誘惑

편집

굽이치고 휘돌아서 길이 오백여 리를 흐르는 동안에 농사 짓는 물로서는 많은 이익을 주며, 마침내 대경성(大京腥)의 칠십만 인구에게 음료수를 제공하고, 배와 떼를 운전하여서 모든 물화의 운수의 편의를 주면서 낮과 밤으로 흐르고 흘 러서 서해 바다로 들어가는 한강(漢江)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러한 한강 근원의 한 가닥인 설악산(雪嶽山) 물은, 그 한 잔에 지나지 못하는 첫 근원이 그 산의 제일 상봉인 청봉 (靑峰) 밑에 있는 봉정암(鳳頂庵)의 근처에서 나서, 이조 단 종(端宗) 때의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매 월 당 김 시습(梅月堂金時習)이 산에 올라 울고 물에 임하여 울다가 마침내 중이 되어서 부처님에게 귀의하던 오세암(五 歲庵) 밑으로, 또는 김삼연(金三淵)의 끼친 자취로 이름을 전하는 영시암(永矢庵)을 안고 돌아서, 그 산의 큰절인 백담 사(百潭寺)를 지나며 등, 칡, 댕댕이 덩굴을 뚫으며 바위 뿌 리를 감돌아서 구름과 안개의 맑고 거룩한 지역으로만 흐르 다가 티끌 세상의 첫걸음을 밟게 되는 데가 설악산의 첫 어 귀인 가평(加坪)이라는 동리였다.

그 동리의 북쪽으로 산기슭에 화전(火田) 비슷한 길찬 밭이 있는데, 누가 보든지 메마르게 보이는 밭이었다. 그 밭 중간 두둑의 한쪽 끝에서 김을 매고 있는 계집아이는 복(伏)지경 에 내리쬐는 볕을 가리기 위하여 조그마한 떨어진 수건에 물을 적셔서 머리 위에 얹었으나, 불 같은 햇볕과 김 같은 바람이 한 조각 수건에 전신 물기운의 서늘한 맛을 그 아이 에게 한 동안이라도 이바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 여 그 아이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 위의 수건을 몇 번이나 다듬거려서 고쳐 썼으나 그 수건은 마침내 뜨거운 볕을 가 려주지 못하였다. 그 아이는 호미 잡았던 손으로 이마에서 흘러서 눈으로 들어가는 땀줄기를 씻었다. 그렇게 할 때마 다 손에 묻었던 흙이 땀에 배어서 눈으로 들어가서 눈알은 쓰라리고 쓰라리곤 하였다. 그리하면 날아간 수건을 줍거나 치마끈의 한 끝으로 눈도 씻고 땀도 씻곤 하였다. 아무리 지극히 공평되고 사정이 없는 태양으로, 찰 때는 차고 더울 때는 더워서 이것저것을 가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아이에 게는 너무도 애처로운 일이었다.

그 아이는 날마다 날마다 하루같이 혼자서 그 장차고 광찬 감자밭을 매는 것이었다. 약하고 연한 작은 손으로 손아귀 에 버는 육중한 호미를 잡고, 무딘 호미 끝으로 깊이 박힌 김뿌리를 캐고 돌덩이처럼 단단한 흙덩이를 깨뜨리려면, 그 호미를 몇 번 드놓지 아니하여도 팔목이 시고 손바닥이 아 팠다. 그러는 중에 한나절이 되며부터는 위에서 내리쬐는 햇볕과 했볕의 반사로 땅에서 솟아오르는 더운 기운이 어리 고 연한 살을 녹일 만큼 찌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볕에 타 고 바람에 그은 어린 계집아이는 얼굴과 수족은 물론 몸까 지도 새까맣게 되어서 완연한 흑인종과 같았다.

그 아이는 그렇게 덥고 피곤할 때에는 설악산에서 내려오 는 시원한 물에 뛰어들어가서, 딩굴면서 목욕도 하고 먹기 도 하고 뱃속에 있는 창자까지라도 꺼내어 씻고도 싶었지 만, 밭에서 시내까지 가려면 한참이 걸릴 뿐 아니라, 계집아 이니 만큼 혼자 가서 활활 벗고 멱감을 용기도 좀처럼 없었다. 그러나 온몸을 벗고서 목욕까지는 하기가 어렵다 할지 라도, 잠시가서 낯도 씻고 손발도 씻고 마시기도 하여서 견 디기 어려운 더위를 적이 물리칠 수는 있었지마는, 그렇게 하노라면 자연히 시간을 허비하게 되고, 시간을 허비한 결 과로는 밭을 덜 매게 되는 것이요, 밭을 덜 매게 되는 때에 는 그렇지 않아도 날마다 밭을 얼마 매지 못하였다고 집에 가서 날카로운 꾸지람을 듣는데, 게다가 물에 가서 몸을 씻 느라고 시간을 보내고 밭을 그전만큼도 못 매게 된다면, 그 때의 꾸지람을 어떻게 들을까 하는 어린 가슴속에 풀기 어 려운 두려운 마음이 뭉쳐져 있는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그 아이는 멀지 아니한 곳에 은하수 같이 생각되는 시원한 물 을 두고도 비같이 흐르는 땀을 한번도 씻어 보지 못하는 것 이었다.

그 아이는 자기에게 있는 부드러운 마음과 약한 힘을 다하 여 심한 더위와 큰 괴로움을 참아 가면서 밭을 매다가 다시 배고픈 것을 깨달았다. 그 아이는 왼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는 밭둑에 있는 소나무의 그 림자를 돌아보았다. 그 소나무 그림자는 날마다 날마다 그 아이에게 점심 먹는 시각을 알려 주는 자연의 시계였다. 그 아이는 그 소나무의 그림자가 어제보다 조금 더 동쪽으로 기울어 진 것을 보았다. 그 아이는 점심 먹을 때가 조금 지 난 것을 깨닫자 무슨 엄숙한 약속을 어긴 듯이 조금 놀랐다. 그 아이는 밭매기가 하도 어려워서 점심 때나 어서 되 었으면 하고, 해도 자주 쳐다보고 그 소나무 그림자도 참참 이 돌아보았다. 그리하여 오정때쯤 된다든지, 혹 그보다 조 금 지났다든지, 하여간 점심 먹고 쉴 때가 되었으면 마땅히 기뻐해야 할 터인데, 점심 먹을 시간이 어제보다 조금 늦어 진 것을 보고서 도리어 놀라게 되는 것은, 그 아이의 연약 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얼마나 애처로운 것은, 사정 없이 내 리쬐는 폭양이나 숨이 탁탁 막히도록 울려치미는 땅 기운이 야 아랑곳할 바 아니었지만, 다시 말하면 그 아이의 기다리 던 점심때가 조금 지난 것을 보고서 도리어 놀라는 어이 없 는 심경을 하늘과 땅도 모르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아이에 게 점심 먹고 쉴 대를 가르쳐 주는 소나무 그림자도 그것을 알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 아이가 점심 먹기 위하여 일어서려고 할 때에는 오래 쪼그리고 앉아서 김을 매기에 마비가 되어서 굳은 다리는 잘 펴지지 아니하였다. 그 아이가 아픈 것을 참아 가면서 이맛살을 찌푸리고, 조금 몸을 뒤틀어 가면서 다리를 차차 펼 때에는 무릎의 힘줄과 무릎의 뼈에서 오독오독하는 소리 가 난다. 그 아이는 일어서자 허리를 뒤로 젖히기도 하고 몸을 좌우로 흔들기도 하며, 다리를 번갈아 들고 꼬부렸다 가 폈다 하여서 온 몸의 뼈와 힘줄을 고르면서 먼 하늘을 바라보고 한숨을 후! 하고 내쉬더니 에구!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그 아이가 누구를 원망한다든지, 자기의 신세를 한탄한다든지 하는 등의 무엇을 헤아리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의 몸이 너무도 괴로워서 자연히 나 오는 소리였다.

그 아이는 밭고랑으로 나가면서도 행여나 감자순을 밟을까 봐 조심조심하여 밭둑으로 나가서 으레 점심 먹는 소나무 밑에 조그마한 반석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 반석에는 그늘 이 지고 조금 시원한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 가지에는 점 심 꾸러미가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그것을 보는 그 아이는 빙긋이 웃었다. 그의 웃는 입술은 바로 아까 한숨쉬고 에고 소리를 지르던 그 입술이었다. 그 아이는 밥 꾸러미와 같이 달려 있는 조그마한 바가지를 떼어 가지고 여남은 걸음쯤 띄어 있는 조그마한 샘으로 갔다. 이것은 어느 사람이 일부 러 파 놓은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에 패어서 자연히 샘처럼 된 것인데, 그 물은 돌 틈에서 나오고 바닥에는 새 모래가 깔려서 물이 깨끗하고 차고 맛이 달았다. 그 아이는 가지고 간 바가지를 그 물에다 두 번이나 부시고 다시 한번 부시었다. 그리고 바가지를 가볍게 저어서 웃물을 헤치고 한가운 데로 퐁당 떠서 우선 벌떡 뻘떡 마시었다. 그 물을 마시는 아이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누구보다도 자기가 제일 행 복스런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 아이는 물을 마신 뒤에 그 샘의 아랫물에다 손도 씻고, 얼굴도 씻었다. 그리고 발도 씻 으려다가 다시 밭을 매면 또 흙이 묻으려니 하는 생각으로 , 씻지는 아니 하고 다만 시원하게 하기 위하여 물에 들어 서서 혼뎅거리기만 하였다. 그런 뒤에 다시 바가지에다 물 을 떠 가지고 와서 조그마한 조약돌 세 개를 솥발처럼 늘어 놓고, 그 위에다 물바가지를 기울어지지 않도록 반듯이 놓 았다. 그리고 점심 보자기를 내려서 깨끗한 돌 위에 놓았다.

그리고 자기도 반석 위에 앉아서 점심 보자기를 끄르고, 마 악 먹으려고 할 때에 뒤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가벼운 기침 소리가 났다.

그 아이는 몸을 조금 쉬고 점심을 먹으려다가 뜻밖에 뒤에 서 기침 소리가 나므로 깜짝 놀라서 돌아다보았다. 나이가 오십 가량 되어 보이는 중늙은이 여자가 손에다 가방을 들 고 오는데 열인(閱人)을 많이 한 사람이 본다면 전도부인 비 슷도 하고 방물장수 같기도 하였다.

그 여자는 밭둑에서 얼마 안 되는 작은 길로 좇아오더니, 길로 가지 아니하고 그 아이있는 곳으로 향하여 오는데, 그 아이를 흘끔흘끔 보면서 빙긋빙긋 웃을 듯한 표정으로 치맛 자락이 산초나무 가시에 걸리는 줄도 모르고 바쁜 듯이 걸 어온다. 그 아이는 그 광경을 보고서 무슨 나쁜 짓이나 하 다가 들킨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펴놓았던 점심 보 자기를 부리나케 도로 덮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거동만 살 폈다.

"에구, 강원도가 산골이라는 말은 들었지마는 산골 중에도 이렇게 흉악한 산골이 어디 있을까? 거기 좀 들어오는데 치 마가 다 찢어졌나 보다."

하는 그 여자는 아직도 산초나무에 걸려 있는 치마폭의 한 자락을 떼어내다가 산초나무 가시에 손가락을 찔렸다.

"에구 아파! 금방 피가나네. 이게 무슨 천주악할 나뭇가시 가 이렇게 흉악하담."

하고 그는 가시에 찔린 손가락을 다른 손가락으로 꼭꼭 누 르고 비벼서 피가 나지 못하도록 하고서, 다시 그 손가락을 코 끝에 대고 콧김을 쐬면서 그 아이의 옆에 와 앉는다. 그 광경을 멋도 모르고 보는 아이의 놀랐던 가슴은 어느덧 안 정이 되고, 도리어 우스운 생각이 났다. 그리하여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로 그 여자를 흘끔흘끔 보았다.

그 여자가 눈살을 찌푸리고 찔린 손가락에 콧김을 쐬는 것 이 더욱 우스웠다. 그리하여 그 아이는 고개를 돌려서 소리 안 나게 조금 웃고서는 그 여자의 하는 양을 보지 않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점심 보자기를 다시 다듬거려서 그 여자가 보지 않는 편으로 비켜 놓았다.

"에구 아파! 아프다 못해 쓰리고나."

하고는 그 여자는 그 아이를 향하여

" 사람이 그냥 다니기도 이렇게 어려운데 이 산골에서 어 떻게 농사를 지어 먹고 사니. 더구나 이 뙤약볕에 밭을 어 떻게 매니. 그런데 네 집에는 농사짓는 다른 사람이 없니?

네가 밭을 매고 있게?"

하고 다시 그 아이에게로 다가 않는다. 그 말을 들은 아이 는 다시금 부끄러운 생각이 나면서 무어라고 대답을 하여야 좋을지 주저하였다.

"그래 늬 집은 어디냐?"

하고 다시 묻는 그 여자의 태도는 더욱 친절한 듯하였다.

"이 안 동리에요."

하고 그 아이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 안 동리에? 네 나이는 몇 살이냐?"

"열네 살이에요."

"성은 무어구?"

"성은 장(張)가구, 이름은 순영(順英)이에요."

그 아이는 자기의 이름까지 말하였다. 그것은 어른이 성을 묻는데 아이로서 이름까지 대답하는 것이 예의라고 들었던 까닭이었다.

" 응, 그래. 장 순영이, 이름도 좋다. 나는 서울 사는 송씨 라는 사람이다."

하고 그 여자는 남의 거주 . 성명을 물었은즉 자기의 거주 . 성명도 말하는 것이 인사 . 체면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상 대한 사람이 어린 아이니만큼 자기의 이름까지는 말하지 아 니하고 동리 이름이라든지 번지까지는 아직 말할 것이 아니 라고 생각하여서 다만 서울 사는 송씨라고 한 것이었다.

" 그런데, 네 부모가 다 계시냐?"

하고 말을 계속하였다.

"아버지는 안계셔요."

순영은 슬픈 듯이 대답하였다.

" 그럼 어머니만 계시냐?"

" 어머니도 친어머니가 아니에요."

"친어머니가 아니면 무슨 어머니냐. 아마 서몬 게로구나."

하고 송씨는 걱정스런 듯이 말한다.

"서모는 아니에요."

"그럼 무슨 어머니란 말이냐?"

"계모 어머니요."

하는 순영의 눈에는 실안개가 어리는 것 같았다.

"계모여! 그러니까 네가 밭을 매게 되었구나. 계모니까 그 렇지. 자고로 소설책을 보아도 계모 슬하에서 학대를 받는 일이 좀 많은가. 별별 기괴한 일이 다 많았지. 여북해야 어 린애가 이 뙤약볕에 밭을 매겠니. 그런데 오빠구 언니구 누 가 또 없니. 네 친동기간 말이야."

송씨는 여간 걱정스런 빛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빠두 언니두 아무두 없어요. 저 하나뿐이에요."

하는 순영은 갈수록 마음이 괴로워졌다.

"아무도 없고 너 혼자뿐이야? 그러면 무남독녀 외딸이로구나. 친부모가 계시면 옥이야 금이야 하고 얼마나 귀여워하 시겠니. 늬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은들 너를 두고 어떻 게 눈을 감으셨겠니 에구 가엽기도 하지."

하는 송씨의 말과 표정은 마치 자기의 친척이나 가까운 친 구의 딸에게 대하여 걱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 같았다.

순영은 부모를 여읜 뒤로 누구에게든지 그만큼 따뜻한 말 을 들어 본 적이 없어 본 적이 없었다. 자기의 주위에 닥치 는 것은 모두가 얼음처럼 차고 종이처럼 얇았다. 그리하여 세상이라는 것은 도무지 그러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있었으 나, 그러나 다른 집 아이들이 그의 부모에게 사랑받는 것을 볼 때에는 이 세상에 자기 혼자만이 불쌍한 듯하여서, 남모 르게 운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으나, 누구 하나 그 사정을 알아서 자기를 위로해주느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가 송씨는 처음 보는 사람으로 빈 말이나마 그만큼 자기를 불쌍히 여 겨 주는 것에 견딜 수 없이 감격하였다. 게다가 자기의 부 모가 돌아가셨어도 자기 때문에 눈을 감지 못하였으리라는 말을 들을 때에는 어린 가슴이라 하여도 미어질 듯하였다.

그리하여 고개를 돌리고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잠잠히 있던 순영에게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얘야, 너 우니, 울지마라. 어린 것이라도 소견이 있으니까 내 말을 듣고 우는구나,. 소견이 기특하다. 울지마라. 사람이 액운이 닫는 때는 그런 수가 있느니라. 너도 항상 그렇거니 와 액운이 다하고 잘 될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이다. 옛날에 흥진비래요, 고진감래라구 부귀빈천은 물레바퀴 돌아가듯 하는 것이다. 조금도 스퍼하지 말아라. 네 얼굴이 예쁘고도 잘 생겼다. 멀지않아 액운이 다 하고 잘 될터이니 아예 울 지마라."

하는 송씨는 순영이 알아듣지도 못할 문자를 써서 말하고, 순영의 팔을 잡아서 가볍게 흔들면서 울지 말라고 말린다.

순영은 송씨가 울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을 보고서 처음에 는 더욱 울다가 차차 진정하고, 또는 송씨의 말을 다는 알 아 들을 수가 없었으나 대개가 자기가 장차 잘 되겠다고 위 로하는 말이, 작은 새의 그것과 같은 어린 순영의 마음은 거기에 솔깃하여서 다시 위안을 얻는 듯하였다.

순영은 별안간에 깜짝 놀라면서 나무 그늘을 보았다. 그것 은 정신 모르고 있는 자기의 발에 햇볕이 쬐어서 뜨거운 것 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순영이 날마다 그 자리에 앉아서 점 심을 먹으려면 다 먹고 나서 한참 있어야 햇볕이 발에 내리 쬐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면 곧 일어나서 다시 밭을 매러 들어갔는데, 그날은 아직 점심도 먹지 아니하였는데 벌써 나무 그늘이 옮겼은즉, 늦었다고 장차 혹독한 꾸지람을 들 을 두려움이 있는 순영이로서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순영은 자기 집에서 넘어오는 고개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자기 집에서 누가 오다가 그 광경을 보지 아니하였 나 하는 염려로 본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개뿐 아니라 어 디든지 거기서 보이는 곳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순영은 적 이 다행하였다. 순영은 옆에 있는 점심 싼 보자기를 만지작 거렸으나 차마 내놓고 먹지는 못하였다. 그 눈치를 본 송씨 는,

"얘, 너 참 밥먹어야지. 아까 오다가 보니까 너 밥먹으려고 하다가 내가 오니까 말았지. 점심 때가 늦어 간다. 이 때 까 지 밭 매고 여북이나 시장하겠니. 어서 내놓고 먹어라."

하고 앉은 자리에서 몸을 굽히고 찰을 늘여서 점심 꾸러미 를 잡아당겨서 순영이 앞에 놓는다.

순영은 시간도 늦어 가고 배도 고팠으므로 점심을 속히 먹 고도 싶었으나 어쩐지 점심 보자기를 풀고 싶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보자기의 여민 곳을 손으로 붙들고서,

"점심을 안 먹어도 괜찮아요."

하고 고개를 숙인다.

"암 먹어도 괜찮다니, 이때까지 일을 하고서 배가 안 고풀 리가 있나. 내가 있으니까 체면 차리느라고 그러니? 어서 밥을 먹어라. 어디 밥은 무슨 밥이고 반찬은 무엇이냐. 구경 좀 하자."

하고 송씨는 점심 보자기를 끄른다. 순영은 할 수 없이 보 자기 잡았던 손을 놓으면서.

"밥이 아니에요."

하고 다시 고개를 숙이면서 얼굴이 붉어진다. 송씨가 보자 기를 펴 놓고 보니 그 속에 있는 것은 찐 감자 몇 개하고 나무 잎새에다 소금 좀 싼 것 하고 그것뿐이었다.

"에구. 이것 감자뿐이로구나. 이것만 먹고서 어떻게 사니?

반찬이라고는 소금뿐이고, 에구 가엾기도 해라. 사람이 이걸 먹고서 사는구나. 그러나 이것이라도 어서 먹어라."

하고 송씨는 두 손으로 보자기의 양쪽 귀를 잡아서 행여 감자가 딩굴어 갈까 하고 조심스럽게 순영의 앞으로 다가놓 는다. 순영은 무슨 비밀이나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으나 그 렇다고 아니 먹을 수도 없었다.

" 그럼 먹겠어요."

하고 조슴 주저하는 순영은 감자 보자기를 조금 송씨의 앞 으로 밀어 놓으면서,

" 이거 하나 잡숴 보세요."

하고 송씨를 쳐다본다.

"오냐, 너나 어서 먹어라. 나는 점심밥을 많이 먹었다. 어 서 물 마시고 먹어라."

송씨는 정답게 말하였다.

"서울도 이런 것이 있어요?"

"있고말고. 지금은 서울이 시골보다 감자가 더 흔하단다."

"서울도 감자가 있어요!"

하고 순영은 이상한 듯이 눈을 깜짝거리다가 감자를 먹기 시작하였다. 순영이 감자에 소금을 찍어서 한 입씩 먹는데 별로 물도 많이 마시지 아니하고 잠깐 사이에 먹는다. 송씨 는 순영이 하도 먹음직스럽게 먹는 것을 보고서 속으로 침 을 삼켜 가며 보다가 다 먹은뒤에

"너는 잘두 먹는다. 먹는 것이 아주 복스럽다. 사람이 그래 야지, 너는 암만 해도 복을 많이 받겠다."

순영은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아니하고서 점심 보자기를 훌 훌 털어서 개어 놓고 나무 그림자 옮긴 것을 다시 보더니,

"저는 밭을 매러 가야겠어요."

하고 미안한 듯이 송씨를 보며 일어선다.

"응, 어서 매어라. 오늘 나 때문에 시간을 늦었구나. 너 밭 을 얼마 매지 못하였구나. 계모에게 걱정을 들으면 어쩌니.

내가 밭을 맬 줄 알면 같이 좀 매어 주겠지만, 나는 호미 자루가 어디가 붙은 줄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맬 수가 있나."

하고 송씨는 따라서 일어서더니 아까 산초나무에 걸렸던 치마폭을 살펴보고 다시 그 산초나무를 가리키면서,

"저게 무슨 나무가 저렇게 흉악하게 생겼니?"

하고 순영을 본다.

"그게 산초나무에요."

순영은 조금 웃으면서 말하였다.

"산초나무? 나무두 망하게두 생겼다. 허다한 나무에 어떻게 저따위로 생겼담. 하기야 사람두 그런 것이야. 너같이 얌전 한 사람은 나무로 일러두 좋은 꽃나무와 같은 것이고 사람 못된 것은 저 따위 나무와 같은 것이야. 남의 계모 노릇이 나 하면서 전처 자식에게 심하게 구는 것이 다 저렇게 가시 가 돋쳐서 남의 치마나 찢어 놓는 놈의 나무나 마찬가지지.

산초나무가 무슨 산초나무야. 개초나무라든지 돼지초나무라 든지 하지."

하고 송씨는 골을 내면서 흘기는 눈으로 산초나무를 본다.

순영은 송씨가 산초나무를 보고 성내고 욕하는 것이 여간 우습지 아니하였다. 돌아서서 소리 없이 웃다가 호미를 가 지고 밭으로 들어가서 부지런히 밭을 매었다. 송씨는 한참 이나 서서 순영의 밭 매는 것을 보다가 내일 이맘때 또 오 겠다고 하고서 몇 번이나 돌아보면서 어디론지 가버렸다.

이튿날 아침에는 설악산 중허리에서 안개가 끼기 시작하더 니 삽시간에 들과 마을을 덮는다. 순영은 언제든지 밭매러 가는 것이 싫었으나 그날 아침에는 어쩐지 속히 가고 싶었다. 순영은 어제 만났던 송씨의 일이 궁금하였던 까닭이었다. 순영은 머리도 빗고, 치마만이라도 빤 것으로 갈아 입고 싶었으나 그것은 계모가 무서워서 하지 못하였다.

순영은 아침에 낀 안개가 종일 그대로 있었으면 하였다.

그것은 내리쬐는 불볕이 너무도 무서운 까닭이었다. 그러 나 안개는 얼마 아니 되어서 슬슬 걷히기 시작하였다. 순영 이 밭매고 있는 그 곳을 스케지한다면 어제의 그것과 조금 도 다를 것이 없었으나. 다른 것이 있다면 동쪽 봉우리에 돌아가는 구름이 비 의사(意思)를 머금은 듯한 그것뿐이었다. 순영은 머리를 자주 돌이켜서 어제 송씨가 오던 길을 보고 보고 하였다. 그러나 한나절이 거의 되도록 송씨는 오지 않 는다. 다만 백담사 길로 좇아나오는 늙은 중이 시내(川) 건 너의 작은 길로 가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순영의 송씨를 기다리는 마음은 초조하였다. 그것은 순영이 송씨를 기다리는 까닭을 스스로 물어 본대도 꼭 집어서 대 답할 만한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순영이 점심 때를 표준하는 소나무 그늘은 거의거의 어제 그맘때가 되어 간다. 시내 위에 우뚝 선 바위 밑으로부터 처음에는 머리만 보이다가 차차 온몸을 나타내며 바쁜 듯이 오는 사람은 틀림없는 송씨였다. 그것을 본 순영은 달음질 로 좇아가서 마중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다만 일어서서 바 라보다가 도로 앉아서 못 본 체하고 밭을 매었다. 호미끝은 제자리에 가 찍히지 아니하고 딴 곳을 찍었다. 순영의 손은 호미에 있으나 순여의 마음은 송씨에게 있는 까닭이었다.

"에구, 너 또 와서 밭을 매는구나. 얼마나 더우냐. 나는 오 늘은 좀 일찍 와서 놀다 간다는 것이 다른 볼일이 있어서 좀 늦었다."

송씨는 밭고랑까지 들어서서 숨이 조금 찬 듯이 말을 한다.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는 이외에 순영은 다른 말을 더 할 것이 없었다. 말 대 답을 하기 위하여 일어서는 순영의 다리는 벌써 오금이 켕 기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어제는 집에 가서 걱정이나 안 들었니?"

"아니요, 아시나요."

하는 순영의 말은 자기의 계모가 어제의 사정을 모른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점심 먹을 때가 아직 못 되었니?"

하고 송씨는 해를 쳐다본다.

"아직 조금 못 되었어요."

하고 순영은 해를 보지 아니하고 소나무 그림자를 돌아본다. "그래 오늘은 조금 일찍 나오너라. 내가 할 말도 있고 또 너 주려고 무엇을 좀 가지고 왔다."

하고는 송씨는 밭둑으로 나가서 반석에 가 앉는다.

순영은 아까는 별로 이유도 없이 송씨를 기다렸지마는 지 금은 정말 궁금하였다. 송씨가 자기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 니 할 말은 무슨 말이며, 또 무슨 먹을 것을 가지고 왔다고 하니 그것은 무엇이며 또 무슨 이유일까? 자기에게 무슨 좋 은 일이 있을 것인가?" 적지 아니한 기대큼 가지고 가슴이 울렁거릴 만큼 기쁜 생각도 있었으니, 여자로서 열네 살이 되었으면 부끄럼 많고 의심 많고 조심성 많은 처녀다운 지 경으로 들어가는 시기였다. 그리하여 한쪽으로는 의심도 나 고 무서운 생각도 났으나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날은 아침에 안개가 끼었으므로 낮에는 더욱 더울 줄로 안 것인데, 구름도 오락가락하고 바람도 불어서 어제보다는 조금 서늘한 편이었다. 순영은 밭맨 것을 돌아보았다. 한나 절 맨 것으로는 그전보다 훨씬 많이 매었다. 점심 참에 조 금 일기 나가서 늦게 들어온다 할지라도, 저녁 때에 조금 부지런히 서둘렀으면 전일보다 오히려 많이 매어질 것 같았다. 순영은 점심 때가 조금 못 된 줄을 알면서도 그대로 나 갔다.

"자, 점심 먹기 전에 이것이나 좀 먹어 보아라."

하고 송씨는 신문지에 싼 꾸러미를 펴놓는데, 비스킷. 카스 텔라 그런 등의 과자였다. 순영은 그러한 과자를 먹어 보지 못한 것은 아니나. 흔히 먹지는 못한 것이요. 항상 감자나 강냉이로만 끼니를 잇고 별식이라곤 좀처럼 얻어 먹어 보지 못한 나머지라. 그것이 특별한 진미로 보이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 어서 먹어라. 네가 하두 얌전하고 밭 매느라고 너무도 애 를 쓰기에 일부러 이것을 사왔다. 어서 먹어라."

송씨는 과자를 보기만 하고 앉았는 순영에게 카스텔라를 접어서 주더니,

"물을 마시고 먹어야지. 내가 물을 떠 오마."

하고 얼른 일어서서 소나무에 걸린 종구라기를 떼어 가지 고 그 옆에 샘으로 가는데

"그만두세요, 제가 가겠어요."

하고 일어나서 종구라기를 빼앗으려고 하는 순영의 말도 듣지 아니하고, 자기 손으로 물을 EJ가지고 오는 송씨는 물 을 순영이 입에 대어 주다시피 마시라고 한다. 순영은 물을 감사히 받으면서도 너무 유난스럽게 권하는 바람에 행여 물 이 자기의 앞섶에 엎질러질까 염려하여 조심스레 물을 마시 고 과자를 먹기 시작하였다.

별안간 설악산 늘목형 쪽으로부터 검은 구름이 넘어 오고 샛바람이 건들건들 불기 시작하더니, 삽시작에 일기가 험악 하여 지면서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이거 비가 와서 큰일났구나. 어떻게하나."

하고 가방이니 수건이나 과자 봉지니 할 것 없이 주섬주섬 챙기며, 한편으로는 치마를 여미어서 깡뚱하게 추켜 매낸 둥 수선을 떠는 송씨는 여간 당황하지 않는다. 순영도 점심 그 릇이나 호미 같은 것을 급히 건사했으나 비교적 침착하 였다. 빛방울은 점점 자주 떨어진다. 동해 바다 쪽에서는 우 레 소리가 우르릉우르릉 나며 번개가 번쩍번쩍한다. 비는 쏟아지기 시작한다. 단 두 사람의 여자로서 무인지경에서 졸지에 그러한 광경을 당하여 오도가도 못하게 된다면, 그 것도 인생 사회에 한 근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 나,

"이리 오세요."

하고 앞서 가면서 송씨를 인도하는 순영은 이러한 지경을 몇 번이나 당하여서 그다지 놀랄 것이 없다는 듯이 몸은 급 하였으나 마음은 침착하였다. 송씨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 어서 무엇이든지 순영이 하라는 대로 할 수 밖에는 다른 도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두 주먹을 부르쥐고 순영의 뒤만 쫓 아갔다. 얼마 아니 가서 바위 밑에 굴이 있다. 넉넉히 여남 은 사람은 앉을 만큼 되었다. 억수가 진대도 비는 한 방울 도 맞지 아니하게 되었다. 그 굴은 본래 조그마하게 생긴 것을 동리 사람들이 농사짓다가 그러한 경우에 비를 피하기 위하여 크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것을 굴에 들어서자 마 자 순영은 이야기 하였다.

"에구 비두, 산골 비는 무지스럽고 흉악하게도 온다. 까딱 하면 떠내려 갈뻔 했다."

송씨는 젖은 옷을 떨고, 밖을 내다보면서 말하더니 다시 굴 속을 둘러 보며,

"에구, 방안 같구나. 사람이 자기라두 하겠네. 굴 속은 겨 울에는 덥고 여름에는 서늘하다는데. 참 한결 시원한 것 같 은데, 비를 맞아서 그런건가."

하고는 다시 굴 바닥에 놓여 있는 방석땍와 판판한 돌덩이 를 보더니

"에구, 사람들이 앉으려고 이런 것을 장만하여 놓았구나.

어디 좀 깔고 앉자. 너도 앉아라."

하고 그중 깨끗한 자리때기를 순영이에게 밀어 준다. 그리 고 무슨 좋은 기회나 얻은 듯이 빙글빙글 좋아한다. 순영도 송씨와 마주 앉았다. 비는 여전히 쏟아진다. 그들은 과자와 감자를 내어 놓고 산중 별미의 오찬회가 벌어졌다. 그러한 기회가 피로하고 가엾은 순영을 잠시라도 편안히 쉬게 하기 위하여 천사가 주는 기회인지. 순영의 앞길을 그르치기 위 하여 악마가 주는 기회인지, 혹은 사람으로서 간혹 있을 수 있는 공교한 일인진 모르나 하여간 이상한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에구, 너는 어찌 그렇게 어여쁘냐. 어제 처음으로 볼 때에 는 이쁘긴 이뻐두 그다지 이쁜 줄은 몰랐는데, 오늘은 자세 히 보니까 정말 이쁘구나. 그 뙤양볕에 그을리고, 흙이 묻 고, 또 이렇게 더러운 옷을 입었어두 저렇게 어여쁠 때야, 잘 가꾸고 좋은 옷을 입으면 얼마나 이쁠까. 인물은 시골에 있다는 말이 옳은가봐. 서울 사람은 하도 가꾸니까 얼른 보 면 번지를르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맵자하게 이쁜 사람 이 드문데 너는 정말 미인이다. 저런 얼굴ㅇ르 가지고 이런 산골에 파묻혀 있기는 아깝지."

입에 침이 없이 순영을 칭찬하는 송씨는 다시 순영의 치마 를 만지면서,

"이게 네 집에서 난 것이냐?"

하고 순영을 본다.

"네."

하고 순영은 부끄러운 듯이 치마촉을 여미어서 오른편 발 끝으로 밟는다.

"네가 짠 것이냐?"

"아니에요. 저는 삼을 삼을 줄밖에 몰라요."

"그럼 네 계모가 짠 것이냐?"

"네."

"그럴 것이다. 네가 짰으면 얌전스럽게 잘 짰지 이렇게 못 되게 짰겠니. 나는 길쌈은 할 줄 모른다마는 이런 솜씨는 처음 구경하겠다. 굵든지 가늘든지 올이나 고르게 짜지 이 게 뭐람, 솜씨도 빌어먹겠다."

하고 혀를 끌끌 차더니,

" 석새 베라더니 참 석새 배로구나. 그 중에 또 성하기나 한다. 노닥 논닥 깁고 또 이렇게 해어져서 너풀너풀하는 것, 이런 것을 입어도 몸맵시가 어찌 그렇게 좋으냐. 어디 이렇 게 돌아앉아라. 뒤태를 좀 보자."

하고 순영을 억지로 돌려 앉히고 보더니,

"뒤태는 더 이쁘구나. 천상 타고 나는 것이라 할 수 없거든. 예다가 깨끗이 씻어서 비단옷이나 맵시 있게 입혀 노면 얼마나 이쁠까. 그러면 천상 선녀 같지 뭐야. 청산백옥이 건 토에 뭍힌 형국이라더니 너를 두고 이른 말이로구나."

하고 순영을 다시 돌려 앉히고서,

"되로 보니까 뒤가 더 이쁜 것 같더니, 앞으로 보니 또 앞 이 더 이쁜 것 같구나. 무산(巫山) 선녀가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더니 거짓말이 아니로구나. 참 이 상도 해라."

하고 쉴 사이 없이 무당 푸념하듯이 순영을 추더니,

"너 비단옷 더러 입어 봤니?"

하고 화제를 돌린다.

"아니요, 못 입어 봤어요."

하는 순영은 다시 부끄러움을 느꼈다.

"인조견도 못 입어 보았어?"

"인조견 저고리는 하나 있어요. 그것은 명절 때나 나들이 갈 때나 입어요."

"그러면 비단신은 더구나 못 신어 보았겠구나."

"비단신이요?"

"그래."

"비단으로 신을 만드나요?"

"암, 비단으로 신을 만들고 말고, 이맘적에 개화들을 하여 서 고무신이니 무엇이니 모두 생겼지. 그 전에는 서울 사람 은 모두 비단신을 신었다."

"비단으로 신을 만들어 신으면 흙이 묻지 않아요? 그리고 비가 오면 젖구요?"

"흙이 묻으면 대순가. 그러니깐 그게 호사란 말이지. 비오 는 때는 신는 것은 진 신이 따로 있지."

"그래요, 비단으로 다 신을 만들어요? 지금도 비단신이 있 나요?"

하는 순영은 아무래도 비단으로 신을 지어 신는다는 말이 곧이 들리지 아니하였다.

"지금도 있고말고. 지금도 하이칼라들은 비단신을 신지. 그 러나 그전처럼 흔치는 아니하지."

하고 송씨는 다시 순영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 보고 있더 니,

"너 비단신 좀 구경하고 싶으냐?"

하고 빙긋이 웃는다.

"어떻게 구경해요?"

순영은 그 말을 거짓말인가 하고 의심도 하였으나. 이상한 충동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구경하려면 어렵지 않지."

하고 송씨는 자기의 가방을 열더니 신문지로 싼 것을 내놓 는다. 순영은 마음이 긴장되면서 그것을 바라본다. 송씨는 그것을 풀더니,

"자, 이것이 비단신이다. 구경 좀 하여라."

하고 조그마하고 어여쁘게 만든 비단신 한 켤레를 내놓는다. 그것은 빛은 회색이요 무늬는 준주 무늬로 된 것인데, 순영으로서 그 비단 이름을 알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에구 참. 비단신이군요. 척 이쁜데요."

순영은 그것을 만져 보려고 오른손을 내밀다가 깨끗지도 못한 자기 손에서 무엇이 묻을까 저어하여서 놀라는 듯이 손을 다시 움츠린다.

"만져 보고 싶으면 만져 보아라. 만져 보아도 괜찮다."

송씨는 신을 들어서 순영의 앞으로 나란히 놓는다. 순영은 아니 만져 보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듯이 신 한짝을 자기 치마폭의 가장 깨끗한데로 싸잡아 들고서, 자기가 잡았던 곳을 갸웃거려 가며 들여다 보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 을 보고 서야 비로서 안심하였다.

"이렇게 고운 신을 어떻게 발에다 신고 땅으로 다녀요? 한 번만 신으면 다 더러울 텐데."

순영은 비단신이 좋아서 가지고 싶은 마음보다 그것이 너 무 고와서 신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앞을 선 것이다.

순영은 그 신발을 보다가 곁눈으로 자기의 발을 보았다.

눈대중으로 자기 발에 맞을 것도 같았다. 아무도 없으면 자 기 발을 깨끗이 씻고서 신어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옆에 있는 다 떨어져서 여기저기 얽어매고 흙투성이가 된 자기의 고무 신을 볼 때는 송씨가 부끄러운 것보다 비단신을 보기 가 부끄러웠다. 그리하여 순영은 자기의 신이 송씨에게 보 이지 않고 또 비단신에게 보이지 않도록 그 사이를 막아서 비켜 앉았다. 그리고 안 보는 체하면서 비단신을 자꾸자꾸 보았다.

"너 이런 신 신고 싶으냐?"

순영의 말엔 대답도 아니하고 순영의 거동만 살펴보는 송 씨는 한참 있다가 말하였다.

"아니에요, 신고 싶은 것이 뭐에요. 이런 신을 신고서 밭을 매면 어떻게 되겠어요."

순영은 어이가 없는 듯이 소리를 내어 웃는다.

"이런 신을 신고 밭을 매어서야 되겠니. 밭을 매지 아니하 도록 하고서 신어야지. 이런 신을 신으려면 규격에 맞게 하 고서 신어야지. 비단옷도 입고, 금가락지나 보석 반지도 끼 고 비단 양산도 가지고, 또 비단 가방도 가지고 또 쪽지면 순금 비녀에 보석 물린 연(蓮)봉 뒤꽂에도 꽂고, 모두 그렇 게 그렇게 하고서 선을 보라는 말이지. 그렇게 차리구 나서 면 얼마나 어여쁠까. 저 얼굴 저 맵시에."

하고는 송씨는 고래를 기울이고 순영의 얼굴을 본다.

"에구, 제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겠어요?"

순영은 솔깃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그리하여 두 볼이 붉어 지면서 팔목으로 웃음 나오는 입을 가리었다.

"너라고 왜 못하니? 하는 사람이 따로 있나. 또 너같이 잘 생긴 사람이 그런 것을 못하고서 누가 하겠니. 네가 생각만 있으면 그렇게 하기는 여반장이다."

"어떻게요?"

"어떻게든지 되는 수가 있지."

"꿈에나 될까요."

"꿈에는 왜? 생시에 버젓하게 되지. 서울은 서울 토박이 보 다 시골서 호밋자루 놓고서 올라와서 잘된 사람이 더 많단다. 내가 알기에도 얼마인지 수가 없다. 너는 인물이 잘났으 니까 마음만 있으면 다른 사람보다 쉽고도 더 잘 될 것이다." 순영은 눈으로 비단신을 보고 귀로 송씨의 말을 듣기에 골 몰하였으나. 마음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놀리는 듯이 굴 밖에 내다 보았다. 비는 그치지 아니하였다.

"너 비단옷 한 벌도 못입어 보았다지? 비단 구경 좀 해 보 아라."

하는 송씨는 조그마한 꾸러미 하나를 내어서 순영이 앞에 펴놓는다. 그것은 가지각색의 비단 조각으로, 마치 조각보 만들려고 모아 두었던 것 같았다.

송씨는 준주사니, 여의사니, 법단이니, 양단이니, 하부다이 니 하고 주워 섬겼으나 순영으로서는 그 이름을 기억할 수 도 없었고, 또 다 기억하려고도 아니하였다. 다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어지러운 꽃송이를 보는 것 같아서 정신이 황홀할 뿐이었다. 진홍빛이 고운가 하면 연분홍빛이 청초한 듯하고, 회색빛이 좋은가하면 남빛이 더 새뜻한 듯하였으며, 완자 무늬가 좋아 보이다가 다시 준주무늬가 좋아 보이며, 꽃무 늬가 혼란한 듯하다가 무늬 없는 것이 도리어 점잖게 보였다. 순영은 그 중에서 마음대로 골라 가지라면 어떤 것을 취하여야 할는지 모를 것이었다. 그 중에는 자기 동리의 호 사하는 사람들이 입었던 것과 같은 비단이 있는 듯도 하였 으나 그것도 분명히는 알 수가 없었다.

"어디서 이런 비단이 다 나셨나요?

순영은 이러한 비단은 한두 조각도 얻기가 어려울 터인데 어디서 이렇게 많이 생겼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우리 집에서 옷가지나 해 입을 때에 조각 남는 것을 모은 것이 그렇게 많단다."

"그런데 어쩌면 저렇게 솜씨가 좋을까요? 짜기도 잘 짜고 무색도 곱게 들이고, 저런 비단을 짜는 여자들은 예사 사람 들이 아니겠지요."

하는 순영은 옷감이나 무색을 들이는 것은 반드시 여자의 손으로만 하는 줄로 알았다. 자기는 석새 베를 짜는 것도 쉽지 아니하고, 또 옷감에 분홍이나 양청을 들이려면 얼룩 덜룩 하게 채(彩)가 지기 쉽고, 무색의 깊고 옅은 것도 마음 대로 되지 않는데, 어떻게 가는 비단에다 무늬를 놓아서 짜 며 또 어떻게 여러 가지 무색을 그렇게도 곱게 들어나 하는 생각이었다. 순영은 자기 동리에서는 얌전하다는 말도 듣고, 재주 있다는 말도 듣는다. 길쌈이라든지, 무새나 푸새 같은 것도 남보다 낮게 한다는 말을 들었을 뿐 아니라 자기도 그 렇다고 아는 터이었다. 그렇건마는 그러한 비단 짜는 솜씨 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말을 하면서, 비단 조 각들과 자기의 치마와를 갈마들어 보았다. 그러고 부끄러워 하였다.

"아니야, 이런 비단은 다 기계로 짜는 것이지. 사람의 손으 로 이렇게 짤 수가 있나. 그리고 무색도 다 기계로 들인단다. 서울에는 비단 짜는 데도 있고 염직소라고 물 들이는 데도 있고 다 있지. 서울에 가보면 별별 기기괴괴한 것이 다 있지. 없는 것이 있나. 고양이 뿔도 있고 색시 상투도 있 고 다 있지. 호호호."

"그래요, 이상도 해라. 무슨 기계가 저런 것을 다 짜는 기 계가 있을까요."

순영은 비단을 짜기도 기계로 짜고 물도 기계로 들인다는 말에 이상하고 신기하게 생각하였으나, 하여간 사람의 손으 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에는 적이 안심이 되었다. 만일 그것이 다 여자의 손으로 하는 것이라면 자기의 재주가 그만 못할 것이 얼마나 부끄러울까 하는 생각이었다. "너 쓸 데 있으면 더러 가져가거라. 다라도 가져가거라. 내 게는 이런 것이 얼마든지 있으니깐."

하고 송씨는 비단 조각을 꾸러미째로 순영이 앞으로 밀어 놓는다.

순영은 비단 조각이 하도 커 보여서 그것을 그대로라도 두 고 이따금 내어 보기만 하여도 좋을 것 같았고, 또는 그런 것으로 색보를 모아서 색실이나 분갑 같은 것을 싸 두었으 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급기 야에 송씨가 가져가라고 주는 때에는 다시 생각이 났다. 그 것을 가지고 가는 때에는 자연히 계모가 알게 될 것인즉, 그것이 어디서 났느냐고 종주먹대게 되면 사실대로 말을 한 댔자 나쁜 일은 아닐 것이나 자연히 시끄렇게 될 것이요, 또는 무슨 뜻밖에 일이 있을는지도 모르는 것이어서 굳이 사양하고 말았다. 비는 아까 보다도 더 온다.

송씨는 굴 어귀에 나셔서 비오는 것도 보고 다시 사방을 둘러보더니, 도로 와서 앉았던 자리를 비켜서 순영에게 가 까이 앉으면서 순영의 손을 잡고 손바닥을 한참 보더니,

"손금이 아주 좋구나. 부자 되고 호강하겠어. 그런데 초년 고생은 조금 있겠다. 이것 때문에 네가 지금 고생하는구나."

하고 손바닥 왼편에 있는 잔 금을 가리키더니 다시 오른편 에 있는 큰 금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부자 되고 호강할 금이다. 그런데 고생할 금은 가 늘고 짧고, 부자 될 금은 굵고 길지 아니하냐."

하고 다시 얼굴을 이리저리 자세히 보더니.

"네 상도 손금과 똑같다. 이마가 조금 좁은 까닭에 초년 고 생을 하는구나. 그런데 너는 집을 떠나야 할 팔자다. 집에만 묻혀 있으면 고생만 하고 별수 없겠다. 사람 이상이 아무리 좋아도 팔자에 타고난 대로 떠나게 되면 떠나고 있게 되면 있고 해야지, 떠나게 될 팔자를 억지로 있는다든지 있게 될 팔자를 억지로 떠난다든지 하면 못 쓰는 것이다. 너도 하루 바삐 집을 떠나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크게 좋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다."

하고 순영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순영은 거기 대하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속 히 집을 떠나지 않으면 좋지 못한 일이 있으리라는 말에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속히 집을 떠나지 아니하면 좋지 못한 일이 있어요?"

하고 다시 물었다.

"그렇지. 집을 떠나지 아니하면 좋지 못한 일이 있지."

"무슨 좋지 못한 일이에요?"

"그것은 말할 수가 없다."

"집에 있으면 죽겠어요?"

"그거야 죽는 것만 똑 좋지 못한 일인가?"

"죽더라도 할 수 없지, 어떻게 떠날 수가 있나요."

하는 순영의 얼굴에는 걱정스런 빛이 나타난다. 순영의 기 색을 살펴보던 송씨는 순영의 말과는 조금 딴판으로,

"너 서울 구경 했니?"

하고 묻는다.

"서울 구경이 뭐에요. 십리 밖에도 못 나가 보았는데요."

"이때까지 십리 밖을 구경하지 못했어?"

"네."

"그러니까 네게 고생이 더 되지. 팔자는 나다닐 팔잔데 십 리 밖에도 안 나가고 있으니 되겠니? 나하고 서울이나 가자." 하고 다시 순영의 기색을 살핀다.

"제가 어떻게 서울엘 가요?"

순영은 돌연히 서울 가자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거야 네가 갈 생각만 있으면 가는 수가 있지. 나도 네가 장래 잘 될 상(相)이기에 가자고 하는 것이다. 너는 집을 떠 나더라도 서울 같은 대처로 가야지 다른 곳으로 가서는 소 용이 없을 것이다."

하고 끝말을 꽉 눌렀다.

바람이 불지 아니하여도 흔들릴 만큼 연약한 순영의 작은 가슴은 여간 설레지 아니하였다. 거기 대하여 가타 부타 말 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자기의 마음으로도 어떻게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네가 서울엘 가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비단옷도 입 을 수가 있고 비단신도 신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나 그뿐 인가, 좋은 데로 시집을 가서 쪽지게 되면 보석 반지에 순 금 비녀에, 어디를 가려면 자동차를 타고 마음대로 호강을 할 터인데 말할 것이 무엇 잇나. 그게 다 네 복으로 그렇게 된단말이야, 내가 억지로 시켜 준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면 네 덕에 나도 호강을 하자꾸나."

송씨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웃음으로 끝을 막는다. 순영도 웃었다. 그러나 순영은 송씨의얼굴을 똑바로 보지 아니하고 조금 외면하였다.

"그런데 대관절 네 생각이 어떠냐? 갈 생각이 있으면 내가 잘 데리고 가는 것이고, 안 간다면 할 수 없고, 그러나 네가 아무 때 가도 가기는 갈 것이다. 사람이 팔자는 속이지 못 하는 것이니까."

송씨는 결정있는 대답을 다그쳐 묻는다. 순영은 아직 모르 겠다고 가타 부타 결정하는 대답을 피하였다. 그들의 말이 끝나자 비도 따라서 그쳤다.

순영은 평일에 밭으로부터 돌아가는 때는 언제든지 늦게 되 었다. 그리하여 집에 가면 곧 저녁을 먹게 되고, 저녁을 먹고 나면 피곤을 이기지 못하여 밥도 내릴 사이 없이 곧 쓰러져서 자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나긴 여름날의 피 곤한 몸을 짧은 밤에 꿈도 없는 단잠으로 위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비가 온 뒤라 땅이 질어서 밭을 맬 수가 없 으므로 조금 일찍이 돌아왔으나, 그 대신에 집안 쓰레질도 하고 저녁밥도 지어 먹고 하느라고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잠자리에 누워 있는 순영은 눈이 반반한 채로 잠이 오지 아니하였다. 순영은 송씨의 일이 생각나는 동시 에 자기의 지나간 모든 일이 역력히 생각되었다.

순영은 산촌의 구천 집에서 자라났으나 그다지 무지막지한 가정에서 본 데 없이 생장한 것은 아니었다. 순영의 아버지 는 한문학자였다. 그러므로 촌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쳐 주고 그 사례로 전곡(錢穀)간에 얼마씩 거두어 주는 것으로 생활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순영도

<천자(千字)> , <동몽선습(童蒙先習)> , <격몽요결(擊蒙要 訣)>까지 배웠고, 항상 훈계하는 말이라도 오륜(五倫)이니, 삼강(三綱)이니 하는 이외에 특별히 여자의 행실에 대한 말 을 많이 들었다. 그뿐 아니라 순영은 천품이 순량하고 의지 가 굳은 편이었다. 그리고 얼굴도 그다지 미인은 아니나 누 구라도 귀엽게 볼만큼 되었다. 그리고 하는 행동도 요사바 사하다든지 간교하다든지 그러한 일이 없고 순직하여서, 동 리 사람에게도 칭찬을 듣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순영에게 가장 불행한 일은 일곱 살때에 사랑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 고 계모를 얻는 바에, 사람이 아주 재깔마리인데다가 시기 가 많아서 자기가 데리고 들어온 딸보다도 순영이 나은 것 을 미워하였다. 그리하던가 순영의 아버지가 돌아간 뒤부터 는 거칠 데 없이 순영을 구박하였다.

순영의 집은 본래 가난하여서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었지마는, 그 중에도 순영은 있는 음식에도 배부르게 얻 어 먹지 못하고, 있는 의복에도 등 따습게 입어 보지를 못 하였다. 언제든지 약한 힘으로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칭찬 이라고는 한 마디도 들어보지 못하고 도리어 꾸지람만 듣게 되며, 때때로 잘못한 일 엇이 혹독한 매를 맞게 되어서 집 안은 가시 덤불 같고, 인정은 얼음 같았다. 아무리 자기의 나이보다 많이 참고 자기의 키보다 더 길게 견디는 순영으 로도, 도저히 정신의 고통과 육체의 피로를 견딜 수가 없었 던 것이다. 그리하여 순영은 한 마디의 따뜻한 말이라도 배 고플 때의 밥보다도 고맙고, 조그마한 친절한 일이라도 추 울 때의 옷보다도 그리웠다. 그리하여 더위를 무릅쓰고 땀 을 뻘뻘 흘려가며 어려운 일을 할 때에 누구라도,

"에구, 너 덥겠구나."

한다든지,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서 홑치마에 맨발을 벗고 서 동동걸음 칠 때에,

"에구, 추워서 어쩌나."

한다든지 하면, 그러한 말만이라도 자기에게 새로운 생명 을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쓸한 세상을 보내다가 우연히 송씨를 만나서 자 기에게 말로만이라도 고맙게 구는 것이 그지없이 감사하였 는데, 게다가 자기를 구원까지 하여 주겠다는 것은 무어라 고 말 할 수가 없이 감사하였다. 또 자기의 팔자가 잘 되겠 다는 점에 대해서는 꼭 믿어지지도 아니하였으나 그렇다고 전연 안 믿을 수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차차 생각할수록 그것을 믿어지지 아니하는 마음이 삼분이라면 그것을 바라 고 믿어지는 생각이 칠분이나 되었다. 그러한 잘 된다든지 못 된다든지 하는 미래의 일보다, 우선 꽃무늬 있는 비단옷 을 입고 또한 그러한 비단신을 신으면 얼마나 좋을까. 또는 자기가 그렇게 차리고 나선다면 보는 사람들이 자기를 얼마 나 귀여워할 것인가. 또는 자기가 며칠이라도 몸을 가꾼 뒤 에 얼굴에 분이나 바르고 머리를 곱게 빗고 그러한 비단옷 을 입는다면 자기 스스로 거울을 본대도 그다지 남만 못지 아니할 것 같았다. 그렇게 차린 자기가 곧 깜깜한 벽에 비 치는 것 같았다.

순영은 생각을 계속 하였다. 우선 서울 가서 잘 지내다가 차차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가서, 남편도 잘 만나고 호강을 하고 살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렇지 아니하고 자기 집에 있다가는 언제까지든지 지금과 같은 고생을 계속할 것이요, 나중에 시집을 간대야 역시 구차한 집으로 갈 것이요, 남편 될 사람이라야 땔나무꾼에 지나지 못할 것인즉, 그리하느라 면 평생을 고생만 하다가 말 것이요, 호화로운 구석이라고 는 조금도 없을 터인즉, 그것을 비교하여 생각하면 당장이 라도 뛰어 나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할 때에는, 가기 아버지가 계실 때에는 자기가 동리 집에 마을만 가도, 여자라는 것은 함부로 나다 니는 것이 아니라는 꾸지람을 들을 때에 여러 가지로 여자 의 행실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 자기가 아무도 몰래 서울까지 간다면 그것을 잘못하는 일이 아닐까? 또는 송씨 라는 이가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를 따라갔다가 일이 여의 치 못하면 어찌 될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때에는 거기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요, 집으로 도로 올 수도 없는 일인즉 오도가도 못하고 어찌될 것인가?

순영은 여러 가지의 공상으로 미래의 운명을 그려보았다.

행복의 꽃도 그려보고 불행의 잎새도 그려보았으나 다만 진정한 열매만을 그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순영의 공상은 홀연히 광명을 얻어서 앞길이 탄탄한 대로로 환하게 보이다 가 어느덧 침침칠야가 되어서 물러갈 길조차 없어지고, 조 금 있다가는 또 그러한 현상이 뒤집히곤 하였다.

이렇게 공상이 사로잡힌 순영은 아무리 하여도 잠을 잘 수 는 없었다. 그리하여 순영은 불도 켜고 싶고 일어앉고도 싶 고, 마음대로 돌아눕기도 하고, 기침도 나오는 대로 하고 싶 었으나 그것을 마음대로 못하였다. 그것은 옆에 누워 자는 계모가 자기의 잠 안 자는 것을 안다면 무슨 야단이 날는지 모르는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하 려고 하였지마는 잠을 들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조금도 움직 이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요, 게다가 빈대로 물고 모기도 물고 하여서 가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만 오래 누워서 몸이 불편하기도 하였으므로, 주의를 하면 주의를 할수록 움직이 지 아니하면 견딜 수가 없는 일이 생기었다.

"왜 잠을 아니 자고 버스럭거려쌓니?"

하는 계모의 소리는 바늘로 찌르는 듯하였다.

"........."

자지러지게 놀란 순영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왜 대답을 아니해. 음충스럽게? 이때까지 잠을 안자고 버 스럭거리다가 물으니까 말을 않니?"

계모는 무슨 거조나 낼 듯이 벌떡 일어 앉는다.

"물것이 물어서 그래요."

하는 순영도 모른결에 일어 앉았다.

"물 것? 언제는 물것이 없어서 잠을 그렇게 잘잤니? 목이 몰(말)라서 물을 좀 떠오라고 소리소리 질러도 아니 일어나 고 뒤흔들어도 죽어라고 깨지 않던 년이 물것이 있어서 잠 을 못 잔다? 장히 귀골인 년 다 보겠네. 다른 사람은 물 것 이 없어서 잠을 자고 있니? 이년아."

"........"

"이년아, 왜 말을 안해? 무슨 생각을 하느라고 잠을 안잤느 냐 말이야. 기집애년이 청승스럽게 왜 잠을 안 자고 있느냐 말이야. 집안에 무슨 일을 내려구. 집안에 좁쌀낱이나 있는 것, 그것을 깝살리지 못해서 그러니, 왜 그러니? 그러기를.

그렇잖으면 왜 잠을 안자? 사위스럽게. 말 좀 해라, 들어 보자." "........"

"오! 이년이. 너 말 않는 속을 알겠다. 너 어제 밭매러 갔 을 때에 비오는 핑계하고 굴 속에 들어가서 어느 놈을 만난 것이로구나. 그래, 그놈 생각하느라고 오매불망(寤寐不忘) 잠못 이루는구나. 그렇지, 이년아? 바른 대로 대라, 대여."

"........."

"아! 이년아, 그래두 아니 댈 테냐? 한번 맛을 보아야 하겠니?" 하고 어둠 속에서 닥치는 대로 때린다.

훌쩍훌쩍 우는 순영의 모든 공상은 여지없이 깨어졌다.

날이 채 새기도 전에 계모는 일어나서 고콜에 관솔불을 켜 놓고 무엇을 하려는지 수선거린다. 언제든지 늦도록 잠을 자서 순영이 아침밥을 지어 놓고 밥 먹으라고 깨워야 겨우 일어나, 세수도 아니한 채로 밥을 먹는 위인이 전에 없이 일찍 일어나서 서두르는 것을 보고서, 순영은 행여 어젯밤 에 난 독살이 아직 풀리지 아니하여서 자기에게 무슨 거조 를 하려고 그러나 하고, 따라 일어나서 마음을 졸이면서 윗 목 귀퉁이에 얼굴도 들지 못하고 쪼그리고 앉았다.

"계집애가 앉음을 앉고 그게 뭐야? 토깽이 마냥 쪼그리구 앉아서. 어서 나가서 밥이나 지어라. 또 어제 아침처럼 술밥 을 만들어 놓지 말고 축축하게 잘 지어.""

하고, 데리고 들어온 딸을 가볍게 흔들어서 깨우더니, 그래 도 아니 일어나니까 두 팔로 얼싸안아서 어린아이 일으키듯 이 한다. 그래도 기지개를 켜고 도로 드러누우면 또 다시 일으키면서도 조금도 나무라는 기색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러 할수록 도리어 귀여워하는 표정이었다. 순영은 그것을 볼 때에 자기도 친어머니가 있으면 그만큼이나 사랑을 받으려 니 하는 생각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얼른 나가서 밥하라니깐 왜 그러고 앉았니. 무엇을 정신없 이 보고 있어 응?"

하는 계모의 눈은, 한편에 대해서는 사슴의 눈 같았지만 한 편에 대해서는 독사의 눈 같았다. 벌떡 일어서며 눈물 흔적을 가리기 위하여 외면하고 나오는 순영은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터져나오는 울음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아니하고 도로 삼켜 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삼켜도 다 삼켜지지 않는 흐느끼는 소리는 솥 씻는 소리를 따라서 자기도 들을 수가 없을 만큼 가늘게 나왔다.

순영은 밥이 늦다고 꾸지람을 들을까 봐서 부리나케 밥을 짓는다. 밥이 채 익기도 전에,

"밥이 다 됐니?"

쥐어지르는 듯한 말소리가 방 안에서 나온다.

"아직 덜 되었어요."

"무얼 하기에 입때 덜 되어? 속히 하라니까 해롱해롱 눈깔 만 팔고 저 할 것 다하고 있으니까 밥할 새가 있나. 조 맹 추가. 저걸 부려먹느니 개를 부려먹지. 저런 것을 낳아 놓고 도 미역국을 먹었나. 저런 것을 낳아 놓은 에민들 오죽할 리가 있나. 그런 것을 데리고 살다가 나 같은 사람과 살게 되니까 제복에 겨워서 죽었지. 너의 아버진가 그 멍텅구리 말이다. 에구 내 팔자야, 에구 내 팔자야."

하고 제 가슴을 제 손으로 두드리더니,

"밥을 지레라두 퍼 오너라. 어서 먹고 어디 좀 가게. 망건 쓰다 장 파한다고, 네년의 밥 다하기 기다리다가 혼인 구경 터지겠다."

하더니 조금 있다가,

"어서 가져와, 이년아."

하고 악을 쓴다. 순영은 무슨 이유를 말할 수도 없고 더 지체할 수도 없어서 뜸도 아니 든 깡보리밥과 끓지도 아니 한 된장국을 되는 대로 퍼다 놓으니 그것이 엽법할 리가 없다. 밥상을 갖다 놓는 순영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벌벌 떨 면서 조심스럽게 갖다 놓고, 무엇으로 후려 때리지나 아니 할까 하고 계모의 눈치만 보면서 슬금슬금 나오려고 할 때 에,

"이년아, 이게 밥이라구 해가지고 왔니? 보리밥일수록 속이 잘 무르고 구실구실해야지. 또 된장이라는 것은 끓어야 맛 이 있는 것이지. 밥이라는 것은 생보리대로 물이 지르르 흐 르고, 된장은 항아리로 도루 들어가려 하고, 네 눈구멍으로 보아라, 이년아. 이게 보리쌀에다 물 발라 놓은 것이지 밥이냐? 또 이것은 날된장에다 찬물 타 놓은 것이지 된장찌개야? 솜씨가 이렇구두 아가리로 밥이 들어가니?"

하고 계모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가지고 다듬이 방망이 를 밥상 너머로 던져서 때리는 것을 겨우 피하여 나오는 순 영은

"지레 퍼 오라고 하셔서 그랬어요."

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왔는지는 모르지마는, 그 말이 계모 의 귀에까지 들리지는 못하였다.

밥을 먹는둥 마는둥 혼인 구경에 열불이 나서 허둥지둥 나 서는 계모는, 노랑 머리에 기름을 뚝뚝 떨어지게 바르고, 푸 르뎅뎅한 얼굴에 분을 덕지덕지 발랐다. 나쁜 분을 너무 많 이 바른지라 당장에 연독(鉛毒)이 나서 눈이 벌겋게 되었다.

"오늘은 빨래나 모두 해라. 웃방에 벗어 논 옷들 땀에 절어 서 다 썩겠다. 가는 것은 비누로 놀려서 살살 빨아, 또 방망 이로 척척 두들겨서 터뜨려 놓지 말고. 그리고 빨래 갈 적 에 사립문을 밖으로 단단히 잠그고 가. 또 환히 열어 놔 두 었다가 모두 도적맞지 말고. 네게 말해야 쇠귀에 경 읽기지 만 내일 저녁에 와 봐서 잘못만 했어봐라. 너 내 성미 알지.

이년아? 그리고 밭을 매어 응."

하는 계모는 아직도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있는 순영을 향 하여 말하고 밖으로 나간다.

"네."

하고 대답을 하면서 부리나케 달려나와서,

"안녕히 다녀오세요."

하는 순영은 그들의 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계모가 데리고 온 딸이 곱게 입고 그 어머니를 따라가는 것이 부러웠다.

자기도 그렇게 곱게 입고 혼인 구경을 가고 싶었다. 신부는 얼마나 어여쁘고 얼마나 호사를 하였으며, 신랑은 어떻게 생기고 무엇을 입었는가? 또 초례는 어떻게 지내며 음식은 무엇을 차렸는가? 그런 것들이 모두 보고 싶었다. 순영은 그전부터 그 너머 동리에 혼인이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 리하여 행여나 혼인 때에 자기도 가게 될까 하고 기대하였 었다. 그러다가 가지 못하게 된 것은 적지 아니한 낙망이었다. 순영은 그들이 가는 것을 다 보고 싶었으나 계모가 돌 아다보면 또 뭐라고 할는지 몰라서 들어왔다.

순영은 조금 있다가 울타리 구멍으로 그들이 가는 길을 내 다 보았다. 그들은 고개를 넘어가서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 것은 순영이 아까 처럼 자기도 가고 싶어서 그들이 가는 양 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없으면 잠시라도 지기를 펴 고 무엇을 할 양으로 내다본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순영이 다시 내다본 것은 그들이 가는 모양을 보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다 가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었다.

그들이 다 간 것을 보고서 적이 안심한 순영은 설거지와 부엌 쓰레질을 말갛게 하고서 토방의 삿자리 조각 깐 데 앉 아서 조금 쉬었다. 순영은 졸음이 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 하여 졸지 않으려고 눈도 비비고, 정신도 차리고 하였으나 밤새도록 잠 한숨 못 잔데다가 일할 욕심으로 밥을 좀 과히 먹은지라 곤기를 이기지 못하여 사지가 줄어지고 정신이 희 미하였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 쓰러져서 졸 게 되었다. 순영은

"아가, 어서 머리 빗고 새 옷 입어라. 나하고 아버지 따라 서 혼인 지내는 구경 가자."

하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로,

"나는 머리 빗기 싫어, 어머니가 빗겨 줘."

하고 응석을 하였다.

"오냐, 일어나거라. 내가 빗겨 줄게."

하는 어머니의 손에 머리를 빗고 새 옷도 어머니가 입혀 주는 대로 입었다. 그리고 뛰어나와서 같이 구경 가자고 동 무아이들을 불렀다. 그리하여 동무 아이들과 손을 잡고 가 면서 뒤에 오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돌아보면서 웃고 이야기 하였다.

"아, 이년아! 빨래 좀 하랬더니 때도 안 배고 모두 터쳐 놓 기만 하였으니 이게 다 뭐냐?"

하는 계모의 악쓰는 소리에 놀라서 일어난 순영은 온 몸에 땀이 흘렀다. 해를 쳐다보니 아까보다 두어 발이나 더 올라 왔다. 순영은 아무리 꿈일망정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파리하고 근심스럽게 보이는 것이 걱정되었다.

순영은 조금 진정한 뒤에 옷방 구석에 되는 대로 벗어놓은 빨랫감을 정돈하여 가지고 나갔다.

적은 비가 갠 뒤의 시냇물이라 유난히도 맑았다. 물 밑에 깔린 흰모래 우에 듬성듬성 놓여 있는 작고 큰 돌더미에 휘 감겨서, 처녀의 머리카락처럼 흐늘거리는 가는 이끼 털까지 라도 셀 만하였다. 순영은 그 물을 들여다볼 때에 자기의 마음 까지 비치는 듯하였다.

순영은 그렇게 맑은 물에다가 때묻고 땀내 나는 더러운 옷 을 빠는 것이 죄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순영은 마침내 두 발을 물에 잠그고 판판한 돌 위에 앉아서 이것저것을 빨기 에 골몰하여서 모든 생각을 잊어버렸다. 산빛과 구름 그림 자가 방망이 끝에 오르내릴 때에 인간 고락과 세상 만사가 빨래 소리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게 누구야, 순영이 아닌가?"

하는 소리에 놀라서 돌아다보는 순영은 벌떡 일어나서면 서,

"이게 참 누구야? 운옥(雲玉)이가. 이게 웬 일이야?"

"웬 일은 웬 일이야, 순영이가 보고 싶어서 왔지."

"그런데 서울 가서 공부한다더니 언제 내려왔어?"

"공부는 밤낮 하나, 하기 방학에 내려왔지. 순영이도 보고 싶고, 호호호."

하고 운옥은 순영의 손을 잡으면서,

"얼굴이 더 이뻐졌어, 그런데 고생살이 한 티가 좀 있군."

"없는 사람이 그렇지 뭐."

하고 순영은 손바닥으로 자기의 양쪽 볼을 문지른다.

"없는 사람은 다 그런가 뭐, 나는 없는 사람 아닌가. 하지 만 그래도 서울 가서 공부도 하고 그러는데."

운옥은 들고 있는 비단 양산을 기울여서 순영을 가리면서 다시,

"이리 좀 와요, 뜨거운데 이쁜 얼굴 다 그을리지 말고."

순영은 손을 잡아당긴다.

"그런데 웬 호사를 저렇게 했을까?"

순영은 운옥의 옷과 구두와 양산과 핸드백까지라도 너무 사치한 것을 보고서 말하였다.

"호사는 무슨 호사야 이게, 정말 호사한 사람을 보면 기막 히겠네."

하고 자기의 몸을 돌아보더니 다시,

"빨래도 좀 쉬어 가며 해야지. 우리 저 그늘로 갈까?"

하고 운옥은 언덕 위에 있는 소나무를 쳐다본다.

"그럼 그려지."

하는 순영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운옥이 앞을 서고 반 비슷 이 멘 양산을 홰홰 돌리면서 그늘을 향하여 간다. 뒤를 따 라가는 순영은 운옥의 옷 위에 살이 비칠 뿐 아니라 살이 움직이는 작은 흔적까지라도 역력히 옷 위로 나타나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운옥은 양산을 접어서 소나무 옆에서 세 워 놓고 핸드백에서 향내가 물씬물씬 나는 수건을 내어서 홀홀 떨더니 그늘진 반ㄴ석 위에 되는 대로 깔고서 치마를 겉어잡고 그 위에 앉는다. 순영은 이마를 여미고 그 옆에 앉았다. 순영의 눈에 먼저 띈 것은 운옥이 끼고 있는 반지 였다.

"이것은 무슨 반지가 이렇게 좋을까?"

하고 순영은 운옥의 반지를 가리킨다.

"이것?"

하고 조금 주저하다가,

"이건 백금 반지라고도 하고, 금강석 반지라고도 하는데, 백금에다가 금강석을 물린 게야."

"이건 값이 얼마나 될까?"

"값이 그리 많지는 않아, 한 오륙십 원이면 사지."

하는 운옥은 자랑하는 빛을 보인다.

순영은 그것이 은반지에다 인조 보석을 물린 것인지 아닌 지도 모르고, 또는 진짜 백금에다 금강석을 물린 것이라면 값이 오륙십 원만 될 리가 없는 것도 몰랐으나, 하여간 반 지값이 오륙십 원이나 되도록 많다는 데에 놀라고, 또 그것 이 그리 많지 않다는 말에 놀랐다.

"그러면 저런 것은 다 집에서 돈을 보내어서 사겠지."

"집에서 무슨 돈을 보내어?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돈이 다 뭐야."

"그러면 어디서 나서 저런 것을 살까?"

"이것뿐인가, 공부하고 먹고 입고 쓰고 하는 것이 다 집에 서는 한 푼도 안 오지."

순영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여간 궁금하지 아니하였다.

"그럼 말은 거저 일러 주나."

운옥은 애교를 짓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일러 줘?"

"한턱 해야지."

"무슨 턱?"

"아무 턱이든지."

"그래, 이담에 턱을 할 터이니 말해 봐."

"그럴까, 이 일은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지마는, 순영에 게야 말을 아니할 수가 있나."

하고 조금 주저하더니,

"저---- 애인이 해 주는 거야."

하고 생긋이 웃는다.

"애인이?"

하고 순영은 조금 덤덤한 기색이 나타난다.

"애인이라니까, 또 정말 애인인 줄 알지 마라. 저 수양어머 니가 해 주는 거야."

"응."

"어떤 수양어머니가?"

"수양어머니가 뭐야, 우리 수양어머니지."

"수양어머니가 어디 있어?"

"서울 있지, 어디 있어."

"본래 있던 수양어머닌가?"

"어떻게 그런 수양어머니를 얻었을까?"

순영은 이상한 듯이 부러운 듯이 말을 한다.

"서울은 그런 수가 많아요, 나뿐 아니라 수양어머니를 정해 가지고 잘 지내는 사람들이 많단다. 순영이는 얼굴이 이쁘 고 게다가 얌전하니까, 서울 같은 데를 가기만 하면 그 보 다 나은 수양어머니라도 대번에 될 것이다."

하고 순영을 본다.

"얘는, 내가 이쁘긴 뭐가 이쁘냐, 또 뭐 얌전하구? 우리 같 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수양어머니를 얻니? 너는 잘 나가기 도 하고 공부도 있으니까 그런 수양어머니를 얻었지."

하는 순영은 운옥이같이 서울 가서 공부도 하고 그러한 수 양어머니를 만나서 잘 지내는 것은 정말로 자기보다도 동트 게 잘난 사람의 일이어서 자기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일 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니야, 정말이다. 너 같은 애가 서울만 가면 대번에 될 것이다. 서울은 하도 사람이 많이 있단 말이야. 아들도 없고 딸도 없는 과부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돈 가진 과부도 있단 말이야, 그러면 그런 과부들은 마땅만 하면 남의 딸이 라도 수양녀를 정해 가지고, 공부도 시키고 호강도 시키고 나중에는 그 재산까지 물려준다. 그런데 사내들 양자는 좀 처럼 않는다. 난봉 부리고 양(養)가 재산 없앤다구. 또 계집 애라구 아무나 수양녀를 정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너 같은 애는 아주 쉽다. 네가 생각만 있으면 내라도 인권할 자리가 많이 있다. 우선 우리 수양어머니도 마땅한 아이만 있으면 하나 둘이구 더 들이려고 한다. 그런 이들은 재미 보려구 수양딸을 하나만 둘라고도 않는다. 우리 수양어머니 는 재산은 그리 없어도 아는 데가 많고 수단이 좋아서 몇이 라도 기를 만하다. 그래 네가 우리 수양어머니한테 들어가 면 나하고 형제간이 되겠구나. 그러면 좀 좋아. 그렇게 되면 네 마음대로 공부를 하고 싶으면 공부를 하고, 놀고 싶으면 놀고, 마음대로 할 것 아니냐? 나도 들으니까 네가 계모 밑 에서 고생만 한다더구나. 낳은 어머니도 아니고, 계모 밑에 서 고생만 하고 있을 것 뭐 있니, 아버지도 안 계시고 한데.

그리고 이 산골에서 나중이라도 무슨 여망이 있어야지. 그 렇지 않느냐? 생각해 봐라. 여기서 자라서 늙어 죽으면 무 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야. 하루살이처럼 살다가 하루살이처 럼 죽는 초로 인생인데 고생만 해서 뭐 하는 거야."

무슨 인생 철학에 느낀 바가 있는 것처럼 말을 하다가 조 금 중지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를 뒤에 순영을 보면서,

"그러나 내가 순영이를 권하는 것은 아니거든. 말이 났으니 까 그렇다는 이야기지. 그리고 내가 너하고 가깝기도 하고 네 속내를 아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왜 하니? 이런 일도 비밀이라면 비밀인데 그렇지 않으냐?"?

하고 순영의 어깨를 툭 친다.

순영은 무슨 요술에 홀린 것처럼 운옥의 말에 팔려서 자기 의 존재까지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순영은 운옥의 말에 대하여 터럭 끝만큼도 의심을 갖지 아니하였다.

"그래 공부는 무슨 공부를 하니?"

순영은 운옥이 무슨 공부를 하는지 궁금도 하고, 자기도 운옥과 같이 공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물어 보았다. "나? 음악을 배운다."

"음악?"

"그래."

"음악이 뭐냐?"

"음악이라는 것은 소리음(音)자 풍류악(樂)자 음악이다. 그 만하면 뜻을 알겠지."

운옥은 음악도 모르냐는 듯 순영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럼 피리 불고 장구 치고 그러는 것이냐?"

"누가 무당인가, 호호호."

"그럼 뭐야?"

하며 순영도 웃는다.

"음악이라는 것은 서양 음악도 있고 조선 음악도 있고 여 러 가지가 있는데, 피아노니 기타아니 오르간이니 하는 여 러 가지 악기들이 있고 또 성악도 있는데, 나는 특별히 조 선 성악을 배운다. 성악이라는 것은 노래하는 것이야."

"그건 배워서 무얼 하는 거냐?"

하는 순영은 아직도 음악이라는 의미를 분명히 몰랐으나, 자기의 모르는 것을 너무 드러내기가 부끄러워서 음악이 무 엇인 것은 더 묻지 아니하였다.

"음악 배우면 쓰는 데가 많지. 돈도 벌 수가 있고, 지금 세 상에는 돈 버는 것이 이렇다."

하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는 운옥은 어름어름하여서 자 세한 말을 하지 않는다.

"너는 복도 많기도 하다. 공부 잘하고 호강하구, 좀 좋겠니?" 순영은 다시금 부러운 듯이 운옥의 전신을 훑어보았지만.

시선은 반짝반짝하는 반지와 뾰족한 구두에로 오락가락한다. "그런데 우리 수양어머니도 여기를 내려 오셨다."

운옥은 딴 포도를 꺼낸다.

"어디?"

순영은 귀가 번쩍 띄는 듯이 고개를 들고 운옥을 본다.

"지금 우리 집에 계시다."

"그런 이가 무엇하러 이런 산골에를 오셨니? 아마 너하고 같이 온 거로구나?"

"아니야, 같이는 아니구 나보다 며칠 뒤에 오셨다."

하고 운옥은 조금 말을 멈추더니,

"그런데, 너 참 아까두 말했지마는, 서울 가서 공부하고 싶 은 생각 없니?"

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으로 귀를 기울인다. 무어라고 대답을 하였으면 좋을는지 알 수가 없어서, 고래를 숙이고 발 끝에 있는 어린 풀을 만지면서 주저하다가,

"우리 같은 사람이 공부를 어떻게 하겠니? 또 할 생각이 있는들 할 수가 있나."

하고 순영은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래, 내 말을 자세히 할게."

하고 순옥은 조금 다가앉으며 두 무릎을 세우고 침을 삼키 더니,

"그런데, 내가 서울 있을 때에 우리 수양어머니에게 네 말 을 많이 하였다. 사람이 이쁘구두 얌전하고 재주 있다고. 그 랬더니, 우리 수양어머니가 솔깃하여서 그렇게 얌전한 아이 가 있으면 데려다가 공부를 시켰으면 좋겠다고 그러겠지.

그러기에 그러면 한 번 내려가서 보자구 그랬더니, 그럼 그 러자구 해서 이번에 내려왔다. 그런데 엊그제 말이야, 너 저 건너서 밭맬 때 누가 온 이가 없데?"

"서울 있는 송씨라고 하는 이 말이냐?"

"그래, 그이가 우리 수양어머니다. 그이가 네 선을 보러갔 었다. 지기(志氣)도 뜨고, 그래 이틀이나 다녀오더니 아주 칭찬이 대단하더라. 그런데 네가 서울 같은 데로 갈 생각이 적은가 보더라고 그러시겠지. 그런데 너 갈 생각이 없다고 그랬니?"

하고 묻는다.

"간다 안 간다 부러지게는 말을 아니하였다. 하지만 나 같 은 것이 가면 무얼 하겠니."

순영은 겸사에 그칠 분이요, 가지 않는다는 뜻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래 그것이 얌전한 것이 하는 말이야. 뭣한 애들 같으면 그런 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대번에 간다고 야단을 치겠지 만, 설사 갈 생각이 있더라도 진득하게 말을 않는 것이 그 게 얌전한 것이거든. 그러기에 내가 천거를 한 것이야, 내가 너를 천거한 것이 우리 수양어머니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니 라 실로 너를 위해서 한 것이거든. 우리가 몇 번 보지도 못 하고 그렇게 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마는, 이웃 동리서 뻔히 아는 터이요, 나는 너보다 세 살이나 더 먹지 아니했니. 하 니까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마는 나는 너를 친동생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네가 이런 곳에서 계모 슬하 에 고생만 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안되었는지. 그래 서울 같은 데 가서 공부라도 하고 조금 호화롭게 지냈으면 하는 생각으로 너를 천거하고, 또 우리 수양어머니를 여기까지 내려오시게 한 것이다. 그런데 대관절 네 생각이 어떠냐?"

하고 끝마디를 꽉 눌러 묻는다.

"너는 참 고맙기도 하다. 누가 나 같은 사람을 그렇게 생각 해 주겠니. 그래서 그 어른이 내게 오셨던가 보구먼. 누가 알았니. 그런데 그 어른은 그런 말은 꿈에도 아니하고 지나 가다가 왔다고 그러겠지. 그래 나는 그이가 누군가 하고 지 금까지도 생각하는 중인데 인제 자세히 알았다. 참 고맙기 도 하다."

하고 순영은 정작 가고 안가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말이야. 감자밭도 맬 때 매야지 손을 놓치면 못쓰 는 것 아니냐.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일도 그런 것이야.

운수가 닥쳐오면 그대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앙 화를 받는 것이다. 너도 내가 아니면 이런 일을 아무리 청 을 한들 쉽사리 되겠니? 두말 하고 이번에 같이 가도록 해라. 내가 설마 너를 잘못 인도하겠니. 그렇잖으냐 순영아?"

운옥은 순영의 손을 잡더니,

"에구, 손두 이쁘기두 해라. 어쩌면 손이 이렇게 이쁠까?

이런 손을 하얀 분통 같이 하고서 보석 반지나 꼈으면 얼마 나 이쁠까."

하고 자기의 반지를 빼어서 순영의 손가락에 끼워 주더니,

"에구, 이것 좀 보아, 이쁘기도 하지. 얼마나 이쁜가, 이것 좀 보란 말이야."

하고 순영의 손을 들어서 순영의 눈앞에 댄다.

"에구, 빼라 얘, 반지가 더럽는다. 좋으면 뭘하니 개발에 편자지."

순영은 눈부터 웃으면서 손을 가볍게 뿌리친다.

"어디 구두도 신어 볼까?"

하고 운옥이 구두 한짝을 벗어서 순영의 발에 신기려고 하 는 것을 순영은 두 발을 오그려서 치마로 싸고서, 자기 손 으로 반지를 빼어서 운옥의 오른손 복판 손가락에 끼워 주 려 한다.

"아니야 얘, 반지는 이 손가락에 끼는 것이 아니야."

하고 운옥은 자기 손으로 반지를 받아서 왼손 무명지에 끼 고 손을 내밀어서 손가락을 폈다. 오그렸다. 하면서,

"자, 이렇게 끼는 것이야."

하고 순영을 본다. 순영은 운옥의 하얗고 보드라운 손가락 에서 햇볕에 반사되어 눈이 부실 만큼 반짝반짝하는 반지를 보면서 얼굴이 붉어진다. 순영은 반지를 왼손 무명지에 끼 는 것쯤이야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마는, 다만 자기 손에 끼 워진 반지를 운옥에게 돌려보내기 위하여 오른편에 앉은 자 기로서 편리한 대로 운옥의 아무 손가락에나 끼워주려 한 것이었는데 운옥이 마치 자기는 반지를 어느 손가락에 끼는 줄도 몰라서 그런 것처럼 말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불 쾌도 하였다. 그리하여 칠분이나 운옥에게로 쏠리던 마음이 홀연히 샐쭉하다.

천지를 녹이는 듯한 더운 날이건만 두 송이의 꽃 사이에는 입김만도 못한 것은 바람이 서늘하게 지나가는 듯하였다.

별안간 새초롬 하여지는 순영의 기색을 보는 운옥은 자기 의 말이 잘못된 것을 깨달았으면서 큰일을 저지른 듯이 낭 패하였다. 순영은 뾰로통한 입술을 감추려고도 하지 아니하 고 고래를 수그린 채 말이 없다. 운옥도 어떻게 말을 붙여 야 좋을는지 마음은 초조하면서 입은 주저하였다.

"운옥이 거기 있니?"

하는 소리가 그들의 뒤에서 났다. 그들은 둘이 다 놀라면 서 돌아보았다.

"에구, 어머니 오세요."

하고 운옥은 일어서서 몇 걸음 나선다. 순영도 일어서서,

"에구, 오세요?"

하고 두 손을 마주 잡고 읍을 한다.

"순영이 오늘은 빨래를 하는구나. 빨래두 어렵기는 하지마 는 밭매는 것보다는 낮지. 시원한 물에서 하니까 덥기도 덜 덥고. 그러나 허구헌날 일만 하고 어떻게 견디니?"

하고 송씨는 순영을 돌아본다.

"관계찮아요."

순영이는 뾰로통하던 입술이 웃는 입술로 바뀌었다.

"거기 그늘지고 시원해서 좋구나, 나두 좀 앉아 보자."

송씨는 치마를 걷어잡고 반석의 한가운데에 앉는다. 순영 과 운옥도 앉았다. 운옥은 결박지었던 자기를 풀어 놓은 듯 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하여야 순영의 마음을 다시 기쁘게 할까 하는 생각은 풀리지 아니하였다.

"에구, 내 정신 좀 보아. 순영이 준다고 무얼 사 가지고 오 고도 잔소리하느라고 잊어버렸다어. 어쩌면 정신이 이모양 이야. 에구 맙소사."

운옥은 순영과 송씨를 번갈아 보고 웃더니. 핸드백을 열고 서 조그만큼씩 종이로 싼 것을 내어놓더니.

"이것은 수백분이고, 이것은 향수고, 이것은 크림이고......그 런데 이것은 정말 토산이야. 이것은 바늘인데, 이것은 독일 것이야."

운옥은 하나씩 하나씩 순영의 앞으로 내어놓는다. 순영이 대답도 하기 전에,

"아, 너는 그것을 인제 내놓고 있니. 서울서부터 순영에게 무엇을 사다 주겠다고 노래 부르듯이 하고서 사가지고 오더 니, 그것을 인제 내놓고 있어? 이 멍텅구리야."

송씨는 눈으로는 운옥을 흘겨보면서 입으로는 웃는다.

"에구, 나는 정말 멍텅구리가 되었어, 저런 순영이처럼 얌 전하고 똑똑하지 못하구서."

"네가 순영이처럼 되면 값이 얼마게. 틀렸다, 고만둬라 얘."

송씨와 운옥이 말을 주고받고 하는 바람에, 가만히 앉았던 순영은 그들의 말이 끝난 뒤에도 조금 기다리다가,

"그런데 웬 걸 그렇게 사왔니?"

하는 말밖에는 고맙다든지 미안하다든지, 그 외에 교제적 인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운옥이가 순영이라면 깜빡 죽는단다. 서울서도 앉으면 네 이야기를 한단다. 이쁘고 야전하고 똑똑하다고. 그래 여기 내려올 때에 제 집에 무얼 사간다 소리는 아니하여도, 순영 이를 무엇을 사다 줘야 하겠는데 하고, 노래 부르듯이 하고 서 사온 것이란다.

송씨의 말이 끝나자,

"에구, 또 잊어버렸어."

하는 운옥은 다시 핸드백 속에서 경성 각처 명소의 그림 엽서를 내어놓고, 한강철교니 남대문이니 남산이니 경희루 니, 기타 여러 가지를 차례로 말하고 각기 거기 대한 구경 거리를 말하였다.

화장품과 바늘을 대강대강 훑어보고 있던 순영은 그것을 젖혀 놓고 그림 엽서를 보며 그 설명을 듣기에 정신이 팔리 었다. 그리하여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그런 곳을 구경하고 싶을 만큼 마음이 쏠렸다.

"그런데, 너 참, 나하고 같이 서울 가서 이런 데 구경도 하 고 공부도 하고 그러면 좋지 않겠니? 같이 가자꾸나."

하는 운옥의 말을 위시하여 송씨와 같이 받고 차기로 순영 을 졸랐다.

순영은 울 듯도 하고 웃을 듯도 한 가슴을 졸이다가, 마침 내 무엇보다도 무서운 게모의 슬하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쾌히 승낙하였다. 청명하던 일기가 얇은 구름이 끼이는 듯하였다.

"그런데 누구에게든지 이런 말을 내어서는 안 된다. 내가 너를 데려가는 것은 평생을 길러서 재미를 보자는 것인데, 중간에 말썽이 되어 너의 계모라도 알고서 이러니 저러니 하게되면 쓰겠니? 그렇게 되면 첫째 너의 일이 방해되지 않 겠니. 너의 계모가 지금은 너를 미워하지만 네가 없어서 아 쉽게 되면 너를 찾으러 들 것이다. 그러니 당초에 이런 소 리를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이 운옥이네 집에서도 아무도 모른다. 너는 소견이 있어서 어련할 바가 아니지마는 구운 게도 발을 떼고 먹으랬다고, 행여나 하고 이르는 말이다."

하고 송씨는 순영에게 신신부탁을 한다.

"그렇지요. 그런 말을 누구에게든지 할 리가 있어요? 우선 제가 부끄러워서도 말을 할 수가 없겠지요."

하고 순영은 행여 누가 근처에서 말을 듣지 않나 하고 사 방을 둘러본다.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가려면 속히 하야지. 공연히 천추 하다가 세상 일이란 알 수가 있니? 하니까 속히 가야지."

하는 송씨의 말에 운옥이,

"암 그렇지요. 순영이 일도 그렇고 어머니도 어서어서 올라 가 보셔야지요, 볼일이 바쁘신데. 또 저도 그렇고."

하고 거든다. 순영은,

"암, 그렇지."

하고 대답을 하고서 자기의 떠날 만한 기회를 생각하여 보 았다. 아무리 하여도 계모가 집에 있을 때에는 떠나기가 어 려울 것 같았다. 계모가 혼인 구경을 가면서 내일 저녁에 온다고 하였은즉, 그날 저녁이나 이튿날 새벽이 제일 좋은 기회일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런 사연을 말하니까, 송씨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내일 새벽에 떠나기로 하 였다. 순영은 그날 저녁에 운옥이네 집에가서 자고서 내일 떠나는 것이 좋을까 하고 말해 보았으나, 운옥이네 집에서 아는 것도 재미없다고 하여서 동트기 전에 송씨와 운옥이 순영이네 집 근처로 와서 운옥이만이 순영이네 집에 들어가 서 같이 나오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송씨와 운옥은거기에 오래 있는 것이 재미 없다고 하여서, 순영에게 당부를 몇 번이나 하고서 가버렸다.

빨래터에 가서 앉은 순영은 빨랫방망이가 손에 잡히지 아 니하였다. 자기의 손은 벌써 호밋자루나 빨랫방망이를 잡을 손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자기의 손가락에는 며칠 안 되 어서 금반지가 끼워질 것을 상상하였다. 반지를 끼게 된다 면 얼마나 큰 것을 끼게 될까하고, 끄나불로 왼손의 무명지 를 둘러서 겨냥하여 보았다. 그러나 끄나풀의 겨냥은 잰 대 로 있지 아니하고 실쭉샐쭉하여서 분명치 아니하였다. 그리 하여 빳빳한 풀 잎사귀를 뜯어다가 겨냥을 하여 볼까 하다 가 그만 두었다. 순영은 두 발을 물에다 담그고 들여다보았다. 맨발로만 다녀서 넓적하고 굳어져서 구두를 신으면 죄 어서 아플 것만 같았다. 운옥의 구두를 볼 때에 뒷굽이 너 무 높아서 불편할 것같이 생각되던 것이라, 발꿈치를 들고 서 몇 발자국을 편할 것 같이 생각되던 것이라, 발꿈치를 들고서 몇 발자국을 걸어보다가 까딱했더면 넘어질 뻔하고 서 구두 신는 것은 위태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구 두가 불편하면 비단신을 신으리라는 생각을 할 때에는 웃는 모습이 맑은 물에 비쳤지마는, 흘러가는 물결인지라 어름거 려서 분명히 보이지는 아니하였다. 가고 가는 흐르는 물이 아무리 길다 할지라도 순영의 희망보다는 길지 못하였다.

순영은 다시 빨랫방망이를 번쩍번쩍 들어서 힘있게 척척빨 았다. 자기의 손으로 빨래하기가 마지막이라면 한 번 잘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자기의 옷은 젖혀놓고 계모의 옷을 빨 았다. 아무리 심하게 굴던 계모의 옷일지라도 자기의 손으 로 다시 하지 못할 바에는 정성껏 잘해 주고 싶었다. 그리 고 자기의 옷은 잘 빨았자 소용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 옷을 다시 입을 리도 없고 또 가지고 있을 리도 없는 까 닭이었다. 계모의 옷을 빨고 헹구고 빨로 하였다. 빨래하는 땟국이 물을 따라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 물이 한강으로 가는 것을 생각하였다. 자기도 가랑잎으로라도 배를 만들어 타고 둥실 둥실 떠서 서울로 가고 싶었다.

해는 석양이 되었다. 모래 강변에 늘어놓은 빨래는 깨끗하 게 마전되었다. 걷어 가지고 오려고 할 때에 눈을 들어서 산천을 둘러보았다. 한 가지의 나무와 한 덩이의 돌까지도 모두가 낯익은 것이었다. 해마다 해마다 자기 손으로 매가 꾸던 밭, 어제까지도 자기의 손으로 매던 밭은 고요히 누워 서 자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한 번 가서 다시 둘러보고 흙이라도 만져보고 싶었다. 매다가 남은 것은 누가 맬 것인가. 가꾸어 놓은 감자는 누가 캘 것 인가. 돌아오다가 세 번이나 돌아보았다. 자기 동리에서는 저녁 연기가 드문드문 난다. 또는 보리방아 찧는 소리도 난다. 동무 아이들은 물을 긷느라고 무슨 이야기들을 속삭이 면서 오락가락한다.

"빨래 해 가지고 오니?"

"빨래두 많이두 해 가지고 온다."

"지금 가서 저녁 하려면 늦었구나."

"날마다 밭매구 빨래하구 어렵겠구나,?

동무 아이들은 다투어서 순영에게 인사를 한다. 순영은 빙 긋빙긋 웃으면서 대답을 하였다. 순영은 그 아이들이 불쌍 하게 보였다. 자기가 나중에 잘 된다면 그 아이들을 도와라 도 주고 싶었다.

"순영이는 불쌍한 아이다. 날마다 밭매고 빨래하고 바느질 하고 밥해 먹고, 잠시도 놀 사이가 없다. 그래도 저의 어머 니한테 핀잔만 듣고 매만 맞는다. 그래두 원체 얌전하니까 그 구듭을 다 치르지."

동무 아이들끼리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순영의 귀에 들린다. 순영은 그 아이들이 고마웠다. 그러나 마음이 섬뜩하면 서 자기 집 사립문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잠근 것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그것은 서울 갈 생각 외에 아무 다른 생각 없이 돌아도던 순영이가 동무 아이들 말을 듣고서 홀연히 계모에 대한 생각이 났다. 그리하여 계 모가 내일 저녁때에 온다고는 하였으나, 혹은 그 사이에 오 지나 아니하였나 하고, 사립문이 열리고 열리지 아니한 것 을 바라본 것이었다.

순영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텅 빈 집이 우뚝 선 것이 마음 에 휘휘하였다. 그리하여 집 안의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사나운 계모라도 집 안에 있다가 자기가 오 는 것을 아는 체하는 것이 좋았다는 생각은 나지 아니하였다. 순영은 보리쌀을 씻어서 밥을 지을까 하다가 자기 혼자 먹자고 새로 지을 것이 없어서, 아침에 먹다 남은 찬밥 한 덩이를 찬물에 놓아 뚝뚝 꺼서 날된장으로 달게 먹었다.

순영은 모든 것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집안 쓰레질도 새로 하고 부엌도 깨끗이 정돈하고 방안도 정리하였다. 다만 자 기의 친어머니가 시집 올 때에 가지고 온 것이라고 아끼다 가 자기에게 물려 준 비단저고리 하나, 명주치마 한 채, 새 버선 한 켤레, 그리고 아버지의 사진 한 장, 그것만은 기념 으로 가지고 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것이라곤 빤 옷 한 벌을 갈아 입을 이외에 자기 손으로 만들어 두었던 골무 몇 개, 바늘, 저고리 몇 개, 조각보 하나, 그런 것들 몇 가지 뿐이었다. 순영의 봇짐은 간단하고 조그마하였다.

등잔불은 희미하였지만 순영의 정신은 깨끗하였다. 밤은 고요하였지만 순영의 마음은 설레었다. 미래를 생각할 때에 는 웃음이 났지마는 과거를 생각할 때에는 눈물이 흘렀다.

기쁨이 설움을 이기는가 하면, 웃음의 흔적이 마르지 아니 하고, 설움이 기쁨을 이기는가 하면, 웃음의 자취가 걷히지 아니한다. 기쁨과 설움이 마주칠 때에는 순영의 어린 가슴 은 폭탄이 없어도 폭발될 듯하였다. 순영은 정신을 차리려 면 졸음이 오는 듯하더니 잠을 좀 자 보려면 눈이 반반하였다. 순영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웃방 구석에 쥐구멍을 막아 놓은 부러진 벼루 토막을 꺼내다가 먼지를 불고 자리끼로 떠다놓은 물을 부었다. 그리고 석유 궤짝으로 만든 자기의 손궤에서 비뚤어지게 닳은 먹 조각과, 대는 깨어지고 촉만 남은 붓을 찾아내었다. 그러나 종이는 아무리 찾아도 없어 서 자기 아버지가 사초(私草)를 베끼다가 남은 책장 한 장을 뜯었다.

순영은 먹을 갈아 놓고 어설픈 손으로 붓촉을 잡고서 눈을 깜빡거리며 앉았다. 순영은 자기가 아무 말도 없이 가면 집 안에 걱정을 시킬 뿐 아니라 동리까지도 소동이 날 것이요, 그리하여 사방으로 찾으러 나서면 서울까지도 오게 될는지 모르는 일이어서 도리어 후려(後慮)가 될 것 같았다. 그리하 여 차라리 가는 것을 집안에 알리는 것이 좋을 듯하여서 무 엇을 적어 두려 하였으나 무어라고 써야 좋을는지 생각이 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붓방아만 찧고 앉았다가 갈아 놓은 먹이 다 말라서 다시 물을 많이 쳐서 갈았다.

「계모 어머님 전 상서 어머니, 저는 가요. 저는 못 생간 탓으로 어머니에게 걱정 을 너무 많이 시켜서 미안합니다. 저는 못난 것으로써 어머 니에게 매를 맞는다든지, 꾸지람을 듣는다든지 원통한 마음 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 때문에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와 친 어머니까지 욕을 들으시게 하는 것은, 아무리 못 생긴 소견 에라도 뼈가 저리도록 원통합니다. 그리고 제가 집에 있으 면 어머니에게 걱정만 더 시킬 것이요, 저의 신세도 보잘것 없이 되겠사오니, 차라리 제가 어디로든지 나가면 저는 죽 든지 살든지 할지라도 어머니께는 걱정을 시키지 아니하겠 사오니, 그리 아시고 찾지 마시옵소서, 안녕히 기셔요, 순영 상서. 」

순영은 마침내 이렇게 써놓고 몇 번이나 읽어 보았다. 그 리고 그것을 봉하려고 하다가 다시 생각하니 그대로 펴놓아 두는 것이 쉽게 누에 띌 듯하여서 그대로 아랫목 방바닥에 반듯이 펴놓았다가, 그것이 바람에 날아갈는지도 몰라서 실 패와 가위로 양쪽을 눌러 놓았다.

순영은 새벽이 오기를 고대하였으나 밤은 용이하게 가지않 는다. 평일에는 종일 일을 하고서 곤하게 자다가 일찍이 일 어나라면, 너무도 고단하여서 밤이 열이라도 잠이 나쁠 듯 이 생각되었는데, 날이 새기를 기다릴 때에는 밤이 가지 않 는 것은 가엾은 순영에게는 밤조차 야속한 듯하였다. 순영 은 귓가에 날아가는 파리 소리를 닭우는 소리로 들었다면 창에 비친 달빛을 새는 빛으로 보았다. 사립문을 똑똑 두드 리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으나 귀를 기울이고 다시 들으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은 우주의 대자연은 순영에게 있어서 하나도 고통의 자료가 아닌 것이 없었다.

"꼬끼오-----?

하고 길게 빼어서 우는 이웃집 닭의 소리가 났다. 순영은 반가왔다. 그러나 또한 놀랐다. 이것도 다른 소리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으나 다시 다른 닭의 우는 소리가 들린다. 순 영은 우는 닭이 고마웠다. 그러나 뒤를 이어서 온 동리의 뭇 닭들이 홰를 치고 요란스럽게 우는 때에는 도리어 그것 이 괴로웠다. 그것은 너무 시끄럽게 우는 닭소리에 이웃 사 람이 깨게 되면 자기가 나가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얌전스런 염려였다.

순영은 다 싸놓은 보따리를 다시 매만졌다. 그리고 들어 보았다. 일어설까 말까 하다가 다시 생각하니, 첫 닭이 온다 고 그것이 곧 새벽은 아니었다. 다시 주저앉은 순영은 깜박 하였다. 사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또 두드 린다. 순영은 운옥이 있을 줄 번연히 알면서도 혹은 계모가 온 것이 아닌가 하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순영은 마당에까 지 나왔으나 선뜻 사립문을 열지 못하였다.

"문 열어라."

하는 소리가 모기 소리만큼 들린다.

"운옥이냐?"

하고 순영은 자기도 못 들을 만큼 말을 하고서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벗긴다. 그들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다른 사람들 을 수는 없었다.

순영은 방으로 들어가서 불을 끄고 보따리를 가지고 나왔다. 마당에 서서 안방과 부엌 쪽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와 서 사립문을 밖으로 잠갔다. 그리고 발길을 돌려놓을 때에 수건으로 더운 눈물을 씻었다. 나오다가 몇 번이나 돌아보 았다. 서산에 걸린 달은 다지지 아니하였는데, 세 사람의 발 자취 소리를 들었는지 어디서 개가 짖는다.

그들은 영동(嶺東)으로 가서 배를 타고 원산(元山)을 거쳐 서 서울로 가기로 하였다. 영동이란 것은 영서(嶺西)를 상대 로 된 명사인데, 천하의 성산(聖山)으로 유명한 백두산의 종 맥(宗脈)이 남으로 떨어져서, 유명한 것으로는 마천령(摩天 嶺) ? 설봉산(雪峰山)을 거쳐서 만고 명산 금강산이 되고, 설악산으로 오대산(五臺山)으로 태백산 ? 지리산(智異山)으 로 완완(緩緩) 삼천여 리를 뻗친 산중에서, 강원도에 이르러 서는 그 산맥의 서쪽을 영서라 하고 동쪽을 영동이라 하는 데, 영서는 순전한 산협 지대요 영동은 전부가 해변이어서 지리상으로 정반대가 되는 고로, 영서에서 생장한 사람과 영동에서 생장한 사람은 그들의 생활 양식과 풍속 ? 습관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우주관 ? 인생관까지도 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그 지대에서만 생장하여서 다른 곳 을 널리 보지 못한 여자로서는 더욱 그러한 것이었다.

순영이 집을 나온 뒤에 제 일차로 큰 충동을 받은 것은 바 다를 본 것이었다. 순영은 무서운 산골에서 성장하여서 세 상에는 육지와 산만 있는 줄 알고 물이라면 가재나 잡고 빨 래나 하는 시냇물만을 보았으며, 하늘도 조그마한 산골 하 늘만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다가 가이 없는 망망 대해를 처음으로 보게 된 때에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순영은 바다끝을 보려고 하였으나 눈이 자라지 못하였다. 다만 바 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을 볼 수는 있었다. 하늘도 바다, 하 늘은 산골 하늘보다 무척 넓었다. 바다가 하늘인지 하늘이 바다인지 분간할 수 조차 없었다. 바다가 아래 있는 하늘 같기도 하고, 하늘이 위에 있는 바다 같기도 하였다. 만경창 파에 수가 없는 크고 작은 배들이 오락가락하는 것이라든 지, 산 같은 큰 물결이 땅덩어리를 부술 듯이 바닷가로 몰 려오는 것이라든지 도저히 무엇이라고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울타리 가지에 고기 잡은 그물들을 늘어놓 은 것이라든지, 여자들이 펄펄 뛰는 고기 함지를 이고서 바 쁜 걸음으로 다니는 것이라든지, 그러한 모든 것을 보게 되 는 순영은 완연히 이 세상을 떠나서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순영은 황홀하고 덩둘하여서 자기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하여 사람은 말고 조그마한 새나 벌레가 자기 에게 무엇을 요구한다든지, 혹은 자기를 배척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저항할 만한 용기가 없을 듯하였다. 자기가 이 세상 에 나와서 열네 살이 되도록 자기의 생각으로 안다 모른다, 옳다 그르다, 좋다 궂다 하는 등의 소위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지극히 적고 좁았던 것을 자연히 느끼게 되었다. 그리 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위대한 실재(實在)인데 자기만이 지극히 작은 꿈인 듯하였다.

" 이게 어디냐?"

하는 순영은 처음에는 바다의 경색(景色)이나 어촌의 풍물 이나 기타 모든 것을 처음 볼 뿐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 을 만큼 엄청나게 황홀하여서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다만 덩둘할 뿐이었으나, 조금 진정이 된 뒤에는 무엇을 알고 싶 었다. 그리하여 송씨에게 물어 볼까 하다가 구식 늙은이보 다 학교 공부를 하는 운옥이 나을 듯하여서 운옥에게 물었다. "예가 대포(大浦)다."

"대포가 어디 땅이냐?"

순영은 자기의 집에서 퍽 멀리 온 듯싶을 분 아니라. 모든 것이 딴 세상 같으므로 거기는 강원도 땅이 아닐 뿐 아니라 혹은 조선 땅이 아닐는지도 몰랐다.

"양양(襄陽) 땅이다."

"양양은 어딜까?"

"양양도 강원도 땅이지."

"그래, 이것도 강원도 땅이야?"

하고 순영은 귀에 익은 강원도 땅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안 심이 되는 듯하였다.

"저렇게 많은 물이 어디서 나올까........"

순영은 계속하여 묻는다.

"나오기는 어디서 나와, 본래부터 있는 것이지."

"본래라도 어디서든지 나왔기에 있지, 안 나온 것이 어떻게 있니?"

"아니야 이애, 저렇게 많은 물이 어디서 나오겠니? 저절로 생긴 것이지."

그들의 문답을 심상하였으나 우연히도 수많은 학자들이 아 직까지 분명히 해결하지 못한 큰 문제에 저촉하였다.

"그런데, 이런 데 사는 사람들은 암만 가물어도 농사짓기가 걱정이 없겠지?"

"왜?"

"바닷물이 저렇게 많은데 무슨 걱정이야."

" 호호, 바닷물로 농사짓는 줄 아니?"

" 그럼 왜 못짓니? 물은 마찬가진데......"

"바닷물은 짜서 먹도 못하고 농사도 못 짓는단다. 이 바보야." 하고 운옥은 송씨를 돌아보며 웃는다.

"바닷물이 짜?"

하고 순영은 물이 짜다는 것은 용이하게 믿어지지 아니하 였다.

"그럼 짜지 않구. 너 정말 바닷물이 짠 것을 모르는구나.

정말 바보로구나."

운옥은 이상한 눈으로 순영을 본다.

"정말이냐?"

하고 순영은 앉았던 바윗돌에서 한층 내려가서 한손으로 바위를 붙들고 엎드려서 손가락으로 바닷물을 찍어서 맛보 더니, 입맛을 다시고 조금 찡그리면서,

"참 짜구나."

하더니 한 번 더 찍어서 맛보고 일어나서 앉았던 자리로 올라가, 운옥과 송씨를 번갈아 보면서

"참 짜, 어째 그렇게 짤까?"

하고 얼굴을 다시 찡그린다. 운옥은 손뼉을 치면서 웃는다.

송씨도 웃는다.

"그러기에 사람이라는 것은 박람(博覽)을 해야 하는 것이 야, 뒷간 쥐처럼 좁은 구석에 들어만 엎드렸으면 못 쓰는 게야."

하고 송씨는 순영을 보고 다시 웃는다. 순영도 웃었다.

"그런데 다른 물은 그렇지 않은데 바닷물은 어째서 짤까?

순영은 운옥에게 묻는다.

"그 애가 별것을 다 묻네. 옛날부터 짜니까 짜지 물을 것이 무엇 있니?"

하고 운옥은 다시 송씨를 보면서

"어머니, 그렇지요. 바닷물이 옛날부터 짜니까 짜지요?"

하고 자기의 대답을 여물리기 위하여 묻는다.

"바닷물은 으레 짠 법이다. 그런데 옛날에 어떤 부자가 바 닷가에다 소금을 많이 싸놓았다가 장마에 떠내려 보냈는가 보더라. 그랬는지, 무슨 수가 있기에 물이 그렇게 짜지."

하고 송씨는 깊은 이치나 발견한 긋이 정중한 태도로 말한다. "참 그랬나 봐. 소금이 들어갔든지 무슨 수가 있기에 짜지, 공연히야 짤 리가 있나. 참 어머니 말씀이 옳아."

운옥은 송씨의 말을 쾌히 승낙한다. 순영은 그 말을 부정 할 수도 없으나 부자가 아무리 소금을 많이 쌓아 놓았기로, 그 소금이 들어가서 저렇게 많은 바닷물이 짜게 될 수가 있 을까 하는 것이 조금 의심스러웠으나 다시는 묻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배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구경을 나온 것이었다.

순영은 배를 타고 간다는 말을 들었으나 어떤 배를 타게 될는지 몰랐다. 순영은 자기 또래가 될락말락한 작은 아이 들이 마음대로 배를 저어서 다니는 것이 신기하게도 보였으 나, 작은 배가 뒤뚱거려서 금방에 엎어질 듯이 보이는 것이 마음이 조마조마할 만큼 위태하여 보였다. 자기도 만일 저 런 배를 타게 된다면 얼마나 위태할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졸이었다.

그들은 다시 모래사장으로 내려갔다. 순영은 모래 위에 밀 려왔다. 밀려서 갔다. 하면서 찰싹찰싹 소리를 내는 바닷물 이 어여뻤다. 그리하여 손도 씻고 발도 씻고 하였다. 모래를 파서 샘도 만들고 모래를 모아서 메도 만들었으나 바닷물이 그것을 지워 버리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리하여 또 하고 또 하였으나 나중에는 순영이 지고 말았다. 순영은 아까까지도 무섭고 엄청나서 바로 보기도 겁이 나던 바닷물이, 그 사이 에 친하여 져서 온 바닷물을 노리개처럼 가지고 장난하고 싶었다. 대자연이 가리는 것이 없어 누구라도 친할 수가 있 는 것이라면 여자는 마음이 부드러워서 어디든지 정들기 쉬 운 것이었다.

"저기 배가 온다."

하고 운옥은 손으로 먼 바다를 가리킨다.

"배가 와!"

하고 순영은 일어서서 운옥이 가리키는 쪽을 보았으나, 배 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어디 오니? 나는 잘 보이지 아니하였다."

하고 순영은 손을 이마에 대고 눈에 힘을 주어 본다.

"저기 저게 아니냐, 내 손가락 끝을 보아. 저 가무스름하고 연기 나는 것이 배 아니야?"

"오 저기 저것, 연기 나는 것?"

"그래."

"그게 배냐?"

"그게 배지 뭐냐."

"응, 그게 배야?"

순영은 처음부터 그것을 못 본 것은 아니나 그것이 배인지 아닌지를 몰랐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배가 그러한 것인지 를 몰랐던 것이다. 배는 차차 오도록 크게 보인다. 얼마 뒤 에 우렁찬 소리를 지르면서 물결을 헤치고 들어오는 것이, 마치 무슨 괴물이 성을 내고 달려드는 것 같았다. 순영은 이상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조그마한 아이들이 혼자 서 노를 저어서 뒤뚱거리며 다니는 작은 배에 비교하면 어 디로 보든지 같은 배라고 할 수가 없었다. 소리는 어디서 나며 연기는 무슨 일로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다만 이상할 뿐이었다. 먼데서는 사람들이 달음질을 치고 부두에는 사람 들이 나서기 시작한다. 그들도 차차 부두를 향하여 걸었다.

배는 아까보다도 더 큰 소리를 지르면서 스르르 밀더니 닻 주는 소리가 나면서 우뚝 선다. 작은 배들은 분주하게 왔다 갔다하면서 사람과 짐을 실어들이기도 하고 실어내기도 한다. 그것을 보는 순영은 작은 배들은 큰 배에 무엇을 실어 들이고 실어내기 위하여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도 배에 올랐다. 순영은 배에 오르자마자 먼저 소리는 어디서 나며 연기는 무슨 연기인지 알아보려 하였으나, 여 기 저기 기웃거리다가 굴뚝만을 쳐다볼 따름이요 뭐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을 보았으나 다만 그 규모 가 크고 장식이 화려하고 설비가 복잡한 데에 입이 벌어질 뿐이요, 그것들을 알아보기는 고사하고 자기의 정신조차 차 릴 수가 없었다. 자리를 잡으려고 삼등 안에 들어가 보니 많은 사람들이 남녀 노소 없이 가로 세로 누워 있기도 하고 앉았기도 하고, 왔다갔다하기도 하는데, 자는 사람, 술이나 과자를 먹는 사람, 노래 부르는 사람, 이야기하는 사람 등등 형형 색색이고, 곳간에는 모든 물화가 산같이 쌓여 있다. 순 영이 보기엔 이것이 한 배가 아니라 별로이 딴 세계가 전개 된 것같았다.

순영은 갑판에 나와서 구경하였다. 사람과 짐을 실어들이 는 종선은 마지막으로 왔다가 가는 모양이다. 부두에는 사 람들이 희소하고, 길로 오고가는 사람들은 개미 만하게 보 인다. 멀리 보이는 설악산은 자기를 보는 것 같았다. 괴롭고 악착한 이 세상을 떠나서 웃음만이 있고 눈물 없는 이상한 나라로 가는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오고가는 사람들이 다 괴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 배에서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까지 다 괴로운 데로 가는 것 같았다.

그 배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오직 자기만이 특별히 좋은 곳 으로 가는 것 같았다. 순영은 다시 머리를 돌이켜서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 바다는 얼마나 멀까? 저 바다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 서울도 저 바다를 건너가야 있겠지.............."

하고 소리 없이 말을 하는 순영은 별안간에 정신이 아찔한 듯하더니,

"나는 지금 어디로 가나? 저 바다를 어떻게 건너가나?"

하는 생각이 났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바다는 의연히 망 망하다.

"뚜우."

하는 기적 소리는 떠난다는 신호였다. 그러자 닻 감는 소 리가 덜컹덜컹 나면서 배가 스스로 돌기 시작한다. 순영은 놀라서 자리로 들어갔다. 배는 간다.

기적 소리가 나자 배는 멈추었다. 선객들은 내릴 준비를 한다. 밤새도록 배멀미에 쪼들린 순영은 간신히 몸을 추고 일어나서 송씨와 운옥을 따라서 갑판으로 나갔다. 아침 햇 빛은 원산 항구를 정면으로 비췄다. 유리창과 함석지붕에 반사되는 빛은 멀리 보기에도 눈이 부셨다. 기적 소리를 듣 고 배를 바라보면서 부두로 몰려 오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그렇게도 급한지 줄달음을 친다. 바다에서 일주야를 졸경(卒 更)을 치른 순영은 육지를 보기만 하여도 천당같이 생각되 었다. 그리하여 일각이 바쁘게 그 지옥 같은 배를 떠나서 육지로 내려가고 싶었다. 순영의 마음은 배를 탈 때의 생각 과는 정반대로 뒤집혔다. 그리하여 세상에 발을 내어 디디 는 첫 경험으로서 꿈같은 달콤한 환상이 하룻밤 사이에 쓰 디쓴 현실로 변하였다.

"여기가 어디냐?"

하고 운옥이보고 묻는 순영은 배가 거기까지 오는 동안에 여러 포구에 들른 것을 아는지라, 거기에서도 다른 사람들 만 내리고 자기 일행은 다시 그 배를 타고 가게 되지 않는 가 하는 생각으로 근심스럽게 말하였다.

"여기가 원산이다."

하는 운옥도 병을 앓고 난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하고 풀기 가 하나도 없이 대답한다.

"그럼 여기서 내리니?"

"그래, 여기서 내려서 기차를 타고 간다."

순영은 우선 거기서 내린다는 것은 반가웠으나, 다시 기차 를 탄다 하니 기차 타는 것은 또 배와 같이 멀미를 하게 되 는 것이 아닌가 하여서 새로 걱정이 되었다.

"기차는 물로 가는 것이 아니지?"

하고 묻는 순영의 말에

"기차가 왜 물로 가니, 기차는 철로로 간다."

하고 운옥은 괴로운 웃음을 웃는다.

"그럼 기차는 배처럼 멀미는 하지 않니?"

"기차는 배 같진 않아도 기차 멀미도 하는 수가 있다."

운옥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기 가는 저게 기차다."

한다. 운옥이 가리키는 대로 바라보는 순영은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큰 뱀처럼 굼실거리고 빠르게 가는 기차를 보았다. 그것을 보는 순영은 기차가 사람이 운전하여서 가는 것 이 아니라, 그것이 살아서 제 힘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기차는 발이 어떻게 생겼기에 저렇게 싸게 가니?"

하는 순영은 기차에 발이 있는 것을 묻지 아니하여도 알 수 가 있으나, 다만 그 발이 몇이나 되며 또는 어떻게 생겼 는지 의문이었다.

"기차가 무슨 발이 있니? 기계로 다니는 것이지."

하고 운옥은 웃는다. 송씨도 웃는다. 옆에서 듣는 사람들도 웃는다. 순영은 부끄러웠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돌아 섰다.

종선들은 선객을 실으러 들어온다. 선객들은 서로 다투어 먼저 가려 한다. 순영이 일행은 송씨가 앞에 서고 그 다음 에 운옥이 서고 맨 뒤에 순영이 섰다. 승강하는 사다리로 내려가서 종선으로 건너가려고 할 때에, 종선은 물결에 밀 려서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아니하고 밀치락달치락 하여서 장 정 이외의 노약(老弱)이나 부녀자들은 사공의 붙드는 힘이 아니면 옮겨 디디기가 어려웠다. 송씨와 운옥은 간신히 넘 어가고 순영이 넘어가려고 하다가 발을 잘못 디뎌서 물에 떨어졌다. 여러 사람들이 소동을 하였으나 남의 일이라 생 명을 내어놓고 달려들어가서 건지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송씨와 운옥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애걸을 하였으나, 원체가 그들의 힘으로는 구원할 도리가 없었다. 순영은 두어 번 솟 아오르다가 물결에 밀려서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건져낼 여망이 없는 줄로 생 각하여서 절망하는 형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기선 갑판의 난간으로부터 나는 듯이 바닷 물에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었다. 보는 사람들은 또 사람이 빠지는 줄 알고,

"앗!"

소리를 치면서 대소동을 일으킨다.

조금 있다가 그 사람은 순영을 건져 가지고 솟더니, 한 손 으로 순영을 잡고 한 손으로 헤엄을 쳐서 종선으로 나온다.

사방에서는 박수하는 소리가 우레같이 일어난다. 순영은 다 시 기선으로 울려다가 응급 치료를 한 결과 빠진지가 그다 지 오래지 않은지라, 성적이 양호하여서 당장에 의식을 회 복하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은 죽게 되었던 순영이 구원을 받아서 다시 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자 기의 생명을 무릅쓰고 바다로 뛰어들어가서 알지도 못하는 순영을 건져낸 그 사람의 용감하고 의협한 것을 더욱 탄복 하였다. 그 사람은 스무 살이 될락말락하게 보이는 청년으 로, 신체가 그리 건강하지도 못하고 의지가 굳세어 보이지 도 아니하였다. 그러나 눈에 영채가 도는 듯하고 표정과 거 동이 날렵하여서 재주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 사 람이 옷을 벗고 샅바만 찬 것으로 보아서, 빠진 사람을 구 원하기 위하여 단순한 의협심으로 모르는 결에 뛰어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준비할 여유가 있었던 것을 알 수 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빠진 사람을 구하더라도 물에 들 어가면서 옷 벗을 여가를 두었다고 그것을 야심스럽게 캘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의 동정은, 죽게 되었다 가 살아나온 순영에게보다 순영을 건져낸 그 청년에게로 집 중되었다.

"그 사람 참 용감한 청년인데."

"용감할 뿐 아니라 헤엄도 잘하는군."

"그 청년도 청년이지만 첫째 빠진 사람의 신수지, 죽지 아 니할 신수니까 저런 청년이 나섰지."

"그러나저러나 상쾌한 일이야. 그 아이가 빠진 채로 죽어버 렸으면 그런 꼴이 있나. 정말 내 딸을 건져낸 거나 마찬가 질세."

"정말이지, 나는 헤엄만 할 줄 알면 옷도 안 벗고 그대로 들어갔겠네. 사람이 죽는데 옷이 다 뭣인가."

"그런데 빠졌던 계집아이도 촌아이는 촌아이라도 얼굴이 괜찮은데, 내 맘 같으면 그 청년하고 결혼시켰으면 좋겠네.

저를 살려 주었으니 그야말로 천생연분이 아닌가."

여러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대로 한 마디씩 지껄인다.

겨우 정신을 차린 순영은 눈을 뜨자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를 구해 낸 사람을 보았다. 순영은 언뜻 보는 듯하였지마는 그 청년의 모습이 평생을 가도 자기의 기억에서 떠나지 아 니할 만큼 보였다. 순영이로서는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 며, 또는 어떠한 동기로 자기를 구원하였는지, 그런 것을 아 랑곳할 바가 아니오, 다만 죽게 된 자기를 구해 준 것,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자기는 영원히 죽었으리라는 것, 그러한 생각으로 그 사람을 볼 때에, 가령 눈으로는 한 번만 보더라도 마음으로는 백 번이나 기억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영은 그 청년에게 대하여 감사하 다는 말은 한 마디도 못하였다. 마음으로는 그 은혜를 죽어 서라도 갚으리라는 생각이 있지만 말로는 할 용기가 없는 까닭이었다. 순영은 자기의 꼴이 모양 없이 되었을 뿐 아니 라, 젖은 옷이 감기고 걸쳐져서 몸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이 다욱 부끄러웠다. 그리하여 몸을 감추려다가 다 감추지 못 하고 다만 두 손으로 얼굴만 감추었다.

그 청년도 자기가 건져 낸 사람인 만큼 유심히 보지 아니 할 것은 아니었으나, 자기의 목적은 거기에 있지 않다는 듯 이 그다지 자세히 보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모여서 그 청년을 칭찬도 하고 순영을 다행하게도 말하는 중에, 나이 오십여 세 가량 되어 보이는 여승(女僧)이 선객 중의 한 사람으로 특별히 그 청년에게 치 하를 하고, 순영에게 대해서도 다행하게 여겼는데, 그 말과 태도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상하게 여길 만큼 과도한 듯하였으나, 여승은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라 자비심이 있어 서 그러한가 할 뿐이었다. 그 여승은 마침내 순영에게 치료 하라고 돈 십 원까지 주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할 듯이 주 저하는 듯 하였으나 다른 말은 없었다.

순영이 원산에서 이틀이나 치료를 하고 경성역에 도착하기 는 어둑어둑한 초저녁이었다. 기차가 서고, 승객들이 내리기 시작하자 플랫포옴에는 환영 나온 사람들이 조수 밀리듯 하 였다. 악수하는 사람, 절하는 사람, 기뻐서 웃는 사람, 슬퍼 서 우는 사람, 가방이나 보따리를 받는 사람.......... 형형색색 으로 제각기 환영하는 사람을 맞아 가지고 발꿈치를 돌이켜 서 승강대로 향하여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누구 하나 순 영이 일행을 맞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제각기 보따리를 들 고서 타박타박 나오는 품이 너무도 고단하였다.

순영은 송씨가 호화롭게 사는 터로, 하인들도 있고 수양딸 도 많아서 그가 어디를 멀리 갔다 오면 응당히 마중 나오는 사람이 많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급기야에 마중 나온 사람 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서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리하 여 운옥에게 가만히 물었다.

"아까 여기 나왔던 사람들이 다 웬 사람이냐?"

"그게 모두 환영 나온 사람들이다."

"그러면 왜 우리 오는데 마중 나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니?

너의 수양어머니가 멀리 갔다가 오래간만에 오시는데."

"전보를 아니 했으니까 그렇지. 전보를 쳐야 어느 때 오시 는 줄 알고 환영을 나오지, 전보가 없으면 어떻게 알고서 나오겠니. 그런데 우리 수양어머니는 어디를 갔다 오셔도 당초에 전보를 아니 하신다. 환영 나오느라고 애쓴다고."

조금 주저하다가 이렇게 대답하는 운옥의 말을 순영은 조 금도 의심 없이 곧이들었다. 순영은 출구를 나서자 눈과 귀 에 끌려서 정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큰길의 양쪽으로 즐 비하게 있는 이삼층의 양옥이라든지, 기타 모든 시설에 가 지각색의 전기등이 너무도 휘황하고 찬란하였다. 백열등이 맑은 가 하면 네온사인이 혼란하고, 명멸하는 광고등이 이 상한가 하면, 별똥처럼 흘러 다니는 교통 기관의 조명등이 기괴하였다. 평생에 고콜에다가 관솔불을 쓰든지, 사치품으 로 쓴대야 양철 등잔에다 석유불을 켜는 이외에 남포불도 써보지 못하던 순영이로서는 도저히 안식(眼識)을 제대로 가 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순영은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전차가 앞을 막는 듯하더니 자동차가 뒤에 달 리고 자전거가 왼편으로 지나는 듯하더니 구루마가 오른편 으로 좇아온다. 거미줄 같은 교통기관의 신호 소리도 가지 각색이었다. 무슨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분간할 수가 도저 히 없고 다만 귀가 시끄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 려갈 때에는 발등을 밟는 사람, 옆구리를 툭 받고 가는 사 람, 밀치고 가는 사람, 어떻게 몸을 간직할 수가 없었다.

순영이 정거장에 나서던 처음 순간에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화려하고 번화하여서, 마치 천상에나 오 르는 것처럼 마음이 고무 풍선같이 높고 부풀어서, 한손으 로 능히 장안의 경색을 다 움켜잡을 듯하다가는, 얼마 아니 되어 모든 것이 휘감기고 취하여서 몸조차 주제할 수가 없 게 되는 때에는 남모르게 울고 싶었다.

"어머니, 전차 타고 가시지요."

하는 운옥의 말에,

"전차가 다 뭐냐, 걸어가지. 네년들 둘이나 데리고 오기에 뽕이 빠졌다. 게다가 원산에서 이틀이나 묵고 노자를 다 써 버리고 한 푼도 없다. 또 순영이는 내일부터라도 공부를 해 야지. 그러니까 걸어가다가 아주 진고개 구경이나 하자."

하는 송씨의 말하는 태도가 처음 만나서 같이 올 때보다는 아주 딴판이었다. 운옥은 송씨의 속내를 잘 아는 듯이 더 말 하지 아니한다.

순영은 송씨의 태도가 너무 냉담한 데에 이상히 생각하였 으나, 전차를 타고 가면 차비가 얼마나 드는지도 모르고, 내 일부터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니 무슨 공부를 그렇게 갑작스레 하는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송씨의 말을 잘 판단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갑자기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에 기 쁘기도 하였으나,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자기의 힘으로 능히 감내를 할 수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겁이 나기도 하였다.

송씨와 운옥을 놓칠까 봐서 그들의 치맛자락을 붙들다시피 하고 따라가는 순영은, 교통이 복잡한 정거장 앞 광장을 벗 어나서 남대문 쪽으로 향하는 좌편 인도(人道)에 이르자 비 로소 숨을 내쉬었다. 거기는 자동차니 구루마니 하는 등의 통행상 위태한 것이 내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보행하는 사 람들도 그다지 복잡하지 아니하였다. 순영은 모든 것이 처 음 보는 것이라 눈을 굴리기가 바쁘게 보는 중에도 자기만 큼한 여자들의 옷 입은 것, 신발 신은 것, 기타 차림차림이 나 걸음 걷는 것까지라도 유심히 눈여겨 보았다.

"저것이 남대문이다."

하는 운옥의 말에 눈을 들어 보는 순영은 「서울 남대문」

이라는 말은 그전부터 들었던지라 알던 집을 오래간만에 다 시 보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그러나 남대문은 다른 집 전 등의 남은 빛에 비쳐서 그 웅장한 자태가 우뚝 서 있는 것 을 볼 뿐이요, 그 문루의 자체는 어두컴컴한 속에서 아무런 광경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심히 적막하게 보일 뿐 아니라, 그 문으로는 통행을 못하게 하기 위하여 문 앞에 굵은 쇠사슬로 막아 놓은 것이, 마치 남대문의 발을 쇠사슬 로 묶어 논 것 같고, 그 옆에 있는 순사 파출소는 그것을 지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남대문이 오백 년의 영화와 풍상 을 아울러 겪어 오다가, 마침내 가지를 옹호하던 좌우의 성 벽까지 헐리고 외롭게 서 있어서, 행인의 지점(指點)을 받는 것쯤은 순영의 알 바가 아니었다.

조금 가다가 순영을 돌아보면서

"예서부터 진고개다. 자세히 구경해라. 진고개가 서울서 제 일 좋은 데다. 여기를 보면 다른 데는 볼 것이 없다. 그리고 계집애가 항상 구경만 다니겠니. 제 할 일을 해야지. 하니까 처음 겸 마지막 겸 구경을 잘해라."

송씨의 말은 싱겁고 구석이 비어서 그것을 말이라고 할 수 가 없었으나, 순영은 별로 그 말을 참견하려고도 아니하고 다소곳이 들었다.

"얘, 너는 불탄 강아지처럼 빨빨거리고 돌아다녀싸서 어디 가 어디인지를 잘 알 터이니, 이런 때 그런 것이나 일러 주 어라."

송씨는 운옥을 돌아보고 볼품없이 말을 한다.

"네."

하고 마지못하여 대답하는 운옥은 입 안의 소리로,

"체, 또 집 근처에 왔나 보다, 핀잔하기 시작하게. 밤낮 핀 잔이야, 에구 성미두, 이번에 공연히 갔다 왔어."

하고 송씨의 뒷모양을 흘겨보더니 곁눈으로 순영을 보면서 입술을 삐죽한다. 순영은 점점 그들의 언동에 의심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을 아무 의심 없이 신뢰하던 마 음은 차차 박약하여지고, 그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운옥은 송씨의 말을 실행하기 위해서뿐이 아니라, 잠시라 도 송씨에게 멀어진 정을 순영에게 붙이려고 하였다. 순영 의 손도 잡고 나란히 가면서,

"이것은 삼월(三越)인데 서울서 제일 큰 백화점이다. 이 안 에는 없는 것이 없다. 나느 화장품을 흔히 예서 사다 쓴다."

조금 가다가,

"이것은 평전(平田)인데 이것도 삼월만은 못해도 거의 그 만한 백화점이다. 거기도 들어가 보면 없는 것이 없다. 구두 가 예서 산 것이다."

하고 자기의 구두를 내려다보더니 조금 가다가 조금 멈추 고 진열장을 들여다보면서,

"이것은 삼중정(三中井)인데 이것도 평전이나 같은 것이다.

내 양산은 예서 산 것이다."

하고 보따리에 꽂아서 들고 오던 양산을 순영이 앞으로 내 어 민다. 순영은 운옥이 말하는 대로 그려냐고 할 뿐이요 다른 말은 하지 아니하였다. 순영은 본정통(本町通 : 충무 로)을 다가도록 운옥의 말을 대강 들어가며 좌우의 상점을 보았으나, 다만 으리으리 하고 황홀할 뿐이요 무엇이 무엇 인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진열대에 세워 놓은 광고용의 마네킹까지도 정말 사람인지 아닌지도 분간하지 못하였다.

그러구러 가느라고 간 것이 서사헌정(西四軒町)에 이르렀다.

송씨가 앞을 서고 북쪽으로 뚫린 작은 길로 들어가는데, 거기는 외등도 별로 없어서 어둠침침하였다.

"인제 다 왔다."

하고 운옥이 반가운 듯이 순영에게 말한다.

"어디쯤이냐?

"이 안에 조금 가면 있다."

"그런데 여기는 왜 이렇게 어두우냐?"

"이런 데는 그렇다. 가난한 사람들만 살아서 문간에 불을 안 켜니까 어둘 수밖에 있니?"

조금 가다가 다시 동편으로 뚫린 작은 골목에 들어설 때에 는 무엇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가 없을 만큼 어두워서 그 길 에 익숙한 송씨도 더듬거린다. 개천의 시궁 냄새를 코를 찌 르고 양편의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의 울퉁불퉁 나오고 들어 가고 한 벽담은 금방에 무너질 것 같았다. 막다른 초가집 앞에 가서 멈춘 송씨는 어지간한 집 부엌문만도 못한 대문 짝을 흔들면서,

"행랑어멈 자나?"

한다. 아무 기척이 없다.

"행랑어멈 자?"

하고 다시 문을 흔든다. 그래도 대답이 없다. 송씨는 화를 내면서,

"이 제기랄 사람이 다 죽었단 말인가, 웬일이야?"

하더니,

"아, 이 행랑방에 아무도 없어?"

하고 소리를 되게 지르고 대문을 떨어져라 하고 뒤흔든다.

"거기 누기 있소."

하고 방안에서 나오는 소리는 경상도 사투리로 아직 잠이 덜 깨어서 목쉰 소리 같았다.

"나야, 문 좀 열어. 무슨 잠을 그 따위로 잔담."

하는 송씨의 말은 찌르는 듯하였다.

"에구, 마님 오셨군."

하고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나더니 버스럭거리는 소리만 나고 나오지 않는다.

"아, 어서 문 좀 열어. 느리긴 저 따위로 느린 것은 첨 보아." 하고 송씨는 발길로 대문을 찬다.

"네, 나가요. 옷을 입어야지요. 발가벗구 나가나요."

"아, 저런 백발 좀 보아 공동묘지 귀신들은 다 무엇을 보고 사는고."

송씨는 급하게 굴어야 소용이 없다는 듯이 한풀이 죽었다.

순영과 운옥은 킬킬 웃는다.

"아, 시굴 가셔서 어째 그렇게 오래 기셨어요? 기다리느라 고 죽을 뻔하였어요."

하면서, 문을 열고 가로막아서는 행랑어멈은 여간 뚱뚱하 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저는 진고개로 쌀을 고르러 다니다가 쫓겨났어요.

쌀을 잘못 고른다고. 그래서 정릉리(貞陵里)로 돌을 깨러 다 니는데, 늦게 왔어요. 그래 저녁을 한 술 끓여 먹고 누웠더 니 곤해서 잠이 깊이 들었어요. 이것 보세요, 돌맹이 깨치느 라고 손등을 다 다쳤어요."

하고 어두운 속에 손을 내밀면서 의연히 문을 막아섰다.

"그러구 저러구 좀 치워. 사람이 좀 들어가야지. 얘기 장단 은 이따 하고."

송씨는 행랑어멈을 밀치다시피 하고 들어간다. 집 안은 깜 깜하다. 사람의 기적은 하나도 없다.

"운옥이 들어가 불 좀 켜라."

하고 송씨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내어서 준다. 운옥은 열쇠 를 가지고 마루로 올라가더니 어두운 속에서 한참 더듬거린다. 그 사이를 타서

"그래, 그새에 손님들 안 오셨나?"

하고 묻는 송씨의 말에

"왜 안 오셨어요, 손님들이 퍽 많이 오셨다 가셨어요. 그런 데 시궁골 사는 김선달 나리는 천 번은 오셨어요."

"저런 망할 것, 선달은 나리가 아니래도 밤낮 김선달 나리 라지. 그런데 시구문안 사는 술집 마님 안 오셨던가?"

"왜 안 오셨어요. 오시기두 여러 번 오시구 어제두 정릉서 들어오셨다가 길에서 만났지요. 그런데 술 팔던 계집애가 하나 내뺐다나요. 그래서 마님 오시기를 고대한다구 그러던 데요."

"그런데 시장해서 우선 무엇을 먹어야겠는데, 지금 늦어서 밥은 지을 수가 없고 가서 우동 세 그릇만 가져오라구 하게." 송씨는 행랑어멈을 보고 말한다.

"참 그 새에 우동 값을 받으러 여러 번 왔어요. 그 젊은 청 인이 여간 투덜대지 않던데요."

하고 행랑어멈은 그대로 섰다.

"망할 녀석 투덜거리긴 왜 투덜거려? 누가 우동 값 떼먹을 까봐 투덜거려. 어멈보고 누가 그런 소리하라나, 얼른 가서 가져오래여, 잔말 말고."

하고 송씨는 창피한 듯이 순영을 본다.

"가보긴 가 보지요만 원........"

행랑어멈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나간다.

"에구, 저런 쇠귀신이 있나. 말을 할 줄 아나, 심부름 하나 를 똑똑히 하나, 나가래야 나가지두 않구."

송씨는 나가는 행랑어멈의 뒷모양을 흘겨보면서 혀를 낄낄 찬다. 조금 있다가 대문 밖에서부터 무엇을 중얼거리고 들 어오는 행랑어멈은,

"그저 그렇다니까. 그 전에 밀린 것을 다 가져오든지 반 이 라두 가져와야 되지, 그렇잖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눈을 부 리대고 북북거리던데요. 하마터면 얻어맞을 뻔했는데요."

하고 송씨를 원망하는 듯하였다.

"에구, 저런 못난이. 에구, 저런 못난이. 우동 한 그릇을 못 시켜 오고. 사람이 저 모양이니까 그 녀석들이 놀리느라고 그랬지. 우동 값은 얼마나 밀렸기에 나중에 모개로 찾아가 면 제가 더 좋지 내가 더 좋은가. 그 녀석들이 그러다가는 우동 한 그릇도 못 팔아먹지."

하고 송씨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운옥을 보면서,

"얘, 네가 가거라. 가서 밀린 것은 며칠 후에 다 끊어준다 고 곧 가져오라고 그래라. 그리고 만일 안 가져온다고 하거 든 야단을 치고 오너라. 내가 당할 터이니. 하지만 네가 가 면 두말 않고 가져올 것이다. 너 그 젊은 청인 알지? 너 보 면 웃고 그러는 그 녀석 말이다."

"아 알고말고요. 그 녀석이 저를 보면 싱글벙글 웃어가면서 우동 먹으러 오라고 그러겠지요, 제가 거저 준다고. 웃어죽 겠어요. 그래도 그 사람이 사람은 괜찮아 뵈던데요."

"거저 준다고 하거든 가서 먹으려무나. 그런 것들두 사귀어 두면 해롭지 않다. 그러니까 네가 가면 얼마라두 가져올 것 이다. 어서 가봐라."

운옥은 대답 대신에 상긋 웃고 나간다. 조금 이다가 손으 로 입을 막고 낄낄 웃으며 들어온다.

"왜 그러니?

송씨는 피우던 궐련을 오른손의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운옥을 본다.

"쫓아와요."

"누가?"

"그 젊은 청인 녀석이 대문 밖에까지 쫓아와요."

"왜?"

"몰라요. 할 말이 있다구 쫓아와요."

"그럼 왜 쫓겨오니? 무슨 말인지 듣고 오지."

"무서워요."

"무섭기는 뭣이 무서워.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면 어떻게 하니?"

"아, 그럼 어둔데 쫓아오는데 무섭잖아요?"

"무섭긴 뭣이 무서워. 기집애가 그렇게 쌀쌀하면 못 쓰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조금 수더분해야 쓰는 것이다. 그 래야 밥이 붙지. 할 말이 있다거든 잠깐 듣고 오지, 그렇게 도망하듯이 내빼을 것이 무엇이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줄 아니. 너는 항상 일러도 말귀를 못 알아듣더라. 그런데 우동은 가져온다던?"

"곧 가져와요."

"그러면 그렇지. 그 멍텅구리가 가서 말을 잘못한 게지, 안 가져 올 리가 있나. 그래 아무 말도 않구 그저 가져온다구 그러던?"

"첨에는 안 된다고 눈깔을 부리대고 야단을 하겠지요."

"그래서?"

"그래 그럼 고만 두라구 골을 내고 나오려고 하니까 도루 부르겠지요."

"그래?"

송씨는 흥미를 가지고 대답을 기다린다.

"그러더니 시골 가서 돈을 얼마나 벌어 왔느냐고 그러겠지요. 그래 많이 벌어 왔다고 했지요, 그러면 왜 돈을 안 가져 오느냐고 하기에, 은행으로 환(換)을 부쳤으니까 이제 찾아 와야 한다고 그랬지요."

하면서 운옥은 웃는다.

"그래 그러니까 우동을 가져간다고 그러던?"

"그러니까 깔깔 웃더니 우동을 가져온다고 하면서, 나중에 우동 값을 안 주면 저를 데려간다나요."

"망할 녀석들, 그래 그러구 쫓아오던?"

"그러구 나오는데, 그 젊은 청인이 슬금슬금 따라 나오더니 할 말이 있다고 붙들려고 하겠지요. 그래 도망하니까 문간 까지 쫓아와요. 까딱하더면 붙들릴 뻔하였어요."

"저런 못난이, 이 담에는 그러지 말아요. 사람이 붙임성이 있어야지. 그런 청년ㄴ들은 거지같이 하고 다녀도 호주머니 에 돈 몇백 원씩은 다 있단다. 피천 대푼 없는 양복장이만 노리지 말구."

송씨가 말을 계속하려고 하는 때에 밖에서,

"우동 가져왔소."

하고 무엇을 마루에 내려놓는 소리가난다.

"우동을 왜 인제 가져와 이 망할 것아."

하면서 문 밖으로 머리를 내어 밀고 보는 송씨는, 말소리 는 골이 난 듯하였지만 입이 벌어지도록 웃는다.

"우리 빨리 가져왔어요. 돈을 내면 더 빨리 가져와요. 다섯 달치나 밀린 것 다 내오."

하는 젊은 청인은 말은 송씨에게 하면서도 눈으로는 운옥 과 순영을 번갈아 본다.

"돈 안줄까 봐 그러니? 어서 가."

언제든지 그 청인에게는 농판으로 대우하는 송씨는 주먹을 휘두르며 때리는 모양을 한다. 그 청인은 우동을 다 먹으면 그릇을 가지고 간다고 추근추근하게 마루에 걸터앉아서, 방 안만 들여다보는 것을 운옥이 우동을 들여놓고 영창을 닫아 버렸다. 그러니까 그 청인은 그릇은 내일 와서 찾아가겠다 고 하고서 슬금슬금 나가 버렸다.

순영은 여러 가지 사정과 모든 형편을 생각할 때에 하도 어이가 없었다. 자기의 집께서 송씨와 운옥의 말을 들을 때 에는, 송씨가 보통으로 정당한 여자일 뿐 아니라 남을 구원 하여 주는 훌륭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생활로 말할지라도 운옥의 말과 같이 그다지 부자는 아닐망정 상당한 집에 상 당한 생활을 하리라고 생각하여서, 자기가 서울에 올라오는 날이면 나중에 공부까지 하고 못하는 것은 모를지라도, 우 선 좋은 집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리라고 기뻐하였던 것인 데, 기차에서 내려서부터 집에까지 오는 동안의 여러 가지 광경과, 소위 집이라고 들어와서 하는 송씨와 운옥의 말과 행동이 도무지 뭐라고 상상할 수 벗을 만큼 불쾌하였다. 순 영은 자기가 도깨비에 홀린 것인가 꿈을 꾸는 것인가 질정 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송씨와 운옥이 과연 사람인가 아닌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자기가 옛날 이야기에 서 듣던 것과 같이, 여우나 도깨비가 변하여서 사람이 되었 다 할지라도 그것을 판단하는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전등불에 비치는 그들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귀신이나 도깨비가 변형을 하여서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은 그림자가 없다는 말을 이야기에서 들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들의 그림자는 분명히 있었다. 혹은 그들의 그림자가 자 기의 그림자와 다른 것이 있나 하고 비교하여 보았으나 조 금도 다른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적이 안심이 되었으나 어 쩐지 무시무시하여서, 만일 자기의 집이라든지 다른 곳이라 도 갈 수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 싶었으나, 다시 생각하니 가령 거기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라도 어디가 어딘 지 모르는 다른 곳으로 다시 갈 만한 용기는 없었다.

그들은 잠자리에 누웠다. 송씨와 운옥은 기차에서 시달려 서 그런지 드러눕자 코를 곤다. 순영은 눈이 반반하였다. 순 영은 몇 번이나 옆눈으로 그들의 자는 양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사람은 사람이었다. 순영은 사나운 계모의 곁에 누었을 때보다 더욱 불안하였다. 순영은 벽에 댓잎처 럼 그려진 빈대 피를 세다가 잠이 들었다.

뻐걱뻐걱하는 물지개 소리에 잠을 깬 순영은 창문이 환하 게 밝은 것을 보고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송씨와 운옥이 아 직 코를 골고 자는 것을 보고서 그대로 누워 있었다. 자기 가 그 자리에 누워 있는 것이 무슨 꿈을 꾼 것 같았다. 순 영은 돌아누워서 벽과 천장을 고루고루 보았다. 빈지와 도 배는 무늬있는 종이로 바르고 울긋불긋한 판박이 그림을 붙 였으나 거미줄로 그물을 치고 빈대피로 환을 쳤다. 그러하 고 방바닥의 한구석은 탈매가 나서 버짐 오른 얼굴같이 되 었다. 깨끗하기는 흙천장 흙벽에 삿자리 깐 자기 집 방만도 못하였다. 순영은 가만히 고개를 들고 송씨와 운옥이 자는 양을 보았다. 그들은 가로 세로 누워서 조금도 조심성 없이 사지를 되는 대로 펴뜨리고 입을 벌리고 코를 골며 자는 꼴 이 하릴없이 자기의 계모와 그의 데리고 들어온 딸이 자기 옆에서 자던 것과 방불하였다. 순영은 다시 베개를 바로 베 고 누우면서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부엌문을 여는 소리가 나더니 기침을 하면서 덜거덕거리는 것이 행랑어멈이 밥을 하러 나온 모양이었다. 순영은 언제 든지 일찍 일어나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해가 높이 올라오 도록 누워 있기가 괴롭기도 하고 스스로 미안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혼자라도 일어날까 하다가 서울 풍속은 으레 늦도록 자는 것인지, 남보다 일찍 일어나면 그것이 못 쓰는 것인지 그 것도 알 수가 없고, 또는 자기가 일어나다가 송 씨와 운옥의 잠을 방해하여 깨게 된다면 무슨 광경이나 나 지 않을까 두려워서 죽은 체하고 누웠다가 행랑어멈이 나와 서 인기척을 하고 덜거덕거리는 것을 기회로 하여 가만히 일어나서, 자던 자리를 소리 없이 치워놓고 맞지 않는 영창 을 이를 악물고 조심조심하여 소리 없이 열고서 나왔다. 행 랑어멈은 순영을 보고서 눈곱도 덜 떨어진 눈으로 눈웃음 치면서 두터운 입술로 빙긋이 웃는다. 순영은 웃고 싶지도 아니하였으나 그의 대접으로 억지로 조금 웃었다. 순영이 세수하려고 물을 뜨러 부엌으로 들어갔을 때에 솥뚜껑을 열 어 놓고 들여다보고 있던 행랑어멈은,

"그런데 어디서 왔어요?"

하고 순영을 본다. 그의 얼굴은 보기 싫었으나 말 묻는 것 은 다정하였다.

" 강원도서 요."

"강원도서 어쩌자고 여기를 왔어요?"

"왜요?"

하는 순영은 아직도 진정되지 아니한 가슴이 다시 흔들렸다. "글세, 얼굴이 이뻐서 돈은 잘 벌겠구면."

순영이 다시 물으려고 할 때에 방 안에서 기지개 켜는 소 리가 난다. 순영은 깜짝 놀라서 물을 떠 가지고 나와서 세 수를 한다. 행랑어멈은 무엇을 두리번거리면서 안방 문앞으 로 오더니,

"마님, 마님."

하고 부른다.

"왜 그러나?"

하는 대답 끝에 이어서 기지개 켜는 소리가 난다.

"아침 진지를 어떻게 해요?"

"어떻게라니. 해야지."

"그럼 쌀하고 나무하고 사야지요."

"최선달네 가게에 가서 쌀 한 되하고 나무 석 단만 가져오게." "그럼 돈 주세요."

"돈은 차차 줄 테니 우선 내가 보내란다구, 가서 달래라."

"잘 주나요 어디, 그 전에도 잘 안 주던데요."

"앙탈부터 하지 말고 가봐요, 어서. 에구, 참 속상해."

하고 송씨의 일어나는 소리가 난다. 행랑어멈은 속으로 중 얼 거리면서 나간다. 순영은 그 사이에 세수를 하고 들어가 서 송씨의 자리를 개어 놓았다.

"오늘 초하룻날 마수걸이라고 외상은 안된다고 그래요. 더 구나 식전에 와서 외상을 달란다고 핀잔만 하겠지요. 재수 없게 공연히 식전 댓바람에 핀잔만 얻어먹었지."

다녀온 행랑어멈은 투덜거린다.

"오늘이 초하룻날인가, 누가 그런 줄 알았나. 내가 나가보지." 하고 송씨는 세수도 아니한 채로 치마끈을 매면서 고무신 짝을 질질 끌고 나간다.

송씨가 식량을 구해 가지고 들어와서 아침을 지어먹고 나 니 한나절이 되었다. 송씨는 순영을 물끄러미 보더니,

"너 옷을 곧 해 입어야 되겠구나. 저걸 입어서 남세스러워 되겠니. 누가 와서 보나따나. 그리고 우선 내일부터 무엇을 배워야 되겠는데, 저것을 입구서 갈 수가 있나. 그런데 무엇 을 사야 좋을까?"

하고 눈을 깜박이며 담배를 빨고 앉았더니 부리나케 소세 를 하고 나간다.

순영은 자기의 옷감을 사러 간다는 데에 기뻤다. 자기도 내일이나 모레는 좋은 옷을 입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옷감은 무슨 옷감을 떠 가지고 올 것인가가 궁금하였다.

"너 인제 호사한다. 그리고 공부도 하게 되구."

하고 운옥은 순영을 보고 웃는다.

"그런데 공부는 무슨 공부를 하니?"

순영은 무슨 공부를 할 것인지가 무척 궁금하던 차에, 운 옥이 말하는 기회를 얻어서 받드시 알아내려고 하였다. 조 금 주저하던 운옥은 얼굴빛을 고치면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 바른 대로 말을 해야지."

하고 얼굴이 붉어지는 듯하더니 다시 어설픈 웃음을 웃으 면서,

"공부는 다른 공부가 아니라 노래를 배운다."

"노래는 무슨 노래를 배우니?"

"시조두 배우구, 잡가두 배우구 다 배운다. 그리고 춤도 배 운다."

"그런 것을 배워서 뭘 하니?"

순영은 얼굴이 질리면서 간신히 말을 한다.

"무얼 하다니, 그런 것을 잘 배우면 돈도 벌고 남에게 귀염 도 받구 참 좋단다."

하고 운옥은 고개를 숙이고 낄낄 웃는다.

"글이나 배우든지 하지, 그런 것을 배워서 뭘 하니. 나는 그런 것은 배우기 싫다. 남부끄럽게 소리를 어떻게 배우니.

또 춤을 배우는 것이 무에냐?"

순영은 짜증을 내는 것보다 울 듯하였다.

"지금 와서 그런 소리가 쓸데 있니. 아무 말도 말고 하라는 대로 해라. 네가 싫으니 좋으니 하면 소용 있니? 하라는대 로 안 하면 매맞는다. 매맞구 구박 받구, 그러면 네가 집으 로 도루 가겠니 어쩌겠니. 하니까 아무 말두 말구 하라는 대로 해라. 그리고 그런 것이 정말 나쁜 것이 아니다. 잘만 배우면 평생에 호강하구 까딱하면 천석군이가 왔다갔다 한다. 그게 왜 나쁜 겐 줄 아니."

운옥은 웃지도 아니하고 진정으로 말하는 기색을 짓는다.

"그럼 너두 그런 것을 배우니?"

"그래, 나두 그런 것을 배운다."

"그게 너 말하던 음악이냐?"

"그래, 그게 음악 공부다."

"그런 것을 학교에 가서 배우니?"

"학교는 학교라두 정말 학교가 아니다."

"그럼 무슨 학교냐?"

"그저 여러 애들이 모여서 배우는 학교다."

"그래, 그런 것을 배우는 아이들이 많으냐?"

"아, 많고 말고, 나 다니는 데만 해도 열 다섯이나 된다.

그리고 다른 데도 많다."

"그러냐?"

순영은 여자로서 소리와 춤을 배운다는 것이 정당한 일이 아니라는 범범한 생각뿐이요, 그것이 어째서 나쁜 것이며 그것을 배운 결과가 어찌 되는 것인지 그것은 자세히 알 수 가 없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그런 것을 배우는 것이 정당 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배우기 싫다고 까지 말을 하였 으나, 운옥도 그것을 배우고 또 다른 아이들도 그것을 배우 는 아이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서는 적이 마음이 놓이는 듯 하였다. 또 자기가 아무리 하기 싫은 일이라 할지라도, 운옥 의 말과 같이 송씨가 때려 가며 하라고 하면 아니할 수도 없는 일이요, 그렇다고 집으로 간다든지 다른 도리가 없을 바에야 차라리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낙망 이라면 낙망이고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또는 운옥의 말과 같이 그런 것을 배워 가지고 나중에 호강을 하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어수선한 마음과 두근 거리는 가슴은 다 진정되지 아니하였다.

"에구, 옷감이 모두 비싸서 어디 사입겠니. 그전보다 갑절 이 올랐구나. 벌이는 안 되구 물건 값은 오르고 어디 살겠니. 네년의 치다꺼리 하다가 골빠지겠다."

송씨는 마당에서부터 하는 말을 방에 들어오도록 계속하더 니,

"엤다. 이것 보아라."

하고 사온 것을 순영 앞에 던진다. 순영이 손을 대기 전에

"어디 무엇을 사셨나 좀 볼까?"

하고 운옥은 그것을 끌어당겨서 펴보더니,

"에구, 이것 좋은데, 이거 새로 난 것이로군. 그전에 못보 던 것이야. 빛도 좋고 무늬도 좋거든. 아주 좋아. 어쩌면 나 입은 것보다 좋은데."

하고 벽이 걸어 놓은 자기의 옷과 대조하여 보더니, 손바 닥을 옷감의 접은 사이로 넣어서 배빚배빚 만져보더니,

"두껍기도 한결 두꺼운데, 나도 인제 이런 것을 해 입어야 겠군."

운옥은 순영을 보고서 웃었으나 순영의 옷감이 자기의 옷 감보다 나은가 하여서 속으로는 샐쭉하였다. 순영은 분홍 적삼과 남빛 치맛감에 무늬가 끄먹끄먹하는 것을 보았다.

입이 벌어지는 것은 손으로 가렸지마는 웃음이 흐르는 눈자 위는 더욱 명랑하였다. 이때까지 불안하던 생각은 자취를 감추고, 그것으로 옷만 해 입으면 모든 것이 기쁠 것만 같 았다.

"너 이런 옷 더러 입어 보았니?"

하는 송씨의 말에

"못 입어 보았어요."

하는 순영의 대답은 말보다 웃음이 많았다.

"이런 것으로 옷이나 해 입고 나서면 꽤 이쁘지. 아마 운옥 이 보다 나을걸."

하고 송씨는 순영과 운옥을 갈마들어 본다.

"아. 낫구말구요, 지금도 나은데 비단옷을 입으면 훨씬 돋 보이는데, 저 보다 낫기만 해요."

운옥은 송씨를 보고 눈웃음을 치는 듯하더니, 얼굴빛이 새 침하여지면서 입술 끝이 뾰로통하여진다. 못 보는 체하면서 그것을 보는 송씨는 속으로 웃으면서,

"그렇지만 태도야 운옥이를 당할 수가 있나. 운옥이는 차리 고 나서면 아무가 보아도 태가 지르르 흐르거든."

"에구 어머니두, 지가 무슨 태도가 있어서. 옷을 입구서 거 울을 보면 아주 시골뜨기 티가 나는데."

너털 웃음을 치는 운옥은 입이 함박만큼 벌어지고 눈은 실 낱만큼 감긴다. 순영은 운옥을 보고 자기의 얼굴을 상상하 여 보았다. 살결이 희거 혈색이 있는 것은 운옥이 나아 보 였으나 얼굴 바탕은 자기가 나은 것 같았다. 몸도 살집이 있고 후리후리한 것은 운옥이 나은 듯하였으나, 앙그러지고 맵시 있기는 자기가 나은 듯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옷감과 운옥의 옷을 비교하여 본즉, 아닌게 아니라 자기의 옷감이 더 좋아 보였다. 그리하여 송씨는 운옥이 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도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런 것은 값이 얼마나 되어요?"

옷감 있는 데로 다가앉으며 조심스럽게 만져보는 순영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주 비싸다. 물건 값이 오를 뿐 아니라 이런 것은 비단 이 좋아서 원체 비싼 것이다."

송씨는 비싸다고만 말하고 얼마라는 것은 말하지 아니하였다. "이 비단 이름이 뭐에요?"

"나는 이름도 모른다. 날마다 새로 나다시피 새록새록 나는 것을 어떻게 그 이름을 다 알겠니. 비단 장수도 이름을 다 모르는데."

"이것이 새로 난 것인데 이름이 무슨 사(紗)야. 무슨 사라 더라, 들었는데 잊어버렸어. 그런데 이것이 처음에 보기는 좋아두 조금 입으면 빛이 변한다나. 그리구 또 여리다던데.

내 옷 해 입은 것은 오래 입어도 빛깔이 변하지를 않아요.

그리구 비오는 날 입어도 다른 것처럼 그다지 후줄군해 지 지도 않아요. 우리는 아무리 좋아도 빛이 퇴색해지는 것은 보기 싫어."

운옥은 순영이 옷감을 타박하고 자기 옷감을 자랑한다.

"얘야 고만두어라. 그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지. 네것도 좋고 이것도 좋다. 퇴색하면 물들여 입구 후줄군 하면 줄먹 여 입지. 무슨 걱정이냐? 어서 갖다가 바느질집에 주어라.

순영이하고 같이 가야 길이고 품이고 보아서 옷을 만들지.

어서어서 머리들이나 빗고 가보아라."

하고 송씨는 옷감을 둘둘 말아서 한족으로 치워 놓는다.

"아주머니 오셨어요?"

하면서 덮어놓고 안방문 앞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에구, 김 선달이요? 어서 들어오시오."

송씨는 문도 열지 아니하고 말을 한다.

"들어가두 괜찮아요?"

"괜찮지 그럼, 별소리가 다 많구료, 어서 들어오."

"낯선 목소리가 나는 듯한데요."

"낯선 목소리가 나면 어때. 내 집이 내외하는 집이요. 그 귀석적은 소리 하지 말고 어서 들어와요."

"그럼 들어갈까."

하고 들어오더니,

"시골 가셔서 여러 날 만에 오셨지요. 시골 바람을 쐬시더 니 얼굴이 좋아지셨구료."

"좋아진 게 뭐야, 볕에 그을고 바람에 그을고 얼굴이 숯검 정이 되었는데."

"그런데, 어째 그리 여러 날 되셨소?"

"잠깐 다녀 온다는 것이 가니까 어디 그렇게 되더라구."

"나는 여기를 몇 번 왔는지 다리가 떨어질 지경이요."

"그렇지 않아도 행랑어멈한테 여러 번 오셨더란 말은 들었소." "그런데 몇이나 주워 오셨소?"

"주워오긴 어디가 흘렸나 주워오게, 겨우 하나 데려왔지."

"이 아이요?"

하고 순영을 돌아보다가 훈옥을 보고서

"너는 오래간만에 보고도 인사두 않니?"

"에구, 머리 빗느라고 몰랐어요, 아저씨. 참 그새 안녕히 계셨어요?"

하는 운옥은 머리채를 쥐고서 돌아다보면서 웃는다.

"그런데, 요새는 돈 한 푼 안 생기고 죽겠소 그려."

김 선달은 포켓에서 담배를 꺼내면서 송씨를 본다.

"에구, 내 말이요, 육십평생을 살어도 이렇게 세월 없는 시 대는 첨 보겠소, 도무지 옴치고 뛸 수가 없소그려, 이러다가 는 굶어죽겠다는 소리가 나기 쉽겠소. 이놈의 세상이 어찌 되려구 이러는지 모르겠소."

"시골 서울 할 것 없이 계집애를 찾는 데는 부지기수로 많 은데, 당초에 계집애가 있어야 아니하우. 이런 기막힐 일이 있나 원."

김 선달은 담배를 붙이려고 성냥불을 켰다가 그것을 재떨 이에 내버리고, 손을 젖혀서 손가락을 벌리면서 말을 하고, 맥없는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앉았다.

"계집애가 흔하고도 귀해요. 쓰지 못할 게야 백 명이면 무 얼 하우. 쓸 것을 고르려면 천에 하나가 드물어요. 나도 이 번에 시골 가서 웬만하면 사람깨나 데리고 오려고 하였더니 어디 있어야지. 참 사람 귀하더군. 그래 할 수 없이 하나를 데리고 왓는데 이건 하나라두 다른 애들 열 주어 안 바꾸지." 하고 송씨는 순영을 흘긋 보더니 다시 김 선달을 보면서 턱으로 순영을 가리킨다. 김 선달은 순영을 보려고 몸까지 돌아앉았으나, 고개를 수그리고 돌아앉은 순영의 얼굴을 볼 수 는 없었다. 그리하여 순영의 뒷모양만을 자세히 보고 돌 아앉은 김 선달은 송씨를 보고 눈을 끔쩍거린다. 송씨도 눈 을 끔쩍하구 웃는다.

"그런데 저, 운옥이는 집에 있나요?"

김 선달은 운옥의 말을 꺼낸다.

"그 애가 그 새 어디 갔다 온 것은 알지요?"

"평양 갔다 온 것 말이요?"

"응."

"그게 알고말고. 내가 소개한 건데 여부가 있나."

"아 참 그렇군. 그런데, 평양서는 서울 소리를 안 알아 주 더래. 그래 겨울 석 달을 채우고 도루 왔지요. 그래 놓고 있 더니 인제 낼모레는 전라도 목표라나 그리 가게 되었지."

하고 말을 계속하여 할 때에

"아우님 계시우?"

하는 소리가 문밖에서 난다.

"에구, 형님 오시는군. 어서 들어오시오."

하고 송씨는 일어나서 문을 열고 맞는다. 머리는 희어도 얼굴의 혈색은 좋아 보이는 노파가 들어오는데,

"시구문 안 아주머니 오래간만에 뵙겠구료. 어서 들어오시오." 하고 김 선달은 자리를 비켜 앉는다. 머리를 다 빗은 운옥 도 인사를 한다. 순영은 자리를 고쳐 앉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우님, 시골 가서 어째 그렇게 오래 계셨소? 그런 데 대관절 볼 일이나 잘 보셨소?"

송씨의 곁에 가서 앉은 노파는 숨이 찬 듯이 말을 하고 진 정한다.

"자연히 늦었어요. 볼 일은 허행은 아니했지만 뜻대로야 될 수가 있어요?"

"나는 아우님 오시기를 기다리느라고 죽을 뻔하였소. 그런 데 언제 오셨소?

"어제 저녁에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이따쯤 가서 뵈려고 하였는데 이렇게 오셨구료. 영업이나 잘 되어요?"

"잘 되는게 뭐요, 가뜩이나 흥정이 없는데다가 술 파는 계 집애 하나가 내뺐지요, 또."

"글세 행랑어멈한테 잠깐 들었는데, 어째 그렇게 되었어요?" "어느 놈이 달구 달아났지요. 젊은 양복장이 하나가 술 먹 으러 자주 다녔는데 눈치가 다른 듯하기는 했으나 술 파는 집에서 그런 것 저런 것을 다 가릴 수가 있어요? 그래 내버 려 두었더니 아무 그자가 달구 간 모양이요."

"그럼 찾지요."

"찾다니 어떻게 찾우? 경찰서에 수색원이라나 뭐라나 했지 마는 찾기가 쉽소?"

"몸값은 얼만데요?"

"자그마치 오백 원이라우."

"그럼 그거나 찾지요."

"찾기는 어디 가 찾소? 허공에 가 찾을까."

"왜 제 집에 없나요?"

"제 집이 있는지 없는지 누가 아우. 어떤 시골 사람이 소개 를 하기에 데려왔는데. 나중에 들으니까 그자가 꾀어다가 팔아먹은 모양입니다. 그러니 어디 가 찾우. 제 집은 알지도 못하거니와 알더라도 가서 돈 달랄 경위가 되오, 만일 돈을 달라다가 그 집에서 됩다 계집애를 찾아 내라구 하면 어쩌구. 안 그러우. 경위가?"

하고 노파는 다시 김 선달을 보면서,

"안 그렇소 김 선달? 우리는 치마를 둘렀지마는 경위가 그 럴 것 같습니다."

하여 자기는 여자지만 그런 경위를 잘 안다는 것을 자랑하 는 듯하였다.

"아, 그렇지요. 아주머니 말씀이 당연합니다. 그렇고 말고요. 다른 놈이 빼다가 팔아먹은 것을 제 집을 알기로니 돈 말을 할 수가 있나요?"

하는 김 선달의 말 끝에,

"그럼, 참 그렇겠군요. 그럼 안 되었는데요. 돈 오백 원이 어디요?"

"오백 원인데 삼년을 있었으니깐 삼백 원 값은 한 셈이지.

그러니까 이백 원이 남은 셈인데, 돈도 돈이지만 대관절 술 이 팔려야 아니하우. 그 계집애가 있을 때는 술이 곧잘 팔 렸어요. 계집애가 생기기두 괜찮게 생기구 붙임성두 있구 해서 밥 술이 잘 팔리구 하더니, 그 애가 간 뒤부터는 오다 가다 한두 잔 먹는 사람밖에는 일부러 술 먹으러 오는 사람 은 비로 쓴 듯이 없구면. 파리만 날리구 앉았으니 일 되겠소?" "왜 또 계집애 없나요?"

"있으면 무얼 하우. 있기야 지금두 둘이나 있지 하지만 사 람이면 다 사람이요? 그것들은 몸값도 없이 밥만 먹고 그저 있는 것들인데, 제발 가래두 안 가지요. 말 마시오, 속상하 는 말을 다 하려면 얘기책을 만들어두 못다 하겠소. 내 머 리가 왜 이렇게 센 줄 아우? 그년의 계집애들 때문에 춘화 노골이 다 되었소."

노파는 머리털을 만지면서 창연한 듯이 한숨을 가볍게 내 쉰다.

"말 마시오, 나는 내 손으로 남의 자식을 길러낸 것이 열두 더 되오. 하지만 꿩의 새끼 길들이기로 조금 크면 다 달아 나요. 뼈가 빠지도록 키워서 정들고 돈푼이나 벌어먹을 만 하면 뒤나 돌아다보고 나가요?"

말하던 송씨는 무엇을 생각한 듯이 순영과 운옥을 재촉하 여서 바느질집으로 보내었다.

"그래두 아우님은 아이들 길러 재미를 보았지."

"재미가 무슨 재미요? 하기야 그 덕으로 이때까지 그렁저 렁 먹고 살았지. 하지만 지금까지 사글세집을 못 면하고 있 으니 무얼 하우."

"그게야 돈이 안 생겨서 그렇소? 아우님이 딴짓 하느라고 그랬지. 아우님이 내버린 돈만 하여도 모아 놓았으면 부자 하나는 되겠소."

"그렇잖아 그렇지요. 아주머니야 돈을 못 벌었다구 할 수는 없지요, 우리 알기에도 아주머니 손 끝으로 내버린 돈이 얼 마요?"

하고 김 선달이 거든다.

"하기야 그렇다구두 하겠지. 나는 정말 그놈의 화투 때문에 못 살아. 그런 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놓지 못하니, 사 람이 결단성이 그렇게 없어서 무엇을 하겠소? 돈 때문에 고 생을 할 때에는 손가락을 깨물고 싶은 생각이 나다가두, 친 구끼리 만나면 또 하구 또 하구 그러우그려. 그것두 맘이 약하고 인정이 많은 탓이지 할 수가 있나요."

하고 송씨는 얼굴빛을 고친다.

"그런데 아까 운옥이하구 나가던 아이가 이번에 데리고 온 아이요?"

하고 노파가 묻는다.

"그렇답니다. 상전 하나를 또 모셔왔는데, 그 뒤치다꺼리를 어찌 할는지 모르겠소. 몸에 걸치고 온 것이라곤 다 떨어진 삼베옷 한 벌 분인데 잠시라도 그대로 둘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 오던맡으로 아까 옷감을 바꾸어다가 지금 바느질 집으 로 보냈어요. 머리나 빗겨서 보내려고 하였더니, 우리들 얘 기하는 는 소리를 그것들이 들으면 재미 없을 듯하여서 재 촉해 보냈지요."

"그런데, 그 애가 얼굴이라든지 몸매라든지 관계찮아 보이 는데."

"그게 지금 그 꼴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조금만 가꾸면 제 구실은 넉넉히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보 아우님, 그 애는 내가 마춥시다. 다른 데로 보내지 마시오. 안할 말로 그 애를 소리장이나 가르치는 동 안에 아우님이 뒤가 꿀리면 내가 뒤라도 될 테니, 알아듣소? 하고 노파는 다가앉으면서 송씨를 본다.

"그건 그만큼이나 되었으니 색주가로는 안 보내렵니다."

"그럼 무얼 하려우?"

"기생을 들여보낼 생각이 있어요."

"기생 말 마시오. 지금 기생들 다 죽을 지경이요, 벌이가 있어야 살지요. 요리집들이 세월이 없으니 부르는 데 없지요. 사랑노름이래야 가물에 콩나듯 하는데 여간내기가 그런 데 참예나 하우? 그 외에 봉이나 물어야 움푹한 구석이 있 는데, 지금은 돈 있는 시골 녀석들이 서울놈 깝데기 벗겨 먹으러 드는데 돈을 쓰나요. 그래서 나다닌다 하는 기생들 도 맨 전당질이고, 그렁저렁한 것들은 노랑병이 들게 되었 어요. 기생들이 시골로 서울로 색주가로 가는 것들이 많고, 그거나마 얻지 못하여서 쩔쩔매는 것이 얼만지 아시오? 그 리고 어느 좌석이든지 참예할 만큼 가르치려면 공이 여간 드오? 그리구 우선 구놈의 옷을 지탱해 내는 수가 있소? 기 생이라는 건 집에서는 굶더라도 나가서는 입는 것이 추레해 서는 안되는 것인데, 어지간한 애들은 하루에 몇 번씩 갈아 입어야 되지 않소? 우리가 다 겪어 본 장단이 아니오? 아우 님이나 내가 지금은 다 이꼴이 되었지만, 한창 당년에는 에 간다 제 간다 하지 않았었소 왜?"

하고 노파는 말을 하다가 끝을 맺지 아니하고, 일대 영화 와 만고 풍상을 추억하는 듯이, 한숨을 쉬고 담배를 한 모 금 잔뜩 빨아서 푸우 하고 내뿜더니,

"그까짓 소리 다 해 무얼 하겠소, 속만 상하지. 그러니까 지금은 기생보다 색주가가 나아요. 어지간히 가르쳐서 시조 장이나 부르고 잡가마디나 할 만하거든 나를 주시오. 확실 히 대답하시오."

하고 여러 번 다진다. 송씨가 대답하기 전에,

"아주머니, 그건 안 됩니다. 내가 먼저 와서 맞추어 놓았는 데 되겠어요?"

하고 김 선달은 송씨에게 눈을 끔적인다.

"그것은 형님 말씀이 옳소. 나도 그런 생각을 못하는 건 아 니오, 기생을 만들려면 몇몇해를 두고 그놈의 치다꺼리가 여간이 아니오. 기생이 된다 할지라도 인물이 도처 한다든 지 가무가 출중하다든지 하면 모르되, 그렇지 아니하면 여 간해 가지고 돈을 벌지 못할 것을 왜 모르겠소 마는, 요새 는 하두 지진 뒤에 올랐으니까 그러면 좋을까 저러면 좋을 까 망설이는 중이요. 어디 차차 봅시다.

송씨는 노파에 대한 대답을 어름어름하여서 결정하는 태도 를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돌아간 뒤에 송씨는 혼자 누워서 자기의 과거를 회 상하여 보았다.

자기는 일찍이 평양 기생으로 젊어서는 인물도 남만 못지 아니하고 가무도 상당하였으나, 그 중에도 수심가와 영변가 는 전 조선을 털어서 하나라고 하는 높은 평판을 받았었다.

그리하여 축음기 회사의 청으로 레코오드에 소리를 넣은 것 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귀족이나 부자들의 큰 연회에는 반 드시 자기가 참예하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정당한 시간비나 놀음채만으로도 수입이 상당하였다. 그런즉 그다지 돈이 부 족한 것도 아니오 사랑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으나, 어쩐지 사내들을 곯이지 아니하면 마음이 항상 부족하였다. 그중에 도 지위가 있는 사람이라든지 명예가 있는 사람이라든지 돈 이 있는 사람이라든지 하여간 무엇으로든지 남보다 나은 사 람이라면, 반드시 무슨 수단으로든지 그를 농락하여서 마침 내는 등골을 빼고야 마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것이 자기의 우월감으로, 조금 특별한 남자이면 향락의 재료로 삼는다든 지 단지 돈만을 탐낸다든지 하는 등의 자기의 필요로서 하 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자기에게 걸려들어서 신분을 망 치든지 재산을 털든지, 하여간 그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서 여지없이 되어야만 만족하게 생각하는 이상한 성격을 가 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참은 십여만 원의 재산을 가지고 호류계의 총애라고 하느니보다 상당한 세력을 가졌었다. 그 리하다가 차차 인심을 잃기 시작하매, 부르는 데도 없고 찾 아오는 사람도 없어서 문전이 냉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 산만은 지닌 것이 있어서 그것만하여도 족하게 평생을 잘 살터인데, 스스로 타락하여서 술도 먹고, 화투도 하고, 한때 는 아편까지 먹었다. 그리하여 불과 이삼년에 있는 재산을 다 털어 없애고 몸만 남으매, 그야 말로 광대한 천지에 갈 곳이 없고, 허다한 사람 중 돌아보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 리하여 평양에선 화류계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자기를 도와 주지 아니할 뿐 아니라, 도리어 타매(唾罵)하는 형편이 므로 도저히 거기서는 부지할 수가 없는 줄을 알고서, 집안 에 남은 허섭쓰레기는 헐가로 팔아 가지고 누구보고 온단 말도 없이 서울로 올라왔었다. 그리하여 서울서 기생질을 하여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나이도 지긋하고 하류계 라는 것은 경향을 물론하고 서로 연락이 있어서, 모든 사정 을 서로 연락이 있어서, 모든 사정을 서로 물금말금 아는 터이므로, 자기의 종적을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어 기생 되 기는 단념하였다.

그러고 보니 인간 만사에 자기가 해먹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처음엔 셋방 하나를 얻어 가지고 그럭저럭 깨 끗하지 못한 생활을 하다가, 뚜장이 노릇으로 나중에는 사 람 장사를 하기 시작하여서, 남의 계집애들을 꾀어 내기도 하고, 구차한 사람의 딸이나 혹은 다른 사람이 꾀어다가 팔 아먹은 계집아이를 돈을 조금씩 주고 사서, 그것을 길러서 기생으로도 넣고 작부로도 팔아먹은 것이 자기의 살아가는 길이었다. 그리하여 그러한 일로 돈냥이나 모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술과 화투로 손을 털곤,털곤 하였다. 그리 하여 언제든지 그 생활을 되풀이하면서 갈 테 안 갈 데, 할 소리 안 할 소리 밤낮 허덕이는 것이 스스로 불쌍하였다.

그리하여 시름없는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그러나 그것은 송씨가 과거와 현재를 뉘우쳐서 흐리는 눈물이 아니라. 다 만 자기의 신세가 고달프고 앞길이 막연하여서 흐르는 눈물 이었다. 송씨는 순영과 운옥이 돌아오는 소리에 놀라서 눈 물 흔적을 거두었다.

이틀이 지난 뒤에 순영의 옷은 일습이나 다 되었다. 순영 은 목욕하고 머리를 빗고 새 옷을 입은 것은 오후 뒤 시쯤 이었다. 순영은 옷을 다 입도록 웃는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순영은 그런 옷을 입어 보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별로 입 은 것을 구경조차 못하였던 것이다. 별무늬가 또렷또렷한 적삼, 꽃무늬가 끄먹끄먹하는 치마, 무늬는 없으나 무늬는 없으나 무늬 있는 것보다 더 좋아 보이는 엷은 자줏빛 단속 곳, 하얀 옥양목 버선........ 그렇게 차린 순영은 얼른 거울을 보도 싶으면서도 어쩐지 거울보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다가 웃는 입을 다물고 얼굴빛을 고치려고 하면서 조용히 거울을 보았다. 자기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딴 사람이 된 것 같 았다. 분홍 적삼에 비쳐서 불그레하게 된 두 볼을 봤을 때 에는 흥분된 마음이 가늘게 떨릴 만큼 기뻤다.

"옷이 꼭 맞는구나. 그 옷을 입으니까 딴 사람 같구나."

하고 송씨는 입을 벌리고 웃는다.

"딴 사람 같고 말고요, 어쩌면 저렇게 이쁠까! 에구 어쩌면?" 하는 운옥은 웃지도 않고 고개를 기울인 채 순영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아, 참 이쁘다. 어디 이리 좀 오너라, 보자. 옷태가 아주 자르르 흐른다."

송씨는 순영을 앞으로 오라고 손짓으로 가리킨다. 순영은 앞섶을 다시 여미고 발등을 내려다보면서, 초례청에 들어가 는 신부처럼 걸어와서 정면으로 서면서 웃음을 참는다.

"아, 참 이쁘다. 옷감이 감도 좋지마는 빛깔이 좋다. 그러 기에 아무리 일색이라도 옷을 잘못 입으면 박색이 되는 것 이야, 그러기에 사람은 옷이 날개거든. 아무리 잘났기로 옷 을 거지같이 입고 다니면 누가 알아주나. 그리고 바느질도 얌전히 하였다. 석새 베어 열새 바느질이라고, 옷감이 아무 리 좋아도 바느질이 잘못 해놓으면 모양이 안 나는 거야.

그러기에 매사가 규격에 맞아야 하는 것이야. 아무렇든 그 만하면 누가 인물 나쁘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인제 속을 잘 자쳐야지. 사람이 외양만 번지르르하고 속이 개차반이면 얻다 쓰니? 청보에 개똥 산게지. 이르는 대로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잘하고 해야지. 그러면 점점 더 좋은 옷을 해짖. 이 것뿐일까, 아무튼 그만하면 어디든 가도 빠지지는 않겠다.

발맵시도 아주 외씨 같구나. 여자는 수족이 잘 생겨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얼굴이 이뻐두 수족이 망하게 생기면 못 쓰 는 것이야. 천격스럽고 팔자가 드세고 여잘수록 수족이 작 고 이뻐야 한다."

송씨는 되는 대로 칭찬도 하고 훈계 비슷한 말도 하더니,

"그런데 발이 안 아프냐?"

하고 웃으면서 순영을 쳐다본다.

"조금 째이기는 해도 아프지는 않아요."

발이 지어서 아픈 것을 참고 있는 순영은 아프다고 대답하 기가 부끄러웠다. 아프지 않다고 말하면서 발가락을 꼼작거 려 보니 더욱 아픈 것 같았다.

"순영이가 그렇게 곱게 입구 섰으니까 초례청에 들어가는 새색시 같구나. 어디 나는 신랑이라구 초례 좀 지내 볼까."

하고 운옥은 순영의 앞에 가서 두 손을 마주 잡고 선다.

"얘는."

하며 순영은 부끄러워하는 얼굴에 웃음을 띤다.

"이런 미친년, 하릴없이 말괄량이야. 네가 무슨 신랑이냐.

이년아? 저리 물러나거라, 보기 싫다."

하고 송씨는 손바닥으로 때린다.

"신랑을 다 때리네."

하며 돌아서는 운옥은 아 보는 체하면서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순영을 보았다. 확실히 자기보다 이쁜 것 같았다.

"어쩌면 순영이는 정말 미인이야, 천하 절색이야."

운옥은 시기심이 났는지 상기가 되는 듯하면서 얼굴에 푸 른 기운이 돈다.

"순영이 앉아라. 정말 새 색시처럼 섰지 말구."

송씨의 말 끝에 쌍긋 웃는 순영은 옷이 구겨질까 봐서 조 심스럽게 앉는다.

순영은 자기의 몸은 앉더라도 옷은 선 채로 있었으면 좋을 듯하였다. 송씨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침을 도사린다.

"얘, 순영아."

송씨는 정중한 태도록 말 허두를 내었다.

"네."

순영도 침착하게 대답한다.

"너 인제 내일부터 공부를 해야 한다. 사람이라는 건 남녀 간 직업이 있어야 한다. 지금 세상엔 더구나 직업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내가 넉넉하면서야 너보고 벌어먹을 것을 배 우라고 하겠느냐마는, 내라야 넉넉지 못하고 하니까 논밭 전지는 물려 주지 못하더라도, 너희들 장래 벌어먹고 살 것 을 가르쳐 주어야 않겠니? 내가 좀 힘이 들더라도 공부하는 뒷바리지를 하여 줄 터이니, 내일부터 공부를 하여라."

"무슨 공부를 해요?"

순영은 그 사이에 보고 들은 것을 미루어서 공부하라는 의 미를 다소 모르는 것은 아니나 분명히는 알 수가 없는 일이 요, 또는 분명히 안다 할지라도 다시 물어 보지 아니할 수 가 없는 것이었다.

"지금 네가 학교 공부를 배우겠니? 사내들처럼 무슨 힘드 는 일을 배우겠니? 여자는 암만해도 힘 안 들이고 가만히 앉아서 벌어먹는 노릇을 배워야 하지 않겠니. 하니까 무엇 이든지 배우라고 하는 대로 배워라."

"글세, 무어에요?"

"무엇 힘드는 일이 아니다. 여러 동무들하고 가만히 앉아서 소리 배우는 것이다. 소리만 잘 배우면 돈도 생기고 호강도 하고 아주 좋은 것이다. 하니까 내일부터 선생님한테 다니 며 소리를 배워라."

그 말을 들은 순영은,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들어가라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운옥에게서도 그러한 말을 들었고, 송씨의 언동에서 그러한 눈치를 알았으나, 그래도 그 때에는 당장에 실행하는 일이 아닌지라 오히려 범범히 생각하였으나, 급기야에 송씨가 정식으로 내일부터 실행을 하라고 하는 바에는 막다른 골목이라 자기의 태도를 애매하 게 가질 수가 없었다. 순영은 상당한 교양이 있는 것은 아 니나, 학문학자인 아버지의 슬하에서 다소 문견이 있을 뿐 아니라, <동몽선습>이나 <격몽요결> 같은, 사람의 행실에 대한 글을 배우던 기억이 희미하나마 남아 있고, 기생이니 색주가니 하는 것을 분명히는 이해하지 못하나, 하여간 그 런 것이 여자로서 정당한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면 적으나마 교양이라면 교양이라고 할 수 있 는 그만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그와 반대되는 길로 인도하는 때에는, 아무리 나이 어리고 개성이 발달되지는 못한 순영으로도 즐겁게 복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는 그런 것은 할 줄 몰라요."

순영의 기색은 어디인지 결심이 있는 태도로 보이는 듯 하 였다.

"할 줄 모르다니? 누가 너더러 소리를 하라니. 차차 소리를 배우란 말이지."

"글세 그런 것은 배울 줄 몰라요."

"배워 봐야 알지, 배워 보지도 않고 배울 줄 모른다는 게 무슨 소리냐?"

"그런 것은 배우기 싫어요."

주저하다가 나오는 순영의 말은 용기가 없는 듯이 끝이 여 물지 못하였다.

"아니 네가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배우기 싫으면 안 배운 다는 말이냐?"

송씨는 얼굴에 푸른 기가 돌고 눈초리가 샐쭉하여진다.

"왜 말을 안해 이년아? 나 좀 쳐다보아라."

순영은 아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자기에게 그렇게 보살같 던 송씨가 당장에 악마같이 보인다.

"그래 소리를 안 배우겠다는 말이냐?"

송씨는 이를 악무는 듯하면서 순영에게로 다가 앉는다. 순 영은 놀라서 놀란 결에 뒤로 물러앉는다.

"왜 대답을 안 해, 왜 대답을 안 해 응? 왜 대답을 안 하느 냐 말이다."

송씨는 바짝 다가 앉는다. 순영은 대답을 아니하려는 것보 다 말할 용기가 없었다. 순영은 모진 주인의 채찍을 무서워 하는 어린 양처럼 벌벌 떨었다.

"아, 그래도 말을 안 해? 아가리에 짠지를 물었느냐, 왜 말 을 안 해 이년아?"

송씨는 순영의 귀때기를 번개같이 때리고 다시 주먹을 든다. "에구 잘못했어요, 배우겠어요."

순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면서 한손으로는 송시의 주먹을 막고 한손으로는 눈물을 씻는다.

"아, 이년아 뉘 손을 막아? 네가 어느새 부터 맞장구를 치 려구 하는구나. 죽더라도 다소곳이 앉아서 당할 일이지."

송씨의 주먹은 어느새 순영이 어깨죽지를 때린다. 순영은 송씨의 주먹을 막으려던 손을 얼른 오그리고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느끼는 소리로 참으면서 운다.

"에구 어머니, 참으세요. 배우겠다는데 무얼 그러세요? 고 만 참으세요."

하고 운옥은 송씨를 붙들어서 진정시키려고 한다.

"아 이년 보게, 가재는 게 편이라고, 잘못하는 년을 보고서 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분통이 터져서 죽겠는 나를 보고서 참으라?"

송씨는 씩씩거리면서 운옥을 보더니

"이년아, 너도 한 번 맞아 보아라. 맞이 어떤가."

하고 때리려고 하는 것을 운옥은 빨리 피해서 구석으로 간다. 그것을 보는 순영은 너무도 무서워서 울지도 못한다. 그 러나 새로 입은 옷이 상할까 하여서 몸을 조심스럽게 가? 다. 방안은 잠시 조용하였다. 송씨는 한풀이 죽은 듯이 물러 앉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뉘 탓 뉘 탓 할 것 있니, 다 내 탓이지. 내가 인복이 없어 서 그렇지, 배우기 싫거든 고만두어라. 남의 자식을 억지로 가르칠 수도 없는 이이요, 또 배우기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가르치면 무얼 하니? 내가 싫거든 지금이라도 내 집에 있지 말고 나가거라. 나가기는 나가지만 내가 너를 거저 보낼 수 는 없다. 내가 너를 데려오기에 부비(浮費)가 백여 원이나 들었다. 대강대강 쳐보아도 예서 사람이 둘이나 내려갔지, 게가서 며칠 묵새겼지, 또 세 사람이 차비 들여서 올라왔지, 또 원산서 물인지 불인지 빠져서 이틀이나 치료하느라고 돈 들었지....... 하니까 대강 쳐도 돈이 백여 원이야. 그것은 네 가 해놓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우선 그 옷을 벗어 놓아라.

그리고 입고 온 옷을 도로 입어라. 그리고 당장이라도 돈을 해놓고 나가거라. 너 싫다는 것을 내가 억지로 가르칠 도리 도 없고, 또 네가 뭐라고 내가 거저 두고 먹이구 입히구 하 겠니? 하니까 어서어서 네 집에 기별을 하든지 어떻게 하든 지 백여 원을 물어 놓고 나가거라. 그리고 우선 그 옷을 벗 어라."

송씨는 그다지 골은 내지 아니하였으나 평탄치 아니한 눈 으로 순영의 눈치를 본다. 순영은 무어라고 대답을 하여야 좋을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돈 백여 원을 물어 놓는 것은 자 기의 힘으로 문제도 아니되는 것인즉, 걱정할 만한 일도 아 니나 평생에 처음 얻어 입고 자기의 몸보다도 더 아끼는 비 단 옷을 벗어놓으라는 것은 천하에 제일 괴로운 일이었다.

"내일부터라도 소리를 배우겠어요. 그리구 무어든지 하라는 대로 하겠어요. 잘못했으니 살려 주세요."

순영은 실정으로 애원하였다.

"네가 다급하니까 배운다고 하지, 또 간이 삭으면 배우기 싫으니 좋으니 하겠지."

"아니에요, 잘 배울 테요."

"정말 잘 배워?"

"네."

"정말 이냐?"

"네 잘 배우겠어요."

"너 그럼 다시 배우네 안 배우네 하는 소리를 하면 그 때 는 부비 든 돈 백여 원을 곱장이를 받고 옷도 빨가벗겨서 그대로 내쫓는다."

"다시 그러면 죽어도 한(恨) 가를 못하겠어요."

"정녕 그렇지?"

"네."

"너 운옥이도 지금 순영이 하는 말을 들었지?"

"들었어요."

"세상 일이라는 것은 알 수가 없어서 증거를 세워 두어야지." 송씨는 자기의 수단이 능히 성공할 것을 예기한지라 가소 롭게 웃어 버렸다.

"얘, 순영아."

송씨의 말소리는 기운을 낮추어서 부드러웠다.

"네."

하는 순영의 기분도 조금 회복되었다.

"너 나한테 맞은 데가 아프냐?"

"괜찮아요."

"내가 너를 아프라고 때린 것은 아니다. 내가 너를 생각하 여서 때린 것이다. 너도 생각하여 보아라. 내가 너하고 살이 섞였니 피가 섞였니, 언제 한 번이나 코빼기나 보기나 하였니. 그런데 너를 천리 타향에서 노자를 들여서 데리고 온 것은 소관이 하사냐? 너도 나도 너를 길러서 재미를 보고 너도 내게 의지하여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니. 그래서 나는 아무쪼록 너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너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내가 네 덕만 보자는 것은 아 니다. 너 도 무엇이든지 배워서 장래에 굶지 아니하고 살 도리를 하지 않아야 하겠지? 그래서 네게 알맞은 소리를 배 우라고 하는 것인데, 네가 첫마디에 배우지 않겠다고 앙탈 을 하니 낸들 화가 나겠니, 안 나겠니? 어린 소견이라도 생 각하여 보아라. 그래서 홧김에 한 번 때렸으나 낸들 너를 사정 없이야 때렸겠니? 하니까 내일부터라도 다니며 공부나 잘 하여라. 그리고 인제 나보고 어머니라고 그래라. 낳는 것 도 부모요 기르는 것도 부모다. 내가 너를 길러서 평생을 같이 살 터인즉 모녀간이 안 되겠니? 그러니까 나보고는 어 머니라고 하고, 저 운옥이보고는 언니라고 그래라."

"네."

하는 순영은 그 말에 정이 드는 듯하였다.

"그래 내일부터 공부를 하려면 오늘 가서 말을 해야 할 터 인데, 나하고 같이 가자."

하고 일어서려다 다시 앉아서 어디로 가야 좋을는지를 생 각하여 보았다. 순영을 기생을 만들자면 권번(券番)으로 가 서 공부를 해야 좋을 것인데, 요전에 시구문 안 노파의 말 도 말이거니와 기생 노릇을 할 만큼 배우려면 여러 해를 지 나야 되겠고, 우선 입학금 오 원이 들어야 되겠은즉 당장에 그것도 걱정이요, 만일 그럭저럭 조금만 가르쳐서 색주가로 나 보낸다면 사숙(私塾)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줄로 생각하 였다. 기생이냐, 색주가냐? 권번이냐, 사숙이냐? 두 가지를 놓고 꼲다가 마침내 우선 사숙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송씨는 순영을 데리고 시궁골 사숙으로 찾아갔다. 집은 고 요하였다.

"선생님, 계셔요?"

하고 송씨는 문을 열고 들어선다. 방은 제법 크다. 아랫목 에 육십 가량 되어 보이는 노인이 앉았는데, 풍골이 무던하 나 조금 궁기가 있어 보인다.

"선생님, 안녕하셔요?"

"이거 얼마만이요? 한잠 못 봤구료."

"그새 시골 좀 갔다 오느라고 한참 못 뵜습니다."

"어느 시골이요?"

"강원도 좀 갔다 왔어요."

"좋은 데 갔다 오셨구료. 금강산 가셨읍디까?"

"금강산이 무슨 금강산이에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무 슨 호강으로 구경 다니겠어요."

"그래 시골 가서 재미나 보셨소?"

"재미가 무슨 주으이 양식이에요, 아이 하나 데리러 갔다 왔지요."

하고 송씨는 순영을 돌아보고,

"너 참 선생님께 인사 여쭈어라."

하니 순영은 선생님의 정면으로 가더니, 공손히 주저 앉아 서는 팔을 양쪽 옆으로 깊고 색시절을 한다. 그러고 아무 말도 없이 일어선다. 그것을 눈여겨 보던 송씨는

"너 첨이니까 그렇지만, 절도 그렇게 않는 것이다. 그렇게 주저앉아서 하지 말고 앉을 때에 무릎을 꿇앉아서 팔을 앞 으로 짚고, 또 고개만 숙이지 말고 허리까지 굽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어나지 말고 그대로 앉아서 「안녕합시오?」 하고 인사를 하는 법이다. 말로만 일러서는 잘 모를 터이니까 나 하는 것을 보아라."

하고 일어나서 개생의 절로 한 번 얌전스럽게 절하고 「안 녕합시오?」하는 인사까지 하더니,

"인제 절을 이렇게 하여라."

하고 순영을 본다.

"이제 차차 하지 대번에 되겠소, 기생의 절도 잘하기가 어 려운 것이요. 요새 미친년들처럼 꾸뻑꾸뻑하는 것이 그게 기생의 절이요? 그런데 저 애가 이번에 시골 가서 데리고 온 애요?"

하고 선생이 말한다.

"그렇습니다."

"그 아이가 괜찮아 보이는데, 시골 아이라도 그렇게 무무한 집에서 자란 것 같지도 않고 얌전하여 보이는데."

"글세 어떨지는요. 그런데 선생님께 수고를 끼쳐야 되겠습 니다."

"수고가 무슨 수고요."

"이것 소리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거야 수고될 것 있소? 다른 애들도 가르치는데."

"그런데 어찌 이렇게 조용해요? 학도 아이들도 없구요."

"여기 있는 아이들은 배워 가지고 제 집에 가서 익히는 애 들이 많고, 여기서 공부하는 아이들도 있지마는 저녁 때가 되니까 다 갔지요."

"그런데 이 애를 좀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 쉽게 배우도록 해주세요. 권번으로 보낼까 하다가 거기 가면 규칙이니 무 어니 성가시기만 하고, 또 그것을 다 배우려면 부지하세월 이 아니에요. 선생님처럼 잘 가르치는 이가 있나요? 그래서 선생님 사숙으로 데리고 왔지요. 아무튼 월사금은 무슨 짓 을 하든지 또박또박 낼 테구요."

"지금은 모두 쉽게 배우기로만 작정이야, 그러면 무엇까지 나 가르치시려우?"

"작게 가르칠 수가 있나요, 시조장이나 하고 잡가나 좀 가 르치고 그렇지요, 뭐 별수 있어요."

"지금은 거의 다 그렇단 말이야. 인제 기생이니 소리니 다 망했소. 우리네 젊어서만 해도 기생이 잡가가 다 뭐요. 으레 소리를 배우려면 첫 번에 목 풀고 사설 아느라고 시조를 조 금 배우지요. 평시조 여창지름, 그리고는 정말 배우는 것은 처음에 우조(羽調)를 배우고, 그 다음에 계면(界面)을 배우 고, 인제 그 다음은 가사지요. 그리고 풍류 배우고 그렇지.

잡가라는 것은 입에나 대 보나요. 하더니, 지금은 시조나 몇 장 배우면 고만 「에라, 놓아라 못 놓겠다」 로 들어가니, 노래꼴이 될 수가 있소? 하니까, 지금은 그게 소리지 노래 가 아니오. 노래와 소리가 다르지요. 옛날로 치면 노래는 양 반이요 소리는 상놈이요, 그렇지요. 노래라니 노래도 다 망 하였소."

선생은 세상 일의 허다한 변천에 병든 듯이 한숨을 쉬면서 허연 수염을 어루 만진다.

"그 말씀 다 하여 무엇합니까? 그 전의 좋던 풍속 다 없어 지고 남은 것이 있나요. 그러나 어찌합니까, 성인도 시속을 따른다고 세상 되어 가는 대로 지내지 어쩌는 수가 있어요?

더구나 우리 같은 인생이야 파리 같은 목숨으로 동쪽이 번 하면 세상인가 보다, 배부르고 등 더우면 살았나 보다, 그렇지. 그전 이야기를 해 소용이 있어요?"

송씨도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얼굴에 참연한 빛을 띤다.

"그나 그뿐이요, 인제 조금 있으면 조선 소리는 다 없어집 네다. 지금도 서양 음악인지 무언지 하는 것이 들어와서 그 것들만 숭상하지, 조선 소리는 천덕꾸러기로 돌리지요. 지금 사람들은 서양 멋은 다 좋고, 조선 것은 다 나쁜 줄로 생각 하지마는 그럴 리가 있나요, 음악이야 조석 음악을 따를수 가 있나요. 노래를 말하여도 평조? 우조?계면, 시조로도 낙 (樂)?언락(言樂)?편락(編樂)..... 여러 가지가 있고 그 외에도 한닢(大樂)이니, 반닢(半樂)이니 존자즌한닢(頭樂)?중허리(中 擧)?막내는 놈(平擧)?만횡(萬橫)?소용(騷聳)........그외도 이루 다 말할수 없소. 그러한 노래라든지 풍류라 하더라도 다른 것은 그만두고, 우선 장구로만 말하여도 지금은 한껏 해야 시조 장단이나 치고 굿거리나 잡가 장단 그런 것이지요, 하 지마 이런 것이 아니오. 장구 장단이 초장 이십점, 이장 십 칠 점, 삼장 이십삼 점, 중념(中念) 십 점, 사장 십칠 점, 오 장 삼십 점, 대념(大念) 삼십삼 점............. 무도 일백 오십 점이요. 그리고 갖은 풍류로 말하면 양금이니 거문고니 퉁 소니, 어떻든 금석사죽포토혁목(金石絲竹匏土革木)여덟 가지 요그려. 그것을 척 하고 앉았으면 참 신선 같지요."

하는 선생은 할 말이 아직 멀었다는 듯이 담배를 붙인다.

"지금은 그것을 아악(雅樂)이라고 합니다. 혹 이왕직(李王 職) 아악부에 가서 구경을 하였는지 모르겠소 마는, 그 악사 들이 홍의(紅衣)를 입고 앉아서 궁중에서 하는 풍류를 하는 것을 보면, 곧 신선이 하강한 것 같지요. 여북하여 풍류를 정 잘하면 봉황이 와서 춤을 춘다고 하였소. 그렇게 좋은 풍류가 다 없어져 가고 서양 풍류라는 것이 다 뭐요? 한 번 은 공회당에서 서양음악회를 한다고 하기에,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고 구경을 갔었지요. 했더니 소리를 한다는 것이 목소리를 떨리게 하는 것뿐입디다그려. 성한 사람이 왜 오 뉴월에도 떠우? 학질 들린 사람이 하였으면 잘하겠더군. 그 렇게 떨다 마는 것을 성악이라나 뭐라나 하고, 풍류라는 것 을 보니까 그게 풍금이라나 피아노라나 한데, 발재봉틀 안 있소 왜? 하릴없이 그것이야. 하는 체격도 두 발로 눌러 가 면서 양복 짓는 것 같은데, 삐빼삐빼하는 소리가 나긴 나나 재미라는 것은 한푼어치도 없고 또 그것은 이름이 뭐라더라 한데, 생김새는 정구라고 학생들 공치는 것 안있소, 왜? 그 공채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것을 턱 밑에다 대고서 고개를 삐뚜름하고 요두전목(搖頭顚目)을 하면서 하는데, 우선 하는 체격이 한 푼 주고 보라면 두 푼 주고 달아나게 생겼고, 소 리는 하릴없이 장타령하는 풍각장이 깡깡이 써는 소리와 마 찬가지라. 한데 그것이 좋다구 박수들을 하고 야단입디다.

그것은 그 소리가 좋아서 박수하는 것이 아니고 서양거라 하니까 덮어놓고 그것은 좋은 게거니 하고, 또는 서양음악 을 아는 체하기 위하여서 공연히 손바닥을 뚜드리는 것이 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우."

선생은 자못 흥분되어서 말을 한다.

"그렇고 말고요, 나는 구경은 못하였지마는 모두들 그렇다 구 하더군요. 서양 음악이니 뭐니 하지마는, 노래와 풍류는 조선 것을 따를 수가 있나요."

하고 송씨는 선생의 비위를 맞추어 주었다.

순영은 자기가 배우려는 조선 소리와 풍류가 대단히 좋아 서, 서양 음악보다 낮다는 말에 다소 위안이 되는 듯하였다.

"너 몇 살이냐?"

선생은 말 머리를 순영에게로 돌린다.

"열네 살이어요."

순영은 앉은 자세를 다정하게 고친다.

"이름은?"

"장 순영이어요."

"그래 소리 좀 배워 보겠니?"

"네."

"그래, 배워 보아라. 그런데 사람이 무엇이든지 안 배우면 모르되, 배우면 철저히 잘 배워야 되는 것이다. 배웁네 하고 흥뚱항뚱해서는 못 쓰는 것이야. 그러니까 첫째 공부를 잘 해야 하는 것이요, 또 품행이 단정해야 하는 것이야. 몸가지 는 것이라든지 말하는 것이라든지 다 단정하여야 하고, 동 무끼리 쌈을 한다든지 어른에게 불공하게 한다든지 그런 것 은 다 못 쓰는 것이야. 그러니까 내일부터라도 아무쪼록 공 부를 잘하고 품행을 잘 가지고 그래라. 그리고 너의 어머니 를 잘 섬겨야 된다. 무슨 말이든지 거역하지 말고 봉양도 잘하고...... 첫째 공부를 잘하는 것이 어머니 뜻을 받는 것이다. 너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하는 은혜가 좀 끄냐? 생 아자도 부모요 양아자도 부모라고 하였지마는, 실로 말하면 양육하는 은혜가 더 크다. 그리고 스승도 섬겨야 하는 것이다. 너는 그런 문자를 모르겠지마는, 군사부(君師父) 일체야, 인군, 스승, 아비, 그 세 가지가 같은 것이야. 하니까 스승이 라는 것이 존중한 것이 아니냐. 너더러 나를 위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리는 도리대로 차려야 하는 것이다.

하니까, 아무쪼록 공부도 잘하고 품행도 잘 가지고 그래라."

선생은 점잖은 태도로 일장의 훈계를 하였다.

"네."

하는 순영은 새로운 정신이 나는 듯하였다. 처음에 그러한 소리나 춤 같은 것을 가르치는 데는 정당한 곳이 아니리라 고 짐작하였던 것인데, 선생이 상당한 도리를 말하는 것을 듣고서는 마음이 새롭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순영은 내일 부터 다니기로 하고 송씨를 EK라서 집으로 돌아왔다.

송씨가 돌아와서 옷을 갈아 입기도 전에

"편지요."

하고 들어오는 체부는 안마당에 들어와서,

"송 정자(宋貞子)씨 도장 내셔요."

하고 가방에서 편지를 꺼낸다.

"어디서 왔어요?"

하고 송씨는 반갑게 일어나서 문을 연다.

"목포서요."

"응, 목포서 왔어요?"

송씨는 경대 서랍에서 갑도 없는 나무 도장을 꺼내어서 그 대로 내준다. 체부는 도장을 들여다보더니 자기가 가지고 다니는 인주에 찍어서 주고서 나간다. 송씨는 편지를 받아 들고 방으로 들어오며,

"목포서 왔으면 운옥이 네 일 땜에 왔구나?

하고 운옥을 본다.

"글쎄요, 이 달 초승에 편지한다고 하였으니까 그런 게지요. 아마 돈도 보낸 것이로구면."

운옥은 기뻐하면서 송씨의 앞으로 다가 앉는다. 송씨가 편 지를 뜯어서 안경을 쓰고 보려고 하는데, 운옥이 먼저 달려 들어서 편지 속에 있는 돈표를 내어 보더니

"어머니, 돈이 삼백십 원이야."

"돈이고 무엇이고 가만히 좀 있거라. 편지 좀 보아야지."

송씨는 돈표를 빼앗아서 손에 쥔다.

"어머니, 그럼 편지 내가 볼게."

하고 운옥은 편지를 읽는다. 그 편지 사연은 그전에 약속 한 대로 차금(借金) 삼백 원과 차비 십원을 보내니 운옥을 삼년 작정하고 작부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송씨는 편지와 돈표를 꼭꼭 싸서 주머니에 넣더니,

"너는 인제 좋겠다. 갑갑하다고 어디로 못 가서 안달을 하 더니, 나 없는 데 가서 가로 뛰고 세로 뛰고 네 마음대로 하게되면 좀 좋겠니."

하고 웃는다.

"좋기는 무에 좋아요. 집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좋지. 그런 데 가면 종일 술 팔고 밤잠도 못 자고 여러 사람에게 시달 리고, 좋기는 무에 좋아. 평양 가서 얼마 있는데도 귀찮아서 죽을 뻔했는데."

운옥은 말은 그리 하여도 실로는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부자집 개처럼 가만히 누워서 먹으면 좋지만, 그러면 코아 래 들어가는 것이 있어야지. 나도 네게 들인 돈을 반절이라 도 건지고 너도 차차 네 아람치로 돈을 모아야 나중에 살지. 그런데 가서 너만 눈치 있게 돌면 한 달에도 몇십 원씩 은 사전이 생길 것이다. 그런 것은 암만 많이 생겨도 다 네 것이지 누가 한 푼인들 달라겠니. 그리고 네가 말은 그래도 나하고 일 년만 같이 있으면 갑갑증이 나서 병이 날 것이다. 안 그러냐, 바른 대로 말을 해 봐라."

운옥을 보고 눈웃음을 치는 송씨는 다시 순영을 본다.

"갑갑하기는 하지마는 설마 병이야 날라구. 에구 어머니두.

하지만 좋으나 궂으나 할 수 있어요? 우선 어머니가 차금을 받아 쓰셔야 할 터이니 어떻게 해요."

"차금을 받으면 나 혼자 먹고 사는 것이냐? 다 같이 먹고 살구 나중이라도 한데 먹고 살 것이지. 마뭏든 오늘 치장을 다 차려라. 그래, 내일은 떠나가야지."

하고 행장의 준비를 재촉한다. 운옥은 한편으로는 빙긋빙 긋 웃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한숨을 쉬어 가며 섭섭한 기색 을 짓는다.

순영은 잠잠히 있으나 그것은 다마 운옥의 일이 아니라 얼 마 아니 되면 반드시 자기에게도 그러한 일이 닥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운옥이가 그러한 곳으로 가는 것을 그 다지 싫어하지 않는 것은 본다면, 그러한 일도 사람으로서 아주 하지 못할 일은 아닌 게라고도 생각하였으나, 하여간 그러한 일이 사람에게 행복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만은 결정되어서 아무 시름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튿 날 운옥이 떠날 때까지 순영은 대단히 섭섭하여서 정든 형 제를 작별하는 것 같았는데, 운옥이 순영에게 대한 모든 행 동과 표정은 특별히 냉담할 뿐 아니라 심히 불쾌하였다. 순 영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튿날은 순영이 오직 하나 인 정든 동무를 작별하고 소리 공부를 다니게 되었다.

순영이 사숙에 갔을 때는 벌써 다른 아이들이 많이 와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시조도 배우고 잡가도 배우고 여러 가 지를 배우는데, 혼자서 따로 배우는 아이도 있으나 대개가 몇씩 패를 WK서 한 가지 소리를 같이 배우는 것이 많았다.

먼저 온 아이들이 다 배운 뒤에 선생은 순영을 여러 학도에 게 소개하더니,

"너 그래 오늘부터 소리를 배우겠니?"

하고 순영에게 묻는다.

"네."

하고 순영은 대답은 하나 대단히 수줍어하고 어려워하는 기색이 나타난다.

"그래, 배울테면 하루라도 속히 배워야지. 한데 맨 첨에는 시조부터 배우는 법이다. 시조도 여러 가지가 있지마는 우 선 평시조를 먼저 배우고, 그 다음에 여창지름을 배우고, 그 리고 잡가를 배우는 법이다. 시조도 처음에는 잡스럽고 음 란하고 그러한 시조는 배우지 않는 법이다. 예전 성현네가 지으신 좋은 시조를 배우는 법이다. 내 시조 사설을 하나 일러 줄 터이니 들어 보아라."

하고 선생은 조금 생각한다. 순영도 시조라는 것은 무엇이 며 또 성현네가 지으신 것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온 정신을 다하여서 말하기를 기다린다.

"이 몸이 죽어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외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시조를 말하는 선생은 다시,

"이것은 우리 조선의 유명하신 정 포은(鄭圃隱) 선생이 지 으신 시조다. 정 포은 선생은 누군고 하니 고려 때에 벼슬 하시던 어른으로, 나라가 망할 때에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 고 충절을 지키다가, 선죽교(善竹橋)에서 남에게 칼을 맞아 서 돌아가셨는데, 선죽교라는 것은 그 때에 난 이름이다. 왜 선죽교라고 하였는고 하니, 정 포은이 돌아가실 때에 그 피 가 돌다리에 묻었는데 그 피 묻은 자리에서 대가 났구나.

그래서 그 다리 이름을 착할 선자, 대죽 자, 선죽교라고 지 은 것이다. 피 묻은 돌다리에서 금방에 새파란 대가 났으니 여간 훌륭한 일이 아니냐? 그러하신 어른이 지으신 시조다.

하니까 나중에는 별별 잡소리를 다 할지라도 처음에는 그러 한 좋은 소리를 배우는 것이다."

하고 다시 그 사설의 뜻을 설명하는데, 특별히 「임」이라 는 말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였다.

임이라는 말음 무식한 사람들은 서방님이나 정든 임이나 그러한 데만 쓰는 말인 줄 알지마는, 그런 것이 아니라 흔 히는 임금님을 임이라고 써 왔고, 그 외에도 부모라든지 부 부든지 나라든지 어디든지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임이라고 쓴다는 것을 말하였다.

순영도 그 말을 들을 때에 한 마디도 빼지 아니하고 정신 차려 들었다.

선생은 다시 시조에 대한 초장, 중장, 종장의 구별을 말하 더니,

"내 한 번 시조를 부를 테니 너도 그대로 하여라."

하고 목을 가다듬어서 그 시조 한 방을 다 부르더니,

"너두 나처럼 해 보아라."

하고 순영을 보고 웃는다. 다른 아이들은 자기네 하던 것 은 그치고 순영에게 가깝게 모여든다. 순영은 시조를 부르 기는커녕 부끄러워서 어찌 할 줄을 몰랐다.

"대번에 잘하겠니. 내가 한 마디씩 할 터이니 그대로 따라 해 보아라."

하고,

"이 몸이....."

하고 초장을 내더니

"이렇게 해봐라."

하고 순영을 본다. 순영은 더욱 주눅이 들어서 고개를 들 지 못한다.

"얘 채란아, 네가 한 마디 해보아라. 너 하는 것을 보고서 순영이도 하게."

하고 맨 뒤에 앉은 아이를 부른다. 그 아이는 조금도 서슴 지 않고서 부른다. 순영은 그 아이가 부르는 것을 보고서 자기도 속으로 그 아이의 목청을 따라서 불러 보았다.

"저것 보아라, 너만한 아이가 부르지 않니? 너도 불러 보아라. 또 내가 할 터이니 나 하는 대로 불러 보아. 처음에는 잘 못하여도 괜찮은 것이다."

하고 선생은 다시

"이 몸이......"

하고 부른다. 순영은 선생님이 하라고 하기 전에 죽을 용 기를 내서,

"이 몸이........"

하고 불렀다. 그러나 순영은 선생의 목청을 따르지 아니하 고 아까 부르던 채란의 목청을 따랐다.

"어 잘한다. 목소리가 좋은데, 장차 명창이 되겠다. 처음에 그렇게 부르면 아주 잘 부르는 것이다. 어, 인제 새 명창 하 나 났구나."

선생은 한 마디씩 그 시조를 다 가르쳤더니, 순영은 그대 로 따라서 다 하였다. 선생만 순영을 칭찬할 뿐 아니라,

"잘한다."

"재주 있다."

"목청이 좋다."

하는 등의 칭찬이 여러 아이들 입에서 나온다. 순영은 용 기가 나고 기운이 생겼다. 순영은 불과 한 시간 동안에 그 시조를 다 배웠다. 그리고 오전 중에 거기서 익히다가 점심 때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 소리를 배웠니?"

송씨는 순영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묻는다.

"예."

하는 순영은 기색이 활발한 듯하였다.

"그래 배울 만하던?"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배웠지요."

"무엇을 배웠니?"

"시조를 배웠어요."

"무슨 시조?"

"평시조라나요."

"으레 평시조겠지, 그런데 사설은 뭐야?"

순영은 시조 사설을 말로 외었다.

"그런 시조가 있기는 하지마는 흔치 않은 것인데, 허다한 시조에 왜 하필 죽네 사네 하는 시조를 가르쳤을까?"

"선생님이 처음에는 그런 좋은 시조를 배워야 한다고 그러 시던데요."

"그래, 어디 배운 대로 한 번 불러 보아라."

순영은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아니한다.

"어디 불러 보아, 여럿이 있는 데서도 불렀는데 나 혼자 있 는데 무에 부끄러우냐."

순영은 두 무릎을 겹 개고 앉아서 그다지 어려운 기색도 없이 불렀다.

"아, 참 잘 부른다. 그렇게 하였으면 잠깐 배우겠다. 세청 이 조금 덜 된다마는 그것은 차차 되겠지."

송씨는 매우 기뻐한다. 순영도 기뻤다.

"집에 와서도 늘 익혀야 된다. 무엇을 할 때든지 잠을 잘 때라도 속으로 익혀야 한다. 그래야 잠깐 늘지. 부지런히 배 워라."

송씨는 친절하게 부탁을 한다. 순영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날이 갈수록 순영은 정신상으로 적지 아니한 변화가 생기 었다. 처음 배우던 시조의 사설에서 의외의 자극을 받은 뒤 로 무엇을 알아보려는 생각이 났다. 자기가 날마다 소리를 배우는 중에서도 기계적으로 소리만을 배우지 아니하고, 사 설의 뜻이나 곡조에 대한 속내를 알려고 할 뿐 아니라, 기 회있는 대로 선생에게나 동무에게나 모든 일의 의심나는 것 을 물어서, 차차 알아가는 것이 여간 재미있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집에서도 송씨와 단 둘이만 있는 바에, 자기의 공부 하는 것도 부지런히 하고 송씨의 비위도 거스르지 아니하므 로, 차차 정이 들어서 별로 고통이 없었다.

순영이 이따금 시름없이 앉아서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하다 가, 가만히 아버지의 사진을 내어 본다든지 어머니의 저고 리를 들추어본다든지 하는 것과, 자다가 자기 집을 꿈꾸고 서 고향 산천을 그려본다든지, 또는 자기의 앞길을 상상할 때에 명랑한 천당이냐 흑암의 지옥이냐, 하는 갈피를 잡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것쯤이야 없을 수가 없지마는, 그러한 어슴푸레한 환상이 또박또박한 현실을 디디고 넘을 수는 없 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