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쥴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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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밤 ── 여분은 삼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글방에 들어 앉아서 조그마한 책상에 몸을 기대고 깊어가는 여름밤을 외로히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외로운 밤은 천년이고 만년이고 같이 살다가 같이 죽자고 맹세에 맹세를 거듭한 그리운 낭군과 더불어 같이 지낼 수 있다면 여분은 얼마나 기뻤으랴. 마음대로 되지않는 이 말썽 많은 세상을 여분은 얼마나 미워했으랴.

여분은 나이 자라 금년 열 아홉 ── 삼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날, 여분은 처음 맛보는 그 비길데 없는 슬픔을 원수의 후손 백문호의 품안에서 풀었던 것이다.

『여분아, 슬퍼한들 뭣하니? 사람이란 누구나 다아 한번씩은 죽는거지. 너도 나도 한번씩은 죽는단다 ──』

『싫어, 싫어! 난 안 죽을래! 너도 죽으면 안돼!』

하며 문호의 품안에서 느껴울던 삼년 전을 여분은 생각한다.

하필 원수의 자손을 눈여겨볼 까닭이 어디 있느냐고 제 마음에 열번 스무 번 물어본 여분이었으나 사랑이란 도리어 그러한데서 더 많이 생기기 쉬운가보다 하였다.

이윽고 여분은 몸을 일으켜 발을 반 만큼 걷어들고 밖을 내다보았다. 행여나 문호의 그림자가 보이지나 않을까?

무더운 밤이건만 화단에 어린 창백한 달빛이 한결 시원해 보이기도 하였다.

『너 아직도 안자니?』

안방에 불은 벌써부터 꺼져있건만 어머니는 아직 잠이들지 않으신 모양이다.

『잠이 안와요 어머니 ──』

『어서 자거라. 자고 깨고 자고 깨고 하노라면 세월도 흐르고, 세월이 흐르면 마음도 흐르는 법이란다. 어서 자거라!』

『어머니 어서 주무세요.』

『자래도 그래! 마음이 약하면 몸도 약해진다고, 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 글쎄 너도 철이 없지, 그게 글쎄 될법한 노릇이냐?…… 너 네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설마 죽이기야 하겠니만 넌 벌써 집을 쫓겨 났겠다.

──』

『어서 주무세요, 어머니!』

『응, 너도 어서 자거라. 홀 에미라고 깔보았단 안된다. 안돼 ── 어서 이 놈의 고장을 떠나야 겠다. 음 ──』

우는 듯한 어머니의 자비스러운 목소리에 여분은 다시 발을 내리고 방바닥에 쓰러져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어머니, 어머니!』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너그러우신 어머니를 이처럼 괴롭히는 이년을 아버지, 할아버지, 하루 바삐 저승으로 잡아 가소서!』

그러나 다음 순간 여분의 귀밑에 쟁쟁하니 떠오르는 것은 며칠 전 문호와 자기가 저 부부암에 나란히 앉아서 주고 받던 이야기의 한구절이었다.

『천년만년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여분은 그만

『아아 ──』

하고 애닲게 느끼면서 그 연약한 손톱으로 방바닥을 무섭게 긁어대는 것이었다. 벗어진 손톱사이로 흐르는 선혈 ──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애기씨, 애기씨!』

하고 여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낮으막히 들려왔다.

여분은 불현 듯 눈물어린 얼굴을 반짝들고 귀를 기우렸다.

『애기씨, 주무세요? 애기씨! ──』

목소리는 분명히 들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사나이의 음성이다.

여분은 사방을 한번 휘 둘러본 후에 몸을 일으켜 들창을 열었다. 들창 밖은 바로 담장이고 담장 박은 바로 행길이다.

달빛을 등지고 담장 위에 엉거주춤 올라앉은 사나이의 그림자 ── 여분은 후다닥 놀라며

『거 누구세요?』

하고 가늘게 불렀다.

『애기씨 접니다. 저예요 ──』

『오, 춘길이! 난 또 누구라고?』

그것은 머슴 홍춘길(洪春吉) ── 현재 술장수하는 홍서방이었다. 춘길네 부부는 여분네 바로 옆집 오막살이에서 살고 있었다.

술과 도박과 싸움을 유일한 취미로 여기는 머슴 춘길이 ── 그런 춘길이가 오늘밤 담장 위에 올라 앉아서 주인집 애기씨 여분을 부르는 까닭은 무엇일가?

『애기씨, 백씨댁 도령이 이 편지를 애기씨에게 갖다 드리라고요.』

하면서 내놓은 것은 달빛에 허엽스레하니 보이는 한개의 흰 봉투였다.

『빨리, 저리로 내려 가!』

여분은 봉투를 받아 들며 춘길이를 그렇게 재촉하였다.

『부부암에서 기다리시겠다고요.』

『알아 알아! 들키기 전에 빨리 내려가래도 그래!』

춘길은 담장 밖으로 사라지고 여분은 봉투를 뜯었다.

달은 밝고 마음은 어둡고 그대 그리는 마음 비길데 없어서 오늘밤도 부부암에서 자정을 기다리노라. 만나면 하고 싶은 말 태산 같건만 못다하고 헤어지는 마음 슬프고 애달퍼라. 그래도 오늘밤만은 하고싶은 말 다 하리다.

그리던 낭군 백문호의 낯익은 글씨였다. 여분은 편지를 착착 접어서 젖가슴 밑에 쓰러넣은 다음에 옥색치마에 만만제 장날 사온 회신을 갈아 신고 불을 끄고 뜰아래로 내려갔다. 안방에 계신 어머니는 주무시는 모양이다.

이리하여 대문밖을 나선 여분은 좁은 개천을 끼고 하류로 하류로 자꾸만 내려갔다. 부부암까지는 그리 멀지는 않았으나 길이 무척 험하다.

자정이 가까운 산골짜기 길을 여분은 모든 두려움을 잊어버리고 허둥지둥 걸었다.

개천이 점점 넓어져 간다. 여분은 왼편 가파로운 숲 사이 길로 들어 섰다.

그 숲 사이 길을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거기가 바로 부부암이다.

부부암은 대동강을 멀리 발밑에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두개의 바위가 아름다운 「로맨스」를 속삭이 듯 가지런히 앉아서 대동강을 내려다 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백년 전인가 이백 년 전인가 ── 이 ×천골에 길동이라는 열 일곱 난 총각과 보배라는 역시 열 일곱살인 처녀가 살았는데 보배는 명망 높은 재상의 후손이었고 길동은 그 댁 하복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 너무도 짝이 기운 자기네들의 신분을 저주하여 오던 나머지 어떤날 밤, 두 처녀 총각은 신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이 벼랑위에서 몸을 던져 대동강 푸른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신을 벗어놓은 그 자리에서 두개의 돌뿌리가 움터 나오기 시작하더니 사흘만에는 현재 보는바와 같은 거의 한길이나 되는 두개의 바위가 돋아 났다고 ── 그 후부터 사람들은 그것을 부부암이라 불렀다고 하는 하나의 「로맨틱」한 전설이 서리어있는 바위였다.

여분은 마침내 달빛이 얼룩얼룩 어린 숲새길을 더듬어서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여분은 후우하고 숨을 내쉬며 주위를 돌아다 보았다.

부부암 한편쪽 바위 위에 달빛을 등지고 물끄러미 벼랑밑을 내려다보고 앉아 있는 사나이

『오오, 여분이!』

사나이는 바위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여분을 맞이하였다.

여분은 달려 가자마자 문호의 품안에 안기우며,

『보고팠어요! 안탑갑게 보고팠어요!』

하며 삼단같이 길게 땋아느린 머리를 사나이의 가슴속에 파묻었다.

『나도나도……얼마나……』

그러나 문호의 굵다란 목소리는 끝을 채 맺지 못한채 그만 중단 되었다.

원수의 아들과 원수의 딸은 대대손손이 지켜오던 철석같은 가헌(家憲)을 헌 신짝같이 저버리고 그 애달픈 마음과 고달픈 영혼을 이 일순간에서나마 마음껏 하소연 하려는 것이었다.

희미하게 비치는 여름밤 달빛 아래서 두 사람의 그림자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떨어질줄 모르고 흑흑 느껴우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만나보는 것도 이젠 한달 밖에 안 남았어……』

여분이의 우는 목소리였다.

『한달 밖에? 왜?』

문호의 놀라는 목소리였다.

『한달 밖에……한달 밖에!』

『여분이, 대관절 그게 무슨 말이야?』

『한달 후엔 이 ×천골을 떠나겠다고……어머니가, 어머니가 그러시는 걸!』

『………』

원수의 자식이라도 『 문호만은 사람이라고 ── 그러시면서 어머니는 늘 칭찬은 해도,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도 원수는 원수라고 ── 원수의 자식에게 제 딸을 시집보내진 못하겠다고…』

『음……』

하고 깊이 신음하면서

『여분이가 이 골을 떠난다면 나도 이 골을 떠날테야! 여분이 없으면 난 못 살아! 난 죽을테야!』

『죽으면 난 싫어! 죽지 말아요!』

『우리들의 사이를 오늘 아버지께서 아시고 날 죽이겠다고……』

『아버지께서? 건 또 어떻게?』

『영호가, 영호자식이 그만 우리들의 사이를 눈치채고 아버지께……』

『영호가?』

하고 여분은 깜짝 놀라며

『뱀같은 사람! 사갈같은 사람! 난 지금까지 아무말도 안하고 있었지만, 저번에도 개천가에서 날 붙들고 제 색씨가 돼달라고, 전 얼마안 있으면 백만장자가 된다나 뭐 ── 그래 아버지 재산은 아들이 상속하는 법이지, 조카 아들이 무슨 소용있느냐고 그랬더니, 그래도 두구보라고, 그리고 날 극진히 사랑하는 증거라고 그러면서, 어디서 났는지 저번 평양서 찍은 내 사진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이는 거에요.』

『음 ── 그랬던가? 글쎄 책상설합에 넣어 두었던 여분이의 사진이 얼마 전부터 도무지 보이지 않았어.』

두 사람의 이야기는 거기서 한동안 그쳤다.

여분은 부부암에 몸을 의지하고 댕기 꼬리를 잘근잘근 깨물면서 달빛이 꿈결같이 어린 대동강을 멍하니 내려다본다.

문호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얼마 동안을 잠자코 서 있다가 이 귀찮은 사파를 일순간이라도 잊어 버리자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여분아! 저 물이 어디까지 흐르는지 너 아니?』

『우리 그만 죽을까?』

『…………?』

『이 벼랑에서 길동이와 보배도 죽었는데 뭐 ──』

『…………』

『그만 죽고 싶어!』

『저 물이 어디까지 흐르는지 여분은 모를 걸?』

『저 물은 ──』

『저 물은?』

『남포까지 흐르지 뭐.』

『그리군?』

『황해바다까지 흐르고 ──』

『또 그리군?』

『또 그리군, 그리군 ──』

『그리군 황해에서 인도양으로 인도양에서 대서양으로 ──』

『대서양에선?』

『태평양으로……』

『태평야에선? ──』

『또 황해바다로 흐르지!』

『그럼 뺑뺑 돌아만 다니게?』

『커다란 배를 타고, 저 물결을 따라 세계를 한번 돌아 다녔으면 ──』

『얼마나 좋을까!』

『그럼 죽을 필요는 없지.』

『누가 정말 죽쟀나 뭐 ──』

이리하여 문호와 여분은 달이 거의 지도록 도저히 허락 되지 못할 애달픈 사랑을 부부암에서 속삭이었다.

문호와 여분이의 사랑이야말로 현대의 「로미오」와 「쥴리엣」의 애끓은 사랑 그것이었다.

부부암에서 내려온 문호가 동리밖 개천가에서 여분과 헤어져 자기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 백준모는 자지않고 기다리다가 문호를 사랑으로 불러들였다.

『거기 좀 앉아라!』

아버지 목소리는 무척 온유하였으나 그 부드러운 음성 속에는 그 어떤 엄숙한 결심이 감추어져 있었다.

문호는 아버지 앞에 끓어 앉아서 머리를 숙으렸다.

『밤새로독 어떤 일이 있었느냐? ──』

『아버지!』

문호는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지금에 이르러 무엇을 숨기리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여 엄씨댁 외딸 엄여분과 같이 있었읍니다!』

『음 ── 그러나 너는 단지 이 애비의 말을 거역했을뿐만 아니라 이 백씨 가문의 조상을 모욕하였다는 사실을 못깨닫는단 말이냐?』

아버지의 얼굴은 점점 핏기를 잃어간다.

『열번 스무번 깨닫고 있읍니다!』

『그러면 그 처럼 자각을 가진 네가 엄가의 후손과 정을 통하다니, 그것이 자각있는 사람으로서 감히 취할 길인가?……』

『문호야!』

하고 아버지는 힘을 주어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네? ──』

『엄가의 딸과 정을 끓어버릴 생각은 없느냐?』

문호는 대답이 없다. 아버지의 얼굴을 묵묵히 쳐다볼 뿐이었다.

『엄가의 딸과 정을 끓어버릴 생각은 없느냐?』

아버지는 다시 한번 그렇게 다졌으나 역시 문호의 다문 입은 통 열릴 줄을 모른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정분을 끓어버릴 생각은 없다는 말이로구나!』

『아버지!』

문호는 한발자욱 앞으로 가까이 다가 앉으며

『불효 소자를 용서하십시요!』

하고 머리를 다시 숙였다.

『용서하라는 뜻은?』

『아버지!』

『어서 말을 해봐라!』

『소자는 아버지의 허락없이 엄여분과 백년해로를 언약하였읍니다.』

『그래서?』

『아버지!』

『말을 해봐!』

『소자는 엄여분과 백년해로의 언약을 하였읍니다.』

『그 말 뿐이냐?』

『엄여분은 소자의 아내입니다!』

『그말 뿐이냐?』

『엄여분은 소자의 아내입니다!』

『그말 뿐이냐?』

『여분은 소자의 아내입니다!』

『에익! 고약한 놈 같으니!』

거기까지 이르자 백준모의 노기는 마침내 화산처럼 폭발하고야 말았다.

『아무리 지각이 없는 짐승이라도 어버이의 은혜는 갚는다는데, 하물며 사람으로 태어나 원수의 자식과 정분을 통하다니…… 이놈! 개새끼같은 놈 같 으니……』

백준모는 치를 부들부들 떨며

『이놈, 비록 네가 백씨성을 부른대도, 이 백준모를 애비라고 불러서는 안 되리라! 너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 아니니 썩 썩 이 집을 나가! 나가!』

『아버지!』

『아니 썩 못 나갈테냐?』

백준모는 드디어 아들의 등살을 쥐고 끌어 올리며 문밖으로 떠밀어냈다.

『아버지!』

『썩 못나갈테야?』

『아버지 ── 그럼 아버지 안녕히……』

그 날밤, 문호는 날이 채 밝기 전에 짐을 조그맣게 꾸려 가지고 정처없이 자기집 대문을 나섰다.

기왕 쫓겨난 몸일진대 여분을 한번 찾아보고 떠나리라 하였다. 아니 될 수만 있다면 여분과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먼 나라로 달아나 버리고 말리라 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문호는 개울을 끼고 여분네 집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문호는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개울 다릿목까지 다달았을 때 돌다리 위에 엉거주춤 하니 앉아 있는 한 사나이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

『아, 백씨댁 도령이 아니십니까?』

하고 물으면서 다가오는 것은 틀림없이 여분네집 머슴 홍춘길이었다.

『아 춘길이가 아닌가?』

『아니, 도령님, 이거 웬일이십니까? 이 밤중에 어딜 행차하시길래……』

춘길은 그러면서 문호의 차림차림을 보고 놀라는 것이었다.

『애기씨를 또 좀 불러주게!』

하고 문호가 충실한 심복 홍춘길에게 대강 이야기를 전하였을 때 춘길은 한번 더 놀라면서

『애기씨는, 애기씨는……』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문호가 홍춘길을 지금까지 충실한 심복이라고 믿었던 것이 불찰이었다. 춘길은 문호에게만 충실하였을뿐 아니라, 문호의 사촌아우 영호에게도 충실하였던 것이다. 자기에게 술값과 도박대만 넉넉히 쥐어주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도 충실한 심복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인간이었다.

『애기씨가, 애기씨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문호는 불길한 예감을 등골에 느끼면서 홍춘길의 손목을 부여잡고 흔들어 댔다.

『애기씨는, 저 애기씨는……』

춘길은 좀체로 입을 열지 않는다.

춘길의 그 비굴한 눈치를 알아차린 문호는 지갑을 꺼내어 지폐 두장을 내어주면서

『자 스무냥이다! 애기씨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이리하여 문호가 머슴 홍춘길의 입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 아까 여분이 가 부부암으로 문호를 만나러 집을 떠난 바로 조금 후에, 영호가 춘길을 불러 술값을 톡톡히 쥐어 주면서 여분을 꾀어내달라고 하길래, 부부암으로 가보라고 하면서 문호와 여분이가 늘 부부암에서 만난다는 이야기를 했노라고 ──

『그런데 대관절 어떻게 된 노릇인지 지금껏 안돌아 오시는데요. …… 그래 너무 걱정이돼서 이렇게 잠을 못자고 애기씨를 기다리는데요.』

그러나 그 때는 벌써 부부암을 향하여 쏜살같이 뛰어가는 문호였다.

춘길은 하루밤에도 여러 차례씩 자기 수중에 들어오는 술값을 머리속으로 세어 보다가 대관절 일이 어떻게 되는가고 문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아까 문호와 여분이가 부부암에서 애달픈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 때, 춘길의 말을 듣고 따라올라간 영호는 으슥한 숲속에 숨어서 그들을 감시하고 있다가, 두 사람이 헤어지는 것을 보고 여분을 어디론가 꾀어 냈을거라고 생각하면서 춘길을 한사코 문호의 그림자를 놓치지 않고 따랐다.

그러나 문호가 산비탈길로 부부암을 향하여 뛰어 올라가던 그 때였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숲새길을 아래로 뛰어 내려오는 두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은 틀림없이 여분과 영호다. 쫓겨 내려오는 것은 여분이고 따라 내려오는 것은 영호였다.

『여분이가 아닌가? ──』

절반은 딩굴듯이 뛰어 내려오는 여분을 왈칵 붙잡고 문호는 그렇게 부르짖었다.

『아악 ──』

하고 울면서 문호의 품안에 쓸어지는 여분이 ── 신발은 벗어지고 옷은 무참하게 흩어지고 ── 따라 내려오던 영호가 우뚝 멈추었다.

『짐승같은 놈! 저 놈은 저 놈은 나를……』

그렇게 영호를 저주하면서 문호의 품안에 쓸어졌던 여분은 흩어진 치마허리를 움켜 쥐고 몸을 일으켰다.

골수에 찬 원한이 복받쳐오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여 여분은 다시 산비탈길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영호야!』

문호는 한발자욱 다가서면서 그렇게 영호를 불렀으나 영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뒷걸음질을 하면서 다시 부부암이 있는 꼭대기로 기어 올라갔다.

문호는 영호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이윽고 두 사나이는 달빛어린 대동강을 멀리 내려다보는 부부암 앞에서 마주 서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나이는 말이 없다. 성난 황소처럼 마주선 두 사나이 ── 거기에는 다만 어두운 침묵이 있을 뿐이다.

『영호야!』

얼마 후 마침내 문호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영호는 통 대답이 없다. 영호는 영리한 사나이였다. 말을 하는 사이에 그는 생각하여야 한다.

『영호야 너도 사람이냐? ──』

하고 문호는 재차 물었다.

『흥! 원수의 자식을 아내로 삼으려는 문호만 사람인가?……우리 조상의 원수를 갚은 이 영호는 사람이 아니고? 나는 오늘밤 백씨가문을 대표하여 엄가가 우리조상에게 준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엄가에게 복수했을 따름이다! 나는 여분이 년을……』

『이놈아! 바른대로 이야길 못해? 네 말이 참말이라면 너는 왜 원수의 자식 여분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거야? 아무리 네가 짐승 같은 놈이라도 남의 집 처녀를 능욕한다는 법이 ──』

그러나 그 순간

『앗!』

하고 외친 문호의 몸뚱이가 짚었던 조그마한 바위와 함께 벼랑 밑으로 툭 떨어지다가 벼랑 기슭에 돋은 키 작은 나무 가지를 붙들고 매어 달렸다.

『하하하! ──』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영호의 웃음소리 ── 문호는 죽어라하고 소나무가지를 붙잡았다. 외넝쿨에 매달리 듯 달랑달랑 매어달린 문호의 몸뚱이! 캄캄하니 내려다 보이는 대동강!

『하, 하, 하, 하 ── 문호 형님! 언젠가 한번은 이제 그 빠져나간 조그마한 바위에 형님을 세워 놓으려고 벌써 한달 전부터 벼르고 있던 것이, 오늘 밤에야…… 사실은 형님과 여분이 년이 매일처럼 이 부부암 근처에서 만난다는 말을 듣고 ──』

그것은 영호가 한달 전부터 문호를 해치려고 만들어 놓았던 무서운 함정이었다. 바위밑을 살짝 빼놓고 간드랑 간드랑 노는 그 바위 위에다 나무 가지를 덮어 놓고 ──

『너는 나를 정말 죽일테냐?』

무서움에 떨리는 문호의 목소리였다. 붙잡은 소나무 뿌리가 한오락 한오락 빠져 나온다.

『앗, 영호야! 빨리, 빨리 손을……』

극도의 공포로 말미암아 맹수처럼 부르짖는 문호 ── 그러나 영호는 엉거주춤하니 벼랑밑을 내려다 볼 뿐 ── 툭! 툭! 하고 끊어지는 나무 뿌리. 문호의 무거운 몸뚱이를 싣고 소나무 뿌리는 한줄기 한 줄기 끊어진다. 끊어질 때마다 흙덩어리가 우루루하고 문호의 얼굴을 덮어 버리는 것이었다.

『영호야! 영호야! 아, 앗, 손을, 손을 내밀어! 아, 앗, 이 비굴한 놈! 악마 같은 놈! 아앗 ──』

다음 순간 문호의 허엽스레한 몸뚱이는 빠져나간 소나무 구루와 함께 희미한 달빛 속을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점점 적어지는 몸뚱이 ── 이윽고 멀리 벼랑 밑으로부터 조그마한 돌을 던진 것과 같은 물소리가 「참방」하고 들린다.

이 무서운 광경을 컴컴한 숲속에 몸을 감추고 목격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것은 엄씨댁의 머슴 홍춘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