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으련 하다가 채 못 깊고 새는 게 첫여름의 가냘픈 새벽이다.

밤은 대전역(大田驛) 그 근처서부터 벌써 동이 트더니, 호남선으로 선로가 갈려들어, 촌 정거장을 세넷 지나 K역을 거진 바라볼 무렵에는 연변의 농가에서 마침 연기가 겨루듯 솟아오르고, 두어 장 구름이 잠자던 동녘 수평선 위로 불그레 햇살이 퍼지기 시작한다.

차는 유축 없이 그대로 세차게 달리고……

경희는 차창 앞으로 바투 다가앉아 눈에 들어오는 대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기에 한동안 무심하다.

끝없이 퍼져나간 넓은 들이 창밖에서 커다랗게 회전을 한다. 들바닥에는 오늘도 날은 좋으려는지 엷은 안개가 조용히 잦아졌다.

잘 갈아서 잘 태운 마른갈이 논이 자꾸자꾸 잇대어 있는 사이사이로, 바다 가운데 작은 섬 같은 못자리판이 물을 그득 싣고, 모는 이쁘게 푸르다.

논도 못자리판도 모내기를 앞에 두고서 마침 서로 대기를 하고 있는 체세다.

조그마한 야산(野山) 산발을 타고 모퉁이를 돌아 나서면, 얕은 언덕을 의지 삼고 다섯 채 열 채 농가가 들어앉은 촌락이 으레껀 기다리고 있다. 울타리도 앞뒤 언덕도 모두 푸르다. 그중에 보리밭만 보리가 익어서 누렇게 고스러졌다.

언덕과 촌락이 다하면 다시 들판이 넓고, 들판을 한동안 잊고 달리느라면 어느새 또 비슷 같은 언덕과 촌락이 나오고……

평범하다 할지언정 별반 탐탁스럽게 아름다운 경치는 아니다. 그러나 그만해도 벌써 육칠 년 전, 그때까지는 일 년 두고도 몇 차례씩 고향을 오고가고 하면서 자주자주 대하던 연변의 풍경이요, 그러한 만큼 어쩌면 모두가 낯에 익은 듯, 또 어쩌면 생소한 듯한 것이 모처럼 반가와서 좋고 겸하여 비록 교외에서 거처는 했다지만 그와는 정취가 달라, 아낌없이 개방적인 첫여름 전야(田野)의 아침이 신선해서 또한 좋았다.

차안의 자리는 이제는 차라리 적적할 만큼 성글어, 경희가 앉았는 좌석에도 아까 어디께선가 타던 촌 영감이 마주 편안히 혼자 앉았을 뿐이다.

밤새도록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한 경희는 비로소 좌석이며 주위가 단출하고 한 김에 문득 잠을 청해보느라고, 고개를 반듯이 뒤로 기대고 조용히 눈을 내려감는다. 그러나……

간밤의 이 찻간은 대단히 분잡했었다. 처음 떠나는 경성역에서부터 자리가 꼭꼭 들어찬 것은 물론이요, 그렇게 타고서도 더 넘쳐서 웅기중기 서서 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었다.

경희는 겨우 어떻게 자리를 잡기는 했었으나, 옆과 앞으로 맨판 낯모를 남자들과 어깨나 무릎을 서로 맞대다시피 끼여 앉았는 틈사구니가 되고 보니, 가령 남달리 결벽이 있고한 신경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붐배통에 박혀 앉아서 꾸벅꾸벅 대고 졸아 쌓고 졸다가는 곤드레만드레 남의 사내들과 살을 마주 비벼대고 한 대서야 젊은 여자의 체모에 그다지 아름다운 포즈는 아닐 것이었었다.

경희는 그리하여 애전에 잠을 경계했었고, 실상 또 경계야 하나마나, 가뜩이 예민한 신경인데 역과 찻간의 잡답에 흥분은 되었겠다, 담배연기 등속으로 공기는 탁하겠다, 설사 자고 싶은 마음이 내켰더라도 수월하게 졸음이 올 계제가 아니었었다.

잠은 그래서 잘 수도 없고 오지도 않았고, 온 밤을 곱다시 앉아, 침침한 불빛에 잡지를 뒤지다가 말다가 꼬박 뜬눈으로 밝히고 말았던 것이다. 하고는 이제야 겨우 한잠을 청해 보던 것인데……

그러니, 단 하룻밤 동안이라고는 하지만 원이 그다지 완구하지 못한 건강으로 전에 않던 무리를 졸지에 그렇게 치른 탓인지, 머리가 무겁고 사족이 나른한 게 몸이 대단히 피로하기도 했고, 일변 또, 주위는 그새 보다 한결 조용할 뿐 아니라 훨씬 임의롭기도 하고 한 터이니, 앉아서 조용히 청하는 대로 이내 잠이 왔어야만 할 것이었었다. 그러나 잠은 용이히 오지를 않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 신경은 가벼운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혹시 그것이 지나친 피로 끝에 오는 일시적 불면증의 증세더냐 하면 전연 그런 것과도 계통이 다르다.

처음에 문득, 잘 생각이 나가지고 그 생각을 그대로 지닌 채 이어 눈을 감고 잠을 벼르기 시작했을 때에는, 잠시 한동안은 끊임없이 울리는 차바퀴의 리드미컬한 음향이 유쾌하고 하여 금시로 달콤한 졸음이 올 듯 올 듯하기도 했었는데, 그 올 듯 올 듯하는 졸음을 안타까이 갖다가, 다른 한 가닥의 신경이 나서서 거절을 하고 있었고.

이 졸음을 거절하는 한 가닥의 신경의 긴장이 바로 이제 오래지 않아서 대하게 될 어떤 조그마한 모험을 위하여 진작부터 무의식하게 대기가 되었던 하나의, 역시 조그마한 흥분이었던 것이다.

비로소 그 연유를 깨달은 경희는, 약간 제 자신을 비양하는 기미가 없지 못한 미소를 입가로 드러는 내면서도, 그러나 조금치도 그에 항거하려는 의사는 가지지 않고, 오히려 눈을 도로 뜨고 정신을 가다듬어, 방금 고의는 아니었으나마 주인을 무시하고서 침노했던 ‘잠잘 생각’을 쫓아버린다.

그러고도 미진하든지 그는 정신도 더 차릴 겸, 젊은 여자의 운명인 화장도 할겸, 행구에서 세면도구를 꺼내 들고 화장실을 찾아간다.


멀리 여덟 해 전, 경희의 나이 열일곱 살 적에, 여학교 삼학년에 재학 중이던 소녀 경희는, S라고 하는 중학생과 연애라고 하는 걸 했었다.

경희는 처음에야 연애가 무엇이며, 또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지도 못했으나, 같은 하숙에 있는 동무가 셋이 죄다 그 연애라는 걸 하고 있고, 그런데 저만 않는 것이 남의 축에 빠지는 반편인 것 같아서 마음이 대단히 좋지 않았었고, 하던 끝에 동무들이 그 눈치를 챘던지 미안히 여기고서 그 S라는 중학생을 소개시켜, 연애를 붙여주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연애라야 별것이 아니고, 동무들이 하는 본을 받아, 제가 사랑하는 그 남자와 같이서 놀고 그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남들은 연애를 하면, 머 재미가 옥실옥실하고 어쩌고 하다는데 경희는 통히 그런 맛을 모르겠고, 도리어 ‘사랑하는’ 그 S가 싫고 밉고 무섭기만 했었다.

아무려나 한 주일 동안 연애를 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S가 백화점에서 시계를 훔치다가 경찰서에 붙들려 가버렸다.

경희는 그리하여 실연을 한 셈인데, 그래서 동무들도 서로가람 위로를 해주고 했지만, 경희는 정작 조금도 슬프지도 않고 ‘자살’할 생각도 나지 않고, 차라리 S를 보지 않게 된 것이 속으로 시원했었다. 그것보다는 연애를 시작한 사흘 만에 그 달치 학비 삼십 원이 온 것을 송두리째 S가 급히 쓸 데가 있다고 취해갔는데 장차 그걸 메꿀 일이 큰 걱정이었었다.

증인으로 경찰서에도 불려갔었다. 경찰서에서는 S의 애인이, 경희 말고도, 어디어디 식당에 있다는 여자가 넷이나 와서 있었다.

이월 달에 그렇게 연애와 실연과 연애 청산과를 한꺼번에 했는데, 오월 달부터는 배가 부르기 시작했고, 동지달에는 고향집에 누워서 애기를 낳았다.

그러기 전에 양편 부모네가 타협한 게 있어서, 애기는 젖꼭지도 물리지 않고 저편에 내주어 버렸다. 마침 저편에서는 S의 아낙이 젖먹이를 데리고 있어서 그 손에다가 맡겨 둘을 같이 기른다는 것이었었다.

이래 팔 년……

그동안 경희는, 해산을 하던 이듬해 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모든 것을 잘 씻어 덮었던 덕에, 전에 다니던 학교를 마저 마치고 이내 동경으로 건너가 ××여자대학에 입학을 했고.

일 년 남짓이 다니다가, 차차로 악화된 폐병을 어찌할 수 없어, 꼬박 이태 동안을 요양원과 고향집에 누워서 정양을 하고 지냈고.

그리고 시방은 서울서 시외에다가 선‧룸 딸린 조그마한 방갈로 한 채를 세우고, 넓은 터전에는 화초를 길러 본전 밑지는 장사를 하면서 호젓이 사 년째 세월을 보내고 있는 참이고.

하면서 거진 두문불출이로되 마침 오늘은 고향집으로 모친의 회갑에 참예를 하러 내려가는 길이고.

아직도 젊은 나이면서 그렇게 칩거를 하여 화초나 가꾸고, 찾아오는 두어 사람 극히 친한 동무나 맞아 한담이나 하고, 일 년이 다 가도록 거리에는 한 번 나와 보는 법 없고, 하는 양이 어쩌면 청춘과 속세의 생활을 이미 단념해버린 사람같기도 하다.

그러나 경희는 일찍이 한번도 그와 같은 단념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작년 올로 들어 건강이 차차로 더 충실해가는 줄을 아는 그는, 종차 마음에 드는 착실한 사람이 있게 되면, 삼십 신부란 말을 듣기 전에 쉬이 결혼을 해야 하겠다고, 일종 초조한 생각까지 하고 있는 참이다.

물론 성미가 유난히 까다로운 만큼, 그 소위 제 마음에 들 착실한 사람이라는 게 그리 용이할 노릇이 아니었었다. 그중에도 그는 처재(妻財)에만 탐이 나서 아내 될 사람의 과거의 흠집을 짐짓 괘념치 않으려고 하는 위인이어서는 안 될 테였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것을 초탈한 사람이어야 할 것이고, 적어도 경희 자신이 그 흠집에 대하여 담담한만큼은 담담해야 할 것이었었다.

경희는 제 자신의 낡은 흠집을 결코 잊어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걸로 인하여 철이 든 이후로는, 심리적 고통을 부담하지도 않는다.

S에 대해서는 더구나 좋고 낮고가 없이 한 장의 사진과 같은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고, 자식에 대해서는 그보다는 약간 자극적인 무엇이 있어서, 가령 잘 자라기나 하는지, 생기기는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려나 한번 얼굴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든지, 이러한 정도의 호기심으로 가끔 가끔 생각이 나곤 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지 그 이상 더 나아가, 안타깝게 보고가 싶다거나 에미의 죄를 뉘우친다거나, 그리하여 모든 것을 다 불고하고 아이를 데려다가 기르고 싶다거나 하는 등속의 고통은 하나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작년 봄에는 늘 찾아오는 친한 동무 하나가, 시골 시댁에를 다니러 갔었는데 거기가 마침 S의 고향일 뿐 아니라 먼 발로 일가도 되고 해서, 말말 끝에 나온 그 애의 소식을 들어다가 경희에게 전해 준 일이 있었다.

그 동무의 전하는 말을 들으면, 아이는 봉식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부르고 닮기는 S를 닮았으나 몸이 약질이고, 재주가 있는지 멍청한지 그것은 몰라도 S의 본실 아낙을 아직껏 저의 어머니로 알고 있고, 그리고 벌써 학령이라 명년, 즉 금년에는 입학을 시킬 차례고, 그러나 그곳 ×역에는 학교가 없어서 △역까지 기차통학을 시키게 되고, 대강 이런 내용이었었다.

경희는 그것이 비로소 처음 듣는 소식이었고, 그런 만큼 신기하기도 하고 일변 반갑기도 하기는 했었으나, 역시 담담한 가운데 호기심의 만족을 채운 것뿐이지, 종시 무슨 애정 같은 것이 와락 솟는다거나, 따라서 마음의 동요가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결국 그리하여, 경희 제 자신의 지나간 그 흠집에 대한 심정은 말썽 없는 하나의 반점(斑點)과 같은 것이었었다. 한번 박히고 나서부터는 간대로 사그러지지도 않거니와 또 불크러 오르거나 아프지도 않고, 끝끝내 한 모양을 지니고 있는 반점이던 것이다.

그 불변색의 반점이 그런데 어떤 시공(時空)의 변화의 자극을 받아, 바야흐로 조그마한 조화를 부리려 들던 것이요, 그러나 그 조화의 한계란 위험이 없고 번연히 속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서, 당자 경희는 놀라거나 짐짓 피하는 대신 가만히 재미삼아 그를 맞이하려 하는 참이었다. 졸음을 무심코 거절하면서 가벼운 긴장으로 기다리던 조그마한 모험이란 게 바로 그것이던 것이다.

K역을 지나면 바로 그 다음이 ×역이다. 만일 그애 봉식이가, 작년 봄에 듣던 말대로 금년에 입학을 해서 △역 앞에 있는 소학교로 기차 통학을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역에서 이 차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오르기만 오르면 만나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요량이다.

물론 만나본다고 하더라도 달리 무얼 어찌하겠다는 생각은 아니다. 그저 여러 아이들 속에서 그애를 보아 알아내는 것이 첫째 흥미요, 그 다음에는 다시 찬찬히, 어떻게 생겼는가 보기도 하고, 무어라고 말도 시켜 보고, 그리고 그애를 실지로 보느라면 경희 제 마음은 그때에 어떠한 반응이 생기는가 그것도 시험해보고 하자는 것뿐이다.


K역을 떠난 지 얼마 안 가서 차는 ×역 구내로 들어섰다.

경희는 차창 밖으로 몸을 내싣고 가까워오는 플랫폼을 분주히 살펴본다. 여느 승객은 하나도 없고 역시 굵은 놈 잔 놈 섞어 통학생들이 칠팔 명은 되게 차를 기다리고 서서 있다.

경희는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그대로 내다보고 있는 동안에, 이윽고 차가 멈춰서고, 아이들은 가까운 맨 앞찻간으로 죄다 올라탄다.

경희는 부리나케 앞찻간으로 달려갔다. 가면서 이편으로 이동해 오는 아이도 만나고, 거기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앉은 아이도 보았다.

승객도 많지 않거니와 또다른 소학생이라고는 하나도 먼저부터 타고 있는 아이가 없어서 경희는 수월하게 이번에 탄 아이들을 일일이 찾아낼 수가 있었다.

두어 번이나 오락가락하면서 그중의 셋을 우선 골라냈다. 그 세 아이는 나이가 일곱 살 아니면 여덟 살씩밖에 안 되어 보이는 것이, 지난 봄 처음으로 입학을 한 일학년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중에서 다시 둘은, 둘이 다 제 밥술이나 먹는다는 S의 집 아이거니 싶지 않게 가난이 꾀죄죄 흘렀다. 땟국 묻은 그의 적삼에 게다를 걸친 것이며, 분명 남의 집 아이의 물림을 천신한 듯싶은 다 떨어진 검정 고꾸라 통학복에 짝 안 맞는 고무신을 꿴 것이며.

그것도 그것이려니와, 두 아이가, 하나는 용졸스럽디 용졸스럽고 하나는 눈방울이 흉 없게 툭 비어지고 한 꼬락서니가, 도저히 저게 내 아들이니라 여기기조차 창피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아이가, 그애는 제법 근리한 것 같았다.

크막하니 시원한 눈하며 검고 짙은 눈썹하며, 준수한 코는 아니라도 너부데데한 얼굴 윤곽하며가, 어쩌면 옛 기억에 처진 S의 모습과 방불한 성도 싶었다.

옷도 말끔 새것으로 국방모자에 국방색 통학복에 국방색 운동화에 그리고 가죽으로 만든 란도셀에 모두가 그럴 듯했다.

그럴 듯해서 더 유심히 바라다보고 섰느라니까, 저는 저만치 빈자리에 가 혼자 걸터앉아서 고개를 소곳하고 눈을 깜작깜작, 그림책을 고부라지게 들여다보고 있는 주제가 아주 간드러지고 이뻤다.

이쁘고, 참말 저애가 내 아들이었으면 좋겠다 싶어진다. 그렇기만 하다면 퍽 기쁠 것 같았다.

그러자 그 다음에는 차차로, 그애가 기어코 경희 제 아들이어야만 할 것 같고, 그래서 다시 한 번 자상하게 뜯어보느라니까 과연 눈과 얼굴 윤곽은 S를 닮은 것이고, 오똑한 코와 전체가 약질로 생긴 체질은 경희 저를 닮았을 것이고 한 게 분명했다.

어떻게도 희한하고 반가운지, 사뭇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눌러가면서 가만 가만 그 앞으로 바투 다가가느라니까 여태까지 그림책에만 잠착해 앉았던 아이가 발딱 일어서더니, 경희는 본숭만숭 옆으로 지나가 버린다.

“얘야!”

지나쳐 보내고 돌아서서 한참이나 주저하다가 겨우 부른다. 일찍이 그만큼 상냥스런 음성을 내본 적이 있던가, 스스로 의심할 만큼 보드랍고 다정한 말소리였었다.

바로 불러보지 못하고서 지나쳐 보내놓고, 그리고도 또 주저를 하고 한 것은 혹시 그애 입으로 말이 퍼져가지고, S하며 그 집 사람들이 그가 경희이었음을 짐작하고 보면 자연 속을 뽑히는 노릇이겠어서, 그걸 저어했던 것이다.

아이는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해뜩 돌려다보다가 웬 낯선 여자인가 하는 듯이 두릿두릿하고 섰고, 경희는 얼른 그 앞으로 따라가서, 끌어안을 듯 허리를 수그린다.

“너 어디 사니?”

“나요? …….”

아이는 더욱 이상해하면서 잠깐 머뭇거리다가 똘똘하게

“……저어기, ×× 살아요.”

틀림없는 S의 집 동네다. 경희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끄덕하다가 다시

“네 이름이 무어지?”

“영섭이예요, 김영섭이요.”

경희는 사지의 맥이 한꺼번에 탁 풀려 덤덤히 서서 말이 없다.

얼마만인지 정신이 들어가지고 제자리로 돌아온 경희는, 아니기를 차라리 잘했지 하고, 강잉해 스스로 위로를 해보는 것이나, 그러나 차악 안기는 무엇인가를 담쑥이 품에 안았다가 놓치고 만 것 같은 허전함을 어찌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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