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현대사회의 발달/발전하는 대한민국/제5공화국

제5공화국〔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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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유신헌법의 공포로 출범한 제4공화국은 헌정궤도를 이탈한 파행을 일삼음으로써 정치파동과 학생시위, 이에 대한 비상조치권 발동으로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는 5·16 이후 18년 간 집권하면서 경제개발·새마을운동·방위력증강 등의 치적을 쌓기도 한 반면 지나친 장기집권 기도와 독재·인권탄압·종속외교 등의 실정을 범함으로써 말기에 접어들어서는 국민의 저항의식이 고조되어 갔다. 또한 지나친 성장 위주·경제력 집중·대외과시 정책은 양적인 팽창을 가져오기는 하였으나 산업불균형·빈부격차 심화·부조리·권력부패 현상을 초래함으로써 국가 전반의 위기 상황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79년에 접어들어 1970년대를 통해 줄곧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노동문제는 ‘YH사건’을 계기로 정치쟁점화되었으며, ‘신민당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과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사태’는 소속의원 전원의 의원직 사퇴라는 정치파동으로 확대되고, 10월에는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화 시위가 발생하였다(釜·馬民主化運動). 이러한 사회 정세 속에서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되는 ‘10·26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사실상 제4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헌법 규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한 당시 국무총리 최규하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발동하였고, 국회는 유신헌법의 개정을 위한 ‘헌법개정심의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동년 12월 단독출마한 최규하 후보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과도관리정부가 출범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1975년 선포되었던 긴급조치 제9호를 해제하여 제4공화국하에서 묶였던 개헌논의와 정치·정당활동을 해금하고 민심수습과 경제난국 타개의 정치일정을 밝혔다. 그러나 학생·재야단체는 ‘거국 민주내각 구성’을 요구하며 ‘YMCA 집회’ 등 각종 집회와 활동을 벌임으로써 계엄정국은 또다시 난기류에 휩싸였다.이 과정에서 10·26 이후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소장을 주축으로 하는 일단의 정치지향 세력이 ‘12·12’로 표면에 드러났으며, 계엄사령부는 1980년 2월 국가 수호와 북한의 남침위험을 명분으로 경직된 대국민경고를 발하였다.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발동되고 ‘모든 정치활동 금지와 옥내외 시위 및 집회금지, 대학휴교령’을 골자로 하는 ‘5·17조치’가 선포되었으며, 부패·사회혼란 죄목(罪目)으로 정치인·재야인사·학생 등에 대한 검거 선풍이 시작되었다. 5월 18일 광주에서 휴교령 조치에 반발한 전남대학교 /학생 일단의 시위는 계엄군의 강경진압으로 광주 전역으로 확산, 학생·시민의 민주화 요구와 신군부 타도 시위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헌정 사상 유례없는 유혈참극이 발생하였다. 광주민주화 항쟁을 진압한 정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 사회 전반에 대한 일대 개혁을 강행하였는데 이것은 초헌법적 권능을 가진 신군부의 정권인수기관이었다. 신군부는 곧 정치권 전면에 부상하였으며,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사직하고 8월 25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 취임하였다.제5공화국의 국정지표는 ① 민주주의의 토착화 ② 복지사회 건설 ③정의사회구현 ④ 교육혁신과 문화창달 등 4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특히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제로 하고 3권분립의 원칙아래 상호견제와 균형을 내세웠다. 제5공화국은 출범당시에서부터 언론통폐합, 부실기업 정리, 정치규제법 등으로 혼선을 거듭하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에 따라 1988년 제13대 노태우 대통령 취임으로 막을 내렸다.

통일주체국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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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一主體國民會議

1972년 12월 공포된 ‘유신헌법(維新憲法)’에 의하여 새로이 조직되었던 헌법 기관. 유신 헌법 제 35조에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추진하기 위한 온 국민의 총의에 의한 국민적 조직체로서 조국 통일의 신성한 사명을 가진 국민의 주권적 수임 기관(主權的受任機關)이다”라고 규정되어 있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주된 임무 내지 권한은 대통령의 선거와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의 국회의원을 선거하는 일이었다. 이 국회의원 ‘선거’는 대통령이 일괄추천한 ‘후보자 전체’에 대한 찬반(贊反)을 투표에 붙이는 방법에 따랐다.이 밖에도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중요 통일 정책의 심의와, 국회가 발의(發議)한 개헌안(改憲案)의 의결·확정권을 가졌다. 1972년 12월 15일 실시된 제1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통하여 당선된 2,359명의 대의원들로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2월 23일 첫 회의에서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朴正熙) 후보를 선출함으로써 첫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후 10·26사태를 거쳐 80년 10월 27일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의하여 해체되었다.

부·마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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釜·馬民主化運動

1979년 10월 16

17일 부산에서 일어난 박정권 타도시위와, 이에 촉발되어 같은 달 18

19일 마산에서 발생된 일련의 시위를 말한다. 시위의 전개는 부산대학교와 동아대학교 학생들이 교내에서 정권타도를 구호로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저지로 해산된 후 다시 시내 중심가로 집결, 여기에 시민이 합세함으로써 확대되었다. 학생시위에서 발단된 정권타도 시위가 시민이 합세하여 부산 전역으로 확산되어 민주화 요구로 대규모화하자, 당시 박정권은 강경진압으로 일관, 곳곳에서 유혈사태를 빚었고 10월 18일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이 발동됨으로써 일단 진정되었다. 이에 촉발된 마산에서의 시위양상은 처음부터 격렬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10월 20일 마산과 창원(昌原)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이 발동되었다. 제4공화국 말기에 일어난 이 시위운동은 박정권의 장기 독재에 대한 국민의 저항으로서 제4공화국 붕괴의 서곡이었는데, 일부에는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의원의 의원직 제명파동이 개제되어 있었다.

10·26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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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六事件

1979년 10월 26일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 살해사건. 5·16 이후 18년 간 장기집권해온 박대통령이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 및 경호원 4명과 함께,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그 수하에게 궁정동 안가(安家) 만찬석상에서 총격을 받아 피살된 사건으로, 제4공화국의 붕괴와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사건 직후 최규하 당시 국무총리가 헌법 규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하고,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발동되었다. 계엄법에 의해 설치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가 동 사건을 수사, 김재규와 그의 수하로 동 사건에 가담한 중앙정보부원 6명 및 살광복임·범인 고지(告知) 지연 등의 혐의로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 등 8명을 체포·구속하였다(김재규와 그 수하의 범행 사실은, 사건 직후 김계원이 국방부장관과 정승화 당시 육군 참모총장에게 고지함으로써 알려졌다). 계엄사 합수부의 발표에 의하면 당시 차지철의 견제로 박대통령의 신임을 잃은 김재규가 외세의 개입 없이 단독으로 구상, 감행한 내란 목적의 살인사건으로 규정지어졌는데, 정승화 육참총장이 사건 당시 현장 근처에 있었음이 의혹으로 대두되어 이를 빌미로 ‘12·12 사건’이 일어났다.

YH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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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件

가발수출업체인 와이에이치 무역 여성근로자들이 회사폐업조치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시위를 벌인 사건. 1979년 8월 9일부터 11일 사이에 벌어졌으며 경찰이 강제해산하는 과정에서 여공 1명이 추락사하였다.1970년대 초 수출순위 15위로 국내 최대의 가발수출업체였던 YH무역은 70년대 중반부터 수출둔화와 업주의 자금유용, 무리한 기업확장 등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든데다 75년 노동조합이 설립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자 79년 3월 폐업을 공고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회사정상화 방안을 채택, YH무역을 회생시키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회사측과 정부 당국이 시종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자 4월 13일부터 장기농성에 들어갔고, 8월 9일 도시산업선교회의 알선으로 사회적 파급효과가 큰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감행했다. 이에 경찰은 신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치안상의 이유를 들어 8월 11일 새벽 2시경 1천여명을 투입, 20여분 만에 강제해산시켰다. 이 와중에서 여공 김경숙(당시 21세)이 추락, 사망하였고, 여성근로자 10여명, 신민당원 30여명, 취재기자 12명이 부상을 입었다. 신민당은 김경숙의 추락사가 강제해산 도중에 발생했다고 주장하였으나, 경찰은 경찰의 신민당 진입과 무관하다고 발표하였다. 8월 17일 경찰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주동자로서 이 회사 노조간부를 구속하였으며, 배후조종자로 도시산업선교회 소속 인명진(印明鎭) 목사 등 7명도 구속하였다. 이 사건은 1970년대의 일대 여성 근로자쟁의사건으로서, 사건 직후 야당 및 여러 민주화운동 세력이 공동전선을 형성, 반유신투쟁에 나서는 계기가 되어 10·26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

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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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圭夏 (1919

)

정치가·제10대 대통령.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하였으며, 1941년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43년 만주 대동학원을 졸업한 후, 194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47년 중앙 식량 행정청 행정실장을 거쳐 이듬해 농림부 양정과장을 지냈다. 1959년 주일 대표부 공사·1967년 외무부 장관·1975년 국무총리 등을 거쳐 1979년 대통령이 됨으로써 공직 생활 30여 년 만에 최고직에 올랐다. 이듬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국정 자문회의 의장·민족사 바로찾기 국민회의장을 역임하였다. 무궁화 대훈장·건국 훈장 등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 최고 훈장 등을 많이 받았다.

최규하 행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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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圭夏行政府

10·26사건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한 최규하 당시 국무총리가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단독출마하여 제10대 대통령에 당선, 취임함으로써 최규하 행정부가 출범했다. 그러나 그 앞에는 10·26사건 이후 격동의 시기에서 장기독재에 지친 국민의 민주화 요구와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제침체, 혼돈과 갈등의 정치상황이라는 숱한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대해 최규하 대통령은 스스로 과도체제임을 선언하고 민심수습과 경제난국 타개를 중점으로 하는 정책방향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긴급조치 제9호 해제 및 관련 구속자 석방 등의 조치를 취하기는 하였지만 구체적인 정치일정 및 정권교체 시기·방법 등에 대해서는 제시가 없었다. 또한 취임 1주일 만에 일어난 ‘12 ·12사건’은 사회 전반의 경색과 함께 최규하 정부의 변질을 가져왔다. 1980년에 접어들어 개헌논의는 정부측의 헌법개정 심의위원회와 국회측의 개헌심의 특별위원회로 2원화되어 각각 나름대로의 진통을 겪고 있었고, 정치권은 3김(金)으로 나뉘어 갈등이 표면화되었으며, 개헌논의 정체와 정치권의 분열에 분노한 국민은 자구책을 강구, ‘서울의 봄’은 학생·시민시위와 노사분규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1980년 5월 17일 최규하 대통령은 비상국무회의를 소집, 당시 사태를 ‘국가위기’로 규정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한편, 모든 정치활동 중지와 전 대학 휴교령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소위 ‘5·17 비상조치’를 발하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국가위기로 규정될 만한 정도의 상태였으며 정치일정의 제시조차 없는 상태에서 정치활동금지령을 포고한 것, 이 조치가 최규하 행정부의 주체적인 의사결정이었는가는 의문으로 제기되고 있다. ‘5·17’ 다음날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광주를 진압한 후 정부는 대통령 자문보좌기관으로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 정치·사회·경제 전반에 걸친 대개혁에 착수했는데, 24인의 위원 중 14인이 군요직자들이고 헌정 질서를 무시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이 부여되었다. 동 위원회 상임위원장 전두환의 8·11 집권의사 선언 후 최규하 대통령이 소요사태에 대한 책임과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유로 8월 16일 스스로 하야함으로써 최규하 정부는 붕괴되었다.

문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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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益煥 (1918

1994)

시인·목사. 호 늦봄. 만주 간도 출생. 1955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대학원 수료. 1972년 『월간문학』에 「추억의 커피잔」 「미켈란젤로의 고독」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히브리서 11장 1절」「십계명」 등이 있다. 그는 『구약성서』의 히브리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정신과 감성을 융화시켜 얻어지는 새로운 가락과 언어를 발굴, 투명하고 섬세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시집으로 『새삼스런 하루』가 있다.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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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壽煥 (1922

)

종교인.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으며, 도쿄 쇼치 대학 철학과를 중퇴하고 가톨릭 신학부를 졸업한 뒤 천주교 신부가 되어 경북 안동교회 주임이 되었다. 가톨릭시보사 사장·천주교 마산 교구장·천주교 주교 등을 거쳐, 1968년 천주교 서울 교구장으로 되었다가 대주교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우리 나라 최초의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12·12 군사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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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十二軍事反亂

1979년 12월 12일 밤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10·26사건 방조혐의’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본부장은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가 위력으로 연행한 사건. 당시 계엄사 합수부는 “정총장이 10·26사건 직후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갖고도 범행에 묵시적으로 동조하여 범죄은닉 및 관용조치를 취하였으며, 일부 군요직자들과 연통하며 심상치 않은 동향을 보이기에 소요 유발을 막기 위해 수사관을 보내 자진출두를 종용했으나 이를 거부, 연행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했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동 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3군 사령관 이건영 중장, 합참본부장 문홍구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원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우 소장 등이 조사를 받고 있으며 이들의 연행 과정에서도 총격전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육군 참모총장 공관과 국방부 청사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그 당시 사회 저변에 엄청난 불안감을 파생시켰는데, 1988년 국회 5공청문회에서는 친임관인 정승화 계엄사령관 및 관련 군요직자의 연행은 사전에 국방부장관을 거쳐 임면권자인 대통령의 승인을 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한 채 합수부 단독으로 진행한 것이었으며(사후승인 처리), 당시 발표와는 달리 사전에 치밀하게 구상된 것이었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는 명분하에 대규모 병력 이동이 있었음에도 명령·지휘계통에서 결정권을 갖고 있는 누구도 그 사실을 사전에 몰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그러나 이 사건 역시 가해자와 피해자측의 주장이 첨예한 대립을 보였을 뿐 진실규명은 되지 않았다. 다만 정총장이 10·26사건 당시 약간의 의혹을 불러일으켰으나, 동년 11월 8일 계엄사령관 명의로 군의 조속한 국토방위 복귀를 희망한다는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점이나, 그간의 행적에 비해 합수부측의 파행적인 행위나 일련의 경과(공석이 된 육참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대장이,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중장이,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이 각각 임명되었다)를 살펴보면 이는 군 내부의 주도권 탈취를 위한 분명한 하극상이었다. 정총장은 내란방조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심에서 징역 7년이 확정되어(본인이 항소하지 않았다) 복역중 1981년 3월 제12대 대통령 취임을 계기로 풀려났다.

5·17 비상계엄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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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一七非常戒嚴擴大

1980년 5월 17일 최규하 대통령이 비상국무회의를 소집, 학원사태와 노사분규 등 일련의 사회적 분위기를 ‘국가위기’로 규정하여, 10·26으로 발동되었던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 발동한 것을 말한다. 이어 5월 18일 새벽, 계엄사령부(사령관 이희성 대장)는 계엄포고 제10호를 통해 ①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②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 금지, ③ 전문대학을 포함한 각 대학의 휴교, ④ 정당한 이유 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및 파업 행위의 금지, ⑤ 유언비어 날조 행위의 금지, ⑥ 전·현직 국가원수에 대한 모독비방 행위 금지, ⑦ 북한과 동일한 주장 및 용어를 사용·선동하는 행위 금지, ⑧ 공공집회에서 목적 이외의 선동적 발언 및 질서를 문란시키는 행위 금지 등 초강경의 ‘5·17 조치’를 포고하였다. 같은 날 계엄사는 권력형 부정축재, 사회혼란 조성 및 학생·노조소요 관련 배후조종 혐의로 구정치인·3김(金)씨와 재야인사·교수 등을 연행하였다. 이 사태로 사회 전반은 급격히 경색되었으며, 같은 날 광주에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전남대학교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이후의 일련의 과정으로 이 조치가 의미했던 바가 확실해졌지만, 5공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정부측 인사 그 누구도 진실을 밝히지는 않았다. 이 비상계엄은 1981년 1월 24일 해제되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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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1979년 10·26사태 직후의 혼란기를 한 고비 넘긴 80년 5월에 들어서면서 서울의 대학생들은 ‘민주화성회’를 통하여 참민주화의 실현을 이루고자 하였다. 한편 학생운동을 지구화(地球化)하여 13일부터 전국 대학생들이 일제히 가두로 진출, ‘계엄철폐’ ‘유신세력척결’을 외치면서 본격적인 시위로 돌입하였다. 15일 서울역 광장 앞에서 30개 대학교의 학생 10만명이 모여 시위를 한 다음 날, 서울시내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교내 및 가두시위를 일시 중단하고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면서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광주 역시 16일, 3만명의 학생·시민이 도청 앞 분수대에서 횃불시위를 한 뒤 정부 답변을 기다리며 각자의 일에 전념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정부당국은 비상대책회의를 소집, 18일 0시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시켰다. 계엄확대 발표 직전 서울에서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16일부터 이튿날까지 계속된 제1회 전국 대학 총학생 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55개 대학 대표 95명 중, 서울지역 대학생 회장단 전원이 연행되고, 김대중(金大中)·김종필(金鍾泌)을 비롯한 26명의 재야인사와 구공화당계 정치인들이 체포되었다. 광주에서도 시위의 주도적 인물들이 연행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변하기 시작했다.비상계엄 확대조치로 전국 각 대학에 휴교령이 선포된 5월 18일 아침, 전남대학교 학생 200여 명은 교내로 들어가려다 이미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의 제지가 있자 투석전을 벌였다. 계엄군에게 몰린 학생들이 장소를 옮겨 금남로(錦南路)에서 시민들과 합세하여 연좌시위를 벌이자 이 날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9일 시위대 수가 5,000여 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곤봉과 착검소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관공서와 공공건물이 폐쇄되고, 중·고등학교에 임시 휴교조치가 취해지는 등 군의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으며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사상자에 대한 온갖 소문이 난무하는 등 광주 전역의 분위기는 흥분과 분노로 더욱 격해져 갔다. 20일 오후 시내 중심가에는 시민 3만여 명이 운집하여 연좌농성을 벌였으며 250여 대의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며 도청을 향해 시위행렬을 이루었다. 그날 밤 20만명에 육박하는 시민들은 군경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하였다. 파출소와 방송국이 파괴 또는 방화되고, 주유소가 시민들에 의하여 점검되었으며, 외부로 통하는 모든 시외전화가 두절되고, 지역신문사의 편집이 중단됨으로써 광주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날 밤 11시 5분 도청방어가 위태롭다고 판단한 계엄군은 공식적으로 발포를 개시하였다. 21일 병원은 환자로 가득차고, 시위대들은 군납방위산업체인 아세아 자동차 공장에서 대형버스·장갑차 등 80여 대를 몰고와 도청으로 진격하며 시민들을 운송하였다. 30만명쯤으로 증가한 시위군중은 도청의 군경저지선 돌파시도가 기관총에 의하여 희생자만 늘어나자 외곽지역의 경찰서를 습격하여 무기와 탄약으로 무장을 하였다. 광주시민들로부터 ‘시민군’으로 불린 무장시위대는 급기야 계엄군과의 총격전에 들어가, 계엄군은 시민의 화력을 피하여 철수했고, 시민군은 계엄군 임시본부인 도청을 점거하였다. 계엄사령부는 이날 처음으로 광주사건에 대하여 ‘서울을 이탈한 시위주동학생 및 깡패들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여 발생한 사태로, 현재까지 민간인 1명, 군경 5명이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한편 계엄군은 작전을 변경하여 외곽지역 경계로 전환하면서 광주를 타지역과 차단, 봉쇄하였다.시내를 장악한 시위군중은 22일부터 시내의 지도급 인사로 ‘5·18 사태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계엄군측과 협상을 시도하였으며, 무기·차량 회수를 시작하고, 도청에 상황실을 설치하여 사망자 신원을 확인하였다. 한편 도청 앞에는 시민들이 모여 26일까지 날마다 ‘민주수호 궐기대회’를 열었다. 26일 새벽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재진입하였다. 이에 수습대책위원회는 군의 후퇴 등을 요구하면서 타협안을 제시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았고, 군은 무기를 반납하지 않으면 공격한다는 최후 통첩을 내렸다. 자정을 기해 계엄군은 광주 외곽진입로를 봉쇄하면서 무력진압을 개시, 시민군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오전 5시경 도청의 잔여 시민군은 투항했으나, 전일 빌딩에 배치되었던 20여 명의 시민군들은 끝까지 싸우다가 오후 2시경 전원 사살되었다. 5월 27일 김원기(金元基) 부총리를 단장으로 한 ‘광주사태피해조사단’이 파견되어 피해복구비 15억원과 보조금으로 취로사업비 2억 7400만원, 장례비로 시체 1구당 20만원을 책정하였다. 또 6월 5일 계엄사령부는 민간인 사망자가 148명이라고 발표하였으며, 7월 25일 이희성(李熺性) 계엄사령관은 민간인 162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등 총 사망자수가 189명이라고 밝혔다.9월 5일 계엄사령부는 구금자 174명을 훈방, 175명을 군사재판소에 기소하였으며, 10월 25일에는 175명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사형 5명, 무기 7명을 언도하였다가, 81년 4월 175명 전원에 대한 특별사면 및 감형조치를 하였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85년 5월30일 신민당(新民黨) 소속 의원 103명이 ‘광주사태 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 정부측 답변을 요구함에 따라 6월 7일 윤성민(尹誠敏) 국방부장관은 사망자 총 191명, 중상 122명, 경상 730명, 총피해 260억원이라고 발표하였다.1988년 제6공화국이 들어서자 정부에 대한 한시적(限時的) 자문기구인 ‘민주화합추진위원회’는 광주사건에 관한 진상파악 및 치유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때 ‘광주의거 부상자회’ 및 ‘광주의거 유족회’는 사망자가 2000명에 달하며, 계엄군의 발포에 의하여 광주사건이 야기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철저한 진상규명, 책임자 의법조치, 광주시민의 명예회복, 피해자에 대한 정신적·물질적 피해보상 등을 주장하였다. 같은 해 11월 국정조사권 발동과 언론사상 최초의 국정 생중계라는 분위기 속에서 ‘5공화국 비리’ ‘언론문제’ 등과 함께 ‘광주문제’ 청문회가 실시되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이렇듯 국회 청문회를 거쳐 새로운 시각에서 진상을 규명하였고, 1993년 ‘민주의거’로 재조명되었다. 그 후 1995년 11월 마침내 5·18특별법이 제정되어 전두환 전 대통령이 기소되고 유가족에 대한 철저한 보상과 더불어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기념사업, 기념일 제정 등이 이루어져 끊임없는 민주화의 성원으로 15년이 지나서야 진실이 밝혀졌다.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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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19 80년 5월 31일 전군 비상계엄하에서 설치된 대통령 자문보좌기관. 최규하 대통령은 국보위 제1차 회의에서 10·26 이후에 야기된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이를 ‘국가위기’로 규정하였다)에 대처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헌법과 관계 법령에 입각하여 동 기관을 설치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위원회의 구성은 행정부 각료 10인, 군요직자 14인 등 총24인으로 이루어져 내부적으로는 당연직 위원 14인과 임명직 위원 10인으로 조직되었다. 대통령을 의장으로 국보위의 위임사항을 심의·조정하기 위한 상임위원회(위원장 전두환)와 상임위 소속하에 13개(운영·법제사법·외무·내무·재무·경제과학·문교공보·농수산·상공자원·보건사회·교통체신·건설·사회정화) 분과위원회를 설치, 각 분과위는 분야별 소관사항에 대한 기획·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였다. 국보위는 기본 목표로 국가안보태세 강화, 경제난국타개, 사회안정확보로 정치발전의 내실 도모, 부정부패·부조리 및 각종 사회악 일소를 통한 국가 기강 확립의 4대 지침을 설정하고, 이에 따라 소요·시위 사태 불식, 학원안정, 정치풍토 쇄신, 권력형 비리 발본색원, 언론정화, 노사분규 규제, 각종 사회악 일소, 교육풍토 쇄신, 불순세력 척결 등 9개 당면과제를 확정, 사회 전반에 대한 소위 대개혁에 착수했다. 이로써 시작된 일련의 개혁이 공직자 숙정, 권력형 부정축재자 숙정,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순화교육) 및 지역사회 정화위원회 조직, 정계 숙정과 종교계 정화, 과외금지 및 교육계 정화, 언론통폐합 및 언론계 정화,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등으로 나타났다. 극보위는 1980년 9월 ‘국가보위 비상대책회의’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동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발효되어 제10대 국회가 해산된 후 동 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보위 입법회의’에 흡수되었다. 상임위 분과위원회였던 사회정화위원회는 동년 11월 지속적인 사회정화추진을 이유로 국무총리 직속 중앙행정기관으로 분리 설치된 후 1989년 2월 폐지되었다.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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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斗煥 (1931

)

군인·정치가·제11·12대 대통령. 경남 합천에서 출생하였으며, 1955년 육군 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였다. 그 후 미국 특수전학교와 보병학교에 유학하고 돌아와, 1961년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을 지냈다. 1970년 백마부대 연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국군 보안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979년 10·26사태를 합동 수사본부장으로서 수습하고 이듬해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 되어 제5공화국의 기틀을 잡았다. 1980년 8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으며, 같은 달 27일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1981년 2월 25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8년 2월까지 재임하였다. 퇴임 후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문제로 책임 추궁을 당하다가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비자금 사건과 관련, 1996년 구속 수감되었다가 1997년 12월 사면 복권되었다.

제5공화국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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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共和國-成立

‘10·26’ 이후 출범한 최규하 행정부는 과도체제일 수밖에 없었으며 ‘12·12’를 기점으로 새로운 정치세력(新軍部)이 가시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진부한 틀을 벗어나지 못한 기존 정치세력은 이합집산을 거듭하였고 이에 반발한 학생·재야의 자구적 노력은 언뜻 혼란으로 비쳐졌다. 이러한 국가 공동화(空洞化) 상태에서 국가보위와 개혁의지를 내세운 신군부는 조직적인 세력확대를 꾀해 5·17, 5·18을 계기로 하여 국보위를 통해 정치권 전면에 나타났다.그들은 개혁의 명분하에 사회 전반에 걸쳐 집권을 위한 정지작업을 강행,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 대장을 중심으로 집권의사를 드러냈다.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은 정치도의상의 책임과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유로 하야, 8월 27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당선, 9월 1일 취임하였다. ‘5·17조치’로 국회에서의 개헌논의는 정지되고 정부측의 헌법개정심의회가 개헌작업에 착수, 작성된 개헌안이 1980년 10월 22일 국민투표에 부의되어 확정, 10월 27일 공포되었다(제5공화국 헌법, 제8차 개정헌법). 제5공화국 헌법은 공포와 동시에 발효되었으며, 동 헌법규정에 의해 제10대 국회는 해산되었고, 구체제하에서의 정당도 자동 해산되었다. 동 헌법 부칙 조항에 의해 ‘국가보위 입법회의’가 구성되어 동 헌법에 의해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는데, 동 회의는 과거 국보위를 흡수·통합한 것이었다.전두환 대통령은 11·21 정치활동 부분 해제, 11·25 정치쇄신 조치를 통해 정계 재개편을 완료한 후, 1981년 2월 25일 대통령 선거인단 투표에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 동년 3월 3일 취임함으로써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전두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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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斗煥政府

민정당 5공화국 정부는 정의사회 구현과 민주복지국가의 건설을 국정지표로 내걸고, 육사 출신의 고급장교들을 전역시켜 주요 관공서와 정부투자기관의 요직에 앉혔다.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의 핵심세력은 경상도 출신의 정규 육사 출신으로서, 박대통령 시절부터 ‘하나회’라는 군대내 사조직으로 결속되어 있다가 박대통령의 사망을 기회로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박대통령이 교수의 두뇌를 주로 빌렸다면, 전대통령은 육사 출신 엘리트의 힘을 빌렸다.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 후 재야, 학생운동에 대해 강온 양면의 정책을 썼다. 학원의 시위현장에는 직접 정사복 경찰을 캠퍼스 안에 투입시켜 진압하였으며, 1984년 3월까지 사복경찰이 대학에 상주하였다. 이 때문에 80년대의 학원은 전보다 더 살벌하였고, 최루탄가스가 그칠 날이 없었다. 또한 여러 언론매체들을 통폐합하고, 반정부 성향 기자들을 대거 해직시켜 언론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유화정책을 펴서 정치규제자를 단계적으로 해금하고, 중앙정보부의 이름을 ‘국가안전기획부’로 바꾸는 한편(80. 12), ‘반공법’을 폐지하여 ‘국가보안법’에 흡수하였으며, 시위로 제적된 학생들을 복교시켰다. 그리고 1984년에는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학생자치기구를 부활시키기도 하였으며, 학원의 면학분위기를 조성하고 대학입시 재수생을 구제한다는 명분으로 ‘졸업정원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졸업정원제 이후 대학정원이 대폭 늘어 교육의 질이 떨어지고, 1981년에는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다음해에는 통행금지가 해제되었으며, 중·고등학생의 교복이 자율화되었다. 5공시대의 경제는 다른 분야에 비해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80년대 전반기에는 60

70년대 경제개발의 후유증으로 외채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고, 장영자사건, 명성그룹사건, 국제그룹해체 등 많은 문제가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로 정부의 긴축정책과 국제 원유가(原油價)의 하락, 달러가치의 하락, 금리의 하락 등 이른바 ‘3저’ 현상이 지속되어 물가가 한 자리수로 잡히고, 수출이 호조를 보였으며, 부가가치가 높은 자동차, 전자, 기타 반도체 첨단산업이 활기를 띠고 성장하였다. 1986년 현대자동차 포니, 엑셀이 미국으로 수출된 것은 우리나라가 자동차산업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겨루게 되는 첫 신호탄이었다.한편, 선진국의 시장개방 압력이 높아지면서 공산품뿐만 아니라 농축산물도 수입자유화의 폭이 확대되어 1986년 현재 수입자유화율은 91.5%에 도달했으며, 외국자본의 투자비율도 점차 확대하여 100%까지 허용하였다. 정부의 시장개방정책은 대기업에는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였으나, 값싼 외래 농축산물의 수입으로 농촌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0대 대기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79년의 33%에서 1989년에는 54%로 증가하고, 30대 대기업의 계열기업은 1970년 126개, 1979년 429개, 1989년 513개로 늘어났다. 이와 대조적으로 농촌인구는 급속히 감소하고, 이농민의 대다수는 도시빈민층을 형성하여 막노동에 종사하거나 산업노동자 혹은 서비스업으로 전환하였다. 양곡자급률은 1970년의 86%에서 1985년에는 48.4%로 낮아졌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밥상에는 외래 농축산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대가 되었다,수출호조에 힘입어 국민총생산이 급속히 성장하여 매년 평균 성장률이 10% 내외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1인당 GNP가 1987년 현재 3천 달러를 넘어서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게 되었다. 1977년의 100억 달러 수출이 1981년에 200억 달러를 돌파하고, 1989년에는 620억 달러를 달성했다. 80년부터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것도 경제성장의 한 징표였다.80년대의 경제성장에는 1981년에 결정된 88서울 올림픽과 1986년에 개최된 아시안 게임도 한몫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이 열린다는 자긍심이 국민을 분발시켜 미래에 대한 희망과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또한, 전두환 정부는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준비를 통해서 사회통합을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80년대에는 외형상 경제규모가 급속히 커졌으나, 빈부격차와 도시와 농촌의 갈등, 그리고 지역갈등의 문제는 더욱 심화되었다. 산업노동자의 급증과 열악한 임금 및 노동환경으로 노동운동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농촌의 피폐에 따라 농민운동도 고개를 들었다. 이 시기 학생운동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민중’으로 간주하고, 이들과 연계하여 민중사회건설을 표방하고 나선 것은 이전의 민족 민주화운동과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제 민족(반미), 민주(반독재), 민중(반자본가)을 합친 이른바 삼민(三民)투쟁이 학생운동의 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학생운동은 반미운동에 중심을 둔 이른바 반미자유파(NL)와 민중광복에 역점을 둔 제헌의회파(CA)로 나누어 주도권 다툼이 나타나기도 하였다.1972년 역사적인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후 가동되던 남북조절위원회는 1973년 김대중납치사건으로 중단되고 남북관계가 한동안 정돈되었다.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적십자회담과 남북체육교류를 위한 체육회담은 70년대에도 있었다. 그러나 1983년 10월 전두환대통령이 미얀마(버마)를 방문하던 도중 랑군의 아웅산 묘소에서 폭탄폭발사고를 만나 부총리 등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의 배후에 북한이 관여했다고 알려지자 남북관계는 다시 냉각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86년에는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하면서 이것이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북한의 수공(水攻)작전이라고 선전되어 국민성금을 모으고 대응댐을 건설하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남북관계가 악화되는 가운데 남북의 통일방안도 평행선을 달렸다. 북한은 1980년 10월 새로운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남북대표가 모여 통일헌법을 마련하고, 그것에 따라 총선거로 통일정부를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남과 북의 통일방안은 모두 자신에 유리한 조건을 내세운 것으로, 결국 선전적인 의미를 갖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천만이나 되는 남북 이산가족의 재회는 통일 이전의 인도적인 문제로서 남북한이 다같이 피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이산가족의 요구가 너무나 절실하여 이를 외면하는 것은 정권유지에도 지장을 주었다. 북한은 남한의 요구를 받아들여 1985년 9월 20일 드디어 쌍방 151명의 이산가족이 판문점을 넘어 3박 4일간 서울과 평양을 방문하였다. 이 만남은 비록 일부 인사에 국한되고, 고향방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분단 후 처음 맛본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국수주의적 역사를 선전하였다. 일제초기에 유행했던 대종교 계통의 역사책이 여과없이 퍼져 고대사에 대한 허황한 자부심을 부추겼다. 그런가 하면 각종 사회교육기관에서도 이를 대대적으로 취급하여 역사교육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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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所爆破事件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 있는 아웅산 묘소에서 한국의 외교사절단이 북한의 테러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 대통령 전두환의 서남아·대양주 순방의 첫 방문지인 이 곳에서 대통령의 아웅산묘소 참배행사를 위하여 미리 대기 중이던 부총리 서석준 이하 여러 정부요인, 취재차 수행했던 기자 등 17명이 북한 테러범이 장치한 폭파물의 폭파로 사망하고, 합참의장 이기백 등 13명이 중경상을 입는, 세계 외교사상 유례없는 일대 참변이었다. 화를 면한 전두환대통령 내외는 모든 방문 예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하였다. 국내외의 비분과 비탄 가운데 미얀마 정부는 한국에 조문사절을 보내는 한편, 주범 2명을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북한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다음 해인 1984년 10월 미얀마 정부는 아웅산 사건은 북한의 소행이라고 국제연합에 공식으로 보고하였다.

국가보위 입법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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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家保衛立法會議

제5공화국 헌법의 발효로 동 헌법 부칙 제5조에 의해 국회가 해산되고 제6조 규정에 의해 설치되었던 과도입법기관. 동 조항에 따르면 “국가보위 입법회의는 동 헌법에 의한 국회의 최초 집회일 전일까지 존속하며, 동 헌법시행일로부터 동 헌법에 의한 국회의 최초 집회일 전일까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국가보위 입법회의법에 의하면 동 회의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행정 및 기타 각계 인사 50인 이상 100인 이내의 의원으로 구성하며, 의장 1인과 부의장 2인을 두고, 7개 상임위원회(운영·법제사법·외교국방·내무·경제 제1·경제 제2·문화공보)와 특별위원회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1980년 10월 28일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81인의 입법의원이 다음날 개회식을 갖고, 제11대 국회가 구성된 후인 1981년 4월 10까지 법률안 189건을 비롯, 총 215안건을 처리했다. 그러나 제5공화국 헌법 관련 조항을 살펴보면 이 기관의 반민주적이고 위헌적인 요소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부칙 제6조 3항은 “동 회의가 제정한 법률과 이에 따라 행해진 재판 및 예산 기타 처분 등은 그 효력을 지속하며 이 헌법 기타의 이유로 제소하거나 이의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제4항에서는 “동 회의는 정치풍토의 쇄신과 도의정치의 구현을 위하여 이 헌법 시행일 이전의 정치적·사회적 부패나 혼란에 현저한 책임이 있는 자에 대한 정치활동을 규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헌법의 필수기관도 아닌 과도입법기관이 그 존립근거인 헌법보다 우위를 점하여 ‘소급입법의 제한’이라는 헌법의 일반원칙과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할 수 있음은, 국가권력의 근원인 국민의 ‘일반의사’인 국가 근본법인 헌법정신에 비추어 볼 때 어떤 논리로도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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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生運動

학생운동은 헌정사에 있어서 반민주·독재 투쟁의 선봉이었다. 1980년대의 학생운동은 과거에 비해 조직·이념적으로 체계화되고 정치적 성향이 강화되는 특권을 갖는다. ‘10·26’ 이후 ‘5·18’로 규정지어지는 초기의 학생운동은 민주화와 신군부 타도로 집약할 수 있다. 5·18은 학생운동 차원을 넘은 국민적 항쟁이었으나 1980년대 학생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고 있다. 10·26 이후 제4공화국 당시 학교에서 추방되었던 제적학생·해직교수들이 복권·복교한 후, ‘학내문제’에 집중하였던 학생들은 1980년 5월 민주화 궤도의 이상을 감지하자 정치적 성향으로 급전한다. 이 때부터 ‘대학연대’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후 체계적인 조직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5·17, 5·18 이후 가열하기 시작한 학생운동에 국보위의 교육개혁은 악재로 작용하고, 제5공정권의 녹화사업은 일시적으로 학생운동을 침체시켰으나 급진세력의 등장을 초래한 결과가 되었다. 1983년 학내자율화 조치 이후 학내에는 총학생회 부활과 학도호국단 폐지 요구가 대두되었고, 학생운동은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대한 실체적 민주화 요구로 확대되어 ‘군부독재 타도’의 구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4년 학생운동은 노학·농학(勞學·農學) 연대투쟁의 형태로 구체화되고 대학연합시위라는 조직화 경향을 나타냈으며, 가투(街鬪)를 선언, 대정부 실력행사로 나타난다. 학내 서클이나 학생회가 주도했던 시위를 이념학습을 거치고 조직화된 학생단체가 주도하게 되었는데, 1985년 결성된 ‘전국대학총연합(全學聯)’이 사실상 최초의 실체화이며 그 기원이다. 이 무렵부터 학생운동은 이념적인 진보를 시작하여 이에 대한 정권의 좌경화·극렬 논리와 충돌하게 된다. 학생운동 또한 반사적으로 실력행사에 돌입하고, 이 과정에서 급진적인 세력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여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주도적 지위를 점한다.1980년대의 학생운동은 재야와 연합, 독재타도와 민주화, 노동운동의 진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사상하였고 구속되었다. 제6공화국 출범 이후 학생운동은 ‘통일·반미·군부통치 종식’ 투쟁으로 전환하였으며 독립적인 경향을 보였다.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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勞動運動

제5공화국에서의 노동운동은 제4공화국에서의 성장 위주 경제정책에서 소외되어온 근로자들의 빼앗긴 몫을 찾고자 하는 권리회복의 주장이었지 확대 요구는 아니었으나, 주체적으로 이러한 의사를 이끌어 나갈 만한 능력은 축적되어 있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학생운동권의 노학연대 노력에서 비롯되어 재야를 주축으로 하는 민주화 투쟁에 연계됨으로써 진전되었고,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한 것은 ‘6·29’ 이후였다. 노동문제는, ‘정경유착’이라는 경제적 현실 앞에 성장의 주역인 근로자들은 그 과실(果實)의 분배에서 사실상 제외되었고, 미미한 법률적 권리의 주장마저도 정책적인 억제를 받아왔으므로 ‘상대적 빈곤감’과 기업주들의 전근대적·권위적인 기업운영, 종속의 강요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된다. ‘10·26’ 이후 과도기적 상황에서 발생한 일련의 노사분규에서 나타났던 과격성은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1980

81년 국가보위 입법회의에서는 1971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효력이 정지되었던 노동관계 법령 개정안을 확정하고 ‘노사협의회법’을 제정·공포하였다. 그러나 동 법률들은 당시의 노동 상황에 비추어볼 때 실제로는 진전이 없는 무의미한 것이었으며, 근로자의 권리주장을 제한할 수 있는 독소조항이 상당히 포함되어 노동조합 가입 근로자가 감소하는 현상도 나타났다.제5공화국 출범 이후 1984년도까지는 노동운동의 암흑기였으나 1985년 학생운동권의 노학연대 투쟁이 본격화됨으로써 노동운동은 전환기를 맞는다. 실정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 의의를 잃은 노동조합 대신에 학생운동권 또는 대학 출신의 지식인 그룹에 주도된 각 기업별·지역별 단체가 조직되어 기존 노조와의 어용·정통성 시비가 일어나자, 당시 정부는 이들을 비합법적인 불순세력으로 규정하고 탄압을 가함으로써 파업·항의농성·시위 등 첨예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양상의 노동운동은 구속·해고사태로 이어졌고, 학생운동권과 노동계에 대한 공권력의 감시와 탄압에 반사적으로 재야·민권단체들과 연계됨으로써 ‘민주화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관련 기업체와 외곽 노동단체들의 공동보조는 노조연대, 동조투쟁이라는 광범위하고 강력한 노동운동 형태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과열성에 대한 국민의 우려와 정권의 주도면밀한 제재로 1986년에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지만, 이러한 조직이 계속적으로 확산되자 ‘불법노동단체 해산령’이 발동되기도 했다. 1987년에는 산업사에 전례가 없는 노사분규사태가 발생했다. 그 기폭제는 바로 6월 민주화항쟁이며, 6·29선언 이후의 민주화 물결 속에서 과거의 억압과 상실에 대한 불만이 일시에 터짐으로써 위기적 상황까지 발생되었다. 이후 노동운동은 그 주체적인 세력이 성장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6·29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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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二九宣言

1987년 민주 정의당 대표위원이 발표한 시국수습 선언. ‘6월 민주화항쟁’에서의 국민적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정치적 구상으로, 제5공화국의 붕괴와 제6공화국 성립과정에서 집권층 내부의 결단으로 평가된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권교체, 시국관련 구속자 석방, 언론기본법 폐지, 지역감정 해소, 지방자치제 및 교육자율화 실시 등을 골자로 한 이 선언은, 6월항쟁의 당연한 귀결로서 재야·국민·야권의 수락으로 실체화되었다.

6월 민주화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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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月民主化抗爭

제5공화국을 붕괴시키고 제6공화국을 성립시킨 국민적 민주화 의지를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1987년 6월 10일에서 6·29선언까지 20여 일에 걸쳐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 5공 타도를 요구한 시위운동을 가리킨다. 그 과정과 결실을 맺기까지 전위에 선 세력은 학생·재야인사·야권 정치인들이었으나, 집권세력의 결단에 이르게 한 것은 침묵하는 다수로 머물러 있던 국민이었으므로 6월항쟁의 주체는 국민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1986년 초 야권의 개헌투쟁이 시작된 후 재야·학생이 이에 가세함으로써 본격화된 5공종식과 민주화운동은 5·3 인천사태와 야권분열로 일시 침체되었으나, 1987년 1월 당시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불법연행된 후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여 범국민적 분노와 참여를 야기시킴으로써 전기를 맞게 되었다.동년 4월 13일 5공 정부는 ‘5공 헌법에 의한 대권이양’을 골자로 하는 소위 ‘4·13 호헌(護憲)조치’를 발표, 이를 계기로 야권·재야가 재결합하고 학계·종교계 등에서도 이에 반대하는 시국선언·농성이 잇달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5월 27일 각계를 망라한 민주·민권단체가 총결집된 ‘민주화추진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어 ‘군사통치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을 슬로건으로 대정권투쟁에 돌입하였다. 6월 10일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지명 전당대회가 열린 날 국민운동본부는 ‘6·10 민주화 장정대회’를 개최, 6월항쟁의 대막이 올랐다. 이를 불법집회로 규정한 5공 정부는 무한정한 공권력을 투입하여 원천봉쇄를 시도했으나 서울·부산·광주·인천 등 전국 18개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시민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날 밤 ‘6월의 태풍의 눈’이라 일컬어졌던 ‘명동성당 점거 농성사태’가 발생, 반미(反美)·화형식 등의 새로운 시위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앞서 6월 9일 연세대학생 이한열군이 교내 시위중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여 ‘6월항쟁’의 기폭제로 작용했고, 특히 여성계 참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1987년도의 6월은 전국이 최루탄과 투석의 공방전으로 얼룩졌는데, 이러한 위기적 상황은 국민의 평화적 민주화 요구를 물리적으로 봉쇄하려고 한 5공 정부의 권부집착에 기인한 것으로, 초강경 일변도였던 그들의 대처는 일반국민의 시위 참여·동조로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국민운동본부는 ‘6·26 평화대행진’을 선포하였다. 3일 후인 6월 29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의 6·29선언으로 ‘6월’은 정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