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3장
結婚
편집1.
편집즐거움과 괴로움 속에 그날 그날을 보내는 순영도 어느덧 열여덟 살이 되었다. 봄이 순영에게로 왔는지 순영에게서 봄이 생겼는지 모르나, 순영은 정수박이에서 발꿈치까지가 봄이었다. 육체도 봄이라면 정신도 봄이었다. 살에서 피어나 는 냄새가 봄의 향기라면, 감정에서 솟아나는 공상은 봄의 꿈이었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이성(異性)을 그려도 보고, 오지 않는 행복을 손가락에 찍어서 맛보려고도 하였다.
일기가 청명하면서도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숙자의 집에서 는 술 파는 계집애들을 한 달에 두 번씩 대거리로 놀리는 정기일(定期日)이 있는데, 그날은 마침 순영이 놀게 되는 날 이었다. 순영은 그날을 이용하여 월미도의 조탕(潮湯)에 가 서 해수욕을 하기로 하였다. 순영은 일찍부터 서둘렀다. 손 님들에게서 얻은 팁으로 저금한 중에서 돈 얼마를 찾았다.
게다가 숙자가 점심 사 먹으라고 주는 일 원을 보태었다.
그 전날부터 같이 가기로 약속하였던 동무가 찾아왔다.
"정순(貞淳)이냐? 일찍 왔구나, 들어오너라."
순영은 반가이 맞아서 손을 잡더니,
"지금 가면 너무 이르지 않을까? 우리 들어가서 조금 놀다 가자."
순영은 손목을 끈다.
"조탕에는 일찍 가야 앞턱으로 좋은 자리를 잡는다. 조금만 늦게 가면 만원이 되어서 많을 자리도 없어요. 지금 가도 늦을는지 모르는데."
정순은 아미를 조금 찡그리면서 끌려가지 않는다.
"그럼 지금부터 갈까?"
순영은 팔뚝시계를 보더니,
"에구 참, 열시가 다 되어 가는구나. 지금부터 가노라면 열 한시가 다 될 텐데."
순영은 정순을 보면서 입을 조금 벌린다.
"그러기에 말이야, 지금 가도 늦겠다 얘. 어서 가자."
정순은 발꿈치를 돌린다. 제 방으로 가서 핸드백을 가지고 나오다가,
"글럼 다녀오겠어요."
하고 숙자에게 꾸벅 하는 순영은 달음질로 정순을 쫓아가 서 팔을 잡고 걷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천천히 가 다가 상 인천 역에서 떠나오는 기차 소리를 듣고서,
"어서 가자, 서울차가 내려오면 사람들이 많아서 자리를 뺏 기겠다."
하는 정순의 소리에 치마를 걷어잡고 빨리 걸었다. 하 인 천 역을 지나서 조금 가노라니 벌써 경성차가 와서 우뚝 선다. 사람들이 풀리기 시작하더니 정작 정거장으로 나가는 사람 은 얼마 없고, 거의 전부가 해수요장으로 가는 임시 정거장 으로 향한다. 남녀 노소를 몰론하고 모두 간당한 행장으로 서로 앞서려고 달음질을 치는 사람이 많다.
"빨리 가자 얘."
순영과 정순은 서로 돌아보고 웃으면서 빨리 걸어서, 월미 도로 다니는 정기 자동차부까지는 먼저 갔으나, 자동차는 기차에서 내리는 손님들까지 같이 태워 가지고 가려고 먼저 떠나지 않는다. 순영과 정순은 먼저 갈 수만 있으면 달음질 이라도 하여서 가고 싶었으나, 아무리 먼저달음질을 한댔자 자동차보다 먼저 갈 수가 없으므로, 조마조마하는 가슴을 부둥켜 안고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아니하여도 속은 바빴다.
"에구, 먼저 가세요."
하는 소리를 운전수에게 몇 번이나 하였지마는,
"네, 곧 갑니다."
하면서 빙긋빙긋 웃는 운전수는 다정스런 듯도 하면서도 궅게 잡고 있는 핸들은 돌리지 않는다. 천하의 남자가 모두 그 운전수와 같이 남의 사정을 몰라 준다면, 처녀들의 봄을 가을의 서리가 오도록 그대로 오수름이 늙혔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자동차 운전수의 아내 되는 여자는 불행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순영은 그러한 생각을 잊어버리 려고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순영은 그중 앞차로 갔으므로 뒤에 오는 손들은 아 직 이므로 못하고, 먼저 온 사람들은 많지 아니하여서 조탈 의 이층의 좌석은 많이 비어 있었다. 순영과 정순은 서로 여기가 좋으니 저기가 좋으니 하다가, 마침내 바다 쪽으로 그중 시원하고 바라보기 좋은 데다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핸드백 각각, 수건 각각, 부채 각각, 모두 늘어놓아 서, 사람이 으레 있는 것처럼 꾸며서 다른 사람이 그 좌석 으로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면서 땀 을 들이고 나서 욕탕으로 들어갔다.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게 알맞은 도수로 데워져 있는 해 수욕탕에 드나들며 씻은 뒤에 맑은 물에 깨끗이 헹구고 수 건질을 하면서 탈의장으로 나왔다. 순영은 옷을 입으려고 할 때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아니한 자기의 몸이 체경에 비치는 것을 보았다. 대리석으로 깎은 것처럼 의고 윤택한 살이, 알맞게 데워진 물이건만 그래도 뜨겁든지 불그레하게 되어서 홍보석으로 만든 인형같이 외었다. 순영은 제 몸이 제가 보기도 부끄러울 마큼 신비하게 된 것을 깨달았다. 그 리하여 자기의 몸이 더 한층 귀중한 듯하였다. 누구에게든 지 그러한 몸을 바치는 것은 욕이 되고 죄가 될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수록 어쩐지 울타리 없는 집처럼 허전한 생각이 나서 자기의 몸을 도적맞을 것만 같았다. 그 리하여 하루 바삐 조촐하고 믿음성 있는 품에 안겨 버렸으 면 하는 마음도 아울러 있던 것이다.
그들이 이층으로 올라가니 어느 사이에 사람들이 꽉찼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서서 바장이는 사람도 많았다. 순영은 자리를 찾아가는데 발을 옮겨 놓기도 어려웠다. 사람들이 그렇게 빈틈없이 앉은 중에도 자기의 좌석만은 모른 물건이 놓여있는 대로 온전히 남아 있어서 임자를 기다리는 것 같 았다.
"우리 자리는 남아 있구나,?
하는 순영은 그것이 그렇게도 반가웠다.
"에구, 그러기에 여러 가지를 놓았더니 사람이 많은 줄 알 고서."
"그러기에 말이야, 그런데 우리 둘만 있는 것을 보고서 다 른 사람이 오면 어쩌니? 우리 같은 계집애나 오면 그래도 괜찮지만, 우악스런 사내들이 와 앉으면 어쩌니?"
순영은 정순의 귀에다 대고 가만히 말을 하고서, 옆에 있 는 사람들을 돌아본다.
"에구, 참 그렇다. 하지만 누가 오거든 우리 동행이 올 사 람이 또 있다고 그러자, 그래서 아무도 못 오게 해야지, 오 면 쓰겠니?"
정순도 가만히 말한다. 그들은 과자도 먹고 사이다도 마시 면서 난간을 의지하여 바다를 바라보면서 바람을 맞는다.
순영은 월미도의 남쪽을 맥없이 한참 바라보다가 홀연히 눈 물이 핑 돌면서 눈자위가 붉어진다.
"너 왜 그러니?"
그것을 보는 정순은 이상한 듯이 묻는다.
".....나는 왜 그런지 바다를 보면 비창한 생각이 들더라."
순영은 말끝을 흐려 버린다.
"에구, 이상두 해라. 우리는 바다를 보면 시원하고 좋은데 너는 왜 그러냐?"
"나도 시원하고 좋은데 어떤 때는 그렇단다."
순영은 남이 안 보도록 수건으로 눈물을 씻는다.
"그거야 아무라도 그렇다. 아무리 좋은 경치라도 제 마음이 좋아야 즐겁지, 제 마음이 슬프면 경치도 슬픈 것이다. 나도 바닷가에서 몇 번이나 운지 모른다."
정순도 눈물이 그렁그렁한다.
"너도 왜 그러니?"
순영이 됩다 묻는다.
"네가 우는 것을 보니 나도 슬프구나."
정순은 눈물을 씻으면서 웃는다. 순영도 웃는다. 순영이 작 년 봄에 숙자에게 얻어맞고 자살하러 나왔던 곳을 바라보고 눈물짓는 것은 서해 바다나 월미도가 아니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2.
편집난간에서 바로 내려다뵈는 푸울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목욕도 하고 헤엄도 치는데, 특별히 젊은 남녀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서 목욕을 하는 것이 시선을 끌었다. 푸울의 얕은 편으로 몇 쌍의 청춘 남녀가 섞이어서 멱을 감는다고 하느 니보다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욕의(浴衣)를 입 은 것은 물론이요, 여자들은 방수포(防水布) 모자를 쓰고 부 낭(浮囊)까지 가진 사람이 있으며, 어린 아이들은 다 각기 제게 적당한 부낭을 가졌다. 여자들은 제법 헤엄을 치는 사 람도 있었지마는, 대개는 얕은 데서 팔을 짚고 헤엄을 치며, 멱을 감는댔자 물에서 왔다갔다하고 섰다 앉았다 할 뿐이 며, 고개만 내놓고 앉는다든지 허리 위를 내놓고 앉아서, 다 른 사람들이 목욕하는 것을 보다가 손끝으로 물을 퉁겨본다 든지, 손바닥으로 물을 아플세라 하고 찰싹찰싹 친다든지 하다가, 다시 둑으로 올라가서 벤치에 앉는다든지 조약돌을 깐 맨바닥에 앉아서 일광욕(日光浴)을 한다. 그러는 동안 그 들은 서로 웃고 이야기도 하며, 서로 몸을 돌아보는 것이, 자기의 살빛과 남의 살빛이 어느 것이 희고 윤택하며, 누구 의 살집이 더 좋은지 서로의 육체미를 비교하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광욕을 하면서도 행여나 자기의 희고 고 운 살빛이 검어질까 염려하는 듯하였다. 그들은 공연히 손 으로 자기의 살을 만지면서 싹싹 비벼 본다든지, 조약돌을 집어서 자기 다리위에 여기저기 올려놓고서 애교를 지으면 서, 남자들 중의 어떤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각기 자기의 남편이나 혹은 애인에게 정을 주는 적을 바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과의 일행인 남자들은 각기 부낭에 다 아이들을 태워가지고 다니면서, 장난도 하고 수영을 가 르치기도 하여 아무쪼록 아이들을 즐겁게 하면서 가끔 자기 의 목적하는 여자를 돌아본다. 그러다가 여자들이 다시 물 로 들어가서 남자들과 같이 즐기며 각각 아이들을 받아서 사랑한다.
"저것은 아마 내외 내외 끼리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목욕 을 하는 것이지?"
순영은 그러한 광경만을 눈여겨보다가 정순을 돌아보며 말 한다.
"그렇지, 그렇지만 정작 내외가 아니면서 같이 온 사람도 있는지 모르지."
정순도 잠착하고 그런 것 만 보다가, 눈을 순영에게로 돌 리면서 대답한다.
"그도 그렇겠지. 하지만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은 내 외 간이겠지. 다른 아이가 없이 단 둘이 온 사람은 그도 알 수 없지. 그런데, 너는 어떤 사람이 내 외 간이 아닌 듯하냐? 어디 알아 내 봐라."
순영은 다시 눈을 그들에게 돌린다.
"저기 저 가로 둘쨋번에 선 여자 있지? 키가 조그마하고 그 중 젊어 뵈는 여자 말이다."
정순은 손가락을 가만히 내밀어서 가리킨다.
"그래, 살결이 조금 까무잡잡한 거 여자 말이지."
"그래, 그 여자하고 이쪽으로 키가 호리호리하고 얼굴이 해 맑은 사내 안 있어 왜?"
"그래, 저 똥똥한 사람 다음에 있는 그 사람 말이지."
"그래, 그 사람하고 아까 말하던 그 여자하고 그건 내외간 이 아니고 그저 연애하는 사람인가 봐."
"어떻게 아니?"
순영은 정순을 돌아본다.
"너, 그 사람들의 눈치를 자세히 보았니?"
"나는 자세히 안 보았다."
"나는 자세히 보았다. 그런데 그이들은 아이도 없고 다른 사람들은 다 드러내놓고 아이들을 주고받기도 하고 말하고 노는 것도 활발하여서, 아무가 보아도 내외간 인 줄 알 것 인데 그 사람들은 안 그렇다. 서로 좋아는 하면서도 웃는다 든지 말하는 것도 남의 눈치를 보아 가며 살살 하고, 그러 면서 서로 보기는 더 자주 보고 웃기는 더 웃는다. 내외간 같으면 다른 사람처럼 드러내놓고 하지, 왜 그렇게 음침하 게 하니?"
정순은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뒤를 돌아본다.
"너는 자세히도 보았다. 나는 모두 내외간으로만 보았다.
그 사람들도 그러다가 차차 결혼을 하겠지. 그런데 저런 사 람들은 내외간에 정도 있고 살기도 걱정이 없기에 저렇게 해수욕도 같이 다니고 하겠지. 저런 사람들은 세상에 난 보 람이 안 있니?"
순영은 가볍게 한숨을 쉰다.
"그게 그렇게 부러우냐? 너는 그보다 더 잘 살는지 누가 아니?"
정순은 위로하는 태도로 말한다.
"지금 이 모양이 되었는데 잘 살기는 무얼 잘 사니? 이러 다가 말이지."
순영의 얼굴에는 즐겁지 아니한 기색이 나타난다.
"너 시집가고 싶으냐?"
정순은 웃지도 않고 묻는다.
"망할 것, 누가 시집가고 시파니."
"내외간에 놀러 다니는 것을 부러워 할 적엔 시집가고 싶 은 것이지 뭐야?"
"그저 그렇다는 말이지. 똑 시집가고 싶어야만 그런 소리를 하니?"
"너 시집하고 싶으면 마땅한 데 중신 하나 해 주랴?"
"나를 중신해 줄 생각 말고 너나 시집가렴. 내가 왜 중신해 달라니?"
"그렇잖아도 나는 시집을 가요. 약혼해 놓았어, 왜 그래?"
"정말이냐?"
순영은 처음 듣는 말이라 이상한 듯이 묻는다.
"그럼 정말이지, 누가 거짓말 할까."
"사내는 어디 사람이냐?"
"본집은 원산인데 인천 와서 많이 있다."
"원산 사람이야?"
순영은 별안간에 놀라는 기색을 나타낸다.
"그래, 원산 사람이다. 너 왜 그렇게 놀라니?"
"놀라는 게 아니라 먼 데서 사람이기에 말이다."
말이 막히는 듯이 조금 주저하다가 순영은 어색한 듯이 말 을 한다.
"원산이 뭐 머냐, 지금은 외국 사람하고도 결혼하는 세상인데." 정순은 입을 실룩한다.
"누가 중신했니?"
"지금 세상에 중신이 다 뭐냐?"
"그럼 연애했구나?"
"그럼, 사랑이 없는 결혼이 무슨 재미있니. 사랑 없는 결혼 은 무덤과 같은 것이다. 중신이 다 뭐냐. 너는 케케묵은 소 리를 하는구나."
정순은 순영을 자세히 본다.
"그래 혼인 잔치를 언제 하니? 떡이나 좀 얻어먹어야지."
순영은 새로 얼굴을 편다.
"결혼 일자는 아직 작정하지 않았다. 약혼이라고 해도 아직 은 확실한 약혼도 아니다."
"왜?"
"그 사람도 돈이 없는 사람인데, 자기도 돈 없고 나도 돈 없고 하다고 조금 꺼리는 모양이란다."
"사랑만 있으면 고만이지. 돈 있고 없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 "그거야 그렇지만, 결혼을 해 가지고 너무나 경제 곤란을 받으면 그것도 어려운 일이거든, 하니까 그 사람 말에는 돈 이 없으니 결혼을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차차 돈을 벌어서 가지고 하자는 것이야, 그러니까 나는 들을 만하고 있는 줄 이다."
"그럼 너의 부모도 아 아시니?"
"아직 부모는 모르신다. 당자끼리 사랑만 있으면 고만이지 부모가 무슨 상관있니. 지금 세상에 부모가 하라면 하고 말 라면 말겠니? 제가 하고 싶으면 고만이지."
정순은 가소롭게 말한다. 순영은 거기 대하여 반대하고 싶 은 말이 있었으나, 구태여 남의 뜻을 거스릴 필요가 없어서,
"그러면 차차 돈을 많이 벌겠지."
하는 말로 범범히 위로하고 그 말은 끝을 막으려고 하는 데,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재주는 별로 없어도 수영을 아주 잘한다. 그래서 수영 선수로 뽑혀 다니니까 잘만 하면 돈을 벌기도 쉬울 것이다."
정순은 기뻐한다.
"그러나 저러나 인제 시장하다. 무얼 좀 먹어야겠다."
하는 순영은 음식 파는 데를 돌아보니,
"너는 무얼 먹겠니?"
하고 정순을 본다.
"나는 ....라이스카레이를 하나 먹을까."
"무엇?"
"라이스 카레이 말이야. 너 그거 모르니?"
"나이수 카리?"
순영은 정순을 보고 웃는다.
"이런 멍텅구리, 나이수카리가 뭐냐? 너부터 그러는 구나, 나를 놀리려구."
"아니야, 나는 정말 모른다. 나는 가서 말하다가 망신당하 겠다. 네가 가서 시켜라, 돈은 내가 낼 테니."
순영은 좌우를 돌아본다.
"그래, 내가 가서 시키지. 너는 무얼 먹을래?"
"나는 밥이지, 뭐."
"밥도 여러 가지인데 무슨 밥 말이냐?"
"그저 밥이지 무슨 밥이야."
"벤또 말이야?"
"그래."
"너 정말 그러니, 우얼을 떠느라고 그러니?"
정순은 눈을 가늘게 뜨고 순영을 흘겨보더니 음식 파는 데 로 간다. 정순은 다녀오면서 바다를 바라보고 천천히 오더 니,
"인제 물이 들기 시작하는구나, 물이 들면 해수욕을 나올 것인데."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듯이 한다.
"누가 말이냐?"
"아까 말했던 그이 말이야."
"아까 말하던 이가 누구야, 너의 서방님 말이냐?"
"서방인이 뭐냐.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서방님이야?"
"약혼했으면 결혼한 셈이지 뭐야? 그러니까 아주 헤엄을 썩 잘친다. 저 바다 가운데까지 나갔다 들어온다. 이따 나하 고 구경 가련?"
"너는 서방이니가 좋아서 가지만 나는 뭐라고 가니?"
"망할 것, 그래서 가지니? 헤엄을 잘 치니까 그것을 구경하 러 가자지."
정순은 골내는 기색을 지으려다가 웃는다.
"그럼 동무 따라 강남 가기로 나도 가지."
순영은 조수가 들어오는 것을 바라본다.
바다에는 바람이 있는 듯하면서 물이 들어와서 드러난 갯 바닥을 차차덮는다. 조개잡이를 나갔던 사람들은 달음질로 쫓겨 나온다. 어디서 무엇을 싣고 오는 밴지 먼 데서부터 차차 가까이 오는 돛대들이 보인다. 물새들은 물 마중을 하 는 듯이 날아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물에 스치기도 하고 첨벙 들어갔다가 쑥 솟아오르기도 한다. 천지간의 이상한 일이요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치였다. 어느 사이에 점심이 왔다. 순영은 정순이 먹는 라이스 카레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그리하여 자기도 어디를 가면 그것을 한번 청하여 먹어 보리라고 생각하였다. 순영은 라이스카레이를 속으로 두어 번이나 외었다. 그들은 조금 시장하였는지 점심을 달 게 먹었다.
정순은 점심을 먹으면서도 조수 들어오는 것을 여러 번 돌 아보았다. 점심을 마치고 정순은 곹 일어서서 바다를 바라 보더니 다시 해수욕장을 본다.
"벌써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물이 많이 들어왔구나.
우리 차차 나가 볼까?"
정순은 순영을 돌아본다.
"그럼 차차 나가지, 밖에도 구경하고."
순영은 다시 푸울을 내려다보았으나 아까 있던 사람들은 더러 업고 다른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순영은 아까 보던 사람들이 없는 것이 섭서반 듯하였다. 그들은 어깨를 견주 어 나오다가 해수욕장을 바라보던 정순은 우뚝 서면서,
"저기 벌써 나와 섰구나."
하고 눈을 쓴다.
"어디?"
순영도 이상한 듯이 묻는다.
"저기 천막 친 옆에 솔나무 하나 있지. 그 아래 양복 입은 사람들이 안 섰니? 바로 그 사람이야."
"둘이 다?"
"아니야 얘, 바다쪽으로 선 사람, 키가 좀 작은 사람, 그 사람이야."
정순은 웃으면서 빨리 걷는다. 눈여겨보면서 따라가던 산 영은 가까이 가자 깜짝 놀라면서 주춤하고 선다.
3.
편집순영은 언제든지 잊어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 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원산서 물에 빠졌을 때에 자기를 건져준 사람이었다. 그 때에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수중고혼이 되었을 것을, 그 사람 때문에 살아난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가령 자기가 고통을 받았을 때에는, 차라리 그 때에 건져 준 사람이 없었더라면 하는 생각으로, 오히려 그 사람을 원망하고 싶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한때의 변칙적 심리로 나는 생각일 뿐 아니라, 백보를 사양하여 그때에 죽 었던 것이 자기의 신세에 나았을 것을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자기를 살려 준 은혜만은 잊을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도 그사람의 은혜를 생각하지 아니한 때가 없 었지만, 차차 나이들고 철이 나매 그 사람에게 대하여 막연 하게 살려 준 은혜만을 생각할 뿐이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 고 알지도 못하는 자기를 건져 준 그 사람의 사내답고 의협 한 것이 더욱 감심되어서, 어딘지 모르게 연모하는 마음이 있었다. 순영은 점점 사람의 봄을 알아서 이성에 대한 정서 를 느끼게 될 때에는 더욱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 순 영이 술을 파는 동안에 여러 남자에게 유혹을 받고 위협도 당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조에 대한 위기를 곁은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은, 이때까지 그것을 다 모면하고 조촐한 몸을 보전하게 된 것은, 순전한 대체상의 정조 관념 뿐이 아니라 아무쪼록 자기의 몸을 깨끗하게 가졌다가, 천행으로 그 사람을 만나게 되고 또는 사정이 허락하게 된다면, 자기 몸을 송도리째 바쳐서라도 그 사람의 은혜를 갚아 볼까 하 는 깊은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에 다만 그 사람의 얼굴만을 기억하였을 뿐으 로 그것만은 잊지 아니할 양으로 그모양을 마음속 눈에 봉 사(複寫)하고 복사하고 하여서, 생각만 나면 눈을 감고라도 어디서든지 볼 수가 있었지만, 사실상으로 만나기를 기약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때의 그 사람의 주소도 모르고 성명 도 몰랐으니 종적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고 또는 누구를 인 연하여서 물어 보기라도 할 길이 없었다. 또는 그 사람을 만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형편이 자기의 뜻을 맏아 주게 될는지 안 될는지가 의문이어서, 공연히 아무도 모르게 고 민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 사람에 대한 모든 일은 하늘에 맡기기로 하였으나, 그래도 언제든지 뜻 밖의 요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날 조탕에서 푸울에 멱감는 남녀들을 볼 때에 도 자연히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어서, 자기도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면 하고 행복스럽게 살아가며 저 사람들처럼 같이 나와서 해수욕이라도 하게 될까 하는 것을 상상하여 보았 던 것이다.
또는 정순이 약혼하였다는 데에 충동을 받았고, 그 약혼한 사람이 원산 사람이라고 하는 데에 홀연히 그 사람의 생각 이 났던 것이다. 자기가 빠졌던 곳이 원산이므로, 언제든지 원산 소리만 들으면 그 생각을 하게 되는데, 특별히 자기가 그 사람 생각을 하는 즈음 정순의 말을 듣게 되므로, 혹은 그 사람이 원산 사는 사람으로 정순과 약혼하게 된 것이 아 닌가 하는, 이른바 기상천외의 생각으로 놀랐던 것이다. 그 리하여 마음이 설레는 중에, 기이하게도 그 사람이 수영을 잘 한다는 말을 들을 때에는 더구나 걷잡을수 없이 마음이 흔들렸으나, 죽을 힘을 다해서 간 것이다. 그리하여 정순을 따라서 해수욕장에 갈 때에도, 그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 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조마조마 하여서, 어서 가고 싶으 면서도 가기가 겁이 났던 것이다.
순영은 천행으로 정순과 약혼한 사람이 자기의 보고자 하 는 사람이었으면 한 번 만나라도 보겠다는 생각이 앞을 서 다가, 다시 차라리 그 사람을 영원히 바라보지 못하다 할지 라도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이 뒤를 누렀다. 그리 하여 정순이 가리키는 사람을 눈여겨 보다가 갑자기 시선을 돌려서 다른 사람들 있는 데를 보면서 누구를 찾는 듯하였다. 그러다가 정순이 가리키는 두 사람 중에 키가 작은 사 람이 그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
첫째로 자기가 기다리는 사람은 키가 그렇게 작지도 아니하 고 모른 모습으로 보아서 비슷하지도 아니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순영의 눈은 그 사람과 같이 서 있는 다른 한 사람에게서 떠나지 아니하여서, 발부리가 돌에 차 이는 줄도 모르고 치맛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리는 줄도 모르 고, 정신 없이 가다가 급기야 가까이 가서 사람의 얼굴을 똑똑히 알아볼 만한 거리에 이르러서는 부지불각 중에 놀란 것이었다.
"너 왜 그렇게 놀라니?"
몸이 움찔하면서 우뚝 서 있는 순영을 본 정순은 자기도 따라서 놀라는 듯이 말한다.
"..... 아니다 얘, 공연히 그랬어."
순영은 주저하다가 군색하게 대답을 하였으나 어느 겨를에 이마에 땀이 난 것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다.
"너 무얼 단단히 놀란 거로구나, 이마에 땀이 다 난 것을 보니까. 나는 어디 뱀을 보았다구, 왜 그렇게 놀라니? 나는 공연히 놀랐다."
정순은 순영의 이마를 본다. 그제야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시는 순영은,
"나는 뱀을 보지는 못했지만, 푸울 속에서 무엇이 꿈틀하는 데 뱀인 줄 알았다."
정순이 뱀 소리를 한 것은 순영에게 핑계 댈 자료를 주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그런데 저기 같이 있는 사람은 누구냐?"
순영은 침착한 듯이 물었으나 목소리는 조금 떨리었다.
"저이도 원산 근처에 사는 사람인데 둘이 수영 동무란다.
그 사라도 수영을 잘한단다. 그 사람 말을 들으면, 물에 빠 진 사람을 여럿 건져 주었다고 하더라."
"어쩌면, 성명은 뭔데?"
순영은 가슴이 더욱 울렁 거린다.
"성면은 김 대철(金大哲)이라던가 한데, 남의 사내 성명은 알아서 무얼 하니?"
"아니 글쎄, 수영을 잘해서 물에 빠진 사람을 많이 건져 주 었다니 말이야."
"응, 그러기도 쉽잖지, 나하고 약혼한 그 이도 그랬단다.
수영을 잘하면 그것도 좋을 거야."
하는 정순은 몸을 돌리면서,
"어서 가자."
하고 재촉한다.
"나는 안 가겠다. 얘."
순영은 발로 푸울을 밟으면서 고개를 숙인다.
"왜 또 간다고 그러니? 예까지 와서."
"낯 모르는 사내들 있는 데 무엇 하러 가니? 남부끄럽게."
"남부끄럽긴 무에 남부끄러우냐. 너 그렇게 사내들이 남부 끄럽우면 술은 어떻게 파니?"
순영은 그 말을 듣기가 조금 마음에 찔렸다.
"술은 할 수 없이 팔지마는, 술 파는 사람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줄 아니?"
순영의 얼굴은 붉어지는 듯하면서 조금 새침해진다.
"그렇게 할 말이 아니다. 사람을 많이 열인 하면서 무엇이 부끄러우냐 말이다. 그러지 말고서 어서 가자. 내 인사 소개 를 해줄 터이니. 인사나 하고, 그래야 차차 연애도 하고 그 러지."
정순은 순영의 어깨를 툭 치면서 끌어당긴다.
4.
편집순영은 정순의 시선을 피하여 가며 눈을 흘겨서 그 사람들 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 사람은, 가지가 오매불망 기다 리던 그 사람이었다. 기쁜 마음은 밀려 들어오는 조수처럼 걷잡을 수가 없었으나, 세상에는 비슷한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오, 또는 너무두 보고 싶던 나머지에, 혹은 시신경(視神 經)의 착각인가도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기연미연학 서먹서 먹하는 마음으로 가고픈 용기도 없었으나, 돌려 생각하니 이러한 얻기 어려운 기회를 놓치면 일생의 한이 될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어서, 못이기는 체하고 발을 메놓기 시작하 였다. 순영은 한 것음 두 걸음 행복하면서 한 번 보고 두 번 보는 것이 의심이었다. 순영이 제일 염려한 것은, 그 사 람이 선뜻 자기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하고, 물에 빠진 것을 건져 주건 이야기를 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가 슴이 두근거렸다. 순영은 한 소능로 턱과 입을 가리고 정순 의 뒤에 따라가며서 어수선한 생각으로 가슴에 넘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아! 정순씨가 웬 일이세여?
키 작은 사람은 얼굴에 웃음투성이가 되어서 마주 나온다.
"선생님이 오신 것을 보고서 쫓아 왔어요, 동무하고 조탕에 가다가요."
정순도 기쁘게 대답한다.
"그렇잖아도 정순씨가 혹 나오셨나 하고 살펴보았지요, 지 금도 이 친구하고 정순씨 이야기를 하는 중입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
하더니,
"그런데 이 선생님 모르세여? 내가 인사 소개를 한 번 한 듯한데, 김 대철 선생님이라고 아주 수영 선수로 조선 스포 츠계에 유명하신 선생님입니다. "
하고 정순과 대철을 번갈아 본다.
"예. 그전에 한 번 인사했습니다. 그새 안녕하세요?"
정순은 공손히 머리를 숙인다.
"예, 그전에 이 서 정식(徐廷植)군의 소개로 한 번 뵈었습 니다. 안녕히 오셨어요?"
그들은 인사가 대강 끝나자,
"두 분 선생님께 인사 소개하겠습니다. "
정순은 순영에게 인사를 원한다. 순영은 전체 사람에게 인 사를 하고, 다음에 대철과 인사를 하였다. 순영은 전기에 갈 전(褐展)된 것처럼 살이 움직이면서 마음대로 진정할 수가 없었다. 순영은 대철이 자기를 알아보는가 못 알아보는가에 주의를 하였으나, 대철은 한두 번 눈여겨볼 뿐이요, 알아보 는 듯한 눈치는 찾아 낼 수가 없었다. 순영은 대철이 자기 를 알아보고, 그대의 일을 말한댔자 그것이 무슨 부끄러운 일이 어서 은휘(隱諱)하려는 것은 아니였으나, 어쩐지 여러 사람이 있는 중에 그 사람이 먼저 말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순영은 그 사람이 확실하냐 않으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 되고, 인제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살피게 되었다. 사람의 인물은 어떠며 신체는 어떠며 건강 상태는 어떠며, 될 수 있으면 성격까지라도 알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일 외양은 그전에 본 바도 있거니와 특별히 볼 만한 것이 없 고, 성격에 이르려서는 얼핏 알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그 사람의 가부를 논의할 것이 아니므로, 마음을 쉬기로 하고 다만 그때의 은혜와 자기의 그리워하던 일을 생각함에, 온 몸이 그때의 은혜와 자기의 그리워하던 일을 생각함에, 온 몸이 그 사람의 품에 포근하게 싸이는 듯하였다.
"자, 인제 만조가 되었으니 우리 나가세. 한데 해수욕장으 로 가면 거기 규칙이 있으니까 테 밖에 를 나갈 수가 있나, 하니까 우리는 딴 바다로 나가세."
정식이 말하더니,
"우리 수영하는 것 구경도 하시고 같이 가시지요."
정순과 순영을 돌아본다.
"우리도 가서 구경하자. "
하는 정순의 말에 순영은 대답은 아니하였으나 태로 순종 하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두 청년의 뒤를 따르는 두 처녀, 순영의 심리 상태는 아까보다 엉뚱하게 달라졌다. 서먹거 린 다든지 부끄러운 생각은 거의 없어지고 기쁘고 반갑고 만족하였다. 그나 염려되는 것은 대철의 형편이었다. 대관절 그 사람이 아직까지 미혼 남자인지 아닌지가 자기의 미래 행복에 대한 열쇠라고 생각하였으나, 그것은 갑자기 물어 볼 수 도 없는 일이어서 어찌하면 알 수가 있을까 하고 생 각하다가,
"얘, 저 서 선생은 나이 얼마나 되었니?"
하고 단 말을 묻기 시작하였다.
"지금 스물 일곱이란다. "
정순은 거침없이 대답한다.
"너보다 여덟 살이 위로구나."
"여덟 살 위면 적당하지, 여남은 살 더 위라도 관계없다. "
"그런데 스물 일곱이 되도록 어찌 장가를 안 들었을까?"
"그런 운동 선수들은 흔히 장가를 일찍 안 든단다. 스물 일 곱만 되어도 운동 선수로는 한창은 지냈다고 하더라. 그래 서 결혼을 하겠다고 그러겠지."
"어쩌면, 그러면 운동 선수는 다 그럴까?"
"다 그렇기야 않겠지만, 장가 안 드는 사람이 많단다. 장가 가면 기운 빠진다고."
정순은 옆눈으로 순영을 보면서 입을 가리고 웃는다. 순영 도 앞서가는 남자들이 행여 정순의 말을 듣고서 돌아보지나 않나 하고 흘끔 보더니,
"망할 것, 별소리를 다 하네."
하고 웃는다.
"망하기는 왜 망할 것이냐. 일찍 장가들면 기운이 빠지지 않 빠지겠니?"
정순은 순영의 귀에 대고 가만히 말을 하더니 낄낄대고 웃 는다.
"계집애가 부전부전하게 그게 다 무슨 소니냐?"
순영은 손가락으로 정순의 옆구리를 꾹 찌르더니,
"그런데, 너 그전에도 저이들 둘이 헤엄치는 것 보았니?"
"보지는 못했어도 둘이 똑같이 잘 친단다. "
"그럼 저 김 선생님이라는 이도 헤엄치는 선수라지?"
"그럼, 그이도 아주 잘하는 선수란다. "
"그럼 그이도 장가를 안 들었게?"
순영은 심상히 묻는 듯이 말하였지만, 얼굴이 붉어지는가 염려하여서 수건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래, 그이도 아직 장가 안 갔단다. 그래서 그이도 색시를 고르는 중이란다. "
정순은 심상히 대답하고 순영을 보더니,
"왜, 너 그이하고 연애하고 싶으냐?"
하고 씽긋 웃는다.
"망할 것, 그런 소리나 하라면 잘하지. "
순영은 정순이 행여 자기의 뜻을 알고서 하는 말이나 아닌 가 하여서 얼굴이 화끈하였다.
"너는 툭하면 망할 것이로구나, 연애하고 싶으냔 말이 그른 말이냐? 네가 생각만 있으면 내가 중신애비 노릇을 하마.
중신은 잘하면 술이 석 잔이고 못하면 뺨이 세 대라던가 , 하지만, 내가 뺨이야 맞게 할라고."
정순은 남자들과 떨어지기 위하여 걸음을 찬찬히 걸으면서 수선을 떤다.
"듣기 싫다, 네가 어서 시집을 가거라. 잔치 떡이나 좀 얻 어먹게."
순영은 이러한 소리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여간 즐겁지 아 니하였다. 대철이 나중에 자기의 소원을 좇아서 결혼을 하 게 되겠느냐 안 되겠느냐 하는 것은 딴 문제이고, 우선 장 가를 들지 아니한 사실만으로도, 전일에 물에 빠졌다가 살 아 나온 것만큼이나 기뻤다.
5.
편집그들은 남쪽으로 돌아서 해수욕장이 보이지 아니하는 곳에 이르렀다.
"자, 우리는 실례하겠습니다. 구경을 하십시요."
정식이 순영과 정순에게 말을 하고 옷을 벗으려 할 즈음에 대철이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가만있게, 내가 저기 좀 다녀올께."
하고 달음질을 쳐서, 오던 길로 가더니 여러 가지 실과 한 꾸러미를 사 가지고 왔다.
"우리는 수영이나 하지만, 그저 앉아서 구경하시려면 심심 들 하실 테니까, 이것이나 잡수시며 구경하시지요."
하고 순영과 정순의 앞에 놓는다.
"에구, 웬걸 이렇게 사오셨어요? 일부러 또 가셔서, 감사합 니다."
그들은 한꺼번에 일어나서 치사를 하고 받았다. 순영은 대 철이 특별히 다정한 사나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실과 꾸러미를 들 앞에 놓으면서도 특별히 자기 앞으로다가 놓는 것 같이 생각하였다. 순영이 보기에는 정순의 기색이, 실과 를 정식이 사오지 아니하고, 대철이 사온 것을 불쾌하게 생 각하는 듯하였다. 아닌게 아니라 정순은 그것에 조금 샐쭉 하였다.
"네나 먹어라. "
정순은 실과를 순영의 앞으로 밀어 놓는다.
"같이 먹자."
순영은 도로 밀어 놓는다.
"나는 그런 것 좋아 않는다. "
정순은 눈을 다른 데로 돌린다.
사내들은 어느 사이에 옷들을 벗고서 수영복만 입은 채로 바다를 바라보고 섰다. 그들은 햇볕에 그을러서 시꺼멓게 된 몸뚱이에 모든 근육이 여간 발달되지 아니하였다. 순영 이 보기에는 정식은 키가 조그마한 것이 조금 만족하여 보 였으나 대철은 적당한 키에 알맞은 체격이었다. 그들은 아 무리 수영복을 입었지만 그래도 순영은 바로 보기가 부끄러 웠다. 그러나 드러내놓고 보는 것보다 더욱 자세히 보았다.
"저 서 선생님 체격이 조그마하고 아래위 모착한 것이 아 주 잘 되었지?"
정순은 웃으면서 순영을 돌아본다.
"그렇다, 참 조선 사람은 작아야 쓴다는데, 작고도 야무지 게 생겼구나."
순영은 정순의 뜻을 알고서 비위를 맞추었다.
"우리는 사내들 키 큰 것 좋잖더라, 키 크고 싱겹게 않은 사람 없다는 말이 안 있니? 또 수수댕이 종이 감아 놓은 것 처럼 몸집이 호리호리한 것도 사내답지 않더라, 그렇지?"
하고 순영은 대철의 체격이 알맞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정순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될 뿐 아니라 혐의를 살까 봐서 말끝을 웃음으로 흐려 버렸다.
사내들이 놓은 데로부터 바다를 향하여 툼벙하고 거꾸로 뛰어들어가서 한참 동안 보이지 않는데 순영은 가슴이 두근 거리게 놀랐다. 조금 있다가 그들은 물 위로 솟구치더니 헤 엄을 쳐서 바다로 나간다. 그들은 여러 가지로 헤엄을 친다.
엎드려서 치는 것은 물론이고, 젖혀져서 치고, 옆으로도 치 고 앉아서도, 서서도, 온갖 짓을 다 하여서 오리 같기도 하 고 고기 같기도 하였으나, 만경창파에 마음대로 떠다니는 것이 신선같이 보였다. 순영은 대철이 만을 보았다. 이따금 정식을 보는 것은 대철과 비교하기 위하여 보는 것이었다.
순영은 수영을 잘하는 것이 남자의 영예로도 보이고 미(美) 로도 보였다. 순영은 대철이 하늘 끝까지도 갔다 왔으면 좋 겠다고 생각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아슬아슬하고 조심이 되 어서 어서 나왔으면 하였다.
"저희 같은 여자들도 헤엄치는 것을 배우면 될까요, 선생님?" 그들이 수영을 마치고 나온 뒤에 순영이 마음은 대철에게 향하고 눈으로는 정식을 보는 듯하면서 말을 하였다.
"아, 되고 말고요. 여자들이 남자보다 낫게 하는 수가 많은 데요."
대철이 순영을 돌아보고 대답한다.
"조선에는 아직 그런 예가 없지마는, 서양에서 수영을 썩 잘하는 여자가 많은 모양이야, 언젠가 신문을 보니까, 영국 에 영물해협(英佛海峽)을 몇 시간에든가 횡단한 여자가 있데. 그런 여자는 남자 이상이 아닌가?"
정식이 대철에게 말한다.
"그런 여자들은 어쩌면 그렇게 자할까, 우리는 물에 들어가 면 자꾸만 가라앉고 조금도 뜨지는 않던데, 선생님네는 어 떻게 그렇게 잘하세요? 저는 그렇게 잘하시는 것 처음 보았 어요."
순영은 차차 파겁이 되는듯이 대철을 바로 보고 말한다.
"아무라도 그저 물에 들어가면 가라앉지요. 차차 헤엄치는 것을 배워야 되지요."
"어떻게 배워요?' 순영은 수영에 대한 일을 알려고 하는 것보다, 아무쪼록 대철에게 말한 마디라도 더 붙여 보아서 차차 익숙하게 되 기를 바라는 고로, 그다지 긴하지 않은 말이라도 하려고 하 였다.
"어떻게요? 글쎄요. 실지로 배워야지 말로 하기는 곤란합니다. 물에는 압력(壓力)이라는 것이 있어요. 한데 그것을 이 용해서 사람이 뜨게 되는 것입니다. 헤얼 칠 때에 팔과 다 리를 휘젓는 것이 그 압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뜨는 것이지요."
대철은 친절하게 말하면서 팔다리를 내젓는 시늉을 한다.
"네, 그래요? 그래도 어떤 때는 보면, 선생님은 팔 다리를 가만 두고도 잘 뜨시던데요. 그건 어째 그럴까요?"
"네, 그건 밖에서 보면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다 놀리는 것입니다. 익숙해지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는 수 가 있으니까요."
대철은 순영을 보다가 다시 정식을 보고서 웃는다.
"너 수영 선수가 되고 싶으냐. 왜 그렇게 자세 묻니? 그렇 게 알고 싶거든 지금이라도 옷을 벗고 들어가서 배우려무나.' 정순은 공연히 기색이 날카로와 지는 듯하였다.
"누가 배운다니? 모르니까 여쭤 보는 말이지."
순영은 눈을 대철에게서 돌려서 바다를 보면서 다시 묻지 않는다.
"그런데 왜 실과들은 안 잡수셨어요? 싼 채 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까 아직 안 잡수신 게로군요."
대철이 그대로 놓여 있는 실과 꾸러미를 보고서 말한다.
"선생님네 수영하시는 것 보느라구 먹을 새가 있어야지요."
순영은 손으로 실과 싼 것을 만지면서도 끄르지 않는다.
"그게 뭔가? 끄르게. 우리도 좀 같이 먹게."
정식이 말을 하고 웃는다.
"선생님은 그런 것 하나도 사오시지는 않으시고, 남이 사온 것을 왜 잡수신다고 그러세요? 그게 우리 먹으려고 사오신 게지 왜 선생님 잡수시라고 사오셨나요?"
정순은 완연히 새침 대는 기색을 나타내고 정식에게 눈을 흘긴다.
"아니올시다. 이것이 사오기는 제가 사왔어도, 정식군이 사 오라고 하여서 사온 것이올시다. 같이 잡수시지요."
대철은 정순의 뜻을 안다는 듯이 웃고서 실과 꾸러미를 끄 른다.
"아무가 사왔든지 먹으면 고만이지요."
정식은 포도 한 송이를 들어서 먼저 먹는다.
"어서들 잡수시오"
하고 대철은 포도를 그 중 깨끗한 송이로 골라서,
"이것이 좀 괜찮군요. 잡숴 보세요."
하고 순영을 준다.
"에구, 먼저 잡수시지요."
순영은 공손히 받으면서 만족한 듯이 웃음을 띤다. 대철은 다시 포도를 뒤적거려 보았으나 순영을 준 것만큼 먹은직 한 송이가 없었다. 그 중에서 조금 나은 것을 골라서,
"포도가 아직 덜 익어서 그런가 변변치 않군요. 그대로 잡 수세요."
하고 정순을 준다. 정순은 뾰로통하여서 선뜻 받지 아니하 다가 부득이한 듯이 받으면서,
"제게는 이것도 과하지요. 그 중 좋은 놈은 서 선생님이 가 져가시고, 서 선생님은 생전에 포도 한 번도 못 잡숴 보셨 나봐, 남보고 먹어 보란 말씀도 아니하시고 그 중 좋은 것 을 얼른 집어 가시게."
하면서 정식의 뒤에다 눈을 흘긴다. 정순은 정식이 대철처 럼 다정스럽게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권하지 아니하고, 자기 혼자만 꾸역꾸역 먹는 것이 밉살스럽기도 하였으나, 실로는 대철이, 좋은 포도는 먼저 순영에게 주고 그만 못한 것을 나중에 자기에게 주는 것이 공연히 새암이 났었다.
"아, 참 잊었습니다. "
하고 정식은 자기가 가진 포도송이에서 먹던 부분을 떼고 남은 것을 부면서,
"먹던 데는 떼었습니다. 잡수십시오."
하고 웃는다.
"나는 뭐 남 먹던 턱찌끼만 얻어먹는 사람인가요?"
정순은 발끈하여서 얼굴빛이 변하면서 포도송이를 채뜨리 니, 포도가 터지면서 물이 튄다.
"이게 웬일이세요? 그러실 것 뭣 있어요?"
정식은 불쾌한 기색을 짓는다. 대철과 순영은 수건으로 옷 에 튄 포도물을 씻는다.
"혼자 많이 잡수세요, 나는 갈 테니."
정순은 일어서서 옷을 툭툭 털더니 불문곡직하고 간다.
"이리 오세요."
"그러지 말고 이리 오세요."
"이리 오너라, 같이 가자. "
그들은 여러 번 만류하였으나 정순은 뒤도 안 돌아보고 해 죽해죽 간다.
"그럼 저도 가겠어요."
순영도 일어난다.
"가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 우리는 더 놀다 갑시다. "
하는 정식의 말에,
"그럴 수가 있어요? 둘이 왔다가 하나만 떨어져서 있으면 되겠어요? 더구나 불안해서 가는데."
순영은 옷을 매만지더니,
"그럼 안녕히들 놀다 오세요, 동무가 가니깐 저는 먼저 가 겠어요."
하고 대철을 한 번 보더니 걸음을 옮긴다.
"자, 그럼 우리도 가세, 다들 가시는데 무슨 재미로 우리만 남아 있나?"
대철이 주섬주섬 걷어 가지고 일어선다. 정식도 마지못하 는 듯 일어섰다.
"얘, 정순아, 같이 가자. "
하고 지금 달음질을 하던 순영은 그들이 뒤에 따라오는 것 을 보고서 그럴 것이 없다는 듯이 천천히 걸었다. 순영은 정순의 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고소한 듯도 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대철이 정식보다 나은 점이 있는 듯 하여서 그것이 더욱 기뻤다. 순영은 앞에 가는 정순보다 뒤 에 오는 대철을 자주 돌아보면서 속으로 웃고 오는데, 아까 대철이 포도를 좋은 것으로 고라서 먼저 알았던 정순보다 처음본 자기를 먼저 준 것은, 확실히 자기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여간 기쁘지 아니하였다.
"오늘 우리도 여러 날 만에 만나고, 또 좋은 손님도 두 분 계셔서 어디 가 저녁이나 같이 먹었으면 좋겠는데, 정순씨 가 저렇게 가셔서 재미가 적은데."
대철이 정식을 보고 말한다.
"글세 , 나도 그런 생각이 있는데, 정순은 내가 데려 올 수 가 있으니."
정식은 말을 하고 앞에 가는 정순을 바라본다.
"그러면 우리 저녁 먹으러 가세, 그런데 인천으로 들어가자 벼로 만만한데 없고, 조탕 옆에 있는 식당으로 가세."
"그럼 그러지."
하고 정식은 다시 정순이 가는 곳을 바라보더니,
"정순이가 벌써 자동차를 타는 모양인데, 자동차를 탔자 한 껏 해야 자기 집으로 가겠지. 하면 내가 곧 가서 데리고 올 수가 있으니까, 고만두고 식당으로 가세."
정식이 앞을 선다.
"순영씨는 저녁을 잡수시고 간대도 관계없겠지요?"
대철이 묻는데,
"글세, 오늘 노는 날은 노는 날이지마는, 너무 늦으면 안 될걸요. 또 동무도 먼저 가고 했는데."
순영은 어려운 기색을 보이면서 단연코 못하겠다는 말은 안했다.
"그럼 관계없습니다. 정순씨도 오실 것이니까 염려 마시지요." 대철은 정답게 말한다.
"순영은 고개를 숙이고 가부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식당 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자마자,
"자, 그러면 나는 가서 정순이를 데리고 올 터이니, 미안하 지만 조금 기다려 주게."
하고 정식은 다시 순영에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나간다.
지평선을 넘어가려는 저녁 빛은 엷은 커어튼을 통하여서 그들의 좌석을 비춰 주었다. 그들은 서로 보려고 하면서도 눈이 마주칠 것을 피하기 위함인지 다른 데를 본다. 참시 동안 침묵이 계속된다. 순영은 물어 볼 말이 있으면서 차마 먼저 말을 내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만 하고 입술을 달막 거릴 뿐이요, 그 말이 대철이 귀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인제 저녁때가 되니까 좀 시원하시지요?"
대철이 말머리를 꺼낸다.
"네, 아주 시원한데요. 더운 기운이 조금도 없는 것 같은데요." 순영도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들으니까, 오늘이 노는 날이라고 하시니 노는 날이 따로 있어요?"
"네, 따로 있습니다. "
"뭘 하시는데요?"
순영은 말이 꽉 막혔다. 노는 날이 따로 있다는 말까지는 심상히 하였으나, 급기야에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 데는 차 마 자기의 경우를 그 사람에게 선뜻 말할 수는 없었다. 순 영은 얼굴이 붉어지고 등골에서 땀이 나다가,
"그것은 차차 아시지요."
하고 겨우 말하였다.
"아, 참 실례하였습니다. 졸구의 말로 말한다는 것이 그런 말씀을 다 물었습니다. 용서하세요."
대철은 초면에 남의 처녀의 직업을 물은 것이 진정 실례로 생각되었다.
"아니에요, 그렇게 말씀하실 것은 없어요. 저의 직업이 하 도 이상해서 말씀하기가 부끄러워서 그래요. 묻지 않으셔도 차차 말씀드릴 때가 있겠지요."
순영은 고개를 숙이면서 웃는다. 대철은 순영의 말과 태도 를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더 추궁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자 차가 나온다. 차를 마시고 앉았던 대철은 벌떡 일어 서서 밖을 내다보더니,
"이 사람이 가서 정순이를 데리고 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 릴 텐데, 그새 갑갑한데 밖에 나가서 산보나 하실 까요?"
하고 순영을 돌아본다.
"앉아서 예기나 하시지요, 앉으세요."
순영은 정식이 오는 시간까지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서 애고 있게 말하였다.
"그럼 이야기를 하시지요."
대철은 반가운 듯이 교의에 앉는다.
"선생님이 하시요. 제가 얘기를 할 줄 아나요."
"무슨 얘기를 할까요. 얘기라는 것은 일부러 하려면 잘 안 나오거든요."
대철은 천장을 쳐다보면서 무엇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헤엄을 어쩌면 그렇게 잘 치세요?"
순영은 대철이 다른 얘기를 끄집어내면 자기의 듣고 싶은 말을 못 듣겠으므로, 대철의 말이 나오기 전에 이렇게 허두 를 내었다.
"잘 이라니요? 잘하지도 못하지마는 무엇이든지 차차 배우 면 되는 것이지요."
"그 위에 어떻게 더 잘하세요? 아마 바다라도 건너가려면 건너가시겠어요?"
"허허허, 아닙니다. 바다를 어떻게 건너나요. 수영이라는 것은 그렇게 장거리로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
"그럴까요? 저는 보기에 바다라도 건너가실 것 같은데요.
아뭏든 그렇게 헤엄을 치시면 물에 빠질 염려는 없으시겠지요?' "그런 것도 아니겠지요. 옛말에도 헤엄 자 치는 놈 물에 빠 져 죽는다는 말이 있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일은 제가 잘 못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저만 조심하면 빠질 리는 없겠 지요."
"그렇게 헤엄을 잘 치면 물에 빠질 리가 있나요. 오히려 물 에 빠진 사람을 건져 줄 텐데, 그렇잖아요 선생님?"
말은 차차 본문제로 들어간다.
"그렇지요, 다른 사람을 더러 건져 주는 수도 있지요."
"아, 그렇겠지요? 그럼 선생님도 물에 빠진 사람을 많이 건 져 주셨 겠지요?"
순영은 흥미를 가지고 대철을 쳐다본다.
"네, 더러 건져 준 일이 있지요.'
"몇이나 건져 주셨어요?"
순영은 않은 채로 자기의 의자를 다가놓는다.
"서너 번 그런 일이 있었지요."
"바다에서요?"
"바다에서 두 번 찾았었고, 강물에서 한 번 찾았고, 그렇지요." "세 번이면 세 사람을 살린 것이 아니예요. 건져 주신 사람 이 남자에요, 여자예요?"
"여가가 둘, 남자가 하나, 그렇지요."
"어디서 어떻게 건져 주셨어요? 어디 얘기 좀 해보세요."
"그까짓 것 얘기할 것 무어 있어요? 순영씨나 좋은 얘기 좀 하세요."
대철이 순영으 보면서 가늘게 웃는다.
"그까짓 것이 뭐야요? 그게 좀 좋은 이이에요. 저는 그런 얘기가 재미있어요. 어서 해 주세요."
순영은 모르는 결에 응석하듯이 말을 한다.
"한 번은 함경도 서호(西湖)라는 데서 배타고 고기잡이 나 갔다가, 풍랑에 배가 파선해서 빠진 사람을 하나 건져 주고, 한번은 바로 서울 한강입니다. 달밤에 거기를 놀러 나갔다 가 마침 자살하려고 철교에서 떨어진 여자를 하나 건져 주 었는데, 아주 젊은 여자에요. 그 후에 신문에 났는데 그 여 자는 서울 삼청동(三淸洞) 사는 과부라서, 수절하는 중에 어 떤 자가 밤중에 들어가서 겁탈을 했는데, 강약이 부동으로 당하기는 당하고도, 그것이 분하고 부끄러워서 자살을 하려 고 빠진 것을, 어떤 사람이 건져 주어서 생명에는 관계가 없다고 났더군요."
대철은 차를 마시더니,
"그런 일이 있었고, 또 한번은 원산서 생긴 일인데....."
하고 말을 계속하려 할 때에 정식이 정순을 데리고 들어온다. 어느 사이에 정순이가 들어왔다.
" 이 사람 조금 늦었습니다. 오늘 미안합니다. "
하는 정식의 토거리 인사가 있자,
"저를 기다리시게 하여서 대단히 미안합니다. "
정순이 미소를 띠고 인사한다. 대철은,
"뭐 그다지 오래지 않았습니다. 순영씨하고 이야기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을 몰라서 그런가 잠깐인 듯한데요."
하고 웃어 버린다.
"같이 와 가지고 나는 어떻게 하라고 너 혼자만 그러구 갔니?" 순영은 웃으면서도 불평하는 듯이 말한다.
"너는 뭐, 길을 몰라서 못 오니? 나는 잠깐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갔더니, 모두 미안하게 됐구나."
정순은 말을 하고 조금 주저하더니,
"그런데 김 선생님 말씀에, 너 하구 예기하시느라고 시간가 는 줄을 모르셨다는데, 얼마나 재미있는 예기를 했기에 그 러냐? 그러면 내가 먼저 간 것이 잘 됐지 뭘 그래?"
하고 눈을 흘기는 듯이 웃는 입술을 삐죽인다.
"너는 그게 방패막이 하는 소리냐? 너 말 잘하는 줄 알았 어, 얘 고만두어."
순영은 웃지도 아니하고 얼굴이 조금 붉어진다. 순영은 그 들이 일찍 오기를 기다리지 아니했을 뿐 아니라, 마침 그때 들어온 것이 여간 불쾌하지 아니하였다. 순영은 대철이 물 에 빠진 사람 건져 준 이야기를 하다가, 끝으로 원산에서 사라 건져 준 이야기를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자기의 일인 줄을 알면서도 어쩐지 철두철미 그 얘기를 자세히 듣고 싶 었고, 그 얘기를 들은 다음에는 자기로서 표정으로나 말로 나 라도 해포를 두고 가슴에 일이고, 다음에 말했던 회로를 때 말이라도 누설하려고 하였었는데, 그러한 말이 시작되다 가 그들이 들어오므로 주단이 된 것이, 마치 바라고 바라던 행복의 실마리를 잡을 듯 잡을 듯 손끝에 가칫거리다가 고 만 바람에 부려서 놓친 것처럼 애석하였다. 그것이 만일 심 상한 이이라면, 그들이 있는 데서 말을 했자 아무 거리낄 것이 없는 것이어서 다시 재차 물을 수도 있는 일이지마는, 그 일만은 도저히 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이 있는 데는 들 을 재미가 없을 뿐 아니라, 가령 고양이나 강아지가 옆에서 듣는다고 하더라도 순영은 긴장한 마음과 진정한 표시가 얼 마쯤 걸릴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는 다시 묻고 싶지 아니할 뿐 아니라, 도리어 대철이 그 말을 계속할까 두려웠다. 만일 대철이 그 말을 계속한다면, 무슨 방법으로 그것을 중지시킬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그렇지 않아도 끊 어질 듯한 간장을 더욱 졸이었다. 만일 조물주가 그것을 본 다면 실로 가엾은 일이었다. 그러나 대철은 그들과 다른 말 을 하기에 그 마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남은 문제는 어찌하여야 다시 대철을 조용히 만나게 될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처지 자기의 처소를 가르쳐 줄 수 는 없었다. 처소를 가르쳐 준댔자 대철이 반드시 찾아올지 도 모르는 일이요, 그보다도 자기가 말하기 전에 대철이 자 기의 경우를 알게 된다면, 그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말을 하는 때에는 아무 쪼록 양해가 되도록 말을 하겠지만, 그러한 양해도 없이 무 두무리(無頭無尾)에 자기가 색주가로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첫 인상이 나쁘게 되어서 만사는 와해될까 두려운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그리고 다음에 대철의 주소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정식의 주소를 물었다. 그리고 다음에 대철의 주소를 알았다.
그들이 저녁을 먹고서 집에 간 것은 오후 열 시경이었다.
6.
편집순영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튿날에라도 대철을 찾아가 보아야 하겠는데, 낮에는 몸을 뺄 수가 없을 뿐 아 닐, 찾아가도 약속이 없는 일이라 만날는지도 모르고, 밤에 가는 것이 마땅한데 밤에도 이슥하도록 손님을 치르고 나면 너무 늦기도 하려니와, 그때인들 무고히 나갈 수는 없고, 무 슨 핑계를 대어야 좋을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리하여 군색하게 거짓말로 핑계를 대는 것보다 차라리 사실대로 말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결심하였다.
이튿날 저녁을 먹은 뒤에, 순영은 숙자에게 가서 사실을 대강 말하였다. 자기가 서울 올 때에 원산서 종선에 내리다 가 잘못하여 물에 빠진 것을 건져 준 사람이 있는데, 어제 월미도에 갔다가 우연히 그 사람을 만난 바에 그러한 은인 을 찾아가 보지 않을 수가 없다는 사연이었다. 그 말을 들 은 숙자도 쾌히 허락하였다.
순영은 대철의 여관을 찾아갔으나 선뜻 들어갈 용기가 나 지 않아서, 대문턱에서부터 어름어름하는데,
"여관을 정하려고 그러세요?"
그 여관의 심부름꾼일 듯한 아이가 어디서 나왔는지 공손 하게 말을 했다. 순영은 공연히 놀라서,
"아니에요, 여기 계신 손님을 찾아뵈러 왔는데요."
"성함이 누구세요?"
"저요? 저는 장 순영이에요."
순영은 자기 성명을 묻는 줄 알고 대답하였다.
"아니에요, 손님 성함 말씀에요."
"네, 손님은 김 대철 씨 에요."
순영은 조금 무색한 듯이 고개를 숙인다.
"네, 김 대철 씨 요? 저 칠호실에 계십니다. 이리 들어오시 지요."
하고 손으로 인도하였다.
"지금 그 방에 다른 손님이 안 계신가요?"
순영은 걸음을 천천히 옮기면서 말한다.
"네, 아까 손님이 한 분 오셨더니, 가시고 지금은 아무도 안 계십니다. "
그 아이는 순영을 자세히 보면서 가다가, 다른 손님이 부 르므로 칠호실을 일러만 주고 간다. 칠호실은 맨 끝으로 있 어서 비교적 조용한 방이었다. 순영은 방문 앞에 가서 조금 주저하면서 방안의 동정을 살피다가, 다른 사람이 있는 기 척이 없으므로 기침을 가볍게 하였다. 그래도 아무 기적이 없었다.
"선생님 계세요?"
목소리는 가늘면서 떨리는 듯하였다.
"게 누구십니까?"
말소리만 나오고 문은 열어 보지 않는다.
"저예요."
안에서 놀라 문을 열어 보는 대철은,
"아! 이게 웬일이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나는 약 팔러 다 니는 여자인 줄 알았습니다. 약 팔러 다니는 여자가 어찌 그렇게도 많은지 하두 귀찮아서 문 밖에서 여자 소리만 나 면 대답도 잘 않는데, 그래서 진작 문을 열어 보지 않았습 니다. 용서하십시오."
하고 순으로 인도하더니, 방석을 내놓고 안기를 청한다.
"어제는 실례를 많이 하였습니다. "
순영은 않으면서 인사를 한다.
"천만에, 어제 참 실례 많았습니다. 댁을 알았으면 먼저 찾 아가서라도 뵐 텐데 이렇게 오셔서 찾아 주시니 너무 감사 합니다. 그렇잖아도 내일쯤이나 서군을 통하여서 정순씨 에 게라도 순영씨의 주소와 형편을 물어서 찾아가 뵈올 계획이 었는데, 이렇게 오셨습니다. 도리어 미안합니다. "
대철의 느름새는 상당한 교제적 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서 선생님이나 정순이를 한 번도 못 만나 셨어요?"
순영은 대철이 그 사이에 그들에게서 자기의 형편을 듣지 나 않았나 하고 다시 물어 보았다.
"못 만났어요. 만일 만났으면 순영씨의 사정을 물어라도 보 고서 찾아갔게요."
대철은 찾아가지 못한 발명을 되풀이한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저물게 찾아와서 선생임이 어찌 생각 이나 하지 않으실 는 지요?"
"천만에, 언제 오시든지 무슨 관계가 있어요. 심방이라는 건 기회와 시간이 있는 대로하는 것인데요. 그렇잖아도 궁 금하더니 잘 오셨습니다."
"저는 어제께 듣던 말이 재미있어서 마저 들으러 왔어요."
"어제께 무슨 말을 했던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생 각이 안 나는데요."
하고 대철은 무엇을 생각한다.
"아따 어제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시던 이야기를 하시다 가 말지 않으셨어요 왜? 그 얘기 말씀이에요."
"네, 그게 무슨 그리 재미있을 것이 있어요? 나는 무슨 말 씀이라고."
대철은 웃는다.
"저는 어쩐지 그런 얘기가 퍽 재미있어요. 집에 가서도 그 얘기 생각하느라고 잠을 못 잤는데요."
"아! 그렇게까지 재미가 있어요? 그럴 줄 알았으면 어제 그 얘기를 마저 해 드릴 걸 그랬습니다. 어제 무슨 말까지 했 던가?"
대철은 눈을 깜짝이며 생각한다.
"두 가지는 하시고, 원산서 생긴 일이라고 말씀하시다가 말 았지요."
"오, 참 그랬습니다. "
하더니,
"조금 가만히 계세요."
하고 심부름하는 아이를 불러서 실과를 사러 보낸다.
"저 주시려고 하시면 고만두세요. 저는 밥을 갓 먹고 와서 아무것도 못 먹겠어요."
순영이 사양하였으나 그 말쯤은 효력이 없었다.
"원산에서 생긴 일인데요. 그때 강원도를 갔다가 배를 타고 오는 길이었어요."
"네, 그런데요."
순영은 대철의 말을 밀막다시피 하고 자리를 고쳐 앉는다.
"그런데 그날 풍랑이 조금 있었어요. 그래서 조그마한 종선 의 출입은 좀 어려웠었는데, 배에서 종선으로 내릴 때에 종 선이 출렁거려서 잘 내리지는 못하는데, 웬 열 넷 댓 살 먹 은 계집애 하나가 내리다가 발을 잘못 디뎌서 바다로 떨어 졌지요. 그런 것을 들어가서 건져내었지요. 그것이 뭐 그렇 게 재밌을 것 있어요?
대철은 심상하게 웃는다.
"그러니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그애는 죽었겠지요?"
순영은 긴장하면서도 천연한 태도로 말한다.
"물론이지요, 건져 주지 않았으면 죽었지요."
"그게 어디 아이래요?"
"모르지요. 그때 강원도 어디 사는 아이라는데 웬 늙수그레 한 여자하고, 또 그보다 조금 큰 계집애하고 셋이 가나 보 더군요."
"대강이라두요."
"대강? 대강 말하자면?"
하고 순영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대강 말하자면 순영씨 얼굴 비슷할까? 어쨌든 계집애는 촌에서 생장한 아이라도 얌전스럽게는 생겼더군요."
대철은 그때에 보던 기억을 찾아내려고 하는 듯하였다.
"저같이 생겼어요?"
순영은 눈자위가 붉어지고 얼굴빛이 변하더니 눈물이 주르 르 흐른다.
뜻밖에 그 광경을 보는 대철은 놀랄 만큼 이상하였으나, 냉큼 웬 일이냐고 묻지도 못하고 한참 그대로 보았다. 순영 은 이마를 방바닥에 대고 두 손으로 양쪽 볼을 가리고 느낀다. 대철은 순영이 정신병자로 발작된 것이나 아닌가 하고 도 생각해서, 마음이 희끄름하기도 하였으나 하여간,
"왜 그러세요?"
하고 물어 보았다. 순영은 들었는지 말았는지 느끼는 소리 가 더욱 커질 뿐이다.
"아, 웬일이세요?"
대철은 순영의 어깨를 적신다.
"제가 원산서 선생님이 살려 주신 장 순영이에요."
순영은 비로소 머리를 들고 눈물도 씻지 아니한 채 울음 섞어서 말한다. 대철은 뭐라고 마을 해야 좋을는지 몰라서 순영의 얼굴만 쳐다본다.
"저는 선생님이 원산 바다에서 물에 빠진 계집애를 건져 주셨는데, 얼굴 모습이 저와 비슷하다고 하셨지요. 제가 바 로 그 계집애에요."
순영은 말끝에 소리를 내어 울다가 수건으로 눈을 씻고 진 정하면서 대철을 본다.
"아! 그러세요? 나는 진정 몰라보았는데요."
대철은 어색하고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러시겠지요. 저는 그때 눈여겨보았으니까 짐작이라도 하 지만, 선생님은 그렇게 눈 여겨 보시지 아니하셨을 뿐 아니라, 그때의 제 모양이 형편없이 되었을 터이니까, 자세히 보셨더라도 모르시겠지요. 저는 그 이후로 한날 한시라도 선생님을 잊어 본 일이 없습니다. 저 는 그때에 철을 몰라서 선생님의 주소나 성함을 물어 보지 도 못했으나, 마음으로는 잠시라도잊은 때가 없습니다. 그래 서 선생님을 한 번 만나 뵈었으면 하고 늘 마음으로 생각하 고 염불을 하면서 부처님께 축원을 하였습니다. 그래 부처 님이 돌보셨는지 오늘 선생님을 이렇게 뵈옵게 되오니, 인 제는 죽어도 원이 없겠습니다."
순영은 다시 눈물을 흘린다.
"아, 그러세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 나도 그 후로 순영씨 를 생각한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일은 잊을 수가 없는 일이지만, 순영씨에게 대해서는 더욱 잊혀지지 않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때에 순영씨가 나이 과년했다든지 인물이 초월했다든지 그런 것 으로 나의 마음을 끈 것은 아니지만, 그때 물에서 건져내서 갑판에 놓고 물을 빼고 해서 정신이 난 뒤에 나를 보면서
<에이구, 이 은혜를 어떻게 갚나>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순영씨는 그것을 기억하시는지는 모르지마는, 나는 확실히 그 말을 잊어버리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그때 순영씨가 나 를 보는 눈이 하도 이상하여서 나에게 여간한 인상을 주지 않았습니다. 순영씨는 그때 경황이 없는 때라, 나를 의식적 으로 그렇게 보았는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보았는지 그것 은 모르나, 하여간 나로서는 평생에 그렇게 심각한 인상을 받아 보기는 처음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에이구, 이 은혜를 어떻게 갚나>하는 말이 심상한 듯하지만, 어린애로서 죽다 가 살아나서 정신이 없는 중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여간한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늘 순영씨를 생각하게 되고 친구 끼리 모여 앉으면 흔히 그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 제 만났던 서 정식씨 보고도 언젠가 그런 얘기를 한 번 했 는데요. 그래서 그 친구도 그 일을 알지요. 그래 그후로 한 번 만나 봤으면 하는 생각은 있었으나, 그 보다도 어찌 되 었는지 소식이나 알았으면 하고 늘 생각하였습니다. 그랬더 니 이렇게 만나 보기는 참 천만 의외입니다. ......."
하고 말을 계속하려 하는데 심부름하는 아이가 실과를 사 가지고 왔다.
"자, 이것을 좀 잡수시지요. 잡수시면서 천천히 말씀하시지요. 인제 마음 상하실 것 있어요?"
대철은 호주머니에서 작은칼을 내어서 배를 벗기려 한다.
"이리 주세요. 제가 벗길께요."
순영은 대철의 손에서 칼을 빼앗듯이 한다. 대철은 조금 사양하다가 그대로 주었다. 순영은 될 수 있는 대로 손이 배 몸에 덜 닿도록 조심스럽게 벗겨서, 저민 것은 대철의 앞에 놓고 자기는 배속을 들고 꼭지 잡은 손을 회회 돌리면 서,
"선생님, 잡수세요."저는 인제 원을 풀었어요. 죽어도 원이 없어요. 선생님을 뵈었으니까, 아무 원도 없어요. 저는 선생 님을 뵈오려고 하는 것이 일구월심 원이었어요. 그러다가 선생님을 이렇게 뵈오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대도 관계 없어요."
순영도 배속을 입에 대려다가,
"선생님, 이것을 이것 좀 잡수세요."
하고 배 저민 것을 손으로 들어 주려고 하다가 놀라는 듯 이 손가락을 치마폭에 씻으면서,
"들어 드리려고 하였더니 손이 더러워서 못 들어 드리겠어요. 어서 잡수세요."
순영은 부지 불각중에 웃는다.
"아닙니다, 이것을 잡수세요. 왜 배속을 들고 그러세요. 배 속을 먹으면 귀먹는다던데."
대철은 배 저민 것을 순영의 앞으로 밀어놓으면서, 순영이 가진 것 을 빼앗다시피 하여 자기가 가지더니,
"순영씨는 손이 더럽다고 안 집어 주시지만, 나는 더러운 손으로라도 들어 드리겠습니다."
하고 배 한 점을 집어서 순영을 준다. 순영은 받아서 대철 이 손잡았던 곳을 한 번 베어 물더니,
"그럼 저도 더러운 손이나마 집어 드리겠습니다."
하고 한 점을 집어 준다. 대철은 웃으면서 받아먹더니,
"그런데 어떻게 여기 와서 계시게 되었으며, 또 무얼 하고 계세요? 본래 댁이 여기시던가요?"
대철은 진정으로 묻는다.
"아니에요, 제 고향은 강원도 인제 땅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 와 계세요? 그런데, 그때는 어딜 가시 는 길이였으며, 그때 동행하던 이들은 다 누구래요?"
"네, 그것을 다 말씀해 드리지요. 선생님이 묻지 아니 하신 대도 저의 사정을 다 말씀 하려구 하였습니다......"
순영은 먹던 배를 놓고 자리를 고쳐 앉더니, 자기가 생장 하던 일부터 오늘날까지의 내력을 소상하게 말하는데 대철 은 정신을 모아서 듣는다. 순영은 말을 다 하고 나더니 다 시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 눈물이 글썽글썽한다.
"야!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그렇게 파란이 많은 것입니다.
순영씨도 불과 사오 년 간에 그러한 파란곡절이 있었습니다. 그려."
대철이는 인생 철학을 다시 인식하면서 동시에 자기의 과 거를 추억하는 듯하였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저 같은 팔자도 있을까요?"
순영은 다시 눈물을 씻는다.
"이 세상에 그런 일이 얼마든지 있겠지요. 그보다도 몇 배 나 기구한 일도 많겠지요. 초년 고생은 복이 된답니다. 언제 또 운이 돌아오는 날이 있겠지요. 조금도 비관할 필요가 없 습니다. 나도 순영씨 못지 않은 운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지만 그것을 비관하지는 않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세상하 고 싸우고 운명하고 싸우고 그러자고 결심하였습니다. 흥진 비태요,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으니까요."
대철이는 굳은 결심을 가진 듯이 주먹을 불끈 쥐다가 다시 껄껄 웃는다.
"사내들은 그럴 수가 있지마는, 여자야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거야 남 여가 다를 리가 있나요?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선생님!"
순영은 새로운 기색으로 대철을 본다.
"네"
대철은 순영을 본다.
"계집애가 색주가 노릇을 하면 사람은 버린 것이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색주가 노릇을 한다고 사람을 버 릴 리가 있나요."
"일반 사회에서 색주가 노릇하는 계집을 사람으로 인정하 겠어요?"
"천만에, 영업이 다를 뿐이지 무슨 상관이 있어요? 색주가 가 아니라 아무 노릇을 하더라도 저 되기에 있는 거지요."
"그럴까요?"
"그렇고말고요, 정경부인이라도 제게 있는 것이요, 색주가 아니라 기생이라도 제게 있는 거지요. 그전의 역사를 보면 기생 중에도 훌륭한 사람이 많은 데요."
"기생은 오히려 색주가보다 다르지 않아요?"
"다르다니 얼마나 다르겠어요? 혹은 다른 점도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판에 박힌 것으로 보면 기생이 색주가만 못한 점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러나 통틀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에요."
대철은 자시 있게 말한다.
"그거야 그렇겠지요. 황모꼬리 삼 년 두어도 흰 개꼬리 못 되는 것이요, 옥은 진토(塵土)에 묻혀도 옥은 옥대로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기가 쉬워요?"
"그러니까 쉽지 못하다는 것은 딴 문제요, 모든 일이 사람 에게 있으니까, 단지 색주가라고 해서 나쁘게 알 것은 아니 다, 이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만 하여도 색주가 노릇하는 계집애라면 재미없이 생각하시지 않겠어요? 우선 저만해도 색주가 노릇 을 한다니까 처음부터 정나미가 떨어지실 건데."
순영은 대철의 기색을 자세히 살핀다.
"아닙니다. 나도 세상의 쓴맛을 하도 맛보아서 그만한 사정 은 잘 이해하지요. 순영씨의 사정을 듣고서 동정이 있었지 만 달리 나쁘게 알 리야 있나요. 순영씨가 혹은 자격지심이 들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사실 그러 한 관념을 가지는 사람은 아니올시다."
대철은 차차 순영의 말하는 눈치를 아는 듯이 더욱 진실한 태도로 말하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무엇으로 갚을 것이 있어야지요......옛날 사람들은 은혜를 갚을 수가 없으면 몸으로 대신 갚은 일도 있다고 하지만, 저는 몸도 색주가 노릇하는 더러운 몸이 되었으니 몸으로 갚을 수도 없고......또 제 몸이 색주가가 안 되었더라도, 무엇이 투철하 여서 선생님 같은 어른을 모실 수가 있나요. 그러니까 선생 님 댁에 가서 종노릇이나 하였으면 모르지만, 선생님은 아 마 색주가 노릇하던 년이라고 종노릇도 안 시키시겠지, 그 렇겠지요 선생님?"
순영은 몸을 조금 틀면서 웃으려는 태도로 대철을 본다.
"원 이제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그려. 은혜가 무슨 은혜며 또 겸사도 분수가 있지, 왜 자꾸 그렇게 말씀을 하세요? 저 는 삼십이 다 되어 가지만 이때까지 순영씨 만한 여성을 대 해서 이만큼 정담을 해본 일도 별로 없습니다. 나는 아직 미혼입니다. 위인도 못났지만 여러 가지 사정도 있고, 그중 에 안 고수비로 눈은 높아서 웬만한 여자는 눈에 차지도 않 지요. 그래서 이때까지 장가를 못 들었는데, 그러자니까 자 연히 여자가 있으면 주의해 본 것이 아니오. 하지만 정말 여자가 귀하더군요. 사람이 껍데기만 번지르르하면 뭘 해요.
속이 있어야지. 대면해서 실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순영씨 같이 구비한 여성은 처음 본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종이라니요. 저로서는 실례의 말로 순영씨를 사랑할 자격도 없는데 종이라는 말씀은 마십시오."
대철은 만족한 듯이 웃는다.
7
편집대철의 사정과 자기에게 대한 심정을 알아보려고 애를 쓰 던 순영은, 대철이 아직 장가를 들지 아니하여 규수를 고른 다는 말과, 자기를 사랑할 자격도 없다는 말에 적지 아니한 힘을 얻어서 태반이나 뜻을 이룬 듯하였다.
"선생님"
순영은 정중하게 말을 꺼내었다.
"저는 할 수 없이 색주가 노릇은 하지만 아직 몸은 더러운 몸이 아닙니다. 그것만은 그렇게 알아주세요. 여자로서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 체면도 아니고, 선생님이 어찌 생각하실 는 지 모르지만, 저는 평생을 두고 생각하던 일이요, 또 선 생님을 지금 뵈오면 다시는 언제나 뵙게 될는지 모르니까, 저는 속에 있는 말을 다 하는 것이에요. 저는 정말 못 생기 기는 했지만 몸은 조금도 더럽힌 일이 없어요, 그것만은......"
순영은 말을 계속하려다가 차마 못하는 모양이다.
"아, 그러시겠지요? 잘 알았습니다 한데 그게 참 어려운 일 이거든요. 여자라는 것이 층층 시하에 안방에다 가두어 두 다시피 하고, 어디를 가려면 사람을 따라 보내느니 어쩌니 하여서, 물샐 틈 없이 감독을 하여도 별별 일이 다 많은데, 술잔을 들고 여러 손님을 대하면서도 몸을 깨끗이 가지는 건 보통 일이 아니겠지요. 참 감사한 일이올시다."
대철은 순영의 칭찬을 흠뻑 하면서도 정작 순영이 듣고자 하는 말은 비치지도 아니한다.
"그런데 여자로서 제 몸을 깨끗이 가졌다는 것이 무슨 강 한 일도 아니겠지요 그러나 저로서는 못 생긴 이 몸이나마 깨끗이 가졌다가, 선생님의 은혜를 갚을 기회가 있을까 하 고 제 딴에는 오늘까지 원을 세웠습니다."
순영은 망설이다 망설이다 마지못하여 이 말을 하고서는,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울렁거린다.
순영은 진실로 순진한 사람이었다. 자기의 은혜를 갚겠다 는 도덕 관념으로 오늘까지 사오 년의 성상을 하루같이 생 각하던 그 사람을 만나서 자기의 간담을 다 털어 말하여 여 자로서 도저히 먼저 말하기 어려운 말까지 하게 된 것은, 경솔하니 무례하니 하는 동의 교제적 체면으로 책망하는 것 보다, 차라리 솔직한 성격의 아름다운 일이었다. 그러나 순 영하고 대철은 문을 열더니,
"정순씨도 오셨군요. 어서 들어오시지요."
하고 그들을 인도한다. 그 소리를 들은 순영은 그 사람들 을 보기 전에 얼굴에 불을 담아 붓는 것같이 화끈하면서 어 쩔줄을 모른다.
"순영씨가 오셨군요."
하는 정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가 웬 일이냐?"
정순이 이상한 듯이 순영을 보다. 순영은 일어서면서,
"여기 오세요."
하고 정식에게 인사를 하더니,
"너는 웬 일이냐?"
하고, 정순에게 말하는 태도는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대철을 찾아왔건만 대철에겐 별로 말이 없고, 말머리는 순 영에게로 대었다.
"참, 순영씨를 여기서 뵈옵기는 의외인데요."
하는 정식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그런데 정말 웬 일이냐?"
정순이 다그쳐 묻는다. 정순이 순영을 보고서 웃기만 하는 것도, 순영은 그것이 소리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자기 를 보고 웃다가 다시 대철을 보고 웃는 정순은, 더욱 의미 가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여서 순영은 몸 둘 바를 알지 못 할 만큼 불안하였다. 순영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때의 공 기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전환시킨다든지, 자기의 마음을 너 그럽게 돌린다든지 할 수는 없었다.
"저는 먼저 가겠어요."
하고 일어나는 것이 순영이로서 면할 수는 없는 사정이었다. "아닙니다, 더 놀다 가시지요."
빙긋빙긋 웃으면서 말하는 정식도 밉살스러웠으나,
"우리가 와서 방해를 하는 게구나. 그러면 우리가 갈 터이 니 더 놀다 가거라."
하고 웃으면서 무릎을 짚고 일어나는 체하는 정순은 더욱 그러하였다. 그보다도,
"왜, 더 놀다 가시지요."
심상하게 말하면서 전송하려고 일어서는 대철의 태도는 다 시는 안 보겠다는 생각이 날 만큼 섭섭하였다.
거기를 나선 순영은 어두운 굴속에 갇혔다가 벗어나온 것 처럼 시원도 하였으나, 아끼던 보물을 잃어버린 것처럼 서 운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한 걸음에 뛰어가고 싶으면서도 어쩐지 다리가 무거워서 잘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순영 은 공연히 얼굴을 숙이고 가로등 빛을 피하여 가며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골목길로 돌아왔다.
순영은 집에 돌아와서 잠을 잘 수는 없었다. 첫째로 대철 이 이외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여간 괴롭지 아니하 였다. 자기로서는 하늘과 땅도 모르게 교섭을 하자는 것이 동이 닿기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바에, 모르는 사람도 아니 오 제일 꺼리는 정순을 만나게 된 것이 더욱 불쾌하였다.
그리하여 하필 왜 그란 저녁에 갔던가 하고 후회도 하였으 나 그것도 쓸데없는 일이요, 다시 생각하면 정순이 하고 특 별히 꺼릴 까닭도 없는 듯하였다. 처음에 자기가 대철을 만 나기 전에 정순이가 먼저 대철을 만나서 자기의 형편을 말 하게 되면 그것이 재미가 없을까 하여 꺼렸던 것인데, 자기 가 이미 대철을 만나서 자기 형편을 숨김없이 말한 바에는 정순을 그다지 꺼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자기의 소회를 이 루기 전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행동을 알게 되는 것은 재미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순영에게 크게 관심 되는 일 은 대철의 태도가 바라던 것보다 냉담한 것이었다. 순영은 대철을 믿고 믿어서, 자기 운만 데면 대철의 편에서 먼저라 도 호감을 가질 것이요, 만일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물론 소원을 이루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 마침내 기대와는 딴판 으로 !
되는 것이 실로 쓰라린 낙망이었다. 그러다나 한때의 행동 으로 그것을 여지없는 실패의 결과라고 볼 수는 없는 일이 요, 또 대철의 말이 뒤를 둔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스스 로 위안도 되었다.
순영이 대철에게서 나온 뒤로 그들의 화제는 순영에게로 돌렸다.
"선생님, 순영이를 그전부터 아세요?"
정순은 새삼스럼 말로 대철에게 묻는다.
"그전부터 알다니요? 어제 정순씨의 소개로 처음 인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순영이가 어떻게 선생님을 찾아왔어요?"
"왜요, 어제 인사한 사람은 서로 심방을 못하나요?"
"어제 인사했다고 심방을 못할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을 밤 중에 찾아온 것이 이상하지 않아요?"
"딴은 이상은 한 일일세. 어제 처음 인사한 사람을 밤중에 찾아왔으니, 어찌 순영이가 수영하는 것을 보고 칭찬을 해 쌓는데, 자네에게 홀딱 반한 것일세. 그렇지만 연애로는 너 무 특급(特急)인데."
대철이 정순의 말에 대답하기 전에 정식이가 말을 하고 웃 는다.
"그런 것도 아니겠지만, 자네 말대로 수영 때문에 반했다고 하면, 나보다 더 잘하는 자네에게 반하지 않고 내게 반할 리가 있나."
대철도 웃는다.
"그거야 말이 그렇지, 아무리 수영 때문에 반했기로 단순한 수영만이 조건이 될 수가 있나.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지.
하니까 자네를 택한 것이지."
"아니 그런데, 어제 순영의 행동이 이상스런 점이 많이 있 었어요. 그런데도 나는 무심코 심상히 보았더니 무슨 까닭 이 있나 봐요. 아마 어제 선생님이 순영이 하고 처음 인사 는 하였어도 그전부터 아시던 모양이에요. 그러면서도 서로 모르는 체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순영이 눈치가 다른 것 을 이제야 알았어요. 에구, 어쩌면 그렇게도 시침을 떼어요?
여자는 혹 모르지만 사내들이 아닌 보살인 체하고 시치미를 떼는 것은 웃어 죽겠어."
정순은 영리하게 알아 낸 듯이 자신있게 말을 하고 웃더 니,
"서 선생님도 이따금 그렇지 않으세요? 번연히 아는 일을 아니라고 뚝 잡아떼기가 일쑤구, 연애하는 남자들은 다 그 런가봐. 그저 어리석은 것은 여자지.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고 여자들은 속는 법이거든. 그래도 남자들끼리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언제든지 여자한테 속는다지. 참 기가 막혀서." 정순은 다시 정식을 향하여 오금 박듯이 마를 하고서 눈을 힐끔한다.
"이 사람아, 자네 때문에 나까지 연루자가 되겠네. 바른대 로 말을 하게."
정식은 대철을 보다. 대철은 순영에게 대한 전후 사연을 말할까 하고 입을 들먹거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그 말 은 도로 삼켜 버리고,
"그건 다 농담이고, 그 순영이 정체가 어떤 사람인가요?"
하고 정순에게 묻는다.
"왜 몰라서 물으세요?"
정순은 아직까지도 대철의 말을 곧이듣지 않는 모양이다.
"모르지 어떻게 아나요? 자세히 아시겠지요. 말씀이나 해주 세요."
"또 순영이 정체는 자세히 알아서 무얼 하세요?"
"기왕 말이 났으니까 들어보잔 말씀이지요."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그저 여기 와서 색주가 노릇하고 있지요 고향은 강원도 라나요. 처음에는 누구한테 속아서 서울로 왔다가 홍 숙자의 술집이라고 그리 팔려 온 모양이 더군요. 그래서 지금 술을 팔고 있지요. 그런데 아까 두 분 이 얘기할 때에 그런 이야기도 안하였어요?"
"그런 얘기 저런 얘기 할 겨를이 있나요? 순영이가 와서 얼마 안 있자 두 분이 오셨는데요. 그리고 대강 말을 한들 제 말 듣고서야 내용을 자세히 알 수가 있나요? 그러면 사 람은 보잘것없이 타락된 사람이구요."
하면서 은연중 정순의 뒷말을 기다린다.
"그거야 그렇겠지요. 계집애가 색주가판으로 돌아다니며 술 잔을 들고 앉게 되는 바에야 그다지 취할 것이야 있겠어요."
정순은 입술의 표정을 이상하게 하면서 냉담하게 말한다.
"그건 그렇게 말할 것은 아니지. 색주가 아니라 아무 짓을 하더라도 저 하기에 달린 것이지, 술잔을 두고 앉았다고 덮 어놓고 나쁘게 보면 안 되지요.
정식은 사리대로 말하는 겸 대철을 위로하듯이 말한다.
"그건 그렇지요. 순영이는 그 집에 와서 있는 지가 삼 년이 나 되서도 이렇다는 말이 없어요. 그런데 있는 계집애들이 나이 열 너더댓 살만 되어도 별별 행동이 다 많다는데, 수 영이는 나이 열 여덟이나 되고 인물도 미인은 아니라도 그 만큼이나 되었니만 이때까지 아무 말도 없었거든요. 그런 것을 보면 사람은 난잡하든지 그렇든 않은 모양이어요."
정순은 정식을 보고 다시 대철을 본다.
"그런 일이야 비밀이니 만큼 누가 아나요? 색주가로 있는 계집애가 나이 그만큼이나 되고서 성 할 수가 있나요. 그런 일 이란 소문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거든요."
대철은 더욱 정순의 말이 자세히 나오기를 돋운다.
"아니오, 그런 일이 아무리 비밀이라 하지마는 남이 먼저 아는 법입니다. 그리고 숨기려고 하는 일일수록 탄로가 나 는 것입니다. 그리고 숨기려고 하는 일일수록 탄로가 나는 것입니다. 순영이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제 가 보증이라도 하지요. 그래서 인천 바닥에서는 아주 순영 이가 얌전하다구 야단입니다. 그것은 참 애매한 소리입니다." 기를 내어서 말하는 정순은 순영의 변호보다 자기의 말을 세우기 위하여 힘있게 말한다.
"글쎄요, 정순이가 그렇다고 하시는 것을 구태여 아니라구 할 수는 없으니, 그렇기가 쉬울까요, 원?"
대철은 오히려 미심스럽게 말한다.
"그러나 저러나 순영이 행동을 자네가 그렇게 새삼스럽게 물을 것이 무엇인가? 자네 암만 해도 순영이에게 대해서 다 른 생각이 있나 봐."
정식이 웃으면서 말한다.
"아니, 기왕 말이 났으니까 말일세. 그런 것이 다 이야기지 별말 할 것이 있나. 심심한데 그런 얘기가 좋지 않은가."
대철은 자기의 무슨 의미를 그렇게 돌리려 한다.
"그러지 마시고 연애를 하려면 하세요. 다른 것은 몰라도 순영이가 난잡하지 않은 것만은 제가 보증을 할 테니까요.
그리고 그애가 원체 얌전하니까 손님들도 귀엽게 보아서 술 먹으러 가면 돈냥씩이나 집어 주고, 그 주인 마누라도 이따 금 뭣에 쓰든지 쓰라고 돈 원씩이나 착실히 주어서, 지금 저금한 돈이 삼 년 동안에 수백 원이나 되나 봐요. 그것은 아무도 모르고 저만 알지요. 저 보고서는 무슨 말이든지 속 내 말을 다 하거든요. 어째든 그만한 사람이 쉽지 않으니 연애를 하시려면 하세요. 망설이지 마시고."
정순은 진정 반 농담으로 말한다.
"술꾼들이 돈푼씩이나 주었 기로니 무슨 수백 원에 되겠어요? 쪽해야 몇십 원 되겠지."
대철은 심상히 말하는 듯하면서도 실정으로 알고 싶었다.
"아니오, 그것은 속이려야 속일 수가 없지요 제가 얼마 전 에 순영이가 저금하고 오는 길에서 만나서 저금통장을 보았 는데요. 그때에 벌써 이백 몇 십 원인가 되었으니까, 그 새 에 얼마간이라도 붙었겠지요. 오래잖아 한 밑천 꺼리가 될 텐데요. 사람은 고만큼 되기가 어려워요. 살 아끼고 인정 있 고 그러기에 저는 성미가 야릇해서 별로 친한 애들이 없어요. 순영이 하고는 참 친합니다."
정순은 내친걸음에 순영을 한껏 춘다. 그들은 늦게까지 얘 기하다가 흩어졌다.
8
편집이튿날 저녁에 순영은 다시 대철을 찾아갔으면 하는 생각 도 있었으나, 날마다 몸을 빠져나갈 수도 없는 일이요, 대철 이 냉담하게 하던 일을 생각하면 그다지 애쓸 것이 없다는 마음도 있었으나, 그래도 궁금하여서 마음을 진정할 수 없 었다.
"순영아, 손님 오셨다."
하는 산월의 말에 전 같으면 으례 술꾼인 줄 알고 아무 말 도 없이 나갈 터인데 자기도 모르게,
"웬 손님이냐?"
하고 물었다.
"모르겠다, 웬 손님인지. 전에 못 보던 손님이다, 아마 술 꾼이겠지."
"늙은이던? 젊은이던?"
순영은 전에 못 보던 사람이라는 데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양복장이 젊은인데 키가 호리호리하고 그렇다."
"응, 그래?"
순영은 혹은 대철이 아닌가 하고 마음을 졸이며 나가다가
"아! 김 선생님이 어떻게 오셨어요?"
하고 머뭇머뭇 서서 기다리고 있는 대철에게 놀라는 듯이 말을 한다.
"안녕하셨어요?"
대철은 반가와 하면서도 어쩐지 서먹서먹하는 듯하였다.
"네"
하고 말을 계속하려다가 옆에서 누가 듣나 하고 사방으로 돌아보다가,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하고 딴 방으로 인도한다. 대철은 인도하는 대로 따라 들 어갔다.
"어젯밤에 곤하셨지요? 제가 온 뒤에도 손님들이 오래 앉 아 노시다 가셨을 텐데?"
"아닙니다. 손님들은 조금 있다가 갔으니까 손님 때문에 잠 못 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잠은 잘 안 오더군요."
대철은 순영을 보며 웃는다.
"왜 그러세요?"
순영은 말을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더욱 의심하는 태도로 묻는다.
"글세요, 순영씨가 어두운데 혼자서 잘 가셨나 어쨌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덧들어서 날 새는 줄을 몰랐어요."
"에구 감사합니다,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저는 와서 드러눕기가 무섭게 쿨쿨 잤답니다."
"그러시겠지요, 초라한 데를 내왕하시느라고 고단하셨겠지요." "선생님은 제가 오던 맘으로 쿨쿨 잤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그런 말을 하기 전에는 어떻게 생각을 하셨어요?"
"글쎄요, 그 전에는 내가 순영씨를 생각하느라고 순영씨가 어떠하리라는 사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랬을까요, 그러나 선생님이 저의 잘 가고 못 간 것을 생 각하시느라고 잠을 못 주무셨으면, 저도 선생님의 잘 주무 시고 못 주무시는 것을 생각하느라고 잠을 못 잤을는지 모 르는 일이 아니에요?"
순영은 대철을 보다가 얼굴을 숙인다.
"감사합니다. 어제 저녁이라도 곧 와서 뵈옵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순영씨의 처소가 처소요 사정이 사 정이니 만큼 오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일찌기라도 올까 하 다가, 낮에는 자연히 분주할 듯도 하고 해서 지금서야 왔습 니다. 한데 방해되시는 일이나 없을까요?"
하는 순영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미닫이를 열고,
"여보, 거기 술상 좀 차려와요."
하더니,
"조금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나갔다.
대철은 자기가 먼저 술을 청하기 전에 순영이 술상을 차리 는 것이, 한편으로는 미안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에게 술 을 팔기 위한 것이나 아닌가 하여서 불쾌하기도 하였으나, 허여간 하회를 볼 양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에구, 오래 기다리시게 하여서 미안합니다."
하고 순영은 술상을 가지고 들어와서 공손히 놓으면서,
"제 손으로 술상을 좀 보느라고 나갔다 왔어요. 기다리셨지요?" 웃는 눈으로 대철을 본다.
"아니오...... 기다리기는 하였으나 술상 차리는 것이 늦어서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요?"
순영은 의심을 갖는 듯 한다.
"순영씨가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니까 기다려진 것이지요."
"에구, 선생님도 무얼 그러세요? 공연히 하시는 말씀이지......"
순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만족한 듯하였다.
"어쩌서 공연한 말이라고 하세요......그러나 그렇게 말씀하 시겠지요. 사람은 다 자기를 표준하고 말하는 것이니까. 순 영씨의 마음을 미루어서 본다면 그렇게 말씀하시겠지요. 그 러나 순영씨가 순영씨의 표준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나의 표준어가 있으니까요. 순영씨가 나를 보기 싫어하신 대도 나로서 순영씨를 잠시라도 기다려지는 것은 개성 (個 性)으로 보아서 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대철은 이상한 눈으로 순영을 보면서 웃지도 않는다.
"왜 그렇게 말씀을 하세요. 저는 그렇게 한 말씀이 아닌데, 에구 참......"
순영은 몸릉 조금 틀면서 대철에게 넘어질 듯한 자세를 취 하다가, 다시 몸을 바르게 하고 얼굴을 조금 붉힌다.
"술이나 한 잔 잡수세요."
하고 술을 따라서 은근히 권하는 순영은 술 권하는 것으로 자기의 군색한 것을 흐려 버리고, 새로운 공기를 지으려고 하였다.
"저녁을 먹은지가 오래지 않아서 술 생각이 별로 없는데요." 하고 술상을 살펴보면서 술을 들지 않은 대철은, 이 말로 써 자기가 먼저 술을 청하지 아니한 발명을 표시할 겸 순영 의 술 가져온 의사를 엿보려고 하였다.
"저녁 잡수신 지가 언제라고요. 지금 밤중이 다 되어 가는데. 그리고 아까 하신 말씀이 정말이시라면 설사 약주를 잡 수 시가 싫으시더라도 제가 드리는 술이니 달게 잡수셔야 옳지 않아요?"
순영은 다시 술잔을 들어 준다.
"글쎄요, 순영씨가 권하는 술을 안 먹을 수야 있습니까?"
대철은 잔을 받아서 천천히 마신다.
"그런데 선생님, 약주를 왜 그렇게 뜨막하게 잡수세요? 정 말 잡수시기 싫은신 것을 잡수시는 계로군요."
대철의 술 마시는 것을 바라보던 순영은 조금 미안한 듯이 말한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나는 본래 술 먹으려면 그렇 습니다. 처음에는 날 보건데 술을 못 먹을 것 같지요. 그러 다가 차차 먹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두 고 보십시오."
대철은 안주도 먹지 아니한 채로 술을 따라 들더니,
"술이라는 것은 혼자 먹으면 아무 재미가 없는 것이거든요." 하고 순영에게 권한다.
"에구 선생님도, 제가 술을 먹을 줄 아나요?"
순영은 술잔을 받아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른다.
"그렇지만, 술이야 혼자 무슨 재미로 먹나요, 순영씨가 안 잡수시면 나도 고만두지요."
대철은 순영을 보더니 팔짱을 낀다.
"그럼 먹겠습니다. 많이 먹으나 적게 먹으나 먹기는 일반이 니까요."
순영은 술을 한 방울쯤 마시는 듯 마는 듯하더니, 남은 술 잔을 들고서 다른 그릇에 따를까 하고 망설이다가,
"그런데 약수를 혼자 잡수시기가 재미가 없으면 한 잔은 선생님 턱으로 잡수시고, 한잔은 제 대신으로 잡수시고, 그 러면 둘이 먹는 셈이 아니에요. 그렇게 잡수세요, 선생님."
하고 술잔을 대철에게 다시 거두면서 고개를 숙이고 웃는다. "그것 참 명답 이신데요. 그전에 정수동(鄭壽銅)이라는 사 람이, 술을 한 병은 술로 먹고 한 병은 안주로 먹었다더니, 그 말과 마찬가지 논법이시군요. 그럼 그렇게 하지요."
하고 대철은 팔짱 꼈던 팔을 쑥 빼더니,
"그럼 그 잔부터 이리 주시오."
하고 손을 펴서 순영이 먹다 남긴 잔을 받으려 한다.
"아니에요, 이 잔은 버리고 새로 따라 드릴 게요."
순영은 술상의 아래위를 둘러보았으나, 먹던 술을 따를만 한 그릇이 하나도 없다.
"그러면 순영씨가 잡숫다가 남은 것을 먹는 셈을 잡지말고 내 입을 공기라고 하지요. 그래서 순영씨가 잡숫다가 남은 술은 공기에다 따르는 셈을 잡으면 안 되어요? 그러고서 새 로 따라 주시면 그것은 정말 입으로 먹겠습니다."
대철은 순영이 가진 슬잔을 빼앗다시피 하여 들고서,
"자, 이것은 먹다 남은 술을 공기에다 따르는 것입니다."
하고 훌쩍 들이마시더니,
"자, 이제 정작 술을 한 잔 따라 주시오."
하고 잔을 주면서 웃는다.
"에구, 참 선생님도, 용한 말씀을 어쩌면 그렇게 잘 하세요?" 순영은 만족한 듯이 웃으면서 술을 따랐다. 술은 대 여섯 잔이 지났다.
"그런데 선생님, 어제 저녁에 제가 나온 뒤에 제 말씀들을 많이 하셨지요?"
순영은 궁금하던 어제 저녁 일로부터 말을 꺼내었다.
"별로 말할 것이 있나요, 뭐?"
대철은 잔을 놓고서 순영을 본다.
"그럼, 제게 대한 말을 한 마디도 안 했어요, 그래?"
"더러 말이 있었지요."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 들으나 안 들으나 흉을 보셨겠지뭐?" "그렇게 아시면 물으실 것이 있나요."
"그래도 어떻게 흉을 보았는가 알고 싶어요. 말씀 좀 해주 세요."
순영은 조금 새암하는 듯한 애교를 부린다.
"흉은 누가 흉을 보아요? 순영씨에게 흉된 일이 있나요?
말하다가 순영씨 말도 더러 났는데, 정순씨가 아주 극구 찬 성을 하더군요. 그래 나는 듣기만 하였지요. 내야 순영씨에 게 흉이 있는지 찬성할 것이 있는지 알 수가 있나요. 하지 만 듣기에 아주 좋더군요."
"선생님이 저 듣기 좋으라고 공연히 하시는 말씀인 계지, 정순이가 저를 찬성할 일이 무엇 있나요. 그러면 뭐라고 찬 성해요?"
순영의 안색은 새로 기뻐진다.
"정순씨 하던 말을 고대로 옮길 수는 없으나, 인물이 이쁠 뿐 아니라 맘씨도 좋고, 범절이 얌전하고 저금도 많이 하고 그랬다고 여러 가지로 칭찬하던데요."
"에구, 그건 참말 거짓말이에요. 인물이 이쁘다구요?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다른 것은 몰라두 얼굴은 환히 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제 얼굴을 이쁘다구요. 그 한가지로 보아도 거짓말이 아니에요? 에구, 망측해라, 내 얼굴이 이쁜 게 다 뭐야."
순영을 머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러나 기색은 만족하였다.
"그럼 얼마나 이뻐야 이쁘다고 하나요? 나는 각처로 다니 면서 여자를 상당히 보았지만 순영씨 같이 여러 가지로 구 비한 인물은 처음 보았는데요. 사람의 인물이라는 것은 뵈 는 구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요."
대철은 순영을 보더니 다시 술잔을 본다.
"에구 선생님두, 공연히 그러시지 마세요. 부끄러워 죽겠네. 인물이 못났다고 그렇게 조롱하시지 마세요."
순영은 웃음에 감기는 눈으로 대철을 흘겨보더니,
"약주나 잡수세요"
하고 술을 친다.
"세상에 꽃이 허다하게 많지만, 보는 사람의 주관을 따라는 것도 그러하여서 다 각기 좋아하는 것이 다릅니다. 마찬가 지로, 사람을 보는 것도 그러하여서 서로 취하는 점이 다를 뿐 아니라, 심하면 갑(甲)은 박색이라고 보는 것을 을(乙)은 일색이라고 보는 수도 있으니까요. 순영씨 자체로서 또는 다른 사람으로서, 순영씨의 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별문제이 겠지요. 그러나 나로서는 첫인상이 좋았고 볼수록 더욱 그 러한데요. 나는 터럭끝 만큼도 순영씨의 환심을 사기 위하 여 본의 아닌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순영씨도 지금 말 씀은 그렇게 하지만, 언제든지 거울을 대할 때에는 '이만하 면'하고 스스로 웃으실 것입니다......가령 순영씨의 말씀과 같이 나의 아까 한 말을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지금 한 말 만은 참 말이지요?"
대철은 이상하게 눈웃음을 치면서 순영을 본다.
"말대답을 하면 점점 더하실 테니까 말대답을 안 해야지.
그럼 그렇다고 하시고 약주나 드세요."
순영은 잔을 들어서 거의 대철의 입에 닿을 만큼 권한다.
"먹지요, 오늘 저녁같이 좋은 때에 술을 안 먹고 언제 먹겠 습니까? 나는 순영씨같은......뭐라고 말할까, '미인'이 라면 반대하실 게고, '박색'이라고는 내가 말하기 싫고 그저 순영 씨하고 하지. 나는 순영씨의 손에 술을 받아 먹는 것만해도 여간한 광영이 아닙니다. 나는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술 을 먹어 보기는 처음이니까요, 아! 참, 유쾌하다."
대철은 잔을 받아서 단숨에 마시더니 술잔을 잡은 채로 내 밀면서,
"한잔 더 주시오, 이번은 내 술로 먹었거니와 또 순영씨 대 신으로 먹어야지. 사람은 남녀간에 약조를 지켜야 하는 것 이니까요."
하고 반취나 된 눈으로 순영을 본다. 무어라고 말을 해야 좋을는지 모르는 순영은 웃는 입술에서 흐르는 '에구, 참!'이 라는 한 마디로 천언 만어를 대신하고 술을 가득히 부어 주 면서,
"이것은 제 대신이에요."
순영은 자기 존재의 전부를 그 술에 타서 주는 것처럼 그 때의 심리 상태는 아무런 반항 작용이 없었다. 대철도 순영 의 참된 정신에 감동이 된 듯 한참동안 진정하는 것처럼 잠 잠히 앉았더니,
"이것은 딴 말씀입니다마는, 들으니까 저금을 많이 하셨다 니, 이러한 처지에 있어서 어떻게 저금을 하셨어요?"
술잔을 든 채로 몸을 조금 굽히고 묻는다.
"저금이 무슨 저금이에요?"
순영은 기분이 새로와진다.
"그럼 저금한 일이 조금도 없어요?"
"그까짓것 저금이라고 할 것이 있나요? 푼푼이 모아서 저 금이라고 한 것이 한 이백여 원이나 될까요."
"이백 원이 적은가요? 한데 돈의 다소야 여하간, 이런 처지 에 있으면서 어떻게 저금할 여유가 있었느냐 말씀이지요.
그것이 쉬운일이 아니거든요."
대철은 그제야 술을 마신다.
"선생님 말씀을 알아듣겠습니다. 저 같은 처지에서 저금하 기가 어렵다는 것보다, 무슨 돈이 어디서 나서 저금하게 되 었느냐하는 말씀이시겠지요?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더러운 돈이나 꺼림칙한 돈은 아닙니다. 손님들이나 주인 어머니가 저를 귀엽게 여겼다는 것보다 불쌍하게 생각하여서, 이따금 돈푼씩이나 주신 것을 함부로 쓰지 않고 저금한 것이에요.
거기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실 것은 없습니다. 저는 몸은 천 하여도 마음은 그다지 천하지 안하요, 의심하지 마세요."
순영의 말은 힘이 있었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의미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설 사 순영씨가 적당치 아니한 돈을 모았기로손, 나로서 그것 을 의삼하고 어쩌고 할 것이 있나요."
"그야 그러시겠지요, 저만 사람이 무슨 짓을 하기로 선생님 같은 어른이 그것을 관계하실 게야 없겠지요......"
하고 말을 더 하려다가 그만두는 순영은 부끄럽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였다. 자기가 돈 모은 이유를 말하여 의심하 지 말라고 한 것은, 대철을 십분이나 믿고서 아무쪼록 자기 에게 대한 오해를 없도록 하려고 한 것인데, 대철은 자기의 행동이 어찌 되었는지 아랑곳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말을 하게되메, 순영으로서는 자기가 의심하지 말라고 경솔하게 말한 것이 뉘우쳐지고 불안스러웠다.
"아닙니다, 저의 말이 잘못되었습니다. 의심할 것이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순영씨의 일에 대하여 의심할 자격이 없다 는 말씀입니다. 만일 순영씨에게 그러할 자격만 인정이 된 다면, 그보다 세밀한 것이라도 의심할 수가 있겠지요......아 닙니다, 사실은 지금도 순영씨의 과거 행동에 대하여 여러 기지로 알고도 싶고, 의심되는 일은 실쌈스럽게 묻고도 싶 지만, 스스로 돌아보아도 그러할 만한 자격이 없다는 말씀 입니다."
하는 대철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그것을 보는 순영은 도리어 자기가 나중 말을 경솔하게 한 듯하여서 미안스러웠다. "무얼 그러세요. 선생님 같은 어른이 무슨 자격이 없다고 그러세요. 저는 이렇게 선생님을 모시고 이야기하는 것만 하여도 기쁘고도 조심스러워 죽겠는데, 선생님이 자격이 없 으면 누가 자격이 있어요?"
순영은 얼굴빛이 풀리면서 웃으려다가 참는다.
"아니, 다른 자격은 있을느지 모르지만, 순영씨의 행동을 의심할 만한 그 자격이 없다는 말씀이지요. 순영씨의 행동 을 의심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순영씨를 사랑한다는 말인데, 저로서 순영씨를 사랑한대서야 말이 되나요?"
"어째서 말이 안된다는 말씀이에요?"
"자격이 없어요."
대철은 허리는 굽히고 눈은 들어서 순영을 쳐다본다.
순영은 눈이 휘둥그래 가지고 묻는다.
"아닙니다."
대철은 눈도 돌리지 아니하고 힘없이 대답한다.
"무엇이 불쾌하세요?"
"아니오."
대철의 기색은 여전히 좋지 않다.
"제가 무엇을 잘못한 거로군요?"
순영은 자기의 말이나 행동이 무엇이 잘못되었나를 생각하 였다.
"아닙니다. 나의 사정이 사정이니만큼 술을 먹다가 자연히 이러는 때가 많습니다."
하고 술잔을 돌아보더니,
"술이나 한 잔 더 먹을까요?"
대철은 손깍지를 떼고 오른손으로 턱을 괸다.
"에구, 왜 그러세요? 무슨 걱정이 계신 계로군요."
순영은 자기도 걱정스런 듯이 얼굴빛을 흐리면서 술이 잔 에 넘칠 만큼 따른다.
"특별한 걱정도 아닙니다만, 사내자식이 못 생겨서 그렇지요." 대철은 술을 마시더니, "어 인제 술이 취하는데, 더 못 먹 겠구요. 고만 회계하지요."
하고 몸을 기우뚱하더니 손을 포켓에 넣고 돈지갑을 찾는 모양이다.
"아니에요, 회계가 무슨 회계에요?"
순영은 몸을 조금 일으켜 대철을 붙들려는 자세를 취한다.
"회계가 무슨 회계라니요? 술 먹었으면 술값을 내야지요."
대철은 포켓을 뒤지기만 하고 무엇을 꺼내지는 않는다.
"언제 선생님이 술을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제가 가져왔지." "술이야 누가 가져왔든지, 먹기는 내가 먹었으니까 술값은 내가 내야지요."
"아니에요 제가 술 한 잔 대접한 거에요. 술값이 다 뭐에요?" 순영은 이맛살이 조금 찌푸려진다.
"이게 순영씨 댁 같으면 그도 혹 모르지만, 남의 집에 계신 터에 어떻게 술을 내실 수가 있나요."
"그것은 염려 마세요. 이 집 술로 선생님을 대접하는 것은 아니에요. 뭐 제가 남의 술로 선생님을 대접하겠어요. 제게 도 그만한 술값은 있어요. 제가 또박또박 쳐서 회계를 할 터이니, 조금도 창피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많이 좀 잡수세요." "그렇지만 순영씨가 푼푼이 모은 돈으로 술을 주신다는 것 은 더욱 미안한 일이 아니에요?"
"그것이 미안한 일이에요? 그러면 선생님은 죽을 사람을 살려 주시고도 그것이 대단치 않은 일이라고 하시면서, 선 생님 손에 살아난 저로서 술 한잔 대접하는 것이 미안하다 고 하시면, 세상의 좋은 일은 사내만 하고 저 같은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저는 물론 사람답지 않지만 세상에 들도 없는 은인에게 술 한잔 대접하는 것까지 미안 을 끼칠 위인은 아닙니다. 그것만은 용서하여 주세요."
말을 마친 순영은 추연(秋然)한 듯하였다.
"감사합니다......"
할 뿐이요, 뒷말을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조금 흔들고, 포켓에서 손을 빼더니 다시 양복 저고리 양 섶을 여미면서,
"자, 그럼 가겠습니다. 오늘 대단히 감사하였습니다."
대철은 순영이 만류하는 것도 불구하고 나가 버렸다.
9
편집대철을 보낸 순영은 속으로 치부하여 두었던 술잔 수를 다 시 계산하여서 자기의 돈으로 치르고, 잠자리에 누워서 대 철에게 대한 일을 생각하여 보았다. 대철은 분명히 불평한 기색으로 갔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자기가 잘못한 일이 있는가 하고 여러가지로 생각하여 보았으나, 별로 잘 못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자기로서 그러한 은인을 대접하 려면 안주도 특별히 자리고 술도 보통으로 술집에서 파는 술이외에 고급인 외국술 같은 것을 대접하여야 할 터 인데, 그렇지 못하여서 불평이 생긴가 하고도 생각하여 보았으나, 여러 가지 형편으로 헤아려서 그럼직도 싶지 않고, 혹은 수 영 선수를 대접하는 데는 다른 사람과 달라서 특별한 의식 (儀式)이나, 음식으로도 유다른 음식을 차리는 법인데, 그렇 지 못하여서 노염이 난 것인가도 생각하여 보았으나, 가령 그렇다 할지라도 자기는 그런 것을 전연 모르는 터이요, 그 자리가 무슨 예법이나 형식을 차리는 좌석이 아닌 바에야 대철이로서 그만한 것은 양해를 함직한 일인즉 그럴 것이 같지도 않았다.
그러면 자기에게 대한 인상이 나빠서 그런 것인가 하는 것 이 가장 염려되는 점인데, 그것도 그럴까 싶지 아니하였다.
자기도 대철을 알게 된 뒤로 다소 어떤가 하는 점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로 보아서 자기에게 대한 언어, 동작, 표정......모든 것으로 보아서 결단코 불쾌히 여기는 기 색이 없을 뿐 자기에게 대한 감정이 대단히 좋았고, 어느 점으로 보아서는 자기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표정이 귀로 듣 고 눈으로 볼 만한 정도까지 나타난 것이 확실하였은즉, 졸 지에 그럴 리도 없을 것 같았다.
최후로 생각나는 것은 대철이 술을 먹다가 졸지에 한숨을 쉬면서 자기에게 무슨 절박한 사정이 있는 것처럼 말하던 일이다. 그 일로 하여서 그랬다면 그것은 무슨 일일까? 대 철에게 어려운 사정이 있다면, 그것은 곧 자기에게 관련되 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가령 그 일이 직접으로 자기를 사 랑하는 데에 지장되는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만일 대철에 게 고통되는 일이 있기만 하면 그 일의 종류야 무엇이든지 간접으로라도 자기와의 사랑을 성립하는 데에, 다시 말하면 자기가 대철과 결혼을 하여서 소원을 이루는 데에 영향되지 않을 수가 없는 까닭이었다. 그것이 만일 자기의 힘으로써 모면할 수라 있는 일이라면, 자기 몸의 반쪽을 떼어서라도 대철의 절박한 일을 모면해 줄 수가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 여 빈약한 자기의 힘으로써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 라면, 자 그 때 가서는 어찌할 것인가? 그렇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 남녀가 힘을 합하고 마음을 같이하여서 어려운 세상 을 살아나가는 일이 여북이나 많은가. 그러면 자기의 힘으 로써 대철의 어려운 일을 같이 겪었으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대철과 결혼이 된 뒤의 문제이거니와 이른 바 대철의 절박한 사정이라는 것이 과연 자기와 결혼할 만 한 정도까지는 허락이 될 것인가 아닌가가 큰 문제여서 몹 시 괴로왔다.
그러다가 순영은 자꾸만 옥 파고 들어가던 생각을 돌렸다.
아까 대철이 한숨을 쉬고 하던 말이 우연한 말이나 아닐까, 또는 다소 곤란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일신상의 생활문제 라든지, 소소하고 절박한 일로 자기와 결혼할 수 없는 정도 까지 박절한 사정이 아니라, 무슨 일을 크게 경영하다가 그 것이 여의치 아니하므로 술 기운이 있는 김에 탄식을 발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도 대철을 위하여 불행한 일이 아닌 것은 아니다. 자기의 일이 대하여 낙망할 것은 조금도 없을 뿐 아니라, 대사를 경영하는 대철의 인격에 대하여 도 리어 존경을 바라고 스스로 위로하였다. 순영이 꿈이 아닌 공상에 잠겨서 날 새는 줄을 모르게 된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동정할 만한 일이었다.
10
편집이틀이 지난 뒤 비 오는 저녁이었다. 홍 숙자의 술집에는 이따금 비를 피하기 겸하여 드나드는 선술꾼들이 더러 있을 뿐이요, 별로 손님들이 없었다. 순영은 자기 방 문턱에 걸터 앉아서 낙수물 방울이 전등에 비쳐서 구슬같이 반짝이는 것 을 보고 있었다. 물방울은 구슬같이 찬란하다가 땅에 떨어 지면 산산이 부서지고, 다른 물방울이 뒤를 이어서 그러하 곤 하였다. 순영은 구슬 방울이 땅에 떨어져서 깨지는 것이 애처로왔다. 그리하여 땅에 떨어지기 전에 손으로 받아보려 하였으나, 물방울은 손바닥에 떨어질 때에도 마찬가지로 부 서져서 얼굴에도 튀고 옷에도 튀었다. 순영은 구슬 방울이 땅에 떨어져서 깨어지는 것보다 자기 손바닥에서 깨어지는 것이 더욱 애처로왔다. 도로 물러앉아서 어찌하면 그 구슬 을 온전히 받아볼까 하는 계책을 생각하여 보았으나 아무리 하여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순영은 구슬 지는 것을 더 자 세히 보려고 자리를 옮겨 앉다가 도리어 전등빛을 가려서 보이지 아니하므로, 그제는 전등을 내어 걸었더니 아주 환 하게 비쳐서 빗줄기가 제대로 보이고 구슬 지던 것이 하나 도 없어져 버린다. 순영은 자기의 어리석은 것을 깨닫고 ?
蔘便?것을 뉘우치면서, 전등을 그저대도 걸어 보았으나 무 엇이 틀렸는지 물방울의 구슬 지는 것이 그전만 못하였다.
순영은 애가 나서 전등을 내려 보기도 하고 올려 보기도 하 고, 전후좌우로 요리조리 변경하여 보았으나, 아무리 하여도 처음만큼 비치지 못하였다. 순영은 세상 일은 너무 잘하려 고 하는 것도 병이요,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는 것도 잘못 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행여나 다시 구슬 지는 것을 볼 수가 있을까 하고 뚫어져라 하고 보고 있었다. 하도 오래 보면 시선의 착각으로 얼비쳐서 이상한 구슬을 보기도 하였다. "넌 무얼 그렇게 정신 없이 보고 있니?"
하는 소리에 소스라쳐 놀라는 순영은,
"에구, 깜짝이야 너 왜 그렇게 자취도 없이 오니?"
하고 돌아본다.
"자취도 없긴 왜 자취도 없이 와? 저기서부터 저벅저벅거 리고 왔는데, 네가 무엇을 잠착해 보다가 제풀에 놀랐지."
"그런데, 너 어찌 이렇게 왔니? 정순이가 비오는데 이렇게 오기는 뜻밖이로구나. 어서 들어가자."
순영은 먼저 방으로 들어가며 정순을 인도한다.
"그런데 너 어떻게 일허게 왔니? 정말 반갑다. 나도 손님들 도 없고 심심하여 앉았는데."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 저녁을 먹고 앉았다가 별안간에 네가 보고 싶더구나. 그래 우장옷을 입은 채로 온다간다 말 도 없이 쫓아왔다."
"에구 요런, 비가 오니까 모든 것이 누져서 그런지 네 말도 늘었구나."
"정말이다 예, 이것을 입고 쫓아왔을 때는 여북해서 왔겠니? 너는 남의 공두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정순은 손으로 치마를 쓰다듬으며 눈을 살짝 흘긴다.
"아뭏든 잘 왔다. 예기나 좀 해라."
"하나는 볼 일이 있어서 어디를 갔고, 둘은 술청에 있다.
왜 들어오다 못 보았니?"
"보기는 봤지만 너 혼자 있기에 말이다. 아주 조용하구나."
정순은 밖을 내려다 본다.
"너 저번에 김 선생님 사관에서 말이야, 그때 나온 뒤에 무 슨 얘기를 했니? 아마 내 말들 많이 했겠지."
"응, 그때 말이냐? 그때 무슨 말을 하긴. 김 선생이 너하고 연애하는 이야기를 하기에 그저 들은거지. 김 선생이 아주 네게 깜박했더구나. 어쩌면 한 번 보고 남을 그렇게 반하게 하니, 너는 참 재주도 용하더라.
정순은 참던 웃음이 터져서,
"픽!"
한다.
"그러지 말고 정말 얘기를 해 얘, 그때 내 흉들 보았지?"
"흉을 보다니, 뭐 흉 잡힐 일이 있니? 그때 김 선생님이 네 말을 묻기에 사실대로 말했지, 얌전하고 조촐하다고. 흉이 다 무슨 흉이냐."
정순은 다시 문 밖을 내다보더니,
"그런데 그 후에 김 선생을 못 만났니?"
"왜?"
"글쎄 말야. 만났니, 못 만났니?"
"만났다."
"어제 그저께 저녁에 여기를 왔었지?"
"그래, 어찌 아니?"
"아는 수가 있지. 그리고 그이가 그 전에 너 원산서 물에 빠진것을 건져 주었지?"
"너 어떻게 아니?"
순영은 놀라는 듯하면서 공연히 얼굴이 붉어진다.
"나도 다 들었다. 김선생이 어제 서 선생 있는 데 와서 자 세히 얘기를 하더라. 그때 나도 마침 거기 있었는데, 그래서 자세히 들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인연이더라. 어떻게 공교 하게 만나게 되니. 서선생도 그 말을 듣고 아주 탄복을 하 더라."
"그래 뭐라고 하시던, 김 선생님이 그 말만 하시던, 다른 말도 하시던?"
순영은 대철이 사실을 말한 것보다 그의 자기에 대한 의사 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그저께 여기를 와서 네게 대접을 잘 받았다고 말 하면서 미안하게 생각하더라. 그리고 네 칭찬을 입에 침이 없이 하더라. 아뭏든 김 선생은 네기 깜박 반해서 죽고 사 지 못하는 모양이더라. 어쩌면 나도 남자에 그러한 사랑을 받아 보았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더라."
정순은 소리를 내어 웃는다.
"에구 요런, 저는 서 선생한테 그보다 더 사랑을 받으면서, 그리고 그게 다 네 말이지, 설마 김 선생님이 그랬을라고."
순영은 정순에게 눈을 흘기려 ㅎ면서 입술에는 웃음이 흐 른다.
"아냐, 정말이다. 한데 네 속내를 모르겠다고 그러더라."
"무슨 속내를 모르겠다고?"
순영은 눈이 둥그래진다.
"네가 말로는 살려 준 은혜를 갚는다고 하고, 종 노릇이라 도 한다고 했지?"
"그래."
"그랬어도 말이야, 그것이 네가 인사조로 한 말인지, 진정 인지 그것을 모르겠다고 그러더라."
정순은 순영을 쳐다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사람이 왜 거짓말을 하니? 그리고 저 를 살려준 은인에게 대해서 거짓말이 다 뭐냐. 너는 그런일 이 있다면 그런 은인을 대해서 거짓말을 하겠니? 말이 났으 니 말이지 나는 그이의 종노릇이라도 하면서 은혜를 갚고 싶다."
순영은 진정한 태도로 말한다.
"그러면 너 그이가 결혼하자면 결혼하겠니?"
"얘는 별소리를 다 하네."
순영은 기뻐서 웃을는지 부끄러워서 울는지 어찌할 줄을 몰랐다.
"아! 저번에 월미도 갔을 때에, 내가 중신아비 노릇을 하겠 다고 말하지 않던. 나는 말을 허수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말 네가 마음에만 있으면 내가 중신을 할 테다."
"너는 정신도 좋구나, 그때 한 말을 잊어버리지 않고 또 하 는 것을 보니. 그럼 그이가 나하고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그 러더란 말이야?"
정순은 몸을 조금 틀고 고개를 끄덕한다.
"결혼했으면 좋겠느니 어쩌느니 말하기는 고사하고, 까딱하 면 너 때문에 병이 날 지경이다. 약을 지어 가지고 가서 병 구완하느라고 애쓰지 말고 어서 허락을 하여라."
정순은 웃으면서 순영을 본다. 순영은 단번에 대답할 말이 얼마든지 쌓여 있지만, 거기에 이르러서는 주저하기 않을 수 가 없었다. 그것은 마음으로서의 결정 문제가 아라 말로 서의 사령 문제였다.
"나는 그이가 무엇이든지 청구를 한다면 안 들을 수는 없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지. 하지만 그이가 나 같은 사람과 결혼을 하겠니? 공연히 네 말이지."
순영은 승락을 하면서도 더욱 분명한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그이가 한 가지 꺼리는 일이 있더라."
"응, 무슨 일?"
순영은 가슴이 섬뜩하였다.
"아니, 네게 대해서 꺼리는 일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형편 이 말이야."
"그래 무슨 일?"
"다른게 아니라. 그이가 지내는 형편이 어려운 모양인데 그 래서 결혼을 하면 가족 생활이 문제가 되니까, 어디 취직을 하든지 무슨 도리가 있기 전에는 결혼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더라."
"아니, 그이가 나하고 결혼할 마음은 확실히 있는데, 생활 문제 때문에 주저한다는 말이지?"
"그래, 결혼할 마음이 있고말고, 그런 생각이 없다면 낸들 왜 공연히 그런 말을 하겠니? 또 그런 생각이 있더라도 기 연미연하여서 확실히 알 수가 없다면 그런 말을 할 리가 있니? 그리고 또 너하고는 친한 동무요, 그이는 한두 번 인사 있을 따름인데, 내가 너를 위하면 위했지 그이를 위하겠니?
아니 참 나도 사내들 말이라는 것은 그렇게 믿을 수가 없어 서 그런 말을 하기에 여러 번 재우쳐서 물어보았다. 했더니 그이도 진정으로 말하고 나중에 서 선생보고도 물어 보았더 니 아주 진정이라고 그러면서, 그 사람이 돈은 없지만 사람 은 얌전하여서 장래성이 많다고 그러더라. 그런데 그이가 우선 생활이 어려워서 결혼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하는 것도 얌전한 데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러냐 하던 사내 들 본심은 자기 마음에 맞는 여자가 있으면 나중이야 어찌 되었든지 속여서라도 우선 자기 물건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 데, 그이가 너를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자기의 실정을 말하 는 것이 보통 사람과는 다르지 않느냐? 그리고 그이가 너를 사랑하는 것도 너의 얼굴이라든지 태도라든지 그것도 그것 이지만, 더구나 너의 마음씨가 얌전하다고 그러더라. 보!
통 계집애들 같으면 그때에 자기를 건져주었다 할지라도 예사로 생각하고 벌써 잊어버렸을텐데 잊지 아니할 뿐 아니 라 그 은혜를 갚으려고 결심하여서 자기의 몸까지도 돌아보 지 않는다는 것이 감복할 만한 일이라고 그러면서, 자기의 욕심만 채우기 위하여 그런 여자를 데려가 고생을 시키면 되겠느냐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여간 사내 같으면 그러겠니. 그래서 서 선생도 그러고 나도 그러고 그 말에 탄복하였다. 네가 이때까지 그이를 잊지 않고 은혜를 갚으 려고 하는 것이나, 그이가 너를 사랑하면서도 고생시킬까 봐 결혼하기를 꺼리는 것이나, 어쩌면 그렇게 잘두 만났니?
옥이 옥은 만나고 원앙이 녹수(綠水)를 만난 격이더라......"
정순은 말이 끝나지 아니한 태도로 웃는다.
"에구, 너는 언제든지 부너부전하구나."
쌍긋 웃는 순영은 다시,
"그거야 그러면 돈 있는 사람만 시집가고 장가가지, 돈 없 는 사람은 평생을 그대로 늙어 죽을까? 있으면 있는대로 살 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것이지. 사람이 어떻게 꼭 돈을 모아 놓고 결혼을 하니?"
"너는 어쨌든지 하루라도 어서 시집을 가고 싶어 죽겠는 게로구나. 그렇게 급하면 이때까지 어떻게 견디었니? 그러 면 내가 지금 가서 김 선생을 보낼 테니 당장에 이 방에서 결혼식을 거행하려무나. 서 선생은 함진아비하고 나는 들러 리를 설테니, 그럼 다녀오마."
하고 정순은 웃으면서 일어서려 한다.
"그러지 말고 앉아서 얘기나 해라. 너는 언제든지 사람을 놀리기만 하니?"
순영은 일어나려는 정순을 붙들면서 주저앉힌다.
"그런데, 그이가 여기를 온 것은 그저 온 것이 아니라 긴한 볼 일이 있어서 왔더구나."
하고 허두를 낸다.
"무슨 긴한 볼일?"
순영은 다시 긴장하여진다.
"그이가 어디서 금광을 하나 발견하였는데, 그것을 출원할 인지(印紙) 값이 없어서 그것을 변통하러 서 선생님을 찾아 온 모양인데, 서 선생인들 돈이 있어야지. 해서 극력으로 주 선하여도 안 되는 모양이더라. 그래서 김 선생은 허탕을 치 고 가게 되었는데 금광은 아주 싹이 좋다나. 해서 그것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가면 워농하다고 그러면서, 서 선생과 둘이 걱정을 해쌓더라. 나라도 돈이 있으면 변통해 주었으 면 좋겠더만, 너도 알다시피 내가 무슨 도리가 있니?"
정순은 걱정스러운 빛을 띤다.
"돈이 얼마나 드는데?"
순영은 조금도 거북하지 않은 태도로 묻는다.
"인지 값이 백 원이고 또 무슨 비용, 무슨 비용 합해서 일 백오십 원이면 된다고 하더라."
"일백오십 원 있으면 금광을 차지하게 된다는 말이지?"
"그럼, 차지하는 셈이지. 출원만 해 놓으면 다른 사람이 가 져가지를 못하니까."
"요새 금광으로 부자 된 사람이 많다더라."
"그럼, 많고말고, 큰 부자는 모두 금광 해서 되었다는데."
"그럼, 그이가 허탕치고 간다고 하디?"
"자기 그럼 어쩌니?"
"어디로 간다고?"
"어디로 갈는지 아니? 어디로든지 다니면서 돈 변통을 해 보겠지."
"그러면 다른 데로 다닌들 쉽사리 되겠니? 공연히 애만 쓰지." "그러기에 말이야, 다른 데서 될 데가 있으면 그러겠지, 예 까지 서 선생을 찾아왔겠니? 다른 데서 변통할 수가 없기에 서 선생을 찾아왔지. 그거 참 안 되었더라. 그것만되면 아주 팔자가 고쳐지겠다고 그러더라. 물론 너하고 결혼도 하고 사람이 돈 백여 원이 없어서 그러한 기회를 놓치게 되면 원 통한 일이 아니냐?"
"그래 그런 얘기를 너보고 하던?"
"나보고 그런 얘기를 왜 하니? 서 선생하고 이야기하는 것 을 내가 들었다니깐."
"그럼 언제쯤이나 간다던?"
"모르지, 언제 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곧 갈 것 같더라.
여기 있으면 비용만 나지 뭘 하겠니? 노자도 떨어진 모양이 더라."
"그럼 그걸 어떻게 하나?"
순영은 턱을 괴고 근심스런 듯이 말을 하고 눈을 까막까막 하다가,
"그럼 이렇게 하지........"
하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에,
"정순이 왔구나, 너희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니?"
숙자가 안으로부터 나오다가 말을 하면서 방을 들여다본다. 순영과 정순은 공연히 놀라면서 일어선다.
"안녕하세요? 비도 오고 심심해서 놀러 왔더니, 인제 가야 겠어요."
중순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얼굴빛이 변해지면 서 어쩔 줄을 모르고 문 밖으로 나오려 한다.
"가긴 왜, 더 앉아 놀아라. 오늘은 비도 오고 손님도 없는 데, 우리 순영이도 심심하고 한데. 순영이는 늘 네 말을 한 단다, 어서 앉아 놀아라."
숙자는 술청 근처로 사라진다.
"너 놀다 가거라."
하는 순영의 만류도 듣지 아니하고 이상하게도 정순은 그 대로 나간다. 순영은 따라 나가며 무슨 말을 하고자 하였으 나, 술청 근처에서는 다른 사람의 이목이 있어서 하지를 못 하고, 비가 오는데 멀리 따라 갈 수도 없어서 고만두었다.
11.
편집순영은 대철에게 필요하다는 돈 일백오 십 원은 단연코 자 청이라도 하여서 자기가 돌려 주기로 결심하였다. 그것이 자기로서 대철에게 접근하게 되는 인연이라고도 생각하였다. 또는 대철과의 결혼 여부는 별문제로 하고라도, 대철이 공 교히 그만한 곤경에 있는 것을 아는 바에, 자기의 힘으로써 할 수 있는 백여 원의 돈쯤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 각하였다. 그러나 자기 혼자서 미래 일에 대하여 요리조리 그려보던 것보다는 대단히 달라진 것이 유감이었다. 자기가 생각하기는 대철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결혼한 뒤에도 남 의 집에서 술을 팔아 주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요, 그렇다 고 남에게 팔려 있는 몸으로 작정한 기한도 채우지 못하고 자유의 몸이 될 수가 없는 일인즉, 남은 기한 약 일 년 분 에 적당한 돈을 물어주지 아니하면 아니 될지라, 자기의 삼 년에 대한 몸값 칠백 원을 삼 년에 나누면 일 년 분이 이백 여 원밖에 아니 되겠은 즉, 저금한 돈으로 그것을 물어 줄 만하겠으므로, 그리 하고서 하루라도 일찍이 자유롭고 따뜻 한 생활을 하여 볼까 하였던 것인데, 그 돈 중에서 대철을 주고 나면 남은 돈으로는 도저히 몸값을 청산할 수가 없는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순영은 자기의 운명에서 아직도 액운 이 남아 있는가를 생각할 때에 홀연히 눈물이 도는 것을 깨 닫지 못하였다.
순영은 이튿날 중에는 기회 있는 대로 대철을 찾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철이 자기를 찾아올 듯도 싶 게 생각하였다. 어떻든 만나게는 되겠는데, 다시 만나는 때 에는 자기로서 먼저 결혼에 대한 의미로는 말을 내지 않기 로 하였다. 전일에 두 번이나 만나는 때에 직접으로 결혼하 고 싶다는 말은 아닐지라도 아무라도 알아들을 만큼 의사를 표시 하였은 즉 저편에서 생각이 있다면 응당히 말이 있을 것이요, 그만큼 하여도 말이 없다면 그 이상 더 강권할 수 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대철이로서 그러한 말을 내지 않는다든지 또는 그러한 의미에서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할 지라도, 자기로서는 먼저 대철의 사정을 물어 보 아서 사실이 정순의 말고 같다면 자기는 무조건 하고 돈 일 백오십 원을 주리라고 두 번 결심하였다. 그러나 정순의 말 이 사실이라면 대철의 사정만이 아니라 대철이 자기에게 마 음이 있다는 것도 사실일 것 같았다. 그리하여 자기의 남은 운명을 잠깐 비관하던 신경이 스르르 풀리면서 달콤한 꿈을 이루었다.
이튿날도 어제 오던 비가 채 개지 아니하여서 일기는 좋지 못하였다. 황혼이 되자, 청명한 날 같으면 아직도 밝은 터인 데, 어두컴컴해지면서 전등불이 한 시간쯤이나 일찍이 들어 왔다. 순영은 대철을 찾아갈까 하면서 혹시 대철이 오지 않 나 하고 자주자주 바깥쪽을 내다보았다. 비가 뿌리다가 조 금 멎는 때에 순영은 술슬 나와서 대철의 여관 있는 쪽의 길을 바라보았다. 그 편으로 가는 사람은 많이 있어도 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할 수 없이 자기가 들어가서 옷을 갈 아입고 찾아갈까 하고 돌아서려다 다시 한 번 내다보았다.
우산이 언뜻 보이면서 길바닥을 골라 디뎌 가면서 오는 것 이 분명히 대철이었다. 순영은 와락 나가서 마중하려다가, 무슨 마음이 났는지 모르는 체하고 도로 들어가서 r자기 방 에 앉았다. 그 방에는 모란이 있었다. 순영은 옷을 갈아입으 려 하였으나 모란이 이상하게 볼까봐서,
"에구, 비가 오니까 그런가, 몸에서 땀이 나고 해서 옷을 입으면 이내 후줄군해서 적삼이나 또 갈아입을까."
하고 벽에 걸어 두었던 준주사 적삼을 만지작거리다가 옷 상자를 열고서 세모시 생풀 적삼을 내 입었다. 그리고 치마 는 만져보기만 하다 고만두었다.
"순영이 손님 오셨다."
하고 들어오는 산월의 소리에,
"어떤 손님?"
순영은 짐짓 물으면서 일어선다.
"엊그제 밤에 오셨던 손님 말이야."
"응, 그래."
순영은 나가서 대철을 맞으면서,
"선생님 오셨어요? 그렇잖아도........."
하더니,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말을 하지 않고서 딴 방으로 인도하여 들어갔다.
"저는 조금 있다가 가서 뵈려고 하였더니 이렇게 오셨군요." 순영은 웃으면서 대철의 기색을 본다.
"일전에 하도 감사하게 다녀가서 그런 말씀도 하고, 일간에 떠나야 할 사정이 있어서 작별 겸 두루두루 왔습니다."
대철은 웃지도 않는다.
"천만에, 감사한 게 뭐에요? 일전에 실례만 많이 하였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쉽게 떠나세요?"
순영의 얼굴에는 걱정스런 빛이 떠돈다.
"객지에 왔으니까 또 가야지요."
"왜 무슨 급한 일이 계세요?"
"급한 일이라고 할 것도 없지마는, 그런 사정이 있어서 그 럽니다."
"무슨 사정이에요?"
"그것 뭐 아실 것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못 쓸 일인가요?"
"못 쓸 것은 없지마는, 그까짓 구구한 사정을 알아서 무얼 하시겠소? 나로서는 말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 이번에 가시면 언제쯤 오시겠어요?"
"모르지요, 언제쯤이나 또 오게 될는지."
"그러세요."
순영은 대철이 떠나게 되면서도 자기에게 대하여 별로 관 심이 없는 것처럼 냉담하게 말하는 것이 섭섭하여서, 얼굴 에 화기가 돌지 아니하였다. 순영의 기색을 살피던 대철은 자리를 고치면서,
"그런데 나는 떠나려고 하는데 적지 않은 고통이 있는데요." "왜, 무슨 고통이세요?"
순영은 으레 돈에 대한 말이 나오리라고 생각하였다.
"그것 다 제가 사서하는 고통이니까 할 수 없지요."
"글세 무슨 고통이세요? 그것도 말씀하실 수 없으세요?"
"아니요, 말을 못할 것이야 없지마는......."
"그럼 또 뭐에요?"
"순영씨에게 모욕이 될까 봐서 말씀하기가 어려운데요."
"무슨 일이기에 제게 모욕이 돼요?"
"그럼 말씀해도 용서하시겠어요?"
"용서가 다 뭐에요? 아무 말씀이든지 하세요. 선생님의 말 씀은 무엇이든지 제가 나쁘게 생각할 것은 하나도 없을 테 니요."
"나는 부득불 떠나야 될 사정이 있으면서도 어쩐지 떠나기 가 싫은 고통이 있습니다."
대철은 이상한 눈으로 순영을 뚫어져라고 본다.
"무슨 사정이 그런 사정이 계세요?"
순영은 칠 분이나 짐작이 되어서 마음이 가려웠다.
"순영씨를 작별하고 떠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인제 아 시겠어요?"
대철은 오히려 눈을 다른 데로 돌리지 않는다.
"에구 선생님두, 뭘 그러세요? 저 같은 젓을 공연히 그러시지." 순영은 웃음투성이가 되어서 한손으로 입을 가리고 부드러 운 눈으로 강하게 대철을 본다.
"그러지요, 순영씨의 마음을 미루어 본다면 그렇게도 말씀 할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나로서는 이 세상에서 맛본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고통입니다. 만일 내가 이 고통을 이길 수 가 있다면, 이 세상에서 나는 제일 강한 자가 될 것이요, 따 라서 제일 약한 자가 될 것입니다."
"선생님이 저를 떠나서 가시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고통이 되신다면, 저에게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큰 행 복이 되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모시고 지내지 못하게 된 다면, 이 세상에는 아무런 즐거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선생 님이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저는 이 세상에서 고통이란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순영은 감격을 못 이겨서 눈물을 흘린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순영씨는 나의 사랑을 받게 되면 고통 이란 것은 없을 것 같다고 하시지만은 나는 그와 반대입니다. 나는 순영씨를 사랑하기 위하여서 새로운 고통이 생기 게 되었습니다."
대철은 천장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내쉰다.
"선생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면 그다지 비밀을 지키시지 아 니하신 대도 좋지 않으세요. 무슨 일인지 걱정되시는 일을 저에게 말씀하신 대도 결단코 방해되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 순영은 새로운 기색으로 대철을 본다.
"글쎄요, 나는 순영씨를 사랑하기 위하여 생긴 걱정이지만, 순영씨를 사랑하는 까닭으로 말씀하기가 싫습니다."
대철은 미안한 듯이 순영을 본다.
"그런데 선생님, 정순이보고 하신 말씀이 있어요?"
순영은 참다 못하는 듯이 물었다.
"정순보고요?"
"네."
"정순씨 보고 무슨 말씀을 해요?"
"아니 꼭 정순이만 보고하신 것이 아니라, 정순이 듣는데 하신 말씀이 없어요?"
"네! 서 정식군한테 얘기한 일이 있는데, 그때 정순씨도 들 은 일은 있지요. 왜 그러세요? 무슨 말씀을 들으셨어요?"
대철은 의심하는 기색을 나타낸다.
"정순이 듣는 데는 말씀하셔도 저한테는 말씀을 못하신다 면, 그것은 정순이를 더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순영의 기색은 조금 날카로운 듯하였다.
"그거야 다른 사람은 들어도 심상한 일이니까 말을 해도 무방하지만, 순영씨가 들으시면 고통이 되실 것이니까 말을 아니하는 게지,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말을 않는 것은 아닙 니다. 만일 정순씨를 사랑한다면 순영씨에겐 말을 하여도 정순씨에게는 말을 않겠지요. 이 세상에는 사랑하는 사람에 게 못할 일이 없지만, 다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말은 할 수가 없겠지요."
"그럴까요? 그래도 저는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고통이든지 행복이든지 똑같이 받는 것이 옳을 줄로 생각하는데요. 그 보다도 선생님의 고통을 통거리 째라도 가져오고 싶은데요."
순영은 생긋 웃는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하고 대철이 주저할 즈음에,
"선생님, 금광하신 다지요?"
순영이 먼저 마을 내었다.
"금광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금광 해서 큰 부자 되는 이가 많다는데요."
"글세요. 나도 큰 부자가 되어 보려고 하는데 어찌 될지 모 르겠는데요."
"그런데 거기 대한 돈 변통이 미처 안 되신 다고요?"
"그 말씀은 어디서 들으셨어요?"
"선생님은 말씀을 안 하시지만 저는 어디서 들었어요. 그런 데 얼마나 있으면 되시겠어요?"
"글세요, 금광 충원에만 필요한 돈은 한 백여 원이면 되겠 는데, 그렁그렁 일백 오십 원만 있으면 되겠지요."
"그러면 제가 그 돈을 변통해 드릴까요?"
"천만에, 순영씨가 무슨 돈이 있어서 그 돈을 변통하시며, 또 돈이 있기로 소니 그러실 수가 있나요."
대철은 부지중에 웃는다.
"돈이 없으면야 할 수가 없겠지요. 하지만 있고서야 못할 리가 있습니까? 저는 선생님께 몸을 바칠 텐데 돈이 다 무 엇이에요. 조금도 염려 마시고 얼른 출원하실 도리를 하세요. 금광을 해서 돈이 많이 생기면 저도 호강할 것이 아니 에요. 내일이라도 돈을 찾아다 드리지요....."
순영은 다 하지 못한 말이 있으면서도 중지하는 듯한 기색 으로 대철을 본다.
"그거야 물론이지요. 한데 말의 선후가 바뀌었습니다. 나는 순영씨와 평생을 같이하고자 하는데 생각이 어떠세요? 나 같은 사람하고 결혼해 주시겠어요?"
대철은 진정한 태도로 말한다.
"저는 몰라요. 선생님의 처분이지요."
순영은 결혼하길 원하던 바요 평생을 대철에게 의지하겠다 는 의사를 표시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급기야에 대 철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말이 나올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 면서 말소리가 떨리었다. 순영은 붉어지는 얼굴을 숙이려고 하다가,
"선생님, 정말이세요?"
하고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말을 거짓말이나 농담으로 하는 줄 아십니까?"
"아니에요, 너무도 꿈 같아서 그래요."
순영의 눈에는 눈물이 어린다.
"자! 술이나 한잔 가져오시지요."
대철은 기운을 펴면서 순영을 본다.
"아 참, 얘기에 팔려서 잊었습니다."
순영은 놀라면서 일어나서 나가다가 대철을 돌아보고 웃는다. 술상을 가지고 와서 술을 따라 주는 순영은,
"그럼 내일이라도 돈만 있으면 곧 가시겠어요?"
하고 급히 묻는다.
"돈이 있다면 곧 가야지요, 지금도 늦었습니다. 요즈음의 금광 출원은 시각을 다투는 것이니까요. 내가 발견한 것은 다른 사람은 알 수가 없는 곳이니까 별로 염려는 없지만, 그래도 세상 일을 알 수가 있나요?"
"가시면 어디로 가세요?"
"먼저 서울로 가야지요. 출원은 서울서 하게 되니까여."
"그럼 서울 가서 계시게 되나요?"
"출원만 서울 가서 하고서 곧 금광 있는 데로 내려가 보아 야지요."
"금광 있는 데가 어디에요?"
"여기서 먼 뎁니다. 함경도 장진(長進)이라는 땅이에요. 출 원하기 전에 금광 있는 곳을 좀처럼 남보고 말을 않는 게지 마는, 순영씨야 설마 내 광을 뺏어가기야 할라고."
대철은 웃는다.
"또 뺏어가면 어때요? 제가 하나 선생님이 하시나 마찬가 진데."
순영도 웃더니,
"그럼 언제나 여기를 또 오세요?"
애교 있게 묻는다.
"글세요, 아마 늦을걸요."
"금광이라는 것은 출원을 하면 가서 시굴(試掘)을 해봐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자면 겨울 안에도 오기가 어려울걸요." "겨울 안에요?"
순영은 얼굴빛이 변한다.
"자연히 그렇게 되기 쉽지요."
"그렇게 오랫동안 계세요?"
"늘려 잡고 그렇다는 말이지요. 또 혹시 가을이나 겨울 안 으로 오게 될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려요. 에구, 참 큰일났군."
순영은 몸을 조금 틀면서 웃는 얼굴을 찡그린다.
"만사는 돈을 조금 만들어 놓은 뒷일이니까요. 겨울이 얼마 나요, 며칠 안 되면 단풍이 들어서 낙엽이 우수수하고 쏟아 지고, 또 조금 있으면 백설이 펄펄 흩날릴 텐데 잠깐 동안 이지요."
대철은 술을 한잔 더 먹고서 감동한 바가 있는 등이 한숨 도 아닌 숨을 길게 내쉰다.
"그거야 쉽게 말하면 얼마든지 잠깐으로 볼 수가 있지요.
한겨울은 고만두고 삼 년이라도 잠깐으로 볼 수가 있고, 사 람의 일생도 잠깐이라고 볼 수가 있지요. 그러니 일각이 여 삼추라는 말이 있지 않아요.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소리에 창자가 끊어지고 눈 한송이 날리는데 터럭이 세는 수도 있 다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렇지요? 조금만 있으면 낙엽이 우 수수하고 떨어지고, 또 조금 있으면 백설이 펄펄 흩날리고,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사람도 백발이 나지 않습니까? 말로 는 쉽지만...."
순영의 가슴엔 애틋한 원망이 숨겨져 있는 듯하였다.
"아닙니다. 그렇게 하실 말씀이 아닙니다. 형편이 그럴 듯 하다는 말씀이지요. 하기야 필요가 있다면 그 사이에 몇 번 이든지 올 수가 있겠지요, 한데...."
대철 은 말을 멈추고 조금 앉았더니,
"그러면 결혼할 시기는 언제든지 관계가 없을까요?"
하고 순영을 본다.
"언제든지 좋을 뿐 아니라 저는 하루라도 속히 하여서 이 노릇을 얼른 면하고 싶습니다. 술잔을 들기가 싫어서 그야 말로 일각이 여삼추에요. 선생님의 형편만 허락하신다면 저 는 내일 이라도 하였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이 집에서는 언제든지 나오실 수가 있단 말씀이지요?" "글세요, 그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잖은 사정이 있군요. 제 가 이 집에 올 때에 삼 년 작정을 하고 왔는데, 온 지가 햇 수로는 삼 년 되었으나 실제로는 아직 일년이나 남았는데요. 지금이라도 나가려면 나머지 돈을 주고서 사정을 하면 되겠지요. 한데 지금 제게 있는 돈을 다 털어 준다면 그것 은 되겠지요. 하나 선생님이 일백오십 원을 쓰셔야 할 터이 니까 나머지 가지고는 모자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속 히 하기는 참 어렵겠군요. 제가 얼마 동안 고생을 좀더 하 고 선생님도 힘이 좀 펴시는 대로 할 수밖에 없겠군요. 급 하다고 바늘 허리 매 쓰겠어요. 언약만 굳으면 결혼식이야 조금 늦어도 관계없겠지요."
순영의 표정은 근심스런 듯하면서도 오히려 대철을 위로한다. "그러면 일백오십 원은 고만두시지요. 그래서 그것을 어떻 게 쓰시든지. 나는 달리 변통을 해봐서 되면 좋고 안 되면 할 수 없더라도...... 하지만 어차피 나의 형편으로는 결혼식 을 속히 하게는 못 되었습니다. 하니까 하여간 그 돈 일백 오십 원은 막설 하시지요."
대철의 태도는 냉담하여진다.
"아닙니다. 선생님. 사정이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그 돈을 드리기 싫어서 핑계 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돈을 안 드리 더라도 선생님 사정이 속히 못 하시게 된다면 드리나 안 드 리나 마찬가지가 아니에요? 아무 생각 마시고 그 돈을 쓰세요. 저는 선생님을 위해서는 얼마를 고생하든지 관계없어요.
인제 그럼 그 말씀은 고만두시고 약주나 잡수시고 다른 얘 기나 하시오."
순영은 쾌활한 기색으로 술을 따라 준다. 대철이는 술잔을 감싸 보고
"응, 그래선 안 될 겐데."
하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술잔을 상에 놓으면서,
"제기, 사내자식이 돈이 없어서 이 지경을 당하니 결혼은 해서 무얼 한담, 혼자 딩굴어 다니다가 죽든지 살든지 할 일 이지요."
하고 천장을 쳐다본다. 순영은 다시 놀랐다.
"에구, 선생님 왜 그러세요? 속태우지 마세요. 돈이라는 것 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만 있 다면 돈은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에요? 술이나 잡수세요."
하고 술잔을 들어서 쉽사리 받지 않는 대철의 입에 대어 주었다.
"그러면 남은 세상은 사랑을 위해서나 살아 볼까요?"
대철은 술의 힘보다는 더 큰 충동을 받았다.
"그러면요, 저는 선생님을 위해서 살고 선생님은 저를........
뭐라고 할까.... 서로 그렇게 살지요."
웃음을 띠며 붉어지는 순영의입술은 돌연한 대철의 행동에 키스를 빼앗길 뻔하다가, 어느 새 미꾸리 빠지듯 하였다.
12.
편집이튿날 순영은 저금통장을 가지고 일찍이 가서 은행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서 누구보다도 먼저 들어갔다. 돈 일백오십 원을 찾아 가지고 선걸음으로 대철을 찾아갔다. 겨우 일어 나서 세수도 아니하고 자리옷을 입은 채로 답배를 피워 물 로 앉았던 대철은,
"선생님, 인제 일어나셨군요?"
하는 순영의 말에
"어제 저녁에 술을 먹었더니 그런가 좀 피곤하였습니다.
참, 일찍 나섰습니다."
대철은 반가와 하면서도 순영의 눈치를 슬슬 본다.
"이따가 손님이 오기 시작하면 나올 새가 있어요? 그래서 일찍 나섰지요. 은행에 가니까 아직 문도 안 열었겠지요. 이 것을 찾아왔어요."
하고 종이로 싼 돈을 꺼내더니,
"어디 옳은가, 다시 한 번 세봐야지."
하고,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한 번 세어 보고 다시 돌려잡 고 세어 보더니, 또다시 한 장씩 한 장씩 세어서 대철의 앞 에 놓고서,
"이러면 일백오십 원 옳지요?"
하고 대철을 보며 웃는다.
"고만두시지 않고서 기어이 가져 오셨군요."
대철은 앉은 채로 어슷비슷 놓여 있는 십원짜리 지폐를 내 려다본다.
"그러면 언제쯤이나 떠나시겠어요?"
순영은 대철이 체면조로 하는 말은 대답할 것도 없다는 듯 이 이렇게 물었다.
"글쎄요, 사정으로 말하면 진작 떠날 것을 늦었으니까 떠날 바에는 시각을 다투어서 떠나야지요. 요 다음 차에라도 올 라가야지요."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대관절 일을 보셔야지요. 저로서는 여간 섭섭하지 않지마는, 제 사정으로 급한 일을 안 보실 수가 있어요? 이 다음에 그런 이야기를 해가면서 살지요."
순영은 부끄러운 빛도 드러내지 않고 웃는다.
"그럼 그렇게 작정하지요. 다음 차에 떠나겠습니다."
대철은 시계를 보더니 세숫물을 가져오라고 소리를 지른다. 순영은 대철을 속히 가라고 곧 떠날 채비를 하는 바에 는 다시 가슴이 뭉클하여지고 얼굴빛이 변한다.
"선생님, 지금 가신대도 오늘 출원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 데, 그러면 저녁 차로 떠나시나 마찬가지가 아니에요? 그럴 바에는 저녁 차로 떠나시지요. 이따 오셔서 술이나 한 잔 더 잡수시고."
순영은 대철이 저녁까지라도 더 있다가 자기의 손에 술 한 잔이라도 더 먹이고 갔으면 좋을 듯하였다.
"오늘 가서 출원을 못한다 할지라도 여러 가지로 준비를 해야 될 터니까요. 곧 가야겠습니다."
"그러면 서울 가서 출원을 하시고 한 번 더 다녀가세요."
"될 수 있는 대로 그리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있 을는지요."
"그러면 저도 나온 김에 정거장에 가서 떠나시는 것을 보 지요."
순영은 눈자위가 붉어진다.
"아니, 그러실 것 없습니다. 부득불서 정식씨를 보고서 떠 나야 할 터이니까, 그러노라면 그 사람도 나오게 될 것이고, 나는 결혼에 대한 말은 아직 누구보고도 안 했으니까요. 공 연히 번거롭게 정거장까지 나오실 것이 없습니다."
대철은 부랴부랴 준비를 마치고 나선다. 순영도 나섰다.
"자, 예서 작별하지요."
조금 나가다가 갈림길에서 대철이 우뚝 서면서 말한다.
"저도 같이 가겠어요. 남들이 보면 어때요."
"아직 그러실 것이 없어요. 고만 들어가시지요."
대철은 말은 부드러운 듯하면서 얼굴은 조금 찡그린다.
"그럼 가세요. 저는 가시는 것이나 보고 갈 테 에요."
순영은 눈물이 글썽거린다.
"그러지 말고 들어가세요."
대철은 돌아서서 간다. 순영은 떨치고 가는 대철의 뒷모양 을 보다가 보이지 아니할 때에 다시 따라갈까 하다가 할 수 없이 돌아섰다.
순영은 돌아서서 오다가 대철의 가는 길을 돌아보았으나, 다른 사람이 오고 갈 뿐이요 대철은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다. 순영은 머뭇거리다가 팔뚝시계를 보고서 다시 정거장 쪽으로 향하였다. 순영은 큰길로 활발하게 가지 못하고 골 목길로 서슴거리며 간다. 순영은 대철을 보고 싶어서, 가기 는 하면서도 대철의 눈에 띄지 아니하려고 조심하는 까닭이 었다, 그것은 대철의 명령을 복종한다느니 보다 대철에게 불쾌를 줄까 염려하는 까닭이었다. 순영은 정거장까지 가기 는 하였으나 정거장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그 근처의 실과를 그중 좋은 것으로 사가지고 가서 대철이 앉은자리에까지 들 어가서 그 옆에 놓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저것 실과 값 만 들어 보고 말았다. 순영은 다른 사람들이 실과를 사가지 고 정거장으로 달음질쳐서 가는 것이 부러웠다. 그 중에도 자기와 같은 여자들의 그리하는 것이 더욱 부러웠다. 순영 은 대철이 자기를 정거장까지 나올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자 기를 싫어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역시 자기를 아끼기 위하 여 그러한 것인즉, 자기로서 절대로 정거장까지 가서는 못 쓸 일도 없는 것이요, 막상 대철을 전송하러 나오는 사람들 이 있다할지라도 다른 모르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 껏 해야 문제되는 사람이 정식과 정순이 두 사람인데, 기왕 약혼한바에야 일부러 그들에게 말이라도 할 터인데, 그다지 그들을 기피하기 위하여 정거장까지 전송도 못할 이유가 조 금도 없는 것인즉, 대철이 무슨 마음으로든지 자기를 나오 지 말라고 하였더라도, 뜻밖에 자기가 실과를 사가지고 정 거장까지 가서 정답게 전별을 하면 의외로 기뻐하지 아니할 까, 그렇게도 생각하여 보았으나 어쩐지 그렇게 할 용기가 나지 아니하였다.
순영은 대철이 정식, 정순 두 사람과 같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지, 작 약하게 웃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순영은 홀연히 놀라면서 몸을 피하여 그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서면서 눈만은 어느 것이든지 보지 않고 일 초 동안이라도 깜짝이지 아니하면서 그들을 보았다. 순영은 으레 그들과 같이 나오리라는 것을 예측하였건만 어쩐지 갑작스럽게 감정이 악화되었다. 게다 가 정순이 대철에게 가까이 서서 대철을 보면서 웃고 말하 는 것을 봤을 대에는 눈이 뒤집힐 만큼 시기가 났다. 그리 하여 나온 것을 후회하면서 뒷문으로라도 빠져서 나갈까 하 다가도 의연히 서서 그들을 보았다. 지금부터는 대철이보다 도 정순의 행동을 살펴보았다.
그들이 정거장으로 들어갈 때에 대철이 앞서고 정식과 정 순이 뒤에서 나란히 걸어가는 뒷 모양을 볼 때에는 순영의 감정은 아까보다 훨씬 풀렸다. 그들이 정거장 안으로 사라 지자 조금 있다가 기적이 울리면서 기차는 천천히 움직인다. 순영은 그대로 서서 기차 연기를 바라보았다. 전송객들 이 나오기 시작하매 순영은 다시 몸을 숨겼다. 그러나 눈만 은 숨기지 아니하였다. 조금 있다가 정시고가 정순이 어깨 를 겯다시피 가까이 서서 나오면서 아까보다도 몇 배나 정 답게 웃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는 순영은 아까 시기하던 마음은 봄눈 사라지듯 하고 다시금 부러운 마음이 여름구름 일 듯 한다. 순영은 다시 멀리 가는 기차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연기조차 분명히 보이지 아니하였다. 순 영은 다시 대철이 어디만큼이나 갔는가를 알고 싶었다. 순 영은 정식과 정순이 어느 청요리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서 실과 전방에 너무 오래 있는 것이 미안하여서 별로 필요 도 없는 실과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순영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숙자는 무엇을 들고 있다가,
"얘, 네게 전보 왔다."
하고 전보를 내어 준다.
"웬 전보에요?"
전보를 받는 순영은 가슴이 섬뜩하였다. 순영은 이때까지 전보를 받은 일이 없었으므로, 자기에게 전보가 왔다는 것 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혹은 대철이 전보를 한 것인가 하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아무리 빠른 기차라 할지라도 삼십 분도 못 되는 사이에 경성에 도착하여서 전 보까지 발송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더욱 놀랐다.
"모르겠다. 지금 막 받아서 떼어 보지도 않았으니까 떼어 보려무나,?
숙자도 궁금한 듯이 전보를 들고 있는 순영이 손을 본다.
순영은 거의 떨리는 손으로 전보를 떼어 보았다.
"송씨 위독 직상래?
이것이 전보의 내용이었다. 순영은 다시 놀랐다. 위독이라 는 것은 죽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죽은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구경 죽은 뜻이라고 해석 하는 사람이 많았고, 순영이 곧 가서 보아야 옳으니 가보지 아니하여도 관계가 없느니 하는 의논이 불일하였으나, 가서 보는 것이 좋다는 숙자의 말을 좇아 순영은 곧 경성으로 가 게 되었다.
13.
편집순영은 자기가 이태나 있던 송씨 집이건만 그 사이에 도로 의 변경된 곳이 많아서 찾기가 곤란하였다. 그러나 워낙 날 마다 날마다 드나들던 골목이라 묻지는 아니하고 찾아갔다.
순영은 그집 골목에 들어서자 송씨의 집 문 앞에 싸리나무 로 되는 대로 만들어서 백지로 씌워 놓은 등이 달려 있을 뿐이요, 아무도 어리대는 사람이 없어서 적막하게 보였다.
순영은 서먹거리면서 문턱에 들어서서 발을 멈추고 집 안의 동정을 살폈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는지라 들어가기가 휘휘 하였으나 기침을 두어 번하고서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에구, 아씨 오시네."
하고 부엌에서 쫓아나오는 행랑어멈은 눈물을 흘리면서,
"에구, 마님이 돌아가셨어요."
하고 순영의 가방을 받는다.
순영도 어쩔 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쏟아진다.
"순영이 오는구나, 어서 올라오너라."
마루 끝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던 시궁골 김 선달은 담뱃대 를 빼고서 말한다.
순영은 마루에 올라가서 시체 방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방 문 앞에 엎드려서 한참 울었다.
순영이 차차 자세한 사정을 들으매, 송씨는 술을 너무 과 히 먹은 결과로 뇌일혈(腦溢血)에 걸려서 불과 이틀 만에 죽 었는데, 원래로 친족은 하나도 없고 길러낸 계집애들도 제 대로 흩어져서 종적을 알 수가 없으며, 운옥은 목포 가서 있다가 다시 함흥(咸興)의 어떤 요리집으로 갔는데 병이 나 서 오지 못하게 되었으며, 송씨의 살던 집이 본래는 사글세 집 이었는데 순영을 팔아서 칠백 원을 받은 중에 오백 원을 떼어서 그 집을 전세로 변경하였는데, 송씨가 죽을 임시에 김 선달과 그 동리 소임 보는 사람을 불러 놓고 유서를 썼 는데, 그 전셋집과 세간과 옷가지와 기타 모든 재산을 전부 순영에게 물려주기로 되었다.
순영은 송씨의 초종 장례에 대한 일은 전부 김 선달에게 맡겨서 치르고, 가산 전부를 정리하여서 채무와 장비(葬費) 를 갚고 초종 장례에 애쓴 사람들에게 조금씩 분배하고 나 니 순영에게 차례 오는 것은 이백 원 가량밖에 아니 되었다. 정리가 끝난 뒤에 순영이 인천으로 오려고 할 때에 대철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으나, 주소를 알 수가 없어서 그 대로 내려가게 되었다. 순영이 송씨의 집을 마지막 나설 때 에는 깜박하는 꿈에 잠기는 듯하였다. 순영은 울면서 쫓아 나오는 행랑어멈에게 다시 돈 십 원을 주었다. 순영은 자기 가 다니던 사숙과 동무들을 찾아보고 싶었으나 이 다음에 결혼한 뒤에 좀더 행복스럽게 살 때에 찾아볼 양으로 그만 두었다. 바람이 불고 빗발이 듣는다.
송씨의 초종을 치르고 내려온 순영은 여러 가지로 생각이 달라졌다. 송씨가 죽지 아니하였으면 자기가 작부로 팔려온 기한 삼 년을 지난 뒤에라도 또다시 다른 곳으로 팔아 먹으 려고 하든지, 숙자에게 다시 기한을 정하여 새로 돈을 요구 하든지 하면, 자기가 한 번 팔린 것으로도 족히 이태 동안 양육한 비용을 갚았은즉, 더는 팔릴 까닭이 없다는 이유를 주장하여서 그것을 모면한다 할지라도, 그러노라면 시끄럽 고 창피한 일인데 인제는 그럴 염려가 조금도 없고, 또 뜻 밖에 돈이 이백 원이나 생겼은즉 그것으로 넉넉히 숙자의 집에 팔린 기한의 남은 부분을 돈으로 환산하여 줄 수가 있 으니, 언제든지 자유의 몸이 되어서 마음대로 결혼이라도 할 수가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순영은 서울서 내려올 때에도 그 사이에 대철이 편지가 반 드시 와서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었는데, 집에 들어가던 길로 편지 온 것이 없느냐고 물어 보았으나 그런 일이 없었고, 날마다 기다렸으나 소식이 감감하였다. 그리하여 순영은 한 편으로 걱정도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야속한 마음도 생겼다.
만일 처지가 바뀌 되었다면, 자기는 그 사이에 열 번 스무 번이라도 편지도 하고 전보도 하였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이 편의 소식을 알리기 위하여서 그러는 것보다 저편의 소식을 알기 위하여 그리하였으리라고 생각되어서, 더욱 야속하고 섭섭한 듯하다가도 돌려 생각하면 아마 그만한 사정이 있어 서 그러하려니, 남자란 여자와 달라서 모든 일에 대모하여 서 그렇거니, 그보다도 너무 통신이 잦으면 도리어 나의 마 음을 괴롭힐까 염려하여서 짐짓 그러는 것이 아니가 이렇게 생각할 때에는 편지를 기다리는 자기의 마음이 도리어 편지 를 아니하는 대철의 마음만 못한 듯하였다.
대철이 떠난 뒤에 이십 일이 넘어서 비로소 편지가 왔는데 그 내용은 그 사이에 너무도 바빠서 편지도 못하였다는 말 을 허두로, 광산은 곧 출원을 하고 그곳으로 내려가서 자세 히 조사한 결과, 광맥은 대단히 좋은데 시굴을 하려면 최소 한도로 돈 백 원이나 있어야 할 터인데, 그것을 주선하기 위하여 방금 함흥에 나와 있으나, 좀처럼 돈 주선이 아니 되어서 걱정 중에 있은즉, 언제나 가서 만날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는 사연이었다.
그 편지를 본 순영은 덮어놓고 돈 백 원을 부쳐 보낼까 하 다가 다시 생각하였다. 대철이 금광 한다는 말을 들은 뒤로 기회만 있으면, 손님들에게 금광에 대한 일을 물어 보았으 나, 입 둔 사람마다 광산에 대한 일은 그렇게 쉽사리 끝나 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일을 지내야 가부간 끝이 나는 것 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 보면 금광에 대한 일이 끝나기까지 기다리자면 몇 해가 될는지 모르는 일인즉, 그 렇게 한만하게 기다리자면 기한이 없는 일이었다. 순영이 하루라도 속히 결혼을 하자고 하는 이유는 남성이 그리워서 시집을 가고픈 것보다도 하루라도 하기 싫은 작부 노릇을 면하려는 데 있는 것인즉, 도저히 무한정하고 대철의사정이 펴기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사정이었다. 그리하여 돈 을 먼저 보내는 것 보다 어찌하든지 대철을 만나서 여러 가 지 상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순영이 자기의 생각대로 대철과 상의를 하여서 결 혼을 하게 된다 할지라도, 또 한가지 문제는 숙자의 의향이 어떨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자기가 작부로 팔려 온 기한 삼 년중에서 남은 기한은 돈으로 환산하여서 주면 될 수가 있 으리라는 것은 자기 혼자의 추측이요, 숙자가 과연 그것을 들어줄 것인가 안들어 줄 것인가는 조금도 알 수 없는 일이 므로, 숙자의 의사를 들어보지 않고서는 결혼에 대한 시기 를 지레 짐작할 수가 없고, 그렇다며 따라서 대철과 꼭 만 나자고 기회를 만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14.
편집"어머니, 제가 여쭐 말씀이 있는데요....."
순영은 조용한 때에 숙자에게 말을 하고서도 차마 못하는 듯이 망설인다.
"응, 무슨 말이냐?"
숙자는 사랑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대단히 말씀하기 어려운 일인데요."
"어려운 일이 무슨 일이냐? 아무 일이든지 말을 해라."
"제가 어머니한테 온 것이 삼 년을 작심하고 왔으니까 꼭 삼 년을 채워야 되지요?"
"암 삼 년을 채워야 되지, 왜 그러니?"
숙자는 비로소 의심이 났다.
"채우지 않고 그 대신 돈을 도로 드리면 안될까요?"
"무슨 돈을 도로 준단 말이냐?"
"돌아가신 송씨 어머니가 저를 팔고서 차음 칠백 원을 쓰 지 않았어요? 그 중에서 제가 여기 있은 적은 제하고 나머 지 돈을 도로 드리면 안 되겠느냔 말씀이에요."
순영의 말은 조금 거북한 듯하였다.
"그런데 왜 그러니? 여기 있기가 싫어서 그러니 어디 다른 좋은 데로 가려고 그러니? 그 말을 먼저 하여라."
숙자의 기색이 조금 달라진다.
"아니에요, 있기 싫기는 왜 있기 싫어요. 또 다른 데로 가 는 것이 뭐에요. 저는 어쩐지 술잔을 들고 여러 사람에게 시달리기가 싫어요."
"그래서 그러니, 또 다른 까닭이 있니?"
"다른 까닭은 별로 없어요."
"네 속에 있는 말을 다 해라. 나도 짐작하는 일이 있으니."
숙자의 기색은 도로 풀리면서 순영을 보고 웃는다.
"다른 일은 별로 없어요."
순영은 얼굴을 숙인다.
"너 시집가려고 그러니?"
"........."
순영은 얼굴을 붉힐 뿐이다.
"나도 네 눈치를 대강 안다. 자세히 말해라, 어쩐 일이냐?"
순영은 조금 주저하다가 대철에 대한 전후 사연을 조금도 가리지 않고 말하였다.
"그렇겠다. 그런데 너 말하는 그 사람이 여기를 두 번이나 왔었지?"
"네."
"저녁에 두 번이나 왔던 양복 입은 젊은 사람, 키가 호리호 리한 그 사람이지?"
"네."
"너 그사람이 꼭 마음에 드니?"
"저는 첫째는 은혜를 갚으려고 하는 것이요, 또 사람이 아 주 마음에 안 들면 그런 생각이 나겠어요?"
"그렇겠다. 하지만, 은혜는 은혜고 사람은 사람이니라. 결 혼이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니라. 평생의 고락을 같이하 고 사생 동거를 하는 것인데 쉬울 수가 있니?"
"그렇지요, 그 일이란 한 번 하면 변경할 수가 있는 일이 에요?"
"네가 즐겨서 하는 일을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겠느냐만, 나는 그 사람을 언뜻 보았는데 그다지 탐탁해 보이지 않더라. 사람은 남녀를 물론하고 첫째 코가 좋아야 하는 것인데, 그 사람은 코가 조금 비뚤어지고 사람이 조금 간사해 보이 더라. 나는 육십 평생을 두고 사람을 겪어 본지라, 관상은 못해도 한 번만 보면 대강은 짐작한다. 또 말이 났으니 말 이지, 나 너를 언제까지든지 부려먹을 생각은 아니다. 아니 잖아 네가 온 뒤로 손님이 상당히 있어서 네게 들인 밑천은 벌써 대고 그전에 빛냥졌던 것도 더러 갚았다. 하니까, 네가 얼마만 더 있으면 나는 심평이 관계찮게 되겠다. 한데 내가 자식이 있니. 뭐 있니? 돈을 많이 모으면 무얼 하니? 밥이 나 굶지 않을 만하게 되면 그때는 마땅한 사람을 골라서 성 취를 시켜 가지고 아들 겸 딸 겸 같이 데리고 살려고 했더 니라 했더니........."
하고 담배를 붙인다.
"그랬더니 이런 일이 생겼구나. 하지만, 내 욕심만 채기로 너 하는 노릇을 말라고야 할 수가 있느냐. 하지만 혼인을 하더라도 그 사람을 더 지내 보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숙자는 자기 의사만 말하고 정작 순영이 묻는 요점은 대구 하지 않는다. 순영은 숙자의 말이 한편으로는 고맙게도 생 각되나, 또 한편으로는 숙자가 자기의 편의만을 위하여서 대철의 위인을 대단치 않게 말하는 데는 더욱 불쾌하였다.
"잘 되고 못 되고 하는 것이야 제 팔자대로 되겠지요, 인력 으로 면할 수가 있어요? 혼인을 하게 되면 아까 제가 하던 말씀은 그렇게 해 주실 수가 있겠지요?"
순영의 기색은 쾌쾌하지도 못하였으나 애원하듯이 국축을 하지도 않았다.
"남은 기간을 돈으로 한다는 그 말이냐?"
"네."
"그거야 네가 다른 데로 간다든지, 여기 있기 싫어서 나간 다든지, 그런 일 같으면 될 말이냐, 돈 아니라 은을 준대도 제 기한을 꼭 채게 하겠지만, 네가 시집을 가게 되는 바에 야 내가 이해를 따져서 너를 못 가게 하겠니? 그것은 조금 도 염려하지 말고 너 할 채비나 하여라. 하지만 암만해도 나는 그 사람과 혼인하는 것이 그다지 좋은 줄 모르겠다."
숙자는 먹던 담뱃대를 밀어놓는다.
"그럼 나가겠어요."
하고 나오려는 순영은 앞으로는 무엇을 얻은 것 같고 뒤로 는 무엇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얘, 순영아."
숙자는 마당까지 나온 순영을 다시 부르더니,
"그래, 나머지 기한을 돈으로 받는다면 그것 낼 돈은 있니?" 하고 묻는다.
"있지요."
순영은 손쉽게 대답한다.
"그럼 그것은 사내가 당하겠지?"
"아니요, 제가 들이겠어요."
"네가 들여?"
"네."
"왜 네가 들여? 그 사내는 그런 것 물 돈도 없다더냐?"
"제가 들이지요, 아무가 들이면 어떤가요."
순영은 차마 대철이 그만 돈도 물어 줄 것이 없다는 말을 못하였다.
"그럼, 너 저금한 돈으로 물어준단 말이지?"
"그것도 있고 이번에 서울 가서 가져온 돈도 있지 않아요?" "응 그것하고..... 하지만 네 돈으로 그것을 물어주면 혼인 한 뒤에는 먹고살기는 걱정이 없는 모양이냐?"
"모르기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럴 형편도 못 되나 봐요."
"그럼 살기는 어떻게 사니?"
"어떻게 살겠지요,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쓰겠어요."
"암, 살기야 살지. 사람이 죽기야 하겠느냐만, 당장에 먹을 것이 없으면 그것도 어려우니라. 너는 지내보지를 못했으니 까, 사람 사는 일을 속속들이는 모르겠지만, 목구멍에 풀칠 해 가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로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네가 은혜를 갚 는 다니까 할 말은 없다만 후회할 날이 있으리라."
숙자는 조금 있다가,
"그렇지만 네가 다 작정한 노릇을 말해야 쓸데 있겠니? 남 은 기한은 돈이고 무엇이고 그만두어라. 내가 너를 성취시 켜서 데리고 살려고까지 하였는데, 그렇게는 못하게 될망정 네가 시집가게 되는데 내가 이해만 따져서 또박또박 돈을 박을 수가 있겠니? 하니까 돈은 한 푼도 낼 생각을 말고 아 무쪼록 시집가서 잘 살 도리나 해라."
숙자는 눈물을 흘린다. 순영도 같이 눈물을 흘리다 나왔다.
15.
편집순영은 숙자의 말이 여간 감사하지 아니하였다. 남은 기한 을 돈으로 가져오라고만 한 대도 감사하기가 짝이 없는 일 인데, 게다가 돈까지도 고만두라고 하는 것은 자기로서 바 라지도 못했던 일이므로, 숙자의 지나치게 관대한 처사에는 감복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숙자의 대철에게 대한 말을 되씹어 보았다. 숙자 같은 경험 많고 열인을 많 이 한 여자로서, 사람을 그릇 볼 리도 없는 것 같고, 또는 자기에게 그만큼 관대하게 하는 심사로서 자기를 오래 두고 부려먹기 위하여 결혼을 못하도록 방해하는 말이라고는 생 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으로는 아무리 생각 하여도 대철에게 그만한 단처가 있는 것 같지 아니하였다.
숙자의 말과 같이 코가 조금 비뚤어지기는 하였으나, 언뜻 보면 모를 만큼 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오, 다소 비뚤어졌다 할지라도 코가 비뚤어졌다고 마음까지 바르지 못할 이치는 없을 것 같았다.
그 전의 자기의 서모는 코는 반듯하였으나 속 쓰는 것은 개차반이었고, 자기의 이모는 코가 조금 비뚤어졌으나 마음 은 좋았던 것을 생각하니 숙자의 말일 더욱 근거가 없어진다. 또 대철의 얼굴이 간사하여 보인다는 것은 대철이 언제 든지 상냥한 태도를 가지므로 그것을 잘못 보면 간사하게 보기도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보다도 대철의 사람됨 이 만일 마음이 바르지 못하다든지 간사하다든지 하였으면,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바닷물에 뛰어들어가 빠진 사람을 건져 낼 리가 만무한 일이요, 또는 장충단에서 점하던 일이 생각났다. 자기가 숙자의 집에 온 뒤로 처음으로 모함을 입어서 다소 고생한 일도 있지마는, 그 뒤로는 모든 일이 순조로이 되어서 자기 처지로는 상당 하다고 할 만한 저금도 하고, 평생 소원하던 대철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고, 송씨가 죽어서 한시름을 잊게 되는 동시 에, 이백 원 돈이 공으로 생기게 되고, 또는 몸을 팔린 기한 중에 남은 기한이 걱정이던 것이 그것도 염려 없이 되었은 즉, 그때의 점장이가 <가는 곳은 생문방이라 거기로 가게 되면 자연히 붙들어 주는 사람이 있어 부귀영화를 누릴 것 이다.>하고 하던 말이라든지, <청실홍실 늘이기는 이구십팔 열여덟 살이 제격이라>고 하던 말이 어제들은 것 같이 소상 하게 기억되어서, 그 점이 조금도 틀림없이 맞는 것인즉, 자 기가 열여덟 살인 그해에 시집을 가게 되는 것이 하늘이 정 해 준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순영은 숙자의 말을 들은 뒤에 엷은 구름이 명랑 한 날을 가린 것처럼 잠시 꺼림칙한 의심이 없지 아니하던 마음 하늘은 한 점의 구름도 없이 명랑하여졌다.
순영은 저녁의 조용한 틈을 타서 대철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로 하였다. 쓸 말이 퍽 많을 것 같아서 종이를 많이 내 놓고 먹을 한 벼루 잔뜩 갈아서 종이를 많이 내놓고 먹을 한 벼루 잔뜩 갈아 놓았다. 붓을 들고 쓰려고 할 때에는 무 슨 말을 먼저 써야 좋을는지 몰라서 주저하였다. 가슴에 가 득한 회포가 하나도 급하고 긴요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므 로, 모두가 첫머리에 먼저 쓰고 싶어서 뒤에 쓰고 싶은 말 은 하나도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쓰려고 함에 선뜻 먼저 쓸 말이 없었다. 쓰고 보면 잘못된 것 같고, 쓰고 보면 잘못된 것 같고 하였다. 말이 선 후 도착이 된 듯하여서 새로 쓰고 보면 배어 놓은 말이 있 고, 또다시 쓰면 안 할 말을 쓴 것 같고, 또다시 쓰고 보면 글씨가 잘못된 듯하였다. 순영은 천하의 어려운 일은 편지 쓰는 일이요, 그중 에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가 더욱 그러 하다고 생각하였다. 몇 번이나 만지장서로 썼던 것을 다 찢어 버리고 나중에는 몇 줄이 안 되게 줄여서 썼다. 사연은, 안부를 물은 뒤에 세상없어도 만나야 할 일이 있으니 곧 오시되, 만일 오시지 못할 지경이면 자기가 가겠 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그 전날 아는 손님에게 써 달라고 하여서 두었던 봉투에 넣어서 부쳤다.
순영은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돌아와서는 이내 그 편지를 우체부가 거둬 갔을까, 거둬 갔으면 그 사이에 기차에 실렸 을까, 그 편지를 실은 기차가 어디만큼 갔을까, 그 기차가 가다가 정거를 오래 하지나 않는가, 그 차가 함흥에 도착하 려면 몇 시간이나 걸릴까, 함흥서도 우편물이 오면 그 즉시 로 분전(分傳)하여 주는가, 대철이 그 사이에 어디로 가지나 않았는가, 다른 데로 떠나지는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사관이 나 옮기지 아니 하였는가, 심지어 편지가 혹 유실될 수가 있다는데, 그 편지가 유실되지나 아니할까.. 여러 가지로 생 각도 하고 염려도 하였다. 또는 언뜻 생각나는 것은 <차비 를 보낼 것을> 하는 생각이었다. 대철이 그렇게 곤란하게 다니는 중에 차빈들 용이할 수가 있을까. 만일 차비를 변통 하지 못하여서 오지 못한다면 어찌할까. 그렇다면 그쪽에서 차비가 없으니 보내라고 하기도 창피한 일이어서 그럴까 싶 지도 아니하고, 자기가 다시 보내자니 날짜가 늦어질 것이 고, 그 생각을 미처 못하여 차비를 보내지 못한 것이 대단 히 후회되었다.
이튿날부터는 답장을 기다리게 되었다. 아직은 답장이 올 수가 없을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시시각각으로 기다렸다.
우체부가 언뜻하면 반가우면서도 가슴이 섬뜩하다가, 다른 데로 가는 것을 보면 공연히 무정한 듯하였다. 순영은 대철 에게 보내는 편지를 쓸 때에는 세상에 어려운 일이 애인에 게 편지하는 일이라고 생각되던 것이, 그보다도 애인의 기 별을 기다리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사흘만에 대철이 온다는 전보를 받은 순영은 날개가 없이 도 날 듯싶었다. 순영은 지나치게 즐거워서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하면서 다시 거울을 보았다. 얼굴이 며칠 동안에 조금 파리한 것 같았다. 대철이 마일 얼굴이 파리한 까닭을 묻는다면, 며칠 동안 대철의 소식을 기다리 느라고 그렇게 되었다고 대답할 것을 생각하였다. 순영은 얼굴에 크림을 바르고 두 손바닥으로 문질러 보면 당장에 윤기가 돌고 부실부실하여서 포시러운 것 같았다. 순영은 얼굴에 화장을 하지말고 파리한 빛을 보여서, 대철을 기다 리느라고 애쓴 보람을 내세우는 것이 좋을까, 될 수 있는 대로 얼굴을 포시럽게 매만져서 첫눈에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좋을까, 두 가지를 생각하는 사이에 손은 저절로 향수 병과 분항아리로 오락가락하면서 얼굴은 훌륭하게 화장이 되었다. 순영은 자기도 모르게 된 화장을 마치고 전보를 다 시 보았다. <명일 오후 착>이라는 것을 볼 때에 너무 일찍 이 화장한 것이 우스웠다. 그러나 그 화장한 것을 다시 흐 릴 필요는 없었다. 마른 수건으로 문질러서 조금 엷게 하였다. 엷은 화장이 수수하여서 더욱 어여쁜 것 같았다.
"너 어디 가니?"
산월이 퉁퉁거리고 들어와서 문지방을 짚고 말한다.
"가긴 어딜 가?"
하고 돌아다보는 순영은 놀랐다.
"단장을 하기에 말이야."
"어디로 가야만 단장을 하나?"
"그럼 누가 오니?"
"오기는 누가 와?"
"그러면 아닌 밤중에 왜 단장을 하고 있었어?"
"아닌 밤중이 뭐냐, 지금 대낮이지 아닌 밤중이냐?"
"대 아닌 때에 하는 것은 다 아닌 밤중이지 뭐냐, 아닌 밤 중만 아닌 밤중인가?"
"이런 멍텅구리, 밤은 밤이고 낮은 낮이지. 아무 때나 아닌 밤중이야?"
"네게 아까 전보 왔지?"
"그래."
"무슨 전보냐?"
"무슨 전보는 알아서 무엇하는 거야?"
"정든 임에게서 왔니?"
"그래 저든 임에게서 왔다. 어째?"
"미친년처럼 와서 무엇을 주절대고 있어, 어서 나가 보지 않구."
하는 숙자의 소리에 산월은 낄낄대고 나간다.
16.
편집이튿날 오정도 치기 전에 순영은 정거장으로 나갔다. 인천 에는 발착하는 기차가 하루에 여러 번 있으므로 사실 <오후 착>이라는 전문만으로는 어느 시간에 올는지 모르는 것이어 서, 오정 치기 전에 마중을 나가는 것도 괴이한 일은 아니 었다. 기차는 오고 또 오고 기차를 바라볼 때에 그 차는 행 복을 가득히 싣고서 자기에게로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 는 차마다 자기가 기다리는 사람이 내리는 것을 보지 못하 였다. 그러나 순영은 대철을 싣고 오지 않는 그 차들이 원 망스럽지는 아니하였다. 다음에 올 기차가 얼마든지 잇는 까닭이었다. 조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오히려 좋을 듯하였다. 다 저적 때서야 대철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 순 영은 미처 자기를 보지 못한 대철을 쫓아갔다.
"선생님!"
하고서는 미처 다른 말을 하지 못하였다.
"아, 무엇하러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대철은 놀라는 듯한 반가운 표정으로 순영을 본다.
"오정 치기 전부터 나와 있었어요, 어쩌면 이제 오세요?"
"미안합니다 안 나오시면 어때요."
대철은 출구(出口)를 향하여 걸으려고 한다.
"이리 주세요."
순영은 대철이 한 손에 가방을 들고, 한 손에 사과 바구니 를 든 것을 한꺼번에 받으려고, 두 손을 벌리고 몸을 굽힌다. "고만 두시오."
대철은 사과 바구니만 순영에게 주고 가방은 주지 않는다.
"어디서 사과를 이렇게 사 가지고 오세요?"
순영은 사과 바구니를 받아서 조금 쳐들고 보더니,
"이 사과 좋은데요."
하고 대철을 본다.
"그게 원산 명산입니다. 순영씨가 사과를 좋아하시기에 사 가지고 왔지요. 조금 더 사 가지고 오려다가 무거워서 가지 고 올 수가 있어야지요."
"감사합니다. 저는 참 사과를 잘 먹어요. 선생님은 저를 사 과 잘 먹는 장이라고 별명을 지신 게로구면."
순영은 눈이 먼저 웃고 입은 나중에 웃는다.
"별명은 무슨 별명이요? 별명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사과 잘먹는다는 별명쯤은 괜찮습니다."
그들은 정거장 밖에 나와서
"그전 여관으로 갈까?"
대철이 주저하는데,
"아니에요, 그전 여관은 저 있는 데서 멀기도 하고 재미없 어요. 제가 근처에다가 여관을 정해 놓았어요. 그 집은 여관 도 아니고 여염집인데, 조용하고 좋아요. 그 집 주인도 저하 고 잘 알구요. 늙은 여자 혼자 사는 집이에요. 이리 가세요." 순영은 손으로 인도한다.
"그렇게까지 하셨어요, 고맙습니다. 그럼 그리 가지요."
그 집은 순영이 있는 지벵서 서너 집 건너서 있는데, 집은 조그마하나 정결하고 조용하였다. 주인도 늙수그레한 여자 가 순탄해 보였다. 그들이 들어가니 건넌방을 벌써 깨끗이 치워 놓았다.
"선생님, 얼굴이 조금 축가신 것 같은데요."
그들은 방에 들어앉자마자 순영이가 추췌하여진 대철의 얼 굴을 쳐다보며 말한다.
"축갔어요? 축갔겠지요."
대철은 한손으로 자기의 광대뼈를 만진다.
"그러시겠지요.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되시니까 얼굴인들 죽 가지 않으시겠어요? 편지에 돈 때문에 걱정이 되신다고 하 시더니 어떻게 주선이 되셨어요?"
"주선이라니, 요새 세상에 돈 주선이 그렇게 쉽게 되었어요?" "그렇지요. 요새는 돈 있는 사람들이 당초에 돈을 내놓지 않는다는데요. 돈 있는 사람들이 남의 사정을 알아주나요.
부자는 돼지 한 가지라는데요."
순영은 민망한 듯이 말하다가 나중에는 웃는다.
"그거야 소경 개천 나무라기지. 소용 있나요. 다 제 불찰이 지요."
하고 대철은 순영의 얼굴을 보더니,
"순영씨는 그새 얼굴이 나아진 것 같군요."
하고 웃는다.
"나아진 것이 뭐에요. 요새 며칠 동안에 쪽 빠졌는데요."
순영은 손바닥으로 두 볼을 비비면서 웃는다.
"왜 그러세요?"
"사람이 성미가망해서 그렇지요. 선생님에게 편지를 하고 답장을 기다리느라고 그랬답니다."
하는 말을 비롯하여 순영은 자기의 사정을 낱낱이 말하여 서, 언제든지 결혼하여도 거릴낄 것이 없다는 말과 하루라 도 속히 작부 생활을 면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뜻을 분명히 말하였다.
대철도 자기의 사정을 말했는데, 서울 가서 곧 금광 출원 을 한 뒤에 부득이 광산 있는 곳으로 가게 되어서 부득이 다시 오지 못한 말과, 그 사이에는 시굴할 자금이 변통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다니다가 순영의 편지를 보고서 왔다는 것 이었다. 대철은 순영의 말에 동의하여서 하루 바삐 결혼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도, 광산을 경영하려면 자금이 필 요하다고 오락가락하게 될 터인즉, 결혼한 뒤의 가정 생활 이 문제라는 뜻을 은연중에 주장하였다. 그러나 순영은 광 산을 경영하는데 같이 따라다니며 고생을 할 수도 있고, 그 렇지 못하여 자기가 혼자 있게 되는 때라도 자기의 생활은 하다 못해 바느질품이나 빨래품을 팔아서라도 스스로 담당 하여서, 대철이 일하는 데에 방해를 끼치지 아니할 것을 말 하면서, 결혼한 뒤에 아무런 곤란한 생활을 하더라도 대철 을 떠나서 작부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뜻을 여러 번 되풀이하였다.
그날 저녁에야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어서 불복일(不卜 日)하고 한 일주일 뒤에 결혼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이 소 문이 퍼지자 인천 바닥에는 한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순영 과 대철의 관계, 곧 순영이 원산 바다에 빠졌을 때에 대철 이 건져 준 일을 비롯하여, 순영이 그 사이에 잊지 아니하 고 은혜를 갚으려고 하던 일과, 우연히 해수욕장에서 만나 던 일, 마침내 그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되는 인연에 대하여, 누구라도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고, 순영에게 대하 여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순영에게 다니던 손님들 중에는 돈이나 피륙, 화장품 같은 것을 보조하는 사 람이 많았고, 결혼 피로연에 대한 것은 홍 숙자의 집에서 담당하기로 하였다.
기일이 되자 오전 열한시에 그들의 결혼식을 건봉사 포교 당(乾鳳寺布敎當)에서 거행하게 되었는데, 정각이 됨에 종소 리와 향 연기로 청겸한 도랑을 강연한 뒤에 부처님에게 귀 의(歸依)를 맹세하고 포교사의 정중한 주례 아래에 한쌍의 원앙의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다. 송곳 찌를 틈이 없이 들어 선 구경꾼 중에서 꽃을 뿌리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순영은 그렇게 기쁜 마당에서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하고서, 아무리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눈물이 면사포 밖으로 비치는 것을 본 사람은 있었지만, 그 뜻을 아는 이 는 부처님밖에 없었다. 순영은 그 중에는 속으로 염불을 하 면서 자기들의 행복을 빌고, 돌아가신 부모를 축수하고 홍 숙자의 행복도 빌고 자기와 친한 사람의 행복까지 빌었다.
식을 마치고 숙자의 집에 와서 피로연을 할 때에는, 여러 사람의 입에서 순영에게 대한 칭찬과 숙자에 대한 칭찬이 아울러 벌러졌다. 그 중에도 기쁜 기색을 가지면서도 섭섭 히 생각하는 것은 홍 숙자였다.
그들은 우선 대철의 사처(私處)한 비에 신방을 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