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나먼 옛날
맥두산 포수막이
잣솔밭에 숨어 있는 곳-
소리개 많다 하여 솔개골,
허나 그렇게 많던 소리개도
그림자까지 찾을 길 없어지고
사발봉 우엔 외가마귀 앉아
두메를 하소연하듯 울고만 있어라!
옛날엔 범 잡는 포수들이
저녁이면 모닥불 옆에 모여앉아
래일의 희망을 떳떳이 그리며
화성대 닦고 창끝 버렸으리!
그러나 조상의 녹쓴 화성대도
귀뿌리 어루만지며 주재소에 바치고
포수의 후손들은
검둥이 화전농이 되었다.

2

세상에서 떨어져나간 솔개골-
이 마을에 김윤철이 산다.
피투성의 ≪3.1≫을 다시 맞은 해 봄
안해도 놈들의 뭇매에 죽고
의병들도 두만강 건넜을 제
참나무통에 의의 총 감추고-
품팔이로 이곳저곳-
몇 해인가 보내다가
이 솔개골에 화전농이 되었다.
혜산에 있는 어린 딸 데려다가
분노도 희망도 두메의 흙속에 묻고
그날그날 보내더니
지난해 어느 때부터
새 희망 새 힘 얻었다.
그것은
솔개골에 이런 전설 돌던 때-
≪백두산 속엔 큰나큰 굴,
해도 달도 있고 별도 반짝이는
넓으나 넓은 굴 있는데
그 속에선 용사 수만이 장검을 간다고,
장검을 바위돌에 갈면서
령 내리기만 기다린다고,
때가 되면 령이 내리고,
령만 내리면
석문이 쫘악 열리고
석문만 열리면
용사들이 벼락같이 쓸어나오고
용사들만 쓸어나오면
이 땅에 해방전이 일어난다고
일제를 쳐부시리라고-≫
이때부터 꽃분이도
철호의 지도 받았고
이때부터 백두산을 바라보면
마르고 쪼들린 마음속에 오월의 대하인 양 격랑이 도도

3

백두산! 백두산!
너, 세기의 증견자야!
칭기스한의 들띄우는 말발굽도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피묻은 칼도
너의 가슴에 잊히지 않은 상처를 남겼고
오백년 왕업도
사신의 두 어깨에 치욕의 짐이 되어
너의 등골에 모멸의 발자국 치며
해마다 압록을 건너야만 될 때도
인민만은 자유의 홰불을 쳐들고
홍경래의 창기를 뒤다랐고
갑오의 싸움을 펼쳤다.
허다가 반만년 다듬기운 이 땅이
일제의 독아에 울크러질 제
백두야, 너도 가슴막히여
숙연히 머리 숙이였지!
그러나 인민만은 봉화를 일으켜
칼을 들고 의병이 일어났고
피를 들고 ≪3.1≫이 일어났다.
파업의 굴뚝에 분노 서리우고
≪소작≫을 안고 주림이 통곡칠 때
또 송화강 물결까지도
일제의 그림자에 거칠어지고
만리장성도 놈들의 멸시에 맞아
조약돌로 딩굴 때
이 나라의 빨찌산들이 일어나
반항의 기치를 피로 물들이거니
아아, 백두야, 네 얼마나
동해의 날뛰는 파도인 양
격분에 가슴을 떨면서
바다 속 섬나라 저 원수를-
하늘아래 한가지 못살 저 원쑤를
피어린 눈으로 노렸느냐!

4

꽃 같다고 꽃
분같이 희다고 분-
꽃분의 어린 때는
혜산 어느 마을에서 지냈다
솔개골로 온 지도 십여 년-
학교라곤 구경도 못한 꽃분이
허나 기나긴 겨울밤은 한글의 밤-
아버지의 가르침 받아
손싸래에 때묻고 모지라진
몇 해 전 ≪신녀성≫도 쉽게 보았다.
임당수 깊은 물에
심청이를 버린 그 배사공들이
한없이 야속하다 눈물도 지었고
드덜기 캐면서도
신관사또 변학도의 목 버이노라
중동을 찍어 동댕이도 쳤다.
때로는 아버지의 구슬픈 이야기-
그것은 소녀의 가슴속에
세월은 흘러도 더 피여오르는
불멸의 불덩이!

5

기미년 ≪토벌≫에 돌아가셨다는 어머니-
그렇게 기다리던 보리밥도 못받고…
어떤 때는 치받치는 어머니 생각
온 마음을 비트는 듯 조이는 듯-
≪어떻게 원쑤 갚을가!≫
꽃분이 온몸 떨었다.
꿈속에라도 잠꼬대 피하려고
혀 불어끊어 벙어리 되고
대사의 비밀을 죽음으로 감추며
고문대에 매인 채 소리없이 죽어간
그 이름모를 청년-
≪실루 그런 오빠나 있었으면!≫
꽃분이 한숨지었다.
빨찌산 남편을 천장에 감추고
놈들의 창에 찔려 죽으면서도
남편이 알면 뛰여내릴가
한마디 신음도 안낸 그 마을 아낙내-
≪아, 나도 그래리라!≫
남몰래 꽃분이 맹세했다!

6

산촌의 밤-
마을집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모지라빠진 뒤웅박 같은 두메의 삶이
누덕밑에서 어지러운 꿈자리 펴는
밤에도 4월의 한밤!
물레방아소리도 그쳤다-
마지막 물레방아소리…
굶주리는 마을을 조상하듯
밤새 개울물줄기 외로이 부여잡고
목놓아 흐느껴울던 그 소리…
그래도 두메의 외딴 오막살이 한 채엔
이 밤이 삶의 밤, 투쟁의 밤-
철호와 꽃분이
마지막 선포문 찍는다.
이제 백부만 더 찍으면 그만,
래일 아침엔 철호 떠나리
이때-
밖에서 가벼운 발자취소리-
온몸이 바늘이 돋는 듯,
보장 내린 창밖에서
수직 서던 아버지의 숨겨운 소리-
≪꽃분아! 불 꺼라!≫
캄캄한 방안,
어느새 철호는 등사기와 선포문 안고-
≪꽃분이! 뒤문 여우!≫
그러나 벌써 무거운 발자국소리 들렸다-
가슴을 으스러뜨리는 발자국소리.
심장이 골풀이치다 기절한 듯-
꽃분이 한자리에 서 있다
≪나가면 체포된다!≫-머리 속에 언뜻,
≪어쩔가?≫ 순간은 천년인 듯!

7

다음 순간…
신념과 압력에 찬 꽃분의 말-
≪철호 이불 쓰고 눕소!
아버지도 정주에!≫
어느새에 자리 펴지고
철호도 등사기도 삐라도
이불밑에 들었다.
밖에서 건방진 순사의 반말-
≪여보 령감! 자나?≫
≪……≫
≪이 두상 웬 잠을!≫
≪그게 뉘기요?≫
꽃분의 목소리 잠내 난다.
허면서도 그는 저고리 벗었다.
창문에 포장 살짝 벗기며-
≪가만 있습소… 불을 켜고…≫
≪아뿔싸, 등잔 쏟았네!≫
(등잔은 걸린 대로 있었다)
≪에그! 석유냄새야!≫
(등사유냄새였다)
빤해진 창문에 비친 그림자-
또렷이 나타난 처녀의 젖가슴
그것은 순사의 눈뿌리 뺐다.
능청스런 꽃분의 말-
≪가만 있습소… 내 옷 입고…≫
주섬주섬 방안에 흘려진 선포문
철호의 이불 속에 들었다.
≪나리님, 들어옵소≫
꽃분이 문 연다.

8

≪에잇! 냄새… 이건 누구야?≫
≪내 저의 새서방이요…≫
≪새서방? 너 시집 가?
계집년이 초저녁부터 끼고 누워…≫
≪나리님두… 초저녁이라니…≫
꽃분이 웃으며 말한다.
≪잡말 말고 두상에게 일러!
래일 아침 주재소로 오라구≫
아니꼽게 방안을 훑어보고
휙 돌아서는 순사,
그 발자취소리도 사라졌을 때
불붙는 낯을 두 손으로 막으며
꽃분이 주저앉는다
감격에 말없이 일어선 철호에게
≪아이고 참! 용서하옵소!≫
머리숙이고 부엌으로 나간다.
방안에 홀로 남은 철호
감격에 떨리는 입술로
≪꽃분동무!≫
맘속으로 부르짖고
맘속으로 합장하고, 무릎 꿇고-
≪참다운 전우여!
이 나라의 귀여운 딸이여!≫
밤은 깊어도 가누나
창문을 사이 두고
밤은 깊어깊어 한밤에 드누나…
이 한밤
철호 길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