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그냥 불고

1 편집

산허리로 무심히 넘는 해를 등에다 지고 동쪽으로 길이 뻗은 신작로 위로 흘러내리는 오렌지빛 놀 속에 물들며 물들며 순이는 걷는다.

오늘 하루를 두고는 다시 오지 않을 이 해(年)의 마지막 넘어가는 저 해(日)가 인젠 아주 자기의 운명을 결단하여 주는 것만 같다. 저 해가 넘어가도 그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이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그이다. 그럴진대 차라리 저 해와 함께 운명을 하고도 싶다. 저 해에 희망을 붙이고 살아오기 무릇 일 년이었다. 앞으로 기다릴 저 해가 아니었던들 자기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는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다가 순이는 또 문득 걸음을 세운다. 대체, 가면 어디까지 가자고 해도 넘어가는데 젊은 계집년이 무작정으로 이렇게 걸어만 가는 것인가.

‘오긴 무에 온다구, 죽었을걸…….’

아주 단념을 하자고 하다가도 차마 단념이 가지 않는 안타까운 한 가닥의 미련 -

“……염려 마라 살았다. 이 해 안으로는 단정 들어서리라.”

지금도 그 소리가 또렷하게 귓전에 남아 있다.

싸움은 끝났다고 해도 일제히 들어서는(출정했다가) 사람들이 아니었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츠음츰 들어서는 사람들었다. 시일이 차면 어련하랴 하였으나, 라바울 갔던 사람까지 들어서는데 일본 갔던 남편의 소식이 이렇게도 없는 덴 애가 키지 않을 수 없었다. 불안한 속에서 기다리며 기다리며 날을 세다가 그 해도 설을 넘길 적엔 그대로 앉아만 있을 수가 없었다. 생사의 여부를 무당에게 물었던 것이, 무당의 대답은 이렇게도 분명하였던 것이다. 무당의 말이라 믿을 것이 있으랴 하다가도 자꾸만 그대로 믿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해가 다 저물었다 하더라도 이 하루까지는 어련한 이 해다.

마지막 이 날이라고 들어오지 말랄 법 있으랴, 혹시……? 하는 한 가닥 희망이 다시금 가슴속에 정성껏 무젖어 든다. 오면 차에서 내려올 테지, 정거장까지 마중을 가보자, 치맛자락에 바람을 순이는 다시 몬다.

깊바닥 위에 깔렸던 놀이 차츰 그 빛을 잃는 걸 보면 보지 않아도 산 너머로 무썩무썩 깊이 해는 이제 아주 떨어지는 고비에 접어들고 있음을 알겠다.

그러나 놀이 걷히면 어둠이 바뀌어 깔릴 밤길에의 공포도 지금 순이는 모른다. 준비를 하고 나선 길이 아니다. 두루마기도 목도리도 없건만 저녁 바람의 차가움도 지금 순이는 모른다. 모든 무서움이 지금 순이에게는 없다.

다만 간다는 것, 오늘 하루 안으로 생각이 닿는 끝까지 간다는 단순한 일념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지금 순이의 생명이다.

2 편집

산 모롱고지에 별안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가 하더니 시꺼먼 물체가 씩씩거리며 산허리를 꺾어 돈다. 기차다.

어느새 다섯시 차일까. 이 차가 그 차면 인제 객차는 없다. 보얗게 얼은 유리창 속에 담뿍 담기운 사람들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얼른얼른 칸마다 연달린다. 분명일시 객차다. 발락발락 좀더 서둘러 걸었던들 정거장에서 저차를 마음 놓고 맞았을걸…… 저 차와 같이 걸음을 달릴 수가 없을까. 그이는 죽었느냐 살았느냐 최후의 판단을 싣고 자기의 운명을 결단하여 줄 이해의 마지막 객차가 지금 들어오는 것이다.

가로놓인 신작로 한복판의 레일을 타고 기차는 정거장을 바라보았다. 뀌익 소리를 냅다 지르며 숨이 찼다.

지리한 몸을 쿠션에서 일으켜 모자를 떼어 쓰고 트렁크를 시렁에서 내리는 손님들이 순이의 눈에는 보인다. 그 손님들 가운데서 그이의 모습을 순이는 찾는다. 그러나 내릴 준비를 하는 그이이기보다 떠나보내던 그이의 모습만이 눈앞에 생생하다. ‘祝 金鎭秀君 入營[축 금진수군 입영]’이라는 면장의 글씨로 정성껏 씌어진 붉은 다스끼를 가슴에다 걸고 눈썹 위까지 푹 눌러쓴 사각모를 차창으로 내밀어 플랫폼에 선 어머니와 자기를 말없이 번갈아 바라보던 첫혈된 두 눈, 이윽고 차가 바퀴를 움직이기 시작할 때 와아 하고 아들을, 손자를, 동생을, 남편을 보내는 가족들의 마지막으로 모습이나 한 번 더 다시 보리라는 죄어드는 분비 속에 붉은 다스끼들이 창턱마다에 가슴을 걸고 내미는 손 가운데는 그이의 하이얀 손도 자기의 눈앞에 있었다. 저도 모르게 쭈룩 흘러내리는 눈물이 뺨 가에 뜨거움을 느끼며 저도 말없이 손을 내밀어 그이의 손안에 가만히 넣을 때 따스한 온기가 꽉 부르쥐는 힘과 함께 뼛잠까지 스며드는 듯하던 생각, 차 안의 손과 차 밖의 손이 서로 붙들고 늘어진 무수한 손들, 놓으면 다시는 잡아 볼 수 없는 손 안에 사무친 정이 서로 끄는 손들은 굴러나가는 차바퀴에 따라 저절로 당기어 진다. 그이의 손안에 감기운 자기의 손도 으스러지게 팽팽히 당기웠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손끝에 힘을 주어 그이의 손가락을 자기도 감싸쥐고 쫓아가며 쫓아가며 여유를 주는 것이었으나 속력을 내기 시작한 차체의 힘과는 저항이 되지 않는다. 마침내 뻐드러져 나가던 손, 뻐드러져 나간 손들은 차 안에서나 차 밖에서나 서로들 두르며 두르며 떠나는 정과 보내는 정을 잇(續[속])는다. 그이의 손도 자기를 향하여 허공을 추켜올리며 그냥 두르는 것이었으나,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얼굴로만 손을 가져가게 만들던 생각 - 언제나 그이가 생각키면 이렇게 먼저 보이는 것이 붉은 다스끼요 떠나보내는 형상이다.

기차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정거장에 차가 멎고 사람들을 내려놓을 때에야 겨우 역전의 광장에까지 달릴 수 있는 순이였다.

거리로 쏟아져 흩어지는 사람들을 순이는 낱낱이 살핀다. 보퉁이를 머리에다 잔뜩 인 여인네가 아니면 륙색을 등에다 무겁게 걸머진 중년의 사나이가 대부분이다. 한참 나오던 사람들이 츰해지는데도 그이 같은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정거장 안까지 들어섰을 때 육중한 트렁크를 한 손에다 들고 몸을 일며 아직도 플랫폼에서 헤매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순이의 눈에 쏘인다. 어딘지 눈에 서투르지 않은 익은 인상임이 대뜸 들어왔던 것이다. 그 일까 하는 생각에 별안간 가슴을 뒤노이며 짙어 가는 어둠 속에 똑똑히 알아볼 수 없는 형상임을 초조로이 눈에 힘을 주며 주며 바라보다가 질겁을 하고 순이는 놀란다.

영세, 그것은 틀림없는 영세였던 것이다.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리는 영세, 하필 왜 이 자리에서 이렇게 영세를 만난단 말인가. 그이를 마지막으로 기다리는 오늘 마지막 차의 마지막 손님이 그이가 아니고 그이를 전지로 몰아낸 영세라니! 영세를 맞으러 자기는 어둠도 추움도 무릅쓰고 오 리나 되는 정거장 길을 집안도 모르게 이렇게 달리어왔더란 말인가. 영세가 나오기를 이렇게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었단 말인가. 속이 떨려 두 번 다시 거들떠 보기도 으즈즈하다. 얼굴을 돌린 채 제결에 몸을 피하여 터전으로 순이는 뛰어나왔다.

3 편집

영세는 순이네와 논틀이 하나를 사이에 둔 건너마을에 산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문벌과 재산이 그를 우러러보게 만드는 데다가, 경도 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돌아오게 되자부터는 학력까지 그를 따를 사람이 없어 금력으로나 학력으로나 물심양면에 있어서까지 선망의 적(的)이 되어 동네의 추존을 한 몸에 받아 오다가 서울로 올라가자부터는 그 이름이 언론 기관에 끊일 새 없이 오르내리게 되어 신문장이나 보는 사람치고는 박영세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이 되었다.

누구나 동네의 빛으로 동네를 말할 때에는 그를 내세우고, 자기도 그 동네에 사노라 말했고, 친하다 말했다. 그리고 개인의 사정이나 동네의 사정으로 혼자 처리하기에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 있을 때면 일부러 서울까지 올라가 그와 더불어 문의를 하고 그의 말을 좇았다. 면사무소에서, 주재소에서 창씨(創氏)를 하라고 그렇게 강권을 하는데도 사람이 어떻게 성을 고치느냐고 하나 없이 뻗대이었으나 영세가 솔선해서 다까야마(高山[고산])로 고치는 것을 보고는 영세가 고치는 것이라 아니 고치고는 견딜 수 없는 창씨인가 보다고 다들 면사무소로 달려가 제멋대로 성들을 갈았다.

그리고 뒤이어 몰아치는 학도지원병 영이 발포되매 막다른 골목에 든 이 위급을 피해 보려고 학교도 집어치우고 집안도 모르게 어디론지 숨어 버린 진수를 끌어 내는 데도 이 영세의 영향이 절대하였던 것이다.

주재소에서는 아들을 내놓으라 날마다 졸랐으나 그 아버지 선달은 모르노라 응치 않았다. 응치 않음이 그대로 강경함에 경찰서 고등계에서는 형사까지 둘씩이나 나와 선달을 데려다가 유치장에 집어넣고 승낙서에 도장을 찍으라, 그렇지 않으면 싸움이 끝날 때까지 가두어 두리라 위협 위협이었다.

그래도 듣지 않음에 반이나 넘어 세인 선달의 그 허연 수염을 형사들은 둘러앉아 승벽으로 뽑으며 만행으로 단련을 시켰으나 수염 아니야 목을 뽑히는 한이 있더라도 승낙은 못 한다 하여 턱이 맨숭맨숭하게 수염이 한솟 다 뽑힐 때까지 굳이 승낙을 하지 않고 죽일 테면 죽여라 뻗치고 있는데 하루는 서울서 강연대가 내려와 공회당에서 명사들의 시국강연이 열리니 다 가서 듣자 하여 학병 지원에 승낙을 않는다고 가두고 단련을 시키던 학부형 십여 명을 다 나오래서 데리고 갔다.

선달은 군중 속에서 늙은이(아내)도, 적은이(동생)도 다 들어와 앉아 있음을 보고 주재소에서 반드시 이 강연만은 들어야 한다고 같이 들어가자 해서 들어들 왔노라는 말을 들었다.

강연은 들으나마나 누구나 전문 학생이면 다 지원을 해야 된다는 소리였다. 여기서 선달이 놀란 것은 이 연사 세 사람 가운데 영세가 섞여 있음을 본 것이었고, 황은(皇恩)에 보답할 길은 오직 자식을 나라에 바치는 길밖에 없다고 테이블을 주먹으로 치는 것을 보는 데서였다. 그리고는 영세 같은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하여 저런 강연을 할 때에는 이것도 창씨와 같이 피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일까, 죽어라 하고 수염을 뽑히면서도 움직여지지 않던 선달의 마음속엔 그 어느 한 구석이 흔들리우는 것 같음을 그 순간 느꼈다.

그러나, 영세도 하는 수가 없어 이렇게 붙들려 다니며 저런 강연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것은 아닐까 몇 번이고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아 저녁에 사석에서 조용히 좀 만나 의견을 들어 보리란 생각까지 은근히 두었던 것이, 그러지 않아도 이 연사들과 지원에 대해서 문의할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하라고 이에는 구속도 않으므로 선달은 가족들을 다 데리고 그의 여관으로 찾아가 하룻밤을 같이 묵으면서 의견을 들었다.

사석에서의 의견도 다른 데가 없었다. 지원을 아니 하면 그보다 더 무서운 징용이 내린다는 것이요, 그것까지 거부하게 되면 가족의 일체 배급 정지로 가정은 파멸되고 말 것이니 이왕이면 선뜻이 지원을 하고 나서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싸움을 나간다고 다 죽는 것이 아니요, 승리를 하고 싸움이 끝나 돌아오게 되면 명예와 권세가 그 한 몸에 넘칠 것이니 하루바삐 지원을 하는 것이 유리하리라는 것이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믿기에 의심이 없는 영세이었던 것이다. 그대로 고집을 한다는 것은 그것은 결국 자승자박을 하는 셈이 되는 우둔인 것임을 깨닫고 산속 깊이 절간에 가서 숨어 있는 아들을 수소문하여 찾아다 놓고 온 가족이 모여앉아 지원서에다, 승낙서에다 도장들을 부자가 각기 찍고는 눈물을 흘리며 진수를 떠나 보냈던 것이다.

자기가 자기 손으로 도장을 찍어서 아들을 내보내 놓고 누구를 원망하랴만 지원서에 도장 찍기를 굳이 피하고 숨어 돌아가던 학생들 중에는 간혹 적발도 되어 징용장을 받기도 하였으나 피하면 얼마든지 피해 돌아갈 수 있고, 또 피치는 못했댔자 그것이 총알이 왔다갔다하는 전장판보다는 비교도 안 되게 헐한 것임을 알았을 때 순이네 가족은 가슴을 치고 통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영세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남과 같이 살아 돌아오기나 했으면 모든 것을 꿈처럼 잊어나 버리고 말았으련만, 아아.

4 편집

‘무당도 다 소용이 없어, 인젠 아주 그이는 잊고 말자.’

영세가 뒤에 달리는 것 같아, 늦어진 허리를 다시 단정히 고칠 여유에도 초조로이, 집으로 내닫기 시작한 순이는 치마 뒤를 땅에다 지일질 끌면서 몇 번이고 마음에 힘을 주어 가며 뇌인다.

‘잊어야지, 안 잊음 별수가 있나.’

그러나, 누구를 믿고 살 것인가가 뒤미처 생각킬 땐 받느니 옷자락에 눈물이었다.

부모네들의 옛날부터 내려오던 우의에서 그이는 대학에 들어가던 해, 자기는 고녀를 나오던 해, 그 해 봄에 약혼이 되어 결혼은 그이의 졸업을 기다려 하자던 언약이,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 학도지원병 영이 내리게 됨에 부랴부랴 결혼을 하여 한 달을 채 못다 살아본 남편이었다. 이러구러 정신 없는 얼떨떨한 삼 년 동안의 시집살이였다. 이것으로 자기라는 인생은 다산 것이란 말인가. 학생 시대에 꾸던 무한히 즐겁던 청춘의 꿈은 이렇게도 삭막하게 뒤집히고 만단 말인가. 인젠 나라도 찾았다. 제 나라에서 거리낌 없이 마음껏 살 수 있는 아름다운 꿈이 그이로 더불어 한껏 즐거울 것이련만 이렇게도 청춘은 애달프단 말인가. 그이가 나가기 전에 부모네들이 하루바삐 결혼을 서두른 의미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한낱 꿈이었다.

부모네들의 소망대로 한 점 혈육이나마 남기었더라면 대(代)나 이음이 되지 않을 것인가. 자기의 존재는 이 집에 무엇으로 있단 말인가. 불쌍한 며느리, 죽기까지 들어야 할 측은한 대명사 - 그것이 인젠 다만 자기에게 남은 존재일 뿐이다.

‘더 살음 무얼 해. 그이가 간 곳을 나도 인제 따라가야지.’

그러나, 자기마저 그이 따라 이 집을 떠나간다면 늙은 시부모 양주는 누구를 믿고 의지하고 산단 말인가. 생각이 이에 미치면 제 마음이건만 제 마음을 저로서도 결단할 용기가 차마 나지 않는다.

그이는 이 집의 기둥이었다. 그이의 어깨에 늙은 부모가 매달려 있었고, 거기 자기가 또한 덧붙은 것이었다. 시아버지는 늙마에 만득으로 그이 하나를 두시고 그이를 위하여 넉넉지도 못한 가산을 기울여 학자를 대었다. 몇 마지기 안 되는 땅이 들어간 것은 그이가 중학에 들어가던 해요, 학병으로 끌려 나가던 해엔 집문서까지 금융조합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이제 한 해만 더 참으면 졸업을 하게 된다. 오히려 반갑게 매어들 달리려던 기둥이었다.

그 기둥이 이제 부러졌다. 의지 할 데가 없는 것이다. 여전(餘錢)은 다 쪼아 먹고 집문서는 찾을 기약조차 까마아득한데 배급은 없고 쌀값은 나날이 오른다. 조반석죽도 구차하다.

이게 인제는 모두 자기의 손에서 해결이 되어야 할 무거운 짐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그이는 아주 잊는다 해도 이미 자기가 그이의 아내었다면 이 집은 아주 잊을 수가 없는 것이 도리다.

그러나, 이 집을 붙들고 나갈 그만한 힘이 계집으로서의 자기에게 과연 있을 것일까. 생각하니 그저 아득한 앞날이다. 다시금 눈시울이 뜨거움을 느끼며 짙어 가는 어둠 속을 분주히 집으로 집으로 순이는 걷는다.

5 편집

시부모도 오늘 하루를 은근히 기다리다 지치고 만 모양임이 드러난다. 이미 밤은 깊을 녘에 들었건만 사당에도 제석에도 아직 불이 없다. 해마다 섣달 그믐밤이면 초저녁부터 칸마다 불을 밝히고 복을 맞아들이던 수세(守歲)의 풍습도 이 해 따라 이 집에선 지금 무시되고 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이 수세의 점등(點燈)만은 잊지 않고 손수 정성을 들이던 시어머니였던 것이, 이게 다 그이 때문이로구나 하니 모든 것을 잊자던 순이의 가슴은 다시금 뭉크레하여진다. 들어서는손 장종백이를 말끔히 닦아 솜으로 심지를 비벼 넣고 피마자 기름을 부어 사당과 제석에 먼저 불을 밝히고 큰칸으로 건너갔다.

시어머니는 샛문 발치에 이불을 쓰고 누웠고, 시아버지는 아랫목에서 팔패를 뗀다. 시아버지의 팔패는 화 팔패다. 속이 상할 때에는 언제나 늘 팔패로 화를 푸는 것이 버릇이다. 한동안 그쳤던 팔패를 오늘 저녁 시아버지는 또 꺼내 들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음을 순이는 모르지 않는다. 마음대로 맞아떨어지기나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한결 위안이라도 되련만…… 생각을 하며 아랫목으로 내려가,

“추운데 손 시럽지 않아요? 밧 날이 끔찍이 찬가 봐요.”

하고 방바닥을 순이는 손으로 짚어 본다.

“응 난 괜찮다. 네가 얼었구나. 어디를 갔다 오니?”

“어디 간 데두 없어요. 괜히 밖에 있었죠.”

곧이들을는지 모르나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침울해 팔패까지 또 손에 대신 시아버지였다. 아들의 이야기를 하여 아픈 상처를 건드리기 보다는 정거장까지 갔더란 말은 숨기는 것이 예의였다.

이것은 순이만이 취하는 태도가 아니다. 이 한 해 동안의 이 집 가족은 며느리나 시부모나 서로들 눈치와 위로로 산다. 털끝만큼도 진수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 입 밖에 내지 않고, 누가 얼굴을 푹 숙이고 앉았든가 먼산만 좀 바라보아도 진수를 생각하나 보아 필요도 없는 이야기로 어루만지는 것이 누구나의 태도였다.

“아, 참, 너 이박기 먹어라. 며느리 이박기 내려 주구려.”

시아버지는 팔패 떼던 손으로 마누라를 흔든다.

마누라는 눈이 좀 붙었던 모양이다. 기지개와 같이 일어나 장문을 열고 고리당즉을 들어낸다.

“주막집 엿장사가 이박기라구 엿을 갖다 맡기누나. 어서 먹어라, 너 들어온 담에 같이 먹으려구 기대렸단다. 영감님두 드세요. 영감님이 먼저 드세야 얘가 먹지.”

시어머니도 극진하다.

“아이, 먼저 잡수실걸요. 아부님 드세요. 어머님은 치아가 없으셔서 넣고 녹이서얄걸요.”

근심 없는 마음의 표현들 같다.

이렇게라도 가정이 지속만 될 수 있다면 죽는 날까지 이러구러 살다는 볼 것이, 맞닥뜨린 절박한 사정은 이러한 눈물겨운 단란도 허치 않았다. 금융 조합에서는 인젠 더 연기는 하는 수가 없으니 그리 알라는 최후의 통첩이 떨어진 것이다. 지금 선달이 떼는 팔패에는 이러한 것들의 처리에 판단을 댄 앞날에의 운명이 점쳐지고 있었다. - 오늘도 진수는 들어서는 애가 아니니, 이 애는 인젠 정말 아주 잊어야 옳으냐, 옳다면 붙고 글타면 맞아떨어져라, 떨어지는 데 마음을 대고 떼었던 것이, 붙고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정말 진수는 죽었느냐, 차마 믿고 싶지가 않아, 삼태 양승(兩勝)으로 행여 다시 떼어 보았던 것이, 영락없이 연달아 붙고 떨어지지를 않는 덴 눈앞이 아득했으나 하는 수가 없는 일이다. 정말 잊어야 옳은 앤가 보다, 쓰린 가슴을 억누르며 금융조합의 빚처리로 넘어가 돈은 집을 팔아서라도 갚아 주고 여전을 벗겨 생활의 밑천을 삼는 것이 옳으냐, 옳다면 떨어지고 글 타면 붙어라, 또 떨어지는 데 마음을 대고 떼어 본 것이, 마음과 같이 마저 떨어졌다. 그렇다면 집은 파는 것이 바른 길이긴 길인가 보나, 쓰고 있을 집이 그적엔 또 있어야 아니하나, 서방은 죽어 돌아오지 않고 집은 팔아먹고 그래도 며느리는 청상과부로 있을 데도 없는 이 집을 족히 지키며 개가 할 의사가 없이 수절을 하고 지낼 것인가, 아들을 생각 할 때마다 연달아 떠오르는 며느리의 귀추가 자못 궁금하다. 개가할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 없다면 떨어지고 있다면 붙어라, 떨어지는 데 마음을 또 대고 떼었던 것이 신통하게도 이번에는 장마다 맞아 돌더니 끝내 떨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인젠 며느리밖에 의지할 데가 없다고 은근히 생각을 해 오던 것이다. 이것이 시아버지는 기막히는 사정 가운데서도 한결 마음의 위안이었다. 더욱이 이 패를 떼는데 어딘지 나갔던 며느리가 섬적 들어서고, 또 그 앞에서 뗀 패가 이렇게 대었던 마음대로 떨어지고 마는 것은 이것이 무슨 한낱 자위책으로서의 그러한 노름이 아니요, 정말 며느리 앞에서 그러마 하는 굳은 맹세를 받는 것도 같아, 엿을 들면서도 시아버지는 참 기특도 하다고 생각을 하며 몇 번이고 며느리를 바라보다가 한 가락 엿을 채 못 다 들고 수염을 닦고 나더니,

“며느리 너 -.”

하고, 부르며 얼굴을 든다.

팔패는 마음대로 떨어졌다. 떨어진 팔패와 같이 며느리의 마음은 과연 그렇게 굳어 있는가, 집을 팔자면 살아갈 방도에 있어 무엇보다 알고 싶은 것이 며느리의 마음이었다.

“네 앞에서 내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하랴만 목구멍이 야속해서 산 사람은 그래도 먹구 살아야겠으니 어찌하겠니?”

“아무럼요. 지나간 일은 다 잊구 산 사람은 살 도리를 해야죠. 아부님 근심 마세요.”

철난 대답이다. 아무런 티도 없이 천연하게 받는 며느리다. 시아버지는 놀랍고도 반가웠다.

“으니라 참, 너 선선하구나! 네 입으루 그런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얼마나 풀리는지 모르겠다. 공부헌 여자란 참 다르다. 그럼 그러지 않음 도리가 있니?”

“그이는 아주 돌아오지 못할 사람으루 알아야 해요.”

“아무렴 이젠 어련히 그렇게 믿구 지내야지. 그런데 말이로구나, 살랴니깐 그놈의 빚 때문에 집을 안 팔구는 못 배길까 보다. 창피하게 집행을 겪기보다는 팔아 물어 주는 것이 떳떳한 일 같구나. 네 의견은 어떠니?”

“제가 멀 알아요. 아버님 생각이 어련하시겠어요.”

“어련험 멀 허겠니. 팔구 나서 살 길 때문에 그러지. 남저지를 벼끼문외막살이나 한 채 살까. 그것두 십 만 원을 받아야 할 말이구. 그러문 또 집만 쓰구 있음 사니, 먹구 살 밑천이 그적엔 또 있어야지. 다른 게 아니구 이게 걱정이 돼서 그러누나.”

여기엔 순이도 할 말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못 잊는 근심이었다. 정거장에서 돌아오면서도 눈앞이 아득해 발길조차 더디었던 것이다. 다시금 암담한 생각에 순이는 얼굴을 무릎 위로 떨어뜨린다.

“글쎄, 그 섬나무자리 너 말지기 그것만 가지구 있어두 우리 세 식구 자 농감은 걱정이 없으련만 논이나 좀 좋은가 천상수(天上水)판에…….”

하다가 시아버지는 별안간 흑흑 느끼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 살피다가 며느리의 어깨가 분주히 들먹이고 있음을 보고는 더 말을 계속하지 못하고 그만 한숨과 같이 고개를 숙인다.

‘그럼 그만치 참는 것두 나이 봐선 용허지. 저두 기가 왜 안 막히려구, 서방은 죽어 돌아오지 않구, 집까지 팔아먹게 되니…….”

6 편집

“칠(칠만 원)이면 놓게 놓아.”

집을 내어놓기는 내어놓으면서도 이 동네에서 작자가 그리 쉽게 나서리라고는 믿지 않았는데 의외에도 며칠이 안 되어 박구장은 어디서 작자를 구해 놨는지 자꾸 와서 값을 튀긴다.

“글쎄, 채여 놓래두 그래. 하나(십만 원)루.”

“하나 다는 안 된대두 그러눈. 이게 꼭 작자니 놓아. 이 작자 놓치면 집 팔기 힘드네. 그래 이 동네 집 살 사람이 어디 있어, 빤한 형편 아닌가?”

“작잔 누군데 그러나?”

“건 미리 알아 쓰나. 문서 쓸 때 알아야지. 어서 칠이면 놓게.”

“사실 작자라면 우리 집은 하나라두 싸네. 위치가 이 촌중에서 젤 아닌가. 손자 손향 판이지, 건자 건향 판이구. 다자꾸 내 운이 진해서 집을 팔아먹지, 집이야 좀 좋은 데 놓였나. 건넌말 박영세네 집자리를 좋다구들 말하지만 그건 집이 푹 백히구. 어디 우리 이 집에 대겠나, 전에 우리 조부님이 뒷산에 올라서서 촌중을 쓱 내려다보시군 참 집 자린 일등이라구 번마다 말씀을 하시던 집 아닌가.”

“자네 말 숱두 늘었네게레. 고집 말구 놓게. 저녁엔 문서나 하구 우리 오래간만에 한 잔 하기나 하세.”

“글쎄. 여러 말 말구 하나만 채여 놔.”

“놓래니까 글쎄? 칠이면 고집 말구.”

“이 사람 어렴두 없는 소릴 자꾸…… 칠에 어떻게 놓으래나 이 집을.”

“자, 그러믄 그럼 팔만 허지. 팔에 또 말을 듣겠는지 모르겠군 저짝에서. 자네만 팔에 놓는대문 내 건 떼여올게.”

제 욕심만 부리다 작자를 놓치면 사실 팔기도 그리 수월치 않음을 안다.

십만 원을 다 받는다 하더라도 예산은 닿지 않는다. 팔이면 무던도 해 보이는 것 같다.

“구꺼지만 올려 대 보게.”

우선 높여 보다가 할 말이다.

“그저 팔, 팔, 팔이면 꼭 정가야. 어서 팔에 말을 뚝 자르게.”

“글쎄 구에만 끌어 대여.”

“어서 팔에 말 떼래두.”

“허 이건 권에 못 이겨 방립을 쓰는 격이야?”

이만했으면 승낙하는 의미의 말임을 박구장이 모를 리 없다.

“그럼 잘 됐네. 저녁 세시쯤 문서 허지. 내 저짝에 가서두 그렇게 잘라 가지구 또 오겠네.”

이렇게 언약은 되고, 저녁 세시를 기하여 다시 박구장은 찾아와 계약을 하러 같이 가잔다.

그러나 즐거워 파는 집이 아니다. 구장을 따라가 제 손으로 집 문서에 도장을 찍기가 차마 싫다. 선달은 계약 일체를 도장까지 내어 구장에게 맡기고, 대체 나를 몰아내고 우리 집으로 들어올 사람은 누구일까, 촌중에는 아무리 훑어보아야 없는 것 같고 읍에서 누가 퇴촌을 하는 것인가, 구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앉았다가 선달은 계약서를 받아들고 놀란다. 매수자가 뜻도 않았던 영세였던 것이다.

‘내 집이 영세의 손으로 들어가다니!’

순간, 떠오르는 생각과 같이 자기의 이름과 가지런히 쓰이고 분명하게 朴永世[박영세]란 도장이 찍힌 부분을 얼빠진 사람처럼 선달은 내려다본다.

“자 인젠 우리 흥정이 됐으니 술이나 한잔씩 노누세. 주막에 마침 곳 주가 들어왔기에 한 병 넣어 달래 가지구 왔지. 아주머니 그 머 김치 쪼각이나 좀 들여오시우.”

구장은 품 안에서 술병을 뽑아 낸다.

“아니, 영세 그 사람이 우리 집을 뭣 하러 사나?”

“가만 보니 동생들 분가(分家)를 시킬 눈치드군.”

“동생들의 분가?”

“넷을 일시에 다 시킬 모양인가 봐. 웃말 홍첨지네 집두, 유사과네 집 두 지금 흐르고 있는 판인데 것두 아마 오늘 저녁쯤은 떨어지게 될걸.”

“아아니! 그게 무슨 일인가 갑자기 - 그 사람이 동생들의 분가는 왜 그리 갑자기 일시에 서둘까?”

선달은 의아한 눈이 둥그래진다.

“까닭이 있드군 그래. 앞으로 법이 서면 토지가 국유루 될 것 같으니까 동생들을 분가시켜가지구 논아서 제 몫금씩 갈라 세울 모양이야. 그리구 대명동 토지, 웃당모루 토지는 전부 내놓았다는데.”

무슨 비밀이나 말하는 것처럼 구장은 나직이 수군거린다.

“그래서 그럼 그이가 일전에 내려왔군요. 법이 세면 토지는 자농감 몇 정보씩을 내놓구는 유상 몰수가 될진 몰라두 다 몰수하게 되리라구 그리는 소리를 들었드니…….”

순이도 의아한 태도로 참예를 한다.

“그 사람이 지금두 서울서 그런 우두머리루 다니는 사람이니까 그런 거야 아마 잘 알 테지. 미리 손 쓰는 셈이로군 그럼.”

이제야 깨달은 듯이 선달은 머리를 주억시며 들었던 잔을 쭉 들이킨다.

“암, 영세 그 사람이야 알구 말구. 확실히 알게 누대루 내려오던 토지를 팔아 없애려구 내놓구, 또 부리나케 동생들을 위해서 집을 사는게 아니겠나?”

“아아니, 나라를 위해서 정치를 하자는 사람이 큰 게는 잡아서 제 구럭에 먼저 넣구, 정친 참 바르게 되겠네. 한때는 일본 사람들한테 남이야 어찌 되었든 저만 곱게 보이구 살려구 남의 귀한 자손들을 전장판으루 나가야 한다구 목구멍에 핏대를 돋히구 연설을 다니드니 이젠 또 나라를 위하여 나섰다는 사람이 제 실속부터 차린다! 그럼, 아, 그 대명동 토지 사는 놈은 쫄딱 망하겠구먼. 돈 주구 샀다가 왼통 몰수를 당할 테니까. 에이 내 앉아서 그대루 죽음 죽었지 영세헌테 내 집은 못 파네. 그 여보게 집 해약해다 주게.”

문갑 빨함에 넣었던 계약서를 선달은 되꺼내어 구장의 무릎 위에 던진다.

“이 사람이 벌써 취했나? 술두 몇 잔 안 들어가서.”

“아니, 취허긴 이 사람아 그럼 전 눈 좀 밝다구 모르는 사람을 속여 먹어야 옳은가. 몰수당할 토지를 팔아먹으문 사는 놈은 녹을 줄을 몰라? 그놈 아니문 내 자식두 쌈 나가서 죽질 않았어. 내 자식두 내 집두 그놈으 손에다 녹아나야 옳아? 뻔뻔헌 놈! 체면이 있지, 자식을 먹구 미안하지두 않아서 집을 또 먹게서? 이 집이 이게 누구 때문에 파는 것인 줄 몰라? 난 못 파네, 내 집을 그놈의 손에단. 어서 물러다주게, 허 세상이 -.”

아닌 게 아니라 선달은 벌써 주기가 얼근히 도는 모양이다. 손세까지 이상히 쓴다.

“그 무슨 소리야, 이 사람 정말 취했네게레. 자 자 그런 소린 말구 어서 또 잔이나 내게.”

“글쎄 아니야, 내 집은 백 번 죽어두 그놈의 손엔 안 넣네. 어서 일어서게 이 사람?”

선달은 잔을 바로도 못 들고 술을 옷자락에다 줄줄 흘리며 들이키더니 상 위에다 잔을 엎어 놓으며 일어선다.

“이 사람이 이게 앉아.”

“아니야, 일어서래두.”

“앉아요 글쎄. 이게 무슨 일야 이 사람.”

구장은 선달의 손목을 끌어당긴다.

“아니, 안 일어날 텐가? 그럼 내가 가겠네.”

팔을 뿌리쳐 구장의 손을 떨구고 감투를 눌러쓰며 계약서를 집어들더니 문을 차고 나간다.

설도 지났으니 양지쪽엔 이미 봄뜻도 푸르련만 날씨는 그대로 차다.

종일을 그칠 줄 모르는 바람이 그냥대로 누동의 구새 먹은 오리나무 가지를 왕왕 울린다.

“이 사람 여 여보게 선달.”

구장은 쫓아가며 부르나 선달은 들은 체도 않고 옷자락을 날리며 건넌마을 논틀이 길을 취한 사람도 같지 않게 총총걸음으로 내닫고 있다.

7 편집

시아버지가 혹 취중에 무슨 실수나 하지 않을까 순이도 덧쫓아 나와 넌지시 논틀이를 뒤따른다. 그러나 차마 영세네 집까지엔 발길이 내키지 않는다. 누동 마루 오리나무 아래 그만 걸음이 멎는다.

구장은 그냥 선달의 뒤를 바틈이 따라가며 연방 뭐라고 말리는 모양이나 대꾸도 없이 선달은 활깃세를 쓰며 앞만 보고 그저 내닫더니 영세네 마당에 발을 들여놓기가 바쁘게 소리를 지른다.

“영세.”

개가 세 마리씩이나 짖으며 우르르 밀려나온다.

“영세 있나?”

“영세.”

세 번 만에야 밀창이 밀리며 영세의 머리가 기웃하더니,

“아 선달님 오래간만이십니다.”

하고, 대 아래로 쫓아 내려와 인사를 한다.

“나 자네 좀 볼일이 있어 왔네.”

“네 그러세요? 들어오시지요.”

영세는 사랑 곁으로 손을 내밀어 인도한다.

“아니, 들어갈 것두 없어. 집이나 물러 주게.”

“이 사람 취언두 웬. 술두 몇 잔 안 허구 그리 취해? 어서 들어가 담배나 한 대 붙여 가지구 가세.”

구장은 선달의 옷소매를 붙들고 사랑 쪽으로 이끈다.

“이 사람 왜 붙들구 이래 자꾸. 취허긴 누가 취했다구. 어서 집 물러 주게.”

“참 취허셨군요 선달님.”

하긴 하면서도 영세는 자못 불쾌한 태도다.

“취허다니! 집을 물러 내라는데?”

선달은 정색을 하고 영세의 옆자락을 낚챈다.

어인 까닭인지를 몰라 말없이 영세는 선달을 노려본다.

“집을 물러 달라는데 자네가 나헌테 도리어 눈을 부릅떠? 허 이거 세상이!”

“아니, 대체 어떻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영세도 눈이 길쭉해지더니 정면으로 마주 선다.

“하, 눈을 부릅뜨구 마주 선다! 이놈 너 그래 마주 섬 어떡헐 테냐?”

버썩 나서며 선달은 영세의 멱살을 붙든다.

“아니 이게 무슨 행패란 말이오? 해방이 됐다니까 괜히 모두들…….”

“머야? 행패? 해방이 됐다니까? 그래 해방이 돼서 넌 잘허는 일이 머냐?

나라는 어떻게 되든 제 배만 불렸음 되구, 촌중은 어떻게 되든 저만 잘 살았음 그만이로구나. 고이헌 놈 하늘이 내려다본다 이놈.”

선달은 멱살을 붙든 손에 힘을 주어 버쩍 당긴다.

“아니 남의 멱살은 무슨 까닭으루 붙들구 이래요? 내가 영감네 집을 억지루 빼앗는단 말요? 하 참, 별일 다 보겠네, 집을 판다구 내놨기 샀는데…….”

“집을 판다고 내놨기 샀는데? 이놈 너 무슨 까닭으루 동네 집들은 돌아가며 다 사들이니? 너만 집 쓰구 살 테냐? 이놈 매양 하는 버릇이…… 응?

이놈 이놈아! 내가 집을 왜 파는지 몰라? 이놈 이놈아! 학병으루 지원 안 한 놈은 하나두 안 죽었구나 글쎄? 이놈아 이놈아 가슴이 터진다 이놈아!”

선달의 팔은 와들와들 떨린다.

영세도 여기엔 할 말이 없는 듯이 첫혈된 눈만을 꺼벅실 뿐 아무런 대꾸가 없다.

“이놈아 내 아들이 죽었구나. 이놈아, 이놈아 이놈아, 내 아들이 죽어서? 진수란 놈이 죽어서? 이놈아 이놈아, 진수란 놈이? 진수야아 진수야아!”

목이 찢어지는 듯이 기를 쓰며 발악을 부리더니 별안간 선달은 눈을 뒤어쓰며 뒤로 나가 쓰러진다. 기를 앗긴 모양이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여 여보게 선 선달 선달!”

싸움을 말리노라 서서 어르다니던 구장은 어쩔 줄을 모르고 선달의 팔을 잡아당긴다.

“아부님 아부님! 정신을 차리세요. 네? 아부님!”

순이도 달려와 떨리는 손으로 시아버지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며 달래나 흰 자위만으로 뒤어쓴 눈이 그저 무섭게 마주 올려다볼 뿐, 아무러한 응냄도 없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사랑으로 안아다 눕히고 냉수를 떠다가 얼굴에 뿌린다 사지를 주무른다 갖은 짓을 다 해 보았으나 선달은 종시 피어나지를 못하고 그대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잘 죽었지. 외아들 죽이구 더 삼 무슨 낙을 보려구.”

“암 잘 죽구 말구.”

“아들을 따라 갔구먼.”

“불쌍헌 건 며느리야.”

숙덕이는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에 순이의 가슴은 더한층 미어지는 듯하였다.

‘나는 왜, 그이를 따라 가지 못할까. 아니, 그이는 정말 죽었을까.’

하염없이 내리는 눈물을 순이는 걷잡지 못한다.

(1947.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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