괴도(怪盜)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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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무서운 도적이 서울 장안에 나타나서 한 개의 커-다란 흥분을 시민들에게 던져준 것은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 그때도 요즈음처럼 종로 네거리의 아스팔트가 엿 녹듯이 녹아 나가던 팔월 중순, 뜨거운 태양이 바로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불타듯이 이글이글 내려 쪼이던 무더운 삼복더위였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림자는 실로 기상천외한 재주를 가진 도적이었다. 누군가 그를 가리켜 그림자라고 불렀는지 영예스러운 이름을 조금도 훼손치 않으리만큼 신출귀몰한 재주를 가지고 그야말로 그림자처럼 나타나서 그림자처럼 사라지곤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도 역시 그림자라고 불리는 것을 결코 불명예라고는 생각지 않음인지, 그는 협박장 맨 끝에는 반드시 “너희들이 그림자라고 부르는 사나이로부터—.” 라고 서명이 박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실 사내인지 여자인지 사람인지 귀신인지— 누구 하나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시커먼 그림자가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곤 하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자는 반드시 타이프라이터로 박은 편지로 미리 예통을 한 후에야 나타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림자는 아무 날 아무 시 아무 장소에 나타나서 무엇 무엇을 가져가겠다고 꼭 통지를 하는 법이었다. 아무리 경비를 엄중히 하여도 그날 그시 정각만 되면 그림자가 가져가겠다던 물건은 감쪽같이 없어지곤 하였다. 그것은 실로 요술사와 같은 무서운 재주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림자가 서울에 나타나서 약 한 달 동안에 훔쳐간 금품은 물경 수백만 원에 달하였고, 금품 이외에 유명한 미술품 같은 것도 수 없이 없어졌다. 유명한 탐정들이 수십 명씩 모였으나 그림자는 그 없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 년이 지나고 이 테가 지나고 삼 년이 지난 이즈음에 와서는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는 벌써 옛말로 돌아가고 사람들은 다시 평화와 안식 속에서 그날그날을 즐거이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군이여, 이야기가 여기서 그쳐서는 아니 될 것이 아닌가? 마술사와도 같은 그림자의 후일담(後日譚)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청운동에서 자하문으로 올라가는 중턱에 아담한 양옥이 한 채 외인 편 숲 새로 바라다보이는 것을 제군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거들랑 지나든 길에 장난삼아 한 번 그 조그만 숲 샛길로 들어서서 양옥 정문 앞까지 걸어보라. 그러면 세파-드를 정문 앞에서 발견할 것이다. 세파-드는 고 뾰족한 두 귀를 바짝 추켜 세우고 앞발을 한 번 적숙 굽혔다가 훅하고 일어서자마자 제군을 향하여 컹컹 짖으면서 쏜살같이 달려들 것이다. 그리고 제군이 만일 악인이 아니고 선량한 사람이라면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세파-드를 맞이하라.

그리고 만일 제군이 그 어떤 흉악한 마음을 품은 자라면 곧 발꿈치를 돌려 도망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세파-드는 제군의 채림과 제군의 눈동자를 유심히 살핌으로써 가슴속에 품은 제군의 마음을 곧잘 헤아릴 수 있는 실로 놀라울 만한 통찰력을 가진 영리하고도 사나운 개였다. 엉거주춤하니 앉아서 그 집 정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것을 오직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떳떳한 직책으로 알고 있는 가장 충실한 짐승이다.

그러니까 선량한 마음을 가진 제군이라면 조금도 서슴지 않고 정문까지 걸어가도 괜찮을 것이며 거기서 제군을 대리석 문패에 강세훈이라는 글자가 쓰여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니 그때야 비로소 제군은 [하하, 그랬던가!] 하고 머리를 끄떡일 것이다.

강세훈 박사— ! 그렇다. 제군은 신문 지상이나 혹은 잡지 같은데 서 살인광선(殺人光線) 연구자로서 유명한 알고 있을 것이며 다년간 연구 중에 있던 그 무서운 살인광선이 이즈음에 이르러서는 거의, 거의, 완성에 가까웠다는 소식을 들었을 줄로 믿는다.

제3차 세계대전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이즈음,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앞을 다투어 가면서 신병기 발명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이즈음에 강세훈 박사의 살인광선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비단 우리들만의 자랑이 아니라 전 세계의 경이의 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해외의 신문지는 구라파 어느 나라에서 살인광선을 발견하였다는 소식을 때때로 전하지마는 그것은 모다 허위의 풍설임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세계 각국이 서로 먼저 이 무서운 병기 살인광선을 틀림없는 사실일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그것은 아직 극히 소규모의 것이므로 실 전쟁에 사용하기까지는 아직 기나긴 시일을 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증거로 이번에 일어난 세계대전에서 아직 살인광선을 사용한 나라는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 그간의 소식을 넉넉히 추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근래의 전쟁은 과학의 전쟁이라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마지노선이 그처럼 쉽사리 격파된 것은 첫째로는 불란서의 작전상의 오산도 오산이려니와 무엇보다도 정예한 독일의 기계화 부대의 힘이 컸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여튼 그처럼 전 세계가 충혈된 눈동자로 연구 도중에 있는 살인광선이 극히 대규모로 완성되게 되었다는 사실은 전 세계가 몸부림칠 만큼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거니와 강세훈 박사의 노력이 여기에 이르기까지에는 그의 반생을 피눈물로 적시어버린 실로 비장하고도 눈물겨운 희생의 선물이었다.

강세훈 박사는 벌써 오십의 고개를 넘어선 중늙은이로서 그 불타는듯한 연구심과 견고한 의지는 그로 하여금 삼십 년 동안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오로지 살인광선 연구에 바쳐 왔었다. 오륙 년 전까지는 그래도 S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으나 인제는 그것마저 그만두고 밤이나 낮이나 컴컴한 대학 연구실에 파묻혀서 전심전력 거의, 거의 완성되어 가는 자기의 연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함과 마찬가지로 강 박사도 역시 인간 생활에 있어서는 아무 데도 쓸모없는 하나의 비참한 낙오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소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의 청춘은 연애라는 것을 몰랐고 그의 사회생활은 친구라는 것을 몰랐고 그의 노년은 가정이라는 아기자기한 낙원을 몰랐다. 컴컴한 연구실이 그의 생활 전부를 점령하였고 번쩍번쩍 빛나는 연구 도구가 그에게 있어서는 애인이요 친구요 자식이었다. 따라서 과학자로서의 그의 냉정한 피는 그의 가정을 쓸쓸한 사막처럼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맺게 된 것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세 사람의 구혼자(求婚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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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英彩)는 강 박사의 무남독녀 외딸이건만 지금까지 통 아버지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자랐다. 그래도 처음에는 다른 집 가정과 어딘가 공기가 다른 자기네 가정을 저윽히 기이하게도 여겼었으나 그러나 철이 들어 아버지가 세상 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걸머쥔 훌륭한 과학자라는 사실을 알자, 영채는 자식으로서의 애정을 아버지에게 느낀다는 것보다도 먼저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의 존경을 가지고 아버지를 우러러보는 습관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린 영채의 가슴 속에는 다만 “아버지는 훌륭한 학자이시다.” 뚜렷이 도사리고 있을 뿐, 다른 애들이 항상 아버지에 대해서 품을 수 있는 그러한 친애의 감정을 통 모르고 자라난 영채였다. 그것은 다만 영채뿐만이 아니라 남편에게 대하는 영채의 어머니의 감정도 역시 그러하였으며 다른 부부들과 같은 애틋한 정이란 대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 영채의 어머니로서는 통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채의 어머니는 남편에 대해서 불평이라던가 불만 같은 종류의 감정을 품은 적은 꿈에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을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남편으로 하여금 그의 맡은 바 직책을 충분히 다 할 수 있도록 자기의 모든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어머니 아래서 자라난 영채로서도 자기가 가질 수 있는 온갖 존경을 다하여 아버지를 대해 왔었던 것이다.

“영채야, 너의 아버지는 훌륭하신 학자이시다. 세상 사람이 모두 우러러보는 그와 같은 아버지를 모신 너는 오죽이나 행복이냐. 너두 부지런히 공부해서 아버지처럼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 아버지의 낯을 더럽히지 않을 만한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하는 거야.”

그러한 말을 어머니의 입으로부터 들을 때면 영채는 그 영리한 눈동자로 어머니의 기색을 잠깐 동안 살피고 나서 “네—.”

그러나 영채가 여학교 일학년 때 어느 날 작문 시간에 다음과 같은 말을 쓴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아버지’—라는 제목이었었는데 그중의 한 구절을 소개해 보면 이러하다.

“……나의 아버지는 세상이 모다 우러러보는 훌륭한 학자라고 한다. 나의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또 나도 역시 그렇게 믿고 내가 가질 수 있는 최고 최선의 감정을 가지고 아버지를 존경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훌륭한 아버지를 가진 나로서는 당연히 행복을 느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훌륭한 아버지를 갖고 싶지 않다. 일요일이면 나와 동물원엘 가 주시고 밤이면 나에게 옛말을 싶다…….”

이와 같은 영채의 글을 읽은 담임선생은 그 후 어떤 기회에 강 박사를 만나 영채의 쓸쓸한 심정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강 박사는 빙그레하고 한번 웃으면서 “전해주신 말씀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동물원 구경으로 말미암아 하루 동안을 소비하고 옛말로 하루 저녁을 지날 그러한 여유를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고 차디찬 대답으로 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영채는 슬픔을 눈물로써 위로하는 달콤한 감상주의자는 아니었다. 모든 슬픔과 모든 곤경을 어디까지든지 자력으로서 개척하고저 하는 가장 이지적이고 가장 건전한 성격의 나아가서 슬픔과 곤경을 웃음으로써 위로하고 개척하고저 하는 일종의 풍자적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영채의 성격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비약에 비약을 거듭하여 서정시(敍情詩)에 한숨을 짓는 감상 많은 소녀들을 비웃었고 실연의 고배를 마시고 눈물짓는 동무들을 비웃었다. 이리하여 삼 년 전, Y 전문학교 문과를 나온 영채는 가장 명랑한 [아이로니스트]로서 동료 간에 알려졌던 것이다.

전문학교를 나온 지 벌써 삼 년—영채는 올해 들어 스물셋이다. 혼담이 비 오듯이 내리는 금방석 위에 올라앉은 영채이건만 그러나 영채는 통 결혼할 의사를 표시하지 서글프게 하였다. 그것도 가만히 방안에 들어앉아서 시집을 안 가겠다고 발버둥을 친다면 또 모르거니와 영채에게 남자 동무가 너무나 많은 것을 어머니는 더한층 걱정하였다.

방임주의를 취하는 강 박사는 영채가 어떠한 행동을 취하던 통 내 알 바가 아니란 듯이 그저 그 컴컴한 연구실 안의 세계를 향락할 뿐, 영채의 어머니가 아무리 걱정을 하여도 “그저 다 저 될 대로 되는 거요. 내버려 둬요.” 하고 통 딸의 행동에는 조그마한 간섭도 할 생각을 갖지 않는 남편을 어머니는 무척 나무라는 것이었다.

“그래두 어디 그렇수? 처녀의 방에 보구만 있을 수가 있어요? 그 애는 어미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는걸요. 일을 저지르기 전에 어서 당신이 좀 톡톡히 타일러 보구려. 그래두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열 마디의 한 마디쯤은 귀담아 들을지두 모를 테니까—.”

그래도 강 박사는 모다가 귀찮다는 듯이 얼굴을 돌리는 것이었다. 사실 영채에게는 남자 동무가 너무나 많았다. 그 많은 남자 중에서도 영채가 가장 가깝게 하는 청년이 세 사람 있었다. 그 하나는 강 박사의 연구실에서 조수 노릇을 하는 윤정호라는 독실한 청년학도였다. 강 박사는 비록 자기 딸 영채에게 그것을 입 밖에 내서 말한 적은 없었으나 마음으로는 은근히 이 윤정호를 영채의 어머니는 벌써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얘, 영채야. 여자란 혼기를 놓쳐서는 안 되는 법이란다. 아버지두 그렇구 나두 그렇구, 인제 한 번이라두 네가 싫어하는 혼담을 강권한 적이 있드냐? 어서 네 마음대로 누구든지 한 사람 고르려므나. —그런데 얘 영채야, 말이 났으니 말이지, 너희 아버지께서는 비록 그런 말씀을 하시진 않아두 저어 아버지 연구실에 있는 윤 선생을 무한 눈여겨 보나 부더라. 그리구 너두 그처럼 윤 선생을 가까이하는 걸 보니…… 그래 너는 그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 나야 뭘 아니, 그저 네가 좋다면 좋은 줄 알지.” 하고 어머니가 무릎걸음으로 다가들면 “아버지가 좋으시면 제게도 좋죠 뭐…….” 단지 그것 한마디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좋다면 영채에게도 좋다는 말에 어머니는 조금 샐쭉해졌다. 어째 그러냐 하면 어머니는 저 남일 은행 두취의 아들 김중식이란 청년이 마음에 꼭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가 제일 마음 놓구 교제할 수 있다는 김중식이란 사람은 어떠냐? 부자의 아들치고는 여간 착실한 사람이 아니라구 네가 늘 칭찬하던 그 사람 말이다. 그래 그 사람이면 결혼하고 싶으냐? 여기 놀러 오는 걸 나두 여러 번 보았지만 정말 그런 사위를 한 번 맞아 보구 싶더라.”

그러면서 어머니가 딸의 얼굴빛을 살필라치면 “어머니께서 좋으시면 뭐 제게도 좋죠 뭐.”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잠깐 동안 어이가 없어서 잠자코 있다가 이번에는 인자한 웃음을 얼굴에 띄우면서 “오오, 이제야 내가 네 마음을 알았너니라. 그래 너는 저 가난뱅이 이야기꾼 백일평이라는 사람을 그중 좋아하는구나.” 하고 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머니두, 참! 소설가라구 그렇게 알려 드렸는대두 그냥 이야기꾼이라구만 그러셔!”

“그래 그 소설가 말이다. 그이가 네게는 제일루 마음에 드는구나. — 그야 뭐, 가난하면 어떠냐? 네가 좋다면 의사가 있느냐?”

그러나 영채는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아이, 어머니두 참! 누가 결혼하겠다구 그런 것 같으셔? 전 아직 아무 허구두 결혼할 생각 없어요.”

그리고는 벙벙해하는 어머니를 힐끗 쳐다보고는 제 방으로 건너가 버리는 것이었다. 사실 어머니로서 딸의 마음의 갈피를 통 잡을 수가 없었다. 윤정호도 그렇고 김중식도 그렇고 또 백일평도 그렇고, 모두가 다 영채에게 대한 열렬한 구혼자임을 어머니는 잘 알고 있었으며 영채로서도 그 세 사람을 특별히 가깝게 하고 있는 것을 매일처럼 목도하는 이즈음이었다.

불길(不吉)한 예감(豫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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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군이여, 용서하라! 필자는 이때까지 탐정소설답지 않은 이야기를 너무 지리하게 했나 보다. 이러다가 어느 대중작가의 서푼짜리도 안 되는 연애소설이 될 것이 아닌가?…… 탐정소설을 즐기는 제군이여. 그러나 안심하라! 삼 년 전에 서울 장안 칠십만 시민을 흥분과 공포 속에 휩쓸어 버린 저 무서운 그림자가 우리의 자랑과 존경을 한 몸에 걸머진 강세훈 박사의 살인광선을 노리기 시작한 것은 바루 이러한 때였다.

강 박사가 사나운 세파-드를 문지기로 세워 놓은 것도 그러한 위험을 방지하고저 한 때문이며 조수 윤정호를 거의 매일처럼 침실에서 밤을 새우도록 한 것도 실은 살인광선의 설계도(設計圖)를 도난으로부터 구할 의향에서부터였다.

강 박사는 아침부터 밤까지 대학 연구실에서 연구의 결과를 실험하고는 집으로 돌아올 때는 성실한 조수 윤정호를 동반하여 그 비밀설계도를 자기가 몸소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사실 이 비밀설계도는 강 박사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었으며 만일 자기의 생명과 바꾸는 한이 있을지라도 이 설계도만은 자기 손에서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영채의 생일날을 바로 사흘 앞둔, 어느 무더운 밤이었다. 그날 밤—영채는 사흘 후 자기 생일에 곧 외출하고 집에 없었다. 늦게 연구실로부터 돌아온 강 박사와 윤정호는 저녁을 먹은 후에 영채의 어머니와 세 사람이 응접실에서 과일을 깎으면서 한담에 꽃이 피어 있었다. 그러나 열 한시가 거의 가까웠을 때, 윤정호는 먼저 자야겠다고 하면서 침실로 돌아갔는데 영채가 외출로부터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약 십 분 후의 일이다.

“아버지!”

영채는 응접실 안으로 뛰어들어 오면서 그렇게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이상한 사람이…….”

무엇에 놀랐는지 영채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었다.

“이상한 사람이라니?……”

“이상한 사람— 아니, 사람이 아니고 무슨 시커먼 그림자가 쑥 지나가겠지요. 저편 아버지의 서재 들창 밖에서…….”

“시커먼 그림자?”

옆에 앉었던 어머니는 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한 번 되풀이하면서 그 어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시선으로 늙은 남편의 얼굴을 가만히 엿보았다.

“시커먼 그림자가 서재 들창 밖에서?……”

서재의 들창 밖이라는 한 마디는 사실 강 박사에게 커-다란 충동을 던져 주었던 것이다. 조금 아까 연구실로부터 가지고 온 가방—저 살인광선의 설계도가 들어있는 가방이 서재 테이블 위에 놓여 있지 않는가! 그렇게 부르짖으면서 강 박사는 마치 총알에나 얻어맞은 듯이 후닥닥 하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영채도 아버지가 말한 그 한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깨달은 듯이 새파랗게 변한 얼굴을 무섭게 긴장시키며

“아버지, 설계도…… 설계도를 빨리…….”

하고 고함을 치면서 아버지보다 먼저 응접실을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딸의 뒤를 따라 아버지도 뛰어나갔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어머니도 뛰어나갔다. 응접실 바루 옆방이 강 박사의 서재였다. 그리고 그 서재 바루 옆방이 윤정호와 강 박사가 자는 침실로 서재로 뛰어들어간 영채는 무엇보다도 먼저 뜰에 면한 들창을 바라보았다. 행인지 불행인지 들창은 모두 닫혀 있었다. 테-블 위에는 여전히 가방이 놓여 있었다. 강 박사는 뛰어가자 가방을 열고 설계도를 조사하였다.

“있다, 있다!”

기쁨에 넘치는 강 박사의 부르짖음이다. 삼십 년 동안 피눈물로 빚어놓은 결정—살인광선의 설계도는 온전하다. 그때야 비로소 옆방 침실에서 자고 있던 윤정호가 의아스럽다는 얼굴로 쑥 들어오면서

“대체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하고 일동을 바라보았다.

“서재 안을 들여다 보더라구…… 영채가 그것을 보았다구—.”

영채의 어머니가 부들부들 떨면서 설명하였다.

“시커먼 그림자가요?”

깜짝 놀라는 윤정호의 목소리다. 사람들은 들창을 열어 재치고 우거진 숲 새로 청운동 일대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도 보이지 않고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는 다만 캄캄한 어둠과 살랑살랑 숲 새를 스치고 지나가는 밤바람 소리만이 있을 뿐이다.

“영채야, 네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이윽고 강 박사가 침착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영채는 아무 대답도 없이 드넓은 시선으로 이 잡듯이 뒤지고 있을 뿐이다. 밤은 점점 깊어간다. 무슨 불행이나 없었으면 좋으련만—.

무명(無名)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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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불안 속에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강 박사 부부는 마침내 자기 딸 영채의 생일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저번 날 밤, 서재 들창 밖에서 무엇인가 시커먼 그림자가 바람처럼 쑥 지나가더라는 말을 영채에게서 들은 후부터 그렇지 않아도 평시에 자기 주위를 무척 주의하던 강 박사는 무엇인가 헤아릴 수 없는 불길을 신변에 느끼고 한층 더 감시의 눈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강 박사는 충실한 조수 윤정호를 자기와 곡 같은 침실에서 재웠으며 저 귀중한 살인광선의 설계도는 어떠한 일이 조그마한 금고 속에 넣어두고 자물쇠를 굳게 잠가 두었다. 그리고 그 금고의 열쇠는 언제든지 자기 베개 밑에 감추어두었다.

영채의 생일날은 왔다. 영채의 늙은 어머니는 그날 저녁, 딸이 가장 가까이하는 동무들을 십여 명 청하게 하고 간단한 만찬을 베풀어서 하루 저녁을 즐겁게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늙은 어머니로서는 남자 동무 중에서도 영채가 가장 친하게 지나는 세 청년—강 박사의 조수 윤정호와 남일 은행 두취의 아들 김중식과 그리고 저 가난뱅이 이야기꾼 백일평, 이 세 청년을 청하게 하여 한 번 더 자세히 자기 눈으로 사윗감이 될 만한 사람일 것이다.

만찬은 여섯 시가 좀 지나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날 만은 강 박사도 일찍이 연구실에서 돌아와 그들 젊은이들과 자리를 같이하여 즐거이 저녁을 나누며 담화를 바꾸었다. 이날 저녁 여기에 모인 사람 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화제를 가지고 만찬회를 리-드하다시피 한 것은 김중식이었다.

재작년 T 대학 경제과를 마치고 지금 아버지의 은행에서 일을 보고 있는 김중식은 한마디로 말하면 교양있는 현대 지식층을 대표할 만한 건실한 청년이다.

그의 정확한 상식과 고상한 취미와 세련된 화술은 이날 저녁의 만찬회를 가장 명랑하게 하였고 즐겁게 하였다. 성격을 가진 것은 윤정호였다. 사회생활과는 거의 절연하다시피 한 강 박사의 성격을 한 점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본받은 것 같은 윤정호는 가져다주는 요리를 한편 구석에서 묵묵히 먹어 치울 뿐, 묻는 말 이외에는 단 한 마디라도 자진하여 이야기를 꺼내는 적이 없는 청년이다.

소설가 백일평은 김중식과 윤정호의 중간을 걷는 성격으로서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섬세한 감정과 예민한 통찰력이 항상 떠돌고 있었다. 영채는 그들 세 사람의 청년을 번갈아 바라다보며 지나간 날, 그들 세 청년이 자기에게 준 똑같은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내 목숨보다도 한층…….”

그런 말을 영채에게 하소연할 때, 그들의 눈동자는 모두 타오르는 불길처럼 번쩍거리던 것을 영채는 다시 한번 회상해 보았다. 그러나 영채의 이 호화로운 회상은 그때 어멈이 들고 들어온 한 장의 편지로 말미암아 그만 무참히도 중단되고 말았던 것이다.

“편지인뎁쇼.”

그러면서 어멈은 주소 성명을 타이프라이타로 찍은 한 장의 흰 봉투 뒷등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뒷등에는 발신인의 성명은 적혀 있지 않았다.

“어데서 왔을까?”

강 박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봉투를 일동은 잠깐 식사를 중지하고 강 박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고?…… 처음에는 무심중 들여다보던 늙은 강 박사의 주름 잡힌 얼굴이 점점 긴장미를 띠기 시작하다가 마침내는 그 어떤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 버리질 않았는가! 편지를 든 두 손이 키질하듯이 와들와들 떨린다.

“아버지!”

하고 영채가 불안스러운 얼굴로 불렀을 때 옆에 앉은 윤정호가

“선생님, 무슨 편지길래…….?”

하고 목을 늘여 강 박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강 박사는 혼란한 흔들고 나서

“아, 여러분 ,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잠깐 착각을 해서 그만…… 어서 식사들이나 하시우.”

하고 일동을 불안으로부터 수습하려는 듯이

“나이를 먹으면 그만 때때로 정신에 혼란이 생기는구먼…… 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러나 강 박사의 웃음은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웃음이 아니었다. 어딘가 한편 구석이 텅 비인 웃음, 어딘가 한편 구석에 공포를 실은 웃음이었다. 강 박사는 총총히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나는 먼저 실례하겠소. 천천히들 잡수시우.”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려다가 다시 뒤를 돌아다 보며

“윤 군과 김 군, 그리고 백 군, 식사가 끝나거든 날 좀 봅시다. 서재로 좀 와 주시우.”

강 박사는 편지를 움켜쥐고 밖으로 나갔다.

무서운 협박장(脅迫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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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식사는 끝났다. 영채는 자기 동무들과 안방으로 들어가고 윤정호와 김중식과 백일평은 제각기 긴장한 얼굴로 강 박사의 서재로 갔다.

그들이 서재로 들어갔을 때, 늙은 강 박사는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고 심각한 공포의 표정을 양미간에 그리고 있었다.

“아, 거기들 앉으시우.”

강 박사는 그들에게 앉기를 권하였다.

“선생님, 대체 무슨 편지옵니까?”

저번 날 밤, 시커먼 그림자가 들창 밖으로 지나가더라는 말을 영채에게서 들은 윤정호는 호기심과 불안을 억제하지 못하고 강 박사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고 강 박사는 길고도 깊은 신음을 한번 한 후에

“여러분, 이 일을 대체 어찌하면 좋소?”

하고 강 박사는 젊은이들의 힘과 지혜를 빌고저 하는 듯이 애원하는 시선을 세 사람에게 던졌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오.”

하고 김중식도 상반신을 테이블 위에 내밀었다.

“음—.”

하고 강 박사는 다시 한번 신음하고 나서

“제군은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 그림자라는 무서운 도적이 서울에 나타났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요.”

“그림자?”

부르짖었다.

“그렇소! 그림자는 실로 무서운 재주를 가진 도적이라는 사실을 제군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 그림자는 다시 서울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의 살인광선을…….”

강 박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엣?”

하고 세 사람은 일시에 외쳤다.

“그림자가…… 살인광선을?…….”

“그렇습니다. 이것을 보시오!”

그러면서 강 박사는 주머니에서 아까 그 편지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펴 놓았다.

그들은 제히 충혈된 눈동자로 그림자에게서 온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줄이

강세훈 박사여! 삼가 귀하께

아뢰노니, 오늘 밤 열두 시 정각에

귀하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히 여기는

물건을 소생이 가져가겠사옵기에 미리 그

뜻을 전달하여 두노라.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귀하에게 다져

둘 것은 귀하가 만일 경관의 보호를

원한다면 그때는 한층 더 귀하에게 있어서

나쁜 결과를 맺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양해하여 두시기 바라노라.

—너희들이 나를 가리켜 그림자라고

부르는 사나이로부터—.

협박장을 읽고 난 세 사람의 청년은 “음—그림자가 살인광선의 하고 중얼거리며 극도의 불안에 잠겨있는 강 박사의 비장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군도 알다시피 그림자는 불가능이라는 것을 모르는 괴도다. 그는 자기가 하고저 하는 일에 실패라는 것을 모르는 자다. 저번 날 밤, 그는 이 서재 들창 밖에서 살인광선의 설계도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번 날 밤이라고요?”

일동은 놀라며 황급히 물었다.

“바루 사흘 전, 외출로부터 밤늦게 돌아오던 영채가 서재 들창 밖에서 무슨 시커먼 그림자가 바람처럼 쑥 지나가는 것을 보았지요. 그때 나는 삼 년 전 서울 바닥을 헤매던 괴도 그림자를 불현듯 그는…….”

그리면서 강 박사는 서재 한편 구석에 놓인 조그마한 금고를 한 번 돌아다보구 나서

“그런데,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소?…… 그놈은 오늘 열두 시 정각에 가져간다고 했는데…….”

그때 김중식은

“그래 그 설계도는 대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강 박사는 잠깐 주저하는 눈치를 보이다가

“저 금고 속에 있습니다.”

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때 영채가 동무들을 돌려보내고 서재로 들어왔다. 영채는 불안 속에 둘러보며

“무슨 일이 생겼어요?”

하고 물었다. 옆에 앉었던 백일평이 그림자의 편지를 묵묵히 영채에게 내주었다.

“아그머니나! 아버지!”

편지를 읽자마자 그렇게 부르짖으며

“그림자가!…….”

하고 외치는 영채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핏기를 잃어버린다.

그때 강 박사는

“떠들지 마!”

하고 손을 들어 딸을 막으며

“하여튼 제군의 의견을 좀 들려주시우. 편지에는 경찰에 알리면 더 나쁜 결과를 맺는다고 협박을 했는데, 그렇다고 그대로 아니요?”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백일평이

“하여튼 한시바삐 경찰에 알리는 것이 좋겠지요. 더 나쁜 결과를 맺는다는 것은 결국 일종의 협박에서 더 지나지 못할 것이니까요.”

하고 대답하였을 때

“아닙니다! 그림자는 결코 거짓 협박을 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는 어디까지든지 자기의 말을 그대로 실행하는 무서운 놈입니다!”

하고 대답한 것은 강 박사의 조수 윤정호였다.

“그래요. 그놈은 자기 말을 거역한 우리에게 어떠한 악착한 일을 저지를지 누가 알아요? 경관이 오든 안 오든 그 그저 그의 말대로 순순히 복종해야죠. 아그머니, 이 일을 어찌하나?”

하고 영채도 윤정호의 의견에 가담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들의 의견은 경찰에 알리자는 파와 알리면 안 된다는 두 파로 나누어졌으나 결국은 그림자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경찰에는 알리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자기네들이 몸소 살인광선의 설계도를 저 그림자의 손으로부터 보호하기로 되었다.

“그러면 제군! 수고로운 대로 오늘부터 나와 같이 우리 집을 좀 지켜 주시오!”

그 어떤 비장한 결심이 늙은 강 박사의 주름 잡힌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강 박사는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여덟 시 반이다. 그림자가 나타나겠다는 열두 시까지는 아직 세 시간 반이나 남었다.

정각 십이 시(正刻十二時)

편집

영채는 아버지의 얼굴을 무서움에 찬 눈동자로 힐끗 바라보며

“아버지, 정문을 잠가야죠. 그리구 뒷문도 잠그구…….”

“음—윤 군, 자네가 나가서 모두 잠그고 들어오게. 그런데 영채야, 여자 손님들은 다 돌아갔느냐?”

“네, 벌써들 돌아갔어요.”

“어머니는 안방에 계시냐?”

“네, 어머니는 벌써 주무셔요.”

“음, 그러면 어머니는 깨우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그리구 너두 네 방으로 건너가 있거라. 아무 염려 말고 빨리 가거라.”

그러나 영채는 온몸을 보들보들 떨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를 무척 두려워하였다.

“아버지, 무서워서…… 어떻게 혼자…….”

그러나 그림자가 나타나겠다는 서재에 있는 것보다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 영채로서는 안전할 것이었다.

“암말 말구 어서 건너가 자거라. 여기는 도리어 위태하니까—“

김중식과 백일평도 강 박사의 말을 옳다 여기고 자기 방으로 건너가기를 영채에게 권하였다.

이리하여 영채는 하는 수 없이 자기 방으로 건너가고 이윽고 윤정호는 정문과 뒷문을 엄중히 잠그고 다시 서재로 돌아왔다. 금고 속에 들어있는 설계도를 훔쳐갈 수는 없는 것이다.

“윤 군, 현관도 잠갔는가?”

“네, 모두 엄중히 잠갔습니다.”

“정원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던가?”

“없습니다. 정원을 한 바퀴 돌아봤습니다만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음, 그러면 김 군, 저 들창도 잠그게. 커-튼도 내리고…….”

강 박사의 명령대로 김중식은 돌아가면서 들창을 전부 잠그고 커-튼을 내렸다. 그리고 복도에 접한 [도어]까지도 안으로 굳게 잠가 버렸으니 서재는 마치 뚜껑을 덮어 논 모말과도 같았다.

그림자가 사실 무슨 공기처럼 문틈으로 새어드는 재주를 가졌으면 모르거니와 이처럼 물샐 틈도 없이 밀폐한 방안에 제 어찌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으리오. 더구나 방 안에는 혈기왕성한 세 사람의 청년이 지키고 있다. 깊기 쉬운 여름밤은 어느덧 아홉 시가 되고 열 시가 가까웠다.

세 청년은 흥분된 얼굴로 두 시간 후에 이 서재에서 일어날 그 어떤 무서운 광경을 제각기 머리에 그리며 묵묵히 앉었을 뿐이다.

“선생님, 그런데 설계도는 분명히 금고 속에 넣어 두셨습니까?”

하고 그때 윤정호는 불안에 넘치는 시선을 강 박사에게 던졌다.

“분명히 넣어 두었어.”

그렇게 대답은 하였으나 그러나 신경이 무슨 실수나 저지르지 않았나 하고 포켓트에서 열쇠를 끄내어 서재 한편 구석에 놓인 금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금고 속에서 조그만 서류함을 끄집어내어 테이블 위에 놓고 뚜껑을 열었다.

설계도는 틀림없이 들어있다. 그때 소설가 백일평이 테이블 위에 펴 놓은 설계도를 들여다보면서

“설계도는 분명히 이것이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 말에 강 박사는 눈을 부비며 펴 놓은 설계도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 자신 있게 대답했다.

“틀림없소!”

김중식도 혹시 그것이 가짜 설계도나 아닌가 하고 강 박사에게 다시 한번 다졌으나 강 박사는 “누구가 알겠소?”

하고 대답한 후에 다시 금고 속에 넣고 자물쇠를 굳게 잠가 놓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그때 열한 시를 뗑뗑 쳤다. 나머지 한 시간—한 시간만 지나면 저 그림자는 금고 속에 깊이 넣어 둔 설계도를 감쪽같이 가져갈 수가 있을 것인가?……. 무슨 재주로?……무슨 힘으로?…….

건넛방으로 건너간 영채는 인젠 잠이 든 모양인지 조금 아까까지도 켜져 있던 불이 꺼졌다. 아니다. 영채는 잠이 든 것이 아닐 게다. 열두 시가 가까웠으므로 불을 끄고 영채는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을 것이다.

열한 시 반이 되었다. 열한 시 사십 되었다. 그러나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집 안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들창 밖 꽃밭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한가히 들려올 뿐이다.

시계의 바늘은 일 초도 거침없이 정각 열두 시를 향하여 돌아간다. 오십 삼 분, 오십 오 분,— 사람들은 말이 없다.

다만 비상한 긴장 속에서 서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김중식은 그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커-튼을 열어젖히고 들창 밖을 내다보았다. 캄캄한 어둠의 장막이 드넓은 정원을 덮어 눌렀고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정문 외등 밑에 세파-드가 그림자 오기를 기다리는 듯이 엉거주춤하니 앉아 있다.

김중식은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시계를 쳐다보았다. 열한 시 오십 팔 분이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그림자가 이 분 동안에 나타날 수가 있을까?……. 흥!”

윤정호와 백일평도 김중식이 옆으로 걸어가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림자가 제아무리 귀신같은 재주를 가졌대도 오늘 밤만은 안 될 걸!”

“벌써 오십구 분! 정문에서 여기까지 걸어만 올래두 일 분은 걸릴 텐데—“

사람들이 그런 말을 주고받고 하는 동안에 시계는 정각 열두 시를 뗑뗑 치기 시작하였다.

“열두 시다!”

목적(目的)은 달(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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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나타나겠다던 열두 시다!”

강 박사는 그 순간, 복도로 통하는 문을 향하여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림자! 들어 오너라! 네가 가져가겠다던 열두 시다!”

그러나 문밖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시계는 마침내 열두 시를 다 쳤건만 나타나겠다던 그림자는 나타나질 않는다.

일 분, 이 분, 삼 분, 사 분—

사람들은 흥분과 긴장 속에서 열두 시 십 분, 열두 시 이십 분, 그리고 마침내 열두 시 삼십 분을 맞이했으나 그림자는 통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때야 비로소 긴장과 비웃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선생님, 금고 속을 한 번 다시 조사해 봅시다.”

하는 윤정호의 말을 강 박사는 웃음으로 넘기면서

“윤 군을 이때까지 과학자로만 알았더니 이제 보니 대단한 신비주의자인 걸!”

그리고는 포켓에서 열쇠를 꺼내어 금고를 열었다. 서류함은 그대로 있다.

뚜껑을 열어 보았다. 아까 꺼내 보았던 설계도는 여전히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림자도 인젠 늙었나 보군! 하하하…….”

“하하하…….”

사람들은 비로소 그림자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서 마음껏 웃었다.

복도로 나가려던 윤정호가

“이게 뭔가?”

하고 부르짖으며 문밖 자기 발뿌리에서 한 장의 봉투를 발견하였다.

“그림자다!”

윤정호는 봉투를 줍자마자 다시 한번 그렇게 외쳤다.

“뭐, 그림자?…….”

봉투에는 여전히 타이프라이터로 [강 박사 전]이라고 찍혀 있다. 강 박사는 부리나케 봉투를 떼었다. 편지에는 단 한 줄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강 박사! 나의 목적은 달하였다.

“목적을 달하였다고?…….”

강 박사는 일동을 돌아보았다.

“목적을 달하다니?……. 그러면 여기 있는 이 설계도가 가짜란 말인가?……. 천만에!”

그 순간, 무엇을 생각했는지, 백일평이 긴 복도를 통해 저편 건넛방을 향하여 비조처럼 달려가는 것이다. 이윽고 건넛방의 문이 열리며

“영채 씨!”

하고 부르짖는 백일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짝하고 영채의 방에 불이 켜진다.

“앗! 영채 씨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야 사람들은 욱하고 영채의 방으로 밀려갔다.

“영채야!”

아무리 집안을 뒤져 보았으나 영채는 보이지 않는다.

그때 백일평은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강 선생, 그림자는 설계도를 가져가지 않고 영채 씨를 가져갔습니다.!”

제군이여! 그림자의 편지를 제군은 기억하는가? 그림자는 강 박사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물건을 가져가겠노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는가?…….

아아, 저 마술사와도 같은 그림자는 마침내 강 박사의 무남독녀 영채를 붙들어 갔다.

강 박사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이냐?……. 영채냐? 설계도냐?……. 강 박사는 그때야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음—”

하고 강 박사는 길게 한 번 신음하면서 그 순간까지도 착오된 길을 걷고 있던 자기 자신을 쓰라리게 뉘우쳤다. 자기 생명보다 귀중히 여기던 설계도! 그러나 그 설계도보다도 한층 더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중풍 환자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야 비로소 안방에서 자고 있던 영채의 어머니가 “영채가…… 영채가……”

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고함을 치며 뛰쳐나왔다.

“이 일을 어찌 하노? 여보! 영채가…… 영채가 없어졌구려! 영채가……”

그러면서 늙은 강 박사의 팔을 흔들며

“그러나 그림자는 대체 어디로 어떻게 들어왔을까?……”

하는 한 개의 커-다란 의문이 사람들의 가슴을 꽉 부여잡았다.

“틀림없이 정문을 엄중히 잠갔었는데—–“

그러면서 윤정호는 그것이 자신의 실수인 것처럼 무안해하며 방을 뛰쳐나가 현관으로 달려가 보았다.

“앗! 현관문이 열리었구나!”

그렇게 고함을 치면서 이번에는 정원으로 뛰어나가 정문으로 가 보았다.

“정문도 열렸다! 이게 대체 어찌 된 노릇인가? 분명히 내 손으로 잠갔었는데—–”

아아, 그림자는 사실 귀신같은 재주를 정문과 현관을 어떻게 열고 영채를 붙들어 갔을꼬?……. 그뿐만 아니라 정문 안에는 사나운 세파-드가 지키고 있지를 않는가? 그림자는 사실 무슨 그림자처럼 문틈으로 새여 들어온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여튼 한시바삐 경찰에 전화를 해야겠습니다!”

하고 그때 김중식이가 강 박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강 박사는 사건을 경찰에 알리기를 무척 두려워하였다. 경찰에 알리면 한층 더 나쁜 결과를 맺는다는 그림자의 말이 또다시 머리에 떠올랐던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앗! 그림자의 편지다!”

하고 고함을 치며 영채의 책상 위에서 한 장의 흰 봉투를 발견한 것은 소설가 백일평이다.

“뭐? 그림자의 편지?……”

사람들은 욱하고 백일평을 둘러쌌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강 박사여, 귀하가 이 사실을 경찰에 알리는 순간, 귀하의 사랑하는 딸 영채의 생명은 위험하리라.

그림자로부터

애인(愛人)을 위(爲)하여

편집

“아그머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요! 영채가…… 영채가…….”

영채의 어머니는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세 사람의 청년을 향하여

“여보, 젊은이들! 내 딸을 구해 주우! 제발 경찰에는 알리지 마시우! 원 이런 변이 어디 있을라구?”

하며 딸을 살려 달라고 울구불구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하여튼 당분간은 경찰에 알리지 않고 그림자로부터 다시 무슨 지시가 있기를 조용히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것이 영채의 생명을 온전히 보호하는 가장 적당한 이리하여 공포와 비애의 하룻밤은 끝났다.

날이 밝자, 세 청년은 근방 일대의 숲 새와 기타 그림자가 잠재해 있을 만한 장소를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그림자는 물론, 영채의 간 곳을 통 알배 없었다. 영채의 어머니는 미친 듯이 딸의 이름을 부르며 방 안과 넓은 정원을 정신병자처럼 헤매었다. 점심때가 기울어도 그림자로부터는 아무런 통지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저녁 여섯 시가 거의 가까웠을 때, 배달부는 마침내 한 장의 흰 봉투를 현관에 던지고 지나갔다.

“그림자다!”

그것은 틀림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편지를 떼었다.

강 박사여! 귀하의 딸 영채는 무사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나의 요구를 귀하가 무시할 때, 영채의 생명은 없어질 것이다. 오늘 밤 열두 시 정각에 귀하가 가장 아끼는 살인광선의 설계도를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교환조건으로 귀하의 딸을 인도하리라. 장소는 한강 인도교 다리목에서 하류로 오백 메돌, 거기 회중전등을 든 사람이 서 있을 터이니 그에게 설계도를 내주라.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 둘 것은 가짜 설계도를 가지고 와도 아니 되며 무기를 들고 와도 아니 된다. 이 조건 중 어느 한 가지라도 거역하면 영채의 생명은 물론, 가지고 온 자의 생명도 즉시로 없어질 것이다.

편지를 읽고 난 강 박사는 한참 동안 묵묵히 앉았다가 돌연

“안 된다. 안 돼!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설계도만은 못 내놓겠다!”

하고 고함을 치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각한 고민의 빛이 그의 얼굴을 덮어 누른다.

아니, 그것보다도 만일 설계도를 가지고 간다면 대체 그처럼 위험한 곳에 누가 가겠는가가 문제였다. 늙은 강 박사 자신이 갈 수는 물론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영체의 어머니가 갈 수도 없었다.

영채의 어머니는 애원하는 듯한 눈동자로 앞에 앉은 세 사람의 청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세 청년은 아무런 말도 없이 불안과 긴장 속에 파묻혀 “가짜 설계도를 가지고 가면 갔지 진짜는 못 내놓겠다!”는 말을 하였을 때는 사실 세 사람의 청년의 입은 무겁게 다문 채 통 열릴 줄을 몰랐다.

“가짜 설계도를 가지고 오는 때는 영채의 생명뿐만 아니라 가지고 온 자의 생명도 즉시에 없어질 것이다”

라고 한 그림자의 한마디가 무척 마음에 걸리는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보! 원 제 자식이 죽게 되었는데 설계도가 다 뭐란 말이요?”

하고 영채의 어머니가 절반은 애원하는 듯이, 절반은 원망하는 듯이 말하였을 때에도 설계도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강 박사의 굳은 결심은 좀체 풀어질 줄을 차디찬 강 박사의 마음이었다. 강 박사는 한참 동안 세 청년의 불안에 찬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검토하듯이 둘러보고 나서 마침내 무엇을 결심한 듯이

“내가 가지. 이 몸이 아무리 늙었다 하여도 염려 없어!”

하고 말하였을 때 윤정호와 김중식은

“선생님, 제가 가겠습니다!”

하고 동시에 입을 열면서

“그러나 선생님, 만일 가짜 설계도를 가지고 가면 영채 씨의 목숨이 위태합니다. 선생님에게 있어서는 역시 설계도보다도 따님의 생명이 더 귀중할 것이 아닙니까?”

하고 두 청년은 진짜 설계도를 가지고 가서 무사히 영채의 몸을 구해 가지고 오기를 강권하였으나 마이동풍, 강 박사는 그러나 그때까지 한편 구석에서 잠자코 앉았던 백일평이

“강 선생, 선생님의 말씀과 같이 선생의 연구를 일개인의 목숨과 바꾸기는 너무나 귀중합니다. 설계도는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그림자에게 뺏겨서는 아니 되지요. 선생님,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백일평의 얼굴에는 비장한 결심이 알알이 떠 올랐다.

이리하여 깊기 쉬운 여름밤은 아홉 시가 지나고 열 시가 지나고 열한 시가 되었다.

“그러면 갔다 오겠습니다.”

하고 백일평이 가짜 설계도를 한 장 만들어 가지고 그렇게 말하였을 때, 강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세 청년 가운데서도 가장 허약한 몸을 가진 백일평—그와 같은 백일평이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 내고서 단신 아무런 무기도 가지지 않고 저 무서운 도적 그림자와 만나고저 하는 그 타오르는 듯한 정열에서 강 박사는 비로소 과학으로서는 엿볼 수 없는 인성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던 것이다.

“백군! 진짜 설계도를 가지고 가게! 그리고 그림자에게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말고 설계도를 곱게 갖다 주고 영채를 곱게 구해 주지! 영채, 오오, 내 딸 영채!”

그러나 백일평은 그것을 굳이 거절하였다. 자기가 그림자의 손에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설계도를 뺏기지 않고 영채도 구하고……, 그것이 백일평의 결심이었다.

“설계도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영채 씨를 죽이겠다고 하지만은, 그것은 일종의 협박에서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채 씨를 죽인다는 것은 그림자에게 있어서 설계도를 빼앗는 수단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그 한마디를 남겨 놓고 백일평은 청운동 강 박사의 집을 나왔다.

어둠 속의 그림자

편집

그러나 백일평에게는 그림자의 손으로부터 영채를 무사히 구해 낼 어떤 신통한 방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자기와 같이 허약한 몸의 소유자— 열세 관이 될락 말락한 수척한 몸으로 어찌 완력을 가지고 그림자에 대항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또 무슨 명탐정과 같은 신통한 계략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불덩어리 같은 열정뿐이다.

커–다란 흥분만이 그의 정신을 덮어 눌렀다. 무섭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돌팔매 하듯 자기의 그 여윈 몸뚱이를 그림자 앞에 내던지면 그만이었다. 잡아타고 열두 시가 가까운 밤거리를 화살처럼 몰아 대는 백일평이었다.

한강 인도교 다릿목에서 택시–를 멈추었을 때는 정각 열두 시까지는 아직 십오 분이나 남았을 때였다.

인적이 끊어진 한강 다리는 무슨 커–다란 마물처럼 허공에 솟아 있었다. 군데군데 서 있는 희미한 전등불이 캄캄한 한강 냉대를 수비하는 듯이 지키고 있다.

백일평은 잠깐 사방을 돌아다 보고 나서 어두운 언덕 비탈을 모래밭으로 내려갔다.

— ‘한강 다릿목에서 하류로 오백 메돌, 거기에 회중전등을 든 사람이 서 있을 테니 그에게 설계도를 내주라’—는 그림자의 편지를 다시 한번 되풀이하여 모래밭을 한 걸음 두 걸음 하류를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회중전등의 불빛은 통 보이지 않는다. 밤바람이 이나 보다. 강물이 철렁철렁 들린다. 멀리 상류에서 발동선의 통통통통 하는 엔진 소리가 들릴 뿐,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

“그림자는 어디 있는고?…… 그림자! 그림자!”

그는 마치 무슨 열병 환자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며 꿈꾸는 사람같이 하류로 하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꼬? 백 메돌, 이백 메돌, 삼백 메돌—이니, 사백 메돌은 넉넉히 걸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뒤를 돌아다 보았다. 다릿목의 전등불이 멀리 등 그때였다.

그가 서 있는 데서 약 백 메돌 쯤 되는 장소에 반짝하고 조그마한 불빛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림자가!”

백일평은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어둠의 장막을 바늘 끝으로 꼭 뚫어 놓은 것과 같은 한점의 불빛을 꿈결같이 바라보았다. 사실 백일평은 자기가 지금 허황한 꿈속의 사람이 아닌가 하고 자기의 넓적다리를 한번 힘껏 꼬집어 보았다.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고 이렇다 할 계략도 세움이 없이 맨손으로 저 무서운 도적 그림자를 맞이하고저 하는 이 너무나 무모한 자기의 행동을 그는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갈래야 물러갈 수 없는 백일평—에게 남은 단 한 가지 길은 눈을 딱 감고 자기의 여윈 몸뚱이를 그림자에게 내던질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죽든지 상대자를 죽이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불빛은 통 움직일 줄을 모른다. 그 움직일 줄 모르는 불빛을 향하여 마치 몽유병자처럼 백일평은 걷기 시작하였다.

백 메돌에서 팔십 메돌, 팔십 메돌에서 오십 메돌—그러나 어둠 속의 불은 차츰차츰 커질 뿐, 땅바닥에 얼어붙은 듯이 움직이질 않는다.

백일평에게는 공포를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물에 빠진 자식을 건지려는 광란의 어머니처럼 그의 모든 사색은 한 개의 몸뚱이뿐이었다.

그림자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고?……그림자의 가슴 속에는 지금 어떤 종류의 무서운 계책이 도사리고 있는고?……

백일평과 그림자의 간격은 한 걸음 한 걸음 좁아져 간다. 사십 메돌, 삽십 메돌, 이십 메돌—

이리하여 마침내 그들의 간격이 십 메돌 이내로 좁아졌을 때였다. 어둠을 헤치며 불빛을 향하여 비조처럼 날아가는 백일평의 몸뚱이— 자기 자신을 돌팔매 하듯 회중전등을 향하여 내던진 백일평의 몸뚱이는, 그러나 다음 순간, 허공을 부여잡고 회중전등 위에 퍽삭하고 쓰러지고 말었던 것이다. 회중전등만이 반짝이고 있을 뿐이 아닌가!

“속았고나!”

하고 외치면서 모래밭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때는 벌써 늦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백일평의 등 뒤로 쑥 나타났던 때문이다.

“앗!”

하고 부르짖은 백일평은 그 순간 휙 하고 뒤로 돌아서면서 맹수처럼 그 시커먼 그림자를 향하여 덤벼들었다.

그림자는 역시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었다. 두 개의 몸뚱이는 불꽃이 튀리만큼 맹렬히 서로 부딪치면서 캄캄한 모래밭 위에 쓰러졌다.

그림자의 정체(正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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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군이여. 필자는 지금 모래밭에 쓰러진 두 개의 몸뚱이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청운동 강 박사의 집으로 붓끝을 돌리고저 한다.

백일평을 떠내 보낸 강 박사 이하 일동은 극도의 불안과 초조 가운데서 열두 시를 맞이하고 새로 한 시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두말도 할 것 없고 영채를 구하러 간 백일평조차 돌아오지 않었다.

두 시가 지나고 세 시가 지나고, 새기 쉬운 여름밤은 어느덧 네 시, 다섯 시가 되었다. 동편 하늘에 먼동이 훤하게 터오기 시작하여도 백일평은 통 돌아오지 않는다.

“무슨 일이 생겼고나!”

사람들은 저마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그 어떤 불길한 상상을 머리에 그리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날이 밝자 윤정호와 김중식은 기다리다 못해 그림자가 만나자던 한강 모래밭으로 나가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런 것도 보이지 않었다. 다릿목에서 약 오백 메돌쯤 떨어진 하류 백사장 위에 사람들의 발자국이 서로 엉키고 감기여 난잡히 인 박혀 있는 것을 보았을 따름이었다.

“백 군은 어떻게 되었을꼬…….?”

“그리고 영채 씨는…….?”

이리하여 두 청년이 어두운 얼굴로 다시 청운동으로 돌아온 것은 오정이 거의 가까웠을 때였다.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하고 늙은 강 박사가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을 바로 그때였다.

어멈이 한 장의 속달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다.

“편지?…….”

사람들은 그 순간, 그 어떤 불길한 뉴-쓰를 각오하면서도 또 한편 기적에 가까운 광명을 기대하면서 강 박사의 옆으로 달려갔다.

“영채다! 영채의 글씨다!”

봉투 겉봉에 쓰인 것은 틀림없는 영채의 필적이었다. 그 순간

“영채는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기쁨이 일동의 얼굴을 점령하였다.

영채의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

불초 영채를 용서해 주십시오. 남만 못지않게 길러 주시고 남만 못지않게 교육을 시켜 주신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면 정말 천벌을 맞을 만큼 괴롭힌 영채올시다.

아버지, 어머니!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부유한 가정에 태어난 몸으로서 무엇 한 가지 남부럽지 않게 자라났습니다.

지필묵(紙筆墨)이 없어서 고학하는 동무를 볼 때마다, 그리고 방탕한 아버지와 정숙하지 못한 어머니 때문에 고생하는 동무들을 볼 때마다, 소녀의 조그마한 가슴에는 분에 넘치는 행복으로 가득 차곤 하였습니다. 더구나 세상이 모신 소녀의 행복은 한층 컸었습니다. 아니, 한층 커야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그와 같은 행복이 넘처 흘러야 할 소녀의 연약한 가슴속 한편 구석에는 구멍이 펑 뚫린 것처럼 항상 허룽하고 항상 텅 비인 것 같은 자리가 남아 있는 것은, 결국 소녀의 마음가짐이 잘못인 때문일까요?

아버지는 훌륭하신 과학자이십니다. 그러고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저버리시고 과학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버지께서 그처럼 사랑하시는 과학에 소녀는 항상 이해할 수 없는 질투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녀로부터 아버지를 빼앗아 간 그 차디찬 과학을 질투했습니다. 소녀의 어린 살인광선을 증오했습니다. 소녀의 손으로부터 아버지의 자애스러운 사랑을 여지없이 박탈해 간 아버지의 연구를 저주했습니다. 아버지의 그 차디찬 가슴 속에는 따뜻한 가정도 없고 사랑하는 아내도 없고 귀애하는 딸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혈관에는 피가 돌지 않고 다만 언제든지 냉각한 강철이 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리석은 소녀 영채를 힘껏 꾸지람해 주십시오. 소녀는 마침내 소녀의 손에서 아버지를 빼앗아 간 원수— 살인광선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살인광선이 귀하냐, 딸이 귀하냐?

아버지에게 이와 같은 시련의 기회를 드리고저 소녀는 마침내 저 무서운 도적 있어서 가장 귀중한 것은 살인광선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께 증명해 드리고저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훌륭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마침내 진짜 설계도를 가지고 가라고 하셨다는 말을 백일평 씨로부터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역시 저를 가장 귀해 하셨습니다. 고맙소이다. 이 기쁨은 소녀에게 한 줄기 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소녀가 이번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한 데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님께서도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소녀에게는 세 사람의 열렬한 씨, 백일평 씨—이 세 분은 다 같이 저를 자기 생명보다도 더 귀해 한다고 소녀에게 말했습니다.

그런 말을 소녀의 귀에 속삭일 때는 그들의 눈동자는 타올랐고 그들의 온몸은 정열의 덩어리로 변하곤 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을 어찌 거짓이라 생각할 수 있으리오? 그것은 실로 그들의 폐부를 뚫고 나오는 참된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어서 말하기보다 더 쉬운 것이 어디 있으리오. 행동이 말을 증명할 때, 비로소 그것이 참된 말의 자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어머니! 가난뱅이 이야기꾼은 세 분 중에서도 가장 허약한 몸을 가진 분입니다마는, 그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들었습니다. 그의 말은 행동을 가진 말이었던 것을 소녀는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 이즈음 며칠 동안 걱정을 시킨 소녀 영채를 너그러이 용서하시기 바라오며 여러분께서 이 편지를 읽으실 지음에는 소녀는 저 가난뱅이 이야기꾼과 함께 인천행 열차 속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인천 월미도에서 며칠 동안 해수욕을 하여 튼튼한 몸을 만들어 가지고 오겠사오니 그리 하량하여 주십시오. 그런데 어머니! 가난뱅이 이야기꾼이 지금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번의 이 사건을 한 편의 재미있는 소설로 써서, 그 원고료로 제게 약혼반지를 사 주시겠다고요. 그리고 소설의 제목은 ‘괴도. 그림자 후일담(後日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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