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고려의 발전과 제도 정비/고려의 대외정책

고려의 대외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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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槪說〕

고려는 개국 이래 중국의 양(梁)·당(唐)·진(晋)·한(漢)·주(周)의 5대조와 국교를 맺었는데 그 뒤 중국을 통일한 송/송(宋)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은 신라와 중국과의 관계를 계승한 것으로, 고려도 중국의 문물에 대해서는 모화사상(慕華思想)의 경향이 많았다. 따라서 오랑캐 나라인 요(遼)와는 단순한 국교조차 맺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요나라의 성종(聖宗)은 압록강 하류의 여진(女眞)을 정복, 또 985년 그 중류에 있던 발해(渤海)의 후신인 정안국(定安國)을 멸망시킨 후 여진과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게 하고, 993년에는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도 끊기 위해 고려의 영토 서북면(西北面)에 쳐들어왔다. 이에 고려는 사대의 관계를 송나라로부터 거란(契丹)에 옮겨서 거란 황제의 정령을 받는 대신 압록강 동쪽의 여진이 차지하고 있던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고려와 양국과의 정치적인 관계는 이로써 일대 전환을 하게 된 것이다.10여 년 후에 고려의 목종이 피살되고 현종이 즉위하자 요나라 성종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침입하여 서울인 개경(開京)을 함락시키는 한편 대묘·궁궐(大廟宮闕)을 불태워버렸다. 쳐들어온 이유는 왕을 마음대로 폐하고 세운 죄을 묻기 위한 것이었으나, 난을 남쪽으로 피했던 현종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성종은 앞서 고려에 주었던 강동6주(江東六州)의 반환을 핑계로 삼아 1019년(현종 10)에 이르기까지 전후 4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해 왔으나 끝내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철수하였다. 이리하여 두 나라 사이에는 그 뒤 평온한 국교가 계속되었다. 다만 제일 처음 싸움을 할 때 강동(江東)에 설치한 보주(保州:지금의 의주)는 그 후도 장기간 요나라의 소유가 되어 이로 인해 사소한 분규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한편 송나라에 대해서는 뜻에 없는 요나라의 정령을 받는 관계상 도리어 중국의 사상·문물을 숭모하는 관념을 북돋우어 송나라에 대한 친밀감을 갖게 되니 종종 사신을 보내고 특히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기까지 약 1세기 동안은 가장 친밀했다. 더욱이 송나라의 해상무역 발달에 따라 송나라 상선의 내왕이 빈번했으므로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서 주자학(朱子學)을 수입하기 이전에는 요·금·원 세 나라에서 문화적 영향을 받지 못한 데 비하여, 송나라 문화는 정신·물질 양면으로 많이 섭취되었다.고려는 개국 초기부터 북변에 여진이라는 이민족과 접경하고 있었으며, 여진은 발해시대의 말갈(靺鞨)로서, 발해가 멸망한 뒤는 서쪽의 요나라에게 위협과 견제를 받으며 수많은 부족(部族)으로 나누어져서 만주 및 우리나라 북변 일부에 살고 있었으나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통일도 없었다. 우리나라 북변에서도 동해 해안에 있어서는 함흥평야가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서 여기에는 대소의 많은 여진부락이 흩어져 있었고, 그들 중에는 유력한 추장들도 많았다.고려는 태조 때부터 화주(和州:永興)에 변성(邊城)을 두었으며, 성종 이후는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라 하고 변경 밖의 여진을 선무하고 견제하는 데 힘썼고, 특히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함관령(咸關嶺) 안에 있던 여진이었다. 그러므로 그 여러 추장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고려에 복종하고 물질적인 이익을 얻고자 자주 조공(朝貢)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외적이 되어 때때로 변경에 침범하였다. 압록강 하류에서 동해에 이르는 장성(長城)의 일부로서, 지금의 정평(定平)에다 견고한 성을 쌓은 것도 그들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종에서 문종대에 걸쳐 해적(海賊)으로서 동해안을 횡행하고 해마다 북쪽은 원산만(元山?0의 진명(鎭溟)에서 경상도 울산에 이르는 각 지방을 약탈하는 한편 동해를 건너 멀리 일본까지 침범하였던 도이적(刀伊賊)도 역시 같은 지방의 여진이었다. 여하간에 문종·선종대의 갈라전(曷懶甸)이라 불리던 이 지방의 여진은 거의 고려에 복종하고 있었다.그러나 숙종조에 이르러 만주의 정세는 일변하여 북만주 아집하(阿什河)를 본거지로 하는 생여진(生女眞)의 완안씨(完顔氏)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뒤 두만강 하류 유역으로 진출하여 그곳 여진을 이끌고 또다시 남하, 갈라전의 여진을 세력권 내에 넣었다. 그 다음에는 정평성 밖에서 고려와 충돌하고 두 차례에 걸쳐 고려의 군사를 무찔렀다. 이에 고려는 갈라전을 고려의 영토로 하고자 예종 초기, 윤관(尹瓘)을 주장(主將)으로 한 유명한 9성(九城)의 싸움을 일으켰다. 그러나 군사를 보낸 지 1년 반이 지나도 완안씨의 군사를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게 되어 완안씨와 교섭한 결과, 그들의 완전복종을 조건으로 성의 포기와 갈라전의 전지역을 완안씨에게 돌려주고 돌아왔다.그 후 곧 완안씨의 아골다(阿骨打)는 요나라에 모반하고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금(金)이라 정한 뒤 1116년(예종 11)에는 고려에 대하여 형제의 나라로 국교를 맺도록 하였다. 고려는 처음에 요나라 연호를 중지하고 그뒤로는 형세를 관망하면서 송나라와 친밀히 지냈다. 1126년(인종 4) 금나라가 이미 요나라를 멸망시키자 고려에서는 금나라의 정령을 받기로 하였으나 그 태도는 금나라의 요망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또한 고려의 신하들 사이에는 금나라를 섬겨야 된다는 일파와의 갈등이 있는 한편 고려를 원조하려는 송나라의 열망도 있었고, 당시의 국제관계도 대단히 복잡하였으나 고려는 1131년(인종 9) 결국 금나라에 복종하여 그 대가로 오랫동안 갈망하던 보주를 다시 찾아와서 이것을 의주라고 개칭하였다. 이와

같이하여 극히 필요한 사대관계는 금나라가 몰락할 때까지 계속되는 한편, 정치성을 떠난 남송(南宋)과의 교섭도 끊어지지 않았다.13세기 초 몽골의 태조 칭기즈칸(成吉思汗)이 금나라 정벌의 싸움을 일으키자, 만주 특히 요동지방의 정세는 혼란에 빠지고 그 영향은 곧 고려에 미치게 되었다. 야율류가(耶律留哥)에 인솔되어 재빨리 금나라에 모반하였던 거란 사람들이 그 후 저희끼리의 분쟁으로 요동지방에서 쫓겨나서 고려에 침입하여 전후 3년 동안 경상도·충청도·전라도 지방을 제외한 북방 일대를 유린하였다.고려는 1219년(고종 6) 몽골과 보선만노(蒲蘚萬奴:금나라에 모반한 장군)가 세운 동진국(東眞國)에서 보낸 군사와 협력하여 그를 쳐서 멸망시켰으나 고려는 당초의 협약으로 몽골과 형제지간의 국교를 맺게 되었다.이때부터 몽골은 해마다 사신을 보내 공물(貢物)을 받아갔으나 수년 후 몽골의 사신이 돌아갈 때 국경지대에서 암살되니 몽골은 이를 빙자하여 고려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 정벌은 몽골의 태종 초기부터 정종·헌종조를 거쳐 세조가 즉위할 무렵에 이르기까지 29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원종이 즉위한 뒤 1269년(원종 10)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다시 서울을 옮겼다. 몽골은 고려를 침범하는 동안, 서북면의 60여 성을 관장하는 동녕부(東寧府)를 서경(西京:평양)에 설치한 다음 황해도의 자비령(慈悲嶺)을 두 나라의 국경으로 정하였고, 그곳에는 모두 고려에 모반하고 몽골에 항복한 사람들을 두었다.그 후 몽골은 고려와 연합군을 편성하여 1274년(원종 15)과 1281년(충렬왕 7)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원종에서 공민왕 초에 이르기까지 90여 년 동안 고려는 일반적인 사대관계를 떠나 거의 원나라에 예속되다시피 그 간섭을 받았다.원나라는 중앙에 중서성(中書省)과 그에 소속된 수많은 행성(行省)을 두었으며, 고려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이름으로 한 행성의 관할구역으로 간주되고, 고려 왕은 원나라에서 책봉되는 국왕인 동시에 정동행성의 장관격이기도 했다. 국왕의 원나라 출입이 빈번하였고, 세자는 인질(人質)로서 연경(燕京:大都)에 머물러 있다가 그곳에서 즉위한 뒤 귀국한 왕도 있고, 거의 본국에 있지 않은 왕도 있었다.충렬왕은 세자로 있을 때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였으며 이때부터 역대의 여러 왕들은 모두 그 본을 따르게 되어 두 나라 왕실간에는 서로 사돈의 관계를 맺게 되었고, 따라서 원나라가 고려 왕의 폐위·복위를 마음대로 하게 되었으며, 때로는 벌을 받아 귀양갔던 왕도 있었다.충렬왕 이후의 여러 왕들이 죽은 뒤 묘호(廟號)를 부르지 못한 것도 원나라의 간섭에 기인하였던 것이다. 공민왕 시기에는 원나라의 말기로서 순제(順帝) 때이며, 원나라 본국은 쇠망기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1394년(공민왕 13)에는 주원장(朱元璋:명나라 태조)이 강남(江南)에서 군사를 일으켜 오(吳)나라 왕을 칭하게 되었다.이 정세를 알아차린 공민왕은 이때부터 노골적으로 원나라에 대하여 반항의 태도를 취하고 순제 황후의 오빠로서 권세를 떨치던 기철(琦轍)을 주살하는 동시에 동북면(東北面)에 군사를 보내서 쌍성총관부를 몰아내었다. 또한 원나라 연호의 사용을 중지, 또 그들에게서 강요당했던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1368년(공민왕 17) 순제는 연경에서 쫓겨나 막북(漠北)으로 도망하고, 뒤를 이어 명나라 태조는 황제가 되어 이를 고려에 통고해 왔으므로 이듬해 왕은 사신을 보내 태조의 등극을 축하하고 그의 책봉을 받았다.북쪽으로 도망간 순제는 막북에서 국호를 북원(北元)이라 칭하였고, 공민왕이 세상을 떠나고 우왕이 즉위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친원(親元)·친명(親明) 두 파로 분리되어 서로 대립이 심하게 되니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하면서 때로는 북원나라의 연호도 쓰며 종종 사신의 내왕도 있었다. 따라서 명나라는 고려에게 냉혹한 태도를 취하게 되어 친원파의 비위를 더욱 거슬리게 하였다.또 1388년(우왕 14)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을 그들의 영토인 요동에다 예속시키켔다고 통고해왔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친원파의 영수 최영(崔營)은 명나라 정벌을 계획하고 조민수(曺敏修)·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요동을 치려 하였다.그러나 이성계는 그를 불가하다 하고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세워 친명의 국책을 확립시켰다.그리하여 4년 후인 1392년에는 창왕 다음의 공양왕을 폐하고 스스로 조선을 개국하였다. 고려 말기를 통하여 바다로부터 고려를 괴롭힌 왜구(倭寇)가 있으며 그들은 고종 때 시작하여 충정왕 초부터 심해져서 우왕 때에는 극도로 창궐하였고, 경기도 이남의 여러 도는 해마다 그들의 해를 입었다. 이성계는 종종 그를 쳐서 전공을 세웠고, 당대의 명유 정몽주(鄭夢周)는 그들의 침입에 항의차 일본에 건너갔던 일도 있다.

북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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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進策

고려 건국이념(建國理念)의 하나로 고려조(高麗朝)에 일관(一貫)된 정책.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자로 자처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과 『송사(宋史)』 『원사(元史)』의 고려전에도 고려를 고구려의 후신(後身)처럼 기록한 것은 그 명칭에서만 아니라 실제로 고려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고구려의 후신임을 주장한 데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서희(徐熙)가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에 대하여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후신이니 만일 지계(地界)를 따지자면 귀국(貴國)의 동경(東京:遼陽)·심(瀋:奉天)은 본래 우리나라 옛땅에 속한 것이라 하여 달랜 사실 등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이와 같이 고려는 태조 때부터 북진책을 표방하여, 고구려의 구도 평양성을 중시하여 서경으로 삼고 임금이 자주 행차하였으며 이후 역대 임금이 이를 계승하여 성종 초기에는 고려 영토가 청천강(淸川江)을 넘어 평안북도 박천(博川)·영변(寧邊)·운산(雲山)·태천(泰川) 등지 압록강 연안일대를 차지했고, 991년(성종 10)에는 압록강 이남(以南)의 여진족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냈다는 기록을 남겼다.그런데 고려는 건국 이래로 요(療:契丹)·금(金:女眞)·원(元:蒙古)의 강국이 만몽지방(滿蒙地方)을 무대로 등장하였으므로 그의 이상(理想)을 실현하지 못하고 말았다.그러나 북진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벌을 행하였던 것이니 요가 쇠하고 금이 일어나기 전인 예종(睿宗) 때 윤관의 여진정벌이 있었으며, 공민왕 초기에 원의 세력이 쇠하자 압록강 이서(以西)의 팔참(八站)을 정벌하였고, 또 1370~1371(공민왕 19~20)에는 동녕부와 요양(遼陽)을 정벌하였으며, 우왕(禑王) 때의 요동정벌(遼東征伐) 출병도 모두 북진책의 전통적 이상에서 나온 것이다.

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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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熙 (942

998)

고려 때의 외교가·문신이다. 광종 11년(960) 문과(文科)에 급제,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을 거쳐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성종 12년(993) 거란(契丹)이 침입하자 중군사(中軍使)로서 북계(北界)에 출병하였다. 전세가 불리하자 조정은 항복과 강화 두 파로 의견이 대립하였으나, 서희는 국토의 할양에 극력 반대, 스스로 적장 소손녕의 군영에 가서 담판을 시도했다.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의 옛땅은 거란의 소유지라는 소손녕의 주장을 탁월한 화술로 반박, 고려는 고구려의 옛땅이 터전이므로 국명도 고려임을 설득시켜 거란군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성종 13년(994) 평장사(平章事)로서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女眞族)을 축출하고 강동 6주에 성을 쌓아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 국토를 완전히 확보했다.

강동 6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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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東六州 고려 때 평북의 서북면(西北面) 해안지대에 설치한 흥화진(興化鎭)·용주(龍州)·통주(通州)·철주(鐵州)·귀주(龜州)·곽주(郭州) 등 6주(州). 군사상·교통상의 요지였던 이곳은 여진족이 거주하여 고려의 북방 진출에 큰 장애가 되었다.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가 담판, 거란과 통교할 것을 조건으로 고려는 강동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6주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거란과 통교하지 않고, 장흥(長興)·귀화(歸化)·선천(宣川)·안의(安義)·흥화(興化)·귀주에 성을 쌓고 거란에 적의(敵意)를 보였다.거란은 약속 불이행을 수차 추궁하고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더니 현종 9년(1018) 이래 세 차례나 침입해 왔다. 그러나 고려의 끈질긴 항전으로 이득을 보지 못하고 특히 3차 침입 때는 귀주에서 강감찬(姜邯贊)에 의해 대파되었다. 그 후 고려는 거란이란 연호를 쓰고, 거란은 그 대신 강동 6주의 요구를 철회하기로 하여 계속해서 고려의 영토로 남았다.

강조의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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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兆-政變

목종 12년(1009) 강조가 일으킨 정변.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외척 김치양이 천추태후(千秋太后)와 더불어 정권을 농단, 천추태후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음모하였다. 목종은 후사(後嗣)가 없이 병을 얻어 중추원 부사(副使) 채충순(蔡忠順)에게 김치양의 음모를 말하고 대량군 순을 후계자로 삼아 사직(社稷)을 타성(他姓)에 넘기지 않도록 부탁했다.한편 눈앞의 급변에 대비하기 위해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에게 돌아와 지키게 하였다. 이때 세간(世間)에서는 왕이 위독한 틈에 김치양 등이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는 풍문이 돌았다.이윽고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전해지자 강조는 별장(別將)을 시켜 대량군을 맞게 하고, 자기는 개경으로 달려가 목종에게 퇴위를 강권하여 순(詢)을 왕으로 세웠다.이와 동시에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태후와 그 무리는 귀양보내고 또 목종을 살해하였다. 이 정권은 거란 침입의 도화선이 되었다.

김치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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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致陽 (?

1009)

고려 때의 권신. 본관은 동주(洞州),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의 외족. 성격이 간교하여 승려를 사칭하고 천추궁(千秋宮)에 드나들며 추문이 있어 성종이 멀리 장배(杖配)하였으나 목종이 즉위한 후 천추태후(千秋太后)에 이어 우복야(右僕射) 겸 삼사사(三司事)에 이르러 전횡했고 태후와 불의의 아들을 낳고 그를 책봉하고자 대량군 순(大良君 詢)을 살해할 모의를 하다가 실패, 다시 유일한 혈통인 목종을 해하려다가 성공치 못하였다.강조(康兆)의 정변(政變)으로 순(詢:顯宗)이 즉위하자 치양은 그의 아들과 함께 처형되고, 그의 일당과 태후의 친척 이주정(李周禎) 등은 해도(海島)에 유배, 왕과 태후를 충주로 내쫓아 도중에 왕을 죽이고 태후는 황주(黃州)에 숨었다.

하공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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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拱辰 (? 1011) 고려 때 무장. 진주 하씨(河氏)의 시조. 성종 13년(994) 압강도 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고 목종 12년(1009) 중랑장(中郞將)으로 강조의 정변에 가담하였다. 그 후 동서 양계(東西兩界)를 지킬 때 동여진 침략의 실패로 현종 1년(1010) 유배되었다.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거란이 쳐들어오자 유배에서 풀려나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적진에 들어가 현종의 친조(親朝)와 자신의 볼모를 조건으로 철병시키는 데 성공했다. 거란에 잡혀가 겉으로 성스럽게 보임으로써 거란왕의 신임을 받게 되자 수차 탈출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그 후 여러 가지로 회유를 당했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하다가 살해되었다.

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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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邯贊 (948

1031)

고려의 명장. 초명(初名)은 은천(殷川), 시호는 인헌(仁憲), 본관은 금주(衿州),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궁진(弓珍)의 아들. 성종 때 갑과(甲科)에 장원급제하고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成宗)이 40만 군으로 침입하자 고려에서는 강조(康兆)가 30만 군을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패배, 많은 신하가 왕께 항복하기를 권했으나 유독 그만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을 적진에 보내어 설유(說諭)하여 물러가게 했다.1018년(현종 9)에 거란의 성종은 다시 소배압(瀟排押)을 시켜 고려를 침공케 하자 강감찬이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20만 8천 명을 이끌고 나가, 경솔히 진격을 계속하는 거란군의 뒤를 공격하여 귀주(龜州)에서 크게 이겨 살아 돌아간 적군이 불과 수천에 달하지도 못했다.이 싸움에서 거란군의 시체는 석천(夕川:皇華川)에서 반령(盤嶺:八營嶺)에 이르기까지 들을 덮었으며, 강감찬이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戰利品)을 거두어 돌아오자 왕은 친히 영파역(迎破驛)까지 나와 얼싸안고 환영하면서 금화팔지(金花八枝)를 머리에 꽂아 주었다.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연로하여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과 글을 벗하여 조용히 살았다.

귀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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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州大捷

고려 현종 때 거란 침략군을 귀주에서 물리쳐 승리한 싸움.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 오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계속 시행하였다.이것이 원인이 되어 993년(성종 12) 소손녕에 의한 거란의 제1차 침략이 있었으나,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동(江東) 6주(州)가 군사적 거점이 되자 이를 차지할 목적으로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현종 1) 성종이 제2차 침략을 시도하여 함락했으나 별다른 소득없이 다시 철수하였고, 이에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1018년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략을 강행해 왔다.이때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거란군은 흥화진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곳에서 패배하고 나주에서도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그러나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귀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달아났으며,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천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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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里長城

고려 덕종 때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쌓은 장성. 고려는 초기부터 북평의 거란(契丹)·여진족(女眞族)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성을 쌓으려 하였는데, 이 계획이 실행되기는 1033년(덕종 2)부터였다.천리장성의 규모는 매우 컸던 것으로서 서쪽의 압록강(鴨綠江) 어귀로부터 동쪽으로 위원(威遠:義州地方)·흥화(興化:義州地方)·정주(靜州:義州地方)·영해(寧海:義州地方)·운주(雲州:雲山)·안수(安水:价川)·청색(淸塞:熙州)·영원(寧遠)·정융(定戎:義州地方)·맹주(孟州:孝山)·삭주(朔州) 등 성(城)을 거쳐 요덕(耀德:永興地方)·정변(靜邊:永興地方)·화주(和州:永興地方) 성에 이르러 정평(定評)해안인 도련포(都連浦:廣浦)까지 뻗어 길이가 천여 리(里), 높이와 폭이 각각 25자「尺」의 석축이었다.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성으로서 여기에 동원된 인원은 막대하였다. 이 천리장성은 1033년 경 단시일 내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덕종 이전에 대대로 북방에 쌓은 여러 성책(城柵)을 연결하고 보축(補築)한 것으로, 그 완성 시기는 1044년(정종 10) 경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덕종 때 유소(柳韶)가 축조(築造)의 대부분을 끝마쳐 장성의 윤곽이 형성된 것만은 사실이다.유소는 그 공으로 1034년(덕종 3) 3월에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 장성의 축조는 거란에게 큰 충격을 주어 항의(抗議)를 받았으나, 고려에선 이에 적의(敵意)가 없음을 밝힌 일도 있었다. 이 장성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고려의 북방 방어선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유적은 지금도 의주(義州) 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별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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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武班

고려 때 여진(女眞) 정벌을 위해 편성한 군대, 여진인은 문종 때부터 고려에 귀화 또는 침략해 왔다. 고려에서는 여진족들을 맞아 수차 싸웠으나 우수한 기병(騎兵)을 가진 여진군에게 패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리하여 숙종 9년(1104) 별무반이라고 하는 새로운 군사조직을 편성했다. 별무반은 2군·6위 이외의 특수군단이란 뜻으로 이름지어진 듯하지만, 신기군(神騎軍)·신보군(神步軍)·항마군(降魔軍) 등으로 형성되어 있었다.신기군과 신보군은 각각 기병과 보병이었고 항마군은 승병(僧兵)으로 조직된 것으로, 4시(四時) 훈련하여 여진에 대한 대규모 정벌에 대비하였다. 윤관은 예종 2년(1107) 이 별무반으로 여진족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

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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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瓘 (? 1111) 고려 때의 명신·장군.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한 후 동궁시강(東宮侍講)·어사대부(御史大夫)·한림학사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 9년(1104) 여진(女眞)을 정벌하다가 실패, 예종 2년(1107) 여진정벌군의 원수(元帥)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여진족을 정벌하여 9성을 쌓고, 재침하는 여진을 평정하여 동왕 3년(1108) 개선하였다. 그 후 여진의 계속된 침범을 막지 못한 책임으로 벼슬과 공신의 호마저 삭탈당하였다가 동왕 5년(1110) 복관되었다.

九城

예종 3년(1108) 윤관이 별무반을 조직, 함흥평야의 여진족 정벌 후 쌓은 함주(咸州)·복주(福州)·영주(英州)·길주(吉州)·웅주(雄州)·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공험진(公?鎭) 등 9성. 자세한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윤관이 9성을 구축하자 여진족은 생활 근거지를 잃어버리게 되고, 이에 완안부(完顔部) 오아속(烏雅束)이 중심이 되어 수차 침범하는 한편 강화를 요청하여 9성의 환부를 요청했다. 고려에서는 9성을 철수, 여진은 고려에 조공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