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겨울은 도무지 춥지 않다 하던 어떤 날, 갑자기 추위가 왔다. 소한 추위다. 어저께는 하얗게 눈이 덮인 위에 그렇게도 날이 따뜻하더니, 봄날 과도 같더니, 인왕산에 아지랑이도 보일 만하더니,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다만 젖빛으로 뽀얀 것이 있을 뿐이더니, 초저녁에도 별들이 약간 물을 먹었길래로 철그른 비나 오지 아니할까 하였더니, 자다가 밤중에 갑자기 몸이 춥길래 잠이 깨어서 기온이 갑자기 내려간 것을 보고 놀래었더니, 이튿날 신문에 보니 영화 십 칠도라는 금년 들어서는 첫 추위었다.

아침에 일어나 유리창가에 국화 잎사귀 같은, 잎 떨린 고목 같은 성에로 매 닥질을 하였다.

『어 추워!』

길가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ㅋ`소리가 들창으로 들렸다.

기압이나 기온이나 변하면 아픔이 더하는 아내의 관절염이 밤새에 더하지 나 아니한가 하고 걱정이 되고, 감기 뒤끝에 아직 개운치를 못하여서 기침을 쿨룩쿨룩하는 어린것들의 일이 근심이 되어서, 아직도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세 아이의 머리와 손을 만져 보았다. 한 아이는 암만해도 삼십 칠도는 넘을 것 같아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아침 불 좀 많이 때시오.』

나는 안을 향하고 소리를 쳤다. 아내는 입원하고 안주인 없는 가정에 늙은 식모 둘이 있을 뿐이다.

『예. 몇 덩이나 더 넣어유?』

충남 사투리 쓰는 어리숭한 식모는 지금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한 아궁이에 장작 몇 개비, 이공탄 몇 덩이 넣으라 하면 날이 춥거나 덥거나 꼭 그대로만 넣는 사람이다.

『이거 너무 때었구려. 방이 누르겠는데. 아이들 땀나겠소.』

하면 그는,

『늘 때는 대로만 때는데유.』

하고, 더운 날에 추운 날과 같은 분량을 때면 어찌 되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아침상이 들어왔으나 모두들 식욕이 없었다. 소학교에 다니는 사내아이는 혓바늘이 돋았노라고 안 먹으러 들고 아직 신열이 남아 있는 큰 계집아이는 입맛이 쓰다고 안 먹으려 들고, 새해 잡아 여섯 살 되는 계집아이와 나와만 밥을 한 공기씩 먹었다. 나도 감기 끝에 기침이 쇠어서 몸이 찌뿟하고 식욕이 없었다.

식욕이 왕성한데도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먹는 것이 무론 비극이겠지만 먹을 것은 있어도 몸이 성치 못하여서 식욕이 없는 것도 비극이다. 웬 일인지 우리 집 아이들은 도무지 식욕이 없고 게다가 편식이어서 모두들 꼬치꼬치 말랐다. 아내가 아이들을 맡아서 기를 때에는 모르고 지냈으나 지난 두어 달 동안 내가 세 아이를 맡아서 길러보니 실로 마음 졸일 노릇이다. 밤에 잘 때와 아침에 일어날 때에 옷을 벗기고 보면 팔다리가 젓가락 같고 갈빗대가 불근불근 비치는 것에 애가 타고 그러면서도 덥적덥적 먹지 아니하는 것이 애절할 노릇이었다.

『좀 더 먹어라, 왜 안 먹느냐?』

하는 내 아내의 노래같이 하던 소리를 나도 흉내 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몸이 저 따위니 병에 대한 저항력이 있을 수가 있나?』

아내나 내나 늘 이렇게 어린것들을 보고는 자탄하였다.

실상 우리 집 아이들은 병이 잦았다. 한겨울이면 두세차례나 감기가 들었다. 한 번 감기를 들면 십여 일이나 가두어 놓아야 추섰다.

『너희들은 광동이나 가서 살아라.』

나는 어떤 날, 기침만 쿨룩거리고 밥을 안 먹으려 드는 세 아이를 보고 이런 소리를 하였다.

『광동이 무에야?』

하고 아이들이 물었다.

『더운 데다. 겨울에도 춥지 아니한 데야.』

『그럼 여름만이야?』

하고 한 아이가 물었다.

『그래. 이를테면 여름만이다.』

『그럼 더워서 어떻게 살어?』

참 그렇기도 하다. 광동이나 남양을 가면 추위는 없겠지마는 더위가 있다.

나는 어이없어서 웃었다. 어디를 가면 이 천지 간에 근심 걱정 없이 편안히 살 데가 있으랴? 더구나 몸도 약하고 가난한 몸이, 이렇게 생각하고 나는 아이들을 보며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어린것들은 흐르는 콧물을 주먹으로 씻어 가며, 열과 쇠약으로 잘 아니 떠지는 눈을 억지로 떠 가면서 장난감을 가지고 흥에 겹게 놀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나는 아내가 입원한 병원에를 갔다. 병원 문을 들어설 때에 벌써 그 쇠약한 얼굴과 고통하는 표정을 상상하고 다리에 맥이 풀려버렸다.

병실은 써늘하였다 석탄의 . 배급이 원할치 못하다고 하여서 스팀은 늘 미지근한 정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내가 병실에 들어가자 아내는 또 울었다. 그의 병든 팔은 부목(副木)과 솜으로 통통하게 동여매어서 침대 한 편 옆에 삐뚜름하게 놓여 있었다.

『또 일기가 갑자기 변해서 더 아픈가 보구려.』

하고 나는 선 채로 눈물에 젖은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벌써 두 달이 넘은 병, 이 세상에서 제일 아픈 병이라는 관절염이다. 꼭 누운 채로 꼼짝도 못한지가 벌써 두 달. 그 몸에 살은 다 말라버리고 아픈 팔만이 통통하게 부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스러진지가 벌써 오래다.

『날 어떻게 해 주세요. 나중에는 어찌 되든지 두 시간에 한 번씩만 마약 주사를 해 주세요. 죽는 것은 조금도 무섭지 않아도 이 아픔은 참 못 참겠어요.』

하고 아내는 엉엉 소리를 내어서 울었다.

『조금만 더 참으시오.』

나는 이 말 밖에 할 말이 없었다.

『참기는 언제까지나 참아요. 자고 나면 또 마찬가지요. 자고 나면 또 마찬가진걸, 내일이나 내일이나 하고 내일이면 좀 나을까 해도 마찬가진걸.』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아내의 말이 무슨 신비한 종교적인 암시같이 내 가슴을 울렸다.

『참기는 언제까지나 참아요?』

하는 것이 무척 비통한, 인생의 운명의 노래인 것 같았다.

『내일이나 내일이나 하고 내일이면 좀 나을까 해도 또 마찬가진걸!』

이것이 인생의 노래의 후렴이 아닐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어떡허오? 또 참아야지.』

하는 내 말도 그 인생 시의 한 귀절인 것 같아서 내 스스로 내 말에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오랜 고통에 아내는 마음이 약해지고 또 어리석어졌다. 그는 걸핏하면 비 감해서 울고 또 걸핏하면 원망하였다. 요새에는 살고 싶은 욕망이 하나도 없어졌노라고 자탄하였다.

또 며칠 전에는, 아내는 신앙이 없이는 살아 갈 수 없는 세상인 줄을 깨달았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하나님이나 부처님이 꼭 믿어지지를 아니한다고 자탄하였고, 또 이러한 고통을 받는 것이 다 제 죄값인 줄 깨달았노라고 하였다 그렇지마는 . 그 다음 날에는 그려한 종교적인 생각이 스러진 것도 같았고, 또 그 다음 날에는 나더러 신앙을 가르쳐 달라고도 하였다. 그렇지마는 나 자신이 원체 변변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못될 뿐더러, 설사 내게는 확고 불발한 신앙이 있어서 안심 입명의 기초가 꽉 잡혔기로서니 이러한 마음 자리는 제가 제 마음 속에서 찾은 경계요, 아들이나 아내에게도 전해 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나는 또 돈 변통을 하러 가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얼른 돈 변통을 하여가지고 앓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아내가 병원을 개업하여서 일년 반에 겨우 기초가 잡혀서 매삭 순 이익이 몇 백원씩 남아서, 이만하면 금후 일 년 이내에는 빚도 다 갚아버리고 아이들 데리고 살아갈 걱정은 없어진다고 내외가 기뻐하던 통에 뜻밖에 아내의 병이 튕겨진 것이다.

아내가 발병하기 전 서너 달 동안에는 병원의 성적이 대단히 좋았다. 산부인과에 있어서는 경성 시내 어느 개인 병원보다도 성적이 좋은 편이어서 남의 칭찬도 있었거니와 아내 자신도 자못 양양자득하는 빛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고맙습니다 하고 생각하시오.』

이러한 소리를 하였다. 내 속으로는 언제 어떠한 불행의 벼락이 떨어질는지 모른다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인생의 화복이라는 것은 풍우와 같이 미리 알 수 없다는 원리로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복력을 생각하건댄 근래에 너무나 내 분에 넘게 팔자가 좋은 것이 두려운 까닭이었다. 나같이 박덕 소복한 것에게 줄기찬 복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 각하였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나와 달라서 자기의 운명에 대하여서 상당히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병원이 잘 되는 것으로 말하면 자기가 공부도 많고 기술도 용하기 때문이니 이 공부와 기술을 가지고 하는 자기의 병원이 아니될 리가 없다고 자신하는 모양이었다. 이러한 자신이 때때로 말에 스미어 나오는 일이 있을 때에 나는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신의 힘을 모르는 아내의 자부심이 어떻게나 위태하고 어리석은 것임을 나는 느낀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가 오랜 고생 끝에 얻은 이 기쁨을 깨뜨려 줄 용기가 없어서,

『그저 겸손하시오.』

이러한 말을 할 뿐이었다.

그러면 아내는 내 진의(신의 뜻과 힘이 우리네 사람의 뜻과 힘보다 크고 난측하다는 인식 를 모르고) 자기의 실력을 짐짓 인정치 아니하는 것처럼 오해하여서 도리어 불쾌한 빛을 보였다.

아무도 저 이외의 남의 운명에 간섭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하던 끝에 아내가 병이 났다. 그래서 병원은 쉬이게 되고 쥐꼬리만한 저축은 다 소모하게 되었다. 수입은 없어지고 지출은 배가 된 것이다. 빚에 이자와, 생활비와, 입원비와, 게다가 아이들까지 풀무패로 앓아서 생기는 의약비.

나는 아내의 병원에서 나와서 몇 책사를 찾았다. 내 원고를 팔아서 아내와 아이들의 치료비와 금리를 물 돈을 얻자는 것이다. 발행자들은 다 나를 우 대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결국에는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비상시의 종이 흉년 때문에 새로 책을 발행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도 물론 이유가 되겠지마는 또 하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내가 몇 군데 원고료로 선금을 받아 먹고도 제기한에 원고를 써 주지 못하여서 신용을 잃은 것이다. 아마 또 하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세가 변하여서 내 작가적 명성이 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내 작가적 명성이란 당연히 떨어져야 옳을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내게는 과분한 명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마는 그 때문에 급히 마련하여야 할 돈이 변통되지 아니하는 것은 기막힌 일이었다.

나는 종로의 찻집에서 뜨거운 커피를 두어 잔 사 먹었다. 그러고 아는 사람들을 만나서 유쾌하게 잡담도 하였다.

찻집에서 암빵을 사서 배를 불리고 종로 거리에 나섰다. 이 추운 날에도 길에 사람과 차마가 뿌듯하게 붐빈다. 화신 앞에 전차 정유장에는 안전 지 대가 넘치게 사람들이 전차를 기다리고 섰다. 다들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고? 무엇하러 어디를 가는 사람들인고?

<마음들. 욕심들!>

나는 사람들을 보고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나 자신을 보았다. 나와 비슷한 기쁨, 슬픔, 근심, 욕심들을 품고 움직이는 무리들! 이렇게 생각하면 길거리에 가고 오는 사람들이 다 남 같지를 아니하고 나 자신 이 여럿으로 갈려시 이렇게도 움직이고 저렇게도 움직이는 것을 나 자신이 보고 섰는 것 같았다. 모두 정다웁기도 하고 모두 가엾기도 하였다.

『C 선생.』

하고 누가 내 옆에 와서 불렀다. 나는 이때에 화신 모퉁이에 멀거니 서 있던 것이다. 나를 부른 사람은 K였다. 그는 호리호리한 몸에 검은 외투와 검은 소프트를 쓴 것이 영국 다녀온 신사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〇〇잡지를 경영하는 사람이다.

『추운데요.』

나는 이런 싱거운 대답을 하였다.

『추운데요. 어디를 가도 석탄 절약으로 훈훈한 데라고는 없군요.』

K는 이렇게 말하면서 외투깃을 일으켜 세웠다. 전동 골목으로 내려쏘는 북한의 하늬바람이 살을 에이는 듯함을 깨달은 것이다.

『잡지 나왔어요?』

나는 이렇게 물었다.

『종이를 구할 수가 없읍니다 그려. 한 연애 공정 가격 오 원 오십전짜리 종이를 팔 원 오십전을 내라는군요.』

『경제 경찰에 안 걸리나?』

『영수증에는 공정 가격만 쓰거든요.』

『응야미도리히끼라는 게로군.』

『오레이라는 게야요.』

『그래, 오레이하러 가시오?』

하고 나는 픽 웃었다.

『아뇨, 누가 좀 나누어 준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하고 K도 픽 웃는다.

『새해부터는 출판 사업은 어렵겠는걸요. 일간 신문들도 감페이지만으로는 안 되고, 민간 신문 통제 문제까지 생기는 모양인데요.』

『통제라니?』

『세 신문을 뭉쳐서 하나를 만든단 말이죠.』

『허긴 셋씩 있을 필요가 무엇 있나? 내용은 꼭 같고, 종이는 없고.』

『그래도 잡지는 다르거든요.』

K는 이런 소리를 던지고는 가버렸다.

나도 집에서 앓는 아이들을 생각하고 H로 가는 전차를 탈까 하고 두어 걸음 옮겨 놓을 때에 또 누가 뒤로서,

『C 선생!』

하고 불렀다.

그는 R이었다. R은 시도 짓고 소설도 쓰고 또 한참 동안 승려 생활도 하였으나 우선 돈을 벌어야 한다고 수년간 광산을 따라다니다가 수만 원 잡은 친구였다. 외투에는 진짜 수달피가죽을 대었고 구두도 강가루였다. 아직 자가용차를 가질 정도는 아니었다.

『야아!』

하고 은 R 내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무척 부드럽고 따뜻하였다.

『어때, 또 무슨 좋은 일이 생겼소?』

하는 내 인사말에는 야유하는 빛이 있음을 나 스스로 느꼈다.

『좋은 일이 그렇게 날마다 생겨요?』

하고 R은 그 얼굴이 온통 웃음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그 표정에는 분명 스스로 만족하는 자신의 빛이 있었다.

『한 번 놀러 오세요.』

하고 R은 전화 번호와 주소박힌 명함 한 장을 내게 주고는 동일 은행 쪽으로 가버렸다.

나는 R의 뒷모양을 보면서 문득 S를 생각하였다. 그도 육칠년 전까지는 일 개 건달이었으나 처음에는 주식으로, 다음에는 토지 경영으로, 지금은 총재 산이 사백만 원이라고 평가되는 큰 부자가 되었다. 그의 저택은 서울에서도 꼽히는 호화로운 집이요, 그의 금자 박은 자가용차도 서울에서 몇 개 아니 되는 고급차였다. 그의 자동차는 가끔 종로서 전동으로 들어가는 모퉁이에 세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술도 담배도 아니 먹고 유일한 소일이 첩을 얻는 것이어서 서울 안에만 하여도 알려진 것만이 다섯 곳이라고 한다. 내가 R을 보고 S를 연상한 것이 무슨 때문인지 모르나 그렇게 생각이 되었다.

동시에 나는 갑자기 큰 부자가 된 S가 나를 대할 때마다 매양 인생에 대하여서 회의적이요 비판적인 말을 하던 것도 생각하였다.

『돈은 생겼으나 안심과 행복은 아니 생기오.』

하고 그는 한숨을 섞어서 자탄하였다.

공교롭게도 바로 이때에 S의 자동차가 달려오다가 붉은 신호를 만나서 내 앞에 정거하였다. S는 여전히 철학자적인 침울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하였다.

그는 자동차 문을 열려 하였으나 푸른 신호를 본 운전수는 그대로 자동차를 몰았다. S는 한 번 허리를 굽혀 보이고 가고 말았다.

뜨거운 커피 한 잔 먹은 기운이 종로 찬바람에 다스러지고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내가 기다리는 전차는 좀체로 오지 아니하였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손님들은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하기도 하고 상체를 움직이기도 하면서 추위와 기다리는 화증을 이기려하였다.

『C 선생!』

하고 또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내 귀에 익은 H의 소리였다. 그는 때묻은 흰 무영 두루마기에 흰 소프트를 쓰고 커다란 목도리로 코 끝까지 감고, 그러면서도 손에는 장갑도 없이 빨갛게 언 채로 빼빼 마른 열 손가락을 자랑이나 하는 듯이 짝 펴들고 나를 향하고 왔다. 반갑다는 뜻이다.

H는 본래 시인으로서 시로는 밥을 먹을 수가 없어서 라디오 소설도 쓰고 극장에도 따라다니는 궁한 문사다.

내 앞에 다 와서 그 뼈만 남은 열 손가락을 발발 떨면서 합장을 하였다.

그는 불교도다. 매월당(梅月堂)을 즐겨도 하거니와 그를 연상시킬 만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언제나 H를 대하면 매월당을 생각한다.

『매월당이나 하나 쓰라고.』

내가 H를 보고 이렇게 권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H는 가끔 만나는 사람이라 그리 놀라울 것도 없지마는 그 뒤에 따르는 사람이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는 W다. 잠깐 어느 자리에서 한 번 슬쩍 본 것을 제하고는 이십년 만에 상봉한다고 할 만한 친구다.

H는 이십년 전에는 허무주의자였다. 그는 다만 시나 논문으로만 허무주의 자가 아니라 생활 그 물건이 허무주의자였다. 그러다가는 문득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영남 어느 절에 숨어서 경을 읽는다는 소문도 있었고 참선을 한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아무도 그의 행색을 바로 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 이거 얼마만요?』

W에게 대하여서는 내 편지에서 허겁지겁으로 반갑게 손을 잡았다.

W는 H와 달라서 양복에 외투에 괜찮게 차렸다. 그의 얼굴과 눈에는 아무 걸림 없는 웃음이 있었다.

『그래, 지금 어디서 무얼 하오?』

하는 것은 내 물음이었다.

『그저 아직 천지간에 살아 있지.』

W의 대답은 천연스러웠다.

『술은 그저 좋아하나?』

『누가 사 주면 먹고.』

『그런데 H는 W를 어떻게 만났소?』

나는 H를 보고 물었다. 그 순간에 H와 W는 맞는 한 바리 짐이라고 생각하였다.

『길에서 만났어, 종로서 오다 가다.』

H의 대답이었다.

『오늘?』

『아니 벌써 서너 번째 만났어.』

『오늘은? 어디 가는 길야?』

『가기는 어딜 가. 오늘도 오다가다 만났지.』

나는 이 두 세외인(世外人)을 끌고 찻집으로 들어갔다. 은혜를 차 한 잔으로 갚자는 것이다. 은혜란 무엇인고 하면, 이 두 친구를 보매 내 마음에 서렸던 모든 근심 걱정이 일시에 확 풀린 까닭이다.

『위스키 한잔 먹을라나?』

나는 돈지갑을 생각하면서 물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 두 친구에게 무엇을 사 먹이고 싶었다.

『돈 있어?』

W의 말이다.

『배갈이 싸지.』

H의 말이다.

위스키와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두 사람은 장히 기뻐하는 모양이었으나 위스키를 더 대접할 돈이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찻집에서 나오는 길에 나는 이렇게 두 사람에게 물었다.

『아무데나 가지. 추우면 들어가고.』

W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길로 돌아다니노라면 또 누구를 만나겠지.』

이것은 H의 대답이었다.

그리고는 헤어졌다.

두 사람과 작별하고 나니 두 사람의 경계가 무척 부러웠다. 내가 속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였다. 오십 평생에 날마다 무엇을 하노라고는 하였고 또 잘 하노라고 하였지마는 그것이 다 무엇인가?

나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소아과 병원에 들려서 아이들 약을 얻어 가지고 가야 할 것을 생각하고 안동 네거리를 향하고 바람을 안고 걸어 올라갔다.

기관지염이 만성이 되고 몸에는 미열이 떠나지 않는 나는 찬바람을 쏘이매 기침이 더 나고 몸이 아팠다. 위스키 한잔 먹은 것이 얼굴에만 올라서 낯만 화끈거리고 손끝이 저리도록 시렸다.

나는 내가 지금 걷는 걸음이 침착하지 못함을 느꼈다. 용행호보(龍行號步)로 왜 나는 무게 있게 위엄 있게 걸음을 걷지 못하는고 하고 제 천품이 고귀하지 못한 것이 슬펐다. 박덕 소복(薄德少福)! 이것은 내게 꼭 맞는 말씀이다. 나는 내 몸에 걸친 비단옷이 황송하였다. 내 분에 넘는 의식주를 하 는 것이 손복이 될 것을 믿으므로, 나는 내 아내가 없는 동안에 몇 번 회색 무명옷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내는 남부끄럽다고 집어 치어버렸다.

사실 나 자신도 비단옷이 좋았다. 음식이나 거처나 다 화려한 것이 마음에 좋았다. 이 마음을 떼어버리지 못하고 회색 무명옷이나 입는다면 그것은 아 내 말마따나 위선일 것이다.

<돈이 좀 많았으면.>

나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가끔 있다. 스스로 부끄럽기도 하고 또 원체 복이 없는 자가 부귀를 구한다고 올 것이 아닌 줄을 잘 알기 때문에 돈에 허욕은 내어 본 일이 없지마는,

<돈이 좀 있었으면…….>

하는 가벼운 생각은 가끔 일어나는 내다. 더구나 오늘 모양으로 꼭 돈이 좀 있어야 할 처지를 당한 때에는 돈 생각이 자못 간절하다.

나는 간혹 길가 거지에게 돈을 준다. 내 생에나 이런 공덕으로 좀 넉넉히 살아 보자 하는 천한 동기에서다. 나 같이 박덕한 사람이 이러한 동기나 아니면 어떻게 착한 일을 해보랴? 오늘 H와 W 두 친구에게 위스키 커피 한 잔을 사준 것도 공덕이 되어서 오는 생에는 복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는 내다.

나는 병원에 가기 전에 우선 안동 절로 가서 부처님께 세배를 드릴 것을 생각하였다. 부처님 화상 앞에서 고개만 한 번 끄덕해도 큰 공덕이 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내가 부처님께 정성으로 절을 하면 내 죄가 소멸되어서 어린것들과 아내의 병이 낫기를 바란다. 장난 삼아 부처님 앞에서 합장을 하더라도 반드시 성불할 인연을 짓는다고 석가여래께서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나는 부리나케 안동 네거리로 올라갔다. 북악산 끝에 하늘은 흐렸다. 바람은 대단히 찼다. 몸은 오싹오싹 불편하였다.

나는 법당에 모신 석가여래 불상을 생각하였다. 그 앞에 절하는 나를 상상하였다.

나는 문득 발을 멈추고 우뚝 섰다.

『내 몸이 부처님 앞에 갈 만하게 깨끗한가?』

내 옷이 깨끗치 못한 것은 가난한 탓이었다. 구두는 길가에서 오전을 주고 닦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불결하였다. 손에 끼인 때묻은 가죽 장갑이 내 손 그 물건의 불결함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이 손으로 한 모든 깨끗치 못한 일들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보다도 내 입! 또 그보다도 내 마음!

나는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을 대하기가 부끄러웠다.

<그러나 금방 사람을 죽이는 큰 죄를 짓고 피묻은 칼을 들고도 부처님 앞에 가서 엎드린다.>

하는 것을 생각하고 나는 안동 별궁 모퉁이를 돌아서 선학원으로 갔다.

내가 아는 선사를 찾았다 K. 그는 나를 상당히 존경하는 모양으로 맞았다.

불자는 어떠한 사람에게나 이만한 존경은 할 것이다.

K 선사는 회색 누비 두루마기를 입었다.

나는 절을 하였다. 그도 답례를 하였다.

나는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저이는 정말 청정한 중인가?>

이러한 생각을 해 보다가 나는,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하고 속으로 염불을 모셨다. 관세음보살이 내 처지에 계셨으면 어찌하셨을까.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저이가 청정한 중이거나 말거나 내가 그런 것 아랑곳할 새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내 발부리를 잊어서는 아니될 것을 생각하였다. 나는 반야심경을 읽고 「시삼마」하는 화두도 잡았다. 그동안 K 선사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몇 마디 말이 오고 갔으나 그것은 무슨 말인지 기억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이를테면 아무 말도 없는 것이다.

『갑니다.』

하고 나는 일어났다.

『바쁘시지 아니하시거든 SS 스님을 만나고 가시지요. 금강산에서 일전 오셨읍니다.』

K 선사는 구두를 신는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초췌한 내 형색에 그래도 도를 구하는 한 줄기 반짝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심인지, 또는 헛되게 마음 바쁘게 헤매는 내 꼴을 가엾이 여기심인지.

나는 SS선사의 이름은 들었으나 만난 일은 없었다. 그리고 건방진 생각에 그저 그렇고 그런 중이려니 하였다.

나는 요새 선승이라는 이들에게 별로 경의를 가지지 못하였다. 정말 살불 살조(殺佛殺祖)하는 무리인 것 같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계도 안 지키고 저도 모르는 소리를 지껄이고, 가장 높은 체하는 무리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SS 선사에 대하여서도 그다지 꼭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이왕 기회가 좋으니 한 번 만나리라 하는쯤의 생각으로 K 선사를 따라서 서편 모퉁이 방으로 갔다.

가는 길에 법당 앞을 지나게 되기로 잠깐 합장하였다. 석가여래상은 분명히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들어가서 절을 하려다가 말았다.

SS 노사는 회색 불룩한 바지 저고리를 입고, 검은 승모를 쓰고 수정단주를 오른 손으로 세이고 앉아 있었다.

나는 노사 앞에 절하였다 SS. 그것은 정성의 절이었다. 공덕을 얻고 싶은 절이었다.

K 선사는 나를 소개하였다. 내가 불교에 연구가 깊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소개를 하였다.

『네, 그러십니까. 말씀은 들었지요.』

노사는 이런 말을 하였다.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SS 노사의 얼굴과 눈과 염주를 세이는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화평하였다. 눈은 빛나고 부드러웠다. 염주를 끊임없이 엄지손가락으로 넘겼다.

다른 중 하나가 때묻은 옷을 입고 옆에 앉아 있었다. C라는 지방의 포교사라고 K 선사가 소개하였다. 이 포교사의 옷과 몸에는 때가 묻어도 SS 노사의 옷과 몸에는 때가 묻을 수 없는 것같이 문득 생각되었다.

『불교를 많이 연구하셨다지요?』

SS 선사는 이렇게 내게 물었다.

『법화경을 읽는지가 육칠년 됩니다.』

이것이 내 대답이다.

『불교란 깊고 깊어서 들어갈수록 더 깊지요.』

SS 선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대답이 없이 그의 부드럽게 빛나는 눈을 바라보았다. 고요하고 파란 깊은 소와 같은 눈이라고 생각하였다. 코와 귀도 후하다고 생각하였다.

『선지식(善知識)과 교제가 많으신가요?』

SS 선사의 세째 물음이다.

『Y, R, O 같은 이와 서로 알지요.』

『다 강사들이시군.』

나는 말이 없었다.

『부처님의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선이란 것이 있지요.』

SS 선사는 나를 인도할 뜻을 발한 것이었다.

『선에는 반드시 화두(話頭)를 잡아야 합니까?』

이것은 내 대답겸 물음이었다.

『본래 화두란 것이 없지요. 옛날 영산회상에서 세존이 말없이 점화(拈華) 하시니 가섭(迦葉)이 말없이 미소하였지요. 이 모양으로 이심전심을 하였지만은 차차 인심이 순일하지를 못하니까 화두가 아니면 할 수가 없이 되었지요.』

『염불경계와 참선경계가 어떠합니까?』

『같지요. 염불삼매에 들어가면 같지요. 그렇지마는 극락정토가 저 서방 십만억토 밖에 있으니 거기 태어나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염불을 하면 틀리지요. 길을 멀리 돌아간단 말요. 즉 심시불 ── 이 마음이 곧 부처라 하 는 바른 길로 들어가야 하지요.』

이렇게 말하는 선사의 눈은 한 번 빛을 발하였다.

나는 곧 이렇게 물었다 ──.

『선사도 불상에 절을 합니까?』

『타불타조하는 중에 무시로 시방 제불께 절을 하는 것이지요』

『선사도 타력을 믿습니다?』

『선정에 들어간 때에 무슨 불이니 보살이니가 있겠어요. 내가 곧 부처여 든!』

선사의 눈은 또 한 번 빛났다.

『참선하는 법이 어떠합니까?』

『밖에서 들어오는 것을 막아버리고 제가 알던 것까지 내어던지는 것이요.

그리고 가만히 제 마음을 지켜보노라면 갑자기 환히 깨달아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세상서선처럼 쉬운 것이 없지요. 선이란 밖에서 구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렇지마는 또 선처럼 어려운 것이 다시 없지요. 다겁 이래로 끌고 오는 중생의 습기(習氣)를 벗어 놓기가 참 어렵단 말요. 난중난사요.

일체분별을 다방하(放下)하는 날이 깨닫는 날이요, 다른 길은 없으니까.

이러한 경계에 달하면 가위 대장부 능사필의(大丈夫能事畢矣)지요.』

나는 사의 이 가르침을 들으면서 속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다. 내가 말 없이 있는 것을 보고 사는,

『남화경 읽으셨소?』

하고 새 화두를 내었다.

『네 애독하지요.』

『선사대사독남화경시가 있읍니다. 오언절귀지요.』

『可惜南華子[가 석남화자]. 祥麟作孽虎[상린 작얼호]. 寥寥天闊[요요천활].

斜日亂啼烏[사일 난제오]라고 하셨지요.』

하고 사는 빙그레 웃었다. 나도 소리를 내어서 웃었다.

『장자가 괜히 많단 말씀이지요.』

『고맙습니다.』

하고 나는 일어나서 절하고 물러 나왔다.

집에 오는 길에 나는 「사일난제오」를 수없이 뇌이고는 혼자 웃었다. SS 선사는 이 말을 내게 준 것이다.

『내야말로 석양에 지저귀는 까마귀다.』

하고 자꾸만 웃음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겨울 해는 금화산에 걸려 있었다.

(一九四〇年二月[일구사공년 이월] 《文章 [문장]》所載[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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