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백과
위키백과
위키백과에 이 글과 관련된
자료가 있습니다.

서문(序文)

편집

대저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변함없는 분명한 이치이다. 지금 세계는 동서(東西)로 나뉘어져 있고 인종도 각기 달라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일상생활에 편리한 실용기계 연구도 농업이나 상업보다는, 신 발명품인 전기포(電氣砲 : 기관총), 비행선(飛行船), 침수정(浸水艇 : 잠수함) 등 모두 사람을 상하게 하고 사물(事物)을 해치는 기계에만 치우치고 있다.

청년들을 훈련시켜 전쟁터로 몰아넣어 수많은 귀중한 생명들을 희생물(犧牲物 : 신에게 제사지낼 때 쓰는 짐승, 소, 돼지, 양 따위)처럼 버려, 피가 냇물을 이루고, 고기가 질펀히 널려짐이 날마다 그치질 않는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마음이거늘 밝은 세계에 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뼈가 시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 근원을 따져보면 예로부터 동양의 민족들은 다만 문학(文學)에만 힘쓰고 제 나라만 조심스레 지켰을 뿐이지 도무지 한 치의 유럽 땅도 침입해 빼앗지 않았다. 이는 오대주(5大洲) 위의 사람이나 짐승, 초목까지 다 알고 있는 바 이다.

그런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가까이 수백 년 사이에 도덕(道德)을 까맣게 잊고 나날이 무력을 일삼으며, 경쟁심을 키워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가 더욱 심하다. 그 폭행과 잔인한 해악이 서유럽(西歐)이나 동아시아(東亞) 어느 곳에나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악이 차고 죄가 넘쳐 신(神)과 사람이 다 함께 성을 내게 되었다.

이에 하늘이 한 매듭을 짓기 위해 동해 가운데 떠있는 조그만 섬나라 일본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강대국 러시아를 만주대륙에서 한 주먹에 때려눕히게 하였으니, 누가 능히 이런 일이 있을 줄 헤아렸겠는가. 이것은 하늘에 순응하고 땅의 배려를 얻은 것이며 사람의 정에 응답하는 이치이다.

당시에 만일 한(韓), 청(淸) 두 나라 국민 상하가 일치해서 전날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를 도왔다면 일본은 큰 승리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나 그것을 어찌 예상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한, 청 양국 국민은 그러한 행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일본군대를 환영하고 그들을 위해 운수(運輸) 치도(治道) 정탐(偵探) 등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거기에는 두 가지 큰 사유가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開戰)할 때, 일본천황의 선전포고문 중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공고히 한다' 했으니. 이 같은 대의(大義)가 청천백일(靑天白日)의 빛보다 더 밝아 한(韓) · 청(淸) 인사는 지혜로운 이나 어리석은 이를 막론하고 일치동심해서 복종했음이 그 하나이다. 또한 일본과 러시아의 다툼이 황백인종(黃白人種)의 경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지난날의 원수졌던 심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고 도리어 큰 하나의 인종 사랑 무리(愛種黨)를 이루었으니 이도 또한 인정의 순리라 가히 합리적인 이유의 다른 하나이다.

통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 년 동안 행악하던 백인종의 선봉을 북소리 한 번에 크게 부수었으니 가히 천고에 희귀한 일이요 만방이 기념할 자취이다. 당시 한국과 청국 양국의 뜻있는 이들이 기약 없이 함께 기뻐해 마지않은 것은 일본의 정략(政略)이나 일을 헤쳐나감이 동서양 천지가 개벽한 뒤로 가장 뛰어난 대사업이며 시원스런 일로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슬프다! 천만 번 의외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한 이후로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하며 어질고 약한 같은 인종인 한국을 억압하여 조약을 맺고, 만주 창춘(長春) 이남의 조차(祖借)를 빙자하여 한국을 점거하고 말았다. 세계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의심이 홀연히 일어나서 일본의 위대한 명성(名聲)과 정대한 공훈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만행을 일삼는 러시아보다 더 못된 나라로 보이게 되었다.

슬프다! 용과 호랑이의 위세로서 어찌 뱀이나 고양이 같은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와 같이 좋은 기회를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안타깝고 통탄할 일이로다.

동양 평화와 한국 독립에 대한 문제는 이미 천하만국 사람들 이목에 드러나 그들은 금석(金石)처럼 믿게 되었고 한 · 청 두 나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음에랴! 이러한 사상은 비록 천신(天神)의 능력으로도 소멸시키기 어려운 것이거늘 하물며 한두 사람의 지모(智謨)로 어찌 말살할 수 있겠는가.

지금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西勢東漸) 환난은 동양 사람이 일치단결해서 극력 방어함이 최상책이라는 것은 비록 어린아이일지라도 익히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일본은 이러한 대세를 돌아보지 못하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치고 우의(友誼)를 끊어 스스로 방휼지세(蚌鷸之勢 :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물고 물리며 다투는 형세)를 만들어 어부(漁夫)를 기다리는 듯 하는가. 이로써 한 · 청 양국인의 소망은 크게 깨져 버리고 만 것이다.

만약 일본이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만 날로 심하게 한다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소리가 한 · 청 두 나라 양국인의 폐부(肺腑)에서 용솟음쳐 상하 일체가 되어 스스로 백인(白人)의 앞잡이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 동양의 수억 황인종 가운데 수많은 뜻있는 인사와 정의로운 사나이가 어찌 앉아서 수수방관(袖手傍觀)하며 동양 전체가 까맣게 타죽는 참상을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래서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을 하얼빈에서 개전하고, 담판(談判)하는 자리를 뤼쑨(旅順)으로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다. 여러분의 눈으로 깊이 살펴보아 주기 바란다.

1910년 경술 2월(음) 대한국인 안중근 여순(旅順) 옥중에서 쓰다

편집

전감(前鑑) (前鑑 : 앞사람이 한 일을 거울삼아 스스로를 경계한다)

편집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동서남북의 어느 주(洲)를 막론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대세(大勢)의 흐름이고, 알 수 없는 것은 인심의 변천이다.

지난날(甲午年 :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을 보더라도 그때 조선국의 서절배(鼠竊輩: 좀도둑) 동학당(東學黨)이 소요를 일으킴으로 인해서 청 · 일 양국이 함께 병력을 동원해 건너와서 무단히 전쟁을 일으켜 서로 충돌한 전쟁이었다.

일본이 청국에 승승장구하여 랴오뚱(遼東)의 반을 점령하였다. 군사 요지인 뤼쑨(旅順)을 함락시키고 황해함대(黃海艦隊)를 격파한 후 마관(馬關: 시모노세키)에서 담판을 벌여 조약을 체결하여 타이완(臺灣)을 할양받고 2억 원을 배상금으로 받기로 하였다. 이는 일본의 유신(維新) 이후 하나의 커다란 기념사이다.

청국은 물자가 풍부하고 땅이 넓어 일본에 비하면 수십 배는 되는데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이 패했는가? 예로부터 청국인은 스스로를 중화대국(中華大國)이라 일컫고 다른 나라를 오랑캐(夷狄)라 일러 교만이 극심하였다. 더구나 권신척족(權臣戚族)이 국권을 멋대로 희롱하고 신하와 백성이 원수를 삼고 위아래가 불화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욕을 당한 것이다.

한편 일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래로 민족이 화목하지 못하고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나, 외교적 경쟁이 일어난 후로는 집안싸움(同室操戈之變)이 하루아침에 화해가 되고 연합하여, 한 덩어리 애국당(愛國黨)을 이루었으므로 이와 같이 개가를 올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친근한 남이 다투는 형제보다는 못 하다는 것이다.

이때의 러시아의 행동을 기억해야 한다. 그날로 동양함대(東洋艦隊)가 조직되고 프랑스, 독일 양국이 연합하여 요코하마(橫濱) 해상에서 크게 항의를 제기하니 랴오똥 반도(半島)가 청국에 되돌려지고 배상금은 감액되었다. 그 외면적인 행동을 보면 가히 천하의 공법(公法)이요 정의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호랑이와 이리의 심술보다 더 사납다.

불과 수년 동안에 러시아는 민첩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뤼쑨을 조차(租借)한 후에 군항(軍港)을 확장하고 철도를 부설 하였다. 이런 일의 근본을 생각해 보면 러시아 사람이 수십 년 이래로 펑티엔 이남(奉天以南)의 다롄(大連), 뤼쑨(旅順), 뉴쥬앙(牛莊) 등지에 부동항(不凍港) 한 곳을 억지로라도 가지고 싶은 욕심이 불같고 밀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국이 한번 영(英) · 불(佛) 양국으로부터 톈진(天津) 침략을 받은 이후에 관뚱(關東)의 각 진영에 신식 병마(兵馬)를 많이 설비하자 감히 손을 쓸 마음을 먹지 못하고 단지 끊임없이 침만 흘리면서 오랫동안 때가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에 이때에 이르러 셈이 들어맞았던 것이다.

이런 일을 당해서 일본인 중에도 식견이 있고 뜻이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이유를 따져보면 이 모두가 일본의 과실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구멍이 있으면 바람이 들어오는 법이요. 자기가 치니까 남도 친다는 격이다. 만일 일본이 먼저 청국을 침범하지 않았다면 러시아가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행동했겠는가. 가히 제 도끼에 제 발등 찍힌 격이다.

이로부터 중국 전체의 모든 사회 언론이 들끓었으므로 무술개변(戊戌改變:캉유웨이[康有爲], 량치챠오[梁啓超] 등 변법파[變法派]에 의한 변법자강운동[變法自疆運動]. 1898년 이른바 백일유신[百日維新]은 겨우 100일 만에 실패로 끝났지만 그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이 자연히 양성(釀成)되고 의화단(義和團 : 중국 백련교계[白蓮敎系] 등의 비밀결사. 청일전쟁 후 제국주의 열강의 압력에 항거해서 1900년대에 산뚱성[山東省] 여러 주현[州縣]에서 표면화하여 베이징[北京], 톈진 등지에 확대되었다. 반제반만배척운동[反帝反滿排斥運動]의 주체였다)이 들고 일어났으며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는 난리가 치열해졌다.

그래서 8개국 연합군이 보하이(渤海) 해상에 운집하여 톈진이 함락되고 베이징(北京)이 침입을 받았다. 청국 황제가 시안(西安)으로 파천(播遷)하는가 하면 군민(軍民)할 것 없이 상해를 입은 자가 수백만 명에 이르고 금은 재화의 손실은 그 숫량을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이와 같은 참화는 세계 역사상 드문 일이었고 동양의 일대 수치일 뿐만 아니라 장래 황인종과 백인종 사이의 분열 경쟁이 그치지 않을 징조를 나타낸 것이다. 어찌 경계하고 탄식하지 않을 것인가.

이 때 러시아 군대 11만이 철도 보호를 핑계로 만주 경계 지역에 주둔해 있으면서 끝내 철수하지 않으므로 러시아 주재 일본공사 쿠리노(栗野)가 혀가 닳고 입술이 부르트도록 폐단을 주장하였지만 러시아 정부는 들은 체도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군사를 증원하였다.

슬프다! 러 · 일 양국 간의 대참화를 끝내 모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원인을 논하자면 필경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동양에서 하나의 큰 본보기(一大前轍)가 된 것이다.

당시 러 · 일 양국이 각각 만주에 출병할 때 러시아는 단지 시베리아 철도로 80만 군비(軍備)를 실어내었으나 일본은 바다를 건너고 남의 나라를 지나 4, 5군단과 장비, 군량을 육지와 바다 양 편으로 랴오허(遼河) 일대에 수송했다. 비록 예정된 계산이었다고는 하지만 어찌 위험하지 않았겠는가? 결코 만전지책(萬全之策) 아니요 참으로 무모한 전쟁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육군이 잡은 길을 보면 한국의 각 항구와 성경(盛京), 전주만(全州灣) 등지로, 4, 5천리를 지나 왔으니, 수륙(水陸)의 괴로움을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만 했다.

이때 일본군이 다행히 연전연승은 했지만 아직 함경도(咸鏡道)도 벗어나지 못했고 뤼쑨(旅順)도 격파하지 못했으며, 펑티엔(奉天)에서도 미처 이기지 못했을 즈음이다.

만약 한국의 관민(官民)이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을미년(乙未年, 1895년)에 일본인이 한국의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를 무고히 시해한 원수를 이 때 갚아야 한다고 사방에 격문을 띄우고 일어나서, 함경 · 평안 양도 사이에 있던 러시아 군대가 불의의 기습으로 찌르고 나와 전후좌우로 충돌하며, 청국도 또한 상하가 협동해서 지난날 의화단 때처럼 들고 일어나 갑오년(甲午年) 청일전쟁의 묵은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서 베이칭(北淸) 일대의 국민이 폭동을 일으키고 허실(虛實)을 살펴 방비가 허술한 곳을 공격하며 가이핑(盖平), 랴오양(遼陽) 방면으로 유격기습을 벌여 나아가 싸우고 물러가 지켰다면, 일본군은 남북이 분열되고 배후에 적을 맞아 사면으로 포위당하는 비탄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일 상황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뤼쑨(旅順), 펑티엔(奉天) 등지의 러시아 장병들의 예기(銳氣)가 드높아지고 기세가 배가(倍加)되어 앞뒤로 가로막고 좌충우돌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군의 세력이 머리와 꼬리가 맞아떨어지지 못하여 중장비와 군량미를 이어댈 방도가 아득해졌을 것이다. 그러하여 야마가타(山縣有朋 : 러일전쟁 당시 2군사령관)와 노기(乃木希典 : 러일전쟁 당시 3군사령관) 대장의 경략(經略)은 틀림없이 허사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청국 정부와 주권자도 야심이 폭발해서 묵은 원한을 갚게 되었을 것이고, 시기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른바 만국공법(萬國公法)이니 엄정중립(嚴正中立)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근래 외교가(外交家)의 교활하고 왜곡된 술수이니 말할 것조차 되지 못한다. 병불염사(兵不厭詐 : 군사행동에서는 적을 속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출기불의(出其不意 : 의외의 허점을 찌르고 나간다), 병가묘산(兵家妙算 : 군사가의 교묘한 셈) 운운하면서 관민(官民)이 일체가 되어 명분 없는 군사를 출동시키고 일본을 배척하는 정도가 극렬 참독(慘毒)해졌다면 동양 전체를 휩쓸 백년풍운(百年風雲)을 어찌한단 말인가.

만약 이와 같은 지경이 되었다면 구미 열강들은 아주 좋은 기회를 얻었다 해서 각기 앞을 다투어 군사를 충돌시켰을 것이다.

그 때 영국은 인도, 홍콩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육해군을 한꺼번에 출진시켜 웨이하이웨이(威海衛 : 산뚱 반도에 위치한 군항) 방면에 집결시켜 놓고는 필시 강경수단으로 청국 정부와 교섭하고 추궁했을 것이다. 또 프랑스는 사이공 마다가스카르 섬(加達馬島)에 있는 육군과 군함을 일시에 지휘해서 아모이 등지로 모여들게 했을 것이고, 미국, 독일, 벨기에,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그리스 등의 동양 순양함대는 보하이(渤海) 해상에서 연합하여 합동조약을 예비하고 이익을 같이 나누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별수 없이 전국의 군사비(軍事費)와 국가 재정(財政)을 총동원하여 면성한 다음에 만주와 한국 등지로 곧바로 수송했을 것이다.

한편, 청국은 격문을 사방으로 띄우고 만주, 산뚱, 허난(河南), 찡낭(荊襄) 등지의 군대와 의용병을 매우 급히 소집해서 용전호투(龍戰虎鬪)하는 형세로 일대풍운(一大風雲)을 자아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형세가 벌어졌다면 동양의 참상은 말하지 않아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한 · 청 두 나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약장(約章)을 준수하고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아 일본으로 하여금 위대한 공훈을 만주땅 위에 세우게 했던 것이다. 이로 보면 한 · 청 두 나라 인사의 개명(開明) 정도와 동양평화를 희망하는 정신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하니 동양의 뜻 있는 인사들의 깊은 사려는 가히 훗날의 모범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러일전쟁이 끝날 무렵 강화조약(講和條約) 성립을 전후해서 한 · 청 두 나라 뜻 있는 인사들의 허다한 소망은 크게 부서지고 말았다.

당시 러 · 일 두 나라의 전황을 살펴본다면 한번 개전한 이후로 크고 작은 교전(交戰)이 수백 차례였으나 러시아군대는 연전연패(連戰連敗)로 상심낙담(傷心落膽)하여 멀리서 모습만 보고도 달아났다.

한편 일본군대는 승승장구하여 동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 가까이 이르고 북으로는 하얼빈에 육박하였다. 전세가 여기까지 이른 바에야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왕 벌인 일이니 비록 전 국력을 기울여서라도 한두 달 동안 사력을 다해 진공하면 동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뽑고 북으로 하얼빈을 격파할 수 있었음은 명약관화한 형세였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러시아의 백년대계는 하루아침에 필시 토붕와해(土崩瓦解)의 형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은밀히 구구하게 먼저 강화를 청해, (화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방도를 추구하지 않았는지, 가히 애석한 일이다.

더구나 러 · 일 강화 담판을 벌일 장소를 보더라도 천하에 어떻게 워싱턴을 담판할 곳으로 정하였단 말인가. 당시 형세로 말한다면 미국이 비록 중립(中立)으로 편파적인 마음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짐승들이 다투어도 오히려 주객이 있고 텃세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인종의 다툼에 있어서랴.

일본은 전승국이고 러시아는 패전국인데 일본이 어찌 제 본뜻대로 정하지 못했는가. 동양에는 마땅히 알맞은 곳이 없어서 그랬단 말인가.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외상(外相)이 구차스럽게 수만리 밖 워싱턴까지 가서 (포츠머스)강화조약을 체결할 때에 사할린 절반을 벌칙조항(罰則條項)에 넣은 일은 혹 그럴 수도 있어 이상할 것이 없지만, 한국을 그 가운데 첨가해 넣어 우월권(優越權)을 갖겠다고 한 것은 근거도 없는 일이고 합당 하지도 않은 처사였다.

지난날 마관(馬關) 조약(청일 전쟁 후 이토 히로부미와 리훙장(李鴻章)이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 때는 본시 한국은 청국의 속방(屬邦)이었으므로 그 조약 중에 간섭이 있을 수 있게 마련이었지만 한 · 러 두 나라 사이는 처음부터 아무런 관계가 없는 터인데 무슨 이유로 그 조약 가운데 이런 조항이 들어가야 했단 말인가.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 이미 큰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찌 자기 수단껏 자유로이 행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유럽 백인종과의 조약 가운데 삽입하여 영원히 문제가 되도록 만들었단 말인가. 도무지 어이가 없는 처사이다. 또한 미국대통령이 이미 중재하는 주인공이 되었는지라 마치 한국이 유럽과 미국 사이에 끼어있는 것처럼 되었으니 중재자도 필시 크게 놀라서 조금은 기이하게 여겼을 것이다. 같은 인종을 사랑하는 의리로서는 만에 하나라도 승복할 수 없는 이치이다.

또한 (미국대통령이) 노련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고무라 외상을 농락하여 바다 위에 떠있는 섬의 약간의 땅 조각과 파선(破船), 철도 등 잔물(殘物)을 배상으로 나열하고서 거액의 배상금은 전부 파기시켜 버렸다.

만일 이 때 일본이 패하고 러시아가 승리해서 담판하는 자리가 워싱턴이었다면 일본에 대한 배상 요구가 어찌 이처럼 약소했겠는가. 그러하니 세상의 일이 공평하지 않음을 이를 미루어 가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지난날 러시아가 동으로 침략하고 서쪽으로 정벌을 감행해, 그 행위가 몹시 가증하므로 구미열강이 각자 엄정중립을 지켜 서로 돕지 않았지만 이미 이처럼 황인종에게 패전을 당한 뒤이고 사태가 결판이 난 마당에서야 어찌 같은 인종으로서의 우의를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인정세태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슬프다. 그러므로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 이웃 나라를 해치는 자는 마침내 독부(獨夫 : 악행을 일삼아 따돌림을 받는 사람.)의 환난을 기필코 면하지 못할 것이다.

라이선스

편집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100년이 지났으므로 전 세계적으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단, 나중에 출판된 판본이나 원본을 다른 언어로 옮긴 번역물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저작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