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대전광역시

대전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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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田-象徵物

대전광역시를 상징하는 꽃은 백목련, 나무는 소나무, 새는 까치이다.

대전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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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남한의 중앙부, 서울 남쪽 167km, 부산 북서쪽 238km인 충청남도 남동부에 자리잡아 기호·영남·호남·관동 지방을 연결하는 중심적 위치에 있다. 동쪽은 충청북도 옥천군, 서쪽은 충청남도 논산·공주, 남쪽은 충청남도 금산군, 북쪽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충청북도 보은·청원군과 자연경계를 이룬다.

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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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쪽은 노령산맥에서 뻗은 만인산·식장산·국사봉·지봉산, 서쪽은 계룡산괴인 우산봉·갑하산·도덕봉, 남쪽은 보문산, 북쪽은 적오산·금병산 등 500m 안팎의 구릉으로 둘러싸인 대전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갑천·대전천 등 금강 수계의 지류들이 사방에서 흘러들어 북류하다가 신탄진 부근에서 금강에 합류하는데, 그 유역에 넓고 기름진 충적평야인 관평평야가 펼쳐져 있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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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에서 100km의 거리에 있지만,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며, 연중 남서풍이 탁월하다. 연 강수량은 1,100

1,200mm로서 6

9월에 46% 이상이 내린다.

대전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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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본래 회덕군 일원, 진잠군 일원 및 공주군 현내면을 합하여 1914년부터 1930년까지 현 대전시를 중심으로 대전군이라 하였는데, 1935년 대전읍이 부로 승격하면서 대덕군(大德郡)으로 고쳐 분리되었다. 진잠은 백제의 진현현(眞峴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 진령현(鎭嶺縣)으로 고쳐서 황산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초에 진잠현으로 고치고 현종 9년(1018) 공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태종 14년(1414)에 현감을 두었다. 고종 32년(1895)에 승격되어 군이 되었다가 1914년 대전군으로 병합했다.1932년 도청이 공주에서 이곳으로 옮겨짐에 따라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하여 1935년 부로 승격되었다. 1949년에 시로 개칭되었으며, 한국전쟁 중에는 임시 수도가 되기도 하였다.그 후 1963·1983·1987년에 걸쳐 주변지역을 편입하여 시역을 넓혔으며, 1989년 1월에는 대덕군 전역을 편입하여 직할시로 승격되었는데, 유성구·대덕구를 더 늘려 면적이 539.71㎢로 확대되었으며 행정구역은 5개 구가 되었다. 1995년 3월에 광역시로 개칭되었다.

대전의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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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口

1917년 6만 6,000, 1926년 11만 5,000, 1960년 22만 9,000, 1967년 36만 5,000, 1998년 1월 현재 131만 7,642명이며, 이후 2002년 12월 통계는 142만 4,844명으로 나타났다. 총면적은 539.73㎢로 서울특별시 다음으로 넓고, 인구밀도는 2,485명/㎢이다.

대전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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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충청 내륙공업지역의 중심지로서 일찍이 1920년대부터 각종 공업이 일어났다. 편리한 교통, 풍부한 노동력 및 용수 등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었으며 특히 경제개발계획 사업으로 인해 대전지방공업단지·신탄진 섬유공업단지 등이 조성되어 공업도시로 크게 발전하였다.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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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말 농업인구는 6,430가구 2만 1,415명이다. 이들은 2002년 한해 동안 논 3,186㏊, 밭 2,908㏊ 등 6,094㏊를 경작해 쌀 1만 2,426M/T, 두류 310M/T, 서류 647M/T, 채소류 3만 585M/T, 특용작물 334M/T, 과실류 1만 6,158M/T을 생산했다. 한편 농민들이 사육하고 있는 가축은 한육우 3,711, 젖소 263, 돼지 5,792, 닭 25만 9,852, 산양 720, 개 2만 4,044, 오리 5,668마리 등이다.

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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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는 섬유공업이 크게 비중을 차지했으나 사양화해 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면사·면직물·견직·특수견직·내의·양말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기계공업은 일반 주물·알루미늄 제품·발동기·자동차 부속품·페달 베어링 등을 생산하는데 이 중 한국이연 공장의 자동차 부속품은 해외 수출로 유명하다.화학공업으로는 세탁비누·도료·제지·피혁·고무제품 등으로서 이 중에서 동양최대의 시설을 자랑하는 한국조폐공사 대전 제지공장과 대전 피혁공장 등이 유명하다. 그밖에 대전인조진주가 유명하며, 연필·인조빙 공업과 해외수출을 목적으로 하는 내륙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공업도시로서의 기능이 강화되고 있다.제조업체는 2001년 12월 말 현재 1,260개 소이며 이 가운데 음료식품 및 담배 95, 섬유 및 가죽산업 204, 나무제품 32, 종이·인쇄 97, 화학 56, 비금속광물 44, 제1차금속 28, 기타 181개 업체가 있다.기업별로는 대기업 8, 중기업 129, 소기업 877업체이며 여기에 총 3만 4,668명이 고용되어 있다.99년 수출총액은 6억 3,972만 달러로 전년보다 4∼6% 증가했으며 수입은 8억 2,406만 달러로 전년대비 315% 감소했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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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벌꿀·산내포도·세천막걸리·앵두 등이 유명하다.

대전의 지방 공업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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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에 지방 공업단지로 지정되어 제1단지는 1969∼1973년 47만 9,340㎡가, 제2단지는 1975∼1978년에 77만 6,860㎡가 조성이 완료되었으며 제3공단 조성에 이어, 제4·제5공단도 조성될 계획이다. 단지는 동구 대화동·읍내동 일대 금강 지류의 평탄지와 구릉지를 정리한 곳으로, 총면적 125.6ha이다. 이 단지의 조성 목적은 대도시 산업 시설의 지방 분산을 촉진하여 지역간의 경제적 격차를 줄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식품·섬유·화학·기계 부품 등의 업체가 입주해 있다.

대덕연구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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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德硏究團地

우리나라 제2의 과학연구단지로서, 기초과학 및 특수분야 학문연구를 목적으로 유성구에 건설되었다. 총 면적은 27.6㎢이다. 이 연구단지는 과학기술 입국을 실현하고자 건설했다. 1973년에 기본 계획이 수립되었고, 1978년부터 연구기관들이 들어섰다. 각종 과학연구기관, 과학문화센터 등이 조성되어 있고, 주택과 자녀교육 시설, 문화복지 시설을 갖추었다. 2만여 명의 전문 인력이 단지 안에 살고 있다.대덕연구단지에는 한국과학기술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자원연구소, 한국원자력연구소, 항공우주연구소, 유전공학연구원, 한국인삼연초연구원, 한국기계연구원, 천문우주과학연구소가 있다. 또 쌍용중앙연구소, 엘지중앙연구소, 한양석유화학연구소, 삼성그룹종합연구소 같은 각 기업체의 연구소도 있다.1993년에 열린 대전국제무역 박람회 때 인기가 있었던 자기부상열차, 태양전지거북선, 전자교환기는 이 곳에서 개발한 것이다.

대전국립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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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田國立墓地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정부는 묘역확대의 일환책으로 1985년 11월 13일 대전 갑동 산36번지에 국립묘지 대전분소를 설치하였다. 계룡산을 태조산(太祖山)으로 하고 그 맥을 이어 받은 조종산(祖宗山) 문필봉과 한 갈래에 선 주산(主山) 옥녀봉(玉女峰)의 좌우능선에 싸인 98만 평의 터에 마련되었다.1977년 4월 착공하여 8년 6개월 만에 준공된 이 분소는 동작동 국립묘지의 갑절이 넘는 규모에, 묘역은 8만 4천 평이다. 현충문·현충관·현충탑 등의 시설이 동작동 국립묘지와 똑같은 형태로 건설되었다. 1986년 이후의 영령들은 주로 이곳에서 영면하게 되었다.

대전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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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경부선·호남선 등 철도는 물론,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묶은 고속도로 시대를 맞이하여 1970년에는 경부고속도로가, 1973년에는 호남고속도로가 대전을 기점으로 개통되었으며, 1988년에 착공된 서울∼대전간 중부고속도로(145.3km)가 1988년에 개통되었다. 1996년 10월에 지하철 1호선이 착공되었으며, 1996년 도시계획상 도로연장은 총 1,922km이며 고속도로 43km, 국도 79km, 시도 1,800km로서 이 중 1,402km가 개설되어 72.9%의 도로개설률을 보이고 있다. 도로율 22.4, 포장률은 97.4%로 타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도로사정이 좋은 편이다.2002년 말 현재 등록차량은 45만 6,941대이며 이 가운데 승용차 33만 8,752대, 버스 3만 7,812대, 화물차 7만 9,513대, 특수차 864대 등이다.

대전의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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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光

대전은 문화의 도시로도 유명한데 국립 충남대학교를 비롯하여 한남·목원·침례교 신학대학 및 과학기술 대학과 많은 중·고등학교가 있다. 주요기관으로는 시청, 충남도청, 교육청, 지방법원, 체신청, 신문사, 방송국 등이 있으며, 또 최근 둔산지구에 정부 제3청사를 건설하였다.관광자원으로는 Expo 과학공원, 계룡산 국립공원 일부가 포함되고 유성온천·대청호·보문산 공원·고란사 등의 명승지가 있으며, 문화재로는 보물 2점, 지방 유형·무형 문화재 31점, 기념물 31점, 사적지로 계족산성 등이 있다.문화행사로는 10월이면 ‘시민의 날’, ‘한밭문화제’가 열리고 각 구에서 구민의 날 행사와 함께 동구 우암문화제, 중구 테미벚꽃제, 서구 갑천문화제, 유성구 온천과학문화제, 대덕구 신탄진벚꽃제, 동춘당문화제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있다.

동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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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鶴寺

계룡산 상봉 북동쪽 골짜기에 위치한 이 절은 724년(신라 성덕왕 23) 상원조사(上願祖師)가 조그만 암자를 지은 것을 후에 회의(懷義)가 창건하여 이름을 상원사(上願寺)라 하였다. 937년(고려 태조 20), 동계사(東溪祠)를 건축하니 참선 승려들이 운집하여 사찰이 커지게 되었고 후에 동학사로 고쳤다고 한다.현재는 비구니 사찰로 계룡산 국립공원구역이다. 주소상으로는 공주시 반포면이다.

유성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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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城溫泉

대전 유성구 온천1동에 있는 온천. 대전 중심가에서 서쪽으로 약 11km 지점에 있다. 1920년대에 자연분출되는 온천을 개발하면서부터 온천장시대가 열리고, 그 후 근대적 온천장 시설을 하면서 발전하였다. 주변 관광지로는 계룡산국립공원, 공주 무녕왕릉과 마곡사 등의 유물·유적이 있다. 교통은 철도·고속도로·시내버스 편이 있다.

남간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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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澗精舍

유형문화재 제4호. 가양동에 있는 우암 송시열의 강학당이다.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송시열이 말년에 강학을 위하여 지은 별당건물이다. 2층누각식 건물로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물가의 암반 위에 세웠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면 가운데 기둥은 연못 가운데에 세웠고, 나머지 기둥은 바위 위에 세워 계곡의 물이 건물 대청 밑을 흐르도록 설계하였다. 이곳에서 송시열이 전국의 유림과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북벌책을 강구하던 곳이기도 하다.

대청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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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淸- 충북 청원군 현도면(賢都面) 하석리(下石里)와 대전 대덕구 신탄진동(新灘津洞) 사이의 금강 본류를 가로지른 댐. 높이 72m. 길이 195m.

면적 129만 6,000m. 4대강 유역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75년 3월 착공, 80년 12월 완공하였다.

계족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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鷄足山城

사적 제355호. 회덕 장동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석축산성으로 둘레 약 1,200m이다. 높이 399m의 계족산 위에 있는 테뫼형 산성으로서 현존하는 성벽의 안쪽 높이는 3.4m, 외벽 높이는 7m, 상부 너비는 3.7m이다. 금강 하류의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백제시대 토기 조각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백제의 옹산성(甕山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군이 이 산성을 근거로 한때 신라군의 진로를 차단시키기도 하였고, 조선 말기에는 동학농민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성내에서 백제시대는 물론 신라·고려·조선시대의 토기와 자기 조각이 출토되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된 산성임을 알 수 있다.

목은 이색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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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李穡影幀

보물제 1215-4호. 중구 옥계동 84번지 대전영당. 고려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목은 이색(1328~1396)의 영정으로, 헌종10년(1884)에 그려졌다. 앞이마를 덮고 있는 게발형태의 사모 부분은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해 회색줄을 사용하였고, 살색 바탕의 얼굴과 이마, 코, 뺨 등에는 옅은 붉은색을 넣어 생동감을 나타내었다. 그 외에도 얼굴주름을 나타내기 위해 갈색선을 사용하였고, 단순히 먹선으로 표시한 눈, 부드러운 선으로 묘사한 얼굴, 그리고 옅은 먹선의 덧칠효과로 나타낸 옷주름 등은 일류화가의 솜씨임을 잘 보여준다.

회덕 동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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懷德同春堂

보물 제209호. 대덕구 송촌동 192 소재. 송촌(宋村:예전에는 백달촌이라 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은진송씨가 번창하면서 송촌으로 불려짐)의 한복판에 있는 건물로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606∼1672)의 아버지(송이창, 1561∼1627)가 세웠다.건물의 일부가 허물어져 가자 선생이 48세 때인 효종 4년(1653)에 헌 목재를 그대로 써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지금의 위치로 옮겨 다시 지었다. 동춘당은 조선시대 충청지역의 대표적인 별당(別堂) 건축으로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그리 크지 않다.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오른쪽 2칸은 대청, 왼쪽 1칸은 온돌방이다. 머름·중방·창호의 구성이 단아하며,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쓴 ‘同春堂’ 현판이 걸려 있다.

한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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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

대전의 향토문화행사이다. ‘향토문화예술의 창달과 전통민속문화의 육성’을 목적으로, 1983년 10월에 대전시 일원에서 ‘제1회 한밭제’가 거행되었으며 매년 한번씩 개최되고 있다. 한밭제는 시민의 날과 한밭제 행사를 연계하여 추진하며, 시민이 다수 참여하여 즐길 수 있는 행사종목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충청남도지부가 주관하여오고 있다. 한밭제의 행사 내용은 전야제로서 축포발사·불꽃놀이, 기념행사 및 공개행사로서 시민의 날 기념식과 식전공개행사, 문화예술행사로서 시민위안잔치·한밭백일장·연극공연·합창제·무용공연·시조경창대회·국악공연·교향악연주, 전시행사로서 대전미술인작품전·사진전, 민속행사로서 민요경창대회·씨름대회·농악경연대회·그네뛰기대회 등이 열린다.

보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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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門山

보문산 녹음은 ‘대전8경’의 하나이다. 특히 약수터가 많으며, 봄에 진달래와 왕벚꽃, 산벚꽃이 많이 피어나고 가을에는 단풍도 곱다. 보문산 이름의 전설은 나무꾼이 죽어 가는 물고기를 살려줘서 얻은 ‘은혜를 갚는 보물주머니’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엑스포과학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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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o科學公園

엑스포 과학공원이 자리잡은 곳은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가 열렸던 유성구 도룡동 일원이다. 공원 앞으로는 물 맑은 갑천이 흐르고 있다. 갑천을 사이에 두고는 둔산 신시가지가 마주하고 있다. 과학공원의 범위는 연구단지로 들어가는 대덕대교와 엑스포 아파트로 들어가는 둔산대교 사이이다. 이 두 대교 사이에 태극을 상징화한 엑스포 다리가 과학공원의 중심지 한빛탑과 남문 입구를 연결해 주고 있다. 관할 행정기관은 유성구와 서구이다.

대전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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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김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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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1720)

호는 서포(西浦). 사계 김장생의 증손자이며 창주 김익희의 아들로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서포만필' '구운몽' 등을 저술하였고 국문학상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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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1894)

호는 고부(古符). 동구 이사동 외가에서 출생. 박규수·오경석 등과 함께 개화단을 조직하고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며 개화운동을 전개했다.

김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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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1656)

호는 창주(滄州). 허주 김반의 둘째 아들. 병자호란 때 독전어사를 지냈으며, 대사간·강원감사·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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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4~1656)

호는 신독재(愼獨齋). 사계 김장생의 둘째 아들. 부여 현감 등을 잠시 지냈으나 그 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연산에서 강학과 저술에 힘썼다. 인조 때의 산림(山林:학식과 덕망을 갖추고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선비로 당시 사회 정치 여론을 형성했다.)으로 기호주자학·호서사림의 대표적 인물이다.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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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1~1756)

호는 기은(耆隱).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판서·경기도 관찰사·호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영조 3년 암행어사로서 부정한 관리를 적발했고 이때의 많은 일화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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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1689)

호는 우암(尤菴).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을 역임한 노론의 영수. 효종의 명을 받아 북벌정책을 추진하였다. 자의 대비복상문제, 경종책봉의 시기상조 상소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율곡 이이, 사계 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집대성하였으며 동방의 주자(朱子)로 일컬어진다.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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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1936)

호는 단재(丹齋). 중구 어남동 도리미 외가에서 출생하여 8살 때 청원군 남성면 귀래리로 이사했다. '독사신론' '조선사 연구초' '조선상고문화사' 등을 저술하였고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대만 기륭항에서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서 옥중 순국했다.

대전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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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대전은 서울에서 167km, 부산에서 283km 지점 경부선의 요역이며 행정·문화의 중심지이다. 2002년 12월 현재 46만 3,270가구이며 인구는 142만 4,844명이다. 대전은 1907년까지만 해도 대전천 연안 한밭이라는 수십호 되는 한촌에 불과하였다.그러던 것이 1905년 경부선,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됨에 따라 교통 요지로 되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32년에는 도청이 공주에서 이곳으로 이전해 와서 행정·경제·문화·교통의 중심으로서 일취월장의 발전을 거듭했고 더욱이 한국전쟁 중에는 임시수도로 되고 또 많은 피난민이 모여, 전시이긴 하나 시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당초부터 도시계획에 의하여 건설된 도시이기 때문에 가로가 정연하다. 중심 번화가는 대전역에서 도청에 이르는 인동·원동·중동 일대인데 이곳에는 전 도소매상의 약 70%가 집중되어 있다.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15, 중학교 73, 고등학교 51, 전문대 및 대학교 15개교가 있다(2001). 총 1,212개 소의 의료기관과 TV방송 3, 라디오방송 6, 일간신문 5, CATV 6개 사 등의 언론매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