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북부지방/황해도

황해도의 자연 편집

-自然

위치 편집

한반도의 중앙 서부에 위치하며 서한만과 경기만 사이에 돌출한 반도부와 동체부로 되어 있는데, 경위도는 동경 124 34 126 59 , 북위 37 36 39 06 에 해당된다.

지질 편집

황주·사리원·신원리 이동은 상원계(祥原系), 반도부 해안과 곡산 지방은 조선계, 반도의 기부에서 도의 남부 연백지방에 걸쳐서는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이 각각 발달하여 있다.

지형 편집

고조선계에 속하는 대단층 산맥이 동서로 3줄기, 남북으로 4줄기가 거의 직교(直交)하여 지형이 매우 복잡하다. 즉 동서 방향으로는 멸악·수양(首陽)·조일령(朝日嶺) 등 산맥이 뻗어 있는데 특히 멸악산맥은 본도의 중추로서 본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중요한 산맥이다. 또 남북 방향으로는 구월(九月)·자모(慈母)·육장현(六將峴)·마식령(馬息嶺) 등 산맥이 뻗어 지형은 대체로 동·서부가 높고 중앙이 낮다.주요 하천은 예성강(禮成江)과 재령강(載寧江)인데 유역에는 연백평야와 재령평야를 이루었으며 우리나라 굴지의 산미지대이다. 해안선의 총연장은 1,618㎞인데 웅진반도 이남은 특히 리아스식 해안이다. 연안은 조석의 차가 크고 수심이 얕아 간석지가 널리 발달하여 해안선에 비해 양항이 적고 부근에는 대소 130여 개의 도서가 산재하여 있다.

기후 편집

해안지방은 황해 해류의 영향으로 비교적 온화하고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기온의 교차가 커진다. 해안지대의 연평균 기온은 10 11 인데 내륙지방은 9 10 가 되고 연교차는 전자가 29 31 인 데 비해 후자는 34 이상이 되는 곳도 있다. 강수량은 평균 900㎜ 정도로서 소우지대에 속한다.

멸악산맥 편집

滅惡山脈

평안남도·황해도·함경남도·강원도의 도계부근, 낭림산맥의 남부에서 시작하여 서주하면서 멸악산(816m)·장수산(長壽山:747m)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서부는 장연(長淵)의 불타산맥(佛陀山脈)이 되어 장산곶(長山串)을 이루고 그 말단은 바다에 빠졌다가 그 여세가 다시 중국의 산둥반도에 나타난다. 지질은 주로 상원계(祥原系)의 규암(硅岩)이고 그 북사면은 주요 광산지대를 이루고 있다.

마식령산맥 편집

馬息嶺山脈

낭림산맥(狼林山脈)의 남쪽 마식령에서 갈려,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계를 이루면서 서남방향으로 뻗은 길이 150㎞, 높이 500 1,400m의 산맥이다. 이 산맥은 본래 한 줄기의 산맥이었으나 임진강의 본지류에 의해 세 줄기로 갈라졌다.산맥 북부는 1,300 1,500m이며 심한 협곡을 이루고 있다. 그 중 임진강 본류와 그 지류 고미탄천 상류 계곡은 양쪽이 병풍 같은 절벽을 이루어 이름난 산악지대이다. 이 산맥 중에는 백암산(1,229m)·제두산(1,340m)·추애산(1,529m) 등 이름난 산이 있다. 이 산맥 일대는 고도에 비하여 기온이 낮다. 그러므로 식물상이 갑산 일대와 비슷한 것이 특징이다.

구월산 편집

九月山

안악·신천·은율 등 3군에 걸친 해발 954m(주봉:사황봉)의 산인데, 주요 봉우리들은 주가봉·단군봉·인황봉 등 909개 봉이라 전해지는 수많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산중에는 용연폭포를 비롯하여 수많은 폭포가 있고 부연(釜淵)·마연(馬淵)·요연(腰淵) 등 산수의 절경과 7년 왕가물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석담(石潭)·고요연(高腰淵) 등이 있다. 또 신라 때 발견되었다는 달천 온천이 있으며, 또 신라 애장왕 때 창건했다는 패엽사(貝葉寺)를 비롯하여 월정사·흥률사·낙산사·달마사 등 많은 절이 있다. 최고봉 사황봉에는 과거 황해도 5대 산성의 하나이며 둘레가 4㎞에 달하는 9월산성의 옛터가 있다. 옛날에는 군기와 군량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그 밖에 유명한 청자기를 굽던 고려 요지(窯地)와 아름다운 오경루(五更樓)가 있다.

장수산 편집

長壽山

황해도의 중앙부를 동서 방향으로 뻗고 있는 멸악산맥 중에서 두 번째로 높은 명산이다. 이 산중에는 남북주하는 세 갈래의 대단층곡이 있으며 서쪽의 것을 십이곡(12曲), 가운데 것을 벽암계(碧巖溪), 동쪽의 것은 장수산성의 본거지로 모두가 풍경이 가절하여 황해금강이라는 호칭이 있다. 주봉 보적봉(747m) 외에 보장봉·관음봉 등과 세심·약수·수양 등 폭포가 있다. 그 밖에 굴과 약수도 있고 고적으로는 현암(懸庵)·묘음사·장수산성지 등이 있으며, 묘향사는 이 산 중에서 가장 크고 역사가 오랜 절이다.

재령강 편집

載寧江

재령평야를 관류하는 강인데 그 길이는 129㎞이고 유역 면적은 3,671㎢이다. 신천군의 지남산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다가 송림 남쪽에서 대동강에 합친다. 또 이 강은 은파천·서흥강·서강 등 지류를 합하여 수량이 연중 풍부하다. 이 강은 우리나라 제2의 대평야를 형성하여 관개 수운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한다. 300t급의 배가 38㎞ 상류 상해까지 소항하여 재령철산의 철광을 송림제철소에 운반하고, 또 남포 방면으로 비료·잡화의 운반선 왕래가 빈번했다.

재령평야 편집

載寧平野

재령강에 의하여 이루어진 넓은 충적평야와 주변의 구릉성 평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적은 약 500㎢로서 호남평야 다음가는 대평야이다. 지사상(地史上)으로 보면 멸악산맥·구월산맥·평양·황주준평원간에 만입한 대함몰지,즉 고재령만(古載寧灣)이었는데 이 저함지(低陷地)가 재령강·서흥강 등의 퇴적작용과 서해안의 융기에 따라 낮고 기름진 평야가 되어 오늘날에는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 평야의 대부분은 해면상 20m가 넘는 곳이 적고 만조시에는 수면하 3m로 되는 저습지까지도 있다. 재령·신천은 평야의 중심지이고 특히 신천에서 쌀이 많이 난다. 옛날 조선 왕실에 바치던 재령미는 품질이 우수하여 평택미와 함께 그 성가(聲價)가 높았다. 구릉평야에서는 밀·콩·면화·담배가 나고 철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광산물이 산출된다. ==예성강 禮成江

언진산(彦眞山)에서 발원하여 신계(新溪)·남천(南川)을 지나 경기도와의 도계에서 경기만에 이른다. 강의 길이는 173㎞이고 그 중 가항 거리는 65㎞, 유역 면적은 4,049㎢이다. 주요 지류는 지석천(支石川, 44㎞)·구연천(九淵川, 58㎞)·누천(漏川, 42㎞)이며 유역의 연강수량은 1,100㎜ 정도이다. 유역 평야의 관개용수로서 매우 중요하다.

몽금포 편집

夢金浦

장연군(長淵郡)에 있는 아름다운 포구로서 북으로 초도, 남으로 장산곶(長山串)이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다. 남북 2㎞, 동서 8㎞에 달하는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앞에는 모래산이 가로 막고, 뒤로는 낙락장송이 병풍처럼 둘러서서 백사청송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6·7월이면 해당화가 붉게 피어, 이른바 3합(백사·청송·해당화)의 조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몽금포의 절경은 금사낙조(金砂落照)이며 승선봉(勝仙峰)에서 바라보면 형용키 어렵다. 여기서 나는 모래는 유리 원료로 쓰인다.

구미포 편집

九味浦

장산곶 남동쪽에 있는 포구이며 대동만 북쪽 해안에 불타산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대동만 중심에 거북이 꼬리모양으로 튀어나온 봉대(烽臺)를 기점으로 남은 포구며, 북은 장산곶까지 16㎞나 되는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이 청송백사장은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며 외국인의 별장지대였다. 유리의 원료인 규사가 많다.

연혁 편집

-沿革 우거왕(右渠王) 때에 한무제(漢武帝)가 침략하여 기원전 108년 우리 땅에 4군을 설치하여 황해도의 북부는 낙랑군(樂浪郡), 남부는 진번군(眞蕃郡)에 속하였다. 그 후 낙랑군이 진번·현도를 병합함으로써 황해도 전역이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다. 전한 말(前漢末) 왕망(王莽)이 신(新)을 세우고 낙랑군을 일시 낙선군(樂鮮郡)으로 고쳤다. 후한 광무제 6년(A.D.30) 다시 낙랑군으로 되고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여 황해도의 대부분은 이에 속하게 되었다.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을 멸망시켜 421년 만에야 중국으로부터 우리 국토를 수복하였다.이후 황해도는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어갔다. 고구려는 황해도 지역에 동홀(冬忽) 이하 11군홀(郡忽)을 두고 230여 년 통치하였다. 그러나 668년 나당(羅唐)연합군에 멸망되어 일시 당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치하에 있었다. 676년에는 신라의 영유가 되어 한주(漢州)에 속했다. 신라는 이 지방을 중시하여 장구진(長口鎭)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때에는 자비령(慈悲嶺) 근처에 장성(長城) 300리를 쌓았다고 한다. 효공왕(孝恭王) 5년(901) 궁예(弓裔)의 후고구려 소유가 되고, 918년 고려 태조(太祖)가 건국함에 다시 고려 영토가 되고, 성종(成宗) 14년(995) 전국을 10도로 구획하여 관내도(關內道)라 하였다. 현종(顯宗) 때 서해도(西海道)로 개칭하고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황주목(黃州牧)을 두어 군현을 다스렸다. 원종(元宗) 10년(1269)에는 자비령(慈悲嶺) 이북 수안·곡주·황주·은율·안악·봉산 등은 원(元)의 동령부(東寧府)의 소속이 되었다가 충렬왕(忠烈王) 16년(1290)에 다시 우리 국토로 수복되었다.조선 태조(太祖) 4년 풍해도(豊海道)로 개칭했으나, 태종(太宗) 17년(1417) 비로소 황해도로 고치고 해주에 관찰사를 두어 2목 4도호부 7군 77현을 관할하게 되었다. 1895년 23부제(府制) 실시에 따라 해주부(海州府) 치하에 해주·연안·백천(白川) 등 16군이 속하고, 황주군(黃州郡)은 평양부(平壤府)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토산·평산 등 6군은 되돌아와 23군이 되고, 해주에 도청을 두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17군으로 되고 1938년 해주읍(邑)이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1부 17군이 되었으며, 1945년 해방 당시 1시 17군(벽성·금천·연백·평산·신계·장연·송화·은율·안악·신천·재령·황주·봉산·서흥·수안·곡산·옹진)이었고, 현재 대·소연평도·우도·백령도(白翎島) 및 대·소청도(大·小靑島)를 제외하고는 미(未)수복지구로 남아 있다.

산업 편집

-産業

예로부터 하천과 연해를 통한 무역으로 상업을 하여 왔으며, 연철(鉛鐵)·면화·미곡의 생산과 더불어 어업 및 제염업에도 힘써왔으나, 도내에는 재령평야·연백평야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평지가 곳곳에 잘 발달하여 농업이 주를 이루었다.

농업 편집

평야가 많아 경지율이 약 34%로 전국에서 제일 높으며, 특히 연백·신천·재령·안악 등의 평야지방에서는 50 60%에 이른다. 경지면적은 약 60만ha로서 전국의 약 14%를 차지하며, 농가 1호당 경지면적도 2.4ha에 달하여 전국에서 1위였다.연백미·재령미는 품질이 우수하여 예로부터 왕실의 공어미(貢御米)로 쓰여왔고, 특히 재령미는 북률무사미(北栗無砂米)로 유명하였다. 재령평야는 원래 갈밭으로 덮인 저습지였으나 1920년대에 이르러 재령강의 곡류(曲流)를 바로잡고 배수와 관개에 노력하여 옥답으로 바꾸었는데, 재령강상류의 안녕저수지(安寧貯水池)와 서흥강 상류의 재신저수지는 관개용 대저수지이다. 연백평야는 해안지방을 제외하면 저평하지 않다. 그래서 종래에는 밭으로 많이 이용되었으나, 멸악산 남쪽 산록에 연해저수지·황해저수지를 구축하고 해안에 대규모 제방을 쌓아 간척사업을 벌인 결과 논의 면적이 크게 중가하였다. 주요 전작물은 조·기장·수수·콩·팥·밀 등이다.기후관계로 2모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3종류의 작물을 2년에 3번갈아 수확하는 2년3작농법이 채용되고 있으며, 혼작·간작 등의 경종법(耕種法)도 전역에 보편화되었다. 특용작물로는 면화·대마·인삼·담배 등이 많이 재배된다. 풍토가 면화재배에 적합하여 평안남도와 더불어 재래면의 2대 산지였는데, 1940년대에 들어와 완전히 육지면으로 바뀌었다.이밖에도 대마와 담배는 동북부에서 재배되며, 인삼은 금천·서흥 지방에서 많이 재배된다. 과일로는 사과·배·복숭아·밤 등이 많이 재배된다. 황주지방은 일조량이 많고 구릉지는 배수가 양호하여 사과재배에 알맞다. 황주사과는 국내는 물론 만주·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명성이 높았는데, 이후 재배지역은 황주를 중심으로 하여 봉산·평산·은율·송화 등지로 확산되었다.동북부 산간지방은 양잠업이 성하여 가내공업으로 이루어지는 명주의 소산지이다. 축산업도 활발하며 북부 산간지역은 소사육지로 유명하여 광복 전에는 연간 약 2만 마리를 일본 등지로 수출하였다.

수산업 편집

서쪽과 남쪽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1,600여 ㎞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으며, 연해의 수심이 얕고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므로 양식과 어업에 알맞다. 대표적인 수산물 어종은 조기로서, 연평도 근해는 우리나라 최대의 조기어장이다. 성어기에는 전국에서 수천 척의 어선들이 운집하여 파시(波市)를 이루며 대부분이 경인지방으로 공급되는데, 연간어획량은 7,000여 톤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이밖에도 새우·갈치·민어·해삼 등이 많이 잡히고, 용호도(龍湖島)를 중심으로 한 옹진반도 연안에서는 김양식이 성하다. 또한, 연안지방에서는 간척에 의한 대규모의 염전이 조성되어 있다.

광업 편집

각종 유용광물의 부존이 많으며 주요 광물은 금·은·철·석탄·텅스텐·형석·아연·규사·중정석·석면·붕광(硼鑛)·각종 희유 원소광 등이다. 금은 수안홀동(隧安忽洞)·수안·옹진 등 광산이 유명하다. 철광은 하성(下聖:재령군)을 최대 광산으로 하고, 재령(載寧)·은룡(銀龍:재령군)·은율(殷栗)·송림(松林:황주군) 등 광산이 있고, 갈탄은 사리원 탄전에서, 텅스텐은 단연 타도의 추종을 불허하며, 곡산군의 기주·백년 광산에서 많이 산출된다. 형석은 물개(物開):평산군)·은적(銀積:재령군)·하성 등 광산에서, 중정석은 은적·은율·안악 등 광산에서, 석면은 평산·신계 등 각지에서, 규사는 순위도·몽금포·구미포 등 해안에 많이 있다. 아연광은 은적광산에서, 희유원소(稀有元素)광은 적암(積岩:평산군)·소연평도·홀동·해월 등지에서 난다.

공업 편집

풍부한 농산자원·지하자원·노동력 등의 호조건을 갖추었으나 교통의 불비로 부진한 상태에 놓여 있다. 공업 중심지는 첫째, 해주 중심의 중화학과 식품공업 지역이다. 즉 화약·시멘트·도자기·조선·제련·제철·제지·양조·정비·제분공업 등이고, 다음은 사리원을 중심한 식료품·섬유공업과 요업지역이다. 즉 조면·제사 제분·시멘트 등 공업이다. 셋째 지역은 송림 중심의 중공업지역이다. 즉 제철·제강·인조비료·코오크스 등 공업이며, 기타 지방에는 농산 가공의 제사(서홍)·양조·정미업 등의 소규모 공장이 산재해 있을 따름이다.

황해도의 교통 편집

-交通

주요 종단 국도는 철도 경의선을 따라 도의 중앙부를 종관하는 선과 금천·신계·곡산·평남 양덕방면으로 북상하는 도의 동부선이 있으며, 남천에서 신계·수안·평양 방면으로 통하는 선과 해주에서 재령·남포 방면으로 가는 선이 중요하다. 횡단 국도로는 옹진에서 해주·연안·토성에 달하는 선과, 장연에서 해주·남천에 달하는 선이 중요하다.철도는 1905년에 개통된 경의선의 경의가도와 병행하여 부설됨에 따라 신막·사리원 등의 신흥교통취락이 성립되었으며, 그뒤에 부설된 사리원 장연간의 사장선(沙長線), 사리원 해주간의 토해선(土海線), 해주 옹진간의 해옹선(海甕線, 일명 黃海線) 등은 산업지대를 관통하고 있다. 예성강·재령강의 수운교통은 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쇠퇴하였으나 그 이전에는 물자수송에 지대한 구실을 하였다. 예성강 연안의 하항(河港)은 벽란도·조포·한포 등이며, 재령강 연안의 하항은 상해포·해창·신환포 등이다. 특히 재령강은 재령평야의 풍부한 농산물과 철광석의 수송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해상교통은 고려시대에 중국·일본 등지와의 연락로로 많이 이용되었으며 근대적인 개항장은 해주뿐이다. 이 밖에도 겸이포·나진포·구미포 등의 양항이 있다.

황해도의 관광 편집

-觀光

황해금강(黃海金剛)이라 일컫는 장수산, 곡산군 선암에서 평남 양덕까지의 해서금강, 서흥군 귀진사(歸眞寺) 부근의 소금강, 평산군의 태백산성, 해서의 웅악(雄岳) 수양산, 단군 전설이 깃든 한국 4대 명산의 하나인 구월산, 역사가 서린 정방산(正方山)의 기경(奇景), 백사 청송(白砂靑松)의 장산곶과 구미포·몽금포 해수욕장, 배천·연안·평산·신천·삼천·달천·안악·송화 지방의 온천군(溫泉群) 등의 명승지와 대방태수 장무이묘, 봉산 휴류산성, 당토성, 황주 유물 포사탑 등의 고적이 있다. 또한 심원사 보광전, 성불사 극락전, 응진전, 광조사 진철대사 보월승공탑비, 학림사 오층석탑 등 많은 보물이 있어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申 鉉 德>

황해남·북도 편집

8·15 광복 후 수차에 걸쳐 행정 구역을 개편한 북한은 1954년 10월 30일 재령강을 경계로 종래의 황해도를 양분하여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를 신설하였다.

황해남도 편집

黃海南道 1개시(해주), 19개 군(벽성·강령·옹진·태탄·용연·장연·삼천·송화·은율·은천·안악·신천·재령·연안·배천·신원·평천·청단·과일), 408개 리로 되어 있으며, 강령·옹진·청단·배천·연안군은 38선 이남에 위치하며 ‘신 해방지구’라 부르고 있다. 면적은 8,294.18㎢, 인구 225만 명(2000.1)으로 추정된다.동쪽은 황해북도·개성직할시, 서남쪽은 황해, 북쪽은 남포직할시와 접해 있다. 도청 소재지는 해주시이다.

자연 편집

조선계에 속하는 수성암(水成岩)이 널리 분포하며 해주에서 구월산에 걸친 동쪽과 연백 서북부는 시생대의 회색 화강편마암이 발달하였다. 전 지역에 걸쳐 평야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서쪽에 구월산맥, 불타산맥, 동쪽에 수양산맥이 뻗어 있다. 도의 북부에서 대동강(大同江) 하류가 남포직할시와 마주하며 동서방향으로 흘러 황해로 흘러든다.

기후 편집

해안지대와 내륙지대의 기온차가 크다. 1월 평균 기온 -3 6 , 8월 평균 기온 23 25 고, 연평균 기온은 9 11 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800 1,300㎜이다.

산업·교통 편집

북한에서 가장 따뜻한 지역으로, 12만 평의 간척지를 갖춘 북한의 곡창지대이다. 경지 면적은 북한 전체 경지 면적의 13.3%로 그 가운데 논 50%, 밭 35%를 차지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보리·콩 등이며 재령·신천·안악 등지가 주요 쌀 생산지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수산업도 성하며 공업은 해주시를 국제무역항으로 지정, 이곳을 중심으로 공업지구가 조성되었다. 주요어장은 각회도·호차·몽금포·초도 일대이며 특히 멸치·까나리가 많다. 또한 은율광산에서는 연간 15만t의 철광석을 생산한다.주요 교통수단은 철도로 배천선(장방 은빛)·황해청년선(사리원 해주)·옹진선(해주 도원)·은율선(은파 철광)·장연선(수교 장연)·부포선(신강령 부포) 등의 철도가 가설되어 있다.주요 도로는 해주 재령 사리원 사이, 해주 장연 룡연 사이, 해주 배천 개성 사이, 해주 평천 평산 사이, 해주 안악 제도 사이, 안악 신천 태탄 사이, 벽성 옹진 강령 사이의 길이다. 황해남도에는 해주항을 비롯하여 부포·제도·룡호·몽금포·구미포 등 항들이 있다. 재령강을 통한 강하천 운수도 있다.

관광·유적 편집

북한의 5대 명산 가운데의 하나인 구월산을 비롯 황해 금강이라 불리는 장수산, 용연 반도의 몽금포 바위 등 명승지가 많다. 고구려시대의 해주수양산성·안악고분군, 고려시대의 옹진군본영리화산산성·신천군자혜사·해주 5층탑·해주다라니석당·신광사 무자비와 안악월정사 등이 있다. 또한 신천·옹진·연안·배천·평천·송화·삼천·은천 등에 온천이 있으며 고려시대의 얼음창고인 석빙고를 비롯한 고인돌 등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이 많다.

황해북도 편집

黃海北道

해방 후 1954년 황해도와 황해남도로 갈라지면서 2개 시(사리원·송림), 14개 군(황주·봉산·연탄·은파·서흥·순안·연산·심평·곡산·신계·평산·인산·토산·금천), 277개 리로 되어 있다.북동부 평안남도, 동부는 강원도, 서쪽은 황해남도, 남쪽은 개성직할시와 접해 있다. 면적은 8,153.70㎢, 인구는 179만 3,000명(2000.1)으로 추정되며, 북한 인구의 7.4%를 차지하고 있다. 도청은 사리원시에 있다.

자연 편집

상부원생대층·하부고생대층·중부고생대층·중생대층과 신생대 제3기 층 및 제4기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암석은 흑운모편암·결정질편암·석회암·점판암·화강암·석영반암·화강반암이다.북쪽에는 강동산맥(江東山脈), 동쪽에는 아호비령산맥이 남북으로 뻗었으며, 중부와 남부에 언진산맥(彦眞山脈)·정방산맥(正方山脈)·멸악산맥이 동서로 뻗어 있으며 동부지역이 높고 남서부쪽이 낮다. 언진·멸악산맥에는 언진산(118m·대각산(1,278m)·멸악산(818m)·정방산(481m) 등이 솟아 있다. 도내의 하천으로는 북서부 경계를 흐르는 대동강과 그 지류인 재령강·남강·황주천·매상강 등과 동부를 흐르는 예성강(禮成江) 등이 있다.

기후 편집

황해 해류의 영향으로 해안지방은 온화하고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기온의 교차가 커진다. 연평균 기온은 10 11 . 내륙지방은 9 10 이고 연교차는 29 31 내륙지방은 34 이상이 될 때도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900 1,400㎜인데 지역적 차이가 많다.

산업·교통 편집

지형에 따라 황주·봉산 등 쌀 생산지와 인산·연산 등 밭작물 지대로 나뉜다. 총 경지 면적은 도면적의 약 24%이고 그 가운데 논이 약 25%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밀·보리·고구마·콩 등이다. 도내에 많은 광산이 있으며 채광과 함께 제철공업이 성하다. 공업은 세계적 규모의 중석광산인 만년광산을 비롯하여 홀동광산·수안광산 등에서 금·은·납·아연·중석 등의 채굴이 활발하며 ‘황철’로 불리는 송림시의 황해제철소는 청진의 김책제철소와 함께 금속기지의 중추지역이다.도내에는 평부선(평양 개성)과 청년이천선(평산 세포)· 황해청년선(해주 사리원)·은율선(은파 철광)·송림선(황주 송림) 등의 철도가 있으며 평양 개성고속도로와 평양 원산고속도로를 비롯한 도로가 있다.

관광·유적 편집

사리원의 정방산은 기암 절벽의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며 유명한 절 성불사가 있다. 또 수안군 수천약수와 신계군 신교약수 등의 약수터가 있다. 평산군 산성리의 태백산성, 봉산군 지탑리 유적, 연탄 고인돌 등의 사적과 성불사·성불사 5층탑·연탄군 심원사 등의 국보가 있다.

사회·문화 편집

교육기관으로 사리원시를 중심으로 농업대학·지질대학·의학대학·제1사범대학·제2사범대학·교원대학·공산대학을 비롯하여 각 분야별 고등전문학교가 있고, 문화시설로 사리원중앙박물관·중앙농업박물관과 사리원청년경기장·송림경기장이 있다. 관광명소로는 사리원의 정방산·경암산·서홍호·남강쌍절벽 등의 명승지와 수안군 수천약수와 신계군 신교약수 등의 약수터가 있다.

해주시 편집

해주의 자연 편집

황해남도의 남해안 중앙에 위치하며, 시생대 형성의 화강편마암 지질로 되어 있다. 북에 수려한 수양산을 등지고, 서에 선리산(仙利山:善女山)을 끼고, 남에 백호상(白虎狀)의 남산(南山)을 안은 ㄷ자형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광석천(廣石川)의 범람원과 단구 위에 시가지가 발달하고, 한편 남산을 넘어 더 남쪽으로 리아스식의 해주만을 안고 있다. 또한 그 중앙에 용당 반도가 돌출하여 대안의 진포반도(벽성군)와의 사이에 좁은 용당 목을 이루어 해주만을 2분하며, 서쪽으로 깊이 만입한 취야만을 분리한다. 해주항은 이 반도 돌단부에 만든 부동항이고, 동측의 정도(鼎島)를 인공으로 육계도화(陸繫島化)하여 방파제를 삼고, 반도 동서 만입부에는 석천포와 결성포의 어항이 있다. 해주의 지형은 한마디로 산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는 곳으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경승요해(景勝要害)의 땅으로 신라 이래 정치·군사상의 요충지로 중시되어 사적이 많다. ====기후====위도에 비하여 온화하고 공기가 맑아 마산·진해·여수 등과 더불어 전국적인 보양도시로 알려져 있다. 연평균 기온은 10.7 , 1월 평균 -5.3 , 8월 평균 4.7 , 연강수량은 1025.9㎜이다. 총 강수량의 60% 이상(622.1㎜)이 여름(6·7·8월)에 집중하고, 반대로 겨울(12·1·2월)은 4%(40.3㎜)에도 미달되는 건조기를 나타낸다.

해주의 연혁 편집

고조선 이후 대방군(帶方郡)에 속하였고, 고구려시대는 내미홀군(內未忽郡)·지성(池城)·장지(長池)라 부르고, 신라 문무왕(文武王) 이후 한주(漢州)에 속하였다가 경덕왕(景德王) 21년(762) 폭지(瀑池)라 개칭하고 지성을 쌓아 대륙방면에 대한 전위부(前衛部)로 중요시되어 왔다. 고려 태조(太祖)는 본 시가 바다에 임한 까닭에 해주(海州)라 사명(賜名)하고 성종초에 목(牧)을 두었으며, 이어서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현종(顯宗) 때에는 절도사를 폐하고 4도호부(都護府)의 하나인 안서(安西) 도호부를 두었다. 예종 때는 대도호부로 올리고 고종 때 목으로 환원하여 조선에 계승되고 광해군 때 일시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인조 원년 복구되고, 고종 32년(1895) 23부(府) 실시로 해주부가 되어 16군을 관하에 두었다가 1896년 13도(道制) 실시로 황해도의 도청소재지로 되었다. 그 후 1920년에는 지정면(指定面)이 되고, 1930년에는 읍(邑)으로, 1938년에는 부(府:市)로 승격하여 종래의 해주군은 벽성군(碧城郡)으로 개칭하여 분리하고, 1940년 개항장으로 지정되어 광복을 맞았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편집

8·15광복 후 북한은 시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였으며 1954년 황해도가 2개 도로 나눠지면서 황해남도 도청소재지가 되었고, 61년 청단군 영양리와 벽성군 신광리, 1965년에는 청단군 작천리·장방리가 각각 편입한 이래 지금의 행정구역은 25개 동, 4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명승 고적으로는 수양산과 산성 및 폭포·다라니 석당(陀羅尼石幢)·구층탑·청성묘(淸聖廟)와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사미정(四美亭)·지환정(志歡亭)·탁열정(濯熱亭)·부용당(芙蓉堂)·석빙고(石氷庫)·구제 유허비(九齊遺墟碑)·문묘·약마지(躍馬池)·옥계정(玉溪亭) 등이 있다.

해주의 산업·교통 편집

지리적 영향으로 일찍부터 상업·공업이 발달하였으며 1973년 해주항이 기존의 군항에서 국제무역항으로 확장되면서 북한 9대 공업지구의 하나가 되었다. 주요 공업으로 건재·화학·기계·금속조선·일용품·피복·유리·도자기 등이 있고, 특히 풍부한 양질의 석회석을 원료로 한 시멘트공업이 대표적이다. 인산비료·페인트·염료·유산·가성소다 등이 화학공업과 연결농기계·콤바인·트랙터 등의 기계공업도 알려져 있다. 농업은 남부 평야지대에서 주로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교외에서 채소와 배·복숭아·감 등의 과일이 생산된다. 또한 젖소·돼지·닭·오리 사육도 성하다. 대어장인 연평도가 해주만 앞에 자리하여 조기잡이가 성황을 이루며, 숭어·전어·민어·새우·굴 등의 어획도 많다. 특산물로는 해주먹, 장산곶(長山串) 부근 해저에서 채취한 돌로 만든 벼루가 있다. 예로부터 서울과 평양·중국 등을 연결하는 교통 요지로서 정치적·군사적 요충이 되어 왔다. 철도교통으로 해주 사리원 사이 해주선이 경의선에 연결되어, 해주에서 토성(土城)·개성으로 이어지는 황해청년선, 해주 옹진 사이의 옹진선 등이 있다. 또한 개성에서 옹진에 이르는 50번 국도와 재령(載寧)을 경유하여 사리원에 닿는 국도가 있다.

해주의 시황 편집

산자수명한 경승보양적 가치보다 본시의 발전은 지리적 제반 조건의 우수한 점에 기인한다. 즉 우리나라 서해안 중앙에 가까운 부동항으로 인천과는 경쟁의 위치에 있고, 중국 산둥(山東)반도를 지호지간에 바라보며 배후로는 무한한 농·광산자원을 갖고 있다. 전면에 연평(延坪)·용매(龍媒)의 풍어장을 안았을 뿐 아니라 교통망의 정비에 따라 멀리 관서(關西) 일대의 물자가 자유롭게 유통되어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하여 상공업이 융성했다. 경제·문화상으로는 서울권역과 평양권역의 접촉점이 되고 있다. 면적 74.47㎢, 인구 22만 4,454명(1991)으로 추정된다.

해주 다라니석당 편집

海州陀羅尼石幢

고려시대 불교미술의 탁월함과 예술정신의 깊이를 맘껏 보여주는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 황해남도 해주시 해청동에 있다. 다리니석당은 다라니경을 새겨 기둥처럼 세운 돌구조물을 말한다. 원래 우리나라에 네 개가 있었는데, 현재는 평북 용천 성동리에 있는 다라니석당과 해주 다라니석당만 남아 있다. 성동리 다라니석당과 해주 다라니석당은 하나의 통돌을 다듬어 세웠다.바닥단과 6각형 화강석 돌기둥과 세 층의 지붕으로 이루어졌고, 높이는 4.64m이다. 석당의 밑받침 부분은 연꽃무늬로 장식돼 있으며, 그 위의 6각형 화강석 돌기둥 전체엔 대불정(大佛頂) 다라니경이 음각돼 있다. 맨 윗부분엔 3중 옥개석이 놓여 있는데 각 옥개석 위에 귀꽃을 장식하는 등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준다. 석당의 머리부분은 지붕돌의 추녀 형태가 독특하며, 지붕돌은 그 받침돌을 석당몸돌보다 작은 6각형돌을 끼운데 비해 셋째 지붕돌의 받침돌은 동그랗게 다듬은 돌을 올려놓았다. 특히 옥개석의 날렵한 경사면은 마치 목조건축물을 연상시킬 정도이다.해주 다라니석당은 우리 선조들의 우수한 조형예술적 수법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로서 보존되고 있다.

부용당터 편집

芙蓉堂-

해주시 부용동에 있는 조선시대 누정 부용당터. 부용당은 아담하지만 탁월한 조형미를 보여주는 건축물로 알려졌으나 아쉽게도 6·25때 불에 타버렸다. 누정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주변의 연못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벽성군 편집

벽성의 자연 편집

황해도의 남부 해주만을 둘러싸고, 중앙에 해주시가 자리잡고 있다. 군의 북부 일대는 3조의 수양(首陽)산맥이 동서로 길게 뻗어 운달산(雲達山:581m), 중앙에 수양산(首陽山:雲留峯:945m), 서부에 달마산(達磨山:596m) 등 여러 고산준봉이 솟고 남사면에 동서 약 30㎞의 대단층애를 보이며 해안에 연하여 4 10㎞ 너비의 해안평지가 있고, 동쪽의 화양강, 서쪽의 광탄천을 비롯하여 어사천·읍천·신광천·취야천 등이 각각 유역에 충적평야를 이루고 있다. 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동부에 청룡반도, 서부에 장상(掌狀)의 동강(東江)반도의 돌출로 해주만이 깊숙이 만입하고 만구에 대·소 수압도·용매도·연평 열도가 있으며 해안선은 260㎞에 달한다.

기후 편집

남쪽 해안에 있어 해양의 영향과 북부 산지가 북서 계절풍을 막아 비교적 온난하고 강수량은 서쪽으로 갈수록 적어진다.해주만을 중심으로 연평균 기온 10 11 , 1월 평균기온 -5 , 8월 평균기온 24.9 이며 연강수량은 1,000㎜ 내외이다.

벽성의 연혁 편집

본래 마한의 영역에 들어 있다가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백제의 영역이었다. 313년(미천왕 14)부터는 고구려에 소속되어 내미홀군(內米忽郡) 또는 지성(池城)·장지(長池)라고 불렸다. 통일신라시대 757년(경덕왕 16)에 폭지군(瀑池郡)으로 개칭되었다. 해주라는 지명은 고려 태조가 이 군의 남쪽이 바다에 임하였다고 하여 내려주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16년(광해군 8) 해옥사건(海獄事件) 때문에 군으로 강등되었는데 이때 벽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해주군의 일부로 존속되어 오다가 1938년 해주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해주를 제외한 전지역이 벽성군으로 개편되었다. 광복 후에는 동강(東江)·송림·해남 등 3면이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2000년 1월 현재 행정구역은 1읍 19개 리로 이루어졌다.

교통·관광 편집

해안을 따라 동서로 뻗은 해옹선 철도와 사리원(沙里院)을 지나 남쪽으로 뻗은 경의선 철도가 해주에서 만나고, 50번 국도가 철도와 나란히 지나며, 도중에 국도가 취야와 해주에서 갈라져 각각 장연읍과 재령읍에 닿는다. 해주만 연안에 천연의 양항 해주항이 있고, 읍천포(?川浦)·연평도·진포(津浦) 등의 어항이 있으며, 군 동부의 화양강 상류 10㎞까지 배가 다닌다. 가좌면 취야리에는 취야정이 있는데 이율곡이 자주 오른 정자로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 수양산 북사면에는 고려 초에 지은 광조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조사는 고려 태조 때 국사(國師)로 국정자문에 응했던 진철대사(眞澈大師)가 입산했던 곳에 그의 제자가 창건한 절이다.그외 신광사(神光寺), 문헌서원(文憲書院), 수양산성(首陽山城), 진철대사 보월승공탑비 등이 있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편집

북한은 8·15 광복 이후 1읍(벽성) 19개 리로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벽성의 산업 편집

농산물로 쌀·밀·조·두류·소·돼지·고치 등 생산이 많고, 수산업에 있어서는 연평도와 용매도를 중심한 해역과 연안 간석지가 전국 굴지의 조기·새우·조개류의 어장으로 조기·새우는 물론 바지락·백합 등의 어획량이 많으며 숭어·민어·도미 등 어획도 많다. 5 6월 조기어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어 일대 장관을 이루고 파시가 열려 흥청된다. 광업으로는 해주광산(大車面)의 금·은광, 소연평도의 티탄철·자철·침철광 등이 저명하고 제조업으로는 취야·청단의 정미·양조업, 해주 부근의 도자기 공업 등이 있다. 군내 상업은 청단·취야·지경·죽천·온천·통산·충암(忠岩) 등 7개 정기시(定期市)를 통하여 상품 거래가 행해지고 그 중 취야·온천은 도내 5대 시장에 드는 큰 시장이다.

소현서원 편집

紹賢書院

황남 벽성군 석담리에 위치한 소현서원은 조선 중종·선조 때의 유학자인 율곡 이이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학문을 연구하던 곳에 세운 서원이다. 석담천 맑은 물이 아홉 구비를 돌면서 돌못(석담)을 이루고, 천하절승으로 이름난 석담구곡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명소인 다섯 번째 구비 ‘은병’에 자리잡고 있다.네모나게 둘러 막은 담장 안을 다시 앞 뒤 두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앞 구역에 강당이 있고 뒤 구역에는 사당이 있으며, 담장 바깥 앞쪽에는 청계당(서쪽)과 요금당(동쪽)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있다.강당은 정면 4칸 총길이 9.98m, 옆면 3칸, 총길이 6.25m의 간소한 합각식 건물이고, 정묘는 정면 3칸, 총길이 7.63m, 옆면 3칸, 총길이 5.82m로 2익공 주도리식 뱃집이다. 정묘 앞 오른쪽에 천 조각이 있으며, 천 조각 안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비문이 있다. 앞마당 한복판에는 소현서원 묘정비(廟庭碑)가 있는데 비면에는 서원의 유래를 상세히 서술한 글을 새겼고, 그 앞에 삼문(三門)이 있고 삼문 앞에는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 옆에는 요금정(瑤琴亭)이라는 정자건물과 서쪽으로 조금 높은 곳에는 청계당(廳溪堂)이 있고, 그 건너편에는 여러 채로 된 가묘(家廟)가 있다. 가묘는 이율곡이 거주하던 곳인데 우감실·좌감실 주택·행랑채·서재 등으로 범위는 453㎡이다.소현서원은 이율곡의 생가인 강원도 강릉에 있는 오죽헌,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 개성의 숭양서원(정몽주의 옛 집)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원의 하나로서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유산이다.

연백군 편집

연백의 자연 편집

延白-自然

황해도의 동남 경기만에 면하고, 북부는 구릉성 수양 산맥이 동서로 뻗어 목단산(牧丹山)·운두봉(雲頭峯)·황의산(黃衣山:479m) 등이 있으며, 그 지맥이 남쪽 해안 쪽으로 뻗어 중앙에 해성(海城) 반도를 돌출시켜, 해안의 단조(單調)를 깨뜨려 서쪽에 용도만, 동쪽에 호남만으로 분리시켰다.군의 남반부는 광활한 해안 평야로 동서의 군계를 이루는 예성강·화양강의 2대 강과 옥산강(玉山江·漢橋川)·나진포천(羅津浦川)·풍천(楓川) 등 하천의 퇴적 작용과 해저 융기로 이루어지고, 해안은 넓은 간석지가 있어 대규모의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연안 도서로는 역구(驛鷗)·신·구 증산 등 7개 도서가 있고 해안선 총연장은 136㎞에 달하며, 면적은 939㎢이며, 인구는 24만 5,000명이다.

기후 편집

기후는 해안에 면해 있어 비교적 온난하다. 연평균 기온 0.9 , 1월 평균 기온 -5.3 8월 평균 기온 25.4 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1,069㎜이다.

연백의 연혁 편집

1914년 연안·배천 양군을 합하여 연백의 군명이 된 것으로 연안은 본래 고구려 때 동음홀(冬音忽) 시염성(鼓?城)으로 불리다가, 신라 때 해고군(海皐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 염주(鹽州)로 개칭하였다. 이어서 영응(永膺)·석주(碩州)로 고치고, 충렬왕(忠烈王) 때 온주목(溫州牧)으로 승격되었으며, 충선왕(忠宣王)때 연안부(延安府)로 되었다. 조선 태종(太宗) 13년(1413) 도호부로 되어 경기도로부터 황해도에 이관되어, 1895년 다시 군으로 되었으며, 1914년 배천군과 평산군의 괘궁(掛弓)·목단(牧丹) 2면을 합하여 연백군으로 개칭했다. 1935년 연안면이 읍(邑)으로 승격했다. 1945년 해방 후 북위 38 선으로 남북 분계로 삼음에 따라 잠정조치로 벽성군의 추화·내성·일신·청룡의 4면을 합한 데 반하여, 38 선 이북의 운산·금산·목단의 3면 전역과 은천·화성·괘궁의 북반부를 잃고 경기도에 속했다가, 한국전쟁 이후는 미수복지로 되었다. 배천은 고구려의 도납현(刀臘縣) 치악성(雉岳城)으로 신라 때는 구택으로 고치고, 해고군(海皐郡)의 영현(領縣)이 되었으며, 고려초부터는 배천으로 고치고 조선 태종 13년(1413) 군으로 되어 내려오다가, 1914년 연안군에 합했다.관내 1읍(연안), 19면(호동·호남·해성·송봉·봉서·해룡·용도·괘궁·목단·금산·화성·금천·운산·유곡·해월·온정·도촌·석산·봉북)을 관할한다.

연백의 교통·관광 편집

해주에서 연안·배천을 통과하여 토성에 이르는 토해선(土海線) 철도와 해주와 개성간 50번 국도가 나란히 중앙을 동서로 지나고, 예성강·화양강 등은 대학포(大鶴浦)·벽란도(碧瀾渡) 등의 내륙수운으로 발달되었다. 연안읍을 둘러싸고 있는 약 5㎞의 연안읍성은 조선 명종(明宗) 10년(1555)에 쌓은 것으로, 2개의 옹성과 4개의 대문이 있으며, 성 주위에는 참호가 있다. 명승고적은 기운정(起雲亭)·남대지(南大池)·연성 대첩비(延城大捷碑)·강서사(江西寺)·탁영대(濯纓臺)·문회서원(文會書院)·지석군(支石群), 그리고 예성강과 벽란도·배천온천·연안온천·연백평야의 학군(鶴群) 등이다. ====북한 정권 수립 후====1952년 북한은 운산면·화성면·금산면·은천면·석산면·도촌면 등지와 해월면의 전역, 호동면 일부 지역이 합쳐서 배천군을 이루고, 용도면·괘궁면·호남면·붕서면·해성면·송봉면의 전역과 목단면·호동면·봉북면·해룡면·연안면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연안군을 신설하는 등의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다.

연백의 산업 편집

전국적 곡창으로 알려진 농업군으로 수리·간척·경지 정리가 잘 되어 쌀을 필두로 밀·두류·조·메밀 등의 곡류와 야채 생산이 많아 경인 지역의 보급지가 되고, 경기만 연안에서는 조기·새우·곤쟁이·뱅어·조개류의 어획이 있으며, 해성면 연안에는 유명한 대천일염전이 있다.광업으로는 해월(海月) 금광이 유명하고 금·모나즈석이 나고, 호남(湖南)광산에서는 창연(蒼鉛) 산출이 있었고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토탄(土炭:泥炭)으로 평야의 지하 0.6m 2m에는 토탄층이 있어 농한기에 채굴하며 일반 연료로 자급할 뿐 아니라 경인지방에 반출이 많았다.상업은 연안·배천·홍현(紅峴)·삽다리(揷橋:天臺)·탁영(濯纓)·성머리(城頭·花山)·석산(石山)·연안온천 등 8개 정기시를 통하여 거래되며, 그 중 연안 정기시는 전국 제일을 자랑했다. 제조업에 있어서는 비교적 큰 정미·양조시설이 여러 곳에 있고 토기·유기제조 등이 있다.

금천군 편집

금천의 자연 편집

황해도의 남동부 경기도와의 접경에 위치하고 동부에는 마식령(馬息嶺)산맥이 뻗어 북부에 학봉산(鶴鳳山:562m)·국사봉(國師峰:402m) 등이 솟고 남동부에 수룡산(秀龍山:717m)·대둔산(大屯山:555m)·제석산(帝釋山:244m) 등이 솟아 예성강(禮成江)과 임진강 유역을 분리한다. 군의 대부분은 마식령·멸악산맥 간의 하곡을 흐르는 예성강과 동으로부터 유입하는 구연천(九淵川) 유역에 속하고, 군 동부 일부가 임진강 유역에 속하고, 예성강 본류의 금천분지, 구연천 유역의 시변리분지, 임진강 유역의 토산(兎山)분지 등 평지가 있다.

기후 편집

기후는 비교적 도내 타지역과 같이 기온의 교차가 심한 내륙성을 나타내며 연평균 기온 10.2 , 1월 평균 기온 -7 8월 평균 기온 25.6 연강수량은 1,100㎜이다.

금천의 연혁 편집

금천·우봉·토산 등 3군을 합한 군으로 금천은 고구려의 굴압현(屈押縣)이고, 신라 경덕왕 때 강음(江陰)현으로 고쳐서 송악군(松嶽郡)의 영현(領縣)으로 되었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으로 독립하여 황해도에 이속되었으며, 효종 3년(1652) 우봉을 합하여 군으로 되었다. 1895년 개성부에 속하였다가 1896년 황해도로 되돌아 오고 1914년 토산군을 합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우봉은 고구려 때 우잠(牛岑)군, 신라 경덕왕 때 우봉군으로 고쳤다. 토산은 고구려 때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이고, 신라 경덕왕 때에 와서 토산으로 고쳐 불러오다가 1914년 군의 대부분이 금천군에, 미원면(美原面)은 신계순에 편입됐다.

교통·관광 편집

서부를 경의선(京義線) 철도가 남북으로 통과하여 계정·금천 등의 역이 설치되어 있다. 동부에는 시변리(市邊里)를 기점으로 하여 이웃인 연천·신계·남천·이천·금천으로 일등 도로가 통한다. 예성강을 이용하는 수운은 조읍이 중심지가 된다.명승지로 오조천 절벽의 영수병(映水屛), 임꺽정의 근거지였던 우봉(牛峰), 고려시대 왕들이 즐겨 찾던 쌍봉동 등이 있고, 고적으로 청룡포, 민충사(愍忠祠)가 있다. 청룡포는 이괄(李适)의 난 때 반군(反軍)과 맞서 싸운 충장공 이중로(李重老)가 전사한 곳이며, 민충사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려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은 건물은 없어지고 비석만 남아 있다.명승고적은 천신산·황의산·용암·삼성대·영수사·민충사비·원명사·문수암 등이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편집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외류면·합탄면·구이면·서천면·토산면·좌면이 토산군에, 동화면의 5개리가 평산군으로 넘어갔다. 또한 평산군 평산면의 전도리, 화산리, 장풍군 영북면의 3개리, 소남면 박연리 등이 금천군에 편입되었다. 54년 황해도가 황남·황북으로 갈라지면서 황북에 속하게 되었다. 93년 현재 1개읍(금천)·14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산업은 쌀·옥수수 등의 농산물 재배와 양 사육이 성하다.

금천의 산업 편집

농업이 전 산업을 대표하고 경지는 밭이 넓으나 쌀 산출도 많으며, 콩·조·밀·팥·인삼·담배 등의 전작물 산출이 많고, 특히 콩은 금천태(金川太)라 하여 성가가 높다. 또한 인삼재배는 개풍군(開豊郡)의 인삼지대의 연장지대로 도내 제일의 재배지이다. 이 밖에 양잠·목우도 많다. 지하자원은 지질이 조선계·평안계 등의 석회암층과 시원대의 편마암층이 분포되어 석면·몰리브덴·수은·진사(辰砂)·사문석(蛇紋石) 등이 난다.

평산군 편집

평산의 자연 편집

平山-自然

황해도의 남동부 내륙에 있고, 군의 북북동-서서남 방향으로 멸악산맥이 뻗어, 주봉(主峯)인 멸악산(滅惡山:816m)을 비롯하여 금동산(金洞山:524m)·주지봉(主之峰:712m)·운달산(雲達山:581m) 등 산이 있으며, 그 여파의 구릉성 산지가 남동부로 향하여 완경사하고, 하천은 동부 군계를 예성강이 곡류하면서 남류하고, 군내를 서류하는 누천(漏川)·남천(南川)의 물을 모은다. 서부에는 재령강의 지류 은파천(銀波川)의 상류와 화양강(花陽江)의 상류가 뻗어 있다.평지는 예성강 유역의 평산분지·누천분지를 비롯하여 각처에 침식분지가 산재해 있다.

기후 편집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 기온 10.5 , 1월 평균기온 -6 , 8월 평균기온 25.9 이며, 연강수랑은 1,390㎜로 도내 최대 다우지이다.

평산의 연혁 편집

고구려 때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지실(多知悉)이라고 칭하고, 신라 때 영풍군(永豊郡)이라 개칭하였다. 고려초에 평주(平州)로 고치고, 성종 때 군사적 요지인 까닭에 방어사를 두었으며, 현종 때는 지주사를 두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 평산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도호부가 되었다.1885년에 다시 군으로 되고, 1914년 부군 폐합시 서부의 괘궁·목단 2면을 연백군에 이관하였다. 1938년 보산면을 남천읍으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른다.이곳은 예로부터 북서지방을 왕래하는 통과지로서 보산(寶山)·금암(金岩)·안성(安城) 등의 역이 있었으며, 경의선(京義線)이 개통됨에 따라 평산·한포(汗浦)·남천(南川)은 군내의 주요 역이 되었다. 특히 남천은 철도교통뿐만 아니라 해주(海州)와 곡산을 연결하는 도로의 십자로에 해당하는 교통의 요지이다.명승고적은 태백산성(太白山城)과 태사사(太師祠)·구룡비(九龍碑)·옥류천·천상정(川上亭)·배연정·행정(杏亭)·구봉서원(九峰書院)·평산온천 등이 있다. ====북한 정권 수립 후====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부지역은 황남 평천군에, 평산면 전도리·화산리는 금천군에 넘겨주고, 금천군 동화면의 5개리가 평산군에 편입되었다. 67년 10월에는 과거의 물개리가 청학노동자구로 개칭되고, 인산군 상암리가 평산군에 편입되었다. 93년 현재 1개 읍(평산)·27개 리·1개 노동자구로 이루어져 있다.

평산의 산업 편집

농업을 주산업으로 하며, 경지의 80%는 밭이다. 농산물은 쌀도 있으나 조·밀·두류 생산이 특히 많고, 또 담배와 인삼재배지로 알려졌다. 양잠과 목축도 성하여 소·고치 생산이 많다.지하자원으로는 형석·석면·텅스텐·천연슬레이트·대리석과 남동·리튬의 매장이 많다. 특히 남천 북서 5㎞의 안성면에 있는 물개관산(物開鑛山)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형석광산으로, 광상은 상원계(祥原系) 천매암질(千枚岩質)·점판암(粘板岩)과 석회암에 배태한 열하충전·교대(交代)·광염(鑛染)의 종합된 광상을 형성하고 있으며, 형석광·천연슬레이트 산지이다. 삼화광산은 텅스텐광으로 알려지고, 남천과 서봉·상월 등 각 면에서는 석면광이 산출된다. 제조업으로는 남천의 양조·유기제조, 가내공업으로 견직·면직물이 유명하다.

태백산성 편집

太白山城

북한 지정 사적 제41호. 태백산의 험한 산세를 이용해 돌로 축성한 고구려 시대의 산성. 원래 성황산성이라고 불렀는데, 조선시대에 성벽을 고쳐 쌓으면서 태백산성으로 고쳐 불렀다.골짜기를 안에 넣고 그 주위에 봉우리들과 산 능선을 따라 쌓은 태백산성은 고로봉식 산성이며, 그 둘레는 2,452m이다. 성벽은 4각추 형태로 다듬은 성돌로 단면축조방법으로 쌓았으며, 높이는 7m 정도이다.성벽 안쪽에 내탁을 만들어 한편으로는 성벽의 견고성을 보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투활동을 편리하게 하였고, 성벽 밑부분은 계단모양으로 굽도리를 조성하였다.성에는 규모가 비슷한 5개의 치가 있는데, 치들은 모두 성벽이 밖으로 내밀어진 곳에 배치하여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치기 좋게 하였다. 성문은 성의 동·서·남·북 네 면이 모두 있으나 동서남북 가운데 동·서문만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다. 수구문은 동문 북쪽에 있다. 성의 동·남·북면에는 전망이 좋은 장대터가 있는데, 그 중 북장대가 원형을 비교적 잘 유지한 채 남아 있어 당시 장대 건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성 안에는 창고들과 절·사당 같은 건물이 있었고 못이 있었다.현재 문루까지 남아 있는 서문과 동문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서문과 동문은 모두 홍예문을 낸 축대와 그 위에 세운 문루로 이루어졌는데, 축대는 성벽을 조금 보강한 것이고 그 복판에 반원형의 홍예문을 내었다. 이 축대는 홍예문 형식으로 개조하면서 만든 것이며, 고구려 시대에는 산성의 문으로 홍예문 형식의 구조를 쓰지 않았다. 우리나라 성문에 홍예문 형식이 도입된 것은 고려 시대이며 조선 초기에 성행했다.서문은 문루로 자연의 지형이 옹성을 쌓지 않고도 방어하기 유리한 고장에 자리잡았으며, 문루 좌우에 있는 자연절벽이 그대로 성벽으로 이용되었다. 서문은 돌을 곱게 다듬어서 넓이 3.07m의 무지개형 성문을 쌓고 그 위에 동문루와 같은 규격과 크기의 합각식 건물을 세웠다. 비록 문루는 임진왜란 이후에 만든 것이기는 하나 자연조건을 적절히 이용하는 고구려의 축성방법을 알 수 있다.문루는 정면 3칸(8.1m), 측면 2칸(3.7m)의 겹처마 합각집이며 홀림기둥 위에 2익공식 두공을 얹은 단층집이다. 문루에는 정면 위에 선득루라고 새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곳은 성안에서 전망이 가장 좋고 시원한 곳으로서 눈 아래로 읍장강(예성강 지류)이 굽이쳐 흐르는 광경은 절경이다.성 안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국을 세울 당시의 주요 신하들을 제사하던 사당집인 태사사(太士祠) 건물이 남아 있었는데 6·25 전쟁 때 파괴되고 비석만 남아 있다.태백산성은 조선 초기의 성곽연구에 참고가 되며, 또한 일제의 침략을 반대해 의병투쟁을 벌인 곳으로도 유명하다.

신계군 편집

신계의 자연 편집

新溪-自然

황해도의 동북부에 있으며 동부군계에는 덕업산맥(德業山脈:馬息嶺山脈)이 뻗어 강원도와 경계를 지으면서 설화산(雪花山:581m)·화개산(華蓋山:581m)·덕업산(德業山:1,019m) 등이 솟아 있다.또한 서부에는 멸악산맥이 뻗어 양 산맥간의 구조곡을 이루고 있다. 이 구조곡을 따라서 홍적세에 현무암이 분출하여 용암지대를 이루고 예성강의 북부 곡산·수안고원으로부터 구조곡을 따라 동서 산지의 지류를 합해 도중에 신계를 비롯한 소분지가 발달하였다.

기후 편집

기후는 내륙의 산간에 위치한 까닭에 한서(寒暑)의 차가 심한 내륙성 기후지대이고 연평균 기온 9.9 , 1월 평균기온 -7.9 , 8월 평균기온은 25 , 연강수량 1,100㎜이다.

신계의 연혁 편집

본래 고구려의 신은현(新恩縣)으로 고려 현종 때 곡주에 속하고, 고종 때 위사공신(衛社功臣) 이공주(李公柱)의 고향이므로 지담주사(知潭州事)로 승격시켰다. 조선 태조 5년(1396) 비로소 감무를 두었고, 협계현(俠溪縣)을 합하여 태종 13년(1413)에 현령을 두었으며, 세종 27년(1447)에 신은·협계 두 현의 명칭을 따서 신계로 고쳤다.명승고적으로는 태봉비·양수암·수림정·학소봉·월은사·이나해총·영천·강선암·모란봉·신수굴 등이 있다.군은 8면(신계·고·다미·다율·마서·적여·사지·촌)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편집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촌면 전역을 곡산군에, 사지면 일부 지역을 수안군에 넘겨주고, 신계면·고면·다미면·다율면·마서면·적여면과 사지면 일부 지역을 합쳐 이루어졌다. 65년 곡산군 도화면 일부 지역을 편입하였다. 93년 현재 1개읍(신계), 27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신계의 산업 편집

대체로 산악 지형이 발달하여 농업을 주업으로 하나 특히 밭이 많아 조·콩·밀·옥수수·담배·인삼 등의 산출이 많다. 또한 양잠·목축·양봉 등도 성하며, 가내공업으로 명주 생산이 있다. 특히 산지에서 산출되는 송이버섯·표고버섯 등의 특용작물이 유명하다.임산물로는 목찬·송이·표고의 산출이 많아 개성·서울 방면의 공급지로 유명하였고, 지하자원으로는 사금·아연·구리 등이 있다.

장연군 편집

장연의 자연 편집

長淵-自然

황해도의 최서단에 돌출한 3각형의 반도로 서주(西走)하는 멸악산맥이 군의 중앙부를 횡단하여 동쪽에서부터 극락산(極樂山:352m)·불타산(佛陀山:608m)·성주봉(聖主峰:554m)·삼봉산(三峰山:380m)·병풍산(屛風山:349m)·태산봉(泰山峰:380m) 등의 연봉이 솟아 있다.또한 이 산맥은 최서단(最西端)에는 국사봉(國祀峰, 284m)과 장산곶의 돌단(突端)을 만들고 황해로 빠져 남북의 분수령이 되고 있다. 북쪽에는 전석산맥·전석산(596m)·태자봉(514m)·광석산(410m) 등 연봉을 일으키며, 동서로 뻗어 송화군과의 자연경계를 이룬다. 또한 많은 군소 하천이 바다에 유입하여 유역에 소평야를 이루는데, 그중에 남·동쪽 군계를 흘러 대동만에 유입하는 광탄천과 북쪽 장연만에 유입하는 남대천은 비교적 깊게 흐르며 남대천 유역에는 넓고 비옥한 장연평야를 이루었다. 해안은 단조로운 사빈(砂濱) 해안이 발달하고 남쪽에 대동만·덕동만, 북쪽에 장연만·몽금포만 등 변화가 있고, 장산곶 부근에는 약 7㎢의 사막을 방불케 하는 사원이 전개된다. 주요 도서로는 백령동·대청도·소청도의 3대 도가 있고, 육도·월내도·오작도·몽금도 등 도서가 있다.

기후 편집

해양성으로 기온교차가 적고 온난하며 소우지대이다. 연평균 기온 10.5 , 1월 평균 기온 -6 , 8월 평균 기온 25.3 이며, 연강수량은 900㎜이다.

장연의 연혁 편집

구 장연현·해안현·백령진이 합한 군으로, 구 장연은 고구려 때부터 장연 또는 장담(長潭)으로 불려왔다. 고려 현종 때 옹진현에 속했다가 예종 때 다시 분리하고 조선 태종 2년(1402)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였으며, 후에 영강현을 합하여 연강이라 칭하였다. 그 후 변천을 거듭하면서 해안현·백령진을 합해 오늘에 이른다.명승고적은 몽금포해수욕장·구미포해수욕장·학림사 5층 석탑·장산곶과 명사십리해당화·불타산·용혈(龍穴)·진서루·천불사·석봉사·백령도의 해식애 등이 있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편집

북한은 1952년 행정개편을 단행하여 1개 읍(장연) 19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장연의 산업 편집

농업은 논이 남대천·광대천 유역에 발달하였을 뿐 밭이 많다. 농산물로는 쌀·밀·두류·고구마·담배·면화·깨·사과·감·소(牛)의 산출이 많다. 연해에서는 조기·새우·양미리·갈치·조개의 어획이 많고, 몽금포·아랑포·오차포·구미포·태탄·용환포·송진 등은 어업근거지이다. 소·대청도 근해는 고래(鯨)어장으로 유명하다. 지하자원으로는 금·철·아연·크롬·규사·벼룻돌 등의 매장이 있다. 금은 낙산(樂山) 광산이 유명하고, 철광·아연광도 수반하며, 용연에서는 크롬과 감람석이, 장산곶 부근에서는 벼룻돌(硯石)이 생산되고, 몽금포·구미포에는 규사가 풍부하다.

송화군 편집

송화의 자연 편집

松禾-自然

황해도의 북서단에 위치한 임해군으로 군의 동남경에는 멸악산맥이 동서로 뻗어 벽성군과의 군계에 달마산(596m)이 솟고 군 중앙부는 구월산맥이 파급하여 묵산(墨山:656m)·월개산(月蓋山:514m) 등 여러 고봉이 솟아 군의 동서 분수계가 되며, 동쪽은 남대천 유역에 송화분지, 서쪽은 남천 유역에 풍천 평야를 발달시켰다. 해안은 단조한 사빈해안이나 북부에 진풍반도가 돌출하여 약간의 단조를 깨치고 해안에서 10㎎ 해상에 초도·석도의 2개 도서가 있고 166.6㎞(본토 80.7㎞, 도서 85.9㎞)의 해안선을 갖고 있다.

기후 편집

겨울에 북서풍이 불어오나 해양성을 띠어 위도에 비하여 온난하다. 연평균 기온 10.5 , 1월 평균기온 -6·1 , 8월평균기온 25.3 이며, 연강수량은 700 800㎜이다.

송화의 연혁 편집

원래 송화군·풍천군이 합군한 것으로 송화군은 고려 때의 청송현·가화현·가천현·영녕현이 조선 초 태종 8년(1408)에 합하여 송화라 부르게 되고, 풍천은 고려 때 풍주라 불렀고, 조선 태종 13년(1413)부터 풍천으로 불러오다가 1914년 송화군에 병합되었다.명승고적은 송화온천·용정·도동서원·삼봉서원·말무덤·구왕굴(救王窟) 등이다.관내 13면(송화·연방·장양·봉래·비원·연정·율리·운방·풍해·진풍·천동·상리·하리)을 관할한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편집

1967년 북한은 군의 서부지역 일부를 분리하고 은율군 원당리를 편입하여 1읍(송화) 10개 리로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다.

송화의 산업 편집

농업을 주산업으로 하여 쌀·조·콩·밀·팥·고구마 등 식량작물의 산출이 많고, 면화는 옛날부터 장연과 같이 전국적 명산지이고, 또 과수원예가 비교적 성하여 사과·배·감의 산출이 많다. 근해에서는 어업이 성하며 조기·새우·곤쟁이·갈치·양미리 등 어획이 많다. 지하자원으로는 금·은·동광 외에 담반(膽礬)과 남동(藍銅)광이 연정면 백석 광산에서 나고, 장양면에서는 도자기 제조가 있다. 상업에 있어서는 5개(송화·수교·공세·풍천·석탄) 정기시장을 통하여 거래된다.

은율군 편집

은율의 자연 편집

殷栗-自然

황해도의 서북해안에 위치하며, 남동부 신천·안악·송화 등 군계에는 구월산맥이 뻗어 구월산(954m)·오봉(859m)·먹산(656m) 등 고봉이 솟아 자연경계를 이루고, 북서쪽으로 그 여맥이 파급하여 구릉의 기복이 있으나 해안일대는 한천(漢川) 유역에 은율평야, 장련천 유역에 장련평야를 전개한다. 해안선은 총연장 108㎞에 달하고 남부·이도(二道)·말촌의 3반도가 돌출하여 유포·은율·감정·장련 등 4개의 만입이 있으나 대부분 간석지로 되고 전면에 청양도·웅도·찬도·해도·서도·능금도 등 군소 도서가 산재한다.

기후 편집

기후는 해안에 있는 관계로 비교적 온화하고 연평균 기온은 10.3 이며, 1월 평균 기온 -6.3 , 8월 평균 기온 24.6 이고 강수량은 800㎜ 정도의 소우지대이다.

은율의 연혁 편집

구 은율군과 장련군이 합군한 것으로 은율은 고구려 때 율구 또는 율천이라 하였다가 고려 초에 은율로 고치고, 현종 때 풍주에 합한 바 있다. 조선 태조 5년(1396)에는 은율현이 되고, 태종 14년(1414) 다시 풍천에 합했다가 분리되고, 현종 4년(1663) 장연에 합했다. 그 후 다시 복구되고 숙종 14년(1688)에는 문화현(文化縣)에 합했다가 16년 다시 복구되고, 1895년 군이 되어, 1914년 장련군을 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장련은 고려 때 장명현(長命縣)으로 본래 황주에 속하여 진을 두고 공양왕 2년(1391) 안악(安岳)에 속하였던 연풍현(連豊縣)을 합하고, 조선 태종 13년(1413) 장련현으로 되었으며, 1895년 군이 되고, 1914년 은율군에 합군되었다.명승고적은 은국사지(殷國寺址)·고분군·인돌(支石:한국제1)·백운대(白雲臺:단군의 등선대)·주가봉(朱家峰:九月山 第二峰)·인형인조석(人形人造石)·패엽사(貝葉寺)·월정사(月精寺)·용연폭포·구월산성·원정사 사적비 등이 있다. 관내 7면(은률·일도·남부·서부·북부·이도·장련)을 관할한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편집

북한은 8·15 광복 후 1개 읍(은율) 22개 리 1개 노동자구로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다.

은율의 산업 편집

전작을 주로 하여 조·밀·두류·면화·고구마·사과·소의 산출이 많고, 특히 사과·면화의 산출이 많기로 유명하다. 근래 수리조합 발달로 쌀생산도 많아졌다. 수산업으로는 근해에서는 조기·양미리·새우·뱅어·조개류의 어획이 많다.지하자원으로는 철광·방해석(方解石)·중정석(重晶石)이 매장되고, 북부면 금산리에서 적철 또는 자철광의 산출이 많고, 방해석·중정석도 많이 산출된다.

은율철산 편집

殷栗鐵山

은율 북방 10㎞ 이도면(二道面) 금산리에 있고, 광상은 점판암·석회암 중에 교대광상(交代鑛床)으로 광석은 적철·갈철을 주로 하고, 품위 55 58%의 우수광으로 하성(下聖) 철산과 같이 국내 우수 광산이며 노천굴(露天掘)을 한다.

관산리 고인돌 편집

冠山理-

황남 은율군 관산리의 청동기시대 고인돌. 현존하고 있는 고인돌 중 가장 아름답고 가장 크다. 관산리에는 여러 개의 오덕형 지석(고인돌)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1호 고인돌이다.관산리 고인돌은 잘 남아 있는 고인돌 중 하나인데, 마을 앞을 가로막은 화산봉우리와 잇닿은, 표고 약 80m 되는 산마루에 남향으로 우뚝 솟아 있다. 이곳은 다른 고인돌이 있는 곳보다 훨씬 높은 곳인데 고인돌 주위에는 사방 3.5m 넓이로 현재의 지면보다 65㎝ 정도 높게 돋구어졌다.질 좋은 화강암을 반듯하게 다듬어 고인돌을 세우고 그 바깥에 막음돌을 세워 묘실을 만들었다. 묘실의 길이는 3.3m, 너비는 1.4m, 높이는 묘실바닥에서 2.15m이다. 관산리 고인돌은 원래는 받침돌을 세운 것으로 4면이 모두 막혔는데 오늘날에는 서남쪽 받침돌이 없어졌다. 덮개돌은 길이 8.75m, 너비 4.5m, 두께 31㎝로 무게는 40t에 달하며, 그 면적이 34㎡나 된다. 덮개돌의 무게가 40t이나 되는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하려면 수백·수천 명의 인부를 동원했어야 할 것이며, 이것은 관산리 1호 무덤을 비롯한 대형 고인돌에 묻힌 자가 부와 권세를 갖춘 추장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고인돌 부근의 평지와 산에는 여러 개의 고인돌이 있는데 이곳에서 돌칼·돌화살촉·질그릇 조각 등 원시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어 우리나라 거석문화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악군 편집

안악의 자연 편집

安岳-自然

황해도의 북부 중앙에 자리잡고 서쪽에 구월산 지괴가 반거하여 오봉(五峰, 859m)·삼봉(三峰, 614m) 등 고봉이 있고, 이 여파로 군 서부에 구릉의 기복이 있으나, 군내는 대체로 저평하다. 이것은 동경을 북류하는 재령강과 그 지류 서강이 적시는 재령평야의 북반부이며 재령강·대동강 연안에는 간석지가 넓어 간척사업의 진척으로 대부분 경지화되었고 저도(猪島)는 완전히 육지화되었다.

기후 편집

북부에 위치한 관계로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을 나타내고 강수량은 대안 평남 용강군과 더불어 국내 3대 소우지(小雨地)에 든다. 연평균 기온 10.9 , 1월 평균 기온 -6 , 8월의 기온이 25.6 이다.

안악의 연혁 편집

고조선 후 한사군시대 낙랑·대방군의 소명현(昭明縣)에 속하였고, 고구려 때는 양악(楊岳), 신라 때는 장구진(長口鎭)에 속하고, 고려 초부터 안악군이 되고, 1939년 안악면은 읍으로 승격했다.관내 1읍(안악), 8면(대속·용순·은홍·대행·서하·안곡·용문·문산)을 관할한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편집

북한은 8·15 광복 이후 재령군의 일부 지역을 편입시켜 1읍(안악), 26개 리로 행정 개편을 단행했다.

안악의 산업 편집

비옥하고 넓은 평야와 넓은 간척지, 관개시설의 완비 등으로 도내 1·2위를 다투는 곡창지대로 쌀·밀·두류·면화·사과·배 등 생산이 많고, 축·잠업도 성하여 소·돼지·닭·고치 등 생산이 많다. 지하자원으로는 적철광·중정석·백운모·갈염석 등 매장이 있으나 가행 광산은 없다. 제조업으로는 정미·양조업과 견직·누비의 가내 수공업이 유명하다. 군내 상업은 안악·복사·온정·동창·초정 등 6개 정기시장을 통하여 행해진다.

노암리 고인돌 편집

황남 안악군 노암리에 있는 청동기시대(기원전 10세기∼기원전 3세기경)의 대표적인 문화유산 고인돌「지석묘(支石墓)」. 북방식. 이 북방식 고인돌은 땅 위에 판 돌「판석(板石)」을 세워 긴 네모꼴의 무덤칸을 들고 시신을 넣은 뒤 그 위에 넓은 덮개돌「상석(上石)」을 올려서 만든다. 이 고인돌은 짧은 쪽의 판돌 두 개가 사라져버린 상태. 전체 높이가 3.0m, 덮개돌은 길이 7.7m, 무게 41.5t톤으로 안악군 일대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다.

월정사 극락보전 편집

月精寺極樂寶殿

황남 안악군 월정리에 있는 조선 초기의 사찰. 월정대사가 846년에 창건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고, 17세기 중엽부터 중수한 기록들만 남아 있다. '중수월정사기'에는 1650년부터 1871년까지 5회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만세루·명부전·수월당과 기타 부속건물들이 있다. '월정사극락보전중수기문'에 의하면 1662년에 중건하고 1736년에 또다시 세웠으며, 1875년에 보수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 초기 건물의 구조형식과 수법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2차·3차의 재건은 새로 지었다기보다는 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극락보전은 1m 높이의 정교한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10.65m), 측면 2칸(6.4m)의 겹처마 합각집이다. 두공은 바깥 7포, 안 5포이며 가운데가 불룩한 두리기둥을 썼다. 이 사찰에서 특이한 것은 포조직과 천장구성이다. 일반적으로 바깥포보다 안쪽포의 수가 많은데 이 건물은 그와 반대로 안쪽(5포)이 바깥(7포)보다 적다. 그리고 천장은 바깥 장여로부터 전반적으로 소란반자를 정교하게 하였다.월정사는 건물의 짜임과 형식이 특이할 뿐만 아니라, 그 수법이 섬세하고 정교하며 그 세부와 전반이 잘 짜인,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안악1호분 편집

安岳一號墳

황해남도 안악군(安岳郡)에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 고분의 봉토는 많이 깎였으나 방대형의 본래 모습은 어느 정도 지니고 있으며, 널방「墓室」의 구조는 널길과 네모「方形」의 널방「玄室」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單室墳」이다. 널방의 4벽면은 평탄한 편석(片石)을 진흙과 석회를 섞어 쌓아 올렸다. 천장은 평행3각굄천장이다. 널길은 널방 남벽에 있고, 널길과 널방 사이에 돌문「石扉」이 있다. 벽화는 4벽과 천장 전부에 그려져 있으며, 인물풍속도인데 박락(剝落)이 심하다. 널방 서벽 상부에 사냥그림이 있고, 하부에 7명의 여인입상(女人立像)이 있다. 동벽에 의장행렬(儀仗行列)과 3대의 우교차(牛轎車)가, 남벽에는 행렬도와 기수 4명이 있고, 말탄 인물이 흐릿하게 보인다. 천장에는 다양한 무늬와 해·달·별 등을 그렸다.

안악2호분 편집

安岳二號墳

안악군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 고분의 봉토는 방대형이며, 묘실의 구조는 연도와 방형의 현실 및 현실 동벽에 감이 하나 있는 외간무덤이다. 현실의 네 벽은 석회암·화강암 등의 판석으로 축조하고 두껍게 면화를 발라 정리하였다. 천장은 벽면과 평행하는 2단의 평행굄 위에 3단의 3각굄을 올려 좁히고 꼭대기 중심에 한 장의 덮개돌을 덮은 평행3각굄천장이다. 현실남벽의 동쪽에 약간 치우쳐 있는 연도와 현실 입구 사이에는 좌우 양쪽으로 열리는 돌문이 있다.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도이나 박락이 심하여 그 전모를 알 수 없다. 벽화는 연도·현실의 네 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으며, 그 배치상태를 보면 현실 네 모서리에는 구름무늬단청을 한 포기둥을 세워서 그 윗도리를 표시한 횡대를 받치게 하였다. 연도의 좌우 벽에는 각각 한 명의 문지기를 그렸고, 그 양쪽에는 무인행렬도를 그렸다. 현실 북벽 중앙에는 화려한 장막을 걷어올린 장방 안의 좌상에 한 여인이 호젓하게 앉아 있는 상이 그려져 있고 장방 밖의 왼쪽에는 6명의 시녀상이, 오른쪽에는 측근 문관으로 보이는 3명의 남자상이 그려져 있다. 현실 서쪽의 윗단에는 여인과 아동군상이 그려져 있다. 동벽은 박락이 심하여 남쪽 윗부분에 그려진 2명의 비천상과 3명의 산연화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남벽의 현문 윗벽에는 동벽의 것과 같은 비천 2명과 현문을 중심으로 좌우벽에는 각각 1명의 문지기를 그렸다. 현실의 천장에는 평행굄 제1단 북벽 측면에 붉은빛 바탕에 먹으로 반규무늬를 그리고, 다른 세 면에는 연잎당초무늬를 그렸다. 다음 평행굄 제2단 측면에는 보륜을 마름모꼴 격자로 꿰고 그 속에 연꽃을 배치한 무늬, 연꽃당초무늬, 괴운무늬 등으로 장식하였으며, 천장 중앙에는 커다란 연꽃대과무늬를 그렸다.

안악3호분 편집

安岳三號墳

안악군에 위치한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 1949년에 처음으로 발견된 이 무덤은 현무암과 석회암의 큰 판석으로 짜여진 돌방무덤으로 남쪽인 앞으로부터 널길·연실·앞방·뒷방으로 형성되며, 앞방은 좌우에 조그만 옆방이 하나씩 달려 있어 좌우 너비가 커지고 있다. 한편, 앞방과 뒷방은 4개의 팔각돌기둥으로 구분되어 서로 투시할 수 있고, 주실 즉 뒷방은 동벽과 뒷벽의 안쪽에 판석벽과 돌기둥을 각각 세워 회랑부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각방의 천장은 네 귀에 각각 삼각형 돌을 얹어 천장공간을 좁히기를 두 번 반복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얹는 모줄임천장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랜 모줄임천장이다.벽화는 널길벽에 위병, 앞방의 동쪽 옆방에 부엌·도살실·우사·차고 등, 서쪽 옆방에 주인공 내외의 좌상, 앞방 남벽에 무악의장도와 묵서묘지, 뒷방 동벽·서벽에 각각 무악도, 회랑벽에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결국 벽화내용은 무악대와 장송대에 둘러싸인 주실 앞에 주인 내외의 초상도를 모신 혼전과 하인들이 있는 부엌·우사·마구고 등을 두고 맨 앞은 위병이 지키는 설계로, 이것은 왕·귀족·대관들의 생전주택을 재현시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벽화는 벽의 면적 81㎡, 천장의 면적 58㎡나 되는 넓은 널방에 가득 차게 그려져 있다.또한 이 동수묘에서는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명문에서 보인 ‘永和十三年’은 동진의 연호로서 서기 357년을 나타낸다. 즉 낙랑 옛 땅의 중국계 주민들이 해상교통을 통하여 강남의 동진과 연락을 하여 동진의 연호를 쓰고 있음을 말해준다.동수묘의 주인공인 동수는 미천왕 27년(326)에 랴오둥에서 고구려로 귀투한 무장이며, 고국원왕 27년(357)에 죽어서 안악에 묻힌 것이다. 동수묘의 구조는 여러 점에서 당대의 중국묘 형식을 본받고 있다. 즉 남북일렬로 여러 방을 배열하는 것이나 앞방 좌우에 옆방을 설치하는 것은 한대 벽돌무덤의 기본 설계법이며, 또 옆으로 넓어진 앞방에 사각형의 주실을 달아 T자형 평면을 만드는 것은 낙랑의 덧널무덤이나 벽돌무덤에서 흔히 보는 형식이다.또, 큰 판석으로 묘실을 짜는 것은 랴오둥 반도의 한대 묘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동수묘에서 처음 보는 고구려 고분의 특색처럼 되어 있는 모줄임천장도 산둥성 기남의 후한 대돌무덤에 나타나고 팔각형 돌기둥도 이 기남묘에 있거니와 기둥 꼭대기에 두공을 얹어 천장석을 받들게 하고 있는 점이 똑같다. 모줄임천장은 원래 근동지방에서 일어난 수법이며, 그것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3세기에는 이미 중국본토로 들어와 있던 것이다. 고분벽화 자체도 한대에서 시행한 것이며, 특히 동수묘와 같은 고구려 전기 고분벽화에서 묘주들이 휘장을 친 방안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랴오둥 지방의 고분들과 같다.결국,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고구려 고분벽화인 동수묘는 랴오둥 지방에서 넘어온 동수의 무덤이며, 그것은 중국의 한·위·진대의 벽화고분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고구려 영토 안에 세워진 최초의 중국계 벽화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묘실 평면·모줄임천장·돌기둥·벽화내용 등 여러 면에서 그 뒤 고구려 벽화고분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이며, 고구려 벽화고분의 발생과정에서 중국 벽화고분과 고구려 벽화고분을 연결하는 과도기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신천군 편집

신천의 자연 편집

信川-自然

황해도의 서북 내륙에 위치하고, 남부 군계에는 멸악·조일령 산맥이 연속하여 천봉산(天峰山:626m)·작산(鵲山:593m)·양웅산(養雄山:551m) 등 산이 솟아 있다. 서북쪽은 구월산 지괴가 반거하여 구월산(954m)·아사봉(阿斯峰:687m)·오봉(五峰:859m)·먹산(墨山) 등 단군의 건국 신화가 깃든 명산이 옹위한다. 중앙은 서강(西江)이 관개하는 넓은 평야가 전개하여 재령평야의 서반부를 이루는데 남북 산지 곳곳에는 단층 구조선이 발달하고, 단층선을 따라 곳곳에 온천이 용출한다.

기후 편집

내륙에 있는 관계로 기온의 교차가 심하고 강수량은 적어 대동강 하류부 소우지대에 속한다. 월평균 기온은 -6.5 , 8월은 25.4 이며, 연평균 기온은 10.8 이다. 연강수량은 955㎜이다.

신천의 연혁 편집

본래 신천·문화의 양군을 합한 군으로 다같이 국조 단군 신화에 어린 아사달 장당경(藏唐京)이 있었던 곳이라 하며 한사군 시대에는 낙랑·대방군의 소명현(昭明縣)으로 불리었다. 신천은 고구려 때 승산(升山), 신라 때 신주(信州)로 불려 오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부터 신천군이 되고, 문화는 고구려 때 궐구현(闕口縣), 고려 때 유주현(儒州縣)으로 고치고, 고려 고종 때부터 문화로 개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천군에 합병되었고, 1935년 신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사리원에서 장연에 이르는 도로가 동서를 연결하며, 신천을 중심으로 하여 해주(海州)·옹진(甕津)·안악(安岳)·은율(殷栗) 등에 이르는 도로가 통해 있다. 또한 사리원에서 장연에 이르는 황해선(黃海線) 철도가 같은 동서 방향으로 연결되어 백석·창촌·신천온천·신천·용문·문화·삼천온천·궁흥 등의 역이 있다.명승고적은 구월산·패엽사(貝葉寺)·삼반정(三泮亭) 및 구월산 성지·황모비(黃某碑)·자혜사 석등(慈惠寺石燈)·신천온천·달천온천·삼천온천 등이다.관내 1읍(신천), 14면(온천, 가연·두나·남부·용문·문화·궁흥·초리·문무·용진·산천·노월·북부·가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편집

1952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재령군, 안악군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1읍(신천) 31개 리로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신천의 산업 편집

산업의 대종은 농업으로 비옥한 충적평야와 수리 관개시설이 잘 되어 있어 전국 유수의 쌀 산지이다. 또 조·밀·콩·면화·담배·사과의 산출과 축우·양돈·양계 등도 성하고, 광업으로 금·적철광의 산출이 있다. 제조업은 정미·양조업 등을 들 수 있고, 상업은 신천읍이 지방 상업의 중심지이고 6개(신천·달천·문화·유천·석당·온천) 정기시장을 통하여 거래가 되는데 신천읍의 정기시장은 군내 총거래액의 70%를 차지하여 도내 10대 시장 중의 하나이다.

자혜사 편집

慈惠寺

황남 신천군 신천읍 서원리에 위치한 자혜사는 창건연대를 밝힐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숙종 42년(1716)에 쓴 자혜사 중수기에도 이 절의 창건연대를 알지 못한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차례 거듭된 피해로 그 사적마저 멸실되었음을 전하고 있다.1572년에 재건된 현재의 절에는 대웅전과 승방, 오층석탑과 석등이 남아 있는데 석등과 석탑은 고려 초기의 것이므로 절도 고려 초기에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자혜사 대웅전은 송광사 국사전과 공통점이 많은 맞배형의 익공집으로, 조선 초기 건축양식의 한 면을 보여준다. 앞면 3칸(9.28m), 옆면 4칸(9.25m)의 배집인데 뒷면보다 앞면을 낮추어 처마를 길게 연장하였으며, 앞은 겹처마인데 비해 뒤는 홑처마로 되어 있다. 기둥은 배부른 기둥이고 두공은 2익공 바깥도리식이다. 매칸마다 액방과 장여 사이에 연꽃무늬를 뚫어 새긴 화반을 하나씩 얹었다. 건물 안 바닥에는 널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통천장이다. 용마루를 받친 화반대공 좌우에는 활개를 달아 받침대로 삼았으며 화려한 단청장식을 하였다.건물은 대체로 균형이 맞고 조화가 잘 되어 아담한 감을 준다.

자혜사 석등 편집

慈惠寺石燈

자혜사 대웅전 앞에 있는 고려 때의 돌등이다. 자혜사 탑과 같은 위치에서 서 있는 석등은 정6각형 형태로 총 높이는 3.88m이다. 석등 맨 아래에 기단 댓돌을 놓고, 그 위에 높이 1.17m의 6모 기둥같이 생긴 중간돌을 세운 다음, 다시 연꽃무늬를 새긴 앉은 돌을 놓았다. 그 위에 가운데가 뚫린 등불을 놓는 자리를 만들고, 다시 지붕돌과 머리부분을 차례로 올려놓았다.석등의 바닥단에는 갓돌윗면에 굵직굵직한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여 장식적 효과를 높였다. 바닥단위에는 6각기둥을 세웠다. 기둥돌 위에 한 단의 받침돌을 얹고 그 위에 중대돌을 놓았는데, 그 밑면에는 바닥단 윗면처럼 연꽃무늬를 새겼다.중대돌 위에 있는 불집돌의 남쪽과 북면에는 네모난 구멍을, 동쪽과 서쪽면에는 굽은 구슬모양의 구멍을 내어 그 안에 불을 켤 수 있게 하였다. 돌추녀로 된 지붕돌의 추녀마루와 추녀 끝은 미묘한 곡선을 이루었다.석등 머리부분의 첫 단에는 6각형 대접처럼 생긴 돌을 얹어놓고 그 위에 동그란 고리를 포갠 듯한 두 줄의 고임을 주었다. 그 위에 다시 둥글납작한 고임을 주고 맨 위에 연꽃봉오리 같이 곱게 조각한 돌을 올려놓았다.자혜사 석등은 그 구상과 수법, 종형예술적 기교에서 뛰어난 재능과 능란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부드럽고 아름다운 모양과 선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탐스러운 느낌을 가지게 한다.

자혜사 오층석탑 편집

慈惠寺五層石塔

자혜사 대웅전 앞뜰에 서 있다. 고려 초기 자혜사를 처음 지을 때 함께 세운 것으로 2층으로 된 바닥단과 다섯층의 탑몸, 탑머리 부분으로 구성된 바른사각형 평면의 돌탑이다. 높이 5.94m.바닥돌 위에 두 개의 단으로 만든 아래바닥단 한 변의 길이는 4.2m이다. 아래바닥단 높이가 낮은데 비하여 윗바닥단은 훨씬 높다. 아래바닥단 가운뎃돌의 매면에는 3m씩의 오묵이를 냈고 한 가운데는 인동무늬를 새겼다. 아래위 바닥단 갓돌에는 연꽃잎을 돋을새김하여 윗바닥단 가운뎃돌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도록 장식하였다. 윗바닥단 갓돌 윗면은 곧으며, 윗바닥단 가운뎃돌의 모서리와 탑몸 모서리들에는 모기둥을 돋아 새겼다. 1층 탑몸 앞면과 뒷면의 가운데는 자물쇠를, 그 좌우에는 인왕산을 각각 한 개씩 새겼다. 인왕산은 생동하는 형상으로 조각이 우수하다. 1층 탑몸체에는 사람모양의 조각을 새겼는데 그 형상이 걸작이다. 4단씩의 처마받침을 굵게 준 지붕돌은 추녀 아래윗선을 보기좋게 같이 휘어올린 돌추녀인데 고려탑의 일반형식보다 길게 내뽑았다. 지붕추녀 끝 네 모서리마다 바람방울을 달았던 고리못 흔적이 있다. 탑머리로는 4각형의 노반과 보륜 위에 활짝 핀 연꽃 송이를 놓고 그 안에 보주를 올려놓았는데 정교하고 아름답다.탑몸과 탑지붕을 차례로 줄여 올라간 이 탑은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게 균형이 잘 잡히었으며 웅장하면서도 듬직하고 굳센 감을 준다. 또한 반듯한 탑몸과 날아갈 듯 날씬하게 쳐든 돌추녀의 조화는 깨끗하고 단정하다.

재령군 편집

재령의 자연 편집

載寧-自然

황해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남경(南境)일대는 멸악·수양 등 산맥이 동서로 뻗어 황해 금강(黃海金剛)이라 일컫는 장수산(747m)을 비롯하여, 동남경의 운달산(581m)·백락산(547m), 서남경의 성암산(466m) 등 산악과 구릉의 기복이 있으며, 북부는 대평야지대이다. 이 평야는 원래 구월산맥·멸악산맥간에 있던 대함몰만이 재령·은파·서흥·서강 등 각 하천의 퇴적작용과 서해안의 융기작용에 의하여 평야화한 것으로 평야의 대부분은 해발 20m 이내이고, 곳에 따라서는 아직도 해면하의 땅도 남아 있다.평야를 관류하는 재령강은 남쪽 수양산에서 발원하여 곡류(曲流)하며, 북류하다가 삼강면(三江面)에서 동쪽에서 유입하는 은파(銀波)·서흥(瑞興)의 2강과 합류하고, 본군 북단에서 남동쪽 군계를 흐르는 서강에 합류한다.

기후 편집

기후는 내륙부에 있어 기온의 교차가 심한 내륙성을 띠며 연평균 기온은 10.6 , 1월 평균 기온 -6.9 , 8월 평균 기온 25.4 , 연강수량은 840㎜로 비교적 적다.

재령의 연혁 편집

고조선 이후 한사군(漢四郡) 시대 진번(眞蕃)·낙랑(樂浪)·대방(帶方)군의 소명현(昭明縣)의 일부이고, 고구려 때는 식성군(息城郡)이라 불렀으며 3경(三京)의 하나인 한성(漢城)을 두어서 한홀(漢忽)이라고도 했다. 고려 현종 초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海州)에 예속되었다가 고종 때 재령현이 되었다. 조선 태종 15년(1415) 군으로 승격시키고, 중종 14년(1519) 군 치소를 구읍 동쪽 24㎞, 현재령읍으로 이전, 1935년 재령면을 읍으로 승격시켰다.명승고적은 장수산·전덕루·고분·마분·문묘대성전·경현재·문천사·애정(艾井)·세심정(洗心亭)·벽송정(碧松亭)·병암정(屛岩井)·미륵불(彌勒佛)·석성동(石城洞) 등이 있다.관내 1읍(재령), 10면(삼강, 은용·상성·하성·신원·장수·청천·서호·남율·북율)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편집

8·15 광복 이후 1952년 행정구역 개편에 이어 1954년 안악군과 은파군을 분리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1읍(재령) 5개 리 1개 노동자구로 행정구역을 바꾸었다.

재령의 산업 편집

주산업은 농업으로 경지 면적 400여 ㎢로 전 면적의 55%에 달하고, 재령강 연안의 간척 사업과 안녕(安寧)·재신(載信)의 양대 수리조합시설로 쌀 산출이 많아 전국적인 곡창으로 이름 높다. 특히 남율·북율 지역은 품질 좋은 무사미(無砂米)로 알려졌고, 또 밀·두류·조·면화·담배·메밀 등 전작물 생산과 소·돼지 등 축산물도 많다.지하자원으로는 철광·아연광·형석·중정석·석회석·방해석·이극광 등 매장이 많으며, 그 중에도 철광이 가장 유명하다. 또한 하성·은룡·재령 등의 광산이 유명하고 은적(銀積) 광산은 아연광·형석·이극광·동광 산지로 알려져 있다. 또 남율·삼강·은룡면 일대는 전국적 중정석 산지로, 상성·하성면 일대는 석회석·방해석 산지로 알려졌다. 제조업으로는 정미·양조업과 가내 방직이 각지에 성하다.

황주군 편집

황주의 자연 편집

黃州-自然

황해도의 북부 평남과 접하고 역내는 언진(彦眞)산맥의 말단이 도계 및 중부에 미치고, 또 남경(南境)은 정방 산맥이 뻗어 자비산(691m)·군장봉(534m)·정방산(480m) 등 산이 솟고 서쪽은 대동강과 재령강이 자연경계를 이루고, 황주천(99.6㎞)은 역내의 중앙부를 서쪽으로 관류하여 대동강에 합류한다. 면적은 873㎢이다.

기후 편집

연평균 기온 8.9 , 8월 평균 26.1 , 최고 기온 38.5 (1944. 7. 15), 최저 기온 -28.8 (1930. 1. 20). 연 총강수량은 849㎜로 전국적으로 소우지대에 속하나, 하기 3개월간 강수량이 525㎜(62%)가 된다.

황주의 연혁 편집

고조선 이후 낙랑군 시대는 함자현(含資縣)이 되고, 고구려 때는 동홀(冬忽)로 되었으며, 신라 헌덕왕(憲德王) 때 취성군으로 고치고 고려 초에 황주로 되었다. 성종 2년에는 목(牧)을 두고, 이어서 절도사를 두어 황주 천덕군(天德軍)이라 칭하여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다. 그 후 현종 때 안무사로 고쳤다가 다시 목이 되어 서해도에 속하고 원종 때 원(元)의 동녕부에 속하여 원(元)의 영토가 되었다. 공민왕 때 수복되고 조선 세조 때 진을 두어 2도호부 6군 5현을 관할해 오다가 1895년 평양부(平壤府)소관으로 옮겨졌다. 그 후 1896년 황해도로 다시 환원되고 1920년 송림면 일부를 겸이포면으로 하여 지정면(指定面)으로 하였으며, 1930년 이를 읍으로 승격하고, 1936년에는 황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명승고적은 정방산성과 성불사(極樂殿·應眞殿은 국보로 지정)·화주 유물포사탑(遺物包舍塔:국보)·심원사 보광전(心源寺普光殿:국보)·황주성지(黃州城址)·기자묘(箕子廟)·지석군(支石群) 등이다.군내 1읍(황주), 11면(인교·귀명·도시·주남·청룡·삼용·영농·구성·청수·흑교·천주)을 관할한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편집

북한은 1952년 군을 황해북도에 편입시키고 금봉리·칠봉리를 연탄군에, 문현리를 봉산군에 편입시키는 등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다. 1개 읍 28개 리로 되어 있다.

황주의 산업 편집

도내 제2위의 밭면적을 갖고 조·콩·밀·수수·팥 등 전국적 잡곡산지를 이루고, 쌀의 산출도 적지 않다. 특히 사과는 국내 각지는 물론 일본·만주에 다량 수출되었다. 축산물로는 체구가 큰 우량 소의 산지로 유명하고 기타 돼지·닭의 사육도 성하다.지하자원으로는 철광·중정석·석고·방해석·공작석 등의 매장이 있고, 특히 철광의 매장이 많아 황철광이 황주광산에서, 침철광이 송림·황주·흑교 등 광산에서 산출이 많고, 방해석은 송림·구성, 공작석은 송림시, 석고는 천주, 중정석은 구성에서 각각 산출한다. 공업은 소림에 거대한 제철소가 있어 제철·제강·각종 강재·코크스·황산 암모니아 등 공업이 있고, 황주에서는 사과주 양조를 행한다.

봉산군 편집

봉산의 자연 편집

鳳山-自然

황해도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북에는 정방산맥이 뻗어 정방산(480m)·보명산(保命山:592m)·고려왕산(高麗王山:571m) 등이 솟아 황주군과 자연경계를 이루고 있다. 군의 중앙 이동(以東)에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멸악산맥이 뻗어 구산(507m)·봉양산(鳳陽山:541m)·차일봉(遮日峰:606m)·우기산(禹岐山:451m) 등의 군봉과 구릉의 기복이 많고 군의 서반부는 재령강과 그 지류 은파·서흥 등 지류의 유역으로 재령평야에 계속되는 일망무제의 대평야지대이다. 면적은 836.9㎢이며, 인구는 9만 3,000명(1987)이다.

기후 편집

기후는 내륙지방에 있어 기온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로 연평균 기온 9.5 , 1월 평균기온 -8.3 , 8월 평균기온 26.1 이며, 연 강수량은 약 900㎜로 비교적 적다.

봉산의 연혁 편집

고조선 이후 한사군시대 낙랑군 대방현(帶方縣)이고, 후에 대방군 치소가 있던 곳이다. 그 후 고구려의 휴암군 또는 휴류성이 되고, 신라 때는 서암군(栖岩郡), 고려 때는 봉주(鳳州)라 칭하였으며, 조선 태종 13년(1413)에 봉산군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1930년 사리원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군내 1시(사리원), 13면(동선·토성·산수·귀연·덕재·쌍산·기천·초와·문정·서종·영천·만천·서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편집

1946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황해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다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부의 대부분 지역이 은파군에, 북동부의 일부 지역이 황주군에 병합되고, 구연면과 서흥군의 서부지역을 합쳐서 봉산군이 되었으며 1개 읍(봉산) 19개 리를 관할한다.

봉산의 교통·관광 편집

중북부를 경의선(京義線) 철도가 지나 사리원시를 거쳐 황주읍으로 이어지고, 사리원시 해주시간 사해선(沙海線) 철도와 사리원시 장연읍간 황해선 철도가 지난다. 도로망도 사리원시를 중심으로 나 있는데, 개성시 신의주시 간 1번 국도가 경의선 철도를 따라 지나고 장연읍 재령읍간 54번 국도가 황해선 철도를 따라 지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다. 관광지로는 정방산(正方山)·경암산(景巖山)이 알려져 있고, 무용가면극 봉산탈춤의 본고장이기도 하다.명승고적은 녹과산성지·고당토성지(古唐土城址)·경암산(景巖山)·환암정(?巖亭)·독정사(獨亭寺)·정방산성(正方山城)과 성불사(成佛寺)·대방태수장무이지묘(帶方太守張撫夷之墓) 등이다.

봉산의 산업 편집

사리원에는 농사시험장 서한지장(西韓支場)이 있어 경작법의 개량 등에 공헌하고 있는 만큼, 농업이 발달하여 조·쌀·밀·콩·팥·고치·면화·사과·채소류·닭·소·돼지 등의 산출이 많다.광공업에 있어서는 갈탄(褐炭:마동·봉산탄광), 석회석 및 방해석(方解石:덕재·구연면), 형석(螢石:쌍산·덕재·구연), 철광(토성·구연), 이극광(異極鑛:쌍산·덕재) 등 지하자원 산출이 있고, 조면(繰綿)·제마(製麻)·제사(製絲)·제분(製粉)·양조·시멘트 등 제조업이 성하며, 가내공업으로 누비이불 제조가 유명하다.상업에 있어서는 사리원이 도내 물자의 대집산 시장으로 점포 상업도 성대하거니와 사리원·마동·청계·은파·서종·산산 등 6개의 정기시에서 거래가 많고, 이 중 사리원시장은 도내 제2의 시장으로 군내 거래의 91%를 차지한다.

서흥군 편집

서흥의 자연 편집

瑞興-自然

도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역내에는 3조의 산맥, 즉 남부에 멸악산맥, 중앙에 정방산맥, 북부에 언진(彦眞)산맥이 동서로 뻗어 구릉의 기복이 많다. 주요 산은 멸악산맥의 복희산(卜希山:575m)·황룡산(黃龍山:485m)·무장산(武張山:524m)·정족산(鼎足山:367m), 정방산맥의 부인당산(夫人堂山:685m)·나장산(羅將山:691m), 언진산맥의 주라산(珠羅山:330m) 등이다.하천은 산맥의 사이사이를 산맥의 주향(走向)과 같이 하여 서류하는 서흥강·황주천이 있어 유역 곳곳에 침식분지를 이루고 있다.역내는 대부분 석회암지질인 카르스트 지형의 발달로 적색·자갈색의 토양이 많은 것이 특색이고, 면적은 914㎢이다.

기후 편집

내륙에 위치하여 기온의 교차가 심하다. 1월 평균 기온 -8.5 , 7월 평균 기온 24.4 이고, 최저 기온은 -27.8 (1942. 1. 15)이며, 최고 기온은 37.2 (1939. 8. 7)이다. 연강수량은 960㎜이나 7, 8월에 집중적으로 내린다.

서흥의 연혁 편집

고구려 때 오곡군(五谷郡) 또는 우차탄홀(于次呑忽)이라 했고, 신라 때는 오관군(五關郡)으로, 고려 초에는 동주(洞州)로 개칭하고, 현종 때는 평주에 속하였다. 조선 세종 6년(1424)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현종 때 현으로 내려졌다가 영조 38년(1773)에 복구되었으며, 여러 번 변천을 거쳐 1895년 군으로 되고, 1938년 신막(新幕)이 읍으로 승격하였다.명승고적으로 귀진사(歸眞寺)와 소금강(小金剛)·고려장(高麗葬)·천자산 마애비(天子山磨崖碑)·성채(城砦)·대현산성(大峴山城)·속명사(續命寺)·용담사(龍潭寺)·자비령(慈悲嶺) 등이 있다.군내에 1읍(신막), 10면(서흥·매양·용평·내덕·목감·소사·세평·도·구평·율리)을 관할한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편집

광복 직후 북한이 황해남·북도로 분리하면서 황해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일부 지역을 분리, 혹은 병합하여 지금의 1읍(서흥) 23개 리로 체제를 갖추었다.

서흥의 산업 편집

농업이 주업으로서 밭이 많으며 밀·두류·조·메밀·사과·인삼·고치·소 등의 산출이 많고, 인삼은 개성 삼업지의 연장지대이다. 또한 양잠업이 성대하고, 임산물로는 신탄(新炭) 생산이 많았다.지하자원으로는 아연광(亞鉛?)·석면·중정석(重晶石) 등이 있으며, 아연은 은화(銀華)광산에서 난다. 제조업으로는 제사·양조·유기제조 등이 있다.

수안군 편집

수안의 자연 편집

遂安-自然

황해도의 북부에 위치하고 언진·정방 양 산맥이 북과 남에 동서로 병행하여 산악이 중첩하고 있다. 즉 북쪽에는 언진산(1120m)·가덕산(879m)·천자산(天子山:812m)·증봉산(甑峰山:878m) 등이 솟아 있고 군 남부에는 감박산(甘朴山:626m)·득룡산(得龍山:523m)·오봉산(五峰山:642m) 등이 솟아 있다.하천은 언진산맥을 분수계로 하여 북부에 대동강계의 남강이 북쪽의 도계를 겸한 자연 군계를 이루고, 그 지류 율리천이 중앙부의 천자산에서 발원하여 북서류하며 군의 북반부를 관개하고, 남부는 예성강의 본 지류에 의하여 관개되어 비교적 넓은 수안분지가 발달하고 있다.

기후 편집

내륙산간에 있어 기온의 교차가 심한 내륙성을 나타낸다. 연평균 기온은 8.7 이며, 1월 평균 기온은 -8 , 8월 평균 기온은 25.5 이다. 강수량은 1,123㎜로 비교적 많다.

수안의 연혁 편집

수안군의 한사군을 거쳐 고구려 때에는 고소어(古所於)·장새현(璋塞縣)이었으며, 신라 때에는 서암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초에는 수안현(遂安縣)이 되었다가 현종(顯宗) 때 곡주(谷州)에 속하였으며, 후에 다시 현령(顯令)을 두었다. 충선왕(忠宣王) 때에는 원(元)의 환관 이대순(李大順)이 청하여 수주(遂州)로 승격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조선 초에 수안군이 되었다. 관할구역은 수안면과 율계·대성·천곡·수구·도소·공포·연암·대오 등 9개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명승고적으로는 언진산·증봉산·남강협곡·용담·가토사·영천사·함굴암·대평면 고분·수안 성지 등이 있다.군내 9면(수안·율계·대성·천곡·수구·도소·공평·연암·대오)을 관할한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편집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연암면·공포면·수구면·도소면과 대오면의 일부 지역을 연산군에, 율계면 일부 지역을 연탄군에 각각 넘겨주고, 수안면·대성면과 천곡면·율계면·대오면 일부 지역 및 신계군 사지면 일부 지역을 합쳐서 이루어졌다. 1954년 10월에는 곡산군 서촌면 일부가 평원리에 흡수되었다. 1993년 현재 1개 읍(수안) 17개 리 1개 노동자구로 이루어져 있다.

수안의 산업 편집

일반 주민은 대부분 농업을 주업으로 삼고 임업·축산업을 부업으로 하고 경지의 대부분은 밭으로 쌀의 산출도 있으나 밭곡식이 많으며 조·콩·팥·밀·메밀 생산이 많다. 그리고 임산물에 있어서는 밤(栗:약률)의 명산지로 알려지고 잣·신탄의 산출이 많고, 소·돼지·양봉 등 축산업도 성하다.본 산업의 특색은 광업으로 금·구리·창연·텅스텐·몰리브덴·납·철·유화철·마그네사이트·각종 희유 원소광 등의 매장이 많고, 특히 홀동(忽洞)·수안(遂安:楠亭)의 2광산에서 금을 비롯하여 각종 광물의 산출이 많기로 유명하다.홀동금광(忽洞金鑛)은 수안군 수구면 보광리(寶光里) 홀동에 소재하며, 이 광산의 개발의 역사는 오래나 구한시대 1905년 영국인 아더 레우에렌 피어스(A.L.Pierce)가 특허를 받아 재개광하고, 1908년부터는 미국인 H. 콜브란과 공동 경영의 한성광업회사 소속이 되어 1937년까지 운영되었다. 그 후 일본 산금진흥회사에 인계되어 운영됐으며, 1908 1919년 약 10년간이 전성시대이고 1932년 13만 4591g을 생산하였다.광상은 화강암과 상원계(祥原系) 석회암의 접촉면에 산출되는 접촉광상이고 금광에 수반하여 창연(蒼鉛)·납·구리·유화철·금운모·석면·석고·각종 희유 원소광을 산출하며, 부근 석달리(石達里)에서는 텅스텐 산출이 많다. 공산물로는 도자기·옹기·창호지·견직물의 가내수공품이 있다.

곡산군 편집

곡산의 자연 편집

谷山-自然

황해도의 동북단 황해·강원·함남·평남 4도 사이에 끼어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고원이나 중앙이 낮아 분지를 이루고 있다. 즉 낭림산맥의 지맥 백년덕(百年德)산맥이 동북쪽에서 뻗어와 함남과의 도계에 일대 장벽을 이루어 두무산(杜霧山:1,186m)·동백년산(東百年山:1,246m) 등이 솟고, 북쪽 평남과의 도계에는 국화 산맥이 뻗어 하람산(霞嵐山:1,486m)·물금산(勿禁山:1,110m)·증봉산(甑峰山:1,179m)·사방산(四方山:975m) 등이 솟아 있다. 동쪽 강원도와의 도계에는 마식령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입암산(立岩山:1,107m)·덕업산(德業山:1,019m) 등이 솟아 있다. 남쪽으로 트인 곡산·신계 구조곡(構造谷)에는 현무암이 분출, 약 320㎢나 되는 용암대지를 이루어 예성강 상류를 가로막아 예성강 상류의 물은 부득이 서쪽으로 빠져 대동강지류 남강에 합류하게 되는 까닭에 남강은 협곡을 흐르고 곳곳에 기경(奇景)을 나타내며 유역에 곡산 분지가 있다.

기후 편집

도내에서 기온의 교차가 가장 심하고, 대륙성 기후로 연평균 기온 9.2 , 1월 평균 기온 -9.3 , 8월 평균 기온 24.7 이다. 지형성 강우가 많아 연평균 강수량 1,250㎜로 도내 제일의 다우지이다.

곡산의 연혁 편집

고구려 때 십곡성(十谷城:德頓忽·谷城·古谷郡)이라 하고 신라 경덕왕 때 영풍군의 진서현이 되었으며, 고려에 와서 곡주로 고치고 조선 태조 2년 현비 강씨의 고향인 까닭에 곡산부로 올렸다. 그 후 태종 2년(1402) 곡주군으로 낮추고 다시 곡산군으로 되었으며 1895년 일시 개성부에 속했다가 1896년 다시 곡산군으로 환원되었다.명승고적은 해서 금강(海西金剛:선암∼양덕)·호로천(湖蘆泉)·용봉(龍峰)·고달사(高達寺)·자하담(慈霞潭) 등이다.군내 12면(곡산·운중·동촌·도화·서촌·화촌·봉오·상도·하도·윤령·부미·청계)을 관할한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편집

북한은 8·15 이후 1개 읍(곡산), 20개 리로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곡산의 산업 편집

농업을 주산업으로 하고 쌀 산출도 있으나 밭이 많아 조·밀·콩·옥수수·감자 등 전곡의 산출이 많고, 고래로 담배의 명산지로 알려져 있다. 또 양잠·양봉·소의 사육도 성하다. 임업에 있어서도 도내 제일의 목재·신탄 산지로 알려졌다.광업은 지하자원으로 텅스텐·몰리브덴·납·아연·창연·금 등이 있고 텅스텐광은 철망간중석(黑重石)으로 이령면 동백년산을 중심한 기주(箕州)·백년(百年)·대동(大同)·곡산(谷山) 광산에서 한때 전국의 80%를 산출했다. 또 이들 광산은 몰리브덴광과 전기석을 수반하고 납·아연광은 부미면 소노 광산에서, 금은 하도면에서 산출이 있다.

옹진군 편집

옹진의 자연 편집

甕津-自然

남·북이 분단되기 전 황해도의 서북단에 위치했던 군. 북부로부터 멸악산맥의 지맥이 미쳐 북쪽 경계에 학산(鶴山:358m)·수대산 등이 솟아 있으나 전역에 걸쳐 노년기의 구릉이 기복하여 물결모양을 이루고 침식에 의한 소평야가 발달하였다. 하천은 짧고 작으며 수량(水量)도 적으나 강령천을 비롯한 몇 개의 하천은 수리조합을 만들어 관개에 크게 이용되고 있다.해안은 굴곡이 심하여 모식적(模式的) 리아스식 해안이며, 대소 70여 개의 섬이 흩어져 있어 침강 해안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용호도·연평도·소강포·부포 등의 양호한 투묘지를 제하고는 간석지가 많아 만구(灣口)를 손질하면 간척지·염전 등에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주요한 섬은 용호도, 순위도, 기린도, 대·소연평도, 대·소압도, 백령도, 대·소청도 등이다.

기후 편집

해양에 돌출한 반도와 도서인 까닭에 온난하나 강수량은 적다. 연평균 기온 10.7 , 1월 평균 -4.9 , 8월 평균 25.3 , 연평균 강수량 884㎜이다.

옹진의 연혁 편집

옹진군과 강령군을 합한 것으로 한사군 시대에는 낙랑군 및 대방군에 속했다. 현종 때 현을 두었고 조선 태조 6년(1397) 진을 두었다가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고종 32년(1895) 군이 되었다.1914년 강령군을 합하여 내려오다가, 1945년 8·15 광복 후 북위 38 선으로 국토가 분단됨에 따라 38 선 이북의 가천면·교정면의 2/3가 북쪽에 속하고 그 대신 벽성군의 대거면과 월록면의 1/3이 가좌면의 일부 및 해남면·동강면·송림면 전부, 장연군의 백령면 전부를 합하였으나 1954년 7월 휴전 협정 성립 후에는 송림면의 연평열도·우도·백령면 등 섬들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부 미수복지로 되었다. 그리하여 일부 수복지구는 이 때부터 황해도에서 경기도 관할로 변경되었으며, 1973년 부천군 영종·북·용유·덕적·영흥·대부 등 6개 면이 편입되었다. 1974년 백령면의 대청리·소청리를 합쳐 대청면을 신설하였다. 1995년에는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으며 8·15 광복 전 옹진군은 옹진읍·가천면·교정면·동강면·동남면·봉구면·부민면·북면·서면·송림면·용연면·용천면·해남면·흥미면 등 1개 읍 13개 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편집

북한은 1952년 옹진읍·북면·서면·용천면·교정면·가천면과 동남면·대거면·대탄군 일부를 병합하는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다. 1읍 23개 리 3개 노동자구로 되어 있다.

옹진의 산업 편집

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었으나 옹진과 온천의 양 수리조합과 용연(龍淵)·서면(西面)·용천(龍泉)면 연해의 간석지 간척사업으로 논의 면적이 확대되고, 토지가 개량되어 쌀 생산이 급격히 증가되었다. 콩·밀·조·고구마·면화 등의 산출도 많고 감의 산출이 유명하다.임업은 비교적 성림지(成林地)가 많고, 흥미면·용천면·순위도를 비롯한 각 도서에 미림(美林)이 많아 목재도 산출한다.연안과 도서 주민 중에는 반농반어(半農半漁)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으며 연해에는 육붕(陸棚)과 뱅크(bank:堆)가 많아 어족이 풍부하여 조기·새우·갈치·멸치·도미·광어·숭어 등의 어류가 많이 잡히는데 특히 5 6월에는 연평도를 중심으로 한 연안의 조기잡이가 유명하다. 또 김·미역·파래 등 조류 바지락·대합·굴 등 패개류의 산출이 많으며 용호도를 중심으로 한 김 양식업과 용매도(龍媒島)의 바지락·대합조개 양식도 유명하다. 주요 어항으로는 부포(釜浦)·소강(蘇江)·연평 등이 있다.또한 본군에는 금·은·연·아연·구리·철광·대리석·규사 등의 매장량이 많으며, 옹진광산, 북면광산·해주광산 등의 금·은, 소연평도의 자철광, 순위도의 규사, 기린도·소청도의 대리석 등이 있고, 옹진광산의 금광과 특히 순위도의 규사는 유리의 원료로서 그 질이 좋으므로 유명하다.

개성시 편집

개성의 자연 편집

開城-自然

서울 서북 78㎞ 지점에 위치하며 남북이 분단된 이후 휴전선 북한지역에 속하게 된 시. 예성강과 임진강 하류 사이에 전개된 개성분지에 발달한 고려의 옛 서울인 모식적 위곽도시(圍廓都市)이다. 이 분지는 북쪽에 송악산과 자남산, 서쪽에 오송산과 야미산, 남쪽에 용유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후 편집

기후는 온화한 편이나 한서의 차가 심하고 강수량이 비교적 많다. 연평균 기온은 10 11 이고 연 강수량은 1,200 1,400㎜이다.

개성의 연혁 편집

고구려 때 부소갑(扶蘇岬), 신라 때 송악(松嶽)으로 불렸다. 고려의 서울로서 일명 송악(松嶽)·송도(松都)·개경(開京)이라고 불렀다. 고려 태조 왕건이 태조 2년(919)이곳에 수도를 정하고 개성군과 송악군을 합쳐서 개주로 하였다. 후에 개경으로 고치고 성종 14년(995)에는 개성부로 고쳤다. 현종 9년(1018) 부를 폐하고 현령을 두어 정주·덕수·강음의 3현을 관할하게 하여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속하게 하고, 경기라 칭하였다. 문종 16년(1062)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를 두었고 공양왕 2년(1390)에는 경기를 좌·우도로 나누었는데 개성부는 우도에 속했다. 1394년 송도개성유후사로 고쳤고 세종 20년(1438) 개성유수(留守)로 고치고, 세조 139년(1467년) 경기에 예속시켰다. 고종 32년(1895) 개성부가 되고 1906년 군이 되었다. 1930년 송도면과 주변 지역을 합쳐서 부를 만들고 나머지 땅을 개풍군이라 하였다. 1949년 개성시로 개칭되었으나 휴전 이후 미수복지구로 남아 있다.

개성의 산업 편집

개성분지는 비옥하고 기후와 토양이 농업에 유리한데 특히 인삼 재배에 적합하여 근세에 이르러 고려인삼의 명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광복 전에는 전국 인삼 식부 면적의 약 58.3%를 차지했다. 개성 인삼은 외국산에 비하여 품질이 좋을 뿐만 아니라 균형적 형태를 갖추어 수요자의 기호에 맞아 중심 산지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인삼 외에 약초·채소도 재배하고 배·자두·복숭아 등도 난다. 공업에 있어서는 섬유공업이 성한데 메리야스·섬유 제품도 행한다.그 밖에 도자기·고무·식료품·인삼 가공·양조 등 공장이 있다. 또 화강암 지대이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석재를 생산한다.서울이 송도에서 한양으로 옮겨지자 종래 영화를 누렸던 시민들은 사관(仕官)의 길을 잃게 되자 경제적 활약으로 갱생의 길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행상으로 조선 500년 동안 상업계의 중진이 되었으며, 이른바 개성 상인의 조직적인 상업 경영은 상업조합·금융제도의 발달을 보게 되었으며 오늘날의 복식부기와 어음에 해당하는 개성 부기와 거래지(去來紙)를 창안하여 사용하였던 것이다.

개성의 교통·관광 편집

경의선과 간선도로가 남북으로 통하고 기타 도로망이 각지방으로 발달하여 교통은 편리하다. 송도는 고려왕조 430년간 수도였던 만큼 유적지가 많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다 없어지고 남대문을 비롯한 선죽교 등 몇 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이태조 3년에 건조한 남대문은 아직 있으며 그 누상에 600여년 전의 대범종(大梵鍾)이 있는데 우리나라 명종 중의 하나이다. 자남산 동쪽에는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태조의 아들 방원에게 참살당한 유명한 선죽교가 있다.개성 고적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고려 왕궁지(王宮址) 만월대(滿月臺)인데 계류를 끼고 배후에 송림이 울창한 기암의 송악산을 등지고, 또 송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승지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초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그 밖에 경덕궁 등과 많은 전각(殿閣)의 유적이 있다. 개성 북방 16㎞ 지점 천마산(天摩山:762m) 기슭에 개성 삼절의 하나인 설악산의 대승폭포, 박연폭포가 있다. 높이는 약 20m이고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 지름 40m여의 고모담이 있다. 부근에 진귀한 유적지가 많이 있다.

개성직할시 편집

開城直轄市

북한은 1954년 10월 30일 개성시를 인접군인 개풍·판문·장풍 등 3개 군을 편입하여 개성직할시로 승격시켰다. 1967년에도 역전동·부산동·남산동을 신설하고 동흥동 일부를 선죽동에, 관훈동 일부를 동흥동에, 남안동 일부를 동현동에, 만월동과 북안동 일부를 태평동에 각각 편입하였으며 개성시·개풍군·판문군·장풍군의 1시 3군 62리 24동이 있다(2000.1). 시 면적은 1,308.63㎢, 인구 42만 2,000명이다. 북쪽으로 송악산·전봉산 등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임진강, 서쪽으로는 예성강이 흐르며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 제3의 도시이다.

개성만월대 편집

開城南大門

개성직할시에 있는 기생 내성(內城)의 남문(南門)으로 1391년에 착공하여 태조 3년(1394)에 완공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보수를 했으며, 고종 4년(1900)에 크게 개수했다. 1950년 6·25전쟁 때 파괴되어 1954년에 다시 복구하였다.내성은 태조 2년(1393)에 쌓은 석성(石城)으로 남대문·동대문·북소문 등 7개의 문과 두 곳에 수구문(水口門)을 설치하였다. 남대문은 돌로 된 축대 위에 있는 목조단층 문루로서 정면 3칸(12.63m), 측면 2칸(7.96m)이다.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화강석을 쌓아 만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문(虹霓門)을 만들었다. 문루의 네 모서리의 기둥들을 약간 안쪽으로 눕혀 건물을 안정되게 보이도록 하면서 건물의 강도도 높여 주었다. 지붕은 겹쳐마의 합각지붕이고 공포(?包)는 안팎 3포로 짜올려 고려 말기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선죽교 편집

善竹橋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교(石橋). 구명은 전시교(善地橋)라 하였으며, 다리의 동쪽에 한호(韓濩) 글씨의 비(碑)가 있다.돌기둥과 노면(路面)이 맞닿는 부분에는 시렁돌을 철도의 침목처럼 올렸으며, 돌기둥 위에 마련된 노면에는 양쪽 가에 긴 난간돌을 놓았고 그 사이를 여러 줄의 판석(板石)으로 깔았다. 노면 위에는 교량의 난간주 구실을 하는 돌기둥을 3단으로 쌓았다.이 다리는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를 문병하고 오다가 방원(芳遠)이 보낸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철퇴를 맞아 피살된 곳으로 유명하다. 이 돌다리에서는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공민왕릉 편집

恭愍王陵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봉명산의 무선봉 중턱에 자리한 2기의 무덤. 서쪽 것이 고려 31대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이며, 동쪽 것이 왕비 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이다. 무덤구역은 3개의 층단과 맨 아래의 경단으로 이루어졌다.공민왕은 1365년 왕비가 난산으로 죽자, 자신이 직접 주관하여 9년이란 오랜 기간에 걸쳐 이 방대한 무덤공사를 벌였는데, 능의 건축과 설계는 당시 고려의 수학·천문지리·석조건축물·조형예술 수준이 집대성되었다.

현화사 칠층석탑 편집

玄化寺七層石塔

북한 국보급 문화재 제41호. 개성시 방직동에 위치한 현화사 7층석탑은 본래 개성시 장풍군 영추산 남쪽 기슭의 현화사에 있던 탑이다.현화사는 고려 현종 2년(1011)에 창간되었는데, 어려서 고아로 자란 현종이 장성하여 왕이 된 후,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절이다. 절의 사적을 새긴 현화사비에 의하면 현화사탑은 1020년에 세워졌다고 한다.탑은 높이 8.64m로, 규모가 크면서도 균형이 잡히고 세부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이 탑은 차례줄임이 적고 높이 솟은 점, 처마선의 휨이 심한 점에서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첨성대 편집

瞻星臺

개성시 송악동 고려의 옛 궁성터인 만월대 서문 밖에 있는 건축물로 고려 때 세운 것이다. 5개의 화강석 기둥 위에 돌마루를 깔았는데 매개 기둥은 어느 것이나 다 길이가 같고, 자름면이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첨성대의 높이는 2.8m이고, 한 변의 길이는 2.6m이다. 기둥들은 정방형의 네 귀에 각각 세워지고 나머지 하나는 정방형 복판에 세워져 있다.돌마루는 돌기둥과 더불어 교묘하게 사개를 틀어 맞추어서 견고하고 단정한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그의 남북쪽 두 측면에는 쇠붙이를 끼우는 방법으로 돌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 윗면 서쪽에는 둥근 구멍 2개가 더 뚫어져 있는데, 이 구멍들은 관측기구들을 설치하는 데 쓰인 것 같다.돌에 의해 사개를 교묘하게 짠 것이라든가 쇠붙이 이음을 적용한 것은 당시 우리나라의 구조물 축조 분야가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만월대터 편집

滿月臺-

개성시 송악동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시대의 왕궁터로 919년에 창건되었다. 왕궁은 황성부분과 궁성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만월대라고 할 때에는 왕궁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궁성부분, 그 가운데서도 관료들이 조회를 하던 회경전을 중심으로 한 중심부의 주 건축군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왕궁 안에 있던 궁성 성벽 자리는 현재 동·서·북쪽 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벽은 석비례와 진흙을 엇바꾸어 여러 겹으로 다져 쌓았다.만월대 유적은 고려시기의 우수한 건축예술이 남김없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궁전건물의 설계에서 일정한 비례관계가 적용된 것, 건물배치에서 지형조건을 잘 고려한 것 등은 고려시기의 건축술이 높은 수준이었음을 의미한다.

숭양서원 편집

崧陽書院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 소재. 조선시대의 지방 사설 교육기관. 고려말의 유학자 정몽주를 기념하여 1573년에 그가 살던 집에 서원을 세우고 문충당이라고 하였다. 숭양서원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1575년부터이다.산 경사면에 여러 층의 축대를 쌓고 건물을 배치하였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첫 문이 삼문이고, 삼문 안에 동재와 서재, 강당이 있으며 강당 뒤에 사당이 있다. 서재와 등을 지고 부속건물이 있다.건물은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았으나 지형을 합리적으로 이용하여 크고 작은 건물들을 적절히 배치하고 조화시켜 높은 건축술과 예술적 재능을 잘 보여준다. 이 서원건물은 사설서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관음사 편집

觀音寺

개성시 산성리 천마산 기슭 소재. 박연폭포 뒷골짜기에 있는 절로서 970년에 처음 세우고 1646년에 고쳐 세웠다. 관음사에는 대웅전·요사·부속건물과 7층돌탑 등이 있다.대웅전은 앞면 3칸(8.4m), 옆면 3칸(6.61m)이며, 약간 배가 부른 두리기둥 위에 바깥 7포, 안 9포로 두공을 짜올렸으며, 드물게도 우진각 지붕을 하였다. 건물안 천장은 비반자와 소란반자이다. 대들보와 중보 사이를 통나무로 조각한 연꽃동자기둥으로 받치었는데 섬세하고 세련되었다. 문은 한 칸에 세 짝씩 달았는데 모란꽃·연꽃·열십자무늬·나뭇잎무늬 등을 조각하여 문살로 하였다. 뒷면에는 각각 한 장의 판자로 연꽃무늬와 사슴을 타고 앉은 불상을 누각한 문짝이 있다. 내부에는 잘 만든 닫집이 있다.

사리원시 편집

사리원의 자연 편집

사리원시의 북부에는 정방산(481m), 한철산(458m), 발양산(440m)이 솟아 있다. 사리원 시내에는 경암산(139m)이 있고, 남쪽 변두리에는 미아산(125m)이 솟아 있다. 사리원시의 한복판과 변두리는 평탄한 평야로 되어 있으며, 이 평야는 남쪽으로 봉산나무리벌, 서쪽으로 재령나무리벌과 잇닿아 있다. 사리원시에는 정방천·상매천 등의 하천들이 있으며, 서흥강을 막아 건설한 운하와 두 개의 큰 경암호가 있다. 산림은 군 전체 넓이의 약 21%를 차지한다. 주요 수종은 소나무·참나무·아카시아나무·잣나무·노가지나무 등이다.주요 기반암은 석회암·점판암·혈암·석영반암 등이며, 지하자원은 갈탄과 차돌점바위가 있다. 토양은 대부분 지역이 산림갈색토양이다.

기후 편집

연평균기온은 10.1 , 1월 평균기온은 -6.8 , 8월 평균기온은 24.8 이며, 연평균강수량은 919.5㎜이다. 첫서리는 10월 17일, 마감서리는 4월 19일에 내린다.

사리원의 연혁 편집

사리원시는 조선시대에 황해도 봉산군에 속해 있었다. 해방 이후 1947년 6월에 봉산군에서 갈라져 사리원시로 되었다. 1954년 10월에 사리원시는 황해도가 황해남·북도로 갈라지면서 황해북도의 소재지가 되었다. 현재 26동 5리를 관할한다.

사리원의 산업 편집

방직공업의 중심지로 사리원방직공장은 방적·연사·방직·나염 부문을 갖춘 대규모 종합공장이다. 특산물로는 미나리와 이 지방에서 재배해 온 승리포도가 있다.

사리원의 교통 편집

사리원시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에 있다. 시에는 평부선, 황해청년선, 서사리원선과 평양시와 개성시, 황해남도를 잇는 도로가 있다. 길성포를 통하여 재령강과 대동강을 따라 송림, 남포, 평양까지 배가 다니고 있다.

경암루 편집

景岩樓

황북 사리원시 경암동에 있는 조선시대 누정. 당싱렌 관청의 누정으로 사용됐었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아담하고 아름답다. 사리원시 중심에 솟은 명승지인 경암산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정자이다.'봉산군지'에 보면 경암루는 1798년(정조 22년)에 봉산군 관아건물로 지은 동헌인데, 원래는 군내 통성면 목정리에 있던 것을 1917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전쟁 중에 파괴되었던 것을 1954년과 1955년 2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여 옛 모습을 되찾도록 하였다.정면 3칸(8.36m), 측면 2칸(4.94m)의 겹처마합작집인데, 바닥에는 널마루를 깔고 사방 돌아가면서 난간을 둘렀고 중단청을 하였다. 천장은 소란반자와 굵은 나무를 건너지르고 그 위에 나무개비를 바로 펴놓은 다음 이를 엮어 진흙으로 두껍게 바른 고미천장의 두 가지 형식을 조화있게 배합하였다. 비탈진 산자락에 붙여 지었기 때문에 뒤는 1층이고, 앞은 2층으로 되어 있다. 2층에는 나무 흘림기둥을 세우고, 1층에는 네모난 화강석기둥을 세웠으며, 모든 기둥들을 정면·측면 할 것 없이 같은 간격으로 벌려 놓았다. 기둥 위에는 꽃가지형의 2익공두공을 얹고, 액방 위에는 연꽃무늬화반을 놓았으며 모루단청으로 장식했다.경암루는 건축솜씨도 뛰어나지만 경암산의 아름다운 자연경치와 잘 조화를 이루었고 시내를 바라보는 전망이 일품이다.

정방산성 편집

正方山城

한반도 중부를 가로지른 정방산맥 서쪽 끝 정방산의 산봉우리인 기봉산·이난봉·돼지골 등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둘레가 12㎞나 되는 산성으로 고려시대에 축조했다.이 산성은 우리나라 서해안 일대에서 남북으로 통하는 기본통로의 요지인 황해도 지방의 가장 큰 요새가 되어왔다.

성불사 편집

成佛寺

북한 국보급 제31호. 황해북도 사리원시 봉산군 정방산성 안에 위치한 고찰. 통일신라 말기인 898년(신라 효공왕 2년)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현재는 1327년에 지어진 응진전과 극락전·명부전·청풍루·운하당·산신각 등의 6채의 건물과 오층석탑, 사적비 등이 남아 있다. 사적비에 의하면 1327년(고려 충숙왕 14년)에 나옹왕사가 중창했는데, 이때 건물의 중창뿐 아니라 석탑을 비롯해 많은 석물을 조성했다고 한다.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선조 2년에 설숭대사가 중수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영조 27년에 찬훈대사가 다시 중수했다. 1924년에도 명부전·향로전·청풍루·극락전·응진전 등을 수리했다.

성불사 응진전 편집

成佛寺應眞殿

성불사의 대표적 건물. 경북 영주 부석사, 황해북도 연탄 심원사 보광전, 평안북도 박천 심원사 보광전 등과 함께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의 하나로 고려시대를 대표한다. 1327년(고려 충숙왕 14년)에 다시 지은 응진전은 내부는 고려양식이지만 조선시대에 수리를 거쳐 고려와 조선양식이 모두 남아 있다. 따라서 응진전은 극락전과 함께 고려 후기의 건물이고, 그 밖의 건물들은 조선시대에 세웠다.앞면이 20m나 되는 긴 건물이면서도 균형이 잘 짜여져 있을 뿐 아니라 줄지어선 기둥들과 처마밑장식, 아름다운 두공의 짜임으로 전체 건물이 부드러우면서도 웅건하다. 건물은 앞면 7칸(22.75m), 옆면 3칸(6.7m)이며 기둥은 배부르고 3포 두공을 얹어 남북으로 긴 배집으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두공은 직선적이고 간결한 소혀 모양의 산미와 첨차가 정밀하게 맞물려 가볍게 도리를 떠받들게 하였으며 제공과 첨차, 첨차와 첨차, 첨차와 장여 사이에는 접시받침이 있는 소로를 받쳐 건물을 단정하고도 아름답게 하였다.또한 장여 윗면에 오목하게 홈을 파고 둥근도리를 맞추어 놓았으며, 대공좌우에는 보기좋게 휜 활개를 받쳐놓았고 박공은 길게 뽑고 풍판을 달았으며, 천장은 통천장이다.이러한 건축양식은 고려건축의 특징으로서, 처음 지은 이래 여러 차례 개축과 증수가 있었음에도 응진전의 고려적 성격은 그대로 남아있다.응진전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옛 건물 가운데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서 뛰어난 건축술과 높은 예술적 기교로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