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편집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수백만 소년들이여! 나는 이제부터 무척 재미나는 이야기를 여러분께 하여 드리고자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슬프고 눈물 나는, 그런 불쌍하고도 가련한 이야기 보다는 용감하고, 무시무시하게 무섭고, 자릿자릿하게 마음이 안타깝고, 양손에 땀을 쥐어 가면서 읽어야 할, 그런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줄로 믿고 다음과 같은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것은 세계 각국의 크나큰 도회지란 도회지에는 반드시 나타나서 나라의 보배를 훔쳐 가고 그것을 방해하는 자는 용서치 않고 죽여 버리는 무서운 백가면의 이야기입니다.

백가면은 온몸에 치렁치렁한 기나긴 흰 망토를 입고 얼굴에는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해골을 그린, 역시 하얀 가면을 썼습니다.

그렇게 온몸을 하얀 복장으로 감추어 놓았으니 그것이 대체 누구인지 백가면의 얼굴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는 백가면을 인도 사람이라고도 하고 또 누구는 중국 사람이라고도 하고, 독일 사람이라는 이도 있고 미국 사람이라는 이도 있으나 어느 사람의 말이 맞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백가면은 자기가 훔쳐 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지 훔쳐 갈 수가 있는, 사실 놀랄 만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며 또 어느 날 어느 시에 무엇을 훔쳐 가겠다고 미리부터 편지나 전보로 통지를 하는 법입니다.

그래, 백가면으로부터 그러한 대담하고도 무서운 편지를 받은 사람은 치를 부들부들 떨며 경찰관이라든가 유명한 탐정을 여러 사람 데려다가 집을 삥 둘러싸고 백가면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틈으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시간만 되면 백가면이 훔쳐 가겠다고 통지해 놓은 물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야 맙니다. 하늘로 올라갔는지 땅속으로 들어갔는지 그것은 참으로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신문에는 거의 날마다 백가면의 무서운 이야기가 실리어 있습니다.

전 세계는 이 백가면의 이야기로 가득 찼었습니다.

“백가면이 이번에는 영국 런던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미국 뉴욕에 나타났다!”

“프랑스 파리에 나타났다!”

세계의 신문은 그렇게 떠들기를 마지않았습니다. 그리고 백가면이 나타나면 그 나라에서 제일 값지고 귀중한 물건을 도적하여 갑니다. 금은보배라든가 나라의 비밀 서류라든가……

이렇게 서양서만 떠들고 있던 백가면이 우리 동양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이 돌았습니다. 그러더니, 약 한 달 전에 백가면은 드디어 중국의 국제 도시 상해로 들어왔다고 하니 여기서 더 큰 두려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백가면이 우리 한국으로 들어오면 어찌하나?”

“큰일 났다!”

“이 일을 어찌하나!”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수군거리며 백가면의 무서운 이야기로 해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로 두어 주일 전에 한국서 제일가는 어느 신문사에 백가면으로부터 한 장의 편지가 왔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짤막한 편지였습니다.

〈나는 한 주일 안으로 서울로 갈 터이니 그리 알아라. ―백가면―〉

마침내, 무서운 백가면이 우리 서울로 온답니다. 사람들은 큰일 났다고 떠들며 간이 콩알만큼 되었습니다.

그렇게도 번화하던 종로 네거리는 해만 지면 사람의 발자취가 딱 끊어지고 어린애들은 이부자리 속에서 벌벌 떨고만 있습니다.

하루 지나고 이틀 지나고 어느새 한 주일이 지나갔습니다.

“언제쯤 백가면이 나타나나? 과연 백가면은 서울로 오는가, 안 오는가?”

사람들은 무서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백가면이 오기를 기다리는 듯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아, 백가면은 마침내 서울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서울 장안을 마치 물 끓듯이 뒤집어 놓았습니다.

안국동에 사는 어느 부인이 밤중에 뒷간에 가노라니까 컴컴한 담 밖으로 머리에서부터 발등까지 하얀 망토를 느린 수상한 그림자가 쑥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얼굴에는 해골의 가면을 쓰고 역시 하얀 말을 타고서 말입니다.

그 부인은 깜짝 놀라 그만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는 밤중에 말굽 소리만 들리면,

“백가면이 아닌가?”

하고, 사람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서울에 있는 경찰이란 경찰은 모조리 몰려나가 백가면을 잡으려고 애를 썼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 날 밤 백가면은 돌연히 공학박사 강영제 선생을 붙들어 갔습니다.

이 한 편의 이야기는 강 박사의 아들 강수길 소년이 동무 박대준 소년과 탐정소설가 유불란 선생의 힘을 빌려 백가면의 손으로부터 아버지를 구해 내고자 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강 박사 편집

수길의 아버지 강 박사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발명가이며 우리 한국이 충심으로 아까워하는 둘도 없는 학자입니다.

거의 예순이 가까운 강 박사는 위턱 아래턱 할 것 없이 허연 수염이 길게 나고 그의 우렁찬 음성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엄숙한 기분을 갖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늦게 낳은 수길 소년을 강 박사는 무척 사랑하셨고,

“위대한 사람이 되어라.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조금도 겁을 내지 말고 용감히 싸워라. 그러면, 너는 우리가 자랑할 만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고, 강 박사는 항상 수길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수길에게는 대준이라는 국민학교 5학년인 친한 동무가 있었습니다. 수길은 대준을 퍽 좋아하였고 대준이도 수길이를 무척 사랑하였습니다.

이 두 소년은 아침에는 같이 학교에 가고 저녁에는 같이 학교에서 돌아오고 할 때까지 같이 놀고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준은 수길네 집 행랑방에서 사느니만큼 퍽 가난하였고, 또 대준이의 아버지는 10년 전 대준이가 네 살 먹었을 때에 외국으로 장사하러 다니다가 그만 인도양 셀론도 근방에서 무서운 해적을 만나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직까지 소식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 박사는 대준네 모자를 대단히 불쌍히 여기어서 비록 행랑이라 할지라도 깨끗한 방을 주어 자기 아들과 같이 사랑하고 학교에도 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강 박사가 돌연 무서운 백가면에게 붙들리어 갔다니 이 일을 어찌하여야 좋겠습니까?

강 박사는 1년이면 태반은 집에 있지 않고 황해에 가까운 어느 해변에다 연구소를 지어 놓고 거기서 어떤 신기한 기계를 발명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기계인지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이 넓은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놀랄 만한 훌륭한 기계라는 것입니다.

그 기계가 어떻게 신기롭고 어떻게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여러분은 이 백가면의 이야기를 끝까지 읽으면 누구보다도 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 하고, 강 박사가 어떻게 백가면에게 잡히어 갔는지, 이제부터는 그것을 이야기하여 보기로 합시다.

강 박사가 황해 해변 연구소에서 연구를 하다가 사랑하는 수길과 대준의 얼굴도 볼 겸 해변 생활이 너무나 쓸쓸해서 얼마 동안 사람 구경도 할 겸 서울 가회동 자기 집으로 돌아온 것은 바로 지금부터 한 주일 전이었습니다. 수길 소년은 어머니 옆에서 잠도 안 자고 기다리면서,

“어머니, 아버지 오시거든 무엇을 사 달랄까? 나는 구경 데리고 가 달랄 테야.”

하고, 말하니 어머니는,

“구경? 저 활동사진 구경 말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아녀요. 활동사진 구경 가면 학교에서 책망을 들어요. 나는 저 곡마단 구경 가달랄 테야.”

“곡마단이 어디 왔니?”

“장충단 공원에 왔대요. 무척 재미있대요. 요술도 하고 줄타기도 하고 말도 타고 공중 비행도 하고. 그리고 이번에 온 곡마단은 세계에서도 엄지손가락 가는 곡마단인데 거기는 별별 각국 사람이 다 있다나요. 아프리카 토인도 있대요. 난 아버지 오시거든 같이 구경 갈 테야. 어머니는 안 가셔요?”

“나는 그만두겠다. 너나 가 보아라.”

그 이튿날 아버지가 오셨습니다. 아버지가 오시자마자 수길이는 곡마단 구경 가자고 졸라댔습니다. 아버지는 허연 수염을 내리 쓸며,

“그렇게 가고 싶거든 오늘 밤에 가자!”

하고, 한마디로 승낙하였으니 수길 소년의 기쁨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일찍 저녁을 먹고 강 박사는 수길이, 대준이 두 소년을 데리고 장충단 공원에 온 곡마단으로 갔습니다. 수길이는 어디를 가든지 자기가 기르는 비둘기를 데리고 가고, 대준이는 개를 데리고 가는 법입니다.

이리하여, 두 소년은 기쁨에 날뛰는 마음으로 제각기 비둘기와 개를 한 마리씩 품에 안고 자동차를 타고 곡마단 구경을 갔습니다.

곡마단은 퍽 재미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그네에서 저 그네로 공중을 날아다니는 공중 비행이 제일 재미있고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네를 타는 사람은 가슴에 털이 부수수하게 난 서양 사람이라나요. 또 한 가지 재미있고 무서운 것은 중국 옷 입은 사람의 칼 던지기였습니다. 그것은 널빤지 앞에 사람을 세워 놓고 이편에 선 사람이 저편 널빤지 앞에 선 사람을 향하여 시퍼런 칼을 자꾸만 던집니다. 칼은 사람에게 맞을 듯하면서도 맞지는 않고 어깨 위로, 옆구리 아래로 살살 기어들며 판자에 툭툭 꽂힙니다. 칼을 던질 때마다 사람들은 바로 자기 가슴에 칼이 박히는 것같이 마음이 섬뜩하고 조여듭니다.

곡마단을 나왔을 때는 벌써 열두 시가 넘은 밤중이었습니다.

그때 수길이는,

(백가면이 나오면 어찌하나?)

하고, 가슴이 덜컥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옆에 계시고 또 대준이도 있는데 하고 졸이는 마음을 참았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 가고 하늘은 먹물을 부은 듯이 캄캄한 어둠에 싸여 있습니다.

바늘 끝 같은 별만이 허공 저편에서 반짝이더니 이제는 그것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수길이네 부자와 대준을 태운 자동차는 장충단에서 가회동을 향하여 달아나고 있습니다. 장충단 앞에는 그래도 구경꾼들이 웅성웅성 머물고 있었으나 자동차가 동대문을 지나 종로로 가는 행길에는 사람이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고 컴컴한 거리거리는 죽은 듯이 고요히 잠들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백가면이 무섭지 않으셔요?”

하고, 수길이는 물었습니다.

“수길이는 좀 무서운 모양이로군?”

하고, 아버지는 허허 웃었습니다.

“아녀요. 무섭지 않아요.”

수길이는 무서우면서도 그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옆에 앉았던 대준이는 팔뚝을 한 번 걷으며,

“무섭긴 뭐가 무서워! 백가면이 나오면 내가 붙들어 버려야지!”

하고, 검둥이(개 이름)의 머리를 두어 번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아, 바로 그때입니다. 자동차가 종로 네거리에서 안국동으로 돌아서려고 한 바로 그 순간입니다.

“악!”

하고, 운전사가 자동차를 갑자기 정거하지를 않겠습니까?

아, 보셔요! 자동차 앞에 앞발을 공중으로 쳐들고 이를 갈고 있는 백마를! 그리고 무서운 해골의 가면을 쓴 말 위의 백가면을!

강 박사는 놀라서 수길과 대준을 껴안았습니다마는 백가면은 나는 새와도 같이 빠른 솜씨로 강 박사 가슴에다 권총을 겨누고 자기의 말에 태워 가지고는 어둠 속으로, 삼청동 방면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운전사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백가면의 뒷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그러나 수길과 대준은 용감하게도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습니다.

“운전사님! 저 백가면의 뒤를 따라 주셔요!”

“안 됩니다. 따라가면 안 됩니다!”

하던 운전사는 돈을 얼마든지 주겠다는 바람에 드디어 자동차를 몰아 백가면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추격 편집

아버지를 무서운 백가면에게 빼앗긴 강수길 소년은 떨리는 목소리로,

“운전사님! 저 백가면의 그림자를 놓치지 말고 따라 주셔요. 빨리, 빨리!”

하고, 또 한 번 고함을 쳤습니다.

박대준 소년도 핏기없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운전사님! 내 저금통장에 칠 원 오십 전이 있습니다. 그것을 죄다 드릴 터이니 좀 더 빨리 자동차를 몰아 주셔요!”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운전사는,

“그러나 만일 백가면이 피스톨로 쏘면 어찌합니까. 그러니, 너무 가까이 따라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하고, 대답하면서 백가면의 뒷모양을 놓치지 않을 만큼 속도를 늦추어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컴컴한 거리에 실과 같이 뻗친 자동차의 두 줄기 불빛, 그 불빛 맨 끝에 백가면이 탄 흰 말이 꼬리를 쳐들고 쏜살같이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깊이 잠든 거리에 말굽 소리와 자동차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수길과 대준은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앉았다 일어섰다 하면서,

“아버지! 아버지!”

“강 선생님! 강 선생님!”

하고, 발버둥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준의 품 안에서 컹컹, 컹컹 하고 소리를 높여 짖고 있는 검둥이도 아마 주인의 위험을 아는 모양인지 양 귀를 뾰족 세우고 두 눈을 커다랗게 떴습니다. 그러나 수길의 품에 안긴 비둘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빨간 눈을 도록도록 하고 있을 뿐이지요.

안국동을 지나고 중앙청을 지난 백가면은 삼청동 공원으로 올라갔습니다. 불빛에 나타나는 백가면의 긴 그림자가 우거진 숲 사이로 번개같이 내닫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두려웠으나 수길과 대준은,

“아버지를 구하자!”

“강 선생님을 구하자!”

는 일심으로 점점 용기가 용솟음침을 가슴 속에 깨달았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저 무섭고 흉악한 백가면을 붙들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두 소년은 이렇게 서로서로 부르짖으며 백가면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과연 서양서도 잡히지 않은 저 백가면이 수길과 대준이 같은 어린 소년에게 잡힐는지 안 잡힐는지 그것은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삼청동 공원을 한 바퀴 삥 돌고 난 백가면은 이번에는 가회동 골목을 거쳐서 또다시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대관절 백가면의 집은 어딜까?”

하고, 수길이가 물으니 대준은,

“글쎄, 나는 산속에서 사는 줄만 알았더니…….”

하고, 이상하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백가면이 시내 어디서 산다면 경찰들의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겠는데…….”

백가면이 창경원 앞으로 해서 동소문을 지나 종로 5가를 거쳐 바로 동대문을 향하여 달아나고 있던 그때입니다.

“탕!”

하고, 요란한 소리가 깊은 밤거리를 울리었습니다. 수길과 대준은 놀라서 가슴이 덜컥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요?”

하고 두 소년이 고함을 치니,

“타이어가 터졌습니다.”

하는 운전사의 대답과 함께 찌걱찌걱 하는 소리를 내며 자동차는 그만 멎어 버리고 말았으니, 강 박사를 구하고자 손바닥에 땀을 쥐어 가면서 따라가던 수길과 대준이야 오죽이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운전사와 두 소년은 자동차에서 내려 회중전등으로 자동차 바퀴를 비추어 보니 마치 커다란 압정과 같은 쇠못들이 수없이 길 가운데 널리어 있고 그중 몇 개가 타이어에 박혀 있었습니다.

“백가면의 장난이다!”

“그렇다! 백가면이 뿌린 못이다!”

그것이 백가면의 장난인 줄을 그들은 곧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강 박사를 태운 백가면의 말은 캄캄한 동대문 쪽으로 비조와 같이 달아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 안 될 수길과 대준의 가슴이야 오죽 탔겠습니까. 발버둥을 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의 그림자는 볼래야 볼 수 없는 밤 새로 두 시였습니다.

대준 소년은 백가면이 사라진 동대문 쪽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운전사님! 아저씨는 곧 파출소로 가서 강 박사가 백가면에게 붙들려 갔다는 보고를 해 주셔요. 그리고 수길아!”

하고 대준은 수길의 손목을 꽉 잡으며 흥분에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수길아! 너는 유 선생님을 언젠가 길거리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지?”

“저 유불란 선생님 말인가?”

“그래, 그래. 탐정소설가 유불란 선생님 말이다.”

“알고말고! 접때도 라디오로 재미나는 탐정 소설 이야기를 방송하셨지?”

“그래, 그래! 그 선생님 댁이 바로 태평로 XXX번진데 너는 이제 곧 선생님 댁을 찾아가서 오늘 밤에 일어난 이야기를 자세히 하고 아버지를 백가면의 손으로부터 구해 달라고 여쭈어! 우리 한국에서 무서운 백가면을 잡을 사람은 유불란 선생밖에는 없단 말이야.”

“그럼, 대준이 너는?”

“나는 검둥이를 앞세우고 백가면의 뒤를 따를 테야.”

“그럼, 다녀오마! 주의해라.”

“내 걱정은 그만두고 빨리 가거라, 응?”

그리하여, 수길과 대준은 힘 있게 한 번 악수를 한 후에 서로 헤어졌습니다.


유불란 선생 편집

유불란 선생은 아직 독신이었습니다. 선생이 어찌나 재주가 있고 탐정을 잘 하는지 그것은 저번 검찰청에서 돈은 얼마든지 드릴 터이니 와서 일을 좀 보아 달라는 편지를 받은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실상으로 탐정 노릇을 하는 것보다도 한가히 집에 앉아서 재미나는 탐정소설을 쓰는 것이 더 취미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선생은 또 어린 소년 소녀들을 매우 귀여워하고 사랑하시어서 근방에 있는 아이들은 하나도 선생님을 모르는 애가 없었으며, 공일날마다 선생은 아이들을 자기 집에 모아놓고 서양, 동양 할 것 없이 재미나는 이야기는 무엇이든지 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대준 소년이 유불란 선생을 잘 아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었으며 공일날이 되기를 손꼽아 가면서 기다리다가 어느 때는 조반도 먹을 새 없이 선생님 댁으로 뛰어간답니다.

수길이도 한 번 선생님을 뵈었지요. 언젠가 대준이와 함께 종로 네거리를 나가노라니까 대준이가,

“저분이 유불란 선생이다.”

하길래 보니까 키가 크고 몸집이 늠름한 신사 한 분이 걸어오다가,

“음, 대준군인가. 공부 잘 하는가?”

하고, 대준의 머리를 쓸어 주시길래 수길이도 인사를 하였습니다.

“저 강 박사가 수길이의 아버지여요.”

하고, 대준이가 소개를 하니,

“음, 그러냐! 나도 몇 번 만나 뵈었지마는 강 박사는 참 훌륭한 분이지. 이제 얼마만 있으면 세계에서 제일가는 발명을 하실 분이지. 그러니, 수길군도 아버님께 지지 않을 만큼 공부를 잘 해야만 될걸.”

하고, 수길이 어깨를 툭 치셨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대준이와 헤어진 수길은 태평로 유불란 선생 댁을 향하여 달음박질해 가다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집에 계신 어머니가 자기들이 돌아오기를 얼마나 걱정하면서 기다리실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화를 할래야 할 곳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수길이는 전등불이 반짝이고 있는 전봇대 밑으로 뛰어가서 수첩장을 한 장 찢어가지고 거기다가 연필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어머님, 어머님은 지금 저희들을 기다리며 얼마나 걱정을 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또 한 가지 걱정스러운 일을 어머님께 말씀드려야 되겠습니다. 어머님, 놀라시지 마셔요. 아버지께서 저희들하고 곡마단 구경하고 돌아오시는 길에 저 무서운 백가면에게 붙들리어 가셨습니다. 대준이는 지금 검둥이를 앞세우고 백가면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언젠가 어머님께 말씀드린 유명한 탐정소설가 유불란 선생님 댁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어머님, 아무런 걱정 마셔요. 유 선생님은 아버님을 구해 내고야 말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밤 새로 두시 반 수길이 올림〉


이렇게 쓴 종잇조각을 꽁꽁 다져서 실오라기로 비둘기 다리에다 맨 뒤에 수길이는 한 번 비둘기 머리에다 자기 뺨을 비볐습니다.

“빨리 가거라!”

하고, 컴컴한 공중에 비둘기를 놓아 주었습니다.

비둘기는 수길이 머리 위에서 한 바퀴 삥 돌고 난 후에 가회동을 바라보고 화살같이 날아갔습니다.

“유불란 선생님만 댁에 계시면…….”

그런 생각을 한 아름 가슴에 품고 수길 소년은 기진맥진하도록 뛰었습니다.

태평로에 가서도 수길은 한참이나 돌아다니다 겨우 유 선생님의 댁을 찾았습니다. 찾아 놓고 나니, 아아 이 얼마나 딱한 일입니까.

유불란 선생은 한 사흘 전에 어디로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언제 돌아오실는지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억제해 가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멍하니 서 있는 수길 소년에게 유 선생님 댁 가정부가 이상한 편지를 한 장 내주면서,

“도련님, 이 편지가 어디서 왔는지 좀 봐 주우. 오늘 저녁에 온 편진데요.”

하는 소리에 수길은 편지를 받아들고 겉봉을 읽어 보다가,

“앗! 백가면! 백가면이 보낸 편지다!”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가정부도 깜짝 놀라며,

“뭐, 백가면?”

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빨리 뜯어 봐 줘요! 선생님이 혹시 백가면에게 붙들리지나 않았는지……. 아이구, 무서워라!”

그래서 수길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뜯어 펴들었습니다.

편지에는 이런 무서운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유불란! 나는 네가 유명한 탐정 소설가며 또 한편 한국에서 제일가는 명탐정이라는 말을 들었노라. 그러나 유불란! 미리부터 네게 알려 두노니 네가 만일 나의 하고자 하는 일을 손톱만큼이라도 방해한다면 나는 네 목숨을 빼앗고야 말 것이다. 목숨이 귀하다고 생각하면 나의 일을 방해치 말지어다.

백가면으로부터〉


아아, 유불란 선생에게 이러한 무서운 협박장을 보낸 백가면이란 대체 어떠한 놈일까요? 백가면은 무슨 이유로 아버지를 붙들어 갔을까요? 그리고 백가면의 뒤를 따라간 대준은 어떻게 되었는가요……

이러한 의문이 한꺼번에 떠오르니 수길 소년의 가슴은 막막하고 안타까웠습니다.


비밀수첩 편집

백가면으로부터 온 무서운 협박장을 읽고 난 수길이는 일순간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머뭇머뭇하고 있었습니다.

(아니다! 이렇게 무서워만 할 때가 아니다! 백가면을 잡아야만 한다! 아버지를 구해야 된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음을 마지아니한 수길이는 무서워서 벌벌 떨고만 있는 가정부에게,

“나는 이 협박장을 가지고 이제 곧 경찰서로 갈 테니 만일 선생님께서 돌아오시거든 우리 아버지가 저 무서운 백가면에게 붙들리어 갔다고 전해 줘요!”

하니 가정부는 또 한 번 깜짝 놀라면서,

“뭐, 저 강 박사님께서요! 저런, 저런…….”

하는 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면서 수길이는 기운차게 대문을 차고 거리로 뛰어나왔습니다.

뛰어나와 보니 수길이는 경찰서까지 갈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행길에는 이 골목 저 골목 할 것 없이 개미 한 놈, 물 한 방울 샐 틈도 없이 정복한 순경이며 사복한 형사들이 엄중히 지키고 있었던 때문입니다. 아마 아까 자동차 운전사가 파출소로 가서 백가면이 강 박사를 잡아갔다는 보고를 한 까닭이겠지요.

“누구냐?”

하고, 고함을 치면서 정복한 순경 한 사람이 수길의 팔목을 꽉 붙잡았습니다.

“강수길이오.”

하고, 수길이는 자기가 바로 백가면에게 잡혀간 강 박사의 아들이란 것과 아버지가 어떻게 백가면에게 붙들리어 갔다는 사실을 세세히 말한 후에 백가면으로부터 유불란 선생께 온 편지를 내주었습니다. 순경은 편지를 읽어 보더니,

“뭐, 백가면?”

하고, 놀라며 눈을 둥그렇게 뜨고 편지를 분주하게 상관한테 전한 후에 수길을 가회동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수길이가 집에 돌아온 것은 어느덧 동쪽 하늘에 먼동이 훤하게 트기 시작하였을 때입니다.

수길이가 비둘기 발목에 매어 보낸 편지를 받아 본 수길이 어머니는 오죽이나 걱정하였겠습니까. 잠 한잠 자지 못하고 기다리던 아들 수길의 목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리자마자,

“에그머니나! 수길이, 너 이제야 오니? 아버지는? 아버지는?”

하면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어머니의 슬퍼하시는 모습을 보니 수길이도 그만 맥이 탁 풀리며 여지껏 참아 오던 슬픔이 가슴 속으로 물밀듯이 복받쳐 올라옴을 느꼈으나 수길이는 그것을 꾹 참고 자세한 이야기를 어머니께 하여 드린 후에 어머니의 손목을 부여잡고 말했습니다.

“어머니! 아무 걱정도 마셔요. 제가 기어코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습니다. 아아! 유 선생님만 집에 계시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수길이는 긴 한숨을 푸 하고 쉬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대준이가 아직 안 돌아왔나요?”

“아직 안 돌아왔다.”

“어떻게 된 일일까?”

“글쎄! 백가면에게 잡히어가지나 않았는지…….”

바로 그때였습니다. 대문이 덜컥 하고 열리기에 보니 대준이가 검둥이를 앞세우고 무척 피곤한 얼굴로 들어오겠지요.

수길이는 마주 쫓아나가면서,

“대준아! 어떻게 됐니?”

하고 흥분한 말투로 물었습니다.

대준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가면은 그만 놓치고야 말았다! 검둥이가 백가면의 냄새를 잘 맡지 못하고 또 강 선생님의 냄새도 그만 잊어버린 모양이야.”

“그래서?”

“그래서, 동대문까지 따라가기는 갔으나 동대문서 어디로 갔는지를 알아야지……. 청량리로 달아났는지 서울 운동장 앞으로 해서 장충단 방면으로 달아났는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래, 어디로 갔었니?”

“그래, 한참 동안 머뭇머뭇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백가면의 소굴이 어느 산속에 있는 것 같아서 그만 청량리로 가 보았으나 어디 있어야지……. 그렇지 않니? 백가면이 서울 장안에 숨어 있겠다고야 어떻게 생각하겠니?”

“그래도 그거야 아니? 백가면은 뉴욕에서도 잡히지 않고 런던에서도 잡히지 않은 무서운 도둑인데. 그리고 변장을 어떻게 잘 하는지 유명한 탐정들도 감쪽같이 속는다는데 뭘 그래.”

“그럼, 너는 백가면이 서울 안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렇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응! 나는 백가면이 산속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다. 북악산, 인왕산, 북한산, 남산 그런 곳에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백가면은 서울 장안에 있다!”

“그럼, 내기할까?”

“그래, 내기하자!”

이리하여, 대준과 수길은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고 굳게 약속하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준이가 이기겠습니까? 백가면이 산속에 숨어 있다고 믿습니까, 서울 장안에 숨어 있다고 믿습니까?

그것은 그만하고 그때 대준이가,

“아, 유 선생님 계시더냐?”

하고, 물으면서 갑자기 무엇을 생각했는지 양쪽 주머니에다 손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래, 수길이가 유불란 선생은 지금 여행을 떠나서 계시지 않는다는 것과 백가면으로부터 무서운 편지가 왔다는 것을 이야기한즉 대준이는,

“뭐, 안 계셔?”

하고, 대단히 낙담한 빛을 띠면서 양복 주머니에서 커다란 수첩을 한 개 꺼내었습니다.

그것은 덮개를 검은 가죽으로 만든 것인데 퍽 귀중한 물품 같아 보이고 덮개에는 금자로 비밀수첩이라고 박혀 있었습니다.

수길이는 단 한 번 보고 그것이 자기 아버지 것인 줄을 알고,

“이거 어디서 났니?”

하고, 물었습니다.

“동대문으로 가는 행길에 떨어져 있는 것을 검둥이가 물고 온 것인데 아마 강 선생님이 백가면에게 붙들려 가면서 이 비밀수첩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행길에다 내던진 모양이야. 이것을 좀 봐!”

대준이는 수첩 맨 첫 장을 펴 놓고 그것을 수길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는 다음과 같은 말이 연필로 난잡하게 씌어 있었습니다.


〈이 비밀수첩을 얻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고 한시바삐 태평동 사는 유불란 씨께 전해 주시오!

강영제〉


협박장 편집

수길이는 그제야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백가면이 왜 자기 아버지를 잡아갔는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백가면은 강 박사를 죽이려고 잡아간 것도 아니요, 돈을 빼앗으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한 개의 이 비밀수첩을 빼앗으려고 강 박사를 붙들어 간 것입니다.

그리고 저 무서운 백가면이 빼앗고자 하는 이 비밀수첩은 대관절 어떠한 것일까요? 강 박사가 자기 목숨보다도 더한층 중히 여기는 이 비밀수첩에는 무엇이 씌어 있으며 무엇이 들어있는가요?

그러나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이 넓은 세상에 강 박사 자신과 유불란 선생, 이 두 사람밖에는 없습니다. 수길과 대준이도 그것이 무엇이며 왜 중대한 것인지를 도무지 몰랐습니다.

수길과 대준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그 비밀수첩을 펴 보았습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글자 한 자 씌어 있지 않은 하얀 백지뿐이었습니다.

아아! 이 백지의 수첩이 어찌 그다지도 중요할까요?

“유 선생님만 계시면 이 모든 비밀을 알 수가 있을걸! 유 선생님은 대체 어디를 갔을까? 백가면이 제일로 무서워하는 사람은 단지 유 선생님뿐이다!”

수길과 대준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수첩만 폈다 접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그 비밀수첩이 지금 강 박사가 황해 어느 해변에서 연구하고 있는 훌륭한 기계에 관한 비밀 서류란 것만은 어렴풋이라도 알 수가 있었으니만큼 유불란 선생이 여행으로부터 돌아오시는 날까지 잘 건사하였다가 드려야만 될 것을 짐작하고, 그러면 이것을 어디다 감출꼬 하고 의논한 결과 서재에 있는 테이블 서랍에다 넣고 자물쇠를 채워 두었습니다.

밖에서는 백가면이 드디어 강 박사를 붙들어 갔다는 호외의 방울 소리가 고요한 아침 공기를 요란히 울리고 있습니다.

경찰관들과 신문기자가 여러 사람 찾아와서 대준과 수길이에게 백가면의 이야기를 세세히 묻습니다. 이리 하여, 그들 두 소년은 몸이 퍽 피곤하였지마는 그래도 조반을 먹은 후에 책보를 끼고 학교에 갔습니다. 그러나 오후에 학교에서 돌아온 수길과 대준은 또 한 번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길이 어머니와 대준이 어머니는 아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애들아! 큰일 났구나! 백가면이, 저 무서운 백가면이 오늘 밤에 우리 집으로 온다누나!”

“이 일을 어찌하노! 에그머니나!”

그렇게 떠들면서 제각기 아들을 껴안으며 온몸을 키질하듯이 떨고만 있었다.

이 벼락같은 말에 수길과 대준이도 일순간 가슴이 덜컥 하고 내려앉으며,

“뭐, 백가면이 우리 집에 와요?”

하고 물으니,

“얘들아, 이것 좀 봐라!”

하면서 수길이 어머니는 한 장의 속달 편지를 꺼내 놓았습니다. 그것은 백가면이 강수길 소년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오늘 밤 꼭 열두 시에 네가 가지고 있는 비밀수첩을 가지러 갈 테니 그리 알아라! 그리고 그 비밀수첩이 완전히 나의 손에 들어오면 강 박사를 무사히 돌려보낼 터이다.〉


이와 같은 편지였습니다. 오늘 밤 꼭 열두 시에 비밀수첩을 가지러 백가면이 수길네 집으로 온다. 아아,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며 대담스러운 일인가!

백가면은 오겠다고 약속한 시간에는 일분일초도 어그러짐이 없이 오는 법이며 또 가져가겠다고 말한 물건은 무엇이든지 가져갈 수가 있는 재주가 있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 아아! 아버지가 중하냐, 비밀수첩이 중하냐? 아버지를 구하려면 비밀수첩을 잃어야겠고 비밀수첩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그 대신 아버지를 빼앗겨야 되겠으니 이 오죽이나 딱한 일입니까!

물론 수길네 모자와 대준네 모자는 비록 비밀수첩을 잃는 한이 있을지라도 강 박사를 백가면의 손으로부터 구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강 박사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냐? 강 박사는 비밀수첩을 자기 목숨보다도 더 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백가면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지 않으냐! 강 박사도 구해 내고 비밀수첩도 빼앗기지 않는 법은 없을까?

“유불란 선생님만 계시다면…….”

두 소년은 또 한 번 한탄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한탄만 하고 있을 바가 아닙니다. 하여튼 경찰의 후원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그들은 곧 경찰서에다 전화를 걸었습니다.

경찰서에서는 수십 명의 경찰관들이 곧 달려왔습니다.

이리하여, 수길네 집은 생쥐 한 마리 샐 틈 없이 경찰관들이 삥 둘러쌌지요. 손에는 총알이 든 권총을 하나씩 쥐고.

그때 대준이는,

“옳지! 수가 있다!”

하고, 혼잣말로 부르짖으며,

“그렇다! 강 박사도 구해 내고 비밀수첩도 빼앗기지 않을 수가 있구나. 제아무리 백가면이 변장을 잘 한다 하여도. ……. 흥! 내가 한 번 백가면을 놀려 먹으리라!”

그리고 대준 소년은 분주스럽게 거리로 뛰어나갔다가 한 시간쯤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는 수길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기 혼자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몰래 서재로 숨어들어 갔다가 한참 만에야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무엇이 기쁜지 한 번 빙그레 웃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대준이가 무슨 꾀를 생각해 냈는지 알겠습니까?

어느덧 해는 지고 사방은 컴컴한 장막 속에 싸였습니다. 여덟 시! 아홉 시! 아홉 시 반! 열 시! 시계는 쉬임없이 약속의 시간 열두 시를 바라고 뚝딱뚝딱 걸어가고 있지를 않습니까.

이제 두 시간만 지나면 저 무서운 백가면이 나타난답니다. 백가면은 어김없이 꼭 열두 시에는 수길네 집으로 온답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십 명의 경찰관들이 권총 하나씩 쥐고 엄중히 지키고 있는 이곳에 과연 백가면은 나타날 것인가, 안 나타날 것인가? 백가면도 귀신이 아니고 사람인 이상 대관절 어떻게 나타나며 어디로 들어와서 저 서재 테이블 서랍에 있는 비밀수첩을 가져가겠다는 말인가요?

그러나 여러분! 꿈에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백가면은 한 번 약속한 물건은 무엇이든지 빼앗아 가고야 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움 편집

강 박사를 붙들어간 백가면이 이번에는 가회동 강 박사네 집으로 비밀수첩을 빼앗으려고 온다는 소문이 마치 날개가 돋친 듯이 서울 장안에 쫙 퍼지자마자 행길에는 사람의 발자취가 딱 끊어져 버리고 텅 빈 전차만이 종로 네거리를 요란하게 왔다 갔다 할 뿐이었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 갑니다. 사람들은 대문을 딱 걸어 버리고 애 어른 할 것 없이 밖에라고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가지요. 얼마나 무서운지 뒷간에도 나가지 못하고요. 요에다 오줌을 싼 애도 많다고 합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저 무서운 해골의 탈을 쓴 백가면이 언제 자기 앞에 쑥 나타날는지 어디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런데 지금 가회동 강수길 소년네 집에서는 백가면이 언제나 오려나 하고 모두들 마른침만 꿀꺽꿀꺽 삼키고 있습니다. 대문 밖과 뜰에는 경찰관들이 지키고 있고 서재에는 수길과 대준, 그리고 경찰서에서 온 임 경감, 이 세 사람이 비밀수첩이 들어 있는 커다란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습니다.

지금 서재 담벽에 걸린 시계가 열한 시를 땡땡 하고 쳤습니다. 이제 한 시간만 지나면 백가면이 올 것입니다.

“오긴 뭘 와! 제아무리 백가면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지키고 있는데.”

하고, 임 경감은 자신이 단단히 있는 듯이 수길과 대준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도 백가면은 오겠다면 꼭 온다는데요.”

하고, 두 소년이 물으니 임 경감은 손에 쥔 권총을 한 번 흔들어 보이면서,

“걱정 마라! 백가면이 오면 이것으로 단번에 쏘아 버릴 테니. 정말 오기만 하라지.”

하고, 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마음으로는 무척 두려워하는 모양인 듯싶어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방 안을 두루두루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책이 가득 끼워져 있는 책장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열한 시 십 분이 되었습니다.

열한 시 이십 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계의 바늘이 열한 시 삼십 분을 가리켰을 바로 그때입니다.

한 대의 자동차가 가회동 골목을 쏜살같이 올라가더니 경관들이 수비하고 있는 수길네 집 앞에서 꾸르륵 하는 소리를 내면서 멎지를 않겠습니까.

자동차가 멎자마자 지키고 있던 경찰관들은 일시에 권총을 겨누고,

“누구냐?”

하고, 고함을 치면서 자동차를 뺑 둘러쌌습니다.

그러나 전등불을 끈 컴컴한 자동차 속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고 다만 사람의 숨결 소리만이 가늘게 들릴 뿐입니다.

“누구냐?”

하고, 또 한 번 고함을 쳤을 때,

“누구긴 누구야, 백가면이다!”

하는 소리에 경찰들은 혼이 빠져서,

“으악!”

하고, 서너 걸음씩 뒤로 움츠러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자동차 안의 전등불이 반짝이고 켜지면서,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누구냐?”

하고, 다시 한번 부르짖으면서 경찰관들이 가까이 달려들었을 때,

“누구긴 누구야! 나를 몰라? 나를? 하하하하…….”

하는 것을 보니 그는 한국의 제일가는 명탐정 유불란 선생이었습니다.

“하, 유 선생님!”

경찰관들은 얼빠진 사람처럼 입을 쩍 벌리고 눈을 커다랗게 떴습니다.

“바보들같이 입은 왜 쩍 벌리고들 있어? 응!”

유불란 선생은 항상 검은 안경을 끼고 자개 수염을 곱게 기르는 법입니다. 지금도 선생은 손가락으로 자개 수염을 한 번 만져 보면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하시다니, 선생님두 원…….”

경찰관들도 어이가 없는 듯이 하하, 하고 웃었습니다.

유불란 선생은 커다란 트렁크를 들고 운전대에서 내려 자동차의 불을 끈 후 경찰관 한 명을 앞세우고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자동차는 선생의 자가용이지요.

서재로 들어가니 수길과 대준은,

“아, 선생님! 여행가셨다 언제 오셨어요?”

하면서 기쁨에 넘치는 가슴을 억제하지 못하여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지금 바로 오는 길이다. 그런데 수길군! 이 얼마나 걱정스러운 일인가! 아버지가 백가면에게 붙들려 갔다니. 그러나 아무런 걱정도 마라. 내가 아버지를 구할 테니.”

하고, 위로의 말을 주면서 수길과 대준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런데 임 경감! 백가면의 소굴이 어딘지 아직 모르오?”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유 선생이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음!”

하고, 유불란 선생은 의자에 걸터앉으며,

“그런데 오늘 밤 열두 시에 저 백가면이 무슨 비밀수첩인가를 가지러 온다는 말을 아까 잠깐 들었는데 그게 대관절 참말이오?”

“네, 참말입니다.”

하고, 임 경감은 대준 소년이 행길에서 얻은 백지의 비밀수첩 이야기를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유불란 선생은 귀를 기울이고 찬찬히 듣고 있더니,

“응, 그런가! 사실 백가면은 무서운 놈이다. 오겠다면 꼭 오고 가져가겠다면 틀림없이 그 시간에 꼭 가져가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 밤에도 열두 시만 되면 백가면이 비밀수첩을 가져갈 테지!”

그리고 방 안을 휘 둘러 봅니다.

“그래도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들어온다는 말이오?”

하고, 임 경감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유불란 선생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기에 백가면이 무섭다지. 사람들이 많다고 못 들어온다면 뭐가 무서울 게 있소? 하여튼 두고 보오! 열두 시에는 백가면이 꼭 올 테니.”

“그러면 유 선생도 백가면을 무척 두려워하시는군요.”

“두렵지 않을 리가 있겠소? 백가면은 참으로 귀신같은 재주를 가진 놈인데!”

수길과 대준은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자기들이 그렇게도 믿고 있던 유불란 선생까지도 이렇게 백가면을 무서워하고, 게다가 백가면의 재주를 칭송까지 하니 백가면이 얼마나 무서운 놈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께도 백가면이 협박장을 보냈답니다. 백가면이 하는 일을 방해하면 죽여 버리겠다고요.”

하고, 수길이가 고하였습니다.

“뭐, 내게도 협박장을 보냈어? 나를 죽이겠다고?”

그렇게 반문하는 유불란 선생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가득 찼었습니다.

시계는 열한 시 사십오 분!

유불란 선생의 얼굴빛은 마치 종잇조각처럼 하얗게 변해 버렸습니다.


밤 열두 시 편집

그때, 대준 소년은 자기가 아까 무슨 꾀를 하나 생각해 냈다는 것을 유불란 선생에게 보고하며,

“선생님! 다른 것이 아니라 강 선생님도 구해 내고 또 비밀수첩도 빼앗기지 않는 수가 있어요. 그것은……”

하고 다음 말을 이으려 할 때,

“대준아, 수길아!”

하고, 수길의 어머니가 문 밖에서 부르는 바람에 대준의 말은 그만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왜 부르셔요?”

하고, 수길과 대준이가 물으니,

“열두 시가 거진 가까왔는데 너희들은 안방에 들어와 있거라. 백가면이 너희들을 잡아가면 어떻게 하니? 어서 빨리 안 나오겠느냐?”

하고, 황급히 재촉하므로 수길과 대준은 그만 안방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때 대준 소년이 자기가 꾸며 낸 꾀를 유불란 선생께 말을 했다면 결과는 더 나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기서 말하지 않더라도 차차 알게 될 것입니다.

두 소년은 안방으로 들어가서 언제나 백가면이 나타나나 하고 기다렸습니다. 유불란 선생까지도 그렇게 무서워하니 강 박사를 구해 낼 희망은 도저히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불안하기가 짝이 없었습니다.

서재에는 지금 임 경감과 유불란 선생이 마주앉아 있지요.

“그런데 대체 비밀수첩은 어디 있소?”

하고 유불란 선생이 물으니,

“이 책상 서랍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수첩 맨 첫 장에, 이 수첩을 얻는 자는 누구든지 유 선생께 갖다 드리라는 말이 씌어 있습니다.”

하고, 임 경감은 열쇠로 서랍을 열고 조그마한 상자에 들어있는 비밀수첩을 꺼내서 테이블에다 놓았습니다.

그러자, 유불란 선생은 상자를 열고 비밀수첩을 펼쳐 보니 그것은 저번에도 말한 바와 같이 아무런 글자도 씌어 있지 않은 하얀 백지 수첩입니다.

“응! 이 백지 수첩이 그렇게도 귀중하단 말이지! 음!”

하고, 다시 상자에다 넣어 놓고,

“그런데 열한 시 오십 분이나 되었는데 아직 백가면이 안 오는구먼.”

하고 중얼거리니 임 경감은 말했습니다.

“오긴 뭘 와요? 공연히 협박하느라고 그랬겠지요.”

“그야 누가 알 수 있소? 아직 십 분이 남았는데.”

“지금까지 안 온 백가면이 십 분 후에 오겠다고야 어디…… 벌써 오십오 분인데요.”

하고, 임 경감은 의자에서 일어나 들창을 열고 컴컴한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내다보니 뜰에도 경찰관, 담 밖에도 경찰관, 대체 백가면이 들어오면 어디로 들어오겠다는 말인가요?

바로 그때입니다! 대문 밖에서 자동차 멎는 엔진 소리가 꾸르륵하고 들리더니,

“누구냐, 누구냐?”

하고 떠드는 경관들의 목소리가 났습니다.

안방에 누워 있던 수길과 대준은,

“백가면이 왔구나!”

하면서 눈을 번쩍 떴습니다.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씀도 듣지 않고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달려 나가 보니, 아아! 이것이 대관절 꿈인가, 생시인가?

대문 밖에는 참말로 꿈인지 생시인지를 알아볼 수 없는 이상하고도 신기로운 일이 한 가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보셔요! 지금 자동차에서 내리는, 자개 수염을 기르고 검은 안경을 쓰고 커다란 트렁크를 든 신사를 자세히 살펴보셔요!

“유불란 선생이다!”

수길과 대준은 그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아아! 이 세상에 유불란 선생이 두 분 계실 리 만무하거늘 이 어찌 된 일이며 어찌 된 까닭인가요. 어느 분이 진짜 유불란 선생이며 어느 분이 가짜 유불란 선생인가요.

그때 둘째 번에 나타난 이 유불란 선생은 입을 쩍 벌리고 멍하니 서 있는 경찰관들을 헤치고 수길과 대준의 앞으로 다가오면서,

“대준군! 군은 내가 틀림없는 유불란 선생이란 것을 증명하여 주기를 바란다. 군은 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이니. 그리고 수길군! 아무런 걱정도 마라. 내가 백가면을 붙들어 버릴 테니. 나는 지금 금강산 여행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다.”

그러나 수길과 대준은 어느 분이 틀림없는 유불란 선생인지를 헤아릴 수 없어서 멍하니 상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경찰관 한 사람이,

“그러면, 들어와서 서로 맞대면시켜 보면 알 거다!”

하는 소리에 수길과 대준은 이 둘째 번에 온 유불란 선생을 서재로 안내하였습니다.

서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니 똑같은 유불란 선생 두 분이 서로 마주 쳐다보면서 잠시 동안 서로 흘겨보는 양은 사실로 신기하고도 한편 무섭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수길과 대준은 오싹하고 몸이 떨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처음에 온 유불란 선생이 나중에 온 유불란 선생을 향하여 벼락같이 고함을 쳤습니다.

“저 놈이 백가면이다! 저 놈이 비밀수첩을 훔치려고 나와 똑같이 변장을 하고 들어 왔다! 여러분, 제 놈을 빨리 체포하여 주시오! 빨리, 빨리!”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경찰관들은 나중에 들어온 유불란 선생을 붙들려고 일시에 달려들었습니다.

“아니다! 여러분, 백가면은 저 놈이다! 여러분이 이제 나를 여기서 붙들어 버리면 저 무서운 백가면은 영원히 놓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부르짖으면서 나중에 온 유불란 선생은 있는 힘을 다하여 경찰관들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방 안으로 쫓겨 다니면서 말했습니다.

“대준군! 군은 나를 믿어라! 나를 믿고 저 테이블 위에 있는 비밀수첩을 속히 감춰라!”

그 말을 듣자마자 처음에 온 유불란 선생은 빠른 솜씨로 비밀수첩이 들어 있는 상자를 집어다가 옆에 서 있는 수길의 양복 주머니에다 넣어 주면서,

“수길아! 너는 이것을 가지고 속히 달아나거라! 백가면은 저 놈이다! 저 놈이 백가면이다.”

하길래 수길은 어리벙벙한 대로 수첩이 들어 있는 곽을 주머니 위로 꽉 부여 쥐고 황급히 서재를 뛰어나와 안방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푹 쓰고 숨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서재에서는 아직도,

“저 놈이 백가면이다!”

“아니다! 저 놈이 백가면이다!”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들창이 깨어지는 소리, 테이블이 쓰러지는 소리와 아울러 경관들의 아우성 소리가 벽력같이 쏟아집니다.

그때 임 경감의 우렁찬 소리가,

“두 놈 다 붙들어라!”

하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임 경감의 명령하는 소리가 입에서 떨어지자 경찰관들이,

“앗!”

하고 놀라는 소리가 일시에 요란히 들려 왔습니다. 그때 서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안방으로 들어온 수길 소년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수길이가 문틈으로 가만히 내다보니, 아아! 그것은 너무나 무서운 광경이었습니다.

“으악! 백가면이다!”

하고, 부르짖으며 주머니에 넣은 수첩 곽을 꽉 쥐고 어머니 품 안에 꼭 안기었습니다.

여러분! 수길 소년은 문틈으로 대체 무엇을 보았겠습니까.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해골의 탈을 쓰고 하얀 망토를 입은 저 흉악한 백가면이 서재 문을 벙싯하게 열고 컴컴한 복도로 쑥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어디선지 열두 시를 치는 시계 소리가 떼―o 떼―o 하고 방 안을 올립니다.

“가만 있자?”

수길은 열두 시를 치는 시계 소리를 들은 순간, 문득 주머니에 넣었던 수첩 곽을 꺼내어 열어 보았습니다.

아아! 신기한 일이로다! 이상한 일이로다!

조금 아까까지도 들어 있던 비밀수첩이 대체 하늘로 올라갔는가요, 땅 속으로 들어갔는가요.


맹인 지옥 편집

아아! 과연 열두 시가 되자마자 저 흉악한 백가면은 어김없이 비밀수첩을 빼앗고야 말았습니다.

수길이는 빈 갑을 던지고 어머니 품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또다시 문틈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서재 문을 열고 컴컴한 복도로 쑥 나온 백가면은 뒤를 힐끗힐끗 돌아다보면서 쏜살같이 뒷문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런데 대관절 서재에 있는 경찰관들은 무엇을 하고 있노? 왜 저리 떠들기들만 하는고? 유불란 선생, 임 경감, 그리고 대준이, 다들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수길이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서재에서는,

“백가면이다!”

“백가면을 잡아라!”

“처음에 온 유불란이가 백가면이다!”

하는 소리들이 소란하게 들려 올 뿐이지요.

그런 소리를 듣자마자 수길 소년은,

“뭐, 처음에 온 유불란 선생?…… 아, 그랬었나?”

하고, 고함을 치면서 붙잡는 어머니의 팔뚝을 물리치고 서재로 뛰어가 보니, 이 무슨 광경인가요.

유불란 선생 이하 여러 경관들은 저마다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마를 서로 부딪는 사람, 머리로 담을 받고 나가 넘어지는 사람들로 그것은 마치 무슨 이야기에 나오는 소경 지옥과도 같은 광경이었습니다.

수길이는 유불란 선생에게로 뛰어가며,

“유 선생님! 백가면은 이제 방금 저 뒷문으로 빠져나갔습니다.”

하고 조급히 보고를 하니 유 선생은,

“그래?…… 그러면, 수길군! 빨리 내 손을 잡아라! 그리고 백가면의 뒤를 따라라! 속히, 속히…….”

그때에야 대문 밖과 뜰을 지키고 있던 여러 경관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와글와글하면서 서재로 몰려 들어왔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백가면은 어디 있어?”

하면서 뛰어들어오는 경찰관들을 향하여 유불란 선생이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앞문으로 들어왔으니 백가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놈은 방금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런데 백가면이 타고 온 자동차는 어디 있는가?”

“대문 밖에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쯤은 백가면이 뒷문으로 해서 대문 밖으로 달음박질을 치고 있을 것이다!”

그때 대문 밖에서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습니다.

“앗! 저것이 백가면이다! 대문 밖에는 경관들이 지키고 있는가?”

“한 명도 없습니다. 죄다 이리로…….”

“뭐, 한 명도 없다니? 빨리 뒤를 따라라!”

“와아!”

하고, 떠들면서 뛰어나가는 경관들의 뒤를 따라 유 선생은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한 손으로 수길의 손목을 부여잡고 쫓아나갔습니다.

그때 앞장서서 뛰어나가던 경관 한 명이 손을 번쩍 들며,

“앗! 저기 가는 저 자동차가 백가면의 것이다!”

하고, 고함을 치는데 수길이가 보니 컴컴한 자동차 안에서 백가면의 흰 그림자가 번쩍이고 있지를 않습니까.

“빨리 타라! 있는 대로 속력을 내어 달려라!”

하고, 유 선생이 명령했습니다.

이리하여, 유 선생과 수길, 그리고 여러 경찰관을 실은 자동차가 좁고 어두운 가회동 골목을 나는 듯이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좀 더 빨리! 보라, 백가면의 자동차는 어떻게나 빠른가!”

사실 백가면이 탄 자동차는 비행기보다도 더 빨리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가회동 골목을 나섰을 때 유 선생은 두 눈을 한참이나 비비더니,

“이젠 됐다!”

하고, 눈을 번쩍 떴습니다.

“선생님, 대체 어찌 된 셈입니까? 어찌 죄다 소경들이 되었어요?”

하고, 수길이가 물으니 유 선생은,

“음.”

하고 분한 듯이 말했습니다.

“경찰관들이 내 말을 듣지 않은 탓이지. 내가 여행을 가고 서울에 없다는 말을 들은 백가면은 나와 똑같은 변장을 하고 바로 여행에서나 돌아오는 듯이 트렁크를 들고 왔거든. 그러나 진짜 유불란인 내가 갑자기 나타났으니까 그놈이 오죽 놀랐겠니?…… 물론 변장도 잘했거니와, 하여튼 저 임 경감이 내 말만 들었으면 뭐…… 그때, 임 경감이 두 놈을 죄다 잡아 버리라고 명령을 내렸을 그때, 그놈이 갑자기 고춧가루를 좌악 뿌렸단 말야.”

“아, 그래서 모두들 소경이 되었군요!”

백가면이 탄 자동차는 지금 안국동을 거쳐서 종로로 달아나고 있습니다. 쫓기는 백가면과 쫓는 유불란, 두 자동차의 거리는 약 백 미터!

“아, 선생님, 백가면의 자동차에서 총알이 날아옵니다!”

수길이는 그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탕, 탕, 탕!”

깊은 밤거리에 들리는 총성.

그때 경찰관 한 사람이 권총을 꺼내 백가면의 자동차를 겨누었습니다마는 유 선생은 그의 팔목을 꽉 잡으며,

“안 된다! 백가면을 죽여서는 안 된다. 사로잡아야 된다!”

하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두 자동차의 거리는 점점 짧아집니다. 백 미터에서 구십 미터, 구십 미터에서 팔십 미터로 사이가 점점 짧아지면 짧아질수록,

“오늘에야 백가면을 잡는다! 유 선생님이 저 무서운 백가면을 잡을 것이다!”

하는 수길 소년의 가슴은 자못 흥분에 뛰놀 뿐입니다.

그때 유 선생은,

“아, 저, 비밀수첩은?”

하고, 물었습니다. 수길이도 그제야 생각이 나서,

“아, 선생님! 그것은 빈 갑…….”

하고 말끝도 채 잇지를 못했습니다.

“뭐, 빈 갑?…… 음!”

“선생님이 그때 대준이더러 빨리 비밀수첩 갑을 감추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때는 벌써 수첩은 없어지고 빈 갑이던 모양이에요.”

“응, 그놈은 제가 백가면이 아닌 듯이 수첩 갑을 군의 포켓에다 넣어 주었던 것이다. 음, 빈 갑!”

“그리고 그놈은 고춧가루를 뿌린 후에 가지고 왔던 트렁크에서 백가면의 가장을 꺼내어 입고…….”

“음,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비밀수첩을 빼앗아야만 한다! 강 박사가 자기 목숨보다도 더 한층 중하게 여기는 그 비밀수첩!”


옥상의 괴인 편집

종로 네거리로 나선 백가면은 곧장 동대문을 바라보고 자동차를 몰았습니다.

동대문에 다다르자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커어브를 돌아 장충단 공원에 온 곡마단 옆으로 해서 캄캄한 남산 공원으로 올라갑니다.

수길 소년은 무섭다는 것보다도 퍽 장쾌하였지요.

“유 선생님이 옆에 계신데 뭐가 무서워. 오늘에야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

수길이가 보니 옆에 앉은 유 선생은 눈 한 번 깜박 않고 앞에 가는 자동차를 뚫어지듯이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탕, 탕, 탕!”

백가면이 쏘는 총 소리는 고요히 잠든 남산 일대를 요란하게 울립니다.

“그런데 선생님. 대관절 백가면의 소굴은 어딘가요? 어떤 곳에 숨어 있길래 그리도 사람의 눈에 띄질 않을까요?”

하고, 수길이가 물었습니다.

“대준이는 어느 산골에 숨어 있다고 그러는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서울 안 어느 구석에 잠겨 있을 것만 같아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셔요?”

“물론 서울 안에 있다!”

“그래요?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셔요?…… 아아, 내가 이겼다, 이겼다!”

“무엇을 이겨?”

“대준이와 저와 내기를 하였어요.”

“무슨 내기?”

“대준이는 산속에 있다고 그러고 저는 서울 안에 있다고 그러고……. 그럼 서울 안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지금 말할 수가 없다. 좀 더 조사해 보지 않으면…… 그러나 분명히 거기 밖에 있을 데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 십중팔구 거기 숨어 있을 것이다.”

“거기라니요, 선생님?”

그러나 다음 말을 기다릴 사이가 없었습니다. 백가면의 자동차는 지금 남산 공원을 한 바퀴 삥 돌아서 분수대 앞을 지나 남대문 거리로 내려가는 비탈길을 쏜살같이 달아나고 있지 않습니까. 수길 일행이 탄 자동차가 남산 턱까지 다다랐을 때는 벌써 백가면은 비탈길을 거의 내려갔을 때였습니다.

“자동차가 부서지든 깨어지든 있는 속력을 죄다 내라!”

유 선생이 미친 듯이 고함을 켰을 때 백가면의 자동차는 왼편으로 급한 커어브를 돌아 컴컴한 남대문 속으로 후딱 들어가는 것이 희미한 전등불에 보입니다.

“남대문로로 들어갔다! 백가면의 그림자를 놓쳐서는 안 된다!”

나는 듯이 비탈길을 내려간 수길 일행이 탄 자동차는 그만 급커어브를 돌 수가 없어서 남대문 오른편, 조선일보사 앞을 한 바퀴 휘잉 돌아 놓고 보니 백가면의 자동차는 벌써 서울역 앞을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거리거리에 지키고 있던 경찰관들이,

“으와!”

하고, 떠들며 따라갑니다.

백가면의 자동차는 사실 미친 것 같았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동차는 전차 정류장 안전지대를 피하지 않고 그것을 떠받고는 한 번씩이나 공중에 떠올랐다가는 내려지곤 합니다. 일직선으로 어디까지나 달아납니다.

그때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쩍 벌리고 백가면의 자동차를 바라보다가,

“아, 아, 아, 앗!”

하고, 이구동성으로 외치지 않으면 안 될 광경이 눈앞에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아아! 어디까지든지 일직선으로 미친 듯이 달아나던 백가면의 자동차는 그만 서울역 현관 콘크리이트 담을 쾅하고 떠받고 나가넘어지는 광경이었습니다.

수길 소년은 이 무서운 광경을 멀리 눈앞에 바라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지요. 백가면의 몸뚱이는 마치 콩보숭이처럼 부스러졌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유 선생은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으니 이 어찌 된 일입니까.

“자동차를 돌려라! 빨리 돌려!”

서울역 앞까지 왔던 자동차는 이 유 선생의 사자와 같은 명령으로 말미암아 휙 돌아섰습니다. 그리고는, 남대문을 향하여 또다시 쏜살같이 달립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하고, 경찰관 한 사람이 물으니 유 선생은 눈앞에 다가오는 시꺼먼 남대문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며,

“빈 자동차다!”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뭐, 빈 자동차예요?”

수길이뿐만 아니라 경찰관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럼 백가면은 어디로?”

“운전사 없는 자동차는 일직선으로밖에는 갈 수가 없다. 백가면의 자동차가 커어브를 한 것이 어디냐? 남산 턱 비탈길을 내려와서 남대문 속으로 들어갈 때다. 그때까지 백가면은 자동차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러면, 백가면이 자동차에서 내린 것은 남대문과 서울역 사이다. 서울역 교차로 앞 안전지대에서 백가면의 자동차는 한 길이나 뛰다가 내려졌다. 운전사가 없는 때문이다!”

“그러면, 어디서 내렸을꼬?”

“물론, 남대문로를 달려갈 동안에 내렸다!”

유 선생은 마치 눈으로 보듯이 자신 있게 딱 잘라 말을 하였습니다.

그때,

“스톱!”

하고, 유 선생이 외쳤습니다. 남대문 앞입니다.

“전부 내려서 백가면을 찾아라! 거기에는 경찰관들이 수비하고 있으니 백가면은 이 근방에 잠복하고 있을 것이다. 남대문을 중심으로 사면 백 미터를 뒤져라! 그 이상 뒤지는 건 헛일이다.”

그리하여, 경찰관들은 남대문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개미 한 놈 샐 틈 없이 찾아보았습니다마는 백가면의 그림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수길 소년의 눈에 이상한 그림자가 하나 눈에 띄었으니 그것은 남대문 지붕 밑 담장덩굴이 우거진 돌담에 무엇인가 허연 그림자가 움직이며 납작 붙어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유 선생님, 저것이 무엇일까요?”

수길 소년은 유 선생의 소매를 약간 잡아당기면서 그렇게 속삭였을 때였습니다. 누군지 알지 못하나 경찰관 한 사람이,

“앗! 백가면이, 백가면이 저 지붕 밑 담장덩굴 속에 엎드려 있습니다.”

하고, 높은 목소리로 부르짖자마자 경찰관들은 저마다 고함을 칩니다.

“백가면이다, 백가면이다!”

“앗! 백가면이 지붕 위로 올라간다!”

“앗! 백가면이 권총을 겨누었다!”

그러자마자 자기가 마침내 발견되었음을 짐작한 백가면은 권총을 휘두르며 남대문 지붕 위로 올라가서 컴컴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마치 마귀와 같이 우뚝 섰습니다. 그리고 멀리 발밑의 경찰관들을 비웃는 듯이 한 바퀴 휘 돌아보았습니다.

아아, 그것이 야말로 무시무시하기가 짝이 없는 광경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해골의 탈을 쓰고 지금 남대문 꼭대기에서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저 백가면은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았습니다.


마주선 권총 편집

보라! 먹물을 부은 듯이 컴컴한 허공중에 높다랗게 솟아 있는 남대문 지붕 위에서 지금 죽은 듯이 날뛰고 있는 진퇴양난의 백가면의 그림자를 보라! 하늘로 올라갈래야 날개 없는 백가면이요, 아래로 내려갈래야 첩첩이 싸인 경찰관입니다.

아아! 제아무리 능란한 재주를 가진 백가면이라 할지라도 이 절박한 위기를 대관절 어떻게 벗어나겠다는 말인가요.

“백가면도 다 살았다!”

“서양서도 잡히지 않던 백가면이 한국에서 잡히누나!”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경찰관들의 수는 점점 늘어가고 남대문은 지금 생쥐 한 마리 샐 틈이 없이 경찰관들로 말미암아 뺑 둘러싸였습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지붕 위로 따라 올라가서 백가면을 붙들려고 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백가면이 휘두르고 있는 권총이 무서운 때문이지요. 물론 경찰관들도 권총을 안 가진 바는 아니나 될 수만 있으면 백가면을 사로잡고자 하는 터이라 함부로 이편에서 쏘아 버릴 수도 없고 해서 경찰관들은 그저 입을 쩍 벌리고 지붕 위의 백가면을 벙벙이 서서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그때서야 겨우 저 맹인 지옥에서 벗어나온 대준 소년과 임 경감, 그 밖의 여러 경관을 실은 자동차가 달려왔습니다. 자동차가 오자마자 임 경감이 뛰어내리면서,

“허어! 백가면도 이젠 기진맥진하였구나!”

하고, 고함을 치고는 유불란 선생을 향하여 물었습니다.

“어째서 백가면을 체포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마치 독 안에 든 쥐가 아닙니까?”

그러나 유 선생은 잠자코 지붕만 쳐다보다가 한 번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어디 잡을 수가 있으면 한번 잡아 보슈. 나는 여기 서서 구경이나 할 테니!”

“못 잡긴 왜 못 잡는다는 말씀이오?”

하고, 임 경감은 외치면서 이번에는 부하를 향하여 부르짖었습니다.

“제군! 제군들 가운데 저 백가면을 붙들어 내릴 용감한 자는 없는가?”

그러나 경찰관들은 서로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웅성웅성할 뿐이지 아무 대답도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수길과 대준은,

“제가 올라가서 붙들겠습니다.”

하고, 손을 번쩍 들고 싶었으나 다음 순간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를 깨달았습니다. 힘도 없고 권총도 쏠 줄 모르는 저희들, 자기들이 만일 총도 쏠 줄 알고 힘도 센 어른이랄 것 같으면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 올라가서 저 흉악한 백가면과 한바탕 싸워 보리라 고 생각하면서 흥분에 넘치는 가슴을 꽉 붙안았습니다.

그때 군중 가운데서 돌연,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하고, 외치면서 사람들을 헤치고 임 경감 앞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동료 중에서도 가장 용감하고 태권도 삼단, 검도 이단인 김 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유 선생은 그때,

“임 경감, 그만두는 것이 어떻소? 공연히 사람을 죽일 필요가 어디 있다는 말이오? 부장이 올라가면 백가면은 물론 단 한방에 쏘아 버릴 것이오. 너무 조급하게 그러지를 말고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지구전을 가지고 백가면과 싸울 수밖에는 없는 것이오. 우리가 가진 단 한 개의 수단은 한시바삐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지요.”

그러나 종내 임 경감은 유 선생의 타이르는 말도 듣지 않고 자기의 말을 꺾는 유 선생을 도리어 불쾌하게 생각하면서, 드디어 김 부장에게 올라가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래, 하는 수 없이 유 선생은 돌담을 기어 올라가는 김 부장에게,

“만일 신변이 위태하거든 백가면을 쏘아라! 쏘되 다른 데는 쓰지 말고 다리를 쏘아라!”

하고, 일러 주었습니다.

수길과 대준은 서로 팔을 꽉 끼고 다음에 일어날 무서운 광경을 상상하고 부르르 몸을 떨었습니다.

용감한 김 부장은 과연 백가면을 붙들 것이냐? 또는 그와 반대로 백가면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냐?

김 부장은 지금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위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올라가다가는 담장덩굴 사이에 납작 엎드리곤 하는 것이 전등불에 희미하니 보입니다.

그런데 대관절 백가면은 자기를 붙들고자 김 부장이 위로 올라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치 동물원 철창 안의 사로잡힌 사자와도 같이 지붕 꼭대기를 이리 왔다 저리 왔다 하면서 사방을 휘휘 돌아다보다가 그만 우뚝 서서 멀리 발밑의 경관대를 묵묵히 내려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김 부장은 잎이 무성한 돌담을 살살 기어 올라가더니 컴컴한 다락 속으로 쑥 들어갔습니다.

아아, 백가면은 대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고? 자기가 서 있는 지붕 밑 다락 속에 김 부장이 숨어들어 간 사실을 아는가 모르는가? ……아는 듯도 하고 모르는 듯도 하였습니다.

수길이는 대준 소년의 몸뚱이를 꽉 부여잡고 가로등불이 훤하게 비치는 지붕 위를 말똥말똥 쳐다보면서 후유하고 긴 한숨을 지었습니다.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대준은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지요.

보라! 다락 오른편쪽에서 비조와 같이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간 김 부장의 용감성을 보라!

그리고 또 보라! 지붕 왼편 속에서 묵묵히 아래를 내려다보던 백가면이 질풍과 같이 휙 하고 돌아서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라!

권총과 권총은 마주섰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다가드는 김 부장과 백가면!

어느 편이 먼저 권총을 쏠 것인가!

사람들의 가슴 속은 마치 풍전의 등화로다!


총에 맞은 백가면 편집

수길과 대준은 어느 편에서 먼저 권총을 쏠 것인가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억제하면서 기다렸으나 총 소리는 한 방밖에 들리지를 않았습니다.

훤하게 바라보이는 높은 지붕 양쪽에서 백가면과 김 부장은 서로 피스톨을 겨누고 언제까지나 마주서 있을 뿐이지요. 그것도 생각하면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김 부장은 될 수만 있으면 백가면을 사로잡으려고 총 쏘기를 주저할 것이며 또 한편 백가면의 마음을 추측해 보건대 그도 될 수만 있으면 사람을 죽이지 않고, 자기의 목적한 바를 달성하고자 하는 태도로 보였던 때문입니다.

아까 수길네 집 서재에서도 백가면은 얼마든지 피스톨을 발사하여 소경된 유불란 선생을 죽여 버릴 기회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언젠가 백가면은 유 선생에게 무서운 협박장을 보내어, 만일 자기의 일을 방해하면은 용서치 않고 죽여 버리겠다고 선언한 일이 있지를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백가면이 유 선생을 죽이지 않은 사실을 되새겨보면 그는 결코 사람의 피를 보는 것을 즐겨하는 악독 무쌍한 살인강도와는 종류가 좀 다른 모양 같았습니다.

그때 높다란 지붕 위에서 김 부장의 고함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백가면! 우리들은 남자다! 권총을 집어치우고 나와 더불어 싸워 볼 용기는 없느냐?”

그러나 백가면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백가면! 용기가 있거든 권총을 던져라!”

그래도 대답이 없습니다.

“백가면!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

세 번째 물었을 때 백가면은 쥐고 있던 권총을 감감히 내려다보이는 행길에다가 휙 하고 던졌습니다. 전차 선로에 툭 하고 떨어지는 권총.

그 순간, 대준 소년과 수길 소년은 전신이 오싹함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무서움에서부터 오는 몸서리가 아니요, 남자다운 용기, 대담 장쾌한 그런 것에서부터 느끼는 극도의 쾌감이었습니다.

“야아, 장하다!”

대준 소년은 불현듯 그렇게 부르짖으면서 수길의 손목을 힘껏 쥐고 흔들었습니다.

“응! 용감하구나!”

수길 소년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자기 아버지를 붙들어간 밉살스러운 백가면이었으나 이와 같은 사지에 빠져서까지도 그만한 용기를 가진 백가면이 한편으로는 무척 부러웠습니다.

순간, 백가면은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엎드려서,

“권총을 던져라!”

하고 외쳤으나 도대체 들은 체 만 체하는 김 부장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가까워집니다. 그때 왼편 벽에 엎드려 있던 백가면이 우뚝 일어서자마자 휙 하고 김 부장에게 달려들었으니 두 사람의 몸뚱이는 높고 높은 남대문 꼭대기에서 이리 몰렸다 저리 몰렸다 한 발자국만 잘못 디디면? …… 아아, 그것은 생각만 하여도 눈앞이 아찔아찔하는 무서운 광경이었습니다.

경관들은 지마다 소리를 높여서,

“김 부장! 김 부장!”

하고 공중을 우러러 고함을 칩니다.

그러는 사이에 백가면과 김 부장의 서로 얽히고설켜진 두 몸뚱이는 지붕 꼭대기에서 처마 끝으로 굴러내려 왔습니다.

“김 부장! 김 부장!”

하고, 소리를 치며 응원하던 경관들도 그만 마른 침만 꿀꺽꿀꺽 삼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몸뚱이는 거의 처마 끝에 다다랐습니다. 두 사람의 다리가, 네 개의 다리가, 처마 끝에서 떨어져 캄캄한 허공중에서 버둥버둥 춤추고 있습니다.

그때, 백가면과 김 부장은 서로서로 자기의 위험을 느끼었는지, 얽히었던 두 개의 몸뚱이가 짝 갈라졌습니다. 백가면이 먼저 일어나 지붕 위로 뛰어올라 갔습니다. 김 부장이 뒤를 따릅니다.

지붕 꼭대기를 왼편쪽으로 뛰어간 백가면은 다음 순간 휙 하니 몸을 날리어 지붕 밑 다락 속으로 들어가자 김 부장도 뒤를 따라 다락으로 내려갔습니다. 다락 안은 컴컴해서 보이지를 않았으나 무엇이라고 서로 외치는 소리, 이리 저리 뛰어 다니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백가면과 김 부장은 암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맹렬히 싸우고 있는 것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때 다락 안에서,

“탕!”

하고 한 방의 총 소리가 요란히 들렸습니다. 총 소리가 나자마자 임 경감은 여러 부하들을 향하여,

“제군! 모두 다락으로 올라가서 백가면을 잡아라!”

하고 사자와 같이 명령을 하니 경관들은 욱 하고 돌담 밑으로 몰려갑니다.

개미 떼같이 돌담을 기어 올라가는 경찰관.

이리하여, 경찰관들이 거의 다락 난간까지 다다랐을 때였습니다.

다락 왼편쪽에서 백가면의 허연 그림자가 쑥 나타나더니 기진맥진한 모양으로 벌벌 기어서 지붕 위로 또다시 올라가서는 다리를 절뚝절뚝하면서 몇 발자국 꼭대기로 걸어가다가 그만 기운이 모자라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백가면이 쓰러진 것을 본 경찰관들은,

“으와, 백가면이 넘어졌다!”

“이제야 백가면을 잡았구나!”

하고, 저마다 고함을 치면서 의기가 만만하여 먼저 올라가기를 다투고 있습니다.

그때 컴컴한 다락 속에서 김 부장이 권총 쥔 손을 난간 밖으로 내두르면서,

“가면의 다리는 꺾어졌다! 빨리 지붕 위로, 빨리 지붕 위로!”

하고, 숨이 찬 듯이 부르짖기가 바쁘게 수십 명의 경찰관대는 일시에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선봉 선 것이 임 경감……. 그러나 그는 기운 없이 쓰러진 백가면을 향하여 뛰어가다가 그만 멈칫하고 섰습니다.

“백가면은 대체 죽었는가, 살았는가?…… 죽은 체하고 있다가 갑자기 우리를 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무서움과 호기심을 한 아름씩 안은 경찰대는 저마다 피스톨을 겨누고 백가면을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듯이 뺑 둘러쌌습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원은 점점 작아갑니다. 수많은 회중전등의 불빛이 쓰러진 백가면 위에 비 오듯이 내립니다. 그때 경찰관 한 사람이,

“아, 피다, 피다.”

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아아, 과연 넓적다리에서부터 솟아나오는 듯한 핏줄기가 백가면의 흰 망토를 시뻘겋게 적시지를 않았습니까!

그래도 경관들은 와하고 달려들 용기가 없었습니다.

“다리는 비록 상하였을지라도 죽기까지는 안 했을 것이다.”

그러면, 죽지 않은 백가면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면서 쓰러져 있는가요. 무슨 재주로 이 절박한 사지에서 벗어나갈 작정인가요.

원은 더 한층 좁아집니다. 원주와 원심이 서로 부딪치는 순간, 저 무서운 백가면의 정체는 청천 백일하에 드러나리라!

아아, 지금 눈앞에 쓰러져 있는 백가면이란 과연 어떠한 놈인가요.


가면을 벗겨라 편집

아아! 백가면의 운명도 이젠 몇 분 남지를 않았습니다. 전 세계를 비웃으며 자기의 목적한 바를 유유히 실행하고 있던 백가면일지라도 보라! 이렇게 첩첩이 싸인 수많은 경찰관의 담을 뚫고 제 어찌 도망갈 수가 있으리오!

게다가 다리에 총상을 받고서 기운 없이 쓰러져 있는 저 백가면! 그는 과연 죽었느냐, 살았느냐? 죽은 것 같기도 하고 살아 있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임 경감은 그때, 있는 용기를 다하여 피스톨을 겨누고 백가면 앞으로 한 걸음 선뜻 나서면서,

“백가면! 죽었느냐, 살았느냐?”

하고 고함을 쳤습니다마는,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백가면은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다만 보기에도 끔찍한 해골의 가면만이 사면에서 쏟아지는 회중전등 불빛 가운데서 입을 반만큼 벌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백가면! 죽었느냐, 살았느냐?”

하고 고함을 쳤을 바로 그때였지요.

경찰관들은 저도 모르게 그만,

“으악, 으악!”

하고 소리를 치면서 질겁을 하고 댓 걸음씩 뒤로 물러섰습니다.

보라! 죽은 것처럼 엎드려 있던 권총에 맞은 백가면은,

“응응!”

하고 한 번 길게 신음하더니 벌떡 일어나자마자 옆에 있는 임 경감의 다리를 꽉 붙잡았으니 임 경감의 놀라움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이게 뭐냐?”

하고 얼빠진 목소리로 부르짖은 임 경감은 그만 무의식중에 손에 쥐었던 피스톨을 백가면의 머리에다 대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탕!”

컴컴한 밤하늘을 은은히 울리며 멀리멀리 굴러가는 총 소리!

백가면은 그만 꽉 부여잡았던 임 경감의 양다리를 탁 놓더니 뒤로 쓰러지면서 양손으로 허공을 서너 번 쥐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머리에서 뭉클뭉클 솟아나오는 샘과 같은 피 뭉텅이! 아아, 백가면은 마침내 죽었구나! 활줄같이 긴장했던 사람들의 가슴 속은 일순간 텅 빈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로잡지 아니한 백가면을 임 경감은 그만 죽여 버리고야 말았다는 비난이 이 모퉁이 저 모퉁이에서 나왔습니다마는 언제까지나 그러고 있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백가면이란 대체 어떻게 생긴 놈인고 하는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옆에 서 있던 경찰관 한 사람이 드디어 백가면의 망토와 해골 가면을 휙 잡아 벗기었지요.

벗기자마자 목을 한 발씩이나 늘이고 들여다보고 있던 경찰관들은 그만,

“앗!”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는 과연 사람들이 예상하고 있던 백가면이 아니라 피 뭉텅이로 변한 김 부장의 얼굴이었습니다.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인고!”

“김 부장! 김 부장이 아닌가?”

“입에 재갈을 물렸구나.”

“백가면은 어디로 갔노?”

경찰관들은 저마다 이렇게 떠들기를 마지않았습니다.

아아, 신기하기 짝이 없고 능란함이 비할 데 없는 백가면의 재주여! 귀신과도 같은 백가면의 요술이여!

순간, 사람들은 백가면을 미워한다는 것보다도 대담하고 민첩한, 마치 마술사와 같은 꾀를 가진 백가면의 재주를 칭찬하고 싶은 생각이 한층 더 많았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백가면은 세상 사람들이 그때까지 생각하던 바와는 딴판의 인상을 사람들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왜냐 하면 사람들은 지금까지 백가면이라 하면 연방 무서운 살인강도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사람을 죽일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는데도 아직까지 한 사람도 죽인 적이 없는 백가면을 생각해 보면 넉넉히 알 것입니다. 백가면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아, 알았다!”

하고 그때 경찰관 한 사람이 고함을 쳤습니다.

“아까 컴컴한 다락 난간에서 권총을 내두르면서, 백가면의 다리를 쏘았으니 한시 바삐 지붕 위로 올라가라고 재촉하던 사람이 실상은 김 부장이 아니고 백가면 그놈이었구나!”

“그렇다! 그렇다!”

“응, 그놈이 백가면이었다!”

하고 이번에는 임 경감이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아까 백가면과 김 부장이 캄캄한 다락 속으로 들어갔을 때 백가면은 김 부장의 권총을 빼앗아 가지고 김 부장의 다리를 쏘았다. 그리고는 재갈을 물린 후에 제가 입고 있던 의복과 망토, 그리고 해골 가면을 벗어서 김 부장에게 입히고 자기는 김 부장의 복장을 입었다. 그리고는 권총으로 협박을 하면서 지붕 위로 올라가기를 재촉한 것이다!”

“그렇다! 그렇다!”

“그러면 아직도 백가면은 다락 인에 숨어 있을 것이다!”

“빨리 다락 안을 찾아보자!”

“응, 다락으로 내려가자!”

이리하여 경찰관들은 으와, 으와 하고 떠들면서 욱 하고 몰려 내려갔습니다.

임 경감은 혼자 남아서 피가 뚝뚝 흐르는 김 부장의 머리를 어루만져 보았습니다마는 벌써 숨이 끊어진 뒤였습니다.

백가면이 쏜 곳은 다리였고 임 경감이 쏜 곳은 머리였으니 김 부장을 죽인 것은 틀림없는 임 경감 자신이었지요. 아아, 이 얼마나 딱한 일입니까.

생각건대 김 부장은 입에 재갈이 물리었으므로 자기가 백가면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할 수도 없었고 더구나 다리에 상처를 받은지라 그만 기운 없이 임 경감의 다리를 쓸어안았던 것을 임 경감은 그런 줄을 모르고 얼떨김에 쏘아 버렸지요.

“아아, 나의 불찰로 말미암아 가장 용감하던 부하를 그만 죽였구나!”

그때, 공연히 부하를 죽이지 말라던 유불란 선생의 생각이 불현듯 나서 임 경감의 뉘우치는 마음은 한층 더 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바라 임 경감은 김 부장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려고 애를 썼으나 도저히 맨손으로는 풀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말에 물리는 것과 같은 쇠로 만든 재갈인데 입과 목덜미를 꼭 졸라매고 조그마한 자물쇠를 채워 놓았던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락으로 내려간 경찰관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고 의심하고 있노라니까 그때 경찰관 한 사람이 뛰어 올라오며,

“경감님! 백가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마 우리들이 떠들며 올라오는 사이에 백가면은 아래로 내려간 모양입니다.”

하고 보고를 하니 임 경감은 그저,

“음!”

할 뿐이지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김 부장의 시체를 겨우 붙들고 아래로 내려와 보니, 아아! 유불란 선생은 또 어디로 갔는가? 대준 소년도 없고 수길 소년도 보이지를 않는구나!


대준의 계교 편집

그런데 대준과 수길, 그리고 유불란 선생은 어떻게 되었는가요.

임 경감과 여러 경찰관들이 남대문 지붕 위에서 백가면을 체포하느라고 야단들을 하고 있는 동안 대준 소년은 유불란 선생에게 다음과 같은 놀라운 보고를 하였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사실 비밀수첩을 저 백가면에게 빼앗긴 줄로 생각하십니까?”

하고 대준 소년이 힐끗힐끗 유 선생을 쳐다보았지요.

“그럼, 빼앗기지 않았다는 말인가?”

유 선생도 이상하여서 눈을 커다랗게 떴습니다.

“선생님, 비밀수첩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양복 주머니에서 한 개의 수첩을 꺼내어서 유 선생께 내주었지요. 유 선생도 놀라고 수길 소년도 놀랐습니다.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냐?”

보니, 그것은 틀림없는 강 박사의 비밀수첩이며, 맨 첫 장에 씌어 있는 글씨, 이 수첩을 얻는 자가 한시바삐 유불란 씨에게 전해 주라는 글씨까지도 강 박사의 것에 틀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백가면이 가진 비밀수첩은?”

유 선생과 수길 소년은 하도 이상해서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것은 가짜 비밀수첩입니다!”

하는 대준 소년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찼습니다.

“뭐, 가짜 수첩?”

“네, 백가면이 가지고 있는 것은 가짜고 이것이 진짜입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은 언젠가 대준 소년이,

(강 박사도 구해 내고, 비밀수첩도 빼앗기지 않는 방법이 있다!)

하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거리로 뛰어나갔다가 한 시간쯤 있다가야 돌아온 사실을 잘 알 것입니다.

그때 대준 소년은 어떠한 꾀를 내었던가요. 그는 거리로 뛰어나가 문방구점으로 달려가서 강 박사의 비밀수첩과 꼭 같은 것을 하나 산 다음 제본소(책 만드는 집)로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비밀수첩〉이라고 금자를 박아 가지고는 수첩 맨 첫 장에 강 박사의 글씨를 본받아 〈이 비밀수첩을 얻는 자는 한시바삐 유불란 씨에게 전해 주라〉는 문구를 썼습니다.

그리하여, 박대준 소년은 집으로 뛰어 돌아와서 아무도 모르게 서재 서랍에 있는 진짜 비밀수첩과 살짝 바꾸어 놓았으니 제아무리 백가면일지라도 이 감쪽같은 대준 소년의 꾀를 알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선생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요. 백가면이 아까 선생님과 꼭 같이 변장하고 왔을 때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수첩을 바꾸어 놓았다는 말을 할 뻔했어요. 그때 수길의 어머님이 저희들을 안방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던들…….”

“음, 대준군. 참 군의 힘으로 이 비밀수첩을 빼앗기질 않았구나! 대준군은 참 훌륭한 꾀를 가졌단 말이지!”

유불란 선생은 비밀수첩을 받아들며 대준 소년의 어깨를 툭 쳤습니다.

“이 비밀수첩만 우리의 손에 들어오면 그만이다. 오늘 우리 집에 가서 이 비밀수첩에 무엇이 적혀 있는가를 시험해 보자!”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지금 어디 있을까요?”

수길 소년이 걱정하면서 물었습니다.

“음, 강 박사는 아직 무사하다. 백가면은 결코 강 박사를 죽이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어째 그러냐 하면 우리들은 백가면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가면은 결코 사람 죽이기를 즐겨하는 자가 아니다.”

“글쎄요.”

“아무 걱정 마라. 강 박사는 지금 어떠한 곳에 갇혀 있을 뿐이지 신변의 위태스러움은 조금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지붕 위에서 임 경감 이하 수많은 경찰관들이 총에 맞은 백가면을 둘러싸고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다가들고 있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경찰관 한 사람이 담장덩굴이 얽힌 컴컴한 돌담을 기어 내려오더니 유불란 선생을 향하여,

“백가면은 지금 지붕 위의 여러 경찰관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것은 지붕 위에서 얻은 것이오.”

라고 보고를 하며 종잇조각을 유불란 선생에게 내주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문구가 씌어 있었습니다.

〈유불란군, 다시 말해 두노니 군은 제발 나의 하는 일을 방해하지를 말라! 그렇지 않으면 군의 생명은 위태로우리라. 이것이 군에 대한 두 번째의 경고다.

백가면〉

백가면이다.

“뭐, 백가면?”

옆에 서 있던 대준과 수길이가 놀라 부르짖을 때,

“이제 그 경찰관은 어디 있느냐?”

하고 유불란 선생이 고함을 쳤습니다마는 이 종잇조각을 가지고 온 수상한 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놈이 백가면이다!”

“뭐, 그놈이 백가면이어요?”

“그렇다! 그놈이 김 부장의 다리를 쏘고 의복을 바꾸어 입고 내려온 것이 틀림이 없다. 지금 지붕 위에 쓰러져 있는 것은 백가면이 아니고 김 부장일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무섭기 짝이 없고 대담하기 비할 데 없는 백가면입니까! 명탐정 유불란 선생까지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으니 백가면의 비상한 재주야 다시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음! 네가 나를 속였다!”

유불란 선생의 얼굴에는 비분의 빛이 뭉클뭉클 떠오릅니다.

“백가면, 네가 나를 속였겠다! 음, 너도 나한테 한 번 속아 보아라!”

그때 지붕 위에서는,

“백가면이 도망갔다! 김 부장이 죽었다!”

하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마는 유 선생은 두 소년을 데리고 한국은행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여러분, 보시오! 지금 우체국 앞 넓은 마당을 지나 태평로 거리를 향하여 뒤를 힐끗힐끗 돌아보면서 달아나는 경찰관의 뒷모양을 보시오!

“저 놈이다. 저 놈이 백가면이다!”

유 선생은 가는 목소리로 두 소년에게 속삭이었습니다.

“자아, 대준, 수길군! 너희 둘은 저 백가면의 그림자를 놓치지 말고 따라라!”

“선생님은?”

“나는 한시바삐 집으로 돌아가서 이 비밀수첩에 무엇이 적혀 있는가를 시험해 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리고 만일 위험한 일이 있거든 이 수길군의 비둘기를 날려라!”

“네, 그러면 선생님, 우리들은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저 백가면의 소굴을 발견하고야 말겠습니다!”

“음, 그렇다! 그러면 수길군! 대준군! 잘 주의해서 백가면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선생님도 빨리 돌아가서 비밀수첩을 시험해 보셔요.”

이리하여, 두 소년과 유불란 선생은 서로 헤어졌습니다. 대준과 수길이는 검둥이와 비둘기를 한 놈씩 데리고 수상한 경찰관, 백가면의 뒤를 따릅니다마는 과연 그들 두 소년은 아무 불행 없이 무사히 돌아올 것인가요, 못 돌아올 것인가요. 그리고 비밀수첩에는 과연 무엇이 적혀 있을까요.


박지용 편집

유불란 선생하고 헤어진 대준 소년과 수길 소년은 경찰관의 복장을 입은 백가면의 뒤를 따라 태평로 거리로 들어갔습니다. 백가면은 아주 제가 경관인 체하면서 조금도 두려움이 없다는 듯이 서슴지 않고 한참 동안 걸어가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더니 옆에 서 있는 공중전화 박스 속으로 쑥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가만 있자! 저 놈이 어디다가 전화를 걸 셈이로구나.”

“우리 가만히 저기 저 전화통 뒤로 가서 엿들어 볼까?”

“그래, 그러자!”

그래서 대준과 수길이는 쥐 잡으려는 고양이 모양으로 발자국 소리를 죽여 가며 지금 백가면이 들어간 전화통 뒤로 다가가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대준이는 컹컹하고 짖으려는 검둥이의 주둥이를 손바닥으로 꽉 막았지요. 수길이의 품안에서 비둘기가 눈을 말똥거리며 주인의 얼굴을 쳐다봅니다.

그때 백가면의 전화 거는 목소리가 가늘게 울리어 나왔습니다.

“동아호텔이오? 지배인을 좀 속히 불러 주오. 여기는 경찰서요. 아, 지배인이오? 지금 당신데 호텔에 든 손님 가운데 외출한 사람은 없소? 뭐, 조사해 보아야만 알겠다! 그러면 속히 조사해 보시오. ……뭐, 팔 호실 손님이 아직 안 들어왔다? 이름은 박지용. 식전에 승마 클럽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를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그만 하고 당신네 호텔에 지금 장충단 공원에 온 곡마단 사람들이 들어 있지 않소?…… 그래, 그들은 죄다 호텔에 있소?…… 뭐? 구 호실과 십 호실 손님이 외출하고 없다! 구 호실에 있는 사람, 아 그 칼 던지기하던 중국 옷 입은 사람과…… 응, 그리고 십 호실에 있는…… 아, 그 공중 비행을 잘하던 사람과 영국 사람이 없다! 외출 시간은 새로 한 시, 음, 음,…… 곡마단에서 돌아온 후 뭐?…… 백가면이 남대문 위에 올라갔다는 말을 듣고 구경하러 나갔다는 말이지. 음! 잘 알겠소. 조금 이상한 사건이 생겨서 그럽니다. 시방 곧 경찰관 한 사람을 보낼 테니까 잘 안내하도록 해야만 되오…….”

백가면은 전화를 끊고 잠깐 동안 주저하는 모양이더니 분주스럽게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왼편 골목으로 빠져서 명동에 있는 동아호텔로 걸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수길과 대준은 이상하기가 짝이 없었습니다. 백가면은 대체 동아호텔로 가서 무엇을 할 셈인가요. 경찰서라고 그는 거짓 전화를 걸었고, 그리고 백가면 자신이 경찰서에서 온 경찰관인 체하고 호텔로 들어갈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요. 들어가서는 또 무엇을 할지.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두 소년은 용감하게도 백가면의 그림자만 어디까지나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준 소년은 그런 것들보다도 더 한층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방금 백가면이 전화를 걸 때 입에 담은 박지용이라는 이름……. 동아호텔 팔 호실에 투숙한 박지용! 식전에 승마 클럽에 가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박지용…….

“박지용! 박지용!”

하고 대준 소년은 흥분과 호기심에 넘치는 목소리로 가늘게 외쳐 보았습니다. 아아, 그것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이름입니다. 주야 조석으로 대준 소년이 그리워하던 이름, 어리고 연약한 그의 가슴 속 깊이 잠들고 있던 이름, 굳게굳게 박힌 이름!

(박지용, 박지용! 오오, 아버지! 제가 밤낮으로 그리던 아버지! 외국으로 장사를 다니다가 인도 셀론도 부근에서 해적 떼를 만나 돌아가신 아버지의 성함이지 무엇이냐!)

그 순간, 대준 소년의 머리에는 백가면도 없고 강 박사도 없고 비밀수첩도 없었습니다. 다만 아버지뿐입니다. 구차한 살림살이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밤낮으로 그리던 아버지!

(그렇다! 아버지께서 집을 떠나신 지가 내가 네 살 때…… 벌써 십 년이 되었구나! 십 년 동안 아버지는 어디 계셨으며 어떻게 변했을까?)

지금 대준 소년은 꿈과 같이 기쁜 소식을 한시바삐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님께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수길이가,

“너 박지용이란 사람을 아느냐?”

하고 이상해서 물었을 때 대준은,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울렁거리는 가슴을 꾹 눌렀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동아호텔 팔 호실, 동아호텔 팔 호실!)

하고 부르짖을 뿐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백가면은 명동 전찻길을 건너서 맞은 편 쪽에 보이는 동아호텔 앞에서 걸음을 멈추지를 않았겠습니까. 동아호텔은 서울서도 일류 가는 호텔인데 커다란 정문 앞에 전등불이 외로이 졸고 있었습니다.

백가면은 잠시 동안 머뭇머뭇하더니 정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수길아, 너는 지금 곧 공중전화로 유불란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라. 백가면이 동아호텔로 들어갔다고……”

하고, 대준이가 말하니,

“대준이 너는 어떻게 할 테냐?”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저 백가면을 따라 호텔 안으로 들어가서 백가면이 무엇을 하는가를 엿볼 테다. 자아, 속히 가거라!”

“음, 그럼 갔다 오마!”

이리하여, 두 소년은 헤어졌습니다.


무서운 기계 편집

그때 유불란 선생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한국은행 앞에서 두 소년과 헤어진 유 선생은 곧 태평로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서적과 약품이 가득 찬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강 박사의 비밀수첩을 포켓에서 꺼내 세세히 조사를 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수첩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 수첩! 강 박사는 대체 이 백지 수첩에다 무엇을 적어 두었는가요.

테이블 위에다 수첩을 펼쳐 놓고 잠깐 동안 두 눈을 감고 있던 유불란 선생은 그때 눈을 번쩍 뜨더니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약병이 가득 찬 장문을 열고 이상한 약을 한 병 꺼냈습니다.

유 선생은 그것을 접시에다 서너 방울 따라 놓고 옆에 있는 주전자에서 물을 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한참 동안 적은 후에 비밀수첩을 그 약품이 담긴 접시에다 적시었습니다.

그 순간…… 아아, 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백지의 수첩에는 무엇인가 이상한 그림과 함께 조그마한 글자가 가득 나타나지를 않았겠습니까.

(됐다, 됐다!)

유불란 선생은 얼마나 기쁜지 마치 어린애처럼 날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비록 강 박사가 없다 할지라도 그 이상하고 신통한 기계를 발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유 선생은 다시 비밀수첩을 접시에서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습니다.

그것은 단 한 번 보고는 잘 알 수가 없었으나, 그러나 그 기계의 원리를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너무나 무서운 기계였습니다. 수첩장 여기저기에 그린 그림은 아마 그 무서운 기계의 약도겠지요.

(그렇다! 이 기계가 성공만 한다면!)

유 선생은 방 안을 돌아다니면서 부르짖기를 마지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신통하고도 무서운 기계란 대체 어떻게 된 기계인가요. 여기서 그 기계의 원리를 대강 추려서 설명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국민학교 자연 교과서에서 자석, 소위 지남철이라는 것을 배웠을 것이며 따라서 자석이 쇠를 빨아들이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석에는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천연 자석과 인공 자석이 있는데 이 인공 자석 가운데서 가장 강도의 흡인력(빨아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전자석입니다.

옛적부터 위대한 발명이란 모두가 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하였으며, 김으로 말미암아 주전자 뚜껑이 열리는 것을 보고 증기기관차를 발명하지를 않았습니까.

그러면 발명가 강영제 박사는 지남철이 쇠를 빨아들이는 사실을 보고 대체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만일 전자석에다 강렬한 전기를 통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요. 크고도 무거운 철분을 흡인할 수가 있지 않은가요. 그리고 과연 그와 같은 기계가 성공만 한다면 어떠한 결과를 맺을 것인가요. 자장(지남철 기운이 떠돌고 있는 곳)이 미치는 한도 내에 있는 쇠라는 쇠는 모조리 끌리어 올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가령 그런 기계를 높다란 건물 위에다 만들어 놓는다면 장쾌하리라. 쇠로 만든 물건은 무엇이든지 휙휙 날아올 것이 아닌가요. 자전거가 날아오고 구두정이 빠져나가고 전차의 선로가 공중으로 우불구불 춤을 추면서 날아 올라오는 가장 유쾌하고도 무서운 광경을 강 박사는 혼자서 상상하며 빙그레 웃었을 것입니다.

(아아, 강 박사는 실로 무서운 기계를 발명했구나!)

그리고 백가면은 지금 그 기계의 비밀을 알고자 강 박사를 붙들어 가지고 비밀수첩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닌가! 강 박사는 지금 어디 있는가? 백가면은 이 기계를 빼앗아서 대체 무엇을 할 셈인가? 어떠한 무서운 계획을 가슴에 품고 있는가?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볼 때 유불란 선생의 온몸은 알지 못할 공포에 휩싸여 버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백가면이 동아호텔로 들어갔다는 전화가 수길 소년으로부터 걸린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수길군, 군은 동아호텔 대문 밖에서 기다려라! 내가 이제 곧 가마!”

유불란 선생은 비밀수첩을 포켓에 쓸어 넣고 조그마한 트렁크를 한 개 손에 든 다음에 분주하게 밖으로 뛰어나가서 자동차를 탔습니다.

어느덧 동편 하늘이 훤하게 밝아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청명한 아침 공기를 헤치면서 유불란 선생의 자동차는 일로 명동 동아호텔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그때 어둑어둑한 행길에서,

“호외다! 호외다!”

하는 배달부의 부르짖음과 함께 방울 소리가 요란히 아침 공기를 울리지를 않았겠습니까. 유불란 선생은 자동차를 멈추고 호외를 한 장 얻었습니다. 그리고 잠깐 동안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음!”

하고 길게 신음을 하였습니다. 호외에는 다음과 같은 실로 놀라운 기사가 커다랗게 실리어 있었습니다.


〈서울 육십만 시민에게 고함

귀신과도 같이 능란한 재주를 가진 백가면은 마침내 남대문 꼭대기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백가면의 정체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백가면이란 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 백가면이 한국말을 할 줄 안다고 해서 그를 대번 한국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전 세계는 아시아의 일각에서 발명되고 있는 그 어떤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기계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는 사실을 시민 제군은 아느냐, 모르느냐?

이 무서운 기계가 아시아 한 모퉁이에서 발명되는 날을 얼마나 두려워하는가를 제군은 아느냐, 모르느냐?

시민 제군이여! 이 비상시국에 처하는 제군은 베개를 높이 하고 코를 골면서 안락의 꿈에 도취할 때가 아니다. 우리의 적은 단지 한 사람의 백가면만이 아니라, 지금 호시를 부릅뜨고 강 박사의 발명을 방해하려는,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기계에 관한 비밀 서류를 빼앗고자 하는 야수와도 같은 국제 폭력단의 눈동자다.

시민 제군이여! 제군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서울 장안을 살펴보라. 장안은 지금 미·영에서 파견된 스파이들로 말미암아 일대 소동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서로 서로 백가면으로부터 비밀수첩을 빼앗으려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시민 제군이여! 우리는 손과 손을 마주잡고 힘과 힘을 합하여 어떠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강 박사를 구해 내며 비밀수첩을 빼앗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유불란 선생은 호외를 포켓에다 구겨 넣고 다시 자동차를 몰면서,

(흥, 비밀수첩은 내가 가지고 있다!)

하고 벙그레 웃었습니다.

한편 동아호텔로 백가면을 따라 들어간 박대준 소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스파이전 편집

새벽은 가까웠으나 동아호텔은 아직 죽은 듯이 깊이 잠들고 있었습니다.

경찰관의 복장을 입은 백가면은 조금도 서슴지 않고 넓은 뜰을 거쳐 현관으로 들어섰을 때 그의 뒤를 따르던 박대준 소년은 문 옆에 납작 몸을 기대고 백가면의 행동을 일일이 감시하였습니다.

현관을 들어선 백가면은 호텔 지배인을 불러내다가 앞에 세워 놓고,

“나는 경찰서 서원인데 이 호텔에 든 손님들 가운데 좀 수상한 사람이 있어서 급히 조사하려고 왔소.”

하는 백가면의 그럴 듯한 거짓말에 지배인은 졸리는 눈을 두 손으로 비비면서,

“네, 그렇습니까? 조금 아까 경찰서로부터 전화가 와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고, 허리를 굽히었습니다.

“그런데 저 구 호실에 든 외국인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아직 안 돌아왔습니다.”

“팔 호실에 있는 박지용이란 사람도 돌아오지를 않고?”

“네, 어제 아침에 나가서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음, 그러면 팔 호실, 구 호실, 십 호실을 차례차례 안내해 주오. 속히!”

하고, 백가면이 명령하는 바람에 지배인은 부리나케 보이를 불러,

“너, 나리를 안내해 드려라.”

하고, 분부한 후에 자기는 졸려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도로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보이는 나이가 열 네댓쯤 되었을까. 대준 소년이 그때 문틈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자기와 국민학교 삼학년까지 같이 다니다가 집안이 가난하여 중도에서 학교를 그만둔 김돌이라는 아이였습니다.

(하하! 돌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여기 와 있었구나!)

이 뜻하지 않은 친구를 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난 대준이는 기쁘기가 짝이 없었습니다.

보이 김돌이는 경찰관을, 아니 백가면을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대준이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드디어 문 뒤에서 빠져나와 다람쥐처럼 빠른 동작으로 현관으로 뛰어 들어가서 층층대로 올라갔습니다.

이층에 올라가니 김돌이가 팔 호실 밖에 우두커니 서 있지를 않겠습니까.

“김돌아!”

하고, 대준이는 돌이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었습니다.

돌이도 놀라서,

“너 대준이…….”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겨우 막고,

“이제 그 경찰관 어디로 갔니?”

하고 속삭이었습니다.

“이 팔 호실로 들어갔다.”

“하하, 여기 저 박지용이란 사람이 들어 있지? 그 사람 어떻게 생긴 사람이냐?”

“키가 크고 신수가 훤하게 생긴 신산데 나이는 서른 댓쯤 돼 보여.”

“그 사람이 언제 들었니?”

“한 열흘 전에 들었다.”

그때 문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니 백가면은 박지용의 트렁크, 테이블, 서랍, 의복 주머니…… 그런 것을 죄다 뒤져 봅니다. 그러더니,

“보이! 박지용이에게 온 편지 같은 것은 없느냐?”

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있습니다. 가만 계십쇼, 곧 가져 오겠습니다.”

하고 돌아가 아래층으로 내려간 사이에 대준이는 실로 이상한 것을 보았습니다.

백가면은 박지용의 트렁크에서 무슨 조그만 약병을 꺼내며 접시에 다 따른 후에 포켓에 들었던 비밀수첩을 거기다 적시었습니다. 그때 돌이가 편지 한 장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돌아! 어디 그 편지 좀 읽자.”

하고, 대준이는 백가면보다 먼저 그 편지를 가로채서 보았습니다. 그것은 물론 박지용이에게 온 편진데 보낸 사람의 이름은 씌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준이는 첫눈에 글씨가 퍽 낯익어서,

“누굴까?”

하고 생각해 보았으나 도무지 알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방 안에서,

“에이, 가짜로구나, 가짜야!”

하고, 고함치는 백가면의 소리에 대준이는 편지를 돌이에게 주고 얼른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백가면은 비밀수첩을 요리조리 천 조각을 내어 찢어 버립니다.

“속았구나. 유불란에게 속았구나!”

백가면은 분한 듯이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마는 기쁘기가 짝이 없는 것은 박대준 소년입니다.

(에헴! 유불란 선생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박대준 선생에게 속았다, 이 놈!)

하고 맘속으로 외쳤습니다. 그때 돌이가 편지를 들고 들어가서 백가면에게 내주었습니다.

백가면은 편지를 받아들고 들여다보더니 얼굴이 종잇장처럼 새파랗게 변합니다.

“무슨 편진가? 내가 먼저 뜯어보았으면 좋았을걸!”

하고, 대준 소년은 후회하였습니다.

이윽고 백가면이 돌이를 앞세우고 다음 방 구 호실로 들어갈 때 대준 소년은 층층대 아래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백가면은 구 호실에 들어가서 방 안을 이리저리 살피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찾고자 하는 물건은 암만 해도 보이질 않는 모양인지 그만 밖으로 나오려고 하던 바로 그때 저편 십 호실로 통하는 문이 슬그머니 열리면서 비쭉 나타난 것은 백가면의 가슴을 겨눈 한 자루의 피스톨 구멍이었습니다.

“손을 들어라!”

하는 굵다란 목소리와 함께 중국 옷을 입은 무서운 사내가 바람처럼 쑥 들어 왔습니다.

백가면은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 옷 입은 사람의 뒤로 두 사람의 수상한 서양 사람이 또 들어 왔습니다. 그 서양 사람들은 실로 무시무시한 국제 깡패 조직의 스파이였습니다.

대준이는 그때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하하! 언젠가 강 박사와 함께 장충단 곡마단 구경을 갔을 때 본 사람들이로구나!)

그러나 그들이 저 공학박사 강영제 선생의 손으로부터 기계에 관한 비밀수첩을 빼앗고자 애를 쓰는 무서운 스파이들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넓은 한국 안에서 백가면 한 사람밖에는 없었습니다.

“백가면, 네가 아무리 경찰로 변장을 했다 하더라도 우리들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네가 아까 남대문 지붕 위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김 부장과 의복을 바꾸어 입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어디냐? 백가면!”

하고, 서양 사람은 한국말로 물었습니다마는 백가면은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네가 거의 매일 밤처럼 우리들 방으로 숨어 들어와서 뭔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마는 대체 네가 찾는 물건은 무엇이냐?”

“알고 싶다면 가르쳐 주마. 그것은 너희들이 너희들 조직 본부로부터 받은 비밀 지령이다.”

“하하하, 백가면. 그런 중요한 것을 네 눈에 띄게 감추어 두어서야 되겠느냐. 하하하……, 그런데 네가 빼앗은 비밀수첩을 이리 내놓아라!”

“가짜 수첩이라도 가지고 싶거든 가져라!”

하고, 조각조각 찢어진 수첩을 주머니에서 꺼내 주었습니다.

“하하하, 저 유불란이란 탐정한테 너도 속았구나!”

“이제 와 보니 속은 것이 다행이다.”

“그래, 너는 저 강 박사를 붙들어다가 어디다 숨겨 두었느냐?”

“어리석은 질문을 말아라. 너희들이 든 피스톨의 탄환이 지금 방금 이 백가면의 가슴을 뚫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너희들 앞에 자백할 난 줄 아느냐?”

하는 수 없이 두 손은 비록 번쩍 들었으나 총알처럼 쏟아져 나오는 백가면의 말소리…… 백가면은 그 순간 아까 김돌이에게 받은 편지를 포켓에서 꺼내자마자 훤하게 밝아 오는 들창 밖으로 휙 하니 던져 버렸습니다.

“앗!”

하고 스파이들이 들창 옆으로 몰려가는 것을 본 대준 소년이 층층대를 날을 듯이 뛰어내려와 뜰로 나가 보니 방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검둥이가 이층에서 떨어진 백가면이 던진 편지를 입에 물고 이리로 달음박질쳐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다음 순간 이층에서 날아오는 한 방의 총알이 검둥이의 머리를 쏘았습니다.

“깽깽깽, 깽깽깽…….”

하는 비참한 소리와 함께 검둥이는 그만 잔디밭 위에 쓰러졌습니다. 그때,

“앗! 백가면을 놓쳤다!”

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이층에서 들리었습니다. 대준 소년은 번쩍 이층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저 중국 옷 입은 사람이 든 권총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지를 않겠습니까.

“에이, 모르겠다!”

하고 외치면서 현관 돌기둥 뒤에서 쏜살같이 검둥이 옆으로 뛰어가자마자 백가면이 던진 그 이상한 편지를 움켜쥐고 일어선 박대준 소년은 대문 밖을 향하여 총알처럼 뛰었습니다. 그러나 아아! 대준 소년은 세 발자국도 옮겨 놓지 못하고 그만 탕 소리와 아울러 흙으로 만든 인형처럼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얽혀진 의문 편집

바로 그때였습니다.

수길 소년하고 유불란 선생이 자동차를 몰아 호텔 정문을 들어오면서 보니 맞은편 잔디밭 위에 한 방의 총 소리와 아울러 힘없이 쓰러지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저것이 대준이 아닙니까?”

하고 외치는 수길이의 목소리에,

“앗, 대준군이로구나!”

하고 유 선생도 놀라 외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선생님! 이제 저 이층에서 웬 중국 옷 입은 사람과 서양 사람의 그림자가 얼핏 나타났다 없어졌습니다.”

“뭐, 중국 옷 입은 사람?”

그러나 그때는 벌써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자동차에서 내린 유불란 선생과 수길 소년은 어깨에서 붉은 피가 뚝뚝 흐르는 대준 소년을 곧 안아 일으키었습니다.

“대준군! 정신을 차려! 상처는 극히 가벼우니…… 대준군!”

“대준아! 눈을 떠라! 나다. 수길이다! 대준아! 대준아!”

수길 소년의 두 볼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수길군, 걱정 마라! 총알은 어깨를 꿰뚫어 나갔을 뿐이지 가슴에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

그러는 동안에 새벽 공기를 요란히 울린 두 방의 총 소리로 말미암아 눈을 뜬 호텔 손님들은 들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혹은 뜰로 뛰어나와 이 참담한 광경에 눈을 둥그렇게 떴습니다.

때마침 손님들 가운데 섞여 있던 어느 늙은 외과 의사가 대준 소년을 안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므로 유 선생은 수길이를 그리로 보내고 자기는 이층으로 부리나케 뛰어올라가서 그 이상한 외국 사람들이 보이더라고 하던 구 호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구 호실에는 아무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중문을 열고 십 호실로 들어가 보았으나 역시 사람의 그림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상하구나. 조금 전까지도 사람이 있던 기색이 있었는데…….)

그때 문이 열리고 보이 김돌이가 들어왔습니다.

“잠깐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돌이는 아까 대준 소년과 함께 문 밖에서 본 광경을 세세히 말한 후에,

“그래, 그 경찰관(사실은 백가면)이 던진 편지 조각을 집을 셈으로 따라 나갔다가 그만 그 중국 사람의 총알에 맞았어요.”

하고, 찬찬히 설명을 하였습니다.

“하하, 그런가! 음, 그랬던가!”

그제야 유불란 탐정도 모든 것을 짐작하였습니다.

“그런가! 그랬던가!”

유불란 선생은 다시 한번 중얼거리면서 아까 그 박지용이란 사람에게 왔다는 편지, 백가면이 들창 밖으로 던진 편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검둥이가 죽고 대준 소년이 부상을 당한 편지를 포켓에서 꺼내 읽어 보았습니다.

“아, 그런가! 그랬던가!”

유불란 선생이 그렇게 세 번째 중얼거렸을 때 수길 소년이 뛰어 올라오며,

“선생님, 대준이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어서 선생님더러 좀 오시라고요.”

하고, 유 선생의 팔목을 끌었습니다.

“오냐. 그럼, 속히 가 보자!

이리하여, 수길 소년과 유불란 선생은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대준이가 누워 있는 외과 의사 방으로 들어가니 늙은 의사는,

“보시는 바와 같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일주일쯤 치료를 받으면 완전히 낫겠지요. 지금은 대강 소독을 하고 약을 발라 주었습니다.”

하고, 유 선생을 바라보았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처럼 친절히 해 주셔서…….”

그리고 이번에는 대준 소년을 향하여,

“대준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구나. 그러나 아무 걱정 마라. 이제 의사 선생님 말씀이 한 주일 후면 완쾌가 될 거라고 하셨다.”

“선생님!”

하고, 그때 대준이는 유 선생의 손을 꽉 잡았습니다.

“오냐, 왜 그러냐?”

“저 선생님께 꼭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응, 무엇이냐?”

“선생님, ……다른 것이 아니라, 이층 팔 호실에 든 박지용이란 사람을 좀 선생님께서 찾아 주실 수 없을까요?”

하고, 애원하는 박대준 소년의 얼굴에는 두 줄기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그게 군의 소원이라면 하늘 끝까지라도 가서 찾아다 주마……. 그래, 박지용이란 사람을 만나서는 대체 무엇을 할 테냐?”

“그인지 그이 아닌진 알 수 없으나 박지용이란 제가 네 살 적에 집을 떠나서는 아직 돌아오지를 않는 아버지의 이름, 박지용, 박지용! ……선생님, 저는 이 이름을 잠시라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

유 선생은 아무 대답도 없이 물끄러미 침대 위에 누운 대준을 바라다볼 뿐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 백가면이 들창으로 던진 편지를 집으려고 뛰어나간 것도 실상은 박지용이란 사람의 일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그때도 유불란 선생은 대답이 없습니다.

“아아! 어머니께서 이 일을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선생님, 그 편지 보셨어요? 무어라고 씌어 있었어요?”

그때 비로소 유불란 선생은 입을 열었습니다.

“팔 호실에 든 박지용이란 사람과 군의 부친이 사실 같은 인물이라고 할 것 같으면 군의 아버지는 대단히 훌륭한 분이다.”

“왜요?”

“음, 아직 군에게 알릴 수는 없다. 차차 알게 될 테지.”

“선생님, 하여튼 어서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셔요.”

대준은 유 선생의 손을 잡고 흔들면서 애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 선생은 묵묵히 대준의 상처받은 어깨를 바라보고 있다가 늙은 의사를 향하여 몸을 일으키며 물었습니다.

“의사 선생님, 대준군을 잠깐 비행기에 실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 움직이지 않는 것만 못하겠지요만 뭐 상관없겠지요.”

이 말을 듣자마자 유불란 선생은,

“그러면 대준군, 수길군! 군들이 잃어버렸던 아버지를 찾으러 가자. 대준군은 박지용 씨를, 수길군은 강 박사를…….”

“정말입니까, 선생님?”

두 소년은 일시에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아직까지 거짓말을 못 해 본 사람이다. 두 분의 신변에는 지금 무시무시한 위험이 절박하고 있다.”

“무시무시한 위험?”

“그렇다!”

“그러면, 선생님, 우리들은 지금부터 어디로 기야 합니까?”

“황햇가 강 박사의 연구소로!”

“항햇가로요?”

흥분과 희망과 모험감에 떨리는 이 두 소년의 가슴 속! 황햇가 강 박사의 연구소에서는 과연 어떠한 무서운 일이 생길 것이며 유불란 선생이 본 아까 그 편지에는 무엇이 씌어 있었던가? 백가면은 또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으며 저 흉악한 스파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은 의문이 두 소년의 머릿속을 뭉게뭉게 떠돌기 시작하였습니다.


뜻밖의 일 편집

이리하여, 유불란 선생이 수길 소년과 함께 부상당한 대준 소년을 부축해 가지고 명동 동아호텔을 떠난 것은 어느덧 아침 햇발이 서울의 거리거리를 덮어 버렸을 때였습니다.

“선생님, 정말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까요?”

수길과 대준은 일시에 물었습니다.

“있고말고. 그러나 광주 가는 여객기는 오후 한 시 반에야 출발하게 되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하고, 중얼거리면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아직 일곱 시를 조금 넘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일곱 시 반 차로 광주행 급행을 타고 서울역을 떠났습니다.

대준 소년은 어깨가 무척 아팠으나 십 년 동안이나 소식 몰라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만난다는 실로 꿈과 같은 이야기에 모든 것을 잊어비렸습니다.

“선생님,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실까요? 아버지께서 어째서 황햇가 강 박사의 연구소에 계실까요?”

안타까운 듯이 이렇게 물었습니다마는 유불란 선생은 잠시 동안 묵묵히 대준 소년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알고 싶으냐? 그러면 이 편지를 보아라.”

하고, 아까 동아호텔에서 백가면이 창 밖으로 집어 던진 그 편지를 두 소년 앞에 꺼내 놓았습니다.

그것은 참말로 뜻밖의 일이었지요. 백가면에게 붙들리어 간 줄로만 알았던 강 박사가 박지용이란 사람에게 보낸 편진데 내용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박지용 씨! 빨리 연구소로 돌아오시오. 지금 이 해변에는 매일처럼 이상한 그림자가 나타나서 나를 죽이려는 시퍼런 칼을 던집니다. 어젯밤에도 연구실 담벽에 어디서부터 날아오는지 두 자루의 단도가 박혀 있었습니다. 생각컨대 기계의 비밀 서류를 빼앗으려는 스파이들의 장난인가 합니다. 한시바삐 쫓아 오시기를 바랍니다.

강영제〉

편지를 읽고 난 두 소년은 대체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강 박사는 백가면에게 붙들리어 갔는데 어떻게 황햇가 연구소에 계실까요? 그리고 박지용이란 사람과는 어떻게 서로 알며 백가면은 또 왜 이 편지를 스파이들에게 보이질 않으려고 들창 밖으로 버렸을까요? 네, 선생님. 좀 자세히 가르쳐 주셔요!”

하고, 절반은 애원하듯이 물었습니다.

“음, 가르쳐 주마. 이야기가 복잡하니까 잘 들어야 하는 거야!”

두 소년은 공손히 대답하였습니다.

“첫째로, 알아 둘 것은 백가면이 왜 강 박사를 붙들어 갔는가?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모를지도 모르나 지금 서울 안에는 강 박사 기계의 비밀 서류를 빼앗고자 국제 스파이단들이 강 박사를 붙들어 가려는 기맥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린 것이 즉 백가면이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필경에 강 박사는 그들에게 붙들려 가서 모든 비밀을 토할 것이니 그들보다 먼저 백가면 제가 강 박사를 붙들어다가 안전한 황햇가 연구소에 다 감추어 두었던 것이다.”

“그래서요? 헤에!”

두 소년은 눈을 둥그렇게 떴습니다.

“그러나 박사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만 비밀수첩을 말 위에서 헹길로 던져 버렸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크나큰 실수였지. 그래서, 백가면은 그 후 비밀수첩이 스파이들의 손으로 들어가기 전에 빼앗으려고 가진 애를 다 썼으나 결국 대준군의 꾀로 가짜 수첩만 가져갔었지. 진짜 수첩은 여기 있거든.”

유 선생은 포켓을 한 번 툭 치면서,

“그런데 대준군. 결코 놀라서는 안 된다. 백가면은 강 박사를 황햇가 연구소로 보낸 후 자기는 박지용이란 이름으로 동아호텔 팔 호실에…….”

하고 말도 끊기 전에 대준이와 수길은,

“뭐, 뭐라고요? 선생님!”

하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아, 그랬던가, 그랬던가? 백가면과 박지용이란 사람은 같은 얼굴이었던가?

“그러면, 선생님! 저 백가면이 저희 아버집니까?”

하고, 대준이는 유 선생의 팔목을 잡아 흔들었습니다.

“글쎄, 자세한 것은 나중에 봐야 하지만 하여튼 백가면과 팔 호실에 든 박지용이가 같은 사람이고 팔 호실에 든 박지용과 군의 부친 박지용 씨가 같은 사람이라면 백가면이 군의 부친일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대준 소년은 아무 대답도 없이 번개같이 지나가는 창 밖의 풍경을 꿈결처럼 내다볼 뿐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백가면이 사실 나의 아버지라면? 무서운 일이다.)

그는 치를 부르르 떨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백가면이 만일 나의 아버지라면? 하고 다시 한번 상상해 보매 그 용감하고도 사내다운 성격을 가진 백가면을 아버지로 섬긴다는 기쁨이 용솟음침을 전신에 느끼었습니다. 대준과 수길이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비둘기 발에다 매었습니다.


〈어머니, 저희들은 지금 유불란 선생과 같이 아버지를 찾으러 여행을 떠났으니 그리 아십시오.

대준, 수길 올림〉


그리고 들창을 열고 비둘기를 허공중에 띄웠습니다.


네 사람의 백가면 편집

세 사람이 광주역에서 다시 목포 가는 차를 갈아타고 목포에서 또다시 자동차로 서해 연변을 남으로 향하여 딛고 있을 때는 벌써 거치른 서해 위에서 저녁놀이 껌벅껌벅 춤추고 있을 때였습니다.

“얼마나 더 가면 되나요?”

“아직 한 오리는 더 가야지.”

왼편은 넓은 바다나 오른편은 험한 비탈입니다. 자동차는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면서 좁은 길을 어디까지나 남쪽을 향하여 갑니다.

그때…….

바로 그때였습니다.

자동차가 바로 눈앞에 가로막힌 커다란 바위 밑을 돌아설 순간 운전사는,

“아, 악!”

하고, 고함을 치면서 자동차를 멈추지를 않았겠습니까.

“백가면!”

대준이와 수길이도 벼락같이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아아, 이 어찌 된 일인가?

보라! 지금 자동차 앞에서 피스톨을 한 자루씩 겨누고 달려드는 백가면!

그러나 그것이 단 한 명이 아니라 한 명, 두 명, 세 명……. 모두가 치렁치렁한 흰 망토에다 그 무시무시한 해골 가면을 쓴 세 명의 백가면이 자동차를 삥 둘러쌌으니 움쩍할래야 움쩍할 수 없는 그들이었습니다.

대준 소년과 수길 소년은 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백가면이란 한 사람이 아니고 세 사람이었던가?

그럴 리가 있나, 그럴 리가 있나. 백가면이 세 사람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나타난 세 사람의 백가면은?

그때 유불란 선생이 굵다란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너희들이 요구하는 것이 대관절 무엇이냐?”

그랬더니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권총을 겨누며 세 사람을 차례차례 자동차에서 내려 세우질 않겠습니까.

그리고는, 운전사까지 네 사람을 어떤 나무 한 그루에 동여매 놓았습니다.

그때,

“선생님!”

하고, 수길과 대준이가 불렀습니다.

“선생님, 저놈의 백가면들은 지금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비밀수첩을 빼앗으려는 것입니다. 아아, 이 일을 어찌하나!”

하고, 발을 동동 굴러 보았으나 유불란 선생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준 소년은 한편 저 세 사람의 백가면 가운데 자기 아버지가 섞여 있으리라고 생각할 때 실상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백가면들은 대준, 수길, 유 선생……, 이렇게 한 사람씩 맡아 가지고 각각 그들의 포켓을 뒤지기 시작하질 않겠습니까.

그러나 명탐정 유불란 선생도 가슴을 겨누고 달겨 드는 무시무시한 권총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드디어 유불란 선생의 포켓에서 비밀수첩을 꺼내 들고 기쁜 듯이,

“응! 이것이다!”

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그들은 결코 한국 사람의 말소리가 아니고, 외국 사람들이 하는 한국말이었습니다.

대준과 수길은 그때에야 모든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스파이다!”

하고, 대준이가 고함을 치니,

“그렇다. 저놈들은 국제 스파이들이다! 백가면으로 가장하고 몸을 감추고 비밀수첩을…….”

하고, 수길이가 분한 듯이 나무 그루에 동여맨 손목을 풀려고 애를 써 보았으나 좀체로 풀리질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백가면들은…… 아니 저 밉살스런 스파이들은 비밀수첩을 빼앗아 가지고 자기네들이 타고 온 자동차, 저편 바위 밑 숲 사이에 멈추어 두었던 자동차를 향하여 의기양양한 발걸음으로 뛰어가질 않겠습니까.

“선생님, 이 일을 어찌합니까?”

하고, 두 소년이 일시에 물었습니다. 그러나 유 선생은 비장한 얼굴로 그들의 뒷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다볼 뿐이었습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실로 이상한 사건이 눈앞 약 백 미터 밖에서 일어났으니, 그것은 참말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보시오! 지금 세 사람의 백가면이 비밀수첩을 빼앗아 가지고 아주 좋아서 뭐라고 서로 떠들면서 자동차에 올라타려고 차 문을 휙 하고 잡아당기지를 않았겠습니까.

그 순간 세 사람의 백가면은 그만,

“악!”

하고 고함을 치면서 손들을 번쩍 들고 두어 걸음씩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으니 아아, 이 어찌 된 일이며 어찌 된 연고인가?

“아, 백가면이다!”

“또 한 사람의 백가면이 나타났다!”

“대관절 어찌 된 셈인가?”

대준과 수길은 이 참말로 기기괴괴한 광경에 절반씩이나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운전사는 그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지요.

그때 유불란 선생이,

“대준군! 지금 나타난 백가면이, 즉 군의 아버지다!”

하고 말하는 바람에,

“그래요? 선생님!”

하고 목이 메어서 부르짖는 대준 소년의 얼굴에는 기쁨과 놀라움이 뭉게뭉게 떠돌았습니다.

또 한 사람의 백가면, 그는 어느 사이에 자동차 안에 숨어들었던지 스파이들이 문을 열자마자 한 자루의 권총을 겨누고 자동차 안에서 바람과 같이 쑥 나타나서,

“홀덮(손을 들어라)!”

하고, 영어로 외치면서 자동차에서 내리었습니다.

이 실로 청천벽력 같은 사실에 스파이들은, 아니 가짜 벡가면들은 포켓에 든 권총을 꺼낼 사이를 그만 놓쳐 비리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마치 질풍과 같이 휙 하니 진짜 백가면을 향하여 달겨들지를 않았겠습니까.

그 순간, 진짜 백가면이 잡은 피스톨에서 하얀 연기와 함께,

“탕 탕……!”

하는 두 방의 총소리가 요란하게 공중을 울리었습니다.

다리에 총알을 맞고 바위틈에 쓰러지는 한 사람의 스파이!

그때 백가면이,

“아앗!”

하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쥐었던 권총을 땅 위에 던지질 않았습니까. 아아, 백가면의 오른 손목에서 뻗쳐 샘솟는 붉은 핏줄기…….

스파이는 자기가 쓰러지는 순간 들었던 비수로 백가면의 손목을 찔렀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점점 저물어 가는 황햇가 바위틈에서 두 사람의 스파이와 백가면 사이에는 보기에도 끔찍한 맹렬한 격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유 선생, 대준, 수길, 운전사…….

“백가면, 백가면!”

“아버지, 아버지!”

수길 소년과 대준 소년은 목청을 높여서 부르짖어 보았으나 바위틈을 이리 굴렀다 저리 굴렀다 하는 백가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스파이 한 놈이 시퍼런 칼을 백가면 가슴 위에 번쩍 들지를 않았겠습니까.

“앗, 아버지!”

대준은 차마 못 보겠다는 듯이 두 눈을 꼭 감았습니다.


날아가는 칼 편집

아아! 무기를 잃은 백가면을 죽일 듯이 날뛰는 양을 보라! 스파이 놈이 뽑아 쥔 시퍼런 칼날이 지금 백가면의 가슴 위에서 번쩍이고 있지를 않은가!

해는 무럭무럭 저물어 가고 바다 위에서 불어 오는 거치른 바람 가운데서 지금 스파이들과 백가면 사이에 무섭고도 짜릿짜릿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앗, 아버지!”

대준 소년은 그 순간 앞이 아찔해짐을 깨달았습니다.

“선생님, 이 일을,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러나 유불란 선생인들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를 잃어버린 유 선생의 얼굴에는 비분의 빚이 이글이글 떠오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된 셈인지 깔려있던 백가면의 몸뚱이가 벌떡 일어나자마자 스파이의 손으로부터 비수를 빼앗아 들고 쏜살같이 유불란 선생께로 뛰어옵니다.

그 순간,

“탕, 탕!”

하고 스파이들이 쏘는 권총 소리가 고막을 찢는 듯이 들려 오지를 않겠습니까.

뛰어오던 백가면은 땅 위에 납작 엎드렸다가 또다시 벌떡 일어나서는 유불란 선생을 향하여 달려옵니다. 그 뒤를 따라 권총을 든 스파이들이 뭐라고 서로서로 외치면서 쫓아옵니다.

“탕, 탕!”

대준의 귀밑으로 핑하고 지나가는 총알 소리!

목을 옴츠리는 대준 소년의 사지는 오싹하고 떨리었습니다.

백가면은 몇 번이나 엎드렸다 일어섰다 하면서 유 선생 앞으로 달려오자마자 툭 하고 유 선생의 포승을 끊어 놓으며,

“유불란 씨! 자아, 빨리 이 칼을 가지고 애들을 모두 끌러 주시오! 그 사이에 나는 저놈들을 막으리다!”

하고, 부리나케 부르짖었습니다.

유 선생은 나는 듯이 빠른 솜씨로 대준 소년과 수길 소년, 그리고 운전사를 끌러 주고 나서는,

“너희들은 빨리 숲 새로 들어가 숨어 있거라.”

하고, 고함을 치는 바람에 수길과 대준은 스파이들이 쏘는, 끝이 없는 총소리를 등 뒤에 들어가면서 어둑어둑한 숲 사이로 뛰어들어 갔습니다.

뛰어들어가서 휙 하고 뒤를 돌아다보니 백가면은 저편 바위 뒤에 몸을 감추고 유불란 선생은 이편 커다란 나무를 등지고 쉴새 없이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고 있습니다.

권총을 든 스파이들과 한 자루의 칼밖에 못 가진 백가면과 유불란…… 아아! 이 곤경을 어떻게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 자동차 운전사가 대준과 수길이가 숨어 있는 숲 새로 들어오더니 조그만 수첩을 내보이면서,

“이것이 아까 그놈들이 유 선생님 포켓에서 빼앗아 간 그 비밀수첩이 아닌가?”

하고, 속삭였습니다.

과연 그것은 틀림없는 비밀수첩이었습니다. 대준과 수길은,

“어떻게 이 수첩을?”

하고 일시에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게 저편 바위틈에 있었는데 아마 아까 백가면과 스파이가 싸울 적에 스파이들이 모르고 떨어뜨렸나 봐.”

수길과 대준은 이 뜻하지 않은 행운을 진심으로 축복하였습니다.

그때였지요! 스파이 한 놈이 백가면이 숨어 있는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가서 그런 줄도 모르고 숨어 있는 백가면의 머리를 겨누고 권총을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 순간 대준과 수길은,

“앗!”

하고 목멘 소리로 외치었습니다. 방아쇠만 잡아당기면 백가면,…… 아니 대준의 아버지 박지용의 목숨은 물거품같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대준 소년이 그렇게 부르짖었을 그 찰나 그들의 눈앞에는 실로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여러분, 보라! 지금 백가면의 머리에다 권총을 겨누고 우뚝 섰던 스파이의 커다란 몸뚱이가 마치 소리 없는 총알에나 맞은 듯이 허리를 뒤로 젖히고 바위 밑으로 무슨 인형처럼 떼굴떼굴 굴러 내려오고 있지를 않겠습니까.

“이게 대체 웬일인가?”

하고, 두 소년이 꿈결같이 고함을 쳤을 때 옆에 있던 운전사가 벙글벙글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유 선생이…… 유 선생이 던진 비수가 그놈의 오른편 옆구리에 맞은 것입니다!”

“그래?”

“뭐, 유 선생이 던진 칼이?”

그때야 비로소 두 소년도 이편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유 선생이 무엇인가를 던지던 것 같은 양을 본 것 같았습니다.

그러는 틈을 타서 스파이들은 부상당한 동료를 부축해 가지고 분주스러히 자동차를 타기가 바쁘게 소란스런 엔진 소리를 남겨 놓은 험준한 해안선을 연구소 쪽을 향하여 곧장 달아납니다.

“유불란 씨! 당신은 애들을 데리고 자동차로 따르시오! 나는 말을 타고…….”

이러한 한마디를 남겨 놓고 백가면은 비조처럼 망토를 펄럭거리면서 맞은편 산골짜기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운전사! 빨리 저놈들의 뒤를 따르라!”

유 선생은 애들과 같이 자동차에 올라타자마자 부르짖었습니다.

“네, 염려 마시오, 자동차가 부서지는 한이 있을지라도…….”

운전사도 기운이 나는 듯이 대답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두 대의 자동차가 황혼이 부옇게 깔린 황해 연안을 남으로 남으로 질풍처럼 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천벌 편집

얼마 동안은 두 대의 자동차의 거리는 퍽 떨어졌었으나 삼백 미터, 이백 미터, 백 미터…… 이와 같이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스파이들이 탄 자동차는 마치 콩 튀듯이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기진맥진하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백가면은 어디로 갔을까?”

사람들은 돌연 자취를 감춘 백가면이 근심되었지요. 아무리 뒤를 돌아다봐야 백가면이 따라오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수길 소년이,

“선생님, 안심하십시오. 비밀수첩은 또다시 우리 손으로 들어왔습니다.”

하고 보고하는 말에 유 선생도 적지 않게 놀라면서 수길 소년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 그랬던가?”

유 선생은 무척 기뻐하면서 잃어버렸던 수첩을 도로 포켓에 쓸어 넣으려는 바로 그때였습니다.

“앗! 저것을 보시오!”

하고, 고함치는 운전사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일시에 얼굴을 들지 않을 수 없었으니. 아아, 자세히 보라!

오른편은 험악한 산비탈이요, 왼편은 수백 길이나 되는 절벽…… 그 절벽 밑에서 지금 황해의 푸른 물결이 바위를 깨물었다 뱉었다 하고 있습니다. 그 산비탈과 그 절벽 사이에 마치 기나긴 허리띠처럼 뻗쳐 있는 한 줄기의 길…… 그 외줄기의 길 위를 지금 화살 같이 닫고 있는 스파이들의 자동차와 뒤를 따르는 대준 일행의 자동차…….

그러나 운전사가 고함친 것은 결코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스파이들의 자동차에서부터 약 오백 미터쯤 앞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나타났는지 백마를 탄 백가면이 두 칼로 망토를 날개처럼 활짝 펼쳐가지고, 말 탄 동상처럼 우뚝 서서 자동차 오기를 기다리고 있지를 않겠습니까!!

“백가면이다!”

“아버지다!”

수길과 대준은 그 장쾌한 용자에 저희들도 모르게 그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아아, 흉악하기 짝이 없고 밉살스럽기 한량없는 저 스파이들의 운명도 이제는 마지막이로구나! 갈래야 갈 데 없고 올래야 올 수 없는 그들의 딱한 운명이여! 앞에는 백가면, 뒤에는 유불란! 오른편은 산비탈, 왼편은 황해의 절벽이다!

그때, 스파이들은 백가면을 향하여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아아, 악한 자는 하늘이 이것을 망하게 하고 선한 자는 하늘이 이것을 돕는다더니 그것도 결코 헛된 말은 아니구나! 그들의 피스톨에는 탄환이 없다! 방아쇠는 그저 째깍하고 조그만 금속성의 소리를 낼 뿐입니다.

백가면과 대준들의 자동차는 스파이들의 자동차를 사이에 끼고 점점 다가듭니다. 오십 미터, 이십 미터.

그 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실로 뜻하지 않은 무서운 광경에 그만,

“아, 아, 앗!”

하고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니, 참으로 그것은 눈 뜨고 보지 못할…… 마치 활동사진에서 흔히 보는 너무나 처참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스파이들은 그만 백가면과 유불란 선생이 앞뒤에서 몰아치는 바람에 일순간 눈앞이 아찔해져서 핸들 잡은 손이 그만 휘끈 하고 왼편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입니다.

자동차는 세 사람의 스파이들을 실은 채 마치 장난감 자동차가 테이블 밑으로 떨어지듯이 수백 길이나 되는 높은 벼랑 위에서 때마침 희미하게 떠올라 온 달빛을 헤치면서 감감하게 내려다보이는 절벽 아래로 총알처럼 굴러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저런, 저런!”

“저 일을 어찌하나!”

두 소년이 서로서로 껴안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을 때는 벌써 스파이들의 자동차는 멀리 발밑에서 ‘철썩’ 하는 소리를 남겨 놓고 깊고 깊은 황해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하였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절벽 위에서 감감한 바다를 내려다보며 그들의 참혹한 최후를 미워한다는 것보다도 도리어 한 줄기의 동정의 마음을 금치 못하면서 얼마 동안은 묵묵히, 마치 부처님들처럼 서 있을 뿐입니다.

그때 백가면은,

“비밀수첩도 영원히 그들과 함께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구나!”

하고 탄식하는 말에,

“비밀수첩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유 선생이 수첩을 내보이면서 설명을 하니,

“네, 그렇습니까?”

하고 감개무량한 듯이 백가면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시선을 돌려 대준 소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박대준이지? 오늘 아침 동아호텔서 총에 맞은 상처는 좀 어떠냐?”

하고, 백가면은 물었으나 대준 소년은 어떻게 된 셈인지 그렇게도 그리던 아버지를 눈앞에 보면서도 입이 꽉 막혀서 아무 대답도 못 했습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아버지, 아버지!”

하고 마음속으로는 불러 보았습니다마는 이 어찌 된 일인가. 갑자기 목구멍이 막힌 것 같았습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유불란 선생이 백가면을 향하여,

“박지용! 이젠 그만했으면 그 무시무시한 가면을 벗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리고 그렇게도 그리던 아버지 얼굴을 대준군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은근히 권하는 말에,

“유불란 씨!”

하고, 백가면은 손을 유 선생께 내밀면서 악수를 하였습니다.

“대준이를 이처럼 사랑하여 주시어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하고, 그 보기 싫은 해골의 탈을 벗으려고 하는 바로 그때였습니다.

옆에 서 있던 수길 소년이,

“선생님, 저기 저 껌벅껌벅하는 불이 무엇일까요?”

그렇게 묻는 말에 사람들의 시선은 일시에 그리로 몰리었습니다.

“아, 그것이 바로 강 박사의 연구소다!”

하고, 백가면이 외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부터 약 일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저편 절벽 위에 마치 무슨 고성과 같이 우뚝 솟아 있는 커다란 양옥이었습니다.

“아, 저것이 연구손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부르짖었을 때,

“앗! 여러분! 강 박사는 지금 그 어떤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보시오, 저 껌벅거리는 불의 신호를 보시오!”

하고, 백가면이 고함을 치면서 휙 하고 말 위에 올라타지를 않았겠습니까.

유불란 선생도 애들을 데리고 또다시 자동차를 타고 연구소를 향하여 몰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끊임없이 껌벅껌벅하는 불빛의 신호…… 그것은 우리들이 흔히 보는 전신용 기호와 같은 것으로써 또츠 또츠를 흉내 내서 불빛으로 보내는 위험 신호였습니다.

위험하니 누구든지 빨리 와서 구해 달라는 표식이었습니다.

아아, 연구소에는 또 어떠한 일이 벌어져 있을 것인가. 과연 강 박사의 운명은 어떻게 되나. 그러나 수길아, 염려 마라! 한국서 제일가는 유불란 탐정과 전 세계를 노려보고 있는 백가면이 우리 편이 아니냐!


단추를 눌러라 편집

백가면이 탄 말은 지금 꼬리를 활짝 펼치고 자동차보다 백 미터나 앞서서 강 박사의 연구소를 향하여 총알처럼 달아나고 있습니다.

어스름 달밤, 황해의 거치른 물결은 멀리 벼랑 밑에서 출렁거리고 밤은 쉴 새도 없이 점점 깊어 가고 있습니다.

보시오! 강 박사의 연구소에서는 ‘위험 신호’가 끊임없이 껌벅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여보, 운전사! 좀 더 빨리!”

수길 소년은 악한들의 칼에 벌써 피를 줄줄 흘리면서 쓰러지는 아버지를 머리에 그려보며 그렇게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덧 백가면과 자동차는 밤하늘을 등지고 마상처럼 높이 솟아 있는 연구소 문 앞까지 다다랐습니다.

“떠들면 안 됩니다!”

그때 백가면은 그렇게 속삭이며 말에서 내렸습니다. 유 선생, 대준, 수길이도 자동차에서 가만히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편에는 아무런 무기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아까 그 스파이들에게 죄다 빼앗긴 때문입니다.

“피스톨이 없어서 어떡합니까?”

하고, 유 선생이 묻는 말에 백가면은,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지금 불이 껌벅껌벅하는 저 삼층에는 강 박사가 감금을 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층 연구실에는 어느 나라 스파이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몇 놈의 스파이들이 기계에 관한 비밀을 알려고 애를 쓰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과연 들창 너머로 들여다보니 두 놈의 스파이가 검정 마스크로 눈과 코를 가리고 강 박사가 연구해 놓은 기계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조사하고 있지를 않겠습니까.

백가면은 또 목소리를 낮추어서,

“그런데 유불란 씨는 오른편 문 밖에 가만히 숨어 있다가 내가 눌러라!’ 하고 고함을 치거든 바로 문 안 담벽에 붙은 하얀 단추를 힘껏 누르시오! 알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너희들은 떠들지 말고 이 들창 아래 숨어 있거라!”

하고 대준과 수길, 그리고 운전사에게 명령한 유불란 선생은 발자국 소리를 죽여 가며 오른편 문으로 기어갔습니다.

한편 백가면은 왼쪽으로 돌아가질 않겠습니까.

“대관절 어떻게 할 셈인고?”

두 소년은 칼 한 자루 갖지 못한 백가면과 유 선생이 대체 무슨 수로 저놈들을 잡으려는지 아무리 생각하여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운전사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였지요. 밤은 점점 깊어 갑니다.

황해에서 들려 오는 모진 물결 소리, 숲을 지나오는 바람 소리……. 두 소년은 숨을 죽이고 들창 아래 엎드려 있다가 그만 안타까워서 머리를 들고 유리창 밖에서 연구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보니, 스파이 들은 저희끼리 뭐라고 쑥덕쑥덕하면서 시방 한창 기계를 만져 보고 비틀어 보고 빼 보고 넣어 보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들창 밖에 사람들이 숨어 있는 줄을 도무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였지요. 연구실 왼편 문이 슬그머니 열리자 바람처럼 백가면이 쑥 나타나지를 않았겠습니까. 순간 스파이들은 화닥닥 놀라서 어느 새에 피스톨을 꺼내 백가면을 겨누며 다가들었습니다.

백가면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번쩍 들고 한 걸음 뒤로 움찔 물러섰습니다.

“오냐, 네가 백가면이란 놈이로구나! 그러나 꼼짝만 하면 네 목숨이 달아난다!”

하고 서투른 한국말로 한 놈이 명령하듯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백가면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손을 든 채 한 걸음 두 걸음 연구실 한복판으로 뒷걸음질을 합니다.

대준과 수길은 대체 이 일이 어떻게 될는지 무시무시하고도 마음이 졸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놈들이 한 방 탕 하고 쏘기만 하면? 아, 참말로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백가면은 아주 천연스럽게 자꾸만 뒤로 옮기질 않겠습니까.

바로 그 순간입니다.

“눌러라!”

하고 외치는 백가면의 고함 소리와 함께 두 방의 총소리가 ‘탕 탕’ 하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 두 방의 총알은 백가면을 쏘지 못하고 천장을 쏘았습니다.

어째 그러나 하면 백가면의 ‘눌러라!’ 하는 고함 소리와 함께 오른편 문 밖에 숨어 있던 유불란 선생이 바로 문 안 담벽에 붙어 있는 조그만 단추를 힘껏 눌렀던 때문입니다.

단추를 누르자마자 그때까지 스파이들이 서 있던 방바닥 널빤지가 사방 여섯 자쯤 덜컥 하고 밑으로 빠지며 스파이 두 놈은 그만 그 컴컴하고도 지옥 같은 굴속으로 떨어져 버리었습니다.

아아, 그 무서운 굴 속. 그것은 천 길 만 길이나 되는 절벽을 뚫고 황해 바다 밑으로 빠져 내려가는 무서운 구멍이었습니다.

“앗!”

하고 부르짖는 스파이들의 외치는 소리와 그들이 쏘는 총소리는 일시에 일어났습니다.

백가면과 유 선생이 뛰어가서 써늘한 바람이 휙 하고 불어 나오는 그 컴컴한 구멍에다 귀를 가만히 기울여 보았을 때는 이미 밑에서 가늘게 들리는 물결 소리밖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한편 수길과 대준은 그때 벌써 층층대를 이층으로 향하여 나는 듯이 뛰어 올라갔습니다.

“아! 저것이 아버지가 갇힌 방이다!”

하고 고함치는 수길 소년의 손가락은 아직도 끊임없이 껌벅거리는 어떤 방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강 선생님 방이다!”

두 소년은 달려가서 문을 두드려 보았으나 문에는 기다란 자물쇠가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백가면, 유 선생, 그리고 운전사가 뛰어 올라와서 힘을 모아 일시에 문을 떠밀었습니다.

문은 드디어 열리었습니다! 아아,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서 무엇을 보았는가?

강 박사! 입에는 재갈이 물리고 뒷짐을 지워 꽁꽁 동여진 강 박사. 기진맥진하여 거의거의 죽어 가는 늙은 강영제 박사가 벽에다 간신히 몸을 의지하고 전기 스위치를 머리로 눌렀다 뗐다 하는 비참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아버지!”

하고, 달려드는 사랑하는 아들 수길 소년을 보자 강 박사는 그만 방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강 선생님, 정신을 차리시오!”

백가면과 유 선생은 재갈과 포승을 풀어 놓았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승리입니다! 모든 것은 다시 우리들의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강 박사는 간신히 눈을 뜨고 자기를 뺑 둘러싸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꿈결처럼 쳐다보며 괴로워하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희망과 미소가 빙그레 떠돌았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강 박사는 힘없는 손을 들어 겨우 백가면과 유불란 선생의 손을 꽉 부여잡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강 박사는 그리고 수길 소년과 대준 소년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너희들의 얼굴을 본 지가 참 오래됐구나! 곡마단 구경을 갔다 오던 길에 그만 이 백가면한테 붙들려서…….”

하고, 힘없이 웃었습니다.

“아버지, 나는 끝끝내 아버지와는 다시 못 만나는 줄 알았어요!”

수길은 그만 아버지 가슴에다 얼굴을 파묻고 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수길아! 너는 슬퍼서 우느냐, 기뻐서 우느냐?


백가면의 얼굴 편집

얼마 동안을 지나니 강 박사도 차차 기운을 회복하였습니다.

유 선생은 그때 백가면을 향하여,

“자아, 이제는 그 무시무시한 탈을 벗으시오.”

하고 은근히 청하니 백가면은,

“그럽시다!”

하고 대답하면서 먼저 얼굴에 썼던 해골 가면을 슬며시 벗지를 않겠습니까!

아아, 백가면, 백가면! 세상 사람들이 궁금해하던 백가면의 정체는 지금 사람들 눈앞에 나타났다! 사십이 될락 말락 한 늠름한 신사. 얼굴이 갸름하고 횃불처럼 빛나는 눈동자!

“아버지!”

대준 소년은 그때야 비로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따스한 감정이 북받쳐 오름을 전신에 깨달았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는 백가면의 얼굴— 그것은 대준 소년이 세 살 때부터 그리워하던 얼굴이었으며 사진으로만 보아 오던 아버지의 훌륭하신 얼굴이었습니다.

“대준아, 어머니도 안녕하시냐?”

백가면은, 아니 박지용 씨는, 아니 대준의 아버지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렇게 물으면서 사랑하는 아들 대준의 몸뚱이를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대준은 아무 말도 없이 머리를 끄덕거릴 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 무정한 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하더냐?”

“아녀요. 사진을 들여다보고서 늘 아버지 말씀만 하셔요. 그리고 아버지는 인도 셀론도 근방에서 무서운 해적들에게 붙들리어서 그만 세상을 떠나셨다고……. 그러면서 저를 품에 안고 느껴 우신답니다. 살아 계시면 편지라도 한 장 하실 텐데, 그것조차 없으니 돌아가신 것이 분명하시다고…….”

“음!”

박지용 씨는 한 번 길게 신음하고 나서,

“사실은 편지라도 한 장 띄워서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었으나 사정이 사정이므로 그만…….”

그리고 박지용 씨는 지나간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습니다.

십 년 전 일입니다. 세계 각국으로 장사를 하러 돌아다니던 박지용 씨는 인도 봄베이에서 조그만 기선을 타고 인도 남단을 뺑 돌아 마라카 해협을 빠져 남지나해를 거쳐서 한국으로 돌아올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봄베이를 출범한 기선은 바로 셀론도를 지나 마라카 해협을 향하고 닫고 있던 그때 어디로부터 나타났는지 어둑어둑한 황혼이 빈틈없이 깔린 바다 위 저편 쪽에서 돌연 해적선 한 척이 쏜살같이 이편으로 달려오질 않겠습니까.

“앗! 해적선이다!”

망원경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선장이 부르짖었을 때는 벌써 백 미터 앞까지 다가들었습니다.

이리하여, 해적선과 기선 사이에는 한참 동안 사격전이 일어났었으나 마침내 선장은 항복한다는 깃발을 띄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칼과 총을 들고 기선으로 올라오는 해적 떼. 그것은 남지나해를 근거지로 하고 근방 일대를 소란시키고 있던 전부가 외국인으로 조직된 해적 떼였습니다.

그것은 하여튼 해적들은 손님들의 재물을 모두 빼앗은 후에 그중 가장 늠름하고 힘 있어 보이는 청년 몇 사람을 사로잡아 갔던 것입니다. 박지용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박지용 씨는 그 무서운 해적선으로부터 도망할 셈으로 기회만 엿보았으나 좀체로 도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세월은 쉴 새 없이 흘러갑니다. 지금은 해적이 된 박지용, 그는 점점 해적들에게 신용을 얻게 되어 그들의 비밀을 죄다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비밀— 그것은 세계 각국으로 돌아다니면서 그 나라의 가장 훌륭한 보물을 훔쳐 오겠다는 계획입니다.

그러나 이 위험한 사명을 다할 사람은 그들 가운데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때,

“수령! 내가 훔쳐 오겠습니다!”

하고 나선 것이 박지용 씨였습니다.

수령은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수령의 허락에는 다음과 같은 무서운 조건이 붙었습니다.

“네가 만일 다른 데로 도망하든가 혹은 우리들의 근거지를 경찰 당국에 밀고하든가 하는 때는 너의 목숨은 즉시로 사라질 것이다. 네가 가는 곳마다 반드시 너를 감시하는 사람이 지키고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박지용 씨는 영국 사잠프론에서 상륙하여 백가면의 탈을 쓰고 런던으로 들어갔습니다.

과연 그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무서운 감시의 눈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훔친 물건은 죄다 그 감시자인 해적에게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런던에서 베를린으로, 베를린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뉴욕으로, 그러나 상해에서 백가면은 마침내 그 감시자를 어떤 컴컴한 골목에서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박지용 씨는 그 무시무시한 해적들의 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박지용 씨는, 그러나 국제 도시 상해에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세계 각국의 스파이들이 강영제 박사가 연구하고 있는 무서운 기계의 비밀을 탈취하고자 서울 장안으로 몰려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오냐! 너희들보다 먼저 내가 그 비밀수첩과 강 박사를 안전한 곳에다 숨겨 둘 테다!”

백가면은 그렇게 부르짖으며 한국으로 건너온 것입니다.

“그러나 스파이들이 곡마단의 곡예사로 몸을 숨기고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그러던 것이 동아호텔에서 우연히 그 정체를 발견했습니다.”

박지용 씨의 기나긴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박지용 씨가 걸어온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며 후유 하고 한숨을 지었습니다.

“내가 유불란 씨에게 그처럼 협박장을 보낸 것은 결코 악의로 한 일이 아니지요. 유불란 씨를 보호하고 싶었던 때문이지요. 스파이들은 비밀수첩을 가진 유불란 씨를 기회만 있으면 죽이고라도 빼앗으려고 한 때문입니다.”

“네, 나도 처음에는 당신의 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으나 남대문 사건이 있은 후부터 차차 백가면이란 인물이 결코 악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고, 유 선생은 대답하면서 들창을 열고 어느덧 훤하게 밝아 오는 황해 바다를 내다보았습니다.

“자아,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는 서울로!”

그렇게 말하며 사람들을 돌아다보았을 때, 박지용 씨는 옆에 놓인 해골 가면과 흰 망토를 집어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물결 위에 던지며,

“백가면아, 잘 가거라! 네 신세도 인젠 다 졌다!”

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기쁘면서도 어딘가 섭섭하고 쓸쓸함이 차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준 소년과 수길 소년은 흰 나비와도 같이 펄럭거리면서 내려가는 망토를 목을 늘여 내려다보며,

“백가면아, 잘 있거라! 백가면아, 잘 있거라!”

하고, 가만히 불러 보았습니다.

아아, 비밀수첩도 이제는 우리 손에 들어왔다! 세계의 발명가 강영제 박사도 이제는 무사히 구하였다! 대준이가 십 년 동안이나 기다리던 아버지도 이제는 찾았다!

“한시바삐 서울로 가서 어머니를 기쁘게 하자!”

대준과 수길은 일시에 그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이리하여, 수길은 강 박사와 유 선생들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대준은 박지용 씨와 말을 타고 즐거운 얼굴로,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연구소를 떠난 것은 어느덧 파도 높은 황해 바다 위로 황금색 햇발이 늠실늠실 기어오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지나간 날의 모든 풍파와 파란을 전혀 잊어버린 듯이 이 장엄하고도 황홀찬란한 대자연을 눈앞에 볼 때 그들의 마음에 기어들기 시작하는 것은 오로지 한 개의 커다란 자비심,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자연이 자아내는 이 커다란 사랑 앞에 어둠도 없고 슬픔도 없고 싸움도 없고 시기도 없고 질투도 없습니다. 희망의 나라! 희망의 세계!

대준은 말 위에서, 수길은 자동차 안에서 두 팔을 번쩍 들고,

“황해야! 황—해—야!”

하고, 커다란 목소리로 고함을 쳤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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