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사온(三寒四溫)

편집

一九三0年代의 젊은 月給장이와 그의 아내의 生活風俗圖

한솥의 밥을 먹고 한방에서 잠은 자지만, 둘이 말 없이 지낸지가 벌써 일주일이다. 본시부터 잘 잘못은 가릴래야 억지가 뛰어들어 가릴수 없는 사이, 그러므로 비위 틀리 는 일이 있으면, 이같이 한동안 서로 말않고 지내기가 일 쑤지만, 이번처럼 여러날이 걸려본적은 없었다. 하나는 옹하고 하나는 앵하는 성미라, 제마다 고집이 세고, 버릴 성은 있어서 곧 죽어도 먼저 입을 벌이고 말을 걸어볼 아 량은 도무지 없는터였다. 전 같으면 문간에서 이로너라─ 소리만 나도 제물로 화해가 되고 말았다.『엊그제 받아간 전깃불 값을 또 받으러 왔으나 웬일이야』이해를 따진다 면 한 사람의 일이 아니요 두 사람의 일이다. 비록 퉁명 스런 소리일망정,

『건너방 벽에 붙은 영수증을 떼다 보여주면 안될까?』

─ 한마디면, 구체가 약한첩에 뚫리듯 막혔던 두 사이는 거저 쓱싹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안그렇다. 해질 머리에 체부동집 아주머니가 와서, 올캐 지노 귀 에 무당이 하던 흉내를 내어, 한참 넌덕을 떨기는 했지만, 하나는 아프다는 핑계로 이불을 쓰고 누워 군입 한번 다 시지도 않았었다.

초저녁에 지어 들여온 밥상이 권하는 사람이 없어, 아홉 시가 되도록 방 한가운데 오도커니 놓여 있다. 숟가락 든 사람이 없어 놋주발의 뚜껑은 덮인대로 있다. 또 솥바닥 을 긁어 모았는지, 바리주발에 비스듬히 칠홉이나 담겨 있는 흰밥도 그냥 그대로다. 사기 접시에 공손히 올려 모 신 알뚝배기는 꾸미 한매에 곁들인 정성이 빠질대로 다 빠지고 숨을 죽인지 오래였다.

─ 에라, 이제는 그만하고 내가 먼저 늦출 밖에 없저, 숫 제 흉측을 떠느라고 그러하지만, 뱃속 마련은 도리가 없 을게다.─

『여봐요.』

명례는 아랫목쪽을 향하여 입을 열었다. 남편에게 하는 말로는 여드렛만에 처음이다.

『인제 그만 진지 잡숫구려』

두 무릎을 모르고, 아랫목쪽으로 돌아누운 남편은 들은 척도 안한다.

─ 그럴줄 알았어! 원체 질기동이가 돼서 금방 일어날 이가 있나! 그렇지, 사내 체면이라 첫마디에 헤헤?! 하고 일어날수야 없을터이지. 내숭 떨지 말고 어서 일어나요─

하고도, 싶었지만 코끝을 간질이는 것 같아서 그만 말았다.

『내가 졌으니, 일어나요, 응』

─ 아차 아니할 말을 했구나 상말로 약을 올리는 것 같 아서 일어날 것도 못일어나겠네─ 명례는 얼른 말 꼬리를 달리 붙였다.

『어디가 정말 편찮으시우……』

여지껏 말 않고 지내기는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남편이 오늘 저녁처럼 식음을 전폐한 적은 없었다. 그렇고 보니, 지구전(持久戰)에 시달려 생병이 났을까? 그러나 속으로 수박씨 까는 남자의 마음이라 병으로 지레 짐작하는 것은 위험한 노릇이다.

─ 아니야 분명히 흉측이야!─

『아무리 역정이 났더라도 풀때는 풀어야지요. 하루 이 틀만 살다가 말 사이래야말이지, 늘 이럴 작정이래서야 되겠어요, 어서 일어나요, 먼저 하던 시비는 인제 그만 두 어도 좋고, 정 더 가리고 싶거든 먹을거나 먹고, 웃어가며 합시다』

남편은 여전히 토라져 있다.

『내가 그리로 내려가리까』

이번에는, 반 어리광 피우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걸어보 았다.

『………』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무리 뱃속이 유한 분이기로서니 이런 판에 잠들었을 리 없고, 남의 말을 거저 듣기만 하고, 갚지는 않으니 웬 셈이야! 당신이 셈 흐리기로 유명한줄은 나도 알지만, 이 런때 쓸거야 없잖어요.』

죽은 듯하던 남편이 그제서야 약간 꿈틀 하였다. 새우처 럼 등을 꾸부리고 두 무릎을 더 모아들인다. 또 저 지긋 지긋한 넋두리가 나온다 싶었던 모양.

명례는 밥상을 웃목으로 밀어놓고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래, 얼마나 오래 그러고 있나 좀 볼걸!』하고, 혼자 종알거리는 소리가 마루 끝에서 난다.

내일 모레가 삼월인데 겨울이 다 안갔는지, 날씨가 선선 하였다. 앞가슴을 여미면서 청동화로의 재를 인두 끝으로 헤치고 보니, 잘하면 소생할 듯한 한 불씨가 어이 추어하 는 듯이 깜박하고는 흐려져 버린다.

명례는 툇마루 선반을 더듬더듬 성냥곽을 찾아서, 두어 개피 득 그어가지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대낮에도 굴속같 이 캄캄한데다가, 깊기는 왜그리 깊은지! 문턱을 넘어 설 때 발한번 비끗하면 재없어 부엌바닥에 곤두박히고 만다.

하루에도 골백번 드나들어 엔간히 익숙해졌으련만 불 없 는 곳이라, 조심이 되었던 것이다.

큰솥 고래는 솥 바닥에 금이 가서 불 못 쏘인지가 오래 고, 옹솥과 밥솥 아궁이에만 밥푸고나서 내쳐 지핀 군불 이 쇠문틈으로 불그레 내다보였다.

명례는 부엌 뒷문을 열고 벽쪽으로 쌓아논 이공탄(煉炭) 을 주섬주섬 날라들여 갯수도 셀 것 없이 깨치지도 않고 온 채로 두 아궁이에 별러 넣었다.

─ 이런때 곰거리나 서너근 있었으면 좀 좋을까! 지난 섣달에 들여온 반돈(半頓)을 꽤 오래는 땠다─ 아궁이 문을 닫은 다음, 더운물 한바가지를 푹 퍼내어다 가 수챗가에서 손의 검정이를 어물어물 씻고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자기 나간 사이에 한번도 돌아눕지 않았는지 남편은 여 전히 벽을 향하여 토라져 있었다.

『버틸성이 얼마나 오래 가나 두고 봅시다. 나는 나대로 지긋지긋이 굴어볼걸』

하고 명례는 아까 나들잇저고리를 깃다 말고 머릿장 밑 에 밀어둔 바느질그릇을 끌어내어, 동정 받침에 쓰는 두 터운 양지 한쪽과, 버선본 뜨는 도막연필을 찾아가지고 방바닥에 나부시 엎드렸다.

─ 무어라고 쓸꾸─ 연필 끝을 물고 침칠부터 하였다. 눈 밝은뭇 어른들 밑 에 자라, 연애편지 한번 못써 보았지만 학교에서 작문 지 을 때 갑은 받아본 솜씨다. 그러나 명례의 경험에는, 아무 리 쇠좋은 식칼도 오래 안쓰면 녹이 나서 잘 안들었다.

─ 글도 역시 그럴까? 명문이 아니요. 하고싶은 말 쓰는 데야 상관 없겠지! 서뿌른짓 하다 정말 소박을 맞으면 이 것이 마지막 편지요, 그것으로해서 병들어 죽으면, 이것 이 유언장 밖에 더 되겠니, 되는대로 써나보자─ 물었던 연필을 쭉 뽑아 글자 한자 쓰고는 침칠, 또 한자 쓰고는 침칠…이렇게 하여 한번 옛편지체로 써내려갔다.

🙝 🙟

가깝고도 먼데 계신 재호씨께 지척이 철리라는 말이 있삽기로 아랫목과 윗목 사이가 멀다면 먼줄도 아옵나이다만, 만릿길을 지척으로 여기고 임찾아 가는 사람도 이세상에 흔치 안사옵나이까. 전차, 뻐쓰에서 서로 모를 남녀가 등을 비비기로니, 그 누가 보 고 가깝다 하오리! 한 남편이 살고 한 아내가 죽어 영영 대할 길이 없어도 그 사이가 멀다 할 사람이 없사오리다.

하물며 아주 끊고, 버린 정이 아닌 바에 한방에 있는 우 리 내외 아니오리까. 의리는 의리요, 정은 정이라 하되 가 까웠다가도 멀어지고 멀었다가도 가까워지는것이 정리라 면 내외간 정리도 그것이오리다.

임이여! (재호씨 낯간지럽지요?) 우리는 너무 밀었나이다. 내가 안갔는지 당신이 안왔는지, 여드레가 걸려도 못 만나는 우리옵나이다. 길이 이같이 머나이까. 말대로 천 릿 길이라면 걸어서도 만나련만, 아 임이여! 남은 길이 있 거든 이제라도 빨리 오소서. 임께서 뛰어 오시고 제가 또 한 곤두박질하면 반나절에 서울 종로서 안만나오리까?

명례 올림.

(답장을 주신다면 더욱 감사하겠나이다)

🙝 🙟

폐첨(肺尖)이 간지러워 밭은 기침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명례는 이 글을 썼다. 그리고 쓴 글을 다시 한번 눈 으로 읽어보고서는 ─ 이마적 고대 소설을 몇권 읽었더니 나도 무척 구식이 되었구나─ 하였다.

여백 남은 종이는 가위로 싹 베어 연필과 함께 바느질그 릇에 담았다. 그리고 그 동안에 혹시 남편이 잠들지나 않 았나 하여 목소리를 가다듬는체 큰기침을 정신이 번쩍 나 게 한번 했다.

명례는 살그머니 기어서 자못 조심성 있게 하나이 한간 씩 차지하고 있는 이 이간방의 한복판 즉 국경선을 암내 맡은 고양이처럼 재치있게 넘어섰다.

남편 가까이 가서는 잠시 주춤하다가 그 종이를 머릿맡 쪽으로 돌려 바로 남편의 코와 맞닿을듯한 벽에다 세워놓 고 그리고는 방금 넘어섰던 국경을 되넘어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 무슨 모험이라고 가슴은 벌렁벌렁하는지 .……

건너다보니 남편은 여전히 꼼짝 안한다.

─ 필연 보기야 볼터이지─

명례의 머릿속에는 시계의 초침(秒針)이 돌아간다.

─ 일분…이분…삼분…─ 보통학교 이학년 생도라도 그 종이에 적은것쯤은 읽었을 터인데 남편은 아무런 티도 없다.

─ 눈을 딱 감고 있나부다. 설마 보고도 못본체 하는겔까? 나같으면 개수작말라 하고 소리라도 한번 꽥 지르련 만─

『가엾어라. 홧병이 나시더니 글 못보는 장님이 되셨구 료!

내가 열녀감은 못되지만 정화수를 떠다놓고 신명께 기도 를 드려볼까?』

참말로 약을 올린다.

『입 두고 말 못하는 병에 눈까지 어두워 지셨으니 저를 어쩌나! 여봐요 정말 못하시겠거든 끙끙거리는 소리라도 해보구료 응, 속좀 시원하게. 아이구머니나 저를 어째, 귀 마저 자셨구먼!』본의는 아니지만 멀쩡한 남편을 가진 병 신 다만들어 놓았다.

이때다, 막 이때다, 어찌보면 코등에 앉은 파리를 물러치 는 듯, 남편은 종이쪽을 홱 잡아웅켜서 어깨 너머로 내던 진다.

으─ 죽었던 사람이 깨어나듯이 이것도 또한 기적이라 할까!

아니 그냥 있었던들 곰배팔이란 병신까지 겸쳐 얻을번 했다.

명례는 옳다구나 하고 한마디 더 늘어놀까 하다가, 거동 만 볼 작정으로 있었다.

남편은 종시 말이 없다. 철석같은 결심이고 뭐고 간에, 뜨뜻한 아랫목에 누운것만 장땡으로 여겨 내쳐 잠들 배짱 이었다.

─ 그렇지만 좀 두고 볼걸!

명례는 자기도 잘자리를 잡느라고 머릿장 위에 얹혀있는 이부자리를 모조리 내려 두둑히 포개어 깐 다음 두더쥐처 럼 그 속으로 쏙 들어가고 말았다.

『아랫목에 계신 양반 안녕히 주무셔요』

『………』

🙝 🙟

방구들 밑에서는 두 고래에서 초저녁에 넣은것까지 열덩 어리의 연탄이 벌겋게 달아 볶아친다. 전에는 암만 처때 어도 덥지 않던 방이 불이 낸다고 부넘기를 고치고 난 뒤 로는 밥 짓고나서 한고래에 두덩이씩만 처넣어도 짤짤 끓 었다.─ 오늘밤 이방 아궁이는 분수 없는 과식을 해서 끓 을 정도가 아니요, 탈 정도다.

재호는 한잠 들어볼까 하고 눈을 붙였다. 그런데, 웬일인 지 털샤쓰를 새어드는 뜨뜻한 훈김이 아까와 달라졌다.

하남동안 한편으로만 누워있어서 방바닥에 맞닿은 어깨와 궁둥이뼈가 저려오는가 싶어 아내의 험한 입이 쉬고 있는 틈을 타서 슬며시 바로 누워보았다. 두 다리 오금과 허리 춤이 근질근질 한 것을, 물것이 오른줄만 알고 긁어도 보 았다. 그러나 시간이 가는 동안에 비로소 뜨거운 것을 깨 닫고 땀나는 것을 알았다.

─ 이이상 더우리라고!

처음은 여느때만 여겨 참아 보았다. 몹시 더운걸. 오늘밤 은 이방이 웬일인가? 방바닥은 점점 뜨거워 온다.

뭘 좀 깔았으면─ 고집을 부리고 끝끝내 누워있던 깐은 있어서, 웃목 머릿 장 위에 있는 요를 집어 올 용기는 없었다. 더구나 장 앞 에 가로 누운 아내의 비웃는 꼴을 굽어 볼수는 없었다.

더 참아볼까 못참겠는데! 슬그머니 약간 윗목쪽으로 몸 을 옮겨보았다.

─ 별무신통인데! 흣흣하기는 왜이리 흣흣해, 비을 날씬 가부다─ 시뻘겋게 상기가 되어 애꿎은 천기까지 탈을 잡았다.

─ 어뜨거뜨거─ 금방 볼 쥐어박은 소리가 튀어 나올 듯이 입을 쭈뼛이 해가지고는 몸을 또좀 뒤틀었다.

─ 큰탈 났네─ 더 참을 수 없어서 또좀 옮겼다. 참을수 있는데까지 참 아볼 작정하고 바른쪽으로, 왼쪽으로, 반듯이, 그리고 간 기에 보채는 갓난애처럼 등밀이까지 해보다가 마지막에는 엎치기까지하였다.

─ 아무리해도 안전지대는 웃목이다! 그러나 벌써 한 개 의 물체가 점령하고 있지 않으냐─ 옛날 희랍(希臘)학자의 원리(原理)가 다 나온다.

─ 그러나 부부는 영육이 일치할수……에─ ㅅ 깨끗잖은 소리! 비루하고 치사스런 타협은 싫다─ 재호는 뜨거운것도 뜨거운것이려니와 자기의 몸이 어느 겨를에 아내에게 가까운 것을 깨달았다.

『에─ ㅅ』

이것도 말이라고 할까? 말이라면 말문이 비로소 열린 것 이다. 재호는 더 참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났다.

아내는 그동안 잠이 들었을까? 눈을 풀로 붙인 듯이 감 고 있으나, 눈알 굴리는 폼이 정말같지 않았다. 돌아다보 니 자기가 최후까지 지켜온 아랫목 자리는 적군의 방화로 인하여 쑥밭이 된것처럼 허허벌판이다.

─ 아아! 도성을 빼앗긴 패장─ 재호는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잠시 앉아있다가 다른 자 리를 물색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야 뜨겁지 않 을 자리라고는 장밑과 벽장속 또 선반이나 새로 맨다면 모르거니와, 아내가 누워 이는 옆자리가 제일일 것 같으 나, 창피하게 참아……

─ 안될 말이지 안돼!

웅도(雄圖)를 차리고 건너방으로 한번 떠 볼까? 폐방된 지 오래라 빙산(氷山)을 정복하는 의기가 없고는 도저히 엄두도 못낼 데고, 비장한 각오만 있다면 견묘(犬猫)의 생 활을 본떠, 부엌, 아궁이 옆에 쌀가미니를 깔고, 하룻밤 그냥저냥 견딜수도 있을 것 같기도하나, 이런일은 심히 신사도에 어그러짐은 물론, 입이 헤픈 아내로 인연하여 천추의 오명을 쓰고야 말 것이다. 타협보다는 차라리 주 검─ 재호는 아직까지 미련이 남아있는 아랫목 고토를 재인식 할 필요를 느꼈다.

─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의 고장이 제일이니라─ 다시 아랫목으로 내려갔다.

─ 기리가 불과 십육척 밖에 안되는 이 좁은 세계도 한 서(寒暑)의 차가 이다지 심한가─ 재호는 자비로운 어머니가, 병든 자식의 이마에서 체온 을 살피듯이 방바닥에 손을 가만히 갖다 대었다.

『이키! 어지간 하구나』

무심히 대었던 손바닥에 전기나 통한 듯이 찌르르하는 감응이 어깨쭉지까지 뻗치었다.

『아─ 니 무슨놈의 불을 이렇게 처땠어!』

분명히 아내에게 타협을 구하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기 다렸다는듯이 일어났다.

『아랫목에서 자는 당신 생각만 하는구료 나는 추워서 못견디겠는걸 어떻게』

『아무리 춥기로서니 얼어 죽을까』

방 한복판에 엉거주춤히 서있는 재호는 얼굴이 불덩이와 같다. 아니 금방 터질것만 같다.

『설마 그렇게 더울라구』

『설마! 더운가 안더운가, 와서 발바닥을 좀 대봐』재호 는 손가락은 벌에 쏘인것처럼 쩔쩔매면서 장판만 가리킨다. 명례는 이불을 한옆으로 밀치고 몸을 도사리면서 팔 을 길에 뻗쳐 장판에 손을 대었다.

『뻔─ 한 노릇이지, 난 꼭 알맞은데 그야단이시우』

『꼭 알맞어?』

재호의 눈알은 명례와 코등에 붙들어 맨 듯이 따라 구른다.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요. 당신 몸생각해서 그랬는데 뭘 그러우』

명례는 조용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다가 고개를 돌 리면서 방그레 웃었다.

어떻게 보면─ 좀더 버티어보지─ 하고 비웃는 것 같아 서 얄밉기도 하였다.

『그럼 불을 물리리다. 나는 하도 당신이 입을 봉하고 있길래, 삶느니보다 굽는게 더 빠를 것 같아서 그랬지!』

재호는 아내의 수다에 젖고 젖어서, 이까짓 소리쯤은 예 사다. 그러나 잠자코 있을 수 없는 것은 화재의 위험이다.

재호는 위엄 있는 가장의 목소리로 부옄에 있는 아내를 지휘했다.

『석탄은 부스러지지 않도록 살며시 꺼내어 끈숯 항아리 에 넣고 뚜껑을 꼭 덮어 두어야 돼』

평생가야 집안 일을 돌보지 않던 바깥 양반이시라, 부엌 에서 아내의 핀잔이 금방 되돌아온다.

『그런 것은 당신보다 내가 더 잘 알우. 그렇게 큰 숯항 아리가 집안에 있답디까? 걱정을 말아요. 아궁이 문만 열 어놓으면 제절로 꺼질터이니.』

─ 기어이 화해가 되어버렸구나!─ 재호는 자기한 일에 자기도 열적었든지 문비장에 먹다 꺼둔, 「마코!」꽁초를 피어 한 모금 쭉 빨았다. 그리고는 긴 한숨에 섞여 다시 내뿜었다. 명례가 부엌에서 들어왔다. 『시장하실텐데, 설렁탕을 좀 부어 올까요』

『그대로 자지』

매우 부드러운 소리다. 하기야 집안에 돌아와서는 담배 한갑을 사도, 젊은 아내를 거리로 내세우는 재호씨였다.

이튿날 아침─ 화해 끝에 긴장이 풀려 그런지는 몰라도 두 내외의 기침 이 여느때보다 좀 늦었다.

그러나 명례는 남편보다 먼저 불 꺼지기 전에 일어나, 조반 준비에 부산했다. 식모나 하나 두었으면 한결 편하 기야 하겠지만, 단두 내외 끓여 먹는 소꿉질 같은 살림에 야단스러이 그럴 필요도 없고, 설사 둔다 치더라도 또 남 편을 못믿어해 그런 것은 아니나, 젊은어멈은 어쩐지 부 질없는 늙은 할멈은 매사가 궂어서 코물이 밥솥에 떨어질 지 센 머리카락이 김치 건더기에 휘감길지도 모를일이다.

남편은 마음내키면,

『식모 하나 구해보지 그래』

하고, 아주 헙헙한 소리를 하지만 사실 쥐꼬리만한 월급 에 내집 사람도 아니요, 더구나 남의 사람을 부리고 닳고 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래서,

『사람의 입 하나가 어디라고 히짜요?』

하고, 예사로 듣는 남편에게 못알아들을 소리를 하였다.

그리고 가끔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았다.─ 남자란 호주 머니에 든돈 셈은 밝아도, 예산에는 깜깜무식이야! 한달 에 단돈 십원이라도 들여오면 식량과 찬용이며, 자자분한 데 나가는 돈걱정은 없을 것처럼 알지만, 구리전 한푼을 열쪽에 내어 쓰는 무서운 규모며, 자기 몰래 전당질을 해 서 급한 대목을 면하는 것 같은 것은 꿈에도 모르는 모 양…그야 전당을 잡혀도 내달에는 들어오는 돈이 좀 낫겠 지! 하고 믿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믿는 것이 변이라 떠내 려 간 것이 좀 많었다구? 자기는 지난 김장때 춘추복, 잡 힌 것을 가지고 큰 생색을 내고 나한테 큰 부주나 한것처 럼 야단이지만(참 그것도 이달엔 개표를 해야되겠군!) 말 을 아니해 그렇지 나는 시집올 때 해온 옷가지 떠내보낸 게 얼마라구! 시집올 때 한창 자기집 기구를 자랑하느라 고 금비녀 가락지며, 귀이게 말뚝잠, 호두잠, 뒷꽂이 비치 개, 고리잠, 과잠…등속 예물로 해준것도 직업이 없어 돌 아다닐 때, 나를 달래다시피 해서 자기 손으로 다 갖다 없앤일은 꿈에도 생각 않는 모양이야…요새 금값이 올라 야단들인데 생각만해도 뼈가 저려!

사실 지금은 시집이 거덜이 나다시피 됐지만, 전에는 떵 떵거리고 살아서 명례는 없는 친정으로 해서 숨은 설음도 많았다. 그래서 가끔가다 내외간 말다툼이 나서 네집 내 집 이야기가 나오면 머리를 싸 등이고 악지를 부린다.

『흥, 우리집이 못살았기로니 어쨌단 말이요. 나같은 딸 주고 치사하게 덕본일 있소? 우리집은 그래도 행세하는 집안이야요. 당신집은 뭔데? 돈놀이해서 벼천이나 장만했 던거…그나마 지금은 다 뭘해서 다 털어 없앴소?』

칼로 여미는듯한 말이지만, 듣는 재호는 의례히 자리를 피하였다. 그러면 명례는 남편의 무던한데를 발견하고 이 어 자기 한 말을 후회하고 마는 것이었다.

간밤에 안먹고 둔 찬밤이 있는지라, 아침은 물이나 끓여 그냥저냥 먹을까 하다가 남편 위해서 한그릇 밥을 지었다. 둘의 밥대중만 하고 불을 늦게 물려서 좀 눋기는 했 지만, 남편이 된밥 좋아하는 성미라 질지 않는것만 다행 이다. 반찬은 시금치에 조갯살을 넣은 빡빡히 끓인 국 한 대접, 하룻밤은 묵었으나, 두부찌깨 끈숯불에 올려 놓았 던것과 군내 나는 김치 깍두기 뿐이다.

『당신 때문에 끼니때마다 큰 걱정이야! 참 계란 한 개 남은 것 벽장 안에 있는데 국에 풀어 드리리까?』

『있거든 주어』

영양분이 있다면, 송충이 뎀뿌라도 사양하지 않을 재호 씨, 밥상만 받으면 반찬 때문에 이맛살을 꾸길때가 많았다. 이런때마다 명례는 죄없이 송구스러웠다.

재호는 국에 말아 밥을 몇술 뜨는 듯 마는 듯 어제 못본 석간과 조간 신문에 대강대강 눈을 달렸다.

천기예보…고기압은 중국 북부와 조선 남쪽, 해상에 뻗 쳐있고, 만주 북부와 북해도 방면은 기압이 낮다. 전조선 은 평온하여 흐렸다 개었다 하고 기온은 부산의 십도와 중강진의 일도 사이에 있다. 명일도 대체는 흐릴 모양이 나, 차차 따뜻해질 것 같다.─ 재호는 혼자 속으로 ─ 그날씨도 꼭 우리집구석 같구나!─ 하였다.

명례는 터벅거리고 나가는 남편의 뒷모양을 물끄럼이 바 라보더니, 간장이 녹는 듯한 애처로운 소리를 불어낸다.

『양복 월부가 끝나기 전에 구두가 또 돈을 달라는구 나!』

남편을 일자리로 보내고나서 명례는 남편이 남긴 반그릇 밥은 뚜껑을 덮어 아랫목에 방석 밑에 파묻어 두고 찬밥 을 국에 말아 두어번 떠 먹었다.

식구 많은 집 같으면, 찬밥이 밀리는 수가 있어도 점심 때 끓인 밥으로 때워버리니까 문제가 없지만, 명례네처럼 단 두 내외 살림에는 한사람이 한끼만 안먹어도 이게 며 칠씩 밀려 성화를 할 노릇이었다.

재호는 원래 양이 크지 못한데다가 일수 밤샘을 하고 돌 아다니니까 이튿날은 입이 깔깔해서, 반그릇도 채 못먹었다. 그렇다고 반그릇만 담아서 남편에게 바칠 도리는 없 으니까, 거기에서 반그릇 밥은 의례히 밀리는 것이고, 또 기껏 해놓은 저녁을 궐할 때가 많으니까, 아무리 밥을 적 게 한다하지만, 밥대중이 어려워서 명례에게는 허구한날 애꿎이 먹다 남은 밥과, 찬밥만 차려오게 되는것이었다.

명례는 설거지를 하고나서 비로소 세수를 했다. 비누는 남편이 쓰는 것을 같이 쓰지만, 양치질은 전에 않던 소금 으로 득득 문대고, 분은 요근래 나들이를 안다니니까 통 바를 필요가 없다. 단지 『크림』을 손가락 끝에 약간 찍 어서 그것으로 얼굴과 손등에 벌려 두어번 문지를 뿐 머 리도 별로 빗지 않으니까, 늘 을시년스럽다. 내꼴 주접도 말이 아니구나.

요 며칠동안 이렇게 바스러지는 수도 있나!

경대와 마주앉아 크림기운있는 손바갇으로 턱아래 목을 쓰다듬으면서 하는 말이다. ─ 이 잘난 살림살이가 뭐이 그리 고되다구!─ 재호와 결혼한지는 불과 이태 나이가 아직 스물을 넘어 서 불과 셋 밖에 안됐지만 명례는 그동안 의모로나 마음 으로나 무척 변했다.

전같이 끼끗하고, 토실토실하던 얼굴이 광대뼈만 불거지 는 것 같고, 햇볕을 모른지가 오래지만 콧등과 눈 아래로 는 기미가 앉아 봄볕에 껀것처럼 가무잡잡하다.

─ 제─ 기 휘장이고 뭐고 다 일없다. 하루를 살더라도 마음이나 편했으면!─ 마루 끝에 무엇이 털썩 한다.

『아씨 적갈좀 안사시라우』

단골로 다니는 광우리장수였다.

『오래간만이로구료! 왜 그간 한번도 안 왔수. 퍽. 여러 날만이지?』

명례는 열렸던 경대 설합을 밀어 넣고 밖으로 나갔다.

『말마시유, 끝의 아들녀석을 요번에 잃어서요』

『저런 어쩌다가?』

뜻밖엣 소리라, 명례는 놀랐다. 마나남은 금방 눈물이 쏟 아질 것 같았으나 억지로 참는 모양.

『어쩌다가 그랬수……몇살이나 됐는데?』

『그까짓 자식……열 네 살 먹은것이지요』

『저런 꼴이 있나. 열 네 살 먹도록 키워 가지구!』

자식이나 여럿 낳아 키워본 사람의 말 같다.

『그녀석 집안중 똑똑한 녀석이지요. 그런데, 경준가 뭔 가 한다구 제 동무들하고 가문돌서 노들다리(漢江鐵橋)루 영등포까지 그 먼데를 그 치운날 구멍뚫어진 잠방이 하나 만 입고, 허구헌날 밤마다 뛰어다녔구먼요. 그래 난 저녀 석이 신문배달부가 되랴나, 인력거를 끌랴나. 했더니, 들 으니까 경주를 잘하면 어디서 동경으로 보내주고, 서양도 보내준다고 그러면서 저녁마다 머리악을 쓰고 뛰드구먼 요』

『으─ 라! 마라손 선수가 되려구했군 그래』

『그랬는데, 그 언젠가 감기처럼 며칠 신음 앓더니 별안 간 죽어 버리는군요. 별로 약도 못써보고 죽였어요』

(만국 올림픽대회 출장을 꿈꾸다가 폐염으로 요절한 십 사세의 소년 지하에서 길이 눈을 감을지어다!)

『참 안됐소. 오나 가나 좋은 소식은 안 들리구……』

잠시 후에 명례는─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 둡시다─ 하 는 듯이 말을 맺었다.

두달째 내려오는 외상값을 주었으면 하는 눈치인데, 사 정은 딱하나 당장에 도리가 없었다.

『이 소라젓은 한사발에 얼만치? 기왕 왔으니 한사발만 놓고 가우. 돈은 내일모래가 월급이니까 한꺼번에 받아가 우 응』

『삼십전애요』

『집의 사발로, 이십오전 내리다』

『아이참, 아씨두 그럼 난 무얼 남겨먹으라구요』

『여러소리 말고, 어서 놓구 가우』

명례는 선반에 엎어놓은 제일 큰 사발을 들어대어 싸우 듯이 해서 한사발 받았다.

『아씨! 그럼 밥이나 한술 먹고 가게 해주시우』

명례는 『그러우』하고 선선히 찬밥 한술을 국에 말아 마나님을 먹여 보내고나서 속으로─ 나도 무서운년이다─ 했다.

광우리장수가 다녀간후 명례는 어제 빨아놓았던 와이셔 츠와 카라에 풀을 먹여서 줄에 넣고, 막 방에 들어 왔을 때다. 마당에서 덜걱덜걱 저벅저벅 소리가 나더니,

『여보시오』한다.

세숫수건에다 손의 물기를 훔치면서 명례는 유리구멍으 로 내다보았다.─ 시커먼 복장을 한 순사가 술두터운 누 우런 책을 들고 두리번거리면서 마루 앞에 와 서있는 폼 이 호구조사를 나온 모양이었다.

『팔십 팔번지?』

순사는 번지부터 따졌다.

『네』

호구조사가 이번이 처음 아니요 그동안에도 몇 번 있었 으나 대개는 남편이 집에 있을때라 몇마디 묻고 대답하는 것만 보았지 무슨말에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이 도무지 나서지를 않았다.─ 나한테는 무슨말을 물으려노─ 하고 생각을 하니, 공연한 겁이 났다.

『세대주는?』

『세대주요? 네, 나에요』

『당신이 세대주?』

순사는 마루 끝에 두팔을 모으고, 서있는 명례를 흘끗 치올려 보았다.

『이름이 뭐요』

『김명례』

순사는 굵다란 만년필로 책장에 꽂힌 하얀 종이에 쇠금 자 하나를 휘갈기더니 멈칫한다.

『밝을명자, 예돗롓자예요』

순사는 그제서야 두자를 마저 썼다.

『식구는 몇이요』

『나까지 단 둘이에요』

『한 사람은요』

『박재호. 실을잿자, 호경홋자에요』

이번에는 글자까지 다 일러바쳤다.

『무얼하는 사람이오』

『회사엘 다녀요. 고려물산회사요』

『그럼─ .당신과 어떻게 되는 사람이요?』

『남편이얘요』

『남편?』

『네!』

『그이는 늘 돌아다니고, 집안에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 까 내가 세대주지요. 살림살이는 내가 통맡아하니깐요』

『그렇다고 세대주가 바뀌는수도 있소?』

순사는 다시 한번 명례를 치올려 보았다.

─ 트레머리는 해가지고, 의양은 반반하면서, 왜이리 숙 맥이냐 하는 듯이 똑바로 뜬 두 눈동자가 비웃다 못하여 사팔뚜기가 될 듯 싶다.

명례가 무안해서 아무말 없는동안 순사는, 쓰던 종이쪽 을 쑥빼어 손아귀에 넣고 구겨버렸다. 그리고는 다른 것 을 갈아끼었다.

명례는 세대주란 것이 무엇이다하고 또렷이 들어나게 알 지는 못하였을망정 순사가 생각하듯 그렇게 판판이 모르 는바도 아니요, 딴 꿍꿍이속이 있어서 한것인데, 말하자 면 망신살이 뻗치느라고 이런 변이 되었다. 자기 남편을 호주나 세대주로 내세우지 못한데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이태동안이나 재호와 같이 살아오지만 여 지껏 재호네집 민적에 오르지를 못한 까닭이다. 그래서 혼인신고를 안하면, 법률상으로 부부가 못되는 줄도 잘 아는 동시에, 지금처럼 호구조사가 나왔을 때 부부 아닌 것을 부부라고 했다가 나중에 동리가 나지 않을까 두려웠 던 까닭이다.

순사가 새종이에다 다시 이름자를 고쳐적고나서, 원적이 어디냐 생일이 언제냐, 하고 묻고 적고 하더니 마지막으 로,

『결혼은 언제 했소』 하는 순사의 묻는 말에 명례는─ 호구조사에 이런것까지 다 묻는가? 인제는 다 바른대로 고해바쳐야 되게 생겼구나─ 하였다.

『재작년 가을에 했어요. 양력으로 시월 이십일날에요』

한 것을 안했다고는 할 수 없고 부르터난김이니 적을레 거든 다 적어가라는 듯이 날짜까지 분명히 일러 주었다.

명례는 경찰서 문을 들어서는것처럼 벌써부터 가슴이 두 방망이질 쳤다. 그러나 순사는 그런 것은 적지도 않고 더 묻지도 않았다. 그대신 명례가 생각한것과는 달리 박재호 란 녀석의 학생첩인게다 했을는지도 모른다.

순사가 집안을 한번 둘러보고 대문 밖으로 나간뒤 명례 는 마루 끝에 맥없이 주저 앉았다.

늦잠자는 남편과 아침마다 싸우기 싫어서 삼십분을 더 돌려놓은 안방 시계가 두 시를 친다. 양철로 이은 일각대 문의 그림자를 꺼멓게 마당가에 그리고 큰 마루를 거의 삼분지 일이나 차지한 햇볕이 콧등이 가렵게 내려 쪼인다. 새우젓독만한 독이 서너개, 고추장항아리가 두엇 되 는 장독대 바로 옆에 작년에 얻어다 심은 진달래가 벌써 불그죽죽한 봉오리를 맺었건만 명례의 눈에는 띠이지 않 았다. 바로 아까 와이셔츠를 풀해 넣고, 엎어놓은 양철대 야는 물 묻었던 자리가 말라서 시설이 앉은것처럼 하─ 얗다. 한 열흘 전 남편의 흰죽을 쑤느라고 방망이로 불은 쌓을 문대다가 금이간 커어다란 질뚝배기가 쓰다가 팽개 친 벙거지처럼 마당 구석에 쳐박혀 있다. ─ 저것은 철사 로 테를 메어 채송화 씨를 뿌려 두쟀던 것이 그대로 있구 나─ 순사에게 큰 경난을 치르고 정신이 멍멍한 중에도 그런 생각은 났다.

점심때는 되었으나 밥생각이 안났다. 햇볕이 따뜻해서 저녁때까지 그대로 넉장을 부리고 앉아 있고 싶었으나 마 음이 한가롭지 못했다.

─ 허구헌날 쉬지 않고, 해야 끝 안나는 일! 그러나 하던 일이나 어서 마치고보자─ 명례는 석가래 끝에 매달린 대소쿠리에서 다시마 한쪽을 쪽 찢어내어 입에 물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심심할때 면 소쿠리를 뒤는 버릇이 있다. 소쿠리 안에 든 것이 없 으면, 실오라기라도 질겅질겅 해야 한다. 버릇으로는 못 된 버릇이지만 그대신 쌀을 퍼주고 떡을 사거나 가가에서 이것 저것 외상으로 들여다 군것질하는 일은 없다.

인둣불이 사위지 않았다. 해체보고 나서 하다가 둔 저고 리를 마저 시작했다. 안팍껍데기는 어제 껴놓은 것 인제 부라구를 마쳐 뒤집어서 옷고름 동정만 달면 다 된 것이다. 혓바닥 농간에 입안에 든 다시마가 짠 기운이 우러나서 목구멍으로 한풀 넌어가고 겨우 달착지근한 맛이 돌때다.

경찰서에 불러갈 그 망신은 그만두고라도 남편이 원망스 럽고 미웠다.

─ 혼인신고 때문에 그렇게 입이 닳도록 말을 했건만, 바쁘다는 핑계만 대고 차일피일 해오는 까닭이 무얼까?

바쁘다는 자기에게만 미룰수 없어 대서소에 가 내손으로 혼인계를 해온 것이 다섯달째 장 설합속에 있다. 애초에 혼인을 부모네가 시킨것이니 자기네가 도장 안찍을 이 만 무한 것이고, 우리 둘의 도장 찍고 증인 둘의 도장만 맡 으면 그만 아닐까. 그 유들유들하고 뻔뻔한 사나이가 필 시 딴 배포를 꾸미는게지─ 명례는 하던 바느질에서 손을 멈췄다. 어쩐지 가슴이 와 들와들해졌다.

─ 옳지, 요새 여자들이 영악하니까 호적등본을 호주머 니에 넣고 돌아다니면서 네보이나부다─ 가슴이 타는지 벅차오른다.

─ 그렇지, 나부터도 속을 테니까.……이런때 만약 딴 계 집하고 혼인을 덜컥 하고서 혼인신고를 먼저 해버리면, 나는 재없이 오쟁이를 쓰고마는 판이다. 밤마다 늦게 오 고 노는 날도 집에 안붙어있는 것이 그까닭 아닐까?─ 명례의 가슴속은 뜨거운 고비를 넘어 차디찰 지경이다.

소름이 끼쳤다.

『오늘은 일찍 안오려나? 오기만 오너라 끝장을 내고말 테니!』

옆에 듣는 사람도 없건만 혼자 중얼거렸다.─ 말로만 해 서 안될터이고, 힘으로 당할수 없으니, 넥타이 끈에 매달 려야 소용없고. 아니다 어쨌든 먼저 말로 따질대로 따져 가지고 싹이 틀리거든 그 다음에는─ 명례의 눈에는 차디 찬 자기의 시체가 보였다.

개와 고양이

편집

─ 부정기(不定期)나마 오늘은 아내에게 대한 특별 「써 어비스데이」─ 잘 잘못이 누구에게 있었건 간에 재호는 내외가 싸우고 화해한 그 이튿날은 반드시 아내를 우대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격조하였던 마음과 마음을 시급히 융화시키는데 유일한 정책일는지도 모르나, 어쨌든 일종 의 미거(美擧)인 것이다.

재호는 두터운 하도릉지에 짠 큼직한 과실 뭉치와 매끈 매끈한 유리종이에 싼 비스케트 상자를 옆에 끼고, 밤 열 시나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회사 일이 끝나면 세상없 는 일이 있더라도 제쳐놓고 일찍이 오자한 것이 악우들의 성화에 못이겨 맥주 몇병에 입이 아프게 노닥거리다가 이 렇게 늦은 것이다. 그러나 여느때 새로 두시 세시에 비하 면 초저녁셈이다.

대문간을 들어서면서부터,

『엽─ !』

어느나라 말인지 못알아들을 소리로 외쳤다. 인기척만 내면, 강아지처럼 아내가 나와 맞아주려니 했던 것이다.

더구나 두 손에 묵직히 무엇을 들고 서있는 것을 보면 반 가워서 고무신짝을 거꾸로 뀌고 곤두박질을 할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어─ 이ㅅ!』

재호는 마루 앞에까지 와서 다시 한번 소리를 내어보았다. 『주인아씨!』

여전히 대답이 없다. 『어디 갔나』하고, 유리 구멍으로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분명히 아내가 누워 있다.

『여봐 명례!』

─ 무슨 잠을 저렇게 자나─ 하고 이번에는 좀 큰 소리 를 내어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이 없다.

방으로 들어간 재호는 『왜또 무엇이 못마땅해서 저렇게 부어가지고 있나』하면서, 자기 손으로 양복을 벗고 넥타 이를 끄르고나서 제자리에다 걸었다.

『사람 소리가 그렇게 나도 모르고 자는 잠이 세상에 어 딨어』

재호는 양복바지를 마저 벗어 못에 걸고 조선바지를 갈 아 입으면서 불평비슷이 두덜거렸다.

명례는 그제서야 일어났다.

『집구석이라고 찾아 들어서면 어서 들어올 일이지, 마 당 복판에서 엽─ 어─ 잇 하면 어쩌잔 말애요. 채신머리 없이』

조선 고추보다도 더 맵고, 쓰라린 말이다. 재호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까닭 모를 노릇이군요. 아씨께서는 오늘 저녁 또 무슨 일로 그렇게 역정이 나셨습니까.』

─ 오늘만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아내에게 봉사하쨌던것 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 것인가? 그러나 자기만은 끝 까지 감정을 누르고 부드럽게 아내를 대하기로 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내게대한 무슨 불평이 있다면 좋 은 낯으로 사분사분히 말해주면 좋잖어? 내 성미가 원체 고약하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수더분한때도 있으니까…

자, 그러지 말고 말해봐 제발 오늘 밤만은 싸우지 만다 구』

재호는 과자 상자의 뚜껑을 열고, 실과는 봉지에서 내어 가지고 명례 앞으로 가만히 밀었다. 그러나 명례에게는 남편의 하는짓이 유들유들하게만 보였뿐, 구슬사탕을 가 지고 어린애를 어르고 달래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사과 와 네애블 비스케트의 향기롭고 달콤한 냄새가 코에 끼치 기는 하나, 여느때의 매력이 없었다.

─ 인제 당자를 만났으니 따져야지─ 명례는 말을 꺼낼까 하였으나 가슴이 들끓어 좋은 낯으 로 좋은 말로는 안될 것 같아서 망설거렸다.

『그럼 오늘은 그대로 자고 내일 아침에 말하지』

명례가 막 생각한 것을 재호가 입을 열어 말하고, 이부 자리를 주섬주섬 내려 깔았다.

『어서 자자니까』

재호는 다시한번 명례를 달래고나서 먼저 자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다지 넓지도 못한 요뙈기지만 명례의 몸뚱이 하나 용납할만한 자리는 언제든지 예약해놓은것처럼 비어 있다.

─ 원수스런 저자리! 만약 내가 저자리 속으로 들어간다 면 오분이 못가서 타협이 되고만다─ 명례는 남편의 말은 들은체 만체 두눈에 불을 켜고 도사 리고 앉았다.

재호는 누운지 십분이 못가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시장 기가 몹시 든 동물원 호랑이가 발바닥을 핥으면서 으르렁 거리는 소리, 공원의 넓은 잔디밭을 기계(刈草器)로 밀 듯 이 덜덜덜하는 소리, 원체 코골기로 조명난 재호지만 오 늘 밤은 더욱 유난스럽다. 그뿐아니라 간간이 숨을 한참 씩 딱 끊었다가 한꺼번에 몰아쉴때는 열차가 정거할 때 풀어주는 압착공기처럼 맹렬한 기세도 『쏴─ !』하였다.

─ 야단도 스럽다─ 명례는 남편의 뭉툭한 콧속에서 새어나는 가지각색의 의 음(擬音)을 들으면서 그의 자는 얼굴을 물끄럼이 들여다 보았다. 매일같이 보는 얼굴에 새삼스럽게 흥미느낄 곳도 없지만 마음 놓고 뜯어보기는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말총만큼이나 거센 머리털, 약간 불거지고도 툭터진 이 마, 추사체의 건너 그은 획처럼 굵직한 두 눈썹, 콧날이 우뚝 솟은 것이 제법 사내다운데가 있었다. 입은 잠잘 때 벌여서 걱정이지 턱도 튼튼하게 생겼다. 대체로 이목구비 는 버젓하지만, 이십 안팎에 여드름이 많이 내솟은 탓인 지 살결이 거칠어서 보통학교 생도가 크레욘으로 그린

『형님의 얼굴』같았다.

─ 미남자라고는 할수 없지만 어디다 내 놓든지 사내답 게는 생겼다! 반주그레하고 희멀겋게 생긴 남자보다 씩씩 해 보이고…… 그만하면 됐지─ 명례는 남편의 얼굴에 대하여 만족한 듯이 이리 보고 저 리 보고 하였다. 저고리 하나를 해놓고, 옷 깃이 잘 달렸 나 살피듯이…….

─ 모양을 너무 내다가 나중에는 온 얼굴을 저며놓지 않 을까─ 살쩍 근처에 면도로 포를 뜬 자리가 보였다. 명례는 이 빠진 그릇을 생각하고 얼른 그 자리가 아물어 딱정이가 떨어졌으면 하였다.

모로 누웠던 남편이 번 듯이 고쳐 누웠다. 야단스럽던 콧소리도 잠시 그쳤다가 다시 계속된다. 명례의 생각도 자리를 고쳤다.

─ 어째서 혼인신고를 안해줄까─ 자기도 모르게 진정되었던 가슴이 다시 끓기 시작한다.

─ 나한테서 단맛 쓴맛을 보았으니까 마음을 딴데로 옮 기랴는게지! 밤을 새어다니는 것은 반드시 술때문이 아닐 게다. 아니할 말로 도적질을 하러 다닌다면 하는 행동이 다르고, 집안에 들여오는 것이 있을터인데, 놀음을 하나?

놀음을 한다면 따올 때 따오더라도 집의것 내가는 일이 많을터이고, 그럼 독립운동을 꾸미나? 더군다나 그런 큰 일을 계획할 깜냥도 못되고 저녁마다 술내를 피우고 들어 오는 것을 보면 역시 술때문이지! 아니다 술에 곯고 곯어 서 하혈까지 하는 사람이 술에 미쳐 그럴 이 없다. 술에 인박힌 사람 같으면 집안에서도 안먹고 배기나! 암만해도 계집 때문이야!

명례는 벌써 질투의 불길로 활활 타고 있었다.

─ 얼굴이 저렇게 반반하니까 계집들이 싫어하지는 않을 테고, 한가지를 보아 열가지를 안다고 마음내킬 때 나한 테 하듯 하면, 계집은 넉넉히 후려낼 솜씨 장가 안들었다 는 것을 내세우고 돌아다니면 지금처럼 노처녀 많은 세상 에 애인하나 만들기쯤은 밥 먹기보다 쉬울것이다. 양복때 기나 솔질해 입고, 몸에 냄새 안나게 샤쓰를 빨아 입고 다니니까 과히 군색하지 않은청년신사로 알테지! 사흘에 한번 양복바지를 다려 금을 내주고 이틀에 한번 양말을 빨아주고, 닷새에 한번 샤쓰를 빨아입히고 하는 사람은 누군데! 장가 안간 사람으로 알고 덤비는 년도 미친년이 지만, 나같이 속 못차리고 뒤받이 하는년은 더 쓸개 빠진 년이야! 내가 왜 진작 속을 못차렸을까 왜 못차렸어─ 명례는 금방 미칠 듯 하였다.

뱃속이 유하게 코만 골고 자는 남편이 원망스럽다. 못해 물어뜯고 싶었다. 재호는 무슨 좋은 꿈을 꾸는지 입맛을 쩍쩍 다시기도 하고 빙그레 웃기도 한다.

─ 어떤년하고 꿈에도 좋아지내는구나─ 명례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착란했다. 더 참을 수 없었다. 무심히 잠만 자고 있는 남편의 얼굴이 뻔뻔스럽게만 보였다.

『예─ 끼!』

어느틈엔지 명례의 세 손가락이 재빠르게 재호의 코를 훔켜 쥐었다. 그리고는 수룽 고동을 틀 듯이 뒤틀었다.

재호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두어번 허덕허덕 하다가 뻘 떡 일어났다.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다.

꿈나라─ 그 어떤 집 문앞에서 휘파람을 불며 얼쩐거리 다가 무서운 세파─ 드에게 코를 물려 휘돌린 생각만 난다.

재호는 잠이 설깨어 한참 멍멍히 있었다. 그러나 맑은 정신이 들면서 코끝이 화끈화끈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웬일일까?

손으로 만져보았다. 그 꿈이 꿈이 아니라 생시라 할 것 같으면 자기의 코끝이 벌써 떨어져 개의 윗속으로 자취를 감춘지도 오랬을 것이다.

─ 꿈이라 다행이다─ 재호는 절박한 위기에서 벗어난것처럼 마음이 가뜬했다.

─ 만약에 정말로 코가 떨어졌든들 어떻게 될번했누─ ─ 주둥이 꼭지 떨어진 사기주전자, 앞뒤를 분간 못할 유선형 자동차, 애급의 스핑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화끈화끈하던 코가 얼얼해 왔다.

재호는 무심히 아내를 바라보았다. 여지껏 잠을 안자고 뽀루퉁해 앉아 있거니만 생각한 아내는 뜻밖에 얼굴이 질 리고, 독이 잔뜩 나 있었다.

『웬 까닭이야?』

재호는 여전히 코끝을 주무르면서 굵직한 목소리로 따졌다. 『………』

『웬 까닭이냐 말야?』

명례는 일시적 히스테리의 발작으로 안할 짓을 해놓고 이어 후회를 했으나, 이미 저질러 놓은 일을 다시 수습할 도리는 없었다.

─ 기왕 내친 길이니 철저히 덤벼봐야지─ 남편이 재차 따지고 묻는데 자기가 입을 다물고만 있는 것이 비겁한것도 같았다.

『왜 남이 말하려는데 잠만 자요?』

『무슨 긴한 말이길래 곤히 자는 사람을 깨워 일으켰 어?』

『당신에게는 긴하지 않지만 내게 긴하니까 그렇지』

말 솜씨까지 글렀다.

『그럼……』

재호는 기침을 한번 캑하고 앞으로 약간 나앉으면서 말 을 잇는다.

『그럼 흔들어 깨워도 될일을 코는 왜 깨물었어?』

꿈꾼 생각만 하고 깨물었다는 트집이다.

『깨물긴 왜 깨물어요. 청국사람이 팔러다니는 아가위든 가』

명례는 남편의 붉은 코를 아가위라고 놀려댄 적이 있었다. 『그럼 깨물지 않고 어떻게 했단 말이야』

『비틀었지요』

『비틀었어?』

재호는 자기의 귀중한 코가 아내에게 잔혹한 고문을 당 한것을 비로소 확인했다.

그러고보니 붓지 않았을까하고 다시 한번 어루만져 보았다. 『비틀었어?』

괘씸한 생각에 한말을 다시한번 되풀이 했다.

『비틀었어요』

명례는─ ─ ─ 그래 어쩔테야─ 하는 태도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기.

『어떻게?』

재호는 턱을 버쩍 쳐들고 아내에게 육박했다.

『어떻게 비틀다니 되는대로……… 어떻게 삼백 육십도 로 비틀었지?』

재호의 얼굴이 명례의 턱밑까지 미쳤다. 명례는 약간 뒤 로 물러났다.

『어떻게 비틀었냐 말야?』

재호는 아마도 턱을 금방 치받칠것 같이 다가들었다. 명 례는 더 피할 도리가 없었다. 더 피한다면 자기가 뒤로 넘어질 지경이었다.

남편의 코를 덥썩 움켜쥐었다.

『어떻게 비틀어? 이렇게 비틀었지?』

날카로운 말과 함께 뒤로 왈칵 떠다밀고 말았다.

제호는 고개에 힘을 주고 버티어볼 사이도 없이 뒤로 벌 렁 나자빠졌다. 두 팔꿈치가 장판바닥에 부딪치면서 쿵!

두 다리를 천정으로 내뻗고 잠싯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 러나 오뚜기처럼 되 일어나며, 그의 바른팔이 전광석화처 럼 앞으로 달렸다.

철썩!

눈 깜짝할 동안에 명례는 두 팔로 얼굴을 싸고 옆으로 쓸어졌다.

『해망적은 계집 같으니』

재호의 숨 가쁘고, 가라앉은 목소리었다.

『사람을 친다?』

맞을짓을 서뿔리 했으되 남편이 그처럼 자기 몸에 손댈 줄까지는 생각 못하였다. 결혼한지 이태에 갖은 투쟁이 많았지만 한번도 무력전은 없었던 까닭이다.

얼마나 올바로 귀때기를 맞았는지 머릿골 속에서 전기풍 선 도는 소리가 윙윙나고 있다.

─ 자기는 굳센 사나이? 코가 약간 아프기야 했겠지만 비겁하게 약한 여편네를 치다니─ 명례는 분하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얼떨덜한김이라, 아 픈줄은 몰랐으나 방정맞은 눈물이 먼저 앞을 서서 두뺨을 뜨뜻이 적시고 있었다. 두 어깨는, 왜그리 들먹거리는지 자기도 모를 일이었다.

─ 내가 사람이 못나서 이럴까─ 비겁한 눈치는 보이기 싫어, 가슴속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독사처럼 무섭게 노려보자 한것이 몹쓸놈의 눈물이 어려서 그런지, 남편의 얼굴은 늘어났다 오므라들었다 한다. 『그집 가풍 꽤 좋다. 막된 버릇을 배워 가지고 아무에 게나 이러는거야?』

날카롭게 하쨌던 말씨조차 반은 목구멍에 걸쳐 국숫발처 럼 아래로 처진다.

『치면 어때. 천하에 괘씸한것 같으니!』

눈이 부리부리한 남편의 이말이 더 무서운호령이었다.

『치면 어때?』

명례의 생각에는 연약한 손가락으로 쥐어 흔드는것과, 무지한 손바닥으로 치는것과는 등분이 달랐다. 장변 놓아 먹는 사람 아닌다음에야 되로 얻고, 말로 줄 까닭이 없었다. 『또한번 쳐봐요. 얼굴이 뒤통수로 돌아가도록 어서 쳐 봐요.』

차근차근히 시작할것처럼 느긋한 말소리었다.

『치라면 못칠까?』

『그러기에 치란말이요 어서 어서』

명례는 바싹바싹 앞으로 나앉았다. 얼마안가서 남편의 턱을 치받칠것처럼 다가들었다.

『이게 정말 죽고싶은가?』

재호는 소두방 같은 손을 쩍 벌이고 한번 울러메었다.

무서운 시위(示威)였다. 그러나 기실 또 쳐볼 엄두는 못내 었는지 그 손을 다시 슬며시 내렸다.

『죽을 작정은 벌─ 써 했어. 자 어서 쳐요』

명례의 파랗게 질린 얼굴이 금방 재호의 얼굴에 맞닿을 것 같았다. 형세 여하에 따라서는 정작 코를 물어뜯을것 도 같았다.

재호는 두팔을 뻗어 명례를 슬며시 뒤로 밀었다.

『정말 죽고싶어?』

『죽고싶구말구』

명례는 두 팔을 뿌리치려고 버둥대었다.

『도대체 웬 기가나서 이지랄이야?』

재호는 성이가시었든지 분명히 한풀 죽은 말소리었다.

『죽여주어요. 유언장 벌써 써놓았으니』

널을 뛰는셈인지 한쪽이 누그러지면 한쪽은 일어나는 법 명례는 기가 뻗칠대로 뻗쳤다. 온전한 정신은 아니었다.

─ 명례는 재호의 팔을 뿌리치려고 여전히 버둥거리고 꼬집어 뜯고 하였다. 그러자 어느틈엔지 『응!』

소리와 함께 재호의 한팔을 덤썩 물었다.

『아얏!』

재호는 눈에 불이 번쩍 났다. 돛에치인 산돼지처럼 물린 팔을 잦혀보았다. 그러나 워낙 입아귀 힘세게 물고 늘어 진 판이라 아프기만 더 아팠을 뿐이다.

『이 이 이걸 안놀테야!』

『………』

『안놀테야』

재호는 턱이 떨어져라 하고 한손으로 뺨을 쳤다. 그러나 살점이 떨어지기 전에는 안놓을듯이 모진 잇발이가 더 깊 이 살속으로 박혔든가, 온팔이 다 저리고, 당기게 되었다.

때리면 때릴쑤록 더 아파서 그이상 손을 댈 기운은 조금 도 나지 않았다.

『정 안놀테야』

재호는 또한번 얼렀다. 상대편은 말 대신 잇발로 살을 질겅질겅 하였다. 재호는 까무러칠 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태를 피하려면 오직 한가지 방법밖에 다른 도리는 없었다. 『잘못 했어, 잘못해, 어서 놓아』

재호는 원인모를 이 전쟁에 항복을 하고 지극히 애련한 목소리로 빌었다.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란 말야 제에발』

재호는 다시 한번 빌었다.

『어서 어서』

또 졸랐다.

『제발 좀 놓아주어. 잘못했다고 항복을 하는데야 더 이 럴것 없잖아! 자 어서 놓아 어서』

굴복이 최대의 모욕이라는것을 모르는바 아니나 워낙 다 급하니 백전 노장인들 하는수 없다.

『아씨, 제발 좀 놓아주십시요』

난데 없는 경어(敬語)─ 여지껏 싸우던것을 슬쩍 농으로 풀자는 수작만도 아니다. 승전 장군에게 경의를 고하는 동시에 관대한 처분을 바라는 것이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어서 놓아주어. 내외간 싸움은 스포츠로 알고 해야지, 이렇게 사생 결단을 해서야 쓰나』

과연 재호는 두 내외 오기와 심술시합에 있어서, 전투력 을 상실한 선수였다. 눈물을 머금고 설욕할,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외에 별도리 없는 마당이다.

『네, 그저 죽을 대로 잘못 했습니다. 그저 관대한 처분 만 내려줍쇼.』

『…………』

『어서 놓아주어.…… 이건 참 너무 심한 일이야.』

인제는 무조건하고 그저 『살려줍쇼』뿐이다.

원래 둘의 전투력을 비한다면, 차이가 없을수 없다. ─ 먼저 재호는 말하면 키가 커서─ 몸이 마른것 같으나, 기 실 십칠관 이백몸메의 거한, 금저울이나, 약저울 눈으로 따져 일천 칠백 스무냥중이나 된다. 게다가 중학시대에 유도니 검도니 하는 무서운 것도 좀 배웠고, 정구에는 선 수로서 전위본일까지 있었으니, (아내 뺨 치는 수법을 보 라) 호락호락히 볼 사내는 못된다. 지금은 비록 체육방면 에 무관심해지고 질서없는 생활을 한다지만 칼로리 많은 영양물─ 삐푸스틱─ 도야지 기름기 많은 호만두?탕수육?

대구탕…등속의 진건한것을 무시로 장복해서, 체내에 축 적한 군량(軍糧)만 해도 상당하다. 이것을 모두 정력(精 力)으로 환산한다면 유사지추에 그 무위(武威)를 놀랍게 발휘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명례는 길이가 오척 삼촌 무게가 십삼관 백몸메, 외관으로 보아 벌써 재호의 유가 못된다. 학생 시절에 체조와 유희로써 몇번 강종강종 뛰 어본 일은 있으나, 가정부인이 된 후로는 그나마도 인연 이 멀어졌다. 그대신 조롱말 처럼 온종일 마루로, 부엌으 로 마당으로 수없이 왕래를 하니까, 다리 힘은 세어졌을까? 물이 그뜩찬 설거지통을 안아 나르고, 다듬잇돌을 들 어 옮기고, 방망이질?(이 운동이 맹랑한 운동일지도 모른다. 두 주먹을 가지고 이 같이 민활하게 놀린다면 스피이 드를 가진 뻑싱선수)을 하니까, 팔과 어깨 힘이 늘었을까? 그것은 그렇다 하고 삼시 먹는 밥에 두끼는 찬밥, 반 찬이라고는 우거지찌개에 짠무 김치쪽, 이것을 미루어서 명례의 전투실력이 아무래도 빈약할 것은 틀림 없다.

이런 것을 비교하면 양자의 승패가 벌써 결정적으로 보 인다. 그러나 양자의 성능(性能) 을 알기 전에는 이것도 속단으로 돌아가기 쉽다.─ 조선 고추가 흐고추보다 맵다 는 한말로서 재호의 무른것과 명례의 매섭고 다구진 우열 을 반드시 참작할 필요가 있을것이 아닌가─ 명례는 한번 문이상 영구히 놓지 않으려 했으나 비는 것 이 가엾어서 잇발의 힘을 차츰차츰 늦추었다.

─ 인제는 살었나보다─ 재호는 고개를 뒤로 잦히고, 천 정만 바라보면서 우는상을 하고있다가 약간 안심한 듯이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러나 아주 놓아 주기 전에는 마음 을 놀수 없었다.

『잘못했으나 어서 놓아주』

무엇을 잘못하고, 이 성화를 당하는지 자기도 모르지만, 덮어놓고 비는 것이다.

명례는 그제야 아까운듯이 물었던 고기를 놓았다. 재호 는 자기의 팔이 힘없이 자기 무릎 위에 털썩하고 떨어지 는것을 알았다.

─ 절처봉생이로다!요담 싸울때는 반드시 팔조심을 해야 겠다─ 진저리가 날것 같아 보고싶지도 않았지만 앓다가 일어난 친구 같이 궁금해서, 재호는 넌지시 자기 팔을 굽어 보았다. 아! 가엾어라, 상상한바와 다름 없이 뜯다가 둔 쇠같 비!

『질겨서 못먹고 있지? 쇠통 이개 잇자죽이야! 예─ 끼 이 미친개!』

분데로 했으면 당장 걷어차고 싶었다.

『개는 당신이 개지』

명례의 노리고 보는 눈추리가 피맛이나 좋이 본 맹수와 같았다.

『그럼 괭이야? 살쾡이지?』

『이 망할것아, 어쩌자고 사람을 이렇게 물어 뜯는거야, 고양이가 둔갑을 해서 세상것이 모두 쥐새끼로 보이거나, 식인종의 자손이 아닌 담에야 사람의 코기를 뜯을 까닭 있어?』

아내의 눈이 동그랗고 반짝반짝하며 아래턱이 빨고 좁은 것이 어떻게 보면 고양이와 방사한데가 없지않아 있었다.

벌어진 이 싸움판에 기념삼아 기어이 고양이란 별명이나 하나 지어주리라한 노릇이 말을 불쑥하고 생각 하니까 쥐 새끼는 갈데 없이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말았다.

─ 아뿔사, 쥐새끼란 말은 안할것을 했어, 저 눈치 빠르 고 입이 잰것이 가만 있을 이가 있나─ 재호는 자기 주먹으로 자기 무릎을 쿡 쥐어박았다. 아니 나 다를까,

『흐흥, 내가 고양이 되기는 어렵잖지만 쥐새끼될 당신 이 더 가엾겠소. 그렇게 겸손하실것 없이 개라구 해둡시 다!』

재호는 아내의 속사포처럼 내쏘는 말보다, 흐흥! 하고 비 웃는 콧소리가 더 자기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 날더러 개라구? 개 같이 생겼을까?

벽에 몸을 기대는체 하면서 마침 눈에 띠인 윗목 머릿장 문에 자기 얼굴을 멀찌기 비쳐보았다.

─ 딴은 저를 고양이라 하고보니, 나는 개 같기도 한데!

쉬엄만 났으면 털이 북슬북슬한 「쎄─ 라」라할까─ 피차에 욕을 주고 받고 하는 판이라, 과히 망발 안될것 같아서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명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개라니까 값나가는「테리아」로 알지 말어요. 당신은 거름 밭에서만 도는 시골개』

재호는 한대 얻어맞은 폭이다.

─ 이서라! 내 속을 빤히 들여다 보는 게다. 「테리아」

는 어떻게 알았누. 말로 싸우면 번번이 내가 밑져. 그렇다 고 직수긋이 말 않고 있으면, 점점 나만 병신구실을 할테구. 어쨌든 욕설은 된소리 안된소리 꼬리를 물고 나가아, 먼저 한말이 쓱싹해지고, 차차 본전도 찾게 되면 찾는것 이다.

『흥, 나를 거름밭에 도는 개라구?』

…너무 긴장한 탓인지 벌써 말머리에서부터 더듬어진다.

『…욕을 해도 근사한 형용으로 해야지 내가 어째 하필 거름밭에 도는 개야? 네 아범 좀 보지, 말소리까지, 수염 난것까지, 담배 좋아하는것까지, 염소 아니고 뭐─ 야. 또 자네 어멈은…』

『아─ 니 싸우면 싸우는 사람끼리 싸우고 욕설을 해도 싸우는 사람끼리 했지 애꿎은 부모는 왜 쳐들어. 아범 어 멈하니 당신네집 행낭살이를 했든가? 어쩌면 사내가 저렇 게 비열할까!』

(독자여! 주책 없는 이 내외 싸움은 귀를 막고, 눈으로 구경하라)

명례는 눈물이 글썽글썽 했다.

─ 친정이 못산다고 얕잡아 보는 수작이지. 걸핏하면 네 부모 네 집─

『그렇게 말하기로 든다면 당신 아버지는 뭔데. 부루도 꾸! 당신 어머니는 세파─ 드!』

『잘 논다!』

『뚱뚱하고 험상궂게 생긴이가 흑책질을 해서 쇠푼이나 모아가지고 내노라─ 하고 뽑내고 다니니까 명사나 된것 같지? 젊은 여자 후리기 일등이고, 손에 든것은 없어도 무슨회 회장, 무슨회 간사, 무슨회 평의원…암만 그래야 부루도꾸…』

『잘논다 잘놀아!』

『그런 소리는 듣기 싫지, 당신 어머니는 어떤가 좀 보 지, 셈 많고 오깃구러기가 돼서 며느리 들볶기와…』

『실컷 떠들어라, 네멋대로 떠들어라. 영산이야 지산이 야』

재호는 명례의 푸념을 듣다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긴 어딜 가요 남의 말은 안듣고』

명례는 재호의 옷을 잡아다렸다.

『이건 왜 붙들고 이래. 재담 듣다가 오줌 쌀까』

명레는 하는 수 없이 잡았던 옷을 놓았다. 남편이 홧김 에 무슨짓을 또 할지 몰라 실상 불안했던 까닭이다.

시계가 세시를 쳤다.

─ 아! 버릇 없는것, 폭로 전술을 막써─ 재호는 변소간에서 볼일을 다 보고도 잠시 그대로 머물 러 있었다.─ 캄캄한 속에 담뱃불만 반짝반짝 한다.

─ 싸우면 거저 싸왔지, 점잖게 욕설을 꺼낸 것이 잘못 이지. 에─ 참 고─ 약하다. 방으로 들어가면 또 지껄일테 니 어떻거나? 지금이 새로 세시,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 서, 언제 밥 먹고 언제 가고─ 재호는 방에 들어오는길로, 잠자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왜 당신 혼자 잠만 자면 제일이오』

명례는 얄밉다는듯이 머리까지 뒤집어쓴 재호의 이불 자 락을 걷어쳤다.

『화약이 다 없어져서 당분간 휴전이야!』

『어서 일어나요 좀!』

벌써 몇번째인지 모르나, 아내의 대꼬챙이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결에 또 들렸다.

─ 어쩐 등살을 이렇게 대나. 기어이 밤을 새우자는 작 정이지─ 재호는 밤중인줄만 알고, 눈을 떠보았다. 어느 겨를에 날 이 새었는지 이튿날 아침이었다.

시계를 안보더라도 들창너머 굴뚝에 해비친폼을 보아 꽤 늦은것을 알수 있었다. 노곤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요 이 부자리를 되는대로 뭉뚱거려 머릿상 위에 내던지고 마루 로 나갔다.

『물이 다 식었겠어요. 어서 세수하고 진지 잡수』

명례가 화로 위의 찌개 남비를 내려놓으면서 종알거렸다. 새초롬한 꼴이 아직도 화가 덜 풀린 모양이나, 간밤에 비하면 매우 연삭삭한 편이었다.

『남 잠도 못자개 극성을 떨더니, 오늘 또 늦었나부다』

재호는 군소리비슷이 응수를 했다.

『나때문에 늦었다는 말은 헛말이야 당신이 여느때는 두 시 세시 전에 들어온 일 있소!』

『동무들과 유쾌하게 놀다가 밤 새우는것과, 여편네한테 들볶기고 물어뜯기고 하다가 밤 새는것과 같을까!』

재호는 문득 생각난듯이 세숫물에 손을 넣기 전에 팔을 걷고 보았다. 밤새 자기도 모르게 하─ 얀 붕대가 감겨 있지 않은가?

─ 웬 붕대가 있었든가?─ 재호는 달포전 다리에 헌데가 나서 병원 신세진 일이 있 는데, 그때 매고 온 붕대가 아닐까 해서 꺼림직한 낯이었다. 명례는 벌써 눈치를 채었다.

『괜찮어요. 말갛게 빨아서 한시간 이상 삶은 것인데 소 독 안되었을리라구?』

─ 너무 알뜰한 것도 변이야─ 재호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렇댔지!』

무엇이 못마땅했든지 방에 들어간 명례가 또 한마디 내 쏜다.

『…당신은 내 일을 덜어주는것이 아니라 저질러 주는거 야』

들창문 미닫잇문을 활짝 열어놓고 풀썩 풀썩하는 꼴이 이불을 고쳐 개는 모양이었다.

『공 없는 소리한다!』

『공이고 뭐고 다 그만 두어요. 당신 하는 일은 열가지 중에 한가지도 사람의 일같잖으니까』

『사람보다 낫게 하는 일이라 그렇지』

『이죽거리지나 말어요. 당신은 입이 열이래도 쓸말을 못하는 사람이야』

『…………』

─ 예─ 라 참아라. 아침에 말다툼하면 온종일 재수가 없어!─ 재호는 얼굴에 두어번 물을 찍어 바르고 방으로 들어갔다. 매일 아침 하는 식으로 경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얼 굴을 가로 보고 세로 보고 하면서 물기를 수건으로 씻었다. 『구리뭇병이 어데 갔나?』

『한갑 사오구려, 남의것을 그만큼 발랐으면 염체도 좀 차려야지. 젊은 여편네가 있대야 꿈에라도 분 한병 사다 준 일 있소?』

이런 핀잔을 말없이 받고서 막 밥상을 대할 때 명례의 꾸지람이 또 나온다.

『남 앞에 나가는 사람은 몸이 정해야지 발 안씻은지가 벌써 몇 날이요. 그렇게 냄새를 피우고 다니니 남들이 오 죽 욕할까』

『어─ 참 방정맞은것 같으니!』

재호는 멀미가 나는듯이 밥을 두어 숟가락 냉큼 퍼먹고 양복을 갈아 입었다. 마루 끝에 나서서, 구둣주걱을 찾느 라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보니, 노란 편지 봉투가 하 나 들어 있었다.

『여기서 꺼내 보지 말고, 전찻속에서나 길에서 보셔 요』

명례가 펄쩍 뛰면서 주의를 시켰다. 재호는 ─ 무슨 같잖은 장난을 또 하누─ 골목 밖을 나와 정류장에서 뻐쓰를 기다리는 동안, 재호 는 호주머니에 든 노란 봉투를 꺼내어 속알맹이를 빼어 보았다.

농반지에 묵지를 대고 쓴 혼인신고와, 연필로 휘적거린 종이 한 장. 그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당신이 나 미워하는데, 낸들 살 재미가 있나요. 당신 민적 에서 나를 뽑아주고, 당신은 당신 마음대로 하셔요.

재호는 간밤에 물어뜯긴 원인을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다.

탈선지급(脫線至急)

편집

월급봉투 돌리기만 기다리고 조삿과(調査課)에 매인 다 섯사람도 잔뜩 마음들이 들떠가지고 있다. 보통때 같으면 일에 분주해서 간신히 담배 한모금 피울 여가 밖에 없던 군들이 일은 손에 안잡히고, 마침 과장도 없어서 제마다 한담을 늘어 놓기 시작한다.

『이달에는 몇푼이나 남을랴누!』

재호 맞은편에 앉은 뻐드렁니가 주판을 끌어다리면서 한 탄을 하였다.

『참 못살겠는데, 못살어』

과(課)중에서 제일 애물애물하고 옷모양 내는 친구가 톡 나섰다.

『말 말게, 난 이달에 병원에 갔다 바칠 세금이 자그마 치 삼십원이야』

키는 제일 커도, 제일 마르고 폣병이 들었는지 오이 (瓜))처럼 척주가 휘어 구부정한 친구가 고개를 외로 꼬 고 우는 상을 하였다.

『자네는 밥대신 약을 먹고 사니까 괜찮지 않은가? 나는 애녀석 중학교 입학시키기에 굶어 죽게 됐네』

열여섯에 장가 들어 아이가 벌써 여섯이나 된다는 차푸 린 수염난 늙은 친구가 땅이 꺼져라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약만 먹고 살수 있다면 걱정 안하겠네. 약이 내리지 않어 소화제까지 겸쳐 먹는것은 어떻거구』

『그러지들 말고, 월급봉투 나오거든 금계란 먹듯 입에 탁 털어놓고 죽어버려라』

이번에는 내차례란듯이, 재호가 입을 열었다. 악담 같으 나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푸념이다.

모두들 서글픈 웃음을 한바탕 껄껄대었다.

『오늘은 어째 점심 생각이 안난다!』

『한달내 기껏 먹구 오늘 하루 규모부리면 별수 있나.

있다가 두눈자위가 푹 들어가지 않을랴거든 지금 먹어두 게』

『오늘 식욕부진은 돈독이 오른 초깃증상이야. 감기 걸 리면, 맨먼저 재채기가 나지 않든가』

『돈독도 연독만콤이나 무서운가?』

『암.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는것이 아니라 두눈이 내 솟 고, 패가 마르고 오장륙부가 녹고, 하는 병일세』

『꽤 추접스런 병이로군! 자네도 더러 걸려본 모양이 지?』

『만성이 되고 고질이 됐는데, 두말할것 있나』

한참동안 너나 할 것 없이 객담으로 판을 켰다.

『오늘은 한잔 해야지』

뻐드렁니가 제의를 했다.

『살인경기를 막 내뿜는구나!』

재호는 예산이 서지를 않아서 침만 꿀꺽 삼켰다.

『별수 있나. 정 할수 없으면 차라도 한잔 해야지』

『공영히들 바람나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가지, 여편네한 테 특별봉사 받는것이 더 낫지 않을까?』

나잇값을 하는셈인지 차푸린수염이 의견을 첨부했다.

『애라가 빠─ 를 냈데그려. 황금정에다』

옷모양내는 친구가 문득 생각 난듯이 공를 했다.

경쟁이나 하듯이 일제히「어디?」하고 입을 열었다. 이 때 애라는 반드시 귀가 가려웠으리라!

애라는 한동안 성악가로, 영화배우로 서울의 웬만한 남 성들은 다 아는 이름, 나중에 카페로 미끄러져서, 잠시 여 급으로 있을 때 이 회사측들과도 다소 지면이 된 여자였 다.─ 방금 애라의 일신에 관한 끄싶이 이자리에 꽃이 피 고 말았다.

재호는 애라와 접근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안나, 스 텐』비슷한 미인으로 재호가 여자의미를 논할때 반드시 한번은 머릿속에 멈쳤다가 지나가는 여자였다. 재호는 또 다시 머리에 그리고 있다.

『박선생 손님 오셨어요』

급사애가 사무실 문을 반쯤 열고 불렀다.

『나?』

키다리가 한참 말참례 하기에 바쁘다가 돌아보며, 자기 코를 가리켰다.

『아니요, 저 박선생님 말이에요』

『나말이냐, 이녀석 빚쟁이를 잘못 본게로구나』

『여자 손님인데요』

급사는 빙그레 웃었다.

『여자 손님?』

재호는 이상하다고 싶으면서도, 좌중에서 가장 행복스런 사내인것처럼 의자에서 일어났다.

『야─ 』

하고 친구들의 부러운듯이 조롱하는 소리는 들은체 만체 애라와 비슷한 여성을 그리면서 층계를 내려갔다.

─ 어떤 여자일까?─ 재호는 문간까지 나와서 급사가『저기 계서요』

하고 손가락질하는 쪽을 바라보자 마자 두다리가 땅에 착 붙고 말았다.

회사 문 어구 한 구석에 약간 청초하게 차린 명례까 책 보같은것을 접어 껴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왜 왔어?』

재호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다지 반갑잖은듯이 눈살을 찌 푸렸다.

『난 이런데 못올 사람이요?』

명례는 주위를 살피면서 조심성있게 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무슨 일로 왔느냐 말이야……급한 일이 생겼 어?』

왜 왔어! 소리는 불쑥 해놓고도 아내가 섭섭히 생각할까 하여, 변명비슷이 묻는 것이었다.

『아─ 니』

『그럼?』

『받은 것 이리 내놓으셔요』

명례는 남편의 옆으로 한걸음 다가서면서, 남의 눈을 기 듯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월급?』

재호는 명례의 빨간 손바닥을 굽어보았다.

─ 그렇댔지─ ─ 알면서 무얼 그래요─ 말은 없어도 두 사람의 표정이 주고 받고했다.

『아직 안나왔어』

『뭘?』

명례의 손끝이 옆구리를 꾹 찔렀다.

『정말이야.……나오면 어련히 가지고 갈까……여기는 왜 찾아 왔어』

창피하다는듯이 아주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몇시면 나와요?』

『세시나 돼야……』

한시간은 에누리했다.

『나 나올적이 한시니까 넉넉잡구 한시간 반만 기다리면 되겠군요』

명례는 넉장을 부려가며 기다릴 눈치였다.

『어디서 기다린다는거야? 사람들 드나는데서, 창피하 게!』

『내가 왜, 이회사에 동냥질을 하려왔나요 창피하게…체 면 있는 여자가 설마 문간에서 기다릴라구. 걱정 말아요.

저 길건너. 전봇대 옆에 가 서있을테니』

『그러지 말고 집에 가서 기다려. 이층에서 친구들이 내 다보면 피차에 망신스럽잖어?』

『망신은 무슨 망신 여편네가 남편 찾아다니는 것이 못 할짓인가. 그렇겠지요, 여편네라도 워낙 못생기고 주제가 사나우니까』

삑죽했다. 머리는 틀었을 망정, 긴치마에 고무신을 신었 고, 햇볕을 못보아 노랑 꽃이 핀 얼굴에 크림을 바르고, 가루분만 두어번 투닥투닥 했은즉, 귤병에 백설탕 뿌린격 이지 옷맵시가 매끈하고, 걸음걸이 본대있고 얼굴에 화색 이 도는, 길가는 여성에 비하면 같은 신여성일지라도 학 과 왜가리의 차이가 있을게다. 명례는 자기자신을 모르는 바가 아닌지라, 자격지심이 슬며시 든것이다.

『그러지 말고 어서 가있어, 나도 일하다 나왔으니 바쁘 고, 이렇게 장황하게 얘기할 자리도 못되니까』

재호는 사정하듯이 달랬다. 두어걸음 뒤로 물러서서 어 름어름하는 꼴이 여차직하면 안으로 들어갈 준비였다.

『도모지 마음이 안놓이는걸 어떻게 해!』

『걱정 말고 가있어. 어서』

재호는 벌써 층계 난간을 한손으로 쥐고 섰다.

『그럼 몇시에 나오시겠어요』

명례는 하는 수 없이 놓아 줄 생각이었다.

『늦어도 다섯시 안으로 가지』

재호는 뒤가 급한 사람처럼 층계에 한발은 얹어놓고 쩔 쩔매었다.

『그럼 일찍 오서요. 볼일이 있더라도 면저 집에 다녔다 나가서요』

재호는 연상 『그래그래』하면서 층계를 종종걸음쳐 올 라갔다.

─ 어─ 참 방정맞다. 어쩌자고 회사엘 찾아 오는거야─ 빚쟁이 만난것보다 더 난처할 고비를 넘기고나니, 등에 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명례는 회사 문턱을 나설때 서운 하였다. 남편의 회사를 처음 보는건 아니지만 문턱 안에 들어서 보기는 오늘이 처음, 건물이 큰데다가 사내들만 왔다갔다하여 낯설은 천 지 같아서 어릿어릿했었다. 무뚝뚝한 남편이나마 거기서 만나고보니 반가왔지만, 몇마디 주고 받다가 발길을 돌리 려니까, 정거장에서 전송이나 하고 돌아오는 것 같이 까 닭 모를 감상적 기분이 가슴에 차올랐다.

전차를 탈까 하다가 걷기 시작했다. 종로통에서 안국동 가는 길로 들어서서 전동장(典洞公設市場) 옆을 지나게 되었다.

─ 조기가 벌써 났구나─ 조기를 도미로 알고 먹는 남편의 식성을 명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수중에 든 돈이 없어서 흥정해볼 엄두도 못 내고 전찻삯 오전으로 쑥갓 한단만 사서 신문지에 싸가지 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명례가 다녀가자마자 이어 월급이 나왔다. 조금만 일찍 나왔던들 재호는 송두리째 아내에게 바치고 말았을 것이다. 재호는 받아쥔 노오란 하도릉 봉투 속에서 발기 적은 표 를 꺼내 보았다.

삼월분 봉급 육십원 차인금 내역 지점장 송별회비 오원 미곡대 십사원 이십전 양복 월부 십오원 시계 월부 삼원 공제회비 육십전 총차인잔액 이십이원 이십전 보나 안보나 뻔한 노릇에 보아야 속시원할 것도 없다.

일분전에는 희망의 월급봉투, 일분후에 실망의 봉투다.

받기 전까지는 터무니 없는 요행에 실낱 같은 희망을 붙 여볼수 있었다.─ 우선 생각 중에도 고약한 생각이 회계 에서 돈을 잘못 세어 십원 한장이라도 더 껴올까 정리가 미쳐 못되어서 이달 물을 양복 월부가 내달로 넘어갈수도 있는것 하다못해 시계포외교원이 회계하는 날이야 말고, 병이 나서 못받으러 오게 되면, 단돈 삼원이라도 제해지 지 않고 배길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것이 절망이었다.

─ 나이 삼십 여세에 아직도 속 못차리는 박재호군이여 ─ 자기를 비웃는 소리가 자기 귀에 들리는것 같았다.

『이런 제에기!』

재호는 상고에 기각당한 형사 피고인처럼 멍하니 앉아서 동료들의 표정만 살피고 있었다.

제일 가엾기는 병구러기인 키다리, 냉면에 중독된 사람 처럼 얼굴 빛이 말 아니었다.

『한달내 벌어서 병을 먹여 살리는 셈이니』

입에 침이 말랐는지 다음 말을 못맺었다.

차푸린수염은 빈 봉투만 나왔는지 세상일을 달관한 사람 처럼 태연하게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뻐드렁니는 양복 월부가 지난 달에 끝이 나서, 돈푼 여 유나 있는 모양이었다. 양복 멋부리는 친구는 별로 제한 것이 없는지 돈을 사타구니에 넣고 세고 있었다.

어느틈에 돈내를 맡고, 사무실 문어귀에는 음식점?약방?

양화점, ……집금원들이 호각 소리를 기다리는 럭비─ 선 수들처럼 잔뜩 대기하고 있었다.

『점심 값이 또 있지!』

재호는 깜빡 잊었다. 이십원 좀 남은데서 십원 한장 또 헐을 일을 생각하니 입맛이 쓰다 못해 저렸다.

─ 옳지 또 약값!─ 십원짜리를 내던지고, 잔돈을 거슬러 받는데 차푸린수염 이 또 나섰다.

『나도 채권잘세, 그저께 일원 내게』

『허─ 참 큰 성환데!』

이원 남은데서 오십전짜리 두개가 또 달아났다.

재호는 남은 돈 일원을 창 갈은 값으로 구두장이에게 선 선히 주어버리고 남은 이십전은 다음달로 미뤘다.

『인제는 다 됐겠다!』

겨우 숨을 돌리고 담배 한개를 막 피어 무는 판인데, 양 복장이 하나가 나섰다. 성냥을 긋다가 보니, 병원 약제사 가 빙긋 웃고 서있다.

재호는 가슴은 또 덜컥했다.

『오원이든가요?』

『네!』

『내가 일간 또 병이 날것 같은데, 그때 또 신세 끼쳐야 되겠고 하니 우리 내달에 한몫 회계하기로 합시다』

『………』

『봉투를 털어 보이면 아시겠지만 세월이 너무 좋아서 일전의 재고품(在庫品)도 없습니다. 애호해주시는 고객에 게 미안함이 이를데 없습니다만 하는수 있습니까, 다음 입하(入荷)시에 우선적으로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호주머니에 십원 한장이 남아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 것마저 부스러뜨리는 날에 가엾은 명례에게 볼낯도 없거 니와, 한달 지낼 일이 큰 일이다.

『자─ 어서 가십시오』

재호는 울듯, 웃을 듯, 애원하듯 열두가지 표정을 다 하 면서, 약제사의 등을 밀었다. 우연한 시험이지만 주효 백 퍼─ 센트, 무던한 약제사는 입학시험에 떨어나진듯이 초 연히 사라졌다.

오후 다섯시. 오늘 하루만 무사히 넘기고 내일이면 천하 없는 빚장이라도 서리맞은 뱀이 된다.

회삿 사람들은 한증하고 난것처럼 부산하게 거리로 흩어 졌다. 봉투에 남은 알뜰한 돈들이 서울 안에 퍼질 시각도 머지 않았다.

『맥주나 두어병 먹고 가세』

돈이 약인지, 뻐드렁니가 기운이 났다.

『그만 가세』

재호는 마음이 불안했다.

『조끔만 먹어』

먼저 말낸 사람이 돈 치르는것은 술 먹는 사회의 불문론 이라 재호는 마지 못해서 따라섰다.

『어디로 갈까?』

두 사람은 안전지대에 서서 망설거렸다.

밤이 열시면 『무─ 랑』도 봄을 맞는다.

『무─ 랑』(風車)은 애라가 경영하는 자그마한 빠─ 규 중에 파묻힌 색시처럼 황금정 큰길거리에서 뚝떨어져 좁 은 골목 안에 안윽히 박혀 있는 반양식 건물이다. 동네 이름만 황금정이지, 다옥정으로 알기 쉽고 골목 어귀에 해세운 파─ 란 네온싸인 『무─ 랑』세글자가 안내를 안 한다면, 낮설은 손님은 무심히 지나치고 말게다. 왁살스 런 장식도 없이 벽은 엷은 주황색, 은은한 조명, 테이블, 앉을 자리 모두가 새뜻하다.

포─ 타불에서 『트로토』한곡이 끝나고 『왈쓰』의 고 운 소리가 냇물처럼 잔잔히 흐를때다.

재호와 뻐드렁니는 벌써 다섯병째 되는 맥줏병을 기울이 고 있었다.

『자 드세』

『취했어, 더 못하겠는걸』

재호는 사양했다.

『뭘 그래, 자네 주량 가지고』

뻐드렁니는 굳이 권한다. 술자리의 선심은 이런때 알수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무─ 랑』에 오기전 다른 몇군데서 대강 요 기는 했다. 요기래야 저녁 요기가 아니요, 술요기. 호주머 니 예산을 차리느라고 값 싼데서 웬만큼 취하고 『무─ 랑』에서는 입가심만 하기로 한것이다.

『다른데로 가세』

재호는 아직도 주홍이 안난 모양이었었다.

『애라가 없어 그렇지? 가만있게 목욕을 갔다니까 조금 있으면 올테지』

『그까짓 애라는 무슨일이 있어, 내 애인인가 뭔가?』

술 먹는 사람마다 한가지 버릇은 다 있듯이, 재호는 술 붓는 여성이 옆에 없으면, 술맛이 안나고 흥이 안나고 하 는 성미였다. 애라가 자기 말과 같이 은근한 새도 아니요, 동무도 아니요, 누이도 아니지만, 일부러 『무─ 랑』을 찾아 올때는 애라의 웃음이 보고싶고, 애라의 목소리가 듣고싶고 애라의 부어주는 술이 먹고싶었던 것이다. 그러 나 운수가 빗나느라고, 애라는 못보고 애꿎이 값비싼 술 만 해냈던 것이다.

『그만 가세. 다른데 가서 내가 내지』

재호가 먼저 일어섰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니까?』

『기다렸다 보면 뭘해』

눈 가리고 야웅하는 수작이나, 말만은 점잖았다.

『그럼, 그만 담배나 한개 피우고 가세』

뻐드렁니는 못이기는체 하고 급사애를 불러 셈을 치렀다. 주인집 장 떨어지자 나그네 국 맛 난다는 격으로 예 산이 넘어, 벌써 십원 하나를 깨뜨려 먹은 판이라, 사실 더 권할 용기도 나지를 않았었다.

─ 나할 도리는 다 했지만 이번에는 네 혜택을 좀 입어 보자!─ 처음부터 계획한 노릇은 아니나, 이 집을 나서면, 재호가 다른데 가서 내겠다고 선언했고, 또 여지껏 흥 없이 먹은 것이 헛돈 들인것만 같아서, 다른 곳에서 감흥을 진작(振 作)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호가 안내게 되면, 남 의 다리만 긁고 마는 것이지만,

『일어날까?』

『일어나세!』

두 사람은 일어섰다. 급사가 고객의 고충(苦衷)도 모르고 애교를 떨었다.

『두분 선생님 안녕히 갑쇼, 또 오세요, 감사합니다』

『고놈 수다도 스럽다』

재호는 급사의 머리를 두어번 뒤흔들어 놓고 뻐드렁니와

『무─ 랑』을 나섰다.

『조용하긴 하지?』

뻐드렁니의『무─ 랑』평이다.

『신부 없는 혼인 잔치를 했으니, 쑥스럽잖은가』

재호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넉넉ㅎ지 못한 군들이 술을 먹자면, 그런걸세』

『가만있자, 어델 갈까?』

재호는 오늘 뻐드렁니의 신세를 너무 져서 미안히 생각 했다.

얼큰한 김이라, 마음 가는대로만 한다면 호주머니 속에 위하고 모시어둔 십원 한장을 털고, 시계를 잡히고 해서 라도 속시원히 한번 놀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를 까맣게 기다리고 있는 명례가 머릿 속에 떠오른다.

─ 바가지를 긁고 대들때는 원수 같아도, 이런때 생각하 면 얼마나 가엾은가?─

『돈도 몇푼 없네. 꼭 두어병만 먹고 가세』

재호는 뻐드렁니의 팔을 끼고 걸었다.

골목을 막 나서니, 네거리 쪽으로 무심히 방향을 고치려 할때, 멀쓱한 양장 하나가 마주쳤다.

『여! 애라!』

뻐드렁니가 눈은 밝았다.

『아이구 이선생님 얼마만이서요!』

애라는 뻐드렁니에게 반갑다는 선물토담스런 미소를 돌 려보내고나서 재호에게는 실수 없을 정도로 흘끗 시선만 보내고 만다.

재호는 존재를 무시당한것 같아서 약간 서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애라의 입장을 모르는바도 아니다.─ 쇠똥에 파리 끓듯 서울안 카페─ 며 빠─ 에 뒤끓는 사내들로 애 라 모를 군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애라가 그사 람 전부를 다 기억할수는 없을 것이다. 보면 얼굴은 알지 만, 누구라고 비어지게 알아낼수 없고, 설사 친히 안다 치 더라도, 저편에서 먼저 아는체 해주기 전에는, 이편은 모 르는체 하는 것이 도리어 점잖은 인사가 되는것이다.

『그래 재미 좋았소?』

인사가 미진했든지, 뻐드렁니가 또 말을 붙였다.

『재미가 좋길래, 이렇게 살아있지요』

어떻게 들으면 의미 심장하기도 하였다. ─ 말은 듣기 탓이라.

『물론 그럴테지』

『저─ 내가 이골목 안에 빠─ 하나를 냈지요. 『무─ 랑』이라구─ 앞으로 자주 놀러 와 주세요. 선전도 많이 해주시고……』

『오─ 라 저기 저집인게로군!』

뻐드렁니는 잇값을 하느라고 아주 내숭스러웠다.

『네, 바로 저거에요. 한번 꼭 오세요』

애라는 이제 자기 할말은 다 했고, 긴 인사는 사절한다 는듯이 골목 안으로 배뚝거리며 들어가 버렸다.

『여전히 괜찮은데』

뻐드렁니는 구미가 동한듯이 재호의 옆으로 다가선다.

『여자란 남자가 못가진 복 한가지를 타고 나서, 지금 말 몇마디 하는 동안에 벌써 우리 모가지에 올가미를 씌 워놓고 가니……』

『다른데 그만두고, 우리 또 들어가세』

『금방 나와서 금방 들어가기는 창피한데!』

『상관 있나, 술 먹는 사람이 그렇지…』

재호가 마음이 솔곳한 눈치를 알고 뻐드렁니는 연해 충 동이질이다.

『무─ 랑』을 나선지 십분이 다 못가서 두 사람은 또다 시 『무─ 랑』에 나타났다.

제돈 주고 술 먹는데 누가 달려들 사람은 없겠지만, 애 라가 들어온 뒤끝이라, 아까부터 와 앉아 있는, 대머리 벗 겨진 중년 신사 일행이 자기들을 비웃는것 같아서 문에 들어설때, 좀 체면적었다. 더구나 급사애놈이 빙글빙글하 는것이 자기네 속을 뚫고 들여다보는것 같았다.

『이녀석 웃기는 왜 웃어』

재호는 주정비슷이 농으로 꾸짖고 나서 자리를 잡았다.

『아이참 선생님두, 웃지도 못하란 말씀얘요』

급사는 머리를 또 쥐어흔들릴까하여 몸을 피하면서 테이 블을 행주로 훔쳤다.

『애라 어디 갔니?』

애라가 안 보이니까 뻐드렁니는 궁금했다.

『곧 나오세요』

『맥주 가져와』

『네─ 』급사는 돈낼 사람이 아까와 바뀐 것을 알고, 물주인 재호에게 한층 더 경의를 표하는것 같았다.

─ 십원을 여기서 털어 먹어? 안되지 안돼, 기왕 부르터 난 김이니, 최대 한도로 삼원어치만 먹고 일어설 밖에 없다. 가만 있자, 오오는 이십에오. 다섯병에다, 쓰끼다시 이인분에 사십전, 십전 남는걸로는 담배 한갑. 꼭 들어맞 는구나! 뽀─ 이놈에게 팁은? 안주어도 좋지만, 마음 내 키면 요 다음번에 줄 요량하고…』

주먹구구로 예산은 빈틈 없이 짜 놓았다.

이윽고 애라가 나왔다.

『어서 오세요』

내키─ 한 코티─ 향기를 피우면서 둘이 있는데로 앉았다. 은은한 전깃불 밑에 있는 그얼굴은 거리에서 볼쩍보 다 더 깨끗하고 예뻤다.

『이손님 몰라?』

뻐드렁니가 소개하는듯이 물었다.

『이어른도 전에 많이 뵌듯한데 성함이 누구시든지?』

애라는 고개를 돌려, 그 서늘한 눈으로 재호의 얼굴을 간지럽게 뜯어보았다.

『그때 그 카페─ 있을 때 우리와 늘 놀러 가던패 아니 야?』

『옳지 생각 나는군! 김선생님시든가?』

『흥!』

재호는 코웃음을 쳤다.

『자네 김가로 있다가 언제 부터 박가로 행사하나』

뻐드렁니가 놀려댔다.

『아이참, 박선생님이시지, 인젠 잘 알았어 미안합니다.

호호호호!』

아주 간드러진 사죄였다.

『자네는 이뻐드러진것이 특색이라 애라씨에게 깊은 인 상을 준 모양인데, 나도 코끼리처럼 어금니가 내 솟았던 들 자네만큼 행운아가 됐을걸……아─ 아!』

재호의 응수에 애라, 뻐드렁니 할것없이 모두 웃었다.

촌에서 머슴들이 먹을 통보리 밥을 담듯이─ 애라가 흰 거품 아울러 수북수북히 부은 맥주컵을 들었다.

뻐드렁니는 재돈 안내는 것이라, 의기를 진작할셈 잡고, 단숨에 들이켰거니와, 재호는 애라에게 돌리려고 잔을 씻 은듯이 비웠다.

『자─ 한잔 하시우』

『아이 난 못해요』

『못할게 어디 있어!… 오늘은 좀 유쾌하게 놀다가게 해 주』

재호는 굳이 안받겠다는 애라에게 자기 손으로 한잔 부 어 바쳤다.

『난 정말 그렇게 못해요. 반만 먹다가 남길테니 잡수시 겠어요!』

애라는 마지못해 받아든 유리컵을 붉은 입술에 갔다대면 서 따졌다.

『정 못한다면, 반은 내가 먹지』

재호는 애라가 입술만 축이고 낸 잔을 광영으로 알고 냉 큼 마시었다. 애라는 병을 들어 뻐드렁니의 잔을 채우고 나서 재호의 잔에도 칠홉이나 붓다가 말았다.

『오까와리!』(또한병) 애라가 빠─ 텐 저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시작이 반이라고 맥주 한병이 눈 깜작갈 사이에 간곳이 없어졌다.

─ 벌써 오십전 해먹었지! 이렇게 템포가 빠르면 나머지 네병은 십분이 못걸리렸다!─ 재호는 담배 한 개를 피어 물었다.─ 십분을 한시간으로 연장시킬 작정이었다.

그러나 새술이 들어오자, 뻐드렁니는 자기 앞에 있는 묵 은 잔을 비우고 재호에게 돌린다.

『자 받게』

재호는 권하는 잔을 안받을 도리가 없었다. 애라는 기다 리고 있다가, 새 맥주로 그뜩 채워놓았다.

재호는 가쁜듯이 반쯤 먹고 내려 놓았다.

─ 전작이 있어 취했다는 핑계를 대었으면 좋기는 좋겠 으나, 남을 대접하는 처지에 있어서는 못할 소리, 단 몇병 만 먹고말 술이라도 기왕 생색을 낼바에는 인색한 꼴을 보여서는 못쓰는 것이야! 못먹는 술이라도 친구를 위해서 먹는체 해야지─

『사실 내가 맥주를 맛으로 먹기는 해도, 너무 벅차서 탈이야. 이튿날은 꼭 욕을 보네그려』

이만하면 좋은 핑계다 싶었다.

『그럼 양주를 잡수시지요. 위스키─ 나 압산 같은거 좋 지 않어요. 먹고나면 뒤가 거뜬해서』

애라가 좋은 의견이나 낸듯이 상그레 웃었다. 재호는 가 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어이구 그건 너무 독해. 가뜩이나 술 먹으면 하혈하는 사람이……』

『그래두, 서너잔쯤이야?』

뻐드렁니가 애라의 의견을 존중 하려들었다.

『아니아니』

─ 저녀석이 누구를 죽일라구 저럴까─ 하고 손을 설레 설레 내둘렀다. 애라가 보기에 저손님은 양주를 쇠통 즐 기지 않는분처럼.

『그럼 우리는 그대로 맥주를 먹고, 애라는 맥주 대신 양주를 먹지』

뻐드렁니가 큰 발견이나 한것처럼 날뛰었다

『괜찮어요』

애라는 사양했다.

『아니야. 우리만 먹고 혼자 가만있으면 됐어』

『암 해야지』

재호는 인사의 말로 한마디 했건만, 이 말이 자기의 어 디서 나왔는지를 몰났다.

『위스키─ ? 뿌란데?』

뻐드렁니는 연해 뛴다.

『난 정말 괜찮아요』

『사양 말고. 위스키─ 를 하지』

『………』

『말 없으면 오─ 케야. 얘─ 위이스키─ 한잔 가져와』

뻐드렁니가 기어이 일을 저질러 놓고 말았다.

─ 한잔만 할 이 없고, 어물어물하면 석잔은 달아날것이라. 한잔에 적어도 오십전은 받을터이니 일원오십전…일 은 벌어졌다.

재호는 입에 침이 없었다.

─ 기왕 선불을 맞었으니 버티기나 하자─

『양주 좋아하는줄 알았더면 진작 시킬걸 그랬지!』

히짜는 부렸지만, 백설기를 씹지않고 넘기는 것처럼 말 이 목에 메었다.

『이사람아, 내가 준 잔은 놓고만 보긴가?』

뻐드렁니는 자기 차례가 급했다.

재호는 반잔 남은 맥주를 마저 켜고 잔을 보냈다. 애라 가 그잔에 또 부었다.

뻐드렁니가 먹고난 잔에 또한번만 부으면 또, 『오끼와 리─ 』.

『어─ 벅차』

삼원 예산은 벌써 싹이 틀렸으나, 재호는 이런중에라도 되도록 규모를 부릴 작정이었다.

『그럼 우리 한잔으로 돌려볼가』

뻐드렁니의 의견이 실없이 괜찮았다.

『그래 그거 됐네』

재호는 방금 먹은 자기 잔을 한옆에 엎어 놓고, 뻐드렁 니의 잔에 술을 따랐다.

뻐드렁니는 돌림잔인만큼 얼른 마시어버리고 재호에게로 되돌렸다.

『이사람아 숨을 돌려가며 먹자는데, 더 빨리 먹게되니 웬일인가?』

『차례는 어서 돌려야지, 우선 받아나 놓고 천천히 먹게 그려』

뻐드렁니가 손수 술을 친다.

68P~69P 누락

번 크게 먹고보니, 뒷일은 걱정도 안되었다.

『자─ 일제히!』

『푸로짓!』

뻐드렁니는 입이 한뺨이나 벌어져, 편도선자리가 보일듯 하였다.

『우리는 불우한 청년들이다. 우리들의 행복은 찰나마다 이 식탁에서 구할수 밖에 없는가?』

재호는 유쾌하게 술이 취하면 순회극단 배우처럼 대사 (台詞)의 쪼를 뽑는 버릇이 있었다.─ 말문이 터졌다.

『나는 자네를 볼 때, 자네 잇발을 보면 생각나네. 자네 가 말로 대나서 경마장으로 돌아먹는다면, 신세가 저지경 은 안됐을것이야』

『옳은 말이야!』

뻐드렁니는 자기의 고단한 신세를 생각하고, 재호의 악 담을 사주장이의 풀이처럼 구수하게 듣는다. 애라는 위스 키─ 잔을 들다가, 웃음 때문에 사래가 들려 캑캑거렸다.

『또! 어떤 사람은 나를 세파─ 드 같다고 하데만……』

재호는 명례와 싸우던 일을 생각하고 잠시 말을 멈췄다.

아내가 지은 별명인것을 내세울 형편이 못되었다.

재호는 침을 삼키고 다시 말을 잇는다.

『차라리 세파─ 드로 태났던들 이지경은 안됐을거야, 개중에 모던뽀─ 어는 세파─ 드 날씬한 키에다, 몸에 착 붙게 해입은 스코취 같은 털, 눈이 부리부리한 폼이 좀 영리하고 매서운가, 가는데마다 대 인길세그려. 체조나 배워 높은데 뛰어넘기와 땅바닥에 기는 법만 배우면 몸값 이 몇천원 나가니, 지금 내팔자 같겠나? 삼복에 개장국 끓이는 집에서도 세파─ 드만은 아까워서 못잡는 모양이 니, 몽둥이를 맞고 늘어질 이 없고, 신수가 빗나서 횡사를 하게 된다면, 전차 자동차에 치일지 모르나, 나는 아직껏 세파─ 드가 차에 치이어 죽었다는 소문을 못들어봤네.

원체 민첩하니까…아침 저녁 두끼는 양식으로 놉시느라고 우유에다 육회 한접시, 점심은 당분이 적은 비스케트런 쵼, 몸에 서캐 끓지 말라고 약탕에 목욕을 해, 병나면 병 원에 입원을 해, 봄이 되니 춘추복 걱정을 하겠나, 쌀이 떨어지니 외상 얻을 걱정을 하겠나, 돈쓸 일도 없지만, 빚 질 일도 없고……』

『얘! 얘! 궁상 그만 떨어라』

뻐드렁니는 재호의 「월급장이 넋두리」를 중간에서 가 로 막아버렸다.

『난 무엇으로 태어 났더면 좋을번 했어요?』

애라가 웃음을 틀어막느라고 한참동안 코와 입에 눌렀던 나프킨을 떼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재호는 미쳐 생각할 시간 여유가 없었다.

─ 여우? 고양이? 수달피? 옥토끼? 청개고리?─ 참아 그런것을 끌어다 붙일수 없었다. 아무리 속너그러 운 여자일지라도 별명이 나오면 삐쭉하는것이 상례니까.

『에…영원의 처녀가 되었더면 좋을번했어』

『아이참 너절한데, 영원의 처녀가 무어야』

P72~P73 누락

데라고도 할수 있고, 좋은데라면 좋은데라고도 할수 있 고…난 천사도 아니요 악마도 아니에요』

『하하하……』

재호는 웃으면서 속으로 ─ 똑똑해─ 하였다.

『그만 가세』

뻐드렁니는 외떨어져서 쓸쓸한 모양이다. 취하기도 했겠 지만, 속이 거북해 못견디겠다는듯이, 테이블에 턱을 괼 듯이 하고 있다.

『가세』

『가시겠어요』

『꽤 늦었서』

제호는 애라의 손을 비로소 쥐어 보았다. 오늘밤 소득은 이것뿐이었다.

애라가 가져온 셈쪼.

삐─ 루 十一 五, 五0 쓰끼다시 四 八0 위스키─ 三 一, 五0 치─ 쓰 一 六0 피죤 二 二0 합계 八, 六0

『또 오서요』

재호와 뻐드렁니는 애라의 인사를 머리로 꾸뻑 받고

『무─ 랑』을 나섰다.

딱다기 (夜警)가 옆구리에 깜박깜박하는 불을 달고 지나 갔다. 가뜩이나 호젓한 골목이 공동묘지 길처럼 쓸쓸하였다. 『몇시나 됐나』

『두시 지났어』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골목을 나섰다. 『무─ 랑』에서 뒤떠들던 재호는 밖에 나와서는 입을 다물고 걸음걸이조 자 엄숙하였다.

『꽤 잘놀지? 괜찮은 계집이야!』

뻐드렁니가 애라의 이야기를 꺼냈다. 재호는 말 없이 고 개만 끄덕 하였다.

『술도 먹을때뿐이지, 먹고나면 이렇게 허무해!』

재호는 또 고개만 끄떡 했다. 뒤가 든든해야 한잔을 먹 더라도 유쾌하지, 우리처럼 이렇게 구차한 주머니를 가지 고서야, 언제든지 살풍경이야 술이 깼는지, 말씨가 침울했다.

『달리 사는 방법이 없을까』

『글쎄말이야』

『택시나 불러 타고 가세』

어슬렁어슬렁 종로까지 걷다가 뻐드렁니가 큰 마음을 썼다. 재호는 큰 길에서 자동차를 버리고, 골목으로 들어서서 걸었다.

─ 오늘밤에 날리가 또 날테지─ 목전에 닥친 불안이 더 컸었다.

─ 통장가게 문이 닫혔으니, 과실도 못사겠고─ 지갑 속에는 한푼도 없었다.

─ 대문은 걸어 잠겄을 테고, 뛰어넘지─ 결심이 대단했다.

一○

편집

아니나 다를까. 여느때 같으면 지쳐만 두었을 대문이 꽉 닫혀 있다. 설렁 빗장을 질렀더라도, 밖에서 빗장에 달린 삼노끈만 잡아다리면 열리는수가 있는데, 그나마 싹 거둬 들였다.

─ 이야말로 금성철벽이로구나. 흔든대야 안열어줄테고 ─ 재호는 한걸음 물러서서 대세를 관망하였다.

대문으로는 손가락하나 들어밀 틈이 없다. 두테는 세푼 이나 되고, 높이가 여섯자 남짓한 검은 판자도, 오늘밤 보 기에는 해발 육천척 이상이다. 터진데라고는 위에 광막한 하늘이 있고(유난스럽게 별이 빤짝거린다) 아래로는 수챗 구멍이 있을뿐, 이 구멍은 하수와 쥐의 통용문으로 벌써 부터 지정되어 있는것이다.

─ 넘어가?─ 재호는 육체와 영혼이 따로 떨어져 있는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 별수 없어. 나폴레온은 앨프스를 넘었다지─ 쓰레기통 위에 한발을 딛고, 전후 좌우를 살핀 다음에 선뜻 올라섰다. 올라서보니 반중턱은 오른셈.

─ 이런때 순사를 만나?─ 재호의 영명(令名)은 이 절벽에서 굴어 떨어지고 마는판 이다.

재호는 진땀을 흘리면서 얼른 판장 위로 뛰어올라, 두어 번 배 밀이를 하면서 두발을 안으로 뻗었다. 그리고는

『익』소리를 치면서 뛰어내렸다.

털썩!

컨디션이 나뻤든지, 고도(高度) 를 잘못 맞췄든지, 떨어 지자 엉덩방아를 찧었던것이다.

『누구요』

안방 문이 와르르 열리며, 명례가 내달았다. 재호는 땅바 닥에 두다리를 뻗고 앉은채 『아이쿠』소리를 지를 엄두 도 못냈다.

『아닌밤중에 남의집 담뛰어넘는게 누구야ㅅ』

명례는 무섭게 독기가 뻗쳤다.

─ 拂墻花影動하니 疑是玉人來라!(西廂記)

『문단속 하는것은 좋은 일이나, 들어올 사람을 보구 해 야지』

부드러운 말로 대답했다. 재호는 오늘밤만은 무뚝뚝하게 굴 처지가 못되니까.

난데 없이, 검은 그림자가 재호의 눈앞을 휙 지나치더니, 판장에 가서 쾅! 하고 부딪쳤다.

『아이쿠!』

재호는 맞지도 않았으나 소름이 쭉 끼쳤다.

『어금니가 빠졌네』

재차 또 무엇이 날라올까 두려워서, 금방 죽는듯이 엄살 을 부렸다.

방문턱에 나섰던 명례가 미닫이를 깨어져라 하고 닫고 들어갔다. 재호는 얼른 자기 옆에 굴러 떨어져 있는 괴물 을 집어 들고 보았다.

─ 오! 무서운 수류탄 (手榴彈)─ 강철을 능가 한듯한 방망이었다. 폭발될 우려는 없는것 이나, 올바로 머리통에 들어맞았던들, 머리가 대신 폭발 되고 말았을것이다.

─ 이런 끔찍한 일 있나─ 재호는 방망이를 든채 일어서서 볼기짝에 묻은 흙을 대 강 털었으나, 살기가 등등한 아내를 맞대할 일이 큰 일이 었다.

─ 또 무슨 일이 나고야 말겠구나─ 불길한 예감이 자꾸 머리에 떠돌았다. 소리 없이 마당을 걸어 소리 없이 구두를 벗고, 소리 안나게 방망이를 마루 한구석에 가만히 놓았다.

─ 세상 없는 일 있더라도, 비위를 긁적거리지 말아야 되겠다! 어떻게 할까? 들어가서 머뭇머뭇하다가는 충돌이 날테니 무슨 도리가 없을까? 들어서자마자 시침을 뚝떼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지─ 그야말로 궁여지책이었다.

재호는 양복저고리, 촉기, 바지, 와이셔츠, 넥타이 할것 없이 미리 벗고 끌러서 들었다. 그리고 방문을 바시시 열 었다. 다 열어놓고도 명례가 와락 달려들까해서 잠시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 이옷을 벽에 걸자면 시간이 걸릴테니…부질없고, 차 라리 머릿장 위에 내던지고 바로 이불 속으로 기어드는것 이 속하다─ 재호는 명례가 내닫는 기색이 없는지라 한걸음 나섰다.

그러나 문뒤에 붙어서서 홍두깨를 둘러메고 있는것만 같 아서, 머리끝이 쭈뼛쭈뼛했다.

─ 뛰어들어갈까? 치더라도 헛맞을테니─ 재호는 다시 한발을 뒤로 내딛고 있다가, 방속으로 노루 뛰듯 깡총 뛰어들어가면서『으악!』 소리부터 쳤다. 홍두 깨가 금방 목덜미에 내려 앉는 것 같았다.

一一

편집

무슨 살똥스러운 짓이든지 하고말치 그대로 안있을줄 알 았던 명례가 뜻밖에 방한복판에 두다리를 쭉 뻗고 큰댓자 로 누워있었다.

─ 꼴 좋─ 다─ 재호는 겨우 안심한 듯이 벗어서 한팔에 걸친 양복과 와 이셔츠를 한가지 한가지 웃목 벽에 가만히 걸었다. 그러 나 만일의 일을 몰라, 연해 명례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했다. ─ 별일이다! 어쩌자고 저지경을 하고 있을까? 저러다가 도 갑자기 일어나서 달려들면 큰 일이지!─ 파리를 틀고 있는 독사뱀 같아서, 재호는 근처로 가기가 싫었다.

옷을 다 걸고나서도,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명례는 꼼짝안하고 누워있다.

─ 별일이다. 어쩌자고 저 흉물을 떨고 있을까?─ 반은 안심이 되고, 반은 의심이 나서 두어 걸음 가까이 갔다. 그러면서는 명례가 달려들면 방비할 태세는 잔뜩 취하고 있었다.

─ 무슨 계책인구!─ 고개를 길게 뽑고, 머리 너머로 기웃이 굽어보았다.

명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두눈자위는 푹 꺼 지고 입은 벌려져 있었다.

─ 이게 웬일일까?─ 재호는 영문을 몰라 잠싯동안 어리둥절 했으나, 다음순 간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무서운 예감이었다.

명례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반 응이 없었다.

『여봐』

다시한번 흔들어 보았다. 역시 끄떡 않았다.

『여봐 명례』

또한번 힘껏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여전하였다.

─ 기절을 했나!─ 재호는 명례의 맥을 짚어보고, 가슴을 눌러 보았다.

─ 죽지는 않았고!─ 재호는 방문을 열고, 부리나케 툇마루로 갔다.

절그렁!

선반에 포개놓은 사기대접 하나를 벗기다가 미끄러뜨렸 던 것이다.

─ 엣 방정맞다!─ 이번에는 사발 하나를 대신 들고 부엌으로 들어서다가 나가 떨어졌다.

─ 불길한 징조로군!─ 팔꿈치가 깨어지고 궁둥이의 살점이 벗겨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호는 워낙 다급하니까 아픈지 쓰린지 생각 나지 않았다.

물을 떠가지고 들어와서는, 명례를 반쯤 껴안아 일으켜 가지고, 물을 입에다 들어부었다.

명례는 때아닌 물벼락을 맞고 흑흑 느끼면서, 재호의 사 발든 팔을 밀어젖혔다. 입으로 들어온 물보다, 코로 옷깃 으로 들어 부은 물이 더 많았던 것이다.

─ 깨어났지!─ 재호는 껴안았던 팔을 풀고, 옆으로 물러앉았다. 안심은 되었으나, 다음 차례가 걱정이다.

명례는 또다시 픽하고 쓰러졌다.

─ 웬일일까? 자살?─ 머리끝이 쭈뼛하고, 온몸에 찬기운이 홱 끼쳤다.

재호는 벌떡 일어나서, 못에 걸린 양복 바지를 떼어 들 고, 허둥지둥했다. 발이 제가랑이에 잘안들어가고, 바지가 휘휘 감기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겨우 어떻게 꿰기는 하 였으나, 무릎판에 댄 왜증이 찢어지느라로 찍─ 찍─ 소 리가 났다.

─ 이 근처에 병원이 있든가?─ 한다리를 마저 꿰면서 생각했다.

재호 사는 동네에 한약방은 두엇 되나 병원은 없다.

급한때 의사를 부르자면, 큰길가에 나와 자동차를 불러 타고 수장동이나, 안국동 거리로 가야만 한다. 새벽 세시 나 되어서 전화 빌릴데도 없거니와, 전화만 해가지고는 여간 마음 착한 의사 아닌 다음에야 올이가 만무하다. 골 목 밖에만 나서면 자동차 부는 하나 있으나, 재호의 수중 에는 한푼도 없다.

─ 찻삯은 나중 일이고, 우선 급하니 타고볼 일이다!

재호가 바지를 다 입고나서 혁대 끈을 조를 판인데,

『여봐요!』

모기소리만큼이나 가는 목소리가 명례 입에서 흘렀다.

자창가

편집

명례는 아까 낮에 남편의 월급을 몰수하려고 회사에 갔다 가 실패하고 와서는 눈이 빠질 지경이었다. 넉넉잡고 두 시간후면 집으로 돌아오겠다던 재호가 열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던 것이다.

─ 기어코 바람이 났어─ 말이 쉬워 열시간이지, 기다리던 명례에게는 열흘보다 더 길었다. 언제라고 일찍 돌아온 남편이 아니었지만, 오늘 만은 홍역앓는 애를 밖에 내놓은것 같아서, 마음이 죄었 던 것이다. 여느때의 저녁상과 달리 이것저것 반찬 한가 지라도 더 늘어놓고, 찌개가 식을까, 졸까 염려되어 화롯 불에 올려놓았다, 내려놓았다 하기를 몇차례나 했는지 모 른다. 그러면서 애꿎은 시계를 몇번이나 원망스럽게 바라 보았는지. 시간이 갈수록 그 월급이 삭는것 같아서.

자정이 넘어 새로 한시…… 또 두시.

─ 과직해야 돈 십원 남짓할거…웬게 남았겠니!─ 명례는 아주 단념을 하고, 대문을 걸어 잠거버렸다. 그러 고나자, 채호가 담을 넘었다. 문 열어달라는 소리를 정당 히 못하는 것이 지은 죄가 있는것 같았다. 명례는 가슴속 에 무었이 불끈 솟아, 방망이를 내던지고 방으로 들어왔 으나, 온몸에 맥이 풀리고 기가 질려서, 그대로 쓰러져 버 린 것이다. 그렇더라도 남편이 방에를 들어왔으니, 웬만 하면 체면을 차리고 일어나 앉을것이로되, 얄미운 생각과 한편으로 어쩌나 좀 보자 하는 생각으로 이내 누워배긴것 이다. 그랬다가, 기회를 보아 돌격을 할 작정하고…….

그러나 겁 많은 남편이 자기가 음독이나 한줄 알고, 허둥 지둥 날뛰는 꼴이 속으로 여간 우습지 않았다.

『거기좀 앉아요』

명례가 또한번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재호는 금방 눈물 이 쏟아질 듯이 명례의 옆에 널찍이 엎으렸다.

『인젠 마음 놓고 당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게 됐으니 좋 겠어요』

몸은 꼼짝도 아니하고, 간신히 나오는 목소리로 했다.

『익…』

재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목이 메었다.

『성화 받을 일도 없고, 귀 아플 일도 없고…』

명례는 힘이 드는듯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재호는 고개를 들고 눈이 한층 더 휘둥그래졌다.

『나 죽고 나거든』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재호는 옆구리를 쥐어 박힌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정말이군그래, 정말이야』

음독한것이 틀림 없었다. 의사 부를 일이 일시가 급했다.

─ 아! 경망스런 계집, 방정 맞은 계집─ 재호는 자기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쿡 쥐어박고 일어섰다. 『거기 앉어요. 죽고 안죽는것은 내마음에 달렸지, 의사 가 오면 소용 있나』

재호의 양복바지를 꽉 움켜잡았다.

『안돼 안돼』

재호는 뿌리치려고 들었다.

거의 울듯한 목소리였다.

『오늘 지낸 일을 어서 말해요』

『이야기는 할테니, 먼저 먹은것부터 토해버려』

『안돼요, 이야기부터 해요』

명례는 여전히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좌우간 오늘 나온 월급이 얼마나 됩디까?』

『십원밖에 안됐어』

『십원?』

『쌀값 십 삼원이지, 양복월부 십 오원이지, 시계월부, 점 심값, 또 지점장 송별회비…다 치면 십원밖에 더 남어?』

『지점장 송별회비란 무어요?』

쌀값, 양복값, 점심값은 공인된 지출이지만, 송별회비라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이번에 본사에 있다가, 평양 지점으로 영전해간 사람이 있거든, 그사람 송별회비야』

『이래저래 술타령이구료. 얼마나 돼요?』

『오원이지!』

『망할놈의 회사지, 월급은 쥐꼬리만큼 주고, 뜯기는 왜 자꼬 뜯어!』

『글쎄 말야』

『그런데 참례 안하면 그뿐아니요?』

『안하는수야 있나』

『요릿집 가고, 기생 부르는 맛에 그랬지?』

『………』

재호는 잠자코 있었다. 사실 그런때나 아니면 요릿집 기 생 구경은 할 도리가 없다.

『그때 부른 기생은 누구누구요』

『누군지 지금 기억나나? 객적은 소리 그만두어』

재호는 검사의 심문에 답변을 거부 했다.

『그렇기로니, 어째 십원만 남는단 말이요』

『그밖에, 더 돼? 빤한 노릇이지!』

재호는 월급 봉투 속에 들었던 셈따진 종이를 보여주려 고, 양복 주머니 속을 훔척훔척했다.

『그건 그렇다고 합시다』

명례는 한숨을 땅이 꺼지게 한번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십원 남은 것 내놓으서요』

의옥사건(疑獄事件)도 중심문제에 저촉되었다.

『………』

재호는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었다.

『다 떨어 먹었지요?』

예심판사의 눈이 밝기도 밝다. 뻔한 노릇에, 명레는 새삼 스럽게 기가 날것도 없었다.

『………』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아직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왜 말을 안하시우, 나도 전 모양으로 바가지를 긁거나, 못살게 굴거나, 그러지를 않을테니, 어서 말해요. 당신이 벌어 당신이 쓰는데, 나 같은 사람이 쌍지팡이 짚고 나설 까닭 있겠소? 하지만, 마지막 소원이니 들려 주어요. 숨 넘어가는 사람 입에 물 한숟가락 떠넣는셈 잡고』

『………』

『내가 죽어서 다시 사람으로 태난다면 어떻게 운등을 해 서라도 남자로 태나보지요. 당신 같은 남자로…그래서 집 안 여편네가 살림살이에 얼마나 애가 곯고, 성화를 하 고…하는 꼴을 내눈으로 좀 보아야 되겠어요. 또 헐수할 수 없이 여자로 태난다면, 남자의 마음을 잘 알아가지고, 좋은 아내될 자격을 얻어가지고, 태나야 않겠어요? 나야 남의 아내 노릇할줄 모르는 사람 공연한 밥만 죽이구…』

한숨을 또 한번 내쉬고나서, 입을 씰룩씰룩, 두 팔을 버둥 버둥 하였다.

주검이 목전에 닥친것 처럼 바람이 났다.

『명례, 명례! 어이구 이를 어쩌나……』

재호도 바람이 날 지경이다.

『얘기 할테야 얘기해, 어서 진정하고 먹은것을 토해봐.

사실은 아까…』

너무 다급해서 말문이 콱 막히었다.

『어서 얘기나 하서요』

명례의 경련은 다시 진정되었다.

『글쎄, 얘기는 할테니, 어서 토하라니까. 제발 날 살리는 요량하구, 응 응』

재호는 다소 마음이 놓였으나, 불안과 초조때문에 얼굴이 질렸다. 명례의 가슴을 끌어안았다 뒤흔들었다 하면서 빌 었다.

『어서 얘기부터 하라니까』

명례는 재호의 손을 뿌리쳤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벌건 눈과, 거품이 질질 흐르는 입을 해가지고, 매달리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불상하기도 하지만, 제일 앞가슴과 겨드 랑 밑이 간지러워서 견딜수 없었다.

『얘기 할거야 해……』

재호는 황망하게 경과보고를 드리기 시작했다.

『파하는길로 바로 집으로 오쟀더니, 친구가 맥주 한잔 먹고 가자고 자꾸 조르기에 마지못해 따라섰지…』

이말을 하고 마른 침을 꿀떡 삼켰다.

명례는 『그래서』하는듯이 눈만 깜작깜작한다.

『그래 두어군데서 얻어먹었는데, 취중이라 호기가 뻗쳐, 남의 술만 얻어먹고 그냥 있을수 없어서, 내가 한잔 냈 어』

『그 사람은 얼마치나 냈기에?』

『한 팔원각수』

『그럼 팔원어치 얻어먹고, 십원어치로 갚았구료. 변리 껴서?』

『그런것도 아니지만…처음에는 내돈 안들일랴고 했다가, 할수없어서 한이원 쓰자고한 노릇이, 흐지부지 경우가 그 렇게 돼버렸어』

『그래 둘이서 이십원돈을 께먹었구료』

말이 쉬워 이십원이지, 명례의 구구로 치면 한달 살을 돈 이었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오늘 받은 십원은 세상없어 도 집에 가져올랴구 했었어』

『참 장한 양반이시요. 말만 해두 생색이 나는구료. 그래 어디어디서 자셨소?』

『오뎅집에서 먹고, 찻집에서 먹고 빠─ 에서 먹었어』

『오뎅집은 뭐고, 빠─ 는 뭐요』

『그건…』

장황하게 설명은 할수 없고, 말문은 막히고 해서 벙어리 처럼 답답하게 손짓만 두어번 하다 말았다.

『당신은 어디서 내셨소?』

『빠─ 에서 냈어』

『카페─ 이름이 빠─ 요』

『아니야, 무─ 랑이란 술집이야』

어물어물 하다가는 시간이 가겠고 해서 솔직간명하게 말 해버렸다.

『여자가 술 따르지요?』

『별걸 다 묻는군 그래』

『무슨꼬 무슨꼬가 있어요?』

명례의 들은 풍월로는 카페─ 여급의 이름에는 꼿자가 붙 는줄로만 알았다.

『애라라는 주인 여자 하나뿐이야. 사내 급사애가 하나 있구』

『무어라는 여자요?』

명례는 다시한번 되물었다. 생각나는 이름이기에.

『애라』

『활동사진에 나오던 여자요?』

『그래』

재호는 죄지은 일이 없는지라, 선선히 대답했다.

─ 애라! 애라! 바로 그 애라로구나─ 명례와 애라는 옛날 보통학교 동창생이었다. 졸업하고나 서 길이 달라진 뒤로 다시 만난 일은 없었지만, 친히 놀 던 동무였다.

─ 창가를 잘하고, 작문을 잘짓고하던 애라! 풍편에 들은 말은 많지만, 그렇게 타락을 했나─ 명례는 동무의 일이라, 남의 일 같지 않게 가슴이 저렸다.

『그런 여자 얻어 살면 좋겠군요. 제것도 가졌고, 술도 맘 대로 먹을게고, 아마 궁합이 맞을 걸』

『객적은 소리…』

『당신 자주 가는데니, 주소나 알아 둡시다』

『황금정 일정목이야』

명례는 더 물을 말이 없었든지,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천정을 뻔히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만 있었다. 재 호는 웃목에 있는 커다란 놋요강을 밀고 와서.

『자─ , 인제는 모든것을 다 고해 바쳤고 사죄도 했으니, 인제는 어서 나한테 토해 바쳐』하면서 억지로 안아 일으 켰다.

명례는 두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맥없이 허리를 굽혔으 나, 저녁도 안먹은 속이라 토해낼 거리가 없어서, 큰 걱정 이었다.

─ 땀나는 일인데, 토하기커녕 속이 쓰린데 뭘좀 먹었으 면!─

『난 내대로 토할터이니, 나가서 모과수나 한통 사오구 려!』

─ 무엇을 먹었는지는 모르나, 모과수를 꼭 먹어야 살어 나나!─ 시계는 네시를 쳤다. 넋 달아난 가게장이 아닌 다음에야 가겟문을 열어 놓았을이 만무하다. 그러나 재호는 죽을 사람이 살아난다는 바에야 안뛰어나갈수 없었다.

재호가 밖으로 나간 뒤, 명례는 놋요강을 장 밑에 밀어 넣고, 잠싯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되지 않은 연극이 나마 힘은 들대로 들어, 학질을 한직 치르고난것처럼 몸 이 휘졌던 것이다.

─ 남은것이 무엇이냐?─ 포르르하던 성결이 가라앉은 다음에는 모든것이 냉정하게 머리에 떠올랐다. 애초의 마음 같아서는 남편을 홍두깨에 말아, 방망이질을 해도 속이 풀릴것 같지 않았다. 방바닥 에 자빠뜨려 놓고, 떡반죽하듯이 뭉쳤다 잡아뜯었다 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것 같았다. 그런것이 결국에는 미적지 근한 넌쎈스극 일막으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 싸움도 마음대로 안되는구나─ 명례는 이런 생각이 들면서, 한쪽으로는 남편이 가엾었다. 몇푼 안되는 월급을 바라고 허덕지덕 하는 꼴, 양복이니 구두니, 월부 맛에 곧죽어도 좋은것으로만 차려 겉만 번 드레 했지, 속에는 샤쓰 한가지 변변하지가 못하고, 양말 한켤레 여벌이 없어, 때묻은것을 벗겨 빨자면, 헌 너털뱅 이를 들끄어 내어 색보 잇듯이 잇거나, 뚫어진 문구멍 메 우듯이 때우거나 해서 우선 입혀두고, 그렇지도 못하면, 일요일 하루는『단벌 옷 클리닝데이』로 정해놓는 신세, 술은 매일 장취라도, 얻어만 먹고 갚지 못하는 형편, 그렇 지만 온종일 술 얻어 먹을 궁리만 하거나, 추접스럽게 술 자리를 늠실거리기 전에야 누가 술을 사줄꼬─ 명례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 말이 쉬워 월급이지, 자기 한몸 거두기도 어려운 돈……문학공부 한답시고 동경 유학하고 와서, 당하지도 않은 주판질을 해서, 밥을 빌어먹으니, 환장 안될수 있 나?…무슨짓을 하거나 갈거나, 제발 계집질만 말았으면─ 명례의 너그러운 생각도 결국에는 바늘구멍만큼 좁아지고 말았다.

얼마 안지나서 재호가 헐레벌떡 거리며 돌아 왔다.

『토했어?』

제일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토했어요.』

『토한것 어딨어?』

재호는 선자리에서 한바퀴 돌면서, 온방안을 두리번거렸다. 『토한것을 무엇하러 두겠어요. 갖다 버렸지…』

명례는 꾸며댄답시고 하기는 했으나, 남편이 눈치챌까 걱 정이었다.

『그대로 두어두지 그랬어. 내가 갖다 버리게…』

─ 엿 먹어라!─ 명례는 속으로 웃었다.

『인젠 괜찮겠어?』

다소 안심된 눈치였다.

『그건 어쨌든간에 사오란 것 어쨌어요?』

『그러게 말야…』

재호는 두 팔을 쩍 벌이고, 고개를 외로 꼬았다.

『가게 문을 암만 흔들구 두드리고 해야 열어 주어야지, 별 사정을 다 하고 문을 발길로 차다시피 해도 들은체 만 체 하는걸 어떻게해. 한군데뿐이 아니라, 몇군데가 다 그 래…』

『별 사정을 다 했다니, 여편네가 독약 먹었다는 말까지 했겠구료』

『아니, 그런 말은 안했지만, 급한 병이 났다군 했어…』

『어쨌든 망신할번 했소. 순사가 순행돌다 들었으면, 나 를 순화병원으로 담어갔지, 그대로 두겠어요?』

재호는 얼이 빠져서, 눈만 끔벅끔벅하고 서있었다.

『그럼 나가서 설탕물이나 좀 해와요』

명례는 오늘 처음으로 가만히 앉아서, 남편을 부려먹는다. 재호는 아무말도 않고 마루로 나갔다. 부엌으로 툇마 루로 한참동안 왔다갔다 하면서, 달그락거리다가 분부대 로 거행해 왔다.

『타도 분수 있게 타야지. 당신 맛좀 봐요』

명례는 대접을 받아서 입에 댔다가 금방 떼면서 핀잔이다. 『이걸 날더러 먹으라는게요?』

『약되라구 듬뿍 탔는데, 왜그래?』

재호는 대접을 도루 받아들고 한모금맛을 보았다.

『아차!』

고개가 절로 죽었다. 소금을 탔던 것이다.

『당신 하는 일이 그렇지 벌수 있소』

『유리항아리가 꼭 같아서 그랬군 새로 타오지, 새로 타 와…』

재호는 다시 나가려했다.

『그만두고 모과수 사랴던 돈이나 이리 내요. 내일 약값 치르게』

『돈이 어디 있나, 한푼두…』

『그럼 죽으려고 먹은 약값까지 외상을 지우구료』

잡아 떼었더면 내일 아침 반찬거리 값이었다.

이튿날─ 재호는 여느때와 달리 회사가 파하자 곧 집으로 돌아왔다. 간밤의 날리를 치르고나서 당분간 근신하자는 뜻이다. 『웬일이야.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돋겠네』

명례가 방으로 들어오는 남편을 보며, 오십전 버는맛에 옆집 젊은이의 께끼저고리 하던것을 한옆으로 밀고 일어 섰다.

『서쪽에서 돋거나, 북쪽에서 돋거나간에 비오게 생겼 어』

『비가 오겠어요? 그럼 장독 뚜껑을 덮어야겠네. 기왕이 면 좀 덮구 들어오지 그대로 들어와요?…… 어서 덮구 들 어와요 좀…』

재호가 벗어주는 양복저고리를 받아들면서 눈을 흘겼다.

『그런것도 내가 해야 하나』

『당신은 뭐계 못한단 말요. 여기가 당신 하숙집인줄 아 시우』

명례는 남편의 등을 밀었다.

『나를 행랑아범 부리듯 했겠다』

『좀 살금살금 덮어요. 깨지면 어떻걸라구! 집안에서 아 범노릇도 해야지, 주인아씨도 안잠자기 노릇을 하는데!』

날이 흐리면, 사람의 마음도 흐려진다. 울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없던 심사가 절로 나고, 까닭 모 를 짜증이 푹푹 솟을 날씨다. 그러나 오늘 두 내외 마음 은 의외로 명랑하다. 간밤 일이 상한 음식 먹고 일어난 곽란이라면, 오늘은 소화제 먹은 뒤끝처럼 후련한 기분이다. 『날씨가 이러면 술 한잔 생각 나겠구료』

장독 뚜껑을 덮고 들어와서, 옷을 바꿔 입는 남편을 바라 보면서, 명례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남의 속을 저렇게 잘 알까?』

『내가 누구라구. 삼년째 길들인 맹수(猛獸)의 속을 모를 까?』

『맹수? 내가 맹수고, 너는 맹수사란 말이지?』

『그럼. 가정을 무시하고, 아내의 인격을 유린하는 횡포 무쌍한 당신이 맹수 아니고 뭐요.』

『기세가 대단하군! 내가 맹수라!』

재호는 자기 자신을, 갈기가 더부룩한 에티오피아의 라이 온으로 생각도 해보고, 누런 바탕에 검은 줄이 죽 죽 진, 만주산의 덩지 큰 호랑이로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는 늠늠한 그 기상에 적이 만족 안한바도 아니었다.

『그래, 무슨 맹수야?』

『늑대! 교활해서 길 잘 안드는, 늑대!』

『늑대?』

재호의 기대는 어그러졌다. 창경원 좁은 쇠철망속에서 창 공을 내다보며, 꼬리는 기운 없이 축 늘어뜨리고 좌우로 종종걸음을 치는 가엾은 늑대가 연상되었었다.

『술 한잔 받아다 드리리까?』

명례는 바느질 삯전을 장 대었다.

『그만 두겠어』

『잘 생각 했어요… 그렇지만 한잔만 사오리다』

『일 없어』

『인제 겨우 철이 났구료, 그럼 곤하실테니 한잠 주무시 지』

명례는 이부자리를 내려 아랫목에 깔고 자기는 한 옆에 밀어놓았던 바느질그릇을 다시 차고 앉았다.

한참동안은 침묵이 흘렀다. 재호는 간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다시피 하여 온종일 몸이 노곤 하기는하나, 자리에 눕 고 보니 잠이 오지 않았다. 명례는 남편을 잠자게 하느라 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이 잠은 안자고, 담 배만 피는것을 보자 입이 간질간질해서 배길수 없었다.

『여봐요』

『왜그래』

재호는 담배 연기를 코로 내뿜으면서 반은 말에 섞여 내 보냈다.

『당신 보기에 내가 결혼할 적보다 지금은 어때요』

『김 나간 사이다지 뭐야』

『호호…사이다? 딴은 그럴듯해! 김이 다 빠지면 맛없어 서 안먹고 버리겠구료』

『버리기야? 아깝지!』

『내 생각에는 당신이 나를 맥고모자처럼 여기는 것 같 애』

『맥고모자?』

『그래요. 맥고모자는 갓 사서 쓸때 위하지, 한여름 다 쓰 고나면 멀쩡한것도 괄세를 합디다그려』

『맥고모자! 하하하하…. 일원 넘겨 주면 이태는 쓰지』

『말 말아요. 당신은 지난 여름에 두개 쓴 생각 안나 요?』

『그건 오십전짜리』

『오십전이고 십전이고 간에 그런 신세가 어디 있어. 먼 젓것은 이혼 당한셈 아니야?』

명례는 자기자신을 맥고모로 치고, 묵은 맥고모 표백법은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좋은 낯으로 말하는 김이니 말이 지, 대체 무엇때문에 돌아다니우? 밤을 새가면…』

명례가 말의 방향을 돌렸다.

『그야 좋은 일이 있어도 다니고, 나쁜 일이 있어도 다니 고…』

『아니, 아는 사람집 생일 잔치에 참례한다거나, 초상난 집에 조상가는 것을 탈 잡는 건 아니우』

『남의 말을 왜 가로채고 이야 단이야?…기쁜 일이 있어 도 다니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다니고…』

『역마직성이라 닳군! 이래저래 다니고싶을 말이면 진작 외교원이나 행상인으로 나설걸 길을 잘못 들었지』

『………』

재호는 몸을 뒤틀면서 고개를 아랫목 쪽으로 돌렸다.

『사내가 어쩌면 저렇게 삐치기를 잘할까. 인젠 안그럴테 니, 돌아누워요』

『………』

『글쎄, 안그럴테니 어서 얘기 해요』

명례는 하던 바느질을 멈추고 아랫목으로 내려갔다. 그리 고서 어린애 달래 듯이 달래어 되돌아 눕게 했다.

『그래 가는데는 어디에요』

『카페! 빠─ 에도 가고, 찻집에도 가고 선술집 앉은술집 에도 가고, 삐비─ 꼴프, 뻘리아드, 극장…돈 없고, 동지 가 없을때는 길가에서 물개고기 파는 사람의 입심 부리는 것도 듣고 구세군 가두연설하는데 끼어 참회의 눈물도 흘 리고, 전신주에 기대어 악기점에서 흘러 나오는 유행가를 들으면서 구두 뒤축으로 장단도 맞추고…』

『가는데도 많고, 하는일도 많군요…사람이란 견문이 많 아야 한다지만!』

『그렇지, 비꼴줄 알았지』

『그렇게 바람이 나 돌아다니지 말고, 그 돈을 저금해서, 몇천원 나를 갖다주어요 당신 비위에 맞도록 다 해드릴테 니』

『그 돈은 뭔가, 위자료란 말인가?』

『이이가 생각을 해도 그 따위만…이혼을 할랴거든 해주 어요. 돈은 안바랄테니 당신 수작이 벌써 틀렸어』

명례는 재호의 옆구리를 살점이 떨어져라하고 꼬집어 뜯 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가 다 뭐야』

『그럼 돈 얘기는 왜해』

『돈 얘기만 하면 그렇게 기가 나우?』

『기가 나는게 아니라, 알아 듣도록 말을 해봐』

재호는 불에 데인것처럼 옆구리를 어루만졌다.

『돈만 많으면…』

『그래』

『마당이 널찍하고 간살이 넓은 큰 집을 사서, 당신 비위 에 맞도록 꾸며 놓겠단 말에요. 안방은 호텔 침실, 마루는 다마쓰끼장에다 카페!를 얼러 내고, 건넌방을 빠─ 하고 찻집, 아랫방 하나는 오뎅집, 또하나는 앉은 술집, 부엌 툇마루는 찬간을 뜯어고쳐 선술집 술청을 내고, 부엌에는 국수를을 놓고, 큰솥이나 걸어 놓았으면 냉면집에다 설렁 탕집이 될테고 마당에는 뻬비─ 꼴프장…옳지 뒷곁에 방 이 하나 있으면 청요릿집도 내겠군』

『대─ 단한 설겐데, 도대체 그런것은 어디서 얻어들었 어』

『흥, 내가 그런데를 모를줄 알구! 당신이 가는데쳐놓고, 뒤 안밟은데가 있는줄 알우?』

재호는 어이가 없어서, 말대꾸도 못했다.

『그래놓고서, 내가 여급노릇을 하지요. 얼굴은 못났지만, 무슨 써─ 비스든지 다 할테니까. 그리구는 팁도 바라지 않고 잡숫는 것은 실비만 받을테야』

『사람은 더 안두나?』

『여급말이지, 그건 못하겠어』

『다 같은 여자로, 여자라면 왜 저렇게 길까?』

『왜 안그렇겠나 생각해 보구료』

『그럼, 여급의 이름은 무어라고 지을테야』

『아끼꼬, 밝을명자니까 아끼꼬지 뭐요』

『허─ 참, 별 고약한것을 다 알았군…아끼꼬상!』

『아─ 이ㅅ』

아내가 여간내기가 아닌것을 평소에도 모르는바 아니지 만, 이렇게매섭게 영리한 줄은 처음알았다. 아내가 그만 큼 자기를 경계하면, 자기는 또한 다른 잠행술(潛行術)을 예비 아니할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현명한 아내를 가진 자기가 이세상을 살아가기에 얼마나 다행스 러운지 이를데 없었다.

밖에는 언제 시작했는지, 비가 죽죽 내리고 있다. 요란스 런 낙숫물 소리도 재호에게는 몸을 적시어주는 행복과 같 이, 지낸날 신혼의 단꿈을 되불러 주었다.

『왜 이 흉측을 떨어요. 카페─ 얘기가 나니까 신이 나시 우?』

철썩! 뺨 맞는 소리가 낙숫물 받아 버리는 소리만큼이나 크다.

재호는 아내의 입술을 도적질 하려다가 사전에 발각이 되 었던 것이다.

『거참, 신경과민이군! 말끝마다 여자 말을 하니, 내가 계 집질만 하러 다니는 사람이란 말인가 온…』

『술때문으로야 무슨맛에 그런데를 가요?』

『계집질 하기가 그렇게 쉬운겐줄 아나』

『어렵고 안어려운것은 당신이 잘 알지! 내가 알겠수? 워 낙 많이 해봐서, 그런데는 환하구료, 어려운줄을 다알 구』

『공연한 질투야!』

『남의 아내돼서 그만 질투도 못할까?』

『왜이래 또?……여자란 하루에 열두가지로 마음이 변한 다더니 정말이군』

『나는 당신 때문에 밤잠도 잘 못자니까, 열두가지는커녕 스무가지로 변해요』

『계집질로 여러가지 조건이 구비해야 되는것이야…첫째 돈이 있어야돼 돈!』

『돈있어 하는것은 돈지랄』

『돈없어 하는것은 뭐고?』

『연애라는거지 뭐야』

『하하─ ……』

이간방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게 연애라! 연애할 팔자는 나혼자 타고 났구나! 행 운아 박재호씨여! 희세의 염복가! 천재적 로─ 맨티스 트!』

『이이가 실성을 했나, 왜 소리를 지르구 야단이야 냄새 스럽게』

『아씨! 왜, 진작 이런 말씀을 안해주셨소. 공연한 청춘을 아끼고 두어, 녹이 다 쓸었소이다. …다시한번 말씀해주 시요. 돈 없이 하는것은 연애라구』

재호가 이렇게 기가 나서, 야단이니까, 명례는 자기 한말 이 실수나 아닌가 해서, 어릿어릿했다. 그러나 자기 주장 을 한번 내세워볼 필요도 있었다.

『그럼 안그래요, 돈 가지고 사는것은 계집질, 마음 가지 고 사는것은 연애』

『안심해, 나는 돈을 가져야 연애를 할 사람이니까. 지금 처럼 지지궁상으로 사는데야 무슨 걱정이야』

『알수 있나요. 돈은 없어도 장가 안들었다고 꾸며대고, 속 모르는 여자나 순진한 여학생을 후릴는지』

『나 돈 없는줄 알고 덤벼드는 여자가 있다면, 한번 연애 도 해보겠어』

농담일지 모르나, 명례의 귀에는 극언(極言)이었다.

『당신 보고 먼저 달려들 여자가 어디 있어, 당신이 먼저 강아지처럼 따라다니거나 추근추근히 굴어야지』

『그점은 나도 잘 알어, 그만한 고행을 안하고서야 자릿 자릿한 맛을 볼수 있나』

『돈 돈 하니, 암만해도 당신은 돈 없어서 실연당한 사람 같소, 정 당신이 연애를 하겠다면, 내가 몸을 팔아 서라도 뒤를 대줄테니 해봐요. 아직 삼십이 못된 계집이니, 어디 다 팔기로 백원 하나야 안주겠소』

『오늘 저녁에라도 출동해 보서요. 날도 축축하고, 마음 산란한 여자도 더러 나올지 모르니』

하면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머리 튼 심청(沈淸)이 나간다─ 돈백원에 몸이 팔려 아 장아장 나간다─ 』

재호는 중머리 장단 맞추느라고 장판 바닥을 철썩철썩 두 드리면서 목청을 내뽑았다.

마루끝에 나앉아 고무신에 물뛴것을 걸레로 훔치려다 말 고, 명례가 뿌루루 와서 방문을 또 열었다.

『저이가 정말 미쳤어! 왜 저럴까, 가뜩이나 옆집 중학생 들이 우리를 싸움질만한다고 흉보는데, 누가 하나가 얻어 맞고 우는줄 알겠소』

『사내 목소리니까 자볼기 맞고 우는줄 알겠지, 엄처시하 라!』

『아이참, 인젠 못하는 소리도 없군 그래』

깔볼수 없다는듯이 문을 다시 닫았다.

밥솥에 불을 지피며 넋이 없이 앉았을 때, 담넘엇 집의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디케─ 의 야간 방송이 시작… 저 노래는「부람쓰」의 자장가지!

명례는 부지깽이로 지휘봉(指揮棒)을 삼아 휘두르면서 잔 잔한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어서 자자 어서자 우리 바람둥이 술에 목 마르고 계집에 눈 어두워 ………

『잘 한다 잘해, 너마저 미쳤구나!』

어느틈에 나왔는지, 재호가 툇마루에 엎드려 부엌 창쌀 사이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던건 마자 해야지』

구름다리 있는 권농동 샛길로 해드라이트를 밝힌 택시?

뻐쓰가 펄쩍 오고 간다. ─ 창경원 본정선 전차 궤도 위 에는 전에 안다니던 대형뽀─ 기차가 줄달아 구른다.

원남동 네거리…택시는 손님을 내려놓고 오던 길을 분주 히 되달아나려니와, 뻐쓰는 하─ 얀 몸뚱아리를 길가에 일렬횡대로 나란히 세워놓고, 뻐쓰양이 메카폰으로 외치 는「총독부행」은 몇대 되지도 않거니와, 거의 빈채로 달 아난다.

창경원 앞은 더 난리다. 종점에서 트롤리를 미쳐 돌릴 사이도 없이 뒤차가 밀리고 밀려서, 대학병원까지 한정류 장 사이는 전차가 꿰미에 뀌듯이 맞닿아 있다. 사람은 얼 마나 많을것인가? 밀 물보다도 더 무섭게 이동한다.

장안 안을 들끓게 하는 창경원의 요사꾸라도 오늘이 초 일이다. 어제 하루 비바람에 쪼들려 꽃봉오리는 피려다 되 오므라 들었는지, 활짝 피려면 이삼일이 더 걸리게 생 겼다. 그렇건만 꽃구경보다도, 휘황한 전깃불 구경보다도 내꼴 남보이고, 남의 꼴 나보자고 모여드는 사람에게는 사람만 많으면 그뿐이었다.

재호도 그런축의 하나였다. 날씨가 산산하지만, 오늘 오 후에 외투와 양복을 되꾸리고 춘추복을 내어 입었다. 남 이 내는 멋을 나는 못부리라는 듯이 어깨가 으쓱해가지 고, 단장을 멋대있게 휘두르면서, 동물원쪽으로부터 돌았다. 꽃이야 피었건 안피었건 그많은 사람에 휩싸여 가면서, 이사람 저사람의 얼굴 살피기에 정신이 빠졌다. 십년을 두고 못찾던 원수도 이장소에서는 만나게 되는곳─ 수좋 으면 옛친구를 찾아볼수도 있거니와, 그보다 더 큰 목적 은 여러 여성들의 미(美)를 감상하는데 있었다.

머리를 땋아 내린 과년한 처녀가 긴치마에 흰 고무신을 신고, 갈매기데가 들끓는 철망안 연못을 물끄럼이 보고 섰다.

─ 보통학교나 다녀본 색신가?─ 양장한 단발양 둘이 엉덩이를 휘두르면서 잔디밭 위를 걸어간다.

─ ××회관 여급이로군! 술 안팔고 왜 나왔나!─ 친구들이나 있었드면, 한패 얼려 보자고 말이나 붙여보 았을 것이다.

트레머리한 여자 셋이 울긋불긋한 치마를 각기 입고, 재 호 옆을 스치고 지나간다.

─ 붉은 치마는 프로필이 좋은데, 다리가 휘었군! 가운데 초록 치마는 키가 작아 글렀고, 끝에 검정 치마는 영 틀 렸고!─ 하고많은 여자의 늙은이와 어린애들만 빼놓고, 눈에 닥 치는대로 모조리 탈도 잡고 찬미도 했다.

얼굴이 반지르르한 여자를 대할때 마음이 동요하는것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한쌍의 젊은 남녀가 나란히 걸어갈때 는 괜히 쓸쓸하기도 했다.

넓은 마당에서는 활동사진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섰 건만, 재호는 눈도 거들떠보도 않고, 앞선 사람들에게 끌 리다시피 동물원을 돌아, 박물관을 돌아, 식물원쪽으로 발을 옮겼다. 박물관 높은 층계를 오르고, 언덕을 내려 연 못가에 이르렀을 때, 재호는 멈칫 서서 자기와 맞닥뜨리 는 두 여성을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한여자는 누군지 모 르겠으나, 흰 저고리에 연두치마, 또 한녀자는 진 미색 저 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굽 높은 구두를 신었건만 미처 옷은 눈에 들지 않았다.

『언제 들어왔어?』

재호는 두어걸음 가까이 가면서 말을 걸었다.

『네?』

두 여자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는듯이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서있다가 히야까싯군인줄 알고 비슬비슬 피하였다.

『아닌가?…미안합니다. 저는 아는 사람인줄만 알고 실 례했습니다』

재호는 여자에게 말을 붙여보려다가 실패한것 같아서 얼 굴이 화끈화끈했다. 두 여자는 재호가 모자를 벗고 사죄 하는 것을 본청만청 언덕 위로 올라가면서 서로 낄

106P~107P 누락

재호는 자기를 비웃고, 박물관 쪽으로 올라가던 두 여성 이 뒤를 할끔할끔 돌아다 보면서 연해 서로 낄낄대기는 하나, 재호는 자기의 실수인지라 그것을 모욕으로 생각지 도 않고, 도리어 일종의 매력을 느끼기까지 하면서, 물끄 럼이 바라보고 서있었다.

─ 괜찮게 생겼어─ 머리 속으로 팔십 오점을 덜컥 매겼다.

─ 어디 사는 여잔가 뒤나좀 따라 볼까?─ 하고, 멀찌기 떨어져서 오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두 여자는 설마 자기네 뒤를 누가 따르랴 하는듯이 손목 을 맞잡고, 돌층계를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딛고 내려가 더니, 전나무가 서있는 잔디밭 위에 펼치고 앉아 방금 내 려온 층계 꼭대기의 전깃불과 사꾸라꽃이 어울러진 풍경 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호는 참아 층계를 내려가지는 못하고 뺀취에 걸어앉 아, 그들이 일어설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 한개를 피 어 물 판인데 누가 등을 탁 친다. 돌아다보니 뻐드렁니.

『여─ 』

『이사람아, 자네 혼자만 이런데 오긴가? 아까 낮에 같 이 오자구 그러잖구』

『저녁을 먹고나니, 심심하길레, 왔지』

『하여간 잘 만났네, 아는놈하나 못만나겠더니…』

둘이 한참 주고받는 동안에도 재호는 쉬지 않고 그 여자 들쪽을 흘끔흘끔 도둑질해 보았다.

얼마 안지나 그 여자들은 치마를 털고 일어서서 걷기 시 작했다. 돌 데를 다 돌아서 그만 가려는것 같았다. 재호는 뻐드렁니 대문에 뒤쫓을 일을 단념하고, 식물원쪽으로 되 돌아 연예관에서 잠시 어물어물하다가 창경원을 나왔다.

전차를 타려할때 뻐드렁니가 꾀었다.

『무─ 랑가서 한잔 할까?』

『나 돈 없어』

재호는 돈 없는것을 까놓고, 그의 하자는대로 했다.

재호가 『무─ 랑』에서 얼근히 취해 집으로 돌아오기는 새로 한시 가까워서다.

명례는 속이 아프다고 자리에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뭣 먹은게 관격이 됐나?』

『아까 낮에 찬밥에 김치를 썰어넣고 고추장 풀어 되게 비벼먹었더니, 그게 탈이 난게야…저녁에도 밥생각이 안 나는 것을 억지도 두어숟갈 뜨구…』

『속 아픈지 몇시간이나 됐어?』

『설겆이를 하다말고 배가 스르르 아프길래 들어와서, 아랫목에 좀 엎드렸다가 일어나니까, 골치가 휭 내둘리구 가슴이 틀어 오르구 하는데 혼났에요. 그래 가게에서 약 한봉을 가져다, 통째로 깨물어먹고 누웠지요』

재호는 명례의 거미 앉은 얼굴과, 창경원에서 만난 여자 의 얼굴을 비교해 보았다.

─ 그여자가 훨씬 낫구말구!─

『열은 없는 모양이군…』

재호는 명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떼었다.

『…약을 두어첩 지어올까?』

『그만두서요. 인젠 괜찮으니…』

『그럼 그대로 자봐, 웬만하면 약 안먹는 것이 몸에 좋 으니까』

빈말이나마 한마디 했으나, 약을 지어오라는 날이면, 불 을 피운다, 약을 달인다 한참 귀찮스러웠을 것을 모면 했 었다. 옷을 벗어 못에 걸고, 자기도 자리 속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방이 덥다』

하고 누우니, 잠은 오지 않고, 창경원에서 겪은 일이 머 리에 떠올랐다.

재호는 일어나서 담배 한개를 꺼내 피어물고 다시 누웠다. 『얼굴에 웬 기미가 그렇게 많아?』

진미색 저고리 입은 그 여자와, 명례의 얼굴을 비교해 보는것이다.

─ 멀리서 오는 광선 관계로 그런지 화장을 잘한 탓인지 몰라도, 그 여자의 살결이 명례보다 훨씬 고왔던 것이다.

『나 말에요?』

명례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손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변명이나 하듯이

『고생을 많이 해서 그렇지!』

『영양분 있는 것을 못먹어 그런게로군! 돼지다리 하나 사다 줄까?』

『말만 들어도 몸이 띵띵해지는데 그러지 말고 속을 썩 여주지 말아요. 속이 썩으면 얼굴도 천해지는 법에요』

『………』

재호는 그말을 묵인했다.

『그런데 별안간 내얼굴에 기미 있고 없는것은 왜 물어 요?』

『지금 보니, 문득 생각나기에 말야』

『원체 못난 얼굴인데, 지금 새삼스럽게 생각날거야 뭣 있어요』

『좋은 구리─ 무 하나 사다 줄까하구』

『아이참 고마워라! 사다 줄 생각 말고, 내 사다 놓은 것 당신 이없애지나 말아요』

『아내봉양으로 전향하쨌더니, 그만 두어야겠군!』

『말리지는 않을테니, 얼마든지 하서. 홍살문은 내가 세 워드리리다.』

『어─ 그 입 고약하다』

재호는 어이가 없어서 돌아누웠다. 대꾸를 하다가는 한 정도 없거니와, 밑천도 건지지 못할 것은 뻔한 노릇이다.

이번에는 명례가 문득 생각난 듯이 입을 열었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아서요?』

『토요일이지 무슨 날』

『그뿐이요?』

『이십일일?』

『이십일일은 어저께』

『그렇지 그렇지』

재호는 명례의 비웃는 얼굴을 곁눈질해 보았다.

『음력으로는?』

『아─ 니, 보통학교 생도로 치고 구두시문을 하는 셈인 가, 어쩐 셈인가?』

『글쎄 맞춰바요』

『음력을 누가 알어』

『그럼 당신 생일인줄은 아서요?』

『내일이 내 생일인가?』

재호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일이 생일이란 바람 한쪽으 로는 기쁘기도 하였다.

『삼월 십칠일이군그래』

『똑똑하구료. 말 한마디 듣고 물리가 통하는것을 보 니』

『예정일(分娩豫定日)보다 삼십일 늦게나서 그런게야』

『호호호…말은 이죽이죽 잘 하는구려. 그래서 입이 저 렇게 큰가?』

─ 내일이 내 생일이라!─ 제호는 명례의 말은 받을 생각도 않고 축복받을 내일은 어떻게 지낼까 하고 궁리했다. 자기 수중에 돈이 없으니, 명례에게도 있을 이 없다. 따라서 생일차리 없을것도 분 명하였다.

『국이나 끓이나?』

『돈이 있어야지요. 미역이나 한꼭지 들여다 끓여 먹고 맙시다』

『처량하다』

『처량할것두 없지. 생일날 굶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기도 하지만』

재호는 속으로 섭섭했다. 그러나 설마 명례가 가만있으 랴?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 잡시다』

명례는 인제 잔소리도 귀찮다는듯이 이말 한마디를 남기 고, 이내 잠이 들었다.

재호는 명례의 새근새근하는 숨소리를 듣자, 방문을 가 만히 열고 나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구수─ 한 국거리 냄 새가 코를 질렀다.

짤그랑!

부엌에서 소댕 깨지는 소리를 듣고 명례가 버선발로 뛰 어나갔다.

『뭐가그래 누구 있소?』

『나야 나, 소두방이 깨졌나, 이 깨졌나, 좀 와봐』

재호의 목소리는 황망하게 들렸다.

국건더기가 얼마나 되나 보다가, 손이 뜨거워 소댕을 깨 뜨렸을망정, 이튿날 아침에 곰국은 훌훌 맛있게 먹게 되 었다.

『염치 없는걸!』

자기에게 이로운 일이 조금치라도 있으면, 재호는 속마 음으로 명례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이로운 일이라는 것도 눈 앞에 들어나는 사소한 일이지, 집안 살림을 어떻 게 뼈 아프게 하여, 굶지 않고 벗지않고 지내는지, 명례의 위공(偉功)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른다. 지난달 월급을 재 호가 집안에 한푼도 들여놓지 않고, 뭉때려 먹다시피 했다. 그러던 이 가정에 크다란 공황이 있고야 말것이다. 쌀 은 외상으로 들여다 먹는것이니, 걱정 없다 치더라도, 반 찬거리 잔돈푼은 어디서 날것이며, 가게 외상값은 무슨수 로 때울것인가.

재호의 보는 바로서는 호강스럽거나 넉넉한 집안은 아니 지만, 그냥저냥 꿀리지 않고 지내는 중류의 가정으로만 알고 있다.

오늘아침 재호의 밥상에 오른 메뉴를 조사한다면, 우선 흰밥─ (생일날 잡곡밥 먹는 사람은 없겠지만) 밥알이 퍼 질대로 퍼지고도 고슬고슬한것이 기름이 지르르 돈다. 명 례가 아침에 석발미를 봉지로 사들고 들어오는것을 재호 는 보았을까?

곰국─ 양에 곱창은 말할것도 없고, 쇠꼬리, 쇠무릎, 허 벅살, 곤자소니도 약간 넣어 푹 고은것이 되어서, 맛은 별 문제로 하고도 이 한그릇이 사륙탕이나, 십전대보탕 한솥 끓인것과 마찬가지의 보혈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국은 오늘 아침 한끼만 대접할것이 아니라, 쉬지 않게 잘 두고 이삼일은 계속해 내놓을것이다.

너비아니─ 갈비가 없어 섭섭하지만 연한 등심을 한근 사서 빛치레로 구워 놓았다. 반은 저녁에도 나올것.

생선지짐이─ 조기 세 마리를 이십원에 사서 쑥갓 넣고, 쇠고기좀 썰어 넣고, 고추장 풀어 얼근히 끓여 식지 말라 고 뚝배기체 올려놓았다. 반은 역시 저녁에 나올것.

강회─ 미나리를 다듬어 줄거리만 따서 데쳐 편육에 감 고, 실백까지 물려 조그마한 양요리접시에 야쁘장하게 괴 었다.

생선구이─ 숭어 한 마리를 사서 머리 자르고, 꽁지 잘 라 겉살을 약간 여민데다 깨소금 간장을 발라, 겉 안타그 속이 익도록 말 히 구워 놓았다.

나물─ 숙주나물, 콩나물, 미나리 연한 줄거리로 묻친 나 물, 무나물을 사기합에 별러 담았다.

이외에도 김구이, 볶은 고추장과 마른반찬으로 건대구, 어란, 북어묻침, 또오이소박이(요놈은 철로 보아 꽤 생각 하고 만든 것이다)얼갈이김치, 햇깎두기‥등등 물론 생일을 차리려고 들자면 한이 없느니만큼, 재호의 밥상에 빠진것도 더러 있고, 어울리지 않을것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명례가 일년을 두고 푼푼이 모으고. 유념했던 돈과, 정성으로 된것이다.

남편이 돈 안주면, 자기에게 돈 나올데 없는것은 뻔한 노릇이다. 남편이 이 고충을 알고 돈원이나 내던져 주면 모르거니와, 원체 집안 일에 등한한 사람, 명례는 참아 생 일차리 하겠다고 손 벌일수도 없었고, 또 그것이 도리가 아닌것 같이도 생각되었다.

큰 손님 들때나 쓰는 교잣상에 늘비하게 차린것을 보고, 재호는 감격한 나머지 입이 귀까지 째졌다. 아내에게 감 사한 생각이 아니드는바 아니나, 이 감사는 단순히 만드 느라고 애쓴 솜씨와 돈 변통에 대한 감사였다. 돈 변통은 이웃에게 꾼돈이라 장차는 자기가 갚아야 할것으로만 알 고 있었다.

『용한데, 웬걸 이렇게 차렸어』

『아무쪼록 많이 잡숫고 기운을 차려서 내속을 태우고 다니시우』

명례는 꼬부장한 소리는 했으나, 남편의 만족한 얼굴을 바라볼때에 자기도 기뻤다.

『…반주는 십전어치만 사온게요, 양에 차지는 않으시겠 지만 회사 때문에 더 못사드리우』

재호는 손짓으로 대답하고나서, 미안해도 훌륭하다는듯 이 밥과 국을 맛나게 먹었다.

재호는 구두 끈을 메고 축대 앞에 나서서 손을 벌였다.

『담배 살돈이 없는데』

전 같으면 한마디 쨍쨍거리고나서 십전 한푼 내던질 명 례가 잠자코 머릿 장 빼닫이를 연다.

─ 없다없다 하면서도 돈 나오는 저 빼닫잇 속─ 재호는 설합 속을 화수분으로 알고 있다.

『있수』

명례가 주는 돈은 일원 한장.

『이그! 이게 웬일이야!』

재호는 너무 황송해서 머리를 긁었다.

『오늘은 특별예요』

토요일이라 반일만 하게되니까 회사의 젊은 사람들의 마 음이 아지랑이처럼 허공에 떠돈다.─ 흰죽을 먹어도 내리 지 않은 뱃속처럼 답답하고 노곤하였다. 포풀라 가지에 뽀쫏이 돋은 움처럼 마음에 부스럼이 돋는지 근질근질하 기도 했다.

『오늘 같은날 야외로 나갔으면 좋─ 겠다』

선술집 좋아하는 촤푸린 수염이 자하문밖 탁주가 그리워 서 먼저 운을 떼었다.

『좋은줄은 누가 모르나』

병구러기 키다리가 돈 없는 한탄을 하였다.

『청양리 송림 새로 걸었으면』

옷모양 내는 친구가 애인하고 산보했으면 하고 궁리었다. 애인은 아직 없어도 파르스름한 넥타이 맨 꼴이 예비 공작을 단단히─ 하고 있는 모양.

『어찌 안그러시리요, 뚜껑머리 하나 구한 모양이시 군!』

재호가 재치 있게 받았다. 뚜껑머리는 열칠팔세된 단발 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없넷 없어』

『없을 이가 있나. 그럼 다람쥐를 잡으러 간단 말인가.

성묘하러 간단 말인가?』

『어─ 나쁜 사람!』

『장가들 나이가 너무 늦었으니, 내버려 두게…한강에나 나가 술이나 한잔 사먹고 들어왔으면 좋겠다』

뻐드렁니도 틈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마디 내놓았다.

『자네 말이 제일 그럴듯하이. 실현성도 많고』

재호가 동감인듯이 뻐드렁니의 어깨를 툭 쳤다. 두사람 은 자리가 가까워서 그런지 같은 술군이 돼서 그런지, 곧 잘 의기가 상합되는 수 있었다.

『가부시끼(추념)─ 』

뻐드렁니는 최후의 안을 내는듯이 낙타의 잇발 같은 길 다란 이를 들어내고 소리쳤다.

『회비는 얼마?』

『이원……이원은 해야 웬만큼 놀지』

분에 넘치는지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왜 말들이 없어? 그럼 일원에 할까. 일─ 원─ !』

경매하는 사람처럼 뻐드렁니는 일어서서 손을 치켜들고 야단이다.

『……일원, 일원일원!』

야외를 찾고, 술을 찾고, ─ 포부를 늘어놓던 군들이 돈 이야기가 나니까, 모다 꼬리를 감추어버렸다.

『회원이 이렇게 없나? 예─ 끼, 이 거지 같은 친구를, 모다 죽어버려라. 돈 일원이 없어 가고싶은데를 못간대서 야!』

뻐드렁니는 실망한듯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나─ !』

재호가 손을 들었다.

『마감이 안됐거든 나하나 넣어주게』

『그렇지…진작 나섰더면 거지소리는 안들었지』

『그러나 이사람, 할인은 해주어야겠네, 구십전에 하 세』

『치사스럽게 할인이 다 뭐야』

『담배 한갑을 샀더니 남는게 그뿐일세 그려』

재호는 통사정을 했다.

회사가 파하자 두사람은 한강교행 전차를 탔다.

『이런때는 택시를 몰아야 하는겐데』

재호가 째를 찾았다.

『회비 할인까지 해달라는 군이 무슨…』

『이사람아, 이래보여도 피눈물나는 돈일세. 자! 회비나 받게』

『그만 넣어두어. 동전 소리 내지 말고』

뻐드렁니가 재호의 손을 가로막으면서 앞에 서있는 승객 들을 창피한듯이 둘러보았다.

전차가 종점에 닿자 두 사람은 뻐쓰 승환할 생각도 않고 강건 까지 걸었다.

시내에서 잔잔하던 바람도 여기에는 강바람이라, 모자를 벗겨갈듯이 분다. ××과자점, ××정으로 기생을 처싣고 달아나는 자동차가 눈꼴 사납게 먼지만 날렸다. 그러나 도회지 사람이라, 푸른 강물과 그 위에 뜬 배만 보아도, 그 티끌이 몸에 불지 않는것 같았다.

두 사람은 철교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막 다 건넌 판이었다. 재호에게는 이름도 모를 양장이지만, 부라운 계통의 스커─ 트와 코─ 트에다 금빛 나는 불라우스를 입은 여 자가 난간에 기대서서 강물을 굽어 보고 있다. 비교적 길 게 늘인 단발이나, 끝은 지져 꼬부리고, 머리에 쓴 검은 바탕에 주색 줄이 진 베레─ 와 같은 빛갈로 같은 줄이 진 핸드백은 제법 격을 찾느라고 찾아, 멋들어 보였다.

『요─ 유나씨』

뻐드렁니가 아는체 하고 말을 걸었다. 그 여자는 놀란듯 이 두 사람쪽을 바라보더니 손을 쳐들었다.

『웬일이십니까』

『동무와 만나기로 했는데 안오는군요』

재호는 그 여자를 보자마자, 두다리가, 땅에 붙고 말았다.

여자는 갖은 애교를 다 부려가며, 뻐드렁니와 몇마디 주 고 받고 하더니, 낯선듯이 재호쪽을 바라보았다.

재호는 죄없이 그 여자를 마주 바라보기에 체면 적었다.

그래서 그 여차의 눈독(설마!)을 피하느라고 고개를 슬며 시 돌렸다.

뻐드렁니와 그 여자는 여전히 수작이 오고 가고 하였다.

『동무라니 남자 동뭅니까, 여자 동뭅니까?』

『물론 여자 동무지요』

『물론 여자 동무에요? 못오나붑니다. 기왕 나오신 김이 니, 같이 산보나 하시다 들어가시지요』

『감사합니다. 같이 나오신 분이 계시지 않어요?』

『네 나와 한회사에 있는 친굽니다. 소개해 드릴까요?』

뻐드렁니는 재호쪽을 돌아보며

『박군!』하고 불렀다.

『이분은 강유나씨신데, 내 친구의 메씨되는 분이야』

『그러십니까?』

재호는 모자를 벗고, 용기를 내어 두어 걸음 나섰으나, 얼굴이 모닥불을 피우는것 처럼 화끈화끈하는것을 깨달았다. 『저는 박재호란 작자올시다』

허리를 굽혔다.

『작자? 하하하하…… 오해 마십시요. 아주 익살 잘 부 리는 친구가 돼서』

뻐드렁니가 주(註)까지 달았다.

『아이참!』

유나는 손수건을 입에 대고, 소리 안나게 웃으면서 따라 절했다.

『그저 많이 귀여워해주시고, 지도해 주십시요』

『아이참 별말씀 다 하시네』

유나는 재호의 유─ 모어를 빈정대는것으로 들은듯이 약 간 엄숙했다. 그러나, 이어 부드러운 낯으로,

『어디서 뵌듯도 한데요』

하며 생긋이 웃었다.

『어젯밤 창경원에서 제가 실례한 일이 있지 않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창경원에서요……』

유나는 먼산을 바라보며, 잠시간 눈을 깜작깜작했다.

『네네 알겠어요, 저─ 식물원 앞에서 말이지요?』

『네』

『실례가 무슨 실례에요. 모르고 그런수도 있지요』

『부랑자로 오해를 하셨을까 해서 저는 밤에 잠도 못잤 습니다』

『아이참 별말씀……』

유나와 재호는 불과 몇분 동안에 구면처럼 되었다.

『자─ 저리로 갑시다』

뻐드렁니가 길을 인도했다.

『유나씨 점심 안자셨지요?』

『아까 백화점에서 먹고 왔어요』

『웬걸 그리 일찍 자셨습니까. 우리는 안먹었는데』

『그럼 어디 가서 요기하구 오셔요.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께』

『그래서야 될말입니까……먹을거나 좀 사가지고 선유나 한번 합시다』

─ 웬돈이 나서 저러나─ 재호는 뻐드렁니가 신이 나서 날뛰는것이 속으로 우스웠다. 유나를 길에 세워두고 둘이 가게에서 먹을것을 흥정할 때 재호가 뻐드렁니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자네 애인인가?』

『예끼 미친놈?』

『그럼 미쓴가? 미세쓴가?』

『말 하자면 미쓰라고 할수 있지. 그건 왜 묻나』

『글쎄 말야』

재호는 미쓰라고 할수 있다는 말이 흥미 있었다. 그 까 닭을 캐보고 싶었으나,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못묻고 말았어. 『이녀석 벌써 반했니』

『아니야』

재호는 어물어물 말 꼬리를 돌렸다.

『맥주는 왜 사나, 저이 앞에서 먹어도 괜찮은가?』

『걱정 말어! 마음 놓고 먹게』

『무엇하는 여잔가?』

그만 묻겠다 하면서도 왜그리 궁금한지.

『들어앉은 여자야』

『상당한 신식가정인게로군!』

『지금은 시원찮지만, 전에는 잘살던 집안이야』

재호는 까닭 없이 마음이 죄었다 놓였다 했다. 어젯밤에 는 조선옷, 오늘은 양장 이렇게 변한 유나─ 너무나 때벗 은 양장에 처음은 어느 카페─ 의 여급인가도 생각하였었다. 일본 물을 먹고온 여자가 아닌 다음에는 화장도 그렇 게 대담하게 익숙하게 할수 없었다.

─ 어쩌면 집의 여편네 얼굴과 꼭 같은가?─ 그러나 명례에 비하면, 무명옷과 비단옷의 차이가 있었다. 사과로 친다면 홍욱과 왜금, 포도로 친다면 달고 향기 높은 머스캇과 시금털털한 워싱톤의 차이가 있어 보였다.

─ 좋은 얼굴과 체격이다─ 볼수록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의렛건 취하는 코─ 스인것처럼 뱃사공은 일행의 의견도 듣지 않고 뱃머리를 상류로 돌렸다. 지남철에 쇳 가루 붙듯 뽀─ 트가 닥지닥지한 ××유선구락부의 모설 (母船)도 차차 밀어간다.

가벼운 배멀미때문에 한손으로 뱃전을 움켜잡고, 물살만 보고있던 유나가 손수건을 떼면서 입을 열었다.

『날이 선선하군요!』

선유할때가 아직 이르다는것이다.

『이리 내려오시지요』

재호가 말을 받았다.

『거기가 왜 아랫묵인가요, 내려가게』

『아랫묵은 아니지만 사람이 모여앉으면, 스팀 놓은것처 럼 후끈후끈하지 안습니까?』

여자 한분을 모시어서 황송하기 짝이 없으나, 맥주 한다 ─ 쓰에 이것 저것 먹을것이 많아 화롯불을 끼고 앉은 폭 이 되는지, 재호와 뻐드렁니는 벌써 웃저고리를 벗어부치 고 앉아 있다.

『남자들은 추위로 모르나바』

『그러기에 냉은 여자들에게 많은 모양이지요』

─ 추저분한 소리로 한다─ 하듯이 유나는 고개를 백사장쪽으로 돌렸다. ─ 시재를 파옮기는지 새까만 트럭 한대가 장난감처럼 들까불면서 굴러간다.

재호는 너무 실없이 구는것 같아서 미안했다. 모처럼 인 상 좋은 여성을 만나 대화에 궁핍을 보이지 않으려한 노 릇이지, 결코 악의는 아니었으나, 유나의 새치름한 표정 이 마음을 꼬집어 뜯는것 같이 따까왔다.

─ 실없는 소리는 인제 그만두자─

『유나씨 이만것은 양해하실터이지만 용서하십시오』

뻐드렁니가 이것저것 챙겨 놓을것을 챙겨놓고나서 좋이 고뿌 두개에 맥주를 그뜩 따르면서 유나를 미안한듯이 본다. 『상관 마시고 잡수셔요. 충분히 양해합니다.』

『충분히 양해하셔요?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것만 있으 면 그만이니, 유나씨는 이런것이나 잡수실까?……옮지 사 이다도 있지』

작은 보따리만한 과실 과자 봉지를 뜯어놓고 사이다도 한고뿌 부어 유나쪽으로 밀었다.

『좀 다거 앉읍시요』

재호도 곁따라 권했다. 유나는 허리를 약간 굽혀

『감사합니다』

하고 조금 들어앉는체 했다.

─ 양장은 저게 틀렸어─ 재호는 유나가 짧은 스카─ 트 때문에 두 다리를 꼬아 한쪽으로 꼬부리고 앉은것이 몹시 불편하게 보였던것이다. 『의자나 하나 준비해 드렸더면 좋을걸?』

실없은 말이 또 무심코 불쑥 튀어나왔다. 은지에 싼 초 콜레트를 집으려던 유나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다 스렸다. 금줄 쳐놓은데 방갓 쓴 상제가 달려들듯이, 수도 원에 떠꺼머리 총각이 뛰어들듯이 재호의 주둥이가 여자 의 몸의 어느 성역(聖域)을 범하는것처럼 생각되었던 까 닭이다. 유나는 얼굴에 약간 홍조를 띄웠다.

『아이참, 박선생 앞에서는 책잡힐 일이 많아서 어디 앉 아 있겠어요』하고나서 재호가 무안해 여길까봐 이어

『호호호호………』하고 웃음으로 씻어버리려 했다.

『그렇게 말씀 하면 제가 더 미안스럽습니다. 함부로 농 을 해서』

『아니얘요. 그렇게 생각 마셔요』

유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원래 천성이 그런걸요.……그러나 사람은 악의가 없고 수더분하니, 그리 알고 사귀십시요』

뻐드렁니가 그럴듯이 변명을 해주었다.

『저두 농담으로 말씀 드렸는걸요 뭐……노여워 마셔요 네』

유나는 고개를 갸우뚱 해가지고 재호를 빤히 쳐다보며 방그레 웃었다.

『천만에요. 되려 내가 할말입니다』

『인제 무슨 말씀을 하셔도 괜찮어요』

유나는 채호의 옆으로 가까이 앉으면서 사이다를 들었다. 『우리들의 행복을 빕시다』

뻐드렁니의 선언을 따라 세사람은 잔을 비웠다. 재호의 뱃숙에는 서늘한 맥주가 짜릿짜릿하게 흘러 내렸다. 그러 나 거품같은 행복이(아직은 터무니 없는 행복이지만) 부 글부글 끓어 올랐다. ─ 유나라는 여성이 자기 옆에 있는 것으로 해서.

유나가 맥줏병을 들어 뻐드렁니의 잔에 붓고, 재호의 잔 에도 대었다.

『남이 술을 칠때는 잔을 드는 법이라지요?』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재호는 얼른 고뿌를 들고, ─ 모던 여성이라 마르구나!─ 했다.

『그런것도 모를까요?』

맥주가 조금 넘쳐 재호의 무릎에 떨어졌다.

유나는

『미안합니다』

하고, 얼른자기 손수건으로 훔쳤다.

『아니 괜찮습니다. 내버려 둡시요』

재호는 술 떨어진 무릎을 한 옆으로 들리려다가, 들었던 잔이 더 엎질러질까봐 그대로 있었다. 유나의 머리털이 자기의 턱에 닿을듯 닿을듯 하면서 목에까지 바른 분냄새 가 코에 느꼈다.

『미안한걸요, 이 더러운 옷을』

『아닙니다. 깨끗한 옷에, 콧수건을 문대서 제가 미안합 니다』

이번에는 유나가 농을 걸었다. 재호는 그런 코는 얼마든 지 문대어 줍시요!

소리가 나오려는것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하─ 얀 종이 컵은 병에 든 맥주를 두 사람의 뱃속에 옮 겨 주는 역할 밖에 안한다. 그러나 한잔씩 부을적마다 병 안에 든 술이 수은주처럼 내려가는것은 앞으로 닥쳐올 술 의 빈궁을 정확히 칙정하는 메─ 터─ 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화폐로 환산하여 결국 포케트의 공허를 의미하는 것도 된다. 다섯병이 없어지고 여섯병으로 넘어설때, 어 지간히 취기도 돌았지만, 재호는 야속하였다.

─ 이 기꺼운 시간을 연장하자면, 저것이 없고는 안된다 ─ 뻐드렁니의 호주머니 속을 알길이 없으니, 어찌 넉넉하 랴 싶었던 것이다.

『일요일마다 한번씩 이렇게 야외로 나오면 좀 좋은 가?』

뻐드렁니는 인생을 도피하고, 선계(仙界)에 나선듯이 유 쾌하게 외쳤다.

『좋구말구요』

유나도 동감이었다.

『요다음 주일에는 우리 관악산 가볼까?』

『관악산은 멀지않어요?』

『안양서 내려 삼막사만 갔다 오자면 얼마 안됩니다. 진 달래꽃이 많이 피었을테니 그것도 구경하고, 절에 가서 점심이나 한끼 사먹고 오면 되지요』

『연주대가 볼만한데』

재호도 잘안다는듯이 내뜨렸다.

『이그, 거기는 너무 멀어. 유나씨가 가실수 있으리 구?』

『너무 먼데는 못걸어요』

유나는 가보기도 전에 다리가 아픈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삼막사까지만 갑시다. 정거장서 평탄한 길로 십리밖에 안되니까, 구두 신고도 넉넉할껩니다. ……가시렵니까?』

『그럼 가지요』

뻐드렁니는 명함갑에서 조그마한, 찻시간표를 꺼내들고, 용산역에서 만날시각과 귀로에 안양서 타고 다시 용산에 내릴 시간을 협의했다.

『나도 한몫 들어야지 응?』

재호는 어린애처럼 따쳤다.

『이사람이 정신이 나갔나?』

『물론 가서야지요』

유나는 우습다는듯이 재호의 얼굴을 말끄러미 보았다.

『그럼 유나씨가 가시는데, 배행의 광명을 내리시렵니 까?』

『박선생두 참 별말씀을 다하시네. 이제 봤더니 아주 험 구시어…두분중에 한분만 빠져도 난 안갈테야요』

『암 다 가야지요』

뻐드렁니는 총지휫격이 되는듯이 유나의 보호자가 되는 듯이 날뛰었다.

─ 말괄량이 짓은 해도, 몸조심은 할줄 아는구나!─ 재호는 이렇게 생각했다.

다음 주일 푸로가 작정되고나서 술은 또 계속됐다. 이야 기와 웃음도 뒤따라 끊일 새가 없었다. 처음부터 여자의 앞이라, 조심은 한바이지만, 유나에게 별 실수 끼친 일없 이 술도 취했다. 재호는 가쁜듯이 뱃전에 기대어서 유나 에게 시선을 한참 동안 꽂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칠때는 얼른 눈을 깔기도 했으나, 유나가 모를 이 없었다. 그럴때 마다 유나의 얼굴은 타오르는듯이 붉었다.

『왜 자꾸만 보셔요』

유나는 면구해서 물었다. 재호는,

『아닙니다……』

하고 변명을 앞세워 놓고,

『…꼭 같은 사람이 있어서 그럽니다』

『나하고 말에요?』

『네네…쌍둥이랬으면 좋겠어요』

재호의 눈에는 유나의 얼굴이 명례의 얼굴과 둘로 보였다. 『누군데요?……나같은 못생긴 얼굴과 같은 사람이 또 있어요?』

『천만에요. 유나씨야말로 현대적 미인이신데』

재호는 솔직하게 말했다.

『아이참 망칙해라』

유나는 부끄러운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다시 고 개를 되돌려,

『그래 그이는 누구에요』

『저─ 기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저─ 기라니 누구요, 선생님 애인이십니까?』

『천만에요』

재호는 공든 탑이 무너지나 해서 펄쩍 뛰었다.

『……나 아는 사람의 부인이 유나씨와 모습이 꼭 같고 목소리까지 같은데, 유나씨에 비하면 어림도 없습니다』

『유나는 아이참 너무 놀리지 마셔요』해 놓고,

『실례지만 부인이 계시지요? 퍽 예쁘실것 같아요, 선생 님이 저렇게 고우시니까』

『뭘요……』

재호는 목이 탁 매쳤다.

『지지리 못생겼습니다』

지킬수 없는 비밀이지만, 아내의 말이 나온것은 재호에 게 치명상이다.

『겸사의 말씀도 하시네, 두분이 의좋게 지내시는것을 한번 봤으면 좋겠어…… 댁에 한번 갈까요?』

『얼마든지 오십시요만, 살풍경입니다』

『살풍경은 왜 살풍경에요?』

『의가 좋은면 이렇게 술만 먹구 다니겠습니까, 말씀 맙 시요』

말 못할 사정이 있는듯이 재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고 속으로는 유나가 이말을 어떻게 해석할까? 했다.

『괜─ 히 그러시지 마셔요. 남자들의 저런 소리는 입버 릇인것 같애요』

『허허 참 기맥힐 노릇이군! 남의 사정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지…』

『정말 그러시다면 허물은 박선생님께 있을거야요. 남성 은 횡포하니까』

『제게 허물이 무슨 허물입니까?』

『대개 보면 여자에게 동정할 점이 많아요. 여자들이야 무슨 죄가 있나요? 남편이 공연히 바람이 나서 집안을 돌 보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마음이 다른데로 쏠리니까 그렇 지…박선생도 그러시리라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저 말씀 마십시요. 머리 아픈 일이 한두가지가 아닙 니다』

재호는 조련질을 당하는것 같아서, 등에 땀이날 지경이 었다. 유나는 같은 여성을 동정해서 구술시험 보듯이 여 전히 따지고 물었다.

『부인께서 구식이셔요?』

『구식도 아니요, 신식도 아닌 얼치깁니다…으히려 구식 편에 가깝지요』

재호는 이말을 해놓고 유나를 엿보았다. 다소 동정하는 눈치인가 하고.

『연애결혼이실테지요』

『연애결혼이 다 뭡니까. 부모들 등살에 못견디어 했지 요』

속으로는─ 잘한 말이다 잘한 말이다─

『……』

유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때에 두사람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뻐드렁니가, 어떻게 들으면 재호에게 유리한 말로 한탄한다.

『비극이야 참말 비극─ 』

학생들이 탄 뽀─ 트가 두어척 심술궂게 뱃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의 대화는 해방당한것처럼 중단되고 말았다.

『벌써 다섯시가 지났네』

유나가 해 저문것을 고했다.

『벌써 그렇게 됐나요……그럼 들어가지.』

재호도 따라 말했다.

『들어가? 오늘은 참 유쾌한데, 유나씨는 괴로우셨겠지 만』

뻐드렁니는 수인사를 늘어놓았다.

『천만에요, 저도 참 유쾌해요』

유나는 핸드빽에서 콤팩트를 꺼내들고 돌아앉아 얼굴을 매만졌다.

코티─ 의 향기가 타분하게 떠돈다.

밀물에 배는 흔들리면서 근거지로 내려갔다.

배를 버리고 큰길 위에 나섰을 때는 벌써 전깃불이 들어 와 일폭의 풍경화 가운데 점짐이 빛나고 있었다.

『저거를 보십시오……』

재호가 유나에게 가리켰다.

『…목동이 피리를 불며 소등에 앉아 갑니다그려』

『어디!』

합비를 입은 어느 상점의 소년배달부가 하─ 모니카를 불면서 자전거를 타고 간다.

─ 왈쓰곡으로된 유행가를 불면서─ 유나는,

『박선생님은 상당한 풍자시인이시군요!』

하고 눈웃음을 쳤다.

지나가는 빈 자동차를 불러 세우고, 뻐드렁니가 유나를 그안으로 모시었다.

『다음 일요일 오전 열시 정각까지 용산역에 모이기 로……아셨습니까?』

『알았어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요』

문을 닫아주었다.

『같이 타고 가시지 왜 그러서요』

『우리는 또 볼일이 있습니다. 먼저 들어가십시요』

『그럼 실례합니다. 박선생님 요다음 일요일날 또 뵙겠 습니다』

『네 또 뵙지요』

재호는 같이 탔으면하고 공허를 느꼈다.

쉬보레─ 는 가벼운 폭음소리를 내면서 두사람을 남기고 달아난다. 유나는 뒤를 돌아다보며 생긋이 인사했다. 재 호와 뻐드렁니도 손을 들고 답례했다.

『우리는 아홉시 전에 만나야 하네, 준비할것도 있고 하 니』

『그러지』

『문안 들어가서 저녁을 먹고 헤지세』

뻐드렁니에게 또 끌려, 재호는 전차로 종로에 와 내려서, 어느 양식집으로 들어갔다.

一○

편집

양식집을 나와, 다시 두어군데 찻집을 들려서, 재호는 열 시나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찻집 「라인」을 나와, 뻐드렁니와 헤어질때 그 가 자기에게 한말이 기억된다.

남녀란 가까워지면 할수 없느니!

서로 좋아서 맺어지는 사랑이라면, 모든것을 초월할수도 있다지만, 부작용(副作用)이야 없을수 있나? 아내있는 자 네를 유나가 멀마큼 생각할지도 모르려니와, 친구인 나로 서도 무어라고 말할수 없네』

그때 자기가 무어라고 어물어물 대답했던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현재에 자기는 자기의 아내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그렇 다고 미워하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가정의 재미란 달지 도 않고, 쓰지도 않고, 말하자면 선 참의를 깎아먹는듯 심 심할 따름이다. 옛날 노인들은「부부란 의리로 사는것이 니, 잔재미가 없이 평범한 그것이 곧 부부의 애정이니 라」했지만 일리가 없는 바는 아니나, 일구삼×년도에는 벌써 낡은 갓앙테와 같은 금언(金言)이다. 시대의 대세를 따르자면 아무래도 베와 대에 칠을입힌 갓보다, 씰크리본 을 두른 쏘프햇이 격에 맞을것은 정한 이치다.

아내를 직제상으로 본다면─ 시어머니는 가슴에 은장도 를 차고, 슬하에 수많은 자손을 거느리니, 여왕으로 봉할 수 밖에 없고, 어깨에 금장은 달지 않았을망정 며느리는 칙임관─ 남편을 위하여 자지고름을 달고, 가식을 위하여 남끝동을 단 큰 며느리는 특히 일등의 관록이 있고, 삼희 장저고리까지. 작은 며느리는 이등. 봐부 며느리는 실격 (失格)이니, 흰저고리에 판임관 대우는 해야 될것이다. 옛 날에도 이랬어니, 명례가 자기에 따른 식구의 한사람으로 만 생각되고, 아내라는 관념이 안생기니, 웬일일까? 시체 여성이 시체아내 노릇을 매섭게 하고 안하는것을 알자면 구두 뒷축의 높이와 치마의 무늬를 보고 알수 있다. 그러 나 그런것도 겁나는 일이요, 명례처럼 너무 맥없이 유순 한것도 만족지 못하다. 살림을 알뜰히 한다? 재호인 남편 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공장에서 실 뽑는 여직공처럼 단 순한 생활을 위한 사무적 일일뿐이다. 둘이 생활을 위하 여 애쓰는것은 고마운 일이나, 남편인 재호에게는 정신적 양식을 주지 못한다. 말하자면 신혼당시처럼 애정의 기교 도, 식탁에 오르는 메뉴─ 와 같다. 물릴 때는 얼마든지 고칠수 있지 않을 까?

유나는 명례와 같은 연배요, 용모도 같고 목소리도 같건 만, 재호에게는 무엇이고 마음 가운데 주는것이 있다.─ 재호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재호가 유치장에나 들어가는 기분으로 방안에 들어서니, 명례가 손바닥만한 경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돌아다 본다.

─ 요꼴에 모양은 내서 뭘해─ 재호는 까닭 없이 불평이 들끓었다.

『저녁 어떻거셨수?』

『먹었지 그대루 있어!』

속으로는, ─ 값 싼 구리무 바를 생각 말고 손에 양념내나 피우지 말았으면─ 했다.

『국을 괜─ 히 올려놨지!』

명례는 손바닥으로 콧날을 비비면서 혼자말로 했다.

『화장은 별안간 왜 하느라고 야단이야!』

『목욕 갔다 왔어요』

핀잔을 받을것 같아서 얼른 어름더듬하고 손을 뗐다. 그 리고 일어서서 재호가 벗어 걸려는 옷을 자기가 받아 못 에 척척 걸었다.

『오늘은 다른날과 달라 좀 일찍 오지 그러셨어요?』

『일찍 오면 뭘해?』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일찍 들어오나요?…… 왜 오늘 무슨 역정나는 일 있었군요? 우울해하시니』

다른날 같으면 뽀루통해가지고 『왜 잔뜩 부었소?』

『우거지상이구료!』하고 갖은 푸념을 다 했을것이다.

재호는 멋적게,

『역정날 일도 없고, 좋은 일도 없고!…』하고는 자리 속 으로 기어들어가고 말았다.

명례는 남편을 더뜨렸다가 탈이 날것 같아서 좋은 낯으 로 될 수 있는대로 말 없이 대했다.

『그럼 일찍 주무서요. 내일부터는 여덜시반에 시작이라 니까 그대중하고 일찍 일어나야 안돼요』

재호는 알아들었다는듯 아무말도 안했다. 어느쪽이고 누 가하나 입만 봉하고 있으면 식구 없는 이 집안은 더한층 쓸쓸하다. 재호는 명례가 밖에 나가 불단속을 하는 동안 그의 가엾은 정경도 생각해 보았다.

─ 나한테 좁더 예뻐보이려구 밀기름, 냄새 나는 구리무 를 다 바르구─ 그러나 일분이 못다가서 유나의 스마아트한 양장이 머릿 속에 보름말처럼 떠올랐다.

十一

편집

─ 내가 정말 유나에게 미쳤나부다─ 떡줄 사람이 생각을 하는지 안하는지도 모르고 재호는 공연히 애가 달았다.

뻐드렁니의 말 마따나 사랑은 맹목적이라지만, 부작용이 없을수 없다. 더구나 자기는 아내 있는 몸, 뜻을 이룬다 할지라도 일은 크게 벌어지고 말것이다.

─ 단념해야지!─ 욕심이란 한정이 없는것이다. 아내가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군것질하듯 갈아대서야 연애를천만번 하고, 이혼을 뒤보듯해도 다 못할것이다.

─ 그러나 그것도 정도문제지, 일생을 즐겁게 지낼만한 상대자가 나서는 경우에는 하는수 있나?─ 부부제도라는것은 일종의 형식이다. 단순히 형식이다.

단순히 형식에만 얽매어 일생을 무의미하게 지낼 필요가 무엇이냐?

─ 유나! 유나! 나의 마음에 손톱 자국을 낸 유나!─ 재호의 머릿속은 실밥을 뭉쳐놓은것처럼 갖은 생각이 얼 켰다. 풀래야 풀수 없이 한가닥을 잡아다리면, 다른 한가 닥이 더 단단히 얽히고 뭉쳤다.

─ 유나와 일시 관계가 되어 명례 모르게 지내다가 서로 헤어지면 몰라도 한평생 같이 붙어 살겠다는 나날이면 부 득불 한여자는 처치를 해야 할것이다.

누구를 처치하나? 물론 명례를 버려야지!

명례와 이혼말이 난다면 어찌 될까? 그 매서운 성미에 가만히 있지 않을것이다.

김칫독에 거꾸로 박힌다거나 허릿바로 목을 매고 대들보 에 매달린다거나, 양잿물을 얼음사탕 먹듯 한다거나……

무슨 일이고 저지르고야 말것이다. 악담인들 오직하랴, 입으로 내쓰지는 않겠지만─

『연놈이 혀가 빠져 죽어라!』

─ 제까짓게 암만 그러면 소용있나, 나할대로만 하면 그 뿐이지!─ 제법 용기를 내보았으나, 찬바람이 머리에 돌았다.

한쪽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 가엾은 여성이다─ 세상의 좋은것을 다 버리고, 오직 남편 하나만 바라고 사는 명례, 남편의 일이요 집안 일이라면 쓴것도 달다 하 고, 울 일에도 웃는 종노릇도 하고 개노릇도 하는 명례, 명례에게 죄라고는 손톱끝만큼도 있을 이없다.

─ 선량한 아내를 버린다는것은 결국 죄다. 예기, 될대로 돼라, 모르겠다.─

『왜 안주무셔요?』

잠든체하고 누워있었으나, 남편이 잠 못자는 눈치를 알 고, 명례가 입을 열었다.

『뭐 생각는게 있어서』

재호는 마지 못해 대답했다.

『생각은 두었다 내일 하지, 지금 몇신데 그러우』

땡 땡!

마침 시계가 내띄듯이 두시를 쳤다.

『걱정되는 일이 있어요?』

명례가 또 근심스러운듯이 물었다.

『장부를 잘못 처리한것이 있어서』

재호는 슬쩍 이렇게 둘러대었다. 아닌게 아니라, 장부의 착오보다 더 큰일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나서 속으로 생 각을 했다.

─ 유나를 안만나는게 제일 상책인가 부다. 공연히 마음 이 들떠서 평지풍파를 일으킬 까닭이 있나. 미우니 고우 니해도 명례가 내복에 닿는 여자다─ 그러나 이생각도 그때뿐이었다. 재호가 회사에 나가, 뻐 드렁니와 관악산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유나의 장점도 듣고, 또 거리에 다니는 예쁜 여자들을 볼때에는 유나가 한층더 빛나게 머리에 솟았다.

─ 별수 없다, 될대로 되어라! 최초에는 동무로 사귈수밖 에 없다. 일이 거북하게 되거든 그때가서 처리할 일이다.

─ 재호는 돌아오는 일요일에 쓸 자금을 융통하기에 젖먹은 힘이 다 들었다.

명례에게 돈말을 했다가 코를 떼고, 친구에게 말해봤으 나, 될턱이 없고, 결국은 거래하는 싸전에 십일원 전표를 써놓고 십원을 빗 얻었던것이다.

울적갈적 차비하고, 점심값에……돌아와서 만찬을 하고, 자동차로 태워보내고 하자면 존절히 써야할판. 뻐드렁니 도 그 준비야 하겠지만, 한강에서 신세진 일을 생각하면, 이번 차례는 갈데 없이 재호에게 있다.

그리고 그날을 위하여 옷치장도 대강은 해야 할터인데, 우선 와이샤쓰도 새놈을 입어야 할것이고, 양복바지도 주 름을 내야하겠고, 넥타이를 새로 하나 사든지, 그렇지 않 으면 노─ 타이샤쓰라도 한벌 장만해야 되겠고……어쨌든 이런일 저런일로해서 한주일동안 돈은 없고 생각만 바빠 서, 없는집 화갑잔치 준비만큼이나 가뻤다.

복습(復習)

편집

다음 일요일날, 바람기는 있으나 청명한 날씨였다.

재호는 아침밥을 몇술 뜨는체 마는체하고 용산역으로 갔 을때는 세사람중 누구보다도 일착(一着)이었다. 너무 부 지런을 부려, 시간이 이르지 않은가하고 시계를 보니, 도 리어 뻐드렁니와 만나자던 아홉시가 십분이나 지났었다.

─ 웬일인가 게으름뱅이라 하는수 없군!─ 하고, 재호는 개찰구 앞으로, 일이등 대합실로 뒷짐을 지 고 왔다갔다했다.

노는날이라 야외로 짧은 여행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비단 재호네뿐이 아니었다. 철 이르게 고꾸라양복을 꺼내 입고, 누런 각반을 친 중학생 한패가 한군데 몰려서서 뒤 떠들고 있었다.

망월사니, 소요산이니, 하는것을 보아 경월선방면으로 코─ 스를 취하는 모양. 어머니는 젖먹이 애를 들쳐업고 아버지는 소학교 일이년짜리를 양쪽손에 맞잡고, 매점 앞 에서 캬라멜을 사 나눠주는 일본사람 내외, 남생이만한 빨병은 아이들에게 메게하고, 먹을것을 싼 보퉁이는 어머 니가 들은것을 보아, 온가족이 출동하여 하루를 들에서 지낼 작정인것 같다. 또 대합실 한구석에는 양장한 젊은 여자와 하이킹복을 차린 청년이 번다한 이꼴을 꺼리는 듯 이 뺀취에 걸터앉아 속살거리고 있었다. 재호는 그들이 부러우면서도, 조금있다가, 유나가 올것을 생각고 자신을 위로했다.

경부선 남행은 열시 팔분에 있다. 십분을 남겨놓고 유나 는 택시를 몰아왔으나, 뻐드렁니는 오지를 않았다.

『난 찻시간 놓치는줄만 알고 부리나케 오는 길이야요』

유나는 편히 타고 왔으면서도, 마음이 조렸든지 숨이 차 서 할딱거리면서 개찰구쪽을 두리번거렷다.

『몇분 안남았는데요』

『김선생님은 웬일이서요?』

『우리는 아홉시까지 여기서 만나자 해놓고 여지껏 안옵 니다그려』

재호도 걱정스러운듯이 멀리 전차정류장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사고가 계신가』

『글쎄요,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재호는 연해 시계를 쳐다보았다.

칠분밖에 안남았다.

『우선 차표나 사놓고 기다려보지요. 안올 이는 만무하 니……』

하고 유나의 의견도 듣기 전에 안양까지 석장을 샀다.

유나가 자기표는 자기가 사겠다는것을 굳이 말렸던것이다. 개찰구로는 벌써 사람들이 나간다. 그러나 뻐드렁니는 오지를 않는다.

『어떻게 할까요. 김군은 못오는 모양이고, 기위 나선 길 이니……유나씨 의향은 어떠십니까?』

표는 한장은 버릴 요량하고라도 이미 사놓았고 먹을것도 두어뭉팅이 되는것을 손에 들었다 첫 .

『어떻기시겠어요, 남들은 다 나갔는데요 유나씨가 그만 두자면 그만두는것도 좋지만』

『………』

유나는 난처하다는듯이 그 고운 얼굴이 흐렸다. 두번째 만나는 남자를 얼른 따라 설수도 없는 노릇이요, 그렇다 고 지난 공일에 흉허물 없이 지낸 교분으로보아, 그의 호 의를 무시할수도 없는 처지였다.

재호는 유나를 눈으로 재촉하고 먼저 개찰구로 나가─ 서 차표 두장을 역원에게 내밀었다. 유나는 저절로 그뒤 를 따르게 되었다.

『정 가시기 거북하시면 그만두셔도 좋습니다. 요다음 기회에 갈셈잡고……』

『아니야요』

유나는 재호에게 변명하듯이 했다.

『김선생이 빠지셔서 섭섭한데요』

『불쾌히 생각하실것 같아,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천만에 말씀애요』

유나는 억지로나마 그제야 싱그래 웃었다. 수원까지 가 는 자동차 안은 거의 빽빽히 찼다. 재호와 유나는 남늦게 들어갔으나,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남보기에는 애인끼리 앉은것처럼 어깨를 맞대고 앉았다.

『지금이라도 왔으면 좋겠는데』

재호는 유나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연송 차창 밖으로 머 리를 내밀고 개찰구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차에 오를 사람은 다 올랐는지 가위를 든 역원은 한가롭게 서 있기 만 했다.

플레트폼의 전령소리가 끝나고, 경적은 울렸다. 차는 벌 써 궤도 위를 미끄럼질 친다.

─ 인제는 별수 없다─ 하고, 재호는 겨우 숨을 내돌렸으나, 유나는 모든것을 단 념한듯이 말한마디, 않고 차창만 내다보고 있었다.

─ 이대로 천리만리 가버렸으면─ 재호는 남편과 어린 자식을 내버리고 달아나는 소부의 마음같았다.

벌써 한강철교.

『지난 일요일은 꽤 욕보섰지요?』

저─ 편 인도교쪽을 바라보면서 재호는 한토막의 추억담 을 늘어놓으려했다. 그러나 유나는,

『별말씀 다 하시네, 퍽 유쾌했어요』

하고 잠간 웃는 낯을 보이고나서, 다시 창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호는 멋적어서 속으로─ 이색시가 종시 이렇게 뻣뻣이 굴텐가! 했다.

강물은 푸르다. 지난주일에는 저물에 배를 띄워놓고. 유 나에게 첫정이 들었거니! 오늘은 신혼여행처럼 한차에 나 란히 앉아 있으나, 그때보다도 마음에 미흡한 점이 많았다. 『수영하실줄 아시겠지요』

재호는 유나의 하─ 얀 육체가 청개구리처럼 물속에서 노는것을 연상했던것이다.

『할줄몰라요』

무뚝뚝하다.

『겸사의 말씀……』

『산골에서 자라서, 물에 들어가본 일이 없는걸요……선 생님은?』

『저말씀입니까』

공연한 군소리다.

『저는 물에 들어가기는 종종 합니다다만 가라앉는 재주 밖에 없습니다』

『그럼 여러해 해보셨군요』

『여러해요? 잠행술도 아십니다그려. 빠져 죽을 각오한 다면, 한간통은 나가겠지요』

유나가 고개를 돌렸다.

─ 왜 저렇게 실없이 굴까─ 하는듯이 가끔 흘겨보고나 서,

『아이참 선생님두…』했다.

재호는 심술궂게도, 유나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보면 볼 수록 명례의 얼굴.─ 아내의 얼굴이라해서 마음놓고 유심 히 뜯어본 일이 없지만, 웃는 입맵시며, 눈을 새초롬히 뜨 고 불평을 말할 때 이맛살을 약간 찌푸리는것…모두가 판 에 박은듯이 같았다. 단지 한쪽이 트레머리요 조선옷인 데, 한쪽은 웨이브한 단발과 양장 손에 낀 싸파이아반지, 팔뚝에 두른 백금(?)시계 구두 그것뿐이 달랐다. 조물주 가 사람을 만들 때 비슷한 사람도, 다 다른 몸으로 그 특 징을 점지했으련만, 일시 망녕이 났었든지 그렇지 않으 면, 어떤 착오로 한 인간형(人間型)에 둘을 찍어냈을는지 도 모른다. 어쨌든 유나가 명례와 같게 안생기고 다른 사 람과 같게 생겼다면, 재호는 어느 좌석에서든지 이 사실 을 한개의, 기적으로 들고 자랑삼아, 선전을 했을지도 모 른다. 재호도 그렇게 입이 무거운 사람이 아닌만큼 말못 할 사정 앞에 있는 이 괴로움이 없을수 없었다.

차는 벌써 노량진을 지나, 영등포역을 또 지나려한다.

창밖을 내다보던 유나가 웃으면서 재호를 돌아다보았다.

『박선생님, 성지순례(聖地巡禮) 오신 기분이 나시겠군 요』

『모르겠어요?』

유나는, 놀리듯이 웃었다.

『여기 성지될만한데가 있습니까?』

『모르시는군요. 그럼 내다보서요』

재호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저집말애요』하고 유나가 가리키는것은 ××맥주회사 공장이었다.

『네─ 네. 유나씨도 상당한 야윳군이군……』

『야유가 아니라 술먹는 사람에게 성지지 뭡니까』

『술 먹는다고 이렇게 막 놀려대시깁니까? 그럼 유나씨 는 화장품 파는 집 앞을 지나가실 때, 절 한번하고 지나 가시겠군요』

『분하고 술하고는 성질이 다르지요』

유나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원체 살결 고우시니까 많이야 안바르시겠지만……』

살결이야기가 나니까, 유나는 벌써 실쭉해진다.

『바른소리 하는데 왜 듣기 싫어하십니까?』

『듣기 싫을거야 없지요, 꼬집어뜯으시니까 그렇지』

『꼬집어 뜯기는요. 저는 본대로 느끼는대로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인제 그런 얘기 그만두세요』

유나는 손을 저어 재호의 말을 막아버렀다.

『그럼 다른 얘기 하지요. 기동차는 일이등이 없어 문제 밖이지만, 이등과 삼등의 차이를 어떻게 보십니까』

『이등은 자리가 낫지요 뭐』

『별로 나을것도 없지만, 조용해서 좋지않어요』

『사람이 많찮으니까 제일 편해서 좋드군요』

『그것도 그렇지만, 속력도 삼등보다 좀 빠른듯 하든데 요』

『아이참 선생님두』

아이참은 유나의 입버릇 같았다.

『유나씨를 삼등에 모셔서 미안하다는 말이올시다』

용산역을 떠난지 불과 삼십분내의 서울서 엎어지면 코닿 을데지만, 안양은 시골티가 조르르 흐르는곳이었다. 게딱 지처럼 납작한 때묻은 정거장, 자갈을 깐 신작롯가에 조 가비 엎어놓은듯한 집들, 그나마도 몇발자국 안걸어서 뚝 끊어지고 평퍼즘한 들이 열리었다.

『시가지가 겨우 요뿐인가요?』

유나는 거리에 나선 사람들의 눈총이 얄미워서 파라솔을 한편으로 젖히고 재호의 곁으로 다가섰다.

『여기만해도 경기도땅 아닙니까?』

『경기돈줄 누가 모르나요』

『서울은 경기도 아니고 뭐얘요』

『경기도야 경기도지만 경기도 경성부라고 누가 잘 부릅 니까? 물론 기분문제지만 그대로 경성부 하는것이 자연스 럽습니다. 그러니까 경성만 빼놓고보면 다 시골이지요.

우리가 시내에있을때는 경기도란 관념이 도무지 안생기지 만 동소문밖이나 자하문밖만 나서보십시요. 벌써 경기도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재호의 말이 심술궂은 장난같기도하나, 유나는 뭐라고 반박할 자료가 얼른 나서지 않았다.

두사람은 신작로 길을 떠나 철로뚝을 넘어서서, 삼막사 가는 제길로 들어섰다. 논두렁이나 밭두렁의 좁은 길에서 는 서로 앞을 서거나 뒤를 서서 걷다가도, 둔덕지지 않은 풀밭길을 지날때는 어깨를 비빌듯이 나란히 걸었다. 그리 고 유나가 한마디하면, 재호는 열마디─ 우스워서 웃을 말도 있었고, 어이 없어 웃을 말도 있었건만, 유나는 찻속 에서보다 한결 사분사분하고 야불야불했다.

『관약산은 저기얘요?』

말본새도 달라진 『……십니까』가 줄어들어 『여보』와

『얘요』로 통하고 간혹가다, 혼자말처럼 반말을 불쑥 내 놓지만, 재호에게는 도리어 정답게 들릴뿐이었다.

『관악산은 이것도 관악산이지만……』

하고, 재호는 단장 끝으로 나지막한 주위의 산들을 가리 켰다.

『정작 관악의 기풍이 드러나는데는 아직도 멀고 멀어 안보입니다. 제일봉 연주대를 가자면 저─ 기 저 높은 산 을 넘고, 또 저보다 높은 산을 하나더 넘어야 되니까, 까 마득합니다』

『저를 어쩌나! 우리 가는데는 어디얘요?』

『삼막사 그까짓데는 조산 너먼걸요뭐』

저산을 조산이라고하고 아주 얕잡아 말하나 유나의 눈대 중에는 삼십리는 될것 같다. 갈수록 첩첩한 산, 수석이 좋 고, 두견화가 그득하건만, 걱정이 앞을 서니, 근기의 명사 도 털을가는 소의등처럼 살풍경이었다.

『십리도 못된다구 그러시더니, 거짓말이시군……어떻게 걸어!』

유나는 어이없어 가던 길을 멈췄다.

『걸어보시면 알지만, 사실 십리는커녕 오리밖에, 안됩 니다. 가시다가 정 다리 아프시면 업어드릴테니 염녀마십 시요』

『아이 망칙해라』

『말도 타는데, 사람의 등에 업히는게 불명예될거야 있 습니까』

『저렇게 말씀하시면 난 뭐라구 대답해야 좋아』

『제말을 자꾸 곡해하시고, 오해만 하시니 말씀입니다』

재호는 유나에게 섭섭하다는 눈치를 보이려고 가장, 정 숙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유나는,

『저는 선생님을 믿기때문에 그런 오해는 가져본적이 없 어요』

한마디로 가볍게 받아 넘기고, 그의 독특한 표정……방 그레─ 웃는 낯을 재호에게로 돌렸다. 재호는 이 웃음 한 번이면 그만이다.

두사람은 옥수가 펑펑흐르는 냇가에서 물에 씻기어 하얗 게된 돌을 타고,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재호가 들고온 종 이뭉치를 풀어놓고 이것저것 집어먹으면서, 어린애들처럼 즐거워하는 시간이었다.

바람기가 차차 세어지면서 구름이 자주 해를 가리기 시 작한다. 가뜩이나 의심 많은 유나는 하늘만 자꾸 살폈다.

『날씨가 이상해져요』

『비는 안옵니다』

『어떻게 아셔요』

『어제 천기예보를 보니까, 일시 흐렸다 개인다고 하드 군요』

『예보도 어디 잘 맞드라구요』

『아닙니다. 바람이 이렇게 불면 비오는 일이 없어요』

『그럴까요?』

유나는 잃어버린 바늘을 찾듯이 하늘의 이구석 저구석을 여전히 살폈다. 재호는 『자─ 일어서십시다. 저─ 기 보 이는 저것이 염불암인데, 그 옆만 돌아서면 바로 삼막삽 니다』

하고, 벗었던 양복저고리를 뀌어 입고, 넋이 빠진 유나를 앞서서 인도했다.

산을 반중특 올랐을 때 빗방울이 두어번 손등을 때렸다.

그러나 연기처럼 엷게 흩어진 구름조각이 지나갈뿐 햇볕 은 쨍쨍히 내려쬐었다.

염불암을 잠시 들려 탑탑한을 축이고, 그위 등성이를 넘 어서니, 울울창창한 아름드리솔밭 틈으로, 저편 언덕에 청기와 입힌 고찰이 나섰다.

『보십시오 뭐 멉니까』

재호는 앞가슴을 헤치고 서늘한 바람을 받아들이면서, 뒤에 오는 유나를 기다렸다.

『삼막사가 저기에요?』

인제는 살았다는듯이 유나도 손수건으로 콧등과 이마의 땀을 눌렀다.

『저깁니다, 경치가 어떻습니까』

『좋은데요』

구름장이 지나가느라고 양지쪽에 서있는 법당들이 잠시 어두웠다 밝아진다.

두사람은 절에 이르렀다. 판도방 옆에 달린 조그마한 방 에 들어, 앞뒤창을 훤히 열어놓고, 피곤한 다리를 겨우 뻗 었다. 경치를 탐내어 왔건만, 쉬는 재미도 온것처럼 다시 일어설 생각은 나지 않았다.

점심밥을 시켜놓고 재호가 세수를 하러 나간 사이, 유나 는 얼굴의 화장을 고치고 나서, 무엇을 잠잠히 생각하고 있었다.

─ 무슨 생각일까?─ 알 사람은 유나자신뿐이다.

바람이 분다. 아까보다 더 세차게 분다. 구름은 비상소집 이나 한듯이 몰려든다.

재호와 유나가 의좋은 내외처럼 겸상을 받고 막 밥술을 뜰참인데, 주먹 같은 빗방울이 툇마루로 들이쳤다.

유나는 놀란듯이 숟가락을 바릿대에 걸쳐 놓았다.

『큰일 났네!』

『큰일 날거야 있습니까, 온대야 소낙빌테지요』

재호는 얄밉게도 태연히 앉아서 자작한 맥줏잔을 들었다. 유나를 절간에 몰아온 책임은 자기에게 있으나 비 오고 안오는것과는 관계없다는 태도였다.

『어떻게요?』

『곧 그치겠지요. 기다려볼밖에있습이까』

『아까 냇가에서 쉴때 되돌아 갈걸 그랬어요』

『지나간 일을 애기해서 소용 있습니까? 어서 진지나 마 저 잡숩시요』

『괜─ 히 선생님 말만 듣다가 이렇게 됐지 뭐』

유나는 원망하듯이 재호를 흘끗쳐다 보고, 숟가락을 다 시 들었다.

『더 잡수시지 왜그러서요』

하는 재호의 권고도 저버리고, 유나는 바릿 밥이 삼분지 이나 남았을때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배불러 더 못먹겠는데요』

『양이 그렇게 적으셔요』

하고 재호는 한그릇 밥을 다 먹고도 모자라서 유나의 남 긴것을 반이나 덜어갔다.

밥상을 물리고나니, 삼막사의 볼일도 다 본셈이다. 그러 나 비는 본격적으로 퍼부어 돌아갈 길을 막고 말았다.

『왜 안끄칠가』

유나는 비만 그치면, 금방 튀어나설듯이 모자를 머리에 얹고, 미닫이 두껍닫이를 젖히고 서있었다.

재호는 식곤증이 생겼든지 벽에 몸을 기댄채 비스듬이 누워 담배만 피고 있었다.

『설마 그칠때가 있겠지요』

『그런 소리는 나두 할줄 아는데요』

유나는 혼자 토라졌다. 이상야릇한 심경에서, 남남인 두 젊은 남녀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비는 점점 더 퍼붓는다. 『잘 온다 잘온다!』

심술궂게도 재호가 침묵을 깨뜨리고 한다는 소리가 이것 이다.

『오기는 뭣이 잘 와요』

유나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재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가와야 농촌에서도 먹고 살지요』

재호는 유나가 혼자서 불그락 푸르락하는것이 자기에게 는 조금도 영향이 미치지 않는듯이 이죽이죽 입만 놀렸다. 『난 이럴줄은 몰랐어요』

유나의 이말은 천기를 탓하는 말이지, 재호 개인을 원망 하는 말인지, 재호의 처지로서 해석한다면, 자기가 『흉 측스런놈』밖에 된것이 없다.

『앉아서 조금만 더 기다려보십시다.…… 유나씨를 모시 고온 책임은 제게 있으니까, 모든것이 다 잘못되고 죄송 스럽니다. 비가 꼭 올줄을 누가 알았으며, 이렇게 되리라 는것을 알고야, 모시고 왔겠습니까.……이것도 운명입니다. 오비이락으로 오해를 하기 시작하면, 한이 없지요. 저 를 나쁜놈으로 아신다면 변명할 도리가 없어 비 끄치기만 빌밖에 없습니다』

재호는 자기자신을 추근추근하다거나, 비열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말이 자기의 본정신에서 나왔는지 안나왔는지, 얼른 판단할수 없었다.

『운명이요?』

유나는 운명이란 말이 가슴에 걸렸다.

『운명이라고 할밖에 다른 좋은 말이 있습니까. 애초에 내가 불순한 생각을 먹고, 유나씨를 여기로 모셔온것도 아니고 또 오지않을 비를 오라고, 기우제를 지낸것도 아 니니까요. 그럼 운명이란 말은 취소하고, 다른 용어로 정 정하겠습니다…가만있자 뭐라고 할까』

재호는 유나의 눈치를 살피고, 담배 한모금을 쭉 빨았다.

『…불가항력…천후의 변?…부득이한 사정…말못할 사 정……』

『말못할 사정은 또 뭐에요?』

『네네, 그말도 불온하게 해석할수 있겠습니다. 그럼 답 답한 사정…가슴 아픈 사정…지긋지긋한 일…』

『점점 약을 올리십니다그려, 남은 가슴이 터질 지경인 데』

『옳지, 옳지. 가슴 터질 사정! 그것이 좋겠습니다』

『흥, 연극 배우로 나섰으면 성공하시겠군』

『진작 그런 말씀 해주셨더면 ××좌 일행의 하다모찌라 도 됐지요. 무슨 배우가 좋겠습니까』

『희극 배우나 되세요. 막간에 나오는 피에로』

『어릿광대말입니까? 차라리 비극 배우가 됐으면 격에 맞을것 같은데요』

말끝에 약간 애조를 띠웠다.

『비극 배우요?』

유나는 입을 빼쭉했다.

『이절의 이름도 좋습니다. 삼막사 (三幕寺) ! 어떤 유례 가 있어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제물배경에 제물장치 연극하기 꼭 좋게 됐습니다. 희극이든지 비극이 든지 활극이든지, 삼막중에 어느 한막짜리고 안해보시렵 니까? 내가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요. 유나씨는 유성(流 星)과 같이 반짝하다 사라지는 행복의 여신이 되십시요』

『점점 더하십니다그려. 점점 노골적으로 나서시는군!』

『노골적? 하하하……』

재호는 어이 없는듯이 선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보니, 유나씨가 여지껏 나를 경계하고 계셨군 요』

결국은 농이 지나 미묘한 감정에서 우러난 마음과 마음 의 알력이 되고말았다.

유나는 말 없이 툇마루로 나섰다. 수틀리면 파라솔이라 도 버리고 그냥 나설듯이 움줄움줄하다가, 참아 못나서고 이어 들어오고 말았다. 비단양말에 빗발이 쳐서 얼룩진 자리를 보면서, 재호는 또 입을 열었다.

『비여, 오시지 맙소서!』

재호는 마음속에 공허를 느끼면서 유나를 위하여 충심으 로 부르짖는 소리였다.

『잘 온다 잘온다 하시더니, 금시에 마음이 변하셨나?』

유나도 잠자코 있는것이 미안한듯이 따라 입을 벌였다.

『나는 예사로오는 빈줄알고 밭가는 농부만 생각했지, 바다에 뜬 고기잡이배는 미처 생각 못했습니다. 이 모진 비바람에 해상의 비극이, 좀 일어나겠습니까? 관측소원이 낮잠만 안잤다면 폭풍 경보는 했으련만!』

『거룩하십니다. 자비심이 대단하시군요』

『그만 자비심이야 못쓰겠습니까. 나는 백수 건달이지 만, 마음만은 억만장자 부럽잖게 푸집니다. 나에게는 마 음이 재산이니까요』

『백수건달? 별별문자가 다 나옵니다그려』

『귀한 사회에서 별로 안쓰는 말입니다』

『귀한 사회를 모르고 하층 사회에서 비비대는 인간이 라, 얻어들은 문자가 모두 이따위 뿐인걸 어쩝니까』

재호의 마음은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어린애들이 소꿉질 하다가 수틀리면 훼방을 놓듯이. 삼막사에 올때는 유나에 게 그어떤 잡스런 희망과 포부를 가지고 온것이 아니라, 단순히 막연한 일종의 향락적 기분과, 연애에 대한 사행 적 심리에 들떠서 왔을뿐이다. 주인이 던져줄 과자를 안 던져주고서 손에 쥐고 있으면, 언제까지든지 눈만 끔벅끔 벅하고 앉아있는 개처럼 재호는 유나가 달콤한 은전(恩 典)을 베풀기 전에는 언제까지든지 우애의 경계선을 넘어 서보지 못할 소극적 인간이다. 왜그러냐하면, 자기는 아 내 있는 몸이라, 반쪽 사람…자기 몸뚱아리를 어느 연애 시장에 내다놓든지 썩은 복생선으로 알고 사갈사람이 없 을것을 너무 현명하게 알기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예 외 (例外) 라는 사실이 허다하다. 재호는 이점에 착목하고

「요행」을 붙들기 위하여, 오늘의 거사는 없는 주변과 용기를 털어낸데 지나지 못한것이다.

그러나 유나의 냉정한 태도를 보니, 벌써 싹이 틀렸다.

자기의 먹은 마음을 털어 내놓고 죽네 사네 호소한 일이 없은즉 부끄러울것은 없으나, 유나도 모르게 받은 상처는 어지간히 컸다. 진열창 안에 있는 금장치─ 돈 없는 한탄 보다 얄미운 존재다.

태양은 유나를 위하여 머물러있지 않았다.

─ 벌써 다섯시─

점심상 가져왔던 사람이 또 왔다. 묻지않아도 저녁을 어 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는 눈치였다.

『우산 하나 살수 있을까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유나가 친정아버지나 만난듯이 반갑게 나섰다.

『이산중에 우산 살데가 어디있습니까, 이비를 맞고 가 실랍니까? 안됩니다. 주무시고 가셔야지요』

그사람은 숙녀에게 대하여 한껏 공손한 티를 보이면서 도, 어림없다는 표시로 입을 쩍 벌였다.

재호는 자기가 할말을 대신 해주는것 같아서 속으로 고 마왔다.

『아까처럼 두상만 하구료』

『아니얘요. 한상만 하세요』

유나가 펄쩍 뛰었다.

『글쎄, 못가신대두……』

그남자의 말이다.

『가든 안가든 한상만 해요』

『왜요』

『난 속이 아퍼 못먹겠에요』

『정 못자시면 나래도 다 먹을테니 두상만 하시요』

이번에는 재호가 초지를 관철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엄 명했다.

『또 잡수실것은』

『곡차를 먹어볼까. 있겠소?』

『정종을 하시지요』

『그럼 정종을 사홉짜리 따끈히 데워오구료. 그리고 호 박이 먹고 싶은데』

『그것도 있습니다』

그사람은 암호나 통하는듯이 빙그레 웃었다.

유나는 요시 절간이 요릿집 한가지라는 소리는 들었으 되, 때아닌 호박이 다 있나하고 경이의 눈으로 재호의 입 만 바라보았다.

─ 많이 다녀본 솜씨로구나!─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유나는 자기를 무시하고, 재호의 분부대로 거행하려는 그사나이를 황급히 불러 세웠다.

『댁에 쓰던 우산이라도 좋으니 파십시요』

『웬 팔게 있습니까 글쎄』

『날좋은 날 새로 사면 되지 않어요?』

『없습니다 없어요』

그 사나이는 입 아픈 소리 말라는듯이 더 듣지 않고 가 버렸다.

『망할녀석!』

유나는 자기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적이 하나 더 생겨서 저주하는 눈추리었다.

『욕을 그렇게 마구 하십니까?』

재호는 웃었다.

『몰라요』

『나도 망할 녀석이 됐눈요?』

제호는 일어서서 남포의 불을 밝혔다. 두사람에게 요근 래 남폿불은 처음 구경이다. 침침하면서도 바라보면 양귀 비꽃같은 고운 불길이 딱정벌레는 아니나 마음 끌리는데 가 있다.

『좀 로─ 맨틱합니까, 비오는 밤 호젓한 절간 한등 아 래서……』

유나는 마주보기도 지긋지긋해서, 귀머리가 됐으면 하고 돌아앉았다.

한참동안 두사람은 다시 말이 없었다. 유나는 돌아앉은 채 고개를 외로 꼬고 앉았고, 재호는 배짱좋게 두다리를 쭉 뻗고 애꿎은 담배만 자꾸 피었다.

저녁상이 왔을 때 재호는 담배를 두어갑 부탁하고 그상 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토라져 앉은 유나를 달래기 시 작했다.

『유나씨─ 모든 죄는 다 내가 지지요. 유나씨가 그렇게 괴로워하시는것을 보고 잠시라도 이 자리에 앉아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비만 끄치면 이 징역살이는 면하겠습니다. 유나씨는 아직도 나의 마음을 몰라주시고 오해만 하 시는 모양이나 나는 외양은 이렇게 추잡스럽게 생겼어도, 마음만은 깨끗합니다. 여자의 신분으로 그만 뭄조심 하시 는것을 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나에게 대한 태 도는 너무 심하신걸요. 저의 심경을 말한다면, 유나씨에 게 대하야 우정에 벗어나지 못한줄 압니다. 도리어 우정 에까지 달하지 못한것을 섭섭히 생각합니다만』

재호는 말을 잠시 끊고 다시 이었다.

『안심하시고, 진지를 잡수십시요. 그리고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주무시고 내일 아침 비 끄치거든 일찍 떠나기 로 하십시다』

그러면서 연해 『녜?녜?』했다.

그러나 유나에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들은체도 않고, 그대로 돌앉아서 손수건만 비틀고 있었다.

재호는 그옆으로 가까이 갔다.

『존귀하신 몸에 누추한 손을 대어 미안합니다만, 어서 저녁을 잡수십시요』

하고 유나의 두무릎에 손을 대고 불상을 모시듯이 곱게 돌려놓으려 했다.

『왜이러서요』

철썩하고 유나는 재호의 손등을 갈겼다. 그러고는 다시 돌아앉았다.

『아─ 내가 이렇게 주접스런 사나인가?』

몽글몽글한 육체의 촉감도 금방 사라지고─ 제호는 벌떡 일어났다.

분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잠싯동안은 아무말 없이 서있 었다. 그러다가 겨우 마음을 늦췄다. 자기에게 아무런 잘 못이없고 억울한 욕을 당했다 할지라도 상대자가 여자요, 처지가 맹랑한 처지이니 만큼 큰마음을 먹자는것이였다.

그러나 분풀이는 그만 두더라도, 이 자리에서 같이 앉아 있을수는 참아 없었다.

『그럼 그이상 말씀 안드리겠습니다. 내가 지금 이모욕 을 당하고 가만있다고, 못생긴 녀석으로 아시고, 우월감 은 갖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모든 굴욕을 참고 최후 까지 유나씨를 숙녀로 대우했을 뿐입니다. 그럼 편히 앉 으십시오. 나는 유나씨의 괴로움을 한시 바삐 덜어드리기 위하여 이 자리를 떠나드리겠습니다.』

재호는 모자와 웃저고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는 미닫이문을 닫고 툇마루 끝에 서서 양복바지를 벗고, 옷저고리와 함께 돌돌 말았다. 육십 오원에 맞춘 월부 양 복을 마구 대우하기는 너무나 가슴 저린 일이요 잔인한 일이었다.

막 구두 뒤축을 눌러 신고, 마당으로 내려설판에 유나가 방문을 열고, 재호의 한팔을 움켜잡았다.

『어디를 가셔요?』

『이울안에 있어도 마음이 안놓이실테니까 아주, 멀리 가 드리지요』

『어디를요!』

『서울로 가지, 별수 있습니까』

『안돼요』

『왜 안돼요?』

『들어오세요』

『들어갈일 없어요』

『할말이 있으니 들어오서요』

유나는 결코 애원하는것이 아니라, 으르 딱딱거리는 셈 이다.

『할말은 여기서 못하나요?』

재호는 유나의 태도가 달라지니까, 한층더 뻣뻣이 버티 고 싶었던것이다.

『가실 때 가시더라도 내말을 듣고서요』

유나는 볏섬무게나 되는 재호의 몸뚱아리를 이를 악물고 끌어올렸다.

『신발을 벗으서요』

재호는 명령대로 했다.

『인제는 들어오세요』

재호는 방에 끌려 들어갔다. 그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서 있었으나, 샤씃바람인것을 깨닫자, 면구스러워서 곧 바지 를입고 말았다.

『앉으세요』

재호는 명령대로 한구석에 앉으면서 다음말 나오기를 기 다렸다.

유나가 밥상을 재호 앞으로 밀어놓고, 먼저 숟가락을 들 었다. 그리고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잡수세요. 제가 실례한 일은 다 용서하세요. 박선생 을 못믿어한것은 아니고 저에게는 말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랬답니다. 어째서 그랬나하는것은 묻지, 마서요. 요다음 기회에 다 말씀해 드릴테니 결코 저는 선생님의 행동을 오해했거나 음흉한 분으로 생각하지는 않었어요. 용서하 세요, 네? 저도 퍽 히스테리 증이 있는 여자지요?』

한갖 매력있게 방그레 웃으면서 술까지 따랐다.

─ 조변석개라더니, 여자의 마음은 어째서 저럴꼬?─ 재호는 어이가 없어 좀더 뻣뻣이 굴어볼까 하다가 뱃속 이 궁해서, 이에 수저를 들고말았다.

『아까, 호박있느냐고 물으시더니 어디 들어왔어요?』

유나는 젓가락을 쳐들고, 밥상에 놓인 반찬을 고루 살폈다. 낮에와는 좀 달리 차린다고한 모양이나, 튀각에 도라 지묻침 일본반찬 몇가지는 여전히 놓이고, 호박은 안놓였 던것이다.

『이것을 절에서는 호박이라고 그립니다』

『고기 군것 아니에요?』

『네─ 그래요』

유나는 한가지 배웠다는듯이 좋아서 눈을 깜작깜작했다.

『절에서는 원래 고기를 안먹는데거든요, 그런줄을 알고 고기장수가 고리를 팔러 올때는 고기 사란 말은 않고, 슬 쩍 호박 사시요! 한답니다』

재호는 가장 박람다식한듯이 유래를 말하였거니와, 유나 는 밥에서 금모래나 발견한듯이

『어쩌나! 호호호……』

하고 대단한 명랑성을 띠웠다.

저녁을 끝낸 뒤에, 두사람은 이런얘기 저런얘기 탈선안 할 정도로 하다가 마침내 재호가 일어섰다.

『그럼 일찍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십시 요』

『다른방하나 치우라고 부탁하셨어요?』

『인제 할 작정입니다』

인제 저우 부탁한다면, 아까 같아서는 벌써 유나에게 책 잡힐 소리였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요. 내일 뵙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시요』

재호는 밖으로 나가 신발은 신었으나 주인을 불러 방하 나 치워내라기도 난처한 노릇이었다.

재호는 소심한 인간이라, 아니할말로 절 사람이 ─ 저년석이 계집을 후릴랴다가 말을 안들으니까 뒤통수 를 쳤구나!─ 이렇게 해석을 할것도 같고, ─ 오죽 못났어야 툇자를 먹나!─ 하고 비웃을것도 같았다.

비에 막혀서 못가는줄은 모르고, 계집하나 놈 하나 짝지 어 왔으니, 절간에 와서 하루이틀 자고 가는것도 예사요, 여러 사람 눈앞에 내어놓는 추태만 아니라면, 갖은짓을 하더라도 간섭할 까닭이 없으니, 뒤통수가 뼘가웃이나 되 고, 감때사납게 생겨 남보기에 그렇게 물렁물렁하게 안생 긴 재호로서는 쾌남아(?)의 면목이 서지 못할것도 사실이다. ─ 기어이 비극으로 종막을 짓는구나─ 세상에 연애로 인연한 비극이 많다. 첫째 실연을 당하여 수면제 일주일분을 일회에 먹고, 남은 여생을 꿈으로 때 워버리는것도 비극이요, 엄부모 시하에 몰래 맺은 사랑을 추스를수 없어, 맹꽁이처럼 서로 부둥켜안고 쥐목숨을 대 신하는것도 비극이요, 활동사진 푸로마이드를 혓바닥으로 핥다가, ─ 견이불식은 화중지병이여─ 하고 한강교 난간 위에서 따이빙하는 장거도 비극이지 만, 재호는 상대자가 몰라주는 외짝사랑에 더구나, 잘자 리를 뺏기고 밖에서 떨고 섰는것도, 비극도 맹랑한 비극 이라 할수 있다.

─ 어물어물 하룻 밤만 지나면 그만이다. 아모데나 쓰러 졌다가 일어나지─ 하고 재호는 누울 자리를 물색해보았다.

방축당한 토막민보다 별로 나은 팔자는 못되지만, 대웅 전 처마 끝에 쪼그리고 앉아 토끼잠을 잘수는 참아 없었다. 옷에 흙이 묻고, 거북할것은 별문제로 하고라도, 절간 사람의 눈에 띠우는 날이면 ─ 놈 꼬락서니 말아니다!─ 재호는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리고나서 사람이 있나 없 나 하고 판도방 문을 가만히 열었다. 있으면 틀리고, 없으 면 한구석에 누워 잘판이었다.

『누구요?』

캄캄한 속에서 사람의 소리가 났다. 재호는 바늘에 찔린 듯이 움찔하고나서 문을 가만히 닫았다.

『누구요?』

국보(國寶)불상을 도둑질하려는 놈으로 알았는지 이번에 는 사람이 내달았다.

『성양 몇개비만 주시요』

『네 네 그러서요』

임기웅변에 넘어간 그사람은 성냥 한갑을 통체로 기부하 고 다시 들어갔다.

재호는 생각도 안나는 담배를 한 개 피어물고, 뒷짐을 지고 낙수물이 폭포처럼 떨어지는 축댓가를 왔다 갔다 했다. ─ 창피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방하나를 비어 내라 하든 지, 판도방에 들어가 자든지 해버리자─ 그러나 십분만 더 심사숙고할 여유를 가지고 또 왔다 갔 다 했다.

오르고 내리며 잔기침소리에……

어쩌구 저쩌구……

속가(俗歌) 에 있는 정경 그대로 재호는 감기를 먹었는 지 기침이 간혹가다가 났다. 구두소리는 뚜벅뚜벅─ 재호 가 울적한 심회와 비창한 정조에 못이겨, 휘파람 분것은

「드리고」의「세레나─ 데.」결단코 유나가 들으라는것 은 아니었다.

유나의 방 창문에는 오─ 렌지등잔불빛이 아직도 환하게 밝아 있었다. 재호에게는 지척의 거리나 월세계와 같이 멀고 또 그리웠다.

이때다.

『선생님!』

유나의 목소리었다. 재호는 자기 귀를 의심하고 잠시 학 자견(學者犬) 고개를 기우렸다.

『선생님!』

분명히 유나의 목소리였다.

『부르셨습니까?』

『네!』

『왜그러십니까?』

재호는 얼른 창옆으로 가기도 안되어서 선자리에 그대로 머물러있었다.

『잠간만 들어오세요』

『왜요?』

『글쎄 잠간만 들어오세요』

─ 무슨 까닭으로 들어오라나!─ 재호는 너무 황송하기도 했지만,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했다.

안들어가는것도 쑥스럽고, 불쑥 뛰어들어가는것도 경망 스러운것 같아서, 재호는 미닫이 앞에 이르러서 기침소리 만 한번 내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어서 들어오서요』

『괜찮어요?』

재호는 비로소 방으로 들어갔다.

유나는 이부자리도 깔지 않고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있 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잠싯동안 말이 없어서 재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서워서 못자겠어요』

유나는 하기 거북한듯이 이말을 겨우 나직이 꺼냈다.

재호는 너무나 의외의 말씀에 머리끝이 쭈뼛했다.

『무섭기는 뭬 무섭습니까. 원래 사찰 근처에는 맹수가 안나옵니다. 걱정 마십시요. 나무아미 타─ 불!』

『중생만 무서운가요』

유나는 숙였던 고개를 반쯤 들고, 재호를 바라보았다. 침 침한 불밑에서나마, 그의 얼굴이 불그레한것을 재호가 모 를 이 없었다.

『사람이 무섭단 말이시요?』

『………』

『설마』

………『설마』다음 말은 못붙이고 말았다.

『아직 잠이 안오시거든 얘기나 하시다가 천천히 가서 주무세요. 정말 혼자 있기 무서워요』

『무섭기는 뭐이 무서워요 온참, 인제보니 여간 겁쟁이 가 아니십니다그려』

『글쎄요. 겁장이가 돼서 그런지 몰라도, 저는 여관에 들 어도 괜히 겁이 나서 잠을 통 못잔답니다. 더구나 이런데 서야……』

유나의 말도 그럴듯했다. 재호가 유나의 소원대로 파수 병 노릇을 하는동안 할말이 없어서 그랬든지, 거북해서 그랬든지 피차에 주고 받을 말이 별로 없었다.

유나는 유나대로 책상에 올려놓은 팔로 턱을 괴고 앉아 무엇인지 생각만 골돌히 하고 있었다. 재호역시 재호대로 방문 앞에 퍼뜨리고 앉아서 애꿎은 담배만 피우고 방안에 자욱한 연기를 뽑느라고 가끔 미닫이를 열었다 닫았다 할 뿐이었다.

이 지리한 시간을 보내는동안 흥분했던 감정이 평온하게 되니 닥쳐오는것은 졸음과 괴로움 뿐이었다. 재호는 일어 섰다.

『인제는 주무십시요. 꽤 늦었습니다. 걱정하실것은 조 금도 없어요. 내가 옆방에서 잘테니까 여차직하거든 소리 만 지릅시요』

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유나가 인사를 차린다면, 자기도 일어나 문턱에 서서 잘 자라는 인사라도 할것이다. 그러나 유나는 해쓱한 얼굴 로,

『주무시겠어요?』

한마디만 하고 앉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다.

재호가 구두를 꿰고 툇마루를 내려서 두어발자국 떼어놓 았을때다.

『선생님』

하고, 유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호는 멈칫 서서

『부르셨습니까』

내가 요릿집 뽀이인가! 하고, 재빨리 창문 앞까지 되갔다. 유나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웬일일까 하고 방문을 반쯤 열고보니, 유나는 책상에 엎 드려 울고 있었다.

『아니 별안간 웬일이십니까?』

재호는 들어가는 길로 유나의 곁으로 다가들었다. 유나 의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왜 이려서요. 진정으로 말하십시요. 제가 잘못한 일이 있거든 용서해주시고……』

『아니에요』

한마디를 하고 더 느꼈다.

재호는 서먹서먹했으나, 염치불고하고 유나의 어깨에 손 을 얹은채 오─ 부드러운 촉감!─ 온몸의 말초신경이 일시에 저릿해 온다.

『말씀 하십시요』

이번에는 눈을 딱 감고, 팔까지 얹었다.

유나가 자기의 팔을 뿌리치려고도 않고 부끄러운듯이 원 망하듯이

『선생님은 제마음을 모르세요?』

하였을때 재호는 미처 이말을 깊이 해석해볼 여가도 없 이, 정신이 아찔했다.

『모를 이가 있습니까』

어깨에 얹은 팔이 어느틈에 허리에까지 흘러 내려왔다.

─ 사랑의 흥망성쇠! 용기를 내자─ 재호는 비로소 자기가 남성인것을 깨닫고, 힘껏 끌어안 았다.

유나는 행복스런 병아리처럼 재호의 가슴에 파묻혀 자기 의 조그마한 몸에 따른 모든 권리를 다 내어 맡긴다는듯 이 아무런 불안도 반항도 없었다.

그러나 마저막으로 한마디 했다.

『키쓰 하나가 여자의 운명을 어떻게 좌우하는지 아십니 까』

『압니다』

신사조약이 끝난 다음, 언제 받을 의상값인지, 유나는

「판도라의 상자」열쇠를 그제야 재호에게 전했다.

一○

편집

금단의 과실도 먹고 시장기를 면하면 시들하려니!

재호는 이튿날 아침 얼떨떨한 감정속에 삼막사를 떠났다. 산에 오를때는 유나에대한 커다란 포부(?)가 두어깨 를 눌렀었다. 그러나 산을 내릴때는 그보다 더 무거운 짐 이 머리에서부터 짓눌러, 허리가 휘청휘청하는것을 깨달 았다.

『키쓰가 여자의 운명을 어떻게 좌우하는줄 아느냐!』

유나가 따지던 말은 두말할것 없이 자기에게 책임을 지 우는 말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자기는 함축있게 압니다 했은즉,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할것인가? 깨뜨린 그릇 같 으면 값만 물어주면 그뿐이다. 그러나 깨어진 자국도 없 이 깨어진 그물건에 대해서는 죄 없는 사람 하나를 희생 하는 외에 보상의 길이 없게 생겼다.

여덜시십분 경성역에 내려서, 재호는 유나의 의견대로 회사에 가서 일을보고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뻐드렁니로 부터 수삼의 신문(訊問)을 받았으나, 유나와 같이 안갔다 는 말로 씻어버렸다.

아내된 직책대로 명례는 눈이 쿠렁해서 돌아온 남편을 보고 가만히 있을 이가 없었다.

『아이구 나는 누구라구! 오래간만에 뵈니 몰라보게 됐 구려!』

하루를 십년으로 치고 비꼬는 말이언만 재호는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하마트면 과부가 되는줄 알고 울고불고 할번했지!』

『과부!』

재호는 코웃음을 쳤다.

『과부가 되었더면, 어떻게할 작정이었누』

『옛날과 달라 수절하고야 살수있어요? 마땅한 사내 하 나 구해 가야지』

『그럴듯한 말이야. 지금이라도 나 죽은 요량하고 시집 가봐』

『가고 안가는것은 내맘에 달린것이니 걱정 말어요. 내 가 이집 귀신이 되겠다하면 당신이 내쫓기로니, 나갈상싶 어요? 또 내가 나가고싶으면 당신이 붙든다고 안나갈 이 없고…하긴 당신이 나를 붙들 이 없겠지만……』

명례는 또깡또깡하게 힘있게 말했다. 재호는 유나와 맹 세한 일을 생각하니, 속이부르르 떨렸다.

『먹고 살기가 이렇게 힘든가? 그렇게 애쓰고 돈벌 생각 말어요. 가뜩이나 움푹한 눈이 하가마가 됐구려. 어제는 어디 장(場)을 보구 오셨소? 덕소(德沼) 소장을 보구 오셨 소─ 포전 나무 장을 보구 오셨소?』

『왜 또 이야단이야』

재호는 뻣뻣이 굴어볼 용기가 안나서, 아랫목에 누워버 렸다. 몸도 피로했을뿐더러 우선 이 난관을 벗어나보자는 계책이었다. 그러나 명례는 여전히 기어올랐다.

『어디 갔었소?』

『놀러 갔었어』

『어디?』

『인천』

『인천? 호호호……』

명례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러나 칼날을 품은 웃음이 었다.

『인천은 왜 인천이야. 불로초를 캐러 명산엘 갔다 왔다 고 그러지 않구』

재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색안경을 쓰고 보는 말 이나 근사하게 들어맞았던 까닭이다.

『관악산 놀러 갔다가 비가 와서 그만……』

『당신 혼자?』

『친구들하고』

『몇이서』

『몇은 알아 무얼해』

『알면 어째서』

『놀러갔다왔다면 그저 그런가부다 할일이지, 왜 이 극 성이야 극성이, 남편의 하는 일을 그렇게 간섭하는게 아 니야』

『아이구 무서워라, 그런것은 어느 책에 씌어 있습디까.

난 학교 다닐 때 수신책에서도 못봤는데……진작 바른대 로 고해바쳐요. 내가 다 알고 있는 노릇을 시치미 떼자면 되나. 동무는 한사람뿐이었지?』

─ 이망할것이 집구석에 쳐박혀 있어도 태주처럼 잘 아 는구나!─

『이 어퍼카트 한데 맛을 보아야 시원하겠어』

『그럴줄알았지』

명례는 몸을 뒤로 피하면서도 입은 여전히 놀렸다.

『우격으로 누르라는것은 비겁한 짓이야. 이런다고 안될 일이 되나? 그러지 말고 다 얘기를 해요. 이래보여도 인 정이 많은 난데, 당신 소원을 풀어드릴지 알수 있소』

재호는 들었던 궁둥이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 다 낌새를 챈모양인데, 그렇지만 별 일이다.─ 일은 점점 벌어질것 같았다.

一一

편집

『당신 소원대로 해준다는데, 왜 아무말도 안하시우. 태 도를 선명히 가져요』

명례는 재호의 주먹을 피하여 뒤로 비스듬히 자빠진채 한다리는 꼬누고있었다. 급박한 경우에는 발꿈치로 턱을 걷어찰 작정인것 같다.

재호는 아무말 없이 명례를 물끄럼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까닭 모를 울분─ 과천서 뺨 맞고, 서울와 눈흘긴다는 속담과 같이 못마땅한 일만 있으면, 언제나 아내를 들볶 던 그도 오늘은 이상하게도 자기 속을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서, 감히 들고 일어날 엄두를 못내었다. 가슴속은 팥죽이 끓듯이 부글부글했다. 그러나 명례가 입빠른 소리 를 할적마다 몸에 찬바람이 돌고, 입에 경련이 일어날뿐, 평소에 이죽이죽하던 입심도 다 없어지고 얼글은 뒷간출 입 자주한 사람처럼 노─ 랗고 해쓱해졌다.

『비짜리도 오래 두면 도깨비가 된답니다. 여자가 시집 살이 삼년이면, 여우가 되고 귀신이 되는줄 몰랐소? 내눈 을 좀 똑똑히 봐요. 일전(一錢)에 다섯 개짜리 구슬사탕 같이 맑지는 못할망정 앉아서 천리를 보는 눈이에요』

명례는 웬일인지 기가나서 지꺼렸다. 천리안이니 구슬사 탕이니 하는폼이, 재호의 비밀을 분명히 아는 눈치였다.

재호는 노리기만 한댔자 자기에게 불리할것은 정한 이치 였다. 그래서 다시 자리에 누워버렸다.

『왜 말을 안할까』

재호가 퇴각하는것을 보고 명례는 허리를 고추 세웠다.

『………』

『가장 말하기 싫은듯이 흉측을 떨고 누워! 낯간지럽 게』

『………』

『말못할 사정이래서 그렇겠지! 남이 진땀나게 더 물을 거야 있나. 인젠 그만 둘테니 마음 놓세요. 그대신 돈이 있거든 몇원 주구려』

명례는 일어서서 재호의 양복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돈소리에 재호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견딜수 없었다. 비밀서류가 있어 그런바도 아니요, 지갑을 털릴까봐 그런것도 아니요, 요새 처지에 없어야할 돈이 몇원 있기 때문이다.

『아이어머니나 삼원이십전! 인제 봤더니 부자로구료.

월급때는 한푼 못가져와도 이런때는 돈있는걸 보면, 복은 펴 많이 타고난 모양이야. 계집복도 있고 돈복도 있고 ,…… 계집복이라니까 여편네복이란 말이 아니야, 염복이 란 말이지. 어쨌든 삼원은 내가 가질테니 그럴줄 아서 요』

명례는 반가운듯이 지전 석장을 지갑에서 뽑아내어 채곡 채곡 접어 쥐었다.

재호는 아내가 삼막사 사건을 알 이 만무지만, 대체 어 떤 여성하고 동행한 사실을 들었는지 보았는지는 모르되, 날뛰는 꼴이 여간 수상하지 않았다.

전 같으면 돈있는 냄새를 피우지도 않지만, 부득이한 일 에 기십전을 내던지는 경우라도, 돈쓸데를 캐고 따지고 한 뒤가 아니면 안내놓았다. 그러나 오늘만은 대금 삼원 을 빼앗아가되, 제발 쪼련질만 말았으면 하고 바랄뿐이었다. 아랫목 벽쪽을 향하고 누워 잠시 잠간이라도 걱정을 잊 어볼까 하고 잠을 부르는동안 장문이 열리고 닫기고, 경 대가 덜걱거리는 소리를 들어 명례가 나들이준비 하는것 을 알수 있었다. 그러나 재호는 어디를 가느냐, 저녁은 어 쩔테냐, 물을것도 없이 시침을 뚝 따벅렸다.

─ 제발 나가거라! 나가거든 다시 돌아오지 말았으면─ 하는 잔인한 생각도 들었다.

어렴풋이 잠들기 시작할때다. 무엇이 콧등을 가볍게 때 렸다. 깜짝 놀라 눈을 뜨고보니, 종이쪽 접은것. 명례의 편지인것을 재호는 직각적으로 알았다.

재호씨께

마지막으로 저녁이나 지어놓고 가쟀더니, 갈길이 바빠서 그대로 떠납니다.

우리들이 애초의 약속대로 한다면,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같이 살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지금의 당신 형편 이 그렇게 못된줄을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별수 있나요.

못난 사람이 잘난 사람을 위하여 희생해야지. 세상 일이 이런바에 내할 도리는 이밖에 없습니다. 부디 편안히 계 서요. 당신은 마음 악한분이 아니라, 섭섭히 여길줄도 압 니다만 내일의 행복을 위하여, 눈물은 부질없은것이에요.

명례라는 사람 하나를 깨끗이 잊어버리서요. 저도 재호씨 를 되도록은 잊으리다. 그리고 서로 제각기 제갈길을 구 합시다. 돈삼원 저의 일생에 유용하게 쓰도록 기부해주소서. 혹시 결혼자금에 보태게 되더라도

명례 올림

一二

편집

『이로너라─ 』

밤 아홉시나 되어 대문간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누구요?』

재호는 명례가 던지고간 편지를 읽고 여지껏 울고난 끝 이라, 목에 가래가 걸려 그렁그렁한 소리였다. 시어머니 를 여윈 며느리처럼 가는 사람은 가는 사람이려니와, 보 내는 사람의 섭섭한 정에 팔자설음이 북바쳤든지도 모른다. 조강지처를 벅린다는 죄스런 생각, 그보다 인간으로 서의 명례를 잃은 그 설음이 그의 양심을 아프게 찔렀던 것이다.

『여기가 박주삿댁이요?』

안에서 대답이 시원찮으니까, 밖에 섰던 사람들이 들어 섰다. 재호는 일본 어느 작가의 희곡(菊池覽 父歸) 을 연 상하고, 불길한 예감이 머리에 떠올라 방문을 열고 내달 았다.

『내가 박재호요. 누구시요?』

『여─ 박군인가, 난 백졸세』

세사람중 맨 앞서서 마당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김 백조, 즉 뻐드렁니. 그뒤로 양복장이 하나, 양장한 여자 하나. 재호는 그여자가 유나인것을 침침한데서도 넉넉히 알수 있었다.

─ 유나가 이밤중에 웬일일까─ 재호는 체면적게 머리를 꾸뻑하였으나, 엄동에 찬밥먹고 난것처럼 속이 와들와들 떨렸다.

염치 없는 일행은 재호의 입에서 『들어옵시요』소리도 떨어치기 전에 구두를 벗고 마루위로 올라섰다.

『손님들은 아직 안 오셨군』

뻐드렁니는 방속을 기웃거리면서 재호에게 물었다.

『손님은 웬손님?』

『오늘이 무슨날인지 모르나?』

『??』

『이사람 정신 나간 사람이군!』

뻐드렁니는 멍하니 서있는 재호의 어깨를 정신이 번쩍 들게 쳤다. 그리고 방에 걸려있는 양복을 떼어왔다.

『어서 입게, 아무리 약식 (略式) 으로 한 대도 의관은 차려야지』

재호는 영문도 모르고 하라는대로 옷을 바꾸어 입었다.

『자─ 방으로 들어갑시다』

하고 안내하는 뻐드렁니의 뒤를 따라 유나, 또 한사람, 재호도 방으로 들어갔다.

일동이 착석을 하자, 뻐드렁니는 재호를 유나와 나란히 앉힌다음,

『시작합시다!』

하고 선언했다. 무었을 시작하자는지 재호는 도대체 꿈 인지 뭔지 영문을 몰랐다. 유나가 오고, 낯설은 사나이가 오고해서 어떻게 생각하면 유나의 일신에 <관한 책임문 제를 따지러 온것도 같았다. 유나를 흘끗보니 그는 고개 를 숙인채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낯설은 사나이가 일어섰다.

『꼭 오셔야할 손님이 안오셨는데 더 기다려볼까요』

『사고가 있어 어쩌면 못오신다고 그랬는데요』

유나의 말이었다.

『그럼 그대로 시작하겠습니다.……』

긴장의 일분간! 뻐드렁니는 박수로 개회를 시켰다.

『……에─ 또, 오늘저녁, 이 자리를 말할것 같으면 김백 조씨가 월하의 빙인이 되어 박재호군 강유나양 두분의 일 생을 한데 맺어주는 축복할만한 자리입니다. 어둔밤에 홍 두깨 내민다는, 우리 선인들의 말쑴과 같이 너무나 돌연 한 일에 당자되는 신랑께서도 매우 얼떨떨하신 모양이니, 신부께서 오늘이 길일이라고 미지의 결혼날짜를 오늘로 앞잡은 관계니까, 이점을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또─ 두분을 두고 말하면 처녀도 아니요, 총각도 아니요, 버젓 한 결혼식은 전에 한번씩 겪은바가 있으니, 오늘 이자리 는 제법 예를 갖출수 없는 형편입니다. 묻지 않아 신랑은 예물 준비도 없고, 피로연 자금도 없을테니, 예물대신 활 동사진식으로 키쓰나 한번 하고 마시던지, 그럴 용기가 없거든 힘있는 악수도 무방합니다……』

비위좋게 신부가 신랑의 손을 덤썩 쥐었다. 주례하는 사 나이는 코를 한번 씰룩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피로연은 백조씨의 독지로 청요리를 시키 게 됐으니, 의식이 끝난 다음에 다들 참례하시기를 바랍 니다.』

『신랑신부의 맹서가 있어야지』

뻐드렁니가 엄숙한 태도로 주례에게 항의했다.

『옳지옳지 깜빡 잊었어─ 신랑신부 두분이 맹세하십시 오, 먼저 유나씨 박재호란 남편에게 여하한 일이 있더라 도 일생을 바치겠습니까?』

『네─ 』

유나는 아주 고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재호씨는?』

『예끼 망할자식들! 장난도 심하다』

재호는 여지껏 지난 일이 모두 연극인것을 비로소 깨달 았다는것이다.

『이놈아 잠자코 있어. 여기가 어딘줄 아니』

뻐드렁니는 담배 한 개를 꺼내고, 갑을 재호에게 던졌다.

첫날밤 피로연이랍시고 뎀뿌라?양장피잡채에 배갈 한근, 만두 네 그릇을 시켜놓고, 둘러앉아 먹은뒤─ 열한시나 되어서 뻐 드렁니는 가고, 주례하던 사나이는 건넌방에서 머므르고, 재호내외는 안방에서 자리를 깔고 나란히 누웠다.

─ 이를테면 첫날밤─ 재호가 이지껏 속은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고, 우스웠다. 속았거니 하고 다시 보아 그런지, 명례의 화장한 얼굴은 땀에 한꺼풀(특히 콧등 근처로) 번져져서 은메끼(鑛金)한 주전자처럼 노오란 두석(眞錫)살이 내다 보였다.

『어참 고약한 일이로군! 머리는 왜 끊었어. 단발이 그렇 게 하고싶든가?』

『단발이 뭐이 좋아! 수틀리면 중될라구 그랬지!』

『차라리 중이나 돼버리지 않고』

『절근처에 와서 빙빙 도는 꼴을 어떻게 보게』

『누가?』

『당신이』

『어림 없지』

『어림 없어요? 어쨌든 여자한테 몹시 추근추근하고 내 숭스러운 것은 이번에야 알았어요. 여간, 한두번 해본 솜 씨는 아니든데』

『아, 망할것, 별소리를 다 하는군!』

재호는 자기 한일을 자기가 생각해보아도 얼굴이 화끈화 끈 달았다.

『삼막사는 왜 가겠어요. 그것부터 엉큼한 수작 아니 야?』

『남 다 놀러가는덴데 엉큼할게 뭣있어』

변명은 아니할수 없고, 낯은 파리가 기어다니는것처럼 간지러웠다.

『비가 오니까 좋았지요, 좋아?』

『아이쿠! 아얏!』

명례가 옆구리를 사정없이 꼬집어 뜯었던 까닭이다.

『딴데 가서 또 그식으로 해요』

『내가 오라구한 빈가, 왜 나를 탓해? 나는 부끄러울것 이 없어. 오히려 순진했거든!』

『순진? 능청스러워서 그렇지』

『옳지, 다른방에서 자랴는 사내를 불러 들여놓고, 운 여 자는 누군데? 뭐 어쩌구 어째?……왜 내마음은 몰라주─ 세─ 오?』

명례는 이불을 푹 뒤집어 썼다. 아무리 흉허물 없는 새 이지만, 빤히 마주보고 이 소리를 들을수는 참아 없었다.

재호는 이불을 벗기려고 들었다.

『여보, 유나씨. 대답좀 하십시요. 왜 울었어? 뭘 몰라주 어?』

『아이 망칙해!』

『망칙한줄 알면 왜 했어』

『가엾어서 그랬지』

『물에 떠나려갈 지경이든가 가엾게? 나보다도 더 엉큼 하든데』

『아이 인젠 그얘기는 그만둡시다.』

명례는 배길수가 없어서 삼막사 이야기는 쓱싹해버리려 고 했다.

『어쨌든 용한 연극이야, 나 같은 사람이 속을제야』

재호도 그이야기는 더 꺼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생각하고보니, 자기네는 새로 결혼하고 새길을 걷는셈이다. 피로연 석상에서 주례하던 사나이가 말하듯, 명례를 명례로 생각하지 말고, 유나로 생각한다면 명례도 예쁜 아냇감이었다. 재호를 주정뱅이로만 알지 않고, 삼막사에 서 인연 맺은 숫된 사나이로 여긴다면 평생을 미듬직한 남편감이었다.

『언제든지 지금의 기분대로만 나갑시다.』

명례는 재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세상의 애인들이 하듯했다.

『늘 이기분이 있어질까』

『힘써야지요』

『건너방에서 자는 친구하고 어떻게 된댔지?』

『외사촌 오빠』

『익살맞은 친구야』

『해외로 돌아다니다가 십오년만에 돌아왔어요』

『오빠가 하나 생겨서 좋겠군』

『오늘 시집온것만은 못해요』

『말 잘한다!…… 빌려 입은 양장은 세탁을 해서 돌려보 내든지, 새로 해주든지 해야지?』

『기부받은것이니까 괜찮어요』

『너무 염치 없는걸!…… 그동안 총비용이 얼마나돼?』

『말 마서요, 집간이나 작만해볼까하고 모으기 시작한 알뜰한 돈 오십원이 다 달아났어요』

재호는 뻐드렁니가 푸지게 쓰고다니던 돈이 기밀비였구 나! 하였다.

『그이가 아니와서 섭섭한걸!』

『정말 섭섭해요. 부끄러워서 못오겠다구 그러드군요』

『퍽 똑똑해』

『똑똑하구말구요. 나의 은인애요』

『명례는 지금 어디 있을까』

재호는 문학소년의 기분이었다.

『북악산 꼭대기에서 관악산을 바라보고 망부석이 됐겠 지요』

명례도 아니 유나도 쓸쓸히 웃었다.

봄 그이듬해 봄.

종롯거리 길가에 놓고 파는 누그러진 엿가락처럼 사람들 도 추위 한번을 겪고나서 따뜻한 질에 맥이 풀릴 때다.

일요일이 아니언만, 마음이 간지러워 배겨있지 못하는 한가한 사람들로 인하여 창경원행 전차는 제법 복작거렸다. 종로 사정목 안전지대에 서서 오고가는 사람의 눈을 잡 아끄는 두여성.

『참 얼마만이야!』

이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서, 자지러지게 반가워하는 트레머리는 명례였다.

『일년이나 됐나바』

양장한 여자도 명례만큼 번잡은 떨지 않지만 무척 기뻐 하였다.

『작년 이맘때니까 꼭 돐이 돌아왔군 그래!』

『그래 그래 꼭 이맘때야. 그동안 명례는 귀부인티가 꼭 박혀 몰라볼번했어』

양장녀는 명례의 말쑥이 차린 옷맵시와 화장한 얼굴을 눈에 서투른듯이 번갈아 훑어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귀부인? 호호호…그렇게 놀리지 말어. 애라의 은혜는 언제든지 갚을테니』

『은혜될것이 있나. 동무 위해서 옷좀 빌려주었을뿐이 지』

『연극을 잘 꾸며준 덕이야』

『원작이 암만 좋으면 송용있나, 배우가 잘했길래 연극 이 잘되었지……그래 지금은 어때. 내외분 재미가 달콤 해?』

『그저 그렇지 뭐』

재호에게서 받는 대우가 엄청나게 달라졌건만, 참아 자 랑삼을수는 없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아버니, 병환 때문에 상해 갔다가 그저께 왔어』

『그렇게 가있으면서 편지 한 장도 안한담, 친구간에』

『편지하면 뭘해. 나같은 사람이』

애라는 자격지심에서 우러난 소리였다.

『가게는 어떻게 했어』

『누구한테 맡기구 갔지, 인재 그것두 집어치고 들어앉 어볼 작정이야. 나도 귀부인 노릇을 해야 되겠어』

『셈이 안돼?』

『셈이 되구 안되구간에 모양 사나와서 못해먹겠어. 남 자들 상대로하는 장사니까 까닭 없이 나쁜 소문만 돌구 또 그녀석들 취정받이하기도 싫고』

『그럴테지』

명례는 애라의 마음을 잘아는 듯 충심으로 동정했다.

『어딜 가는길이야, 창경원?』

『창경원이 다 뭐야. 병원에 가는길인데』

『병원에는 왜?』

『어린애가 아퍼서』

명례는 옆에 계집애가 업고 있는 어린애를 가리켰다.

『애야?』

애라는 어린쪽으로 좇아갔다.

『어쩌면! 명례가 아기 난줄은 몰랐어』

『몰랐든가』

『그럼 모르지 않구! 퍽 이쁜데 외탁을 많이 했군! 어디 가 아파그래?』

애라는 연해어린애를 들여다 보면서, 예쁘다고 치하를 했다. 명례는 삼막사의 하룻밤 일을 추억하면서 속으로 는, ─ 말 말어라. 관악산의 정기를 타고났단다!─ 했다.

『똥질이야.─ 인제 다 나었어』

『응! 사내?』

『물론 사내지』

명례는 자랑하듯이 대답했다.

『백날 지났어?』

『내달 스무날이야. 퍽 숙성할까봐』

『나도 어서 시집이나 가야겠는데!』

웃음의 말이 아니요 진정이었으나, 두사람은 허리가 아 프게 웃었다.

『오는 토요일날 들러리좀 서주어』

『그렇게 급해?』

『급하잖구!』

『신랑은 누구야?』

『백조씨!』

『백조씨야? 어쩌면……약혼은 언제 했길래?』

『나도 작년 이맘때!』

『그렇더라!』

명례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이는 뻐드러졌지만, 마음씨 고운 사나이라, 두사람이 잘만났다 싶었다.

『꼭 서주어야 해』

『아무렴, 들러리는 몇 번이고 설테니, 잘만 살어!』

『망할 계집애, 악담을 해도 분수가 있지』

『아참 실언을 했어! 용서해주어.』

명레는 무심코 한 말이나 잘못된 것을 깨닫고 낯을 붉혔다. 『용서가 다 뭐야』

애라는 명례가 무안해 하는 것을 알고 말의 방향을 돌렸다. 『바람둥이 자장가는 안하나?』

『자장가?……그건 어떻게 알았어? 지금은 『아베마리아』(聖母禮讚)를 부르는 사람이 따로 있는걸!』

(끝)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5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5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1929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