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찬(宣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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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사(檢校太師)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상서이예부사(判尚書吏禮部事)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상주국(上柱國)으로 치사(致仕)한 신하 김부식(金冨軾)이 임금의 말씀을받들어 편찬하다.

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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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본기 제6(百濟本紀第六) 의자왕(義慈王)

의자왕(義慈王)은 무왕의 맏아들이고, 뛰어나고 용감하였으며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무왕 재위 33년((632년))에 (그를) 태자(太子)로 세웠다. 효성으로써 부모를 섬기고, 우애로써 형제와 함께 하니,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무왕이 훙서하자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 태종(太宗)은 사부랑중(祠部郞中) 정문표(鄭文表)를 보내, (왕에게) 책명(冊命)을 내려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입조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2년((642년)) 봄 정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입조하고 조공하였다. 2월, 왕이 주·군(州郡)을 순행하고 위무하였다. 죄수(罪囚)를 헤아려 보아, 사형에 처해야 할 범죄 이외에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가을 7월, 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항복시켰다. 8월,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1]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品石)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자 윤충은 이들을 모두 죽였고, 그 머리를 베어 왕도(王都)에 이를 전하였다.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 서쪽의 주·현(州縣)에 나누어 살게 하였으며, 병사를 머무르게 하여 그 성을 지켰다. 왕은 윤충(允忠)의 공로에 대해서 말 20필과 곡식 1천 섬을 상으로 주었다.

3년((643년)) 봄 정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입조하고 조공하였다. 겨울 11월, 왕은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아 이로써 입조(入朝)하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마침내 군대를 발동하여 공격하니 신라 왕 덕만(德曼)이 보낸 사신이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군사를 거두었다.

4년((644년)) 봄 정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입조하고 조공하였다. 태종(太宗)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을 보내, 두 나라를 고유(告諭)하였다. 왕이 표(表)를 받들고는 감사하다고 말하였다. 왕자 융(隆)을 태자로 세우고, 크게 사면하였다. 가을 9월, 신라 장군 유신이 병사를 이끌고 와 침략하여 일곱 성(城)을 취하였다.

5년((645년)) 여름 5월, 왕은 태종(太宗)이 친히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신라에서 징병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그 사이를 틈타서 신라의 일곱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더니, 신라는 장군 유신을 보내 쳐들어 왔다.

7년((647년)) 겨울 10월, 장군 의직(義直)이 보병과 기병 3천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성(茂山城) 아래로 나아가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성(甘勿城)과 동잠성(桐岑城) 두 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유신(庾信)이 친히 사졸을 권면하여, 결사적으로 싸워 크게 깨뜨리니, 의직은 한 필의 말을 (타고) (홀로) 돌아왔다.

8년((648년)) 봄 3월, 의직은 신라의 서쪽 변방 요거(腰車) 등 십여개의 성을 습격하여 빼았았다. 여름 4월, 옥문곡(玉門谷)으로 진격하였으나, 신라 장군 유신이 이를 맞이하여, 다시 싸우니 (의직을) 크게 무찔렀다.

9년((649년)) 가을 8월, 왕은 좌장 은상(左將 殷相)을 보내, 정예병 7천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쳐서 빼앗았다. 신라 장군 유신(庾信)·진춘(陳春)·천존(天存)·죽지(竹旨) 등이 이를 맞아 치니, (전세가) 불리해지고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진을 치고 다시 싸웠으나, 아군이 패배하였다. 겨울 11월, 천둥이 치고, 얼음이 얼지 않았다.

11년((651년)),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입조하고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고종(高宗)[2]새서(璽書)를 내려 왕을 타일러 말하기를, “해동(海東)의 삼국(三國)이 나라를 세운지 오래인데, 지경을 나란히 늘어섰고 땅은 실로 개〔犬〕의 이빨처럼 서로 어긋나 있다. 근대 이래로 마침내 의심과 틈새가 얽어졌다. 전쟁이 서로 일어나서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고, 마침내 삼한(三韓)의 백성의 목숨이 칼과 도마 위에 올라가게 하였고, 무기를 쌓아두고, 제멋대로 성내는 것이 아침 저녁으로 서로 이어졌다. 짐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므로, 심히 긍휼히 여기고 민망함에 처해 있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 등의 사신이 함께 와서 입조하니, 짐은 이러한 원한을 풀고 다시 친분과 화목을 돈독히 하라고 명령하였다.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이 아뢰어 말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순치(처럼) 서로 의존하고, 마침내 간과(干戈)를 들어, 침입과 핍박이 번갈아 닥치니 큰 성과 중요한 진(鎭)들이 모두 백제에게 병합되었습니다. 강토(疆土)는 날로 줄어들고 위력도 아울러 쇠퇴하였습니다. 바라건대 백제에 조칙을 내려 침략한 성을 되돌려 줄 것을 명령하소서. 만약 조칙을 받들지 않으면 곧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쳐서 빼앗을 것입니다. 다만 옛 땅을 얻으면 곧 상호 화해를 청할 것입니다.’ 짐은 그 말이 순리에 맞으므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제후(諸侯)라는 벼슬의 정도로 순서가 매겨져 있었으나, 오히려 망한 나라를 살폈다. 하물며 짐은 만국(萬國)의 군주로서, 어찌 위난의 번국(藩國)을 구휼하지 않으리요. 왕이 겸병한 신라의 성은 모두 마땅히 그 본국에 돌려줄 것이며 신라도 붙잡은 백제의 부로(俘虜)들을 또한 왕에게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연후에 환난을 풀고 분규를 해결하여, 무기를 내려놓고 전쟁을 그치면, 백성이 식견(息肩)의 소원을 얻고, 세 번국들은 전쟁의 근심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저 피흘리는 변방의 초소·시체가 쌓인 강토·농사와 길쌈의 모두 폐(廢)함·사녀(士女)가 의지할 것이 없음과 어찌 같은 해〔年〕(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왕이 만약 나아감과 머무름을 따르지 않는다면 짐은 이미 법민(法敏)이 청한 바에 따라, 그가 왕과 결전하도록 내맡길 것이고, 또 고구려에게 약속하기를 명하여, 멀리서 서로 구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곧 거란(契丹)과 여러 번국(蕃國)들로 하여금 요하(遼河)를 건너 깊이 들어가 노략질하게 할 것이다. 왕은 가히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여 복록(福祿)을 추구하고, 좋은 계책을 살피고 도모하여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하라.”

12년((652년)) 봄 정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입조하고 조공하였다.

13년((653년)) 봄,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다. 가을 8월, 왕은 왜(倭)와 통호(通好)하였다.

15년((655년)) 봄 2월, 태자궁(太子宫)을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손질하였다.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 여름 5월, 붉은 색의 말〔騂馬〕이 북악(北岳)의 오함사(烏含寺)에 들어가서, 울면서 불우(佛宇)를 돌다가 며칠만에 죽었다. 가을 7월, 마천성(馬川城)을 또다시 고쳤다. 8월, 왕은 고구려와 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가 보낸 사신이 당나라를 배알하고 표(表)를 올려 일컫기를, “백제가 고구려·말갈과 함께 우리 북쪽 경계를 침략하여, 30여 성을 빼앗았습니다.”라 하였다.

16년((656년)) 봄 3월, 왕은 궁녀와 더불어 음탕하였고, 주색에 빠졌으며, 마음껏 즐기며 술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좌평(佐平) 성충(成忠)혹은 정충(淨忠)이라고도 한다.이 세차게 간언하자, 왕이 노하여 그를 옥중에 가두었다. 그러므로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成忠)이 유사(瘐死)하였는데, 죽음에 임하여 올린 글에서 이르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원컨대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늘 때를 보고 변화를 살폈습니다만, 틀림없이 병혁(兵革)의 일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반드시 그 지리를 살펴 택할 것이니, (강의) 상류에 처하여 적을 끌어들인 연후에야 가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셔야 합니다. 험난하고 길이 좁은 곳을 꾀하여 이로써 그들을 막은 연후에야 가능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왕은 살피지 않았다.

17년((657년)) 봄 정월, 왕의 서자(庶子) 41명에 벼슬을 내려 좌평으로 삼고 각각에게 식읍(食邑)을 주었다. 여름 4월, 크게 가물어 적지(赤地)(가 되었다.)

19년((659년)) 봄 2월, 여러 마리의 여우가 궁궐 안으로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上佐平)의 책상 위에 앉았다. 여름 4월 태자궁(太子宫)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 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獨山)·동잠(桐岑) 2개의 성을 침공하였다. 5월, 왕도(王都) 서남쪽의 사비하(泗沘河)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장(丈)이었다. 가을 8월, 어느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生草津)에 떠올랐는데 길이가 18자이었다. 9월, 궁중의 느티나무가 울었는데 마치 사람이 우는 소리 같았다.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20년((660년)) 봄 2월, 왕도(王都)의 우물물이 핏빛이었다. 서해 바닷가에서 조그마한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이를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사비하(泗沘河)의 물의 붉기가 핏빛과 같았다. 여름 4월,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왕도(王都)의 저잣사람들이 까닭없이 놀라고 달아났으며, 마치 붙잡으려는 자가 있는 것처럼 쓰러지고 엎어져 죽은 자가 100여 명이었고, 망실(亡[3]失)한 재물이 헤아릴 수 없었다. 5월, 바람과 비가 갑자기 닥쳐와, 천왕(天王)·도양(道讓) 두개 사찰의 탑에 번개가 쳤다. 또한, 백석사(白石寺) 강당(講堂)에도 번개가 쳤다. 검은 구름이 마치, 용이 동서로 (나뉘어) 공중에서 서로 싸우는 것 같았다. 6월, 왕흥사(王興寺)의 여러 승려들 모두가 어느 배의 노와 같은 것이 큰물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야생의 사슴과 같은 모양의 어느 개 한 마리가 서쪽에서부터 사비하(泗沘河)의 언덕에 이르러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깐 사이에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왕도(王都)에서 개떼들이 노상에 모여 혹은 짖고 혹은 울고 하다가 얼마 후에 곧 흩어졌다. 어느 귀신 하나가 궁중에 들어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곧 땅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를 괴이히 여겨, 아랫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다. 깊이 세 자〔尺〕 가량에서 거북이 하나가 있었다. 그 등에 있는 글에 이르기를, “백제는 월륜(月輪)과 같고 신라는 초생달과 같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월륜(月輪)과 같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가득 차면 기울 것입니다. 초생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으면 점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보름달과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생달과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왕성하게 되고 신라는 점차 미약해진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기뻐하였다.

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을 거느리고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여 와서 정복하게 하고, 아울러,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그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당나라 병사))과 세력을 합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 서쪽의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金庾信)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에) 다다르게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군신(群臣)들을 모아 싸움과 지킴의 마땅함을 물었다. 좌평 의직(義直)이 나아가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는 멀리 아득한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물에 익숙지 못한 자는 배에서 반드시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육지에 내렸을 때에는 사기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급히 치면 뜻(한 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신라 사람은 대국(大國)의 후원을 믿고 있는지라, 우리를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당나라 사람이 날카로움을 잃는 것을 본다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할 것이므로, 감히 빠르게 진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나라 사람과 결전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라 하였다.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서 와서 속히 싸우려 할 것이니, 그 예봉(銳鋒)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라인들은 전에도 여러 번 아군에게 패배를 당하였으므로, 지금 우리 병사의 위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은 마땅히 당나라 사람의 길을 막아 그 군사가 쇠약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먼저 절반의 군사로 하여금 신라군을 치게 하여, 그 예기(銳氣)를 꺾은 연후에 그 형편을 엿보아 세력을 합하여 싸우면, 군사를 온전히 하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망설이며, (어느 말을) 따를 바를 알지 못하였다.

이 때에 좌평 흥수(興首)가 득죄하여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유배되어 있었다.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묻기를, “사태가 위급하니 이를 어찌하는 것이 옳으냐?” 라 하였다. 흥수가 이르기를, “당병은 원래 수가 많고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공모하여 기각(掎角)을 이루니 평원이나 광야에서 마주 보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백강(白江)혹은 기벌포(伎伐浦)라고도 하였다.과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하였다.은 우리 나라의 요로(要路)입니다. 장부(壯夫) 한 사람이 창 한 자루만 가지고도 1만 명이 (이를) 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땅히 가려낸 용사가 가서 그것을 지켜, 당병이 백강(白江)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인이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시고, 대왕께서는 여러 겹으로 막아서 굳게 지키시다가 그들의 재물과 양곡이 다하고 사졸이 지치기를 기다린 연후에 힘을 떨쳐 그들을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 때에 대신들이 (흥수의 말을)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묶여있은 지 오래이므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 말은 쓸 수가 없습니다. 당병이 물결을 따라 백강(白江)으로 들어오게는 하되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炭峴)으로 올라오게는 하되 좁은 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 때를 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친다면, (이는) 마치, 새장 안의 닭이나 그물 안의 물고기를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왕은 그럴 듯이 여겼다. 또 당과 신라의 병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고 들었다. 장군 계백(堦伯)을 보내어 사사(死士) 5천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병과 싸우게 하였다. 네 번을 붙어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도 꺾여서 끝내는 패하고, 계백(堦伯)도 죽었다. 이에 군사를 합쳐 웅진강(熊津江) 입구를 막고, 강 가까이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정방(定方)이 왼편 물가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서 진을 쳤다. 그들과 더불어 싸웠으나 아군이 대패하였다. 왕사(王師)(를 실은 배들은) 조수를 타고 고물과 뱃머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가며 북을 치고 떠들어댔다. 정방(定方)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그〔其〕[4] 도성(都城)으로 달려가서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우리 군사의 모든 무리가 이를 막았으나 또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성에 가까워지자, 왕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성충(成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 하였다. 드디어 태자 효(孝) [5] 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정방이 (사비)성을 포위하니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즉위하여 왕이 되고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자 융(隆) [6] 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왕과 태자께서 (성밖으로) 나가시자, 숙부가 멋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만약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그들은) 마침내 좌우를 거느리고 (밧줄에) 매달려 (성밖으로) 나갔다. 백성들이 모두 그들을 따라 가니 태(泰)는 붙들 수 없었다. 정방이 병사로 하여금 성가퀴를 넘어가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였다.

태(泰)는 군색(窘塞)하고 급박하여, 문을 열고 명령(에 따를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왕과 태자 효(孝)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정방(定方)은 왕과 태자 효(孝)·왕자 태(泰)·융(隆)·연(演) 및 대신과 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2,807명을 (당나라)의 경사(京師)로 보냈다. 나라에는 본래 5부(部)·37군(郡)·200성(城)·76만호(萬戶)가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의 5개의 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두고 각각 주·현(州·縣)을 통할하게 하였고, 우두머리〔渠長〕들을 발탁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현령(縣令)으로 삼아 이로써 이들을 다스렸다.[7]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명령하여 도성(都城)을 지키게 하고 또, 좌위랑장(左衛郞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남은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정방(定方)이 사로잡은 바로써 알현하니, 상제(上帝)는 그를 꾸짖고는 용서하였다. 왕이 병사(病死)하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위위경(衛尉卿)을 증위(贈位)하고, 구신(舊臣)들이 부고(訃告)를 내고, 곡(哭)하도록 허락하였으며, 손호(孫皓)·진숙보(陳叔寶)[8]의 묘 옆에 장례를 지내도록 조서를 내렸고, 아울러 비(碑)를 세우게 하였다. (隆)에게는 사가경(司稼卿)을 제수(除授)하였다. 문도(文度)가 바다를 건너다 죽으니, 유인궤(劉仁軌)가 그를 대신하였다.

무왕(武王)의 종자(從子) 복신(福信)이 일찍이 병사를 거느렸는데, 부도(浮屠)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을 근거지로 하여 배반하였다. 옛[9]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맞이하였는데, (그는) 일찍이 왜국에 인질로 있었다. 그를 왕으로 세우니, 서북부가 모두 응하였고, 병사를 이끌고 도성에서 유인원을 포위하였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유인궤(劉仁軌)를 검교 대방주 자사(檢校帶方州刺史)로 기용하였다. (유인궤는) 왕문도의 무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병사를 보내 이로써 유인원을 구해냈다. 유인궤가 웃으며 말하기를, “하늘이 이 늙은이에게 부귀를 가져다 주는구나.”라 하였다. 당나라 책력과 묘휘(廟諱)를 요청하고는 떠나면서 말하기를, “내가 동이(東夷)를 쓸어 평정하고, 해표(海表)에 대당(大唐)의 정삭(正朔)을 반포하고자 한다” 유인궤는 군사를 거느리고 엄정(嚴整)하였고, 옮겨서 싸우고 앞으로 나아갔다. 복신 등은 웅진강 어귀에 두개의 목책을 세우고 이를 막았다. 유인궤가 신라 군사와 합하여 이를 치니, 아군은 물러나고 달아나 목책으로 들어와 강(江)에 의지하니, 다리가 좁아 물에 빠져 전사한 자가 만여명이었다. 복신 등이 이에 도성(都城)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 임존성(任存城)을 지키니, 신라인들은 양곡이 떨어져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이때가 용삭(龍朔) 원년((661년)) 3월이었다.

이때, 도침은 영군장군(領軍[10]將軍)이라고 스스로 칭하고,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고 스스로 칭하고,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그 기세가 날로 커졌다. 인궤에게 고하게 하여 이르기를, “듣기로는 대당이 신라와 서약하기를 백제()은 노소를 묻지 않고 일절, 죽이고, 그 연후에 (우리) 나라를 신라에게 주기로 하였다한다. 어찌 싸우다 죽는 것이 그런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으랴! 그러므로 모여서 스스로 고수(固守)할 따름이다.”라 하였다. 유인궤는 글을 지어, 화복(禍福)을 구진(具陳)하고 사람을 보내 이들을 타일렀다. 도침 등은 무리를 믿고 교거(驕倨)하였다. 유인궤의 사신을 외측 숙소에 두고, 비웃으며 대답하여[11]이르되, “사인(使人)의 관직이 작고, 나는 한 나라의 대장이므로, 함께 참여하지 않겠다.”라 하며, 글을 써서 답변하지 아니하였고, 다만 그를 (되돌려) 보냈다. 유인궤는 무리가 적으므로[12] 유인원과 군사를 합하여, 사졸들을 쉬게 하고 표(表)를 올려 신라와 함께 그것을 꾀하기를 청하였다. 신라 왕 김춘추는 조서를 받들어 그 장수 김흠(金欽)을 보내 병사를 이끌고 유인궤 등을 구하게 하였는데, 고사(古泗)에 이르러 복신이 요격하여 그를 깨뜨리니, 김흠은 갈령도(葛嶺道)에서부터 달아나 돌아왔다. 신라는 감히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이윽고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13]를 아우르니, 부여풍은 (이를) 금할 수 없었고 단지 제사(祭事)를 주재할 따름이었다. 복신 등은 유인원 등이 성에 떨어져 있어서 무원(無援)하다고 생각하여, 관리를 보내 그를 달래어 말하기를, “대사(大使)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는가? 마땅히 관리를 보내어 배웅하겠다”라 하였다.

(용삭(龍朔)) 2년((662년)) 7월 유인원·인궤 등은 복신의 남은 무리를 웅진(熊津)의 동쪽에서 대파하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대산(大山)·사정(沙井) 등의 목책을 쳐서 빼앗았으며 많은 무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에 병사를 나누어 진을 치고 이를 막으라고 명령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을 내려다보고, 높고 험하여 요충지로서 적당하였으므로, 병사를 더해 그곳을 지켰다. 인궤는 밤에 신라의 병사를 통솔하여 성의 판축(板築)된 성가퀴에 가까이 다가가, 날이 밝아서야 성에 들어가, 팔백명을 참살(斬殺)하였고, 마침내 군량(을 나를) 길을 신라까지 통하게 하였다. 유인원이 아뢰기를 병사를 늘릴 것을 청하니, 치주(淄州)·청주(靑州)·내주(萊州)·해주(海州)의 병사 칠천명을 보내고,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이로써 유인원의 무리에 더하라고 조칙을 내렸다. 이때, 복신은 이미 전권(專權)하고 있었고, 부여풍과 차츰 서로 시기하였다. 복신은 병이 났다 말하고 굴실(窟室)에 누워 부여풍이 병문안하기를 기다려, 그를 붙잡아 죽이려 하였으나, 부여풍이 이를 알고, 친신(親信)(하는 자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엄습하여 죽이고, 고구려·왜국에 사신을 보내 군대를 보내줄 것을 빌어, 이로써 당병을 막았으나, 손인사(孫仁師)가 도중에 이를 맞이하여 격파하였다. 마침내 유인원의 무리와 함께 상합(相合)하니 사기(士氣)가 대진(大振)하였다. 이때, 모든 장수들이 향(向)할 바를 의논하니,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가림성(加林城)은 수륙의 요충(要衝)이니, 응당 먼저 이를 쳐야 한다”고 하였다. 유인궤가 이르기를, “병법(兵法)(에서는) 튼튼한 곳을 피하고 허약한 곳을 치라 (하였소.) 가림성은 험하고 굳세니, 공격하면 병사를 다치게 할 것이고, (밖에서) 지키자면 광일(曠日)할 것이오. 주류성(周留城)은 백제의 소굴이어서 무리가 모여 있으므로, 만약 이를 이기면 여러 성들이 스스로 항복할 것이오.”라 하였다. 이때, 손인사·유인원 및 신라왕 김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갔고, 유인궤 및 별도의 통수(統帥) 두상(杜爽)·부여융(扶餘隆)은 수군과 군량선을 거느리고 웅진강(熊津江)에서부터 백강(白江)으로 가서, 육군과 모여서 함께 주류성으로 달려갔다. 백강 입구에서 왜인을 만나, 네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사백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밝게 비치고, 해수(海水)가 붉어졌다. 왕 부여풍은 몸을 빠져나와 달아나니 소재를 알지 못하였는데, 혹자는 이르기를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그의 보검(寶劍)을 획득하였다.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충지(忠志)등은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과 더불어 함께 항복하였다. 홀로 지수신(遲受信)만이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처음에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망하고 흩어진 자들을 불러 모으니, 열흘 사이에 귀부(歸附)한 자가 삼만여 명이었다. 소정방은 군사를 보내 이를 쳤으나, 흑치상지는 거전(拒戰)하여 이를 깨뜨렸고, 다시 이백여 성을 취하였다. 소정방은 이길 수 없었다. 흑치상지는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吒相如)와 더불어 험한 곳에 웅거하여 이로써 복신에 응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모두 항복하니, 유인궤가 이들에게 적심(赤心)을 보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임존()을 빼앗아 자신을 헌신하게 하니, 곧, 갑옷, 병장기, 군량, 건량을 주었다. 손인사가 이르기를, “(그들은) 야심이 (있어) 믿기 어렵다. 갑옷을 받고, 조〔粟〕를 더하면, 도적을 돕는 편이 되는 것이다.” 유인궤가 이르기를, “내가 사타상여·흑치상지를 보았는데, 충성스럽고 지모(智謀)가 있어, 기회를 주면 공을 세울 것이다. 여전히 어찌 의심하는가?”라 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그 성을 빼앗았다. 지수신은 처자식을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나니 여당(餘黨)은 모두 평정되었고, 손인사 등은 진려(振旅)하여 되돌아왔다. 인궤(仁軌)를 머물게 하라고 조서를 내리니, (인궤는) 병사를 거느리고 진수(鎭守)하였다. 병화(兵火)가 남아 집집마다 조잔(凋殘)하였고 강시(殭屍)가 숲과 같았다. 인궤(仁軌)는 비로소 명령을 내려 해골을 묻고, 호구(戶口)를 등록하고, 마을을 다스리고, 관장(官長)을 임명하고, 길을 통하게 하고, 교량을 세우고 제언(堤堰)을 고치고, 농상(農桑)에 과세하고, 빈핍(한 자들)을 구휼하고, 고로(孤老)를 돌보고, 立唐社稷 정삭(正朔)과 묘휘(廟諱)를 반포하니, 백성이 모두 기뻐하고, 각자 그 자리에서 만족해 하였다. 황제는 부여융을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였고, 신라의 옛 원한을 평화롭게 하고, 버려진 사람들을 초환(招還)하였다. 인덕(麟德) 2년(665년), 신라왕과 웅진성에서 만나 백마를 죽여 이로써 맹세하고, 인궤는 맹세의 글을 지어 이에 금서철권(金書鐵契)을 만들고, 신라의 묘(廟) 중에 보관하였다. 盟辭見新羅紀中 仁願等還 隆畏衆攜散 亦歸京師 의봉(儀鳳) 연간에 부여융을 웅진도독 대방군왕(熊津都督帶方郡王)으로 삼고, 귀국하게 하여 남은 무리를 평정하고 이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새로운 성으로 옮겨서 이들을 다스렸다. 이때 신라가 강건하니, 부여융은 감히 구국(舊國)에 들어가지 못했다. 寄理 高句麗死 武后又以其孫敬襲王 而그 땅은 이미 신라·발해·말갈로 나뉜 바가 되니, 나라의 계통이 마침내 끊어졌다.

사론(史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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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하건대, 신라의 고사(古事)에 이르기를 하늘이 금궤(金樻)를 내리니, 성을 김(金)씨라 했다 하는데, 이 말은 가히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臣修史 以其傳之舊 不得刪落其辭 然而又聞 新羅人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신라 국자(國子) 박사(博士) 설인선(薛因宣)이 찬한 김유신 비와 박거물(朴居勿)이 찬(撰)하고 요극일(姚克一)이 쓴 삼랑사(三郞寺) 비문을 보면, 高句麗亦以高辛氏之後 姓高氏 見晋書載記 고사(古史)에 이르기를, 백제와 고구려는 모두 부여에서 나왔다. 또한 이르기를 진(秦)나라·한(漢)나라의 난리 때에, 중국인들이 많이 해동으로 달아난 즉, (이들이) 삼국의 선조라고 한다. 豈其古聖人之苗裔耶 何其享國之長也 至於百濟之季 所行多非道 又世仇新羅 與高句麗連和  以侵軼之 因利乘便 割取新羅重城巨鎭不已 非所謂親仁善鄰 國之寶也 이때, 당나라 천자가 다시 조칙을 내려 平其怨 양으로는 따르면서 음으로는 이를 거슬러 대국(大國)에 획죄(獲罪)하였으니 망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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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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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현재의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으로 비정한다.
  2. 649년에 당나라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3. 원본은 立인데, 오자로 보인다.
  4. 原本 「眞」
  5. 효가 태자로 나온 것은 본 기사뿐이고, 다른 자료에는 모두 융(隆)이 태자로 기록되어 있다.
  6. 의자왕 4년조에는 태자로 책봉되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왕자로만 나온다.
  7. 다스릴 탁(擢). 원본은 노 도(櫂)인데, 오자로 보인다.
  8. 이들은 모두 망한 나라의 최후의 군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9. 원본 古. 舊唐書 卷199 上 百濟傳, 新唐書 卷220 百濟傳, 資治通鑑, 三國史節要 「故」.
  10. 原本 「車」. 舊唐書 卷199 上 百濟傳, 新唐書 卷220 百濟傳,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車」.
  11. 「嫚報」, 舊唐書 卷199 上 百濟傳 「傳語謂」.
  12. 原本 「小」. 新唐書 卷220 百濟傳과 三國史節要에 의거 少라 수정.
  13. 原本 「還」. 三國史節要에 의거 衆으로 수정.

라이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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