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경기도

경기도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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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畿道-象徵物

경기도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새는 비둘기, 나무는 은행나무이다.

경기도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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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우리나라의 서쪽 중앙에 위치하고 동은 강원도, 북은 황해도, 남은 충청북도와 접하며, 서쪽은 인천광역시와 경계를 이루며, 수도인 서울이 중앙부를 차지한다. 총면적 10,190.41㎢이고 수리적으로는 동경 124

43

127

51

, 북위 36

53

∼38

16

에 이른다.

지형·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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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는 주로 경기지괴(京畿地塊)에 속하는 곳으로서 시생대의 화강편마암, 대동계, 경상계 지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조선계·평안계의 지층이 결여되어 있으며, 대동계의 지층도 국부적 소규모의 분포에 지나지 않는다. 즉 오랜 기간에 걸쳐 대부분의 지역이 육화(陸化)되어 있던 지역이다. 그러므로 지질은 극히 단순하다고 할 수 있으나 발달된 지층의 대부분이 오랜 지질시대를 경과한 지층이므로 층서(層序)와 그 구조에 있어서는 명확히 구명하기 곤란한 점이 적지 않다. 대체로 보면 주로 화강편마암이 많고, 화강암이 북부는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을 따라, 남쪽은 여주·이천·안성 등지를 서남방으로 사행하여 분포되어 있다. 이 화강암 지대는 차별침식을 받아 침식곡 또는 분지를 이루었고, 화강편마암 지대는 침식에 저항하여 산지로 남아 있다.도내의 전반적인 지세는 경동지형(傾動地形)의 일부로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아 완경사를 이루면서 해안으로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고도별 비율을 보면 100m 이하의 저지대가 총면적의 52%, 100∼500m 미만이 46.5%, 500∼1,000m까지가 1.4%, 1,000m 이상이 0.2%에 이른다.동북부 지방은 태백산맥의 철령(鐵嶺) 부근에서 갈라져 서울 부근에 이르는 광주산맥이 추가령구조곡을 사이에 두고 마식령산맥과 호응하고 있다.이 산맥의 동북부에 국망봉(國望峰, 1,168m)·명지산(明智山, 1,250m)·용문산(龍門山, 1,157m) 등의 높은 산이 솟아 있다.

그러므로 동북부의 가평

포천 일대는 1,000m 이상으로 높은 산지를 이루나, 서부로 향하여 감에 따라 점점 낮아져 서울 부근의 북한산(北漢山, 836m)·도봉산(717m)·관악산(冠岳山, 629m) 등 500m 내외의 잔구성(殘丘性) 산지가 발달되어 있다. 한강 서쪽에서는 100m 이하의 구릉지가 되고 이어서 평야로 이행된다. 서북부는 마식령 산맥의 말단부가 개성(開城) 부근의 천마산(天摩山, 762m)을 이루고 계속하여 강화도로 뻗어 마니산(馬尼山, 468m)·혈구산(穴口山, 466m)을 이룬다. 남부는 오대산에서 갈라진 차령산맥이 경기도와 충청북도와 도계를 이루며 남서로 달리고 있다. 한편 한강 남부의 광주·용인 일대는 광주산맥의 연장으로서 낮은 구릉성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도내의 하천은 북에 임진강, 중앙에 한강, 남에 안성천 등이 있다. 임진강은 길이 254km, 유역면적 8,118㎢로서 마식령과 아호비령(阿虎飛嶺)에서 발원하여 고미탄천(古味呑川)과 한탄강이 합류하여 한강 하구 부근에서 한강과 합쳐진다. 유역에는 연천 분지가 발달하였고, 하류에는 파주평야가 펼쳐져 있다. 한강은 오대산 부근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양수리 부근에서 합류하여 서울을 거쳐 강화만으로 흘러든다. 길이 514km, 유역면적 26,219㎢로 압록강에 이어 우리나라 제2의 큰 하원이다.중·상류 부근에는 많은 침식분지를 형성하고, 여주 부근에 여주평원, 김포반도에 김포평야 등의 이른바 준평원을 이룬다. 한편 이들 평야에는 한강과 그 지류에 의하여 운반·퇴적된 충적지(沖積地)도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한편 안성천은 한천·진위천 등과 합류하여 안성·평택 부근에 기름진 충적지와 간척지로 이루어진 평택평야를 전개시키고 아산만으로 흘러든다.해안선의 총연장은 1,415.6km로서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반도·만 등이 많아 이른바 리아스식 해안을 이룬다. 그 중 반도는 김포시의 김포반도, 화성군의 남양·조양반도가 있고, 만은 한강 하구 부근에 강화만, 중앙에 인천만, 남부에 남양만 등이 있다. 해안은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여 넓은 간석지가 발달하여 염전과 간척지 개발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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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 한랭하고 여름에는 기온이 높아 한서(寒暑)의 차이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볼 때에는 북부지방과 남부지방의 점이적인 기후로서 전반적으로 온화한 편이다. 연평균 기온은 인천이 11.6

, 수원이 10.9

이며, 1월 평균기온은 인천이 -3.9

인데 대하여 내륙인 양평은 -6.2

이고, 8월 평균 기온은 인천이 25.1

인데 대하여 양평은 26

로서 해안에서 내륙으로 갈수록 기온의 교차가 심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약 1,000㎜ 내외로서 다우(多雨) 지역과 소우(少雨) 지역으로 나뉜다. 내륙의 한강·임진강 중류에 걸친 일대는 우리나라 3대 다우지의 하나로, 연강수량 1,200㎜ 이상을 나타낸다. 해안지역은 지형적인 이유 때문에 강수량이 900㎜ 이하로서 소우지역을 이룬다. 그러므로 해안지역은 넓은 간석지가 나타나는 데다 강수량이 적고 일조율(日照率)이 60% 이상이 되고 맑은 날씨가 계속되어 천일제염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한편, 7·8월에는 열대성 저기압의 일부가 경기만을 지나 영동지방으로 통과하므로 태풍 경로의 일부지역으로 피해를 받는다. 늦봄에서 초여름에는 고온건조한 북동풍이 태백산맥을 넘어 불어와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높새바람인 푄 현상이다.

경기도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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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대에는 마한(馬韓)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고구려·백제·신라의 정립으로 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일대가 삼국의 각축장의 중심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이 지역은 한산주(漢山州)·한주(漢州)·한양군(漢陽郡) 등으로 불려졌으며, 신라가 멸망한 이후에는 양주(楊州)라고 개칭되었다. 고려 성종 때는 전국을 10도로 나누어서 이곳을 국내도(國內道)라 하였고, 현종 때에는 양광도(楊廣道)라 개칭하는 한편 그 부근 13현(縣)을 중앙에서 직할하여 경기(京畿)라 칭하였고, 공양왕 때 경기를 좌우도(左右道)로 나누었다. 조선 태종 2년(1402) 다시 경기도라 칭하고, 1413년 황해·강원·충청 3도와의 경역(境域)을 변경, 1416년 본도의 일부를 강원도에 할양하였다. 1896년에는 전도를 4부(府) 30군(郡)으로 하고, 수원에 관찰부를 두어 이를 관할하는 한편, 따로 한성부(漢城府)를 서울에 두고 중앙의 직할로 하였다.그 후 수원·강화·개성의 3부는 군으로 바뀌었고, 한성부는 그대로 존속되다가 1910년 경술국치와 동시에 도청을 수원에서 서울로 옮기고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고쳐서 경기도 소관에 편입하였다. 1945년 광복과 동시에 국토가 양단되면서 당시

38

선 이북에 있던 장단·개풍의 각 군과 연천·포천 군의 일부는 제외되는 동시에 38선 이남에 있던 황해도의 연백·옹진 2군의 대부분이 새로 편입되었다. 1946년 경성부는 서울특별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1949년 인천·개성부와 수원읍이 시(市)로 개칭되었으며, 1954년에 연천·포천군의 북부지역이 수복되었다. 1963년 1월 1일 의정부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1967년 6월 23일 도청을 수원으로 옮겼다.1973년 7월 1일에는 안양읍이 안양시, 소사읍이 부천시, 성남출장소가 성남시로 각각 승격, 1981년에는 인천시가 정부직할시로 승격분리되고 소하읍이 광명시로, 송탄읍이 송탄시로 승격, 1982년에는 과천지구 지원사업소가 과천지구출장소로 승격됐고, 1986년 1월 반월출장소가 안산시로, 과천출장소가 과천시로, 남양주군 구리읍이 구리시로, 평택군 평택읍이 평택시로 각각 승격됐다. 1989년 1월에는 시흥군 의왕읍이 의왕시로, 군포읍이 군포시로, 소래읍 군자면·수암면이 시흥시로, 화성군 오산읍이 오산시로 남양주군 미금읍이 미금시로 각각 승격됐고 시흥군은 폐지됐다. 또 옹진군 영종면과 용유면, 김포군 계양면이 인천광역시에 편입됐다. 1992년 고양군이 고양시로, 1995년 미금시와 남양주군이 남양주시로 통합되었다. 또 강화군 전체와 김포군 검단면, 대부도를 제외한 옹진군 전지역이 인천광역시로, 옹진군 대부도는 안산시로 각각 편입되는 등 시·도간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으며, 평택시·평택군·송탄시가 평택시로 통합되었다. 2000년 3월에는 용인군·이천군·파주군이 각각 시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998년에는 김포군과 안성군이 시로 승격되었다. 2001년에는 화성군과 광주군이 시로 승격되었으며, 2003년에는 포천군과 양주군이 시로 승격되었다.

경기도의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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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口

1960년 센서스 결과 259만 9,282명, 1966년 센서스 결과 310만 2,325명으로 도별 구성비 10.6%, 인구밀도 283.1인/㎢인데 대하여 1970년 센서스 결과 335만 3,272명으로 도별 구성비 10.7%, 인구밀도 306.2인/㎢, 1966년 대비 증가율 8.1%로 나타났다. 2001년 12월 현재 961만 2,036명으로 1980년 대비 인구증가율은 서울과 부산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이와 같은 현상은 1970년대 이후 서울의 위성도시들이 공업도시로서 개발됨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이들 위성도시로 많은 인구가 집중된 사회적인 증가가 큰 원인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수도권의 인구 분산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되어 이의 해결을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이 강구되고 있다.

경기도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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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농목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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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인구는 14만 8,922가구에 52만 757명(2001)이고, 총 경지면적은 20만 8,761㏊이다. 그 중 논이 12만 6,908㏊, 밭이 8만 1,853㏊로 논이 훨씬 많다. 주요한 농작물은 쌀로서 한강 유역인 여주·이천·김포·파주 일대와 안성천 유역인 안성·평택지역이 주산지이다.특히 평택평야는 수리시설과 여름 기온이 벼농사에 알맞아 주로 벼농사 지대로서 경기미(京畿米)의 주산지이다. 각종 농산물 생산고(2001)는 쌀 60만 265톤, 보리 326톤, 잡곡 3,187톤, 콩 1만 1,390톤 등이다. 주곡물 외에 서울·인천·수원 등 수도권의 대소비지를 배경으로 원예농업이 발달해 채소·과일·화훼 등 재배가 성하다. 한편 개성을 비롯하여 강화·김포·용인·포천 등지에서는 인삼의 재배가 성하다. 한우는 간선도로변 한우단지·협동축산단지 등 축우를 위한 단지가 있어 증산에 노력하고, 특히 낙농에 있어서는 안성·평택지구의 낙농단지를 비롯하여 양주·광주·가평·용인·시흥·화성 등에 많은 목장이 분포한다.

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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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야면적은 54만 1,419㏊로서 전도의 약 55%에 이르고, 동부 산악지대에 주로 분포한다. 특히 유실수가 많아 밤은 생산량 4,361M/T(1995)로서 전국의 제5위, 잣은 661M/T로서 전국의 제1위를 차지하는데, 주로 가평·양주 등지가 주산지이다.

수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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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인구 3,454가구에 1만 962명이 종사하며 전국 어업 인구의 약 3.3%이다. 어선은 2,196척이다. 갈치·전갱이·멸치·민어·도미·새우 등이 경기만 일대에서 잡힌다. 바다 양식장은 1,042ha, 내수면 양식장은 115ha이고 수산물 총생산량 및 어획량은 1만 8,926t으로 이중 연안어획량은 1만 5,626t, 양식어업 및 내수면 어업생산량은 3,300t이다.

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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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은 경인지방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 지방은 우리나라의 정치·경제·문화·금융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인구가 조밀하므로 큰 소비시장으로 되어 있는 등 기업 경영상 유리한 조건이 구비되어 공업이 일찍부터 일어나 전국 최대의 공업지대를 이루었다. 2001년 12월 말 3만 1,338개의 사업체에 74만 2,755명이 종사하고 있다. 산업단지는 반월·시화·반월도금·성남·송탄·안성·향남제약 등 35개 단지 4만 1,703㎡이며 입주공장은 6,103개 소로 종업원 16만 3,401명이다.

경인공업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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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仁工業地帶

서울·인천을 중심으로 한 안양·수원·부천·성남·의정부 등지에 걸친 우리나라 최대의 공업지대이다. 오늘날과 같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온 것은 196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실시된 이후의 일이다.1970년대 이후에는 주요 공업지구는 서울을 중심으로 부천·부평·인천 임해지구, 시흥·안양·수원지구, 서울·의정부지구, 서울·성남지구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에는 구로동 수출공업단지와 같이 공업단지로 지정 개발되는 곳도 있다. 그러나 수도권 팽창에 따른 지가의 상승과 공업의 집적(集積)으로 인한 공해 문제가 심각하게 되어 공해 공장을 우선적으로 지방에 분산(分散)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 수원-인천 사이에 반월공단이 조성되어 공업도시로 급성장하고 있다.

팔당 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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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堂發電所

서울에서 한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약 35km 지점, 즉 남북 한강이 합류하는 양수리로부터 하류쪽으로 7km 지점에 오른쪽으로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왼쪽은 광주군 동부면과 접해 있는 곳에 위치한다. 이 발전소는 한강 본류를 가로지른 거대한 규모라는 점과, 댐에 설치된 폭 20m, 높이 16.75m의 15개 수문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채택된 저낙차 밸브형 발전을 가능하게 하고 텐더식 수문으로는 동양 최대라는 점이 특징이다.1966년 6월에 착공되어 1974년 5월 24일 준공된 것으로 팔당댐으로 얻어지는 관련 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유역 면적 23,800㎢에 수몰 면적 5,174,376평의 거대한 인조 호수가 생김으로써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관광 유원지가 형성되었고, 둘째, 댐의 저수를 이용해서 경인지구에 깨끗하고 안정된 생활용수의 공급지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시설용량은 8만kW이고, 연간 발전은 3억 3,800만 kW/h이며, 평균 출력은 시설용량의 48.2%인 38,600kW이다.

경기도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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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한반도 중심부로서 서울과 개성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수도권을 형성하고 있어 도로가 서울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뻗어 경기도의 각 지방으로 전부 통한다. 그리하여 본도의 도로는 대체로 서울을 기점으로 경부·경원·경인·경춘 등 국도를 비롯하여 지방도·시군도 등이 거미줄같이 얽혀진 도로망을 이루고 있다. 더불어 경인·경부·영동 고속도로 등이 개통되어 더욱 도로교통을 발달시키고 있다. 철도는 X자형의 중심부로 경인·경의·경원·중앙, 그리고 경춘·교외·안성선 등이 있고, 이 중 경인∼서울∼수원 사이가 전철화되어 있다. 도로 총연장은 9,521km, 이중 포장도로는 8,364km, 비포장도로 1,157km이다.

경기도의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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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光

경기도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으로서 많은 사적·유물·사찰 등이 있고, 또한 자연 경관이 뛰어난 곳이 많다. 더욱이 근래에는 산업시설도 괄목하게 늘어나 관광자원이 풍부하고 관광시설의 정비와 개선에 힘써 관광산업이 발전하고 있다. 각 지역별 주요 관광자원은 다음과 같다. 팔달문·화홍문·소요산·광릉·불암산·동구릉·금곡릉·신륵사·영릉·관악산 연주암·판문점·행주산성·북한산성·진관사·산정호수·한탄강 계곡·현등사·남한산성·이천 온천·민속촌·자연농원 등의 유적지와 명승고적이 있으며 국보 31점, 보물 112점, 사적 61개 소, 천연기념물 51종 등이 있다.

경기도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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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育

초등학교는 901개교에 학생은 95만 6,758명, 중학교는 323개교에 38만 4,591명, 고등학교는 311개교에 32만 9,606명, 대학은 종합대학 단과대학 분교 및 전문대 등 65개교가 있다.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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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漢山城

사적 제57호로 남한산 도립공원에 있다. 선조 28년(1595)에 축조하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난했지만 결국은 45일 만에 굴욕의 항복을 한 고전장(古戰場)으로 유명하다. 성벽 둘레가 약 8km이고, 높이는 2.2m이다. 성안에는 숭열전·연무관·침과정 등이 있다. 현존하는 성벽은 광해군 이후 여러 차례 중수축된 것이고, 이의 보수가 완공되었다.

광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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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陵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조선 제7대왕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의 능. 사적 제197호. 1468년(세조 14)과 1483년(성종 14)에 정하였다. 이 능은 세조가 석실의 유해무익함을 강조하고 석실과 병석(屛石)을 쓰지 말라고 한 유명(遺命)에 따라 병석을 없애고 석실은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꾸몄으며, 십이지상을 난간동자석주(欄干童子石柱)에 옮겨 새겼다. 회격으로 바꿈으로써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했으며, 능 배치상에 있어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이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이로써 국초 왕릉제의 일대개혁을 이루었다.

수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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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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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原-象徵物

수원시를 상징하는 꽃은 진달래, 나무는 소나무, 새는 백로이다.

수원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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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중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질은 전역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북쪽에는 300m 이하의 광교산맥이 다다랐고, 서쪽은 여기산, 중앙에는 팔달산이 솟아 있다. 광교산에서 시작되는 수원천, 장지천, 원천천 등은 황구지천에 합쳐져 시의 남쪽을 흐르며, 이들 하천을 따라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남쪽은 평야에 연속되어 전원도시로서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전체 면적은 121.10㎢, 인구 97만 8,698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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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강수량은 전체의 3/4이 여름에 집중한다. 연평균 기온 12.1

, 1월 평균 -7.0

, 8월 평균 26.2

, 최고 기온 37.3

, 최저 기온 -25.1

, 연평균 강수량 1,300㎜이다.

수원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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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삼한시대 때 모수국이었고, 고구려 때 매홀군(買忽郡)이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수성군(水星君)으로 고치고, 성종 때에는 이곳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 현종 9년(1018)에는 지수주사(知水州事)가 되고, 원종 12년(1271)에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고쳤으며, 충선왕 2년(1310)에 수원부로 내렸다. 조선조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로 고치고, 세조 때에 진(鎭)을 두어 한성(漢城) 수호의 4진의 1로 삼았다. 1896년 수원부가 되고, 이듬해에는 경기도의 도청 소재지로 되었다. 1909년에 도청이 서울로 이전되고, 1949년 시로 승격하여 종래의 수원군은 화성군(華城郡)으로 고쳤다. 1963년 주변 20개 리를 편입하였으며, 1967년 도청이 다시 수원으로 이전되었다. 현재 3구 38개 동을 관할한다.

수원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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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과거에는 소비도시였는데 근래에 대규모 공장이 건설되면서 공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업도시로서 예부터 우리나라 농업의 중추적 역할을 다해 왔다. 황구지천의 상류인 이곳은 충적평야로서 기름지고 이미 정조 때 축조된 서호를 비롯하여 광교저수지 등 많은 저수지가 있어 관개시설이 잘 정비되어 있고 범람이 없이 매년 풍작지대를 이루고 있다. 대소비지대를 끼고 있어 특히 고등원예 작물이 성하며, 딸기는 유명하다. 공업으로서는 연초 제조·전자·면방직·인조견·조면·양조 등 공업이 일어났는데 특히 방직과 전자공업이 유명하다. 상업은 경기 남부지방을 상권으로 하여 활발하며 영동시장을 비롯한 여러 시장과 우시장(牛市場)은 고래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농업 중심지이기 때문에 농산물의 거래가 성하여 쌀·콩·밀·야채·고치·소·돼지 등의 집산이 성하고 특히 우시장은 고래로부터 유명하다. 시내에는 상설시장 6, 백화점 5, 그리고 3,600여 개의 점포가 있다. 도매상은 농산물 취급이 수위이고 다음이 잡화류인 데 반하여, 소매상은 잡화가 태반이고 의류·농산물·기타 순위로 되어 있다. 공업에 있어서는 연초 제조장을 비롯하여 삼성전자·선경화섬 등 대규모 공장이 건설되어 많은 노동력을 흡수하고 시민의 소득을 증대하여 소비도시에서 공업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대규모 공장이 건설되면서부터 영세 기업체들은 격감하고 있으나 종업원은 급증하고 있다. 업체의 수에 있어서는 전기기계·의류제품·음식료가 많으나 종업원의 수에 있어서는 섬유가 단연 수위이고 전기기구·토석·음식료품 등의 순위이다. 특히 기술집약적인 첨단산업이 발달해 한국의 실리콘밸리 역할을 한다. 기흥 일대의 반도체를 비롯한 관련 전자업체가 많이 입주해 있다.

수원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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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철도 경부선이 시의 중앙을 남북으로 달리고 수인선이 분기하며, 서울과 전철로 연결된다. 경부고속도로가 교외를 지나고 신갈에서는 영동 고속도로가 분기되어 있다. 서울-평택간 국도와 인천·안산·화성·용인·광주 방면의 도로가 방사상으로 뻗어 있다. 남쪽에는 군용 비행장이 있다.

수원의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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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光

풍부한 관광자원이 있고 서울에 인접해 있는 관계로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연간 50만을 넘는다고 한다. 주요한 관광자원으로서 사적·유물 등 문화재가 많다. 정조 18년 건립한 팔달문(八達門, 일명 南大門)을 비롯하여 수원성의 동문인 창룡문, 초계의 임무를 하던 화서문(華西門), 정원의 작약으로 유명한 화령전, 그리고 누 아래에 수문 7개가 있는 화홍문·방화수류정,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 서호·지지대, 딸기로 유명한 푸른지대, 광교풀 등이 있다.

수원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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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原城郭

사적 제3호. (화성)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석전교축(石塼交築) 읍성. 둘레 5,520 m, 서쪽으로 팔달산(八達山)을 끼고 동쪽으로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축성한 평산성(平山城)으로서, 창룡문(蒼龍門)·화서문(華西門)·팔달문(八達門)·장안문(長安門)의 사대문을 비롯하여 암문(暗門)·수문(水門)·적대(敵臺)·각루(角樓)·포사(鋪舍) 등의 각종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정조의 명으로 1794년 2월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주관하에 성역에 착수,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축조방법은 전통적인 축성경험을 바탕으로 유형원(柳馨遠)과 정약용(丁若鏞) 등의 과학적 지식과 중국성제의 장점을 활용하였다. 성벽은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돌과 모래로 다진 뒤 그 위에 배흘림을 준 규형(圭形)의 벽을 쌓았다. 성곽 주위의 호(壕)는 산지 부분에서는 두르지 않았으나 평지부분은 둘렀고 성의 남서쪽에 해당하는 화양루와 서남암문 사이의 작은 계곡에서 흐르는 계곡물은 자연호를 이룬다. 종래의 조선시대 성곽이 보통 때 거주하는 읍성과 전시에 피난처로 삼는 산성을 기능상 분리하고 있는 반면, 수원성곽은 산성은 설치하지 않고 읍성의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1975년부터 4개년 계획으로 실시되었던 복원공사로 현재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997년에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했다.

화성행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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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城行宮地

우리나라 행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던 화성행궁의 주건물(정당)로서 정조임금께서 모친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던 건물이다. 현재 남아있는 낙남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시설물들과 함께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인해 사라져 버렸던 건물을 복원했다.정조 18년~20년에 화성을 축성하고 팔달산 동쪽에 행궁을 건립한 정조는 선왕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사도세자의 원침에 자주 참배하고 이 행궁에서 숙박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봉수당을 비롯하여 낙남헌 등 33개 동의 건물이 있어 궁전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팔달문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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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達門銅鐘

화성축성과 동시에 건조된 성의 사대문의 남문인 팔달문2층 누상에 달려 있는 종. 종걸이는 음통이 없는 용두뿐이고 상대에는 내부에 글씨를 넣은 수십 개의 문양을 두 줄로 나란히 돌렸으며 종신에는 이 종을 주조한 장소와 연대 유래, 주조자들의 명문이 주자 혹은 각자되어 있다. 하대에는 보상당초화문을 양주하여 돌린 고려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한 조선종의 형식을 하고 있다.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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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고려 우왕 12년(1386)에 명승인 진각국사(1307~1382)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수원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건립한 비다. 진각국사는 충렬왕 33년에 출생하여 13세에 화엄종반용사에 들어가 19세에 상풍선에 오른 고려말 화엄종사로서 왕은 ‘대화엄종사 선교도총섭’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창성사가 폐사되어 1965년도에 이 비를 매향동 현위치로 옮겼다.

수원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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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原鄕校

고려 원종 22년에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세워졌던 것을 화성 축성과 더불어 현위치로 옮겨 건립하고 공자·맹자 등 선인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향교 앞에 하마비가 있고 나무로 건립된 홍살문이 있으며 외삼문은 소슬삼문 형태이며 명륜당·내삼문·동무·서무·대성전의 건물이 있다.

지지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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遲遲臺碑

정조가 부친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륭원 전배를 마치고 환궁하는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면서 멀리서나마 현륭원이 있는 화산을 바라볼 수 있게 되므로 으레 이곳에 행차를 멈추게 하고 현륭원 쪽을 뒤돌아 보면서 떠나기를 아쉬워하였기 때문에 정조의 행차가 느릿느릿 하였다 하여 이 고개를 지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지대비는 홍문관 제학 서영보가 지었고 윤사국이 글씨를 썼으며 숭전기원 후 1807년 정묘 12월에 건립하였다.

심온선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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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溫先生墓

세종 원년(1418)의 것으로 안평대군이 쓴 비와 상석이 있다. 조선조 초기의 문신으로 세종대왕의 부원군이다. 선생이 영의정에 있을 때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수원에서 사사되었으나 사후에 진실이 밝혀져 충성심과 명예를 회복하였다. 묘역은 2단으로 제1단에는 봉분 앞 백대리석에 안평대군이 쓴 묘비와 상석이 있고 제2단에는 정방형 운족석등과 좌우에 문인석 한 쌍이 있다.

광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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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矯山

경부고속도로와 서울~수원간 도로 사이에서 남북으로 약 2km 정도에 걸쳐 뻗어 있는 산. 산의 능선이 매우 한적하면서도 완만하고 사방에 수목이 우거져 있어 삼림욕을 하거나 당일코스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예부터 광교산은 수원 8경의 하나로 불렸는데 광교적설(光矯積雪)이라 하여 광교산에 눈이 내려 나무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경치의 아름다움은 8경 중에서도 첫 번째로 손꼽혔다.

칠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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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寶山

수원시의 서쪽에 있는 산으로 수원시와 화성군의 경계지점을 이루고 있으며 예부터 일곱 가지 보물(산삼, 맷돌, 잣나무, 황계수탉, 절, 장사, 금)이 많았다고 하여 칠보산이라 했으며 234m로 2개의 등산코스는 완만하고 수림이 울창하여 노약자와 주부들의 산행으로 매우 적당하다.

팔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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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達山

옛이름은 탑산. 이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고 탑산에 은거해 있는데 고려말 3학사 중 한 분이 조정에 내려올 것을 누차 권고했으나 끝내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화공을 시켜 탑산을 그려오라 했다 한다. 그림을 본 이태조는 “역시 아름답고 사통팔달한 산”이라고 하며 산이름을 팔달산이라 명명하였다. 팔달산에 오르면 수원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수원성곽이 고스런히 보존되어 있어 역사의 산교육장이다.

수원시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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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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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1800)

조선 제22대왕. 재위 1777~1800,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庄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비(妃)로 맞았다.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조세(早世)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에 대리 청정을 하다가 다음 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왕위에 올랐다.즉위하자 곧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퇴색해버린 홍문관을 대신하여 규장각을 문형(文衡)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홍문관·승정원·춘추관·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세손 때부터 추진한 '사고전서'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임진자·정유자·한구자·생생자·정리자·춘추관자 등의 새로운 활자를 개발, 많은 서적을 편찬하여 사서·삼경 등의 당판서적을 수입하지 못하게 했으며, 왕조 초기에 제정, 정비된 문물제도의 보완·정리를 위하여 영조 때부터 시작된 정비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속오례의',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은 그 결과였는데 그는 자신의 저작물도 정리하여 뒷날 '홍재전서'(184권 100책)로 정리, 간행하였다.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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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1948)

호는 정월(晶月). 근대 미술사상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작가·여성해방론자.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 오면서 봉건적인 사회로부터 독립한 개인의 자아를 형성하는 개성의 확립이 문학계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던 때 여성 화가로서 여성해방론자로서, 그리고 여성 작가로서 언제나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의 진보가 조선 여성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뚜렷하게 지녔던 인물. 나혜석이 쓴 글이나 행동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여자도 사람이라는 것,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 사람의 대우를 받아야겠다는 것으로 이러한 생각은 그의 그림속에도 깊이 투영되어 있다. 당시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 그리고 이혼으로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던 나혜석은 그러한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인간적 원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어 해체하는 글들을 썼다.

홍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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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941)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본관 남양(南陽). 본명 영후(永厚). 경기 수원(水原) 출생. 1912년 YMCA 중등부를 졸업하고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 양악부(洋樂部)를 마친 뒤 동전습소 교사가 되었다. 16년에는 홍난파가 작곡한 최초의 곡으로 추정되는 행진곡풍의 야구 응원가인 창가(唱歌) 「야구전」을 작곡하였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후 귀국, 1920년 「봉선화」를 작곡하고, 1925년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이 무렵 잡지 '음악계'를 발간하였으며, 소설 '처녀혼' '향일초(向日草)' '폭풍우 지난 뒤' 등도 발표하여 문학적 재질도 보였다. 1926년 다시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교에 편입하고 이듬해 도쿄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1929년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 교수를 거쳐 1931년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로 있다가 이 해에 미국으로 건너가 셔우드음악학교에서 연구하고 1933년 귀국하여 이화여전 강사를 지낸 뒤 경성보육(京城保育)학교 교수로 전임하였다. 1935년부터 「백마강의 추억」 등 모두 14곡의 대중가요를 나소운(羅素雲)이라는 예명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주도하에 결성된 조선문예회에 가입하면서부터는 총독부의 정책에 동조, 1938년에는 대동민우회, 1941년에는 조선음악협회 등 친일단체에 가담하여 친일가요 「희망의 아픔」을 발표하는 등 친일활동을 하기도 했다.작품으로는 「봉선화」 외에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 민족적 정서와 애수가 담긴 가곡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곡, 도쿄 유학 직전에 남긴 「통속창가집」, 「행진곡집」 등 6권의 편저작물 등을 남겼다. 이 밖에도 저서로 '음악만필(音樂漫筆)' '세계의 악성' 등이 있다.

장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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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수원시 매탄동에서 출생. 7세에 첼로 연주를 시작하여 9세에 '월간음악' 주최 전국 콩코르 1위에 입상하였다. 1993년 2월 한미 뉴욕 줄리어드 예비음대에 특별 재학생으로 입학하였고, 1994년 10월 세계 최고 권위의 로스트로포비치 첼로경연대회 최우수상과 현대음악상을 수상했다. 이 상의 수상은 역대 최연소 기록으로 장한나의 음악적 천재성을 평가받은 계기가 되었다. 현재 활발히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

수원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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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옛날부터 교통의 요지로서 영남·호남가도의 회합점이 되며 또 형승(形勝)의 지리(地理)를 가져 한성 수호의 전위도시로서 발달하였다. 지금도 역시 서울의 위성도시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개성·강화·광주(廣州)와 더불어 4진(四鎭)의 하나로 발달한 외곽도시이다.수원이 교통의 요충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발전 속도가 느린 것은 서울의 위성도시로서 그 세력이 서울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청이 이전해 오고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서울·수원간의 시간 거리가 단축되어 서울의 팽창력이 이곳에 미치면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1970년 17만 1,000이던 인구가 1975년 22만 4,200명, 2001년 12월 97만 8,698명으로 급증했다.

의정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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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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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政府-象徵物

의정부시를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잣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의정부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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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중앙에 위치하며 전역은 화강암 지대이다. 주변에는 수락산(水落山:638m)·도봉산(道峰山:717m)·사패산(賜牌山:550m)·어둔산(於屯山:468m) 등 여러 산이 솟아 있다. 한강의 지류 중랑천이 도봉산과 수락산의 안부(鞍部)를 끊고 남류하는데 중앙부 지류가 모이는 곳에 의정부 분지가 발달하여 있다. 면적은 81.60㎢, 인구 36만 8,887명(2001.12) 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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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거의 비슷하나 산지가 되어 기온의 교차가 더욱 심하고 강수량은 우리나라 3대 다우지의 하나인 곳이다. 연평균 기온 11.7

, 1월 평균 -6.1

, 8월 평균 23.8

, 최고 기온 38.2

(1939), 최저 기온 -26.2

(1923), 연평균 강수량 1,331.7㎜이다.

의정부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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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1910년 시북면과 둔야면을 합쳐 시둔면이라 하고 1938년 주내면에 있던 양주군청을 시둔면으로 이전함으로써 양주면이라 개칭하였으며, 1942년 읍으로 승격시켜 의정부읍이라 개칭했다. 1963년 읍을 시로 승격시켜 의정부시가됨에 따라 종래의 양주군에서 분리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의정부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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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주위가 비교적 평탄한 분지상의 준평원화된 지역이고 서울이 가까우므로 근교농업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이때문에 이곳의 대표적 경작은 야채중심의 밭농사이다. 중랑천과 왕숙천은 천정천이므로 제방이 많고 사면(斜面) 이용이 집약적인 점이 특색이다. 또 이 지방은 양주와 더불어 밤으로 유명하다. 공업은 주로 섬유제품·제지류 등인데 규모가 크지는 못하다. 그리하여 3차산업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의정부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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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경원선의 요역이고 서울시의 환상교외선인 능의선이 통하고 있다. 또 도로는 서울에서 원산에 통하는 금성가도와 추가령구조곡을 통하여 원산으로 직통하는 경원가도의 분기점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이다. 서울과는 교통이 빈번하여 마치 서울특별시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망월사 혜거국사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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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月寺慧炬國師浮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호원동 산 91번지 망월사 부근. 혜거국사의 사리를 봉안한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전체의 높이는 3.4m이고 탑의 몸통 둘레는 3.1m이다. 기단부위에 구형 탑신을 안치하고 옥개석과 상륜부로 구성돼 있다. 기단부는 지대석과 대석으로 구성돼 있는데 지대석은 팔각형 삼단의 일석으로 높이가 80cm이다. 탑 몸통은 공 모양으로 조성되고, 괴임대 위쪽과 옥개석 아래쪽에 홈을 파서 탑 전체의 안정감을 꾀했다. 옥개석은 북발과 보주까지 한 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낙수면은 목조건물의 지붕 모양이며, 귀꽃은 모두 8개이다. 상륜부는 옥개석과 일석이며 복발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것이 특징이다.

망월사 천봉당태흘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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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月寺天峰堂泰屹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6호. 호원동 산 91번지 소재. 조선시대 천봉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팔각석종형의 부도로서 기단부위에 탑신을 안치하고 옥개석을 얹은 위에 상륜부를 구성하고 있다. 탑신석은 팔각석 종형으로 조성되었다.

신숙주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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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叔舟墓

경기도 기념물 제88호. 고산동 산 53-7번지 소재. 무송군부인 윤씨의 묘와 나란히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묘앞에는 묘비석, 상석, 문인상, 신도비, 한글창제사적비 등 각종 석물들이 있는데, 그 중 한글창제사적비는 최근에 건립한 것이다. 신숙주는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정치가로서 자는 범웅, 호는 보한재·희현당. 공조참판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 때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여섯 임금을 충성으로 보필하였고, 특히 계유정란 이후부터는 조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성종의 특명으로 간행된 '보한재집' 17권을 비롯하여, 세조 6년(1460) 여진정벌을 마치고 북정에 관한 것을 편찬한 '북정록' 6권, 세종 25년(1443) 일본 서장관으로 갔을 때의 견문록인 '해동제국기' 1권과 '동국정운', '사성통고', '오례의', '경국대전' 등이 있다.

의정부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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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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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1634)

자는 가의(可依). 호는 송와(松窩). 본관은 한산(韓山). 고려말 명신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3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양주목사·부제학·대사헌·장흥부사·이조판서를 지냈다. 선조 37년(1634)에 82세로 하세하였다. 시호는 장정(莊貞)이며 청백리에 올랐다. 저서로는 '송와잡설'이 전해온다.

이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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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1~1660)

조선 효종 때의 문신으로 자는 돈시(敦時), 호는 조암(釣巖), 본관은 연안이다. 양주목사·수원부사를 역임했다.인조반정 때의 공으로 연양부원군에 피봉되고, 인조 14년(16 36) 병자호란 때 수어사로 남한산성을 지켰다.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가 효종을 세자로 세우려 하여 신하들의 찬동을 얻었으나, 시백은 이경여와 같이 세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인조가 승하한 후 효종 원년(1650) 우의정이 되었고, 효종 3년에는 연경에 다녀온 뒤 효종 6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의정부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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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서울 북동쪽 4km 지점 추가령구조곡의 저곡(低谷)에 발달한 경기도 북부지방의 교통·경제·군사의 중심을 이루어, 북쪽은 포천·감화방면, 서쪽은 연천 방면으로 통하는 교차점에 역촌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또 부근 농산물의 집산지였는데 점차 공장이 들어섰고 8·15를 전후하여 인구가 증가하였다. 의정부가 오늘날과 같이 큰 발전을 가져오게 된 것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군사상의 요지가 되어 그 영향으로 서울과의 교통이 편해진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그리하여 한국전쟁 전만 해도 인구의 약 90%가 제1차산업에 종사하였는데, 1970년에는 10%로 내려가고 그 대신 3차산업이 80%로 역전되었다. 특히 1963년 교외선의 개통과 서울시와의 버스 교통의 발달로 더욱 급격히 발달하였다. 공업은 수질이 좋은 공업용수가 풍부하고 지가(地價)도 비교적 저렴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면직물·제지공업이 발달해 있다. 대부분의 공장은 1963년 시로 승격되기 전후하여 일어났다. 근교에서는 서울시를 상대로 채소·과수재배·낙농·양계 등의 근교농업을 많이 하고 있다.

성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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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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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南-象徵物

성남을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성남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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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南-自然

북으로는 수도 서울과 접경을 이루고 동남으로 광주군·용인시, 서쪽은 시흥시와 접하여 있다.시의 가운데로 탄천이 남북으로 흐르며, 하천 양 기슭으로 범람원이 발달해 있다. 청계산, 남한산, 청량산이 주변의 시·군과 경계를 이룬다. 면적은 141.83㎢이며, 인구는 93만 7,780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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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을 통하여 맑은 날씨가 많고 겨울에는 추운 날씨가 많다. 연평균 기온 11

, 1월 평균 기온 -5.9

, 8월 평균 기온 26.3

, 연평균 강수량 1,249㎜이다.

성남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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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도읍지로 정한 하남 위례성이 옛터로 추정되는 지역으로 고구려 장수왕이 475년에 남하하여 한산성을 함락하고 북한산군을 설치, 551년 백제성왕이 신라와 연합군을 결성 한산성을 탈환하였고, 553년 신라 진흥왕이 한산성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고, 557년(진흥왕 18)에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으며, 다시 568년(진흥왕 29)에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남천주를 설치하였으며 604년(진평왕 26)에 남천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가 662년(문무왕 2) 남천주가 설치되고, 664년 한산주로 개칭되고, 767년(경덕왕 16)에 시행된 한화정책에 따라 한주로 개명되었다.고려 태조 23년(940)에 광주로 개칭하여 부르다가 현종 9년(1018)에 양광도에 예속되고 안무사를 설치하였다.조선시대인 명종 14년(1559)에 목사가 파견되었고 선조 10년에 광주부로 승격되었다. 1946년 세촌별 관할구역 6개리를 관할하는 중부면 성남출장소를 설치하여 개소한 뒤 1964년 광주군 직할 성남출장소로 승격되었다. 이후 경기도 성남 출장소의 관할 인구가 14만여 명으로 급격히 증가하여 행정수요 충족이 불가피하게 되어 1973년 성남시로 승격하여 시행정 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성남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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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새로 개발된 신생도시이며 수도 개발권에 위치한 주거 도시라는 특수여건에 힘입어 방대한 공업단지를 조성하고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을 주로 하고 있다.3개의 공업단지에 수출을 목적으로 한 각종 공장이 많이 입주하여 매년 공장의 수나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다. 업종별로는 금속기계·섬유·전자·화학 등 다양하다.

성남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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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서울 중앙부로부터 20km 반경, 수원 21km 반경에 위치하며, 철도는 없으나 경부선의 각 역을 통하여 관내 교통에 이용되고 있다. 도로교통은 경부고속도로가 시의 서남부를 통과하며, 서울 외국 순환고속도로를 주축으로, 잠실방면의 도로와 광주-안양간 도로, 분당선 전철이 통과해 편리하다.

성남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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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삼국시대에는 삼국의 치열한 각축장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광주·광주목, 조선시대에는 광주부·광주부윤으로 불렀다. 1895년 행정제도 개편 때 광주군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 광주군 중부면에서 성남지구 주택단지 조성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성남시의 모체였다. 1973년에 광주군에서 분리되어 시로 승격했으며, 1989년에 중원구와 수정구를 신설했다. 1990년대에는 분당지구에 신도시 건설사업을 추진해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증해 분당구를 신설했다. 시의 중앙에는 한강의 상류가 남에서 북으로 관통하고 있고, 북동의 경계에는 남한산성이 가까워 시민의 휴양지로도 좋다. 표준 신시가지 건설을 위해 상업·문화·교육·주거 등 전반에 걸쳐 조화있고 특색있게 방대한 개발사업을 펼치고 있다.

분당 신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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盆堂新都市

분당 신도시는 1989년 4월 27일 당초 정부가 발표한 것처럼 서울 중산층의 흡수를 겨냥하고 있다. 분당의 전체 개발 면적은 당초 556만 평에서 몇 차례의 조정을 거쳐 현재는 69.43㎢으로 늘어났다.공원, 녹지, 하천 시설용지가 172만 평, 도로 시설 용지 119만 2,000평, 기타 주택 건설용지가 192만 3,000평이다. 그러나 신도시는 쾌적한 도시 공간 조성을 위해 수용 인구를 당초 42만 명에서 39만 명으로 축소했다. 인구밀도는 ha당 210명선으로 기존 상계·과천 지역보다 훨씬 낮다. 이곳에 들어선 주택은 아파트 8만 8,700가구 연립주택이 6,400가구 단독주택이 3,200가구로 모두 9만 7,500가구에 달한다. 교육 시설로는 초등학교 26개교, 중학교 16개교, 고등학교 15개교, 유치원 10개교, 특수학교 1개교 등 모두 68개의 각급 학교가 신설되었으며, 광장 6개소 운동장 3만 2,000평, 공공청사 4만 8,000평, 시장 6개소, 3만 7,000평, 자동차 정류장 8개소 3만 7,000평 등이 들어선다. 또 사회복지 시설 8개소, 종합 의료 시설 3개소, 도서관 5개소 등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안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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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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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養-象徵物

안양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독수리이다.

안양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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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중서부에 위치하여 동은 과천시·의왕시, 서는 광명시·시흥시, 북은 서울 관악구·금천구, 남은 군포시·안산시와 접한다. 지세는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하여 동부와 남서부가 높고, 중앙이 낮은 지형이다. 시의 동북에는 관악산·삼성산 등이 옹립하고 서남부에는 수리산·수암봉 등이 솟아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시 중앙에는 안성천이 북류하면서 유역에 평야를 전개하여 농경지와 도시 발달에 주요인이 된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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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균 기온 11.9

, 1월 평균 -7

, 8월 평균 26.2

, 연평균 강수량은 1,300㎜이다.

안양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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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 때는 율목군 통일신라 때는 율진군이라 했다. 안양(安養)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궁예의 후예인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 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산꼭대기의 구름이 5가집 빛으로 채색을 이룬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했다. 구름 밑에서 능정(能正)이란 노스님을 만났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건의 뜻과 같으므로 이곳(만안구 석수 1동 산 2번지 일대)에 안양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이 안양사로 인해 안양이란 명칭이 탄생하였다. 조선시대에 정조대왕께서 부친 사도세자의 능행을 위해 가설한 만안교의 안(安)자와 함께, 양(養)자는 후세 사람에게 인륜의 근본인 효의 뜻을 살리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1941년 시흥군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되며 쓰였는데, 안양이란 불교에서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극락정토의 세계로 모든 일이 원만구복하여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롭고 안락한 이상향을 뜻한다. 조선시대에는 과천현과 금과현으로 나뉘었다. 1914년에 시흥군 서이면이었다가 1941년에 안양면으로 바뀌었다.1949년 8월 안양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63년 1월 동면의 안양리, 서면의 박달리가 안양읍에 편입되었고, 1973년 1월 18리를 12리로 통합하였으며 1973년 시로 승격되었다.

안양의 산업·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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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交通

서울의 위성도시로 근교농업이 활발했다. 그러나 산업화, 도시화에 따라 공장이 늘고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공업은 기계·금속·전기·전자·화학·섬유 공업이 주업종으로, 1970년대 이후 급성장했다. 공장은 시의 북동부와 경부선 주변, 안양천 주위에 집중해 있다.철도는 경부고속이 시 중앙을 남북으로 종단하여 안양역을 통하여 시내 교통에 이용되고, 도로교통은 경부가도와, 경수산업고속화가 이루어져서 서울·수원 방면의 교통이 편리하다. 지하철 1·4호선과 연결되는 수원·과천선 전철과 주변 주요도시와 연결되는 도로가 발달해 있다.

석수동 마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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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水洞磨崖鐘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2호. 소재지는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산 32 비산공원 주차장 뒤. 이 마애종은 달아놓은 종을 스님이 치고 있는 장면을 거대한 바위에 묘사한 것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마애종이다. 사각형의 결구(結構)형식에 쇠사슬로 연결된 종은 음통(音筒)을 갖춘 비교적 정교한 종뉴 아래에 약간 벌어진 형태로 종신이 연결되어 있다. 종신의 표면에는 상대(上帶)와 붙어 있는 유곽(乳廓), 종복(鐘腹)에 있는 연화문(蓮華紋) 당좌(撞座), 뚜렷하지 않은 문양을 새긴 하대(下帶)가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공간의 균형감이 있어 보이며, 전체적으로도 안정감이 있다.

삼막사 마애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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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幕寺磨崖三尊佛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 자연 암벽에 감실을 만들고, 거기에 부조한 치성광삼존불(熾盛光三尊佛)로 조선 후기를 대표할 만한 걸작이며, 석굴사원으로 중요한 자료이다.주존(主尊)인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의 머리는 소발(素髮)에 반달형 계주가 보이며, 얼굴은 사각형이지만 눈과 입, 볼 등을 율동감 있게 묘사하여 미소짓게 함으로써 중후하고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게 한다. 목은 짧아서 더욱 어깨가 움츠려 보이고, 신체는 두터운 불의에 파묻히고 선각(線刻)으로 묘사하여 양감을 느낄 수 없다.좌우 협시(脇侍)인 일광(日光)·월광보살(月光菩薩)은 각각 연화대 위에 합장한 모습인데, 머리에는 소박한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본존과 비슷하지만 환한 미소 때문에 활력이 넘쳐 보인다. 이 삼존불은 얼굴이나 상체의 활달한 부조(浮彫)로 생동감이 넘쳐 조선(朝鮮) 불상(佛像)에서는 파격적 수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몸의 표현을 생략한 평판적이고 경직된 상체와 하부로 내려갈수록 얕은 기법 등은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이 불상 아래 건륭(乾隆) 28년(영조(英祖) 39년, 1763)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칠성신앙과 다산신앙이 결합된 불교와 민간신앙의 결합상태를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삼막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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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幕寺三層石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2호. 석수동 산 10-1 삼막사 경내. 삼막사 승도(僧徒)인 김윤후(金允候)가 몽골군의 원수(元帥) 살리타이를 살해, 싸움을 이긴 승적을 기념한 탑이라 전한다.기단부(基壇部)는 장대석(長臺石) 4매(四枚)로 하층기단(下層基壇) 하대(下臺)를 만들고, 하층기단 면석(面石)도 역시 장대석 4매로 되었으며, 갑석(甲石)은 2매석으로 구성되었다. 상층기단(上層基壇) 면석(面石)은 4매석(四枚石)으로 짜여있고, 갑석은 한 귀퉁이가 파실(破失) 되었다.탑신부(塔身部)는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각기 1석씩으로 조성하였는데 각층의 옥개받침은 3단씩이다. 전체적으로 둔중하여 고려시대(高麗時代)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높이는 2.55m.

안양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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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안양은 8·15 광복 당시 방직공업을 기반으로 발달했으며, 1960년대 이후 계속해서 인구가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시 외곽을 따라 시가지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군포와 서울에 연결되어 있다. 중앙의 분지에는 1990년대 평촌 신도시가 들어섰다. 전체 면적은 58.52㎢이며, 인구는 59만 3,967명(2001.12)이다.

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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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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富川-象徵物

부천시를 상징하는 꽃은 복숭아꽃,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보라매이다.

부천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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富川-自然

동은 서울 양천구·구로구, 서는 인천시·부천시, 북은 서울 강서구, 남은 시흥시에 인접하고 있다.시의 동남에는 춘의봉·원미봉·성주봉 등 200개 내외의 저산성 산지들이 산재해 있어 대체로 높고, 서북은 대체로 저평한 평야가 발달하여 농경지로 이용된다. 굴포천과 소사천이 북쪽으로 흘러 한강에 합류하며, 굴포천 연안에는 범람원이 넓게 발달되어 있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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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의 영향을 받아 대체로 온화하며, 연평균 11.7

, 1월 평균 -5.2

, 8월 평균 25.9

, 강수량은 1,111㎜로 적은 편에 속한다.

부천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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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조선시대에는 부평 도호부에 속해 있다가 1895년 부평군(富平郡)에 예속되었다. 1914년 부천군(富川郡), 곧 다시 계남면으로 칭하였다. 1931년에 소사면으로 호칭, 1941년 소사읍으로 승격되고 1963년 읍의 일부가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 부천시로 승격되었다.

청룡산 청동기시대 출토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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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청룡산유적 발굴 결과, 청동기 시대 주거지 6기와 돌넛널무덤 1기를 발굴하였다. 주거지는 완전한 형태를 알 수 있는 것 2기, 반파된 것 2기, 그리고 미발굴 1기이다.돌덧널무덤은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속에서 확인되었지만 반드시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볼 수는 없으며 후대의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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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팡구지는 선사시대의 청동기 거석기념물(巨石記念物)로, 납작하고 짤막한 받침돌을 양편에 세우고, 그 위에 평평한 덮개돌(또는 뚜껑돌)을 덮은 청동기시대 부족장의 무덤인 침존형(일명 남방식) 고인돌(덮개돌)로 보이는 큰 바위이다.이 돌팡구지는 남북 길이가 4m, 동서가 2m로 상단 표면에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성(性)이 있다. 10월 추수감사제로 경기도 지방에서 행해지는 마을의 공동제사인 장말도당굿을 거행할 때 이 돌팡구지는 큰당(웃당)에 해당된다. 돌팡구지 옆에는 도당굿을 할 때 제사를 드리는 당집이 있다.

변종인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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卞宗仁神道碑

향토유적 제1호.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공장공 변종인의 신도비로 옥개(이수)는 그가 우인이었기 때문에 투궁형을 하고 있으며, 비좌(귀부)는 문갑 무늬를 장식하였다.

부천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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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변영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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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1961)

시인. 호는 수주(樹州). 중앙 학교를 졸업하고, 이화 여전 등에서 교편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산 호세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후 동아일보사 기자로 근무했다.신문학 초창기에 등장한 신시의 선구자로서, 민족의 울분을 서정적이며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작품으로 시집 '조선의 마음', 수필집 '명정 40년', '수주 시문선' 등이 있다.

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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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971)

실업가·사회사업가. 평양에서 태어나, 9세 때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고학으로 공부하여 미시간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에서 가공식품회사를 경영하여 크게 성공하고, 귀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제약회사인 ‘유한양행’을 세웠다.한편, 학교를 세우고 공익 사업과 육영 사업에 힘썼다. 소득을 사회에 환원시킨 사업가로 유명하다. 뉴욕 한미상공회의소 회장·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지낸 그는 국민 훈장 모란장·무궁화장 등 많은 훈장을 받았다.

최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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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嬉涉 (1919~1998)

재단법인 북성육성회 이사장으로서 사회봉사활동에 전념한 인물이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평생 사랑과 헌신의 발자취를 남겼고 기아에 허덕이는 방글라데시 어린이들을 돕는 데도 앞장섰다. 원미구 춘의동의 산2필지 9,429평(시가 5억원 상당)을 부천시에 희사하여 공원조성의 기반을 마련하게 했다.

부천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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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서울의 위성도시로서 과거에는 원예농업이 활발하였으나 최근에는 서울에서 분산되는 공업을 수용하여 그 수가 증가되어 가고 있다. 공업은 기계·화학·전자·전기·섬유 등이 주종을 이루며 이중 기계업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경인고속국도 주변의 오정동과 신흥동이 중심 공업지구이다.서울과 인천의 중간지점으로서 철도는 경인선이 시 중앙을 통과하여 소사역을 통하여 서울과 인천 방면에 연락되고 서울∼인천간 지하철이 부천을 지나간다. 김포

고양간, 인천

시흥간 도로가 있다면적 53.44㎢에 인구 78만 5,754명(2001.12)으로 전원 주거도시와 경공업도시로 개발의 기본방향을 세우고 다방면에 걸쳐 도시개발을 추진 중에 있다.

구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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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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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里-象徵物

구리시를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구리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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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중부에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 호상 편마암과 대보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남쪽에는 한강의 본류가 흐르며, 서쪽에는 한강의 지류인 왕숙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면서 넓은 충적지를 형성한다.

구리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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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신라시대에 내소군, 고려시대에 한양부, 조선시대에 양주목으로 불렀다. 중종25년(1530) '신동국여지승람'에 ‘구지’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였다. 구지면에 10개 리가 있었다. 1914년 구지면의 10개 리와 망우리면의 15개 리, 그리고 노원면, 미음면의 일부 리, 진관면·별비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구지의 ‘구(九)’자와 망우리의 ‘리(里)’자를 따서 구리면이라 하였다. 1973년 구리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양주군에 속하고, 1980년 남양주군의 설치로 구리읍에 편입되었다. 1986년 구리읍이 시로 승격하였다.

구리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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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왕숙천과 한강변을 따라 긴 제방이 축조되어 있어 농경지를 보호한다. 현재 안창리와 수택리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도시계획법에 따라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있다. 총면적의 34.6%가 전답이며, 그 중 41.3%가 밭이다. 서울 주변의 대표적인 근교 농업 지역의 하나로 특징적인 농산물은 원예작물이다. 광공업현황은 섬유·의복·음식료품에서 금속·목재가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업체가 있으나 모두 소규모 생산시설이다.

동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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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九陵

국가지정 사적 제193호. 구리시 인창동 산 2-1번지. 동구릉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능침지로서 57만 9,557평의 넓은 대지 위에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 17위의 유택(幽宅)이 마련돼 있는 왕릉군이다.

명빈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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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嬪墓

국가지정 사적 제364호. 조선조 제3대 태종의 후궁인 명빈(明嬪) 김씨의 묘이다. 명빈(?~1479)은 지돈령부사(知敦寧付事) 안정공(安靖公) 김구덕(金九德)의 딸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태종 11년(1411) 11월 명빈으로 책봉(冊封) 되었고 성종 10년(1479) 6월 5일 사망하기까지 태종부터 성종에 이르는 7대에 걸쳐 내명부를 지켰으나 태종과의 후사는 없다. 묘역의 석물(石物)은 표석 1기, 문인석 1쌍, 상석(혼유석) 향로석 등이 있다.

구리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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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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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1931)

구지면 사노리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노은(蘆隱). 한말에는 의병활동을, 합병후에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였다. 한말 대한제국군인 육군 참위(參尉)로 군대에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가 해산당하자 철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차에 걸쳐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1908년 1월에는 13도연합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하였다.그러나 일제의 강력한 군사력에 밀려 1908년 1월 13도 연합의병군의 서울진격작전 당시 부상을 당한 적도 있다. 이후에도 경기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석방되어 1910년 합병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1919년 8월 북만주의 항일 무장독립 운동조직인 북로군정서의 사단장이 되어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또한 만주 왕청현십리평에 세운 사관연성소의 교관으로서 김좌진 등과 함께 청년 교육에 힘썼다.1920년 10월 북로군정서 제2연대 제1대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크게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밀산(密山)에서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 등 여러 단체의 군대가 통합하여 편성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총사령이 되어 3, 500여 명의 독립군을 이끌었다.자유시참변 후에 다시 연길현으로 돌아와서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상해노병회(上海勞兵會)의 지원을 받아, 1923년 5월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총사령에 선출되었다. 고려혁명군은 병농일치(兵農一致) 제도를 실시하여 직접 농사를 지어 군수문제를 해결하였으며, 소련으로부터 비밀리에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력을 강화하고 군사훈련을 계속하였다.1925년에는 북구영안현(北溝寧安縣)에서 정의부와 참의부가 합쳐 조직된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하였고 1926년 4월 5일 길림성 영남(嶺南)호텔에서 각계의 혁신적인 대표들이 모여 조직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그러나 항일 투쟁을 계속할수록 장기적인 항일투쟁을 위해서는 2세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연수현(延壽縣)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학교 운영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1931년 4월 10일 주하현(珠河縣)으로 가서 최악·홍진·식숙 등을 만난 후 암살당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심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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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독립운동가. 구리면 아천리 출신으로 직업은 농업. 1919년 3월 식민지 지배에 항의하여 전국에서 3·1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3월 28일 오후 5시, 같은 마을에 사는 이강덕과 함께 아천리 주민 수십 명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 아천리·토평리·교문리 일대에서 시위를 하였다. 다음날인 29일에도 아차산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1919년 5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기각 판결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판결을 받고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였다.

구리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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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동으로 남양주시, 서로 서울 노원구·중랑구·광진구, 남으로 서울 강동구와 접하고 있으며, 7개동이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수도권의 베드타운으로 급성장했으며, 서울에서 이주해오는 인구가 많다. 면적 33.29㎢, 인구 18만 5,494명(2001.12)이다.구리시는 서울 동북의 관문이며 서울과 동일 생활권으로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 있어 도시개발이 시급하다. 전체 면적 중 그린벨트 등 개발제한 구역이 77.7%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시가지는 3%에 불과하다. 연 5%의 높은 인구 증가율을 보이고 있으며 공장도 191개나 되어 주거 면적은 늘리고 도시 외곽에 공단을 조성하는 일이 당면 과제이다.

과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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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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果川-象徵物

과천을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밤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과천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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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기반암은 대부분이 호상 편마암으로 되어 있으나, 양재천 연변에는 충적지도 널리 발달되어 있다. 북서쪽의 관악산이 서울·안양과 경계를 이루고, 남동쪽의 청계산이 성남·의왕과의 경계를 이룬다. 한강의 지류인 양재천이 시의 북동쪽으로 흐르고, 양재천 양쪽 기슭에는 범람원이 발달해 있다.

과천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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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 율목군(일면 동사힐)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한산주 율진군으로 되었고, 고려 태조 23년(940)에 과주로 개칭하였다. 고려 성종 9~13년(990~994) ‘부림’, ‘부안’이라는 별호를 사용하다가 고려 현종 9년(1018) 과주현이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경기도 광주목 과천현으로 개칭하고 1895년에 경기도 과천군으로 변경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시흥군에 병합되어 면으로 격하되었다. 1979년 4월, 정부가 제2종합청사 건립에 따른 행정기능 지원과 서울대공원의 위락공간 기능을 감안한 시범 전원·문화도시 개발을 목표로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에 경기도 과천지구 지원사업소를 설치하였다. 이어 1982년 6월 이를 경기도 과천지구 출장소로 승격하여 관하에 북부지소와 남부지소를 두었다가 1986년 과천시로 승격하여 정부의 전경제부처를 이곳으로 이전하였으며 6개 동이 있다.

과천의 산업·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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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交通

4개의 대도시와 접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근교 농업지역이다. 최근에는 정부 과천청사 부근에 대기업 본사 등이 들어서고 있어 이와 관련된 서비스업이 발달하고 있다.한때는 우리나라의 남북을 연결하는 국도가 지나 교통의 요충지였으나, 교통로의 변천으로 쇠퇴하여 한촌으로 전락되었다. 그러나 최근 교통로의 정비로 다시 번영을 되찾아 행정도시로도 변모하였다. 서울·군포·안산 방면을 연결하는 과천선 전철과 서울

안양간 국도가 있다. 그 밖에 안양·의왕·성남 방면의 지방도가 있다.

조선방역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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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方域地圖

국보 248호. 과천에서는 유일한 국보급 문화재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이다. 조선방역지도는 우리나라 8도의 주와 현을 표시한 지도로 상단에는 조선방역지도로 가로로 쓰여 있고 중심부인 가운데에는 우리나라 전도를 그렸으며, 그 아래에는 제작자의 이름을 적은 좌목이 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연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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蓮珠臺

관악산 연주암 북쪽(관악산 정상). 관악산 연주암 북쪽 꼭대기 절벽에 위치한 절이다. 신라 제30대 문무왕 17년(667)에 의상대사가 좌선공부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고, 조선 태조 원년(1392)에 중건하였다. 고려의 남은 신하 강득룡, 서견, 남을진 등이 여기서 개성을 바라보고 통탄했다 해서 ‘연주대’란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효령대군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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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寧大君影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1호. 관악산 연주암 경내 효령각에 소장. 효령대군은 태종의 둘째 아들로 원경왕후 민씨 소생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독서를 즐기고 활쏘기에 능하여 늘 태종의 사냥터에 따라다녔으며 동생인 세종대왕과는 우애가 깊어 밤늦도록 국정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고 한다. 영정은 정면에서 바라본 전신좌상이다.이모를 거듭하여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기 어려우나 원본의 형태를 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조선초기의 초상화를 연구하는 데 참고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과천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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果川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호. 관악산 등산로 입구 소재. 향교는 고려와 조선 등 전근대적 국가의 중앙집권적 구조위에 왕경이 아닌 지방 군현에 유학을 교육 할 목적으로 설립된 관학 교육기관이다. 과천향교는 태조7년에 창건되어 숙종 16년(1690)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 개축하였으며, 홍살문·외삼문·내삼문·대성전이 전학 후묘의 양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온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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穩穩舍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0호. 중앙동사무소 뒤편에 소재. 과천의 객사였던 온온사가 축조된 것은 조선 인조 27년(1649)이었다. 과천현 신수읍지에 의하면 이때에 객사동헌을 현감이었던 여인홍(1649~1651 재직)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과천객사가 온온사란 명칭을 갖게 된 것은 정조 연간이었다. 즉 생부인 사도 세자(장헌세자:고종 때에 장조로 추증)의 원묘인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이후 이름을 현릉원으로 고치고 이레 참배하기 위해 거동할 때 과천의 객사에서 머물며 주위 경치가 쉬어 가기가 편하다고 하여 ‘온온사’란 현판을 내림으로써 이름을 갖게 되었다.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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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寺址石造菩薩立像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7호. 과천정부청사 맞은편 과천보광사 경내. 높이 17m의 각주형 돌에 전면만을 선각하여 제작되었고, 둥근 얼굴에는 간략히 눈과 코를 새겼으나 입은 보이지 않으며, 목이 없어 몸에 붙은 얼굴 아래로는 굵은 삼도를 표현하였다. 조선시대 보살상으로 추정된다.

과천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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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동은 성남시와 서는 안양시와 북은 서울과 남은 의왕시와 접하는 곳에 위치하는 서울권 도시로 면적은 35.86㎢이며 인구는 7만 1,525명(2001.12)이다. 전체면적의 6% 정도인 2.3㎢가 도시계획 면적이고, 나머지 94%인 33.16㎢가 개발제한구역이어서 도시발전의 장애가 되고 있으나, 정부가 중앙행정 기능의 분산과 서울인구의 분산을 위하여 개발한 계획도시답게 도로포장률 100%, 상수도 급수율 88%, 주택보급률 92% 등으로 도시기반 시설에는 거의 부족함이 없으며, 85년 8월부터는 전화가 서울시 지역전화로 바뀌었다. 이곳에는 경제부처 외에도 중앙공무원교육원·국립공업시험원·공업진흥청 등 중앙부처와 관련된 정부기관이 있고, 초등학교 4, 중학교 2, 고등학교 4개교가 있다.현재는 서울대공원·승마경기장·과천서울경마장이 있으며, 서울 사당동∼과천간의 지하철 연장선이 완공됨으로써 상주인구 및 유동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광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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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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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明-象徵物

광명시를 상징하는 꽃은 장미,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광명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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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서부 중앙에 위치하며 서울의 위성도시이다. 북동쪽은 서울특별시와 접하고 남동쪽은 안양시와, 남서쪽은 시흥시와, 북서쪽은 부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 경계에는 안양천의 본류가 한강으로 북류(北流)하며 광주산맥 말단부의 구릉지인 구름산을 중심으로 화강암이 풍화 침식되어 이루어진 평야지대이다. 고도 100

200m의 구릉성 산지가 특히 남부에 널리 전개되고, 북부에는 인구조밀 지역이 있다.

광명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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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 때에는 잉벌노현(仍伐奴縣)에 속하였다. 1895년에는 금주군에 속하였다가 1914년 금천(시흥)·안산·과천의 3개 군이 시흥군으로 통합되면서 시흥군 서면이 되었다. 1970년에는 광명리와 철산리를 관할하는 서면 광명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79년에는 서면이 소하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에 광명시로 승격되었다. 1983년에는 시흥군 소래읍 옥길리 일부가 광명시로 편입되었으며, 1987년 소하동 일부가 안양시에 편입되었다.

광명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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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농업인구는 1960년 전체인구의 70%를 차지하였으나 시 승격 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급격한 감소현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는 도시화가 늦은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하우스 재배 등 근교농업이 발달하여 고등채소와 과실류의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전체 인구의 1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반면, 도시화와 더불어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1985년 전체 산업별 취업자 중 제조업 종사자 비율이 50.7%였으나, 1990년에는 80.6%로 급증하였다. 업종별로는 조립금속·기계장비 제조업이 주종을 이루고 섬유류·화학섬유 공업도 발달해 있다. 약 300여 업체가 있지만, 대기업의 중공업과 자동차 공장의 제외하면 대부분이 중소업체 들이다. 지역적으로 안양천을 사이에 두고 서울 구로공업단지와도 인접해 있다.

광명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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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안양천을 경계로 서울과 연결되어, 서울시내 전화를 사용하고 서울시내 버스노선이 통하는 등 서울시 생활권에 속하는 대표적인 위성도시이다.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20개교, 중학교 9개교, 고등학교 6개교가, 특수학교 1개교가 있다. 1990년에는 대한주택공사에 의해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시민의 주택난 완화와 더불어 인접한 구로공단 등지의 근로자가 입주하여 서울의 주택 위성도시로서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전체 면적은 38.50㎢이며, 인구는 33만 7,175명(2001.12)으로 총 가구수는 11만 685가구이다.선사시대 유적으로 소하동의 지석묘(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58호)와 철산동 고인돌군이 있다. 조선시대 유적으로는 이원익의 영우(影宇, 경기도 문화재 제80호)와 충현서원지(경기도 기념물 제80호)가 있으며, 이원익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동두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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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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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豆川-象徵物

동두천시를 상징하는 꽃은 장미,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동두천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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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기반암은 화강암·결정편암·호상편마암 등으로 되어 있다. 북쪽에 옥녀봉(411m), 서쪽에 마차산(587m), 동쪽에 소요산(526m)·국사봉(754 m)·왕방산(737m), 남쪽에 칠봉산(506m)·해룡산(661m) 등이 있어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이고, 남서부에 좁은 평야가 있다. 한탄강의 지류에 좁은 평야가 있으며, 한탄강의 지류인 신천이 시의 중앙부를 지나 북으로 흐른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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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의 산악지에 위치하므로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 기온이 12.4

내외이고, 1월 평균 기온은 -6

이며, 8월 평균 기온은 25

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300㎜ 내외로 비교적 많다.

동두천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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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시대에 매성군, 신라시대에 내소군, 고려시대에 견주군, 조선시대에는 양주군에 속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일담면이었으나, 후에 이담면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 동두천으로 개칭됨과 동시에 동두천읍으로 승격되었다. 1968년에는 준전시체제로 직제개편을 하였고, 1973년 포천군 탑동리를 편입하였으며, 1979년 또 한번 직제개편을 하였다. 1981년 7월 1일 동두천시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 2월 전국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양주군 은현면 상패리가 편입되어 시역이 늘어났으며, 행정구역은 7동으로 이루어졌다.

동두천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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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경기도 최북단의 상업중심도시로 인근 지역을 경제권으로 하는 도로망이 발달되어 있고, 대단위 농산물 및 생활필수품 유통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또 군사보호구역으로서 외국인전용 위락시설과 관광업소가 설립되어 있다. 소수의 종업원을 거느린 중소기업이 대부분이다. 최근 전원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하여 시가지의 녹화사업, 주말농장 개설, 대단위 근교원예·과수단지 조성 등이 추진되고 있다. 경제활동 인구비율을 보면 1차산업 1%, 2차산업 65%, 3차산업 34%이며 경지면적은 전체면적의 16%인 14.96㎢이다. 주요 농축산물은 쌀·보리·사과·배·포도·젖소·돼지·닭 등이다. 상업활동을 업종별로 보면, 식료·잡화점·음식점·주류·클럽·다방·다과점 순으로 많으며, 특히 외국인전용 위락시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공설시장 1개소, 개인경영시장 1개소가 있다. 광업면에서는 규석·백운석·장석 등의 생산업소가 있으나 영세하며, 제조업 부문에서는 피혁·금속·섬유·염색·전기전자·식품·화학·벽돌·연탄 등의 중소기업이 발달되어 있다.

동두천의 교통·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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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觀光

경원선과 평화로가 시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한다. 서울 성북역에서 1시간 이내의 거리이며, 서울까지의 완행버스와 직행버스가 수시로 운행하여 교통은 편리하다. 동두천 시내의 명승고적으로는 소요산이 있다.

소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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逍遙山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수이북 최고의 명산이다. 규모는 작지만 산세가 특이하고 봄철 진달래와 철쭉이 장관을 이루며 가을 단풍 또한 유별나서 예부터 경기의 소금강이라 일컬어진다. 이곳은 원효대사가 고행 수도하여 큰 도를 깨친 곳이어서 불교 유적지로도 이름이 높다. 자재암, 원효폭포 등의 관광명소가 소재하고 있으며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과 눈썰매장, 수영장 등이 있어 수도권지역의 일일 관광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서화담 양봉제와 매월당이 자주 소요하였다 하여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산세가 그다지 장쾌하고 웅대하지는 않지만 형상미의 극치를 보이듯 뾰족뾰족한 기암괴석이 절묘하게 봉우리를 이루어 놓아 만물상을 연상케하고, 심연의 계곡은 오묘한 정취를 발산한다. 산정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소담스러우면서도 앙증맞은 청량폭포가 있으며 폭포 위로 조금만 더 오르면 높이가 10m나 되는 원효폭포가 있다.

자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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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在庵

소요산에 위치한 자재암은 신라 무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기거했다는 전설 때문인지 무수한 승려들이 수도차 거쳐가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1994년 암자의 서책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반야바라밀다심경'이 발견되었는데 낙장 하나 없는 완벽한 언해본으로 보물 1211호로 지정돼 있다. 소요산 입구에서 자재암 일주문까지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다.

사패지 경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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賜牌地境界石

향토유적 제1호. 동두천시 생연동 379. 사패지 경계석의 위치는 조선 초기의 무신(武臣) 어유소(魚有沼 1434~1489) 장군이 1488년 국왕인 성종과 함께 어등산(御登山)에 올라 화살을 쏘아 맞혀 솔개가 떨어진 지점이라 하며, 이로 인하여 현 동두천시 일원(一圓)을 사패지로 주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전해온다. 능안 마을의 밭 한가운데 서 있는 이 사패지 경계석은 일반 무인석보다 그 규모가 작으며 머리 부분은 6·25전쟁 때 일부가 파손되어 탄흔(彈痕)이 역력하다. 높이 140cm, 폭 47~50cm.

탑동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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塔洞石佛

향토유적 제5호. 동두천시 탑동 산 168 소재. 고려시대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석불좌상이다. 지금으로부터 1백 여년 전 이곳에 살던 주민 배기주와 이우상이 어느날 꿈에 부처가 현몽, 다음날 이곳을 파보니 땅속에 미륵좌상 석불과 탑이 묻혀 있었다고 한다. 화강암의 석불좌상은 연화문이 선명히 조각된 대좌 위에 항마좌(降魔坐)를 하고 있는데 육계와 삼도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나발에서 수인에 이르기까지 심한 마모현상을 나타내고 있으나 얼굴 부분은 온화한 느낌을 준다. 석불좌상의 높이 80cm, 최대 높이 100cm.

삼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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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忠壇

향토유적 제9호. 동두천시 상패동 105. 단종 원년(1453)부터 세조 2년(1456)까지 세조의 왕위찬탈에 항거 단종의 복위 운동에 가담했던 민신(閔伸)·김문기(金文起)·조극관(趙克寬) 등 세 충신의 호패비를 모신 곳이다. 곡담 내 대리석 호패비들은 각각 높이 67cm, 폭 28cm, 두께 10cm이며, 삼충단의 규모는 정면 9.6m, 측면 7.2m이다.

동두천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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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홍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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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애국지사. 휘는 병준(秉俊), 본관은 남양(南陽). 1919년(己未)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음력 2월 25일(동두천 장날) 정오에 1천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그 후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다. 출옥한 후에는 일본 헌병이 가한 형독(形毒)으로 인하여 수년 후 향리인 걸산동에서 세상을 떠났다.1975년 읍민의 성금을 모아 소요산 입구에 추모비를 세웠다. 화강암으로 된 비신의 앞면에는 애국지사 홍덕문 추모비라 음각했고, 뒷면에는 선생의 행적을 새겼다.

어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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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4~1489)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자는 자유(子遊), 본관은 충주(忠州). 세조 2년(1456) 무과에 장원한 후 세조 6년(1460) 야인(野人) 정벌에 큰 공을 세우고 회령부사(會寧府使)를 거쳐 세조 13년(1467에는 좌대장으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이 되어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지고 공조판서에 특진되었다.그 해 겨울 명나라가 건주위를 칠 때 좌대장으로 큰 공을 세웠고 예종 원년(1469) 함경북도 절도사, 성종 2년 좌리공신 4등이 되고, 두 차례나 영안북도 절도사를 지냈다. 이후 우참찬으로 도총관을 겸임했고 병조판서 우찬성을 지냈다. 성종 10년(1479) 건주위 정벌 때 서정대장으로 출정했으나 작전상 회군한 죄목으로 한때 유배되었다가 다시 풀려나 도총관 이조판서 동지중추부사, 영안도 순찰사를 역임했고, 성종 19년(1488) 판중추부사 겸 도총관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장(貞莊).

동두천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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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경기도 최북단에 위치한 시로 면적은 95.68㎢, 인구는 7만 5,699(2001.12) 이다. 북동쪽으로 포천군에 접하고 서쪽과 남쪽으로 양주군, 서북쪽은 연천군에 접한다. 주민의 절대다수가 타지역 출신이다. 수도권 40km 이내의 위성도시로 군사보호구역으로 되어 있으며 한국전쟁 이후 급격히 발전한 기지촌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18개소, 초등학교 8개교, 중학교 5개교, 고등학교 5개교가 있다. 주변의 군부대 때문에 여러 가지 규제를 받아 다소 개발이 늦어지고 있으나 소요산과 탑동계곡을 중심으로 관광업이 활발해지고 있다. 해마다 10월에 종합예술제인 소요문화제가 열린다. 문화재로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자재암과 탑동석불이 있다.

안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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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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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山-象徵物

안산시를 상징하는 꽃은 장미,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안산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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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중서부에 위치하며 대부분의 지역이 화강암질 편마암으로 되어 있고, 북부에 편암이 나타나며, 반월천 일대에는 충적층이 형성되어 있다. 북부에 수리산(474m), 남부에 나보산(137m), 칠보산(189m)이 있고, 반월저수지가 있는 중부와 황소저수지가 있는 동부지역에 전답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안산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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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 때는 장항구현, 통일신라 때는 장구군이 되었다. 고려 때는 안산현이라 불렀다. 1895년 인천부 안산군이었다가 곧 경기도 안산군이 되었다. 1977년 시흥군의 수암면·군자면과 화성군 반월면의 일부를 수용하여 반월공업단지와 반월 도시개발지원 사업소가 설치되고, 1979년 지원사업소가 경기도 반월지구 출장소로 승격하여 반월지소와 수암지소가 설치되었으며, 1986년 1월, 수암면 화정리와 반월면 둔대리 일부를 다시 편입하여 시로 승격되었다. 1995년에는 옹진군 대부면과 화성군 반월면 일부, 시흥시 안산동과 화정동 일부가 편입되어 시역이 확장되었다.

안산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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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반월신공업도시’ 건설계획에 의하여 집중 개발된 공업도시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낮다.현재 가동중인 공장수는 1,000개로 앞으로도 증가될 전망이다. 업종별로는 기계공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화학·섬유공업 등이 그 다음을 잇고 있다.

반월공업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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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인구 분산책의 일환으로 서울과 경기도 각지에 산재한 중소기업·공해업체의 공장들을 이곳에 이전, 계열화하여 육성할 목적으로 조성된 것인데, 다른 공단과는 달리 주거·교육·생활환경 등 여러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인구 30만 명 규모의 배후도시를 함께 개발한다는 점이 특색이다. 전체 면적 1,750만 평의 기본 계획이 1977년 6월에 확정 고시되었는데 내용은 공업지역 247만 평, 주거 및 상업지역 525만 평, 녹지지역 767만 평 등의 조성이었다. 같은 해에 착공하여 87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를 추진하여 오던 중 총사업비 4,394억 8,000만 원 가운데 932억 3,000만 원이 집행된 1981년 말 당시 이미 350개 업체가 입주하였다. 1년이 경과한 1982년 11에는 부지도 22만 4,000평이 추가로 조성되었고 그중 86%가 분양되었으며 공장입주 계약을 체결한 업체도 총 400여 개 소에 달하였다. 군포 및 논곡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확·포장 공사도 1988년에 개설되었고 또한, 약 400km에 이르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안산시를 기점으로 목포까지 연결될 계획으로 1987년에 착공되었다. 서울과는 지하철이 연계되어 있으며, 인근 시들과도 시내·외 버스노선이 많다. 기계장비·화학·고무업종 등이 입주해 있다.

정정옹주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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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翁主墓

안산시 향토유적 제14호. 안산시 부곡동 산 50-40. 선조 후궁 정빈홍씨의 소생으로 선조 37년 정정옹주로 봉해지고 묘는 부곡동에 있다.

부계팔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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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界八景圖

안산시 향토유적 제16호. 소재지는 안산시 부곡동 237번지. 모산 유원성이 고향땅 부곡지방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그린 8폭의 부곡 8경은 산수와 전원 기암괴석을 독특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부계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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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界全圖

안산시 향토유적 제17호. 안산시 선부동 237. 유원성(1851~1945)이 부곡동 일대에 있는 조상들의 산소를 표기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그림 크기 76.2

133cm, 족자크기 120

180cm로서 부곡지방의 지형산세 지명 등이 상세하게 세필로 기록되어 있어 1920년대 부곡지방의 지형구조가 어떻게 변모되고 있는가를 비교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이익선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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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瀷先生墓

경기도 기념물 제40호. 안산시 일동 555. 수원·인천간 산업도로가 바라보이는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묘소의 석물로는 묘비(墓碑)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봉분의 규모는 600

550

220cm이다. 묘소로 오르는 길은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무덤 앞에 안내판이 있다. 묘소 우측에는 사당이 있다.

별망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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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望城址

경기도 기념물 제73호. 안산시 초지동 656. 별망성지는 남양만을 연하여 해안으로 침입하는 몽골군을 막기 위해 요새지를 형성코자 독립봉의 배면 정상에서 해안선을 따라 양쪽 골짜기 사이를 돌로 쌓아 만든 해안산성이다. 성 가운데에서 청자 및 도자기 조각들이 출토되었으며 능선 끝에는 선사 시대의 패총(조개무덤)이 있다.조선왕조 중종실록에는 이곳에 수군 만호영이 있었으나 갯벌에 밀려 선박의 출입이 어려워지자 이곳으로 영을 옮겼다가 중종 때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 왕후의 능인 소릉이 인근 목내동에 있고 바다가 다시 깊어져 선박의 출입이 가능해지자 다시 영을 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후 임진왜란과 6·25전쟁을 거치는 동안 거의 파괴되어 현재는 인근의 목내산성 군자산성과 같이 이 지역이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남양만을 방어하는 서해안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현재는 복원하여 높이 2.5m, 길이 300m 규모가 되었다.

안산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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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시흥군과 화성군을 통합하여 이루어진 계획도시로 면적은 145.92㎢이며 인구는 59만 8,560명(2001.12)이다. 1972년 이래 반월면과 시흥군 군자면·수암면 일대의 240만 평 규모의 반월공업단지가 완공되어 있다. 이 단지는 수도권 인구 분산책의 일환으로 서울·경기 일원에 산재하는 중소기업 공장을 이전, 계열화하여 지원하는 데 목적을 두고 이루어졌으며, 종래의 공단과는 달리 주거·교육·생활환경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하여 인구 30만 정도의 배후도시를 공단과 함께 건설한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 교육시설로는 초등학교 12개교, 중학교 4, 고등학교 2개교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가 있다.

평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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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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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澤-象徵物 평택시를 상징하는 꽃은 배꽃, 나무는 소나무, 새는 백로이다.

평택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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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남동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해의 아산만을 끼고 발달해 있다. 지질은 주로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기반암은 주로 화강암이며 하천 연변에는 충적층이 형성되어 있다. 대부분 침식평야와 충적평야로서 전 지역이 고도 64m 이하이다.군의 동북부는 대체로 구릉이 많으며 무봉산·천덕산·부산 등의 비교적 높은 산이 솟아 있고, 서남쪽으로 갈수록 낮다. 남부는 동쪽 안성시와 북쪽 화성군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안성천과 황구지천이 아산만으로 흐른다. 연안은 광막한 평야로 경기의 곡창을 이루고, 서부는 다소 구릉의 기복이 있으나 높은 산은 없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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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해발고도가 낮기 때문에 1월 평균 기온은 -4.5

로, 경기도에서 가장 따뜻하며 8월 평균 기온은 26.4

로 경기도에서 가장 덥다. 연평균 강수량은 1,100㎜, 7월 평균 강수량은 283.4㎜, 8월 평균 강수량은 207.3㎜로 평균 강수량이 경기도에서 가장 적은데 이는 지형성 강우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적기 때문이다.

평택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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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삼국시대에는 연달부곡(淵達部曲)이라고 불리었으며 신라 경덕왕 16년(857)에 진위현(振威縣)이라 개칭하고, 고려 태조 23년(1040) 수주(水州)에 편입되었으며, 조선 태조 7년(1398)에 충청도에서 경기도에 이관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변혁을 거쳐 1895년에 군이 되고, 1914년 수원군에 일부를 합하고 1924년에 군명을 평택군으로 개칭하였다.1983년 면에서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안성군 원곡면 용이리·죽백리·청룡리·월곡리와 공도면 소사리가 평택읍에 편입되었다. 1986년 평택읍에서 평택시로 승격되었다. 1995년 3월 평택군과 송탄시를 편입, 통합시로 승격됐다. 2004년 1월 현재 1개 읍(팽성읍), 8개 면(진위·서탄·고덕·오성·청북·포승·현덕·안중)과 13개 동이 있다.

평택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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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이곳은 자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뿐 아니라 교통이 좋은 이점 때문에 예부터 인근 안성 일대와 아산 등 충청 일부 지역의 농산물이 모여들어 농산물 집산지로 이름이 높다. 주요 하천은 안성천·원곡천·도일천 등이며, 하천 연변에는 제방을 축조하여 농경지를 보호하고 있다. 총 면적 중 경작지는 약 56%, 그 중 논은 78%를 차지하며, 농가 가구는 총가구 중 17.1%를 차지한다. 예부터 평택미는 미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원예업과 낙농업도 발달했다. 지형이 평탄하고 수리(水利) 시설이 잘된 평택평야를 끼고 있어 도내에서 경지면적이 가장 넓으며 총 인구의 약 46%가 농업에 종사한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쌀의 곡창지대로서 유명하며, 쌀 이외에도 맥류·서류 등 잡곡류와 특용작물로 참깨·들깨·땅콩 등이 나며, 과실류도 생산된다.공업은 식품·화학·전자·자동차 공업이 주업종으로 공장은 송탄공업단지에 집중되어 있다. 아산만 개발 계획으로 항만공업단지와 안중공업단지를 조성하고 있으며, 평택화력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다.

평택의 교통·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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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觀光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가 있고 지방도로가 잘 발달되어 있어 교통은 비교적 편리하다. 평택시를 중심으로 수원·온천·천안 등과의 사이에 도로망이 잘 정비되어 육로뿐만 아니라 아산만과도 접해 있으므로 해운도 편해 교통의 요지를 이루고 있다.관광 명소로는 진위면의 만기사, 고덕면의 수덕사, 청북면의 약사사, 현덕면의 심복사, 팽성읍의 망한사, 포승면의 영웅 바위 등이 유명하다.

심복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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深福寺石造毘盧舍那佛坐像보물 제565호. 현덕면 덕목리 115. 이 석불좌상은 왼손을 밑으로 지권인을 결한 채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는 비로자나불좌상이다. 굵고 낮은 육계를 한 갸름한 얼굴, 짧은 목과 단정한 어깨, 좁은 무릎폭을 갖추고 있으며, 대체로 온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체에 걸친 법의는 가슴이 노출된 통견의로서 반원꼴의 화문이 조각된 굵은 옷깃이 특징적이며, 양팔과 무릎 위에서 도식적인 평행밀집식 옷 주름을, 양 무릎 사이에는 부채꼴의 옷주름을 형성하고 있다.대좌는 16엽의 양련이 조각된 상대석과 두 마리의 사자가 상대석을 받치고 있는 중대석, 8엽복판의 하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불상은 비교적 볼륨감이 있고 단정한 모습의 우수한 상으로 경기도에서는 드물게 보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이다.

원균 선무공신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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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均宣武功臣敎書

보물 제1133호. 평택시 도일동 480. 원릉군균선무공신교서는 선조 37년에 발급된 것으로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이 끝난 후 나라에서 공이 있는 장수들에게 내리는 녹훈봉작교서의 하나로서 원릉군원균을 선무 1등 공신으로 하여 증직을 내리는 문서이다. 이 교서는 국내에서 발급된 선무공신교서중 1등 공신 교서로 유일한 것이며, 그 역사성과 희귀성을 인정받아 보물(제1133호)로 지정되었다.

대동법시행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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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同法施行記念碑

유형문화재 제40호. 평택시 소사동 140-1 소재. 조선 효종 때 김육이 충청감사로 있을 때 공부의 불균형과 부역의 불공평을 없애기 위하여 호서지방에서 실시한 대동법이 좋은 성과를 거두자 대동법 시행을 만인에게 알리며, 백성을 생각하는 그 덕을 기념하기 위하여 효종 10년(1659)에 세웠다. 대동법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공물로 바치던 폐단을 없애고 미곡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인데, 동법을 시행한 후부터는 공부의 불균형과 부역의 불공평이 없어지고, 민간의 상거래까지 원활해졌다.

팽성읍 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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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邑客舍

유형문화재 제137호. 팽성읍 객사리 117. 조선시대 팽성현의 객사로, 원래는 작은 규모였던 것을 현종(1659~1674) 때 크게 중창하였고, 다시 영조 36년(1760)에 중수하고, 순조 1년(1801)에 또 다시 중수했다.현재는 대문간채와 본채가 남아있는데, 본채는 전체 9칸 가운데 3칸은 중대청이고, 좌·우에 동·서헌이 각각 3칸씩이다. 중대청은 안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고을 수령이 한달에 두 번 배례를 올리던 곳으로 굵은 원형 기둥에 초익공을 결구하고 지붕도 동·서헌보다 높여 건물의 격식을 높였다. 동·서헌은 다른 지방에서 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로 사용되었다. 대문간채의 중앙에 1칸의 대문이 있는데 솟을지붕으로 꾸몄다. 중대청과 대문의 지붕 용마루 양끝에는 용두를 놓아 관리청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냈다.

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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烽燧臺

향토유적 제1호. 포승면 원정리 109-54. 조선시대 서남쪽 봉화의 주요 직봉을 이루었던 순천봉화와 연결을 가지며 서해안의 외적침입을 알리게 하는 등 군사적 통신수단으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봉화재 정상에는 약 2m 높이의 방형 석축으로 된 500평의 평지가 있으며 현재 석축은 부분적으로 훼손되었고 봉화대 북쪽 100m 아래에는 봉화수의 주거지와 샘의 흔적이 남아 있다.

평택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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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면적은 452.19㎢, 인구는 36만 1,902명(2001.12)이다. 다른 신흥도시와 마찬가지로 도시기반시설이 낮다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시가지 한가운데 저지대가 많아 배수 문제가 큰 과제이다. 전체 면적 가운데 도시계획 면적이 23.9%밖에 안 돼 시단위 광역 도시계획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1995년 3월 행정개편으로 송탄시·평택군과 통합했다.시에는 초등학교 45, 중학교 19, 고등학교 17, 대학교 1개교가 있다.

오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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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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烏山-象徵物

오산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오산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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烏山-自然

동경 127

북위 37

로 경기도의 남서부에 있으며 동·서·북쪽에 각각 화성군 동탄면·정남면·태안읍이 남쪽에는 평택시와 접하고 있다. 북서부에 양산봉(陽山峰:160m)·반월봉(半月峰:118m) 등 구릉산지가 이어지고, 남동부를 남류하는 오산천 유역의 오산동 일대에 비교적 넓은 평지가 펼쳐져서 논농사 지대를 이룬다. 기반암은 주로 화강편마암과 반상변정질 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오산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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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 때는 매홀군이었는데 그 뒤 신라 때는 수성군(水城郡)이었고, 고려 태조 때 수주(水州)였다가 원종 12년(1271) 수주도호부, 충선왕 2년(1310) 수원부(水原府)가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 도호부, 고종 32년(1895) 수원군(水原郡)이 되었다. 1949년 화성군으로 개칭되어 화성군 오산면이 되었으며, 1960년 읍이 되었다가 1989년 1월 시(市)로 승격되었다.2004년 현재 중앙·대원·남촌·신장·세마·초평동의 6동을 관할한다.

오산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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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공업으로는 식품·섬유·제지·전기·전자·기계·화학 등 크고 작은 공장이 대거 들어서 있어 신흥공업도시로 크게 발전하고 있다. 그 밖에도 채소나 과일 등 각종 원예농업과 젖소를 비롯한 각종 가축류를 기르는 낙농업도 활발하다. 상업은 상설시장이 2곳이 있고, 각종 서비스업이 활발하다. 역촌동·초평동 일대를 중심으로 기계금속·전기전자·목재제지·화학·섬유·피혁·식품 등에 전주민의 약 25%가 종사한다.

오산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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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면적은 42.76㎢이고, 인구는 11만 5,161명(2001. 12)이다. 서해안 시대의 배후 도시로 발전하기 위하여 개발이 뒤떨어진 서부지역을 활성화시켜 아산만과 연결되도록 도시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시의 동단부에서 남북으로 통하는 경부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가 있고, 경부선과 국도가 수원·평택과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유물과 유적은 신장동에 있는 금암리 고인돌군과 삼국시대에 건축된 독산성(禿山城)과 보적사 선물 사반야암 등이 있다. 그 밖에 세마대지(洗馬臺址:사적 140)가 있고 이상재의 정려각, 이지란의 사당이 있다. 또한 1955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제24사단 소속 장병들의 공산군과의 최초의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유엔군 초전기념비·충혼탑이 있다.

하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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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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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南-象徵物

하남시를 상징하는 꽃은 은방울꽃,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꿩이다.

하남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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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남동부, 서울시의 동쪽에 위치하며, 광주산맥의 줄기로 둘러싸이고 강원 산지에서 흘러내리는 한강지류가 북으로 흐르고 있다. 기후는 연평균 기온 11

내외, 1월 평균 기온 -4

내외, 연 강수량은 1,300㎜ 정도이다.

하남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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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이곳에 도읍을 정한 이후 신라 문무왕 4년(664) 한산주라고 고쳤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한주로 고치고, 고려 태조 23년(940) 광주로 고쳤다. 고려 성종 14년(995) 절도사를 두면서 봉국군이라 부르다가 고려 현종 3년 절도사를 폐지하고 안무사가 되었다. 조선 태조 4년(1935) 광주가 경기좌도에 속하였다. 조선 연산군 11년 목이 폐지되었다가 조선 중종 6년 복구되었고, 조선 인조 4년 읍지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1980년 광주군 동부읍으로 승격되었고, 1989년 광주군 동부읍과 서부면·중부면 일부가 합쳐 하남시가 되었다. 서울시의 근교농업지이자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위락지로 발전하였으나, 최근에 상공업이 차츰 일어나고 있어 섬유·의류·피혁·제지·가구·기계 등의 생산이 활발하다.그러나 대부분 시민의 생활 기반이 서울시에 있어 서울시의 교외 주택지로서의 비중이 크며, 앞으로 시 전체 면적의 94%에 이르는 그린벨트가 시정되어 공단이 들어서면 크게 발전할 전망이다.

하남시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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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2001년 12월 현재 10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남의 면적은 93.08㎢이고, 인구는 12만 4,018명(2001.12)이다. 시내버스와 중부고속도로 등으로 서울시와 연결되어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재로는 춘궁리 5층석탑·3층석탑, 미사리 선사유적, 남한산성 등이 있다.

시흥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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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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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興-象徵物

시흥시를 상징하는 꽃은 목련,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시흥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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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중서부에 있으며 부천·광양·안양·안산 등 4개 도시에 둘러싸여 있고, 서쪽만이 황해를 향해 틔어 있다. 1989년 1월에 시흥군의 소래읍을 중심으로 수암면·군자면이 합쳐져 시로 승격되었다. 광주산맥의 끝부분으로 구릉의 기복은 있으나 경지는 비교적 넓고, 서쪽 해안은 간석지가 넓어 소래·군자 등의 염전이 발달하여 국내 유수의 소금 산지를 이루며, 근래에는 시화지구 간척사업으로 육지화가 진행되고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1,100㎜ 정도, 연평균 기온 12.5

, 내외 1월 평균 기온 -4

내외, 8월 평균 기온 25

이다.

시흥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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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옛 시흥군·과천군·안산군이 시흥군으로 통합되었으며 1963년 화성군 일왕면 9개리가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1989년 군포읍·의왕읍이 시로 승격되고, 시흥군이 시로 통합·승격되었다. 11동(대야·신천·신현·은행·매화·목감·군자·정왕1동·정왕2동·과림·연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흥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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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농업과 공업이 나란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농산물로는 쌀 생산이 많으나, 원예농업과 낙농업이 성하여 우유의 생산도 많다. 지하 자원으로는 오류 광산에서 질 좋은 인상 흑연이 생산된다. 공업은 구로·안산을 잇는 반월공단의 일부로 식품·의류·화학·전자·기계 등의 200여 개의 공장이 있으나, 대부분 중소기업이다. 서울의 공업지역이 분리되면서 경인공업지역으로서의 상공업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소래산 마애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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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來山磨崖菩薩立像

시흥시 향토유적 제14호. 시흥시 대야동 산 140-3.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은 소래산 중턱에 위치한 병풍바위(또는 장군바위) 암벽에 선각(線刻)되어 있다. 머리에는 연화문(蓮花紋)의 화사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그 모습이 특이하다.이 보관은 위가 좁은 원통형으로 안에 당초문이 장식되어 있고, 양 옆에는 사모의 각과 같은 것이 뿔모양으로 뻗쳐있다. 뿔의 형태는 서역(西域) 지방에서 흔히 보이는 것으로 보아 당시 서역과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얼굴은 둥근 형상에 눈, 코, 입이 부리부리할 정도로 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양쪽 귀는 유난히 길게 늘어져 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둘러 있다. 또 양쪽 어깨에 걸친 천의(天衣)는 동체(胴體)를 휘감았는데 가슴 밑에는 결대(結帶)가 있고, 그 밑으로는 큼직한 활과 같이 굽은 형상을 그리면서 발목까지 유려하게 흘러내렸다. 한편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내장(內掌)하였으며, 왼손은 팔꿈치 부근에서 상장(上掌)하였다. 발은 연화 대좌 위에 양쪽으로 뿌린 자세를 취하였다.높이 14m, 보관 높이 1m 80cm, 발길이 1m 24cm, 발톱길이 15cm, 귀길이 1m 27cm, 눈 크기 50cm, 머리 높이 3m 50㎝, 어깨너비 3m 75cm의 거불(巨佛)로 우리나라 석불조각에 있어서 최대에 속한다.

조남리 지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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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支石墓

경기도 기념물 제103호. 시흥시 조남동 480-4번지 일원. 청동기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무덤이다. 이 지석묘는 조남동 소릉뫼 사남쪽 안골 논둑에 있다. 덮개돌은 이곳 주변지역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질 편마암으로, 규모는 길이 4m 20cm, 넓이 3m, 두께 70cm에 이른다. 덮개돌의 윗면에는 금이 많이 갔는데, 이것은 편마암 계통의 암질을 가지고 지석묘를 만든 다른 경우처럼 암질이 생성될 때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이 지석묘는 한강 이남에 있는 지석묘 가운데서 찾아보기 드문 북방식 지석묘로 광명의 가학동 지석묘와 철산동 및 인근 지역인 강화도의 부근리 지석묘와 서로 비교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청동기시대의 귀중한 문화재이다.

시흥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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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강희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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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4~1483)

최초의 농학자, 문장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농학자로 자는 경순, 호는 사숙재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세종 29년(1447)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이조좌랑, 집현전직제학, 이조·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을 역임하였으며, '국조오례의', '경국대전', '세조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저서에는 '금양잡록', '사숙재집', '촌담해이'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량이다.

강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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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8~1464)

시·글씨·그림에 뛰어났던 조선 전기의 학자·문신. 자는 경우, 호는 인재. 본관은 진주. 강희맹의 형으로 세종 23년(1441)에 문과에 급제한 후 정인지 등과 세종이 지은 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히 붙였고 최항 등과 '용비어천가'에 주석을 붙였다. 시와 글씨 및 그림에 뛰어나 삼절이라고 일컬으며 세종의 인산 때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그가 대표로 추천될 만큼 당대 서예의 대가였다. 세조1년(1445) 새로 글자를 주조할 때 그의 글씨를 썼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인 '양화소록'을 저술하였다.

이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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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3~1440)

조선 태종 때 공신·문신. 자는 백응. 호는 운정. 본관은 안성. 태조 2년(1939) 문과에 급제한 후 방원(태종)을 도와 사병을 출병시켜 정도전 등을 제거 하는 데 공을 세웠고 이어 박포의 난과 조사의 난을 진압하였다.태종 때(1414) 하륜 등과 함께 고려사 중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고쳐서 바로잡도록 명을 받았고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짓자 편찬을 도왔다.

시흥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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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경제활동은 미약하고, 이웃도시에 경제활동 근거를 둔 유동인구가 많아 노동 인구의 70%가 주변도시로 출퇴근하고 있어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25.2%에 이른다.시역은 소래·수암·군자의 32지구로 분리되고 있어, 3지구의 중심지인 군자 염전지대를 매립하여 신시가지가 조성되고 있다. 교통은 시의 동쪽에 인천∼수원간 국도가 있으며 서울∼안산간 국도는 시흥시의 중앙부를 지난다.명승고적으로는 계수·물왕저수지 등과 황해를 끼고 있어 대규모 해양관광지가 있으며, 선사시대의 유물·유적도 많다. 또 소래산에 마애보살입상이 있으며 평산성인 오산읍성과 관오지가 있다. 면적은 132.62㎢이고 인구는 34만 2,351명(2001.12)이다.

군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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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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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浦-象徵物

군포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군포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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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중부에 있으며 면적 36.38㎢. 서부는 수리산(修理山, 475 m)으로 이루어진 산지이며 북쪽은 안양시, 서쪽은 시흥시, 동쪽은 안산시·화성군, 남쪽은 화성군에 접한다. 연평균 기온 11.9

, 1월 평균 기온 -1

, 8월 평균 기온 25.6

, 연강수량 1,200㎜이다.

군포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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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원래 시흥군 남면이었으나 1979년 읍으로 승격되면서 군포읍으로 개칭되었으며 1989년 군포시로 승격했다. 면적 36.35㎢, 인구 27만 326명(2001.12)이다. 초등학교 21, 중학교 9, 고등학교 7개 교와 순복음신학교, 교육청이 있으며 종합운동장 건설과 근린공원과 삼림욕장을 조성했다.

군포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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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도시화·공업화와 함께 축소되었으며 산본 신도시의 개발에 따라 경지면적이 더욱 축소되었다. 주요 농산물로 무·배추와 포도 등이다.

경부선 철도와 안양천을 따라 전기, 전자, 유리, 식품, 인쇄, 화학 공업이 골고루 발달해 있다. 한국중공업·서진산업·농심 등 서울과 인접하고 교통 등 입지여건이 좋아 수도권지역 경공업 단지로 발전이 가속화될 전망이다.

군포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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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경부선 철도와 안산 복선전철과 47번 국도가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또 평촌·산본 신시가지 개발로 시흥∼수원, 인덕원

군포 4거리, 군포

안산간 국도가 8차선으로 확장됐다. 금정역에서 서울 사당과 안산간의 과천선 지하철이 개통되어 더욱 교통이 편리해졌다.

의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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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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儀旺-象徵物

의왕시를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까치, 동물은 다람쥐이다.

의왕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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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군포시와 자매도시를 이루어 수원·안양·시흥의 3시에 둘러싸여 있고, 이들 도시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북동쪽에 국사봉(586m), 남동쪽에 백운산(561m), 서쪽에 오봉산·모락산이 있다. 또 북부에는 학의천이 의왕저수지를 거쳐 계속 북서쪽으로 흘러 안양천(安養川)에 이른다. 기후는 연평균 기온 11.5

, 강우량은 1,300㎜이다.

의왕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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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조선시대(1395) 광주목이 되고, 1623년 광주부로 승격하였다. 1895년 인천부 수원군에 포함되고, 1896년 경기도 광주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광주군 의곡면·왕륜면이 수원군 의왕면으로 편입되었으며, 1980년 의왕읍이 되었다가 1989년 시가 되었다. 의왕시의 유래는 광주목에 속했을 때 의곡면(儀谷面)의 ‘의(儀)’자와 왕륜면(旺倫面)의 ‘왕(旺)’자를 따서 의왕면(儀旺面)이라 하였다.

의왕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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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주로 쌀·보리 등의 식량작물을 주로 하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채소나 과일 중심의 원예작물과 각종 가축 및 젖소를 기르는 낙농업도 활발하다. 상업의 발달은 부진한 편이며, 공업은 1980년대 이후 기계·섬유·화학공업 등의 제조업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의왕의 교통·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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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觀光

경부선 철도와 수도권 전철이 시의 남서부 지역을 관통하며, 그 밖에도 서울∼수원을 연결하는 경부국도가 시와 연결되어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관광지로는 낚시터로 유명한 의왕저수지가 있으며 국사봉·바라산·백운산 등이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의왕시의 유물·유적 및 문화자원으로는 부곡동의 지석묘와 무늬없는 토기가 있으며, 청계사가 있다.

의왕의 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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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況

시역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포일지구, 행정관청이 들어선 고천지구, 남부 철도화물 기지가 있는 부곡 지구로 나뉘어 발전하고 있으며, 142개의 크고 작은 공장이 들어서 활기를 띠고 있다. 면적은 53.96㎢이고, 인구는 12만 4,772명(2001.12)이다. 초등학교 8, 중학교 5, 고등학교 3, 대학교 2개교가 있다.

남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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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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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揚州-象徵物

남양주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소나무, 새는 크낙새이다.

남양주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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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동쪽과 남쪽은 한강으로 경계를 이루고, 남동쪽 끝은 광주군과의 사이에 팔당댐이 건설되어 팔당호수가 펼쳐진다. 가파른 산이 많아 경치는 좋으나 평야는 드물고, 서쪽을 남류하는 왕숙천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지가 있다. 연평균 기온 10.8

, 1월 평균 기온 -5.4

, 8월 평균 기온 26.5

로 연교차가 30

에 달하며 한서의 차가 크다. 연강수량은 1,300㎜로 한강 상류 다우지역에 속한다. 면적 459.98㎢, 인구 37만 6,231명(2001.12)이다.

남양주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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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의 매선군(일명 창회군)에 속하였다가 통일신라시대 내소군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양주군 풍양현에 속했고, 1505년 풍양현이 양주로 개칭되었다. 1914년 영근면(嶺斤面)이 연천군에, 고양주면(古楊州面)이 고양군에 편입되었고 1946년 파주시 남면이 양주군에 편입되어 1읍 16면이 되었다. 1963년 의정부읍이 시로, 이담면이 동두천읍으로 승격하였다. 1979년 미금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양주군이 분군되어 남양주군이 신설되었다. 1980년 7월 동두천읍이 동두천시로, 1986년 1월 구리읍이 구리시로, 1989년 11월 미금읍이 미금시로 승격하였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미금시와 남양주군이 합하면서 남양주시로 통합되었다. 2004년 현재 6동 5읍 4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양주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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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총면적 459.99㎢ 중 42%(2000) 이상이 개발 제한구역에 묶여 있어 경지율은 18.2%이면, 논밭의 비율은 50.2:42.8이다. 일반 농업보다 채소·화훼·과수 등의 원예 농업과 축산업 양계·양돈·낙농·양봉 등이 성한데, 특히 배의 생산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비육우 사육도 전국 제2위이다. 식품·섬유·피혁·화학 등의 공업이 발달하여 124개소의 크고 작은 공장이 있다.12개의 금속 광산과 9개소의 비금속 광산이 있고, 발전 시설로는 팔당 수력 발전소(8만kW)가 있다. 남쪽 한강 연안의 와부읍(덕소)을 중심으로 전기·전자·식품·섬유·제강 등의 공업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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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골배·포도·영지버섯·장뇌삼·계명주·화훼작물 등이 유명하다.

남양주의 교통·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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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觀光

경춘선·중앙선 철도, 경춘국도·원주 국도가 있고, 서울 시내버스가 연결되어 매우 편리하다. 군 전체가 공원과도 같아 산수가 아름답고 사적이 많은데, 크낙새를 비롯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식물의 보고로 알려진 광릉의 임업 시험장과 사릉·수종사 다보탑·정약용묘, 흥선 대원군묘 및 봉선사대종·묘법연화경 등의 보물과 문화재가 많다. 그 밖에 군립 공원인 천마산과 서울 시민의 식수원인 팔당호 등이 있으며, 특히 천마산 일대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데다 스키장이 있어 수도권 시민의 관광지가 되고 있으며 광릉수목원 등의 이용도도 높다. 1977년 경기도 관광지로 지정된 수동지구, 수락산·천마산 등과 광릉·홍유릉·사릉 등의 문화재와 뛰어난 자연경관, 팔당·밤섬·새터 등의 유원지가 있다.

봉선사 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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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先寺大鐘

보물 제397호.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 중앙 횡대안에는 사실적이고도 조선시대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파도문이 있다.

홍·유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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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裕陵

사적 제207호. 남양주시 금곡동 141-1.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 제27대 순종과 동후 순명왕후 민씨 및 계비 순정왕후 윤씨의 동릉 3실로 구성된 능이다.

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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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陵

사적 제209호.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 65-1.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 중종 16년(1521년) 왕후가 82세의 일기로 승하하고, 77년이 지난 숙종 24년(1698년) 11월 종묘에 신위가 모셔졌고 능호를 사릉이라 하였다.

흥국사 대웅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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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國寺大雄寶殿

문화재자료 제56호.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 33. 신라 진평왕 21년 원광국사가 수락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으나, 선조 1년(1568년) 선조의 덕흥대원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흥덕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천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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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馬山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면·화도면과 미금시의 경계에 위치한 산. 광주산맥에 속하는 이 산은 경춘가도의 마치고개에서 북쪽으로 3km 지점에 위치하며, 산세가 험하고 조잡하다 하여 예로부터 소박맞은 산이라는 별칭이 있다. 능선이 산정을 중심으로 방사선 형태를 이루고 있어 어느 지점에서도 정상이 바라보인다. 천마산의 북쪽 능선을 따라 괘라리고개에서 서북쪽에 철마산(鐵馬山, 711m)이 있다. 산록부는 밭이나 목장으로 이용되며, 각종 연수원·수련장 등이 있고, 최근 스키장이 조성되어 서울 근교의 위락지로 각광받고 있다.

남양주시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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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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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1836)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출생. 호는 다산. 1789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794년(정조 18) 경기도 암행어사를 지냈다. 1795년(정조 19) 병조참의를 지내다가 천주교 주문모 신부사건에 연루되어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장기로 유배, 다시 강진으로 이배되어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다산은 민생을 위한 경세의 학문에 뜻을 두고, 장기간의 유배 생활의 고통 속에서도 경서학에 전념하여 학문적 체계를 완성하고 실학의 대가가 되어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특히 정약용은 1792년 서양식 축성법에 기초한 거중기를 제작하여 수원성 축조에 이용하였다.남양주에서는 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다산 사상 강연회를 비롯한 다산 문화제를 대규모 문화 축제로서 매년 개최하고 있다.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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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1950)

소설가. 호는 춘원. 1892년 평북 정주 소작농 부모에게서 출생. 1905년 도일, 메이지학원에서 공부, 소년회를 조직하여 '소년'지

발행. 1917년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우리 근대소설의 시조로 「무정」, 「유정」, 「흙」, 「사랑」 등의 소설을 다수 발표하여 근대문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1945년부터 1950년 인민군에게 끌려가기 전까지 남양주 봉선사 근처 다경향실에서 은거하며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춘원의 문학적인 업적을 기려 지난 1975년 봉선사 들머리 오른쪽 비석거리에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세워졌다.

와부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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瓦阜邑

군의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과 동쪽은 한강과 북한강으로 자연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백봉에서 뻗은 산맥으로 경계를 이룬다. 읍내에는 예봉산·운길산·조조봉 등 높은 산이 있어서 경치가 좋다. 한강변과 계곡을 따라 원예 농업과 낙농업이 성하고, 용수와 수리 등 공업 입지가 좋기 때문에 덕소를 중심으로 제강·전자 제품·식품·메리야스·셀로판·파지 등의 공업이 일어나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다.

파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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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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坡州-象徵物

파주시를 상징하는 꽃은 모스모스,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파주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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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중앙에서 약간 북서에 위치하고 북경에는 임진강, 서경에는 한강이 흐르며 지질은 석회암지대로 되어 있어서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하여 있다. 광주산맥과 그 지맥의 반은 대체로 저평하고, 특히 임진강 하류와 한강 연안은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농경지가 넓다. 면적 682.70㎢이며, 인구는 22만 6,858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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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에서 보기 드문 온화한 지역으로 4계의 격변이 적다. 연평균 기온은 11.8

, 1월 평균 -4

, 8월 평균 24.7

, 연평균 강수량 1,200㎜ 이다.

파주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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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구파주군은 고구려 장수왕 때 술이홀현(述爾忽縣)인데 고려 명종 때 서원현(瑞原縣)으로 고쳤다. 태조 2년(1393) 서원군으로 승격, 태조 7년(1398) 파평군을 병합하여 원평군(原平郡)이라 하다가 태종 15년(1415)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곧 군으로 강등되었다. 그 후 파주목으로 되었다가 고종 32년(1895) 군이 되었다. 1945년 연천군이 38

선 이북에 속하고 적성면만이 남아 이를 파주군에 병합하였다. 1973년에는 아동면이 금촌읍으로, 임진면이 임진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에는 주내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7년 광탄면 기산리 일부가 양주군 백서면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교하면 상지석리가 조리면에 편입되었다. 1996년 3월 파주군이 시로 승격되었으며, 3읍 5면 2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파주의 산업·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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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交通

주산업은 농업인데 농업 인구가 타군에 비해 적은 것은 휴전선에 인접한 군사지역이기 때문이다. 임진강과 한강 유역에서는 쌀이 많이 생산되고 서울의 근교농업지로서 채소 재배가 성하다. 또 양잠과 한우의 사육도 많이 한다.한편 석회 제조와 수공업적인 유기(鍮器)의 제조가 행해지고 있다. 1995년부터 출판문화정보단지 조성사업이 전개되면서 출판·유통회사·인쇄소가 들어서 파주시 일대가 출판관련 시로 발전이 가속화하고 있다.철도 경의선이 군의 중앙을 남북으로 종단하고 있으며 간선 도로가 이와 병행하고 또 자유로가 새롭게 가설되어 서울과의 교류가 더욱 편리해졌다.

금촌1·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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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村一二洞

산업·교통·행정의 중심지이다. 부근은 토지가 비옥하여 농산물이 풍부하며 소하천들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어 소규모의 수운도 행하여지고 있다. 명승 고적으로서는 문산 부근에 있는 높이 약 17m 가량의 입상 석불을 비롯하여 봉서산성지·공릉·영릉·반구정·검단사·종유동 등이 있다.

감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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紺岳山

감악산은 예부터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동시에 쏟아져 나온다하여 감악(紺岳), 즉 감색 바위산이라 불렀다. 등산이 허용된 코스는 범륜사와 신암리, 원당리 쪽, 산 정상에는 비석 글자가 마멸된 ‘비뜰대왕비’가 서 있는데 북한산 순수비와 형태가 흡사하다 하여 ‘진흥왕 순수비’라고 주장하는 설과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 고장 출신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설인귀비’라는 속설이 각각 전한다. 또 이곳의 장군봉 바로 아래에는 임꺽정이 관군의 추격을 피해 숨어 있었다는 임꺽정 굴도 있다.

범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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梵輪寺

감악산에는 감악사, 운계사, 범륜사, 운림사 등 4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모두 소실되었고, 1970년에 옛 운계사터가 있던 곳에 재창건한 범륜사가 있다. 절 입구에는 해탈교라는 작은 다리가 있고 절 뒤편으로는 산신각이 있는데 그 안에서 석간수가 흘러나온다. 절 바로 밑에 높이 20여 m에 달하는 운계폭포가 있다.

통일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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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一展望臺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자유로 변에 위치. 남쪽에서 흘러드는 한강과 북녘에서 내려오는 임진강이 만나는 곳으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며 북한의 주민생활을 전망할 수 있는 곳이다.6,500여 평의 대지위에 지상 5층, 지하 1층의 석조건물로 되어있으며, 92년 9월 8일에 개관했다. 해발 140미터의 높이에 자리잡은 원형 전망실에서는 북으로는 개성의 송악산, 남으로는 여의도 63빌딩을 바라볼 수 있다.1, 2층의 전시관에는 북한실과 통일실을 마련하여 북한실상과 남북한의 어제와 오늘 및 통일 한반도 미래상을 보여주는 사진, 영상실, 대형지도 등의 시설과 북한상품 도소매점 등이 있다.

고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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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嶺山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와 영장리, 양주군 장흥계곡에 걸쳐 있으며,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고 능선을 따라 봄과 가을이면 꽃과 단풍이 절경을 이룬다.고령산은 1634년에 주조한 보광사 범종과 조선 후기에 편찬된 '양주목읍지'에 각각 고령산과 고령산(高靈山)으로 기록하고 있어, 높고 신령스러운 산으로 불리웠음을 알 수 있다.

보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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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光寺

고령산에 위치한 사찰, 신라 진성여왕 8년(894년) 도선 국사가 창건했으며 창건 당시 한강 이북 6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혔다. 고려 고종 2년(1215년) 원진국사가 중창하고 우왕 14년(1388) 무학대사가 삼창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4년(1622년)에 복원했다.보광사의 내력을 담은 범종(1631년, 인조9년 주조)은 조선시대 범종양식을 잘 보여주는 종으로 크기는 작지만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인근에 조선 제21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 소령원이 있다.

판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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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門店

북위 38

선 남쪽 5km 지점, 개성 동쪽 10km 지점에 있는 한촌에 지나지 않았으나 한국전쟁 당시 제2차 휴전회담 장소로서 알려졌다. 이곳에서 유엔군과 북한 공산군과의 군사연락장교 회의가 열린 바 있다.특히 1972년 9월부터 남북적십자회담이 이곳을 통하여 진행되어 온 국민의 관심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최근에는 관광지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명승 고적으로서는 장단석벽·오관산·용암산·임진나루·화장사·낙산사·고려 숙종릉·고려 명종릉·신라 경순왕릉 등이 있다.

고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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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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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陽-象徵物

고양시를 상징하는 꽃은 장미, 나무는 백송, 새는 까치이다.

고양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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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북서부에 위치하며 남부는 화강편마암으로, 북부는 결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지세는 대체로 평탄하나 시의 동부에는 광주산맥의 여맥 북한산(836m)을 주봉으로 하는 험한 산괴(山塊)가 둘려 비교적 높다. 그리하여 서편 한강 쪽으로 완경사를 이루고 한강 연안에는 비교적 넓은 퇴적평야가 전개된다. 이 일대는 한강변에 큰 제방을 쌓고 홍수를 막아 비옥한 농경지를 만들어 주로 쌀을 생산한다. 면적 267.25㎢, 인구 81만 4,493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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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지만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고 강수량은 비교적 많다. 연평균 기온 11

, 1월 평균 -4.9

, 8월 평균 25.5

, 연평균 강수량은 1,236㎜이다.

고양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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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 달을성현(고봉), 개백현(행주, 덕양)이었는데, 신라시대 때는 한사주라고 하였다. 고려 때 고봉현(高峰縣)·덕양현(德陽縣)·부원현(富原縣)·황조현(荒調縣)을 합쳤으며 태조 8년(1394) 감무를 두었다. 태종 13년(1413) 고봉과 덕양을 합쳐서 고양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성종 2년(1471) 군으로 승격하였는데 연산군 10년(1504) 이를 폐하고 유행(流行)하는 곳으로 만들었다.중종 1년(1506) 복구되고, 1973년 신도면의 구파발·진관내·진관 외리가 서울시로 편입되고, 신도면이 읍이 되었으며, 1979년 원당면이 원당읍으로 1981년 벽제면이 벽제읍, 중면이 일산읍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1992년 2월 고양군이 시로 승격, 현재 2구(덕양구, 일산구), 35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산 신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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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山新都市

일산은 서울시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18

23㎞ 사이에 위치한 도시이다. 일산은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에 속해 있다. 일산은 일산 신도시와 일산 신도시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기존의 일산동과 중산·탄현 개발지구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 일산 신도시는 우수한 주거 환경을 갖춘 전원도시이다. 공원이 많고, 아파트 사이의 간격이 넓으며, 주차장이 많이 확보되어 있고, 주택간의 거리도 넓다. 일산은 한국이 선진국으로서의 새로운 생활 환경 기준을 가지고 만든 한국 미래상의 한 단면이다.

고양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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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한강 연안은 토지가 비옥하여 쌀을 비롯하여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며 특히 서울의 근교 농업지로 채소·과수·화훼 재배와 함께 닭·돼지·젖소의 사육이 활발하다. 특히 신도동과 지도동에서는 대부분이 야채를 재배하고 있는데 겨울에는 온상, 여름에는 냉상을 하여 연중 싱싱한 채소를 서울에 공급하고 있다. 공업에 있어서는 피혁·금속·가구 등 대부분 중소업체이나 최근 신도시 개발로 새로운 상공업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고양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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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서울의 교외로서 교통이 편리하며 경의선이 시의 서남부를 관통하고 또 능의선(陵議線)이 횡단하여 통근자·관광·물자 수송에 편리를 주며 대자리∼원당∼행주로 이어지는 도로와 의정부로 통하는 산업도로 등이 이에 병행하고 있다. 서울시 중심부와 서울 시내버스노선이 연장되어 있으며 지하철 일산선이 개통되어 교통은 매우 편리하다. 서울시의 인구분산정책에 따른 주택지로서 일산·화정·원당 등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시에는 초등학교 63, 중학교 29, 고등학교 23, 대학교 2개 교가 있다.

행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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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州山城

사적 제56호. 행주산성은 고양시의 서남쪽 끝 한강 연안에 위치한 산성으로 덕양산 7~8부 능선에 축조된 토성이다. 권율 장군(權慄將軍)은 1592년 7월 8일 싸움에서 왜군을 크게 격멸하여 대첩을 이루고 12월에 수원(水原) 독왕산성(禿王山城)에서 또 왜적을 무찌른 후 한성(漢城)을 수복하고자 작전을 개시하였을 때 성지로 결정한 곳이다.권율 장군은 이곳에서 왜군 3만 명과 12시간의 공방전을 치른 후 승리했다. 이 대첩이 충무공의 한산대첩과 아울러 길이 빛나는 행주대첩으로 이 때 고양의 부녀자까지도 치마폭에 돌을 날라 석전을 전개했는데, 그 치마를 행주치마라 부르며, 이를 계기로 다른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도 산 중턱에 목책자리가 남아 있고 삼국시대 토기(土器) 조각이 출토되어 옛날에도 이곳이 군사기지였음을 말해 준다.1603년에 건립한 행주대첩비가 비각(碑閣) 속에 남아 있으며 1963년에 세운 대첩비도 서 있다. 이 비의 전면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1970년 대대적인 정화공사를 하면서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를 다시 짓고 정자(亭子)와 문(門)을 세워 경역을 규모있게 조성하면서 1845년에 세운 행주기공사 경내의 대첩비는 충장사 옆에 옮겼다.

벽제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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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蹄館址

사적 제144호. 이 자리는 옛날 역관(歷官)이 있던 자리로 현재 고양동 사무소 북쪽에 인접해 있다.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에게는 역관에 머물러 휴식하는 공용의 숙박시설(宿泊施設)이기도 했다. 벽제관은 한성에 인접하고 있었으므로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은 한성에 들어오기 전에 반드시 이 역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관복으로 갈아 입고 예의를 갖추어 들어 가는 것이 정해진 예법이었다.본래 고양시의 고읍치(古邑治)는 벽제관에서 서북방으로 5리 정도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위치로 읍치를 옮긴 인조 3년(1625)에 이곳에 새로 세운 객관이 지금의 벽제관이다. 당시 규모는 면적 1,265평, 건물은 601평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언제 다시 건물을 세웠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일제 때 일부가 헐렸고 6·25 때 완전히 불타 버렸다. 그러나 1960년경까지도 객관문(客館門)은 남아 있었으나 퇴락(頹落)해 무너져버려 현재에는 객사의 윤곽과 터, 그리고 7척(尺) 간격으로 원좌주초석의 장대석(長臺石)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북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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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漢山城

사적 제162호.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할 때 도성(都城)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백제 개루왕(蓋婁王) 5년(132)에 축성되었다.1232년 고려 고종 때는 몽골군과 격전이 있었고, 고려 현종은 글안의 침입을 피하여 이 성에 고려 태조의 신궁(神宮)을 옮겨 왔던 일도 있으며, 이때 성의 중축(重築)이 있었고, 1387년 고려 우왕 때 개축공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의 외곽성으로 축성론이 일어나고 1711년 숙종(肅宗) 37년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7,620보의 석성(石城)이 완성되었다.성의 규모를 보면 대서문(大西門) 동북문(東北門) 북문(北門) 등 13개의 성문과 시단봉상에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쪽에 남장대(南將臺) 중성문(中城門), 서북쪽에 북장대(北將臺)가 있었고 중흥사(重興寺)와 136간의 행궁이 있었으며 140간의 군랑이 있었다. 성내에 승군도 배치 하였으며 중흥사는 136간의 대사찰이었다. 그리고 성내에는 99개소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 숙종 때 군제(郡制)를 보면 수성대장에 영의정이 겸하고 훈련(訓練)·어영(御影)·금위(禁衛)의 삼군문(三軍門)이 모두 배치되었다.지금은 대서문이 남아 있고 성곽의 여장은 허물어졌으며 성의 모습은 완전히 보존되어 있다. 최근 대성, 대남, 대동문 등도 복원하였다.

고려 공양왕릉 및 각종 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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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恭讓王陵-各種陵

고려의 마지막 왕인 34대 공양왕과 순비 노씨(順妃盧氏)의 능인 공양왕릉(사적 제191호), 조선시대 덕종과 그의 비 소혜왕후의 능인 경릉, 조선조 제8대 예종(睿宗)과 그의 계비(繼妃)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의 능인 창릉, 숙종 왕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인 익릉, 조선 제21대 영조 원비(英祖元妃)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의 단릉(單陵)인 홍릉, 조선 제19대 숙종(肅宗)과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와 제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의 능인 명릉이 있다. 이와 같은 다섯 능을 서오릉(사적 제198호)이라 한다.오릉 외에 명종의 첫째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순창원(順昌園)이 경내에 있으며 최근 숙종의 후궁(後宮)인 장희빈(張禧嬪)의 대빈묘도 경내에 옮겨 놓았다.이 외에 서삼릉(사적 제200호)이 있다. 서삼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인 희릉, 조선 12대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의 능인 효릉, 조선 제25대 철종(哲宗)과 철인왕후(哲人王后) 안동 김씨의 능인 예릉을 말한다.

이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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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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利川-象徵物

이천시를 상징하는 꽃은 진달래, 나무는 소나무, 새는 까치이다.

이천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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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동남단에 위치하고 전역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광주산맥의 여맥이 미치어 북·서 시계는 비교적 높은 구릉이 기복하며, 이천 구릉의 중심부를 이룬다. 한강 지류 복하천이 시의 중앙을 북류하여 이천분지를 이루는데 여주·이천·장호원에 걸쳐 발달한 한강분지의 중심이 된다. 또 남쪽 도계를 청미천이 북류하여 역시 한강에 합친다. 면적 461.16㎢, 인구 18만 8,367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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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부에 위치한 관계로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 기온이 11.7

, 1월 평균 -5

, 8월 평균 26

, 연평균 강수량 1,300㎜이다.

이천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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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원래 백제의 영지였으나 후에 고구려의 남가(南賈)·남천현(南川縣)으로서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황무(黃武)라 고치고, 한주(漢州:廣州)에 속하였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로 남정한 때에 이천이라고 불렀으나 고종 때 영창(永昌)이라 하였다. 문헌에서 찾아보면, 고려 왕건이 후백제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하여 복하천(福河川)에 이르렀을 때 홍수(洪水)로 인하여 내를 건널 수 없는 상황에서 서목(徐穆)이라는 사람이 인도하여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후에 왕건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가상히 여겨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글귀에서 첫글자 ‘利’자와 끝글자 ‘川’을 따와 ‘이천’이라는 명칭을 하사한 이래 오늘날까지 불리어 오고 있다.('동국여지승람 누정편')또한 일설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남정(南征)길에 올라 이천에 주둔하고 점을 쳐 보았더니, ‘利川大川’ 점사(占辭)를 얻어 역시 ‘利川’이라는 명칭을 내렸다고 한다.('동국여지승람 고적편')조선 태조 때에 이르러 이천현이 되고 현감을 두었는데 세종 26년(1444)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 후 1894년의 갑오경장 이후 군으로 개칭하고, 1914년에 음죽군의 대부분을 합쳤다.1996년 3월 이천군 전역이 시로 승격되었으며, 관할구역은 2읍 8면 4개동이다.

이천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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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복하천 유역의 이천분지와 청미천 유역의 장호원 분지는 비옥하고 수리시설이 잘 되어 주요 산미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이천쌀’ 특히 ‘자채쌀’은 상품(上品) 중의 상품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주변 도시와의 교통이 편리하여 특히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된 후로는 종래의 미맥 위주의 농업으로부터 탈피하여 점차 수익성이 높은 원예농업의 성격을 띤 경제작물을 재배하게 되었다.임산물로는 신탄의 산출이 있어 경인지방에 공급해 왔고 광산물로는 사금이 있다. 공업에 있어서는 가내수공업적으로 직물·성냥 등을 생산한다. 또 이천시는 도자기 생산지로서도 유명한데, 이곳에서는 조선백자 도요지의 전통을 엿볼 수 있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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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도자기·산수유·장호원복숭아·돼지고기·게걸무·화훼단지·황기·송골딸기·팽이버섯 등이 유명하다.

이천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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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지리적으로 한반도 중부 지역의 평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도로망은 일찍부터 발달되고 있어 현재 교통망은 남한 유수이다. 시청소재지인 중저동은 서울∼이천∼충주를 거쳐 영남지방으로 연결된다.

명월암 마애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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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月庵磨崖如來立像

보물 제822호. 이천시 관고동 산 64-1. 설봉산 영월암 대웅전 뒤편으로 높이 약 10m 두께 4m 가량의 동남간을 향한 바위면에 선각(線刻) 되어 있다. 높이 9.6m, 어깨폭이 3m 가량으로 규모면에서 관내에서 제일 큰 불상이다.머리는 승려 모양의 맨머리여서 지장보살의 상으로 여겨지며, 얼굴은 둥근 형태의 살찐 편이며 입이 커서 투박한 느낌을 준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왼손은 가사자락을 움켜 쥔 모습으로 왼손으로부터 늘어진 가사의 주름이 무릎 아랫부분까지 늘어져 있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올려 손바닥을 펴서 밖을 향하게 한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다. 조성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 말 고승인 나옹선사가 부모님을 천도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태평흥국명 마애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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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平興國名磨崖菩薩坐像

보물 제982호.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 183-1. 높이 3.3m, 어깨폭 1.2m, 무릎폭 1.47m. 인도(印度)의 아잔타 반가상보다 높이가 0.8m 큰 세계 최대 반가상이다.

이천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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利川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2호. 이천시 창전동 336. 조선개국 11년 임오년(서기 1402년, 태종 2)에 당시의 감무(監務) 변인달(邊仁達)이 신축했으며, 이천읍 중심가에 인접해 있으면서도 우거진 녹음 속에 둘러싸여 심산유곡과 같은 풍치로 한 여름이면 인근 주민들을 위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현재의 규모는 대성전이 겹처마 맛배집 형태로 58.87㎡이며, 동(동무)와 서(서무)가 각각 12.83㎡로 되어 있고 이들을 둘러싼 담장과 문으로 되어 있으며, 문 왼편 밑으로 홀처마 맛배집 형태의 명륜당은 37.65㎡의 규모이며 1998년 60.18㎡의 관리사를 개축하였다.

설성산 설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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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지방기념물 제76호.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 931. 설성산 주봉 능선과 그 동쪽으로 아래편 골짜기 약 2~3만여 평을 에워싸고 있는 석성으로 그 북쪽 성벽에 인접하여 신흥사가 있는데, 중간에 작은 계곡을 포함하고 있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현존하는 이천의 성지 중 가장 뚜렷한 성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곳이 ‘설성’으로, 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가지를 뻗은 증선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20~30m씩 길게 성벽이 이어진 곳도 있다. 험준한 지세와 절벽 등을 이용하여 쌓은 외벽은 그 높이가 4~5m에 달하는 높은 곳도 있으며, 1.5~2m 높이의 배경 흔적도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있어 성벽의 두께가 대략 5m 안팎의 폭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외벽 사이에는 잡석을 다져 넣어 아주 견고하게 성을 쌓은 흔적이 보인다.

이천 도예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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利川陶藝村

현대 한국 전통도예의 중심지로 성장한 이천도예촌에는 300여 개의 요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직접 도자기를 만들거나 제작 과정을 볼 수 있고, 구매도 할 수 있다. 해마다 ‘이천도자기축제’가 열린다.

설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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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峰山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에 위치한 설봉산은 이천시가지를 감싸 안 듯 둘러싸고 있으며 험준하지는 않으나 오밀조밀한 운치와 주봉 부근에 울창한 혼합림과 기암괴석이 볼 만하다. 이 산에는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위해 작전계획을 세웠다는 성터인 남천정지와 봉화대지, 설봉서원지, 관고리 3층석탑 등 유물과 영월암, 법왕정사 등 2개의 절이 있다. 또한 명소로는 주봉에서 동쪽 능선을 따라 약 1.5km 지점에 칼 모양의 날카롭고 거대한 칼바위가 있고, 영월암 동쪽에는 고깔 쓴 중이 바라를 진 모습을 한 고깔 바위가 있다. 특히 영월암 입구에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있고, 고려 전기의 것인 보물 제822호 마애조사상이 커다란 자연암석에 조각되어 있다.

이천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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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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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2~998)

고려시대의 외교가·공신. 960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982년 송에 가서 국교를 열고 돌아왔다. 993년 거란이 침입하자 종군사가 되어 출병, 국서를 가지고 소손녕과 담판을 하여 그를 설득시켰다. 마침내 거란군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이듬해인 994년 청천강 이북에 있던 여진족을 몰아 내고 군사 요지와 행정 요지에 성을 쌓아 압록강까지 뻗어 나가기 위한 전략 기지로 삼았으며, 아울러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의 국토를 완전히 회복하였다. 태보·내사령을 지내고 개국사에서 병으로 죽었다.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어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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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1871)

본관은 함종(咸從), 자(字)는 성우(聖禹). 이천시 율면 산성1리에서 태어났다. 어재연은 근세 조선 말기 구미 열강에 의해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있을 때 서해안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이천의 별이다.1862년 관계에 진출하여 대구영장이 되고 광양현감, 평양중군, 풍천·장단·회령부사 등을 거쳐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나자 강화영(江華營) 진무중군(鎭撫中軍)이 되어 침공해 온 미국함대의 병력을 막았다. 이에 나라에서 충장공(忠壯公)이란 시호를 내리고 병조판서 겸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라는 높은 벼슬을 더해 주었다. 지금도 강화도에 있는 장군의 묘와 장군이 전사한 광성진은 역사의 현장으로서 잘 보존되고 있다. 율면 산성1리에 있는 장군이 태어난 생가 역시 이천시와 그 후손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이수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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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26)

독립운동가. 이천시 창전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좌성(佐聖). 1923년 중국의 상해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주만주참의부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6년 귀국하여 서울 동소문 파출소와 백사면 현방리 왜경 주재소 등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해 거사하던 중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했다.

장호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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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湖院邑

시의 남동부에 위치해 있으며 서울·충주·부산에 이르는 간선공로와, 평택·제천·영월간의 동서 횡단공로가 교차하는 교통요지를 차지하여 발달한 읍이다. 시가지는 경기·충북 도계인 청미천의 좌우 양안에 발달되어 같은 시가지가 우안측은 경기도에, 좌안측은 충청북도에 속한 쌍자도시(雙子都市)를 이루어 두 개의 행정관할에 들어 있으며 미곡의 집산이 성하다.읍내에는 이천온천·설봉산 영월암·효양산·육괴정·설성산 ·봉미봉, 수목이 울창한 백족산과 그 기슭의 자점보·원적산·율수폭 등이 있다.

용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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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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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仁-象徵物

용인시를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전나무, 새는 꿩이다.

용인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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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 남부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지질은 주로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역내는 광주산맥의 여맥이 기복하여 구릉이 각처에 발달하고 소분지가 점재하며, 하천은 중앙지대를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흐른다. 한강의 지류 금령천은 북류하여 광주천이 되어 한강에 합하고, 구흥천은 남으로 흘러 평택시를 지나 분향만으로 유입하고 또 동남쪽으로 청미천의 상류가 흐르며 유역의 소분지를 관개한다. 이 지방은 경안(京安)과 길량장의 침식곡에 의하여 광주산맥의 낮은 구릉이 동서로 분단되었는데, 그 중 서쪽 용인구릉의 일부가 이 지방에 해당된다. 면적 591.52㎢, 인구 45만 5,118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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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부에 위치하여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 기온 11.3

, 1월 평균 -4.8

, 8월 평균 26

, 연평균 강수량 1,300㎜이다.

용인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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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본래의 용인·양지(陽地)·죽산(竹山)의 일부를 합한 것으로 용인은 고구려 때 구성현(駒城縣), 신라 경덕왕 때 거서(巨黍)라 고치고 한주(漢州)에 소속시켰다. 고려초에는 용구현(龍駒縣)으로 하고 현종 때 광주에 소속, 명종 때 현으로 하고 감무를 두었다.조선 태조 6년(1397)에 현령을 두고, 태종 13년(1413) 처인부곡(處仁部曲)을 합하고 후에 양지현이라 칭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용인·양지가 각각 군이 되고, 1914년에 죽산의 일부와 함께 용인군이 되었다. 1979년 용인면이, 1986년에는 기흥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1996년 3월 용인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용인읍이 4개 동으로 분할되고, 수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2읍 7면 4동이다.

용인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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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농업이 주산업으로 미맥을 주로 생산하며 최근에 이르러서는 수익성이 높은 청정 야채 재배가 성하다. 1970년대 이후 수도권 분산정책의 일환으로 기흥·수지읍 일대에 많은 화학·전자·섬유·기계·식품 등의 생산업체가 들어서 있다. 구성면·기흥읍·모현면·수지읍에 목장이 많다.

용인의 교통·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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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觀光

협궤 수려선이 시의 중앙을 횡단하고 있었으나, 1972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철폐되었다. 경부고속도로가 시의 서부를 지나가고 영동고속도로는 신갈에서 분기한다.기타 도로는 수원·원주 공로를 중심으로 수지상으로 발달하여 교통이 편하다. 용인시의 관광지로는 고려의 퇴세를 만회하고 몽골의 세력을 몰아내게 한 유서깊은 처인성을 비롯하여 현오국사탑비(보물 9호)·정포은묘·민충정공묘, 그리고 원천유원지 등이 있으며, 한국민속촌과 에버랜드(용인자연농원)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처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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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仁城

경기도 기념물 제44호.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 43. 총면적 5,820평의 장방형으로 된 토성으로 본래 고려 때 군창(軍倉)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백제 때 축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성곽 둘레는 425m 이며, 북벽 좌측에 출입구가 있고, 남쪽 중간 지점에 후문자리가 있었다.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경사면을 이루고 있으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입구 주변의 4백 평쯤 되는 부분에는 낮은 둔석이 있다. 내부는 지형에 따라 2~3단계의 층급이 있다. 현재 성곽의 흔적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토축된 주위는 3리였으나 이미 성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였고, 다만 군창만 남아 있다고 하였다.당시 이 지방은 교통이 발달한 곳이어서 일찍부터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처인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적을 기록하고 있다. 즉 고려 고종 19년(1232) 9월 몽골군의 2차 침공 때 승장 김윤후가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하여 승리로 이끈 대몽항쟁의 전승지로 유명하다.

에버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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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 Land

경기도 용인시 포곡면 전대리 310. 1976년 개장한 에버랜드는 각종 놀이 시설과 바자지구, 그리고 다양한 축제가 펼쳐지는 ‘페스티벌 월드’, 세계 최고 수준의 물놀이 시설인 워터파크 ‘캐리비안베이’, 국내 최고 규모의 자동차 경주시설인 모터파크 ‘에버랜드 스피드웨이’로 구성, 365일 내내 즐거움이 함께하는 테마파크이다.

민속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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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俗村

우리나라의 민속적인 삶을 종합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사실적이고도 흥미 넘치는 현장이다. 30만 평의 부지에 마련된 민속촌은 초가 지붕의 일반 평민들의 생활상에서부터 양반관리의 호사스런 99칸짜리 저택에 이르기까지 총망라하여 볼 수 있도록 마련된 종합적인 과거 생활의 재현 단지이다.장승이 서있고 북부지방, 중부지방, 남부지방, 제주지방, 울릉도 지방까지 각 도의 민가와 한약방, 글방, 관상소 등을 비롯하여 대장간이 있으며 유기공방, 도자기 가마 등의 생산공장, 각종 민속음식과 생활용품을 파는 민속 장터 등을 선보이고 있다.

안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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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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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城-象徵物

안성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안성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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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최남단에 위치하며, 면적 554.19㎢, 인구 14만 2,799명(2001.12)이다.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의 지질로 되어 있다. 역내는 차령산맥의 여맥인 잔구의 기복이 많으나 대체로 준평원을 이루고 있다.용인에서 발원하여 차령산맥의 북부 산록을 따라 서류하는 안성천은 도중에 한천(漢川)을 합류하고 하류 근처에서 황구지천과 합류하여, 유역에 충적평야인 넓은 안성평야를 펼쳐 놓으며 서서히 황해의 아산만으로 흘러들어간다. 많은 소지류는 관개에 편하고 한편 범람이 별로 없으므로 예로부터 풍작지로 유명하다.한강의 지류 청미천은 동부에서 발원하여 동류하고 유역에 죽산분지가 있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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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에 위치한 까닭에 기온의 교차가 심한 내륙성 기후이다. 연평균 기온 12.2

, 1월 평균 ­4.9

, 8월 평균 26.6

, 연평균 강수량 1,200㎜이다.

안성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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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 시대에 내혜홀(奈惠忽)이라 부르고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는 백성군(白城郡)으로 개칭하였다. 현종 9년(1018)에 수주(水州:현 水原)에, 그후 천안에 이속하고, 명종 2년(1172)에 현으로 되었으며, 조선 태종 13년(1413)에 충청북도로부터 경기도에 이관되었다. 1914년 3월 죽산(竹山)·양성(陽城)의 2개군에서 5개면을 제외한 전부를 본군에 편입하였으며, 1963년 4월 구역 개편으로 다시 용인군 고삼면(古三面)을 편입하여 1읍 12면으로 개편되었다. 1998년 4월 1일 도농복합형의 시로 승격되었다.

안성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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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안성평야의 일부를 차지하고 고래로 미작 중심의 곡창지대이다. 논 면적이 월등하며 2모작 면적도 60% 이상 된다. 이 평야는 비옥할 뿐만 아니라 하천의 분류가 많아 관개가 잘 되어 매년 풍작지대를 이루고 미맥 외에 콩·채소 등이 많이 나며 낙농도 성하다.채소의 60% 이상은 서울을 비롯한 인근 여러 도시에 공급하는데 경부고속도로의 개통 후는 수익성이 높은 조기촉성 재배를 많이 행한다.과실 재배도 하고, 특히 낙농이 성하며 그 중 한독 낙농장은 유명하다. 광산물에 있어서는 금·중석의 생산이 있고 화학·기계·섬유 공업 등도 성한데 주로 중소기업이 입지하고 있다. 특히 안성 유기(鍮器)는 예로부터 유명하다.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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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과 밭의 비율은 7:3으로 논의 비율이 대단히 높고, 전가구의 70%가 농업에 종사한다. 안성쌀은 예부터 고급쌀로 유명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한 맥류·콩·저류 등이고, 포도·복숭아·사과 등의 과일과 채소의 생산도 많다. 한편, 일죽·죽산·삼죽·양성면에는 뽕밭이 많아 양잠업이 활발하다.

축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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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은 평탄한 야산지대여서 넓은 구릉이 많아 낙농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현재 대단위 낙농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젖소 2만 2,608두가 사육되고 있으며, 연간 약 170억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안성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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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안성은 서부 평야지대와 동부 산악지대 그리고 차령산맥을 넘어 경기도와 충청도 사이에 끼어 이들 사이의 교통 요지를 이루고 있다. 안성선은 광산지대인 선덕리 등을 지나 천안에서 경부선과 교차한 뒤 장항선과 연락되며, 육로로는 서쪽으로 평택, 동쪽으로 장호원과 충북의 진천·음성·충주·제천 등과 연결된다.또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가 지나므로 교통은 편리하다. 그런데 1924년에 개통한 안성선은 연변의 광산지대 개발과 동시에 곡창지대인 안성과 연계되어 장차 장호원을 거쳐 원주까지 이르는 내륙지방과 산악지대 개발의 일환책으로 부설된 철도이다.

석남사 마애여래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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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南寺磨崖如來佛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9호.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산중리 소재. 석남사는 신라 문무왕 20년(680)에 고승 석선(奭善)이 창건했다. 임진왜란으로 병화를 입어 영조 때 해원선사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애여래불상은 높이 6m, 폭 8m의 바위면에 5m가 넘는 마애불을 조각해 놓은 것이다.

청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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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龍寺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용리 소재. 안성읍에서 16km 정도 떨어진 서운산 기슭에 있는 청룡사는 고려 24대 원종 6년(1265년)에 명본국사가 지어 대장암이라 하였으며 그 후 고려 공민왕 13년(1364) 나옹화상이 다시 크게 중창하여 청룡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청룡사라 부르게 된 것은 나옹화상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청룡사의 전체 규모가 아담한 것에 비해 대웅전은 의외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안성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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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城邑

안성시의 중앙에 있으며 평택과 함께 안성평야의 중심지로서 안성선의 종점이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도로가 통한 교통의 요지이다. 고래로 안성유기의 특산지로 알려져 있고 제사·금속·성냥 등 공장이 있다. 농산물의 집산이 성하며 정기 시장이 열린다. 시내에는 남쪽 도계에 삼림이 울창하여 천혜의 승경을 이룬 서운산이 있다. 이 산에는 임진왜란 때의 사적과 기타 사찰이 많이 있다.

김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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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시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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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浦-象徵物

김포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까치이다.

김포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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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서쪽 한강 하구에 위치하며 주로 시생대의 화강편마암과 중생대 대동계(大同系)의 혈암·사암 등 지질로 되어 있다. 면적 276.54㎢, 인구 18만 3,156명(2001.12)이다. 역내는 문주산·가현산·장릉산 등의 낮은 산이 약간 있을 뿐인 준평원화한 지역으로서 한강에 의한 퇴적으로 이루어져 농경지로 가장 적합한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구릉군의 기복이 약간 있으나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는 이곳을 김포평야라고 한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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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서울보다는 온습하나 겨울에 북서풍을 직접 받아 같은 위도의 동해안보다는 훨씬 춥다. 연평균 기온 11.7

, 1월 평균 -4

, 8월 평균 26

, 연평균 강수량은 1,100㎜이다.

김포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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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옛 김포군과 양천군을 합친 것으로 김포는 본래 고구려의 검포현(黔浦縣)이며, 신라 경덕왕 때 김포로 고쳤다. 고려 명종 때 처음으로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신종 1년(1198)에 현령을 두었고 여러 차례의 변혁을 거쳐 오다가 고종 32년(1895) 군으로 고쳤다. 1914년 양천을 흡수해 오늘에 이르렀다. 양천은 본래 고구려의 한 현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공암(孔岩)으로 고치고 충선왕 2년(1310) 양천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령(縣令)을 두었다. 고종 32년(1895)군이 되었다가 1914년 김포군에 흡수된 것이다. 1963년에는 양서·양동 2면이 서울에 편입되고, 1973년에는 부천군의 오정·계양 2면이 김포군에 편입되었으나 오정면은 1975년 다시 부천시로 이속되었다. 1979년 김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계양면, 1995년에 검단면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 1998년 4월 1일 시로 승격했으며 6개 면, 4동을 관할한다.

김포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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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준평원화한 지역에 한강에 의한 퇴적이 이루어져 농경지로서는 가장 적합한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대부분이 논이어서 다른 근교 농업 지역과는 구별되는 특색있는 경관을 나타낸다. 여기서 나는 쌀은 김포미, 통진미(通津米)로서 유명하며 수원·평택 지방과 함께 주요 미작지대를 이루고 있다.그러나 남쪽의 구릉 지역이나 높지 않은 고지대에서는 채소 재배를 주로 하는 근교농업을 하고 있다. 미맥·채소가 많이 나며 특히 전국 인삼 생산에 큰 비중을 담당하리만큼 인삼을 많이 재배한다. 축우·양돈·양계 등 축산업도 성하다. 바다가 가까워 부업으로 어획도 하고 있다. 지하자원으로서는 무연탄·토탄이 많이 난다. 김포읍에는 최근에 서울에서 공장이 많이 이전해 와 중소 규모의 제조업체가 많다.

김포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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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올림픽 대로의 건설로 서울과의 접근이 용이하며, 특히 경인 신도로와 강화의 연락 통과지로 대단히 편리하다. 1970년 김포와 강화를 잇는 강화교가 개통됨에 따라 더욱 편리하게 되었다. 또 서울의 문호인 한강구에 위치하고 있어 수도 방위상 중요한 곳이다. 한강은 또한 수운이 열려 수륙의 모든 교통이 편하다.

김포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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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浦邑

김포시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김포시의 행정·교통·문화·산업의 중심지이고, 농산물의 집산이 성하다. 부근에는 노송거수가 울창하여 경승지를 이루었던 장릉산이 있는데 그 기슭에 장릉이 있다. 한말 개국과 쇄국 양론으로 국내가 들끓던 고종 때 영·미함대의 내습으로 부각된 문수산성, 그리고 봉수대 등이 있다.

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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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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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州-象徵物

양주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양주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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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대략 중앙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동두천시와 포천시, 서쪽은 파주시와 고양시, 남쪽은 서울시와 의정부시, 북쪽은 연천군과 접하고 있다. 광주산맥의 여맥이 곳곳에서 일어나 남쪽에는 도봉산(道峰山:717m)이 높이 솟아 지형이 험하고, 동쪽으로는 칠봉산(七峰山:506m), 서쪽에는 앵무봉(鸚鵡峰:622m) 등이 솟아 있다. 중앙의 도락산(道樂山:441m)이 분수계를 이루고 있다. 중랑천은 남류하여 한강에 합류하고, 청담천은 북류하여 임진강 지류 한탄강에 합친다. 전체 면적은 310.18㎢이며 인구는 13만 8,748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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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내륙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기온의 교차가 현저하며 강수량은 전국 3대우지에 속한다. 연평균 기온 10.8

, 1월 평균 -5.4

, 8월 평균 26

, 연평균 강수량 1,400㎜이다.

양주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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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 시대에는 매성군(買省郡)이라고 하였으며, 신라 경덕왕 16년부터 내소군(來蘇郡)이라 칭하였다. 고려 태조시대에 양주라 폐개(陞改)하고 현종 9년(1668) 견주군(見州郡:내소군의 개칭명)이 양주군에 완전 편입되었다. 1963년에는 의정부읍이 시로 승격하여 양주군에서 떨어져 나왔고, 노해면이 서울특별시로, 개군면이 양평군으로, 이담면이 동두천읍으로 각각 편입되었다.1973년에는 구리면이, 1979년에는 미금면이 읍으로 각각 승격되었으며, 양주군이 분군되어 남양주군이 신설되었다. 1981년 동두천읍이 시로 승격하였으며, 1985년 회천면이 회천읍으로 승격되었고, 1986년 구리읍이 다시 시로 승격되었으며 1987년 파주군 광탄면 기산리 일부가 양주군 백석면으로 편입되었다. 2003년 양주군이 양주시로 승격되었다.

양주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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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농축산업이 우세한 편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콩 등의 곡물과 사과·배·포도·복숭아 및 채소 등이고, 낙농과 양계도 성하다. 서울과의 접근성이 용이하여 주곡작물보다 근교농업의 특성을 살린 원예농업이 성하다. 쌀과 채소류 등의 주곡 생산은 점차 감소하는 반면 젖소나 돼지 등의 축산업이 신장되고 있다. 공업은 회천읍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220여 개 제조업체가 들어서 있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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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부추·회암솔잎부추·청정수경채소·가래비배추·천보산더덕·느타리버섯·영지버섯 등이 유명하다.

양주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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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철도는 경원선이 구조곡을 따라 남북으로 통하고, 중앙선은 군 남부의 한강변을 연하여 동서로 달리며, 경춘선은 중앙을 횡단한다. 또 서울의 교외선인 능의선이 군의 서남부에서 경의·경원 양선을 연결시키고 있다. 자동차 도로는 예부터 경원지방의 교통의 요지였던 관계로 사방으로 발달해 있다.

양주의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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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光

송추계곡은 산수가 맑고 계곡이 길며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교외선이 개설된 이후, 유원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며 최근 장흥면의 장흥계곡에는 위락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젊은층의 인기를 얻고 있다. 군의 남동부에 있는 도봉산과 만장대는 예로부터 서울을 비롯한 인근 사람들의 유명한 관광지이다. 별산대 놀이·향교춘추제·문화제가 매년 열린다.

회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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檜巖寺

사적 제128호. 회천읍 회암리 산 14-1. 천보산의 서남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초기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이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보우·나옹 등의 고승들이 배출되면서 유명해졌고, 사찰의 규모도 더욱 확대되었다.조선 중기에 문정왕후의 관심으로 영화를 누렸으나, 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원인모를 화재로 폐사가 되었다. 북에서 남으로 퍼진 부채꼴 모양의 부지를 아래로부터 8단으로 정리하여 각 단마다 건물을 배치하였다.사지(寺址)는 약간의 경사가 있지만 대체로 평탄한 지형이다. 남쪽의 하단부는 비교적 넓은 대지이고, 북쪽으로 갈수록 폭이 깊숙한 곳에 상단부가 있다. 상단부 주위 3면은 능선으로 둘러져 있어 아늑한 분위기가 감돈다.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부도(보물 제388호),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 등이 있다.

온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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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陵

사적 제210호. 장흥면 일영리 산 19. 조선시대 중종의 원비인 단경왕후 신씨의 능이다. 묘역은 약 6만 6천여 평이다. 능 뒤에 곡장을 두르고, 능 안에 석양(石羊) 석호(石虎) 각 2필로 호위하게 하였다. 원분 앞에 혼유석을 놓고 양 끝에 망주를 세웠으며, 중앙에는 장명등을 놓고 양옆에 문석(文石)과 석마(石馬)를 배치하였다.단경왕후 신씨는 연산군의 처남인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이다.

양주별산대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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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洲別山臺-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 주내면 유양리 261.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 중심의 경기지방에서 전래되어 온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일분파로 본산대라고 불리던 녹번, 아현, 구파발, 퇴계원, 송파, 사직골 등지의 산대놀이와 구별해서 별산대라고 부르고 있다. 18세기 무렵 양주에 사는 이을축이 서울의 사직골 딱딱이패를 본따 가면을 제작하고 공연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양주 땅에 정착하였으며, 이를 별산대라고 불렀다고 한다.조선시대 양주목의 관아가 있었던 유양리를 중심으로 전래되어온 독특한 탈춤이다. 대개 음력 4월 8일, 5월 단오, 6월 유두, 7월 백중 등의 대소명절과 기우제의 행사로 공연되었다. 밤 10시에 시작되면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으며 형편에 따라 3~4시간으로 줄이는 수도 있다고 한다.전체 8과장 8경으로 되어 있으며, 춤사위는 우리나라 탈춤 중에서 가장 분화 발전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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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國山

주내면 유양리와 산북리 경계에 있다. 높이는 360m이고, 불곡산이라고도 한다. 도봉산 낙맥으로 주내면과 백석면 중간에 솟아 있는 반석반토의 명산이며 양주의 주봉이다. 제일 삼봉은 마치 투구와 같아 투구봉이라고 부르며, 그 아래에 도선선사가 창건 하였다고 전해지는 백화암이 자리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약수터는 아무리 가물어도 줄지 않고 장마에도 물이 늘지 않으며, 혹한에도 얼지 않고, 복중 더위에도 아주 차다. 옛 절터가 있었으나 지금은 밭이 되어 있고, 북구바위 아래에는 기당폭포가 있다.

장흥국민관광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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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興國民觀光團地

장흥면 석현리를 중심으로 골짜기 일대에는 밤나무와 갈참나무, 소나무들이 어우러져 숲을 형성하고 있으며, 물이 맑은 것으로 유명하다. 계곡을 따라 수영장, 상가, 방갈로, 매점 등이 산재해 있다.계곡 어느 곳이라도 야영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많아 가족단위로 찾는 경우가 많다. 장흥역에서 이어지는 8km의 계곡은 봄에는 산채와 약초, 여름에는 시원한 물과 검푸른 녹음, 가을에는 단풍, 그리고 겨울에는 설경과 산세가 좋다.입구에 있는 토털미술관은 1984년 10월 7일 야외조각전시장으로 개관한 이래 연중 조각·회화·도자기 등을 전시하고 있다. 원형공연장에는 수시로 연극·인형극·음악·무용·마당놀이 등을 공연하여 미술작품과 공연예술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여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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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군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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驪州-象徵物

여주군을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백로이다.

여주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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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동남에 위치하며, 동쪽은 강원도 원주시, 서쪽은 이천시, 광주군, 남쪽은 충청북도 음성군, 충주시, 북쪽은 양평군과 각각 접하고 있다. 역내는 구릉과 저지가 착종(錯綜)하고, 지질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전체 면적 607.97㎢이며, 인구는 10만 5,084명(2001.12)이다. 평균고도 약 200m의 준평원면을 이루며 중앙부는 특히 낮아 여주분지를 이루고 주변의 최고지점인 동북단의 당산(堂山)도 648m에 불과하다.태백산맥, 차령산맥, 광주산맥 세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여주평야가 남한강을 끼고 펼쳐져 있다.여주군을 관통하여 흐르는 남한강을 여강이라고 부르며 여강의 동북 지역은 산지가 많고, 강남지역은 전형적인 여주평야로서 넓은 들과 야산이 잘 발달되어 있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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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부에 위치한 까닭에 기온의 교차가 심하고, 강수량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연평균 기온 11.7

, 1월 평균 -6.0

, 8월 평균 25

, 연평균 강수량 1,250㎜이다.

여주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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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여주군은 천여(天與)의 지리(地利)로 말미암아 진국(辰國) 시대부터 평화로운 집단부락을 영위해 왔으나 역사상 지명이 뚜렷이 나타난 것은 고구려 장수왕 63년(476)에 골내근현(骨乃斤縣)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후 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황요, 고려 고종 때는 영의(永義), 충렬왕 31년(1305) 여주로 개칭하였다가 1914년에 여주군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2004년 1읍(여주읍), 9면(점동·가남·능서·홍촌·금사·산북·대신·북내·강천)이 있다.

여주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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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강 연안에 위치하면서도 전곡이 많이 산출된다. 특히 이 지방에서 산출되는 ‘여주쌀’은 국내 제1우량미로 이름이 높다. 채소·과수 재배도 성하고 대마·왕골 등 특용작물도 생산된다. 특히 최근에는 땅콩 주산단지를 조성하였다. 지하자원으로는 고령토와 규석이 있으며 제조업체는 대부분 도자기를 제조하는 영세업체이다.경지면적은 총면적의 30%로 182.82㎢이며 산지가 많다. 호당 경지면적은 1.4ha이다. 논농사 비율이 59%를 차지하며, 벼농사가 주종을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땅콩 등이고, 배·복숭아 등의 과일 생산과 양잠·축우도 성하다.

여주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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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협궤 수려선이 있었으나 1972년 초에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철폐되었다.영동고속도로가 군의 중앙을 동서로 횡단하며 여주읍을 중심으로 기타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비교적 편리하다.

여주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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驪州邑

여주군의 중앙부에 있으며 행정·교통·산업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종래 수려선의 중심이었다. 쌀·잡곡·콩·소 등 농축산물의 집산지이고 도자기 공장이 있다.부근에는 백제 자사왕(姿娑王) 때에 축성한 자사성의 성지, 고려 광종조에 창건된 고달사의 사지, 세종대왕의 영릉과 효종대왕의 영릉 및 명성황후의 출생지인 능촌, 하리와 창리의 삼층석탑, 여주 절경의 하나인 청심루지, 신라 예술의 정수를 다한 미의 극치라고 하는 오층벽탑, 건축의 미술적 가치가 지극히 높은 조사당, 구룡루 등 기타 많은 고찰이 있다.

신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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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勒寺

여주읍에서 동북쪽으로 2.5km 정도 떨어진 남한 강 상류 봉미산 기슭에 있는 오래된 사찰.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전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신륵사(神勒寺)라는 절 이름은 고려 고종 때 건너 마을에서 거칠고 사나운 용마가 나타났는데 이곳의 큰 스님이 신력으로 사나운 말에게 굴레를 씌워 잡은 것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신륵사의 늑(勒)자가 바로 말을 통제하고 다스린다는 뜻을 품고 있다.고려 우왕 2년(1376)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는데 유서가 깊은 만큼 규모가 웅장하며, 주위의 경관도 뛰어나다.나옹선사의 열반으로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일으킨 이 절은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인해 위축되었다가 경기도 광주 헌릉에 있던 세종대왕의 유택을 인근 능서면으로 천장하면서 신륵사를 세종대왕의 원찰로 삼아 옛 명성을 되찾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극락전을 비롯해 많은 건물이 불에 타고 말았다.신륵사는 화려한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을 비롯하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조사당(보물 제180호), 보제존자 석종부도(보물 제228호),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등 많은 유물을 지니고 있다.

고달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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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達寺址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1번지 일대에 위치. 고달사의 정확한 창건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다고 한다.현재 이곳에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부도와 보물 제6·7·8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는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원종대사혜진탑, 고달사지석불대좌 등이 남아 있는데, 이들 석조유물들은 하나같이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원종대사 혜진탑 귀부 및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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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宗大師慧眞塔龜趺-二首보물 제6호.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9-3. 975년에 세운 혜목산 고달선원 국사 원종대사비를 받쳤던 귀부와 비신 위에 얹혔던 이수이다. 1915년 봄에 넘어져 8조각으로 깨진 비산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비신없이 귀부와 이수만 맞물려 있다.원종대사부도비 귀부와 이수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귀부와 이수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태산 같은 힘을 분출시키고 있다. 전체적으로 각이 깊고 뚜렷하여 귀부의 튀어올라온 거북등만 보아도 그 힘을 당할 장사가 천하에 없을 듯이 보인다. 치켜 올라간 꼬리가 험상궂기 이를 데 없고, 콧등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코를 벌름거리며 눈을 부릅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여의주를 물지 않은 게 특이하다.

원종대사 혜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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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宗大師慧眞塔

보물 제7호.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산 46-1. 원종대사 입적 19년 만인 고려 경종 2년(977)에 화강석으로 조성한 부도이다. 나말여초에 유행했던 팔각원당형의 기본형식에 각 부의 수법이 섬세하고 우아하면서도 다소 시대적인 특징도 드러나고 있다. 4매석이 맞물려 짜인 넓은 장방형의 지대석 위에 4매로 짜인 사각의 하대구조가 특이하다.

창덕궁 측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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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德宮測雨臺

보물 제844호.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83-1(영릉전시관). 직경 16.2cm, 길이 4.3cm의 구멍이 파여 그 안에 측우기를 앉혀 놓게 되어 있다. 본래 창덕궁 금문원(檎文院)에 설치되었다가 1920년경 경성박물관 앞 계단으로 옮겨 전시하였다가

6·25전쟁 때 측우기는 없어지고 측우대만 남아 창경원 명정전 뒤에 전시되었다. 이후 1960년 말에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겼다가 1970년 후반에 영릉 전시관으로 옮겼다. 자체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조선 정조 6년(1782) 6월과 7월 사이에 계속된 가뭄에 비가 오기를 기원하고 기다리며 이를 제작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명문은 심염조(沈念祖)가 찬(撰)하고 정지검(鄭志儉)이 썼다.

앙부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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仰釜日晷

보물 제845호.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83-1(영능전시관). 해시계 중의 하나로 반구형(대접모양)의 형태로 인하여 앙부일구라는 명칭이 붙었다. 시판은 동지(冬至) 쪽에서 시작하여 하지(夏至)에 이르기 까지 24절기를 13선의 위선(緯線)으로 긋고 이에 수직으로 시각선(時刻線)을 그었다. 영침(影針), 즉 그림자바늘은 북극성(北劇聖)을 향하여 비스듬이 꽂았으며 문맹자들도 시간을 알 수 있도록 각 시간에 해당하는 신(神)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청동을 재료로 하여 주물을 부어 만들고 글자와 선은 흑색칠 바탕에 은상감(銀象嵌)을 하여 뚜렷이 보이게 하였다. 4개의 발은 수평을 맞추기 위하여 수평기준장치를 십자(十字)의 형태로 하였다.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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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方廣佛華嚴經

보물 제1146호.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이호리 396-2 목아불교박물관. '화엄경'의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을 반야삼장이 한역(漢譯)한 정원본 40권 중의 제24권이다. 이 판본은 국보 제206호로 지정된 해인사 소장 고려각판에서 인쇄한 것이다.판각시기는 12~13세기로 추정되며, 인출은 감색 표지에 금은니의 보상화문, 지질, 인쇄상태 등으로 미루어 14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이미 보물 제1017호로 지정된 정원본(貞元本)과 같은 계통이나 표장법에서 보상화문이 있고 없는 차이를 보여준다.상하단변이고 상하변간(上下邊間)은 22.5cm, 장(長)의 크기는 30.5

48.8cm에 일행 17자씩 24행인데 6행씩 꺾어 첩을 만들었다.

영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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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陵 사적 제195호.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1. 조선 제4대 세종(재위 1418~1450)과 왕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영릉의 지세는 층층이 해와 달의 모습을 띠면서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형국이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재실과 세종대왕 동상이 오른쪽에 서 있고, 왼쪽에는 세종대왕 기념관인 세종전이 있다. 세종전 안에는 집현전 학사도를 비롯한 여러 유물들이 대왕의 업적을 기리며 모작 혹은 진품으로 진열되어 있고, 세종전 밖의 잔디밭엔 해시계·자격루·관천대 등이 전시돼 있다.봉문 앞에는 4개의 돌로 받친 혼유석 2개를 놓아 합장릉임을 표시했다. 봉분 둘레는 돌난간을 두르고 동자기둥에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 넣었다. 그 앞에 팔각으로 다듬어진 장명등과 능 앞으로 석상·석마·문인석·무인석을 배치했다. 정자각은 합장 봉분에 축이 맞추어진 배치이나, 홍살문의 위치가 틀어져 있어 참도는 꺾인 축형이 되었다. 현재의 홍살문은 후대에 옮겨진 듯하며 원래의 위치에 초석이 남아 있다. 또한 수복방과 수라간의 위치가 정자각 바로 옆까지 올라간 특수한 예에 속한다. 1977년 능역 성역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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寧陵 사적 제195호.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1. 조선 제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왕비 인선왕후 장씨가 모셔진 쌍릉이다.정자각 뒤 봉분은 오른쪽이 왕비릉이고 왼쪽이 효종릉이다. 왕비릉엔 둘러쳐진 곡장이 없고 왕릉에는 곡장이 있다. 영릉은 다만 쌍릉이면서 앞뒤로 엇비슷하게 위치를 잡고 있어 지형과 상관 없이 애당초 ‘나란히’ 놓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의 석물들은 똑같이 갖춰져 있는데, 배치와 양식은 조선전기 '국조오례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명성황후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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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成皇后生家

유형문화재 제46호.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2. 고종황제의 황후로 개화기 국정에 참여하였으나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게 시해되어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 명성황후가 출생하여 16세까지 살던 집이다.1687년(숙종 13)에 왕의 장인 민유중의 묘막(墓幕)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서 남아 있는 것은 안채뿐이다. 1975년과 1976년에 안채가 중수되었고 1996년에는 안채가 수리되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되었다.

화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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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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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城-象徵物

화성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화성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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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서남부에 위치한다. 남서부 해안지대와 도서들은 편암, 북서부는 화강암질 편마암으로 이루어지고, 북부와 동부지역에는 반상변정질 편마암과 호상편마암이 나타난다. 군의 동부에는 광주산맥이 뻗어 광교산이 솟고, 그 여맥은 남쪽으로 뻗어 용인시과 경계를 이룬다. 서부 구릉지대는 넓은 화성평야로서 사근천 및 대천이 광교산에서 발원하여 도중에서 합류하고 수원시를 거쳐 남류하여 바다에 들어간다. 해안은 굴곡이 많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남양·조암의 반도가 돌출하고, 그 사이에 남양만을 비롯한 수개의 만을 안고 여러 섬을 포함하고 있으나 해안이 멀리까지 얕고 간만의 차가 커서 양항이 발달되지 못하고 있다. 면적 687.65㎢, 인구 21만 4,729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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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서울의 기온과 차이가 없는 대륙성 기후이다. 연평균 기온 11.7

, 1월 평균 -2.3

, 8월 평균 28.5

, 최고 기온 37.3

(1939·8), 최저 기온 -25.1

(1936·2), 연평균 강수량은 1,200㎜이다.

화성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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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 때에 매홀군(買忽郡)이라 일컬었으며 신라 경덕왕 때 수성군(隨城郡)이라 칭하였다. 고려 태조시에는 수주(水州)라 개칭한 것을 충선왕(忠宣王) 때 수원부로 고치고 1896년 경기도 도청소재지를 겸한 군이 되었다. 1909년 도청이 서울로 이전되고 1949년 수원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군명을 화성군으로 고쳤다. 1960년 오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63년에는 태장면 3개리와 일왕면 11개리가 수원시로 편입되었다. 1989년 오산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 반월면이 안산시·수원시·군포시에 분리 편입되었다. 1988년 봉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2001년 화성군이 화성시로 승격되었다. 2003년 우정면이 우정읍으로 승격되어 현재 3읍 11면 1동을 관할한다.

화성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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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군민의 55%가 농업에 종사하며, 군면적의 41%가 경지로 쓰인다. 경지율이 도 안에서 가장 높다. 옛날에는 궁중에 소금을 조달하던 소금의 고장 남양이 있어 유명하였다. 농사법이 크게 발달하여 주곡 생산 외에 채소 재배와 소·돼지·닭 등과 산양이 많고 또 양잠도 성하다. 해안에는 천일 제염이 발달하여 전국 굴지의 염전지대를 이루고 있다. 바다가 멀리까지 얕아 굴·패류·잡어가 많이 잡힌다. 광업으로서는 텅스텐·금·토탄 등의 산출이 있다. 특히 텅스텐은 한때 수출로 이름을 떨쳤다. 공업은 근래에 경인공업지대의 확장으로 태안읍의 전기·전자·기계·제약·플라스틱·제지, 봉담면과 동탄면의 전자제품·기계·플라스틱, 비봉면의 운동 용구, 향남면의 제약, 정남면의 플라스틱, 팔탄면의 화공 약품, 1977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반월면의 공업단지에는 전기기계·화학기계·전자제품·유무선 통신기·섬유 제조업 등이 활발하다.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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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면적은 군면적의 41%인 2만 9,846ha이며 논농사의 비율이 높다. 쌀은 경기미(京畿米)로 알려져 있으며, 제부도에서 생산되는 땅콩은 유명하다. 1974년 남양만 방조제의 준공으로 용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밀·두류 및 채소이고, 원예 작물도 많이 재배되며, 축산과 양계도 성하다.

화성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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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철도 경부선과 안산전철선 및 협궤열차인 수인선이 지나며,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국도 등 지방도가 사방으로 통하고 있으며, 도로망이 비교적 발달하여 편리한 편이다. 오산에는 군용 비행장이 있고, 또 송산면에는 출력 500kW를 과시하는 동양 굴지의 남양 송신소가 있다.

태안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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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安邑

군의 동부에 위치하며, 수원시와 오산시 사이에 끼여 있어 경기평야의 중심부가 된다. 경부선·경부국도·경부고속도로가 지나므로 교통이 편리하여 농산물의 집산이 용이하고, 공업도 일어나 제조업체가 늘어나고 있다.군내에는 반월·발안·남양·조암 등 지방의 정기시장이 있다. 광교산·무봉산·독산성·서호·용주사·창성사·봉령사·청련암·건릉·융릉·항미정 등이 있다.

용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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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珠寺

태안읍 송산리 성황산 남쪽 기슭에 있으며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 신라 문성왕 16년(AD 854)에 갈양사로 창건되어 고려 광종 때에는 혜거국사가 불도를 닦던 곳으로 조선 정조대왕이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지금의 화산으로 이장하고 사찰을 중건하여 융릉(사도세자의 묘)의 원찰로 삼았다.정조의 효성은 지극하여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긴 뒤 자주 행차하면서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슬퍼하였다. 용주사에는 국보 제120호인 범종을 비롯하여 정조의 애절한 효심이 깃든 '불설부모은경' 등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사찰 명칭은 낙성식날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어 용주사라고 개칭하였다고 한다.

융릉·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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隆陵·健陵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산 1-1. 융릉은 영조의 세자였고 정조의 생부인 장헌세자(사도세자)와 동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능상설은 장릉식의 병석을 꽃봉오리 모양으로 하고 무석까지 세웠으며, 장명등은 8각 장명등과 4각 장명등의 양식을 합하여 운종이 달린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었다.건릉은 조선 제22대 정조와 동비 효의왕후의 합장릉으로 동릉이실이며, 병석없이 난간만 두르고 그 외 모든 상설은 융릉과 같다. 문무석의 조각이 극히 사실적이며 안정감이 있는 수작으로 문관은 금관조복을 입고 있다.

광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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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敎山

광교산은 수원시와 용인시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582m의 높이를 자랑한다. '산경표'(신경준)에 의하면 한남금북정맥의 한남정맥에 속하는 산으로 이 정맥에서 높이가 가장 높은 산이다. 한남정맥은 속리산에서 뻗어나온 산맥이 서북향으로 올라오다가 안성의 칠장산에서 서북으로 내쳐 흐른 정맥이 강화도까지 이어진 것을 말한다. 칠장산에서 서남으로 방향을 바꾼 금북정맥은 청양 일월산, 오서산, 보개산, 수덕산을 거쳐 태안반도까지 이어진다.광교산은 자락을 넓게 벌리고 수원을 북에서 싸안고 있는 형세를 한 수원의 진산이다. 주위에 큰 산이 없는 평야지대에 위치한 수원이라 광교산은 어쩌면 수원사람들에게 물을 대주는 역할을 해온 고마운 산일지도 모른다. 광교산은 산의 높이에 비해서는 인근의 백운산과 함께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덩치가 큰 산이다.소나무 능선 산행이 특징적이며, 능선엔 송림이 많은 편이다. 계곡안은 활엽수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능선 산행중 남으로는 수원시가 간혹 보이고, 시루봉에서는 수지면 일대와 분당 등이 보인다.

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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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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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州-象徵物

광주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제비, 동물은 소이다.

광주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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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중남부에 위치하며 북은 서울특별시와 연접하고 있다. 군내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한 광주산맥의 구릉이 몹시기복이 심하여 평지가 적다. 한강 지류 우천·경안천,·능원천 등의 하천은 북류하여 한강에 합류하며 유역에는 평지가 발달하였다. 거의 전역이 시생대의 화강편마암계로 되어 있다. 면적 431.84㎢, 인구 15만 4,808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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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부에 있는 관계로 한서의 차가 심하고 강수량은 비교적 많다. 연평균 기온 11

, 1월 평균 -4.7

, 8월 평균 25.5

, 연평균 강수량 1,200㎜이다.

광주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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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 때 도읍을 위례(慰禮, 현 稷山)로부터 지금의 중부면 산성리로 옮기고 남한산성이라 칭하였다. 그 후 근초고왕 26년(371) 다시 남평양성(南平壤城-지금의 서울)으로 천도하였다. 그 후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갔는데 신라와 연합하여 남·북한성 6군을 수복하였으나 이번에는 신라에 빼앗겨 한산주가 되었다. 조선 고종 44년(1907) 군이 되었으며 1914년 의곡면, 왕륜면을 수원면에 붙이고, 양평군 남종면을 편입(16개면)하였다. 1917년 군청을 중부면 산성리에서 광주면 경안리로 이전하고 1963년 구천면 중대면, 언주면과 대왕면의 5개리(일원, 수서, 조곡, 율현, 세곡리)를 서울시로 편입했다. 1973년 대왕면, 낙생면, 돌마면과 중부변 일부(6개리)를 성남시로 편입했고, 1979년 광주면이 광주읍으로 승격, 1989년 동부읍, 서부면과 중부변 일부를 하남시로 편입했다. 2001년 광주군이 광주시로, 오포면이 오포읍으로 승격되었다.

광주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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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지형상 구릉지가 많아 밭농사가 발달하여 있고 서울에 근접해 있기 때문에 근교 또는 원교 농업지로 야채 재배와 가축의 사육이 성하며 그 산물은 서울에 공급된다. 광산물로는 사금·은·구리·고령토·철강 등이 있다. 특히 이곳의 도자기는 조선시대부터 유명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 등의 곡물과 채소·인삼·누에고치 등이다. 쌀 농사는 주로 한강과 경안천 유역의 서부 평야지대에서 이루어진다.

광주의 교통·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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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觀光

명승 고적이 많아 가로가 발달하고 한강이 군의 북계(北界)를 흘러 수운이 또한 편리하다. 팔당호는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관광명소의 하나이다. 성남공업단지가 생긴 후에 서울과의 교통이 더욱 편하여졌다. 중부고속도로 및 서울∼부산간 국도가 중앙을 종단하고 경부고속도로가 서부를 지나고 있다. 명승 고적이 많아 관광객이 많이 모여들고 있는데 그 대부분은 병자호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해발 460m의 고원지대로 천연의 요새지에다 선조 28년에 축조한 산성인 남한산성은 청 태조에게 항복한 한많은 산성이며, 지금은 관광지 또는 하이킹 코스로서 산성취락의 표본으로 가치가 있다. 또 산성 제일 높은 곳에는 수어장대가 있는데 인조대왕이 청군에게 포위되어 45일간의 시련을 겪은 곳이다. 이 밖에 청량당·숭렬전·현절사·연무관·침녀정·저암정·봉은사·능묘·백련암 약수 등의 유적이 있다.그외 유교의 성현들과 유학자들의 제사를 지내는 광주향교(지방문화재자료 제13)가 있고, 광주조선백자도요지(사적 제314)와 조선시대의 분원 가마터가 많이 남아 있다.시내에는 초등학교 19, 중학교 6, 고등학교 2, 대학교 2개 교가 있다.

주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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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주장산은 보통 청량산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 사적 제57호로 지정된 남한산성이 위치한다. 주장산은 일견 평범한 산처럼 보이지만 산속이 광대한 분지로 되어 있고 밖으로는 험한 경사를 이뤄 천혜의 요새지나 다름없다.고주몽의 셋째 아들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백제국을 일으킨 곳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온조는 현재의 서울 풍납동에 토성을 쌓고 위례성이라 하여 백제국을 세웠으나 지세가 불안하고 협소하여 이곳으로 천도했다.

장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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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寺

산성 안에는 본래 9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현재 장경사·망월사·개원사·국청사 등이 복원되었고 나머지는 소실되었다. 장경사는 남한산성 동문에서 북쪽으로 2km 가량 올라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연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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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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漣川-象徵物

연천군을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대추나무, 새는 비둘기이다.

연천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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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동북부에 위치하며 군내의 중심부를 추가령구조곡이 남북으로 지나고 동쪽에는 광주산맥의 지맥이 뻗어 지장봉을 비롯하여 험준한 산이 연달아 있다. 서북부는 마식령산맥의 지맥인 수룡산을 비롯한 높은 산들이 솟아 있다. 임진강은 구조곡을 남류하여 후천·한탄천을 합하고, 마전 부근에서 서남으로 방향을 바꾸어 장단군 쪽으로 흘러간다. 유역에는 비옥한 연천·마전 등의 분지가 있다. 이 군의 북반부는 현무암의 용암으로 덮였으며 남반부는 석회암 지대를 이루고 있다. 면적 693.21㎢, 인구 5만 1.902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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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부에 위치한 관계로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심하고 강우량은 한국 3대 다우지(多雨地) 중의 하나에 속한다. 연평균 기온 10.4

, 1월 평균 -7.0

, 8월 평균 25.2

, 연평균 강수량 1,200㎜이다.

연천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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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연천은 원래 고구려의 공목달현(功木達縣)으로 신라 때는 공성현(功城縣), 고구려에 와서 장주현(障州縣)이라 부르다가 충선왕 때에 연천현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되었으며, 1914년 마전군·적성군·삭녕군과 양주군 서면을 편입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마전은 본래 고구려의 마전천현(麻田淺縣)으로, 신라시대에는 임단(臨湍)현, 고려에 들어와서 마전현으로 불려 오다가 1452년(문종 17) 군으로, 다시 1914년에 연천군에 합하여졌다.1945년 8·15 광복과 더불어 본군의 대부분이 38

선 이북에 속했으나 한국전쟁 후 영근(嶺斤)·삭녕(朔寧) 등만을 제외한 군의 대부분이 수복되어 군의 부활을 보게 되었고, 1979년 연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2004년 현재 2읍(연천·전곡), 8면(군남·청산·백학·미산·왕징·신서·중·장남)을 관할한다.

연천의 산업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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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交通

임진강과 한탄천 유역의 비옥한 분지에서는 쌀·보리·조·옥수수·고추·담배 등 농산물이 산출된다. 특히 채소는 군납으로 인해 성하고, ‘연천콩’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축우가 성하여 목장도 여러 개 있다.경원선이 통하고 도로망 특히 군사도로가 발달하였으며 경원선과 같이 병주하는 간선 도로는 중요하다.

연천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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漣川邑

연천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군청 소재지로 교통·산업의 중심지. 휴전 이전까지는 이북에 속해 있던 곳으로 그 어느 곳보다 전쟁의 상처를 많이 받은 곳이다. 연천콩은 예부터 유명하며, 군내에는 보개산·문인폭·문인석·훈암벽·풍혈·연취암·운계동·청학동 등과 군자산·감악산·용추·칠중성·숭의전·한탄강 수영장 등이 있다. 군내에는 초등학교 13, 중학교 6, 고등학교 2개 교가 있다.

포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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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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抱川-象徵物

포천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잣나무, 새는 까치이다.

포천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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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동북부 추가령구조곡 내에 위치하며 거의 전역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3면이 광주산맥의 높은 산지로 둘러 싸여 있고, 서쪽으로 경사가 완만하다. 그리하여 동북경의 국망봉(國望峰:1,168m)·설악산(雪嶽山:936m)·홍성산(鴻城山:923m)·불무산과 서쪽의 보장산 등 고산 준령이 많아 시내는 산지의 기복이 심하다. 하천은 한탄강 지류 포천천·영평천 등이 임진강에 합하여 이곳에 작은 분지를 이룬다. 면적 826.42㎢, 인구 14만 8.452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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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에 위치하여 도내 제1의 벽지로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고 우리나라 다우지의 하나에 속한다. 연평균 기온 10.5

, 1월 평균 -7.3

, 8월 평균 25.0

, 최저 기온 -32

(1958. 1), 평균 강수량 1,400㎜이다.

포천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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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옛 포천군과 영평군(永平郡)이 합한 것으로 포천은 본래 고구려의 마홀군(馬忽郡)이며, 신라에 와서 견성군(堅城郡)으로 고치고, 고려 초에 포주(抱州)로 고쳤다. 성종 14년(995) 단련사(團鍊使)를 두었으며 목종(穆宗) 8년(1005) 이를 파하고 현종 때에 감무(監務)를 두고, 조선 태종 13년(1413) 현감으로 고치어 그 뒤 여러 차례의 변혁을 거쳐 1895년에 군이 되었다. 1914년에 영평군을 합하였으며, 광복과 더불어 본군 북부는 이북에 속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수복하였다.1979년 포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9년 관인면 부곡리를 연천군 연천읍으로 편입, 1996년 소흘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2003년 포천군이 포천시로 승격되었다. 현재 2읍, 11면을 관할한다.

포천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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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산지가 많아 농토가 협소할 뿐만 아니라 토질이 척박하여 콩을 많이 재배하며 논보다 밭이 많다. 아름드리 나무와 수많은 잣나무가 있어 훌륭한 임상을 이루었던 이곳 산은 한국전쟁으로 옛 모습을 찾아 볼 길이 없다. 축산은 연년 증가하여 목장이 여러 곳에 있다. 휴전선이 가까운 전방 지구에 속하므로 공업은 거의 없고 군납 식료품 공장 몇 개와 양조장이 있을 정도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포천 막걸리는 유명하다. 이렇게 기형적인 산업구조를 지니고 있는 이곳에 유명한 것은 과거부터 내려온 소시장으로서 장날이면 서울·양주·연천 등지에서 상인들이 모여든다. 연천계 지층으로 덮여 광물 산출은 도내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주요 광물은 구리·남정석·홍주석·형석 등이 있는데 질·양이 모두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약 1,000개를 넘는 중·소 제조업체가 있다.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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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간지역으로 임야가 많고(총면적의 70%) 농경지가 적어 농경지 비율은 총면적의 18%에 불과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 외에 콩·조 등의 두류와 축우가 유명하며, 특히 최근에는 대규모의 인삼 재배가 성하다.

포천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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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군의 대략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여 북은 철원, 남은 의정부로 연락되는 간선도로가 중요하며 군용도로가 있어 도로망은 정비되어 있다. 포천읍을 지나는 43번 국도는 4차선으로 수도권과의 교통이 편리하다. 철도는 경원선이 서북부의 일단을 스쳐 지나가고 있다.

포천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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抱川邑

군의 남서부에 있으며 서울∼김화 공로에 연하여 교통이 편리하며 경기 북동부의 경제·교통의 중심을 이루고 군청 소재지이다. 부근의 산지대는 축우가 유명하다. 북쪽 운천(蕓川) 동쪽 4km 지점에 산정호(26정보, 깊이 23m)란 관개용 대저수지가 산상에 있고, 서북쪽 한탄강 계곡에는 명승지 고석정이 있어 관광객이 그치지 않는다. 그 밖에 흥룡사·영평팔경 등이 있다. 시내에는 초등학교 29, 중학교 12, 고등학교 6, 대학 3개 교가 있다.

산정호수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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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井湖水觀光地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에 위치. 1977년 3월 30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연간 70만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수영장, 볼링장, 사우나 시설을 갖추고 있고 최근에는 눈썰매장 및 스케이트장이 개장되어 4계절 관광지로 손색이 없다. 수심 23.5m, 면적은 7만 8,000여 평에 이르고 산과 호수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흥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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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龍寺

신라 말엽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절터를 정할 때 나무로 만든 세 마리의 새를 공중에 날려 보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백운산에 앉아 그 자리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1922년 중수하면서 흑룡사로 절 이름을 고쳤다가 다시 오늘날의 흥룡사로 바뀌었다.

가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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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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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平-象徵物

가평군을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잣나무, 새는 꿩이다.

가평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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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경기도의 최동부에 위치하며 거의 화강암과 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전체 면적의 81%가 산지이며 군내를 광주산맥이 달리고 있는데 매우 삭박(削剝)되어 산맥으로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되었지만 고도는 아직도 1,000m 이상을 유지하므로 지형이 전체적으로 높다. 광주산맥의 최고봉인 화악산이 진산이 되어 촛대봉, 매봉, 국망봉, 강씨봉, 명지산, 수덕산, 계관산을 거느리며, 해발 700~800m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끼고 웅장한 맥을 이루고 있다.이러한 산들의 계곡을 따라 흐르며 이어지는 가평천과 조종천의 수많은 지류들은 모두 북한강으로 유입되어 흐른다. 남쪽으로는 중미산, 화야한, 장락산이 산맥을 이루어 용문산으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주금산, 축령산 등이 끝없는 산맥을 이어 나간다. 지역의 경계를 보더라도 동쪽으로는 강원도 춘천시와 홍천군이 맞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포천군, 남쪽으로는 양평군과 남양주시와 경계를 이루어 중부 전선의 요충지이다. 면적 843.27㎢, 인구 5만 6.211명(2001.12)이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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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에 있는 관계로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이며 우리나라 다우지의 하나에 속한다. 연평균 기온 10.5

, 1월 평균 -6.6

, 8월 평균 25.3

, 최고 기온 37.7

(1939.7), 최저 기온 -31

(1957·1), 연평균 강수량 1,300㎜이다.

가평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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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 근평군(斤平郡)인데, 신라 경덕왕이 가평(加平-嘉平)으로 고쳤다. 현종 9년(1018)에 춘천에 속하였다가 태조 5년(1396) 감무를 두었고 태종 13년(1413)에 현감을 두어 강원도로부터 경기도에 예속하였다. 숙종 33년(1707) 군으로 복구하였고 그후 다시 강원도에 예속되었다가 고종 32년(1895) 경기도로 이속되어 한성부에 속하였다가 복구, 오늘에 이르렀다. 2004년 1읍(가평), 5면(설악·외서·상·하·북)을 관할하고 있다.

가평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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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도내에서 가장 농경지가 적은 군으로서 주민들은 농업의 불리한 조건 때문에 과반수가 자유업을 택하고 있다. 그리하여 행상을 비롯한 상업 방면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최근에는 양잠·축산이 성해 가고 있다. 산림은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져서 용재·신탄의 산출이 많았으나 그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일부에 밤밭이 남아 있어 옛날의 특산물로 명맥을 잇고 있다. 광산물로는 흑연·구리·형석·남정석·홍주석 등이 있으며, 이 지방을 상징하는 청평수력발전소가 있다. 소규모의 한지·도자기 공장이 있다. 전체 수입의 약 20% 정도가 관광수입이다.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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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면적의 대부분을 임야가 차지(84%)하고 있기 때문에 농경지는 협소하다(2.2%). 또 산간지역으로 농업에 불리한 지형조건 때문에 논농사보다는 밭농사 위주(총경지 면적의 62%)의 농업이 발달하였다. 주요 밭작물로는 콩·조·밀 등이 생산되며 한우의 사육과 양잠도 성하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잣·밤·대추·도토리 등이 생산되고 있어 농가의 소득원이 되고 있는데, 잣은 전국 생산량의 2/3를 차지할 정도이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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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밤·사과·포도·배 등이 유명하다.

가평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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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경춘선(京春線)이 군의 동남부 한강 연안을 따라 통하였으며 경춘가도도 이에 병행하고, 청평에서 조종천을 따라 포천 일동면까지 국도가 건설되어 있다. 북한강의 수운은 강원 홍천까지 이어져 수륙교통은 편리한 편이다.

가평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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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平邑

군의 중앙 동쪽 군계에 치우쳐 있는데 군의 행정·교통·상업의 중심지이며 경춘가도에 연한 목재·농산물의 집산지이다. 특히 꿀·밤·잣의 산출이 많으며, 과거는 서울의 신탄을 거의 이곳에서 공급하였다. 관광지로 경반리 계곡의 수확폭포와 용추폭포가 있고, 북한강을 따라 풍광이 좋아 중요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청평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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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平dam

군의 서남부 한강 우안에 위치하고 경춘선에 연하여 있으며 서울·춘천·포천 등에 연락이 편하다. 잡곡·가축·창호지 등의 집산이 성하고, 특히 1944년 청평 수력발전소가 건설된 후부터 유명해졌는데 이 발전소는 설비용량 7만 9,600kW, 평균 3만 5,000kW 출력의 대발전소이다. 여기서 생산되는 전력은 부평에 송전되는데 전력도 중요하지만 한강의 수위조절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맡고 있다.군내에는 청평댐을 비롯하여 현등사·농추폭·조종암과 대보단 등이 있으며 서울과의 교통이 편하여 경인지방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온다. 특히 청평댐에는 최근 수상 스키장을 마련하여 인기를 끌고 있으며 댐 안쪽에는 미국인 경영의 외국인 유원지가 더욱 유명하다.

청평호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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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平湖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회곡리 위치. 외서면 청평 3리와 설악면 회곡1리 사이에 위치. 청평댐 건설로 말미암아 형성된 인공호수로 넓고 잔잔하게 펼쳐진 수면이 특색으로 서울에서 열차·버스·승용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1일 관광 코스로 적격인 곳이다. 주위의 산과 호반의 맑은 물이 빚어내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울 뿐 아니라, 서울에서 불과 50km 떨어진 곳이므로 당일코스 관광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청평도 주변으로 오래된 호반유원지들과 별장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호수 북쪽에 위치한 청평페리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이용, 북한강을 거슬러오르는 뱃길은 운치를 더해준다. 호반에서는 수상스키를 비롯, 각종 놀이를 즐길 수 있고 숙박시설이 완비돼 있어 4계절 휴양지로 유명하다.

용추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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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湫溪谷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승안리 위치. 해발 900m의 칼봉산을 발원지로 형성된 용추계곡에는 자연의 형상이 용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와룡추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물이 맑기로 유명하다. 용추폭포를 시작으로 와룡추, 무송암, 탁령뇌, 고실탄, 일사대, 주월담, 청풍협, 귀유연, 농완개 등 옥계구곡이라 부르는 아홉 군데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유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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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양평군 옥천면 위치. 높이 866m.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과 우거진 숲, 풍부한 계곡 물이 마치 설악산을 보는 듯하다. 산 위에는 넓은 평지가 있고 눈앞에 용문산 주봉이 나타난다.

북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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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漢江

가평군은 전체 면적의 84% 이상이 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 발원하는 계곡과 하천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이들 중에는 유일한 직할하천인 북한강을 비롯하여 1개의 지방하천과 35개의 준용하천 등 모두 37개의 법정하천으로 이어져 있다. 이들은 모두 북한강으로 흘러드는 북한강 수계의 하천들로서 총 길이는 316.85km에 달한다.북한강은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강원도와 경기도 및 서울을 관류하여 황해로 흘러드는 전장 313km의 장강으로, 가평군을 지나는 북한강은 가평읍 개곡리에서 설악면과 가평읍의 경계를 이루며 흘러 외서면 대성리에서 끝나는 정장 32.35km의 강이다.

하판리 삼층석탑지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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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三層石塔地鎭塔

문화재자료 제17호. 가평군 하면 하판리 산 163. 고려 희종 때의 고승인 보조국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석등에서 불빛이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하고 수백년 동안 폐사되었던 사찰을 재건할 때 현등사 경내의 지기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일명 보조국사탑이라고도 한다.기층부가 없어지고 갑석 위에 초층 개반석, 2층 개신, 2층 개반석, 3층 개반석이 얹혔는데 상륜부는 없어졌다. 높이 1.88m.

월사집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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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沙集木版

유형문화재 제133호. 가평군 상면 태봉리 산 115-1. 조선시대 학자이며 문신이었던 월사 이정구(1564~16 35)선생의 문집목판을 장판각에 보존하고 있다. 선생의 자는 성징 호는 월사. 본관은 연안.

현등사 소장 봉선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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懸燈寺所藏奉先寺鐘

유형문화재 제168호. 가평군 하면 하판리 산163. 조선조 15대 임금인 광해군 11년(1619)에 봉선사에서 제작한 조선 중기의 범종으로 현재 현등사 법당 안에서 의식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단아한 모습의 장식석이 돋보이는 중종(中鐘)으로서, 쌍용(雙龍)이 어우러진 모양의 종뉴(鍾紐) 아래 포탄형의 종신(鐘身)이 연결된 모양이다. 종신의 외형선은 종의 윗부분으로부터 아랫부분을 향해 벌어지며 내려오는 선형(線形)을 그리고 있다.전형적인 한국종의 특징인 음통(音筒)이 없고, 종신에는 띠 장식이 둘러져 부분적으로 중국종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사실적인 조각 수법이나 뛰어난 풍만감, 짜임새 있는 표면구조, 생동감 넘치는 장식문양 등에서 우수한 범종(梵鐘)이다. 조선시대 범종 연구의 귀중한 자료.

가평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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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김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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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1658)

조선시대의 문신·학자. 호는 잠곡(潛谷). 1624년 문과에 급제한 후 부제학·영돈녕부사·영의정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소현 세자가 선양에 볼모로 잡혀가자 보양관으로 수행했고, 청에 사은사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경제 정책에 뛰어난 식견이 있어 대동법 실시를 주장했고, 이 문제로 김집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시헌력이라는 새 역법을 실시하는 한편, 교통 수단으로 수레를 만들게 하고 상평통보의 주조를 건의, 유통케 하였다. 그의 경제학은 유형원에게 큰 영향을 끼쳐 실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저서로 '잠곡유고', '구황촬요', '해동명신록' 등이 있다.

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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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6∼1431)

승려. 호는 함허·득통·무준(涵虛·得通·無準)이고 속성은 유(劉)씨이며, 본관은 충주(忠州).21세 때 관악산 의상암에 들어가 승려가 되고, 이듬해 회암사의 자초대사(自超大師)로부터 법요(法要)를 닦은 뒤 전국의 명산을 주유(周遊)하고 돌아와 수도에 전념하였다. 이때부터 공덕산의 대승사·천마산의 관음굴·불회사 등지에서 강설하고자 모산 연봉사(煙峰寺) 등에서 3년간 수도하였다. 1420년(세종 2) 45세 때 오대산에 들어가 여러 성인들에게 공양하고 월정사에 있을 때 왕명에 의해서 대자어찰(大慈御刹)에 머물다가 4년 이후 이를 사퇴하고 길상산·공덕산 등 여러 산을 편력하였다.가평 운악사 현등사에 머문 때는 세종9년(1427)이었는데 그는 현등사에서 3년간을 머물다가 세종 13년(1431) 회양산에 이르러 봉암사(鳳巖寺)를 중수하고 그곳에서 열반하였다.

김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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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1672)

자는 일정(一正). 호는 귀계·귀천(歸溪·歸川). 본관은 청풍(淸風)으로 잠곡(潛谷) 김육의 장남으로 가평군 외서면 청평리 잠곡동에서 태어났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4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으나 취임치 않고 후에 박사(博士)·설서(設書)로 있다가 홍문관으로 옮겼다. 그 후 병조좌랑이 되었을 때 다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합격하여 수찬(修撰)이 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한때 안변으로 귀양갔다가 1년 만에 돌아왔다. 효종조에 이르러 다시 수천이 되었다가 교리·이조좌랑·사복사정·대사헌·경기도관찰사·대사간·대사성·도승지 등 주요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현종조 초 공조참판으로 있었는데 아버지 김육이 생전에 호남지방에 실시토록 한 대동법의 시행에 많은 애로점이 있는 것을 한탄하고 아버지의 유지를 펴기 위해 호남 관찰사로 임명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대사헌·도승지를 거쳐 예조참판을 지냈고, 현종 3년(1662) 46세에 공조와 예조의 판서를 지내다가 병조판서 겸 수어사가 되어 병기·군량 등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군사훈련을 엄격히 실시하였다.그가 죽자 조정에서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충숙(忠肅)이라 내렸다.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도 명필이었으며 저서는 '귀계유고(歸溪遺稿)'가 있고, 김장생, 김식 등의 비문을 남겼다.

양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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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의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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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平-象徵物

양평군을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잣나무, 새는 까치이다.

양평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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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도의 동북부, 북한강과 남한강 사이에 위치하며 결정편암·화강편마암 등의 지질로 되어 있다. 면적은 878.28㎢, 인구 8만 2.921명(2001.12)이다. 태백고원의 연장지로서 대부분이 산악지대이며 그 중에 최고봉 용문산(龍門山:1157m)이 솟아 있고, 산록에 고찰 용문사가 있어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이와 같이 이 지괴(地塊)가 군 전역을 지배하고, 강남에는 양백산의 지괴가 있다. 용문산에서 발원한 용문천이 북서류하여 남한강에 합류하는데 풍치가 자못 아름다우며, 남한강 연안에 띠 모양으로 발달한 평야는 서쪽으로 갈수록 강을 중심으로 한 하안단구로 이루어져서 기름진 논농사 지역이 되고 있다.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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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에 위치한 까닭에 겨울과 여름의 기온 교차가 심한 내륙성 기후로 특히 겨울에는 서울보다 더 기온이 낮고, 강수량은 여름에 특히 많다. 연평균 기온 10.9

, 1월 평균 -6.2

, 8월 평균 26

, 최고 기온 38.2

, 최저 기온은 -26.3

, 연평균 강수량 1,300㎜이다.

양평의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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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

고구려 때부터 양근군(楊根郡) 또는 항양군(恒陽郡)이라고 불려오다가 신라 때에는 빈양군(濱陽郡)으로 고치고 고려시대에 와서 양근군이라 다시 불리었다. 조선시대에 지평군과 합쳐 지금의 양평군이 되었다. 1914년 관할구역이었던 남종면이 광주군에, 1942년 설악면이 가평군에, 1963년 여주군 개군면(介軍面)이 양평군에 편입, 1979년 양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1읍(양평), 11면(강상·강하·양서·옥천·서종·단월·청운·양동·지제·용문·개군)이 속해 있다.

양평의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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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業

농경지 면적이 좁은데다가 논이 적어 맥류와 기타 잡곡이 많이 산출되며, 부업으로 담배·낙화생 재배와 양잠을 많이 한다. 용문산을 중심한 산지 외에는 볼만한 임상(林相)이 없다. 그 밖에 약초 재배가 성하고 한강에서는 잉어가 많이 잡힌다. 광물에 있어서는 방연 광·금·섬아연광·석면 등이 산출된다.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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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면적은 총면적의 16%인 143.06㎢로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약간 우세하다. 옥수수·콩·감자·고구마·땅콩과 배추·무·고추·마늘 등의 채소류, 배·사과·포도 등의 과일 등이 생산되며, 축우와 양잠업도 성하다. 임야면적은 전체 면적의 약 75%이며 뽕밭 면적은 101ha이다.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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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타리버섯·팽이버섯·동충하초·산더덕·오이·상추·얼갈이·토종꿀·치커리차·둥글레차 등이 유명하다.

양평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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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

철도 중앙선이 군을 횡단하고 도로는 강릉가도와 안동가도, 홍천·속초·양양 등에 이르는 도로가 용두에서 분기되며 여주∼포천간 국도가 있어 여주·양평·포천·전곡·파주 등을 연결하고 있다. 또 한강의 수운이 있어 교통은 매우 편리하다.

양평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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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平邑

행정·교통·산업의 중심지이며, 홍천·인제·동해안 방면과 원주·영남 방면의 교통로의 분기점으로 군사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군내에는 기암 괴석과 울창한 수림을 이룬 용문산이 있는데 이산에는 선덕여왕 3년 원효대사의 개기(開基)에 의한 대찰 용문사가 있고 경내에는 수령(樹齡) 1,000년이 넘는 우리나라 최고의 은행나무(公孫樹:밑둘레 10.5m, 높이 12m)가 있다. 또 산중에는 영천 폭포가 있어 승경지를 이루어 많은 관광객이 모인다.그 밖에 사나사(舍那寺)·상원사(上元寺)·봉황정(鳳凰亭)·오로정(五老亭)·구사곡 약수(九寺谷藥水) 등 명승 고적이 많이 있다.

운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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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溪書院

문화재자료 제18호. 덕촌리(德村里) 계류(溪流)를 건너 서쪽 산 중턱 한적한 곳에 조영(造營)하였다. 재실(齎室) 한 채와 묘우(廟宇) 뿐으로 담장이 멸실되었던 것을 근래에 담장을 복원하였다.평평한 대지(臺地)의 좀 낮은 곳에 재실(齋室)을 건축하였는데, 팔작(八作)지붕으로 한식(韓式) 골기와를 얹었으며 정면(正面) 3칸(間), 측면(側面) 2칸 규모이다.

양근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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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根鄕校

문화재자료 제19호.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外三門)을 거쳐 경내로 들어가면 명륜당이 있고 그 안쪽으로 동서재(東西齋)가 배치되었으며, 내삼문(內三門)에 들어서면 중앙(中央)에 대성전(大成殿)이 있고 그 앞쪽으로 좌우(左右)에 동서무가 있어 비교적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향교(鄕校)라 하겠다. 명륜당(明倫堂)을 높직한 축대(築臺) 위에 세워진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맞배지붕에 한식 골기와를 얹고 좌·우측에는 방풍판을 달았다.다른 곳의 향교들과 비교할 때 전모를 갖추고 있는 향교로서 건물 배치나 건축양식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용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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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門寺

전통사찰 제47호.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이 친히 행차하여 참사하였다고 한다.고려 우왕 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1480)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 봉성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 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들이 불태웠다. 1982년 선걸 스님이 취임하여 대웅전·삼성각·범종각·지장전·관음전·요사·일주문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 부도 및 비와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은행나무가 있다.

사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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舍那寺

전통사찰 제48호. 사나사는 신라 경명왕 7년(923)에 고승인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제자 융문과 함께 창건(創建)하고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盧舍那佛像)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 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고려 공민왕 16년(1637)에 태고왕사(太古王師) 보우(普愚)가 140여 칸 규모로 중건하였으며,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사찰이 불타버린 것을 선조 41년(1608)에 단월(檀越) 한방손(韓芳孫)이 재건하였다. 영조 51년(1773)에 양평군내(楊平郡內) 유지(有志)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堂山契)를 조직하고 향답(鄕沓)을 사찰에 시주하여 불량답(佛糧沓)을 마련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에 비를 세웠다. 순종(純宗) 원년(1907)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義兵)들의 근거지라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그 후 여러 번의 재건을 거쳐 최근에는 1993년에 대웅전과 지장전을 재건하였다.경내에는 도유형문화재 제72호인 원증국사석종탑(圓證國師石鐘塔)과 도유형문화재 제73호인 원증국사석종비가 있다.

상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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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院寺

전통사찰 제49호. 창건연대는 뚜렷하지 않으나 세조(世祖)가 이 절에 거동하였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기록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 성찰(盛刹)로서 조선시대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398년에 조안화상(祖眼和商)이 중창(重創) 하였으며 세조 8년(1463)에는 왕이 직접 거동하였고 곧이어 중창불사를 행했으며 효령대군의 원찰이 되었다. 순종 원년(1907) 왜병이 이 지역에 집결해 있던 의병을 소탕하기 위해 불을 질러 법당만 남겨놓고 모두 타 버렸는데 1918년에 주지 최화송 화상과 화주 차상원이 큰방을 복원하였다. 이어 1934년에 주지 최경언이 중수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모두 불타버렸다. 1969년 주지(住持) 덕송(德松)이 초막(草幕) 삼 칸을 짓고 복원에 착수했으며 1970년에는 주지 경한니(鏡漢尼)가 취임하여 요사(療舍)와 삼성각(三聖閣), 대웅전(大雄殿), 용화전(龍華殿)을 차례로 복원하였다.

이항로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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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恒老生家

유형문화재 제105호.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인 이항로(1792∼1868)선생이 살던 곳이다. 순조 8년(1808) 한성시에 합격했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는 주전론을 적극 주장하였고, 종조참판 우부승지를 지냈으며 내무대신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화서집, 화동역사합편강목 등이 있다. 이 집은 그의 부친 때 지은 집으로 약 300여 년이 되며 그가 태어나서 일생을 보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