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조
1
편집모처럼 별식으로 닭 국물에 칼국수를 해서 식구가 땀을 흘려가며 먹고 있는 참이었다.
“이런 때 느이 황주 아주머니나 오셌다 한 그릇 훌훌 자섰드라면 좋을걸 그랬구나…… 말이야 없겠느냐마는, 그 마나님두 인저 전과 달라 여름 삼복에 병아리라두 몇마리 삶아 소복이라두 하구 엄두를 낼 사세가 되들 못하구. ……내남적없이 모두 살기가 이렇게 하루하루 쪼들려만 가니…….”
어머니가 생각이 나 걸려해 하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의가 좋고 해서 그러던 것이지마는 어버지는 어머니와 달라, 황주 아주머니가 별반 직성이 맞지를 않는 편이었다.
“그래두 그 마나님넨 느는 게 있어 좋습니다.”
“온 영감두. 지금 사는 그 일본집두 30만 환에 내놨다는데 그래요?
한30만 환 받아, 삭을세집을 얻든지, 문 밖으루다 조그만한 걸 한 채 장만하든지 하구서, 남겨진 가지구 얼마 동안 가용이라두 쓰구 할영으루다……”
“느는 게 조음 많으우?…… 자아, 몸집이 늘지. 희떠운 거 늘지. 시끄런 거 늘지. 말 능란한 거 늘지. 따님 양개화(洋開化) 늘지. 아마 그 마나님은, 한때 그 국회의원이라드냐 하는 걸 선거하는 데 내세우구서, 누굴 추천하는 연설 같은 걸 시켰으면 아주 일등으루 잘 했을 거야.”
“난 또 무슨 말씀이라구……”
어머니는 그만 웃고 만다.
아버지도 따라 웃으면서
“난 정말이지, 그 생철동이, 하두 시끄러 골치가 아파 못하겠읍디다.”
“아따, 생철동인 생철동이루 씨어먹게스리 마련 아니우? 세상 사람이나 세상 일이 다 그렇게 제제끔이요, 제곬이 있는 법 아니우?”
어머니는 이렇게 원만하였다.
어머니가 만일 원만치 못한 어른이었다면 그런 대답이 나오는 대신
“영감두 말씀 마시우. 황주 마나님더러 느느니 몸집이네, 희떰이네, 시끄럼이 네, 말 능란해 가는 거네 하시지만, 영감은 느느니 괴벽과 편성입디다. 난 영감, 그 남 비꼬아대기 잘하는 거, 미운 소리 잘하는 거, 하두 박절해 골치가 아파 못하겠읍디다.”
하고 오금을 박았을 것이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말이 오고가고, 티격태격하다 필경 싸움이 되고, 결과는 불화가 일고.
생각하면 어머니의 그렇듯 원만함은 우리 집의 고마운 보배였다. 솔성이 심히 박절하고 옹색한 아버지를 모시어 규각이 나지 않고, 잘 평화가 지탱되어 나가기는, 오로지 어머니의 그렇듯 남의 흠점이나 과실을 찬하지 않고 너그러이 보는 원만함의 덕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가리켜 어머니의 성정을 닮아 세상 만사를 좋도록만 보려 들고, 그래서 사나이 자식이 소견이(視野가) 좁고 진취성(積極性)이 적으니라고 하였다.
미상불 나는 내가 생각하여도, 아버지의 편협하고 박절한 성품보다 어머니의 너그럽고 원만한 성품을 물려받은 것 같고, 따라서 모든 사물을 호의적으로만 보면, 인하여 시야가 좁고 진취성이 적음도 사실인 성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닮았음을 복되게 여기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편협하고 박절함은 유난한 것이 있었다.
아무 이해상관이 없는 일이거만, 당신의 비위에 맞지 않는다든가 눈에 거슬린다든가 한다는 것으로, 미운 소리을 하고 비꼬아 대고 하여 남에게 실 안심을 하고 경원을 당하고 하였다.
아버지는 크고 작은 일에 있어 당신이 보기에 그른 것에 대하여 둘러 생각을 한다거나 관용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르다…… 혹은 보기 싫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상관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른 것을 그르다고 단정하는 데 그치고 말거나, 보기 싫은 것을 보기 싫어하는 데 그치고 말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미운 소리를 하고 비꼬아 대고 하기를 좋아하였다. 일종의 악취미랄 것이 있었다.
해방까지는 아무려나 그것이 타고난 천품에서 오는 단순한 성격적인 것이요
악취미나마 취미적인 것이요 함에 불과하였으나, 해방을 고패로 아버지의
그 비꼬는 솔성은 경제적인 이해관계에서 우러나는 바로 육체적인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
3백 석 추수거리와 계동(桂洞) 복판에 있던 터전 넓고 고래등같이 큰상하채의 기와집과 이것이 해방 전의 우리 집의 재산이었다.
이 집을 지니고 3백 석 추수를 받아 식량을 하고, 가용을 쓰고 하면서 우리는 넉넉지는 못하나마 남께 옹색한 거동을 보이거나 황차 빚 같은 것은 통히 모르고 편안하고도 만족한 세상을 살아왔었다.
별안간 해방이 되었다.
소작료를 전 수확의 3분지 1만 받도록 마련이 나, 3백 석 추수가 2백석으로 줄었다. 기본 수입이 3분지 2로 줄어, 우리 집에서는 2백 석 추수를 가지고 1년 가계를 삼아야 하였다.
추수는 3분지 2, 2백 석의 추수를 줄었는데 다른 물가는 다락같이 올라만 깄다. 3분지 2로 준 2백 석의 추수를 가지고, 옛 가용의 3분지 2조차 대기가 까마득하게 어려웠다. 추수한 벼2백 석은 소위 공정가격으로 고스란히 공출을 하고서, 그 대금을 받아가지고, 용은 소위 야미값으로 사대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일제 말기에도 소작료 받는 벼를 죄다 공출에 바치고, 한 섬 10원씩의 공정가격으로 받지 아니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때의 야미 시세는 시방처럼은 공정가격과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겨우겨우 제 털 뽑아 제 구멍을 메꿀 수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그러나 도저히 안될 말이었다.
지난해 가을에 2백 석에서 소작료 공출 대금으로 도합 25만 몇 천 원인가를 받았다. 그중에서 토지 그것에 따르는 지세니 무어니를 까고 나면, 20만원 원 남짓이 옹근 수입이었다.
식량 그 밖에 모든 비용을 줄이고 줄여도 1948년 현재의 화폐로 매달 4만 원의 가용이 든다. 20만 원인다 치면 다섯 달치 가용이었다.
그 나머지 일곱 달은?……
내가 국민학교의 교원으로, 다달이 받는 월급이 한 7,8천 원은 된다.
그러나 그 월급을 가지고 나의 일신에 관한 용, 가령 담배를 사피운다든가, 책을 산다든가, 술은 먹지 않아서 그 방면에 낭비는 없다지만, 가다오다 친구 만나 점심 낱 먹고 찻잔 마시고 양말 컬레 사 신고 한다든가 하느라면 오히려 부족이 나서 옹색한 일을 당하는 적이 있을 지경이니, 단돈 백 원이라도 집안에 들여놓질 못하는 형편이었다.
아버지는 드러내놓고 말을 아니하나, 이왕 월급벌이를 할 바이면, 아무 변통성 없는 초등학교의 교원질보다도 종종 가다 뒷길로 딴 수입이 있고, 배급 물자 같은 것도 동떨어지게 후하고, 그리고 권도(權力)도 부릴 수가 있고, 그 권도를 묘리 있이 잘 부리거드면 큰수를 잡아 일조에 팔자를 고치는 수가 있고…… 이런 관리 방면으로 터를 바꾸어 앉았으면 하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나는 그러나 아버지의 그런 뜻을 받들 생각이 없었다.
관리 그것이 나쁠 며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관리를 다니면서, 사를 써주고서 뒷길로 딴 수입을 보고 하는 것은 마땅히 군자의 할 도리가 아니었다.
더우기 지체를 이용하여 아닌 권세를 부린다든가, 황차 권세를 부리어 불의한 재물을 긁어들인다는 것은, 남이야 어떠했든 나로서는 감히 범하고 싶지 아니한 불의였다.
의 아닌 부와 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으니라…… 이 공자님의 말씀은 정히 나의 변할 수 없는 심경이요 태도였다.
관리가 됨으로써 그러한 불의를 범하고 하기가 뜻에 없을 뿐만 아니라, 반면 나는 현재의 교원이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고 있는 자이었다.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을 데리고 그들을 가르치며 잘 지도한다는 것, 이것은 내가 사람으로서 할 바의 다시 없는 사명이었다.
지금은 나라를 새로이 세우는 아침이었다. 앞으로 우리 나라를 두 어깨에 메고 나갈 사람은, 시방 내가 가르치고 지도하는 어린 사람들인 것이었다.
그런 새로운 우리 나라의 일꾼을 가르치고 지도하고 한다는 것은 한결이나 기쁘고 자랑스러운 노릇이었다.
나는 장차에 우리 집안이 더욱 더 몰락이 되어, 가사 조석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른다고 하더라도, 나는 끼니를 줄이고 누더기를 걸치면서라도 이 천직을 지키되 버리지 아니할 터이었다.
우리 집은 빚을 지기 시작하였다. 1946년 봄부터 1948년(금년) 봄까지 만 2년
동안에 진 빚이 30만 원이 넘었다.
토지는 팔자하니, 작인들이 장차에 토지분배가 있을 것을 생각하고서 값만 잔뜩 깎고 앉아 사려고를 아니하였다. 작인들로는 당연한 타산이었다.
할 수 없이 계동 집을 팔아 지금 사는 가희동의 이 방 세 개의 단채 집을 사고 빚을 대강 갈무리하였다.
큰 집을 팔아먹고 작은 집으로 옮아앉아, 빚을 갚고 하였다고 그것으로써 전과 같이 수지의 균형이 도로 맞고, 생활이 안정이 되었느냐 하면 아니었다.
수입보다 지출은 여전히 컸다. 금년 1년을 지나고 나면, 또다시 몇십 만 원의 빛이 앞채일 참이었다.
다시 집을 팔거나 아주 헐값으로 토지를 팔거나 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은 앞으로 3년이 못하여, 토지는 물론이요 집도 터도 없는 철빈이 되고 말 번연한 운명의 선 위에 당시랗게 놓여 있는 것이었었다.
일반 가용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버지는 당신의 모든 씀씀이를 줄이고 갈기었다.
봄과 가을 두 철, 친구들과 작반하여 승자로 유람 다니는 것을 뚝 끊어버렸다.
다달이 한 번씩 모여 놀고 하는 시회(詩會)를 한 달 혹은 두 달씩 거르곤 하였다.
정월과 8월의 양 명절때를 비롯하여 한식, 단오, 9월 9일, 동지, 그리고 시월 초사흗날인 당신의 생신날, 이렇게 1년이면 대여섯 차례를 좋은 술과 안주 많이 장만하여 더러는 기생까지 곁들여 친한 친구 청하여다 대접하면서 풍월(風月 : 詩) 읊어가며 흥그롭게 놀던 것을 처음에는 양때 명절과 시월 초사흗날의 당신 생신날과의 세 차례로, 그 다음엔 당신 생신날의 한 차례로 줄이었다. 그러나마 음식 차림새도 극히 간소하게 하고 기생은 일체로 부르지 아니하였다.
간구한 친구가 촐촐해서 찾아왔을 때, 석양배 한잔 내기에도 두루 주저를 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친구와 술과 풍월과 승자 찾아 유람 다니기와, 이것이 이 아버지에게서 일시에 전부 혹은 태반이 없어진 셈이었다.
친구와 술과 풍월과 승자 찾아 유람다니기와,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아버지는 노래(老來)의 인생이 즐거웠었다. 그리고 그것이 없어짐으로 해서 아버지는 위안과 낙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집안 살림은 나날이 졸아들어, 끝장이 눈앞에 내어다보이고…… 친구도 술도 풍월도, 승지 찾아 유람도 죄다 잃어버린, 그래서 세상 살아가는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이 다 없어진 만년…… 아버지는 이른바 앙앙불락(怏怏不樂)이었다.
아버지는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당신에게 직접 이해 상관이 있는 일이고 없는 일이고 간에 하나도 정당하거나 당연한 것이 없고, 모두가 옳지 못한 일이요, 사리에 어그러지는 일이요 하였다.
아는 사람이고 모르는 사람이고 간에 남이 하는 일, 하는 말 치고 하나도 마음에 맞거나 비위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래서 불평이요 불만인 것이었었다.
이 앙앙한 심사라든지 불평과 불만은, 그러나 어디다 대고 어떻게 부르댈 바이 없는 울분이요 불평과 불만이었다.
천품으로 이미 좁고 비꼬인 것이 있는 아버지였다. 가뜩이나 거기에 당신의 허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외부적인 원인으로 하여 당하는 몰락과, 불여의 에서 (不如意) 오는 울분과 불평불만이———— 그러나마 풀 길도, 부르댈 대상도 마땅히 없는 울분과 불평불만이, 앞채이고 보매, 비꼬인 솔성이 더욱 심각하여질 것은 차라리 당연한 노릇이었다.
친한 여러 친구 중에서도 유난히 더 친하고, 아버지를 잘 알고 하는 윤씨라는 이가 있었다.
“용 못 된 이무기가 심술만 남드라구…… 가사 세상이 좀 불여의하기로소니, 장부가 마음을 좀 활달히 가지는 게 아니라 복닥복닥 속을 고이구, 사람이 그 웨 그렇드람? 그리군 무단히 남더러 미운 소리나 하구…… 그게 그대지 쾌할 건 무어람.”
그 윤씨라는 이가 핀잔삼아 권고삼아 아버지더러 한 말이었다.
아뭏든 아버지가 그런 어른이고 보매, 황주 아주머니만 하더라도 도무지 여자답지 못하게 시끄럽고 실속없이 말이 많고도 능하고, 그리고 번접스럽고 한 것이 작히 아버지의 눈에 벗음직도 하기는 한 것이었다.
2
편집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오더라도 막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당자 황주 아주머니가 거기에 당도를 하였다.
“아유, 아우님은 그래, 어쩌면 그렇게두 꼼짝두 아녀신단 말씀요?……
난 하두우 고만 궁금해서……”
일본 씨름꾼이 생각날 만큼 거창한 몸집으로 대문 안을 들어서면서, 그 동네가 울리도록 큰 목소리로 우선 인사가 이쯤 요란하였다.
황주 아주머니는 한 달이면 적어도 세번 종은 우리 집엘 오곤 하였다.
반드시 와야 할 볼일이 있어서 온다느니보다도, 황주 아주머니의 말대로, 그 아우님이 보고가 싶어서 자주 그렇게 다니곤 하던 것이었었다.
어머니가 출입이 없네 없네 하여도, 한 달에 한번 종은 역시 항주 아주먼네 집을 가곤 하였다.
두 분은 그래서, 멀어야 열흘, 잦으면 대엿새에 한번은 으례 만나는 터이었었다. 그 대엿새에 한번, 열흘에 한번이 황주 아주머니는 하도 그만 궁금하였고, 그것을 아버지의 말을 빌면, 황주 아주머니는 그쯤 엄살이 ㅐ단한 것이 있는 마나님이었다.
“형님 어서 오시요, 그리지 않어두 지끔 형님 이야길 하든 참이드라우.”
어머니가 반겨 일어서면서 이렇게 맞이를 하고.
황주 아주머니는 뒤우뚱거리고 마당을 걸어 들어오면서 일변 분주히 온 어쩌지 구기가 “ , 가렵드라니. ……아제두 마침 기시군. 아젠 요새 이 더위에 어떻게도 지나시죠? 날두 하두우 극성으루 더우니깐…… 오오, 조카님두 집에 나와 있군. 참, 요새 방학을 해서 한가하겠군. …… 오냐, 새아기, 잘 있었드냐? 난 널 보면 꼭 귀여 죽겠드라! …… 뫼시구, 더위에 얼마나 앨 쓰느냐? …… 어멈은 여전히 부지런하군. 아무렴, 나야 늘 태평이지. ……그래, 아우님은…… 아니, 신관이 좀 못하셨구려? 사람들이 너나없이 더위에 부대껴 그래.”
식구라는 식구는 있는 대로 깡그리 흠선하고도 불일성 있이 인사를 건네고 받고 하면서 황주 아주머니는 마루로 올라왔다.
어머니와 두 분이 연방 아우님, 형님 해쌓는데, 남이 듣기엔 퍽 가까운 집안간인 듯도 하겠으나, 실상 촌수를 따진다면 훨씬 먼 일가끼리였다.
어머니와 열두촌인가, 열네촌인가 된다고 하였다. 나와는 그래서 외가로 열세촌이나 열다섯촌 뻘의 아주머니였다. 그러니 일가를 내어도 그만 아니 내아도 그만일 일가요, 혼인도 하여 무방한 집안끼리였다.
일가란 그러나 대체가 촌수야 좀 멀고 하더라도, 가까이 살면서 상종이 서로 잦고, 일변 뜻이 맞는 데가 있고 하게 되면, 사이도 자연 가까와지고 하는 것이어서, 이 황주 아주먼네와 우리가 정히 그러하였다.
황주 아주머니가 지나간 기사년(己巳年 : 1929년)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살다, 맏아들 박부장 재춘(朴部長在春)을 뒤쫓아 황해도 황주로 내려가던 경진년(庚辰年 : 1940년)까지의 열두 해 동안과, 그리고 황주에서 살기 7년 만인 병술년(丙戌年 : 1946년), 그 전해의 8·15 해방으로 생겨진 방해선(妨害線) 38선을 넘어 서울로 다시 온 이후 오늘날까지, 우리 두 집안은 한 서울 안에서 살면서, 남의 사촌이나 친숙질 부럽지 않게, 서로 왕래가 잦고, 가까이 지냈다.
황주 아주머니는 황주로 내려가 사는 동안에도 일 년에 두세 차례는 아우님——— 우리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더 많이는 서울서 출가하여 서울서 살고 있는 맏딸 송자가 보고 싶어서) 이름난 황주 사과를 몇 상자씩 가지고 서울을 다니러 오기를 즐겨서 하였다. 출입이 어려운 어머니도, 두 번인가 세 번인가 황주로 그 형님을 찾아갔었고.
어머니와 황주 어머니는 몸이 크고 뚱뚱하고 얼굴도 우툴두툴한 것이 수염만 났다면 여자보다고 남자에 더 가까운 양반이었다.
어머니는 몸이 가냘프고 여자답게 곱살한 얼굴이었다. 올에 쉰두 살인데 아직도 젊었을 적의 고운 태가 가시지 않고 많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생김새가 그러한 것과 같이 성질도 하나는 남성적으로 괄괄하고 적극적이요 활동적이요 하고, 하나는 여성적으로 차분하고 소극적이요 내면적이요 하였다.
이렇게 서로 공통된 점이 없고 상극진 성격과 생김새의 두 분마나님이었으면서, 그러나 잘 적성이 맞고 의가 좋고 하였다.
두 분이 의가 좋은 것에는 단순히 적성이 서로 맞는다는 것 외에, 어머니가 성품이 너그러워 남을 포용을 한다는 것과, 황주 아주머니가 우리 집———특히 어머니에게서 받은 바 조그마한 경제상의 원조에 대하여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의리와, 이것의 영향이 일변 작자가 아니하였다.
황주 아주머니는 아버지의 폄(貶)이 아니라도, 그야 흠이 없는 바가 아니었다. 무단히 시끄럽고 희떱고 번접스럽고 다변하고……
그러나, 그런 반면 족히 취할 점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여장부라는 말이 있거니와, 기사 여장부토록은 몰라도 대단히 씩씩하고 용감한 것이 있었다.
좋은 조건 밑에서건 절박한 조건 밑에서건 생활과 맞겯고 서서 굽힐 줄을 모르고, 퇴각이라는 걸 모르는 황주 아주머니였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하거니와, 그러나 아무리 언덕이 있기로니, 소가 대들어서 비비지 않는다면 언덕은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양해를 얻어 계동 목판의 우리 집 가까이, 방이 안방 말고 다섯 개가 있는 집 한 채를 전세로 얻어 준 것이 기사년(己巳年 : 1929년), 그해 봄에 상부를 하고 이어서 가을에 젖먹이를 등에 업고 세 아이를 손목 잡고 서울로 황주 아주머니를 위하여 우선 조그마한 언덕이었었다.
황주 아주머니는 당신이 꽁꽁 허리춤에 매어 가지고 온 2백 원을 풀어, 그릇과 밥상과 수저를 장만하여 가지고 학생 하숙을 시작하였다.
방이 다섯이면 다 제대로 차야, 열 명의 학생을 쳐 너댓 식구가 겨우 목구멍을 얻어먹을까 말까 한 영세한 벌이였다.
황주 아주머니는 겨우 목구멍이나 얻어먹자는 데에 만족하려고 아니하였다.
목구멍을 얻어먹어 가면서 한옆으로 자녀를 교육시켜야 한다는 더 큰 대망이랄 것이 있었다. 황주 아주머니는 허리띠 졸라매고 대들었다.
학생들이 먹다 남기는 찬밥덩이를 마다 아니하였다.
옷은 겨우 살을 가릴 정도로써 만족을 하였다.
물 한 지게 전 하는 1 물을, 물장사를 대지 않고 손수 머리로 여날랐다.
젖먹이 영춘을 밤이나 낮이나 등에 매어달고 밥 짓고, 밥상 나르고, 설겆이하고, 다섯 아궁에 군불 지피고, 물 긷고 빨래하고 하였다.
세탁장이를 거절하고, 열 명 학생의 빨래를 죄다 맡아 빨아 줌으로써 아이들의 월사금이며 학자를 벌었다.
기사년(1929년)으로부터 경진년(庚辰年 : 1940년), 시집 고향 황주로 다시 내려가기까지, 열두 해 동안을 그렇게 약삭빠르고도 부라퀴로 납뛰었고, 납뛴 보람이 역력히 있었다.
갑술년(甲戌年 : 1934년)에는 맏아들 재춘이 좋은 성적으로 중학을 졸업하였다.
재춘은 재주도 있고 영리하기도 하였고, 겸해서 모친의 격려와 열성에 감동이 되고 하여 부지런히 공부를 하였었다.
스물한 살에 중학을 마친 재춘은 이어서 전문학교로 올라갈 수가 있기는 있었으나, 모친이 그런 희망이요, 그럴 각오였으며, 재춘 자신도 마음이 당기지 아니함은 아니었으나, 영리한 그는 집안의 형편이며 모친의 고생을 생각하여 일찌감치 실생활 방면으로 나아가기로 하였다.
졸업하던 그해 바로 순사 시험을 보아 교습을 마친 후 서울 본정경찰서에 근무를 하였고, 다음다음해 병자년(丙子年 : 1936년)에는 백주(白株)짜리 사과밭이 딸린 고향의 황주 규수와 결혼을 하였다.
무인년(戊寅年 : 1938년)에는 마침 재춘의 칠촌숙(七寸叔) 되는 사람이 해주(海州)에서 경부를 다니며 서둘러 준 덕에 재춘은 고향 황주로 전근이 되어 젊은 내외가 우선 환고향을 하였고. 재주가 있고 영리하고, 그리고 뒷줄 좋은 칠촌숙이 있고 하여, 이듬해 기묘년(己卯年 : 1939년)에는 부장으로 승차를 하여 이웃 고을 중화(中和) 경찰서에서 근무를 하였다.
황주 아주머니의 맏딸 송자(松子)는 오라비 재춘이 황주로 내려가던 무인년(1938년)에 고등여학교를 마치었고, 이듬해 기묘년(1939년)에는 은행에 다니는 전문학교 출신과 결혼을 하여 지금까지 서울서 잘 살고 있고.
황주 아주머니가 맏아들 재춘을 뒤따라 황주로 내려가던 경진년(1940년) 현재로 둘째딸 춘자(春子)는 고등여학교 2년급이요, 막내동이————젖 먹으면서 어머니의 등에 업히어 고달프게 서울로 올라오던 그 막내동이 영춘은 나이 이미 열세 살에 국민학교 5년급이었고.
이만하면 황주 아주머니는 거의 맨손이다시피, 올망졸망 동서 불변의 4남매를 데리고, 막막히 서울로 올라와 그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자지 않고 쉬지 않고 그러면서 부라퀴로 납뛰며, 열두 해 동안 고생을 한 보람은 넉넉히 났었다.
동시에 혼자엣 남의 어머니로써 인생으로써, 8, 9분 성공이었다고 하여도 무방하였다.
오로지 황주 아주머니의 그 생활과 맞부딪쳐 굽히지 않고 씩씩하게 싸워 마지않는 기개의 덕이었다.
3
편집몸집이 부대한 사람은 추위를 덜 타는 혜택이 있는 반면, 여름이면 남달리 더위를 타고 땀을 많이 흘리는 대갚음을 치르게 마련이어서, 황주 아주머니도 아버지와 나만 아니더면 적삼 치마 단속곳 다 벗어던지고, 속곳 바람으로 앉았고 싶어할 만큼 더워하면서 부채질이 바빴다.
안해가 칼국수를 한 대접, 딴 상에 김치 등속과 하께 놓아 올리는 것을 어머니가 받아 황주 아주머니의 앞으로 놓으면서 권을 한다.
“형님 어여 좀 드시우…… 혼자 먹으려니깐 걸려, 뫼시려래두 보낼까 하는 참인데.”
“발이 효자야, 허어허허허.”
황주 아주머니는 웃음 웃는 것도 남자처럼 걸걸하고 너털스러웠다.
한바탕 너털웃음을 웃고는 수저를 들면서
“여름엔 이게 젤이지…… 더운 국물 해서 먹구 난다 치면, 먹을 땐 더워두 속이 후련하구 더위가 가시구.”
“자시구 더 자시우, 형님. 많이 있으니.”
“양대루 먹죠. 내가 언제 이 댁에 와 먹는 거 사양합디까?”
마침 아버지가 수저를 놓고 상을 물렸다.
황주 아주머니가 건너다보면서
“아제는 벌써 다 지셌수?”
한다.
혹시 당신이 와 자시기 때문에 식구의 차지가 덜린 것이나 아닌가 싶어하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트림을 길게 하고 나서
“내야 이걸 어디 질겨하나요? 전엔 저깔두 아니 댄걸…… 지끔은 마참, 궁졸해지니깐, 입두 궁기가 들어 그런지 이런 것두 곧잘 걸어들이군 하지만서두.”
아따 가만 기시우 “ . 이재네두 인전 도루 옛날처럼 기 펴구 힘 펴구 사실 날이 가차웠으니.”
황주 아주머니는 자신 있이 그러다 문득 기쁨이 얼굴에 넘치면서
“참 이승만 박사루 대통령 난 거, 둘 아시죠?”
“?……”
“아,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으루 올라앉으셌다구, 나지오루 곧장 방송두 하구, 신문사선 호욀 들입다 박아 돌리구 했는데, 여태들 모르구 기섰어?
알뜰두 하시지들.”
오늘 국회에서 대통령 선거를 한다는 것은 미리서 알았으나, 라디오의 스위치를 꽂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미상불 책망을 들어 싼 일이었다.
아버지야 범연한 어른이라지만 적어도 나만은 적지 아니한 등한이 아닐 수 없었다.
“아뭏든 그러면, 아주머니의 그 예언이 영락없이 들어맞인 심이군요?”
이윽고 아버지가 하는 말이었다.
빈정대는 말씨가 역력하였으나, 황주 아주머니는 그런 눈치를 채기보다는 신이 나서
“아, 영락없이 들어맞구말구요. 내가 그날두 무어랍디까?”
유래가 있는 말이었다.
한참 선거로 사람이 둘만 모여도 그 이야기로 판을 짜던, 지나간 4월 그믐께의 어느 날이었다.
석양 때, 그 날도 역시 아버지도 계시고 나도 학교로부터 돌아왔고 한 자린데, 그 자리에 황주 아주머니가 와 참석을 하여 역시 선거 이야기가 벌어졌다.
“거저, 덮어놓구 이승만 박사한테 투표해여 합넨다. 이승만 박사한테 투표해서, 그 으런을 대통령으루 뫼셔앉혀야 우리 죄선 사람 살 길 나서지, 그렇잖구는…… ”
그러면서, 황주 아주머니는 그야말로 덮어놓고 이승만 박사에게 대통령 투표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었다.
아버지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끄러미 앉아 듣다가
“난, 이번 선거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루 알았드니, 이승만 박사 대통령을 뽑는 선거로군요?”
“글쎄, 인제 두구 보시우. 한 열흘 남았으니 두구 보시우마는, 38 이남의 죄선 사람은, 열에 아홉까지는 이승만 박사한테루 투푤 해서, 당장 그 자리서 대통령으루 뽑힐 테니 두구 보세요.”
그 날 저녁 황주 , 아주머니가 저녁을 자시고 돌아간 뒤에 아버지는 혼잣말처럼
“허! 반식자 우환이라드니, 섣불리 조끔 아는 게 탈야. ……그런 우김속, 그런 떡심, 그런 이거지. ……병중에 만일 그 마나님 같은 사자 귀신을 만났단, 한 시간 못 배겨나구, 끌려가구 말 게야.”
하고 짐짓 고개를 내저었다.
38 이남의 조선 사람이, 열에 아홉까지가 5월 10일의 선거에 이승만 박사에게 대통령 투표를 하였거나, 그런 것이 아니요, 그 뒤에 국회에서 국회의원끼리 이승만 박사로 대통령을 선거하였거나, 아무렇든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으로 뽑히기는 뽑혔은즉, 황주 아주머니는 장담을 쳐도 좋은 것이었었다.
황주 아주머니는 땀을 물 쓷듯 흘려가며 후루룩후루룩 먹성 좋게 칼국수를 자시면서 어깨가 으쓱하였고, 아버지는 담뱃대에 담배를 붙여물고 앉아
“그래 이승만 박사가 아주머니 예언대루 대통령이 되구 했으니깐, 인전 그럼 우리 조선 사람이 살길두 생기겠군요?”
“살길이 생기구말구요”
“아주머니, 오시는 길에 싸전이랑 나뭇장이랑 들러보섰읍디까?”
“싸전엘요? 나뭇장엘요?”
“쌀 금세가 천 원 넘든 것이 한 5백 원으루 떨어지구, 남구두 한 마차 한 2천원으루 떨어지구, 광목두 한 자 5,6십 원으루 떨어지구, 다 그랬어야 할 게 아녜요?”
“무슨 물건 금새가 별안간 그렇게 떨어지구 합니까?”
“이런 답답한. ……이박사가 대통령으루 뽑혀야만 조선 사람은 살게 되느니라구 접때두 그리섰죠? 오늘두 방금 이박사가 대통령으루 뽑혔으니깐, 인전 살 길이 생겼느니라구 하시구.”
“그야 그렇죠.”
“그동안 백성이 못 살구 죽을 지경을 한 것이 달리 그랬나요? 쌀은 한말 천원이 넘구. 남군 한 마차 6,7천 원 이죠. 광목 한자에 4백 원이요, 설렁탕 한 그릇이 백 원이요, 다 이래, 백성들이 살기가 어려웠든 게 여든요. 그러니깐 아주머니 말씀대루, 이박사가 대통령으루 뽑혀 백성이 살 길이 나서자면, 제일 첫째 백반 물가가 뚝뚝 떨어져야 할 게 아니겠냐구요?”
“오온 우물에 가서 숭눙 달래시겠수. 오늘 겨우 대통령이 났는데, 오늘루 당장 물건 금세가 떨어지는 수야 있나요?”
들은다치면 외국선 “ 나라가 어지럽구, 물가가 비싸 백성들이 살기가 어렵다가두, 훌륭한 사람이 임금이든 대통령이든 된다치면, 그 시각 그 당장에 물가가 떨어진다구 하길래 하는 말이죠.”
“정부나 생기구 그래야죠. 자끔은 아직두 미국 사람이 자기네 맘대루 이럭저럭하는 군정 아녜요.”
“옳아, 정부가 생기면이라…… 정부만 생기면 그땐 쌀 금세두 내리구, 남구랑 광목두 금세가 내리구 해서 백성들이 살게 되는 판이군요?”
“그러믄요.”
“작히나 고마운 노릇이겠소…… 저 거시키, 그 멀쩡한 도둑놈들———— 탐관오리, 그것들두 죄다 엮어 감옥소루 보낼 테죠?”
“엮어 보내구말구요. ……지끔두 연방 붙잡히잖어요? 여니 관리들은 새려 이번참엔 즉 참 헌다헌 경찰관이 다 들려났나봅디다. 노(盧) 무엇이라구, 수도경찰청 무슨 과장이라드냐……”
“노덕술이 말씀인감? 그 사람은 독직사건은 독직사건이라두, 뇌물 먹은 독직이 아니라, 사람을 붙들어다 고문을 해 죽인 사건이랍디다.”
“그래요?…… 그렇지만 그것두 죈 죄죠. 뇌물 먹은 거허군 좀 달라두.”
“공산당을 고문해 죽였대지 아마?”
“공산당을요? 그렇다면 잘했죠. 잘했죠. 죽여예죠. 고문 아냐 찢어라두 죽여예죠. 그리구 노씨 그인 상금을 줘서 당장 놔줘예죠. 공산당 때려 죽인 게 죄가 무슨 죕니까?”
닿으면 썩둑 베어질 만큼 졸지에 황주 아주머니의 기세는 맹렬한 것이 있었다.
“과히 염려하실랸 마시우. 본다치면 대갠 앞문으루 묶어들면 뒷문으루 풀어놔 주군 하니깐.”
아버지는 그러고 나서 잠깐 사이를 떼였다 다시
“이왕 그 공산당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나는 실상 금년허구 명년허구 이태만 지나구 나서 내명년쯤일랑, 거 공산당을 좀 해볼까 하는 참인데……”
“오온 말씀만이래두.”
황주 아주머니는 기급을 하게 놀란다. 입에 국수를 듬뿍 문 채 야단스럽게 고갯짓, 눈짓, 손짓을 갖추 하며 아버지를 가로막으면서
“제발 덕분, 제발 덕분, 말씀이래두 그런 끔찍하구 숭헌 말씀일랑 애야 입밖에 내지두 마시우. 오온 글쎄, 어떡허시자구 세상에 그런, 세상에 그런.”
그야 낸들 “ 어디 그, 내 토지 약간 조금 있는 걸 거저 뺏어설랑 촌 무지랭이 농사꾼눔들한테 노나주자구 드는, 멀쩡한 불한당 패엘, 하 그리탑탑해 참엘 하자구 들겠소만.”
“그럼! 그러시다뿐이겠에요? 불한당허구두 그럼 불한당이 어딨에요!”
“내가 금년엔, 이 집, 이걸 마저 팔아먹구. 명년엔 토지 2백 석거리 그걸 안 팔아먹구. ……할 수 있나요. 집이래두팔구, 논이래두 팔아 위선 당장 입에 풀필을 해야죠. ……그래, 그렇게 다 팔아먹구 난다치면, 내명년쯤 가선, 한푼 껀지 없는 가난방이가 될 판이어든요. 뺏길래 뺏길 거 없는 사람이니 공산당 두렬 거 없잖아요?”
“공산당, 좌익, 빨강이, 그눔들 말만 들어두 난 차가 떨려요! 에이 불공대천지 원수. ……그눔들은 내가 갈아먹어두 분이 아니 풀려.”
황주 아주머니는 과연 몸을 푸르르 떨었다.
눈에서는 곧 불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냥 못본 체
“그런데, 듣자니깐 공산당은 가난방이끼리 모여 부잣눔의 걸 우격으루 뺏어설랑 고루 노나 먹잔 노름이라구요. 집 팔아먹구 논 팔아먹구, 한푼 껀지 없이 된 가난방이가 게라두 들어서 부잣눔의 걸 뺏어 노나먹는 축 애끼면 조음 좋아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구 않습디까?”
“거짓말예요. 새빨깐 거짓말예요. 속임수루 마련해낸 새빨간 거짓말예요. 그눔들이 빨강이가 돼놔서, 새빨깐 거짓말을 잘 지어내거든요. …… 아무렴 뺏기야 뺏지요. 있는 사람의 걸, 들이 뺏구말구요. 그렇지만 고루 노나 먹는닷 소린 멀쩡한 거짓말예요. 노나 먹을 게 어딨에요. 저이끼리, 저이들 두목 서는 눔들끼리만 노나 가지구 저이눔들이 새루 부자질을 해요. 새루 부자질을…… 그러니깐 고루 노나 먹는다는 바람에, 속구 들어간 진짜 가난방이들은 그만 헷대릴 짚구 나가떨어지죠.”
황주 아주머니는 단숨에 그리고 불을 뿜는 듯 주욱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기보다도 고함을 치고 나더니, 조금 사이를 두었다 별안간 목소리를 뚝 떨어뜨려 지성스럽게
“아잰 그런 생각 저런 생각 하실랴 마시구 한국민주당이나 독립촉성회에 드시우. 그게 젤 숩넨다.”
“허어 낼 모레 집두 터두 없는 가난방이가 될 사람이, 부잣 양반들끼리 모여 수군덕거리는 한국민주당이나, 독립촉성엔 들어 무얼 하나요? 가, 청지기나 살련다면 몰라두. ……난 그 한푼 껀지 없는 녀석들이, 한국민주당에 들어 어쩌구 어쩌구 하는 년석들, 천하 시러베 개아들년석들 입데다. 없는 놈 한국민주당 하는 건 부잣놈이 공산당 하는 거 보담두 더 소갈머리 빠진 짓야.”
“아재네야 어째 가난방이우? 집이 있구, 전답이 있구.”
“한국민주당두 소위 그 강령이란 걸 본다 치면, 토진 분배한다구 그랫읍디다. 독립촉성은 별거겠소?”
“거저 뺏나요? 처억척 값을 주구 사서 농민한테 값을 받구 노나 준다는데요.”
“땅값으루다 돈이나 몇십만 원 받으면, 그걸 가지구 평생 먹구 살아가나요? 원체 큰부자루, 땅값이라두 몇천만 원 받는다면 몰라두.”
“아따, 걱정 마시구 이승만 박사만 믿구 기세요. 오늘 그 으런이 대통령으루 들어앉으셌으니깐, 다 사는 길이 생깁니다.”
“이승만 박사가, 소작률 3분지 1만 받든 걸, 3분지 2루 올려받으란 영이나 내리기 전엔, 날 같은 사람은 온 살길이 트일까 싶지두 않습디다.”
“그래두 인제 두구 보시우, 아재. ……이승만 박사루 대통령이 났으니깐, 이내 곧 정부가 생기구. 이어서 독립이 되구. 그리군 국방경비대가 쏟아져 나가서 38선을 뚜드려 부시구. ……우리 영춘인, 이 박사께서 쳐랏, 호령만 내리시면 지금 당장이래두 뛰어가, 38선을 무찌를테라구. 저이 동간들허구두 늘 얘기하느니 그 얘기라구 비번날 집일 다니러 오는족족 그리면서 벼른답니다. 아유, 난 그 원수의 공산당 그놈들 잡아 죽일 일을 생각하면, 사흘 아니 먹어두 배가 부르니.”
다른 일에는 엄살과 허풍이 노상 없다고는 할 수가 없었으나, 황주 아주머니의 공산당 ——— 좌익에 대한 증오와 반감은 지금 보이는 분노 그대로였지, 조금치도 애누리가 없는 것이었었다.
1945년 8·15의 해방 바로 전 7월달에, 나는 은율(殷栗)의 처가엘 다녀오던 길에 황주에도 들러, 이틀이나 묵으면서 눈으로 보고 하였지만, 황주 아주먼네는 소리치게 잘하고 살고 있었다. 그 전 해 가을에도 어머니가 다녀와 잘하고 살더란 이야기를 하여 대당 짐작을 하기는 하였었으나 실지로 보고는 깜짝 놀랐다.
넓은 터전에다 기와집을 상하채로 날아갈 듯 지어놓았었다.
물자가 극도로 귀할 무렵에 그 좋은 재목하며 유리하며 고급의 도배지와 장판지며, 어디서 골고루 그렇게 구해다 썼는지 몰랐다.
방방이 들여논 조선식 서양식 일본식의 각종 가구며, 벽에 붙이고 걸리고 한 고전미술이며 모두가 귀하고 값진 것이었었다.
마침 붉은벽돌로 빙 둘러 담을 쌓고 있는데, 흙 파다 쓰듯 흔하게 쓰는 시멘트를 보고, 나는 시멘 한 되빡을 구하지 못해 부뚜막을 맨흙으로 바르고 지내는 우리 집을 생각하였다.
설탕, 상품의 왜간장, 옥 같은 입쌀밥, 생선, 고기, 맥주, 일본주, 나라 상감님이 구해 바치라고 하여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만 마치 예사에 것처럼, 그리고 풍부히 있었다.
고무신, 광당목, 순목의 양복천, 각종의 비단, 양말, 고급의 화장품, 또한 없는 것이 없었다.
이런 의복감이야. 아무려면 장롱 속을 열고 보았을까마는, 황주 아주머니가 자랑삼아선지 모두 구경을 시켜 주었다.
그 끝에, 안주 항라로 아버지의 두루막 한 감, 어머니의 치마 적삼 한감, 나에게는 옥양목으로 와이셔츠 두 감, 이렇게를 선사로 주었다.
그 옥양목으로 만든 와아샤쓰는 아끼고 아껴 지금까지도 나는 입고 있다.
아뭏든 그렇게 황주 아주먼네는 일반으로 하여금은 양말 한 켤레 제대로 얻어 신지 못하고, 비웃 한 꽁댕이 반반히 얻어먹지 못하게 할 만큼 물자의 바닥을 내다시피 하는 그 전쟁이, 대체 어느 구석에서 전쟁 바람이 부느냐 할 지경이었다.
사과밭이, 박재춘이 결혼 때에 처재(妻財)로 탄 백주짜리 말고도, 8백주짜리가 또 하나 있었다.
결실이 잘 되었고, 모두 봉지를 지었고, 이른 종자는 오래잖아 딸 것도 있었다.
사과밭 외에 논이 고래실 상답으로 4천 평 가량이나 되는 것이 있었다.
황주 아주머니의 설명을 들으면, 집과 새로 샀다는 사과밭과 논과 이런 것이 모두가 재춘이 처재로 탄 사과밭에서 나은 수입과, 재춘이 연말 상여금이니 출장 여비니 임시수당이니 하는 월급 이외의 수입을 저축한 것과, 그리고 황주 아주머니가 서울서 내려오면서 몽똥그려 가지고 온 2천 원과 이렇게를 가지고 장만한 것이라고 하였다.
박재춘은 계미년(癸未年 : 1943년)에는 다시 경부보로 승차를 하는 동시에 중화경찰서로부터 겸이포경찰서로 전근하여, 햇수로 3년째 경제계 주임의 요직에 앉아 있었다.
창씨(創氏)를 박촌(朴村)이라 하였다.
박촌 경부보는 황주에다 집을 짓고 사과밭과 논을 사고 하여 영주의 근거를 장만하면서, 근무하는 겸이포에는 간단한 세간을 가지고 내외양주만 가서 관사에 들어 살고 있었다.
박촌 주임은 내가 당도하던 날 소식을 듣고 석양에 자동차를 몰고 와 나를 데리고 겸이포로 가서, 큰 일본 요리집에다 일본 기생, 조선 기생 많이 불러 크게 잔치를 배설하고 나를 환대하였다.
그 자리에서 술이 거나하니 취한 박촌 주임은, 이 몇 가지를 몇 번이고 강경하게 주장하고 맹세하고 하였다.
조선 사람은 일본과 떨어져 살지를 못한다는 것. 그러므로 조선 사람은 하루바삐 진심으로 일본 사람이 되어야만 그는 하루바삐 행복할 수가 있다는 것. 그리고 박촌 주임 자신은 서른세 살까지엔 기어코 경부가 되고 서른아홉 살까지엔 기어코 경시가 되고 한다는 것, 이런 것이었다.
때의 그의 나이 겨우 서른한 살이요 나보다 두 살이나 아래였었다.
가을에는 전검시험(專門學校檢定試驗)을, 명춘 일찍이는 고문 시험(高等 文官試驗)을 칠 터이고, 준비는 다 되어 있노라는 말도 하였다.
그의 발랄한 재기와 영리함과 그리고 민첩한 수완과 넘치는 패기와에 나는 경복치 아니치 못하였다.
나이 두 살이나 위요, 명색이 전문학교까지 나왔으면서 아무런 광채도 야심도 패기 없이 한낱 초등학교의 교원 자리에 만족하고 있는 나를 생각할 때에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고, 그에게 비하여 어린아이 같기도 하였다.
잔치가 피하고 나서는 밉지 않게 생긴 일본 기생 하나를 자꾸만 나에게 떠안기려고 가진 수를 부려쌌다.
술은 먹기로 들면 쓸쓸히 먹는 편이나, 서른세 살의 나이가 되기까지 남의 계집이라고는 손목 한번 본 좋게 붙잡아본 일이 없는 나였다.
팔자에 없는 오입 대접을 모면하기에 한동안 땀을 빼었다.
둘째딸 춘자는 스물두 살이요, 그 전 해에 고등여학교를 마치고 시방 결혼 준비를 하는 참이라고 황주 아주머니가 말하였다.
춘자는 다른 남매와 달라, 어머니를 닮지 않고 아버지 편을 닮아 본시도 예쁘장스런 얼굴이었다.
황주로 내려오던 열일곱 살 적에 갈리고 이번이 처음인데, 그동안 활짝 피어 좋은 신부감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몹시 침울한 기색을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이 춘자가 무척 반가왔다.
그렇도록 춘자가 반가우리라고는 나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노릇이었다.
짧은 동안이었지만, 제일 많이 춘자와 사과밭을 거닐면서 이야기하고 놀고 하였다.
춘자도 나를 깜빡 반가와하였고, 나와 함께 있는 시간만은 그 침울한 기색이 가시고 명랑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놀고 하였다.
막내둥이 영춘은 그동안 벌써 나이 열일곱에 몰라볼 만큼 자랐고, 겸이포의 일본 사람 중학엘 통학하고 있었다.
영춘은 일본 사람 중학엘 다니게 하는 형 박촌 경부보에 대하여 나더러 불평 이야기를 하였다.
일본 아이들한테 갖은 구박을 받는 설움을 갖추 호소하면서……
하여커나 그런 사소한 것은 말고, 이렇게 황주 아주머니는 네 남매가 다 잘 자라났고, 공부도 하고 하여 남의 축에 빠지지 아니할 만큼 성장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큰아들 재춘은 겨우 30에 그만한 지체에 올랐고, 앞으로 더욱 대성할 길이 환히 트여 있었다.
재산이 이루어졌다.
이 판국에 백만금을 누리는 부자로도 감히 생의치 못할 풍족한 생활을 하였다.
열여섯 해 전 기사년(己巳年 : 1929년) 가을의 어느 날, 젖먹이 등에 업고, 세 아이 걸려가지고, 막막히 서울 거리에 서던 날의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감개 없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의 이 기초는, 그날로부터 시작하여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자지 않고, 쉬지 않고, 심지어 한 지게 1전 하는 물까지도, 등에다 아이 업은 머리로 여다 먹으면서 열 명이나 되는 남의 집 선머슴 아이들의 밥 심부름을 열두 해 동안 두고 하루같이 하여 온 거기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노력과 고초를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 바가 오늘이었음을 생각 할 때에 황주 아주머니로서는, 오늘의 안정과 성취가 남달리 더 뜻이 깊고 소중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하루 아침 꿈결같이 잃어버렸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노염이 한결이나 컸을 것도 또한 당연한 인정일 것이었다.
황주에 최라고 하는 초등학교 적의 제자 하나가 있었다.
보통학교를 5학년부터 6학년까지 내가 맡아 가르쳤고, 중학이 내가 다닌 XX중학이요, 하여서 최군은 나의 제자인 동시에 중학 후배 동창이 기도 하였다.
그런 관계도 있고 하여 의가 서로 자별한 것이 있었다.
최군은 본시 서울 태생이었으나, 최군의 말로써 하면 일본제국의 기만적인 폭압정치 ——— 불합리하고 추악한 세상과 타협・굴종하기가 싫어 특히 학병(學兵)을 기피하기 위하여 병을 창탈하고 전문학교를 중도에 폐한 후, 동무의 반연으로 황주에다 조그마한 사과밭을 마련하여 가지고 홀어미나와 함께 과수나 가꾸면서 죽은 듯 엎드려 독서와 사색으로 때를 기다리고 있는 청년이었다.
사과밭 가운데의 모종에서, 최군은 뜻하지 아니한 나를 반가이 맞이하여 주었다.
조촐한 술상이 나오고, 손 닿는 사과나무에서 아직 맛이 덜 든 대로 사과를 따 소주잔을 주고받고 하면서, 오래 적조한 이야기로, 먼 소학교 시절의 회고담으로, 때의 시국에 대한 비판으로, 둘이는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최군은 독일이 패전을 하여 일본과의 동서 호응 작전(東西呼應作戰)의 전렬로부터 떨어져나간 것과, 그 영향 말고도 일본이 독자적으로 지칠 대로 지친 여러 가지의 구체적인 실증과, 소비에트 러시아가 대일작전에 참가할 것과, 이런 여러 가지의 사실을 기초로 일본이 멀지 않아 항복을 하고 말 것을 자신 있어 단언하였다.
최군은 또 단지 소극적으로 세상을 피하여 과수 재배나 하면서 독서와 사색으로 무료히 세월을 보내고만 잇거니 여겼던 것은 나의 잘못 짐작이었고, 실상은 그러한 캄플라지 밑에서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일하고 있는 눈치가 보이는 것 같았다.
중국 연안(延安)에 독립동맹(獨立同盟)이라는 조선 사람의 적색 해방 투쟁단체가 있고, 조선 안에서는 여운형이 그와 기맥을 통하여 있다는 꿈 같은 이야기를 나는 얼마 전에 서울서 들은 것이 있었다.
당시의 나에게는 별을 따려고 드는 사람들의 일같이 허황하고 부질없은 이야기였다.
최군이 그런데, 역시 그 독립동맹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야기를 하되, 들은 풍월로, 제 3자적인 처지에서 이야기삼아 옮기는 그러 것이 아니라, 어디라 없이 그 자신이 일맥의 간여가 없고는 그토록 절절하게 이야기를 할 수가 없을 아주 육체적인 것이 엿보였다.
나는 어젯밤 겸이포의 요정에서 이름 드날리는 경부보 박재춘의 앞에서와는 한 다른 의미에서, 이 최군의 앞에서도 나 자신의 하잘것없은 위인임을 또한 뼈아프게 느끼지 아니치 못하였다.
최군은 나의 제자요 후배요, 나이 10년이나 어린 사람이건만, 시국과 세계대세에 대하여 세밀하고도 예리한 관찰을 하는 밝음이 있고, 그것을 명석하게 판단 결론하는 정확한 판단력이 갖추어져 있었다.
거기에 대면 나는 맹추였다.
적의 군함을 몇 척을 깨트리고, 비행기를 몇십 대를 쏘아 떨어트리고, 몇 백 명을 죽이고, 몇천 명을 사로잡고 하였고, 그리고 ‘아방의 피해 근소하다’고 하는 소위 대본영 발표를 그대로 곧이듣는 멍텅구리였다.
최군은 침략자 일본에 대하여 어떠한 정도의 힘인지는 모르겠으되, 가사 그것이 지극히 미약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종시 부질없고 허황한 노릇이어서 성과에 기대를 둘 것이 못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아뭏든 그는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한몫을 거들고 있는 사람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반대로 나는 조선의 어린 사람들에게 일본이 조선을 침략정복한 것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조선말을 금하며 일본말을 쓰도록 나무라고, 조선 사람이기를 버리고서 일본 사람이 되기를 강요 혹은 유인하고, 매일같이 고고꾸신민노세이시皇國臣民の 誓詞)를 외우게 하고 덴노헤이까 반사이(天皇陛下萬歲)를 부르게 하지 아니치 못하는 한 비루하고 무력한 인간에 지나지 못하였다.
조선의 어린 사람들을 잘 가르치고 지도하고 하겠다는 그 관념은, 역사의 앞에 이미 그 내용의 발전을 구속하는 방해물로 전화가 되었것만, 그것을 뿌리치고 일어서지 못하는 것이 나의 타성적(惰性的)인 용렬스런 지아비임을 말하는 것이었었다.
날이 어느덧 저물었고, 최군의 집으로 들어가 저녁을 같이 하면서였다.
최군은 지난 말처럼
“그 박씨네완 가차운 일가신가요?”
하고 물었다.
나도 심상히
“두 집 마나님끼리 사이가 가차워 그렇지 나완 외가루 열 5, 6촌이라니깐 무어……”
“그럼, 남이나 다름없군요?”
“그렇겠지.”
“………”
최군은 무엇을 생각하면서 잠깐 말이 없다가
“여러 날 묵으시나요? ”
“내일 아침차루 떠날 예정은 예정인데, 그 집에서 자꾸만 더 놀다 가라구 만률 해싸서……”
“선생님?”
“응.”
“눈치밥 잡숫지 마시구 내일 아침차루 떠나시죠.”
최군의 말에는 자못 단정적인 것이 있었다.
나는 뻐언히 최군을 건너다보다가 물었다.
“눈치밥이라니? 설마 그 집에서……”
“설마 그 집에서 눈칠 할 리야 없을 테죠. ……남들이 눈칠 합니다.”
“남?”
“며느리가 미우면 발굼치가 달걀 같은 것두 숭이라구 아니합니까? 이 황주 중화 겸이포 세 고장 사람들 치구, 그 박씨네가 밉지 아니한 사람이 없답니다. 박씨네가 미우니깐, 그 집 일가나 손님으루 온 사람두 밉구요.”
“오오!”
나는 비로소 깨칠 수가 있었다.
“아모리나 일가간이요, 큰사모님과는 사이가 가찹다시는 선생님 면전에서 차마 박절합니다만서두, 박재춘이 그 사람, 잘못하다 인제 와석종신하기 어려울 겝니다. 옛날 민XX가 평양감사루 와 하든 갈퀴질이, 어데 박재춘일 따릅니까? 신랄하구 악착하구 광범위하구, 그리구 단작스럽구. …… 오죽해 순사 적엔 정거장 앞에서 채밀 팔구 있는 채미장사 껄다 갉아먹었대잖습니까?”
“………”
“그 집 사과밭, 큰 거 있는 것 보셨을 겝니다. 겸이포 사람의 것인데, 그 사람을 옭아넣군, 거저 빼앗다시피 했죠. 이 황주바닥에서두 젤 치는 좋은 사과밭이죠. 정당한 매매라면 10만 원에두 내놓지 아녈 사과밭입니다.
……대체, 매달 40 몇원의 월급이나 받구 처재루 탄 백 주짜리 사과밭, 그러나마 3급 4급밖에 아니 되는 그 백 주짜리 사과밭에서 나는 걸 가지구, 대관절 그런 홀란스런 집이 지어지며, 10만 원짜리 사과밭이 사지며, 1등 옥답으루 4천 평의 논이 사지며 합니까? 또, 제왕두 어려운 그런 호화로운 식생활을 하며, 옷치레를 합니까.”
“………”
듣고 생각하니 미상불 그러하였다. 박재춘의 월급 수입과 처재로 탄 사과밭에서의 수입과 황주 아주머니의 2천 원과, 이것만으로는 도저히 흉내도 내지 못할 노릇인 것을 알겠었다.
“황주, 중화, 겸이포 세 고장 사람으루 박재춘이 좋다는 인간 녀석이 없읍니다. 가슴에 칼을 머금구, 북북 이를 갈아대는 사람이 얼만지를 모릅니다……겉으룬 다들 혼연하구 내색을 아니합니다. 잘못하다 애끛인 봉변을 할 테니깐요 . 저두 실상, 종종 만나, 바둑두 두구 술두 먹구 보비위두 해주구, 명절땐 잊지 않구 두둑히 선살 하구 하면서, 절친히 지나는 척합니다. 그리구 덕분에, 아직껏은 증용두 아니 가구, 주목두 아니 받구 무사히 지나긴 합니다. 그렇지만, 박재춘이가 만일 그 집 그 전장을 지니구 늙두룩 편안히 살다 와서 와석종신을 한다면, 그야말루 천도가 무심하죠. ……박재춘이 별명이 이완용이 서잡(庶子)니다. 이완용이 똥방자라구두 부르구요. 역적놈 이완용이가 일본다 나라 팔아먹은 뒷추릴 하는 녀석이래서 생긴 별명이죠. 조선말 절대루 아니씁니다. 심지어 제 계집허구두 일본말루다 곧잘 지껄이는걸요. 일본이라면 덮어 놓구 위대하구 좋구, 조선놈은 다 도둑놈이요 나쁜 놈입니다.”
“………”
“20여 일 전에, 평양 있는 치구한테서 편지가 왔어요. 박춘자의 집안에 관한 것을 정확 세밀히 알려 달라구. 박춘자가 평양으루 혼인이 얼린다구 하더니, 아마 그 친구의 집안 누구던가 봐요. 처지가 퍽 곤란하겠죠. 해두, 거짓말을 했다, 남의 일생의 큰일을 그르쳐 주어선 아니 되겠어서 사실대루 편질 했죠. 아마 그 혼인 깨졌기 쉴 겝니다. 벼랑 큰 죄두 없는 박춘자 그 당자한테야 미안한 노릇이지만, 어떡헙니까?”
“연앨 했던가?”
나는 춘자가 결혼할 준비를 한다면서 몹시 침울하던 것을 생각하고 그렇게 물어보았다.
“연애나 했다면 저두 차라리 덜 미안하죠. 연애하는 남녀 사이라면야 가정이 좀 무엇하더래두, 그래서 반대가 있더래두 저이끼리 우겨 혼인이 그런 대루 얼리는 수두 있으니깐요. ……양편 집안에서 서둘러서 하는 혼인이던가 봐요. 맞선은 보았다드군요.”
이튿날 아침, 나는 황주 아주머니가 못내 섭섭하여 하는 것을 겨우 뿌리치고 예정대로 황주를 떠났다.
춘자와 동행이 되었다.
내가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나서려니까, 춘자가 저도 마침 챙겨놓았었던 모양으로, 보스톤백을 들고 양장으로 차리고서 따라나섰다.
황주 아주머니는 잠깐 저마를 하더니, 데리고 가 집에 두어두고 한 달만 있다 내려보내라면서, 춘자의 가방에다 여비를 두둑히 넣어주었다.
춘자는 한 보름 우리 집에서 있다 나와의 그 편지 사단이 있던 날 우리 집을 나가 어디론지 가버렸다.
가슴에 울화를 품은 처녀를 함부로 지향없이 나가게 하기가 조심이 되고 황주 아주머니한데 민망한 노릇이었으나, 그렇다고 부득부득 나가는 사람을 허리 매어두는 수도 없었다.
며칠 있다 8·15의 해방이 오고, 38‘방해선’이 생기고 하였다.
서울서 사는 송자가 하루 걸러큼씩 와서 고향집 소식을 몰라——— 모른다기보다고 어떤 불길한 예감에 울며불며 조바심을 쳤다.
이윽고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정확성도 없고, 겸해서 먼저 소식과 나중 소식에 사이에 공통성이나 연락성도 없고 한 것은 한 것이었으나, 심히 상서롭지가 못하다는 한 점에는 일치가 되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입밖에 내지는 아니하였으나 무시로 최군의 하던 말
“박재춘이가 와석종신을 한다면……”
하던 그 말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참담한 광경이 눈에 서언히 밟히곤 하였다.
박재춘은 양주가 겸이포에서는 요행 무사히 몸을 빠져나왔으나 황주로 오기가 잘못이어서, 황주 경내의 어떤 동네에서 형체를 분간키 어려울 만큼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는 구체적이요 자상한 경위는 이듬해 봄 황주 아주머니가 영춘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직접 이야기를 하여서야 비로서 알았었다.
황주 아주머니는 산산이 부서진 바 된 집에서 그래도 집과 전장을 부둥겨잡고 늘었으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을 시킨다는 강제명령의 앞에서는 어떻게 하는 도리가 없어, 집에다 두었던 현금 10만 원만 지니고 영춘과 함께 월남(越南)을 하여온 것이었었다.
사람이란 대개가 자신이 저지른 바 원인으로 하여 그 필연적인 보과(報果)를 받음에 있어서, 그 저지른 바 원인일랑 고려에 넣지를 아니하고, 받는 바 보과만을 억울타 하는 약점을 가지도록 마련인 듯싶어, 황주 아주머니도 그 테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였다.
황주 아주머니는 어찌해서 박 재춘이 양주가 함께 그처럼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으며, 어찌해서 재산을 적몰을 당하고 쫓기어 왔으며 하였다는 원인에 대하여는 전혀 참작함이 없었다.
다만 생때 같은 아들이, 애탄가탄 길러 그만큼이나 성장을 하였고, 앞으로 더욱 발신이 될 훌륭한 아들이 난민의 손에 참살을 당한 것이, 이것만이 원통하고 분할 따름이었다.
평생 두고 잘 살고, 대대손손 물려가며 잘 살 수 있는 재산을, 온갖 신고를 다 하던 끝에 겨우 그만큼이나 이루어논 재산을, 하루 아침 꿈결같이 빼앗겨버린 것이, 그것만이 미련겨웁고 안타깝고 절통하고 한 것이었었다.
그리고, 그리하여 공산당은, 좌익은, 빨갱이는 황주 아주머니와는 하늘을 더불어 일 수 없는 원수요, 갈아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는 원한의 과녁이요한 것이었었다.
4
편집사흘인가 지나서였다.
점심 후 진고개(舊本町通)의 헌 책사를 들러 명동 거리를 내려오다 국방경비대의 소위의 복장으로 차린 영춘을 퍼뜩 만났다.
반가와하면서, 그러지 않아도 상의할 말이 있어 일간 나를 한번 찾아오려던 참이라고 하여, 골목 안의 조용한 다방으루 데리고 들어갔다.
손위의 형도 없거니와 손아래로 동생이 없는 나는 이 영춘을 친동생처럼 귀애하였고, 영춘도 나를 잘 따르고 신뢰를 하고 하였다. 더러 복잡한 일이 있든지 하면, 나를 찾아와 상의를 하곤 하였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나는 곰곰이 영춘을 바라다보았다.
키가 후릿하고 살이 알맞추 있고 표정은 분명하였다.
이 알맞은 살과 분명스런 표정은 3년 동안의 군대적인 강력한 훈련으로 다져진 것이었으리라.
체격과 기상은 그렇게 좋고, 국방경비대의 소위에 나이는 20…… 거동은 그러나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이렇게 어느덧 헌헌장부가 된 영춘이, 지금으로부터 열아홉 해 전 겨우 첫 돌이 지난 젖먹이의 유아로 삐악삐악 울면서 어머니인 황주 아주머니 등에 업혀 고향 황주로부터 살길을 찾아 막막히 서울 거리에 나타나던 그 영춘이던가 하면, 희한도 하려니와 일변 감회 깊은 것이 없지 못하였다.
20이라는 어린 나이로는 흔치 못한 곡절의 연속이었다.
첫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미니의 등에 업혀 막막하고 고달픈 생애를 출발하였다는 것이 벌써 심상치 아니한 운명이었다.
열두 해를 가난과 고로(苦勞)와 싸우는 어머니 밑에서 찬밥덩이를 먹고 누더기를 걸치고 함께 고초를 겪으면서 자랐다.
고향 황주로 돌아가 살던 해방까지의 다섯 해 동안은 경제적으로는 매우 윤택하게 지낼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우울하고 늘 불안한 날을 보내야 하던 시절이었다.
형 박재춘이 일본인 소학교에다 전학을 시켰고, 중학도 일본인 중학에 입학을 시켰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 아이들은 ‘센징’ ‘요보’를 텃세하고 구박하였다. 함께 휩쓸려 놀아주지를 않고 돌려놓았다.
마늘 냄새가 난다구‘센징구사이’하다면서 옆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하는 아이까지 있었다.
숙제 같은 것을 잘 하여 선생의 칭찬을 받는다치면 시새워 한결 더 구박을 하였다.
한 아이와 시비가 나면, 먼저 잘못이야 어는 편에 있던지 동족인 일본 아이의 편역을 들어 여러 놈이 몰매를 때리곤 하였다.
해방되던 해요, 중학 3년급에서 4년급으로 진급하던 무렵이었다.
그날치 한 학과에 예습이 미흡한 것이 있어 통학하는 차중에서 노트에 적기를 하다 연필심이 부질러졌다.
둘러보는데 마침 저편짝 구석자리에서 역시 통학생인 일본인 고등여학교 생도 하나가 연필을 깎고 있었다.
열서너 살이나 되었을까한 소녀였었다.
영춘은 가 칼을 빌려다 연필을 깎고는 이내 돌려주었다.
이날 학교가 파하여 정거장으로 오는 길에서, 영춘은 여남은이나 되는 일본인 생도들에게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 늑신 매를 맞았다.
표방하는 죄목은, 중학생 녀석이, 더구나 주둥이가 새파란 녀석이 벌써부터 그런 풍기 아름답지 못한 거동을 하니 괘씸하다는 것이었었다.
저희들은 아주 노골하고 심각한 장난을 여생도들과 하면서…… 그러므로, 푸기 어쩌고 하는 수작은 억지엣 구실일 따름이었다.
두들겨패면서 그들은 연방 ‘센진노 구세니, 나이찌진노 죠세이도니 모숑오 가께루난떼 나마이끼’라고, ‘요보노 구세니, 붕기오 시라나이야쓰’라고 하였다.
정히 민족적인 집단성(集團性)을 띤 성적 질투(性的嫉妬)였었다.
영춘은 억울한 매를 맞고도 분함을 꿀꺽꿀꺽 삼켜야 하였다.
형 재춘더러 말을 하면 그야 분풀이를 하여 주기는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신 영춘은 형에게 못생긴 녀석이라는 가혹한 꾸지람과 무서운 매를 맞아야 할 것이매, 차라리 혼자 꿍꿍 참고 말기만 못한 노릇이었다.
처음 입학하던 1년급 때에 일본 아이들한테 몰매를 맞고 돌아와 형에게 일렀다 사정 없는 꾸지람과 매를 맞은 전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뭏든 그리하여 소년 영춘은 학업이 싫은 바는 아니면서도 학교가 싫어 우울하고 늘 불안한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8·15의 해방이 왔다.
영춘의 해방의 고마움을 살이 아프도록 느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 기승스럽고 야속히 굴던 일본 아이들이 그만 풀이 껶여버리는 것이며, 죽은 소리도 못하고 봇짐을 싸는 것이며…… 주먹덩이 같은 것이 여러 해 동안 뭉쳤던 가슴이 단박에 후련히 씻겨내려가는 것 같았다.
해방의 기쁨은 그러나 순간이었다. 형 박 재춘이 형수와 함께 참살을 당하였다.
현장에 가 시체를 거두어 올 염두조차 못하고 있는데 군중이 집을 습격하였다.
모자가 피하여 산에서 이틀을 지내고 내려왔을 때는 집은 지붕과 기둥만 앙상하니 남아 있었다.
사람은 없고 맹수만 시글시글한 고장에 있는 듯싶은 공포와 불안 속에서 해가 바뀌고, 이듬해 2월에는 재산의 몰수와 추방명령이 내리었다.
모자는 꿈에도 뜻하지 아니한 고달픈 남행(南行)을 다시 한번 해야만 하였었다.
영춘은 타고난 천품도 천품이었지만, 아울러 일찍부터 그러한 생활상의 신고와 곡절을 유난히 치른 것으로 하여, 그는 20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워진 것이 있던 것이었었다.
영춘은 월남(越南)하여 와서 이내 국방경비대에 들었다.
돈이나 조금 가지고 왔다곤 하지만, 그것을 장대고 배포 유하게 공부나 하고 앉았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취직을 하자 하니 중학도 미처 마치지 못한 이력이매 우난 직업자리가 얻어질 리가 없고, 그래서 차라리 군인이라도 될까 하는데, 형님은 의견이 어떠시요 하고 나에게 상의를 하였었다.
나는 그렇더라도 학업을 계속하는 편이 옳겠다고 하였으나, 고쳐 생각하겠노라고 하더니, 역시 경비대엘 들어가고 말았다.
3년 반이나마 중학을 다닌 기초가 있고, 체격이 좋고, 다부진 구석도 있고 한 것으로 연해 술술 승차를 하더니, 오늘은 본즉 소위였었다.
시원한 차를 마시면서 피차의 집안 안부를 묻고 그러고는 시국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훨씬 그런 뒤에 영춘은 비로소 애틋한 황해도 사투리와 악센트가 섞이는 말로
“형님을 좀 뵙자든 것은 다름이 아니구요……”
하고 상의엣 말이라는 것을 꺼내었다.
“전 아무래두 집에서 나와야 할 거 겉애요.”
“………”
모친 황주 아주머니와 뜻이 오락 맞지를 않아 가끔 의견의 충돌이 있고 한 줄은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첨에 제가 경비대에 들어간 것은, 형님두 아시다시피 뚜렷한 목적이나 어떤 신념이 있어가지구 그랬던 지가 아니라, 막연히 그저 들어가 보았던 게 아니나요?…… 했던 것이 지끔 와선 저두 조금은 철두 들구, 또 군인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라던지 자각이라던지가 그동안 서진 것이 있구 해서, 전 제 한몸을 군인으루써 나라에 바치겠다는 굳은 각오가 생기구 말았어요. 그런데 오마인 글쎄 자꾸만 절더러 경비댈 고만두구 나오라구 조르구 성활 대시느만요.”
“어머니가?”
나는 부지중 이마를 찡그리면서 되물었다. 엊그저께서 황주 아주머니가 와 칼국수를 자시면서
“……이승만 박사루 대통령이 났으니깐. 이내 곧 정부가 생기구, 이어서 독립이 되구. 그리군 국방경비대가 쏟아져 나가서 38선을 뚜드려부시구.
……우리 영춘인, 이박사께서, 쳐랏 호령만 내리시면 지끔 당장 이래두 뛰어가서 38선을 무찌를 테라구. 저이 동간들허구두 늘 얘기하느니 그 얘기라구, 비번날 집일 다니러 오는족족. 그리면서 벼른답니다……”
하던 말로 미루어 아들 영춘이 국방경비대로 있는 것을 은연중 자랑도 스러워하는 눈치였지, 마땅치 않아하는 기색은 전혀 없지 않았던가.
“오마이 말씀은 이거야요. 오래잖아 인제 국방경비대가 북조선을 치게 될 텐데, 네가 만일 나갔다 죽기나 한다면 나는 누구를 바라구 살더란 말이냐? 그러니 일찌감치 지끔 나오구 말게 해라, 이거야요.”
“어머니의 처지루 생각한다면 그럭허시는 것두……”
“형님……”
영춘은 급히 말을 가로막으면서
“전 오마이 생각과 대단히 불순(不純)하다구 보아요. 오마인 늘 말씀이, 어서 바삐 이승만 박사께서 북조선을 쳐라 하는 영을 내리서야 우리 국방경비대가 38선을 직쳐 넘어가서 그놈들 공산당———살인강도 놈들을 모주리 쳐 죽여, 형의 원술 갚구 우리 재산을 도루 찾구 하느라구, 머 노래부르듯 하신답니다. 그리시면서두 절더런 북조선을 치다 죽으면 안되겠으니, 슬며시 자끔 빠져나오라구 졸라대시니, 말씀이죠, 형님. 나는 위험한 데서 빠지구 남이 , 피흘려 가면서 일해놓는다치면, 가만히 앉았다 그 덕이나 보자는 교활한 타산이 아냐요? 그렇잖아요 형님?”
“………”
“그것이 우리 오마이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 사람들이 아주 나쁜 버릇이야요. 나는 안전한 곳에 편안히 앉어 구경이나 하다, 나중 가서 떡이나 얻어먹자구 드는 심보. 그거가 나랄 망해 먹은 장본예요. 조선 사람이, 그 버릇 그 심보, 내다 버리기 전엔 독립이 돼두 이내 또 망하죠.
대체, 희생정신과 민족관념이 없는 민족이 어떻게 자주독립을 길게 지탕 하나요?”
“………”
“오마인 불순한 것이 또 있어요. 오마인, 남조선이 북조선을 치게 되면, 공산당을 모조리 잡아 죽이구, 그래서 죽은 형의 원술 갚구, 그리구 뺏긴 집이랑 사과밭이랑 논이랑 다 도루 찾구 할 테니깐, 그래 오마인 밤이나 낮이나 앉아서 어서 바삐 북조선을 들이쳐야지 하구, 노래 부르듯 하는 거야요. 그러니깐 오마인, 남조선이 북조선을 친 그 결과를 관심하는 거지, 아들의 원술 갚구, 뺏긴 재산을 도루 찾구 한다는 것이 문제의 중심이지, 남조선이 북조선을 치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두 흥미두 없거든요. 또 남조선이 북조선을 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못하냐 하는 것두 전혀 오마이한텐 문제가 아니구요…… 그러니깐 오마인 결국 남의 불에 겔(蟹) 잡자는, 아조 게으르구 이기적인 그런 타산(打算) 아냐요? 내 아들은 죽을까 무서니깐 슬며시 빼돌리구, 남이 필 흘려 주길 기대려 가만히 앉았다 원술 갚구, 재산을 도루 찾구 하는, 덕만 보자는 교활하구 이기적인…… 그렇잖아요, 형님? 형님은 오마이의 그런 맘상과 행동에서, 조선 사람 전체에 배 있는 망국 민족의 기질을 발견하신다구 생각지 않으시나요?”
“………”
“물론 전 명령 일하에 총을 잡구 나설 테야요. 38선 무찌르구, 북조선을 치구 할 테야요. 그렇지만 지가 북조선을 치는 데에 참가하는건, 그것이 통일 독립이라는 우리 조선민족의 지상 명령, 그 지상 명령을 실현하는 수단이란는 걸 잘 알구 있기 때문야요. 다른건 없어요. 형의 원술 갚는다는가, 그런 건 저한텐 문제가 아냐요…… 그야 저두 사람인 이상……”
영춘은 부지중 흥준하였던 음성을 차악 갈앉히면서, 곰곰
“필 노눈 형이 그런 악찬스런 죽음을 당한 것이 분하기두 하구 애처로운 맘두 없지 않아 있구 하긴 해요. 해두, 전 복술 할 생각은 없어요. 도대체 형이 잘못을 했으니까요. 너무 무도한 짓을 했으니까요. 방법이 좀 잔인했을 따름이지, 형은 자기가 저지른 죄과의 당연한 댓가를 치른거야요.
제가 그 고장 사람들이라구 하더래두, 도저히 박재춘일 용서하고픈 도량까지는 나질 않았을 거야요. 재산은 더구나 말할 것두 없어요. 정당한 재산이라구 한다면, 형이 처가에서 탄 백 주짜리 사과밭한 뙈기허구, 오마이가 서울서 가지구 내려가신 돈2천 원허구 그것뿐야요. 월남할 때 현금 10만 원 가지구 왔으니깐, 그 두 가지만큼은 넉넉히 찾은 심이 아냐요? 그 밖에 집이라든지 논이라든지 큰 사과밭이라든지 다시 찾구퍼하는 맘부터가 벌써 죄야요. 이 다음 그것이 우리 것으루 돌아올 기회가 있다구 하드래두 전 절대루 그걸 받지 않을 테야요. 절대루……”
“으음……”
나는 저절로 이런 탄성이 흘러져 나오면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었다.
영춘을 좋게 본 나의 눈이 무디지 않았음이 기뻤다.
일변, 그러나 나는 마음이 문득 어두워지는 것이 있었다.
‘남조선이 북조선을 치는 날이면?’
혹은 북조선에서 남조선을 먼저 칠는지도 모르는 것인데, 한번 사단이 이는 날 우리는 남북을 해아리지 않고 대규모의 동족상잔, 골육상식이라는 피의 비극 속에 휩쓸려 들고라야 말 것이었다. 제주도의 사태가 전조선적인 구모로 확대가 되는 것이었었다.
“영춘아?”
“네?”
“너허구 나허구쯤 백날 앉아서 그런 걱정을 한댔자 아무 소용두 없는 노릇은 노릇이지만서두, 그 남조선이 북조선을 친다는 것 말이다. 그런 수단이 아니군 달린 남북통일을 할 도리가 없을 꺼나? 동족 도포끼리 서루 죽이구 필 흘리구 하질 말구서 말이야.”
“그야 슬픈 일이죠. 허지만 그밖엔 아무 도리가 없을 땐 그렇게라두 해서 남북은 통일을 해놓아야 할 게 아니겠어요?”
“남북이 반드시 통일이 돼야만 한다는 건 나두 절대 주장이지만, 아무래두 필 흘려야만 된다?”
“전, 최고지도잘 믿습니다. 이승만 박살 믿습니다. 평화적인 방법으루다 하다 못하는 날이면, 그때 비로소 비상수단을 취한다는 어짐과 총명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리구, 그러니깐 전 명령이 나리는 날이면, 이건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수단, 피치 못할 막다른 수단인 걸루 전적 신뢰를 하구서 총잡구 선으루 달려간다는 38 것뿐입니다. 핀 흘리드래두, 통일을 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테니깐요.”
“………”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영춘아?”
“네?”
“남조선이 북조선을 치다 만약 불행해서 실팰 하는 날이면?”
“글쎄요. 전 그럴 리가 없다구 생각합니다만……”
“무슨 근거루?…… 미군이 남도선에 그대루 주둔해 있을 테란 걸루?”
“형님?”
부르는 영춘의 기색은 문득 강경한 것이 있었다.
“형님은 우리 남조선에 미군이 앞으루 언제까지구 주둔해 있길 희망하십니까? 정부가 서구, 독립이 되구, 국제적으루 승인을 받구, 그런 독립국가 조선에 말씀야요. 형님은 미군이 그대루 주둔해 있길 희망하십니까?”
“희망토록은 아니지만…… 희망이라니보다두, 지끔 형편 돌아가는 눈치가 어쩐지……”
“외국 군대가 주둔해 있는 독립두 그것두 독립이나요? 보호국이지, 독립국은 아닌 거 아냐요?”
“그야 물론……”
“이승만 박사께서, 미국 신문기자한테 남조선에 독립정부가 서드래두, 미군은 눌러 그대루 주둔해 있어 달라구 할 테라구 말씀을 하섰다는 신문 기살, 허긴 저두 보긴 봤읍니다. 그렇지만, 전 이승만 박살 믿는 만침, 그 으런이 절대루 그런 말씀을 하섰으리라군 믿구 싶질 않어요. 그으런이 그런 생각을 가지구 기실 이치가 없어요. 아마 미국 자신이 어떤 정치적 필요에서, 의식적으루 꾸며낸 정치적 제스추어기 쉴 겁니다.”
“그럴까?”
“소위 북조선 인민해방군이 남조선을 친다는 걸 가상하구서 난 말인 것이 분명한데 말씀이죠. ……형님, 가사 그런다구 합시다. 그런다구 하드래두 우리 사상이나 정치 노선은 상극이라두, 다 같은 우리 조선 사람한데 압박이면 압박, 창피면 창필 받구 살아야 합니까? 내 땅을 외국 군대가 차지하구 있는 총칼 밑에서, 이름만 독립이요, 실상은 보호국 노릇을 하구 살아야 합니까?…… 전 노골한 말이지, 요새두 연방 북조선에서 남조선으루 오구 있는 사람들더러, 저 독도사건(獨島事件)을 비롯해서 개인적인 살인, 강도질, 강간, 천시, 모욕, 비방, 중상 이런 갖추갖추의 우릴 개도야지만큼도 못 여기는 그런 밑에서 살기와, 북조선에서 노동자 농민에 의한 독재(獨裁) 밑에서 핍박받구 살기와 그 어느 편이 더 괴롭구 원통하구 섧구 하느냐구, 전 그 월남해 오는 북조선 동포들더러 한번 물어보구파요.”
“………”
나는 영춘의 말이 노상 편협한 감정인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그러니깐 이상적으루야 외국 군대가 물러가구. 남조선이 자력으루 북조선을 쳐 뻐젓하게 남북통일을 해치우구 하는 게 이상적이긴 이상적인데 말이다. 그러니깐 우선 그럼, 미국 군대가 물러갔다구 가정을 하자꾸나.
하구서, 남조선이 북조선을 치는데…… 치다. 그만 불행해서 실팰 하는 날이면 어떡헌다?”
“그런 것두 한번은 생각을 해봄직한 일은 일이죠만, 저 자신이 잇읍니다.”
“넌 군인이니까 신념이 그래야 할 것이지만, 전쟁이란 실력으루 승패가 졀정나는 거지, 감정이나 희망으루 되는 건 아니니깐. 너나 나나 남조선이 북조선을 쳐 승릴 하길 바라구 또 그래야만 하긴 하지만, 지끔 남조선의 실력두 미지수, 북조선의 실력두 미지수, 따라서 승패두 미지수가 아닌가?
그러니 불행히 북조선을 쳤다 실팰 하는 날이면…… 이것두 한번은 생각해볼 문제가 아니냔 말야?”
“남조선이 승릴 하면, 남조선 정부의 호령이 압록강 두만강까지 미칠테구, 실팰 하는 날이면 북조선 정권이 제주도까지 미치구 할 테죠.…… 남북 사이에 전단이 이는 날이면 그날루 38선이란 건 아뭏든지 없어지구서, 다신 유지되신 못할 테니깐요. 미국의 남북전쟁이 그랬구, 신라(新羅)의 백제(百濟)에 대한 통일전쟁이 그랬구 한 것 처럼, 이번의 남북통일 전쟁두 둘 중에 하나가 결정적으르루 쓰러지구 마는 그날까지 계속이 될 것이지, 그래서 남조선이 없어지거나 북조선이 없어지거나 하구서, 단지 조선이 남구 말 것이지, 절대루 둘이 다시 남아 있겐 아니 될 게 아니겠어요?”
“당연히, 북조선이 없어질 것이요, 그러길 우리는 희망하구 잇지만, 아차해서 북조선의 정권이 제주도에까지 미친다면?…… 생각만 해두 안타까운 노릇이 아냐?”
“그렇드래두 통일은 된 거 아냐요?”
그러면서 영춘은 딴 속 잇어 벌쭉 웃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내가 퍼뜩 놀라 짯짯이 저의 얼굴을 건너다보는 것을 보고는 또 한번 벌쭉 웃으면서 염려하실 거 없어요 “ . 빨갱이가 된 건 아니니깐요. 전 공산주인 절대루 싫어요.”
하고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그렇지만, 형님. 제가 공산주의가 싫다는 것과 대세(大勢)완 다르지 않어요? 가령 여름날이 더워서 더운 것이 육체상으루 고통이요 싫다는 것과, 그러나 여름이란 더웁기루 마련이라는 것과 즉 더운 것이 대세라는 것과는 다르드끼 말씀야요. 저 한 사람이 공산주의가 아무리 싫다구 하드래두 북조선 정권이 제주도까지 오는 것이 모든 조건에서 대세란다면 전 그것을 적어두 이론상으룬 승인을 해야 하는 거라구 생각해요.”
“………”
나는 그것을 부인할 아무런 조건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니깐 형님. 전 불행히 북조선 정권이 제주도까지 온다면, 감정상으룬 싫으나따나 이론상으룬 승인을 하긴 하겠지만 한가지 조건이 있어요. ……소련의 위성국가루써의 조선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어떤 방면에 있어서두 소련방의 간섭이나 그 제압을 받지 않는 완전 자주독립의 조선인민공화국이란 조건에서 승인을 하겠어요.”
“………”
“그리구 말씀예요, 형님. 전 비단 북조선 정권에 대해서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 남조선, 대한민국에 대해서두 마찬가지야요. 옛날 비율빈처럼, 실권은 여전히 미국 재벌이 쥐구 앉었는 그런 독립은 일없어요. 일제시대의 만주국 독립 같은 그런 독립은 일없어요. ……만일 어떤 놈이구 간에 그 따위 정불 만들어 가지구 내용으룬 외국에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으면서 수염을 쓰다듬구 앉어선 독립을 했읍네 하구 국민을 호령하는 놈이 있다면, 전 그런 놈 면점 때려죽이구서 북조선을 치러 갈테야요, 단연코 용설 안해요.”
탁자 위에 놓였던 주먹을 하마 터질 듯 불끈 쥐면서 푸르르 떨었다. 눈은 불이 활활 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덧붙여 하는 말이었다.
“제가 만일 일한합병 때 나서 있었다면, 이완용이, 이용구, 송병준이 그런 놈들을 살려두질 않아요.”
차를 다시 가져오게 하여 마시면서 오래도록 서로 말이 없었다.
나는 여기서도 ‘무서운’ 후진을 봄과 아울러 범속(凡俗)하고 용렬한 나 자신을 다시금 발견하였다.
훨씬만에 영춘은 조용한 음성으로 새로운 말을 꺼내었다.
“춘자 누나를, 걸 어떻게 했으면 좋아요?”
“………”
춘자라면 나는 여러 가지 착잡한 감정이 일지 아니할 수사 없었다.
“동기간 의리에 불쌍하다군 생각을 해요. 그렇지만 차라리 전 청산카리(靑酸加里) 같은 거라두 앵겨주구파요.”
“………”
“인전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데까지 타락이 되구 말았어요.”
“………”
“해방되는 해 형님이 황주 오섰을 때, 제가 왜놈의 학교엘 다니면서 온갖 구박과 설움받는 이애기하지 않았어요? 그리구 통학열차에서 일본 계집아이한테 칼을 빌려쓰군, 왜놈의 아이들한테 무리맬(몰매) 맞인이애길 했죠? 들으셨죠.”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었다.
“전 그때, 왜놈의 아이들이 절 그렇게 몹시 때린 심정이 지금야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대체 연애면 연애, 유희면 유흴, 조선놈허구나 한다면 구태라 누가 무어래겠어요?…… 어째서 그 XX놈들허구……”
춘자가 바람이 나기는 재작년 겨울부터였다.
미국 사람과 팔을 끼고 거리를 걸어오는 춘자와 딱 마주친 일이 있었다.
나는 알은체를 해야 옳은지, 모른 체해야 옳은지를 몰라 주춤주춤하는데, 춘자는 보아란 듯이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지나가 버렸다.
미국 사람과 찌프카에 앉아 달리는 것도 두세 차례 보았다.
춘자네 집 아래 찌프카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마침내 지나간 유월인가는 춘자가 아이를 뱄다는 소문이 좌악 퍼졌다.
그 소문이 퍼지면서, 춘자의 그림자는 거리에서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도 그 뒤로는 만나지 못하였다.
춘자가 타락이 되고 만 데는 그 책임이 한 부분은 나에게 있다면 있을 수가 없지 아니할 내력이 있었다.
황주서 맞선까지 보았다는 그 평양 청년과의 혼인이 깨어진 것은 춘자에게 커다란 타격이었음일시 분명하였다.
연애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맞선까지 보았고, 저편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춘자만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고, 혼담이 상당히 익었고 했던 것을, 남자편에서 파혼을 선언하였으니, 셈 들 대로 다 든 숫처녀로서 당하기엔 견딜 수 없는 실망이 아닐 수 없을 것이었었다.
나를 따라 서울로 한 보름 동안 우리 집에 있으면서 차차로 나에게 하는 태도가 매우 자연스럽지 아니한 것이 있었다. 생각컨대 한 잠자던 감정이 문득 파혼의 앙앙한 반감과 절망에서 오는 하나의 자포적이며 의식적인 반동으로 인하여, 그것이 비로소 불붙어오른 것일는지도 몰랐다.
우리 집에서 나가던 바로 그날 아침이었다.
안해는 여느때대로 부엌에서 어멈과 함께 조반 분별을 하였고, 나만 건넌방에서 혼자서 책을 읽고 있는데, 그러자 앞문 밖에서 춘자의 음성으로
“오빠, 나 어제 신문 좀 주세요.”
하였다. 그러면서 앞 미닫이가 손 하나 드날만큼 바깃이 열렸다. 그 열린 사이로, 툇마루에 가 모로 걸터앉았는 춘자의 소매 짧은 폴로샤쓰 소매 아래로 포동포동 드러난 팔이 내어다보였다.
처음 보는 바도 아니었으면서, 그렇게 보는 춘자의 팔은 그날 아침 따라 심히 매혹적인 것이 있었다.
책상 위에서 신문을 집어 열린 문 사이로 내밀어 주는 신문과 바뀌어 무엇이 문턱 안으로 사풋 떨어졌다.
배 볼록한 하얀 각봉투였다.
나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피가 와락 얼굴로 쏟혀 올랐다.
어른 미닫이는 닫혔으나, 편지‒‒‒‒각 봉투는, 기쁘면서도, 일변 방바닥에 흘린 숯불덩이같이 뜨거울 것이 무서워 손이 움츠러들었었다.
아까 춘자의 폴로샤쓰를 입은 드러난 팔이 매혹적이어 보인 것이나, 시방 그 편지를 바라다보면서 기뻐하는 것이나, 그것은 한가지로 나의 가슴속에서 진작부터 움터 가지고 잇던 어떤 특수한 한 개의 감정 상태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일컬어 연애라고 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난 지 33년 처음이었다.
나는, 그리고 춘자보다도 내가 먼저 춘자에게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1945년 여름, 황주에 갔을 때 그때부터였든지 모른다. 아니, 그보다도 더 멀리 춘자가 서울서 황주로 내려가던 열일곱 살 적, 햇물의 은어처럼 발랄하고 귀염성스럽고, 나를 따르고 하던 그 춘자 적부터였을는지 모른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집어들었다. 앞에다 ‘송선생님’ 뒤에다
‘춘’ 이렇게 썼었다.
나는 편지를 뜯을 용기를 문득 내지 못하였다.
그 속에는 내가 일찌기 들여가 본 적이 없는 화려한 세계가 담겨 있을 터이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무서운 세게이기도 한 것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나는 나 스스로가 몸을 단정히 가져 나의 어린 사람들에게 본받이가 되어야 할 직책에 있는 사람이었다. 의 아닌 행동을 하면서 어린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양심의 자살이었다.
나는 안해가 있는 사람이었다.
나의 안해는 연애를 한 것도 아니요, 도타운 애정이 서로간 있는 바도 아니었다. 보통학교를 겨우 마쳤을 뿐이니, 속에 든 것도 없고 인물도 별반 보잘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나의 안해임에 틀림이 없고, 나는 그의 남편임에 역시 틀림이 없었다. 좋으나 낮으나, 안해가 있는 사람이 한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하고 어쩌고 한다는 것은, 나의 윤리로는 허락할 수 없는 패덕(悖德)이었다.
고운 장미꽃을 완상하기 위하여, 꽃에 달린 가시에 살을 찔려야 하느냐, 꽃을 내다버려야 하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비록 30분에 지나지 못하는 시간이었으나 심각하기로는 다시 없이 심각한 암투를 치러야 하였다.
나는 편지를 종이에 싸가지고 춘자가 거처하는 뜰아랫방으로 내려갔다.
춘자는 내가 대뜰에 서는 것을 보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들지 못하였다.
옆 볼때기로, 귀로 부끄럼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그 고개를 푹 숙이고, 볼때기와 귀밑이 새빨개서 앉았는 이때처럼 춘자는 어여뻐 보인 적이 없던 것 같았다.
“왜, 쓰잘데없는 장난을 하는 거야?”
낮은 음성으로 나무라면서 나는 종이에 싼 편지를 돌여뜨리고 돌아섰다.
나는 나의 음성과 말씨가 내가 들어도 몹시 매섭고 얼음같이 찬 데에 스스로 놀랐다. 결코 그다지 냉혹하게 말을 할 생각인 것은 아니었었는데 말이었다.
남들도 그런지는 몰라도 연애란 이상한 물건이었다. 그렇게 드는 칼로 베듯 선 자리에서 잘라버렸으면서도, 그날 그 시각 이후로 춘자의 영상은 나의 가슴에 지진 듯 박혀가지고 말았다.
나 혼자서 나 자신도 모르게 연애를 하고 있던 연애에다 춘자가 비로서 그런 모션을 보인 것으로 하여 볼에다 기름을 부은 소리치라고나 할 것인지.
잊으려고 하나 잊혀지지가 아니하였다. 무시로 불현듯 생각이 나고, 심한 때는 좌우간 얼굴이라도 좀 보았으면 싶을 적도 있었다.
늘 거취가 궁금하고 행동이 염려스럽고 하였다.
타락한 줄을 알았을 때는, 나는 울기까지 하면서 일변 가슴 아프게 책임도 느꼈다.
조반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춘자는 행장을 참겨가지고 우리 집을 나갔다 우리 집에서 나간 춘자는 일자로 발걸음을 끊었다.
그 뒤, 황주 아주머니가 월남하여 와 살면서부터는 종종 만날 기회가 저절로 있고 하기는 하였다.
춘자는 가족이나 아는 이가 있는 자리에서는 인사도 하고 이야기도 하면서 내색을 아니하였으나, 혹시 나와 단둘이 만나는 때는 뽀로통해 가지고 인사도 변변히 하지 않았다. 겨우 마음 내켜야 한단 소리가, 피 도덕군자님 행차시군이었다.
5
편집이승만 박사로 대통령이 선거가 되고, 황주 아주머니가 마침 왔다 칼국수를 자시면서 믿고 기다렸던 대로,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으로 들어 앉았은즉, 인제는 조선이 독립이 되는 정부나 조직이 되고 하면, 그때는 조선 사람도 살길이 나서느니라고 말만 들어도 갈증이 개는 푸짐한 이야기를 한바탕 늘어놓고 간 것이 7월 스무날.
이어서 며칠 잇다 국무총리가 나고, 달이 바뀌어 8월이자 바로 이틀 사흘날에는 조각이 발표되었고.
13일은 미국과 중국이 우리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였고.
그리고. 해방기념일인 8월 15일의 복날을 날받아, 일본 동경으로부터 온 맥아더 장군까지 참석한 자리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과 외국에 대하여 정식으로 한국의 독립을 선포하는 성대한 식전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우리 조선은 위선 마쪽 한 토막이나마 우리의 정부를 가진 독립국이 된 것이었다.
한편 북조선에서는, 거기서도 8월 25일날 총선거를 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 복조선의 총선거는 북조선에만 실시하는 것이 아니다, 남북조선의 전체적인 선거로 하기 위하여 남조선에서는 소위 지하 선거(地下選擧)라는 비밀 선거를 한다고 하였다.
그러는가 하면, 삼남지방에는 큰비가 와 논밭이 휩쓸리고, 집이 떠내려가고 사람이 많이 상하고 하였다. 범위의 넓고 또한 큰 품이 근년에 드문 재앙이었다.
그리하여 이래저래 세상과 감격과 아울러 인심은 겉으로 혹은 속으로, 한결 더 심각한 갈등과 긴장과 소란과 초조와 불안 가운데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나는 월 일날 8 15 일찌감치 학교의 아이들께 태극기를 들려 데리고 기념식장에 나아가 해방과 대한민국의 탄생을 함께 축하하는 축하를 진심으로 축하하였다.
누가 무어라고 하건 나에게는 뜻깊고 감격의 날이었다.
석양녘에는 어머니의 전갈을 가지고 황주 아주먼네 집엘 갔다.
장충단 공원을 가까이 끼고, 조촐한 정원을 가진 아담스런 일산 주택이었다.
위치, 정원, 집 재목과 모든 꾸밈새, 이런 것들에 고비샅샅이 집을 진 주인의 알뜰한 마음성이 깃들어 있는 주택이었다.
누구였든지는 모르겠으나 정복한 이 땅에서 이 집을 지니고 백년 천년 살 마음으로 집도 이렇게 정성을 들여 오밀조밀 잘 지어놓았던 것이 거니 하면, 인사의 영고(榮枯)가 문득 감회스럽기도 하였다.
황주 아주머니는 재작년 봄, 이 집을 권리금으로 3만 원을 주고 물려 받았다.
10만 원 지니고 온 것에서 3만원으로는 집을 장만하고 한 7만원 남은 걸 가지고 금년 봄까지 그럭저럭 살아나왔다.
황주 아주머니쯤의 규모와 억척으로 하다못해 야미 보따리라도 싸 들고 나섬직한 노릇이지, 수중에 있는 돈을 곶감 빼먹듯 빼먹고만 앉았다니 모를 소리라고 하겠으나, 첫째로 황주 아주머니는 믿고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오래지 않아, 곧 오래지 않아 곧 38선이 터지고 황주로 돌아가 빼앗긴 집과 전장을 찾아가지고 산다…… 이렇게 믿으면서 날이 날마다 그것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하기 때문에 황주 아주머니는 가진 돈이 하루하루 졸아드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시장스런 줄을 몰랐다.
황주 아주머니는 일변 늙기두 하였다. 올해 쉰셋.
일찌기 네 아이들 데리고 맨손 쥐다시피 하고서 서울로 올라와 학생 하숙을 하면서 생활과 단판씨름을 하던 서른넷으로부터 마흔너댓, 그때와는 이미 다른 것이 있었다. 좀처럼 시방은 그럴 체력도 용기도 낼 기력이 없었다.
오늘 내일, 이 달 새 달 하고 금년 봄까지 만 이태 동안을 기다리는 동안에 수중의 돈은 다 밭아버렸다.
금년 봄부터는 큰딸 송자의 도움, 그리고 춘자의 소위 노린내나는 수입으로 입에 풀칠을 하였다.
춘자는 그동안까지는 단순히 방탕을 위한 방탕이었다.
파혼과 뒤미처 다시 실연, 이 거듭하는 타격의 반동으로 생긴 실망과 자포자기, 그리고 천품의 불량성, 거기에다 호기심, 이런 것으로 인한 장난이요 방종이요 오입에 불과한 것이었었다.
그러다 춘자는 생활이 절박하여지자 장난과 오입을 손쉽게 직업으로 바꾸었다.
미군의 옷, 피륙, 화장품, 담배, 설탕, 과자, 만년필, 약품, 이런 것들을 버터제(物物交換制)로 받아, 남대문 옆댕이와 배오개 장터의 소위 사설 피엑스(私設PX) 꾼들을 불러 조선은행권으로 바꾸고 하였다.
이 노린내나는 춘자의 수입은, 그러나 지나간 유월부터는 배가 너무 불러올랐음으로 하여 일단 수입이 막히지 아니치 못하였다.
황주 아주머니는 오로지 큰딸 송자의 가느다란 도움으로 겨우 연명을 해야 하였다. 막상 어려운 노릇이었다.
이런 군색한 사정이며 춘자에 대한 이야기는, 앞서번 명동의 다방에서 영춘에게서 자상히 들어 안 것이었다.
황주 아주머니는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여전히 오래지 않아 곧 오래지않아 곧 38선이 트이고, 트이는 그 날로 공산당이 몰살을 당한 이북(以北) 땅 황주로 달려가, 집과 전장을 도로 찾아가지고 편안히 다시 살 것을 믿으며 기다리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눈앞의 생활이 궁하여짐에 반비례하여 더욱 조급성을 띠고 강화되었다.
거기에다 겹쳐서, 객관적으로 남조선에 5·10 선거가 실시되어 국회가 생기고, 이승만 박사가 의장이 되어 헌법을 마련하고, 마침내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으로 들어앉고 하는 것으로써 황주 아주머니의 희망과 기대는 드디어 움직여지지 않는 일종의 신앙이 되었다.
그러나 내일 황주로 가 떵떵거리고 살망정이라도 오늘을 굶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아쉰 대로 우선 집을 팔아 작은 것으로 줄이든지, 이왕 오래지 않아 곧 서울로 뜨게 될 터인즉, 조그마한 삭월세집을 얻든지 하고서, 처지는 돈으로 한동안 생활을 지탱할 마련을 하기로 한 것이었었다.
가회동 우리 집에서 한참 올라가 조그마한 집이 한 채가 삭월세로 난 것이 있었다. 안방 간반, 부엌 간반, 마루와 건넌방이 각 한간, 도합 다섯칸짜리의 소꿉 같은 집으로, 6만 원 보증금에 월세가 3천 원이었다.
납작한 고가에 마당은 손바닥만 하고, 수통은 멀고, 두루 마음에 어설프기는 하나 단출한 식구니 구태여 큰 집이라야 할 며리도 없고, 겸하여 전세가 아주 사는 것이 아니니, 아무때라도 서울을 훌 떠나기에 집처분으로 붙잡혀 앉히울 까닭도 없고 해 황주 아주머니한테는 차라리 제격이었다.
어제 오후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가 집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이만한 자리도 쉽기가 어려우니 속히 서둘러 놓치지 말고 붙잡도록 하라고, 내일 부디 가서 전갈을 하여 주라고 하였다.
시방 사는 집은 30만 원은 몰라도 25만 원이면 당장이라도 살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25만 원 받아 한 3만 원 들여 명의변경시켜 주고, 6만 원 보증금 주고, 이사 비발이 돈 만 원이나 날 것이고, 15만 원은 고스란히 떨어질 것이다.
15만 원 가졌으면 1년은 견딜 터.
그 안에 38선이 트이면 돈으로 가지고 가서 해로울 까닭 없는 것이고.
나는 황주 아주머니가 대한민국이 탄생하는 오늘을 누구보다도 희망과 기쁨으로써 맞이하였을 것이려니 하는 생각을 하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내가 현관을 열고 무심코 한 걸음 들어서는 것과, 안의 열려 있는 장지문 뒤로 좇아 알락달락한 원피스 안에다 둥근 청동호박을 한 덩이 밀어넣은 것 같은 무서운 배가 불쑥 나오는 것과가 거의 동시였었다.
배는 다음 순간 질겁을 하여 나오던 장지문 뒤로 도루 들어가 버리고.
나는 그 괴물 같은 배가 불쾌하기보다는 눈시울이 매우면서 가슴이 뿌듯하여 오름을 어찌하지 못하였다.
잠깐 진정을 하여
“아주머니,”
하고 불렀다.
황주 아주머니의 대답 대신 춘자의 히스테릭한 음성이
“멋허러 오는 거예요? 당장 가요!”
하였다.
망설이다가 나는 또 한번 아주머니 하고 불렀다. 종시 황주 아주머니의 대답은 없고 일단 더 높은 춘자의 음성이
“괜히 물 끼얹을 테니깐 알아 해요.”
하였다.
황주 아주머니는 집에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저마를 하다가 구두를 벗고 올라갔다. 기다려서 황주 아주머니를 만나자 함이 아니었다. 춘자를 만나자 함이었다. 그러나 만사서 어떻게 한다는 것은 없었다.
내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춘자는, 아까처럼 질겁하여 피하는 대신 똑바로 서서 나를 쏘아보면서 쌔근쌔근하였다.
춘자는 만삭(滿朔)된 임부(姙婦)가 대개 그러하듯이 부석부삭하고 광택을 잃은 얼굴은 삐뚤어지고, 눈시울은 틀어지고 하였다. 그 이쁘장스럽던 모양을 찾을 길이 없었다.
저 뱃속에서 시방 눈 새파랗고 머리터럭 노랗고 코 오똑하고 한 것이 수만리 태평양 저편짝을 향수(鄕愁)하면서 꼼틀거리고 있거니 할 때에 비로소 나는 견딜 수 없는 혐오와 추악감(醜惡感)이 솟아오르고, 하마 국역이 넘어오려고 하였다.
나는 전후를 생각지 않고 제풀에 말이 흘러져 나왔다.
“차라리 죽어버리구 말지!……”
탄식조의 차악 갈앉은 구슬픈 음성이었다. 나는 의식하고서 그런 구슬픈 말로써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춘자의 표정은 암상으로부터 잔뜩 시니칼한 것으로 돌변을 하였다.
“흥1 도덕군자님, 장하십니다. ……XX놈한테 XX했다구? XX놈의 자식 애뱄다구? 그래 더럽다구?…… 흥, 더러우니 어쩧단 말씀이신구, 말씀이. 박춘자년이 더러운 양갈보면, 어떤 양반 출세 못하실 일났나? 정가 맥히실 일 났나?”
“………”
“흥! 나더러 죽으라구? 더럽다구 죽으라구?…… 왜? 어째서 죽어?
더러울 게 어딨어? 이 세상 깨끗한 사람 별루 없읍디다. 별루 없어.”
“………”
“외국놈한테 정졸 팔아먹는 년이 더러면, 외국놈한테 절갤 팔아먹는 서방님네들은 무엇일꾸? 외국놈의 자식을 애밴 년이 더러운 년이면, 제 뱃속으루 난 제 자식을 외국놈을 만들 영으루 하는 서방님네들은 무엇일꾸? …… 말을 해봐요. 바루 터진 입으루 말을 해봐요.”
춘자는 어느덧 다시 한번 변하여 눈은 분노로 불타고, 사납게 들이 육박이었다.
“흥, 할 말이 없기두 할 테지. 그럼 내가 대신 말을 하지. ……자기가 데리구 가르치는 철없는 어린 아이들더러 왜놈이 되라구 시킨 건 누구신구?
조선말을 내다버리구 왜말을 쓰라구 딱딱거린 건 누구신구? 하루두 몇 번씩 황국신민서 살 외우게 하구, 걸핏하면 덴노헤이까 반사일 불러준 건 누구신구? ……그뿐인감? 왜놈이 물러가니깐 이번엔 왜놈대신 온 놈란한테 붙어서 XX , 조선 아이들을 XX놈의 노예를 만드느라구 온갖 짓다 하구 있는 건 누구신구?”
“………”
“난 양갈보야. 난 XX놈한테 정졸 팔아먹었어. XX놈의 자식 애뱄어.
그러니깐 난 더런 년야. ……그렇지만서두 난 누구들처럼 정신적 매음은 한일 없어. 민족을 팔아먹구, 민족의 자손까지 팔아먹는 민족적 정신 매음은 아니 했어. 더럽기루 들면 누가 정말 더럴꾸? 이 얌체 빠진 서방님네들아!”
생각하면 춘자의 공박도 노상 억지엣 공박은 아니었다. 차라리 지당한 말일 수가 있었다.
이조초(李朝初)에 고려의 유신으로서 이씨 조정에 벼슬을 한 한 사람이, 말을 아니 듣는 기녀(妓女)더러, 동가식 서가숙(同家食西家宿)하는 몸으로, 사람을 가릴까 보냐고 꾸짖었더니, 계집이 천연히 대답하기를, 오아씨를 섬겼다 가릴까 보냐고 꾸짖었더니, 계집이 천연히 대답하기를, 왕씨를 섬겼다 이씨를 섬겼다 하기와 다를 거냐고 하여서, 그만 무렴을 당하였다는 이야기를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으니 노염 풀구려.”
진작부터 떨어뜨리고 섰던 고개를 들고 겨우 푹 죽은 목소리로 이 한마디를 하고는 나는 돌아섰다.
춘자가 우르르 앞을 가로막았다.
눈과 눈이 마주친 채 한참 서 있었다.
춘자의 얼굴에서는 분노가 물 쓰이듯 가시면서 대신 조용히 슬픔이 퍼져올랐다.
“무슨 원수라구, 두구두구 날 어디지 모욕이세요? 두구두구.”
음성은 힘없이 차악 갈앉은 음성이었다.
“편지 뜯어보지두 않구서 도루 집어 내던져 주는 거, 숫기집애루 그런 부끄럼이 또 있어요? 모욕이면 이만저만한 모욕예요?”
그것이 모욕이었으리라고는 나는 꿈밖이었다. 그러나 듣고 보니 또한 지당한 말인 것도 같았다.
눈물 글썽글썽한 눈으로, 똑바로 나의 눈을 보면서 넋두리하듯 말을 이었다.
“이 배만은 당신한테만은 보이구 싶잖었어요. 당신한테만은, 이 배만은. 당신은 더럽다구 죽으라구 했지만, 난 부끄러서 죽어야 해요, 당신이 부끄러서.”
목이 메더니 울음이 , 터지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싸고 그대로 접질려 쓰러지면서 흐느껴 울었다.
창자가 끊이는 듯 애달픈 울음이었다.
나는 울기조차도 못하여 등신처럼 망연히 선 채 있었다. 망연히 서서 열린 유리창 밖으로 보는 데 없이 눈이 가는 곳, 정원의 해당화 가지에 매달린 두어 송이의 시들고 퇴색한 월계꽃이 눈에 들어왔다. 넘어가는 햇살이 힘없이 그 위에 드리웠고.
우연한 일치였지만 심술스러운 부합이었다.
드르릉 현관문이 열리었다.
이어서 시끄런하게
“아유 더워, 사람이 곧 미치겠구나!…… 작은 아이, 나와, 이거 좀 받아라. ……대체 쌀 한 말에 1천 5백 원이니, 이런 무도한 녀석에 세상이 있단 말이냐? 쌀장산 죄다 공산당인 게야, 분명……”
하고 떠드는 소리는 묻지 않아도 황주 아주머니였다.
매정스런 까마귀가 까옥까옥 지붕 위로 울고 지나간다. 시든 월계꽃에는 낙조(落照)가 마지막 가물거리고. (1948. 8. 15. 裸里 假寓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