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예양
전차(電車)에서 내리어 바로 버스로 연락되는 거리인데 약 15분 걸린다고 할지요. 밤이 이윽해서 돌아갈 때에 대개 이 버스 안에 몸을 실리게 되니 별안간 폭취(暴醉)를 느끼게 되어 얼굴에서 우그럭 우그럭 하는 무슨 음향(音響)이 일던 것을 가까스로 견디며 쭈그리고 앉아 있거나 그렇지 못한 때는 갑자기 헌 솜같이 피로해진 것을 깨다를 수 있는 것이 이 버스 안에서 차지하는 잠시 동안의 일입니다. 이즘은 어쩐지 밤이 늦어 문붕(文朋)과 중인(衆人)을 떠나서 온전히 제 홀로 된 때 취기와 피로가 삽시간에 급습하여 오는 것을 깨닫게 되니 이것도 체질로 인해서 그런 것이 아닐지요. 버스로 옮기기가 무섭게 앉을 자리를 변통해 내야만 하는 것도 실상을 서서 쓸리기에 견딜 수 없이 취했거나 삐친 까닭입니다. 오르고 보면 번번이 만원인데도 다행히 비집어 앉을 만한 자리가 하나 비어있지 않았겠습니까. 손바닥을 살짝 내밀거나 혹은 머리를 잠깐 굽히든지 하여서 남의 사이에 끼일 수 있는 약소한 예의를 베풀고 앉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피로를 잊을 만하게 그렇게 편편한 자리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양 옆에 완강한 젊은 골격이 버티고 있어서 그 틈에 끼워 있으려니까 물론 편편치 못한 이유 외에 무엇이었습니까마는 서서 쓰러지는 이보다는 끼워서 흔들거리는 것이 차라리 안전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만원버스 안에 누가 약속하고 비어 놓은 듯한 한 자리가 대개는 사양할 수 없는 행복같이 반가운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일상생활이란 이런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풀이하는 것이 거의 전부이겠는데 이런 하치 못한 시민을 위하여 버스 안에 비인 자리가 있다는 것은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보담은 겨우 있다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라는 원리로 돌릴 만한 일일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종시 몸짓이 불편한 것을 그래도 견디어야만 하는 것이니 불편이란 말이 잘못 표현된 말입니다. 그 자리가 내게 꼭 적합하지 않았던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말하자면 동그란 구녁에 네모난 것이 끼웠다거나 네모난 구녁에 동그란 것이 걸렸을 적에 느낄 수 있는 대개 그러한 저어감(齟齬感)에 다소 초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로서니 한 15분 동안의 일이 그다지 대단한 노역(勞役)이랄 것이야 있습니까. 마침내 몸을 가벼이 솔치어 빠져나와 집까지의 어둔 골목길을 더덕더덕 걷데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튿날 밤에도 그때쯤 하여 버스에 오르면 그 자리가 역시 비어 있었습니다. 만원 버스 안에 자리 하나가 반드시 비어 있다는 것이나 또는 그 자리가 무슨 지정을 받은 듯이나 반드시 같은 자리요 반드시 나를 기다렸다가 앉히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그도 하루 이틀이 아니요 여러 밤을 두고 한결로 그러하니 그 자리가 나의 무슨 미신에 가까운 숙연(宿緣)으로서나 혹은 무슨 불측(不測)한 고장으로 누가 급격히 낙명(落名)한 자리거나 혹은 양복 궁둥이를 더럽힐 만한 무슨 오점(汚點)이 있어서거나 그렇게 의심쩍게 생각되는데 아무리 들여다보아야 무슨 실큼한 혈액(血液) 같은 것도 붙지 않았습니다. 하도 여러 날 밤 같은 현상을 되풀이하기에 인제는 버스에 오르자 꺼어멓게 비어 있는 그 자리가 내가 끌리지 아니치 못할 무슨 검은 운명과 같이 보이어 실큿한 대로 그대로 끌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밤을 연해 앉고 보니 자연히 자리가 몸에 맞아지며 도리어 일종의 안이감(安易感)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괴상한 노릇은 바로 좌우에 앉은 두 사람이 밤마다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이가 실상 20 안팎 밖에 아니 되는 청춘남녀 한 쌍인데 나는 어느 쪽으로도 쓸릴 수 없는 꽃과 같은 남녀이었습니다. 이야기가 차차 괴담(怪談)에 가까워 갑니다마는 그들의 의상도 무슨 환영(幻影)처럼 현란(絢爛)한 것이었습니다. 혹은 내가 청춘과 유행에 대한 예리한 판별력을 상실한 나이가 되어 그럴지는 모르겠으나 밤마다 나타나는 그들 청춘 한쌍을 꼭 한사람들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괴담과 같은 버스 안에 이국인(異國人) 같은 청춘남녀와 말을 바꿀 일이 없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종시 불편하였던 원인을 추세(追勢)하여 보면 아래같이 생각되기도 합니다.
- 나의 양 옆에 그들은 너무도 젊고 어여뻤던 것임이 아니었던가.
- 그들의 극상품(極上品)의 비누냄새 같은 청춘의 체취에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이 아닐지?
- 실상인즉 그들 사이가 내가 쪼기고 앉을 자리가 아이예 아니었던 것이나 아닌지?
대개 이렇게 생각되기는 하나 그러나 사람의 앉을 자리는 어디를 가든지 정하여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늙은 사람이 결국 아랫목에 앉게 되는 것이니 그러면 그들 청춘남녀 한 쌍은 나를 위하여 버스 안에다 밤마다 아랫목을 비워놓은 것이 아니었을지요? 지금 거울 앞에서 아침 넥타이를 매며 역시 오늘밤에도 비어 있을 꺼어먼 자리를 보고 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