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상권
假裝舞蹈會[가장무도회]
편집세계범죄사(世界犯罪史)는 일천구백 삼십 ×년 삼월 십 오일을 꿈에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실로 야수(野獸)와 같이 잔인하고도 한편 신기루(蜃氣樓)처럼 신비롭고 마도(魔都)의 일루미네 ─ 숀 처럼 호화로운 이 죄악의 실마리는 그 날밤 ─ 저 세계적 무용가 공작부인(孔雀夫人)의 생일날 밤부터 시작되었다.
공작부인이 세계적으로 진출하여 구미 각국에서 자기의 예술과 더불어 조선이라는 이름을 선양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은 바로 작년 늦은 가을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이름이 주은몽(朱恩夢)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 그를 공작부인이라고 불렀고 그 역시 그렇게 불리우는 것을 그리 불명예스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전하는바에 의하면 공작부인은 벌써 삼십 고개를 넘었다고도 하고 아직 이십 이삼세 밖에 안되었다고도 하여 가히 추측할 길이 없었으나 그의 파트너인 백영호(白英豪)씨와 약혼한채로 아직 결혼식을 거행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그가 아직 미혼의 처녀라는 것 만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리고 공작부인이라는 명칭은 그의 출세작 『공작 부인(孔雀夫人)』으로부터 불리워지는 일종의 애칭이었다.
그 처럼 주은몽을 세계적 인물로 만들어 준 그의 출세작 『공작부인』이 상연된 것은 지금으로 부터 사년 전 동경『히비야 음악당』의 호화로운 스테 ─ 지에서 였다.
퍼붓는 듯한 찬양의 소리 ─ 앵콜에 앵콜을 거듭한 주은몽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듯 싶었다. 도하의 각 신문기사는 반도의 무희 주은몽을 세계적으로 선전하기를 아까워 하지 않았다. 주은몽이란 이름은 어느덧 공작 부인이란 애칭으로 변했던 것이다.
그때 마침 미술연구자 「파리」에 가 있던 백만장자 백영호씨가 요꼬하마 부두에 내리자 마자 조선이 낳은 세계적 무희 주은몽의 인기에 놀라는 한편 그를 은연히 사모하는 정을 남달리 두텁게 품고 수차 주은몽과 만나는 사이에 두사람 사이에는 어느덧 화려한 미래를 굳게굳게 맹세하는 속삭임이 오고 가고 하였다. 그리고 그해 가을로 주은몽은 약혼자 백영호씨의 후원을 얻어 구미로 무용행각을 떠났던 것이라고 ─ 이것이 소위 믿을만한 소식통이 전하는 「뉴우스」로 되어 있다.
그것은 하옇든 필자는 이만한 예비 지식을 독자제군에게 던져주고 이제부터 세계범죄 사상에 잊을 수 없는 일천구백 삼십×년 삼월 십 오일 명수대 주은몽의 저택에서 열린 가장무도회(假裝舞蹈會)로 인도하고자 한다.
주은몽 ─ 아니, 공작부인은 자기의 축복받은 탄생을 가장 흥미있고 가장 호화롭게 기념하기 위하여 삼월 보름날 한강 건너편 명수대 자기 저택에서 조선서는 보기드문 가장 무도회를 열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날 밤 ─ 남국으로부터 화신(花信)을 싣고 찾아오는 바람 조차 훈훈한 밤, 손님들을 태운 자동차가 달빛에 무르녹은 한강을 황홀히 내려다보며 명수대를 향하여 마치 그림처럼 미끄러져 간다.
오늘밤 공작부인의 초대를 받은 손님들은 가장무도회에 적지 않은 흥분과 호기심을 느낄뿐만 아니라 절세의 미인이요 세계적 무희인 공작부인과 손목을 마주잡고 춤출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고 그 황홀찬란한 일순간을 전 생애의 금자탑 처럼 고히 고히 가슴속 깊이 모시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공작부인의 초대장을 받은 그 날부터 동경이나 혹은 해외에서 배워 가지고 온 서투른 「스텝」을「레코 ─ 드」에 맞추어 가면서 연습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초대를 받은 손님들 가운데는 유명한 실업가라든가 명성높은 변호사도 섞여 있었으나 대체로 보아서 문학가, 미술가, 음악가, 연극인, 같은 예술가가 대부분이었다.
도하의 각 신문은 공작부인의 가장무도회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그 중에는 공작부인의 이 너무나 광적(狂的)인 이국적(異國的)취미를 비웃는 기사도 없지 않았으나 하옇든 조선서는 처음 보는 거사인만큼「저 ─ 널리스트 」들에게 있어서는 한개의 좋은 미끼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하옇든 공작부인으로 부터 영예스러운 초대를 받은 손님들은 지금 공작부인의 화려한 자태를 눈앞에 그려보면서 명수대를 향하여 달렸다.
더구나 그것이 힘만 있으면 누구든지 딸 수 있는 야생화(野生花)가 아니고 장래의 남편 백영호라는 을파주안에 찬연히 피어있는 「다리야」인지라 사람들은 더 한층 흥분과 호기심을 안 느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제일미술전람회(第一美術展會)조각부(彫刻部)심사원인 백영호 씨는 제아무리 백만장자지만 벌써 오십 고개를 넘어선 중늙은이다.
하기는 비록 오십이 넘었다 할지라도 그의 단정한 용모와 교양있는 예술가적 「타입」은 그로 하여금 적어도 십년은 젊게 하였다. 더구나 미술연구차 다녀간 세련된 파리생활을 겪어온 영향도 많은 편이다.
『그러나, 그러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공작부인과 백영호씨의 약혼을 남달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한사람 있으니 그것은 지금 한강인도교를 호기있게 달리고 있는 한대의 「세단」속의 인물이었다.
그 「세단」속의 인물─「씰크햇트」에 「택시 ─ 도오」를 입고 흰 장갑을 낀 손에 흑칠의 단장을 들고 귀밑에서부터 턱 아래까지 시커먼 수염을 곱게 기르고 게다가 검은 「모노클(외알안경)」까지 낀 양은 마치 파리나 런던의 사교계에서 흔히 보는 교양있는 신사다.
아니 독자제군이 만일 탐정소설의 팬이라면 이 세단속의 인물이 저 「모리스 ․ 루불랑」의 탐정소설 주인공 ─ 파리 경시청을 마치 어린애처럼 농락하기를 즐겨하는 무서운 도적 「아르세느 ․ 루팡」으로 가장하였다는 것을 곧 간파할 것이다.
그리고 제군이 만일 가장술(假裝術)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면 그의 수염이 결코 임시로 붙인 가짜 수염같이 보이지 않는 것만 보아도 그의 가장술이 얼마나 훌륭하다는 사실을 가히 짐작할 것이다.
그는 지금 자기의 변장을 자기 이외에는 한사람도 간파할 수 없으리라는 자부심을 한아름 품고 눈앞에 닥쳐오는 공작부인의 저택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공작부인이 진심으로 저 늙은 백영호씨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공작부인이 과연 백영호씨와 결혼을 한다면 그는 자기의 청춘을 제물로 바치려는 정략결혼일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와 돈 많은「파트너」사이에 생기기 쉬운 의무결혼! 공작 부인은 현재 저 쾌활한 청년화가 김수일(金秀一)을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자동차는 벌써 공작부인의 정문 앞까지 다달았다. 그는 갑자기 얼굴을 가다듬고 배우가 마치 무대위에서 하는 것처럼 상반신을 약간 숙이면서
『공작부인! 처음 뵙겠읍니다.』
하고 이번에는 음성을 좀 높이어 중얼거려 보는 것이다.
독자제군이여! 제군이 만일 의성학(擬聲學)에 대한 조예가 있다면 이 수상한 인물의 목소리가 어떻게 홀륭하게 변해 버렸는지 제군은 자못 경탄할 것이다.
운전수도 수상하다는 듯이「백미러」를 통하여 등뒤의 신사를 쳐다본다.
자동차는 마침내 유랑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는 현관 앞에서 조약돌을 깨물며 멎었다.
운전수는 뛰어내려 문을 열면서 또 한번 이상한 눈으로 손님을 쳐다보았다.
신사는 포켙 에서 거울을 「 」 꺼내어 자기 얼굴을 한번 유심히 드려다 본 후에 자동차에서 내렸다.
자동차에서 내려 현관을 들어서니 거기 안내인 한사람 서 있다가 이 훌륭한 신사의 늠름한 풍채를 아래 위로 살피면서
『실례의 말씀을 여쭈겠읍니다. 가장을 어떻게나 살 하셨는지 도무지 누구이신지 알아 볼 수가 없어서 ─』
하고 속히 명함을 꺼내라는 눈치를 보였다.
신사는 그 순간 득의만만한 얼굴로 이 충실한 젊은 안내인을 잠깐 흘겨보고 나서
『수상히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소. 나는 오늘밤 처음으로 공작 부인의 현관을 들어서는 사람이니까 ─』
그리고 한장의 명함을 꺼내며 안내인의 손에다 쥐어 주면서 가장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러한 사람이요. 청년화가 김수일군을 대신하여 찾아온 사람이라고 공작부인께 여쭈어 주면 잘 알겠지요.』
명함에는 단지 『화가 이선배(李宣培)』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 그렇습니까. 잠깐 기다려 주십시요.』
안내인은 명함을 들고 분주하게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더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아씨께서 여쭈시라는 분부가 있었읍니다. 자아 이리로 들어 오십시요.』
머리를 곱게 가른 젊은 안내인은 넓고도 긴 복도를 한참 앞서서 걸어 가다가 음악소리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넓은「홀」로 신사를 인도하였다.
『허어 훌륭한 이국풍경『異國風景』이로군!』
입으로는 감탄사를 던지면서도 그는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서슴치않고
「산데리아」가 찬연히 빛나는 넓은「홀」안을 한번 휘 둘러보았다.
가장무도회는 지금이 한창이다. 저편 상단에는 그리 빈약하지 않은 「밴드」가 자리를 잡고 있고 백인백양 가지 각색으로 가장을 한 신사 숙녀들이 열정적인 음악에 맞추어 가며 짝짝이 쌍을 지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춤추는 양은 마치 「파리」의「캬바레」를 서울에 옮겨온 것과 같은 광경이다.
중세기의 「나이트」로 변장한 사람, 「빅토리야」왕조의 궁녀로 가장한 사람, 인도의 귀족을 흉내낸 사람,「집시」풍의 여자 ─ 그들의 가장을 한 사람 한사람씩 따져볼 때 가장술이 극히 유치하고 빈약함을 면치 못했으나 이렇게 멀찌기 서서 바라보면 그리 추한 광경도 아니라고 신사는 생각했다.
그는 아니 화가 이선배는 ─ 「홀」안을 이리저리 살펴 보았으나 이 가장 무도회의 주인공인 공작 부인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이상했다.
그는 한편 모퉁이 종려수(棕梠樹) 그늘 밑에 놓여있는 「소파」로 걸어갔다. 아까부터 파초나무 그늘아래 외로히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한 사람의 청년을 발견한 때문이다.
청년은 별로 가장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눈에다 시커먼 「마스크」를 썼을 뿐이다. 사람들의 춤추는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아있는 그의 입술과 눈동자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이 가장무도회를 비웃는 듯한 표정이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다.
『공작부인은 아직 홀에 나오지 않았읍니까?』
화가 이선배는 청년 앞으로 한발자욱 다가 서면서 은근히 물었다.
청년은 그 어떤 명상에서 깨어나듯이 머리를 돌려 이 선배의 차림차림을 유심히 살피더니 한번 빙그레 웃으면서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아르세 ─ 느 ․ 루팡」은 아랫 턱에 수염이 없읍니다. 그리고 「아돌프․ 맨쥬」도 역시 아랫턱엔 수염이 없지요.』
하고 의외의 말을 건넨다.
『그러나 때로는「루팡」도 아랫 턱에 수염을 기르지요. 필요를 느낄 때는 ─ ─』
하고 대답하는 이 선배는 불문곡절하고 내쏘는 이 청년의 어투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다.
청년은 역시 빙글빙글 웃으면서
『필요를 느낄 때는 그렇지요.「루팡」은 그 어떤 굉장한 범죄를 실행할 때는 백발 노인으로도 변장할 테니까요.─ 하하하……하옇든 훌륭한 가 장술을 가지셨읍니다. 오늘밤 여기 모인 손님 중에서 당신의 가장 술이 가장 우뜸일 것입니다. 자아 여기 앉으시지요. 저는 이러한 사람입니다.』
하고 청년은 명함을 꺼냈다.
이 선배는 잠깐 명함을 들여다 보더니
『아 당신이 그 유명한 탐정소설가 백남수(白南樹)씨?』
이선배는 적지않게 흥미를 느끼는 모양으로 상대방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유명하다는 말씀을 빼놓으시지요.』
『글쎄, 나의 가장을 「루팡」으로 보시는 것을 보니…… 저는 이선배 ─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이선배도 명함을 꺼냈다.
『이선배씨?』
『네 이선배 ─』
『이선배……』
그림에도 남달리 많은 취미를 가진 탐정소설가 백남수는 여태껏 이 선배라는 성명을 가진 화가를 모르는 모양이다.
그런 눈치를 알아차린 이선배는
『아직 백남수씨 처럼 유명한 이름을 가지지 못하여 대단히 미안합니다.』
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천만에요. 그런데 그림 그리시는 지는 벌써 오래셨읍니까?』
『한 이삼일 되었지요.』
『이 삼일?』
탐정소설가 백남수는「유모러스」한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기 보다도 오히려 유쾌하였다.
『잘 알겠읍니다. 그래 이 삼일 동안에 어떤 그림을 그리셨읍니까?』
『고양일 그릴 셈으로 붓대를 들었었는데 그만 호랑이가 되고 말아서 ─ 하하하……』
『하하하하……』
두 사람은 십년 친구를 만난 듯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백남수는 웃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끝끝내 자기의 본명과 직업을 감추어 두는 자칭 화가 이선배의 정체가 무척 마음에 걸렸던 때문이다.
『공작부인은 아직「홀」에 나오지 않았읍니까?』
이선배는 말머리를 돌렸다.
『아까 잠깐 나와서 한차례 춤을 추고 도로 들어 갔읍니다. 아직 그의
「피앙세」백영호씨께서 등장을 안하셔서……』
『백영호씨! 허어 자기 부친의 성명 삼자를 함부로 입에 담는 습관을 우리는 아직 갖지 못한 줄 알았더니……』
이선배는 약간 놀란 모양이다. 그러나 백남수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만 있다.
빙글빙글 웃고만 있다가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오늘밤 이 가장무도회에 출석한 손님들을 대개는 다 알아보겠는데 도무지 그의 정체를 알아 볼수 없는 손님이 꼭 두사람 있읍니다.』
하고 그는 손을 들어 저편 한 모퉁이를 가리켰다.
아 『 , 저기 서 있는「써 ─ 커스」의 파리앗치(道化役者)[도화역자] 말씀입니까?』
『네, 얼굴을 저렇게 그림 그리듯이 그려 놓았으니 저게 대체 누군지 ……』
『하하, 가장도 저렇게 대담하게 하고 나서면 증오를 느낀다는 것 보다도 도리어 애교가 있는 걸!』
저편 「밴드」옆 한구석에 우두켜니 서서 사람들의 춤추는양을 히죽히죽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는 이상한 인물 ─ 저 곡마단의 웃음단지, 어릿광대의 복장을 한 인물이 바로 그 사람이다.
목에 커다란 깃이 달린 주홍색 도화복을 입고 역시 붉은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맸을 뿐만아니라 흰떡같이 분을 칠한 얼굴에다 붉은빛, 파랑빛, 노랑빛, 이렇게 여러가지 빛으로 눈, 코 입술 같은 것을 간판처럼 그려 놓았으니 탐정소설가 백남수의 호기심을 어지간히 끈 것도 사실 무리는 아니었다. 아니 백남수만 아니라 수 많은 손님들 중에 그가 대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 수상한 어릿광대에게 쏠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춤을 추면서 속삭이는 것이다.
『하필 저런 어릿광대로 가장을 한담?』
『흥, 사람이란 다 저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니까요.』
『대체 누굴까, 저이가……』
『글쎄 누굴까?』
그때 어릿광대는 그 우수운 얼굴로 백남수와 이선배가 서 있는 이편 쪽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 반월(半月)처럼 커다랗게 찢어진 입술에 이상한 웃음을 띄우면서 훌쩍 홀 밖으로 빠져 나가고 말았다.
이선배는 어릿광대가 우쭐우쭐 하면서 걸어 나가는 뒷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백남수에게로 얼굴을 돌리며
『그런데 또 한사람 도무지 정체를 알아 보지 못할 사람은 누굽니까?』
백남수는 잠깐 이선배를 쳐다보면서
『또 한사람은 고양이를 그리다가 그만 호랑이를 그린 화가 이선배씨!』
『하하……화가 이선배의 정체가 암만해도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입니다그려. 하하하……』
이선배가 그렇게 호기있는 웃음을 연발할 즈음에 박수소리가「홀」안을 요란히 울리었다. 한 차례의 춤이 또 끝난 때문이다.
그때 번쩍거리는 금테안경을 쓰고 검은 모보단으로 만든 중국복을 입은 한 사람의 청년신사가 사람들을 헤치며 이편으로 걸어온다.
그는 「소파」에 앉은 백남수를 발견하고
『여어, 백군 아닌가!』
하고 소리를 치며 다가선다.
『어째 그리 쓸쓸히 앉아 있는거야? 남들은 이처럼 흥이나서 춤들을 추는데 응? 공작부인이 꾸며 놓은 이 가장무도회에 대한 군의 감상은 어때?』
중국복의 신사는 그 조각(彫刻)처럼 단정한 용모에 반만큼 미소를 띄우면서 은으로 만든 「시가렛케이스」를「포켙」에서 꺼내어 담배를 붙인다.
그러나 백남수는 한번 빙그레 웃고 나서
『하옇든 군의 감상부터 먼저 들어나보세. 보건대 무척 유쾌한 모양인데, 요즈음 도무지 웃을 줄을 모르던 군이 그 처럼 즐거워 하는 것을 보니 ……』
하고 의미있는 눈으로 상대방을 쳐다보며
『국제도시 상해에서 수입해 온 춤인만큼 훌륭한 걸. 공작부인을 제법 리-드 하는 걸 보니.』
『하하 그걸 보았나? 그러나 백선생(백영호씨)의 춤이야말로 본격적일 걸.
『홈바』파리의 사교장에서 가져온 만큼…… 그런데 왜 백선생이 아직 안 보이지? 정란(남수의 누이동생)씨도 아직 안보이고……』
이선배는 그 순간 이 중국복을 입은 청년신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살아지고 그 어떤 오뇌의 빛이 알알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웃음이 살아진 청년의 얼굴 ─ 그것은 마치 단아한 『그리샤』조각 처럼 어여쁜 얼굴이다. 이 선배는 아직까지 그 처럼 어여쁜 용모를 보지 못했다.
청년은 홀 안을 한번 휘 둘러 보고나서 자기의 오뇌를 떨쳐 버리려는 듯이
『하하하……하옇든 백선생이야말로 조선의 행운아 ─ 아니 세계의 행운아인걸! 오십 오세의 늙으신 몸으로서 공작부인의 사랑을 독차지 했으니까…… 백군 그렇지 않은가?』
그는 억지로 작기가 유쾌하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보이려는 듯이 웃어 보이며 옆에 앉은 신사「모노클」에다「씰크햇트」를 쓴 이선배의 차림차림을 흥미있는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백남수는 그때 얼른「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두 분을 소개 하겠읍니다. 이 분은 이선배 화백, 그리고 이 분은 저희 집의 고문변호사, 다년간 만주개발에 많은 힘을 쓰는 오상억(吳相億)군입니다.』
아아 그런가! 청년변호사로서 가장 수완이 능란하다는 오상억 변호사였던가!
그 때 이 가장무도회의 여주인공 공작부인이「홀」에 나타났다.
「홀」안이 터져 나갈 듯한 박수 소리 ─ 머리에다 꼬리를 활짝 펼친 공작의 관을 쓰고 흰바탕에 금실로 수 놓은 화려한 야회복을 입은 공작부인은 손님들에게 가벼운 답례를 하며 돌아간다.
음악소리는 다시「홀」안을 울렸다. 「왈츠」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선으로 상대방를 고르면서 「홀」중앙으로 몰려든다.
백남수는 이선배를 혼자「소파」에 남겨놓고 군중을 해치면서 공작부인 앞으로 걸어가서
『오늘 밤만은 저도 서양사람이된 셈이니─ 공작부인, 부인과 함께 춤추는 영광을 가질 수 있겠읍니까?』
하고 그는 약간 허리를 굽히고 공작부인의 손등에 입을 대는 흉내를 낸다.
공작부인은 얼굴에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 대신 왼손을 백남수의 어깨에 올려 놓았다.
이리하여 춤은 다시 시작되었다. 무르녹는 듯한 음악소리와 아울러「홀」
안은 흐느적거리는「왈츠」의 물결이다.
『그런데 백선생께서는 왜 아직 안보이셔? 같이 떠나오시지 않았어요?』
『저, 백영호씨 말씀입니까?』
『아이 어쩌면!』
『공작부인의 바깥어른 ─ 아니 한달 후면 바깥어른이 되실 양반! 허어, 백영호씨야 말로 세계에서 둘도 없는 행운아죠.』
『그만 두세요. 누가 자기 아버지를 그렇게 부른담?』
『아니 올시다. 그건 저 오상억 변호사가 아까 나에게 한 인사였죠. 세계에 둘도 없는 행운아라고 ─ 오군은 공작부인에게 많은 흥미를 가진 모양인데.』
『흥.』
공작부인은 입맛이 쓰다는 모양이다.
『그런데 은몽씨! 은몽씨는 나의 아버지의 무엇과 결혼하시렵니까? 백만 원의 재산?』
『노오.』
『그의 인격?』
『노오.』
『그이에 대한 의리?』
『예스! 그리고 그의 성의!』
두 사람의 이야기는 거기서 잠깐 그쳤다가
『한달 후에는 남수씨의 젊은 어머니 ─』
『젊은 어머니!』
감개무량하다는 남수의 어투였다.
『그런데 은몽씨는 지금까지 참으로 사랑을 바쳐 본 사나이가 있읍니까?』
『한 사람 쯤이야 ─』
『누구?』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세요. 칼이라도 들고 덤벼 들겠어요?』
『칼? 농담은 그만하고 ─』
『참 농담은 그만합시다.』
남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지금 저기「소파」에 앉아 있는「씰크햇트」에「모노클」을 쓴 신사 ─ 그가 대체 누굽니까?』
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글쎄 누굴까? 아, 이선배라는 화가가 아니예요?』
『전부터 친분이 있었읍니까?』
『아뇨. 오늘밤이 처음 ─ 아직 인사도 못했어요.』
공작 부인은 그리고 남수의 어깨 위로 묵묵히 앉아 있는「씰크햇트」의 신사를 뚫어질 듯이 넘겨다 본다.
남수는 다시 말을 이어
『그리고는 조금 전 곡마단의 어릿광대로 가장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대체 누굽니까?』
『곡마단의 어릿광대?』
『얼굴에다 흰떡같은 분칠을 하고 우수워서 죽겠다는 듯 초생달 같은 입이 찢어지도록 웃는 사람, 머리에는 주홍빛 수건을 쓰고……』
공작부인은 이상하다는 듯이「홀」안을 이리저리 휘 둘러 보았다.
『어디 있어요?』
『없을리가 있나? 조금 아까도 있었는데 ─』
『누굴까?……』
남수와 공작부인이 「홀」안을 아무리 살펴보았으나 주홍빛 도화복으로 전신을 감추고 히죽히죽 웃고 서 있던 수상한 그림자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道化役者[도화역자]
편집춤은 또 한 차례 끝났다.
백남수와 헤어진 공작부인은 저편「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이선배 옆으로 걸어갔다. 그때 이선배는 얼른「포켙」에서 커다란 「마스크」를 꺼내어 눈과 이마를 가리우면서 몸을 일으켰다.
『처음뵙겠읍니다. 이선배 ─ 김수일(金秀一)군을 대신하여 이 흥미 있는 가장무도회를 구경할 셈으로……』
독자제군은 이 선배가 오늘밤 이 공작부인의 저택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부터 자기의 본 음성은 감추고 가짜 목소리로 대화(對話)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만 할 것이다.
공작부인은 약간 수심 띈 얼굴로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읍니다. 수일씨와는 전부터 친분이 있었어요?』
『저와 수일군은 막역지우 ─ 수일군의 일신상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알고 있읍니다.』
『네, 그러세요?』
공작부인의 주옥같은 두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공작부인, 이리로 좀 나오시지요.』
이선배는 앞장을 서서 홀 밖 발코니로 나갔다. 명수대 일대에 고요히 흐르는 달빛 ─
『그때 수일씨는 어디 편찮으세요?』
그러나 그 때 자칭 화가 이선배는 엄숙한 목소리로
『공작부인!』
하고 힘있게 불렀다. 순간, 공작부인의 화려한 얼굴빛이 금새 어두워 졌다.
『네?』
『백영호씨와의 결혼식을 끝끝네 거행하실 작정입니까?』
이선배의 물음의 떨어지자 마자 공작 부인의 관을 쓴 머리가 창백한 달빛 속에서 힘없이 숙으러졌다.
『대답을 하십시요! 당신의 대답 여하에 따라 수일군의 일생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
『그 처럼 순진하고 쾌할한 청년으로부터 당신은 영원한 행복을 빼앗으려는 겁니까?』
『…………』
『대답을 하십시요! 그에게 준 사랑의 말 ─ 자기 입으로 한 말에 책임을 못 느끼십니까?』
그러나 공작부인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숙으렸던 머리를 들어 달빛에 곱게 깔린 한강을 물끄러미 바라 볼 뿐이었다.
꿈과 같은 백요 (白妖)의 세계, 멀리 서울 시가의 울긋불긋한 네온이 호화롭게 흐른다.
『수일씨!…………수일씨!』
약간 떨리는 공작부인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긴 한숨과 함께 얽히어 나왔다.
『운명은 김수일씨와 저와 서로 사모하는 마음을 허락했으나 결혼까지는 허락치 않았다고 ─ 돌아 가시면 부디 부디 그떻게 전해 주세요.』
『그러면 당신은 백영호씨의 백만원과 결혼 하시렵니까?』
『말씀을 삼가세요.』
『그러면……』
『백선생은 나의 예술 파트너 ─ 나의 예술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람 ─ 나의 세계적 진출을 위하여 노력한 사람이예요.』
『사랑과 의리를 구별하시지요.』
『저는 연애 지상주의자가 아니라는 말을 수일씨에게 전해 주셨으면 고맙겠어요.』
『잘 알아 듣겠읍니다. 다시는 수일군의 자취를 찾으려고는 생각지 마시요.』
『……?』
이선배가 던진 최후의 한 마디는 확실히 공작부인의 가슴을 바늘로 찌른 듯, 긴 눈썹 밑에 숨어 있던 두 눈동자가 쏘는 듯이 이선배를 쳐다 보았다.
그때 젊은 안내인이 밖으로 나오면서
『아씨, 삼청동댁에서 오셨읍니다.』
하고 공손히 읍하였다.
『아, 그래?』
하고 공작부인은 잠깐 주저하는 모양을 보이더니
『그럼 잠깐 실례 하겠읍니다.』
한마디를 남겨놓고 약혼자 백영호씨를 맞이하러「홀」안으로 들어갔다.
이선배는 공작부인이 살아진『홀』문쪽을 언제까지나 바라보면서 중얼거린다.
『아아! 절망이다! 암흑이로구나!』
『발코니』에서 이선배와 헤어진 공작부인은 지금「홀」안으로 들어서는 백영호씨와 그이 딸 정란(貞蘭)을 향하여 걸어간다.
『늦었읍니다.』
화려한 러시아 귀족의 복장을 입은 백영호씨는 서양사람 모양으로 젊은 약혼자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아버지는 오늘 밤 자기를 네프류 ─ 도프 공작이라고 부르란답니다. 저카츄 ─ 샤를 위하여 일생을 참회 생할로 보낸 도덕적 연애인!』
서반아의 집시 칼멘으로 분장한 정란이 냉큼 나서면서 공작부인의 손목을 잡았다.
『호호……네프류 ─ 도프 공작!』
공작부인은 반만큼 웃는 낯으로
『그럼 나도 저 천진난만한 카츄 ─ 샤로 분장 했으면 좋았을 걸!』
그러면서 약혼자의 딸 정란의 부드려운 어깨를 정답게 껴안았다.
그 한 마디가 늙은 백영호를 어지간히 만족시킨 모양이다.
『카 ─ 츄샤가 공작의 면류관을 썼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 하하하……』
백영호씨는 눈부신 듯이 젊은 약혼자의 아담한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네프류 ─ 도프 공작이라는 공작(公爵)과 공작 부인이라는 공작(孔雀)의일치에 무척 흥미를 느끼시는 모양이야. 그렇지 않아요? ─ 네프류 ─ 도프 공작부인!』
『호호호……』
『호호호……』
『얘는 너무 입이 빨라서 ─ 』
『그래 그렇지 않으셔요? 아버지.』
『그래 그래, 네 말이 맞았다.』
삼년 전 어머니를 여윈 정란은 홀아버지의 사랑을 혼자 받아 가면서 자랐다. 작년 봄 P 여자 전문학교 음악과를 마치고 혼담이 비오듯이 쏟아지는 금방석 위에 앉은 정란이었다.
그 수 많은 혼담 가운데서도 가장 유력한 후보자로서 아까 잠깐 독자제군에게 소개하여 둔「그리샤」조각형(型)의 미남자 오상억 변호사가 있었다.
청년변호사 오상억은 법조계에 마치 혜성처럼 나타난 존재일뿐더러 백영호 씨의 고문 변호사란 지위로 따져 보더라도 백정란의 약혼 상대자로서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다. 백영호씨는 딸 정란에게 오상억을 택하기를 누구 보다도 주장한 사람이다.
그러나 정란의 가슴속에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한 가지 비밀이 있었으니 그것은 작년 봄 학위논문이 통과된 의학박사 문학수(文와의 사이에 얽히어진 學洙) 「로맨스」였다. 정란은 마침내 아버지를 설복하여 문학수와 약혼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작년 늦은 가을의 일이었다.
인물소개는 이만해두고 이제부터 필자는 그리도 호화롭던 가장 무도회가 돌연 공포의 마수가 꾸물거리는 암흑의 세계로 변하지 않으면 안되게된 사실을 기록하여야만 될 때가 왔다.
그것은 유랑한 음악에 마추어 약혼자 백영호씨를 상대로 한차례 춤을 추고 난 공작부인이 저 편 「소파」에 걸터 앉아서 자기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씰크햇트」의 신사 이선배와 시선이 부딪치면 그 청아한 눈동자가 구름 낀 하늘처럼 어두어졌을 때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
『왜 그리 안색이 좋지 못하시오? 무슨 근심되는 일이라도?』
백영호씨의 음성은 언제나 은근히 그리고 부드럽게 굴러 나오는 것이다.
『아니예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 저 잠깐 화장을 고치고 나오겠읍니다.』
그리고 공작부인이 이선배 앞을 지나 복도로 나가버리지 약 오분 후 돌연
『악』
하고 마치 장막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부르짖음이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릴까?』
열광적으로 춤추며 돌아가던 여러 손님들은 마치 방바닥에 얼어 붙은 듯이 우뚝 멎었다. 그때 또 한번
『아, 아, 아―ㅅ!』
하고 외치는 공작부인의 공포에 찬 목소리가 사람들의 고막을 찢는다.
『공작부인의 목소리가 아닌가?』
『이게 대체 어디서 나는가?』
방바닥에 얼어붙은 듯이 우뚝 멎었던 손님들은 다음 순간,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무서운 예감을 전신에 느끼면서 떠들기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쏜살같이 「홀」밖으로 뛰어 나가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하나는 「택시 ─ 도오」에 「씰크햇트」를 쓴 이선배의 검은 그림자요 하나는 「네프류 ─ 도프」로 분장한 백영호씨의 흰 그림자다.
『공작부인은 어디 있읍니까?』
이선배의 고함소리다.
『화장실에 있을겁니다.』
백영호씨의 목소리다.
이선배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넓은 복도를 왼편 쪽으로 달음박질 해 간다.
그는 전 부터 공작부인의 화장실을 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서슴치 않고 왼편 복도 맨 나중 방 「도어」를 힘차게 열어제쳤다.
『앗!』
하고 외치는 이선배의 놀란 목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덜컥하고 눌렀다.
사람들은 대체 거기서 무엇을 보았을까?
커다란 삼면경(三面鏡)앞에 무참히 쓸어져 있는 공작부인의 몸뚱이! 공작 부인의 왼편 어깨 위에 날카로운 비수가 박혀 있지 않은가! ─
『이게 어찌된 일이요?』
이선배와 백영호씨는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부르짖으며 쓸어진 공작부인 옆으로 뛰어 갔다.
『빨리 빨리…… 저 주홍빛 어릿광대를 …… 들창으로 …… 그 들창으로 ……』
공작부인의 숨찬 목소리와 함께 그의 백납(白蠟)처럼 흰 손가락이 활짝 열어 젖힌 달빛 어린 창 밖을 가리키며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순간 그 주책없이 히죽히죽 웃으며 돌아 가던 곡마단의 웃음 단지 도화역자의 간판 같은 얼굴이 번개 같이 눈 앞에 떠 올랐다.
공작부인이 말한「어릿광대」란 한 마디에 누구 보다도 놀란 것은 백영호 씨의 아들 백남수였다. 그는 아까부터 수상한 도화역자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의혹의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속히 정원을 뒤져 봅시다!』
백남수는 그렇게 고함을 치면서 들창을 넘어 달빛이 희미한 정원으로 뛰어 나갔다.
그러나 손님들은 감히 그의 뒤를 따라 나갈 용기가 없다는 듯이 돌부처처럼 우뚝 서서 자기네들도 조금 전에 목격한 도화역자의 무서운 환상을 머리에 그려 볼 뿐이다.
한편 이선배는 시뻘건 피가 뚝뚝 흘러 내리는 공작부인의 어깨로부터 그처럼 절박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손수건으로 칼 자루를 쥐고 뽑으면서
『경찰 당국이 올 때까지는 누구든지 이 칼에 손을 대지 마시요.』
하고 사람들에게 주의를 시켰다.
얼른 보기에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으나 정신을 잃어 버린 공작부인의 납상(蠟像)처럼 해말쑥한 얼굴에는 그 어떤 무서운 광경을 아직도 눈 앞에 보는 듯한 공포의 빛이 심각히 그려져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요?』
까닭 모르는 이 무참한 봉변에 백영호씨는 절반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여러분 『 가운데 혹시 의술(醫術)의 경험을 가지신 분은 없읍니까?』
하고 이선배가 물었을 때, 백영호씨의 딸 정란이 제 옆에 서 있는 투우사(鬪牛師)의 등을 살그머니 밀었다.
『변변치는 못하지만……』
투우사로 가장한 청년은 서슴치 않고 앞으로 나섰다.
『오, 문군, 빨리 손 좀 써 주게!』
하는 백영호씨의 말에
『과히 염려하지 마십시요. 경상(輕傷)인 듯 싶읍니다.』
그가 바로 정란의 약혼자인 의학박사 문학수(文學洙) 그 사람이다. 오상억 변호사의 눈초리가 쏘는 듯이 문학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동안 공작부인의 상처를 만져보고 난 문학수는 상처에다 붕대를 대면서
『극히 경상이니까 그리 염려 되는 일은 없읍니다. 다만 극도의 공포로 말미암아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이지요.』
하고 설명하였다.
그 때 이선배는
『하옇든 누구든지 빨리 경찰에 전화를 걸어 주시요. 전화는 이층 서재에 있읍니다.』
하고 외치면서 정신없이 쓸어진 공작부인을 안고 옆 방 침실로 들어가서 하얀 시 ─ 트가 깔린 침대 위에 눕혔다.
오늘밤 처음으로 공작부인의 현관을 들어섰다는 수상한 화가 이선배는 대체 전화기가 이층 서재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리고 한 달 후면 공작부인의 남편이 될 백영호씨가 옆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몸소 공작부인을 안고 침실로 옮긴 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그러나 백영호씨 이하 여러 손님들은 그가 오늘밤 처음으로 공작부인을 찾았다는 사실도 몰랐을 뿐더러 공작부인을 칼로 찌르고 들창을 넘어 도망한 저 도화역자의 가장으로 정체를 감춘 무서운 악마의 환영이 그들로부터 정당한 사색의 힘을 모두 빼앗아 버렸던 것이다.
그때 만일 탐정소설가 백남수가 그것을 보았던들 이 모순된 이선배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 밖으로 도화역자의 뒤를 따라 나갔던 탐정소설가 백남수가 헐떡거리며 뛰어들어 왔다.
『어떻게 되었소?』
여러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고함을 치면서 백남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뒤져도 보이질 『 않습니다. 한길 반이나 되는 돌담을 넘어 나가지도 못했을 것이고 정원을 통해서 정문으로 밖엔 도망할 길이 없는데…… 그래 그때 바로 정문 밖을 순회하던 경찰에게 물어 보았으나 그런 수상한 사람은 본적이 없다구요.』
『그럴리가 있나? 그러면 그 놈은 아직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고 정원 어느 구석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래 그 경찰은 지금 어디 있소?』
『정문을 지키고 있읍니다.』
그래 이번에는 백남수, 오상억 변호사, 의사 문학수 등 여러사람이 한번 더 정원을 이잡듯이 뒤져 보았으나 이상한 도화역자의 그림자는 연기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편 정신을 잃어 버렸던 공작부인이 눈을 반만큼 뜨고 약몽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어릿광대, 어릿광대가 나를……』
하고 아직도 무서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정신을 차리시요 은몽씨!』
백영호씨는 공작부인의 핏기없는 흰 손을 잡고 애처러운 듯 서너번 잡아 흔들었다.
『상처는 극히 가벼우니 염려마시고 속히 그 수상한 도화역자의 이야기를 하여 주시지요.』
하고 묻는 이선배의 말에 공작부인은 이상스러운 표정으로 이선배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저를 화장실에서 이 침실로 옮겨 주신이는 어느 분이예요?』
하고 의외의 말을 물었다.
『저올시다. 긴급한 때라 실례를 무릅쓰고 제가 침대로 옮겼읍니다.』
그 말을들은 공작부인은 아무말도 없이 이 두 눈을 스스르 감았다.
공작부인은 실로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비록 정신은 잃었다 할지라도 아까 자기가 화장실로 부터 침실로 안기워 올 때 자기의 코를 찌른 이상한 체취(體臭) ─ 어디선가 맡아 본 적이 있는 듯한 몸냄새를 깨달았던 것이다.
공작부인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 독특한 몸 냄새를 어디서 맡아 보았으며 누구의 것인가를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때
『그런데 빨리 그 도화역자의 이야기를 하여 주십시요.』
하고 재촉하는 이선배의 말에 공작부인은 감았던 눈을 다시 뜨면서 입을 열었다.
공작 부인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가「홀」에서 백영호씨와 춤을 추고 나서 화장을 고칠 셈으로 「홀」 밖으로 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에 들어가 삼면경 앞에 서서 얼굴을 고치고 있노라니까 언제 어디로 들어 왔는지 주홍빛 도화복을 입은 어릿광대가 바람처럼 등뒤로 쑥 나타나는 것이 거울에 비치었다.
공작부인은 그만 『악!』하고 뒤로 돌아서려는 순간, 시퍼런 칼날이 왼편 어깨 위로 번쩍 들리었다고 한다.
공작부인은 그 때 무서운 광경을 다시 한번 회상하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면서
『그래 그만 악하고 사람 살리라고 고함을 쳤어요. 그러나 칼 쥔 손이 제 왼편 어깨위로 번쩍 들리는 것과 제가 고함을 치는 바람에 들창 밖으로 달아나던 것만은 기억 하겠어요.』
그때 옆에 있던 오상억 변호사가
『범인은 왼손잡이다!』
하고 중얼거리는 말에
『음 그렇다! 공작부인의 등뒤에 섰던 범인이 만일 왼손잡이가 아니고 보통 사람처럼 바른 손을 쓴다면 정녕코 공작부인의 바른편 어깨를 찔렀을 테니까 ─ ─』
하고 오상억 변호사의 말을 지지한 것은 탐정소설가 백남수였다.
그러나 오늘밤 그 도화복으로 정체를 감춘 범인이 대체 누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현관을 지키고 있던 안내인도 그런 수상한 사람을 들여보낸 기억은 전연 없다고 단언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관할 경찰서로부터 사법주임 임경부가 십 여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도착하자 그 뒤를 이어 검사국으로부터 박검사가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그 이상 더 신통한 발견은 못하였으며 다마 흉기(凶器)인 단도 한자루를 유일한 물적 증거품으로 압수 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여기 이상한 현상이 하나 일어났다. ─ 경찰 일행이 손님들을 홀 안으로 몰아 넣고 간단한 취조를 시행하려고 하였을 때, 조금 전까지도 보이던 저 수상한 화가 이선배의 그림자가 마치 요술사처럼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이선배라니요?』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임경부와 박검사는 남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자칭 화가 이선배라는 자가 오늘 밤 이 무도회에 참석 했었읍니다.』
하고 백남수는 이선배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였다.
그래서 곧 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찰을 불러 들여다 물어 보았더니 무슨 『 긴급한 일이 있다고 하여 밖으로 내 보냈읍니다.』
하고 적지 않은 책임감을 느끼면서 대답하였다.
『에이, 바보 같은 자식!』
임경부는 마악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억지로 참는 얼굴이다.
『지금이라도 곧 뒤를 따라라. 그리 멀리 못 갔을 것이다.』
하고 부하들에게 벼락 같은 명령을 내리고 이번에는 백남수를 향하여
『그 도화역자가 홀에 나타난 것은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요?』
『단 한번입니다.』
『그것은 어느때요?』
『공작부인이 춤을 한차례 추고 안으로 들어간 후입니다.』
여러 손님들도 남수의 증언을 지지하였다. 경부는 다음 공작부인을 향하여
『당신은 그 때 도화역자를 보았읍니까?』
『저는 못 보았어요. 제가 다시 홀로 나왔을 때는 벌써 그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뒤였어요. 지금와서 생각하니 그 때 그 어릿광대는 저와 엇바뀌어 화장실로 숨어 들어 간 것 같아요.』
『음 ─ 그것은 그런데 화가 이선배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저도 그이와는 오늘밤이 처음입니다. 다른 손님의 대신으로……』
공작부인은 말을 끊었다.
『다른 손님의 대신으로?』
『………』
『숨김없이 똑똑히 말씀해 주시요.』
그러나 공작부인은 말이 없다.
공작부인의 저윽이 주저하는 낯빛을 눈치챈 임경부는 조금 엄숙한 목소리로
『어떤 사람의 대신으로 이선배란 작자가 이 가장무도회에 참석하였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공작부인은 그 망설이는 눈동자로 옆에 있는 백영호씨를 한번 쳐다본 후에
『김수일이라는, 역시 화가가 오늘밤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의 친구인 자기가 대신 무도회를 구경할 셈으로 왔었다고요.』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십시요.』
『그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없었어요. 전부 말씀 드렸어요.』
공작부인은 돌연 어깨에 받은 상처에 고통을 느끼는 듯이 양미간을 찌프리고 귀찮다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미안합니다만 자세한 『 심문은 후일로 미루어 주시요. 무척 고통을 느끼는 모양이니까.』
옆에 서 있던 백영호씨가 애처러운 듯이 임경부에게 정중히 말했다.
『─ 그러나 단 한가지, 그 김수일이란 화가의 주소를 가르쳐 주십시요.』
그러나 공작부인은 들은체 만체하고 눈을 뜨지 않는다.
『속히 말씀해 주시요. 일 분이라도 늦으면 늦을수록 ─』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다.
『미안하지만 내일로 ─』
백영호씨가 다시 한번 간절히 부탁 하였다. 임경부도 하는 수 없이 공작 부인에 대한 심문을 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작부인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임경부가 발머리를 돌려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잠깐 ─』
하고 임경부를 불러 가지고 아까 이선배가 자기를 「발코니」로 끌고 나가서 한 이야기를 숨김 없이 말한 후에
『김수일씨의 주소는 서린정 중앙「아파─트」칠 호실 ─』
하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중앙「아파─트」칠 호실!』
사법주임 임경부의 양눈이 번쩍 빛난다.
경부 임세훈(任世勳)은 근 이십년 동안이나 탐정이란 직무에 몸을 던진 노련한 경찰관이다.
그의 민활한 수완과 초인적인 정력은 사실 놀랄만 하였으며 어떠한 범죄자라도 그가 한번 훑어보는 눈초리 아래 머리를 숙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지금까지 손에댄 범죄사건은 태반이 무미간조하고 지리하기 짝이 없는 사소한 사건 뿐이었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자기의 기념비가 될 만한 사건 ─ 탐정소설 처럼 흥미있고 호화로운 범죄 ─ 기상천외(奇想天外)의 재주를 가진 범인을 상대로 마음껏 한번 싸워 보고 싶은 충동을 언제나 느끼던 바이다.
그러던차 오늘밤 이 화려한 가장무도회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돌발한 이 살인미수 사건을 눈앞에 볼 때 그의 가슴은 마치 예술가가 느끼는 창작욕 이상의 흥분을 느끼는 것이었다.
더구나 세계적 무희 공작부인에게 칼을 던진 범인이 화려한 애수(哀愁)를
「심볼」로 하는 도화 역자의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거기서 실로 악마시(惡魔詩)와도 같은 공포를 전신에 깨달았던 것이다.
『이 사건만은 내손으로 해결하리라!』
이리하여 임경부는 부하 한명에게 손수건으로 싼 단도를 내주며 도경찰부 감정과로 가지고 가서 감정의 결과를 보고해 오라는 분부를 내린 후에 자기는 부하 두명을 거느리고 명수대 공작부인의 저택을 나서서 바로 시내 서린 정을 향하여 달빛이 낯같이 쏟아져 내리는 한강 인도교를 기운있게 몰아댔다.
『늙은 백영호씨와 젊은 공작부인의 약혼…… 백정란의 약혼자인 의학 박사 문학수는? 그리고 정란을 따르는 오상억 변호사는? 화가 김수일과 공작 부인의 연애사건은? 수상한 화가 이선배라는 작자는…… 도화역자의 정체는……
』
이러한 의문이 임경부의 머리 속을 질서없이 떠돌기 시작하였다.
그때 부하 한사람이 임경부를 향하여
『그런데 저 수상한 화가 이선배를 따라간 경찰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니 무슨 소득이 있는 모양이지요?』
하고 물었으나 임경부는 묵묵히 「쿠숀」에 몸을 파묻고 양눈을 지긋이 감은 채 도대체 대답이 없다.
그것도 그럴법한 것이 임경부는 지금 저 악마의 가장인 주홍색 도화복을 이 사람에게도 입혀 보고 저 사람에게도 입혀 보곤 하면서 가장속에 숨은 범인의 정체를 머리에 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이선배란 인물에다 도화복을 입혀 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임경부는 곧 그것을 벗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째서? 이 선배와 그 도화역자는 결코 동일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하면 도화역자가 벙글거리는 얼굴로「홀」안에 나타났을 때 이 선배는 확실히 탐정소설가 백남수와 함께「소파」에 걸터 앉아서 멀리 그것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화장실에서 부르짖는 공작부인의 날카로운 비명을 듣고 백영호씨와 함께 홀 밖으로 뛰어 나간 것도 이선배였다.
『그렇다. 이선배는 결코 범인이 아니다. 그러면……』
그러면 대체 무슨 이유로 이선배는 경찰들의 눈을 피하여 도망을 했을까?
그리고 오늘 밤 처음으로 공작부인의 현관을 들어 섰다는 그가 이층 서재에 전화기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또 어떻게 아는가?
『하옇든 이선배가 범인은 아닐지라도 중요한 관계 인물이라는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다음에 임경부는 돌아 가면서 전부 한 번씩 이 주홍색 도화복을 모두 입혀 보았다.
탐정은 어떠한 인물이라도 『 의혹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는 탐정학(探偵學)제 일과의 교훈 그대로 탐정소설가 백남수를 의심하고 의학 박사 문학수를 의심하고 변호사 오상억을 의심하고 나중에는 백영호씨와 그의 딸 정란까지를 의혹의 눈으로 훑어 본 다음에 눈을 번쩍 뜨면서
『화가 김수일! 공작부인의 애인 김수일!』
하고 중얼거렸다. 비록 자기를 해하려 하였으나 그것도 결국은 자기를 끝없이 사랑하고 있는 때문이 아니었던가? 김수일의 주소를 숨기려고 애를 쓰던 공작부인의 얼굴이 알알이 나타난다.
어디로 들어 와서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는지는 지금 갑자기 추측하기 어렵거니와 하옇든 그 김수일이라는 인물이 가장 농후한 혐의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을 실은 자동차는 벌써 남대문을 지나 부민관 앞을 지나고 있었다. 김수일이란 화가가 살고 있다는 서린정 「중앙·아파 ─ 트」
는 바로 광화문 우체국 뒷 골목을 조금 들어서면 보이는 이층 양옥이다.
황급히 자동차에서 내린 임경부 일행은 금자로「중앙·아파 ─ 트」라고 씌어있는 유리문을 기운차게 열었다.
『수부(受付)』─ 라고 씌어 있는 조그마한 들창 안에 주인 마누라 비슷한 중년부인이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다가 뚜벅뚜벅 들어서는 경찰관 나리를 쳐다보자 이편에서 묻기 전에 먼저 들창을 다르르 열고 인사 대신 반만큼 웃어 보였다.
『잠깐 조사할 일이 생겼는데……숙박부(宿泊簿)를 좀 보여 주시오.』
하는 임경부를 조금 의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네, 이것입니다.』
하고 옆에 놓인 테이블 위에서 숙박부를 가져다 주었다.
『칠 호실에 김수일이란 사람이 들어 있을 텐데……』
『김수일 김수일?』
하고 두어 번 중얼거리다가
『아, 저 뭔가, 그림 그린다는 사람 말이죠? 아, 참 그의 이름이 김수일이라지. 난 참 잊어먹기도 잘해. 그가 무슨 못할 짓을 했어요?』
魔 術 師[마술사] 임경부가 숙박부에서 발견한 사실을 대강 추려서 기록해 보면 다음과 같았다.
성명 ── 김수일.
연령 ── 삼십 삼 세.
본적 ── 평안부 남문동 ××번지.
직업 ── 화가.
투숙일(投宿日) ── 소화 십× 년 정월 팔일.
그리고 옆에다가 빨간 잉크로 『방세 사 개월 분 선납(先納)』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 때 마누라가 생긋 웃으며
『참, 그 분과 같은 손님만 들어 주신다면야 「아파 ─ 트」 영업도 괜찮지요.』
하고 묻지도 않는 말을 한다.
『어째서?』
『글쎄 그렇지 않아요. 방 세는 사 개월 분이나 먼저 내주겠다 방은 기껏해야 한 달에 두세 번 밖에 사용하지 않겠다.──』
『한 달에 두세 번?』
귀 밑이 으쓱해지는 임경부였다.
『그럼요. 그것도 잠을 잔다든가 하는 게 아니고 두어 시간씩 어여쁜 아가씨와 같이 와서 조용히 이야기나 하시다가 가신답니다.』
『그럼 그 어여쁜 아가씨란 어떤 사람이요? 이름이 뭔지 모르오?』
『그런 것은 알 수 없어요. 아마 그의 사랑하는 사람이겠지요. 호호…… 낯은 펵 익은 듯 해두 도무지 누군지, 어디서 본 사람인지, 기억이 안 나겠지요.』
『음, 신문이나 잡지 같은 데서 사진으로나 본 사람이 그리 쉽사리 생각날리는 없지. 속눈썹이 길고 살결이 백옥 같이 맑고 얼굴이 갸름한 ── 다시 말하면 무척 총명스러운 아가씨 ──』
『네네, 맞았어요! 아이, 어쩌면 그렇게 눈 앞에 보는 것 같이 맞추실까!
참 신통도 해라!』
주인 마누라는 혀를 찬다.
『그래 김수일이가 지금 집에 있소?』
『없어요. 어제 저녁에 잠깐 들려서 그이에게 온 편지를 달래가지고 또 어딘가 나가 버렸어요. 아마 그 아가씨한테서 온 편지같은데 여자글씨로 봉투엔 단지 「명수대에서」라고 씌어 있었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어여쁜 아가씨란 오늘밤 저 도화역자의 칼에 찔린 공작 부인에 틀림없을 것이며 편지의 발신인도 공작부인이란 것 쯤은 임경부도 미리부터 짐작하고 있었던바다.
『그런데 김수일이란 사람은 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이요?』
『얼굴이 기름하고 아주 호남자예요. 키가 늠름한 아주 훌륭한 신사 ── 퍽 점잖아요. 화가 처럼 머리를 길게 기르고 ──』
『그의 친구 이선배란 사람이 찾아온 적은 없소? 역시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 ──』
『그에게는 한사람도 친구가 찾아온 적은 없었어요. 그 어여쁜 아가씨 외에는 ──』
임경부의 걷잡을 수 없던 공상의 실마리는 거기서 그만 딱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선배는 한번도 김수일을 찾아온적이 없다지 않은가. 과연 이 선배는 김수일의 친구였던가? 이선배는 대체 어떠한 인물일까?
임경부는 김수일의 방 칠 호실을 임검하였다. 방안에는 「테이블」과 의자, 그외 간단한 화구(畵具)가 몇개 놓여 있을 뿐이요. 임경부는 이렇다할 물적 증거품 하나 발견하지 못하였다. 지문을 얻어 보았으나 전부가 다 분명하지를 못해서 하나 쓸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 하는 수 없이 김수일이 다시 「아파 ─ 트」로 돌아오거든 곧 경찰서로 전화를 걸어 달라는 부탁을 톡톡히 다진 후에 임경부 일행은 「중앙 ‧ 아파 ─ 트」를 나섰다.
『한달에 두 세번 밖에 사용하지 않는 「중앙 ‧ 아파 ─ 트」 칠 호실 손님 김수일이란 어떤 인물일까?』
임경부는 ××경찰서로 돌아 오자마자 경성시민을 직업별(職業別)로 나눈 커다란 장부를 책장에서 꺼내놓고 분주스러이 펴보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화가난(畵家欄)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김수일이란 이름도 보이지 않고 이선배란 이름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가짜 화가로구나!』
임경부는 장부를 접어 놓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선배도 가짜 화가, 김수일도 가짜 화가! 공작부인은 결국 가짜 화가 김수일과 지금까지 교제를 해 왔다?』
거기에 무엇인가 헤아릴 수 없는 무서운 비밀이 숨어 있는 것 같아서 임 경부의 걷잡을 수 없는 호기심은 ( )없이 허공을 달리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바뀐다.
임경부의 벼락처럼 쏟아지는 명령을 받고 수상한 화가 ──「씰크햇트」에
「외알 안경」을 쓴 이선배를 따라 명수대 공작부인의 저택을 뛰어나온 경찰관 일행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가장 탐정으로서의 장래성이 많다고 동료간의 촉망을 받는 순사부장 박태일(朴泰一)을 선봉으로 「오 ─ 토바이」를 한대씩 잡어타고 질풍과 같이 한강 인도교를 향하여 달려갔다.
바로 그때였다.
『저놈이 아닌가! 저기 저 인도교 입구에서 지금 뒤를 힐끗 힐끗 돌아보면서 달아나는 「씰크햇트」에 「택시 ─ 도오」를 입은 ──』
하고 경찰 한사람이 부르짖었다.
보니, 과연 저 이선배에 틀림이 없는 「씰크햇트」의 괴상한 신사가 한강 다릿목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가로등을 등지고 지나가는 「택시 ─」를 잡을 셈으로 이리왔다 저리갔다 하는 모양은 마치 함정에 빠진 짐승처럼 안타깝게 보이며 초조해 보였다.
「그렇다. 저 놈이 이선배다!』
『자동차가 없어서 애를 태우고 있구나!』
『앗! 「택시 ─」를 멈추었다…… 올라탄다…… 빨리 빨리!」
그러나 그 때는 벌써 이선배를 실은 자동차가 높다란 엔진소리와 함께 달빛이 곱게 어린 한강다리를 비조와 같이 시내를 향하여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경찰들과 이선배 사이에는 우리들이 영화에서 흔히 보는 일대 추격전(追擊戰)이 일어났던 것이다.
경찰들의 「오 ─ 토바이」와 이선배의 자동차와의 거리는 약 삼백 미터 ── 그러나 처음에는 「오 ─ 토바이」의 속력이 무척 빨라서 이대로 가면 적어도 경성역 근방에서 저 수상한 화가 이선배를 완전히 체포하리라 박부장은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이가 백미터까지 좁아졌을 때 운전수는 과분의 보수를 받은 듯 이선배의 자동차는 마치 총소리에 놀란 참새처럼 후닥딱하고 한번 커다란 엉덩이를 들썩 하더니 저릿저릿한 속력을 내어 점점 깊어가는 밤공기를 칼로 베이듯이 날아간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새 경성역을 지나고 남대문을 거쳐서 이번에는 왼편으로 급「커 ─ 브」를 하여 쏜살같이 부청을 향하고 달아나던 자동차는 마침내 태평동 조선일보사 앞에서 『욱!』소리와 함께 황급히 멎어 버리지 않는가.
『앗! 저 놈이 그만 자동차에서 내렸다! 빨리 빨리!』
『앗! 왼편 골목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렇게 부르짖으면서 경찰들이 따라 왔을 때는 벌써 저 이선배를 싣고 온 자동차는 광화문 저쪽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린 후였다.
『빨리 이선배를 따라라!』
박부장이 선봉에서 어둑어둑한 골목으로 밀려 들어 갔을 때
『저기 간다 ! 저기 저기!』
하고 경찰 한사람이 소리를 쳤다.
보니, 약 백미터 앞을 나는듯이 달음박질치는 이선배 ── 「씰크햇트」를 제겨 쓰고 단장을 꺼꾸로 잡은 이선배의 그 늘씬한 뒷모양이 조는 듯한 전등 밑을 힛득힛득 ── 마치 재봉침으로 눕이는 듯이 번쩍거린다.
『저 놈을 놓쳐서는 안된다!』
『어떠한 위험이 있더라도 저 놈을 잡아야 한다!』
고적한 밤공기를 울리는 경찰들의 패검 소리가 채칵 채칵 채칵 ── 그때 이선배가 힐끗힐끗 돌아다 보면서 왼편 골목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본 박부장은
『오냐! 이젠 네가 포대에 들은 쥐로다!』
하고 외쳤다.
어째 그러냐하면 지금 이선배가 허덕거리면서 뛰어 들어간 골목이란 높다란 『콩크리 ─ 트』 담장을 디귿(ㄷ)자로 둘러쌓고는 그만 꽉 막혀버린 소위 막다른 골목이란 것을 박부장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실로 이상한 일이 하나 일어났다.
필자는 여기서 수상한 화가 이선배가 허덕거리면서 쫓겨 들어간 그 막다른 골목이란 것을 좀 세세히 기록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러냐하면 이 막다른 골목에서 실로 사람의 힘으로는 수행할 수 없는 ── 그리고 사람의 두뇌로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상한 사건이 생긴 때문이다.
그것은 박태일부장 이하 여러 경찰들의 맹렬한 추격을 받고 있던 이선배가 돌연 마술사)魔術使)와도 같이 ── 그리고 연기와 같이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는 실로 이상야릇하고도 초인간(超人間)적 사건이 돌발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막다른 골목의 지리(地理)는 대체 어떻게 되었는가?
필자는 독자의 편의를 도모코저 다음과 같은 간단한 그림을 가지고 설명하고자 한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갑』 『을』 『병』 『정』은 각기 주인이 다른 외채집이다. 『가』 『나』 『다』 『라』는 양옥을 둘러싼 두길이나 되는 「콩그리 - 트」 담장이다. 그리고 『마』 『바』 『사』는 고등여학교의 역시 두길 이상의 돌담이다.
그러면 그때 경찰들에게 쫓기던 이선배는 어떤 길로 들어 갔는가 하면 그림의 화살표(↑)를 따라서 왼편으로 꺾어져 양옥을 둘러싼 디귿(ㄷ) 모양으로 생긴 골목으로 뛰어 들어 갔던 것이다.
이 골목은 약 한칸 반 쯤 되는 넓이를 가졌는데 『라』에서 꽉 막혀 버리고 말았다.
경찰 일행이 쫓기는 이선배의 뒷모양을 최후로 본 것은 정문을 지나 「콩크리 ─ 트」담 『나』모통이를 돌아서는데 까지였다.
그때 경찰들은 바로 『가』모통이를 돌아섰던 것이다.
이상야릇한 실로 믿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때 였다.
용감한 박태일 부장은 동료들을 격려해 가면서 정문을 지나 『나』 모퉁이를 오른편쪽으로 돌아섰을 때 보니, 골목에는 희미한 달빛만이 비칠 뿐,
「씰크햇트」의 이선배 그림자는 하늘로 올라갔는지 땅 속으로 빠져들어 갔는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지를 않았는가!
『야얏?』
『어디로 갔니?』
그러나 그 순간까지도 박부장은 실망을 안하였다. 자기네들의 『가』에서
『나』까지 따라오는 사이에 이선배는 벌써 『다』모퉁이를 돌아섰나 보구나 하는 하나의 희망을 품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모퉁이를 이편 쪽으로 돌아서서 휘파람을 불면서 한가히 걸어오고 있는 한사람의 산보객을 눈 앞에서 보았을 순간, 박 부장은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 앉음을 깨달았다.
모자도 안쓰고 「칼라」도 없이 흰 「와이샤츠」바람으로 양손을 「바지」
「포켙」에다 쓰러넣고 이리로 걸어오는 한 산보객이 도중에서 만일 허덕거리면서 달아나고 있는 「씰크햇트」의 예복을 입은 수상한 신사를 맞났다고 하면 그는 필연적으로 눈이 둥그래져서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저렇게 한가스러이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걸어 올리는 만무하리라 ── 이것이 박부장의 번개같은 추리(推理)였다.
그때야 그 산보객도 우두커니 서서 무슨 일인가 하고 바람과 같이 옆을 지나가는 경찰들을 멍하니 쳐다본다.
과연 박부장의 상상대로 『다』모퉁이를 돌아서서 막다른데까지 따라가 보았으나 이선배는 마술사처럼 없어지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다!』
『어디로 도망갔을까? 두 길이나 되는 이 양편 돌담을 넘어 갔을리는 없는데……』
『하옇든 이제 그 산보객더러 물어보자.』
이리하여 박부장은 아직 우두커니 서서 경찰들이 떠들고 있는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있는 산보객을
『여보!』
하고 불렀다.
『왜 그러시우?』
산보객은 한발자욱 경찰 앞으로 다가 서면서 대답하였다.
『이제 방금 이리로 「씰크햇트」를 쓰고 예복을 입고 단장을 든 수상한 신사가 뛰어 들어가는 것을 못보았소?』
하고 묻는 말에
『「씰크햇트」를 쓰고 예복을 입은 신사?』
하고 산보객은 또 한걸음 다가 선다.
『그리고 외알안경을 쓴 ──』
그때 그 산보객은 달빛에 어렴풋이 비치는 박부장의 창황한 얼굴을 유심히 드려다보면서
『자네 박태일군이 아닌가?』
하고 의외의 말을 건넸다.
이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이 뜻하지 않은 인물과 만난 박태일은 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어떻게 축복하여야 할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지금 서울 장안뿐만 아니라 전 조선의 범죄자들을 전률시키며 따라서 그들의 미움을 자기 혼자 차지하고 있는 명탐정 유불란(劉不亂)씨 그 사람이었던 때문이다.
경찰서에도 소위 저라고하는 자칭 명탐정이 수두룩한 가운데 박태일은 오직 자기의 스승이 될만한 사람은 유불란씨 이외는 없다고 믿고 그를 지금까지 사숙해 왔던 터이다.
그러한 유불란씨를 이러한 곳에서 우연히 만난 박태일이었다.
『무슨 공명을 이룰만한 사건이 생겼나보구만, 응?』
하고 묻는 유불란씨의 말에
『「씰크햇트」를 쓰고 예복을 입고 아래 턱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수상한 신사를 못보셨읍니까? 이제 방금 이리로 쫒겨 들어 갔는데 ──.』
『이제 방금?』
『네! 그이가 유령이 아닌 이상, 그리고 세상에 과학(學科)이란 것이 있는 이상 선생과 그이와는 이 좁은 골목에서 필연적으로 만났을 것입니다.』
「하아, 군의 말을 듣고 보니 군은 나를 몽유병자(夢遊病者)로 생각하는 모양이네 그려. 그렇지 않겠나? 내가 졸면서 산보하는 습관을 가지지 않은 이상 사실 그런 사람이 이 골목으로 뛰어 들어 왔다면 내가 못 볼 리가 없을 텐데 ──』
『이상한 일입니다. 이선배란 인물이 겨드랑이에 날개를 붙이지 않은 이상이 수수께끼를 풀 사람은 우리 조선 안에 단 한사람 ── 선생님뿐이겠지요.』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나 군의 말을 들으니 대단히 재미 있는 사건 같은데, 어디 처음부터 한번 이야기를 해보지. 그리고 웬만하면 내 집으로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씩 ──』
그 때야 박태일부장도 오른편 양옥이 유불란씨의 댁인줄 비로소 깨닫고
『고맙습니다. 그러나 곧 서로 돌아가서 보고를 해야겠읍니다.』
『하아, 사법주임 임경부가 또 활약 할 모양이로 구먼.』
『그렇습니다. 오늘밤도 임경부께서 현장을 임검했읍니다.』
그래서 박태일은 행길에 서서 오늘밤 명수대 공작부인의 저택에서 가장 무도회가 열리었고 도화역자가 나타나서 공작부인을 칼로 찌르고 한편 이상한 화가 이선배를 따라오던 도중이란 것을 간단히 말하였다.
『하아, 그랬던가! 글쎄 우리 서울안에는 아직 「씰크햇트」에 「모노클」
을 쓴 「댄디(풍류신사)」는 없을 텐데 하고 이상스러히 생각했더니만 ── 』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은 과학을 믿습니까?』
『나는 무엇보다도 과학을 사랑하지.』
『그러면 이선배가 ── 아니 사람의 힘으로 이와같은 두길이나 되는 돌담을 눈 깜박할 사이에 넘을 수가 있을까요?』
『못넘는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면 이선배라는 인물은 사람이 아니고 귀신……?』
『귀신이 걸어 다니는 것을 군은 보았는가?』
『그러면 이 이상야릇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만 되겠읍니까?』
『그것이 즉 우리들 탐정으로서의 연구 대상이다. 음 괴상한 일이로군!』
『그러면 이 좁은 골목에서 유령처럼 사라진 이선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아 박군도 어리석은 『 , 질문을 하는구만, 그것을 곧 이 자리에서 대답할 자격을 가진 이는 탐정이 아니고 신인(神人)이거든. 샬록 ‧ 홈즈가 어떤 곤난한 사건에 당면했을 때, 그는 어떻게 했는가 쯤은 군도 잘 알 것이 아닌가?』
『하루 밤에 담배를 스무 갑이나 피우고 커피를 설흔 잔이나 마시고 고슴도치 처럼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렇다. 군도 오늘 밤에 집에 돌아 가서 담배 열 갑만 피워 보게. 그러면 유령 이선배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릴지도 모를 테니까…… 하옇든 이 공작 부인 살해 미수 사건은 대단히 재미있는 사건이다. 대체 동서 고금을 통하여 무척 무섭고 무척 흥미 있는 사건은 거의 전부가 처음에는 신비(神秘)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법이건든.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 다시 말하면 과학으로는 넘겨다 볼 수 없는 유령의 탈을 쓰고 나타나는 것이다. 이 공작부인 살해 미수 사건만 해도 두 가지의 신비로운 점이 있다.── 한 가지는 도하역자의 신비요, 또 한가지는 이선배의 신비다. 하옇든 돌아 가서 임경부에게 보고를 해 보게. 그가 과연 어떠한 의견을 가지는가.』
『그럼 후일 또 다시 뵙겠읍니다.』
이러하여 근방 일대를 이리 저리 수색하고 있던 동료를 불러 가지고 유불란씨의 정문 앞에서 헤어졌다.
××서에 도착하니 서린정 『중앙 ‧ 아파 ─ 트』로 김수일을 찾아 갔던 임 경부 일행이 좋지 못한 안색으로 박태일 부장을 맞이 하였다.
『박군, 어떻게 되었는가?』
임경부는 박태일을 보자마자 성급히 물었다. 임경부는
『실로 상상하지 못할 이상한 일이 하나 생겼읍니다.』
하고 이선배 추격전의 전말을 세세히 보고 하였다.
『음, 이 세상에 그런 일도 있을까?』
임경부는 한층 더 이 사건의 신비성과 정체모를 악마의 촉수(觸手)를 전신에 느끼고 부르르 떨었다.
『그래 유불란군의 의견은?』
『하룻 밤에 담배 열 갑만 태우면 이선배에 대한 신비의 껍질이 벗어 지리라고 말합니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이냐?』
『샬록 ‧ 홈즈는 하룻 밤에 담배 스무 갑을 피우고 어려운 사건을 해결했답니다.』
유불란이 어느새 이 사건에 등장하였다는 말을 들은 그 순간부터 임경부는 벌써 기분이 상했던 터이라, 화를 벌컥 내며 고함을 쳤다.
『이 바보야! 샬록 ‧ 홈즈는 소설속의 인물이다! 공작부인 살해 미수 사건은 현실 문제가 아닌가!』
『네, 저는 다만 유불란씨의 말을 전했을 뿐입니다.』
박태일 부장은 일상 임경부가 민가 탐정 유불란씨에게 질투와 시기와 마음을 품고 잘 잘못은 하옇든 그를 항상 힐란하고자 하는 임경부를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는 터이라, 속으로는 픽하고 웃으면서도 태도만은 공손하였다.
그 때 한 사람의 경찰이 또 경찰부 감정과(鑑定課)에 보냈던 단도 ── 공작 부인을 찌른 흉기가 감정되었다는 보고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 보고서에 의하면 단도에는 아무런 지문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문을 인멸(湮滅)시킬 셈으로 범인은 처음부터 무슨 헝겊 같은 것으로 단도를 싸 쥐었다고 한다.
임경부는 보고서를 구겨 쥔 채 한참 동안 지긋이 눈을 감고 잠자코 앉았더니 돌연 의자에게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하옇든 이상한 일이다. 이선배와 김수일이 둘 다 가짜 화가다! 그리고 이선배가 자취를 감춘 태평동 골목과 김수일이 유숙하고 있는 서린정 「중앙 ‧ 아파 ─ 트」는 말하자면 엎드리면 코가 닿으리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것이 과연 우연한 일치일까?』
하고 부르짖었다.
魔人[마인]의 命分書[명분서]
편집공작부인이 가장 화려하게 꾸며 놓았던 우리나라 최초의 가장무도회는 저 벙글벙글 웃으면서 돌아가는 무기미한 도화역자가 던진 한 자루의 비수로 말미암아 공포의 수라장으로 변하였으나 다행히도 공작부인이 받은 어깨의 상처는 예상외로 극히 가벼워서 오월 초 열흘에 거행될 결혼식에는 추호도 지장이 없으리만치 회복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늙은 신랑 백영호씨의 남다른 두터운 간호의 보람도 많았다.
그는 거의 매일 젊은 약혼자 옆을 떠날 줄 몰랐다.
『은몽씨!』
그는 어떤 날 오후, 공작부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춘색이 파랗게 어린 한강 일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불렀다.
『왜그러세요?』
긴 속눈섭 밑에 숨었던 공작부인의 까만 눈동자가 반 만큼 웃으면서 흑요석(黑耀石)처럼 백영호씨를 쳐다보았다.
『한 주일 후면 은몽씨는 나의 아내!』
감개무량한 듯 그는 다시 찾아온 자기의 청춘을 혀끝으로 대굴대굴 굴리면서 맛보는 것이다. 그러나 공작부인의 얼굴에서 그 순간 부처처럼 표정이 사라졌다.
『은몽씨는 이 늙은이의 아내란 말에 아무런 불쾌도 느끼지 않으십니까?』
『그런 말은…… 그런 말씀은 이후 다시는 저에게 들려 주시지 마시고 물어주시지도 마세요.』
거의 애원하듯이 굴러 나오는 공작부인의 목소리였다.
『아름답지 못한 질투라고 생각하시지 마시오 ── 저번달 은몽씨가 경찰관에게 한 증언 ── 김수일이란 화가와 연애관계가 있었다는 말을 이 늙은이는 어떻게 생각해야만 될런지……』
공작부인은 잠시 동안에 대답이 없다가 간신히 입을 연다.
『김수일씨는 나의 감정의 연인, 그리고 백영호씨는 나의 이성의 연인 ……』
그 순간 백영호씨는 한편 젊은이 처럼 모욕을 느끼었으나 다음 순간,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그의 핏기 없는 피부와 그의 힛득힛득 흰 머리털이 그의 귀밑에서 조용히 타이르는 것이다.
『잘 알아들었읍니다. 나는 은몽씨의 말에 대하여 분노를 못느끼는 나 자신을 잘 알고있읍니다.』
『걱정 마세요. 연정의 대상도 가지각색……나는 벌써 꿈을 사랑하는 어린 소녀는 아니예요.』
『은몽씨!』
하고 그때 백영호씨는 힘있게 불렀다.
『…………?』
『만일 내가 가진 백만원이란 재산이 이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소유로 변하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은몽씨는 역시 이 늙은 백영호와 결혼해 주시겠읍니까?』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공작부인의 어조는 약간 높았다.
『은몽씨! 고맙소! 이 늙은이가 만일 시인이었던들 이 고귀한 순간을 이대로 보내리까 ──』
백영호씨는 불현 듯 공작부인의 어깨를 껴안았다.
이와같은 의사를 언제가 『 한번은 은몽씨에게 조용히 표시해 보리라고 기회만 있으면 입을 열었으나 도무지 말문이 꽉 막혀서……사실은 지금 경비난으로 폐교의 운명에 임한 혜성전문학교(惠星專門學校)을 위하여 칠십 만 원을 제공할 셈으로 교장 황세민(黃世民)씨와 누차 교섭을……』
감격에 찬 백영호씨의 목소리를 공작부인은 들은체 만체하고 머엉하니 서 있더니 어깨에 얹은 백영호씨의 손을 슬그머니 내려 놓으면서
『저기 남수씨가 오십니다.』
하고 정문을 가리키었다.
『응, 그러면 나는 이 길로 황교장을 찾아봐야 되겠소.』
백영호씨의 가슴을 누르고 있던 우울 ── 황금의 힘이 공작부인을 황홀케 하지나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던 우울을 일시에 떨쳐버린듯 그는 발걸음도 가볍게 공작부인의 저택을 나섰다.
백영호씨가 나간 뒤로 공작부인의 방을 들어서는 탐정소설가 백남수는
『무슨 소식을 전했기로 아버지가 저렇게 희색이 만면해서……』
하고 의아의 눈썹을 모으면서 표정없는 공작부인의 백옥같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회 사업을 하신답니다. 칠십 만 원의 제공을 ……』
『칠십 만 원?』
태연스럽게 말하는 공작부인의 청천 벽력과도 같은 한마디에 백남수는 순간 얼굴이 핼쓱하게 핏기를 잃어버렸다.
『뭘 그리 놀라세요? 아버지께서 훌륭한 사회 사업을 하신다는데……』
『그러나 그게 사실입니까? 칠십 만 원을…… 그래 무슨 사업을 하신답디까?』
『해성전문학교를 살리신다고요.』
『해성전문학교를? 아버지가? 아니, 저 백영호씨가……』
남수가 이처럼 놀라는 것은 결코 이유 없는 일은 아니었다.
팔년 전 어디론가 행방 불명이 된 형 ── 백남철(白南鐵)이 작년 가을 실종 선고(失踪宣告)를 받은 이상, 당연히 상속권은 남수에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상속재산의 십분지 칠이 눈깜짝할 사이에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사실도 사실이려니와 그 보다도 한층 더 남수를 놀라게 한것은 아버지 백영호씨의 사람된 품이었다.
『아버지 같은 위인이 사회 사업을 하다니? 칠십 만원을……』
『왜 아버지는 사회 사업을 하면 안돼요?』
공작부인은 의미있는 웃음을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안되죠.』
『어째서?』
『음 ──』
남수는 터져 나오려는 말을 목구멍에서 꽉 막으려는 듯 혀를 깨물었다.
『백영호씨가 공작부인의 미모에 눈이 어두어져서 공작부인을 위하여 적지 않게 산재(散財)한 것은 말하자면 예외의 일이지요.』
『예외의 일이라니오?』
『난생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써 보았다는 말입니다. 현재 은몽씨가 쓰고 있는 이 집값만 해도 오만원 ── 백영호씨가 오만원을 허어! 게다가 이제와서 칠십 만 원을 교육사업에 던진다. 옛적부터 하는말이 구두쇠가 돈 쓰는 법을 알게되면 황천에서 호출장이 온 것이라고 하더니만 행복스러운 결혼식을 한주일 앞두고 염라대왕이 백영호씨를 황천으로 모셔 갈 모양이 아닌가……』
『호호호! 남수씨도 재미있는 말을 제법 잘 하셔.』
공작부인은 유쾌한 듯이 웃었다.
그러나 이 남수의 농담섞인 말이 한개의 무서운 현실로서 독자제씨의 눈앞에 나타날 것도 멀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그렇고, 경찰당국에서는 아직 저 김수일씨를 범인이라고 인정하는가요?』
하고 공작부인은 말머리를 돌린다.
남수는 잠시동안 묵묵히 앉아있다가.
『당국뿐만 아니라 나 역시 김수일이란 인물을 의심하고 있어요. 첫째로 그가 무슨 이유로 돌연 「중앙 ‧ 아파 ─ 트」에서 자취를 감추었을까요?』
『그건 지난번에도 말한바와 같이 그는 영원히 나의 눈앞으로 부터 떠날 셈이겠지요.」
김수일을 변명하고자하는 공작부인의 태도는 어느 듯 백남수의 탐정욕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면 김수일이란 인물은 어째서 은몽씨와 만날때만 「중앙 ‧ 아파 ─ 트」를 사용했을까요 ── 그의 본 주소는 어디에요? ──』
『뭐요? 저와 만날 때만 「중앙 ‧아파 ─ 트」를 사용했어요?』
공작부인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외쳤다.
『그럴리가 있어요?』
『그뿐만 아니라 당국이 조사한 결과 김수일이란 이름을 가진 화가는 서울에는 없답니다.』
본적이 평양부 남문정이라는 것도 거짓말이랍니다.』
공작부인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었다.
그러니 은몽씨는 『 김수일이란 가짜 화가 ── 가짜 신사와 교제를 하여온 것이지요.』
『그럴리가 있어요?』
『그런걸 어떻거우. 대체 그이와는 언제부터 교제를 하였소?』
공작부인은 잠깐 주저하는 모양이더니 이미 경찰에도 말한바라 숨길 것 없다는 듯이 작년가을 ×××개인전람회에서 알게 되어 단 한번 본 그이에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 쏠려 그후 몇번 그가 거주하는 「중앙 ‧ 아파 ─ 트」를 찾아갔다는 것이다.
『흥!』
하고 남수는 한번 코웃음을 치고나서
『그래 무도회날 밤, 이선배란 작자가 무슨말을 가지고 왔읍디까?』
『김수일씨를 생각해서 이 결혼을 그만두라고요. 그래 그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절을 했더니만 그럼 이후에 다시 수일씨를 찾지말라고 ──』
『그래 은몽씨는 그날 밤 은몽씨를 해치려고한 그 도화역자가 결코 그 김수일이란 사람은 아니란 말씀이지요?』
『그이가 그렇게 악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공작부인은 머리를 숙으렸다가 다시 들면서 「테이블」설합에서 한장의 종이를 꺼내어 「펜」을 들었다.
김수일씨! 지금 경찰당국의 무서운 혐의는 오직 수일씨에게로 쏠리어가고 있읍니다. 나는 수일씨를 어디까지나 믿고 있읍니다. 수일씨가 저를 해한 저 도화역자의 정체라고는 꿈에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일씨는 무슨 이유로 자취를 감추었읍니까? 어째서 저와 만날 때만 「중앙 ‧ 아파 ─ 트」를 사용했읍니까? 한시바삐 나타나서 이러한 의문을 풀고, 받고 있는 무서운 혐의에서 벗어나십시요.
주 은 몽
『남수씨 수고스럽지만 이 글을 신문에다 광고해 주세요. 무슨 소식이 있을지 모르니까.』
남수는 그것을 받아들고 읽더니
『생각 잘 하셨읍니다. 그러면 지금 곧 돌아가는 길에 ××일보사에 들르겠읍니다.』
하고 황급히 명수대 저택을 나섰다.
그 때 공작부인과 헤어진 백영호씨는 효자동 해성전문학교 교장실에서 황세민 교장과 커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필자는 여기서 황세민씨에 관한 세평을 간단히 소개할 필요을 느낀다. 그것은 이 한 편의 이야기에 있어서 표면에는 그리 흔히 나타나지 않지만 맨 나중에 이르러 그는 실로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십이 넘은 황세민 교장은 십년 전, 삼백 만원이란 거액의 돈을 품고 아메리카로 부터 표현히 귀국한 독신자(獨身者)다. 그 후 그는 고아원, ×××중학교, ××도서관, 혜성전문학교 ── 이와 같이 사재를 모두 교육 사업에 바친 독실한 사회사업가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금액이 어디서 들어 왔으며 그가 어떠한 과거를 밟았는지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특히 영어와 중국 말에 능통하였으나 남달리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 같지도 않았다.
그것은 하여간 지금 황교장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백영호씨의 모양은, 마치 고양이 앞에 쥐와도 같았다.
『혜성을 위하여 칠십 만원을 제공할 결심을 했읍니다. 그러나 공식 발표와 모든 수속은 결혼식 후로 밀어 주시는 것이 어떻겠읍니까?』
『자네의 의향만 그렇다면 그떻게 해도 무방하지.』
『고맙습니다. 그러면 후일 다시……』
걸상에서 일어 서는 백영호씨의 얼굴에는 기쁨과 감격이 넘쳐 흘렀다.
『고맙기야 이 편이 더 한층 고맙지. 하옇든 우리들은 손과 손을 마주 잡고 미미하나마 사회를 위하여……』
황교장은 백영호씨의 손을 붙잡고 힘있게 서너 번 흔들었다.
교문을 나서는 백영호씨의 가벼운 발걸음을 황교장은 커 ─ 텐을 열어 젖히고 머엉하니 바라보았다.
이리하여 한 주일 후면 공작부인과 백영호씨의 결혼식을 부민관에서 거행하게까지 결정되고 무려 수천 장의 결혼 청첩장이 각계 명사들에게 발송된 어떤 날이다. 실로 뜻하지 않았던 악마의 무서운 명령이 청천벽력처럼 떨어졌던 것이다.
여기는 다방 백구 ── 자욱한 연기속에서 손님들은 차를 마시며 달콤한 레 ─ 코드 음악에 귀를 기우리고 있었다.
저편 파초 나무 그늘 밑 ── 전등 불이 어슴프레 흐르는 구석 복스에는 아까부터 누구를 기다리는지, 연방 팔뚝 시계를 들여다 보는 한 사람의 청년 신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저 백영호씨의 딸 정란의 약혼자인 의학 박사 문학수 그 사람이다.
양미간을 약간 찌프린 그의 얼굴에는 무엇인가 헤아릴 수 없는 수심과 초조의 빛이 뭉게뭉게 떠돌고 있었다.
『무슨 이야길가?』
그는 주머니에서 아까 정란으로부터 온 한장의 속달 엽서를 꺼내어 또 다시 읽어 보는 것이다.
학수씨 ─ 오늘 밤 여덟 시에 다방 「백구」로 꼭 와 주세요. 저는 지금 까닭 모를 어떤 무서운 처지에 빠져 있읍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 백 정 란 문학수는 속달을 받던 그 순간부터 정란의 소위 『까닭 모를 무서운 처지 ──』라는 것을 가지 각색으로 상상해 보았으나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 때 문이 휙하니 안으로 열리면서 정란의 낯익은 회색 투피스가 문학수의 시선을 붙들었다.
핼쓱하니 핏기를 잃은 정란의 얼굴을 바라 보는 순간 문학수도 이유 모를 공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란의 몸뚱이는 자욱한 연기를 칼로 베이듯이 헤치고 복스와 복스 사이를 허덕거리면서 학수의 곁으로 다가와 마주앉는다.
『이일을 어떻게 해요.』
정란은 복스에 몸을 던지면서 방안을 두루두루 돌아다보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생겼기로 ── 왜 그리 얼굴빛이 나빠요?』
학수는 상반신을 내밀며 종이장 처럼 창백한 정란의 갸름한 얼굴을 걱정하였다.
『이유가 있어요! 이유가 ──』
정란의 목소리는 떨린다.
『이유라니 ── 무슨 이유가?』
『무서운, 무서운 이유가 있어요!』
『무서운 이유라니 ── 속히 말해봐요! 뭘 그리 두려워하는게요?』
『두려워할 까닭이 있어요. 그러나 ──』
정란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공포에 쫓기는 눈동자로 또 한번 방안을 둘러본 후에
『그러나 그것을 저는 차마 입밖에 낼 수 없어요. 그것을 말하면 안됩니다. 저의, 저의 목숨이, 생명이 위태하다고요!』
『목숨이? 생명이?』
그처럼 침착한 문학수는 저도 모르게 그만 목소리를 높였다.
안 『 됩니다! 음성이 너무 높아요. 조용히 말씀해 주세요.』
정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애원하듯이 학수의 말을 막았다.
정란의 표정은 무엇인가를 혼자서 망설이는 것이다. 터져 나오려는 그 어떤 호소를 입술을 꼭 깨물고 참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란은 무엇을 결심한 듯이 손가락으로 핸드 ‧ 백을 열고 한장의 붉은 봉투를 꺼냈다.
『저는 지금까지 이 무시무시한 협박장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에게 보이면 제 목숨이……』
『협박장?』
『네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면 나를……나를 죽이겠다고 ──』
정란의 눈에는 순간 눈물이 핑하고 돌았다.
『그러나 당신께 만은 ──』
정란이 핸드 ‧ 백 속에서 꺼낸 한 장의 봉투는 새빨간 봉투 ── 타오르는 듯한 주홍빛 봉투였다. 『백정란 앞』이라고 쓰인 이 붉은 봉투에는 발신인의 주소와 성명은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광화문국의 일부인이 박혀 있을 뿐이다.
『빨간 봉투?』
문학수는 부리나케 봉투를 뜯었다. 편지지도 역시 핏빛같은 주홍빛이다.
정란, 너는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나의 명령을 거역해서는 안된다. 나는 까닭이 있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너에게 내리노라.
오는 초 열흘 오후 두시부터 공작부인과 백영호씨의 결혼식이 부민관에서 거행된다. 그리고 그 때 행복스러운 「웨딩 ‧ 마 ─ 치」를 칠 사람이 백정란 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정란, 나의 명령을 잘 알아두어야만 한다. 처음 신랑 신부가 입장할 때는 물론 너는 「웨딩 ‧ 마 ─ 치」를 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물을 교환하고 식이 끝난 후 신랑신부가 퇴장할 때 너는 절대로 「웨딩 ‧ 마 ─ 치」를 쳐서는 아니될 것이다. 너는 그 때 그 행복스러운 「웨딩 ‧ 마 ─ 치」를 치는 대신, 「쇼팡」의 「퓨 ─ 네랄 ‧마 ─ 치(葬送行進曲[장송행진곡])」를 쳐야한다. 인생의 최후를 애도하는 장송 행진곡을 쳐야한다!
백정란, 이는 나의 절대적인 명령이다! 네가 만일 이 명령에 거역한다면 그것은 그대로 네 손으로 너의 하나 밖에 없는 아름다운 목숨을 끊는 것과 같은 결과를 맺으리라. 내가 너를 위하여 장송행진곡을 칠 것이다.
다시 말하노니 정란! 나의 명령은 절대다! 쇼팡의 「퓨 ─ 네랄 ‧ 마 ─ 치」를 완전히 치고 나는 순간까지 너는 이 비밀을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는 다른 피아니스트를 대신 세워도 아니 된다. 너는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그날 꼭 「쇼팡」의 장송곡을 쳐야 할 운명에 사로잡힌 자다.
공부작인에게 칼을 던진
「도화역자」로부터
『퓨 ─ 네랄 ‧ 마치!』
괴상한 명령서를 읽고 난 문학수는 얼마 동안 묵묵히 앉아서 정란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들여다 보다가 마침내 굵다란 신음 소리로 중얼거렸다.
『결혼 행진곡 대신에 장송 행진곡! 장난이라고 할진댄 너무나 악착스런 장난이다!』
무서움에 벌벌 떨고 있는 정란을 보아서는 자기는 하하 하고 쾌할하게 웃어 보이고도 싶었으나 어쩐지 문학수는 웃을 줄을 몰랐다.
『어떻게하면 좋아요?』
정란의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하옇든 심상치 않은 일이다. 한시 바삐 이 일을 경찰에 알릴 수 밖에 없소.』
『안대요. 안돼요!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서는 안돼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문학수의 손을 잡고 정란은 애걸하듯 끌어 앉히었다.
『정란씨!』
『──?』
『아무 염려 마시요. 말하자면 이것은 한개의 장난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니까 ── 그러나 장난치고는 좀 지나친 장난이기 때문에 만일을 염려해서 경찰의 보호를 받도록 하는 것이 제일 무방하지 않아요? 입밖에 내면 죽인다고 하는 것도 결국 위협에 지나지 못하니까. 하옇든 나하고 같이 이 길로 경찰서에 가서 자세한 것을 이야기하고 만일 위험하다면 경찰의 적당한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공연히 무서워만 해도 안되니까 ──』
이리하여 문학수와 백정란은 그 길로 ×× 경찰서 임경부를 찾아가서 자세한 사연을 이야기하였으나 그들에게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편지에 묻은 지문을 감정해 보았으나 물론 그런것을 남겨둘리는 만무한 일이다. 결국 정란이 대신 다른 「피아니스트」를 세우기로 하였을뿐이었다.
葬送行進曲[장송행진곡]
편집그런 일이 있은지 한 주일 후, 마침내 백영호씨와 공작부인의 결혼식날인 오월 초 열흘은 다가 왔다.
그날 부민관 앞뜰에는 ── 마치 가마귀떼 처럼 몰려드는 자동차, 자동차, 자동차의 행렬이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고 정각 새로 두시를 기다리는 이층 중강당 넓은
「홀」에는 화려한 화환의 행렬과 함께 사람의 물결이 넘칠듯이 흐느적거렸다.
축복하는 사람, 선망하는 사람, 시기하는 사람 ── 사실, 젊은 공작 부인과 늙은 백영호씨와의 이 결혼식은 무지개와도 같이 가지각색의 색채를 띄고 그들의 눈에 비쳤으리라.
정각까지는 아직 이십 분 ── 문학수는 맨 앞줄 가족석에 앉아있는 정란의, 어쩐지 창백해 보이는 얼굴을 멀리서 바라보고 남모를 불안에 가슴을 두근거리었다.
그리고 정란은 지금 「피아노」앞에 묵묵히 앉아있는 그의 동무 마리야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바라다 보는 것이다.
마리야는 지금 두 손을 가만이 건반에 얹고 그럴상싶어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긴장된 눈동자로 악보를 드려다보고 있다.
그 마리야의 옆 모양을 멀리 내빈석에서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 저 사법주임 임경부가 또 한사람 있다.
그는 지금 「포켙」에 쓸어 넣은 오른편 손으로 정란에게 온 주홍빛 협박장을 어루만져 보면서 물결처럼 흐느적거리는 이 수 많은 손님들 가운데 그 정체모를 마인 ── 백영호씨와 공작부인의 결혼식을 장송곡으로 축하하고 저 하는 무서운 악마의 눈동자를 자기 얼굴 위에 감각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만일을 염려하여 「홀」앞문과 뒷문에 사복한 경찰들을 파수시켜 놓고 뜻하지 않은 재화가 돌발하는 순간 「홀」문을 앞뒤에서 꼭 잠가버릴 작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고 임경부는 자신에게 타이르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조금 아까 「피아니스트」김마리야양을 불러다가 혹시 이상한 편지를 받은적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김마리야는 그런적은 없다고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던 때문이었다.
정각이 가까왔다.
팔십이 넘은 듯한 늙은 주례자가 기침소리와 함께 등단하여 이제부터 백영호와 주은몽의 결혼식을 거행하겠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신랑 백영호씨가 둘러리들을 곁에 세우고 천천히 입장하였다.
뒤를 이어 신부 주은몽이 공작의 꼬리처럼 활짝 펴진 면사포를 끌며 「웨딩 ‧ 마 ─ 치」와 함께 행복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다.
사람들은 웅성웅성 떠들기 시작하였다. 「웨딩 ‧ 마 ─ 치」는 조금도 거침없이 두사람의 원앙처럼 다행다복한 앞길을 축하하며 장엄한 「톤」 「리듬」을 가지고 계속된다. 이윽고 주례자의 기나긴 상투적 교훈과 축하의 말이 끝나자
『이제부터 신랑은 신부에게 예물을 주는 것으로서 선량한 남편되기를 서약하고 신부는 신랑으로부터 예물을 받음으로서 정숙한 아내가 되기를 선언하겠읍니다.』
이리하여 예물을 주고 받은 다음 각계명사의 축사가 있고 축전축문의 낭독이 있은 후 신랑신부가 팔을 끼고 퇴장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란은 지금 「피아노」앞에서 백납처럼 낯빛이 변한 김마리야의 얼굴을 발견하고 전신이 오싹함을 깨달았다.
『마리야!』
정란이 놀란 상반신을 의자에서 일으키며 그렇게 불렀을 때, 그러나 다시
「홀」안을 울린 것은 행복에 찬 「웨딩 ‧ 마 ─ 치」 그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찌된 셈인지 마리야의 양손이 흰 건반 위에서 죽은 듯이 움직일줄을 몰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피아니스트」에게로 쏠렸을 때, 마리아의 손가락은 다시 「키 ─」를 『콰앙』하고 눌렀다.
순간, 사람들은 자기들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것은 독자제 군도 이미 예상하고 있는바 저 재 (灰[회])빛에 쌓인 음침하고도 애도를 품은 「쇼팡」의 장송 행진곡 그것이 아닌가.
마침내 불안과 공포와 초조에 떨고있던 정란의 예감은 명중하였다.
행복의 길을 열어야 할 결혼행진곡이 죽엄의 길을 찾고있는 장송 행진곡으로 변하였다는 이 무서운 사실, 이 불길한 사실을 눈 앞에 보는 군중은
『이게 무슨 곡조냐?』
『장송곡이 아닌가?』
『빨리 피아노를 멈춰라!』
하고 저마다 떠들기를 마지않았으나 마치 납인형(蠟人形)처럼 핏기를 잃은
「피아니스트」김마리야의 손가락은 아직도 미친듯이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리야! 고만둬! 피아노를 고만둬!』
하고 부르짖는 정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비로소 마리야는 악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구슬땀이 비오듯 흐르는 얼굴을 한번 번쩍 들었다가 그만
『와악! ──』
하는 울음 소리와 함께 정란의 품 안에 쓸어지고 말았다.
바로 그 때 그렇지 ── 않아도 수라장처럼 어지러워진 화려하던 홀 안을 시꺼먼 공포의 장막으로 둘러 싸 버린 무서운 사건이 또 한가지 일어 났다.
그것은 바로 저 신랑 신부가 실로 이 뜻하지 않은 불길한 음악 소리에 행복의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숙였던 머리를 번쩍 들어 어지러워진 식장 안을 휘 돌아 보던 그 순간이었다.
신부 주은몽의 눈동자가 불현 듯 군중의 일각(一角)을 바라보자 그만
『악!』
하고 고함을 치며 신랑 백영호씨의 팔목에 새파랗게 변해 버린 얼굴을 묻으면서
『악마! 악마!』
하고 부르짖었던 때문이다.
백영호씨는 깜짝 놀라 신부의 몸을 껴안으며
『뭐, 악마? 누가, 누가, 악마란 말이요?』
하고 부리나케 물었으나 극도의 공포를 느낀 듯한 신부는 얼굴을 파묻은 채 군중이 어물거리는 오른편 쪽 한 모퉁이를 손가락질 하며
『저기, 저기 이제 방금……』
하고 간신이 입을 떼는 신부 공작부인의 목소리는 마치 십리 밖에서 들려오는 모기 소리처럼 가늘다.
그 때 임경부의 벼락같은 목소리가 식장안을 흔들었다.
『여러분 조용히들 하시요! 그리고 대단히 미안합니다마는 아무리 바쁘신 분이 있더라도 식장 밖으로 나가서는 안됩니다. 그러니 떠들지들 말고 약한 시간만 기다려 주십시요. 한시간 후에는 경찰관이 여러분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드릴 것입니다.』
그 때는 벌써 사복한 경찰들이 「홀」문을 물샐 틈 없이 잠가버렸다. 뚜껑을 덮은 커다란 모말안에서 지금 수백명 군중은 벌떼 처럼 떠들고 있을 뿐 ──
『이처럼 경사스러운날 이렇게 상스럽지못한 취조를 감행하지 않으면 안될 경찰관의 고충을 헤아려 주십시오.』
임경부는 먼저 신랑 백영호씨의 허락을 은근이 구한 후에 아직도 사지를 바들바들 떨고 있는 신부 주은몽을 향하였다.
『오늘 이런 심문을 하는 것을 널리 용서해 주시요. 그리고 신부께서 이제 보신 그 악마란 자를 이 가운데서 골라내 주지 않으면 안되겠읍니다.』
그러나 공작부인은 백영호씨의 팔목에 매어달린채 무서움에 찬 눈동자로 수 많은 군중을 노려볼 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생겼소?』
백영호씨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신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한참동안이나 식장 안을 휘 둘러 보고있던 신부는
『보이질 않아요. ──』
하면서도 시선으로는 이구석 저구석 군중을 헤치며 그 어떤 무서운 그림자를 쉴새없이 찾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임경부는 신부를 출입구 옆에 놓인 교의에다 앉히우고 한 사람씩 그 앞을 지나서야 홀 밖으로 빠져나가는 손님들 가운데서 악마의 정체를 골라 내기를 신부에게 청하였다.
손님들은 하는 수 없이 자기의 필적과 주소 성명을 남기어 놓고 한사람 한 사람씩 마치 시험관 앞을 지나는 수험생처럼 공작부인 앞을 지나서야 밖으로 빠져나갔다.
한명 두명 열명 수무명 ── 이리하여 식장안에는 가족 몇 사람을 남겨놓고 손님들은 모두 무사히 시험관 앞을 통과하였으나, 아아 이 어떻게된 노릇인가……
『없어 졌어요! 보이질 않아요.』
하는 신부의 목소리와 얼굴빛은 한층 더 떨리었으며 한층 더 창백해진다.
『그럴리가 있나?』
『그럴리가 있겠소?』
바람같이 나타났다 바람과 같이 자취를 감춘 악마였다.
『이상한 일입니다.』
『없을리가 있나?』
누구보다도 혀를 차며 놀란 것은 임경부와 백남수다.
『이상해요. 이제 방금 보았는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신부는 또 한번 텅 비인 식장 안을 돌아다 보는 것이다.
『음 ──』
하고 임경부는 한번 신음한 후에
『실로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신비로운 사건이다. 인력으로는 도저히 엿볼 수 없는 요술사의 재주다!』
하고 한번 더 혀를 찼다.
『그가 귀신이 아니고 사람인 이상 앞뒷문을 꼭 닫아버린 식장안 어느 구석에서 필연적으로 신부의 눈에 안띌리가 없을 터인데 ──』
하는 백남수의 말에 임경부는 하옇든 이상한 사건입니다 『 . 저번 날밤 이선배라는 화가가 막다른 골목에서 연기처럼 없어지고, 이제와서 또……』
『사실 우리들은 이번 사건에서 과학(科學)과 이성(理性)을 완전히 잃어 버리고야 말았읍니다.』
사실 백남수는 허황한 백일몽(白日夢)속에서 헤메고 있는 자신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대체 이제 신부께서 보신 그 악마라는 사람은 누굽니까? 조금도 숨김없이 세세히 말씀해 주시요. 저번 날밤 부인을 해하고저 단도를 던진 그 도화역자와 동일한 인물에 틀림이 없겠는데 ──』
그때 정란이가 「피아니스트」마리야의 손으로부터 석장의 붉은 봉투를 받아 임경부에게 내주면서
『이것을 보다면 마리야가 왜 「웨딩 ‧ 마 ─ 치」를 도중에서 끊고 불길한 장송곡을 치지 않으면 아니된 까닭을 잘 아십겁니다.』
『빨간 봉투?』
임경부는 그렇게 외치며 신부에 대한 질문을 잠시 정지하고 먼저 마리야의 자백에 귀를 기우리었다.
임경부가 받아 쥔 세개의 빨간 봉투 ── 발신인의 주소 성명이 써 있지 않은 이 석장의 편지는 저번 정란이가 받은 그것과 대동소이한 내용을 가진 무시무시한 협박장이다.
역시 주홍빛 편지였다. 그 중 한귀절을 여기에 소개해 보자.
(마리야! 이번이 세번째의 명령이다. 네가 만일 백정란이 한달 후 피뭉치로 변해버릴 운명에 있다는 사실을 미리 짐작한다면 너는 결코 떠들지 말고 조용히 나의 명령에 복종함이 좋으리라. 한달 안에 나는 정란의 사령(死靈)을 위하여 장송곡을 칠 터이다. 마리야! 너도 만일 목숨이 아깝다고 생각하거든 꿈에라도 나의 경고를 헛된 협박이라고 믿어서는 안되리라. 그리고 너는 경찰의 힘을 빌 생각을 하여서는 안된다. 무슨 연고로…… 경찰의 위력도 나의 이 철석과 같은 의지를 추호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며 온전치 못하리라. 나의 이 위대한 힘, 자연을 초월한 마술사의 재주를 너는 저 백영호 씨와 공작부인의 결혼식장에서 목격할 것이다. 과연 이 대담하고도 무시무시한 마인의 선언은 지금 수 백명 군중 앞에서 훌륭히 실행되지 않았는가!
임경부는 이 어리석은 마리아의 행동을 픽 하고 코웃음을 치려는 자기 입술을 꽉 깨물고 신부를 향하였다.
『그러면 아까 보신 그 악마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시요.』
공작부인의 입으로부터 간신히 흘러나온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그것은 주은몽이 열 여섯 살 되던 여름이었다.
어렸을 때 양친을 잃은 은몽은 그 해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할머니와 함께 금강산 백도사 에서 (百道寺) 더위를 피하고 있던 그 때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고 ── 수 많은 절간이 산재해 있는 금강산에서도 이 백도사라는 절은 가장 초라 하였으며 손님이라고는 은몽이네 둘 밖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매미소리와 해를 보내는 적적한 절간 생활 ── 육십 고개를 넘은 늙은 주지 한사람과 열 여덟살 먹은 소년승려(少年僧侶) 해월(海月)이 이 백도사의 주인공이었다.
은몽의 할머니는 늙은 주지와 옛말하기를 즐겨 하였으며 어린 은몽은 홍안 미소년 해월이와 매일 산골짜기로 싸돌아 다니기를 무엇보다도 좋아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은몽과 애기승 해월이가 어렸을 때 부모를 여위었다는 공통적인 쓸쓸한 신세는 그렇지 않아도 타기쉬운 소년소녀의 연약한 가슴 속에 기름을 부었다.
『해월아!』
『은몽아!』
그들은 이렇게 부르며 불리우기를 좋아하였다. 하나가 쫓기는척 하면 하나는 반드시 따랐다. 하나가 따르는척 하면 하나는 반드시 쫓기었다.
이리하여 그들 앞에는 「아담」과 「이브」의 그림이 그림 그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해월은 「아담」이 아니었고 은몽은 「이브」가 아니었다.
저녁노을을 머리에 이고 해월이와 은몽이 바위위에서 나란히 앉은 어떤 날 ──
『내년 여름에도 꼭 와야 해!』
『꼭 오고말고! 내가 뭐 거짓말 할라고?』
『일 년이 몇 일인지 너 아니?』
『아이 참. 삼백 예순 다섯 날이지.』
『삼백 예순 다섯 날? 아이구!』
『뭐가 아이구야?』
『꼭 와야한다! 안 오면……』
『안 오면?』
『너를 찾아 가서……』
『나를 찾아 와서?』
『너 정말 꼭 와야 한다!』
『꼭 온대도 그래?』
『안 오면 난 찾아 가서 너를 죽일 테야!』
『왜 죽여?』
그러나 해월의 입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 할머니의 뒤를 따라 백도사를 떠나는 은 몽의 등 뒤에서 애기 중 해월은 울었다.
그러나 은몽은 화려한 서울에 한 걸음 들여 놓자마자 해월의 존재는 영원히 망각했던 것이다.
그해 가을,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천해 고아가 된 주 은몽은 몇 푼 되지 않은 학비를 가지고 오랫동안 그리워 하던 동경으로 무용 연구 차 건너갔다.
그 후 은몽은 해월의 소식을 알려고도 하지 않아서 전연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은몽이 공작부인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데 ─ 뷰한지 얼마 안 되어 그는 돌연 해월이란 이름이 씌어 있는 주소 불명의 주홍 빛 봉투를 받고 놀랐다.
── 팔년 동안 너를 찾아 십삼 도를 편답한 해월이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너를 발견했다. 일 년이 며칠인지를 네가 안다면 팔 년이 며칠인지도 가히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세상이 귀여워 하는 공작부인, 나는 노방의 거지 같은 초라한 도승 ── 그러나 나는 너의 육체의 비밀을 알고 있다.
애기 중 해월의 아내였던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모일 모시 모처에서 만나자는 말이 씌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가지 않았어요.』
공작부인은 얼굴을 붉혔다.
『그 후 또 한번 붉은 협박장이 온적이 있었어요. 나를 죽이겠다고 ── 그리고 붉은 봉투와 편지는 피(血)를 의미한다구요.』
『음 ── 복수를 의미하는 붉은 봉투 ── 도승 해월이, 해월이!』
임경부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백도사의 중 해월이가 역시 주홍 빛 도화복을 뒤집어 쓰고 공작부인에게 비수를 던지는 것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무서운 戀愛史(연애사)
편집이리하여 가장 호화롭던 백영호씨와 공작부인의 결혼식장은 암흑과 캄캄하고 죽엄과 같이 음침한 장송행진곡으로 말미암아 공포와 신비를 남겨놓고 일대 혼잡리에 시커먼 장막을 내렸다. 그리고 사흘 후, 백영호씨의 고문변호사 오상억은 사무실 팔거리 의자에 깊이 파묻혀 한 손으로 턱을 고이고 들창 밖 행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상억 변호사의 사무실이 오늘처럼 한가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사무원들도 모두 점심을 먹으로 나간 모양이다.
오상억은 지금 멍하니 밖을 내다보면서 어떻게하면 십 만원이란 돈을 마련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있는 것이다. 작년 가을 목단강(牧丹江)유역에 약 오십 만평이나 되는 광대한 토지를 사 놓은 것은 괜찮았으나 그것을 개간하고자 하니 적어도 십 만원은 갖어야 했다.
『십만원, 십만원!』
하고 그는 중얼거린다. 십만원만 지금 수중에 갖었다면 몇 해 안되어 자그만치 십배 ── 백만원을 만들만한 성산이 그의 명석한 두뇌와 그의 능난한 수완이 확보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기의 치밀한 머리와 튼튼한 심장을 믿었다. 그것은 그가 성대(城大)법학부를 나온지 아직 오년이 못된 오늘날 적어도 민사소송이라면 구십「퍼 ─ 센트」까지 승소에 승소를 거듭해온 그의 명성과 따라서 벌써 오십 만평이란 광대한 토지의 소유자라는 사실만으로 미루어 봐도 그가 결코 범인이 아닌 것만은 확실히 증명될 것이다.
그것도 그럴법한 것이 그의 삼십 오년 간의 생애란 실로 참담한 역사의 연쇄였다.
그의 고향은 평안복도 S읍이다. 그가 어머니의 뱃속으로 부터 생명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여 발버둥치며 이 사파에 떨어져 나왔을 때 사람들은 뭐라고 수근거렸던가.
『저것이 뭘 하러 나왔노! 차라리 죽어서나 나오지!』
그러나 오상억은 자기 아버지와 달랐다. 비록 아버지는 대대손손이 물려준 생업 ── 백정(白丁)이라는 생업으로써 아들을 길렀으나 그의 아들 오상 억만은 그와같은 낙인(恪印)을 자기 자손에게 물려줄 존재는 아니었다.
그는 세상사람들의 가진 확대를 그의 독특한 수단 ── 침묵이란 수단으로서 물리치며 자랐다.
『얘이, 백당(백정)의 새끼!』
그러나 그의 조각처럼 차디찬 얼굴에는 이렇다할 반응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표정없는 얼굴과 말없는 입 ── 이것이 그가 타고난 유일한 무기였다.
『권력! 권력!』
권력이 그에게는 절대로 필요하다.
배워야 한다 돈을 『 ! 모아라! 그러면 너에게는 자연이 권력이 오느리라!』
그의 침묵은 항상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는 아버지가 도수(屠獸)하여 남긴 몇 푼 안되는 돈을 훔쳐가지고 고향을 등졌다. 평양서 어느 사립중학교를 피땀을 흘려가면서 고학으로 졸업한 오상억은 곧 서울로 올라와 성대 선과(選科)에 학적을 두고 학부 이학년 때에 고문을「파스」하였던 것이다.
『배웠다! 그러면 인제부터는 돈이다!』
이것은 졸업장을 쥐고 교문을 등질 때에 한 그의 침묵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상억의 혈관에도 청춘은 섞여 있었다. 영문학과를 졸업한 동기생 배남수의 누이동생인 정란을 흠모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백정의 자식인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옇든 그의 불타는 연정을 무시하고 작년 봄 박사논문이 통과된 문학수의 품으로 돌아가버린 백정란이다.
그 때「테이블」위에 놓인 전화기가 요란하게 사무실을 울리었다. 오상억은 명상에서 깨어나 수화기를 잡았다.
『오상억이 올시다. 아, 선생이십니까?』
뜻하지 않은 백영호씨의 목소리다.
『……백선생 그 동안 재미 많이 보시지요? 신혼의 단꿈 ── 하‘하’
하……』
오상억의 목소리는 수화기 앞에서 아주 쾌활하게 웃어 보이었으나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는다. 인형이 입을 벌린 것 같았다.
『그런데 신부께서 몸이 좀 불편하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좀 어떠시오? 괜찮으셔요? 암, 그렇구말구요. 누구든지, 더구나 부인네들이야 오죽 놀랐겠읍니까! 결혼식장에서 그런 봉변을 당했으니……네, 네, 뭐? 의논할 일이 있읍니까? 아니올시다. 너무 한가해서…… 그럼 곧 가 뵙겠읍니다.
네, 네 ──』
오상억은 수화기를 놓으면서
『무슨 일이 생겼노?』
하고 잠시 주저하다가 마침내 관철동 사무소를 나섰다.
백영호씨의 저택은 삼청공원 바로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삼층 양옥이다.
높은「콩크리트」담장과 드높은 정원과 그리고 꽃화분이 가득 놓인 「베렌다」는 이 집 주인의 호화로운 생활의 일면을 말하는듯이 오고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번씩 빼았는 것이다.
오상억은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백만원!』
선망과 질투와 그리고 자기를 덮어 누르는 그 어떤 압박에 저항하려는 듯이 그의 손 끝은 성난 사람처럼 푸르럭 거리면서 초인종을 억세게 눌렀다.
찌르릉 하고 초인종을 울리는 소리가 안으로부터 어렴풋이 들린다. 그 때 계단 저 편에서
『어멈 누가 오셨어요.』
하는 정란의 목소리가 굴러 나왔다. 오상억의 얼굴에는 일순 긴장의 빛이 핑 떠돌았다.
이윽고 현관 문이 열리었다. 어멈은 어디로 갔는지「핑크」색「원·피스」
를 입은 정란의 얼굴이 기웃한다.
『아, 오선생 ──』
가벼운 놀라움이 정란의 빨간 입술 위에 올라앉았다 사라진다.
『백군, 집에 있읍니까?』
표정없는 오상억의 물음이다.
『오빠는 지금 외출하고 없읍니다. 들어 오시지요.』
『백선생은……』
『이층 서재에 계셔요.』
오상억은 서슴치 않고 구두를 벗은 후 정란보다 앞서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서재까지 안내하려던 정란은 그만 우뚝 발걸음을 멈추고 층계를 묵묵히 올라가는 오상억의 뒷모양을 조금 세침한 낯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뜻하지 않았던 가벼운 동정이 그의 발과는 정반대로 오상억의 뒤를 따라 이층으로 기어 올라가는 것이다.
『어여쁜 부처님!』
정란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상억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려는 자기의 야릇한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리곤 끌어내리곤 하면서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공작부인의 침실로 들어갔다.
공작부인 ── 아니, 지금은 정란의 젊은 어머니 주은몽은 사흘 전 부민관 결혼식장에서 그 쩌릿쩌릿한 악마의 얼굴을 본 후부터 밤이나 낮이나 자기의 신변을 헤매이고 있는 듯한 악마의 환영을 머리에 그려보고 부르르 몸을 떨곤하였다.
신혼의 단꿈도 꿀새없이 주은몽이 지나간 날의 행월이와 자기 사이에 벌어졌던 악몽으로 말미암아 오뇌와 뉘우침으로 날을 보냈다.
지금도 주은몽은 침대에 누워서 그 파리한 얼굴로 천정을 멍하니 바라보며 정란과 더불어 그 백도사의 애기중 해월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있던 참이었다.
자아 어서 이야기를 『 , 계속하세요. 그래 그 악마가 어머니를 죽이겠다고까지 결심한 동기를 자세히 이야기 해 보세요.』
정란은 침대 옆으로 다가와 앉는다. 그러나 독자 제군이여! 우리는 주은 몽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무서운 연애사를 듣기 전에 이층 서재에서 백영호씨와 그의 고문변호사 오상억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벌어졌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오상억이 이층 서재로 들어가자 백영호씨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듯이
『이거참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소.』
하고 반가이 맞아 드렸다.
『안녕하셔요.』
오상억은「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백영호씨와 마주 앉으며
『요즈음 재미가 어떻습니까? 아주 얼굴에 화기가 도시고…… 십년 쯤은 젊어진 것 같읍니다. 하, 하, 하.』
그러나 백영호씨는 다만 빙그레하고 한번 웃어 보일뿐이고 아무런 대답도 없다. 백영호씨의 그 빙그레하고 웃는 웃음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숨어 있었다는 것을 오상억은 모르리라.
결혼한지 벌써 사흘이나 되었으나 그는 아직 신부와 잠자리를 같이 해보지 못했다는 쓸쓸한 심정과 그 쓸쓸한 심정을 이리뒤척 저리뒤척 해보는 초조한 마음을 스스로 웃어보는 웃음이었다.
신혼의 행복을 즐기기 보다도 먼저 그 해월이라는 도승 ── 바람과 같이 나타났다 바람과 같이 자취를 감춘 악마의 칼날로부터 자기의 목숨을 건지려는 마음이 한층 더 바빴던 젊은 아내의 심정을 백영호씨는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흥분된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침실로 바로 옆방인 「아뜨리에」서 오는 유월 상순에 열릴 미술전람회에 출품할 『여인 군상(女人群像)』이라는 석고상을 만드는 것으로 자기의 쓸쓸한 마음을 달래며 오늘날까지 지내왔던 것이다.
백영호씨는 그 때 안색을 가다듬으며
『오늘 일부러 오군을 청한 것은 ──』
하고 오상억을 바라보았다.
『네,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오상억은「테이블」에 상반신을 내 밀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이번 여러가지로 생각한바가 있어서 ──』
『네 말씀을 하십시요.』
오군도 아시다싶이 『 지금 우리 사학계(私學界)는 적지 않은 역경의 길을 밟고 있거던.』
『네 그렇습니다.』
『아시다싶이 조선사학계의 은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장로교에서 모두 손을 떼고 저처럼 은퇴하는 이상, 오직 남아있는 길은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사학을 유지할 수 밖에는 없단말이지 ──』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순전히 우리의 손으로 경영하던 혜성전문학교 ── 내일이라도 교문을 닫아버리지 않으면 안될 혜성전문학교를 위하여 사재 칠십 만원을 내놓을 의사를 가지고 교장 황세민(黃世民)씨와도 여러번 교섭을 하였는데 ── 여기에 대해서 오군의 의견도 들을겸 법적수속이라던가 기타 여러 가지로 군의 수고를 좀 빌셈으로 오라고 한 것이네. ──』
『그렇습니까? 그것 참 장쾌한 일입니다!』
하고 오상억은 먼저 고문변호사로의 찬의를 표하는 한편
『그래 부인께서도 물론 그것을 승락하셨겠지요?』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승락이 있었지!』
하는『물론』에 백영호씨는 유달리 힘을 주었으며 그 힘있게 말하는 백영호 씨의 어투로 미루어보아 백만원의 재산과 결혼한 것이라고 세평을 받는 공작 부인에 대한 인식을 새로히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오상억이었다.
『그럼 남수(南樹)군도 물론 찬성이겠지요?』
『아 정란도 좋다고 하는데 애만이……』
하고 잠깐 주저한 후에
『그러나 이미 나의 의사는 결정된바라 남수가 불찬성해도 하는 수 없는 일이지. 그래 거기에 대한 모든 수속을 오군께 위임할 셈으로 이렇게 일부러 오시라고 한것이네.』
이리하여 오변호사가 백영호씨와 이층 서재에서 칠십만원 제공 문제를 토의하고 있을즈음 아랫 층 침실에서는 정란과 은몽이 저 보이지 않는 악마도 승 해월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젊은 어머니의 기구한 연애사(戀愛史)는 어떠했는가.
행복해야 할 결혼이며 희망에 빛나야할 신혼생활이지만 공작부인 주은몽의 아름다운 공상은 그것이야말로 일장춘몽의 꿈조차 꿀 새도없이 그림자처럼 자기의 뒤를 따라다니는 악마 ── 저 백도사의 애기중이던 해월로 말미암아 여지없이 짓밟히고야 말았다.
어린 시절에 철없이 저질러 놓은 조그만 실수는 주은몽의 화려한 생활도로 하여금 원망과 (生活圖) 저주와 복수의 칼날이 번득거리는 암흑의 빛으로 물들이게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더구나 해가 지면 삼천동공원 일대의 우거진 숲과 드넓은 정원의 캄캄한 장막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그 캄캄한 장막을 슬그머니 헤치고 복수의 악귀로 변해버린 도승 해월이가 어느때 어디서 주은몽을 해치려고 달려들런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은몽은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만 들어도 무서워 하였다. 개만 짖어도 온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어째 그런지 저는 그 해월이가 우리집 근방을 헤메이고 있는 것 같아서 못 견디겠어요.』
어떤날 밤 은몽은 무서움에 찬 눈동자로 남편 백영호씨를 똑바로 쳐다 보면서
『옛적부터 하는 말이 중은 심심산골에 들어 앉아서 오랫동안 도를 닦으면 신선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데 아마 그 놈은 오랫동안 도를 닦아서 요술을 배웠는가 봐요.』
그런 것을 어린애처럼 새삼스럽게 묻는 아내가 백영호씨는 무척 애처러웠다.
『은몽, 무엇을 그리 두려워 하는게요? 아무 걱정 말고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 합니다. 내가 이처럼 옆에서 지키고 있질 않소? 이층에는 남수와 정란이가 있고……』
그러나 은몽은 위로하는 남편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는 듯이
『그래도, 그래도……』
하면서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사실은 백영호씨도 입으로는 아내를 위로하면서도 뭔가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공포에 자기 자신도 사로잡혔던 것이다.
첫째로 저번날밤, 가장무도회에서 은몽을 해치려 하던 어릿광대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일이라던가 이선배란 화가가 태평동 막다른 골목에서 땅으로 숨은 듯이 없어진 일이라던가 결혼식장에 나타났던 해월이가 눈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춘 것들을 다시금 연상해 볼 때 이 모든 사건은 실로 커다란 신비인 동시에 커다란 무서움이 아닐 수 없었다.
연기처럼 틈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기어드는 해월이! 그는 과연 사람인가 귀신인가?
백영호씨가 이층 응접실에서 오상억 변호사와 이야기할 때 아랫층에서는 은몽과 정란이가 도승 해월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럼 『 어머니가 바로 열 여섯 살 나던 여름이로군요?』
『그렇지. 열 여섯 살에 무슨 철이 있어?』
『그래도 어머니 열 여섯 살이면 뭐……』
정란은 제입으로 내 뱉은 이「어머니」란 말이 처음에는 무척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나 뭐 그럴 것 없다고 자기 감정을 어루만져가며 한번 두번 부르는 사이에 지금은 도리어「어머니」라는 말투에 새 감정을 느끼는 정란이다.
침대 위에 누은 은몽의 해말쑥한 얼굴에는 차츰차츰 어두운 빛이 떠돌기 시작한다.
『열 여섯 살이라도, 뭐 난 정말 아무 것도 몰랐어.』
『그래 그 해월이란 애기중과 무슨 언약이 있었우?』
『있긴 뭐가 있어. 내년 여름에 또 오라기에 오겠다고 그랬을 뿐이지. 그럴 걸 그이가 무슨 큰 약속이나 한것 같이 믿고……아이 참, 사람이라니 어디서 어떤 실수를 저지를런지 알 수 없어. 아이 무서워! 그 지긋지긋한 중놈이 언제 또 나를 죽이려고 달려 들런지……』
은몽은 몸을 부르르 떨며 들창 밖을 내다보았다.
정란은 그 애기중과 이 젊은 어머니 사이에 얽혀져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그 어떤 기구한 「로맨스」의 실마리를 끄집어낼 셈으로 의자를 바싹 침대 옆으로 당겨 놓으면서
『그래도 어머니, 그이가 언젠가 어머니께 한 편지에, 그러나 나는 너의 육체의 비밀을 알고 있다. 애기중 해월이의 아내였던 사실을 알고 있다 ── 이런 말이 씌어 있었다면서 뭐?』
정란은 약간 귀밑을 붉히며 은몽을 바라 보았다.
『…………』
은몽은 아무 대답이 없다. 천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의 눈에는 지나간 시절의 회상과 그 회상에서 벌어져 나오는 후회, 어두움, 절망, 공포 ── 그런 것들이 알알이 떠오르는 것 같이 보이었다.
은몽은 길게 한번『후』하고 한숨을 지으며 마치 한탄하듯이 입을 열었다.
『아아 어여쁜 악마! 정란이 그것이 만일「로맨스」라면 그것은 너무도 무서운 「로맨스」야. 공포에 찬 아름다운「로맨스」, 애기중 해월은 그 때 벌써 한개의 소악마(小惡魔)였었어. 뱀 앞에 개구리 모양으로 나는 그 악마에게 나의 철없는 정열을 전부 바쳐버렸단 말이야……어여쁜 소악마!』
그리고 은몽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침대 위에 일어나 앉으며 정란이 내 전부 이야기 『 , 할께 응? 나는 정란이를 누구보다 믿어. 나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정란인줄 알아!』
흥분에 찬 은몽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싸늘한 손가락이 무심 중 정란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자아, 내 이야기를 좀 들어 봐!』
『어머니!』
정란은 그 때 불길처럼 타오르는 어머니의 양볼과 무섭게 충혈된 두 눈을 발견하고 그렇게 불렀다.
『어머니! 뭘 그리 흥분하세요?』
그러나 그 너무나 열정적으로 돌변한 은몽의 태도와는 정반대로 정란의 손목을 잡은 그의 두손은 어름덩이 같이 싸늘하다.
『그 놈의 칼에……그 놈의 칼에 나는 죽을 것 같애! 아아, 그 구렁이 처럼 추근추근한 돌중놈의 칼에 나는 언젠가는 죽을거야! 아아, 그 지긋지긋한 구렁이! 구렁이!』
『어머니 어머니! 마음을 진정하세요. 의사도 그러지 않았어요!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을 편안히 가져야한다고 ── 그리고 흥분하면 안된다고…』
『글쎄 내 말을 들어봐. 나도 참 철이 없지 ── 백도사(百道寺)의 적적한 생활, 하루 종일 가야 누구하고 말 한마디를 해볼까……매미 소리, 벌레 소리, 개울을 흐르는 물소리 ── 그 처럼 쓸쓸한 내 앞에 미소년 해월이가 나타났어. 나는 그를 처음보는 순간 ──』
은몽은 애기중 해월을 처음 보는 순간, 계집애 처럼 아리따운 그의 용모가 어린 은몽의 가슴 속에 아름다운 공상의 날개를 불어 넣었다.
이 공상의 날개는 해월이의 가슴에도 돋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해월을 바라보는 은몽의 눈동자가 천진하고 난만한 것과는 정반대로 은몽을 쳐다보는 이 애기중의 얼굴은 어느 때나 흐리고 침침하고 어두웠다.
그러나 그 침침하고 어둠속에 독사처럼 불타고 있는 정열이 숨어 있을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어떤날 오후, 나는 참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어.──』
은몽은 어떤날 오후, 해월이와 산골짜기를 싸돌아다니다 돌아와서 땀에 젖은 「샤츠」와 양말을 맞은편 담밑 양지쪽에 피어있는 봉선화 잎에다 널어 놓고 방으로 들어와 있노라니까 거기에 해월이가 슬그머니 나타나서 은몽의 양말을 한짝 걷어가지고 뒤뜰로 돌아갔다.
『그때 하도 이상해서 뒤를 따라가 보질 않았겠어? 그랬더니 그이가 그 땀에 젖은 양말을 개처럼 쭐쭐 핥고 있겠지! 아이 참 더러워!』
『양말을 핥아요?』
『그러게 말이지! 처음에는 양볼에 대고 부벼보더니 그 담에는 입에다 넣고 쭐쭐 빨아 보는 거야.』
『아이 더러워! 짐승처럼 빨긴 왜 또 빠는 거예요? 그게 정말이유 어머니!』
정란은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눈쌀을 찌프렸다.
『그림 내가 거짓말을 할까.』
『아이 참 별일도 다 있어! 그래 어떻게 했어요?』
『그래 나는 그것을 본 순간 왜 그런지 보아선 안될 걸 본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하겠지. 지금 같으면 못 본척하고 방으로 뛰어 들어왔을 테지만 그래도 그땐 아직 어리지 않아? 그래 나는 에이 더러워 너 남의 양말은 왜 핥는 거야? 하고 소리를 쳤더니 후다닥 놀라서 이편을 힐끗힐끗 돌아다 보며 멋적은 얼굴로 빙글빙글 웃는거야.』
『그래서……?』
『그래 그 빙글빙글 웃는 낯작에다 침을 탁 뱉고 싶은 생각이 나질 않겠어? 어째 그런지 그런 충동을 받았어. 그래 에이 더럽다! 하고 아직도 손에 들고 우물거리는 양말짝을 잡아 당겼을 때는 땀내가 나고 발고린내가 나는 내 양말짝 보다도 그 양말에 번질번질 발라 놓은 그 자식의 침이 몇 곱절 더러워 보이는거야. 화가 바짝 치밀겠지. 개한테 얼굴을 할키운 것 같아서 못견디겠는 걸 어떻게!』
『그래 어떻게 했어요?』
『그래 양말을 도로 그의 낯작에다 던지면서 깨끗이 빨아오라고 그랬더니 그만 머리를 푹 숙이고 양말을 든채 개울로 내려가는 거야.』
은몽의 두 눈이 양말을 들고 머리를 푹 숙이고 기운없이 개울로 내려 가는 애기중의 뒷 모양을 바라보는 듯이 몽롱해지는 것을 정란은 보았다.
『가엾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은몽은 시선을 정란에게로 돌리며
『응! 그렇게 생각한 나의 어린 감상이 도대체 잘못이었어. 내몸을 망치게 된 동기가 그 부질 없는 「센티멘탈리즘」때문이었지. 그의 뒤를 따라 부리나케 개울로 뛰어내려 갔을 때는 벌써 양말을 깨끗이 빨아서 양지쪽 바위 위에 널어 놓고 그 옆에 주저 앉아서 양손으로 턱을 고이고 소리없이 흐르는 개울물을 물끄러미 드려다보고 있겠지. ── 너 화났니? 하고 등뒤에서 그의 얼굴을 기웃하고 드려다 보았더니 그 때야 바위에서 일어서면서 말없이 빙그레 웃었어. 발고린내 나는 양말짝보다 그 계집애처럼 빨간 입술을 가진 그의 침이 더 더러울리는 만무하지. 양말짝을 핥고 있는 그를 발견한 순간, 나는 아까 얼굴이 화끈함을 깨달았다고 그랬었지. 그의 침이 한량없이 더럽다고 생각한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어 ── 그것은 결국 성(性)에 대한 자각(自覺)이 너무도 갑자기 나를 습격한 때문이 아닐까?』
정란은 얼굴이 간지러운 모양이다. 잠깐 머리를 숙였다가 다시 들면서 이야기를 재촉하였다.
『나는 그 때 어린애와 입 맞추는 어머니들을 불현 듯 연상하였어. 그리고 그에게 대한 미안한 생각도 나고해서 ── 침이 왜 더러워? 침이 왜 더러워…… 하고 마음 속으로 외치면서, 아니 그렇게 외쳤을 때는 벌써 ──』
그렇게 외쳤을 때는 벌써 애기중 해월의 침이 결코 더럽지 않다는 증거를 은몽의 입술이 너무나 명백히 증명하였을 때였다.
해는 비로봉을 넘어 뉘엿뉘엿 넘어간다. 고요히 흐르는 냇물에 거꾸로 비치는 두개의 그림자, 감격된 영혼과 애달픈 입술을 싣고 두개의 그림자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떨어질 줄을 모르는 듯 물결 위에서 넘실거렸다.
『굳센 듯 하면서도 모래처럼 연약한 처녀성의 신비 ── 해가 지고 황혼을 헤치면서 다시 절간으로 올라올 때는 나는 한번도 그의 얼굴을 못 쳐다 봤어. 그러나 아아 저주 받은 그 일순간!……』
은몽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들창 밖에 서 있는 고향나무 그림자가 어느 듯 두자나 동쪽으로 길어 졌으니 해는 벌써 북악산 봉우리를 넘으려는 것이다.
정란은『후!』하고 가느다랗게 한숨을 지었다. 젊은 어머니의 연애사는 아직도 계속된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그는 마치 나를 무슨 여왕으로 섬기겠지. 그리고 자기는 노예가 되어서 나를 위하는 거야. 나는 어린마음에 정말 여왕이나 된 듯이 교만한 태도로 그를 대하기 시작하였어. 그는 내 말이면 무엇이든 싫다는 말 한마디 해본적이 없었어. 언제가는 내가 일부러 어떻게하나 보려고 네길이나 되는 위태로운 벼랑 아래 핀 도라지꽃을 뜯어 오라고 명령을 했더니 말이지,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법당으로 올라가서 오랏줄을 가져다가 그것을 붙잡고 내려가서 꽃을 따가지고 올라 오는거야. 보니 오랏줄을 잡고 미끄럼질을 하면서 내려간 그의 양손에서 새빨간 피가 뚝뚝 흐르겠지. 그래도 그는 아프다는 소리 한마디 없이 잠자코 꽃을 내 손에다 쥐어줬어. 그러나 나는 그것을 별로 애처롭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 아니 사실은 애처로웠지만 그 순간 잔인한 마음이 나의 가슴에 떠오르겠지. 오냐 네가 얼마나 나를 위하나 보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도라지 꽃을 다시 벼랑 밑으로 던지질 않았겠어 그리고 다시 . 가져오라고 명령 했더니 그는 잠깐 나의 얼굴을 들여다 본 후에 또 다시 묵묵히 오랏줄을 잡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꽃을 쥐고 기어올라 오겠지.……』
『어머니도! 어쩌면 그리!』
그 순간 정란은 어머니가 끝없이 미웠다. 그러나 은몽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래 그것은 물론 나의 잘못이었어. 그러나 나를 그렇게 교만하게 만들고 잔인하게 만들어 준 죄는 모두 그 악마에게 있었다고 나는 생각해. 그 계집애 처럼 어여쁜 얼굴, 기쁨도 모르고 슬픔도 모르는 것 같은 마치 인형처럼 생긴 얼굴 밑에 무엇이 숨어 있었는줄 알아? 아 생각하만 해도 온몸이 저릿저릿하게 무서운 계획이 그 표정없는 얼굴 밑에 있었던거야! 그는 나를 나를 죽이려고……』
『옛? 죽이려고?』
정란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그렇게 부르짖었다.
『죽이긴 왜 죽여요? 어머니를 그렇게도 사랑하고 있었다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죽인다는 것이 그 무서운 계획의 동기였어. 어떤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않아? ── 어떤 과학자가 어떤 여자를 무척 사랑한 끝에 여자를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커다란 수통(水桶)에다 여자를 집어 넣고 거기다가 냉각장치(冷却裝置)를 해서 수통의 물을 냉각시킨 후에 수통을 벗겨 놓았다고 얼음기둥(氷柱)속에 꽃처럼 잠자고 있는 구원의 애상(愛像)!』
어느새 옅은 어둠이 방안을 점령한다. 정란과 은몽은 숨길만 높다. 말 없이 쳐다보는 시선과 시선 ──
『애기중 해월이도 나를 영원히 놓치지 않을 생각으로 내년 여름에 또 다시 온다는 나의 말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어 ── 내가 백도사를 떠나는 바로 전날 밤,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밤이었어. 나와 해월이 저번 날 도라지꽃을 따던 벼랑 위에 걸터 앉아서, 그는 내년에도 꼭 오라거니 나는 꼭 온다거니,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던 때야. 내가 문득 달빛에 어린 그의 얼굴이 무섭게 변한 것을 보고 마음이 섬뜻해서 바위 위에서 벌떡 일어서는 순간, 아아, 무서워! 그의 두손이 나의 목을……』
은몽은 다음 말을 못잇는다. 지나간 날의 공포가 다시금 그를 습격하는 모양이다.
『그래 어떻게 했어요?』
『그래 나는 힘껏 그를 떠밀고 미친사람 모양 절로 뛰어 올라왔어 ──』
이리하여 주은몽의 무서운 연애사가 바로 끝났을 때, 정란의 오빠 백남수가 한장의 편지를 들고 흥분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暗夜 [암야]의 野獸[야수]
편집필자는 여기서 탐정소설가 백남수가 가지고 들어온 한 장의 편지가 저 공작 부인의 애인 김수일(金秀一)이란 화가로부터 공작부인에게 온 편지라는 사실만을 독자제군에게 알려 두고 그 편지를 뜯어보기 전에 사법주임 임 경부가 이 괴상하기 짝이 없는 살인미수 사건에 대하여 어느정도 까지 수사가 진행되었는지, 그것이 너무도 궁금해서 독자 제군을 ×× 서 사법주임실로 인도하고자 한다.
명수대 공작부인의 저택에서 가장무도회를 배경으로 일어난 사건에 접하였을 그 순간부터 이 사건만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힘으로 해결하리라고 자타에게 장담하였던 임경부였다.
그러나 사건은 임경부가 생각한 것 처럼 결코 단순하지는 않았다. 사건이 한걸음 한걸음 전진해 나갈수록 예상외로 복잡다난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뿐만인가, 경찰 당국을 ── 아니 임경부 자신을 마치 어린애 같이 비웃으면서 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령과 같은 범인의 재주! 그 신비로운 재주와 실로 위대한 힘을 가진 범인을 가만히 생각해 볼 때 뭐가 뭔지 도무지 걷잡을 수 없는 초조뿐이 그의 가슴을 덮어 누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불란 탐정의 조력을 빌리기는 사실 죽기보다 더 싫었다.
『그 교만하기 짝이없는 놈의 힘을 빌다니 ── ?』
그는 언제든지 그렇게 외치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사건에 관하여 임경부의 공로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임경부는 부하 박태일 부장을 금강산 백도사로 파견하여 공작 부인 주은몽의 증언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조사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에 관한 제일보(第一報)가 작일 은정리로부터 들어왔다.
── 십년 전까지 해월이라는 중이 백도사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자세한 것은 후보로 ── 제 이보가 들어온 것은 오늘 아침이다.
── 주은몽이 백도사로 피서 갔던 사실은 이것을 증명할 재료가 전무 ── 그리고 지금 제삼보를 가지고 박태일부장 자신이 백도사로부터 돌아와서
「테이블」을 사이에 끼고 상세한 보고를 임경부에게 하고 있는 중이다.
『백도사는 바로 비로봉 밑에 있는 극히 초라한 절인데 십년 전까지 해월이라는 애기중이 (당시 스물 안팍이었다고 한다.) 법능(法能)이라는 늙은 주지와 같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현재 백도사로 주지로 있다는 중의 입으로 증명 되었읍니다 . 이 주지는 죽기 바로 삼년 전에 백도사로 와서 그의 뒤를 이었는데 법능은 항상 해월의 말을 입에 담았다하며 칠년 전에 그만 해월이 중 노릇에 싫증이 났는지 어디론가 바랑을 메고 떠나 버렸다고 ── 』
『그래 주은몽의 말대로 해월이 홍안 미소년이었던 것도 사실이라던가?』
『그 점을 캐 물어보니 과연 미소년이었다고 법능도 일상 말하더라고, 그리고 해월은 그 때부터 폐병 제 삼기에 있었다고요 ──』
『그러면 주은몽이 할머니와 함께 피서 갔던 사실은 판명이 안되었는가?』
『그러니 말씀입니다. 현재있는 주지는 그런 것을 알 도리가 없고 법능도 이미 죽어버린 지금에 이르러 그런 것을 알아 볼 재료가 전혀 없읍니다.』
임경부는 잠자코 박부장의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하옇든 주은몽의 말과 늙은 주지 법능의 말이 일치하는 이상 주은몽이 백도사로 피서 갔던 사실은 확실하다 …… 그러면?』
임경부는 그 때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모자를 집어 쓰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삼청동 주은몽을 방문하려는 것이다.
『도승 해월이? 화가 김수일?「씰크햇트」의 이선배? 이 세 사람이 모두 같은 인물이 아닐까?』
그렇게 공상하면서 임경부는 황혼의 거리를 걸어간다.
이리하여 임경부가 삼청동을 향하여 걷고 있을 그 때 백영호씨의 아랫층 침실에서는 은몽과 정란이가 한 장의 편지를 들고 뛰어 들어온 백남수를 바라보면서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리 흥분했어요?』
정란이가 오빠의 얼굴과 손에 든 흰 봉투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을 때 남수는 침대 옆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김수일!』
하고 봉투를 은몽의 무릎위에 놓았다.
『예? 김수일?』
은몽과 정란은 동시에 그렇게 외치고 머리를 모으며 봉투를 드려다보니 과연 그것은 주소는 적히지 않았으나 틀림없는 김수일의 서명이었다.
『하옇든 속히 뜯어 보셔요!』
잠깐동안 얼리벙벙 해졌던 은몽은 남수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봉투를 떼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김수일의 필적이었다.
은몽은 그 낯익은 필적이 김수일의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은몽의 가느다란 목소리는 약간 떨리면서 편지를 읽기 시작하였다.
은몽씨!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은몽씨의 다복다행 하리라고 믿는 신혼생활을 축하 하나이다.
은몽씨!
나는 은몽씨를 잊으려 하였읍니다. 다시는 은몽씨를 생각지 않고 다시는 은몽씨 앞에 이몸을 내놓지 않고 그리고 다시는 은몽씨에게 나의 필적을 전하지 않으려고 결심하였읍니다. 그러나 은몽씨, 나는 지금와서 새삼스러이 지나간 일을 끄집어 내어 은몽씨의 가슴을 쓰라리게 하고 싶지는 않으나 그것은 나를 진심으로 버리고간 은몽씨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처럼 생각하는 나자신의 추측이 그릇 되었을런지는 알 수 없아오나 스스로 오식(誤植)의 인생을 걷고 있는 은몽씨의 고달픈 심정과 외로운 영혼이 나로하여금 붓대를 들게 한 것입니다.
은몽씨! 나는 수일 전 ×× 일보를 우연히 손에 들었을 때 은몽씨가 나에게 준 0간곡한 부탁을 읽었읍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믿고 은몽씨 그대를 믿고 있는데 내가 어찌 은몽씨를 해하려는 그 도화역자 일리가 있겠오.
매일 보도되는 시내의 신문은 나를 일컬어 공작부인에게 칼을 던진 무서운 악마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은몽씨 나는 결코 은몽씨가 믿고 있는것과 같이 은몽씨에게 비수를 던진 범인은 아니올시다. 그러면 나는 무슨 이유로 화가도 아니면서(은 몽씨, ×× 서 사법주임 임경부의 조사로 말미암아 은몽씨도 이미 아시다싶이 나는 결코 화가가 아니올시다. 그리고 김수일이란 이름도 결코 나의 본명이 아니올시다.) 그럼 왜 화가로 자칭하고 은몽씨와 교제를 하였는가? 무슨 이유로 그날 밤 나의 친구 이선배가 끝끝내 정체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는가?
나와 이선배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이냐? 이 모든 의문을 지금 이 자리에서 풀어드리지 못하는 나자신을 얼마나 원망하오리까!
그러나 은몽씨 나를 믿어 주십시요. 나는 절대로 은몽씨를 찌른 범인이 아니올시다. 언젠가 한번은 은몽씨 앞에서 거짓없는 나를 은몽씨에게 소개하리라는 것 만을 여기서 굳게 은몽씨와 더불어 약속하면서 하루바삐 백도사의 도승 해월이가 채포되기를 충심으로 비나이다.
은몽이 편지를 읽고 났을 때 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요란히 들려왔다.
이윽고 젊은 어멈이 한장의 명함을 들고 들어온다.
『이런 분이 찾아 왔는데요.』
임경부였다.
남수는 몸소 현관까지 마중나가 임경부를 맞이하면서
『잘 오셨읍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전화를 걸려고 생각하던 중인데 ── 』
이 말에 임경부도 무슨 반가운 소식이 있는 것을 짐작하고
『무슨 기쁜 소식이라도 있읍니까?』
하고 물으니 남수는 임경부를 방으로 인도하면서
『있습니다! 우리는 김수일이라는 화가 ── 아니 가짜 화가의 소식을 얻었읍니다.』
『뭐? 김수일?』
『네, 김수일!』
남수와 임경부가 방으로 들어 왔을때 은몽은 아직 편지를 손에 든 채 들어오는 두 사람을 멍 ── 하니 바라볼 뿐이다. 그 멍 ──한 표정은 무엇인가를 심각히 생각하는 것 처럼 보이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사색을 잃어버린 인형같이도 보였다.
그러나 임경부가 은몽과 정란에게 인사를 하며 침대 옆으로 다가올 때 은 몽은 비로소 꿈에서 깬 사람 처럼 표정을 가다듬고
『오시느라고 수고 하셨읍니다.』
하는 인사와 함께 손에 들었던 편지를 내어 주었다.
『허어! 이것이 그 편지……』
임경부는 편지를 받아 들고 무엇보다도 봉투에 박힌 일부인(日附印)을 들여다 보면서
『광화문국(光化門局)』
하고 중얼거렸다.
임경부는 편지를 읽는다. 사람들은 잠자코 전등불에 번쩍이는 임경부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경부께서는 그 편지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임경부가 편지를 읽고 났을 때 옆에 있던 남수가 그렇게 물었으나 경부는 무거운 표정을 그 넓은 이마에 그리면서 묵묵히 앉아 있다가
『이 필적은 틀림없이 김수일의 것입니까?』
하고 은몽을 향하여 얼굴을 들었다.
『네! 분명히 그이의 필적입니다.』
그러면 그이와 근 일년 『 동안이나 교제해 오시면서 결국 부인께서는 그의 이름도 모르고 그의 직업도 모르셨다는 말씀이지요?』
『네 ──』
은몽은 무안한 듯이 머리를 숙였다.
『교제는 어떤 정도의 교제였읍니까?』
은몽은 잠시 동안 대답이 없다가
『어떤 정도라고……그것을 구체적으로 경부께 아뢰라는 말씀이라면 그것은 너무…지나친 질문이 아닐까요?』
정색을 하고 자기를 쳐다보는 은몽의 쏘는 듯한 눈초리에 임경부는 당황히 그것을 막으며
『너무도 교양없는 질문을 용서하시요. 다만 질문의 본의만을 양해해 주신다면 고맙겠읍니다.』
『저희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 있었다고, 저번에는 여러번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그러면 그이가 자기를 배반하고 백영호씨와 결혼하신 부인께 그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혹시 부인을……』
『그는 선량한 사람입니다. 쾌할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이 편지에 표시된 것이 결코 거짖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아요.』
『혹시 그이의 사진같은 것을 가졌으면……』
『한장도 없읍니다.』
그 순간 임경부의 머리에는 이 김수일이란 인물과 저 백도사의 중 해월이란 인물이 혹시 같은 사람이나 아닐까 하는 의혹이 또 다시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너무도 탐정소설적 공상일지 모르나 저 해월이가 김수일이란 이름으로 부인과 교제……』
하고 말끝을 채 잇기도 전에 공작부인 주은몽의 입에서는 돌연
『하하하하 하하하하 ……』
하는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임경부는 퍼붓는 듯 쏟아지는 은몽의 웃음 소리가 자기의 너무나 어리석은 공상을 조소하는 줄 문득 깨닫고 일순간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은몽은 서너번 연거퍼 웃고나서
『그것은 너무 지나친 공상이지요. 아무리 제가 눈이 멀었다고 ──』
사실 탐정소설 같은데는 극도로 진보된 정형외과(整形外科)의 수술을 이용하여 사람의 용모를 변장한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그것은 결국 소설속의 이야기가 아닌가 은몽이 . 백도사에 피서 갔던 것이 해월이 열 여덟 살 때라 하니 그 후 십 여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하더라도 그리고 제아무리 변장을 재주있게 하였다 하더라도 더구나 잠깐 동안이면 모르거니와 근 일년 동안이나 교제해 오는 동안 반드이 비밀이 탄로될 것은 정한이치가 아닌가. 은 몽이 주책없이 큰 소리로 웃어 버린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그 때 이층 응접실에서 백영호씨와 혜성전문학교에 희사할 칠십 만 원의 토의를 하고 있던 오상억 변호사는
『그럼 정식발표와 모든 수속은 좀 더 신중히 고려한 후로 하게하고 오늘은 이만 실례 하겠읍니다.』
하면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거 너무 늦어서 미안하네.』
백영호씨가 오상억을 현관까지 전송하였을 때는 벌써 삼청동공원 일대에 짙은 암흑의 장막이 소리없이 덮어 누르고 있을 때였다.
이리하여 백영호씨가 이랫층 침실로 들어가니 거기는 독자 제군도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김수일의 편지를 둘러싸고 임경부 이하 여러사람이 흥분한 얼굴로 백영호씨를 쳐다본다.
임경부는 결국 이 한장의 편지로 말미암아 아무런 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다만 부하 한명을 금강산 백도사에 파견시켰던 전말을 보고하고 백영호씨의 현관을 나섰다.
임경부는 팔뚝 시계를 드려다 보았다. 여덟시 사십 분이다. 밖은 침침하다. 소낙비가 쫘하고 금시라도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다.
넓은 정원을 거쳐서 전등이 어슴프레 비치는 정문을 나섰을 때 임경부는 문득 저편『풀』에 접한 담장밑에 검으스름한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 순간 임경부의 머리를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한개의 무서움 ──
『도승 해월이?』
하고 마음속에 외쳤을 때는 벌써 그 괴상한 그림자는 저편 솔밭새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을 때였다.
무서운 악마 ── 귀신과도 같은 저 백도사의 복수귀는 다시 그 커다란 마수를 펴기 시작하는 것이다.
『위험!』
주은몽의 신변에는 지금 몸서리치는 위험이 절박했다. 어느 때 어디서 저 뱀과 같은 해월이가 또 다시 시퍼런 비수를 던질 것이냐?
임경부는 발걸음을 도리켜 다시 현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요란한 초인종 소리에 뛰어 나오는 남수를 붙잡고 이제방금 담 밑에서 본 수상한 그림자의 이야기를 한 후 안으로 들어가 ×× 서에 전화를 걸었다.
『박태일군인가? 지금 곧 경찰 십 여명을 데리고 이리로 오게. 올 때에는 될 수 있는대로 소리를 내지 말고 정문앞까지 와서 나를 기다리게.』
임경부의 이 흥분된 어조는 사실 사람들의 마음을 여지없이 서늘하게 하였다.
종이장처럼 핏기를 잃은 은몽의 하얀 얼굴, 그 옆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정란, 늙은 백영호씨의 당황한 거동, 남수의 흥분된 얼굴 ……
『그러나 그리 염려할 것은 없읍니다. 이제 곧 경찰대가 도착할테니 ── 』
임경부는 그리고 들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캄캄한 밤이다. 꽃밭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아이 무서워!』
정란은 임경부가 열어 젖힌 달창 밖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어둠속에서 쏜살같이 날아 들어오는 한자루의 칼날을 불현 듯 머리에 그려보고 몸을 떨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무섭지 않아요?』
그러나 은몽은 대답대신 정란의 몸을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 역시 컴컴한 창밖을 뚫어질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더니 은몽은 정란의 귀에다 입을 대고 가만이 속삭이는 것이다.
『정란! 나는 멀지않아 그 중놈의 손에 죽을 사람이야. 나는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있어. 그놈이 나를 죽이려고 결심한 이상 나는…… 나는 도저히 그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단 말이야.』
『어머니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마음을 좀 더 굳게 가져야지!』
『아니야! 그것은 정란이가 아직도 그 놈을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거야.
뱀 앞에 개구리 고양이 앞에 쥐새끼 같은 나의 목숨!』
『어머니, 어머니!』
『아아, 저주 받은 인생! 저주 받은 나의 일생!』
은몽은 무섭다기 보다도 슬퍼서 느끼는 것이다. 두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이윽고 경찰대가 도착하였다. 임경부는 경찰대를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수상한 그림자가 자취를 감춘 숲사이를 수색하게하고 한패는 담장을 빙 둘러쌌다. 제 아무리 날개를 가진 해월이라도 이 엄중한 경비망을 뚫고 들어올 수는 없으리라.
임경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아, 아무 염려 마시고 마음을 푹 놓고 주무십시요.』
하고 은몽과 정란을 침실에 남겨두고 바로 옆방인『아뜨리에』로 들어가서 백영호씨 부자와 밤이 깊도록 은몽의 신변을 지키기로 하였다.
밤은 점점 깊어간다. 아홉시, 열시, 열 한시, ── 열 한시가 조금 지나서부터 한방울 두방울 내리던 비가 갑자기 쏴 하고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억센 빗줄기는 바람과 함께 들창을 덜그렁 덜그렁 두드린다. 음침한 밤이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걷잡을 수 없는 초조와 불안을 마음에 느끼며 저도 모르게 깊고깊은 공포의 연못 속으로 잠겨드는 것이다.
남수는「커 - 텐」을 젖히고 폭풍우가 쏟아져 내리는 창밖을 한번 휘 돌아보며
『경부께서는 아까 보신 그 수상한 그림자란 결국 착각 ── 잘못 보신 게 아닙니까?』
하고 묻는 말에 임경부는 적지않게 불쾌한 얼굴 빛으로
『잘못 볼리가 있소? 확실히 이 두눈으로 담장밑에 엉거주춤히 쭈그리고 앉은 사람의 시컴은 그림자를 보았는데 ──』
임경부가 변명하면 할수록 남수는 그의 경솔한 태도를 마음으로 힐란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수만이 아니라 백영호씨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동안 숲속를 수색하던 경찰대로부터 두번이나 보고를 전해 왔으나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열 두시를 친다. 비는 아직도 쉴새 없이 내리고 있다.
침실에서 들려오던 정란과 은몽의 이야기 소리도 이제 끊긴 것을 보니 아마 잠이 든 모양이다.
백영호씨는 그 때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이제는 잠이 들었겠지 어디 ──』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침실로 통하는 「또어」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끝끝내 자기방으로 돌아가길 무서워하던 정란은 은몽의 침대위에서 함께 고요히 잠들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백영호씨는
『앗!』
하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 대체 어찌 된 일인가?
한자루의 비수가 붉은 봉투와 함께 바로 침대 옆 벽 위에 박혀 있지 않은가? 벙싯하게 열린 들창문 ──
復讐鬼[복수귀]의 悲歌[비가]
편집『왜 그러시오?』
『뭘 그리 놀라시오?』
백영호씨의 놀란 목소리에 임경부와 남수는 일시에 그렇게 부르짖으며 침실로 달려갔다.
『아! 들창이 열리었구나!』
기다리던 것이 종내 왔구나!……하고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임경부는 뛰어가 들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박군!』
하고 고함을 쳤다.
『네?』
박태일 부장의 굵다란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날아온다.
『정문에 무슨 이상 없는가?』
『없읍니다!』
『없다? 없을리가 있나? 사람을 들인적은 없는가?』
『없읍니다. 개새끼 한마리 들이지 않았읍니다.』
『그럴리가 있나? 그러면 속히 정문을 잠그고 정원을 뒤져라! 각각 무장(武裝)을 하고 권총을 꺼내들어야 한다! 알겠나?』
『알겠읍니다.』
『그러면 한시 바삐 뒤져라! 일분 일초라도 늦어서는 아니된다!』
『네!』
이리하여 임경부가 부하들에게 정원 수색 명령을 벽력같이 내리고 있는 사이에 잠들었던 은몽과 정란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들 그러세요?』
은몽과 정란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눈을 부비면서 방안을 두루 돌아다보다가
『아 칼?』
하고 남수가 벽에서 뽑아진 단도를 보고야 비로서 자기 몸에 절박한 위험을 전신에 느낀 듯
『아, 무서워』
하고 서로 껴안으면서 눈을 부릅떴다.
『걱정말아! 걱정할 것 없어!』
백영호씨는 은몽과 정란의 어깨를 번갈아 어루만지며 조용히 일렀으나 그러는 백영호씨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두려움이 목덜미롤 내려누르는 것 같았다.
대관절 『 어떻게 된 일이예요? 칼은 어디서 난 칼이예요?』
은몽은 한손으로 남편의 팔목을 부여 잡으면서 물었다. 백영호씨는 애처로운 듯 젊은 아내의 손을 두손으로 꼭 잡아쥐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세히 설명 한 후
『지금 경찰들이 정원을 수색하는 중이니 무슨 소식이 있을테지. 마음을 굳게 가져야 하오. 아무 염려 말고 마음을 편안히 가져야지 ──』
그 때 임경부는 은몽과 정란을 향하여
『물론 주무실 때 들창을 닫으셨지요?』
『네, 닫았어요. 그러나 잠그진 않았어요.』
『몇시 쯤 잠들으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요. 지금이 열 두시 삼십 분이니까 ──』
『글쎄요. 정란은 저보다 먼저 잠들고……정란이 잠든 것이 몇시었지?』
『나는 열 한시 치는 소리를 꿈결처럼 들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잠든 것은 열 한시 반 쯤 되었을까요. 정란이가 잠든 후 조금 있다가 저도 잠들었으니까요.』
임경부는 잠깐동안 질문을 멈추고 생각한다. ── 그 놈이 창문을 열고 비수를 던진 것은 대략 열 한시 반에서 부터 열 두시 까지다, 그러면 그 놈은 대관절 어디를 어떻게 정원으로 숨어 들었을까? 높은 담장도 담장이거니와 그 담장을 지키고 있던 여러 경찰들의 눈을 어떻게 속이었을까? 정문으로는 개 한마리 드나들지 않았다고 박부장은 단언하지 않는가? 이상한 일이다!
지금 전등밑에서 칼에 꽃히었던 붉은 편지를 양손에 펴들고 한자한자 한줄 한줄을 충혈된 눈동자로 더듬어 읽는 남수의 얼굴빛을 보라! 창백한 양볼, 경련하는 입술!
남수는 돌연 얼굴을 번쩍 들고 무서움에 어린 시선으로 천정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며 떠들지 말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남수는 대체 편지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남수는 무슨 이유로 미친 사람처럼 멍하니 천정만 쳐다보는가? 남수의 수상한 태도에 사람들도 이유없이 천정을 쳐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높다란 천정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빠 무엇을 그리 쳐다보는 거예요?』
종래 정란은 무서움을 참지 못하고 오빠를 불렀으나 남수는 여전히 떠들지 말라고 손을 휘저으면서 물끄러미 천정을 바라다 볼 뿐이다.
『대체 무슨 편지길래 ──』
임경부가 남수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아 들고 읽으려 할 때 남수는 임 경부의 귀에다 입을 대고 가만히 속삭이었다.
『이방 바로 윗층이 뭔지 아시요?』
임경부는 이상한 충동을 느끼며
『뭡니까?』
하고 다시 천정을 쳐다보았다. 하얀 천정에는 여기저시 회칠이 벗어져 어떤 곳은 싯누렇고 어떤 곳은 검으특특하게 변색한 널판자가 들어나 보일 뿐이요, 이렇다할 무슨 변동은 보이지 않는다.
『뭐가 보입니까?』
임경부는 또 한번 남수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창밖은 아직도 폭풍우다. 요란한 우뢰소리와 함께 번개불이 번쩍하고 빛난다.
『아버지 무서워! 무서워서 못견디겠어요!』
정란은 아버지 품안으로 몸을 비비며 파고든다.
『오빠 오빠!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예요? 편지에 무엇이 씌었어요?』
무서운 침묵을 일부러 깨뜨려 버리려는 듯 정란의 쇠소리같은 목소리가 발악을 하였다.
남수는 여전히 뭔가 발견하려는 것 처럼 머리 위를 쳐다본다. 은몽도 쳐다본다. 아니 거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발바닥이 얼어 붙은 것 처럼 천정을 바라보고 움직일줄을 잊은 것 같이 보였다.
그 때 임경부는 참다못해 손에 들었던 편지를 백영호씨 곁으로 가지고 와서 읽기 시작하였다.
전등이 껍벅껍벅 꺼진다. 바람이 센 때문이리라.
은몽아! 하고 내가 네 이름을 정답게 부르면 너도 해월아! 하고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던 십 삼년 전 옛날을 그리면서 이 붓을 드노니 백영호씨 부인이라고 새삼스러이 존칭을 부치지 않는 나를 그리 미워하지 말고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기 바란다.
은몽아! 아아 은몽아! 나는 마침내 너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나의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어버린 너를, 그리고 나로 말하면 영원히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너를 종내 찾아내고야 말았다는 이 간단한 한마디가 결국 이 기나긴 편지의 줄거리며 생명이라는 것을 미리부터 알려둔다.
은몽아! 나는 종내 너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아니 자세히 말하자면 내가 너를 발견한 것은 지금부터 오년 전 네가 공작부인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타났을 때였다 비로봉밑 . 산골짜기에서 하늘만 쳐다보고 자라난 백도사의 애기중 해월이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우물속의 개구리였다. 그 우물 속의 개구리가 짓밟힌 순정을 하소할 길이 없어 비가오나 눈이 오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아 네가 나에게 준 그 빨갛게 젖은 입술을 기념하던 바위 위에서 저기가 서울이라고 네가 나에게 가리켜주던 그 머나먼 하늘을 멍 ― 하니 바라보며 소리없이 눈물짓기를 삼백예순 닷새하고 또 두달 동안 —— 언제나 올까 언제나 올까? 하고 가다리는 마음은 백마를 타고 하늘을 달리는 듯, 그러나 은몽은 끝끝내 오지 않았다. 너와 나의 두 그림자를 꺼꾸로 그리던 개울물은 오늘도 흐르건만…… 나는 울었다. 커다란 소리로 통곡을 하며 「은몽아!」하고 주먹으로 바위를 두드리면서 울었단다. —— 그러나 울어서 울 너라면 울기 전에 왔으리라. 바랑메고 목탁들고 백도사를 떠나던날 밤, 소년중 해월의 가슴에는 조선 십 삼도를 편답하여, 아니 전세계를 답파하여서라도 은몽을 찾으리라, 남의 순정을 앗아가고 가져올 줄 모르는 요망스런 계집을 찾아 내고야 말리라는 결심이 굳게굳게 못박혔던 것이다.
이리하여 산로수로 풍우를 겪여가면서 서울 다방골 너의 집을 찾았을 때는 벌써 너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너희가 살고 있다던 그 집에는 낯설은 사람이 나를 수상스럽다는 듯 쳐다볼 뿐이었었다.
그러면 은몽은 자기 처소까지 나에게 거짓말을 하였을까 하고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복받쳐 올라오는 것이었다. 오냐, 한장의 편지조차 없이 가버린 너를 잊어야만 당연한 나이어늘 잊자해서 잊어버릴 나라면 어찌 팔년 동안이나 방방곡곡을 편답 했으랴.
은몽아! 팔년 동안이라는 기나긴 세월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을까?
나는 벌써 철모르는 애기중이 아니었다. 너를 연모하면서 눈물짓기를 시(詩)로 알던 소년시대는 지나갔다. 은몽아! 하고 통곡하면서 주먹으로 바위를 두드리던 시절은 영원히 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복수! 복수! 복수의 칼날 밑에서 사지를 바들바들 떨고 있는 너를 눈감고 상상할 때 나는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할 줄 알았다. 사랑과 미움에 얽히고 얽힌 원한의 칼날이 너의 부드러운 젖가슴을 찌르고 들어가는 양을 머리에 그려볼 때 불타는 나의 가슴속은 시원하고 통쾌하다.
은몽아! 나는 마침내 너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아아, 이 어찌된 일인가 명성이 높은 무희 공작부인의 전신(前身)이 저 백도사에서 해월이라는 순진한 애기중을 희롱하기를 즐겨하던 요부 주은몽 그 사람이었을 줄이야 어찌 믿었으랴! 나는 참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복수심에 채찍질하면서 너에게 글월을 보내어 조용히 만나기를 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지나도 너는 끝끝내 오지 않았다. 오냐 두고 보아라!
나는 그 때부터 어떻게 복수하여 나의 괴로운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있을까? 밤을 낮으로 알고 나는 복수의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운이 좋은 너는 고의론지 우연인지 구미로 무용행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벌써 복수귀로 변해버린 해월은 낙심하지않고 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너는 돌아왔다. 조선민중이 세계적 무희 공작부인에게 찬양과 갈채의 박수를 보낼 즈음 서울 한구석에 맹수(盲獸)처럼 잠복하여 복수의 칼날을 갈고있던 해월을 너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였으리라 —— 기회는 왔다!
사월 초 열흘 밤, 세상이 흠모하는 공작부인의 생일날 밤이다. 가장무도회 —— 그것은 나에게 다시 없는 절호의 「찬스」였다. 그러나 너는 모르리라, 내가 어떻게 무도회장에 숨어 들어 갔으며 어떻게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던가를 너는 모르리라. 나에게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 어리석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초인적인 마력을 가지고 있다. 보라!
부민관 결혼식장에서 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나의 재주를 보라! 비록 가장 무도회에서는 실패를 하였으나 멀지 않아 복수의 칼이 너의 젖가슴을 찌르리라!
은몽아! 너는 이것을 결코 헛된 위협이라고 생각하여서는 아니된다. 나의 위대한 마시(魔視)는 네가 오늘 하루동안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하였는지 전부 엿보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그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다만 네가 오늘 하루동안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하였는지 그것을 정확히 적어서 나의 위대한 힘을 네게 증명하고자 하노라.
사람들은 그때 불현 듯 편지에서 시선을 들어 서로 서로 얼굴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란 얼굴과 무서움에 찬 눈동자 —— 사람들은 감히 입을 열어 무어라고 말할 용기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자기가 입을 떼는 순간 무엇인가 알지 못할 하나의 커다란 힘이 목덜미를 꽉 누른것 같았다. 숨소리 뿐이었다.
창밖은 여전히 억센 푹풍우다. 빗소리, 바람소리, 우뢰소리, 번갯불 —— 천지가 개벽하는 듯 최후의 심판이 다가온 듯 전세계를 휩쓸어 버리려는 것이 아닌가.
남수는 아직도 발자욱 소리를 죽여가지고 천정을 이리저리 뚫어질 듯 쳐다보며 방안을 돌아다닌다.
임경부의 극도로 흥분된 숨결, 어린애 처럼 울상을 지은 정란, 늙은 백영호씨의 경련을 일으키는 양볼, 그리고 송장과도 같이 얼굴에는 핏기라고는 한점도 없는 은몽은 일순간 정신을 잃고 침상위에 쓸어지려는 자기 몸뚱이를 간신히 일으키며 중풍환자 처럼 떨리는 손을 펴서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은몽아! 나는 지금부터 너의 일기(日記)를 내손으로 대신하여 기록해 보겠노라! 오늘 아침 너는 지금 정란이와 같이 누워있는 그 침대에서 눈을 뜬 것이 일곱시 사십 삼 분이다. 그러나 너는 여덟시 십 오분까지 자리에 누은채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가?…… 십 삼년 전 백도사에서 홍안미소년 해월이와 놀던 생각을 하였다. 절간뒤 바위 위에서 처녀와 동정을 바꾸던 광경을 천정에 그려보며 너는 미소하였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순정시대(純情時代)를 그리워하는 미소인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찰나 —— 너는 뒤를 이어 더럽다는 듯이 떠오르는 환영을 비웃어 버렸다. 그 비웃는 웃음 끝에 알지 못할 공포를 느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다. 그때 백영호씨가 들어와서 치솔과 치약을 갖다주며 빨리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조반을 먹자고 청하였다. 너는 그때 이 친절한 늙은 신랑에게 무척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네가 아직 이 친절한 늙은 신랑과 잠자리를 같이 안하였다는데서 생기는 일종에 동정의 마음이었다. 결혼식장에서 부터 공포와 우울에 잠겨있는 가엾은 아내를 괴롭히지 않겠다는 가장 이해 많은 백영호씨의 마음씨를 기화로 여기고 너는 아직까지…… 것이다. 그것은 네가 김수일이란 화가를 사모하고 있는 때문이 아닌가?
조반을 먹고 너는 곧 변소로 들어가서 약 십분 동안 뒤를 보았다. 나오면서 손 씻을 물이 없다고 어멈에게 일렀다. 열 한시 십 분에 백영호씨와
「아뜨리에」로 들어가서 석고상 「여인군상」을 감상하였다. 그 때 너는 퍽 훌륭한 작품이라고 칭찬하여 남편을 기쁘게 하여 주었다. 오후 한시 반에 점심을 먹고 (너는 달걀 두 알과 「커피」 한잔을 마셨을 뿐이다.) 너는 정란과 같이 삼층 정란의 방으로 올라가 정란이가 「피아노」로 「항가리안·라 부쏘디」를 치는데 맞추어 너는 약 이분 동안 춤을 추었다. 오후 네 시에 오상억 변호사가 찾아와 이층 서재에서 백영호씨와 칠십만원 제공 문제를 토의할 때 너는 아랫 층 침실에서 정란에게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너는 나를 악마라고 부르며 저주하였다. 다섯 시 반 남수가 김수일의 편지를 가지고 뛰어 들어왔다. 여섯시 오십 분에 임경부가 찾아왔다. 임경부는 네게 대하여 김수일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 그 중 김수일과 어떤 정도의 교제를 하였는가고 물은 임경부의 질문에 너는 발칵 화를 내어 정도 넘치는 질문이라고 톡 쏘았다 해월이와 . 김수일이 같은 인물이 아닌가하고 임 경부가 물었을 때 너는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소리를 높여 『하하하하……』하고 비웃었다.
임경부는 부하 박태일인가 하는 순사부장을 금강산 백도사에 파견하여 나에 관한 조사를 명령했던바 나하고 동거하던 늙은 주지 법능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내가 어디로 갔는지 알길이 없다고 이야기하였다. 그 때 오상억 변호사를 전송하고 백영호씨가 들어왔다. 여덟시 삼십 오 분에 임경부가 돌아갔다.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임경부는 다시 뛰어 들어오면서 컴컴한 담장 밑에서 이상한 그림자를 보았다고 보고한다. 경찰대가 왔다. 그러나 해월은 보이지 않는다. 폭풍우가 몰아친다. 임경부와 남수와 백영호씨는 방
「아뜨리에」서 지키고 있다. 너는 정란과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은몽아! 너는 무섭지 않은가? 이만했으면 너는 충분히 나의 귀신같은 힘을 짐작하리라. 이 편지는 칼에 꽂혀 일분 후에는 네가 잠들고 있는 침대 옆 벽 위에 박힐 것이다.
은몽아! 그러면 나는 어디 있느냐? 어디서 지금 무엇을 하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너는 그것을 무척 알고 싶어할 것이다. 나는 여기 있다! 나는 항상 너와 같이 있는 것이다.
복수귀 해월로 부터 나에게 절망과 암흑을 던져준 계집에게 이리하여 복수귀 해월이가 주은몽을 저주하는 길고 긴 「엘레 ― 지(悲歌 [비가])」는 끝났다. 아아 이 얼마나 무서운 편지인가. 사람들은 눈을 들어 서로 얼굴을 쳐다볼뿐, 묵묵히 말이 없다.
은몽의 하 ― 얀 이마에는 구슬같은 땀이 비오듯이 흐른다. 쓸어지려는 상반신을 백영호씨의 팔에 의지하고 무서운 눈동자로 천정을 쳐다본다.
다른 사람들도 불현 듯 은몽의 시선을 따라 머리위를 올려다 보았다. 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무슨 커다란 힘이 그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다.
『그놈은 어디 있는냐?…… 은몽의 거동을 대관절 어디 숨어서 그 처럼 정확히 엿보고 있을까?』
사람들은 다 같이 이 동일한 의문에 가슴이 섬짓했다.
『이방 윗층이 무슨 방입니까?』
임경부는 그 때 용기를 내어 백영호씨를 쳐다보았다.
『미술품 수집실(美術品蒐集室)입니다.』
『미술품 수집실?』
그 때까지 천정 어느 구석에서 뱀과 같은 악마의 눈초리를 발견하려는 듯 위를 쳐다보고 있던 남수는 임경부의 옆으로 다가서면서 악마는 틀림없이 『 윗층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도……』
하고 말끝을 잊지못한채 경부의 팔목을 슬그머니 흔들었다.
『아이 무서워! 아버지!』
정란은 오빠의 얼굴에서 돌연 걷잡을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부르짖는다.
『오빠! 오빠의 얼굴이 더 무서워!』
그 순간 전등불이 껌벅 꺼진채 켜지지를 않는다. 암흑!
『악 ──』
무서움이 덮어누르는 정란과 은몽의 아우성소리 ──
『정전(傳電)인가?』
『빨리 불을 켜라!』
『어멈! 양초를 가져와요!』
사람들은 도승 해월의 그 저릿저릿한 손가락을 등뒤에 감각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떠들어 대기 시작하였다.
『빨리 불을 켜라!』
『빨리 빨리!』
『「스윗치」를 눌러 봐!』
암흑 속에 숨어있는 복수귀의 두 눈동자! 그 무서운 눈동자가 노리고 있는 대상은 누굴까?
『여러분! 너무 떠들지 마시오!』
임경부의 목소리다.
밤은 깊어간다. 끊임없이 퍼붓는 빗줄기, 산떼미를 떠 올듯 싶은 바람 ─ 꺼진 전등은 다시 켜질줄을 모른다.
어물거리는 공포를 가득 싣고 온 방안을 빈틈없이 점령한 어둠의 세계, 지옥의 나라 ──
『어멈! 빨리 불을 가져와요!』
정란의 어지러운 부르짖음이 더 한층 처참하다.
그러나 어멈이 촛불을 가져오기 전에 꺼졌던 전등은 다시 방안을 환하게 밝히었다. 정전인가? 그렇지 않으면 누가 고의로 「스윗치」를 끊었다 이었는가? ……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그런 의문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그 때 정원을 수색하던 박태일 부장이 뛰어 들어오며
『정원은 아무리 뒤져보아도 수상한 점은 하나도 없읍니다.』
하고 보고를 하였다.
『그럴리가 있나?』
사람들은 일시에 그렇게 반문하는 한편 무의식 중에 시선을 또 다시 천정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박군!』
임경부는 긴장한 얼굴을 박부장에게 돌리면서 명령하는 것이다.
『네?』
『「피스톨」을 꺼내드리고 나를 따라오게! 떠들지 말고!』
『네!』
그리고 임경부는 백영호씨를 향하여
『우리들은 이층 미술품 수집실을 조사할테니 우리가 내려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시요. ── 자 남수씨 이층으로 안내하여 주시요.』
이리하여 선봉선 남수의 뒤를 따라 「피스톨」을 쥔 박태일 순경와 임 경부가 이층으로 올라갔다.
임경부는 미술품 수집실을 임검하기 전에 서재로 들어가서 전기회사에 전화를 걸어보니 약 이분 동안 삼천공원 일대에 정전이 있었다고 한다.
『역시 정전이다!』
사람들은 약간 마음이 놓이었으나 미술품 수집실 앞까지 왔을 때는 시커먼 유령이 문을 박차고 밖으로 와락 뛰어나오는 듯한 환영을 느끼었다.
남수는 드디어 문을 열었다. 캄캄한 어둠속, 방안은 죽은 듯이 조용하다.
써늘한 공기가 이마를 스치는 것이다.
박부장은 암흑을 향하여 「피스톨」을 겨누었다.
『움직이면 쏠 테다! 해월이! 움직이면 목숨이 달아난다!』
침착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약간 떨리는 임경부의 목소리였다.
그때 남수의 손가락이 「스윗치」를 눌렀다. 순간 임경부와 박부장은
『악!』
하고 숨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실로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다.
다섯개의 부처님과 십여 개나되는 석고상이 일시에 이편을 바라보는 것처럼 묵묵히 서 있지 않는가. 그 외에 담벽을 반 둘러싼 진열장에도 대소 무수의 입상(立像) 좌상(坐像)이 무려 수 백 개 ──
『허어!』
임경부는 감탄의 눈을 부릅뜨며 한걸음 한걸음 안으로 들어갔다. 해월은 보이지 않는다. 불상 앞을 지날 때마다 싯누런 구리손이 덥썩 머리를 누르는 것 같은 생각 뿐이었다.
그때 꺼꺼부등하고 방바닥을 드려다보며 걷고 있던 남수가 돌연
『임경부!』
하고 고함을 쳤다.
『왜 그러시우?』
『이것 좀 보시요!』
임경부가 부리나케 달려가보니 십전짜리만한 구멍이 뚫어진 방바닥으로 아랫층 침실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것이었다.
『박혔던 매듭(節[절])이 빠진자리로 구려!……가만있자! 최근 이방에 드나든 사람이 누굽니까?』
타는 듯한 임경부의 두눈이 번개처럼 빛나기 시작한다.
『글쎄올시다. 나는 근 두달 동안이나 이 방에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없는데요. 혹시 집의 아버지께서……』
그래서 백영호씨를 데려다 물어보니
『나도 이 방에 들어와본 적이 벌써 한달이나 되었읍니다. 결혼식 전이니까 ──』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이 매듭구멍은 전부터 뚫어져 있었읍니까?』
『아닙니다! 전에는 이런 구멍이 전혀 없었읍니다. 대관절 이 매듭이 언제 빠졌을까?』
백영호씨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허리를 굽혔을 때 남수는 또 한가지 무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임경부! 이것 좀 보시요!』
임경부는 남수 옆으로 뛰어갔다.
『뭡니까?』
『자아 이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시요.』
약 두달 동안이나 청소를 안하고 그대로 내버려둔 이 미술품 수집실에는 희끄무레한 먼지가 방바닥 일면에 자욱하니 깔려있다. 그 자욱하니 먼지가 깔린 방바닥에는 구멍을 중심으로 하고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으나 하옇든 어떤 움직이는 물건이 이리저리로 해매이며 다닌 흔적이 명백히 나타나 있지 않은가!
『그 놈이다!』
『그 놈이로구나!』
사람들은 그 순간 흑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싯누런 부처님과 하얀 석고상이 가득찬 방안을 휘 둘러 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틀림없이 사람이 기어다닌 흔적입니다. 물론 그 놈이 ──』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임경부는 그 놈의 발자욱형태를 발견할 셈으로 방바닥을 유심히 드려다 보았으나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놈은 걸어나닌 것이 아니고 짐승처럼 벌벌 기어 다닌 듯 싶었다.
『두말 할것 없이 이 구멍으로 아랫층을 내려다 보려면 엎드려야만 할 것이니까, 발자욱 형태는 모두 지워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 밖으로 나갈 때도 조심해서 발자욱 형태를 전부 지워 버렸군요.』
이리하여 사람들은 미술품 수집실의 이구석 저구석을 빈틈없이 조사해 보았건만 마수(魔獸)와 같은 해월의 그림자는 또 다시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해월은 대체 귀신인가 사람인가. 귀신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하고 또 한편 무슨 짐승 같기도 한, 마치 반인반수(半人半獸) 반신반인(半神半人)과도 같은 해월이었다.
『그 놈은 대체 어디로부터 들어왔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해월의 이 위대한 힘과 신비로운 재주는 현대의 문명, 현대의 과학을 여지 없이 유린해 버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편지가 침실 벽위에 박힌 것이 길게 잡아도 한 시간 이상은 지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는 박부장 이하 여러 경찰들이 이집을 삥 둘러싸고 있지 않았는가. 어디로 나갔을까?
『아니다. 해월은 아직 이집 어느 구석에 숨어있을 것이다!』
『그렇다! 아직도 집안 한구석에 숨어있을 것이다!』
『그렇다! 온 집안을 뒤져라!』
임경부는 밖에 있는 경찰들을 모두 불러다가 아랫층에서 삼층 꼭대기 까지 그야말로 이잡듯이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허사였다.
시계는 새로 두시, 비는 아직도 폭포처럼 쏟아진다.
은몽과 정란은 절반 정신을 잃어버리고 침대위에서 몸을 떨며 백영호씨 이하 여러 경찰들의 보호아래서 이 무서운 하루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그러나 아아, 이 얼마나 사법주임 임경부의 치욕인가! 침착하고 대담한 임 경부가 오늘밤만은 남달리 흥분하고 남달리 무서워하였다. 복수귀는 그에 눈앞에서 하고싶은 짓을 전부 하지 않았는가……
『유불란!』
그는 그 순간 명탐정 유불란의 조력을 빌지 않으면 안될 것을 생각하면서 분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劉不亂 探偵 [유불란탐정]
편집이 실로 귀신과 같은 복수귀 해월이와 세계적인 무희 공작부인과 명「콤비」는 흥분과 엽기(曄奇)에 궁금해 하던「저 ── 널리스트」들에게 불타는 공명심과 아울러 커다란 자극을 던져 주었다.
이처럼 신비하고 이처럼 무시무시한 복수사건이야말로 탐정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으나 이것이 탐정 소설이 아니고 하계의 생생한 현실이란 사실을 다시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실로 전대미문의 일대괴사(一大怪事)가 아닐 수 없었다.
『보이지않는 악마 해월…… 복수의 칼날 아래에서 떨고 있는 공작부인!』
『조선의 자랑인 무희 공작부인을 한시 바삐 복수귀의 손으로부터 구하라!』
『공작부인의 목숨은 남어지 몇 시간? 자취없이 다가드는 마수의 그림자!』
이와같이 도하의 각 신문지는 최상급의「센세이셔날」한 글자로 독자의 흥미를 부쩍 돋우었다.
『경찰당국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공명심에 노예가 되어 버린 사법주임 임경부여! 귀하는 한시 바삐 그 비열한 공명심을 걷어차 버리고 자타가 공인하는 명탐정 유불란씨의 조력을 구하라! 이 중대사건을 무사히 해결할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유불란씨가 있을 뿐이다!』
점점 위험에 빠져 들어가는 가련한 공작부인의 생명을 구하고자 사회의 대표자인 신문이 명탐정 유불란씨의 출마를 부르짖기 시작한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이상한 것으로 도하의 신문이 그와같이 유불란 탐정의 출마를 부르짖지 않았다면 임경부도 혹시 민간탐정 유불란씨에게 조력을 구했을런지도 몰랐다.
허나 사회정세가 이처럼 자기의 무력을 노골적으로 힐난하고 유불란씨의 출마를 갈망하게 되어버린 지금에 이르러 마지못해 그에게 머리를 숙이고
『도와주십쇼.』
하고 간청해야만 될 자기자신을 생각할 때 임경부의 눈에서는 참으로 피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지금도 바로 그것이다.
순사부장 박태일이 이 삼 종의 신문을 임경부 앞에 펴놓으면서
『경부께서도 벌써 보시었겠지만 시민들의 부르짖음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변한 이 때 당국으로서도 그들의 갈망에 응하는 의미로……』
유불란씨에게 정식으로 조력을 구하는 것이 어떠냐고 임경부의 의향을 물으려 하였으나 박부장은 그만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머리를 숙였다.
임경부의 분노에 찬 눈초리가 자기를 흘겨보는 때문이었다.
내가 감당치 『 못하는 일을 그이면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 자기만큼 경험은 없다손치더라고 유불란의 비상한 상상력과 민첩한 관찰력을 인정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이처럼 자기 부하에게까지 멸시를 당하고보니 임경부의 양볼이 경련을 일으킨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저는 단지 민중의 의향을 상관께 전하였을 뿐이지……』
그 때 서장(署長)이「카이제르」수염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들어왔다. 나이는 사십이 될락말락한 임경부와 동연배의 인물이다.
『요즈음 신문잡지가 대단히 떠드는 모양인데 ────』
서장은「테이블」위에 흩어진 신문지를 뒤적거리며
『임경부, 어떻소? 사건이 더 커지기 전에 유불란군과 일을 같이 해볼 의향이 있다면 오늘 이라도 ──── 아니 지금 이라도 그를 초빙하여서 ────』
임경부는 숨길만 높다.
『그렇게 되면 사건에 대한 책임도 반분이 될 것이며 더구나 소란한 인심을 일시적이나마 진정시키는 의미로 ────』
무거운 공기를 깨뜨려 버리려는 듯 서장은『하하하 ──』하고 쾌할하게 웃었으나 임경부는 묵묵히 대답이 없다.
영리한 서장은 상관으로서 명령한다는 것이 아니고 동료로서 상의한다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사건이 중대하니 만큼 당국으로서도 만반의 준비와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만 될 것이 아니요. 만일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 지금 인기의 촛점에 서 있는 공작주인이 살해를 당하는 날에는 사회의 비난은 오직 경찰당국, 더구나 유불란씨와 타협하기를 싫어하던 임경부께로 쏠릴겁니다. 물론 유불란씬들 무슨 별다른 힘이야 있겠소 마는 하옇든 그이와 일을 함께 하였다는 명목만을 가지고라도 흥분된 사회의 인심을 일시나마 진정시킬 수 가 있다면 다행이니까, 또 당국으로 치더라도 사회의 유용한 기관이라면 이를 잘 이용하는 것이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고 볼 수가 있느니만큼……』
서장의 어투는 임경부가 만일 끝끝내 고집을 부린다면 독단으로라도 유불란씨의 조력을 구하겠다는 것을 암암리에 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못알아차린 임경부도 아니었다.
『그러시오!』
뱉듯이 한마디를 던지고 임경부는 불쾌한 낯으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뱃짱과 정력만은 남 『 못하지않게 가졌건만……임경부도 자부심이 너무 많아서 걱정인 걸!』
하고 박부장을 쳐다보며
『그런데 임경부가 유불란군을 그 처럼 달갑게 생각지 않는 동기는 대체 어디 있는가?……』
『서장께서도 아시다싶이 작년 초가을에 일어난「아파 ── 트 살인사건」
── 저「M데아 ── 트」의「쇼걸」살해사건 말씀입니다. 그 사건에서 유불란씨에게 참패를 당한 이후 부터지요.』
『아, 그「쇼걸」 살해사건 ────』
『그런데 그때 유불란씨가 좀 지나치다면 지나치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농담을 건넨적이 있읍니다.』
『누구에게? 임경부에게?』
『그렇습니다. 그 보다 먼저 임경부는 유불란씨를 가르켜 아직 입술이 샛노란 어린애라고 비웃은 적이 있읍니다.』
『황구지작(黃口之雀)이라고 ────』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처럼 복잡하고 미궁에 빠졌던 사건이 결국 그 황구지작의 손으로 해결을 보지 않았겠읍니까. 임경부도 놀랐었지요. 그래 임 경부께서도 어지간히 유불란씨를 존경한다는 것보다도 장래성이 있는 유망한 청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어느 날 유씨는 임경부 앞에서 말하기를 ──── 탐정이란 결굴 발을 놀리는게 아니라 머리를 놀리는거라고 한마디 톡 쏘았었읍니다.』
『음, 황구지작에 대한 복수로구만!』
『네 그 때부터 임경부는 유씨를 ────』
서장은 자못 흥미를 느끼는 듯이 박부장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던 얼굴을 황급히 가다듬으며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여늬때 같으면 당국이 청하지 않더라도 유불란군은 공명심을 만족시키겠다는 것 보다도 범죄 그 자체에 흥미를 가지고 저 편에서 먼저 사건에 뛰어 드는 것이 상예였건만 이번 사건에는 어찌된 셈인지 유군은 도무지 무대에서 나타나지를 않으니 ────』
하고 말머리를 돌린다.
『글쎄올시다. 언제가는 지나가던 길에 유불란씨를 한번 찾았더니 어딘가 여행을 떠났다고요.』
『어디 전화를 걸어 보게.』
박부장은 수화기를 들고 본국××××번을 불렀다.
『××서 박태일 입니다. 유선생 댁에 계십니까?』
『어째서 찾으시오?』
그것은 유불란씨의 목소리가 아니고 그 집에 있는 젊은 서생의 음성임을 박부장은 잘 알고 있다.
『공작부인 사건에 대하여……』
하고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저 유선생님은 지금 집에 안계십니다. 신문기자들과「인터 ── 뷰」하기가 귀찮으시다고 아침에 나가시어서 밤늦게야 돌아 오신답니다.』
하고 모정스럽게도 전화기를 딸깍하고 끊는다.
박태일부장은 무정스럽게 끊겨버린 전화통을 잠깐 동안 원망스러운 얼굴로 들여다 보고나서
『유불란씨는 지금 집에 안계시답니다.「인터 ── 뷰」하기가 싫어서 밤늦게야 돌아 온다고요.』
하고 서장께 전화의 내용을 보고 하였다. 바로 그 때 ──── 태평동 유불란탐정의 서재에는 지금 한사람의 중늙은이가 커다란 경대 앞에 앉아서 싯누런 노안경을 쓰고 히뜩히뜩한 머리털과 덥수룩하니 자란 수염을 어루만지면서 자기의 얼굴과 풍채를 이모저모로 드려다보다가 드디어 만족한 듯이 우리가 항상 노인네들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온화한 웃음을 한번 빙그레 웃어본다.
그리고는 경대로부터 멀직이 떨어져서 자기의 앞모양 뒤모양을 살피더니 이번에는 왼편 양복장 앞으로 걸어가서 유리문을 열었다.
그것은 모양은 양복장 같았으나 실은 그렇지않고 약 이십 개나 되는 단장이 가지런히 걸려있는 것이다. 그는 그 중에서 한개의 노인용「스틱」을 집어들고 폈던 허리를 약간 굽히면서 주춤주춤하는 걸음으로 다시 경대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도어」밖에서「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들어와.』
하고 그는「노크」에 대답을 하였다. 문이 열리며 이십 이삼세 쯤 되어 보이는 서생이 들어오며
『선생님 지금 ××경찰서 박태일이란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었읍니다. 공작 부인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기에 안계시다는 대답을 하였읍니다.』
하고는 자기의 직분은 다했다는 듯이 곧 밖으로 나가려 했다. 노인은
『잠깐……』
하고 불렀다.
『네?』
『난줄 알겠는가?』
하고 묻는 말에 서생은 그의 아래 위를 살피고서
『제눈엔 그럴 듯 싶어서 그런지 어딘가 낯익은 듯 한데가 없지 않읍니다만 대체로 몰라 볼것입니다. 모자를 쓰시면 더구나 알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말에 그는 어지간히 만족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러면「H그릴」지하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올테니까 만일 무슨 긴급한 사건이 생기거든 곧 전화로 알려주게.』
『네 똑똑히 알아 들었읍니다.』
서생은 다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유불란은 이처럼 가지각색으로 변장을 하고 거리로 나다니기를 무엇보다 즐겼다. 더구나 행길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자기를 유불란인줄 모르고 옆을 지날 때마다 그는 한량없이 기뻐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상 그의 일상 생활에 있어서 빼지 못할 일과인 동시에 또한 무상의 취미였다.
지금도 바로 그것이다. 돈푼이나 있는 중류계급의 중늙이로 변장을 한 유불란은 자기 모양을 한번 더 경대 앞에서 유심히 살핀 후에 주츰거리는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는 골목을 나서서 광화문 네거리를 오른편으로「커 ─ 브」하여 종로로 걷기 시작하였다. 매연이 자욱한 거리거리에는 우유빛 전등불이 꿈결같이 명멸하고 있다. 길거리에서 신문을 팔고있는 소년 옆에는
「공작부인의 목숨은 나머지 몇 시간?」
이런 표제가 길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한다.
그것은 하옇든 지금 종로를 향하여 주츰주츰 걸어가는 유불란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르고 있는 한사람의 수상한 그림자가 있다. 캡을 깊이 눌러쓰고 두 손을 양복 웃저고리에 쓰러 넣고 ── 그러나 유불란은 아무것도 모르고 무심히 걸어간다. 수상한 사나이는 어디까지든지 유불란의 그림자를 놓치지 않고 따르는 것이다.
유불란을 따르는 수상한 사나이와 그런줄도 모르고 자기의 훌륭한 변장에 만족감을 느끼면서 걸어가는 명탐정 ── 두 사람의 거리는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면서 만침내 종로 네거리까지 다다랐다.
그 때 유불란은 오른편 쪽「H그릴」의「도어」를 단장으로 밀어젖히고 층층대를 걸어 지하실 식당으로 들어갔다.
수상한 사나이는 잠깐동안 맞은편 쪽 공중전화통 뒤에 몸을 감추고 「H그릴 로 들어가는 유불란의 」 뒷모양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다가 그도 발걸음을 옮겨「H그릴」지하실 식당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저녁때이건만 식당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십 여명의 손님이 이구석 저구석에 널려 앉아 있다.
유불란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마카로니」와「오므라이스」를 청하여 저녁을 먹기 시작한다. 수상한 사나이는 유불란의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이윽고 유불란은 식사를 마치고 홍차를 마시면서 급사에게 이 삼 종의 신문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할아버지 신문사 사장이신가봐!』
급사 하나가 신문을 가져오면서 낯익은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어째서?』
『신문사 사장이시게 매일저녁 오시기만 하시면 이 신문 저 신문 연구하시지!』
『허어……그렇다. 내가 신문사 사장이다. 허허허……』
유불란은 그렇게 호기있게 웃으면서 이 삼 종의 신문을 펴 놓고 공작 부인에 관한 기사를 대조해가며 읽기 시작하였다.
그때 그의 동정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수상한 사나이는 슬그머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유불란 곁으로 다가오면서 돌연
『유선생이 아니십니까?』
하고 「캡」을 벗어 손에 들었다.
『당신은?』
하고 신문에서 눈을 드는 유불란을 향하여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아 역시 유선생이었읍니까! 이제야 유선생을 붙들었읍니다. 딴은 오늘 아침부터 선생댁 정문 밖에서 선생이 나오시기를 기다렸지요. 그런데 아침부터 지금까지 문밖에서 지켰건만 안으로 들어간적이 없는 노인네가 안에서 나오지 않겠습니까. 옳지 이 노인이 유선생이로구나! 하고……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아차 이거 실례 막십입니다. 저는 ××일보사 사회부에 있는 정대호(鄭大浩)올시다. 참 유선생 처음 뵙겠읍니다. 아 이처럼 유명하신 탐정을 이제와서 뵙게되니 정대호는 도무지 낯을 들 면목이 없읍니다그려. 그런데 저는 전부터 ××서 사법주임 임경부를 상당히 존경해 왔읍니다마는 이번 공작부인 살해미수사건에 관해서는 어찌된 셈인지 우둔하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 아 참 이거 내가 이야기를 들으러 왔나 이야기를 하러 왔나…… 하옇든 이 신비스럽기 짝이없는 살인미수 사건에 대하여 유선생의 명석하신 식견을 하번 피력하여주시면 ××일보사로써 다시 없는 영광이겠읍니다. 뿐더러 경성 칠십 만 시민이 이처럼 유선생의 출마를 고대하고 있는 요즈음, 유선생 개인의 흥미도 흥미일 뿐더러 사회의 이처럼 지극한 갈망을 물리친다 해서야 어디 될법한 이야기겠읍니까? 임경부와의 타협 비타협은 둘째 문제라 치고라도 유선생이 단독행위로서 얻은 견해를 사회에 발표하여 미욱한 백성들의 지향없는 호기심을 바로잡아 준다는 것은 말하자면 식자로서의 권리인 동시에 또한 의무가 아닐 수 없읍니다.……먼저……』
『잠깐……』
유불란은 그때 빙글하고 웃으면서 손을 들어 자기에게도 이야기할 기회를 달라는 듯 상대방을 막았다.
××일보사 민완기자 정대호라는 이름만은 들은바 있으되 이처럼 도도히 흘러나오는 구변의 소유자인줄은 아직까지 모르고 있던 유불란이다. 그는 어지간히 감동하여
『아침부터 저같은 사람을 기다렸다 하시니 대단히 황송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길게 이야기할 틈은 없으나 하옇든 정형의 성의를 존경하여 한가지 사건에 관한 견해를 말씀 드리지요.』
그 말이 유불란의 입으로부터 떨어지자마자 정대호는
『선생의 의견을?』
하고 외치며 희색이 만면하여 분주스럽게 연필과 종이를 꺼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공작부인 살해미수 사건에 관하여 다섯 가지의 「미스테리 ─ 神秘[신비]」가 있읍니다. 그 하나는 명수대 공작부인의 저택에서 열린 가장무도회에서 공작부인을 칼로 찌른, 그 도화역자가 대체 어디로 어떻게 자취를 감추었는가? 그 다음은 이선배란 화가가 태평동 막다른 골목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점…… 또 하나는 김수일이란 화가가 왜 가짜 이름과 가짜 직업을 가지고 공작부인과 교제를 해왔는가? 다음은 부민관 결혼식장에서 역시 질풍과 같이 나타났다 사라진 해월이의 비상한 재주요, 또 한가지 괴상한 것은 해월이란 도승이 마치 귀신과 같이 공작부인의 일거 일동을 어디선가(임경부의 조사에 의하면 이층 미술품 수집실에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만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불란은 거기서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계속하였다.
『실로 이처럼 신비로운 사건은 우리 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범죄사를 뒤져봐도 찾아 볼 수 없는 무서운 사건이 아닐 수 없읍니다. 이 범인의 가슴속에는 보통사람으로서는 추호도 엿볼 수 없는 무서운 계책이 숨어 있는 것 같읍니다. 그는 사람이라기 보다도 사람의 가면을 뒤집어 쓴 짐승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힘을 전연 무시해 버릴 수 있는 초인적 재주를 가진 귀신이거나……』
그 때 정대호가 유불란의 말을 가로 막았다.
『유선생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십니까?』
『나는 학자입니다. 다만 이 사건을 외관으로만 본다면 그와같은 신비의 껍질을 쓰고 나타났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유선생이 지금 말씀하신 그 다섯가지의 신비에 대하여 제가 묻겠읍니다. 첫째로 공작부인을 해친 도화역자가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 점이 이 사건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포인트」지요. 그 점만 풀린다면 남은 모든 신비는 스스로 풀릴 것입니다. 그러나 나 역시 임경부와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 임경부는 해월이와 김수일이란 가짜 화가가 같은 인물이라고 의심하고 있읍니다만 유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네 그 점만은 좀 임경부의 의견과 다르지요. 아니 나는 단언할 수 있읍니다. 김수일이와 해월이는 결코 동일한 인물이 아닙니다.』
『거기 대한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요.』
『그건 이 자리에서는 말 할 수 없읍니다.』
『그러면 이 선배라는 화가는 또 어떻게 보십니까?』
유불란은 잠깐 동안 자기의 착잡한 사색을 가다듬는 듯 눈을 감았다 뜨면서
『그렇지 않아도 착잡다단한 이 사건에 김수일과 이선배라는 화가가 뛰어 들었기 때문에 사건은 한층 더 복잡성을 띄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 선배란 화가에 관해서도 단지 결론만을 말해드리지요.…… 이선배는 결코 범인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째서 그는 태평동 골목에서 연기처럼 사라졌읍니까?』
『글쎄올시다. 그 점에 대해서는 지금 말해 드릴 수가 없어서 대단히 섭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회견기가 신문지상에 발표된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단 한마디 ××서 사법주임 임경부에게 충고할 말이 있읍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사건에 있어서 김수일이란 인물과 이선배란 인물을 전혀 염두에 넣지 말고 다만 저 해월이란 도승만을 목표로 하고 수사를 진행하라는 부탁입니다.』
이리하여「H그릴」지하실 식당에서 유불란과 정대호가 마주 앉아있는 바로 그 시각에 삼청동 백영호씨의 , 저택에는 상상만 하여도 저릿저릿한 복수귀 해월의 시컴은 마수가 뻗기 시작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