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음악/서양음악의 기초와 역사/서양음악의 역사/고전파 음악

고전파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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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派音樂

음악사적으로는 1740년경부터 1810년경까지 주로 빈을 중심으로 한 음악을 말한다. 음악의 특징으로는 주요 3화음을 중심으로 한 기능화성법의 확립, 소나타 형식에서의 제1, 제2주제의 조성을 으뜸음(主音)과 딸림음(屬音)과의 관계에서 파악하여 두 주제의 성격적 대비(對比)를 갖게 했다는 점, 그리고 주제를 유기적으로 전개하는 '주제노작(主題勞作)'원리의 확립, 2관편성의 오케스트라, 소나타 형식에 바탕을 둔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등의 여러 가지 악곡형식을 낳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바로크 시대와 고전파 사이에서 고전파에의 디딤돌 구실을 한 시대를 전(前) 고전파(1720-1760경)라고 한다.

로코코 음악은 18세기의 화려한 궁정생활을 반영한 것이나 로코코 시대의 경쾌하고 우아한 양식을 갤런트 스타일(gallant style)이라 하며 대위법적인 수법에서 화성적 수법으로의 이행(移行)을 나타내며 섬세하고 우아한 멜로디와 단순한 형식, 세속적이며 사교적인 성격을 지닌 소곡(小曲)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 양식을 전형적으로 나타낸 것이 18세기 중엽 프랑스의 클라브시니스트인 F. 쿠프랭, J. P. 라모, C. C. 다캥 등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 경향에서 18세기 후기에 북독일에서 W. F. 바흐나 C. P. E. 바흐, G. 벤다, J. J. 크반츠 등에 의하여 대표되는 자연스럽고 풍부한 감정표출을 지향한 감정과다양식(感情過多樣式)이 일어났다.

또 1770-1790년경 독일에서 발생한 헤르더, 괴테, 실러 등의 문학운동 슈투름 운트 드랑, 즉 질풍노도양식(疾風怒濤樣式)이 음악에도 영향을 미쳐 디나미크나 멜로디크, 관현악법에 두드러진 대조적 효과를 주었다. 슈베르트, 시타미츠의 기악곡, 라이히아르트, 첼터, 츰시티크 등의 가곡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빈에서는 G. C. 바겐자일, M. 몬 등이 교향곡의 악곡구성 면에서 기초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만하임에서는 예술을 애호했던 선제후(選帝侯) 카를 테오도르 궁정에서 J. 슈타미츠, 홀츠바우어, 리히터, 카나비히 등이 활발히 활동하였다. 빠름-느림-빠름의 3악장에 미뉴에트를 쓴 4악장의 악곡 구성, 제1, 제2주제의 성격적인 대비(對比), 크레센도, 디미누엔도, 포르테, 피아노 등의 음량변화(音量變化), 관악기의 중시(重視), 장식법 등이 고전파 음악에 대하여 많은 공적을 남기고 있다.

그 밖에 이탈리아에서는 D. 스카를라티, 사키니 등의 쳄발로 소나타, 파리에서는 슈베르트, 고세크, 런던에서는 크리스티안 바흐 등의 전기(前記) 고전파에 활약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성기고전파시대(盛期古典派時代)에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세 거장의 창작활동으로 감히 따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동기(動機)가 악곡구성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음빛깔, 리듬, 화성, 디나미크 등의 모든 수단을 통하여 동기에 의미를 부여하며 주제를 이끌어 나아가는 '주제노작(主題勞作)'의 원리가 그들의 보편적인 어법(語法)이 되었던 것이다.

18세기의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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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八世紀-opera

헨델은 영국에 귀화한 뒤 영국에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표자로 간주되고 있었으나 그는 결코 개혁자가 아니며 기성의 형식을 활용하면서 하나의 정점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그의 오페라는 아리아에서 각개의 기분을 순수하게 추출하여 묘사함을 기초로 하고 정밀한 구축적(構築的) 플랜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탈리아풍의 벨칸토 양식과 독일풍의 힘찬 내면묘사를 단순·명쾌한 형식 속에서 결합시켜 갔다.

18세기의 이탈리아에서는 나폴리파가 바로 오페라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두 스타일은 분명히 분리되어 레치타티보에서는 극적인 전개가 이루어지며 정서표현은 아리아에서 나타나 있었다. 그 결과로 여러 가지 아리아의 형태가 생겨났으며 아리아가 오페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작품 전체의 구성에서 균형을 잃게 되었다. 또 명인예적(名人藝的)인 기교를 가진 가수가 환영받아 점차로 가수의 기교 과시를 위한 오페라로 변화해 갔다.

시인인 츠에노와 메타스타지오에 의하여 비극적인 스타일의 오페라에서 코믹한 요소가 분리되자 코믹 오페라는 각국에서 각각 독자적인 스타일을 이룩해 나갔다. 즉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 프랑스의 오페라 코믹, 영국의 발라드 오페라, 독일의 징슈필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흔히 있는 일들을 제재로 하여 단순하고 알기 쉬운 형식의 음악이 곁들여졌다.

C. W. 글루크는 가수만능의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항해 음악은 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가수가 기교를 과시하거나 필요 이상의 음악적 장식을 하는 것을 배제하며 표현력이 풍부한 레치타티보나 오케스트라, 또는 코러스 등의 표현력 증대 등으로 단순하고 자연스런 표현 속에서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시도를 했다.

오페라 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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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 buffa

츠에노와 메타스타지오의 개혁으로 비극적 스타일로부터 코믹한 요소가 분리되고 그 때까지 인테르메조(幕間劇)로서 긴 오페라의 막간에 상연되었던 짧은 넌센스 코믹이 오페라 부파로서 독립하여 상연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즉흥희극인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 전형적인 등장인물이나 틀에 박힌 사건, 템포가 빠른 동작이나 대화 등이 분명히 영향을 받고 있었다.

오페라 부파의 대본은 흔히 있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일들을 제재로 하였으며 아르레키노라든가 브리게르라, 또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유형적(類型的)인 인물이 등장하고, 악곡형식은 칸초네타나 시칠리아노 등의 민요에서 취했으며, 도약적인 음형이라든가 빠른 소리로 지껄이는 레치타티보 세코, 광대역의 바소 부포, 중창(重唱)이 중요시되는 것 등이 그 특징이라 하겠다.

나폴리파 오페라 부파의 초기에서 전형적인 초기작품은 페르골레시의 <마나님이 된 하녀>(1733)를 들 수 있다. 1750년 이후, 오페라 부파는 세련된 드라마로 발전하는 한편 피치니의

<착한 아가씨>에서 볼 수 있듯이 감상적인 요소마저 삽입하게 되었다. 후기의 나폴리파에서는 <세비야의 이발사>를 작곡한 파이제로는 등장인물의 교묘한 성격묘사와 화려한 색채의 관현악 등에서 특히 뛰어나며 모차르트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경쾌하고 자연스런 줄거리를 지닌

<비밀결혼>의 치마로자도 나폴리파의 종말을 장식한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오페라 코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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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 comique

프랑스의 오페라 코미크는 보드빌이라고 하는 간단한 속요(俗謠)를 혼합시킨 보드빌 코미디에서 생겼으며 극시인인 샤를 파바르에 의하여 수준 높은 코미디로 발전했다. 1752년 페르골레시의 <마나님이 된 하녀>가 파리에서 상연된 뒤부터 이탈리아와 프랑스 음악의 미(美)의 우열에 대해 유명한 '광대 논쟁(buffon論爭)'이 일어났다.

1750년 이후 J. J. 루소의 <마을의 예언자>를 효시로 하여 오페라 코미크는 독자적인 장르로서 발전, 그 뒤 두니, 피리돌, 몽시니 등의 작품이 속속 등장하였다. 그것들은 농민의 생활을 서정적으로 다룬 것을 테마로 하였고 앙상블의 중시(특히 곡의 끝을 유절형식의 노래에 리프레인을 붙여 연결하는 보드빌 피날레), 오케스트라의 교묘한 정경묘사가 특색이다. 그리고 그레트리가 간결한 구성, 서정적인 멜로디 등으로 18세기 오페라 코미크의 대표적 작곡가가 되었다.

징슈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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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spiel

징슈필은 독일어로 서로 주고 받는 대사(臺辭)에 서정적인 노래가 곁든 민속적인 오페라로서, 1743년에 영국의 발라드 오페라 <악마의 복수>가 독일어로 번역, 상연된 데에 자극받아 A. 힐러가 대본작가인 바이세와 협력하여 1770년에 <사냥>을 작곡하여서 새로운 징슈필의 형태를 성립시켰다. 그들이 대표하는 북부독일의 징슈필은 전원적(田園的)이고 서정적, 공상적인 코미디의 형태로서 민요 같은 단순한 멜로디의 음악을 지니나, 힐러 뒤로는 G. 벤다가 수식없는 그대로의 대사(臺辭)에 오케스트라가 딸린 '멜로드라마의 형식'으로 <낙소스의 아리아도네>를 작곡하였다. 이 형태가 뒤에 베토벤의 <피델리오>나 베버의 <마탄(魔彈)의 사수(射手)> 등에도 영향을 준 바 있다.

남부독일에서는 1778년, 요제프 2세의 명에 의하여 국민 극장에서 징슈필이 상연되었으며, 이 무렵에 디터스돌프의 <의사와 약사> 등 대표적인 작품이 작곡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이 모차르트의 <후궁(後宮)에서의 유괴(誘拐)>나 <마적(魔笛)> 등의 명작을 낳았던 것이다.

베를린 가곡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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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lin 歌曲樂派

베를린 가곡악파는 1753년 베를린의 변호사이며 작곡가인 G. 크라우제의 <송가(頌歌)와 멜로디>로 시작되었다. 이 곡집에는 크반츠나 C. P. E. 바흐, H. 그라운들의 가곡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제1기의 베를린 악파에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속 음악가들, 즉 E. 바흐, K. 그라운, F. 벤다, W. 마르푸르크, J. 키른베르거 등이 있었다. 크라우제는 단순한 형식을 지닌 민요를 바탕으로 한 리드의 창작을 단순한 형식을 지닌 민요를 바탕으로 한 리드의 창작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의 리드는 독립된 클라비어 반주부를 갖고 있었으나 E. 바흐는 게레르트의 종교시집을 작곡하여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제2기 베를린 악파에서는 J. 슐츠, 라이히아르트, 첼터 등이 대표자이나 그들은 크로프슈토크나 괴테, 실러 등 당시의 뛰어난 시에 곡을 붙여 리드를 간결한 형식에 의한 국민적인 가곡으로 승화시켰다.

글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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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ph Willibald Gluck(1714-1787)

글루크는 오페라 세리아 분야에서 18세기 최대의 작곡가라 하겠다. 1736년, 빈에서 로브코비츠공(公)의 실내악 연주자가 되어 그 곳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많이 들을 기회를 얻었으며, 또한 다음해 이탈리아에서 사마르티니(G. B. Samartini, 1700-1775)에게 사사(師事)하여 최초의 오페라 <아르타세르세(Artaserse)>를 발표한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에 의욕을 갖게 되었다.

1752년부터는 빈을 중심으로 활약하여 그 무렵부터 몇 개 프랑스 오페라 코미크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1761년부터는 대본작가 칼차비지(Ranieri Calzabigi)와 협력하여 <오르페우스(Orfeus)>, <알체스테(Alceste)> 등을 작곡하였으나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의 인기에 눌려 별로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

1774년, <아우리스의 이피게니아>가 파리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프랑스 오페라풍으로 제작한 <오르페우스>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당시 파리 오페라계에는 글루크를 미는 프랑스파와 피치니의 이탈리아파 사이에 대논쟁이 일어나 두 사람은 <아우리스의 이피게니아>를 작곡하여 실력을 겨루었으나 결국 글루크의 실력이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글루크는 이처럼 이탈리아 오페라, 프랑스 오페라, 독일 오페라 등이 지니는 각 양식을 융합하여, 가수에 편중하는 오페라에서 '음악을 대본에 봉사케 하는 오페라'로의 개혁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글루크의 가극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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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uck-歌劇改革

1769년에 빈에서 출판된 <알체스테>의 스코어에 글루크 오페라에 대한 새로운 이상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시는 음악표현의 기초가 되며 음악은 시에 종속한다. 가수의 기교 과시나 필요 이상의 음악적 장식을 가능한 한 배제하여 단순한 기법을 쓸 것. 서곡을 극 전체의 분위기와 밀접하게 관계지을 것" 등을 강조하고 있다.

전고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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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古典派

18세기 중엽, 바흐와 헨델에 의하여 완성된 바로크 시대에서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에 의한 새로운 정점이 이룩되기까지인 1720-1780년경의 시기는 과도적인 성격이 현저하기 때문에 전고전파 또는 초기 고전파라고 부른다.

고전파 음악의 발달은 주로 기악분야에서 이루어졌으나, 이 시기에는 소나타가 교향곡이나 실내악에서 알레그로-안단테-미뉴에트(트리오가 있는 것)-알레그로의 4악장으로 된 구성으로 점차 고정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제1악장은 소나타 형식의 성장과 함께 비중이 증대하였고 제3악장에는 바로크 시대의 춤곡형식이었던 미뉴에트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케스트라의 분야에서는 종래 통주저음 악기로 쓰이던 쳄발로가 없어지고 현악기를 주체로 하는 근대적인 2관편성의 전형(典型)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합주기술이나 음량변화, 악기법 등에 새로운 표현이 개발되었다. 건반음악에서는 쳄발로나 클라비코드에서 피아노에로의 이행이 있었으며 또한 이 시기에는 고전주의 음악을 형성하는 3개의 기본적 표현이 나타났다.

즉 제1은 음악상의 로코코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갤런트 양식(gallant style), 제2는 감정과다양식(感情過多樣式), 제3은 역시 같은 이름의 문학운동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이른바 슈투름 운트 드랑(疾風怒濤時代)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양식은 널리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만하임, 베를린, 파리, 런던 등에서 자라났다.

갤런트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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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ant style

문화의 중심이 바로크 시대의 교회에서 왕후귀족의 살롱으로 옮아감에 따라 음악의 양식도 장중하고 견고한 바로크 스타일에서 로코코풍의 경쾌하고 우아한 것으로, 대위법적 작곡에서 화성중심의 음악으로 변천하였다. 이 양식은 17세기에 프랑스의 류트나 클라브생의 음악에서 발단하여 18세기 중엽에는 독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대표적인 작곡가로 쿠프랭(F. Couperin, 1668-1773), 피셔(J. Fischer, 1665-1746), 텔레만(G. Teleman, 1681-1767) 등을 들 수 있다.

감정과다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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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情過多樣式

1750-1780년경, 북부독일의 작곡가를 중심으로 일어난 '진실하고 자연스런' 감정표현을 추구하여 생겨난 로맨틱한 색채가 짙은 양식, 특히 C. P. E. 바흐의 동적 대조(動的對照)나 칸타빌레한 멜로디가 풍부한 작품을 말한다. 주요 작곡가로는 에마누엘 바흐(1714-1788), 쿠반츠(1697-1773), 벤다(1722-1795), 라이히아르트(1752-1814) 등이 있다.

슈투름 운트 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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疾風怒濤

본래는 1770-1790년경에 일어난 문학운동. 헤르더, 괴테, 실러, 클린거들이 루소의 '자연으로'라는 운동의 결과 유희적 감정이나 장식이 많은 로코코 양식에 대항하여 생겨난 주관성이 짙은 문학양식. 이 운동에 비할 음악분야의 경향은 악기법이나 음량변화의 대담한 대조효과와 강렬력하고 도약적인 멜로디의 흐름 등에서 볼 수 있다.

슈베르트(1720-1768), C. P. E. 바흐 등의 작품, 또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초기작품에까지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는 한 사조(思潮)로서의 음악양식.

고전파의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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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派-sonata

소나타가 순환형식으로 알레그로-안단테-미뉴에트(트리오 붙음)-알레그로의 4악장으로 고정된 것은 약 1770년의 일이다. 이것은 급·완·급의 3악장으로 되는 나폴리파의 심포니아파에 바탕을 두고 여기에 마지막부터 두 번째에 바로크 모음곡 가운데의 미뉴에트가 곁든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와 같은 고전파의 소나타에서는 제1악장이 소나타 형식을 취하여 소나타의 중핵(中核)을 형성한다. 제2악장은 템포가 완만한 리트 형식이며 제3악장의 미뉴에트는 이미 바로크 시대의 무용의 성격을 잃고 A-B-A(B는 트리오라 한다)의 3부형식을 취하고 있다. 끝악장은 급속한 템포에 의한 론도 형식과 소나타 형식으로서 소나타의 악곡 전체를 마무리짓는다. 4악장으로 된 고전파 소나타를 확립시킨 사람은 교향곡 분야에서는 만하임 악파의 슈타미츠, 오스트리아의 바겐자일, 몬, 슈레거, 시타르츠아 등이다. 이에 반하여 베를린 악파는 3악장제를 고집하였다. 소나타는 교향곡뿐만 아니라 고전파의 실내악이나 클라비어곡의 조구성(組構成)이 되기도 했다.

소나타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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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ata 形式

소나타 형식은 고전파의 기악곡에서 형성되어 낭만파를 거쳐 현대에 이르고 있는 악곡형식이다. 이것은 교향곡, 소나타, 실내악의 빠른 제1장에 거의 예외없이 쓰이는 외에 제2악장이나 제4악장에도 쓰이는 경우가 있으며 이 시기의 협주곡 제1악장의 대부분은 바로 이 형식의 변형이다.

소나타 형식은 18세기 초에 여러 가지의 전통적 형식, 그 가운데에서도 모음곡의 댄스 악장, 다 카포 아리아, 콘체르토 그로소, 나폴리파의 오페라 심포니아 등에서 볼 수 있는 형식 및 양식상의 특징을 병합하면서 나타났다. 우선 훗날 소나타 형식의 골격이 되는 ||:A:||:BA:ll (2부·3부형식)의 형태는 1720년경 모음곡의 악장이나 기타 작품에서 확립되었다.

한편 대조(對照)라는 소나타 형식에서의 중요원리는 콘체르토 그로소의 투티와 솔리의 교체에 의한 대비적(對比的) 스타일에서 볼 수 있다. 이 원리를 모음곡 악장의 형식적 골격으로 사용한 것이 나폴리파의 오페라 심포니아이다.

소나타 형식은 교향곡의 제1악장에서 그 전형(典型)을 볼 수 있으며 제시부(提示部)·전개부(展開部)·재현부(再現部=코다)로 구성된다. 제시부에서는 으뜸조의 제1주제와 딸림조의 제2주제라는 여러 악주(樂奏)가 제시되고, 전개부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동기적(動機的)으로 분할되어 여러 조성(調性)으로 인도되어 발전한다. 재현부는 제1부의 재현이나, 제시부에서의 딸림조 제2주제는 으뜸조로 환원되어 통일을 꾀하고 있다. 종결부는 독립적인 길이를 가진 것과 재현부에 흡수되는 것이 있다.

지역으로 본 고전파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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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域-古典派樣式

서구음악사에서 하나의 신기원을 이룬 고전파양식의 발전을 위해 다양하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음악가들을 지역적으로 살피면 대강 아래와 같다고 하겠다.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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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ia

새로운 고전파양식의 성립에 주요한 구실을 한 사람으로는 우선 이탈리아의 오페라나 오페라 심포니아, 합주곡 및 호모포닉한 선율이나 반주형을 지닌 클라비어 음악을 들 수 있다. 특히 욤멜리(N. Jommelli, 1714-1774)는 오페라에서의 표정 풍부한 성악양식을 관현악에 전용(轉用)하여 기악분야에서 새 국면을 개척하였다.

실내악이나 관현악 분야에서는 부드럽고 풍부한 울림의 페르골레시(1710-36)의 선율법이나 소나타 형식에서 2개 주제에 대조성을 부여한 사마르티니(1704-74), 교향곡의 제1악장 형식에 명확한 부분구성을 부여한 카프아 등의 업적이 있다.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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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tria

지역적으로 이탈리아와 북부독일을 잇는 중개점에 있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와는 가장 밀접한 유대를 지니고 있다. 일찍이 1704년에 몬(1717-1750)이 미뉴에트를 포함한 4악장으로 된 교향악곡을 작곡한 바 있다. 그 밖에도 교향곡의 각 구성요소의 충족을 촉진시킨 작곡가로서 바겐자일(1715-77), 가스만(1729-1774) 등이 있다.

만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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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heim

만하임 악파라고도 하며, 팔츠바이에른의 선제후(選帝侯) 카를 테오도르 아래에서 활약한 사람들이 대표적이다.요한 슈타미츠(1717-57)를 지휘자로 하는 우수한 관현악단을 조직하여 연주와 관현악곡의 작곡 등 양면에 걸쳐 공헌하였다. 작곡상의 업적으로는 교향곡의 제3악장에 미누에트를 둔 4악장 구성의 확립, 크레센도나 피아노와 포르테의 대비 등 다이내믹 효과의 추구, 관악기(특히 클라리넷)의 중용(重用) 등이 특필된다. 연주 면에서는 정연한 운궁법(運弓法), 정확한 음량변화 등을 하여 온 유럽에 그 명성을 떨쳤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요한 슈타미츠(1717-1757), 홀츠바우어(1711-1783), 리히터(1709-1789), 필츠(1730-1760) 등이 있다.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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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lin

북부독일 악파라고도 하며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주작곡가로는 우수한 클라비어 음악을 저술한 대 바흐의 둘째아들

C. P. E. 바흐(1721-1783), 기악곡의 쿠반츠(1697-1773), 그라운 형제(1702/03-1759) 등을 들 수 있다.

보다 젊은 세대로는 피아노 반주에 의한 가곡을 작곡한 슐츠(1747-1800), 라이히아르트(1752-1814), 첼터(1758-1832)가 있다.

파리·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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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London

프랑스에선 슈타미츠의 교향곡이 즐겨 연주된 외에 고세크(1734-1829)가 있다.

런던에서는 일찍부터 시민계급에서 음악회가 개최되었다. 클라비어 음악 및 교향곡의 대표적 작곡가로서는 크리스티안 바흐(1735-1782)가 있다. 또 바흐-아벨 연주회로 알려진 아벨(1723-1787)도 있다.

빈 고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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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en 古典派

전고전파(前古典派)의 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빈을 중심으로 창작활동을 하여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에 의하여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 특징으로는 주요 3화음을 중심으로 하는 기능화성의 확립, 소나타 형식에서의 제1주제와 제2주제를 조적(調的), 성격적(性格的)으로 대비(對比)시켜 포착했다는 점, 주제 재료를 유기적으로 전개시키는 주제노작(主題勞作) 원리의 확립, 2관편성에 의한 오케스트레이션의 완성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양식원리(樣式原理)를 바탕으로 하여 이 시기에는 교향곡 외에 협주곡, 실내악도 현저한 발전을 보였다.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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協奏曲

바로크 시대의 협주곡 리토르넬로 형식은 고전파의 시대가 되면서 점차로 소나타 형식으로 대체되고 반주인 현악합주도 관현악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급·완·급의 3악장 형식과 투티와 솔로가 교체하는 스타일은 바로크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협주곡에서의 소나타 형식의 특징으로는 제시부에서 처음에 관현악이 두 주제를 원조(原調) 그대로 나타내고, 이어 솔로를 주체로 하여 본래의 제시(이번에는 제2주제가 딸림조로)가 반복된다. 또 재현부가 끝나고 코다에 들어가기 전에 관현악이 쉬고 솔로의 자유로운 카덴차가 삽입된다.

실내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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室內樂

실내악은 바로크 시대의 통주저음 양식이 쇠퇴함과 동시에 종래의 트리오 소나타(바이올린2, 첼로와 통주저음 악기)를 주체로 하는 합주체에서 바이올린2·비올라·첼로로 이루어지는 현악4중주로 중심이 바뀌었다.

이 형식은 하이든에 의하여 확립되었으나 그는 1781년의 <러시아 4중주곡>에서 소나타 형식의 주제조작(主題操作) 원리를 실내악 분야에서도 확립하였음을 공표하고 있다. 모차르트는 독자적인 색채감각이나 피아노의 숙달로 오히려 현악 5중주나 피아노를 포함한 중주(重奏)에 이채를 띠었다.

그러나 고전파의 실내악을 예술적 최고봉으로 이끈 사람은 바로 베토벤이었다. 그는 후기의 현악4중주곡에 소나타 형식과 함께 변주곡이나 푸가, 코랄의 수법까지 흡수하여 형식적 통일을 꾀함과 동시에 형식을 탈피하여 깊은 주관적 세계에까지 이르렀다. 이 밖에도 현악

3중주, 피아노가 있는 실내악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하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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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Hydn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은 18세기 후반의 빈 고전파에서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주로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곡 등의 기악형식의 완성에 공헌하였다. 또한 만년의 2개의 오라토리오나 미사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볼 수 있다. 하이든의 작곡활동은 외적, 내적인 특징에 따라 대략 세 시기로 구분된다. (1) 1760년경까지(빈), (2) 1760-1790(아이젠슈타트-에스테르하지), 1790년 이후(빈-런던-빈)

(1) 가장 초기의 작품에서는 특별한 예술적 개성은 볼 수 없으며 오히려 토착적(土着的)인 전통과의 결합(디베르티멘토나 그 밖의 오락음악)이 현저하다. (2) 1761년,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문의 부악장으로 취임하자 초기의 교향곡군이 탄생되었다. 1761년의 표제가 붙은 3부작(제6번 <아침>, 제7번 <낮>, 제8번 <저녁>)으로 대표되는 초기의 교향곡에는 바로크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1770년경의 이른바 '슈투름 운트 드랑'기(期)에 이르자 급격히 표현력이 심화(深化)하여 클라비어 소나타, 현악4중주, 교향곡 등에 현저한 발전의 자취가 새겨진다. 종래의 클라비어 소나타는 디베르티멘토풍의 경쾌한 성격이었으나 하이든은 에마누엘 바흐의 '감정과다양식'의 풍부한 표현력이나 클라비어 협주곡의 견고한 구성을 소나타에 이식하여 소나타를 교향적인 것으로 하였다.

현악4중주도 디베르티멘토풍의 성격을 배제, 4악장 구성을 원칙으로 하여 OP17(1771)에서 고전파의 현악4중주 구조와 정신이 확립되었다. 여기서는 푸가 형식이 악장에 채택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교향곡에도 새로운 양식에 대한 의욕을 볼 수 있으며 단조(短調)의 채용, 힘찬 리듬적 충동에 의한 표현의 심화가 꾀해지고 있다.

1781년은 하이든이 전적으로 새로운 특별한 방법으로 작곡하였다고 자칭한 <러시아 4중주곡>이 소나타 형식의 주제조작 원리를 실내악의 분야에도 확립한 것으로 의의가 깊다고 하겠다. 1783-1784년의 교향곡(제76번-81번)에는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특징이 보이나, 한편 모차르트도 1782-1785년에 작곡한 6곡의 현악4중주곡을 하이든에게 바쳐 선배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1780년대 후반에는 하이든의 명성이 전유럽에 퍼져 외국으로부터의 작곡의뢰가 늘어났다. 그리고 1786년에는 파리의 관현악단 콘세르 드 라 로쥬 올람피크로부터의 교향곡 6곡(제82번-87번)의 작곡의뢰를 받았다.

(3) 1790년대에는 에스테르하지후(候)가 사망하여 후작가의 악단은 해산되고 하이든은 다만 명예악장으로서 이름만을 남겼을 뿐 빈으로 옮겨졌다. 자유의 몸이 된 하이든은 영국의 흥행사 잘로몬의 권유로 1791-1795년 사이에 두 번에 걸친 영국여행을 하여 영국의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위하여 12곡의 교향곡(제93번-104번)을 작곡하였다. 이는 하이든의 교향곡 창작의 발전의 정점 동시에 고전파 교향곡의 금자탑이 아닐 수 없다.

런던에서 빈으로 돌아온 뒤로 하이든은 교향곡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런던에 와 머무르며 헨델의 오라토리오에 자극을 받아 2개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4계(四季)> 및 6개의 대규모 미사곡의 작곡에 몰두하여 만년의 원숙한 경지를 성악분야에 구축하였다. 여기서 하이든은 청년시대의 바로크 음악 경험과 독자적인 교향적 사고(交響的思考)와의 참된 통일을 달성하고 있다.

음악사에서 하이든의 업적은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를 통하여 추구된 소나타 형식의 완성에 집약되겠으나 그의 많은 기악곡과 오페라에 나타나는 민족성이나 부포적 성격이 그의 작품에 독특한 매력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경시할 수는 없다. 더구나 만년의 대규모적인 성악곡은 고전파의 표현범위에서 다시 낭만주의의 길마저 암시하고 있다.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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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lfgang Amadeus Mozart

하이든보다 24세나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든과 어깨를 나란히 할 뿐만 아니라 서로 상보(相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더구나 모차르트는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 등 순수기악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기악과 성악, 종교와 세속을 가리지 않고 전작품 분야에 예술적 완성을 가져왔다.

모차르트의 유년기는 궁정 바이올리니스트인 부친 레오 폴트(1719-1787)의 적절한 교육으로 클라비어에 숙달하여 유럽 각지를 일찍부터 순회연주하였다. 당시 유럽의 각지에서는 여러 가지 새로운 양식적 시도가 있었으므로 모차르트의 여행은 그러한 새로운 예술적 동향에 직접 접할 기회를 부여받고 그의 창작능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처럼 그가 일찍부터 부친의 천재교육과 유럽의 연주여행에서 직접 체험하고 또한 받은 중요한 영향을 살펴보면 대강 아래와 같다.

( 잘츠부르크 음악. 어린 모차르트가 출생지에서 받은 영향은 그의 예술적 소질을 형성하였다. 잘츠부르크의 음악은 결코 깊이가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우아함이 감도는 경쾌감이 특징으로서, 이 지방의 작곡가 에이베를린이나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 미하엘의 음악에 기조를 이룩하기도 했다.

( 파리의 음악. 1763-1764년, 파리에서 알게 된 슈베르트, 에카르트(Eccard), 르그랑(Legrand)의 영향을 받아 당시 파리를 휩쓸던 우아하고 경쾌한 클라브생 음악에서 감명을 받았다.

( 크리스티안 바흐. 1764-5년의 체재 중, 대(大) 바흐의 막내아들 크리스티안의 교향곡에서 배운 바가 많았다.

( 이탈리아

음악. 1770년의 이탈리아 여행 중, 마르티니 신부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아 엄격한 대위법 음악에 대한 흥미를 더하였다.

( 전(前)고전파의 작곡가들. 1773년 여름의 빈 여행에서 하이든, 바겐자일, 몬 등의 견고한 구성미의 음악에 결정적인 자극을 받아 독일음악을 재인식하였다.

( 갤런트 양식. 미하엘 하이든의 우아한 작풍에 감명을 받고 모차르트의 선천적인 음악적 기질과도 어울려 우아한 표현이 개화하였다.

( 만하임과 파리.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음악이 번영한 곳으로서, 만하임 오케스트라의 우수한 관현악 기법과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나 글루크의 오페라 세리아에서 극적 표현을 습득하였다.

( 요제프 하이든, 모차르트가 1781년 빈에 정주한 뒤부터 직접적인 교류에 의하여 한층 그 유대가 강해졌으며 그는 1782-1785년에 걸쳐 작곡한 6곡의 현악 4중주곡 <하이든 4중주곡>을 하이든에게 바쳐 감사를 표하였다.

( 바로크 음악. 반 스비텐 남작과 알게 되어 바흐나 헨델 등 바로크 대가(大家)의 음악에 접하는 기회를 얻어 엄격한 폴리포니의 기법과 정신 면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모차르트는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로서 음악가의 경력을 시작하였으므로 당연히 작곡도 피아노 분야에서 시작되었으며 평생을 두고 이 악기를 사랑하였다.

클라비어계는 당시 아직도 낡은 형태의 건반악기에서 새로운 피아노로의 과도기였으나 여기서 모차르트는 낡은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갤런트 양식에서 베토벤적인 강력한 에너지를 응집시킨 작품까지 폭넓은 표현을 개척하였다.

전통적인 세레나데나 디베르티멘토 등의 기회음악(機會音樂)은 당시 아직도 왕후귀족의 오락으로서 인기가 있었으나 모차르트의 초기에는 이러한 장르에서의 최량의 작품이 나왔다. 물론 하이든이 철저하게 추구했던 교향곡이나 실내악 등 순수기악의 영역에도 그는 중요한 공적을 남기고 있다.

모차르트는 형식 면에서의 혁명가는 아니었으나 특히 빈 시대의 6곡, 그 중에서도 최후의 3대 교향곡(제39, 40, 41번 <주피터>)에서 고전교향곡의 완성을 이끌어 베토벤에의 길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이와 같은 다채로운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장르는 무엇보다도 오페라의 영역일 것이다. 그 중에도 빈에 정주 후 작곡한 <후궁으로부터의 도주>에서 <마적(魔笛)>에 이르는 오페라 부파와 징슈필의 계열에서 폭 넓은 인간표현과 깊은 독자적 표현을 확립하였다.

대체로 예술세계에서의 창조자는 형식이나 어법 면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급진적인 혁명가와 이러한 형식이나 어법을 적용하고 순응하는 곳에서 독창적 정력을 발휘하는 추고자(推敲者)와의 두 타입이 있겠다. 18세기 고전파의 쌍벽인 하이든이 전자에 속한다면 모차르트는 후자의 전형이라 하겠다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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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wig van Beethoven

베토벤(1770-1827)은 시대적으로는 하이든, 모차르트에 가깝고 대체로 그들과 더불어 빈 고전파의 3대 거장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신시대의 선구자인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일생을 거의 전속악사로만 보낸 하이든이나 봉건적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차르트에 비하면,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에 의한 해방적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선천적인 강인한 성격과 도덕적 신념으로 홀로 감연히 세계에 맞섰다. 그는 외적 상황에 속박되지 않았던 최초의 참된 자유인이었다.

베토벤의 전작품은 보통 작곡연대에 따라 3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는 대체로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전통에 의한 영향이 짙다. 그러나 제1, 제2교향곡과 피아노 소나타 제8번 <비창(悲愴)>에 넘쳐흐르는 강렬한 충동은 베토벤적인 웅대한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이 힘은 중기의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처>나 제3교향곡 <영웅> 등에 훌륭하고 자유분방하게 실현되었다. 더구나 이 시대의 작품은 절망적인 귓병(耳疾)에 대한 그의 초인간적인 자기극복의 대상(代償)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교향곡의 영역에서는 제3에서 제8까지의 압도적인 기념비가 피아노 소나타에서는 각각 강렬한 개성을 주장한 제14번 <월광(月光)>, 제21번 <발트슈타인>, 제23번 <열정>, 제26번 <고별> 등이 분류(奔流)가 되어 넘쳐흘렀다.

그리고 실내악의 분야에서는 <크로이처> 외에 피아노 3중주곡 <대공(大公)>, 현악 4중주곡 <라즈모프스키> 등 그 수효는 매우많다. 이 10년 동안에 베토벤은 거대한 작품의 산맥을 정복한듯이 보였으나 한편 후기에서는 원숙경(圓熟境)의 배후에 철학적 명상에 이끌린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다.

피아노 소나타 제29번 <해머 클라비어>는 거인적인 규모 속에 비합리의 세계를 소화시키고 있다. 대작 <장엄 미사> 및 제9교향곡에는 형식상의 수많은 새로움과 함께 '평화'와 '환희'에의 기원(祈願)을 노래 불렀다. 또한 베토벤은 최후의 힘을 기울여 현악 4중주곡(제12-16번)을 완성하였다. 여기서 그는 인간적 고뇌를 달관한 체념의 세계에 이르고 있다.

베토벤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전형이 될 수 있는 작품을 남기고 있다.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는 정조가 굳은 용감한 아내가 모든 고난을 극복하여 남편을 구출한다는 부부애의 이상을 그린 것으로, 음악의 교향적 수법과 내용의 진실한 점에서 매우 독일적이라 하겠다.

베토벤의 음악적 진수가 가장 명확하게 주장된 것은 9개의 교향곡이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교향곡에는 3악장과 4악장제가 혼재하고 있었으나, 베토벤의 음악에서는 4악장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미뉴에트도 스케르초 내지는 스케르초적 성격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관현악은 2관편성을 원칙으로 하였다.

제3교향곡 <영웅>은 규모로나 내용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그 뒤의 교향곡 계열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제5는 '운명의 동기'라고 하는 4개의 음이 전개하는 고전적 형식의 이상(理想)이다.

제6번 <전원>은 음화(音畵)라기보다 오히려 감정의 표현이며, 후의 표제음악(標題音樂)의 선례가 된다. <제7교향곡>에서는 전곡을 일관하여 리듬 동기가 구성원리로서 작용하고 있다. 최후의 제9교향곡(합창 붙임)은 마침내 순수기악의 테두리를 넘어 성악을 교향곡 속에 합류시켰다.

베토벤의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바흐의 24곡으로 된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이 '구약성서'라고 불리는 데 대해 '신약성서'라고 불리는 영예를 지니고 있다. 이 32곡은 또한 베토벤의 예술적 일생에서 가장 면밀한 이력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실내악 영역은 베토벤의 전창작의 귀결이라 하겠다. 만년의 5개 연작(連作)과 대(大) 푸가와는 고독한 영혼이 자아내는 숭고한 독백이며, 감성(感性)을 초월한 영적 언어(靈的言語)이다.

빈 고전파는 베토벤 음악의 형식적인 완성과 내용의 숭고함 속에서 양식적(樣式的) 정점을 형성함과 동시에 낭만파의 세계로 용해(溶解)함을 말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