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백여 년 전 일이었습니다.

영남 박생(朴生)의 가비(家婢) 매월(梅月)의 우수한 글재주와 절륜한 자색은 영남 일대는 물론이요 한양(漢陽)까지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고을살이나 한자리 얻어 할까 하여 조상들은 배를 주리면서 벌어 놓은 전장을 턱턱 팔아서 조정에 유세력하다는 대감님네 배를 불리는 유경(留京) 선비들 입에서도 박생의 가비 매월이가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자주 흘러나왔습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거반 침을 꿀꺽꿀꺽 삼켰습니다.

그러나 박생은 자기 집에 그렇게 서시 같은 절묘한 미인이 있는 줄은 몰랐었습니다.

박생은 영남에서 양반의 자손이요 가세도 넉넉합니다. 그도 벼슬이나 한자리 얻어 할까 하여 상경한 것입니다. 그러나 벌써 돈도 쓸 대로 썼고 여름이면 빈대 벼룩이 득시글득시글하고 겨울에는 벽에 반짝반짝하는 찬 서리가 들이 돋는 이대감집 사랑방에서 육 년이나 등을 치고 있으나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이렇지만 박생은 그것이 심려가 될지경 갑갑하거나 궁금치는 않았습니다. 매일 기생의 가무 속에서 술 먹고 풍월 짓고 담배 피우고 낮잠 자고 조금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움쭉도 하지 않을 듯하던 박생이 하루는 고향으로 갈 준비를 합니다.

때는 찬비에 우물 위 오동잎이 두어 개나 떨어진 때입니다. 들에는 향기로운 벼가 누렇고 산에는 신나무가 물들기 시작합니다. 부담을 가득히 한 커단 말 등에 앉아서 고향으로 향하는 박생의 가슴에는 천사만감이 새롭습니다. 박생은 크고도 흐릿하게 힘없는 눈을 두리번두리번하면서 앞일 뒷일을 꿈꾸듯이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라 둔한 가을볕이나마 따뜻한 것이 말 등에서 잠자기도 좋거니와 무얼 생각하기도 알맞습니다. 유경 육 년에 천석지기 논은 거의 빚으로 들어가고 벼슬은 못 하고 이런 기막힐 노릇이 어디 있겠습니까? 박생은 번민 끝에 이대감을 은근히 욕하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이대감의 영이라면 슬슬 기면서 거행할 것입니다.

―언제나 좋은 운수가 돌아와라, 벼슬을 해라, 나졸을 거느리고 쿵쾅 울리면서 어느 고을로 가라, 많은 기생들은 춤을 추고 배반은 낭자할 터이지 돈도 막 쏟아질 터이지 예쁜 가비 매월이까지도.

이렇게 박생의 공상이 무르녹았을 제 말이 돌에 채서 깡총 뛰었습니다. 박생은 털썩하는 바람에 그 달콤한 공상의 꿈을 훌쩍 깨었지요! 깨고 보니 어떻게 쓸쓸한지 눈에 들어오는 현실의 세상이 가시밭 같습니다. 박생은 힘없는 소리로,

“이놈 말 잘 몰아라.”

하고는 또 눈을 스르르 감았습니다. 마부는 허리를 굽실하면서,

“황송합니다.”

하고 채쭉을 번쩍 들어 말을 길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말은 머리를 번쩍 들고 서슬이 좋게 방울 소리를 덜렁덜렁 내면서 걸어갑니다. 눈감은 박생은 또 여러 가지 생각에 골몰하였습니다.

―이렇게 멀쑥해 가지고야 부끄러워서 어떻게 사당에 보인담! 더구나 이웃에 사는 유판서의 게트림 부리는 소리를 구역이 나서 어찌 듣누? 에라 그만 말머리를 서울로 돌리리라. 아니다. 그러나 가비의 자색을 못 보고야…… 내가 이 먼 길 떠난 것은 매월이를 한번 보자는 것인데.

박생은 이러한 생각에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실로 박생이 이번 집으로 가는 것은 가비를 보려고 함이외다. 한 입 건너 두 입 건너 전하는 소리에 박생도 침을 삼켰습니다. 보지도 못한 매월의 용모를 상상도 하여 보았습니다. 박생은 이렇게 전전하여 생각하다가 드디어 속시원히 보려고 육 년이나 정든 한양성을 떠난 것입니다.

박생의 마음은 초조하였습니다. 일각이 삼추같이 마부를 재촉하였습니다. 새벽 거리 찬바람이나 민촌의 저문 비나 조금도 상관할 것 없이 자고 깨면 말을 휘몰았습니다.

참으로 속히 다다랐습니다. 서울서 떠나서 영남 본집까지 오는 동안에 닷새가 걸렸습니다. 육 년 만에 주인을 맞은 박생의 집은 무슨 잔칫집같이 들썩합니다. 떡방아를 찧어라, 술을 걸러라, 소를 잡아라, 손님이 오신다, 사랑방에 불을 넣어라, 야단법석입니다.

비둘기의 장 같은 사당 속에 갇혀 있던 신주들은 육 년 만에 손자의 절을 받고 손자의 부어 주는 석 잔 술에 취하였는지 잠잠합니다. 사례(四禮)를 배운 박생은 진심스러운 사람같이 동작을 천연스럽게 지으나 그 마음과 눈은 처음으로 보는 방년 이구의 시비 매월의 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박생으로 말하면 팔자에 없어서 그랬던지 때가 못 되어서 그랬던지 벼슬은 못 하였을망정 그래도 물색이 번화한 한양 성중에 다년 있었는지라 남자나 여자나 간에 어지간한 인물은 거의 보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의 시비 매월이 같은 자색은 못 보았던 것입니다. 박생은 어제 황혼 말 등에서 내려 방으로 들어올 때 문간에서 선녀 같은 시비의 자태를 본 후로는 마음을 진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 오늘 아침에는 매월이를 자기 방에 불러들여서 첫 시험으로 율(律)을 지었습니다. 달빛같이 맑고도 포르스름한 살빛은 청조한 끝에 냉정한 표정이 없지 않으나 이슬기가 자르르한 가는 눈하며 둥그스름한 턱 위 불그레한 입술하며 이성이 넘치는 듯한 우뚝한 콧날 위 그리 넓지 않은 이마하며 어느 것이나 빠진 데 있겠습니까? 박생은 황홀하였습니다. 더욱 매월이가 조심스럽게 앉아서 교수(巧手)를 머금고 낭랑하게 율을 읊는 양은 그냥 탑싹 집어먹어도 비리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 문필이 갖은 것이며 용모의 뛰어난 것이라든지 탁문군이나 최앵앵이와도 손색이 없으리라 한 것은 이때 박생의 추측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박생의 마음이 어찌 순평하겠습니까? 음풍영월에 주색을 사랑하는 것이 이때 선비의 행사가 아닙니까? 아직 삼십이 못 된 박생의 가슴은 번민에 끓었습니다.

―그는 천비다. 나는 양반이다. 양반이 종년을 생각하고 심려를 하다니? 응 세상이 알면 얼마나 비웃으랴? 버리자, 이 심려를 버리자. 그러나 그를 잊을 수 없구나! 그 꽃을 꺾지 않고는 못 견디겠구나! 그러나 어찌 양반으로서 종년에게 말을 내누?

박생은 이러한 생각에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박생은 어떻게든지 사람 없는 유한한 틈을 얻어서 정화(情火)를 끄려고 하였습니다.

가비는 상전의 고민을 몰랐습니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직 말이 없으니…….

박생이 돌아온 지 벌써 보름이 넘었습니다. 벼 베는 농군들은 들에서 거물거리고 잠자리는 소슬한 바람결에 휘휘 날았습니다. 박생은 별로 어디가 아픈지 꼭 지정할 수 없는 미적지근한 병으로 오늘까지 사흘째 신음합니다. 구릿빛 나는 가을볕이 불그무레한 서창 앞 처마에서는 새소리가 고요한데 박생은 폭신한 요 위에 고요히 누워서 천장만 봅니다. 중늙은이가 다 된 박생의 마누라는 남편이 돌아오니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오던 날 밤부터 몸이 괴롭다 하고 자리를 같이하지 않는 남편을 볼 때는 이마에 주름이 잡힌 마누라의 가슴에도 야속스런 생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어라고 할 수 없고 다만 남편의 눈치만 슬슬 볼 뿐입니다. 지금도 고요히 누웠는 박생의 다리를 주무르던 마누라는 팔도 아프건마는 시비를 시키지 않고 자기가 그저 주무릅니다. 이것도 남편의 마음을 사려는 수작이겠지요. 그러나 박생에게는 마누라가 다리 주무르는 것이 도리어 고통이 되었습니다.

“팔 아픈데 그만두지, 매월이더러 좀 주무르라 하고…….”

박생은 마누라와 이렇게 가장 인정이나 있는 듯이 말하지만 속은 딴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생은 마누라가 속도 모르는 줄 알면서도 ‘매월이더러’라고 말할 때에 이상한 불안에 싸였습니다―양심에 거리끼는 짓은 하지 말라 하고 교훈하는 도적놈의 심리 같았습니다―그래서 가슴이 찌부듯하였습니다. 박생은 마누라의 눈치를 슬쩍 도적질하여 보았습니다.

해는 어느덧 졌습니다. 황혼이 지났습니다. 밤은 삼경이 가까웠습니다. 물 같은 달빛이 천지에 흐릅니다. 뜰에는 흩날리는 마른 잎 소리가 소슬하고 숨소리도 크지 않은 방 안에는 촛불이 휘황합니다. 마누라는 팔이 아프던지 저편 시어머니 방으로 가고 밀수를 들고 들어왔던 매월이가 박생의 다리를 주무릅니다. 갸름한 연한 손이 자리 위로 다리를 지근지근 누를 때 박생의 가슴에서 빙빙 돌던 욕화(慾火)는 머리를 훨훨 들었습니다. 박생의 두 눈에는 흐릿한 핏줄이 섰습니다. 박생의 가슴은 꿈틀꿈틀하고 몸은 미미하게 떨렸습니다.

―만일 거절을 당하면, 이것이 마누라에게 탄로가 되면…….

박생은 이러한 생각을 할 때면 알지 못할 공포심과 같이 모든 잡념을 없애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러나 누를수록 정화의 반동은 더욱 심합니다. 이제는 이해타산 할 여지가 없습니다. 절박하였습니다. 박생은 자기도 모르게 매월의 손을 꼭 쥐었습니다. 박생의 호흡은 높고 급하였습니다. 매월이는 흠칫하면서 박생의 낯을 쳐다봅니다. 박생의 낯빛은 훤한 촛불 속에 술 먹은 사람의 낯빛 같았습니다. 매월이는 아무 소리 없이 머리를 푹 수그립니다. 그의 하얀 낯에는 도화빛이 돌고 걀죽한 귀밑의 동맥은 팔딱팔딱 뜁니다. 매월이가 소리 없이 머리 숙이는 것을 볼 때 박생의 마음은 좀 훈훈하여졌습니다. 자기는 상전이니 으레 복종하려니 여기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박생의 호흡은 여전히 급하였습니다. 박생은 매월이를 자리 속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매월이는 몸을 뒤로 주어 쥐인 손을 뽑으려고 하면서 박생을 쳐다보았습니다. 좀 불그레하던 매월이의 낯에는 푸른 연색이 돌고 두 눈에는 굳센 빛이 어리어서 박생의 낯을 쏩니다. 박생은 흐리머리한 눈알을 굴려서 창을 바라보면서,

“얘, 왜 이러니? 누가 들어올라!”

나직이 그러나 황급히 말하면서 몸을 반쯤 일으켜 매월의 허리를 안으려고 덤비었습니다.

“헌헌대장부로서 어찌 천비에게 이런 짓을 하십니까?”

매월의 소리는 떨렸습니다. 그러나 쟁쟁하였습니다. 이때 저편 방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매월아.”

부르는 소리와 같이 발자취 소리가 들립니다. 박생은 매월의 손목을 얼른 놓고 부리나케 자리에 누워서 여전히 앓는 꼴을 보입니다. 매월이는 슬쩍 일어서서 옷깃을 바루고 고요히 문을 열고 나갑니다. 달빛이 그득 찬 하늘이 문을 열 때 박생의 눈에 언뜻 보였습니다. 고요하던 촛불은 잠깐 흔들렸습니다. 문 밖에 나선 시비는,

“네―.”

나직이 대답하면서 잘잘 신 끄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태도는 아주 조용하였습니다.

‘아아, 내가 이게 무슨 짓이냐? 단념을 해라. 철없는 저것이 말만 내면…….’

박생은 이렇게 후회, 공포, 불안에 가슴이 조이면서도 분한 마음도 치밀었습니다.

닭은 벌써 네 홰나 울었습니다. 동천에 반짝반짝하던 샛별도 이제는 할 수 없는 듯이 빛을 감춥니다. 매월이는 예전대로 미음을 쑤어 들고 박생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매월이는 자리에 기대어서 시축(詩軸)을 보는 박생에게,

“밤새 문안 여쭙니다.”

하고 날아가는 듯이 절을 했습니다. 어젯밤 일은 아주 잊은 듯합니다. 다시는 매월의 낯을 볼 것 같지 못하게 근질근질하던 박생의 마음도 매월의 태도에 적이 풀렸습니다. 그러나 그 자태를 보매 마음이 불현듯 또 일어났습니다. 매월이는 이날 종일 굶었습니다. 배부른 상전들은 가비의 굶은 것을 몰랐습니다. 매월이가 이날 머리도 빗지 않고 제 방에 들어가서 누웠기만 하는 것을 박생의 마누라가 알고 어디 아프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매월이는 아픈 데 없다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이날도 어느새 저물었습니다. 그러나 박생은 무르녹은 고민에 밤 되는 줄도 몰랐습니다. 불을 켰으니 밤이거니 하였습니다. 이 밤도 어느새 지내고 또 새벽이 되었습니다. 이날 새벽에도 매월이는 미음을 달여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박생은 이번에는 아주 점잖게,

“대장부의 한을 풀어 달라.”

하고 매월에게 청하였습니다. 매월이는 역시 응치 않았습니다. 이러나 매월이는 조금도 이마를 찡기거나 낯을 붉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그는 태연하였으나 가슴에는 일천 잔나비가 어지러이 뛰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박생의 추태를 책망하고 싶으나 기구한 신세가 이 집에 팔려 와서 태산 같은 은혜 지었거니 생각하매 차마 그럴 수가 없고 그렇다고 송죽 같은 나의 절개를 더럽힐 수는 없다―이렇게 그는 번민하였습니다. 이렇게 번민한 끝에 한 계책을 생각하였습니다. 그 계책은 이러합니다. 자기가 어떤 상전에게서 얻은 패물이 있으니 그것을 팔면 적지 않은 돈이 될 터이라 그것으로 내 몸을 내가 사는 것이 상책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매월이는,

“고향에 돌아가서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겠습니다.”

하고 속신하기를 박생에게 청하였습니다. 박생이며 마누라는 허치 않았습니다. 박생의 허치 않은 것은 딴 욕심이거니와 그 마누라가 허치 않은 것은 충실한 시비라 생각함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때에 박생은 매월에게,

“몸만 허하면 속량은 애를 쓰지 않아도 되지.”

하고 말하였습니다. 매월이는 울었습니다. 돈을 가지고도 맘대로 못 하는 그 억울함을 어디다 호소할 곳이 없었습니다. 상전을 괄시하면 목이 떨어지는 세상이 아닙니까? 그러나 매월이는 그까짓 목 떨어지는 것을 무서워서 상전 괄시를 못한 것이 아닙니다. 괄시할 마음이 나지 않아서 괄시치 않은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상전의 명예도 깎지 말고 자기 몸도 더럽히지 말려고 함이외다.

이렇게 시비의 반항이 심할수록 박생의 짝사랑은 더욱더욱 가슴에 서리었습니다. 보기 전부터 불원천리하고 온 박생이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박생의 심려는 병을 더욱 무겁게 하였습니다. 의원은 맥을 보고 홧병이라 하였습니다. 집안에서도 이웃에서도 박생의 병이 홧병이라는 것을 괴이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두 그 홧병의 뿌리를 아는 이는 없었습니다. 모두,

“아, 유경한 지 육칠 년에 한자리도 못 얻고 그 좋은 전장이 벌써 반이나 넘게 없어졌으니 홧병인들 안 나겠소.”

하고 해석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매월이 한 사람은 박생의 병 근원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했습니다. 그 병을 고칠 묘한 방문은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대략 짐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숨같이 믿는 꽃다운 ‘처녀’를 의미 없이 버리기는 너무도 원통하였습니다. 매월이는 상전의 회심을 충심으로 빌었습니다.

박생은 병 치료를 동래 범어사라는 절로 가려고 벌써 모든 준비를 하여 놓았습니다. 말과 교군까지 마련하였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떠날 작정입니다. 그런데 말은 박생이 타지만 교군은 누구를 태우려는지요?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의원의 말이다)는 병이니까 물론 마누라는 못 갈 터이고…….

이날 밤에 박생의 마누라는 매월이를 불러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얘, 매월아! 서방님께서 절로 가시는데 너를 데리고 가시리란다. 네 생각이 어떠냐?”

마누라는 남편의 병이 걱정되는지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합니다. 매월이는 이 소리를 들을 때 가슴에서 납덩어리가 툭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숙이고 머뭇머뭇하면서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아마 네가 가야 서방님께서 편하시겠다. 박돌이를 보내면 좋겠으나 지금 추수 때고…… 또 네가 가면 음식 범절이 대단 편하겠으니 내가 못 가도 마음을 놓겠다. 또 서방님도 네가 가는 것이 좋다고 하니…….”

두 사람의 내용을 모르는 마누라는 지금 막 떠나는 듯이 부탁이 신신합니다. 매월이는 벌써 모든 것이 박생의 계책인 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조금치도 그러한 눈치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날 밤 달은 어찌 그리도 밝은지요? 유달리 밝은 달은 매월의 속 깊이 잠긴 애수를 환히 비추어 주는 듯하였습니다. 매월이는 깊은 밤 고요한 우물가에서 고향을 향하여 소리 없는 눈물을 뿌렸습니다. 뜨거운 눈물은 찬 달빛과 서로 어울려서 방울방울 진주같이 검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별빛이 금방 사라진 퍼―런 하늘에는 불그레한 구름이 흐르고 찬 안개 거둔 서편 산 높은 봉에는 아침 볕이 입혔습니다.

박생의 일행은 길을 떠났습니다. 잎 떨어진 가지 끝에는 새가 종알거리고 푸른 소나무 사이에는 단풍이 불을 사르는 것 같습니다.

농촌의 남녀들은 벌써 들에 나와서 벼를 벱니다.

서리 아침 쌀쌀한 기운은 박생의 여윈 뼈에 살금살금 스며들었습니다. 그러나 박생의 가슴속에는 그윽한 기쁨이 돌았습니다. 유한한 사찰로 가면 자기의 목적이 꼭 성공되리라고 믿은 까닭이외다. 그러면서도 시비의 상설 같은 태도를 가만히 생각할 때면 언뜻거리는 양심의 느낌을 받는 동시에 불쾌한 무엇에 싸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찰나 염념천사(念念千思)하여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은 역시 매월에게 대한 애욕이었습니다. 이렇게 굳센 애욕이 그 가슴 가운데 있는 박생이 어찌 그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실로 박생은 양반 다음에는 매월이를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상전이고 매월이는 천비다. 제가 내게 거절하는 것은 일시 부끄러워서 그러겠지 실상이야……?’

박생은 이렇게도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부끄러워서 일시 거절되기를 은근히 빌었습니다. 그러나 어쩐 셈인지 공연히 섭섭하였습니다. 매월이는 교군에 실려서 박생의 말 뒤에 따르나, 그 마음은 동에도 있지 않고, 서에도 있지 않고, 남에도 북에도 있지 않고, 하늘에도 땅에도 있지 않고, 물론 몸에도 지접지 않은 듯이 서성거리고 갈팡질팡하였습니다. 이 궁리 저 생각에 가슴은 갑갑하고 정신은 산란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디다 하소연하며 의탁하여 구원을 청하겠습니까? 그는 고적한 신세를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매월이는 눈을 감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교군은 걸음걸음 뒤로뒤로 돌아가는 듯도 하고 무슨 깊숙한 데로 들어가는 듯도 하였습니다. 그는 눈을 번쩍 떴습니다. 하늘에는 솜 같은 흰 구름이 기세 좋게 흐릅니다. 매월의 마음은 그 구름을 타고 자꾸자꾸 저 끝없는 하늘가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는 다시 눈을 굴려 들에서 가을걷이에 분주히 돌아다니는 농촌 부녀들을 볼 때 솔개에게 채여 가는 듯한 자기의 그림자를 눈앞에 그려 보았습니다. 가지 않으려야 추상같은 위엄에 무엇인들 견디겠습니까? 따라가면 그물에 든 고기며 농에 갇힌 새가 될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입을 열어 전후를 토설하고 몸부림을 하고 싶으나 모가지 떨어지는 것은 떨어지더라도 은혜를 생각하니 상전에게 노골적 반항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박생의 사랑은 그리 받지 않았으나 박생의 마누라며 박생의 어머니는 매월이를 친딸같이 사랑하였습니다.

‘한정후’ 시대를 회상하여 ‘화룡도’에서 ‘조조’를 베지 아니한 ‘관운장’의 정의를 찬미하고 ‘견마의 충’을 동경하는 시대에서 성장하여 가르침을 받은 매월이라, 은혜라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는 것보다 그의 천성이 되다시피 은혜감(恩惠感)이 굳었습니다.

―일개 아녀자요 천비로서 헌헌장부의 간담을 태우누나.

이렇게 생각할 때마다 매월의 희생적 정신은 괴로웠습니다. 그렇다고 그 몸을 허할 수는 없었습니다. 은혜를 위하여 마음 없는 정조를 희생하기는 지극히 통석하였습니다. 한평생을 몸 아낄 만한 사람이거나 ‘논개’나 ‘초선’이 같이 큰 사업을 위하는 것이었다면 그 정조를 바쳤겠지만, 상전의 한때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정조라는 비단에 쉬 가위를 대기는 뼈가 갈려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박생의 눈앞에 있고야 그 위험에 협박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 자기의 반항이 굳세면 굳셀수록 상전의 심려는 깊어 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몸도 괴로우려니와 은혜 진 상전의 병이 더하면 어쩌누? 아아 어쩌면 좋으랴? 천지는 넓으나 이 몸을 응납할 곳은 없구나―매월이는 이렇게 교군 위에서 탄식도 하고 절망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마음 한편은 튼튼하였습니다. 더러운 누명을 쓰고 세상의 배척은 받으나 실상인즉 청백한 사람의 속 같았습니다.

박생의 일행은 육십 리 나와서 낙동강 가에 다다랐습니다.

늦은 가을 떨어지는 햇빛이 붉은 먼 강촌에는 비단발 같은 저녁연기가 아른히 빗겨 흐르고 집 찾는 외까마귀는 높다란 벼랑으로 돌아듭니다.

강을 건너야 주막이 있는 고로 나룻배 사공을 불렀습니다.

교군에서 내려 나룻배에 오를 때 매월의 눈에 비치는 용용한 푸른 물결은 그에게 무슨 암시를 주었습니다. 이 무슨 암시인지요?

어디로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저편 해 넘어가는 서산 아래로 양양히 흘러와서 저 아래 세류촌을 지나 끝없이 끝없이 가는 푸른 물! 흰 구름이 뭉실뭉실한 하늘을 띤 수면! 강풍에 옷소매를 날리면서 신비로운 우주 자연의 풍경을 물끄러미 보는 그 찰나 매월이는 현세의 모든 고통을 잊었습니다. 그는 이때 양양한 벽파 속에서 용궁을 찾아보았으며 철철한 물소리 속에서 용녀의 깨끗한 노래를 들었습니다. 매월이는 ‘아아 알았다. 원수의 몸으로 인하여 이 마음까지 고통이로구나!’ 하고 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날씬하던 그의 두 어깨는 으쓱하여지고 하다못해 푸르스름한 낯에는 엄연한 빛이 돌았습니다.

배가 중류에 떴을 때였습니다. 매월이는 살그머니 돌아서서 박생을 향하여,

“서방님, 글 한 수 읊을까요?”

하고 꼭 다물었던 주순을 방긋 열었습니다. 박생은 기뻤습니다. 어떻게 기쁜지 말이 얼른 나오지 않았습니다. 배 안의 사람들은 여자가 글 읊는다는 말에 서로 낯만 쳐다보았습니다.

“응, 그래 읊어라! 나도 한 수 회답할 테니.”

박생은 매월이를 보았습니다. 매월이는 침착하고 조용한 태도로 낭랑하게 읊습니다.

“위여상설은여산 불거위난거역난(威如霜雪恩如山 不去爲難去亦難)

회수낙동강수벽 차신위처차심안(回首洛東江水碧 此身危處此心安).”

끝구 ‘차신위처차심안’이라 읊을 때 박생은 응 하고 소스라쳐 놀랐습니다. 그리하고 얼른 매월의 치마를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추풍 속에 섰던 매월의 가냘픈 몸은 박생의 손보다도 더 빠르게 용용한 벽파 속에 풍덩실 들어갔습니다. 물방울이 뛰고 거품이 부시시 끓던 물 아래로 아래로 흘러갑니다.

배 가운데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놀랐는지 실색할 지경입니다. 그러나 매월이 물에 들어간 속은 박생밖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박생은 사공을 시켜서 배를 중류에 흘리 저어 매월이를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석양은 숨어 버렸습니다. 찬바람이 도는 강변은 차츰 컴컴하여 갑니다.

매월이의 시체는 못 찾았습니다. 아아 매월이는 바다로 흘러갔나? 용궁으로 갔나? 박생은 이날 밤새도록 달빛이 처량한 낙동강 가에서 매월의 시를 읊으면서 가슴을 만졌습니다.

백여 년 뒤 오늘날까지도 낙동강을 건너는 뜻있는 사람들은 매월의 시를 읊으면서 소리치는 벽파를 다시금 돌아봅니다.

‘위엄은 상설 같고 은혜는 태산 같아 아니 가기 어려웁고 가기 또한 어려워라. 머리를 돌이키니 낙동강 물 푸르렀는데 이 몸이 위태한 곳에 이 내 마음 평안하네.’


(24.11 봉선사에서)

라이선스

편집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7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7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1923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물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