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귀족사회와 무인정권/귀족문화

귀족문화〔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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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치주의의 사회에서 유교가 성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문벌 존중의 풍조는 유학에까지 영향을 끼쳐서 사학(私學)이 발달하였다. 문종 때에 최충(崔?)이 9재(九齋)학당을 설치한 데서부터 사학의 시초가 비롯되어, 전직 고관과 당대의 대학자들이 각기 사학을 세워 사학12공도(私學十二公徒)가 성립되었다.사학의 융성은 관학(官學)의 부진을 초래하였다. 이에 자극되어 관학의 진흥을 꾀하고자 노력하는 왕들이 나오게 되었다. 예종은 9재(九齋)를 모방하여 7재(七齋)를 설치하고 또 양현고(養賢庫)와 학문 연구소인 청연각(淸?閣)·보문각(寶文閣)을 궁내에 설치했다. 인종 역시 그 뜻을 이어 관학기관을 정비하였다. 그 결과 김인존(金仁存)·김부식(金富軾)·윤언이(尹彦?)·정지상(鄭知常)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었다. 유학의 발달과 함께 각 왕의 실록(實錄)이 편찬되었으며, 김부식에 의해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찬진(撰進)되었다. 불교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교(敎)라 하여 유교와 병존하였다. 불교는 이미 보편화되어 외형상으로 성했으나 초기에는 그 교리 자체에 이렇다 할 새로운 발전이 없이 선종과 교종이 대립되어 있었다.이러한 때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나타나 교선(敎禪) 일치를 주장하고 천태종(天台宗)을 펴자, 이에 자극되어 선종은 자각·단결하여 조계종(曹溪宗)을 성립시켰다. 이리하여 고려의 불교계는 5교(五敎) 양종(兩宗)으로 새로운 편성을 보게 되었다.또한 고려 초기의 불교는 대장경(大藏經)의 조판(彫板)에 이르러 하나의 정리를 이룩했다. 현종 때 착수하여 문종 때 완성된 대장경의 조판은 거란의 침입을 막으려는 염원과, 요(遼)의 무력에 대한 고려의 문화적 우위성의 주장 및 국가의 관념적인 지도능력의 보유를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이룩된 것이었다.고려 때는 불교가 현세 이익의 종교로 생각되어 국가나 왕실의 융성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사찰 창건과 각종 불교 행사가 성행하였다. 태조 때 세워진 법왕(法王) 왕륜(王輪)·흥국 등의 사찰을 위시하여 문종 때에는 흥왕사(興王寺)가 완성되었다. 또한 국가적인 불교 행사, 즉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가 행해지고, 각종 항례적인 법회(法會)와 기타 행사가 있었다.불교의 숭상은 과거제도의 시행에 따라 승과제도(僧科制度)를 창설케 했다. 승려의 수는 토지의 급여와 면역(免役)의 특권 때문에 점점 늘어갔다. 또 사원은 기진(寄進)·투탁(投託)·겸병(兼倂) 등의 방법으로 소유지를 확대해 갔다. 이 사원전은 면세(免稅) 특권 및 불보(佛寶)·장생고 식리(殖利) 등의 고리대자본을 형성하여 이자놀이를 하였다. 그리고 상업·양주(釀酒)·목축 등의 방법으로 부(富)를 축적하여 갔다.신라의 향가는 고려 초기까지도 그 줄기가 남아 있어 균여(均如)와 같은 작가가 나왔으나, 점차 소멸되어 한문학이 대신 성행하고 중국 고전의 문귀나 한시(漢詩)가 귀족들 사이에 읊어졌다.고려문화 중 가장 손꼽히는 것은 귀족들의 향락 생활의 소산으로 이루어진 대표적 예술작품인 고려자기(高麗磁器)일 것이다. 그 중 특히 청자(靑磁)는 천하 일품이었다. 청자 이외에도 은상감향로(銀象嵌香爐)·촛대·거울 등 훌륭한 공예품들이 많다. 그 밖에도 정교와 섬세미를 자랑하는 석부도(石浮屠) 같은 미술품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정토사(淨土寺)의 실상탑(實相塔)과 법천사(法泉寺)의 현묘탑(玄妙塔)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분묘에 사용된 석관(石棺)의 4신수(四神獸)나 12지신상(十二支神像)의 선각(線刻)도 아름답다.고려 초기의 석탑은 신라의 것을 계승한 것으로, 현화사칠층탑(玄化寺七層塔)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리한 직선미보다는 둥근 맛이 나는 석탑이 나타났다. 또 송의 영향을 받아 8각탑의 양식도 유행하여 월정사 9층탑(月精師九層塔) 같은 것이 생겼다. 불상으로는 관촉사(灌燭寺)의 미륵불(소위 은진미륵)과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아미타소상(阿彌陀塑像)과 같은 걸작이 있다.회화도 상당히 성하였으나 『예성강도(禮成江圖)』로 유명한 이영(李寧)과 그 아들 이광필(李光弼)의 이름만이 전할 뿐이다. 서도(書道)로는 유신(柳伸)·탄연(坦然)·최우(崔瑀)가 유명하며, 이들은 신라의 김생(金生)과 함께 신품사현(神品四賢)으로 일컬어진다.11세기 말 이후에는 국내외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새로운 방향이 모색되었다. 국내에서는 문벌 주도 체제에 대한 내부항쟁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095년 이자의(李資義)의 난이라는 정치세력간의 충돌이 일어났고, 그 결과 어린 나이로 즉위한 헌종(憲宗)이 물러나고 숙부 숙종이 즉위하였다. 정란(政亂)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가운데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남경(南京, 지금의 서울)으로의 천도가 논의되다가 남경에 별도의 도성이 세워졌다.지방에서는 유민들이 발생하고, 군인전의 경작자 확보가 원활하지 못하게 되었다. 국외에서는 거란의 세력이 약화되고, 여진의 세력이 완안부(完顔部)의 발흥과 함께 강성해져, 북방지역의 국제정세가 불안하게 되었다. 문화적인 면에서 우선 왕실의 주도로 유학이 진흥되고 새로운 사상적 탐구가 추진되었다. 숙종은 거란 및 송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송나라에 더 큰 비중을 두고 그 문물의 도입을 더욱 확대하였다. 숙종은 유교 경전과 제자백가서·역사서의 정리와 간행, 보급에도 힘썼으며, 송나라에서 새로이 편찬된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과 1천권 분량의 백과사전적 서책인 『태평어람(太平御覽)』 등 중요한 서적들을 들여왔다. 공자의 묘인 문선왕묘(文宣王廟)에 제자들과 유현(儒賢)들을 제사 대상으로 새로이 안치하고, 1102년에는 공자보다 앞선 인물인 기자(箕子)로부터 우리나라의 유교전통이 시작되었다 하여 평양에서 구전되던 기자의 묘를 찾아 기자사당(箕子祠堂)을 세웠다.예종(睿宗)은 즉위하자 침체된 관학의 부흥을 꾀하고, 군신이 함께 경사(經史)를 강론하는 경연(經筵)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유학진흥의 분위기를 한층 고취하여, 당시에 “삼강오상(三綱五常)의 교(敎)와 성명도덕(性命道德)의 이치가 사방에 충만하였다”는 평도 있었다. 지방에서도 유학이 진흥되어, 한반도 동남부인 밀주(密州, 지금의 밀양)와 같은 곳은 12세기 후반의 글에서 교통과 물산이 흥한 가운데 유자(儒者)들이 많고 예의에 밝은 고장으로 묘사되었다.유학의 내용에서도 달라진 면이 나타나게 되었다. 『주역(周易)』과 『중용(中庸)』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두 책이 경연하면서도 자주 강론되었고, 윤언이(尹彦?)는 『역해(譯解)』를 지어 『주역』에 대한 독자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 두 경전은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사상을 이루는 우주론과 존재론 및 심성론(心性論)의 기초가 된 중심적 경전으로,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진 것은 송나라의 성리학에 대한 높은 관심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그 무렵 고려에서는 송나라 서책들을 비교적 폭넓게 검토하면서 유학을 연구하여, 주희(朱熹) 이전의 중요 성리학자로서 당시 송나라 조정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양시(楊時)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이 시기 새로운 사상적 모색의 또다른 일면은 송나라에서 크게 번성하던 도교(道敎)가 수입된 것이다. 송나라에서 도사가 와서 강론을 하기도 했으며, 고려인으로 송나라에 가서 도교를 공부하고 돌아와 활동한 인물도 있었다. 노자의 『도덕경』이 국왕과 유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강론되기도 했다. 예종은 도교에 크게 심취하여 도교의 사원(道觀)인 복원궁(福源宮)을 세우고 빈번히 초제(醮祭)를 거행하였다.예종대의 문화적 동향은 모화적(慕華的)인 것으로 비판받기도 하는데, 중국문물의 도입이 적극적으로 추진된 반면에 국가 단위의 전통적 제전인 팔관회에 국왕이 참관하는 일은 크게 줄어들었다. 한편 의천의 불교 교단 재정비가 그의 이른 사망과 함께 무산되고, 불교는 계속 일반 대중과 유리되는 가운데 문벌세력과 뒤얽혀 내부 모순이 커져갔다. 이에 세속과 얽힌 법상종·화엄종 중심의 종파불교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으며, 도교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 선(禪)을 개인적으로 수행하는 은둔적이고 고답적인 경향의 거사불교(居士佛敎)가 문벌 사이에 유행하였다. 문벌의 주도 속에 문화의 융성이 구가되는 이면에서는 문화의 기풍이 진취적이고 건실한 데서 보수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으로 바뀌고 있었다.숙종대에는 강성해진 여진과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는데, 보병을 위주로 한 여진 정벌군은 기병의 열세로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에 고려에서는 전국적인 규모로 군대를 징발하여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였고, 예종 2년(1107)에는 윤관(尹瓘)이 이끈 17만의 고려군이 여진을 정벌하여 동북방 지역에 9성을 쌓았다(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함흥평야 일대로 보는 견해와 두만강 북쪽에까지 확대하여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여진이 강성해져 침략해 오는 것에 대한 응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진 정벌에 대해 윤관이 남긴 글을 보면 냉철한 현실인식보다는 관념적인 문화적 우월감에 도취된 면이 나타나 있다. 결국 9성 지역의 지리적 조건 등에 대한 기초적 사전 형세판단의 잘못으로 여진 정벌은 예상치 못한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게다가 서북쪽의 거란에 대비하기 위해 동북방에서의 전투를 장기화할 수 없는 부담과 국론분열로 인해 9성 지역을 그대로 여진에게 내주고 말았다. 실패로 돌아간 여진 정벌은 막대한 인력과 물자의 허비로 경제적 어려움을 남겼고, 여진 정벌 추진세력과 반대세력간에 격화된 대결은 지배층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켜 정치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1122년에 어린 나이로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외척인 이자겸(李資謙)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토지를 탈취하는 등 부정을 자행하였다. 이자겸은 잘못을 비판하는 신진관리들을 제거하고, 1126년에는 왕위를 노려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가운데 여진이 세운 금(金)나라가 거란을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오자, 이자겸 일파는 여러 신료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금나라에 대해 신하로 자칭하는 사대외교(事大外交)관계를 결정하였다(1126).이자겸의 난이 평정된 후, 궁궐의 대부분이 불타 황폐해지는 사태에 이르게 한 기존 정치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와 금나라에 대한 사대외교를 향한 비판여론 속에서 정지상(鄭知常), 승려 묘청(妙淸) 등의 서경 출신 세력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고려가 천하의 중심으로, 천하에서 유일하게 신성한 곳이라는 고대적 천하관의 계승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내적으로는 서경으로의 천도(遷都)와 내정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대외적으로는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제정할 것(稱帝建元)과 금국(金國)과 대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묘청 등의 미신적인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과 음양비술(陰陽?術)에 많이 의존하였는데, 묘청이 지덕(地德)이 쇠한 개경에서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천도하면 국력이 왕성해져 금나라도 항복할 것이며 다른 나라들도 조공을 바치게 될 것이라 하자, 서경에 새로운 궁궐이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히려 자연재해가 잇따르면서 서경 천도에 대한 회의론이 일어났으며, 그것을 만회하려는 묘청의 속임수가 탄로나자 비판론이 크게 고조되었다. 문벌세력을 필두로 한 조정 신료들의 거센 비판에 몰린 묘청 등은 인종 12년(1135)에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1년 만에 평정되었다.서경 반란의 평정을 맡았던 김부식(金富軾)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자 문벌 중심의 체제는 더욱 경직되고 사대외교도 지속되었다. 김부식은 또한 국가의 공식적 역사서를 편찬하는 최고 책임자가 되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만들었다. 이에 앞서 고려 초에 만들어진 『구삼국사기(舊三國史記)』가 있었으나, 『삼국사기』는 유교이념과 유교사관에 치중하여 전통적인 토속문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앞시대의 역사를 다시 편찬한 것이었다.

최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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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 (984

1068)

고려의 학자.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시호는 문헌(文憲). 본관은 대령(大寧). 1005년(목종 8) 갑과(甲科)에 장원급제, 현종 때 습유보궐(拾遺補闕)·한림학사·간의대부 등을 지내고 덕종 초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형부 상서·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정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野射)·참지정사(參知政事)·판서북로병마사(判西北路兵馬使)·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등을 역임하고, 문종 초에 문하시중으로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되었고 대흉년을 만난 서북(西北) 지방 백성이 부역에 시달리는 것을 금지케 했으며, 동여진(東女眞)의 변경 침입에 대해 강경책을 쓰도록 주장하여 시행되었다. 1053년(문종 7) 중서령(中書令)으로 퇴관한 후로는 후진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는데 학도들이 운집해 오자 드디어 9재(齋)로 나누었으며, 우수한 제자를 많이 배출했다. 이를 문헌공도(文憲公徒)라 하며 12공도 중의 하나이다. 그는 우리나라 교육을 진흥시켜 당시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리었다. 사후(死後) 정종의 사당에 함께 모셨다가 그 후에 선종의 사당에 함께 배향(配享)했다.

9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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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齋學堂

고려 때 사학(私學)의 하나.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불리기도 한다. 문종 때의 명유(名儒) 최충(崔?)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후진 양성을 위해 개설한 사숙(私塾)으로서, 당시 국학(國學, 國子監)은 시설면으로나 교육면으로 유명무실했으므로 많은 과거 응시자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다. 9재학당은 악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호도(浩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 등 아홉 개의 학반(學班)으로 나누었다. 학과는 5경과 3사를 중심으로 하고 시부사장(試賦詞章)의 학을 더하였다. 최충이 죽은 뒤 시호(諡號)에 따라 이 학당을 문헌공도라 했으며 과거 응시자의 준비 기관이 되었다.

사학 12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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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學十二公徒

고려 문종 이후 개경에 있었던 12개 사학의 생도(生徒)를 총칭한 것. 당시 최충의 9재(九齋)를 모방하여 11인의 유신(儒臣)들이 사학을 열어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이 11인의 도(徒)와 최충의 도를 합하여 12공도(十二公徒)라 불렀다. 최충의 문헌공도, 정배걸(鄭倍傑)의 홍문공도(弘文公徒:熊川徒), 노단(盧旦)의 광헌(匡憲)공도, 김상빈(金尙賓)의 남산(南山)도, 김무체(金無滯)의 서원도(西園徒), 은정(殷鼎)의 문충(文忠)공도, 김의진(金義珍)의 양신(良愼)공도, 황영(黃瑩)의 정경(貞敬)공도, 유감(柳監)의 충평(忠平)공도, 문정(文正)의 정헌(貞憲)공도, 서석(徐碩)의 서시랑(徐侍郞)도, 설립자가 미상(未詳)인 귀산도가 12도이다.

七齋 고려 때 국학(國學)에 설치한 7개의 전문 강좌(講座). 예종 4년(1109) 관학(官學)의 진흥을 위해 설치한 것으로 최충의 9재(九齋)를 모방했다. 『주역(周易)』을 전문으로 강의하는 곳을 여택재(麗擇齋), 『상서(尙書)』의 대빙재(待聘齋), 『모시(毛詩)』의 경덕재(經德齋), 『주례(周禮)』의 구인재(求仁齋), 『대례(戴禮:禮記)』의 복응재(服應霽), 『춘추(春秋)』의 양정재(養正齊)와 병학(兵學)을 전문으로 강의하는 강예재(講藝齋)를 아울러 7재라 하였다. 앞의 6재를 유학재(儒學齋), 강예재를 무학재(武學齋)라고 하였다.

양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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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賢庫

고려 때 국학(國學)에 설치한 일종의 장학재단(奬學財團). 1119년에 설치한 것으로 판관(判官)을 두었다. 두 명은 양현고 직속의 전지(田地)에 파견, 세(稅)를 거두어들이게 하고, 나머지 두 명은 양현고에 남아 이를 받아들이게 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모방하여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의 식량을 공급했다.

김인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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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仁存 (?

1127)

고려 때의 문신·학자. 문과에 급제,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내시(內侍)로서 선종·헌종·숙종을 섬겼다. 여진의 9성(九城) 반환 요구에 국방상의 난점과 북방 백성의 희생을 우려하여 환부를 주장했다. 송(宋)에 다녀온 뒤 벼슬을 더하였으며, 요(遼)·금(金)의 싸움에 판서북면병마사(判西北面兵馬使)로 부임하여 변방의 안전을 기했다. 척신 이자겸(李資謙)이 권세를 잡자, 스스로 낙마(落馬)하여 벼슬에 사의를 표명했다. 뒤에도 많은 관직을 역임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당대의 석학(碩學)으로 중요한 국사(國事)마다 왕의 자문을 받았다.

『해동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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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東秘錄

고려시대의 음양지리서(陰陽地理書). 1106년(예종 1)에 김인존·최선·이재·이덕우·박승종 등이 예종의 명으로 저술하였다. 당시까지 전해 오던 여러 음양지리서를 1권으로 정리한 것이다.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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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고려 인종 23년(1145)에 김부식(金富軾)에 의하여 찬진(撰進)된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정치적 흥망 변천을 주로 기술한 정사체(正史體)의 역사서(歷史書). 내용은 신라본기(新羅本記) 12권,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10권, 백제본기(百濟本紀) 6권, 연표(年表) 3권, 지(志) 9권, 열전(列傳) 10권, 합계 50권으로 되어 있다. 참고 문헌으로는 『위서(魏書)』 『삼한고기(三韓古記)』 『신라고기(新羅古記)』 최치원의 문집 등 옛 문헌과,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등이 있다. 연표는 중국의 연대를 표시하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순으로 나열하였다. 지(志)는 잡지(雜志)로 총괄·제사(祭祀)·색복(色服)·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지리(地理)·직관(職官)으로 되었는데, 대부분 신라를 중심으로 통일기의 상태에 관해서 서술하고 있다. 열전(列傳) 10권 중 3권은 김유신전(金庾信傳)이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 7권에는 삼국의 충효(忠孝)·화랑(花郞)·문인(文人)·반역인(叛逆人)과 관계 인물 등 80명의 전기를 수록하였다. 삼국사기는 중국측 사료를 많이 채록(採錄)하고 유교적 입장을 강조하였으며, 신라를 위주로 하여 고려 왕실과의 관계를 명시한 것이지만, 한국 고대사 연구에 『삼국유사(三國遺事)』와 더불어 최고의 저서로 이용되고 있다.

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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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天 (1055

1101)

고려의 고승. 천태종(天台宗) 중흥(中興)의 시조. 자는 의천, 이름은 후(煦),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 문종의 넷째 아들. 어머니는 인예대후(仁睿大后). 1065년(문종 19) 왕사(王師) 난원(爛圓)에 의하여 승려가 되어 영통사(靈通寺)에 있었고, 13세에 우세(祐世:廣智開宗弘眞祐世)의 호를 받고 승통(僧統)이 되었다.1084년(선종 1) 송나라 정원(淨源) 법사의 초청을 받고 왕에게 송나라에 가서 구법(求法)할 것을 청했으나 왕이 말리므로 남루한 옷차림으로 몰래 제자 수개(壽介)만 데리고 1085년 송나라로 떠나자 왕은 크게 놀라 관리와 제자 낙진(樂眞)·혜선(慧宣)·도린(道隣) 등으로 수행하게 했다. 송나라 철종제(哲宗帝)가 영접하여 계성사(啓聖寺)에 있게 하고, 화엄(華嚴) 법사 유성(有誠)으로 하여금 상종하게 하여, 현수(賢首)·천태 양교의 판교동이(判校同異)·유묘(幽妙)의 뜻을 문답하였다. 또 상국사(相國寺)의 원조선사와 흥국사 서천(西天)의 삼장(三藏) 천길상(天吉詳)을 찾아보고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楊桀)을 대동하고 송나라 서울을 출발 금산(金山)의 불인(不印) 선사 요원(了元)에게 들리고, 항주(伉州)의 원공(源公) 법사를 찾아 혜인(慧因)에게 『화엄소초(華嚴疏?)』의 의심되던 것을 물었다.그때 선종이 귀국을 청하자 자변(慈辨) 대사에게 천태종의 경론을 듣고, 천태산 지자(智者)대사의 부도(浮圖)에 예배, 발원문(發願文)을 지어 천태종을 본국에 중흥할 것을 맹세했다. 또 영지(靈芝)의 대지(大智) 대사에게 계법(戒法)을 받는 등 고승 50여 명을 만나 법요(法要)를 문답하였다. 1086년(선종 3) 왕과 왕후의 영접을 받고 환국하여 석전(釋典)과 경서 1천 권을 바쳤으며, 흥왕사(興王寺)에 있으면서 그곳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게

하고 요나라·송나라·일본에서 경서를 구입, 고서를 수집하여 『속장경(續藏經)』 4천 7백 40여 권을 간행하였다. 1094년(선종 11) 흥원사(興圓寺)의 주지로 있었고, 그 후 해인사(海印寺)·흥왕사에 있다가 국청사(國淸寺)가 새로 세워지자 주지를 겸하고 처음으로 천태교를 강하였다. 숙종 때 주전론(鑄錢論)을 주장하여 사회경제면에도 많이 공헌한 바 있고, 1098년(숙종 3) 왕자 징엄(澄儼)이 승려가 되자 그 스승이 되었고, 1101년(숙종 6) 국사(國師)로서 총지사(總持寺)에서 사망, 오관산(五冠山) 영통사 동쪽에 장례, 김부식(金副軾)의 명문(銘文)으로 된 비가 세워지고, 또 남숭산(南嵩山) 선봉사(仙鳳寺)에도 임존(林存)의 명문으로 해동 천태 시조 대각국사비가 세워졌다. 서호(西湖)의 승려 혜소(惠素)는 국사의 고제로서 후에 행록(行錄) 10권을 선집하였으며, 태백산인(太白山人) 융응(戎膺)은 국사의 적사(嫡嗣)로 법해(法海)의 용문(龍門)이라 호하였다.

고려의 천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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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天台宗

불교 종파의 하나. 법화경(法華經)을 근본 교의(敎義)로 하고 선정(禪定)과 지혜의 조화를 종의(宗義)로 하는 신라 시대의 천태종은 고려 때 의천에 의해 해동 천태종의 성립을 보았다. 이후 구산선문(九山禪門)은 조계종(曹溪宗)의 이름으로 총칭되면서 5교 9산(五敎九山)이 5교 양종(兩宗:曹溪·天台)으로 일컬어졌다. 천태종의 성립으로 조계 9산은 큰 타격을 입어 겨우 종세(宗勢)를 유지했다. 천태종은 고려말에 천태법사종(天台法事宗)과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으로 나누어졌고, 조선 태종 7년(1407) 다시 통합되었으며, 세종 6년(1424) 조계·총남(摠南)과 아울러서 선종(禪宗)으로 통합되고 선교 양종(禪敎兩宗)이란 이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흥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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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王寺

고려 때 개경 근처에 있던 절. 문종 10년(1056)에 짓기 시작, 12년 만에 낙성된 대사찰이다. 문종 21년(1067) 낙성연등회(落成燃燈會)가 있었으며, 의천이 이곳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속장경(續藏經)을 간행했다. 대각국사 의천이 제1대 주지이며, 제2대 주지는 선종의 왕자로 일컬어지는 징엄(澄嚴)이었다. 국가적인 대사찰로 그 후 정치적인 집합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연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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燃燈會

고려시대에 성행한 봄철의 불교 행사. 이 날에는 등불을 밝혀 다과(茶菓)를 베풀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음악과 춤을 즐기며, 부처님을 즐겁게 하여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빌었다. 연등회는 신라 때부터 있었으리라 추측되나 고려에 이르러 국가의 주요 의식이 되었다.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 속에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연등회는 고려시대를 통하여 겨울의 팔관회(八關會)와 더불어 중요한 연중 행사였다. 팔관회는 왕도(王都)에서만 행하여졌으나 연등회는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거행되었다. 성종 때 유학자들의 반대로 중단되었으나 현종 때 다시 행해졌고, 조선 왕조에 와서도 4월 8일에 연등회가 있었다.

팔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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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關會

고려 때의 불교 의식(儀式). 그 시초는 진흥왕 12년(551) 신라에서 행해진 듯하며 고려 태조 때 중요성이 강조되어 성종(成宗) 때를 제외하고는 연등회와 함께 국가의 2대 의식의 하나가 되었다. 팔관회는 11월 15일과 10월에 개경과 서경에서만 행했는데, 불교적인 색채는 거의 띠지 않았고, 천령(天靈)·5악(五岳)·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 등 토속신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으로 소회일(小會日)과 대회일(大會日)이 있어 많은 의식과 하례(賀禮)가 있었고, 무역도 행해졌다 한다. 고려 왕조를 통하여 여러 변화를 보였으나 국가 최고의 의식으로 계속되었다.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배불정책(排佛政策)에 따라 철폐되었다.

승과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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僧科制度

고려 때 승려가 보던 과거제도. 광종 때 과거제가 실시되자 승과의 제도가 생겼다. 그 뒤 선종 때 진사(進士)와 마찬가지로 3년마다 시행하였다. 승과는 교종(敎宗)의 승려를 선발하는 교종선(敎宗選)과 선종(禪宗)의 승려를 선발하는 선종선(禪宗選)으로 구분되는데, 교종선에 급제한 승려는 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수좌(首座)·승통(僧統)의 법계(法階)까지 진출할 수 있었고, 선종선에 급제한 승려는 대덕·대사·중대사·삼중대사·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승통과 대선사의 위에는 왕사(王師)와 국사(國師)가 있어서 승려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로 생각했다. 조선 왕조 때는 억불책(抑佛策)으로 승려 시험도 엄격히 하였다.

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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均如 (923

973)

고려 때의 중. 15세에 중이 된 후 수도에 힘쓰는 한편 불교의 대중화에 힘을 기울였다. 『보현십종원생가(普賢十種願生歌:약칭 普賢十願歌)』라는 열한 수(首)의 향가를 지어 노래 속에 불교의 교리를 쉽게 풀어 넣음으로써 대중이 불교에 친근하도록 했다. 불교의 종파 통합에도 힘을 기울여 종파간의 분쟁을 종식시켰다. 광종 14년(963) 왕이 그를 위해 창건한 귀법사(歸法寺)의 주지로 있다가 죽었다. 그는 『수현방궤기(搜玄方軌記)』 10권, 『공목장기(孔目章記)』 8권을 비롯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박인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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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寅亮 (?

1096)

고려의 문신. 자는 대천(代天), 호는 소화(小華), 시호는 문열(文烈). 본관은 죽산(竹山). 또는 평산(平山)이라는 설도 있다. 문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청환직(淸宦織)을 거쳐, 1075년(문종 29) 요나라가 압록강 동쪽을 국경선으로 삼으려 하자 진정표(陳情表)를 지어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요나라 황제가 그 문장의 훌륭함을 감탄하여 그들의 주장을 철회하였다.후에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어 1080년(문종 34) 호부상서 유홍(柳洪)·김근(金覲) 등과 송나라에 사신으로 들어 갔을 때 시문(詩文)으로 크게 격찬을 받아 뒤에 김근의 글을 합친 『소화집(小華集)』을 중국인이 발간했다.

귀국 후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를 지내고, 숙종 때 우복야·참지정사(參知政使)로 있다가 사망했다.문장이 우아하고 아름다워 중국에 보내는 많은 외교문서를 담당했고, 『고금록(古今錄)』 10권을 편찬했다. 신라 시대의 설화를 모은 『수인전(殊異傳)』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고려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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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磁器

고려 때의 도자기. 주로 청자(靑磁)가 많다. 고려 청자는 송요(宋窯)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것이나 송의 그것보다도 기법이 훨씬 우수하여 중국인들도 이를 천하의 제일품(第一品)이라고 칭찬하였다. 고려 청자의 우수한 점은 첫째 그것이 지니는 아름다운 색깔을 들 수 있다. 황록색(黃綠色)이나 황갈색(黃褐色)의 것도 있으나 비색(翡色)의 것은 특히 아름답다. 다음은 그 형태이다. 병(甁)·항아리(壺)·잔(盞)·주전자·연적(硯滴)·화병(花甁) 등이 여러가지 덧붙인 장식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졌다. 그 중 향로·주전자·연적 같은 것은 국화·연실(蓮實)·연꽃·봉황(鳳凰)·토끼·원숭이 등 여러 가지 동식물을 본떠 만들어서 탐스러움과 귀여움을 더하고 있다. 한편 문양(文樣)도 아름답다. 처음은 양각(陽刻)이나 음각(陰刻)으로 문양도 새겼으나 뒤에는 상감법(象嵌法)을 사용하게 되었다. 자기에 상감법을 이용한 것은 고려청자만이 갖는 독특한 수법이다. 이러한 문양에는 운학(雲鶴)·국화(菊花)·석류·연화·당초(唐草) 등이 있다. 그릇의 모양과 빛깔·문양이 한데 어울려서 세련된 미(美)를 나타낸 고려청자는 실용품이기보다는 사치품이었다. 따라서 건강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섬세하고 연약한 미(美)였지만 이 청자에는 귀족들의 무(無) 및 정적(靜寂)에 대한 동경이 깃들여 있다.

고려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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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瓦當

신라의 양식을 답습한 것으로 초기에는 섬세한 것이 특징이었으나 점차 조잡하여지고 말기에는 무늬의 종류도 적어졌다. 이들 와당은 만월대(滿月臺)·대화궁지(大花宮址)·사찰(寺刹) 등에서 발견되는데 파와(巴瓦)·당초와(唐草瓦)·치미와(?尾瓦)·평와(平瓦) 등이 많다. 무늬의 종류에는 뱀눈무늬·연꽃무늬가 가장 널리 유행되고 이 밖에도 짐평무늬·쌍봉(雙峰)무늬·범자(梵字)무늬가 있으며, 평와에는 섬세한 기하학적 무늬를 아로새겼다.

고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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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歌謠

고려시대 민요처럼 구전(口傳)으로 전승되어 오던 시가(詩歌). 속요(俗謠:別曲)와 경기체가(景幾體歌:別曲體)로 분류되는데 대개 한글로 표기되어 있지만 도이장가(悼二將歌)·관동별곡(關東別曲) 등 이두(吏讀)로 표기된 것도 있다. 『악장가사(樂章歌詞)』 『악학궤범(樂學軌範)』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근재집(謹齋集)』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 『장범공유사(壯範公遺事)』 등에 실려 있는데, 정서(鄭敍)·예종(睿宗)·안축(安軸)을 제외하고는 그 대부분이 작자 미상이지만, 그 신분은 유녀(遊女)가 많았다. 내용별로는 애정:「만전춘(滿殿春)」 가시리」 「서경별곡」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군신:「도이장가(悼二將歌)」 「정과정(鄭瓜亭)」, 유상(遊賞):「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契別曲)」 「한림별곡(翰林別曲)」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형식은 분장(分章)과 후렴(後斂)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향가문학 쇠퇴 후 고려시가는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전연 침체된 것은 아니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가지지 못한 까닭에 후세에 많이 전하지 못하고 있다.

고려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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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歌詞

구전되어 오던 고려시대의 속요(俗謠). 내용과 정서가 조선의 노래와는 매우 다르다. 「가시리」 「처용가」 「사모곡」 「청산별곡」 따위가 있다. 이 노래들은 조선시대에 엮은 『악장가사』 『악학궤범』 등에 실려 있다.

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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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寧 고려 때의 화가. 그림에 뛰어나 인종과 의종의 총애를 받고 내합(內閤)의 그림에 관한 모든 일을 주재했다. 인종 때 이자덕(李資德)을 따라 송에 가서 휘종(徽宗)의 명으로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려 바쳐 찬탄과 포상(褒賞)을 받았다.

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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坦然 (1070

1159)

고려의 승려. 속성은 손(孫), 호는 묵암(默庵), 시호는 대감(大鑑). 본관은 밀양(密陽). 숙(肅)의 아들. 13세에 육경(六經)의 대의(大義)에 통했고 15세에 명경생(明經生)에 합격하고 숙종의 초청으로 세자(世子:睿宗)를 보도(補導)하다가 1088년(선종 5) 몰래 궁중에서 나와 안적사(安寂寺)에서 승려가 되고 광명사(廣明寺) 혜소국사(慧炤國師)에게 오의(奧義)를 이어 받았다. 1105년(숙종 10) 대선(大選)에 뽑혔으며, 1106년(예종 1) 대사·1109년 중대사(重大師)·1115년 삼중(三重) 대사·1121년(예종 16) 선사(禪師)에 이르렀다. 1129년(인종 7) 보리연사(菩提淵寺)에 옮겨 법회(法會)를 열었다. 1146년(인종 24) 왕사(王師)에 임명되었다. 의종의 즉위 후 예우(禮遇)를 받았고, 1148년 단속사(斷俗寺)로 돌아가 은퇴한 후 불학도(佛學徒)가 많이 모여들어 종풍(宗風)을 크게 떨쳐 동국(東國)의 선문(禪門)을 중흥시켰다. 필법이 가장 정묘하여 홍관(洪灌)과 같이 이름을 날렸으며 서거정(徐居正)은 “동국의 필법에 김생(金生)이 제일이요, 요극일(姚克一)·영업(靈業)·탄연이 다음 간다”고 말하였다. 시격(詩格)이 또한 고상하고 글씨는 구양순(歐陽詢)의 체를 본받았으며 춘천(春川)의 문주원비(文株院碑), 예천(醴泉)의 북룡사비(北龍寺碑), 삼각산 승가굴중수비(僧伽窟重修碑)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