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귀족사회와 무인정권/무인시대의 사회

무인시대의 사회〔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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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란은 문벌과 문신들의 주도와 무신에 대한 차별에 반기를 든 정변으로, 무신들이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신란 이전부터 고려사회는 상층으로부터 하층사회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으며, 무신란 이후에는 그 변화가 더욱 현저해졌다.무신들의 집권이 확고해지자, 무신과 문신간에 공존을 위한 타협이 진행되면서 통혼이 이루어졌다. 특히 집권 무신세력들과 기존의 문벌들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통혼이 추진되었다. 이는 집권 무신세력들로서 문벌층의 권위를 끌어들이는 것이었고, 문벌층으로서도 집권세력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해나가는 길이었다.이로써 지배층의 상층부는 집권 무신세력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문벌층이 재편성되는 양상을 띠었다. 이처럼 변화된 지배층 상층부는 전기의 문벌층에 비해 혈통적인 가문의 권위가 약화되었지만, 그 전통은 일부 남아 후기 지배층의 상층부를 이루는 권문세족(權門勢族)과 같은 양상을 띠었다. 최고의 지배층이 이루는 계급내혼적인 단위에는 급격히 권세를 잡게 된 하층 출신들이 상당수 새로이 포함되었는데, 그 내부 구성원들의 상승과 몰락이 빈번한 와중에서 이러한 신흥세력의 비중은 서서히 확대되었다. 또한 정권을 장악한 정치세력 가운데서도 중심적인 인물들은 무인집정과 같은 신흥세력들이 주류를 이루었다.지배층의 하층부에도 지방의 하층 출신들이 장기간의 정변과정에서 대거 유입되었다. 특히 군인에서 하급무관으로 진출하는 부류들이 많았고, 그 중에는 무인집정 이의민이나 김준(金俊)처럼 노비의 피가 섞인 하층 출신으로 당대의 최고권력에까지 접근한 인물들도 있었다. 무신들이 사회 전반을 주도하는 가운데 문신들의 역할은 오직 문장에 능하고 실무행정을 잘 수행하는 이른바 ‘능문능리(能文能吏)’로 축소되었다. 무반들이 문반직을 겸직하는 것이 확대되고, 지방 향리층의 문반직 진출도 증가하였다.토지질서의 붕괴는 농민들의 생활을 위협하였다. 12세기 초 이래 토지겸병에 따른 수취의 증가, 빈번해진 이상기후에 따른 흉작, 전란 등은 기근을 불러왔고, 경제적 파탄으로 유망민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무신란 이후 정치적 혼란 속에서 더욱 악화되었다. 무신집권기에는 권세가들의 토지겸병으로 농장이 발달하였으며, 전시과제도가 유명무실해지게 되었다. 최고 권력층으로부터 하급 지방관에 이르기까지 수탈을 자행하여 하층민의 항거와 지배질서로부터의 이탈이 이어졌다.하층민의 봉기는 무신집권 초부터 30년 간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명종 2년(1172)에는 서북지방의 성주(成州) 등 3개 주에서 주민들이 수령의 횡포와 수탈에 항거하여 민란을 일으켰고, 명종 4년에 일어난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에는 서북지방 40여 성의 주민들이 대거 동조하였다. 특히 후자는 진압 후에도 난이 두 차례 재발하여 5년 간이나 지속되었다.명종 5년경부터는 남부지방에서도 큰 세력을 이룬 지방민의 봉기가 일어났으며, 명종 6년에는 공주에 속한 종속구역인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가 주동한 봉기가 발생하였다. 망이·망소이는 관군의 회유로 일단 항복했으나, 다음해에 재차 봉기하여 공주를 비롯한 충청도 대부분의 군현들을 점령하며 기세를 떨치다가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의해 진압되었다. 충청도지역에서는 명종 12년(1182)에도 수령의 탐학에 저항한 농민봉기가 있었다.같은 시기에 전라도에서도 산발적인 지방민 봉기가 있었는데, 전주에서는 군인들과 관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명종 23년(1193)에는 경상도지역에서 민란이 다시 발생하여, 신종 5년 경주를 중심으로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경상도 일대에 위세를 떨쳤으나, 다음해 최충헌이 파견한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무신집권기에 발생한 양민·천민·종속구역민 등 하층민의 봉기는 가혹한 수탈에 몰려 일어난 저항이었으나, 일부 봉기에서는 정권과 체제에 저항하는 양상도 나타났다. 신종 원년(1198) 만적(萬積)이 주동이 된 개경지방 사노들의 반란모의에서는 노비문서인 천적(賤籍)을 불태워 삼한에서 천민을 없앨 것이 표방되었고, 더 나아가 정권의 탈취가 기도되었다.특히 종속구역민이나 천민층의 경우 제도적으로 부과되는 부담이 과중하였으므로, 이들의 봉기는 체제에 저항하는 측면이 강했다. 망이·망소이의 난에 대한 정부의 회유책에 명학소를 현으로 승격하는 조치가 포함된 것은 그러한 요구에 대한 미봉적 대응이었다. 최씨정권이 들어서면서 강력한 토벌로써 하층민의 봉기를 억제하였으나, 변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현저한 것은 종속구역민들의 변화였으니, 이들 구역에서는 주민의 이탈이 잇따랐다.그리하여 890여 개에 달하던 종속구역이 12세기와 13세기를 거치는 동안 대부분 사라지고, 일부 남은 것들도 대부분 그 성격이 일반 군·현 도는 그 속의 일반 촌락과 같은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