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21장~40장

불국사에서 돌아온 날 밤을 주만은 뜬눈으로 밝히었다.

눈만 감으면 그 안타까운 석수의 모양이 선연하게 눈시울 속으로 들어선다. 처음 왕께 알현할 제 어색하던 그 모양이 떠올랐다.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전허전하던 그 눈매가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땅바닥에 거의 닿을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광경도 우스웠다.

주만은 제 옆에 마치 그 석수나 있어서 놀려먹는 것처럼 생글생글 웃어 가며,

"이렇게." 하고 베개에 제 이마를 푹 파묻어서 흉을 내보이었다.

탑을 돌 제 그 꿈꾸는 듯한 느린 걸음걸이, 회오리바람같이 달음질을 치던 그 열정 가득한 행동들이 어른어른 눈앞에 지나간다. 달빛으로 더욱 희게 드러난 코, 그 열이 오른 듯한 붉은 입술이 한량없이 그리웠다. 그 청청한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나는 듯 나는 듯하다…….

첫여름 밤은 고요하다. 창 밖은 실바람도 불지 않는지 잎사귀 하나 간댕하지도 않는 듯. 찌잉 하고 귓속만 우는데 문득 사푼 하는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주만은 귀를 기울였다. 갈 데 없는 인기척 소리다. 그 발자국은 가만가만히 걷는 듯 마는 듯 제 방 가까이 와서 사라진 것 같다. 몰래몰래 들어온 사람의 입김이 완연히 문풍지에 서리듯.

"그가 왔고나, 그이가 왔고나." 머리도 없고 끝도 없이 주만의 가슴에는 이런 환상이 번개같이 일어났다.

그는 이불자락을 제치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쏜살같이 문을 열어젖히려다가 말고 제 생각이 너무 헛되고 어림없음을 깨닫자 춤추는 촛불 아래에서 호젓하게 혼자 웃었다.

초도 벌써 다 닳아 옥촉대 밑바닥에 촉농이 켜켜이 앉았다.

주만은 새 초를 한 자루 꺼내서 다시 붙이었다.

그도 이 밤에 잠자기는 단념한 것이다.

그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환상은 꼬리에 꼬리를 맞물고 한번 사로잡은 제 아름다운 포로를 놓치려 들지 않았다.

저와 그가 정면으로 마주칠 때 흑 하고 그가 제 앞으로 몇 걸음 다가들던 광경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는 왜 나를 보고 그렇게 놀랐을까. 그의 얼굴엔 반가워하는 빛이 역력히 움직이었다. 곧 나를 부둥켜안기나 할 듯이 달려들 제 그의 눈은 이상하게 번쩍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돌아서 버린 것은 무슨 곡절일까.

그도 분명히 나를 알아본 것이다. 내 마음을 알아본 것이다. 내 속을 꿰뚫어본 것이다. 그런 놀라운 재주를 가진 그이거늘 어찌 조그마한 여자의 흉중을 살피지 못할 것이랴.

그렇다면 나를 사람으로 여겼을까. 단 한 번 먼빛으로 보고 그대로 마음을 쏟아 버린 나를 상없다고 하지나 않을까.

주만은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누가 곁에서 보기나 하는 것처럼 얼굴을 붉히었다.

"아이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혼자말로 속살거리고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그러고도 미협한 듯이 이불 속에서 또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그러나 부끄러운 생각도 잠시 잠깐이다. 타오르는 정열은 걷잡으려야 걷잡을 수 없었다.

그도 나를 생각하는지 모르리라. 그도 나를 그리며 이 밤을 꼬박이 새우는지 모르리라. 그렇게 반가워하다가 그렇게 물러선 것은 그의 정과 의젓한 것을 한꺼번에 알리는 듯도 싶었다.

온몸이 끓고 얼굴이 확확 달아서 뒤덮었던 이불자락을 걷어찼다.

암만해도 그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그립고 그리워 참으려야 참을 수 없다. 주만은 마침내 또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 밤으로 아사달에게 뛰어가고 싶었다. 세상없어도 만나고야 말고 싶었다. 당장 이 시각에 그를 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벗었던 옷까지 다시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주만은 살그머니 창문을 열었다. 제 갈 길을 미리 보아나 두려는 것처럼.

선뜩한 밤공기는 그의 불같이 타는 뺨을 씻어 준다.

벽오동의 너푼너푼한 잎사귀에 다 기울어진 조각달이 뉘엿뉘엿이 걸렸다.

주만은 이윽히 지는 달을 바라보고 있다가 제가 저를 타이르듯이 소곤거렸다.

"내일 날이 밝거든!"

주만은 남복을 입은 채로 그대로 쓰러져 털이의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돌아누워 버렸다.

이윽고 그 어깨가 덜먹덜먹한다.

"아이 저를 어째. 아가씨가 우시는구먼."

털이는 딱하다는 듯이 제 혼자 종알거렸으나 무엇이라고 달래야 옳을지 몰라 매우 난처해한다.

털이는 제 아가씨의 성미를 잘 안다. 싹싹할 때에는 연한 배 같지마는 한번 역정을 내면 물불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일 어설피 달래었다가는 또 무슨 벼락을 만날는지 모른다. 아까만 해도 '듣기 싫다'는 불호령을 받지 않았느냐. 주만의 어깨는 갈수록 더욱 사납게 들먹거린다. 필경엔 훌쩍훌쩍하는 울음 소리를 내고야 만다.

이젠 무슨 벼락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제 아가씨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주만의 어깨는 부들부들 떨린다. 털이는 손을 들어 그 어깨를 흔들려다가 말고 한숨을 휘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주만은,

"왜 이렇게 가까이 왔니. 저리 가려무나."

볼멘소리나마 아까처럼 날카롭지는 않다.

"아가씨 아가씨, 왜 우십시오. 진정을 하시고 무슨 말씀이든지 하십시오. 쇤네가 죽기 한사하고 아가씨의 원을 풀어 드릴 테니."

털이도 덩달아 울먹울먹하며 등뒤에 대고 간곡한 목소리를 떨었다.

"울기는 누가 울어."

주만은 역시 돌아보지도 않고 되받았으나 울음을 그치려고 애를 쓰면서도 말소리는 여전히 껄떡인다.

"안 우시면 왜 돌아누워 계십시오. 쇤네를 좀 보십시오. 이것 보십시오. 이 새옷이 죄 꾸겨집니다. 자 바로 좀 누우십시오."

"그까짓 옷이야 좀 꾸겨지면 어떠냐."

"어유 그 옷이 이만저만한 옷입니까. 한 벌 다시 장만하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뎁시오."

"그까짓 돈 드는 걸 누가 아니. 꾸겨지면 안 입으면 고만 아니냐."

"웬걸입시오. 앞으로 이 옷 쓰일 때가 많을걸입시오."

"내게 남복이 당하냐. 오늘 밤에 꼭 한 번 쓰려 하였더니만……."

"오늘 밤만 날인갑시오. 앞으로도 이런 밤이 얼마를 올걸입시오."

털이의 말이 그럴듯하다는 듯이 주만은 눈물을 거두고 일어앉아 웃옷의 구김살을 편다.

눈물방울이 아직도 그렁그렁한 주인의 눈을 바라보며 털이는 '옳지!' 하고 제 무릎을 제가 친다.

"쇤네가 좋은 꾀를 하나 생각해 드릴깝시오."

"네 따위가 무슨 좋은 꾀가 있을라구."

"왜요, 쇤네가 이래봬도 꾀주머니랍시오. 그만 일에 우시다니. 내일은 세상없어도 쇤네가 불국사엘 뫼시고 갈 테니……."

"또 내일……."

주만은 재우쳤다. 또 내일! 과연 그에게는 여러 해포나 되는 듯싶다. 어젯밤에 날이 밝기를 기다린 그가 아니냐. 그러나 낮에는 더더군다나 몰래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오늘 밤에는!"

그는 또다시 밤을 기다린 것이다.

단 하루 해를 보내기에 삼사월의 해가 길기도 길었지만, 그에게는 백날 천날이 넘는 듯하였다. 그야말로 일일이 삼추 같은 이 길고 긴 해 동안에 궁리궁리해 낸 것이 남장을 차리고 털이를 데리고 불국사를 찾아가려는 것이었다.

밤이 든 뒤에는 또 집안 사람들이 잠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밤의 몇 시각은 낮보다도 더욱 길고 더욱 지리하였다.

남장을 갖추고 털이를 깨워 일으키고 막상 길을 떠나려 하니 어느 결에 달은 지고 캄캄칠야에 불 없이는 댓 자국을 내어디딜 수 없었다.

이십 리나 되는 밤길을 걸어간다는 것도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이 뜻하지 않은 난관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기다렸던 오늘 밤에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매 참고 참았던 것이 그만 울음으로 터지고 만 것이다. 금이야 옥이야 자라난 그는 난생 처음으로 제 뜻대로 안 되는 일도 있는 줄 알았다.

"내일이라도 뭐 얼마가 남았납시오. 고대 밤이 밝을 것을."

털이는 달래기 시작한다.

"내일이면 무슨 좋은 수가 있니. 어디 말을 좀 해보렴."

털이는 주만의 귀에 입을 대었다.

"저 내일 마님을 조르십시오. 불국사에 불공을 올리러 가시자구요."

"기껏 좋은 꾀라는 게 그게야."

"아닙시오. 쇤네 말대로만 하심 꼭 됩니다. 왜 아드님이 없지 않습시오. 이번 상감마마께서도 석불사에 공을 들여 동궁마마를 보시지 않으셨납시오. 자꾸 동생을 하나 낳아 달라고 조르십시오. 불국사는 새로 중수를 한 절이요, 그 부처님이 더 영검이 계시다고 조르시면 될 것 아닙시오."

주만은 그윽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상머리에서 졸고 있던 금성은 킹킹 콧소리를 하다가 재채기를 한번 되게 하고 졸림 오는 눈을 떴다.

"오호호."

금성의 누이동생 아옥(娥玉)은 허리가 부러지라고 웃어젖힌다.

"아이 우스워, 아이 우스워." 아옥은 때굴때굴 구른다.

그는 사랑에 놀러를 나왔다가 제 오빠가 책상에 코방아를 찧고 있는 것을 보고 심지를 꼬아 코 안으로 비비어 넣은 것이다.

"이 대낮에 낮잠이 무슨 낮잠이에요. 고리타분하게."

"이 무슨 괴란쩍은 짓이람."

오빠는 제법 점잔을 빼고 나무란다.

"어이구, 그 조으시는 모양이란 꼴도 사나웁지, 이 책 속에다가 코를 비벼대고."

아옥은 한 팔로 제 머리를 휩싸고 펴 놓인『시전(詩傳)』속에 제 얼굴을 뒤엎어 보인다.

오빠는 조여붙는 눈으로 삥긋이 웃는다.

"에그, 그 입 가장자리에 침이나 좀 닦아요. 어린애 모양으로 침까지 지르르 흘리고, 으흐흐."

아옥은 그 가느다란 실눈을 거의 감는 듯하며 연방 웃음을 흘린다.

"요런 오도방정은! 지금 한창 재미난 꿈을 꾸는 판인데."

오빠는 웅얼웅얼하는 갈라진 목소리로 게두덜거리며 입가에 희게 늘어붙은 침자국을 닦고 싱겁게 또 한번 웃는다.

"꿈을 꾸었어요. 어디 재미난 꿈 얘기나 좀 해봐요."

"얘기가 무슨 얘기냐. 막 꾸려는데 네가 헤살을 놓은걸."

"그러면 채 꿈도 꾸지를 못하셨군요."

"말하자면 꿈의 서문을 초하다가 만 셈이지."

"뭐 꿈도 서문이 있고 본문이 있나 뭐."

"그럼 꿈도 서문이 있고말고. 본문을 지나면 발(跋)까지 있는 법이야."

"발은커녕 머리가 어때요."

"무식쟁이란 할 수가 없군. 말까지 상스럽거든."

"왜 내가 무식쟁이에요. 맹자 논어를 다 읽었는데 이까짓 '요조숙녀책'만 보면 제일예요."

아옥은 책상에 놓인『시전』을 못마땅한 듯이 손가락 끝으로 튀기었다.

"허, 성경현전을 그렇게 함부로 구는 법이 아니야."

하고 금성은 펴놓은 책을 접쳐서 한옆으로 치운다.

"입에다 대고 침을 께 흘릴 제는 언제고, 오호호."

누이는 또 땍때굴 웃었다.

금성은 누이의 이번 말은 들은 척 만 척하고 아까 말만 가지고 티를 뜯는다.

"흥, 요조숙녀책! 그러기에 무식하단 말이지. 시전이란 말은 못 하고."

"누가 시전인 줄이야 모르나요. 오빠가 그 책만 펴들고 앉으면 밤낮 요조숙녀만 고성대독을 하니 그렇지. 남의 귀가 아프게시리."

"누가 네게 들으라고 하던."

"그건 고만두고, 그 꿈의 머린가 발인가 얘기나 좀 해요."

"맑고 맑은 물가에 비둘기 한 쌍이 내려와서……."

"오호호, 비둘기가 왜 물가에 내려올꼬."

"왜 '관관저구 재하지주로다' 바로 시전에 있는걸."

"시전에만 있으면 고만이에요, 호호. 그러면 으레 요조숙녀가 또 뛰어나왔겠군요."

"암 그렇지, 그야." / "그래 그 요조숙녀가 누구입디까." / "꿈속에 나타난 걸 어떻게 분명히 아누."

"모르긴 왜 몰라요. 꿈에 보고도 몰라요." / "글쎄 네가 잠을 깨워서 놓쳐 버렸다는밖에."

"아이구 가엾어라. 꿈에나 실컷 보시게 할 걸 갖다가." / "그렇기에 방정을 떨지 말란 말이야, 히히."

금성은 또 웃는다.

"그래 오빠는 꿈에 본 요조숙녀를 정말 모르신단 말예요." / "몰라, 몰라."

금성은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었다. / "왜 이렇게 시침을 떼셔요. 그러면 내가 가르쳐 드릴까."

"내가 꿈을 꾼 것을 네가 어찌 안단 말이냐."

"그래도 난 오빠 속을 당경(唐鏡)보다도 더 환하게 들여다보고 있어요."

"어디 알아맞춰 봐라." / "구슬아기지 누구야." /"아니야."

"아닌 게 뭐예요."

"구슬아기가 내 꿈속에 나타날 까닭이 있나."

"어느 건 오매불망이라고 꿈엔들 안 보이리."

"흥, 흥."

금성은 콧소리를 내고 제 아버지를 닮아서 맹숭맹숭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살이 벙글벙글 벌어진다.

아옥은 제 오빠가 싱글벙글하는 양을 빤히 바라보다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저도 덩달아 웃어 버렸다.

"아이 오빠, 또 꿈에 좀 봤다고 그렇게 좋으시오. 생시에 만났으면 큰일났겠네, 호호."

"아무렴."

금성은 역시 코로 웃는다. 그 실룩실룩하는 콧잔등엔 잔주름이 잡힌다.

"난 생시에 구슬아기를 보았는데 그런 줄 알았더면 오빠에게 좀 보여 드릴 것 같다가."

"언제, 언제."

금성은 그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이는지 목이 마르게 묻는다.

"언제는, 저번 파일날 불국사 놀이에서 봤지."

"오, 옳지. 거기는 같이들 갔겠구나. 그런 줄 알았더면 나도 참예를 할 걸 그랬군."

"어규, 오빠 마음대로 갈 수는 있구요. 명부와 딸들만 데리고 오랍시란 분부신데 오빠가 어떻게 참예를 해요."

"멀리서 구경도 못 해."

"그야 길가에는 거둥 구경꾼이 백절치듯 했습니다."

"그것 봐. 내가 보려면 어떡하면 못 보았을라구."

"그러니 더 앵하시지. 더 기가 막히시지."

"그래 정말 구슬아기가 오기는 왔던."

"그럼 거짓말로 왔을까."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네 말을 누가 믿누."

"안 믿거든 고만두어요. 누가 믿으래요."

"정말 구슬아기가 왔으면 옷은 무슨 옷을 입었던."

"남의 옷 입은 것까지 어찌 일일이 일러바쳐요. 입을 만치 입었지요."

"저것 봐. 무슨 옷을 입은 것도 모르니 봤다는 게 거짓말이지."

"그렇기에 고만둬요. 거짓말인 줄로만 알면 그뿐 아녜요."

아옥은 그 실눈이 더욱 샐쭉해지고 두 볼이 뾰루퉁하게 부어오른다. 참말을 거짓말이라고 몰아세우는데 골딱지가 난 까닭이리라.

오라비는 그래도 나이가 세 살이나 위인지라 일부러 짓궂은 척을 하고 누이동생의 골을 슬슬 올려 가며 제 듣고 싶은 대꾸를 끌어내려 한다.

"그러면 옷은 고만두고 손목에 팔찌는 끼었던."

"그럼 팔찌를 안 꼈을라구. 바로 번쩍번쩍하는 황금 팔찌던데."

"그래 그 손목이 굵던 가늘던."

"굵다면 굵고 가늘다면 가늘지."

"그리고 그 손은 어떻던. 조막손이지."

"조막손은 왜. 손가락 끝이 갸름갸름한 것이 천연 돋아나는 죽순 같던데."

"응, 그건 영악스럽게 보았구나. 그래 그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끼지를 안했지."

"아무것도 안 끼긴! 옥가락지를 끼었던데."

"그래 그 손을 어쩌고 있던."

"원 내 참, 땀을 뺄 노릇일세."

하고 인제야 아옥도 제 오라비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 실눈에 생글생글 웃음을 흘린다.

"손을 어쩌고 있기는! 들었다 놓았다 늘어뜨렸다 오그라뜨렸다……."

"그만하면 네가 주만을 보기는 보았구나. 그래 너를 보고 아무 말도 않던."

"말이 무슨 말예요."

"그래 인사도 않더란 말이냐."

"임금님이 계시고 어른들이 계신데 애들끼리 인사가 무슨 인사예요."

"그렇게 너희들 사이가 데면데면하냐. 언제는 퍽 친하다고 하더니."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해요."

"왜 팔월 한가위에 궁중에 들어가면 너희들끼리 베짜기 내기를 하고, 언제는 네가 져서 주만이 앞에 절까지 하고 회소곡을 불렀다더니."

"그야 어디 구슬아기하고 나하고 단둘이 하는 거예요. 여럿이 패를 갈라 가지고 하는 노릇이지. 그럴 말로야 거기 모이는 여러 백 명도 모두 친하다고 하겠네."

"그러니 너희들은 만나도 인사를 않는단 말이냐."

"그야 딱 마주치면 인사야 하지만, 사람 많이 모인 자리에서야 쫓아다니며 알은척할 까닭은 없지 않아요."

금성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적이 실망을 하는 눈치였으나 또 재차 물었다.

"불국사에는 너희들도 배를 타고 들어갔겠구나."

"그럼."

"주만이와 한배를 탔던."

"아녜요, 내 탄 배는 다른 배예요."

아옥은 어설피 주만의 말을 끄집어내었다가 제 오라비가 미주알 고주알 캐고 파는 데 진절머리를 내고, 금성은 주만의 눈매 하나 몸짓 하나 빼어놓지 않고 알알 샅샅이 알고 싶고 듣고 싶은데 제 누이가 말을 잡아떼려고만 하니 어디로 또 말머리를 돌려 볼까 하고 궁리궁리하였다.

오라비는 말허두를 어디로 돌릴까 하고 눈을 껌벅껌벅하더니,

"배를 타고 들어가서는 너희들끼리 한자리에 모였겠구나."

하고 '그렇지?' 하는 듯이 제 누이의 얼굴을 본다.

"그야 한데로 가기야 갔지요."

"나란히 서 있었지."

"아니 멀리 떨어져 있었는걸요."

"뭘 가까이 있고서는!"

"가까이는커녕 아주 서로 얼굴도 못 알아볼 만큼 멀리멀리 있었다오."

아옥은 인제는 제 오라비의 꾀에 좀처럼 넘어가지를 않고 도리어 뱅글뱅글 웃으며 애만 말린다.

금성은 바싹 제 누이의 앞으로 다가앉으며 비대발괄을 한다.

"그러지 말고 그날 지낸 일을 하나도 빼지 말고 죽 강을 좀 해라."

"글 배운 것 강하기도 귀찮은데 그것까지 강을 하란 말예요. 난 싫어."

"싫기는. 그럼 무슨 청이든지 들어줄게."

"정말."

"정말이고말고."

"저 당서 가르치는 것 제발 고만둬 주어요. 그러고 아버지께서 잘 배우느냐 물으시거든 잘 배운다고만 해주실 테요."

"그래 그래 그 청이야 들어주지."

"그리고 또 아버지께서 강을 받으실 때 오빠가 그 대문을 나는 보이고 아버지는 안 보이는 데서 보여 주실 테요. 그렇잖으면 오빠가 옆에서 뚱겨주든지."

"얘 그것 참 어렵구나. 아버지께 들키면 큰일나게."

"그러기 아버지께 안 들키게 하란 말이지, 누가 들키게 하라나베."

"그건 좀 어려운데, 암만해도."

"그럼 고만둬요. 나도 그날 본 것을 말 안 하면 고만이지."

"그래, 그래라. 네 말대로 다 들어주마. 자 그날 본 대로 들은 대로 다 얘기를 하렷다."

"싫어, 얘기만 다 듣고 나면 또 딴청을 부리실걸, 뭐. 난 얘기 안 할 테야."

아옥은 싹을 보고 더욱 비싸게 굴며 단단한 다짐을 받는다.

"한번 약조를 한 담에야 일러주다뿐이냐, 뚱겨주다뿐이냐. 다짐장이라도 두자면 두지. 자 어서 얘기를 해라. 그래 그래 주만이가 어떡하고 있던."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배를 저어 들어가서 돌사다리를 올라가서 다보탑을 구경하고 왕께서 석수장이를 불러 보시고……."

"그래서 그래서."

"그런데 오빠아, 그 석수장이가 참 잘났어."

"그까짓 놈이야 잘났든지 말든지."

"아녜요. 그 석수장이가 어떻게 잘났는지 몰라요. 눈이 어글어글하고, 얼굴이 백옥 같고……."

하고 아옥은 그 실눈을 멍하니 뜨고 눈앞에 무엇을 그려 보는 것 같다.

"이 애가 미쳤나. 웬 석수장이 사설만 늘어놓을까. 그래, 그 다음에는 어떡했단 말이냐."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하다가 말았던가."

"원 얘가 넋이 다 빠졌구나. 석수장이 불러 본 데까지 안 했니."

"옳지, 그 다음에는 불공을 올리고 저녁을 먹고 재를 올리고 돌아들 왔지요."

"그뿐이야."

"그뿐이지 무에 또 있어요."

"주만이는 어떡하고."

"주만이를 누가 어떡해요. 다들 같이 왔지 뭐."

"올 적에는 너하고 동행이더냐."

"그럼 다들 동행이지요."

"그래 동행을 하면서도 아무 말들이 없었단 말이냐."

"말이 무슨 말이에요. 아무리 초롱불이 밝아도 밤길이라 모두들 땅만 내려다보고 가까스로 못까지 내려온걸."

"작별인사들도 안 했단 말이야."

"언제 작별인사나 할 틈이 있어요. 못을 건너와서는 제각기 제 수레를 찾아 타고 돌아왔는데."

"얘기란 단지 그게야."

"그야말로 서문에서 본문까지 본문에서 발까지 다 얘기를 했는데 그래도 미진하시단 말이요, 호호."

"그래 그뿐이야, 기껏."

금성은 대번에 풀기가 꺾이며 매우 서운해한다.

"그러면 구슬아기가 나보고 오빠에게 무슨 전갈이나 할 줄 아셨소, 으흐흐."

아옥은 자지러지게 웃는다.

"전갈이야 않겠지만."

"그러면 뭘 뇌고 또 뇌이시오. 딱하기도 하시지."

금성은 엎어지듯 책상머리에 고개를 푹 숙인다.

"왜 또 주무실 테요. 오 참, 한 가지를 빼놓았군. 구슬아기가 탑 돌던 얘기를."

"응!" 하고 금성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주만이가 탑을 돌다께."

금성은 별안간 정신이 번쩍 나는 것처럼 고개를 쳐들고 제 누이동생을 거의 노려보다시피 바라본다.

"그만 일에 그렇게 놀라실 건 없잖아요, 오호호."

아옥은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또 웃음보를 터뜨린다.

"얘가 웃기는, 무두무미하게 탑을 돌았다고만 하니 궁금치 않으냐."

"참 궁금도 하실 거요. 그렇게 후비고 파는데 구슬아기 얘기란 그것뿐이니."

"얘, 또 그뿐이냐. 탑을 돌았다면 무슨 탑을 어떻게 돌았단 말이냐."

"불국사에 새로 쌓은 다보탑을 돌았지 무슨 탑이 또 어디 있어요."

"그래 탑은 별안간 왜 또 돌았단 말이냐."

"별안간이 무어예요. 그날이 바로 사월 파일. 탑만 돌면 소원성취하는 날인 줄 오빠는 모르시오."

"옳지 참, 사월 파일이라 발원을 하는 날이것다."

"어유 오빠도. 그래 구슬아기의 발원이 무엔지도 모르시오."

"주만의 발원을 내가 어찌 알겠니."

"그래, 참 정말 모르신단 말이에요."

"그걸 어떻게 아나."

"그것도 모르시면서 남이 땀이 빠지도록 물으시긴 왜 물어요."

"모르니 묻는 것 아니냐."

"그러시지, 그렇고말고. 당초에 모르시지."

"참말 알 수 없구나. 그래 무슨 발원일까."

"발원을 올리는 것도 유만부동이지. 임금님도 계시고 여러 어른이 느른 듯한데 저 혼자 빠져나가 탑을 돌 적엔 그 발원이 여간 이만저만한 발원이겠어요."

"글쎄 그래. 그렇다면 더더구나 무슨 발원일까."

"이적도 오빠는 모르시겠단 말예요."

"그럼 내가 어찌 알꼬."

"그럼 고만둬요. 난 기가 막혀서 말도 못 하겠네."

"네가 기가 막힐 거야 무에 있니. 아는 대로 말만 하면 고만 아니냐."

금성은 곁의 사람도 알리만큼 벌렁벌렁 숨길이 사나워 간다.

"그야 뻔한 노릇 아니에요."

"뻔한 노릇이 뭐냐."

금성은 그리 크지 않은 눈을 찢어지라고 흡뜨고 아옥을 훑어본다.

"그만하면 아실걸."

"모른다는밖에."

"그럼 내가 말해 드릴까."

"그래 무슨 까닭이냐. 무슨 발원이냐."

"어서 시집을 가여지이다 하는 발원이지 뭐예요."

"응, 그래!"

금성은 평좌진 다리로 그대로 뛰어서 몇 간통이나 나갈 듯하다가 다시 주저앉기는 앉았다. 그는 주만의 발원이 그 근처이리라는 것은 어슴푸레하게나마 짐작은 하였지만 제 어린 누이가 게까지 직설거를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 하였던 것이다. 어차어피에 그는 아니 놀랄 수가 없었다.

"어유 오빠도, 그 짐작이 안 나셔서 지금 새삼스럽게 놀라시오, 오호호."

아옥은 짜장 우스워 못 견디겠다는 시늉이다.

"시집 어서 갈 발원? 그러면 시집은 누구한테로 간다던."

"어이 오빠는 내흉스럽기도. 그야 갈 데 있나. 장님이 더듬어 보아도 알 노릇이지."

"응 장님! 어느 장님한테로 간다던." 오라비는 일부러 더욱 놀라는 척을 하여 보인다.

"장님! 왜 오빠가 장님이오."

아옥은 한옆으로 우습고 한옆으로 어마 싶었다. 그런 줄 몰랐던 제 오빠가 어쩌면 이렇게 능청맞고 엉뚱할까 하였다.

남매는 서로 넘보는 터이었다.

"그러면 주만이가 내게 시집을 오고 싶어한단 말이냐."

"옳지 인제 바로 알아채셨군. 그야 정한 노릇이지."

"흥 정한 노릇!"

"그래도 미심다우시오."

"누가 아나."

"그러기 낮잠이나 자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예요. 어서 좀 기운을 내보시란 말예요."

"무슨 기운을 어떻게 내란 말이냐."

"그렇게 미심답거든 지금이라도 뛰어가 보시란 말이야요."

"어디로 뛰어간단 말이냐."

"미심다운 사람한테로 가보시란 말이지."

"미심다운 사람이나 있으면 좋게……."

"왜 이러시오. 어서 가보시라는 데나 가보아요. 똑똑히 일러드리리까, 구슬아기에게 말이야요."

"구슬아기, 구슬아기."

"왜 입으로 외기만 하셔요. 어서 가보셔요. 자칫하면 남에게 앗길 테니. 아닌밤에 탑을 돌고 시집을 어서 가여지라 하는데. 마음이 그만큼 달떴으면 다 알아볼 것 아니야요."

금성은 남이 제 마음먹은 것을 영락없이 알아맞출 때처럼 간이 오그라붙는 듯하였다.

아옥이가 들어간 뒤에도 금성은 혼자 안절부절을 못 하였다.

그는 일어나 방 안을 거닐어 보았다. 까닭 없이 발 놓이는 것이 지척지척한다. 다시 책상 앞에 도사리고 앉아 보았다. 치웠던『시전』을 다시 펴들고 소리를 높여 읊조렸다.

아옥이가 흉을 본 대로 역시 '요조숙녀 군자호구'란 대문을 되씹고 곱씹고 하다가 마침내 책을 집어던지고 머리를 흔들어 본다.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는 갖은 생각을 떨어 버리려는 것처럼.

그의 눈앞에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주만이와 처음 만나던 광경이었다.

정월 보름날 그는 달재〔月城〕로 달맞이를 올라갔다. 온 서울 안 사녀들이 한창 구름같이 모여드는 판이었다.

자단과 심향목 수레들이 으늑한 향기를 풍기며 비단줄을 흔들고 사람의 물결을 헤치며 지나간다. 은 안장에 새파란 반딧불처럼 옥충의 등자가 번쩍이며 말탄 공자들도 펀득펀득 보인다.

사르럭사르럭 깁옷 자락이 부드럽고 미끄러운 소리를 낸다. 제글제글 노리개와 구슬줄이 운다.

금성도 성 등성에서 말을 내려 몇몇 친구들과 지껄이며 올라갈 제 그들의 앞에 심향목 수레 하나가 사람에 채이어 머뭇거린다. 수렛채를 곱게 꾸민 계집애 종이 잡고 가는 것을 보면, 대갓집 아씨나 아가씨의 행차가 분명하다.

얼마 가지를 않아 그 수레를 끌던 살찐 황소는 그 기름이 지르를 흐르는 누른 몸뚱어리를 부르르 한번 털고 걸음을 멈춘다. 인제는 더 못 올라가겠다는 뜻인지 모르리라.

짙은 남빛 바탕에 자줏빛 점이 별처럼 발린 앙장이 펄렁 하고 걷어쳐졌다.

그 속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처녀! 날씬한 키와 몸매만 보아도 벌써 뛰어난 미인임을 짐작하겠는데 황금사슬에 꿴 비취옥 귀걸이가 가볍게 흔들리는 사이로 내다보이는 분결 같은 귀밑과 뺨! 뒷모양만 보고도 금성은 이미 반나마 넋을 잃었다.

무례한 짓인 줄 저도 번연히 알건마는 마치 난봉꾼이 화랑 모양으로 슬쩍 옆을 지나치어 서너 걸음 앞을 질러 걷다가 힐끗 돌아다보았다.

먹으로 그은 듯한 진한 눈썹이 초승달 모양을 그리고 그 밑에서 번쩍이는 영채 도는 눈매, 곱고 맑으면서도 활발하게 움직인다. 품위 있는 콧대를 따라 내려오면 연꽃 꽃판 같은 입술이 바시시 웃는 듯하다.

어둑어둑 저물어 가는 황혼을 뚫고 붉은 놀은 환하게 서쪽 하늘에 뻗쳤다.

이 으늑한 빛깔 가운데 그 처녀의 모양은 더욱 뚜렷하게 더욱 선연하게 오늘 밤의 달 모양으로 떠오른 듯하였다.

한 걸음 걷다가 돌아보고 두 걸음 걷다가 돌쳐섰다. 저도 제 태도가 너무 괴란쩍은 것을 깨닫기는 깨달았으나 몇 걸음을 걷지를 않아서 고개는 누가 뒤로 잡아당기는 듯이 돌려지고 또 돌려지고 하였다. 좀이 쏠아서 견딜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참고 이번에는 제법 여러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돌쳐서서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늦었다. 그 처녀는 어느결엔지 좌정하고 달 뜨는 편을 향하여 돌아앉아 버렸기 때문에 백절치듯 하는 사람 틈바구니 사이로 그 옆모양이 어른어른 보일 뿐이었다.

이윽고 놀도 가뭇없이 스러져 버리고 온 하늘이 텅 빈 듯이 제 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더니 마침내 동녘 하늘이 밝아 오며 보름달이 그 둥근 모양을 나타내었다.

사람들은 와 하고 일어섰다.

"어째 달빛이 저렇게 허여스름할까." 어떤 입빠른 친구가 먼저 말을 끄집어낸다.

"대보름달이 희면 큰물이 진다는데!"

"쉬 달님이 들으시오. 처음 뜰 때야 으레 허여스름한 법이오."

"꼭 그런 것도 아니지요. 어떤 때는 아주 새빨갛기도 하니까."

"붉으면 가물이 심하다고 하지만 흰 것이야 그렇게 염려할 것 없소.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흰 대로 그냥 있지를 않을 테니."

"둥글기는 참 둥글군. 어느 한 모 이지러진 데 없이. 둥글면 풍년이 든다지요."

"보름달 안 둥그런 것 보았습디까."

제각기 아는 척을 하고 떠들썩하는 가운데 금성은 틈을 비집고 슬근슬근 그 처녀 가까이 몸을 빼쳐 들어갔다.

달빛을 받은 그 얼굴이 더욱 어여뻤으나 어딘지 모르게 범하지 못할 위압을 느끼고 감히 더 지싯대지는 못했다.

그 후 또 한번 삼월 삼짇날 꽃놀이터에서 보기는 보았지마는 이때는 벌써 혼인말이 왔다갔다할 때라 금성은 체모를 돌보아 날뛰는 마음을 가까스로 참고 먼빛으로 슬쩍슬쩍 바라보기만 하였을 뿐이었다.

그 후 여러 번 매파를 보내 보았으나 저편에서는 선선히 승낙도 없고 그렇다고 딱 거절하는 것도 아니요, "아직 미거하니까"라는 말로 뒤를 둘 뿐이요 종시 결말을 짓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미룩미룩 내려온 것이다.

당당한 금시중의 아들이요 당나라의 말이나 글을 조금만 알아도 금쪽같이 쓰이어 먹는 오늘날 자기는 당나라 유학까지 하였겄다, 한림학사란 기가 막힌 벼슬 가자까지 얻었겄다, 어느 모를 어떻게 뜯어 놓고 보더라도 신라 천지를 통틀어 자기만한 신랑감은 없을 것이다.

통혼만 하면 저편에서 감지덕지 곤두박질을 하고 승낙을 할 줄 알았던 것이 이렇게 질질 끌 줄이야 정말 생각 밖이었다.

호사다마란 예로부터 있는 말이니 무슨 병통이 어디서 어떻게 생길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래 될 줄 알았으면 두 차례나 만났을 그때에 아주 당자끼리 아퀴를 지어 버렸던들 차라리 나을 뻔하였다. 거추장스럽게 매파니 통혼이니 할 것도 없이 일은 쉽사리 귀정이 났을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저번 불국사 거둥에 주만이가 끼일 것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 천추의 유한이었다.

만일 주만이가 거기 끼인 줄만 알았더면 세상없어도 쫓아가 보고야 말았을 것이다.

아무리 잡인을 금하고 남자를 금하시는 거둥이라 할지라도 멀리멀리 따라가는 것이야 누가 금할 것이냐. 그 넓은 불국사에 어디 몸을 숨기면 못 숨길 것이냐. 어느 나무 그림자 밑이나 불전 그늘에 몸을 감추었다가 주만이가 탑을 돌 때에 같이 탑을 돌아도 좋을 것이요 달도 밝으니 그 아름다운 얼굴을 실컷 마음껏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갖은 수작을 주고받을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아옥의 말마따나 저도 탑돌기를 할 적에는 마음이 달떴을는지도 모르리라.

월색이 의희한데 재자가인이 서로 만나 일창일수는 얼마나 운치 있는 놀이였을까.

'아옥의 말대로 오늘 밤에라도 그를 찾아볼까.'

금성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렇게 쉬운 생각을 왜 여태까지 못 하였던고. 지난 일을 탓하고 뉘우칠 것은 조금도 없다. 오늘 밤에라도 그를 찾기만 하면 고만이 아니냐. 오늘 밤 달은 파일날 달보담 더 크고 더 밝을 것이 아니냐.

교교한 월색을 따라 시흥에 겨운 절대의 문장이 절세의 가인을 찾는 것은 옛날에도 흔히 있던 풍류성사가 아니냐. 나는 사마상여의 옛 본을 받아 상사곡을 읊으리라. 저 비록 탁문군이 아닐망정 그만큼 아름답고 풍정 있는 그이거니 오현금 두어 곡조야 어찌 아끼리요.

금성의 방 안을 거니는 발은 점점 활기를 띠어 온다. 그의 팔은 이따금 춤이라도 출 듯이 벌어진다.

자지러지는 제 생각에 미치광이 모양으로 홀로 싱글벙글한다.

주만이 있는 별당문을 두들기기만 하면 주만은 어느 틈에 제 목소리를 알아듣고 맨발로 뛰어나올 것 같다. 자기에게 몸을 던지고 그리움에 주렸던 눈물을 흘릴 것 같다.

홍등을 돋우고 또 돋우고 남남 사이에 밤 가는 줄 모를 것 같다.

그의 공상은 차차 현실성을 띠어 오고 나중엔 자릿자릿한 육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의 입에서는 문득 당시(唐詩) 한 구가 구르듯 흘러나왔다.

新情未洽天將曉

更把羅衫問後期

(새 정이 들자마자 어느새 밤이 밝네.

옷소매 부여잡고 언제 또 오시려오.)

이 한 구를 읊고 또 읊다가 나중에는 미친 듯이 껄껄 웃었다.

앉으락누으락, 일어서서 거닐어 보다가, 발랑 나동그라져 보다가, 바작바작 애를 졸이며 간신히 그 낮을 보내고 말았다.

그의 바라고 기다리던 밤이 되었다.

밤이 되어도 얼마를 더 서성거리다가 마침내 영창을 열어젖히고,

"고두쇠야." 하고 크게 불렀다. 고두쇠란 그의 마부의 이름이었다.

"불러곕시오."

고두쇠는 곧 문 앞에 대령하였다.

금성은 아까와는 딴판으로 아주 점잔을 빼고 거의 눈을 흡뜨다시피 하고,

"너 말 안장 좀 지어라."

호령하였다.

"밤중에 어디를 행차하시랍시오."

마부는 그 유잣덩이 같은 코에 거기 알맞게 큼직한 콧구멍을 벌름벌름하며 묻는다. 삐죽하게 멋없이 큰 키에 퉁겨나올 듯한 핏발 선 눈이 매우 사나우면서도, 더부룩한 구레나룻 밑으로 헤벌어진 입이 그리 흉물스럽지는 아니하였다.

"밤이면 어떻단 말이냐."

"녜에 헤에, 그저 좀 어두우니 어떻게 행차를 하실까 여쭙는 것입지요."

"미친놈, 달이 대낮 같은데 어둡다니."

"녜에 황송합니다. 그저 영대로 시행합지요, 헤헤."

금성은 잠깐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너 안에 가서 놀이〔霞兒〕더러 주안상을 좀 차려 내오라고 일러라."

"주안상입시오, 헤에."

고두쇠는 또 한번 입이 벌어지며 그 뻐드렁니를 내어놓고 웃는다. 주안상이 나오면 상전도 물론 얼근해지려니와, 저도 한잔 얻어걸리게 되는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그보다도 더 좋기는 상전이 술이 취하면 마음씨가 더 좋아지는 탓도 탓이지마는.

고두쇠가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금성은 일락앉으락하면서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였다.

당건 복두에 공작 꼬리도 뻗쳐 꽂아 보고, 금 올린 허리띠에 구슬줄을 늘어뜨려 보고, 당경(거울)을 두번 세번 보고 또 보았다.

"밤중에 무슨 주안상이야요."

한참 만에야 놀이가 주안상을 들고 들어온다.

놀이란 금성의 몸종으로 말하자면 장가 안 든 도련님을 맡은 소임을 가졌다.

도련님은 도련님이지만 나이도 많을 뿐더러 더군다나 놀라운 당나라 벼슬까지 하기 때문에 도련님을 높여서 서방님이라고 부른다.

"주안상이란 으레 밤에 차리는 게지. 잔소리가 무슨 잔소리냐."

금성은 오늘 저녁은 웬일인지 들이닥치는 대로 불호령이다.

"그저 여쭈어 본 겁지요."

놀이는 상긋이 웃어 보인다. 쫄작한 키에 보조개 지는 뺨이 제법 어여쁘다.

"여쭈어 보기는!"

하고 눈을 부라리는 금성의 앞에 놀이는 서슴지 않고 술상부터 놓았다. 으리으리하게 윤이 흐르는 자단 소반에 은주전자와 안주 접시가 까딱하면 미끄러지려 한다.

놀이는 술상 앞에 도사리고 앉아서 옥잔에 퐁퐁 소리를 내고 호박빛 술을 붓는다.

"당주냐."

금성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연해 그 잽새눈을 부라리며 따진다.

"당주, 당주, 귀가 아프군요. 그럼 서방님 잡수시는 술이야 언제든지 소흥주지 무어예요."

"그러면 그렇지."

금성은 아주 뽐내고 한잔을 홀짝 들이켠다. 안주는 신신치 않다는 듯이 상아 젓가락 끝으로 이 접시 저 접시를 뒤적대 보다가 해송자 얹힌 전복 한 저름을 집고 나서 연방 폭배로 놀이가 미처 부을 틈도 없이 마시고 또 마신다. 한 주전자에 반나마 찼던 술이 어느 틈에 없어진다.

"왜 술을 요것만 내왔단 말이냐. 이번에는 한 주전자를 잔뜩 내어와!"

"어유 또 한 주전자를 더 잡수시면 어떡하시게. 또 쇤네를……."

하고 그 가늘게 찢어진 눈초리를 살짝 깔아메친다.

"내어오라면 내어오지 무슨 딴말이냐." 금성은 눈을 지릅뜨고 죽일 년 족치듯 한다.

놀이는 하릴없이 안으로 또 들어가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서방님의 본버릇이 또 나왔구나 하였다. 밤이 이슥하면 중뿔나게 주안상을 차려 내오라고 야단야단을 하고 술만 취하면 갖은 행티를 다 부리고 끝끝내 사람을 놓아 주지를 않는다. 밤새도록 주정받이를 하고 그 이튿날에는 또 마님에게 죽일 년 살릴 년 하며 톡톡히 꾸중을 모시는 것이 놀이의 늘 당하는 고역이었다.

놀이가 내어온 두 번째 주전자를 금성은 빼앗는 듯이 받아서 들어 보더니,

"이번에는 꽤 묵직하구나."

하고 입이 헤벌어지려다가 말고 다시 새침하게 다물어 버린다. 붓고 마시고, 붓고 마시고, 두 번째 주전자도 거의 다 비어 가건마는 금성은 웬일인지 술취한 낌새도 보이지 않는다.

놀이는 속으로 이상한 일도 있구나 싶었다.

여느 때 같으면 벌써 해갈을 떨 것 아닌가. 자기를 끌어당기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가 내려놓았다가 그 술내나는 입술을 비비대었다가…… 몸서리나는 주정으로 남을 못살게 굴 것 아닌가.

그런데 오늘 밤에는 주정은커녕 농담 한마디 걸지 않고 아주 못마땅한 눈치를 보이며 이따금 제 눈길과 마주치면 슬쩍 외면을 해버린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는 격으로 이왕 받을 주정이면 어서 받고 마는 것이 도리어 속이 시원할 듯하였다. 이렇게 시침을 떼고 점잔을 빼고만 있으니 나중에 무슨 벼락이 어떻게 떨어질지 몰라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송구스러웠다.

또 한 주전자를 더 내어왔다.

그 맹숭맹숭한 얼굴이 하얗게 시어서 철색이 지고 꼬부장한 어깨를 연방 추스른다.

"아이그,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잡수십시오. 큰일나겠네."

놀이는 보다가 못하여 이런 말을 하고 고만 술상을 치우려 하였다. 전 같으면,

"그럼 그럴까."

하고 그 음탕한 눈을 지끗지끗하며 곧잘 말을 듣는 서방님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은 댓바람에 역정부터 낸다.

"요년, 방정맞은 년."

욕지거리를 하고 놀이의 손에서 주전자를 뺏어 가지고 제가 손수 따라 먹기 시작한다.

금성은 속으로 오늘 밤에는 주만을 보러 가는데 네까짓 년이 다 무엇이냐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늘 위의 별을 따러 가는 그이거니 발부리에 핀 한 송이 풀꽃이야 돌아볼 나위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놀이를 안은 채로 주만을 꿈꾸기도 여러 번이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주만의 얼굴을 그리어 놀이의 얼굴과 바꾸어 보기도 하였었다. 이 따위 종년의 살도 이렇게 보드랍고 미끄럽거든! 하고 한숨도 한두 번 쉬지 않았었다. 벼르고 벼르던 오늘 밤에야말로 그를 찾을 것이 아니냐. 이런 때에 놀이 같은 것을 가까이하다니 그것은 주만에 대하여 모독이요 죄송스런 일이었다.

이런 줄이야 까맣게 알 수 없는 놀이는 상전의 태도가 이상하다 하면서도, 굳이굳이 술 먹는 것을 말리려 들었다.

"아이그, 제발 좀 고만 잡수십시오. 너무 취하시면 또 쇤네를……."

하고 놀이는 이번에는 잔을 치워 버리려 하였다.

"요년, 버릇없는 년, 더러운 년!"

금성은 눈을 흡뜨고 소리소리 질렀다.

"누가 네까짓 더러운 년을……."

당장 잡아나 먹을 듯이 흘겨본다. 주만을 보러 가는 데 백배 천배의 용기를 자아내게 하는 술잔을 빼앗다니. 괘씸한 년.

놀이는 대번에 눈물이 펑펑 쏟아질 듯하였다. 아무리 상전이기로 사람의 괄시를 이렇게 한단 말이냐. 사람을 짓주무르고 놀릴 적에는 할 소리, 안 할 소리, 갖은 잡보짓을 다 하고 채신머리없이 굴면서 술 그만 먹으라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버릇이 없단 말이냐.

"흥 더러운 년!"

더럽기는 누가 더럽단 말인가. 더러운 짓을 가르치기는 도대체 누가 가르쳤단 말인가.

원통하고 억울한 일은 맡아놓고 당하다시피 하는 처지이지만 이 때처럼 놀이가 분심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발딱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 버릴까 하다가 또 무슨 벌을 받을지 몰라서 주저주저하고 있자니까 창 밖에서 고두쇠 소리가 났다.

"안장을 다 지었습니다."

"응, 그래."

하고 금성은 겅정겅정 뛸 듯이 기뻐하며 영창을 연다.

고두쇠는 술상을 보고,

"여쭙기는 황송합니다마는 소인도 목이……."

말끝을 얼버무리고 연방 허리를 굽실굽실한다.

놀이에게는 그렇게 팩하게 성을 내던 금성은 고두쇠를 보고는 얼굴을 편다.

"그래 목이 컬컬하단 말이지. 자, 옜다, 이걸 먹어라." 하고 제가 먹던 주전자를 내어준다.

"네, 황송합니다."

"놀아, 이 상 마저 내어줘라."

'무슨 까닭이 있구나.'

놀이는 상을 내어주면서 생각하였다. 주안상을 하인에게 그대로 내어주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탑골에 있는 금시중 집에서 상서골 이손 유종의 집으로 가자면 안압지를 돌아내려 햇님다리를 넘어서면 남내 건너 남산 기슭에 너리편편한 기와집이 곧 그 집이다.

집 가까이 오자 금성은 말에서 내렸다. 열흘 지난 달이 낮같이 밝지마는 처음 온 집이라 어디가 어디인지 분별하기가 어려웠다. 금성의 주종은 벌써 여러 번 담장을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담은 두 길도 넘고 게다가 회칠을 번질번질하게 해놓았으니. 어디 발붙일 곳도 없는 듯하였다.

몇 바퀴를 돌아보다가 금성이와 고두쇠는 서로 마주보았다.

"어디 발붙일 데나 있어야지."

하고 금성은 짜증을 낸다.

"암만 둘러봐야 어느 한 모 허술한 데가 있어얍지요. 참 큰일인걸입시오."

"왜 너는 몇 번 심부름을 와봤다며. 그래 어디 보아 둔 데가 없단 말이냐."

"소인이 왜 도둑놈인갑시오. 그런 허술한 데를 보아 두겝시오, 허허."

"얘 웃을 때냐. 무슨 수로 어떻게 하든지 들어는 가봐야지."

금성은 화를 버럭 낸다.

"들어는 가보셔야겠지만…… 젠장맞을 무슨 도리가 있나? 진작 소인에게 그런 분부라도 하셨더면 미리 보아나 두든지, 이 댁 하인들 하고 연통이나 해놓았습지요."

"이제 와서 그 따위 소리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고두쇠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그 사나운 눈방울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더니 고개를 번쩍 들며,

"좋은 수가 있습니다. 서방님이 소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시면 어떨깝시오. 말하자면 무동을 서시란 말씀입니다. 그러면 담 위에야 올라가실 수 있겠습지요."

"무동을 서라! 그래 무슨 짓이라도 해보자."

금성은 술이 잔뜩 취한 판이라 체모를 돌아다볼 나위도 없고 앞뒤를 헤아릴 힘도 없었다. 무슨 창피를 어떻게 당하더라도 불 같은 욕심에 들어갈 생각뿐이다.

주종은 다시 뒤꼍으로 돌아 등성이 발채에 담이 조금 낮은 데를 찾아내었다.

"자 올라타십시오."

하고 고두쇠는 어깨를 떡 버티고 주저앉는다. 금성은 허전허전하는 발을 올려놓았다.

"자 소인의 어깨를 단단히 디딥시오. 자 일어섭니다."

금성은 지척지척 떨면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어규, 어규" 하고 다시 주저앉는다.

"자 두 손으로 소인의 대강이를 꼭 붙드시고 계시다가 소인이 일어서거든 서방님이 일어서셔야 됩니다."

금성은 고두쇠가 시키는 대로 그 목덜미에 몸을 붙이고 고두쇠의 머리를 틀어안았다. 고두쇠는 일어섰다.

"자, 이젠 소인의 대강이를 놓으시고 일어서셔서 담머리를 더위잡아 보십시오."

금성은 일어서려 하였다. 오그렸던 무릎이 덜덜 떨리다가 한 발이 비뚝 하며 어깨 밑으로 뚝 떨어지는 바람에 고두쇠의 이마를 얼싸안고 가까스로 다시 목에 걸터앉았다. 고두쇠의 목 힘이 세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주종은 엎치락뒤치락 재주를 넘을 뻔하였다.

그래도 금성은 벌써 혼이 반이나 떠서 진땀이 쏟아지고 사시나무 떨듯 한다.

한동안 숨을 돌린 뒤에야 젖 먹던 힘을 다 들여 겨우 담머리에 손을 얹게 되었다.

"자 몸을 솟구쳐 보십시오. 그리고 배를 담에다가 척 걸쳐 보십시오."

하면서 고두쇠는 제 주인의 발을 떠받쳐 준다. 금성은 간신간신히 한 다리를 끌어올리어 담을 타고 앉아서 헐레벌떡 가쁜 숨을 모두 꾸려 쉰다.

"자, 어뎁시오. 아래로 내려뛰실 수 있습니까." 금성은 담 안을 굽어보더니,

"얘, 큰일났다, 큰일. 이 발밑이 바로 연못이로구나."

"녜, 연못? 그러면 석가산을 쌓아 놓은 데 말입시오."

"그래, 그래."

"그러면 일은 바로 되었는뎁시오. 거기가 바로 구슬아가씨 거처하시는 별당인뎁시오."

"응, 그래!"

금성은 씨근벌떡 숨도 옳게 쉬지 못하면서도 새 기운이 부쩍 나는 듯하였다.

"바로 내려뛰실 수가 없으시면 두 손으로 담머리를 움켜잡으시고 두 다리를 담 안으로 쳐들어 보십시오."

금성은 담 밖에 놓인 한 다리를 끌어올려 담 안으로 집어넣으려다가 말고 죽을 상을 해가지고 고두쇠를 내려다보며,

"얘, 암만해도 안 되겠으니 네가 좀 올라와야겠다."

"녜, 소인도 올라오란 말씀입지요. 어떻게 올라를 가나."

고두쇠는 올라갈 곳을 찾는 듯이 이리저리 담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문득 난데없는 카랑카랑한 소리가 들려 왔다.

"도적이야, 도적야!"

아사달은 파일날 밤에 집 걱정, 아내 생각으로 말미암아 온밤을 거의 다 새우고 새벽녘에야 고달픈 졸음에 잠깐 눈을 붙인 둥 만 둥 깜짝 놀란 듯이 몸이 소스라치자 쏜살같이 탑 쌓는 일터로 올라갔다.

어젯밤을 꼬박이 새우다시피 하였건만, 이상하게도 머리가 거뿐하고 몸은 날아갈 듯이 가뜬하다. 잠 못 잔 이튿날에 항용 있는 무겁고 흐리터분한 기운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어떻게 쨍쨍하게 맑은지 튀기면 터질 듯하다.

그는 제 핏줄 가운데 제 것 아닌 무서운 힘이 용솟음함을 느끼었다.

오래간만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어마어마한 신흥(神興)이 저를 찾아온 줄 그의 넋은 벌써 깨달은 것이다.

이 흥이 오기를 얼마나 바랐었던고, 기다리었던고, 이 '흥'이란 한없이 곱고 한없이 사납고 철석같이 미쁘다가 바람같이 변한다. 너르자면 온누리에 차고 잘자면 겨자알도 오히려 크다. 활달할 적엔 양양한 바다에 봄바람이 넘놀고 까다롭자면 시기하는 지어미도 물러앉을 지경이다. 그러고 갖은 조화를 다 가진 듯 고대 여기 있는가 하면 까마득하게 사라지고, 분명히 손아귀에 들었거니 하다가 돌아서면 간 곳을 찾을 길 없다. 어느 때는 푸드득 나는 새 날개에서 그대로 뚝 떨어져서 품속으로 기어들고 어느 때엔 발부리에 밟히는 조약돌에서도 불쑥 그 안타까운 모양을 나타낸다.

겨누와 정을 들고 얼마를 신고를 하고 생각을 하여도 날이 마치도록 그림자도 얼씬 않을 때도 있고, 생각이 나면 심술궂게도 아닌밤중에나 샐녘에야 언뜻 얼굴을 비치기도 한다.

바윗덩이에나 지질린 것 같은 답답하고 캄캄한 머리 가운데 으렷이 한 가닥 광명이 어릿거린다. 그 실낱 같은 빛줄이 차차 굵어지다가 떼구름을 쫓고 쑥 햇발이 불거지듯 갑자기 머릿속이 환해지면 어느 모를 어떻게 갈기고 어디를 어떻게 쪼아야 될 것도 따라서 환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통 때는 이 신흥이 그리 길지 않았다. 번개처럼 번쩍 하다가 그대로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길어도 한두 시간을 지나지 않는 법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식전 꼭두부터 찾아온 것도 전보다 다를 뿐인가, 그 빛깔도 유난히 부시고 흐름도 잇달고 연달아 그칠 줄을 모른다.

그리고 그 빛물결도 여느 때 모양으로 한결같고 조용하지를 않다.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찬란하고 너무도 급하다.

영롱한 무지개가 곤두서고 달과 별들이 조각조각 부서져서 수없는 금점 은점이 소용돌이를 친다. 넘놀고 뛰놀고 곤두박질을 치고 줄달음질을 친다.

이 급류에 따라 아사달의 팔은 무섭게 빠르게 놀려졌다.

"이 줄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이 고비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 들여 번개같이 마치와 정을 놀리었건만 굽이치는 급류를 따라가기에 허덕허덕하였다.

그는 아침도 잊었다, 점심도 잊었다, 저녁도 잊었다. 밤이 되었다. 날이 새었다.

그의 줄기찬 정질과 마치질은 쉴 줄을 몰랐다.

쉬려야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번 그를 휘어잡은 '흥'은 좀처럼 그를 놓아 주지 않았던 것이다. 황홀의 경계에 그는 온전히 들어서고 만 것이다.

돌결은 그의 손 아래에서 나뭇결보담 더 연하게 더 하잘것없이 부서지고 다듬어지고 밀려졌다.

영락없이 꼭꼭 제 자국에 들어가 맞는 쇠와 돌의 부딪치는 소리는 그의 귀엔 이 세상의 무슨 풍류보담 무슨 곡조보담 더 아름답고 더 신이 났다.

제 손이 거칠 때마다 드러나는 일머리는 이 세상의 무슨 보배보담도 더 소중하고 더 살가웠다.

그는 목마른 줄도 몰랐다. 배고픈 줄도 몰랐다. 죽고 사는 것조차 그는 몰랐으리라.

그는 이 흥겨운 한 시각이 아까웠다. 한 찰나가 아까웠다.

이따금 그의 팔에 힘이 아니 빠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 다음 순간에는 아까보담 몇 갑절 더 되는 힘을 다시 돌이킬 수 있었다.

둘째 층의 새김질과 다듬질은 댓바람에 끝이 나고 말았다. 셋째 층을 지을 바위도 몇 번 겨누질에 어렵지 않게 매만질 수 있었다.

돌 다루는 울림은 잔 가락 굵은 가락을 섞어 가며 마치 급한 소나기 모양으로 온 절 안을 뒤덮었다.

아사달의 일은 인제 낮도 없고 밤도 없었다.

점심 대중공양을 마치고 아상노장이 들어가자 불국사 중들은 한자리에 모인 김에 '공론'이 분분하다. 벌써 며칠째 밤이고 낮이고 끊이지 않고 귀아프게 들려 오는 돌 다루는 소리에 그들은 진저리를 내었다.

"벌써 며칠째나 되었을까."

"이틀은 더 될걸."

"이틀이 뭐요. 아마 오륙 일은 되지."

"벌써 그렇게 되었을까."

"아무렴, 그렇게 되고말고."

"나무아미타불, 오륙 일을 먹도 않고 자도 않고."

"원 그렇게들 정신이 없단 말이오."

듣다가 못한 듯이 떠는턱이 중론을 가로맡아 시비를 가릴 듯이 나선다.

"가만있거라. 오늘이 사월 열하루, 파일 이튿날이니 곧 아흐렛날 식전부터 일을 시작했으니깐 꼭 오늘이 사흘째 잡아드는군."

떠는턱은 꼬챙이 같은 손가락을 또박또박 꼽아 가며 따지고 나서, 휘 한번 좌중을 훑어본다. 내 정신이 이렇게 좋은데 어느 뉘가 감히 딴소리를 할까 보냐 하는 눈치다.

"장실 말씀이 옳소. 따져 보니 과연 오늘이 꼭 사흘 되는 날인가 보오."

원주가 이번에는 고분고분히 찬성을 해버린다.

"단 사흘이라도 어려운 노릇이야."

"어렵다뿐이오. 단 하루라도 어려운 노릇인데……."

"사흘씩 굶다니 어렵고말고. 그야 우리 세존께서야 칠 년 고행도 하셨지만!"

"아니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일개 석수를 어찌 우리 세존께 댄단 말이오."

말과 말이 주거니 받거니 벌써 중구난방이다.

"원 일을 해도 주책머리가 없지그려. 안 하려 들면 이틀 사흘 손끝 까딱하지 않고 하려 들면 며칠씩 굶고 야단이니."

빨갱이도 마침내 말참견을 한다. 말씨가 우락부락한 것을 보면 아직도 아사달에 대한 미움이 그대로 남은 듯.

"그것도 소위 명공의 유세랄지."

하고 누가 빈정거린다. 파일 잘 못 쇤 분풀이는 뜻밖에 거둥으로 말미암아 풀어졌을 법도 하지마는 그래도 '떠 들어온 부여놈 따위'가 아니꼽다는 감정이 어디선지 움직이고 더구나 자기네가 신 벗고 따르려야 따를 수 없는 그 뛰어난 재주를 까닭 없이 시새었던 것이다.

"그야 그렇게 말할 것 있소. 일이야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할수록 좋은 것 아니오."

이번에는 원주가 전날과는 아주 딴판으로 아사달의 역성을 든다. 산댓속이 빠른 그는 거둥으로 생길 만큼 생겼고 또 왕이 한번 길을 터주신 후로 대갓집 불공도 푸득푸득 들어오기 시작한다. 첫째로 이손 유종 댁 아들 발원의 삼일 불공이 들지 않았느냐. 더구나 불시에 거둥을 하시게 된 것이 전하는 말과 같이 다보탑 구경하시는 데 계셨다면 그것을 쌓은 석수를 미워할 까닭은 도무지 없었다. 하루바삐 석가탑마저 이루어지면 무슨 수가 또 어떻게 생길지 누가 아느냐.

"침식을 잊으니 그것이 딱한 노릇이야." 하고 그 눈방울이 겉도는 눈에 제법 걱정하는 빛까지 보이었다.

한 절의 살림을 맡은 주장중이 이렇게 역성을 들어 놓으니 입 놀리던 중은 멀쑥해지고 난데없는 동정들이 쏟아진다.

"공양을 안 드니 정말 큰일이군."

"병이나 나면 어떡하나."

"글쎄 나도 그게 걱정이야."

"억지로라도 좀 들게 못 할까."

"기어이 좀 권해 보시지요."

"글쎄 나도 두어 번 권해 보았지만 워낙 열이 난 사람이라 말이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니, 허허."

귀찮고 성가신 일은 웃음으로 막아 버리는 것이 원주의 버릇이다.

"그런 신통력을 가진 분이니 사흘쯤 굶는 것이야 관계치 않겠지만."

"아무리 법력이 놀라워도 너무 곡기를 끊어 가지고는 염려지, 염려야."

"그러나 어쩔 수가 있소. 대공을 방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마 오늘쯤이야 일을 그치겠지."

"만 이틀에 해놓은 일머리를 보면 엄청나더군, 엄청나."

"그야 이 세상에서 다시 얻기 어려운 명공이라는밖에."

"그 탑을 모시라고 부처님이 일부러 내신 사람이지."

"어 놀라운 재주거든."

가장 동정을 하는 척도 하고 추어도 올리면서도 속살로 아사달의 신상을 염려하는 위인은 하나도 없었다. 무슨 수로 어떻게 하든지 미음 한 모금이라도 결단코 마셔 보자는 씨알머리는 아직 생겨나지도 않았다. 불전에 공양드리듯 하루 세 끼만 갖다 놓았다가 치워 버렸다가 하면 고만이었다.

아사달의 머릿속을 꿰뚫고 쏜살같이 닫는 흐름은 갈수록 혼란해지고 갈수록 급격해진다.

처음에도 물꽃 송이송이마다 별처럼 빛을 발하여 마치 별로 엉기인 은하수가 굽이치는 듯 눈부시지 않음이 아니요 영롱하지 않음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그 광채는 밝고도 부드러웠지마는, 이제 와서는 그 물결이 그대로 기름인 양 물보라를 날리는 대로 훨훨 불길을 일으키어 물꽃인지 불꽃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다.

그리고 빠르기는 물결이라느니보다 차라리 바람결 같다. 어지럽게 춤추는 꽃구름을 휙 몰아가는 회오리바람도 이러할 듯.

아사달의 손길도 바람결같이 날쌔다.

머릿속에서 쉴새없이 터지는 줄불보담 못하지 않게 그의 눈앞에서도 쇠와 돌이 단판 씨름을 하는 불꽃이 번쩍번쩍 흩어졌다.

이 휘날리는 불꽃 사이에 모래알만한 작은 아내의 모양이 튕기는 듯 번득이다가 스러지기도 하였다. 그리운 아내와 애달픈 '흥'이 두 손길을 마주잡고 그를 찾는 수가 이전에도 흔히 있었다. 그리운 생각이 쌓이고 쌓이어 손바람이 절로 나는 '흥'을 빚어내고 자아내기도 기실 여러 번이었었다.

아쉬운 마음이 도저하고 간절할수록 그에게 '접'하는 '흥'도 놀랍고 엄청난 때가 많았었다.

구축축한 풋사랑과 거룩한 '솔도파(탑)'가 한데 뒤범벅이 되는 것은 발을 구를 일인지 모르리라. 기가 막힐 노릇인지 모르리라. 그러나 사랑에서 흥이 오고 흥이 어리어 세상에도 진기한 탑이 이루어지는 것을 어이하랴. 부처님도 웃으시며 눈을 감으실지 모르리라.

이번만 해도 외로운 나그네의 몸으로 명절을 맞이하게 되고 지나친 그리움과 걱정에 몸이 달고 애를 태운 나머지에 이런 신흥이 그의 덜미를 짚은지 모르리라.

'흥'은 인제 이글이글한 불덩어리가 되어 그대로 디굴디굴 구른다.

그는 불채찍에 휘갈기는 사람 모양으로 죽을 판 살 판 정과 마치를 휘둘렀다.

몇 날이 되었는지 몇 밤이 되었는지 그는 모른다. '흥'이 끊어진 때나 그에게 낮도 있고 밤도 있었지만 '흥'이 꼬리를 맞물고 잇달아 일어날 때에야, 기실 그 '흥'이 계속되는 동안이 그에게는 도무지 한순간인지 모른다.

머리에는 아직도 꽃불이 재주를 넘고 뒹구는데 몸의 힘은 마음의 힘에 차차 휘감겨 들어가는 듯하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다."

용을 쓰면 쓸수록 팔의 맥은 자꾸만 풀려진다.

"저기 불덩어리가 구을지 않느냐. 저 불을 쫓아가야 한다. 세상 없어도 따라가야 한다."

애가 마르도록 외치면 외칠수록 정과 마치는 제자리에 가서 놓이지 않는다.

웬일일까! 그전에도 '흥'의 불길이 껌벅껌벅 꺼지려 할 때에도 손길은 신이야 넋이야 쫓아가서 아주 꺼져 버린 뒤라도 그 남은 운으로 얼마쯤은 끌어갔었거든 이번에는 불줄이 이렇게 춤을 추는데도 팔을 마음대로 놀릴 수가 없으니 웬일일까!

"될 말인가, 될 말인가."

차차 차차 까무러져 가는 제 몸의 힘을 소리소리 불러일으키려 하였건만 기를 쓰면 쓸수록 팔은 허둥지둥 꿈지럭거릴 뿐이다.

"이것 큰일났구나."

아사달은 저도 제 힘에 절망을 느끼면서도 마치와 정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 분명히 댈 데 대고 칠 데 쳤건만 빗맞고 허청을 쳐서 귀에 익은 제 자국에 들어가 떨어지는 쾌음이 여간해서는 일어나지를 않는다.

아사달은 수렁에 빠지는 사람 모양으로 버르적거리며, 이번이란 이번에야말로 제 자국을 때리리라 하고 마치를 번쩍 들어 보기 좋게 한번 휘갈겼다.

아뿔싸! 할 겨를도 없이 마치는 허공을 치고 그의 몸은 이상한 힘으로 휙 앞으로 잡아 낚아채는 듯하였다.

그 찰나, 그의 머릿속에서 마치 눈보라처럼 설레던 불길이 한꺼번에 확 하고 타올라서 삽시간에 불바다를 이루더니 이내 아뜩하게 꺼져 버린다……. 까무러친 아사달의 머리 위에 지나치는 달빛이 종용하게 흐른다.

"그것 보십시오. 쇤네 꾀가 어떠한가."

"그 잘난 꾀."

"모로 가도 장안만 가면 고만 아닙시오."

"그야 마님께서 내 말을 잘 들어주신 탓이지. 어디 꼭 네 꾀 때문이냐."

"아니 누가 마님을 졸라 보시라고 했는뎁시오."

"얘 말도 마라. 생으로 사내 동생을 하나 낳아 줍시사고 떼를 쓰느라고 내 땀이 얼마나 빠졌기에."

"뒹굴고 발버둥을 치시고, 하하. 아이 우스워라. 그래도 애초에 묘책을 생각해 내는 것이 여간 슬기가 아니랍니다. 이런 대강이도 쉽지는 않답니다."

털이는 제 머리가 대견하다는 듯이 주먹으로 자근자근 두들겨 보이며 연해 공치사를 한다. 주만과 털이는 다보탑 있는 데로 걸어올라가며 기쁘게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다.

"아이 장해라. 그 모과머리가."

"생기기야 모과면 어떤갑시오. 머리란 슬기만 들면 고만 아녜요."

"슬기! 놀라운 슬기도 있고는 보겠구나."

"놀랍구말굽시오. 그래 아닌밤중에 남복을 차리고 수레도 안 타시고 등불도 없이 이 먼길을 오실 법이나 합니까. 발만 부르트고 호방에나 빠지고 죽을 고생만 하셨지 뭐입시오. 아이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뎁시오."

하고 털이는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고 나서,

"자 오늘은 어떱시오. 구종을 늘인 듯이 앞세우시고 마상에 높이 앉으시어……."

"아이 장하다, 네 꾀가 장하다. 고만두어라. 무슨 난리를 치러 나가니. 마상에 높이 앉아서, 호호."

하고 주만도 조용한 웃음을 터뜨리었다.

"장하구말굽시오. 중들은 앞에서 굽실굽실하고. 그날 밤에 보행으로 초라하게 그냥 와보십시오. 절문 안을 들어서시게나 할 텐뎁시오. 맙시사, 아하하."

털이는 아주 신이 나서 재깔거리며 웃어 댄다.

"얘, 무슨 방정맞은 웃음 소리냐. 누가 들으면 괴란쩍게."

"누가 들으면 어떤갑시오. 이손 댁에서 불공을 드리러 오시고 그 댁 아가씨께서 저녁에 달빛을 따라 절 구경을 하시는데 어느 뉘가 감히 탄한단 말씀입시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요란스럽다."

"어유 조심은 퍽도 하시네. 어느 때는 밤중에라도 그냥 지쳐 들어오실 듯이 자는 사람을 깨워 일으키시고 야단법석을 하시더니. 그래 만일 아가씨 하시자는 대로 했더라면 그야말로 큰 야료가 일어날 뻔하였지! 온 집안이 벌컥 뒤집히고 온 절 안이 벌컥 뒤집히고. 쇤네는 목이 달아나고, 아하하."

털이는 웃음이 체해서 눈물까지 글썽글썽하여졌다.

"그래도 또 웃음이야, 무에 그렇게 좋으냐."

주만도 털이를 나무라기는 하면서도 솟아나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무에 좋으냐굽시오. 쇤네도 좋기야 좋습지요. 그날 밤에 그 고생을 안 했으니. 그렇지만 아무리 한들 아가씨만큼이야 좋을깝시오."

"내가 좋을 일이 무에냐."

어쩐지 주만의 목소리는 조금 기어들어가는 듯하다. 귀밑 언저리가 갑자기 불그레하게 환해지는 것은 달빛이 거기만 비치는 탓만도 아니리라. 털이는 염치없게도 주만의 얼굴을 말끄러미 들여다보며,

"아가씨도 그런 시침을 뗍시오. 좋거든 그냥 좋다구 그리십시오, 히히."

털이는 정작 제가 좋은 듯이 겅정겅정 뛴다.

"원 그 애는!"

하고 주만도 입을 다물려 해도 그 가장자리가 자꾸만 풀리었다.

그들의 발길은 어느덧 다보탑 가까이 왔다.

"얘, 인제는 제발 좀 떠들지 말아 다오."

주만은 진정으로 털이를 타이르고, 고름을 다시 매고 옷깃을 여미었다.

그는 거룩한 자리에 들어서는 것처럼 기쁨에 헤벌어진 마음이 도사려짐을 느끼었다.

"탑돌기에 애간장을 태우던 데를 다 왔는걸입시오." 그래도 털이는 까불기를 그치지 않았다.

주만과 털이는 다보탑을 한 바퀴 휘 돌아보았다.

눈이 어리는 아름다운 그 모양이 전보다 한결 더 정다웠다. 홑으로 묵묵한 돌이 아니요, 숨길이 돌고 맥이 뛰는 생물인 양 주만을 반기어 맞는 것 같다. 그 연연한 입술을 열어 그리고 그리던 회포를 하소연하는 듯하다. 그 부드러운 가슴을 헤치고 아늑하게 안아 주는 듯하다.

이 탑의 둘레를 돌고 또 돈 지가 단 며칠이 안 되건만 주만에게는 해포가 넘는 것 같았다. 햇수조차 따질 수 없는 까마득한 옛날인 것도 같았다.

그날 밤보담 더 밝고 더 둥근 달이 역시 그날 밤 모양으로 탑의 몸에 서리었다.

주만은 서성서성하며 차마 발길을 못 돌리고 있노라니 털이는 옆에서 재재거리기를 말지 않는다.

"왜 오늘 밤에도 탑돌기를 또 하시렵시오. 왜 또 여기 이러고만 계십니까. 어유, 쇤네는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는뎁시오. 정말 쇤네는 그날 밤에 죽을 고를 치른걸입시오. 몇 바퀴를 돌았는지 어디 헤일 수도 없지. 그러니 이년의 발목쟁이가 성할 겁니까. 그때 시큰거리기 시작한 게 입때 낫지를 안했답니다."

하고 털이는 절름절름 절어 보인다. 달 비친 땅 위에 땅달보 같은 그림자를 그리고 낑낑 매며 돌아가는 것이 허리가 부러지도록 우스운 꼴이었으나 주만은 낄낄대고 웃기는 싫었다.

"여기 이러고 밤을 새우시랍시오. 어서 가보십시오."

제가 재롱을 떨어도 알은체를 안 해주는 데 적이 흥이 깨어진 털이는 절름발이 놀음을 그치고 잠깐 입을 닫았다가 또 보챈다.

시름없이 달만 쳐다보고 있던 주만은 성가신 듯이,

"가기는 또 어디를 가잔 말이냐."

"아니 고작 이 다보탑을 보시랴고 그 애를 쓰시고 여길 오셨단 말씀입시오. 저 석가탑으로 어서 가보셔야 될 것 아닙시오."

"석가탑으로?"

주만은 무심코 말을 받는다.

"그러면입시오. 거길 가셔야 만나실 분을 만나실 것 아닙시오."

"……"

주만은 다시 달만 쳐다본다.

"어서 좀 가보십시오. 나도 모시고 갈게."

"무에 그리 급하냐."

그렇게 급하던 마음이지만, 정작 예까지 오고 보니 축 늘어진다.

갈까말까.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망설여진다. 단 한 번만 보아도 원이 풀릴 것 같더니만 그대도록 중난하던 원을 이렇게 쉽사리 풀 수 있게 되었거늘 가슴은 왜 이리 답답한가. 여기서 몇 걸음을 뜨지 않아 '그이가 있구나' 하는 생각만 해도 얼굴은 왜 이렇게 화끈거리는가…….

"언제는 그렇게 서두시더니 인젠 또 급할 게 없단 말씀입시오. 아가씨도 알고 보니 여간 변덕쟁이가 아니시군."

털이는 이번 일에 제 공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을 믿고 함부로 지싯거리고 말씨도 마구잡이다.

"그 어른이 거기 꼭 계실 줄 네가 어떻게 꼭 안단 말이냐."

빈말뿐이 아니요, 참으로 주만에게 이런 생각이 지나갔다. '거기 가면 그이가 있거니' 하고 믿기는 하였지만 꼭 있다고야 어찌 장담하랴. 혹은 없을는지도 모른다. 만일 없다면!

'있거니' 할 때는 마음이 조려붙기는 하였으되 느긋하고 든든하더니 '없거니' 하매 별안간 속이 텅 빈 듯이 헛헛해지며 부랴사랴 뛰어가 보고 싶었다.

"그 탑에 꼭 계시구말구. 벌써 다 알아본걸입시오. 그 방에서 시종 드는 차돌이란 아이놈에게 넌지시 다 물어 보았답니다. 어서 가시기나 하십시오."

하고 털이는 주만의 등채를 밀다시피 한다.

몇 걸음을 걷지 않아 석가탑 위에 사람이 있고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아보게 되었다.

"저기를 보십시오. 그 어른이 마치를 들고 일하시는 게 보이지 않습시오."

털이는 내 말이 어떠냐 하는 듯이 연방 손가락질을 하며 가리켜 준다.

실상 털이보담 주만이가 먼저 보았다. 희미한 달빛 아래 아사달이 마치를 쥐고 돌 위에 꾸부리고 있는 것을.

"얘, 그런데 어째 돌 다듬는 소리가 들리지를 않니."

주만은 주춤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본다.

"글녓시오." 털이도 들어 보다가,

"참 소리가 안 나는군요. 차돌의 말을 들으면 어두운 밤에도 일을 잘 하신다던데."

하고 째기눈을 뜨고 이윽히 바라보더니만 또 깔깔댄다.

"저길 좀 봅시오. 얼굴을 돌멩이에 비비대시고 아주 한잠이 드셨군요. 그 맨바닥에, 으흐흐."

주만과 털이는 석가탑 앞에 와 걸음을 멈추었다.

"아하, 아주 늘어지게 한잠이 드셨는걸입시오. 쇤네가 올라가 볼깝시오."

털이는 다짜고짜로 거기 놓인 사다리에 한 발을 얹으려 하였다.

"얘, 주무시면 조금 있다가 다시 오는 게 좋지 않니."

"글녓시오. 온종일 일을 너무 많이 하시어 고단도 하실 테니."

털이도 이번에는 순순히 이르는 대로 들었다. 아무리 주책없는 털이라도 생면부지의 사내가 자는 것을 덮어놓고 깨워 일으키자는 염의는 없었다.

그들은 가만히 발길을 돌렸다. 마치 자기네의 자국 소리에 자는 이의 고단한 잠이 깨일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털이는 앞장을 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주만은 무엇이 마음에 켕기는지 다시 돌쳐선다. 어슴푸레한 빛을 통하여 그는 뚫어지게 탑 위를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는다.

"언제는 도로 가자시더니 왜 그리고 서 곕시오. 그래도 차마 발길이 떨어지시지를 않습시오, 히히."

앞을 서서 가다가 제 주인의 뒤따르는 기척이 나지 않으매 힐끈 돌아다보고 털이는 또 우스개를 걸었다.

주만은 털이의 버릇없는 우스개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한동안 뿌리가 박힐 듯이 서 있다가 손짓으로 털이에게 가까이 오라는 뜻을 보이었다.

"얘, 암만해도 이상스럽구나. 주무신다 한들 어찌 저렇게 기신도 없이 주무실 리야 있겠니."

과연 돌 위에 늘어져서 등 언저리가 어쩐지 푹 꺼져 보이는 게 보통 잠자는 사람으로는 너무도 종용해 보이었다.

털이도 제 주인의 목소리가 무슨 불길한 조짐을 느낀 것처럼 약간 떨리는 것을 듣자 심상치 않다는 듯이 발을 사르르 미는 듯이 다시 돌쳐서 제 상전을 따라 탑 위를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딴은 좀 이상한뎁시오. 그냥 주무시기만 한 다음에야 저렇게 퍽 엎어져 계시지는 않을 성싶군요."

"그리고 마치를 그대로 들고 있는 것도 수상하지 않으냐. 저렇게 고단하게 잠이 든다면 쥐었던 것을 으레 놓을 텐데."

"그야 쥐고 자는 수도 있겠습지요만 아무튼 궁금하니 쇤네가 좀 올라가 볼깝시오."

주만도 이번에는 말리지 아니하였다.

털이는 휘청휘청 사다리를 부여잡고 발발 떨면서 올라갔다.

어른어른하는 달빛에서 그 방구리 같은 몸을 꼬불랑꼬불랑하며 털이는 이리 갸웃 저리 갸웃 늘어진 이의 이모저모를 자세자세 들여다보고 있다가,

"에구머니나!"

버럭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응?"

하고 주만도 깜틀 하며 사다리 앞으로 한 걸음 바싹 다가들었다.

"이거 크, 큰일났습니다. 이 뺨에 피, 피가……."

"응, 피가!"

하고 부르짖을 겨를도 없이 주만은 나는 새와 같이 사다리를 날아올랐다.

"어디, 어디냐."

올라서는 길로 주만은 허둥지둥 묻는다. 아사달의 오른편 뺨과 돌이 맞닿은 어름을 들여다보고 있던 털이는,

"여길, 여길 봅시오."

하고 손가락으로 제 보던 자국을 가리킨다.

주만은 미처 치마폭도 못 거두고 올라온 탓에 발이 치맛단에 휘감기어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하였다.

달빛은 아무리 밝다 해도 흐릿한 탓에 빛깔 같은 것이 또렷또렷하게 나타나지를 않는다.

털이는 재빠르게 제 손을 그 뺨과 돌 사이에 집어넣었다가 꺼내며,

"이것 봅시오. 눅눅하게 묻는뎁시오."

하고 무슨 물기가 도는 제 손가락 끝을 비비어 보인다.

살에 묻은 피는 더구나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주만은 급한 마음에 제 치마폭을 꾸김꾸김 꾸겨 쥐고 그 뺨과 돌을 훔쳐 내어 달빛에 펴서 비춰 보고,

"피가, 피가 분명코나."

마침내 단정을 내리었다.

"이걸 어째, 이걸 어째요."

털이는 쩔쩔매었다.

"얘, 몸을 좀 흔들어 보렴."

"여봅시오, 여봅시오."

털이는 넘어진 이의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며 등을 흔들어 본다.

"어규, 어째 살이 단단한 것이 굳은 것 같은뎁시오."

주만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아사달의 코에다가 손을 대어보았다. 그윽한 숨길이 있는 둥 만 둥한데 손을 쥐어 보니 마치 얼음장같이 싸늘하다.

"이를 어떡하나." 주만의 눈에서는 괸 때 모르는 눈물이 쏟아진다…….

아사달은 까무러친 그 이튿날 아침에야 겨우 깨어났다.

아리숭아리숭한 머리 가운데 한창 흥이 겨워서 겨누를 휘두르고 정을 들 만치는 모양이 저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이 떠올랐다.

그 신이 난 잔 가락 굵은 가락이 잉잉 하니 귓결에 울리며 제 몸은 반공에 둥둥 솟아 일렁일렁하는 듯하다.

돌불이 번쩍번쩍 흩어지는 대로 눈동자만큼씩 한 수없는 아사녀의 모양이 마치 콩 튀듯 튀어올라 핑핑 내어둘리는 눈끝에서 뱅글뱅글 매암을 돈다.

'내가 왜 이러고 누워 있을까?'

그는 문뜩 이런 생각을 하였다. 저 아닌 아사달은 저렇게 일을 하느라고 곱이 끼었는데 저는 번듯이 누워서 핀둥핀둥 노는 것이 송구스러웠다.

'한창 흥이 나는 판인데 나는 왜 이러고 누워 있을까. 이 드물고 소중한 시각에 나는 왜 한만히 쉬고 있을까. 몇 번 손질이면 석가탑의 삼층이 끝날 것이 아닌가. 돌결이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 터이거늘 나는 어느 틈에 드러눕고 말았을까…….'

수없는 아사녀의 모양이 하나씩 둘씩 엉겨붙더니 다 자란 아사녀가 되어 뒷걸음질을 치고 멀리멀리 달아나며, 한창 바쁘게 일을 하고 있는 저 아닌 아사달을 손짓하여 부른다.

'저것 보아, 아사녀는 저렇게 부르지 않는가. 저 사람의 겨누와 정을 든 팔은 그렇게 번개같이 놀지 않는가. 그런데 내 몸은 왜 여기 늘어져 있을까.'

암만해도 무슨 곡절인지 알 수가 없으나 아무튼지 자기가 일을 집어치우고 만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때 일을 끝내었던들 나는 벌써 훨훨 날아갔을 것이 아닌가. 지금쯤은 우리집 사립문을 삐걱삐걱 열 것이 아닌가. 그러면 아사녀는 엎드러지며 고꾸라지며 뛰어나올 것이 아닌가. 아무 거리낌없는 내 방에서 네 활개를 퍼더버리고 실컷 마음껏 쉴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는 그 동안을 못 참아서 여기 쓰러져 버린 제 몸이 한량없이 괘씸스러웠다.

'어서 일어나야지.'

하고 그는 몸을 추스르려 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의 몸은 나른하게 풀어져서 손가락 끝 하나 오그릴 수도 없었다.

마치와 정이 제 자국에 맞지를 않아서 화증을 내던 것이 인제 와서 또렷또렷하게 생각이 난다.

'옳거니 그때 내가 화증이 나는 김에 마치를 휘갈겼거니. 그리고 그 다음에는…….'

생각의 실마리가 풀릴 듯 풀릴 듯하면서도 또다시 갈래를 잡을 수 없다. 그 후에 얼마를 일을 더한 것도 같고 탑 위에 그냥 쓰러진 법도 하다.

'마치를 휘갈기고 나서…….' 끝이 아물아물해지려는 그 생각을 붙들고 그는 다시금 곱씹어 보았다.

암만해도 그 뒷일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공중에 둥실 떠 있는 듯하던 몸이 차차 가라앉는 듯하며 뼈마디가 얼얼하였다.

그러자 문득 아사녀의 냄새가 난다. 숨을 들이쉬는 대로 그 감칠 듯한 향기는 모랑모랑 피어나서 콧속으로 흘러들어 피 방울방울에 스며든다.

육지에 뛰어오른 물고기가 오래간만에 물맛을 보는 것처럼 그는 가슴을 벌룸벌룸하며 숨을 크게 내쉬고 들이쉬었다.

아아 향기! 아사녀의 향기! 삼 년이나 길고 긴 세월에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그 향기. 주리고 주리던 그 향기.

과연 그는 이 향기에 주리었다. 그립고 그리운 아내의 얼굴은 비록 환영일망정 때때 그의 눈에 밟히었지만 아사녀의 현실의 몸이 아니면 발할 수 없는 이 향기가 현실로 그의 코 안으로 기어들 까닭은 없었다. 그는 대공을 마치고 어느결에 아사녀의 옆에 와 누워 있는가.

아사달은 눈을 두리번두리번하였다.

헌털방이 다된 제 벙거지가 걸려 있는 바람벽만 보아도 갈 데 없는 불국사 제 처소가 분명하거늘 이 향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흘러오는가.

아사달은 바로만 두었던 고개를 돌리어 뚤레뚤레 살피려 하였다. 그러자 귓결에서 별안간 꾀꼬리 같은 여낙낙한 음성이 들려 왔다. 그는 사내들 틈바구니에서 날을 보내었고,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간만이었다.

"아가씨, 아가씨, 구슬아가씨. 저 좀 보십시오. 그 어른이 고개를 돌리시는군요. 눈을 뜨시고 인젠 아주 깨어를 나셨군요."

홀로 외따로 누웠거니 생각을 하고 있다가 난데없는 사람 소리를, 더구나 여자의 목청을 듣고 아사달은 깜짝 놀라며 그리로 고개를 돌리었다.

제 옆에서 열 뼘도 안 떨어진 저만큼 웬 처녀 둘이 앉아 있지 않은가.

그 중에 한 처녀는 어디선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저이를 어디서 보았누.'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며 아사달은 궁금증을 내었다. 그래도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데 두 처녀는 불시에 몸을 일으키어 제 머리맡에 와서 앉는다. 아사녀의 몸에서 나던 그 향기를 아낌없이 풍기면서.

'오, 옳지 그 향기가 바로 이 처녀들에게서 난 게로구나.'

아사달은 어리둥절하면서도 향기의 출처를 터득하였다.

"인제 좀 어떱시오. 괜찮습시오."

낯선 처녀는 바싹 대어들듯이 다가앉으며 묻는다.

'무에 어떠하단 말인가. 괜찮다는 것은 또 뭣을 가리키는 것인고.'

아사달은 웬 영문인지 말귀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낯익은 처녀는 가까이 오기는 왔으나 물끄러미 들여다만 볼 뿐이요, 아무 말이 없다. 그 목단화 송이 같은 번화한 얼굴 바탕에 어울리지 않게 화색이 걷히고 슬픈 빛이 가득한 것이 대자대비의 관세음상을 생각나게 하였다. 그러나 관세음상이라면 그 눈은 너무 정다웁고 너무 생기가 도는데 자기를 한없이 안타까워하고 한없이 애처로워하는 눈치다. 아사녀의 자기를 보는 눈에서나 이런 눈치를 더러 본 듯싶었다.

'어디서 꼭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보았을까?' 아사달은 또 뇌어 보았다.

'옳거니, 파일날 밤 다보탑에서 보았구나.'

마침내 황연대각을 해내었다. 그때 여불없이 제 아내의 환영으로 속았던 그 처녀가 분명하다. 그리고 보니 그 윗입술이 조금 짧은 듯한 입 모습 언저리든지 갸름한 판국이 연신 제 아내와 같은 점도 없지 않아 있어 보이었다.

'그 처녀가 어찌 또 여길 왔을까. 혹은 내가 그 처녀의 집에 누워 있는 것이나 아닌가.'

아사달의 생각은 다시금 알쏭달쏭해진다.

'이게 생시가 아니고 모두 꿈이어니.'

생각해 보매 딴은 길고 깊은 꿈속을 거쳐 나온 듯도 싶고 아직 헤어나지를 못한 것도 같았다.

그러고 또 아사달을 놀라게 한 것은 그 낯익은 처녀가 눈물을 흘린 것이다.

그 처녀는 참고 참은 모양이었으나 끝끝내 구슬 같은 눈물이 연잎에 빗방울처럼 그 뺨을 구을러 떨어지고야 만다. 뒤미처 곧 눈물을 닦고 닦았으나 그 속눈썹이 은가루를 뿌린 듯 번쩍이고 어룽진 뺨이 마치 이슬에 촉촉히 젖은 꽃잎 같은 것도 천연 이별하던 날 밤에 아사녀가 숨어 울던 것과 같았다.

'저 처녀가 왜 울까.'

아사달은 괴이쩍게 생각은 하면서도 그 눈물이 자기를 동정하는 것인 줄을 어렴풋이 깨닫고 그윽하나마 고마운 정이 움직이었다.

두 처녀는 물론 주만과 털이였다.

그들은 어젯밤 석가탑 위에서 까무러친 아사달을 발견하고 곧 절안을 혼동시켜 기절한 이를 엇메어다가 제 방에 갖다 눕히었다.

의술도 짐작하는 아상노장이 창황히 달려와서 기절한 이의 수족과 등과 배를 주물러 보고 과로한 탓으로 잠깐 기절한 것이지 큰 염려는 없다 하였다.

과연 얼마 만에 까무러친 이는 겨우 숨길을 돌리었다. 우 모이었던 중들은 뿔뿔이 헤어지고 맨 마지막으로 아상노장은 또 한번 기절한 이의 머리와 맥을 짚어 보고 몸을 일으켜 나오다가 그때까지 서성서성하고 있는 주만과 털이를 보고,

"오늘 밤에 두 분이 많이 애를 쓰셨소. 만일 두 분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까맣게 모를 뻔하였소. 그것도 전생의 인연이오. 인제는 피어났으니 다른 염려는 없을 듯하오."

치사하는 말을 남기고 육환장을 끌며 천천히 걸어간다.

주만과 털이도 남 다 헤어지는데 자기들만 처져 있자는 수도 없어 그 방을 나오기는 나왔으나 주만은 차마 발길이 돌아서지를 않는다. 아무리 아상노장이 염려는 없다 하였지마는 아직 쾌히 깨어난 것도 아니니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랴.

아까는 여럿이 몰려 들어가는 판에 휩쓸리어 들어가기도 갔지만, 더구나 기절한 것을 맨 처음 발견한 사람으로 그 자리에 참례하는 것이 인정에도 떳떳한 일이라 조금도 어색하지를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 새삼스럽게 들어간다는 것은 차돌의 보기에도 수상쩍을 것 같았다.

하릴없이 치워 놓은 자기네 처소로 돌아왔다가 얼마 안 남은 밤을 앉아서 밝히고 다시 털이를 데리고 나왔다.

털이의 염탐으로 차돌이가 아침 공양 짓는 데 시중 들러 나간 새를 타서 그들은 다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아사달이 눈을 뜬 것은 그들이 들어온 지 한참 만이었다.

주만은 턱없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외면을 하고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한 뒤에 다시 그 벗겨진 뺨 언저리를 들여다보았다. 생각한 것보담 상처는 그리 대단치 아니하였다. 앞으로 고꾸라질 때 돌에 코를 부딪혀 코피가 터지고 뺨 언저리가 돌결에 스쳐서 벗겨졌을 따름이요, 생채기가 그렇게 깊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사달의 눈엔 차차 흐릿한 기운이 걷히고 정신이 돌아나는 듯하였다. 그 어글어글한 아름다운 눈매는 웃는다. 고맙다는 뜻을 알려 줌이리라.

"상처가 쓰라리지는 않으셔요."

주만이가 맨 처음으로 아사달에게 묻는 말씨다. 이 평범한 말 한 마디가 어쩌면 그렇게 나오기를 어려워하였을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조금 잠긴 것 같았지만, 목소리는 역시 청청하다.

주만은 호 하고 또 한번 숨을 크게 내어쉬었다. 비록 간단한 대답이나마, 말문이 닫혔으려니 하였던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든든한가. 저절로 안심의 숨길이 내쉬어진 것이리라.

"머리가 아프진 않으셔요."

하고 주만은 제 손을 들어 병인의 머리를 짚어 보려다가 슬쩍 옆을 살피었다. 매우 짧은 동안이나마 어느결엔지 단둘의 세계를 이루어 옆에 사람이 있고 없는 것을 깜박 잊었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털이는 어느 틈에 빠져나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주만은 마음놓고 제 손을 병인의 머리 위에 얹을 수 있었으되, 그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손바닥에 촉촉하게 땀이 배고 호끈호끈 다는 것을 보면 아직도 머리가 열에 뜨인 탓이리라.

"머리가 더운데요."

주만은 걱정스럽게 물었으나, 이번에는 아무 대답이 없다. 그 눈은 어느새 꾸벅꾸벅 졸음이 오는 것 같다. 얼마 안 가서 코까지 골고 병인은 혼혼히 잠의 나라로 떨어져 들어가고 만다.

주만은, 마치 제 누이나 다름없이 턱 맡겨 버리고, 아무 거리낌없이 잠이 드는 아사달의 태도가 어떻게 믿음직하고 흐뭇한지 몰랐다.

그러나 아사달의 잠이 깊이 들자 주만은 도리어 휘젓한 생각이 났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단 두 남녀가 있는 것도 실없이 불안한 생각을 자아내는데, 더구나 하나는 자고 하나는 잠든 이의 머리를 짚고 앉았다는 것이 누가 보면 겸연쩍을 것 같았다.

주만은 머리에서 손을 떼고 반쯤 몸을 일으켰다가 그 하붓이 열린 입술에 핏기 하나 없고, 그 눈시울 언저리가 눈에 뜨이도록 꺼져 보이는 것이 차마 혼자 남겨 두고 나올 수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몰풍스럽고 매정스러운 노릇인 듯하였다. 그는 천리타향의 외로운 나그네가 아니냐. 부모도 처자도 없는 낯선 곳에 병들어 누운 몸이 아니냐. 우리 서라벌, 아니, 우리나라에 큰 보배가 될 탑을 하나도 어려운데 둘씩이나 쌓아 올리다가 일터에서 쓰러진 그가 아니냐. 그의 몸을 돌보아 주고 병을 구원해 주는 것이 사람으로 떳떳이 할 일이거늘 부끄러울 것이 무엇이며 겸연쩍을 것이 무엇이랴.

누가 자기를 탄한다 하더라도, 아니 온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흉을 본다 하더라도 조금도 두려울 것도 없고 거리낄 건덕지도 없으리라 하였다.

주만은 다시 눌러앉았다.

아사달은 인기척에 놀랐던지 별안간 눈을 번쩍 뜬다. 제 머리를 짚어 주는 주만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이윽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누, 누구시오." 주만은 무망중이라 서먹서먹하고 미처 대답을 못 하고 있노라니,

"나를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병자는 잽처 또 묻는다. 주만은 짚었던 손을 떼고 얼굴을 붉히었다. 의당히 물을 말은 물을 말이건만 자기의 주책없고 지나치게 부니는 것을 책망이나 하는 것 같았다.

자기는 이손 유종의 딸 주만이라는 것과, 전번 파일 거둥에 불국사에 왔다가 왕께서 부르시어 먼빛으로나마 아사달을 보았다는 것과, 어젯밤에 탑 구경을 올라갔다가 아사달이 까무러친 것을 보았다는 것을 띄엄띄엄 일러주었다.

병인은 말 구절구절마다 고개를 끄덕일 뿐이요, 제 말은 한마디도 티를 넣지 않았다. 다만 그 눈치와 얼굴로 보아 아사달에게는 모두 처음 아는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주만이 제 자신도 이상한 것은 정작 파일날 밤에 같이 다보탑을 돌았다는 얘기를 빼놓은 것이었다.

그 말을 마저 할까말까 망설이는 판에 털이가 문을 빠끔히 열고,

"아가씨, 아가씨."

하고 가만히 불렀다. 그러면 털이는 방에서 나와 가지고 여태까지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던 것이리라. 주만은 쫓아 일어나 나왔다.

"아가씨, 저기 차돌이가 뭐 자실 것 가지고 오는데 여럿이 따라 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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