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맞는 우리 집 창문

여기는 아직도 백설(白雪)이 분분(粉粉)하여 봄의 기분이란 용이히 맛볼 수가 없다. 그러나 모질게 몰아치는 그 바람에는 어지럽게 떨어지는 그 눈송이에도 여인의 바쁜 숨결 같은 것을 내 볼 위에 흐뭇이 느끼게 됨은 봄이 오는 자취가 아닐까.

나는 바느질을 하다 말고 멍하니 유리창문을 바라본다. 오늘 저 유리문은 햇빛을 고이 받아 환히 틔었다. 언제나 저 문엔 누가 그리는 사람도 없는데 갖가지로 그림이 아로새겨진다.

때로는 제법 어떤 화가의 손으로 정성스레 그려진 듯이 산이 솟아 있고 물이 흐르는 것이요, 혹은 망망(茫茫)한 바다에 흰 돗대 오뚝 솟아 초생달 같이 까부라져 있다.

하더니 오늘은 아무것도 그려 있지 않고 파란 하늘을 한 가슴 가득히 안고 있다. 우리 고향 뒷뜰에 풀쿠리 속에 숨어 있는 박우물같이 맑고 그렇게 하늘을 안고 있다. 앞집 뜰에 서 있는 포플러 나무가 우리 뜰의 것같이 가깝게 보이고 앞집 지붕에 녹다 남은 눈떨기는 가을의 목화송이 같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포플러의 가지가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까맣게 솟아 있다. 그 가지 끝이 뾰족함이오 하늘을 그리워 파리해진 듯하고, 제각기 하늘을 쳐다봄이오 역시 하늘을 얼마나 그리워함일까.

어디선가 참새들이 포르릉포르릉 날아와서 나뭇가지 임금(林檎)처럼 매달리고 있다. 손을 내밀어 한 놈 똑 따서 먹고 싶다. 그 임금은 살아서 파닥파닥 날아다닌다. 가을의 빨갛게 익은 임금같이 미각으로써 나를 유혹하기 보다 그들의 가슴에 방금 끓고 있을 삶이 나를 끌고 있다.

그들의 가슴에 빨간 피가 있길래 임금 같으면서도 톡톡 튀어 다니는 것이요. 그 이쁜 머리를 되툭되툭하여 먹을 것을 찾는 것이 아니뇨.

‘이리온, 내 쌀 한 줌 줄게’ 내 입에서는 부지중에 이런 말이 나오려고 옴씰옴씰한다. 새들은 내 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지에서 가지에로 오르내리며 재재거리고 있다.

저들은 필시 하늘에 올라갔다 왔음인지 날개마다 하늘이 물들었고 그 동그란 눈엔 하늘이 파랗게 떠 있다.

간혹 나뭇가지 그림자도 그 눈에 가로질리나 그것은 잠깐이요, 하늘에 동동 떠 있는 흰 구름이 그들의 눈에 눈꼽같이 끼어 있다.

그들의 가슴에 있는 보드라운 따뜻한 털에는 구름을 거슬러 날던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을 게고 지금 싸늘한 나뭇가지가 그들의 가슴에서 포근히 녹고 있을 것이다 고 주둥이 . 같은 움이 가지에서 파랗게 돋지를 않으려나.

그들은 갑자기 후르르 뜰에 떨어진다. 예전 밤알같이 뒹굴고 있다. 치마 앞을 벌리고 한알 두알 주워 넣고 싶다. 그러면 치마 속에서 파닥파닥 날뛸 테지. 그리고 노리칙칙한 새 냄새가 몰씬몰씬 내 코밑에 부딪히겠지.

그 밤알은 대굴대굴 굴러다니며 내가 버린 구정물에서 쌀알을 골라 쪼아먹고 있다. 그 조그만 쌀알이 어쩌면 저리도 잘 보일까. 눈도 밝지, 돌 아래 흙 속에 묻히어 있는 쌀알을 기어이 얻어내고야 만다. 그 눈은 아마도 밤하늘에 별인가보다.

그 갸웃거리는 조그만 목에는 누가 저리도 희고 부드러운 목도리는 해주었을까. 어느 산기슭에서 포근히 잠들었을 때 그 위로 살살 감돌던 안개란 놈이 그들의 따뜻한 목에 감긴 게지.

그들은 포르릉 날아 아까 그 나뭇가지로 올라간다. 뭐라고 열심히 재재거리는데 난 알아들을 수가 없다. 재미난 옛날 이야기거나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를 하는 모양.

나뭇가지는 하늘이 전해주는 무슨 소식이나 있을까 하여 가지마다 긴장되어 가지고 가만히 그들의 털에 귀를 대고 있다. 그들은 주둥이로 나뭇가지를 간지럽게 톡톡 쪼아댄다. “봄이 온단다, 봄이 온단다.” 하는 것 같다.

그들은 후르릉 날아간다. 바라보니 하늘은 깊은 호수같이 파랗게 개었다.

그들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저 하늘은 저들을 위하여 저리도 넓고 깊고 또 저리도 파란 것 같다.

나는 문득 창문을 보았다.

“한푼 줍쇼.”

어린 거지가 창문 밖에 서서 나를 보고 머리를 수굿거린다. 그 보기 싫게 조은 머리며 때가 끼인 얼굴, 남루한 옷 주제, 나는 무의식간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어서 속히 쫓기 위하여 지갑에서 돈 한푼을 꺼내 내쳐 주었다.

“고맙습니다.”

거지는 나가버린다. 나는 거지의 신발소리가 사라지자 참새들과 어린 거지를 문득 대조해 보았다.

3월 14일 아침, 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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