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서양음악의 기초와 역사/서양음악의 역사/근대음악

근대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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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音樂

현재의 시점, 즉 20세기 말에서 생각하는 근대음악이란 대체로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과 20세기 초의 20년 동안 합계 30년에 이르는 동안의 음악을 가리켜 말한다. 개개의 작곡가는 연대적, 지역적으로 본론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기간의 음악에서 두드러진 2대 경향만을 살피기로 한다.

(1) 19세기 후반의 유럽 음악은 바그너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고 있었으나, 여기에서 탈피(脫皮)하여 초극(超克)하려는 시도가 작곡기법의 면에서는 종전의 조성음악(調性音樂)으로부터 비조성음악을 출현시킨다는 근본적 전환을 가져왔다. 독일의 작곡가보다는 바그너의 영향권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드뷔시의 개혁, 인상주의의 창시는 특히 뛰어났으며, 영향력은 크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의 반(反)낭만주의 운동으로서의 베리스모도 주목된다.

(2) 낭만파에서 현대에의 가교적(架橋的) 역할을 하는 과도적인 음악의 정황(情況)으로서 특징적인 것은 민족주의의 발흥이다. 민족적 요소를 중시하는 사상은 원래 낭만파의 발상(發想) 중의 하나이나, 음악사에서는 후진제국, 아메리카,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슬라브계 각국 음악의 자각을 전제로 하여 갑자기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음악사에서는 드뷔시나 또한 보다 현대적인 라벨, 활동기가 장기간이었던 R. 슈트라우스 등은 다음 세대에 대한 영향이나 관련을 고려하여 '현대음악'에서 다루었다.

독일·오스트리아의 근대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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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逸·Austria 近代音樂독일계의 작곡가로서 근대음악에 넣을 수 있는 사람들은 동시에 후기낭만파 최후의 대표자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며 볼프, 말러, 피츠너, R. 슈트라우스, 레거 등을 들 수 있다. 그들로부터 쇤베르크에 이르는 길은 유럽 음악사의 한 주류로 볼 수 있다. 즉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고전적 기능화성의 체계가 극점(極點)에 이르러 붕괴하고 기능화성법이라는 근본 전제(前提)를 12음의 기법으로 바꾸어 가는 과정을 말하며, 이 흐름이 순수기악보다도 오히려 오페라나 가곡 등 타율적 음악에 의하여 이끌려 왔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그들이 공통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바그너의 <트리스탄>의 반음계인데, 각 작곡가의 자질에 따라 볼프는 리트에, 말러는 칸타타풍의 오케스트라 반주가 있는 가곡으로, 레거는 바로크의 구성원리로 복귀하면서 주로 기악곡에서 독자적인 경지를 보이고 있다.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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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Mahler

빈 출신인 말러(1860-1911)는 볼프, 레거와 함께 현대에의 과도기 속에서 진보적인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과도기에서 흔히 있을 수 있듯이, 특히 세대적으로 젊은 레거 등은 아직 충분한 검토롤 받지 못하고 있다. 말러는 주로 가창(歌唱)이 수반되는 교향곡과 가곡의 작곡가로서 인정받고 있다. 낭만파시대의 관현악곡은 리스트, 바그너, 브루크너의 선을 따라 변용(變容)하면서 형식의 면에서는 대규모로 팽창하였지만, 브루크너의 제자인 말러의 작품에도 마치 전인류의 이상을 포함이라도 하듯이 퍼져 있다. 그러나 <제8교향곡>과 같은 방대하고 기념비적인 것이 되면 작곡가의 의지와 연주법이라는 실제적인 면 사이에 우선 모순이 나타난다. 그리고 낭만주의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커짐에 따라 리스트나 브람스, 바그너 등의 작품에 깃들이고 있던 염세적 경향이 개인적 사정과 아울러 말러에게도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서 텍스트는 완전히 낭만파적 내용의 것이며, 형식은 보수적이나 세부의 텍스처(書法)나 관현악법은 매우 새로운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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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go Philipp Jacob Wolf

역시 빈 출신인 볼프(1860-1903)는 청년기에 직접 바그너의 음악을 체험한 뒤 평생을 두고 바그너를 존경하였다. 1888년 이후 유명한 '영감(靈感)의 연출'이라는 상태로 급격히 많은 가곡을 작곡하였고, 오늘날 그것들은 모두 높이 평가되고 있다. <메리케 가곡집>, <아이헤레돌프 가곡집>, <괴테 가곡집>, <스페인 가곡집>, <이탈리아 가곡집>, <미켈란젤로 가곡집>의 제명 등에 나타나 있듯이 그는 한 시인의 시를 집중적으로 작곡하는 특징이 있다. 기법으로는 시의 내용이나 언어에 깊이 결부된 낭창법(朗唱法)과 반음계법, 화성법 등에 매우 진보된 방법이 제시되었으며, 독일 리트나 바그너의 전례(前例)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

레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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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Reger

레거(1873-1916)는 볼프나 말러보다 젊은 세대, 즉 쇤베르크나 스크랴빈의 세대에 속하여 브람스와 힌데미트를 잇는 작곡가이다.

그는 스승인 음악학자 리만의 영향으로 절대음악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정신적으로는 바흐를 통하여 바로크에 접근하였다. 화성을 다성적으로 다루는 브람스의 텍스처를 계승하였으며 또한 거기에 반음계적인 선을 우선적으로 나타내도록 하고 있다. 레거에 의하여 절대음악의 기법은 표제음악이 개척한 분야에 매우 접근하였다.

불과 43세의 짧은 일생을 산 그는 후기에는 브루크너의 형이상학적 세계나 모차르트의 이상적인 음악세계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 무엇인가 암시적이라 하겠다.

영국의 근대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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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國-近代音樂

17세기의 헨리 퍼셀 이후, 영국에는 특출한 대작곡가가 없었다. 18세기에는 헨델이나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등이 중심이었고, 19세기에 이르러서도 아직 유럽 대륙의 음악가들의 유력한 시장으로서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엽부터 서서히 영국 출신 작곡가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E. 엘가에 의하여 영국의 낭만주의적 경향은 하나의 정점에 이르렀다. 대륙과의 교류는 우선 M. W. 발프(1808-1870)나 W. 워레스(1813-1865)와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작곡과 연주의 두 면에서 이루어졌으나, 여기에 계속해서 C. H. 퍼리(1848-1918)는 옥스퍼드 대학 교수, 왕립음악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또한 <그로브 음악사전>의 편찬에도 관여하여 영국의 음악을 위해 크게 공헌했다.

퍼리와 같은 시기의 A. S. 설리번(1843-1900)도 그로브에 협력한 한 사람으로, 작곡면에서는 대본작가 W. S. 길버트와 협력하여 이른바 길버트 설리번 오페라를 많이 발표하여 영국 오페레타의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작품으로는 <배심재판>, <군함 피나포어>, <미카도> 등이 있다.

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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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Elger

에드워드 엘가(1857-1934)는 영국에서 퍼셀 이후의 작곡가로서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으나, 공정한 입장에서 볼 때 외국에서는 그토록 좋은 평을 듣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영국음악의 르네상라는 시기에 후기낭만파의 관현악법을 반영시키면서 크게 공헌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주요 작품은 교향곡, 서곡, 오라토리오, 변주곡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프랑스의 근대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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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近代音樂

베를리오즈에 의하여 프랑스에서 진정한 낭만파 음악이 수립된 데 자극받아 점차 프랑스의 독자적인 음악을 이룩하려는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 하나의 흐름으로서 구노(1818-1893) 등에 의한 새로운 오페라 활동이 활발해졌고 독일 태생의 오펜바흐(1819-1880)는 <천국과 지옥> 등의 오페레타로 경쾌하고 절묘한 음악의 세계를 개척하였다.

한편 이탈리아와 독일의 오페라 붐의 영향을 받아 오래도록 지하에서 잠자던 가곡이나 기악곡의 작곡이 부활하였고, 동시에 그것들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나 실내악단 등도 잇달아 창설되어 연주활동이 매우 활발해졌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그때까지 이탈리아 또는 독일음악에 거의 전면적으로 지배받았던 프랑스에서 프랑스 독자의 음악에 각성하게 되고, 마침내는 짙은 영향을 미치고 있던 바그너이즘을 불식하고 드뷔시가 인상주의 음악을 수립한다는 큰 흐름의 원천이 되었다. 더구나 드뷔시의 음악은 음악사에서의 '현대'의 개막으로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움직임 속에서 구노가 준 영향은 경시할 수 없다. 특히 독특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의 비제를 비롯해서 그 후의 많은 작곡가의 작품 속에서 그 모습을 보게 된다. 또 프랑크(1822-1890)와 그의 제자들은 독일의 영향을 받고는 있었으나 매우 밀도가 높은 음악적 구축물을 창조하였고, 말로(1823-1892), 생상스(1835-1921) 등은 간결하고 알기 쉬운 표현 속에 프랑스적인 감각을 풍부히 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활동내용은 생상스에 의하여 1871년에 설립되고 훗날 프랑크가 계승한 국민음악협회가 구호로 삼은 '아르스·가리카', 즉 '프랑스 예술'이라는 말 가운데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프랑크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듀파르크(1848-1933))나 쇼송(1855-1899)처럼 가곡의 작가로서 뛰어난 일을 한 사람들도 있으나, 대부분이 교향곡이나 실내악 등의 고전적 형식을 써서 작곡하였다.

샤브리에(1841-1894)는 랄로와 함께 색채적인 화성과 관현악법에 의하여 인상주의 음악의 선구를 이루었고 계속하여 비제(1838-1875)는 오페라 <카르멘>으로 프랑스의 독자성과 그의 개성을 명백히 하였다.

프랑스적인 표현을 위한 형식의 개척과 그 달성에서 공적이 있었던 사람들로는 포레(1845-1924)와 댕디(1851-1931)를 들 수 있다. 생상스의 가르침을 받은 포레는 단선성가(單旋聖歌)와 16세기 교회 다성악의 수법을 써 독일 낭만파적 음악어법에 신선한 프랑스적 색채를 더하였다. 그의 가곡에 넘쳐흐르는 멜로디와 펼침화음(分散和音)이 수놓인 피아노곡은 그 고도의 시적 서정성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 프랑크의 우수한 제자였던 댕디는 대구성의 교향시적 작품에 걸출하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수많은 제자를 육성한 탁월한 교사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사람들이 개척하고 서서히 풍부한 자양미(滋養美)를 지니게 한 프랑스 음악이라는 토양 속에 훌륭한 꽃을 피우게 하여 독일·오스트리아의 음악과 함께 세계의 높은 봉우리를 쌓아올린 사람은 포레의 제자이기도 한 드뷔시이며, 또한 수십 년 뒤의 라벨이라 하겠다.

이탈리아의 근대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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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ia-近代音樂

19세기 전반에서의 이탈리아 오페라의 만네리즘과 저속화는 세계에서 이탈리아 음악의 명성을 실추시키고 확고한 힘으로써 대두한 독일 낭만파 음악에 그 왕좌를 물려줄 처지에 빠졌으나, 19세기 후반에 활약한 베르디의 작품은 오늘날까지 전세계의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되는 레퍼토리로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베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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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ussepe Fortunio Francesco Verdi

베르디(1813-1901)의 초기에 발표된 애국적인 오페라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압정 아래 고생하며 독립을 갈망했던 밀라노 사람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의 오페라에서 중심인물은 주로 남성이며, 더구나 바리톤이 주역 성격을 띠는 수가 많다. 이것은 애국적인 테마를 지님과 동시에 그때까지의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징이라 하겠다. 그 뒤로 점차 대중의 요망인 애국적 테마에 중점을 두는 입장에서 벗어나 이른바 중기(中期)의 성숙된 작품, <리골레토>, <춘희>, <운명의 힘> 등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1869년에는 카이로의 가극장 위촉으로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축하하는 대가극 <아이다>를 발표하였다.

베르디는 바그너와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바그너의 악극론은 극히 본질적인 문제로서 베르디의 오페라관(觀)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극과 음악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개개의 등장인물의 성격을 리얼하게 그리고 전체의 앙상블을 중시하며, 종래의 이탈리아 오페라처럼 오케스트라를 단순한 화성적 반주로 다루지 않고 바로 극적 진행을 내용적으로 돕고 등장인물의 심리를 표현하여 전체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수법으로서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인 그는 어디까지나 그침없이 이어 흐르는 멜로디를 소중히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이 잘 전달되어 성공한 작품으로 <오셀로>(1887)를 들 수 있겠다.

그는 셰익스피어, 실러, 뒤마, 위고 등 대작가의 작품을 수없이 오페라화하고 있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것은 <오셀로> 이전에도 <맥베스>를 비롯하여 <헨리 4세>,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 등 매우 많다. 이것은 거친 줄거리에만 의존하지 않고 인물의 심리에 깃든 뉘앙스나 극의 진행에 리얼리틱한 깊이가 있는 것을 추구(追求)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이 오페라로서 성공한 중요한 원인으로는 그가 대작가의 작품까지도 반드시 무대작품의 경험이 풍부한 각색가에 의하여 개서된 오페라 대본을 바탕으로 하여 작곡하였다는 점을 들고 있다.

푸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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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acomo Puccini (1858-1924)

베르디 이후의 이탈리아 최대의 오페라 작곡가다. 베르디, 바그너와 함께 오페라의 3명인(名人)으로 불린다. 그의 음악은 우미(優美), 가련한 선율로 청중을 유도, 관능에 호소하여 취하게 만든다. 대대로 음악가 집안이어서 푸치니는 5대째다. 그의 작품 중 <마농 레스코>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등이 자주 상연되고 있다.

베리스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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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ismo

眞實派, 寫實派

입센이나 졸라에 의한 문학상의 리얼리즘 영향 아래 반(反)낭만주의를 내세워 '베리스모'라 칭하는 작곡가들이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레온카발로(1858-1919)의 <광대>, 마스카니(1863-1945)의 <카바레리아 루스티카나>, 푸치니(1858-1924)의 <나비부인>, 조르다노(1867-1948)의 <안드레아 세니에>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작품으로는 베르디 등의 대가극에 비하여 약간 규모가 작으며 나약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낭만파 오페라에서 현대 오페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시도로서 그 문제의식과 노력을 높이 평가해야만 한다.

이탈리아의 기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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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ia-器樂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독일 낭만파와 프랑스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에 안티 로망, 안티 멜로드라마의 의미를 포함하여 기악이 부흥하였다.

즈간바티(1843-1914), 봇시(1861-1925), 마르투치(1856-1905) 등이 주요한 작곡가로서 그들은 오래도록 잊혀져 있던 이탈리아의 전통을 재현하여 순음악으로 복귀한다는 목표를 지님으로써 그 활동을 두고 이탈리아 음악상의 르네상스라고도 했으나, 그것의 진정한 의미로의 달성은 20세기 초엽이 되어 레스피기나 그 밖의 사람들의 활약에 기대를 걸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들이 실제로 창조한 음악은 이탈리아의 전통과는 상반하는 독일 낭만파 음악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근대에서 현대로 발전시킨 사람들이라 하겠다.

아메리카의 근대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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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rica-近代音樂

아메리카 합중국은 역사가 짧기 때문에 유럽에서와 같은 통일적 낭만주의 운동은 없다. 적어도 19세기에는 작곡가는 물론 연주의 면에서도 유럽 음악가들에 압도되어 국민양식을 창조하는 거장은 없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으나 그들의 노래는 점차 하인리히 등에 의하여 유럽풍의 작품소재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원주민은 아니나 역시 배타적인 사회에 대항해야만 했던 흑인들의 생활 속에 뿌리박고 있는 이른바 흑인영가(黑人靈歌)의 존재와 그 영향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포스터(1826-1864)는 흑인영가를 소재로 뛰어난 가곡을 작곡하여 성공한 최초의 작곡가라 하겠다.

포스터와 같은 시대의 고트샤룩(1829-1869)은 살롱 작곡가로서 유럽문화 우선의 풍조를 높였다. 그는 에스파냐풍의 화려한 작품 외에 남아메리카의 스람에서 음악적으로 자극을 받은 작품(반브라, 하바네라, 탱고 등)을 썼다.

오랜 기간을 두고 영국의 영향이 강하였던 아메리카 북동부 출신의 메이슨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선율을 써서 찬송가집을 만들었고, 또 출판활동에서는 독일음악을 우선시켰다. 그의 뒤에는 페인(1839-1906), 차드빅이 있다.

맥도웰(1861-1908)은 또 스코틀랜드계의 작곡가·피아니스트로서 리스트와 알게 되어 우선 파리와 독일에서 연마했으며 1888년 이후는 미국에서 활약하였다. 대표작인 관현악곡 <인디언 모음곡>이나 피아노곡 <숲의 스케치>는 유럽의 낭만주의적 경향을 반영시키고 있다.

그 밖에도 레플러(1861-1935), 허들레이(1871-1937) 등이 후기낭만파의 작풍을 보이는 작곡가로 손꼽을 수 있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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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hen foster (1826-1864)

최초의 토박이 미국 노래를 만든 사람이다. 소박하면서도 외우기 쉬운 멜로디와 쉽고 서정성 풍부한 가사로 된 그의 노래들은 누구에게나 친근하여 세계 어디에서나 불린다. 200곡 이상을 써써 지금 남아 있는 노래가 188곡이고 거의 자신이 작사한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스와니강> <켄터키 옛집> <올드 블랙 조> <오 수잔나> 등이 애창곡이다.

민족주의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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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族主義音樂

내셔널리즘이란 말은 '민족주의'와 '국민주의'라는 두 가지 말로 번역되어 쓰이는데, 이 두 가지 말은 다소 구분되어야 할 듯하다. 19세기의 자본주의가 융성했던 시대에 민족국가 형성의 움직임에 따라 나타난 음악상―예술상의 운동을 '국민주의'라 하였고,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친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정책에서 각국의 독립 움직임에 따라 하는 운동을 '민족주의'라 부르고 있다.

음악양식에 민족적인 것이나 국민성을 도입시킨다는 것은 19세기뿐만 아니라 훨씬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 전부를 음악이라 부를 수는 없으며 어떤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그 시대의 주요 예술사조로서 의식적으로 민족적 음악 소재를 작품화했을 경우에 그렇게 부른다.

국민주의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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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民主義-音樂

유럽의 시민혁명기에 있어서 봉건성을 타파하고 각 민족이 통일적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을 때 봉건적인 것과의 투쟁으로서 자유주의가, 또 개인의 감정이나 감각의 해방을 표현하는 낭만주의가 태어났으며 그와 동시에 각 민족의 정치적, 사회적 유대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음악상의 국민주의가 강력한 사조로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국민주의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중세 말에 이미 국민주의를 형성하고 있던 영국, 프랑스 등 이른바 선진국에 비하여 독일이나 동구(東歐) 여러 나라의 후진국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음은 당연하다.

국민주의 음악의 특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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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民主義音樂-特色

각 민족이 전통적으로 자라온 민요나 춤곡 등을 중시하는 것이 그 주요한 특색이다.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작품 속에 도입하는 경우도 많으나 그것이 지니는 에너지의 바탕이 되어 있는 음악형식이나 여러 음악어법을 쓰기도 하고, 또 민요의 가사나 전승문학(傳承文學), 혹은 전설, 고담(古譚), 역사, 자연풍토, 민중생활 등을 소재로 하기도 하며 그 시대의 국민주의적인 새로운 문학을 제재로 자국어로 된 성악곡이나 오페라, 교향시, 모음곡(組曲) 등의 표제음악을 작곡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융성은 그 때까지 음악문화의 번영이 중앙 유럽 중심이었음에 대해 주변의 각 민족 가운데에서 작곡가의 출현을 촉진시키고 바로 그것이 이른바 '국민악파'의 활약시대를 낳은 것이었다.

글린카 이전의 러시아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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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inka 以前-Russia 音樂 18세기 전반의 러시아에서는 아직 음악은 단순한 오락의 수단으로 생각되어 천한 것이라 하여 귀족이 다룰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또 순수기악보다 오페라나 가곡(가사가 있는), 무용을 위한 음악이 존중되어 왔다(이것은 후세의 러시아 음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 무렵의 음악은 거의가 외국인의 손에 의하여 존재했었으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점차로 러시아인 작곡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로맨스'라는 정서적인 감미로운 피아노 반주가 붙은 가곡 형태가 러시아적 예술가곡으로 탄생했다. 이를 낳은 것은 귀족계급의 딜레탕티즘이라 하겠다.

프랑스 혁명 이후, 음악은 겨우 예술로 생각하게 되었고 상류계급에서 작곡이나 연주에 힘을 기울인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들 귀족 아마추어 작곡가들의 딜레탕티즘이 이후에 러시아의 뿌리 깊은 전통이 되고 러시아 음악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19세기 초엽 이와 같은 작곡가에는 <꾀꼬리>로 대표되는 로맨스 작곡가 아라비에프(1787-1851)나 <빨간 사프란>으로 알려진 오페라 작가 와르라 모프(1799-1861)가 있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이 실패로 끝나고 러시아가 강국으로 크게 어필하게 되자 당시 유럽에 고조되고 있던 국민주의·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국내에서도 민족의식에 각성하여 슬라브 중심사조가 높아졌다. 상류사회에서는 "고뇌하는 세계를 구원하는 대러시아"의 문학적 사명에 적합한 강력하고 국민적이며 애국적인 작품의 욕구가 높아졌다.

그러한 결과로 음악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고 그와 같은 사명을 지닌 예술로 승격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적, 문화적 조건이 글린카를 낳았고 이어 러시아 음악의 개화를 가져왔다.

러시아 예술음악의 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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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 藝術音樂-開花(글린카와 다르고미지스키)

미하일 이바노비치 글린카(M. I. Glinka, 1804-1857)는 초기에는 이탈리아에서 도니체티, 베를리오즈 등 오페라 작곡가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 뒤로는 참된 러시아 국민 오페라의 창조를 목표로 귀국하였다. 그리고 폴란드의 침입군에 대한 러시아인의 애국 이야기 '이반스사니'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황제에 바친 생명, 1836년 초연)을 작곡하였다.

러시아 민요의 선율을 많이 사용한 이 오페라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양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였다고는 할 수 없으나 최초의 러시아 국민 오페라이다.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1842)나 그 밖의 작품도 민족적 색채에 넘쳐흐르는 국민주의 음악형태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그의 업적으로 뿌리를 뻗기 시작한 국민주의는 뒤를 잇는 다르고미지스키와 세이로프에 의하여 더욱 확고한 것이 되어 '5인조'의 작곡가들로 그 결실을 맺는다.

알렉산드르 다르고미지스키(A. S. Dargomyzhsky, 1813-1869)도 러시아 민족의 음악성을 기조로 한 몇 개의 가곡을 작곡하였고 또 그가 죽은 후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 의하여 완성된 오페라 <석상(石像)의 손님>으로 러시아어의 억양이나 악센트의 음악화, 즉 말의 뜻에 음악을 종속시키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 것 등 '5인조' 특히 무소르크스키에 미친 영향은 크다고 하겠다.

그들에게 있었던 '민족성'과 '서구의 기술'이라는 2개의 요소를 연장시켜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하는 '5인조'와 루빈스타인 형제 및 차이코프스키에 의한 '서구악파(西歐樂派)'가 다양한 꽃을 피우고 있다.

5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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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人組

'5인조'라는 것은 서구에서 쓰이는 통칭으로, 원래는 '든든한 친구'라는 이름의 그룹이었다. 조직자인 발라키프(1837-1910)는 글린카의 뜻에 공명하여 새로운 러시아 국민음악의 창조에 착수, '든든한 친구'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1862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무료음악학교를 설립하여 민간으로부터 유능한 음악가를 육성하는 것과 그 학교에서의 연주회로 '5인조'의 작품을 소개하는 일에 힘썼다.

그는 화성학이나 대위법 등의 작곡기법보다 러시아 민요의 바탕에 깔린 아름다움과 힘참을 소중히 여겨 스스로 러시아 각지를 돌며 민요채집을 하고 1866년에 <러시아 민요집>을 출판하였다.

보로딘(1833-1887)은 화학자로서 일생을 보낸 사람이나, 발라키레프와 알게 되어 1869년에 <교향곡 제1번>을 발표한 이후 적극적으로 작곡활동을 하였다. 그의 작품은 모두 동양적 색채가 짙어 국민악파의 음악으로서 전형적이라 하겠다.

퀴(1835-1918)도 축성가(築城家)로서 일생을 보냈던 사람이며 보로딘과 마찬가지로 음악가로는 아마추어이며 <대위의 딸> 등 수곡의 오페라와 소수의 관현악곡 외에는 살롱적인 소품이 있을 뿐이며 그것들은 매우 러시아적이나 다섯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작품이 적다.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는 1865년경부터 교향곡이나 기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 관현악곡 <사드코(1898)>로 이미 독자적인 스타일 ― 즉 민속적 전설을 바탕으로 한 환상성(幻想性), 극히 색채적인 오케스트레이션, 객관적 묘사 등 ― 을 전개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이포리토프이바노프, 그레차니노프, 체레프닌, 스트라빈스키, 미야스코프스키 등이 배출되었다. 또 그 사이에도 <관현악법>을 저술하였으며 그의 화성상의 독특한 색채나 관현악법의 새로움은 그의 제자, 특히 스트라빈스키 등에 영향을 주었으나 그 밖에도 라벨이라든가 레스피기 등 후세의 다른 나라 작곡가의 작품에서도 그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무소르크스키(1839-1881)는 발라키레프로부터 작곡 지도를 받아 전문 작곡가로서 성공하려 하였으나 경제적으로 곤란하여 일생을 공무원으로 지냈다. 그의 작품에는 큰 곡은 적으나 모든 곡이 러시아적 풍부함과 근대적 음빛깔이 하나로 되어 자아내는 지적인 구성과 섬세한 울림이 있다.

러시아 음악의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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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 音樂-西歐化

무소르크스키와 보로딘의 재능으로써 예술적으로 높은 가치를 창조한 '5인조'는 슬라브 중심사조의 몰락과 더불어 비교적 빨리 해체되었다.

국민악파의 사람들은 서구의 아카데믹한 작곡기술과 절대음악을 경시했다(보로딘을 어느 정도 예외로 하여). 그들의 작품이 오페라 가곡, 표제음악으로 되어 있던 점은 전(前)시대의 러시아적 음악관 그대로의 계승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만은 국민악파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기술적 미숙을 절감하여 서구고전기법(西歐古典技法)을 익혀 작곡에 전념하는 직업적 활동을 하였다. 그는 이러한 점에서 서구악파의 사람들과 가깝다고 하겠다.

서구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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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歐樂派

국민악파의 보수성을 타파하고 러시아 음악에 새시대를 초래케 하는 움직임은 안톤 루빈스타인(1829-1894)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하였으며 조직자로서도 매우 유능한 사람으로서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1835-1881)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러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음악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독일이나 체코 등에서 작곡이론과 기악연주의 교사를 초청하여 전문적으로 음악가를 육성하였다.

한편 1859년에 '러시아 음악협회'를 설립하고 해마다 정기연주회를 20회나 열어 청중을 계몽하였고, 악단을 조직적으로 통일시키며, 음악가의 사회적 지위를 높였고, 기술과 양식을 존중, 절대음악을 높이 평가하는 교육을 하여 러시아 음악사상 비로소 '음악문화'를 목표로 한 혁신적 활동을 하였다. 국민악파의 사람들이 모두 귀족 출신이었는 데 대하여 루빈스타인은 새 중간층의 자제이며 처음부터 음악을 '직업'으로 삼아 직업인의 의식을 지닌 새로운 타입의 음악가였다. 이 루빈스타인의 교실에서 러시아가 자랑하는 대작곡가 차이코프스키가 탄생하였음은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차이코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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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Ilyich Tchaikovsky

차이코프스키(1840-1893)의 개성은 유럽적인 음악어법과 러시아적 감정이 융합함으로써 성립되었다. 민요적인 선율이나 러시아적 정감을 위주로 하여 그것을 정리하고 하나의 형태 속에 넣기 위하여 고전적 형식을 썼다. 그러나 이 관현악법의 숙달은 그때까지 러시아에 없었던 대규모의 교향적 작품을 가능케 하였다.

아카데미즘과 기타 음악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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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sm-其他音樂史潮농노해방 이후 러시아 사회의 자본주의화에 따라 주로 소시민계급 출신의 자제로 된 직업음악가나 우수한 연주가의 출현과 음악 소비자층의 확대 등이 음악출판, 악기의 제조 등을 발달시켜 음악의 기업화가 형성되어 '베라이에프 집단'이 왕년의 '5인조'를 대신하여 러시아의 음악문화를 이끌어 갔다.

러시아 음악이 유럽이나 아메리카에 수출될 정도가 되자 당연히 국내에서의 음악가 지위도 확립되고 경제적 안정도 확보되었다. 이리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과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아카데미즘이 대두하여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국민악파로부터 민족성을, 서구악파로부터 높은 기술을 계승하면서도 그 어느 쪽이나 그들의 절실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인지 민족적 색채는 정형화하여 생기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기법은 멋대로 독주하여 무의미한 중압감을 주는 폐해를 가져왔다.

한편 시민사회의 발달에 따라 프티부르주아적 생활감정과 비정상적일 정도로 예민해진 감각이 발생하여 그러한 것들이 문화의 면에 데카당스적 양상과 극도의 난숙을 가져왔다. 그것은 마침 서구에서 보들레르와 니체가 들어왔다는 점과 앞서 말한 아카데미즘에 의한 반발에 유발되어 신비주의, 심미주의, 상징주의, 인상주의 등을 육성하였다. 또 전음음계나 4도화음의 사용으로 러시아 모더니즘의 선구가 된 레비코프(1866-1920)의 '실험음악', 메트넬(1879-1951), 라흐마니노프(1873-1942), 미야스코프스키 등의 의고주의(擬古主義) ― '차이코프스키로 돌아가라' ― 등도 반(反)아카데미즘 사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반아카데미즘이 '5인조'에서 볼 수 있었던 원시적인 것에 의한 향수와 모더니즘이 결부되어 다음에 스트라빈스키나 프로코피예프 등의 작품을 낳게 된다.

폴란드의 민족주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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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and-民族主義音樂

폴란드에 민족주의 음악을 발생시킨 사람은 도브르첸스키(1807-1867)이며 그것을 낭만파적으로 더욱 세련되게 한 사람이 쇼팽(1810-1849)이다. 그보다 약간 늦게 활동을 시작한 모뉴시코(1819-1872)는 애국적 오페라 <하르카>로 처음으로 폴란드의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썼으며 이 밖에도 많은 민족적 오페라와 가곡을 작곡하였다.

이어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피니아프시키(1835-1880)가 독일 낭만주의에 슬라브적 향기를 자아낸 바이올린을 위한 곡을 남겼고, 세계적 피아니스트 파데레프스키(1868-1941)도 작곡가로서 활약하였다. 한편 그는 제1차대전 후 독립한 폴란드의 초대수상에 취임한 바 있다.

체코의 민족주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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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zecho-民族主義音樂

19세기의 낭만사조가 체코에도 전해져 민족, 인류의 역사를 존중하는 헤르더의 사상이 민족주의, 특히 체코 음악문화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 뒤부터 이 나라의 민족주의는 각성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체코는 처음으로 예술의 면에서 독자적인 음악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시크로프(1801-1862)의 자국어로 쓴 오페라 <도라테니크>에 의하여 시작된 체코의 민족주의 음악은 민족가극 <팔려간 신부>나 <나의 조국>, <나의 일생에서> 등의 표제를 가진 교향관현악이나 현악4중주곡을 쓴 스메타나(1824-1884)에 의하여 정점에 이르렀다.

스메타나와 함께 체코의 음악예술을 높인 드보르자크(1841-1904)는 독일음악의 영향이 보이는 순수기악곡을 많이 썼으나 그것은 슬라브적인 색채가 짙다. 그러나 다음의 피비히(1850-1900)나 펠스터(1859-1951)의 대에 이르러서는 민족적 색채가 희박해지고 다시 국제적인 작풍이 강해져 국민악파의 전통에 바탕을 둔 오페라 <이에느파>를 써서 '체코의 무소르크스키'로 불렸던 야나체크(1845-1892)의 작품도 근대적 경향을 다분히 가지게 되었다.

노르웨이의 민족주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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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way-民族主義音樂노르웨이의 예술음악은 1814년 이 나라 독립 후에 시작된다. 이 나라의 본격적인 국민음악은 그리그(1843-1907)에 의하여 수립되었다. 그의 모음곡 <페르귄트>나 많은 피아노곡, 성악곡은 신비적이면서 구슬프며 그 반면에 열광적인 노르웨이 민요의 아름다운 선율과 리듬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핀란드의 민족주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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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land-民族主義音樂

핀란드의 예술음악은 19세기에 와서 독일인에 의하여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독일인인 파키우스(1809-1891)가 그 기초를 닦았으며 최초의 핀란드 오페라라고 하는 <카롤왕의 사냥> 등을 작곡하였다. 핀란드인으로는 카야누스(1856-1918)가 <칼레발라>에 의한 교향시를 작곡하여 국민악파를 확립시켰다.

그러나 핀란드의 예술음악을 대성시킨 사람은 장 시벨리우스(1865-1957)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의 7개 교향곡이나 <핀란디아> 등의 교향시는 핀란드 민속음악의 선율을 쓰지는 않았지만 핀란드의 국민성을 잘 전하고 있다.

시벨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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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Sibelius (1865-1957)

세계의 어떤 음악 유파와도 상관없는 가장 핀란드적인 작곡가다.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5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15살 때는 바이올린도 배웠다. 헬싱키 음악원에 입학하여 베겔리우스에게 작곡을 배우고, 피아노 교사 부조니와도 알게 되었다.

1889년에 음악원을 졸업하고 베를린에 유학하여 베커에게 사사했다. 이듬해에는 빈으로 유학하여 골드마르크나 푹스에게 사사했으며, 브람스와도 친교를 맺었다.

1892년에 귀국하여 헬싱키 음악원의 작곡 및 바이올린 교수로 취임했다. 작품으로는 국민적 대서사시 <칼레발라>에 의한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교향곡 <쿨레르보>, 교향시 <엔 사가(전 설)>, 모음곡 <카렐리아>, 교향시집 <카레발라에 의한 4개의 전설>, 교향시 <핀란디아> 등이 있다.

에스파냐의 민족주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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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in-民族主義音樂

에스파냐의 국민오페라 운동은 페드렐(1841-1922)에 의하여 그 기초가 수립되었다. 한편, 명바이올리니스트인 사라사테(1844-1904)는 <지고이네르 바이젠>, <에스파냐 춤곡> 등 민족적인 바이올린곡을 남겼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알베니스(1860-1909), 그라나도스(1867-1916), 팔랴(1876-1946), 토우리나(1882-1949) 등이 인상주의적인 수법을 쓰면서 에스파냐 국민악파를 확립하였다. 특히 팔랴는 에스파냐 최초의 예술오페라 <덧없는 생명> 등의 작곡으로 이 나라 최대의 작곡가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