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사기/권002
하본기(夏本紀)
편집우(禹)
편집하우의 내력
편집하우(夏禹)는 이름을 문명(文命)이라 했다. 우의 아버지는 곤(鯀)이라 했고, 곤의 아버지가 제전욱이다. 전욱의 아버지는 창의(昌意)이고, 창의의 아버지가 황제(黃帝)이다. 우는 황제의 현손이자 전욱의 손자이다. 우의 증조부 창의와 아버지 곤은 모두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신하가 되었다.
곤의 죽음과 우의 치수사업 시작
편집제요 때 홍수가 하늘에 흘러넘쳐 산을 무너뜨리고 언덕을 침수시켜서 인민들이 크게 걱정했다. 요가 물을 다스릴 수 있는 자를 구하자 신하들과 사악이 모두 곤이 할 수 있다고 했다. 요는 “곤은 명을 어기고 종족을 훼손시켰으니 안 되오”라 했다. 사악은 “곤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사오니 임금께서 그를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요는 사악의 말을 듣고 곤을 기용하여 물을 다스리게 했다. 9년 동안 물은 다스려지지 않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에 제요는 바로 사람을 구해 다시 순을 얻었다. 순이 등용되어 천자의 정치를 섭정하면서 순수를 다녔다. 다니면서 곤의 치수에 드러난 바가 없다는 것을 보고는 바로 곤을 우산(羽山)에서 죽였다. 천하가 모두 순이 곤을 죽인 것을 옳다고 여겼다. 이어 순은 곤의 아들 우를 천거하여 그로 하여금 곤이 하던 일을 잇게 했다.
요가 세상을 뜨자 제순은 사악에게 “요의 사업을 잘 이룰 수 있도록 자리를 맡길 사람이 있겠소”라고 물었다. 모두가 “백우가 사공으로서 요의 공적을 완수할 수 있습니”라 했다. 순은 “오, 그렇소”이라고 하고는 우에게 “그대는 물과 땅을 다스리는 오로지 온 힘을 다 하시오”라고 명했다. 우는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하면서 설, 후직, 고요에게 양보했으나 순은 “그대는 얼른 가서 이 일을 돌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우는 사람됨이 영민하고 의지가 강하며 부지런했다. 그 덕은 어김이 없었고, 어질어서 가까워지기 쉽고, 말에는 믿음이 있었다. 목소리는 화기애애했고, 행동은 법도에 맞았으며, 일을 공평하게 처리했다. 반듯하고 부지런하여 위아래의 모범이 되었다.
우는 곧 익, 후직과 함께 임금의 명을 받들어서 제후와 백관들에게 사람들을 동원해 공사를 시작하게 했다. 산으로 가서 나무를 세워 높은 산과 큰물들을 측정하는 표시로 삼았다. 우는 선친 곤이 공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이 마음 아파 노신초사(勞身焦思)하면서 13년을 밖에서 지냈는데 집 대문 앞을 지나면서도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입고 먹는 것을 간소하게 해서 귀신에게 정성를 다했으며, 누추한 궁실에 살면서 절약한 비용을 도랑을 파는 일에 들였다. 육지를 다닐 때는 수레를 탔고, 물로 갈 때는 배를 탔다. 진흙탕은 썰매를 탔고, 산길은 바닥에 징을 박은 신발을 신었다. 왼손에는 수준기와 먹줄을 들었고 오른손에는 그림쇠와 직각자를 들고 다녔다. 사계절을 측량하고 아홉 개의 주(구주九州)를 개척하고, 아홉 개의 큰 길(구도九道)를 뚫었다. 아홉 개의 큰 연못(구택九澤)을 조성하고, 아홉 개의 큰 산(구산九山)에 길을 냈다. 익에게는 백성들에게 볍씨를 주어 낮고 습한 땅에 심도록 명했다. 후직에게는 백성들이 얻기 어려운 먹거리를 나눠주라고 명했다. 먹을 것이 적은 곳은 남는 곳의 것을 조정하여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제후들의 균형을 맞추었다. 우는 또 디니면서 그 땅에 맞는 것을 공물로 삼되 산과 하천의 편리함에 따랐다.
구주(九州)의 개통
편집우는 기주(冀州)에서 일을 시작했다. 호구산(壺口山)을 다스리고 양산(梁山)과 기산(岐山)을 다스렸다. 태원(太原)을 다스리고 태악산(太嶽山, 항산) 남쪽에까지 이르렀다. 담회(覃懷)에서 공을 이룬 다음 장하(漳河)에 이르렀다. 이곳의 땅은 희고 기름져 세금을 내는 등급으로 1등급, 전답은 5등급이었다. 상수(常水)와 위수(衛水)가 물길대로 흐르고 대륙택(大陸澤)도 조성되었다. 오이(烏夷)의 공물은 가죽옷인데 오른쪽으로 갈석산(碣石山)을 끼고 바다(또는 황하)로 운송되었다.
제수(濟水)와 황하 사이에 연주(沇州)가 있다. 구하(九河)에 길이 나고 뇌하(雷夏)가 큰 호수가 되자 옹수(雍水)와 저수(沮水)가 하나로 합쳐져 들어갔다. 땅에는 뽕나무를 심어서 누에를 쳤다. 이렇게 (물이 물러나자) 인민들은 언덕을 내려와 평지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의 땅은 검고 기름지며, 풀은 무성하고 나무눈 곧게 잘 자랐다. 전답은 6등급, 세금 등급은 9등급이었으나 13년 사업 끝에 같아졌다. 이곳의 공물은 옻나무와 견사, 대광주리에 담은 무늬가 있는 견직물이었다. (공물들은) 제수와 탑수(漯水)를 따라 황하로 통했다.
대해(大海)와 태산(泰山) 사이에 청주(靑州)가 있다. 우이(堣夷)를 평정하여 유수(濰水)와 치수(淄水)가 소통되었다. 그 토질은 희고 기름지고, 바닷가는 넓은 개펄이라 소금기가 있는 땅을 개간한 밭이 많다. 전답은 3등급이고 세금 등급은 4등급이었다. 이곳의 공물은 소금과 가는 갈포(葛布), 여러 가지 해산물, 태산의 계곡에서 생산되는 견사, 대마, 납, 소나무, 괴석, 내이(萊夷)의 축산물, 대광주리에 담은 작잠사(柞蠶絲)가 있다. (이 공물들은) 문수(汶水)에서 배로 제수(濟水)로 운반되었다.
대해와 태산, 회수(淮水) 사이에는 서주(徐州)가 있다. 회수와 기수(沂水)가 다스려지고 몽산(蒙山)과 우산(羽山)에 나무를 심었다. 대야택(大野澤)이 호수가 되고 동원(東原)이 평탄해졌다. 그 토질은 붉고 기름지며 풀과 나무가 갈수록 무성해졌다. 전답은 2등급이고 세금 등급은 5등급이었다. 공물은 오색토와 우산 계곡의 꿩, 역산(嶧山)의 남쪽에서서만 나는 오동나무, 사수(泗水) 가의 부석으로 만든 경(磬), 회이(軛夷)의 진주와 어류, 대광주리에 담은 흑백의 견직물이다. (이 공물들은) 회수와 사수에서 배로 실어 황하로 통한다.
회수와 대해 사이에는 양주(揚州)가 있다. 팽려(彭蠡)가 호수가 되자 기러기가 살게 되었다. 세 개의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진택(震澤)은 잘 정리되었다. 대나무가 곳곳에서 자라고, 들풀은 무성하며, 나무는 크게 자란다. 토질은 습기가 많은 진흙땅이다. 전답은 9등급이며, 세금 등급은 7등급과 6등급 사이다. 공물은 세 종류의 금속, 옥돌, 대나무, 상아, 가죽, 깃털, 검정소의 꼬리, 도이족(島夷族)이 입는 풀로 짠 옷, 대광주리에 담은 오색 비단이다. 때로는 포장한 귤과 유자도 공물로 바쳤다. 이 공물들은 장강과 대해를 따라서 회수와 사수로 들어온다.
형산(荊山)에서 형산(衡山) 이남까지는 형주(荊州)다. 장강과 한수(漢水)가 종묘를 향해 흘러 가듯 바다로 들어간다. 아홉 줄기로 나누어진 강물이 중앙을 관통하며 흐르고 타수(沱水)와 잠수(涔水)가 소통되니 운택(雲澤)과 몽택(夢澤) 지역이 다스려졌다. 그 토질은 습기가 많은 진흙땅이며 전답은 8등급이고 세금 등급은 3등급이었다. 공물은 깃털, 검정소 꼬리, 상아, 가죽, 세 종류의 금속, 참죽나무, 산뽕나무, 향나무, 잣나무, 숫돌, 노석(砮石), 단사(丹砂), 세 제후국에서 바치는 유명 특산물인 균죽(箘竹)과 노죽(簬竹), 호목(楛木), 잘 포장한 정모(菁茅), 대광주리에 담은 진홍색 견직물과 꿰미로 엮은 진주이며, 때로는 구강(九江)의 큰 거북도 있었다. 이 공물은 장강과 타수, 잠수, 한수에서 배에 실어서 낙수(洛水)를 지나 남하(南河)로 운반했다.
형산(荊山)과 황하 사이에는 예주(豫州)가 있다. 이수(伊水), 낙수(洛水), 전수(瀍水), 간수(澗水) 모두 황하로 흘러들어가고, 형파(滎播)는 물이 모여 호수가 되었다. 하택(荷澤)의 물길이 잘 잡혀 명도택(明都澤)으로 잘 흐른다. 토질은 부드러운데 지대가 낮은 곳은 검고 기름지다. 전답은 4등급이고, 세금 등급은 2등급과 1등급을 오간다. 공물은 옻나무, 견사, 갈포, 모시, 대광주리에 담은 가는 솜이며, 때로는 석경을 만드는 돌을 바쳤다. 이 공물은 낙수에서 배에 실어서 황하로 운반했다.
화산(華山)의 남쪽과 흑수(黑水)사이는 양주(梁州)이다. 민산(岷山)과 파총산(嶓冢山)이 개발되어 타수와 잠수가 모두 소통되었다. 채산(蔡山)과 몽산(蒙山)까지 잘 정비되어 화이(和夷)가 이득을 보았다. 토질은 검푸른 색이다. 전답은 7등급이고 세금등급은 8등급이나 풍년과 흉년에 따라 7등급과 9등급을 오간다. 공물로는 좋은 옥, 철, 은, 강철, 노석, 경쇠, 곰, 말곰, 여우, 너구리, 융단이 있다. 서경산(西傾山)의 공물은 환수(桓水)를 따라 운반했는데 잠수(潛水)에서 배에 실어서 면수(沔水)를 지나서 위수(渭水)로 들어가서 황하를 건넜다.
흑수와 서하(西河) 사이는 옹주(雍州)이다. 약수(弱水)는 서쪽으로 흐르고, 경수(涇水)는 위수와 합류했다.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는 순조롭게 위수로 흘렀고, 풍수(澧水)도 역시 위수로 합류하였다. 형산(荊山)과 기산의 길을 닦으니 종남산(終南山)과 돈물산(敦物山)에서 조서산(鳥鼠山)에 이르는 지역이 모두 다스려졌다. 고원과 저지대의 일이 잘 되자 도야택(都野澤)까지 이득을 보게 되었다. 삼위(三危)가 정돈되니 삼묘(三苗)도 크게 질서가 잡혔다. 토질은 누런색에 부드럽다. 전답은 1등급이고 세금 등급은 6등급이다. 공물은 좋은 옥과 여러 가지 돌들이다. 공물은 적석산(積石山)에서 배에 실어서 용문(龍門) 아래의 서하(西河)를 거쳐 위수에서 만난다. 곤륜(昆侖), 석지(析支), 거수(渠搜)에서 바친 융단도 있다. 서융(西戎)도 질서가 잡혔다.
구산(九山)과 구천(九川)의 개통
편집아홉 개 산맥을 개통했다. 견산(汧山)과 기산은 황하를 넘어 형산(荊山)까지 이어진다. 호구산(壺口山)과 뇌수산(雷首山)은 태악산(太嶽山)까지 이어진다. 지주산(砥柱山)과 석성산(析城山)은 왕옥산(王屋山)까지 이어진다. 태행산(太行山)과 상산(常山)은 갈석산(碣石山)에 이르러 바다로 뻗어간다. 서경산(西傾山), 주어산(朱圉山), 조서산(鳥鼠山)은 화산까지 이어진다. 웅이산(熊耳山), 외방산(外方山), 동백산(桐柏山)은 부미산(負尾山)까지 이어진다. 파총산(嶓冢山)에 길을 내서 형산(荊山)까지 이르게 했다. 내방산(內方山)은 대별산(大別山)까지 이르고, 문산(汶山)의 남쪽은 형산(衡山)까지 이르는데, 구강(九江)을 지나서 부천원(敷淺原)에 이른다.
아홉 개의 하천을 통하게 했다. 약수(弱水)는 합려(合黎)에 이르고, 그 갈래는 유사(流沙)로 흘러든다. 흑수(黑水)의 물길은 삼위(三危)에 이르고 남해로 흘러든다. 황하의 물길은 적석산을 지나 용문까지 이르고, 남으로 화산의 북쪽으로 흐르다 동으로 지주산으로 흘러서, 다시 동쪽 맹진(孟津)으로 흐른다. 다시 동으로 낙수를 지나 대비산(大邳山)에 이르고, 다시 북으로 강수(降水)를 지나서 대륙택(大陸澤)에 이른다. 여기서 북으로 아홉 갈래로 나누어진 다음 다시 합류하여 역하(逆河)가 되어 바다로 흘러든다. 파총산에서 시작되는 양수(瀁水)는 물길을 따라서 동으로 흘러 한수가 되고, 다시 동으로 흘러서 창랑수(滄浪水)가 된 다음 삼서수(三澨水)를 지나 대별산으로 들어가 남쪽의 장강으로 흐르고, 다시 동으로 모여 팽려택(彭蠡澤)이 된다. 여기서 동으로 흘러서 북강(北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민산(岷山)에서 발원한 장강은 동으로 타수(沱水)로 갈라지고, 다시 동으로 예수(醴水)에 이르러 구강(九江)을 지나 동릉(東陵)에 이른다.
여기서 북으로 비스듬히 흐르다 팽려택에서 만나 동쪽으로 흘러 중강(中江)이 되어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연수(沇水)의 물길은 동으로 흘러 제수(濟水)가 되어 황하로 들어가는데, 제수가 흘러넘쳐 형택(滎澤)을 이룬다. 동으로 도구(陶丘)의 북쪽을 지나고, 다시 동으로 흘러 하택(荷澤)에 이른다. 다시 동북으로 흘러서 문수(汶水)와 합류한 다음 다시 동쪽을 향해 북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회하(淮河)는 동백산(桐柏山)에서 시작되어 동으로 흘러서 사수(泗水), 기수(沂水)와 합류해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 위수(渭水)는 조서동혈산(鳥鼠同穴山)에서 내려와 동으로 흘러서 풍수(澧水)와 합류해 다시 동북쪽 경수(涇水)에 이르고, 동으로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지나서 황하로 흘러든다. 낙수는 웅이산에서 시작되어 동북으로 흘러서 간수(澗水), 전수(瀍水)와 합류하고, 다시 동으로 흘러서 이수(伊水)와 합류해 동북 흐르다 황하로 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구주는 하나가 되고, 사방 모두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구산이 개통되자 다닐 수 있게 되었고, 구천이 통하고, 구택에는 제방을 쌓았다. 사해가 하나로 모이고, 모든 땅이 잘 다스려졌다. 땅은 알맞게 등급을 매겨 신중하게 세금을 매겼는데 모두 세 등급에 따라 거두었다. 중국에 땅과 성을 내리면서 “기꺼이 덕을 받들고 짐의 통치가 어긋나지 않게 행하라”고 하였다.
강역
편집천자의 나라 밖 500리를 전복(甸服)이라 부르게 했다. 100리 이내는 세금으로 볏단을, 200리 이내는 곡식의 이삭을, 300리 이내는 곡식의 낟알을, 400리 이내는 빻지 않은 쌀을, 500리 이내는 빻은 쌀을 바치게 했다. 전복 밖 500리는 후복(侯服)이라 했다. 전복에서 100리 이내는 경대부의 채읍(采邑)이고, 200리 이내는 천자를 받드는 소국이며, 300리 이내는 제후국이다. 후복 밖 500리는 수복(綏服)이다. 후복 300리 이내는 정황을 살펴 문으로 교화하고, 200리 이내는 무를 떨쳐 지켰다. 수복 밖 500리는 요복(要服)이다. 300리 이내는 이족(夷族)의 거주지이고, 200리 이내는 범법자들이 산다. 요복 밖 500리는 황복(荒服)이다. 300리 이내는 만족(蠻族)이 거주하고, 200리 이내는 죄인을 추방하는 곳이다.
동으로는 바다에, 서로는 사막에까지 이르고, 북과 남에도 덕을 입으니 교화가 사방에 이르렀다. 이에 순 임금은 우에게 검은 옥을 내려서 천하에 성공을 알리니 천하는 크게 잘 다스려졌다.
순 · 우 · 고요
편집고요는 사법관이 되어 인민을 다스렸다. 제순이 조회를 열자 우, 백이, 고요가 제순 앞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고요가 “진실로 덕정을 펼치면 일을 밝게 결정하고 군신이 화합할 것입니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우는 “그렇다면 어찌 하면 되겠소”라고 물었다. 고요는 “예, 삼가 자신의 몸을 수양하고 멀리 생각하며, 구족을 돈독히 하고 유능한 사람의 보좌를 받고,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이르게 하되 모두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라 했다. 우는 좋은 말에 “그렇군요”라며 절을 했다. 고요는 “예! 사람을 알고 인민을 편안하게 하면 됩니다”라 했다. 우는 “아 예! 모든 일을 그렇게 하기란 요 임금도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을 알려면 지혜로워야 하고, 지혜가 있어야 사람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인민을 편안하게 해야 은혜롭다 할 수 있고, 그러면 백성들이 그 덕을 마음으로 따릅니다. 지혜롭고 은혜롭다면 환두(驩兜)를 근심할 필요가 없으며, 유묘(有苗)를 내쫓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 교묘한 말과 웃는 얼굴로 아부하는 자들을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라고 했다. 고요는 “물론입니다. 예! 대저 행동에는 아홉 가지 덕, 즉 구덕이 필요하며, 말을 할 때도 덕이 필요합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일을 살피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너그러우면서도 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주관이 있고, 사람과 잘 지내면서도 무게가 있고, 재능이 있으면서도 신중하고, 따르면서도 견고하고, 정직하면서도 온화하고, 간결하면서도 구차하지 않고, 굳세면서도 착실하고, 강하면서도 도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 구덕을 꾸준히 실천하면 아주 좋습니다. 이것들 중에서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세 가지 덕행을 실천하면 경대부는 자기 집안을 지킬 수 있습니다. 여섯 가지를 실천하면 나라를 관리하는 훌륭한 제후가 될 수 있습니다. 아홉 가지 모두를 신천하면 훌륭한 인재를 관직에 쓸 수 있고, 백관은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간사하고 음흉한 일을 꾀하는 자들은 나서지 못하게 됩니다. 자격이 없는 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이를 천하대사를 어지럽힌다고 합니다. 하늘이 죄를 지은 자를 벌할 때면 그 죄에 맞게 오형을 내립니다. 제가 올린 이 말씀이 정말 시행될 수 있겠습니까?” 우는 “그대의 말은 실행되어 공적을 이룰 것입니다”라고 했다. 고요는 “제가 지혜롭지 못하지만 오로지 어찌하면 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뿐입니다”라고 했다.
제순은 우를 가리키며 “그대도 고견을 말해보시오”라 했다. 우는 절을 하며 “아 예!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저는 매일 부지런히 일할 것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고요가 “부지런히 일할 것만 생각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라는 말로 우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우는 “홍수가 하늘까지 넘쳐 산을 감싸고 언덕을 집어삼켜 백성들은 인민들이 모두 물 걱정을 하며 살았습니다. 저는 흙길은 수레를 타고, 물길은 배를, 진흙길은 썰매를, 산길은 바닥에 징을 박은 신발을 신고 다녔습니다. 산에 올라가서는 나무를 베어 표지로 삼았습니다. 익(益)과 함께 백성들에게 볍씨와 새나 짐승의 신선한 주었으며, 아홉 개 하천을 뚫어 바다로 흐르게 하고, 밭 사이의 도랑을 준설해 강으로 흐르게 했습니다. 직(稷)과는 백성들에게 모자란 식량을 주었는데 남는 곳의 식량을 모자란 곳으로 조절해 메워주거나 백성들을 좀 더 편한 곳으로 옮기게 했습니다”라 했다. 고요는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덕입니다”라고 하였다.
우가 “오, 임금이시여! 신중하고 편안하게 자리를 지키십시오. 덕있는 신하를 기용하여 돕게 하면 천하가 따를 것입니다. 밝은 마음으로 하늘의 명을 기다리시면 하늘이 다시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라 했다. 제우는 “오, 대신들이여! 대신들이여! 그대들은 모두 짐의 다리와 팔, 귀와 눈이 되시오. 내가 백성들을 지킬 것이니 그대들은 나를 도우시오. 내가 옛 사람들이 어떤 빛깔과 무늬의 복장을 입었는지 살필 것이오. 해와 달과 별의 문양을 한 여러 빛깔의 복장을 만들 것이니 그대들이 내게 알려주시오. 내가 육률(六律), 오성(五聲), 팔음(八音)을 듣고 내 정치의 잘잘못을 살피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테니 그대들은 잘 들으시오. 내게 잘못이 있으면 바로잡도록 그대들이 도와주시오. 그대들은 내가 보는 앞에서는 아부하다가 물러나서 나를 비방하지 마시오. 사방에서 일을 돕는 신하들을 존중하시오. 모함과 아첨으로 총애를 얻은 신하들은 군주의 덕이 진심으로 베풀어지면 깨끗이 사라질 것이오”라고 했다. 우는 “그렇습니다. 임금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고 착한 자와 나쁜 자를 함께 기용하시면 공적을 이루지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했다.
제순은 “단주처럼 오만해서는 안 되오. 방탕하게 놀기를 좋아해서 물도 없는데 배를 띄우고, 떼를 지어 집 안에서 음탕함을 일삼으니 그가 계승하지 못하는 것이오.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소”라 했다. 우는 “저는 도산씨(塗山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나흘 만에 집을 떠나 계(啓)가 태어난 것도 못 보고 또 돌봐주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랬기에 치수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오복(五服)을 두어 사방 5,000리에 이르는 땅을 관할하고, 12주에 장관 사(師)을 두었습니다. 그 너머로는 사해에 이르렀고, 다섯 제후국의 우두머리 오장(五長)을 세워 각자의 백성을 이끌며 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오직 삼묘가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을 뿐입니다. 임금께서는 유념하시기 바랍니다”라 했다. 제순은 “나의 덕정을 그대가 알렸으니 그 공은 그대의 힘으로 얻은 것이오”라고 했다. 고요는 이에 우의 덕에 공경을 표하고 인민들에게 모두 우를 본받도록 했다.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벌이 따랐다. 순의 덕이 크게 빛났다.
이때 기(夔)가 음악을 연주하자 조상의 혼령이 강림하고 제후는 예를 갖추어 양보했으며, 새와 짐승들도 춤을 추었다. 소운(簫韻)이란 음악의 9장 연주가 끝나자 봉황이 날고 온갖 짐승이 춤을 추었으며 백관은 믿음으로 서로 화합하였다. 이에 순제는 노래 가사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 “하늘의 명을 삼가 받들어 오로지 때에 순응하고 삼가 신중하게 행동할지니.” 이어 다시 노래했다. “대신들이 기꺼이 충정을 다하니 원수(천자)는 공업을 크게 떨치고 모든 일이 흥하리라!” 고요는 손을 맞잡고 머리를 조아리며 큰 소리로 “유념하소서! 앞장서서 나라 일을 크게 일으키시되 삼가 법도를 지키고 공경하소서”라고 말한 다음, 가사의 뜻을 바꾸어 “원수가 영명하니 신하들도 현명하구나. 모든 일이 평안하리니”라고 노래했다. 또 이어서 “원수가 자잘해서 큰 뜻이 없으면 신하들도 게을러져 모든 일을 그르치리니”라고 했다. 순제이 절을 하며 “그렇소! 모두 공경합시다”라 했다. 이리하여 천하는 모두 우가 밝힌 법도와 음악을 받들었고, (우는) 산과 하천의 신을 받드는 일을 주재했다.
순의 선양과 우의 즉위
편집제순은 하늘에 우를 천거하여 후계자로 삼았다. 17년 뒤 제순이 세상을 떠났다. 3년 상을 마치고 우는 순의 아들 상균에게 양보하고 양성(陽城)으로 피했다.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상균을 떠나 우에게 인사를 드렸다. 우는 그제야 천자 자리에 올라 남면하고 천하에 임했다. 나라 이름을 하후(夏后)라 하고, 성을 사씨(姒氏)라 했다.
제우가 자리에 올라 고요를 천거하고 정권을 주려 했으나 고요가 죽었다. 고요의 후손을 영(英)과 육(六) 또는 허(許)에 봉했다. 그 후 익을 천거해 정사를 맡겼다.
10년 뒤 제우는 동쪽을 순수하다가 회계(會稽)에서 세상을 떠났다. 천하는 익에게 주어졌다. 3년 상이 끝나자 익은 제우의 아들 계(啓)에게 양보하고 기산(箕山) 남쪽으로 도망쳐 숨었다. 우의 아들 계는 현명하여 천하의 마음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우가 세상을 떠나면서 익에게 주었지만 익은 우를 보좌한 날이 얼마 되지 않아 천하가 미흡하게 여겼다. 그래서 제후가 모두 익을 떠나 계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우리의 군주 제우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계자 마침내 천자 자리에 올르니 이가 하후 제계이다.
하계
편집하후 제계는 우의 아들이다. 그 어머니는 도산씨의 딸이다. 유호씨(有扈氏)가 복종하지 않자 계가 토벌에 나서 감(甘)에서 크게 싸웠다. 전쟁에 앞서 「감서(甘誓)」를 짓고 육경(六卿, 6군의 장수)을 소집하여 경고했다. 계는 이렇게 말했다. “오! 6군의 장수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고한다. 유호씨가 힘으로 오행을 업신여기고, 삼정(三正, 하늘․땅․사람)의 도리를 포기하니 하늘이 그 명을 끊으려 한다. 지금 내가 삼가 하늘의 벌을 함께 집행하고자 한다. 수레 왼쪽에 있는 병사는 적의 수레 왼쪽의 병사를, 오른쪽은 오른쪽을 공격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이다. 명령에 따르면 조상의 사당에서 상을 내리고, 명에 따르지 않으면 사직에서 목을 베고 처자식들은 노예로 삼을 것이다." 마침내 유호씨를 멸망시키자 천하가 모두 인사를 올렸다.
하계 이후의 임금들
편집하후 제계가 세상을 뜨자 아들 제태강(帝太康)이 들어섰다. 제태강은 나라를 잃자 그의 다섯 동생들이 낙수(洛水) 북쪽에서 그를 기다리며 「오자지가(五子之歌)」를 지었다.
태강이 세상을 뜨고 동생 중강(仲康)이 즉위하니 이가 제중강이다. 제중강 때 사시를 주관하는 희씨(羲氏)와 화씨(和氏)가 음주가 지나쳐 계절과 절기를 어지럽혔다. 윤(胤)이 이들 징벌하고 「윤정(胤征)」을 지었다.
중강이 세상을 뜨고 아들 제상(帝相)이 즉위했다.
제상이 세상을 뜨자 제소강(帝少康)이 즉위했다.
제소강이 세상을 뜨고 아들 제여(帝予)가 즉위했다.
제여가 세상을 뜨고 아들 제괴(帝槐)가 즉위했다.
제괴가 세상을 뜨자 아들 제망(帝芒)이 즉위했다.
제망이 세상을 뜨고 아들 제설(帝泄)이 즉위했다.
제설이 세상을 뜨자 아들 제불항(不降)이 즉위했다.
제불항이 세상을 뜨자 동생 제경(帝扃)이 즉위했다.
제경이 세상을 뜨자 아들 제근(帝厪)이 즉위했다.
제근이 세상을 뜨자 제불항의 아들 제공갑(帝孔甲)이 즉위하니 이가 제공갑이다. 제공갑이 들어서서는 귀신을 좋아하고 음란함을 일삼았다. 하후씨의 덕이 쇠하고 제후들이 배반했다. 하늘이 암수 한 마리씩 용 두 마리를 내려 보냈다. 공갑이 (용을) 먹일 줄 몰랐고, 또 용을 기르는 환룡씨(豢龍氏)도 구하지 못했다. 도당씨(陶唐氏)가 쇠퇴한 뒤 그 후손에 유루(劉累)라는 자가 있었는데, 환룡씨에게서 용을 길들이는 법을 배워 공갑 임금을 섬겼다. 공갑이 그에게 어룡씨(御龍氏)라는 성씨를 주었고, 시위(豕韋)의 후손의 땅을 받았다. 용 암컷이 죽자 하후(공갑)에게 먹였다. 하후가 사람을 시켜 (용을) 찾자 무서워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공갑이 세상을 뜨고 아들 제고(帝皐)가 섰다.
제고가 세상을 뜨고 아들 제발(帝發)이 즉위했다.
걸(桀)의 즉위와 하의 멸망
편집제발이 세상을 뜨자 아들 제이계(帝履癸)가 즉위했는데 이가 걸(桀)이다. 제걸 때 공갑 이래로 제후들이 하를 많이 배반했는데 걸은 덕에 힘쓰지 않고 무력으로 백성들을 해치니 백성들은 견딜 수가 없었다. 제걸이 탕(湯)을 불러 하대(夏臺)에 가두었다가 얼마 뒤에 풀어주었다. 탕이 덕을 닦으니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로 귀의했다. 탕이 마침내 군사를 거느리고 하걸을 정벌했다. 걸은 명조(鳴條)로 달아났다가 결국은 추방되어 죽었다. 걸은 사람들에게 “내가 하대에서 탕을 죽이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회스럽다”라 했다. 탕이 천자 자리에 올라 하 왕조의 천하를 대신했다. 탕은 하의 후손을 제후에 봉했고, 주(周) 왕조 때에는 기(杞)에 봉해졌다.
사마천의 논평
편집태사공은 말한다. “우는 사(姒)를 성으로 삼아 그 후손들을 각지에 봉하여 그 나라 이름을 성으로 삼았다. 그래서 하후씨(夏后氏), 유호씨(有扈氏), 유남씨(有男氏), 짐심씨(斟尋氏), 동성씨(彤城氏), 포씨(褒氏), 비씨(費氏), 기씨(杞氏), 증씨(繒氏), 신씨(辛氏), 명씨(冥氏), 짐과씨(斟戈氏)가 생겼다. 공자께서 하나라의 달력을 바로 잡은 바 있어 학자들이 『하소정(夏小正)』을 많이 전수했다고 한다. 우순(虞舜)과 하우(夏禹) 때 공물과 세금 제도가 갖추어졌다. 혹자는 우가 강남에서 제후들과 모여서 공적을 심사하다가 세상을 뜨고 그곳에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회계(會稽)라 불렀다고 한다. 회계는 회계(會計)와 같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