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칼라일 선생의 위인 평론에 있었던가 한다. 마호메트라는 인간은 노발한 즉 이마에 핏줄이 일어섰는데 이렇게 노발하는 것이 그 진실성의 소치라고. 저에게 아무 취할 것이 없다할지라도 이렇게 핏줄 일으키기까지 노발하는 그 진실성만은 시인하여줄 것이라는 뜻이었던 듯하다.

마호메트의 위대는 가지지 못했으나 저의 노발만은 근사하게 천품으로 타고난 인간이 이런 소식을 들은 후로 일부러 노발하려고 힘쓰기까지는 못했으나 자기의 조급한 천성을 스스로 변호하기에는 다대한 힘을 저 위인 마씨에게서 차용한 일도 비일비애이었던 것은 차라리 동정할 만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만주에서 오랫동아 중국인의 성격을 주도(周到)하게 연구한 이의 친절한 보고를 듣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관에 일대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중국인은 어떠한 경우에든지 - 외인(外人) · 가족 · 비복이나 가축 · 가금(家禽)에 대하여서까지라도 - 노발하는 것은 인격 미완성한 자로 알아서 군자의 덕에 대결함으로 여긴다는 일이다.

물론 노발하지 않는 것에도 결함은 있다. 일반적으로 둔감이라고 하면 중국인의 대명사같이 통용되는 것도 그 신경 지완(遲緩)한데 유래할 것이다. 그러나 조급한 것보다 지완한 것이 무슨 우주적인 대법칙에 통하는 바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인은 가축을 몰되 어자(御者)나 목자(牧者)의 뜻에 반한 방향으로 행하고자 할지라도 한참동안은 금축(禽畜)의 의지에 추종하여 그 의지를 만족시켜주다가 기(機)를 보아 서서히 원주(圓周)로 돌려 몬다 하는데, 일본인은 직각으로나 백팔십도로 번개같이 돌려서 듣지 않으면 응징한다. 그러므로 전자의 것은 유순하고 후자의 것은 물고 차는 맹렬한 것이 되고만다. 만일 그 가축을 서로 교환하여 수삼개월 사육하면 그 성격이 또한 서로 반대로 변화하여 버린다고 한다. 무슨 대법칙에 함해야만 되는 듯하다. 이에 연상되는 것은 일본 역사상의 현저한 3결(三傑)의 성격이다.

  1. 안 울면 죽이리라, 두견새(信長)
  2. 안 울면 울리리라, 두견새(秀吉)
  3. 안 울면 울기까지 기다리리라, 두견새(家康).

가강(家康) 3백년 천하는 다른 요소도 있었겠지마는 거의 성격상에 다른 경쟁자가 소유할 수 없었던 것 - 위대한 우주적 대법칙에 부합한 것이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소인(素因)이었던 것은 우리 선생님들이 누누이 설명해주던 바이다. 인위도 가하려니와 천성을 기다히는 마음은 확실히 대인 군자의 덕성이다. 이에 더하여 하나님의 섭리의 실현을 확고히 믿으면서 고요히 여호와를 바라보며 잠잠하게 대망하는 생애에 들어가면 그는 더할 데 없는 명철에 달할 것이다. 사람마다 경우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같은 성격자로서는 또 이런 세대에 처하여서는 노발은 결코 장한 일이 아니다. 성급은 버릴 것이다. 응징의 내 손으로 할 일이 아니다. 노발은 스스로 제지하며 응징을 여호와께 부탁하면서 우리도 군자 대인 되고자 힘껏 노력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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