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민족의 독립운동/신문화운동과 3·1운동/신문화운동의 발생

신문화운동의 발생〔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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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체결 후 국권상실의 절박한 현실 앞에서 개화주의 사조는 뚜렷이 항일계몽 사조로 발전하였고, 의병항쟁이 일제의 공격으로 지방의 산간벽지로 위축되어 감에 따라 자연히 계몽운동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운동이 주류가 되어갔다.이 시기는 아직 유교적·봉건적 근왕사상(勤王思想)이 사회의 잠재적 지도이념이었으나 이미 봉건적 사회질서는 붕괴되어 사회의 지배세력이나 사상계의 주도(主導)는 자연 양반 유생으로부터 서구적 교양을 지닌 신흥 세력층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즉 신교육을 받은데다 거의가 기독교 교양을 갖춘 사람들에 의하여 항일 민족 실력양성의 차원에서 신문화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항일운동이 주로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교육·언론·종교·정당·사회단체활동으로 확대하자 일제는 이를 좌시하지 않고 각종 수단으로 탄압하였다. 그러나 그 방법이 의병의 무장항쟁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운동은 은연중에 범국민적 운동으로 발전되어갔다.이리하여 신교육·언론·학회·애국서적·종교 등을 통한 각종 운동으로 낙후된 민족국가를 조속히 발전시켜 서구의 선진국, 특히 일본과 비견할 수 있는 실력으로 올려놓으려고 노력했다. 이 운동은 본질적으로는 비무장투쟁이었으나 일제에 조국이 합병되는 최후 단계에 이르러서는 무력적 방법으로 격화되어갔다.

언론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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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論抗爭

광무 9년(1905) 이후 1910년 합병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간섭과 탄압을 받으면서도 언론은 일반 국민의 앞장을 서서 민중의 의사를 대변하고 항일운동을 고무하였다. 국내 신문으로는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이 있었고 해외에는 러시아령(領) 연해주(沿海州)에 『해조신문(海潮新聞)』 『대동공보(大東共報)』, 미주(美洲) 하와이에 『합성신보(合成新報)』 『신한국보(新韓國報)』 등이 있었다. 이들 국내외 각 신문은 이미 국내사정과 외국의 정세는 물론이며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을 보도하였고, 보도나 기사내용은 정치·법률·학문·농업 등 다방면에 걸쳐 계몽적인 신문화운동을 기도하였는데, 그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국권의 회복과 조국의 완전독립에 있었던 것이다.신문은 일제 탄압하의 국내 애국지사는 물론 일반국민에게는 유일한 광명이자 희망이었다.국내 신문 중에는 『대한매일신보』가 가장 항일논쟁을 많이 펴서 국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언론기관들이 국민의 정치의식을 앙양시키는 데 이바지한 공은 큰 바가 있어, 초대통감인 이토(伊藤博文)가 자기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一筆)이 한국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크다고 말하기도 했다.

『황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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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城新聞

광무 2년(1898) 9월 5일에 창간된 신문. 장지연·남궁억·나수연(羅壽淵)·유근(柳謹) 등이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물려받아 국한문 혼용의 일간 신문으로 고친 것이다. 이 신문은 장지연을 비롯하여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 중류계급 이상을 독자로 하여 발행한 신문이다. 그러므로 국왕의 통치대권을 보필할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며, 『독립신문』에서와 같이 근대적인 정신은 뚜렷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에 대한 반항에 있어서는 선봉에 서 있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5건 조약체결 전말(五件條約締結顚末)’이라 하여 그 경과를 상세히 보도함과 함께 주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실어 국민의 여론을 환기시켰음은 유명한 사실이다. 융희 4년(1910) 국권강탈 후 폐간되었다.

남궁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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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宮檍 (1863 1939) 한말의 독립운동가·교육자·언론인. 자는 치만(致萬), 호는 한서(翰西), 서울 출신. 어려서 한문을 수학했다. 광무 2년(1898) 독립협회 관계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자 이해 황성신문의 사장이 되었다.광무 10년(1906) 양양군수(襄陽郡守)로 있으면서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이듬해 대한협회장(大韓協會長)이 되었다. 융희 2년(1908) 『교육월보(敎育月報)』를 간행하는 한편 관동학회(關東學會) 회장이 되었다. 1933년 무궁화와 한국 역사 사건으로 체포되어 복역중 1935년 병으로 석방되었다.

『대한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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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每日新報

광무 9년(1905)에 발간된 항일운동지. 광무 7년(1903)부터 이장훈(李章薰)이 발간해 오던 『매일신문』을 광무 9년(1905)에 『대한매일신보』로 개칭한 것으로 영국인 베셀(Bethell, 裵說)이 양기탁과 함께 한글과 영문(英文)으로 출간했다. 박은식·신채호 등이 주필을 맡게 되었으며,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는 영국인의 경영이라 일인(日人)의 검열을 받지 않아도 좋았다. 그러므로 항일운동의 선봉에 나서서 일본의 침략 행위를 공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대한매일신보』는 국한문체를 사용하였으나 뒤에는 일반 대중을 위하여 한글판을 발간하였고 외국인을 위한 『The Korea Daily News』도 발간하였다. 고종이 일본과의 을사조약은 자신이 승인한 바 아니니 열국의 보호를 바란다는 친서를 발표한 것도 이 신문이었다. 이에 일본은 영국 본부로 베델을 소환시켰으나 신문은 여전히 계속 발행되었다. 그러다가 국권강탈 후 통감부가 매수하여 『매일신보』로 고쳐 기관지화하였다.

베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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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hell, Ernest T. 裵說

한말의 영국인 언론인. 광무 8년(1904) 러·일전쟁 때 『런던 데일리 뉴스』 특파원으로 내한, 이듬해 양기탁과 ‘한영합판회사(韓英合辦會社)’를 조직, 국한문체의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간했으며, 융희 1년(1907) 국문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논파하는 등 배일사상을 고취했다. 이에 통감부에 의해 일본 정부와 황태자에 대한 무례, 허위보도와 선동이라는 죄목으로 제소(提訴)되었으나 기각되고, 이듬해 다시 주한 영국 총영사관에 공소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상하이에서 금고생활을 했다. 융희 3년(1909) 서울에서 병사(病死)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양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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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起鐸 (1871

1938)

독립운동가. 호는 운강(雲岡). 평양 출생. 어려서부터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장성하여 부친과 함께 영국 선교사 게일(Gale:奇一)의 『한영사전』 편찬을 도왔다. 1905년에 영국인 베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고 주필로 항일사상을 고취, 1901년에 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국권 침탈 후 신민회 간부 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이승훈(李承薰) 등과 만주에 무관 학교를 세우고 독립 운동에 힘쓰다가 피검, 2년 간 복역 후 다시 105인 사건으로 3년 간을 복역하였다. 1916년 만주로 망명, 다시 돌아와서 동아일보 고문 등 문화사업에도 종사하였고, 1920년 통천교(統天敎)를 발기, 종교를 통하여 독립운동을 전개, 1921년 미국회 의원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독립 진정서 사건으로 투옥, 그 후 남만주에서 의성단(義成團)을 조직, 오동진(吳東振)·김동삼(金東三) 등과 통의부(統義府)를 창설했고, 1923년에는 이청천(李靑天)·김동삼 등과 정의부(正義府) 등을 조직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과 행동 통일에 힘썼다. 1926년 고려 혁명당을 조직, 1930년에는 임시정부 주석·국무령(國務領)에 추대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服裝)이 수여되었다.

『만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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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歲報

광무 10년(1906) 6월 천도교에서 창간한 신문. 손병희의 제창으로 오세창(吳世昌)을 사장으로 하고 권동진(權東鎭) 등이 주동이 되었다. 방수동(坊壽洞) 수진궁(壽進宮)에 장소를 정하여 반민족적인 일진회에 대해서 특히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만세보』가 경영난에 빠지자 이인직은 이를 친일내각의 기관지인 『대한신문』으로 바꾸었다.

『제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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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國新聞

광무 2년(1898) 8월에 창간된 신문. 원명은 『데국신문』. 순(純)국문판으로 발행하였다.처음에는 이문사(以文社)의 이종면(李鍾冕)·이종문(李鍾文) 등이 주동이 되어 창간을 꾀하였고, 그 후 심상익(沈相翊)·이승만 등과 새로 관계를 맺었다. 독자층은 대개 중류 이하의 대중 및 부녀자였으며, 1910년 일본에게 강제 폐간될 때까지 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대한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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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報

대한협회를 배경으로 하여 오세창·장효근·최영목·심의성 등이 주동이 되어 동문관 인쇄소에서 1909년 7월 8일 창간한 일간지이다. 초기에는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 월보를 발행하다가 한일합방으로 대한자강회가 해산되자 폐간되었으나 전회원이 대한협회를 조직, 월보를 속간 발행 하였다. 후에 일간지로 발전하였으나 1910년 8월 30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민보(民報)로 개칭되었다가 31일자 제357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교육열의 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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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育熱-膨脹

정부는 고종 23년(1886)에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여 서양의 신학문을 교육하더니 갑오경장 이후 새로운 교육제도를 실시하면서 신교육을 시키는 각급 관립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이 시대의 교육열은 민간에서 더 심했다. 많은 민간교육 단체와 사립학교가 설립되어 젊은 세대의 교육에 열을 올렸다. 이때에 설립된 교육단체로는 대한자강회·서북학회(西北學會)·관동학회(關東學會)·흥사단·호남학회(湖南學會)·영남학회(嶺南學會)·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대동학회(大東學會)·진학신(秦學新) 등이 있었다. 사립학교의 시초는 미국인 선교회가 고종 23년(1886)에 세운 ‘배재학당(培材學堂)’이었다. 선교회 계통의 사립학교는 이 밖에도 여럿 있었는데 이같이 처음 신교육을 담당한 계통은 미국 계통의 선교회였다. 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한국인 스스로가 세운 수많은 사립학교가 있었다. 이리하여 합방 직전까지 불과 몇 해 사이에 3천여 개에 달하는 사립학교가 각종 까다로운 규정 아래 설립되어 민족운동의 근거지로서 애국열을 키워갔다.

대한자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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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自强會

한말 교육과 식산(殖産) 진흥을 통해 항일 계몽을 한 단체. 광무 10년(1906) 윤효정(尹孝定)·장지연 등이 주동이 되어 ‘헌정연구회’를 개편하여 발족했다. 초대 회장에 윤치호가 추대되어 의무교육의 실시, 폐습의 금지, 유색(有色) 의복의 착용 및 단발의 3개항을 정부에 건의하였다. 특히 그들은 교육과 계몽을 통해서 민족적 주체의식을 고취시키고 교육의 확장과 식산의 흥업(興業)을 통해 독립자주의 실천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주지(主旨)로 삼았다. 또한 고종황제의 양위(讓位)를 반대하는 등 친일 내각에게는 눈의 가시 같은 존재로서 융희 1년(1908)에 해산되었고 후에 ‘대한협회’로 변신했다.

장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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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志淵 (1864

1921)

대한제국의 언론인. 우국지사. 자는 순소(順韶), 호는 위암(韋庵). 숭양산인(嵩陽山人). 본관은 옥산(玉山).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1894년(고종 31) 진사가 되어 뒤에 내부랑(內部郞)·통정(通政) 등을 지냈으나 1898년 9월 관직을 버린 후 남궁억(南宮檍)·유근(柳謹) 등과 일간신문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했다. 한편 독립협회 사업에도 가담하여 이상재·이승만 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기도 했으며, 1902년(광무 6) 3월부터는 『황성신문』 사장직을 맡아 민중 계몽과 독립정신 고취를 위해 분투했다. 1905년(광무 9)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목으로 비분에 찬 “동양 3국의 안녕을 솔선 주선하기로 나선 이토(伊藤博文)가 천만 뜻밖에 어이 5조약을 내놓았는가. 개 가죽을 쓴 우리 대신들은 일신의 영달만 위하여 황제 폐하와 2천만 동포를 배반하고 4천년 강토를 외인에게 주었도다. 슬프다. 우리 2천만 노예 동포여 살아야 할 거나 죽어야 할 거나” 요지의 논설을 게재, 서울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당일로 일본 관헌에 체포, 투옥되고 이듬해 1월 말에 출옥했다. 그해 4월에는 다시 윤효정(尹孝定)·나수연(羅壽淵)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 민족 독립의 실력을 기르는 일에 힘쓰다가 대한자강회마저 해산을 당하자 중국과 시베리아를 유랑, 1910년에 귀국하여 실의(失意)의 생활을 하다가 과음으로 인해 병을 얻어 사망했다. 1962년 건국 공로 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서북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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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北學會

융희 2년(1908) 안창호·이갑(李甲)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교육단체.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한북학회(漢北學會)’를 합해서 설립했으며, 월보 간행·순회강연 등을 통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일본의 침략을 공격했다. 이에 자극되어 ‘기호(畿湖)학회’·‘호남(湖南)학회’·‘관동(關東)학회’ 등이 조직되었다. 융희 3년(1910) ‘일진회’가 합방 지지 토론대회를 열었을 때 맹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된 뒤 ‘대한협회’와 합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종교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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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敎運動

지식층의 정치운동이나 교육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기독교였는데 특히 신교(新敎)가 그러하였다. 신교는 선교사업을 활발히 전개하는 한편 전교의 방법으로 의료 등 사회사업을 경영하여 사회적으로 이바지한 바도 컸거니와 사상적으로 자유주의를 고취하고 민족의식을 앙양하는 데도 큰 구실을 하였다. 신교 계통 독립협회의 중심 인물은 정치운동에 투신하였으며, 또한 사립학교는 마치 민족사상의 교육기관과도 같았다. 그리고 광무 7년(1903)에 설립된 ‘황성기독교청년회’와 같은 기독교단체가 정치적·사회적으로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자극되어 많은 청년단체가 조직되어 다방면에 걸쳐 새로운 풍조를 만들었다. 이외에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종교운동은 매우 활발하였다. 동학의 경우 제3회 교주 손병희가 천도교로 개편하여 민족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유교는 그 전통을 고수하고 보수적인 입장에 서 있었으나 상소문을 통해서 또는 의병운동을 통해서 항일운동에 나섰다.

대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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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倧敎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로, 융희 3년(1909) 나철(羅喆)·오혁(吳赫) 등이 단군신앙을 부활시켜서 만든 종교이다. 나철은 국권강탈 후 1916년에 구월산에서 자결하고, 2대 교주 김교헌(金敎獻)은 일본의 탄압으로 교단(敎團)의 총본사(總本司)를 만주로 옮겼다. 그 후 일본군에게 10만여의 교도가 학살당한 것을 비탄하다가 죽었다.

천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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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道敎

1905년(광무 9) 12월 1일 손병희(孫秉熙)가 동학(東學)을 개칭한 종교. 우리나라는 예부터 불교·유교·선교(仙敎) 등 기성종교가 전래되어 재래의 고유한 신앙의 천신숭배(天神崇拜) 사상과 함께 시대적 지도이념으로서 사회를 지배하여 왔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 사회가 부패하여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구미제국(歐美諸國)과의 접촉에 따른 새로운 문물의 전래, 사상적 성장, 시대적 자각 등은 일반 백성에게 불안과 동요를 주어 모든 기성종교는 이미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때 마침 천주교가 들어오자 압제를 받아오던 서민층에게는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나타난 것이 최제우(崔濟愚)에 의하여 창설된 동학, 즉 오늘날의 천도교인 것이다.

발달·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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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는 일찍부터 사회적 혼란을 개탄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려는 열렬한 구도심(求道心)에서 각지를 다니며 수도(修道)와 기도생활을 계속하던 중 마침내 1860년(철종 11) 4월 5일 천도(天道)를 깨우치고 보국안민(輔國安民)·포덕천하(布德天下)·광제창생(廣題蒼生)의 주위를 선포, 동학을 창시하였다. 그는 『동경대전(東京大典)』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지어 경전으로 삼고 각처에 접소(接所)라는 집회소를 세워 접주(接主)로서 교화시키게 하는 등 조직에 착수하고 수도를 위한 주문(呪文)인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를 지어 포교에 힘썼다. 1863년(철종 14) 그는 모든 책임을 최시형(崔時亨)에게 맡기고 수도와 전도사업에 힘쓰다가 사교(邪敎)로 규정받아 이듬해 대구에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사형당했다.그 뒤를 이어 2대 교주가 된 최시형은 교단의 기초 확립에 힘써 교인의 1단(團)을 포(包)라 하고 이를 통솔하는 자를 접주(接主), 접주 중 유력한 자를 도접주(都接主:大接主)로 하고, 그 위에 교주(敎主)를 두어 모든 것을 통할케 하였다. 실행기관으로는 중앙 및 각도의 접주 밑에 6임(六任:敎長·敎授·都執·執綱·大正·中正)을 설치하고 집회소로 중앙에 법소(法所), 지방에 도소(都所)를 두고 유기적 연결을 도모하였다. 이같이 교단의 기초를 확립한 최시형은 전후 2차에 걸쳐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일으켰으나 정부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있던 중 마침내 동학혁명이 일어나 커다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결국 이 동학혁명은 청·일의 개입으로 국제적인 분규를 일으킨 채 실패하고 동학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교세는 약화되고 최시형은 처형당하였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교인은 흩어지고 3대 교주가 된 손병희는 일본으로 망명하여 재수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04년(광무 8)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가 유리해지자 교인 중의 이용구(李容九)는 동학의 기반을 이용하여 진보회(進步會)를 조직, 손병준(孫秉畯)의 일진회(一進會)와 합하여 친일 정당으로서 정치운동을 시작하였다.이에 손병희는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광무 10)에 귀국하여 교회의 재조직에 착수, 천도교 대헌(大憲)을 반포하는 한편 중앙총부(中央摠部)를 서울에 두고 대도주(大道主)가 되어 지방을 72대 교구로 분할, 교령(敎領)으로 이를 관활케 하였다. 그는 교회의 정당운동을 반대하여 순수한 교단(敎團)을 표방하면서 정당적 색채의 이용구 등 60여 명을 출교 처분하고 교리·교체(敎體)·교제(敎制)·수도조목의 5의(五擬:呪文·淸文·侍日·誠米·기도)를 재정하는 등 교단으로서의 면목을 일신하고 그 기초를 확립하였다.천도교에서 출교당한 이용구는 따로 시천교(侍天敎)를 세우고 손병희도 얼마 후 김연국(金演局)을 교주로 하고 물러났는데 김연국이 나중에 시천교로 넘어가니 박인호(朴寅浩)가 제4대 교주가 되었다. 1919년 천도교는 3·1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여 민족의 혼을 일깨워

주었는데 그 결과 손병희의 죽음과 일제의 탄압, 재정적 곤란으로 많은 난관을 겪게 되고 교단의 재정비가 논의되었다. 이리하여 1921년 교회의 중앙전제(中央專制)를 폐지하고 지방대의제(地方代議制)로 개정, 교주제를 중의제(衆議制)로 결정하였다. 이를 인정하는 교인대회파(敎人大會派), 이를 부정하는 중앙종리원파(中央綜理院派) 및 통일기성회파(統一期成會派)의 3파가 대립하였다. 1926년 교인대회파·통일기성회파가 타협하여 중앙종리원으로 개칭하니 이에 신·구의 양 중앙종리원이 출현하였다.이듬해에는 구파종리원에서 교인대회파가 다시 분리하여 사리원(沙里院) 중앙총부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교도의 단합과 증가를 꾀하여 교회조직을 강화하고 1932년에 5백 호(戶)를 1포(布)로 하는 기구를 만들고 포의 구성을 5단계의 세포 조직으로 하여 그 주관자는 상당한 교권을 인정하도록 규정, 한층 교도 획득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교파의 통일이 진전되어 교회의 발전을 기하고 있다.현재의 교회제도는 중의제이며 지방기관을 중앙기관에 종속시키고 있다. 중앙기관인 중앙총부에는 현기실(玄機室:자문기관)·교령사(敎領司:집행기관)·종의원(宗議院:의결기관)·감사원(監査院:징계기관)을 두고 순수정신면의 속인제(屬人制) 조직인 연원회(淵源會)가 있다. 중앙총부는 서울에 두고 각 군에 교구(敎區), 각 면에 전교실(傳敎室)을 설치, 그 밑에 부(部)라는 세포조직이 있다. 최고 결의기관은 전국연차대회(全國年次大會)이며 지방에는 연차교구대회가 있다. 또 중앙총부는 재단법인체(財團法人體)의 이사회를 구성하고 전위(前衛) 단체로 동학회(東學會)·부인회·학생회 및 기관지 『신인간(新人間)』이 있다.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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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교지(敎旨)는 천도(天道), 즉 우주의 주재자인 천주의 조화(造化:자연적 감화)를 믿는 데 있다. 인간은 이 천도를 알고 순응하며 천주의 마음을 내 안에서 찾고 나의 행동을 천주의 조화와 일치시킴으로써 인간은 신선이 되고 지상천국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① 신관(神觀):천도교에 있어서 천주는 유일절대(唯一絶對)의 인격신(人格神)으로서 이는 인간의 마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적 활동 즉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상은 우주의 활동은 하나의 영적 존재요 인격적인 것으로 보는 인간지상주의(人間至上主義)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최제우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천심즉인심(天心則人心)’으로 설명하고 손병희는 ‘인내천(人乃天)‘이라 하여 신은 인간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며 유일한 절대 신은 인간의 정신 바로 그것이라는 사상을 발전시켰다.② 우주관(宇宙觀):이상과 같은 신앙은 우주관에 있어서도 물·심(物心)의 이원적 존재를 부정하고 ‘지기(至氣)’를 유심(唯心)·유물(唯物)을 총괄한 대우주의 실체(實體)로 보았다. 이 ‘지기’ 개체(個體)로 표현될 때 심적 현상과 물적 현상이 나타난 것이며 이른바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원리를 발전시켜 모든 현상을 자율적 변화과정으로 설명하여 우주는 성(盛)하는 새 것과 쇠(衰)하는 낡은 것이 교체되면서 자연계와 인간계가 생장·발전한다고 설명한다.③ 세계관(世界觀):천도교는 지상천국의 건설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다. 즉 주관적으로는 개인의 인격을 완성하여 정신 개벽(開闢)을 하는 것이며 객관적으로는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고 천도에 순응하는 인간성 본연의 윤리적 사회를 이룩하여 세계의 신앙을 통일, 세계일가(世界一家)를 수립하자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영적 존재, 인간의 자연적 조화의 가능성을 말하는 ‘인내천’ 사상의 당연한 귀결이며 세계는 ‘무위이화’의 원리에 입각하여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이상사회(理想社會)’의 목표를 향하여 발전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최제우는 그 실제적 수도방법으로 입도식(入道式:입교의 서약)·주문·심고(心告:마음을 바르게 하고 부지런할 것)·정장(正裝:의관·품행을 바르게 하는 것)·금악육(禁惡肉):깨긋함을 위주로 하고 개고기를 먹지 않을 것)·금간음(禁姦淫)·신심(信心) 부정을 배격하고 마음을 곧게 하며 신의을 지킬 것) 등을 말했다. 이러한 사상은 유·불·선의 사상에 민간 고유의 신앙을 융합·발전시킨 것이며 천주교와도 어느 정도의 근사성을 나타내고 있으나 인격신의 사상은 천도교 특유의 특징인 것이다. 천도교는 손병희에 의하여 다소 변질과 발전을 보았으나 그 근본 정신에는 초기와 아무런 변함이 없다.

계몽적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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啓蒙的學問

개화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한국의 정치적 위난(危難) 때문에 학문적인 연구는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학자들의 국민 계몽을 위한 애국적 활동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커졌다. 이리하여 유길준과 주시경이 각각 『대한문전(大韓文典)』 『국어문전(國語文典)』 등을 내어 국어 연구에 정열을 기울였다. 국사 연구에는 장지연·박은식·신채호 등이 있어 국사 연구를 통해 민족적인 기개와 자존심을 앙양하려고 노력하였다. 국사뿐 아니라 세계 역사에도 관심이 커서 당시의 한국이 당면한 현실에 비추어서 모범이 되거나 반성이 될 자료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서양의 신문화를 널리 소개한 유길준의 『서유견문』도 큰 영향을 끼쳤다.

주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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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時經 (1876

1914)

한글학자. 호는 한샘. 초명은 상호(相鎬). 면석(冕錫)의 아들, 면진(冕鎭)에게 입양(入養). 황해도 봉산(鳳山) 출생. 1890년(고종 27)부터 이회종(李會鍾)에게 한문을 배우고, 1894년 상경,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 1896년(건양 1) 독립협회(獨立協會) 조직에 참여한 뒤 이 해 협성회(協成會)를 만들고, 1898년(광무 2) 배재학당 만국 지지과(萬國地誌科)를 졸업, 이어 배재 보통과에 입학했다. 『독립신문(獨立新聞)』 교정원으로 일하면서 조선 문동식회(朝鮮文同式會)를 결성, 한글 기사체의 통일과 연구에 힘쓰는 한편, 여러 강습소에 다니며 한글을 가르치고 보급하기에 전력을 다했다. 1905년에 국어 연구와 사전 편찬 사업에 관한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했고, 1907년 어윤적(魚允迪)·이능화(李能和) 등과 함께 학부(學部)의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 위원이 되었다.전생애를 한글의 문법과 맞춤법의 과학적 연구에 바치며 제자를 육성, 후에 조선어 연구회(朝鮮語硏究會:한글학회의 前身)를 창설케 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1908년(융희 2)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을 저술, 19010년 『국어문법(國語文法)』을 지었으며, 이어 최남선(崔南善)이 광문회(光文會)를 창설하자 여기서 간행되는 국어 관계 서적의 교정과 『말모이(國語解典)』 편찬을 담당했다. 1914년 『말의 소리』를 전술, 이 해 독립운동자들이 수감되자 해외 망명을 준비하던 중 급병(急病)으로 사망했다.

『서유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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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遊見聞

유길준(兪吉濬)이 미국 유학 때 유럽 제국(諸國)을 순방하면서 견문한 것을 기록한 책. 고종 32년 (1895)에 간행되었으며, 국문과 한문을 섞은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 단행본이다.총 20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세계의 인종·물산·도시, 국가의 주권 및 교육 문제, 국민의 권리 문제, 정부의 기원·종류·제도·직분·세금·국채 문제, 교육·군대 양성 문제, 화폐의 본질, 경찰의 역할과 규칙, 서양 각국의 정당과 개인의 건강 관리 문제, 직업·애국윤리와 자녀 양육의 도리, 서양의 학술·군제·종교·역사를 개관하는 등 가히 백과사전적인 내용을 수록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신진 개화사상에 눈뜨게 되었고, 갑오경장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박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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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殷植 (1859

1926)

독립운동가. 자는 성칠(聖七), 호는 백암(白巖)·겸곡(謙谷)·태백광노(太白狂奴). 황주(黃州) 출생. 1898년에 장지연(張志淵)·남궁억(南宮檍)·신채호(申采浩)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 창간에 참여, 주필이 되었고, 뒤에 경학원(經學院) 강사, 관립 한성 사범학교(官立漢城師範學校) 교사, 서북학회(西北學會) 회장·황성신문사 사장을 역임하였고, 이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의 주필이 되어 민족사상 고취에 공헌했다.1910년 국권침탈이 되자 광문회(光文會)의 위촉으로 저술에 힘쓰다가 3·1운동 후 시베리아로 망명, 애국노인단(愛國老人團)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투신하는 한편 고구려의 유지(遺地)를 답사, 고대사와 고구려 위인전의 저술에 힘썼다.그 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조직하여 총재에 피선, 이어 『독립신문』 『한족회보(韓族會報)』 『사민보(四民報)』 등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25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피선, 이듬해에 대통령이 되었다가 이 해 7월 헌법의 개정으로 대통령직에서 퇴임, 11월에 병사했다.저서 『한국통사(韓國通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協會之血史)』는 한국의 최근세사·의병(義兵) 활동 등에 관한 귀중한 사료(史料)이다. 1962년 건국 공로 훈장 복장(復章)이 수여되었다.

이인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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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人稙 (1862

1916)

신소설 작가. 호는 국초(菊初). 경기도 이천 출신. 갑오경장 후 친일 망명 정객 조주응(趙重應)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미야코신문(都新聞)』에 연재되던 통속 연파(軟派)소설을 탐독하고 신소설에 대한 소양과 지식을 얻었다. 귀국하여 1906년(광무 10)에 만세보(萬歲報)의 주필이 된 후 처음으로 이 신문에 신소설 「혈(血)의 누(淚)」를 발표하였다. 1907년(광무 11) 만세보가 운영난에 빠지자 이완용의 힘을 빌려 그 시설을 매수, 『대한신문(大韓新聞)』을 창간했다. 한때는 원각사(圓覺寺)를 중심으로 신극운동(新劇運動)을 전개하고 「설중매(雪中梅)」와 같은 신소설을 신극으로 각색하기도 했으며, 계속 작품을 발표하여 당시 신소설 작가 중 제1인자의 위치에 올랐다. 처음부터 친일정객들과 접촉이 있었던 관계로 1910년(융희 4) 한일합방이 조인될 때 이완용을 도와 친일적인 태도를 보인 인간적 과오는 있었지만, 근대소설의 토대를 닦은 그의 문학사적 공적은 크게 평가되고 있다. 그의 작가적 재능은 뛰어나 근대소설의 성격을 잘 파악하였고, 구상력과 성격의 묘사에 능했으며, 사실적 산문 문장을 처음으로 쓴 점에서 신문학 개척기의 선구적 공로자라 볼 수 있다.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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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采浩 (1880

1936)

한말의 독립운동가·민족사가·언론인. 호는 단재(丹齋), 본관은 평산(平山), 충청도 청주(淸州) 태생. 13세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읽었으며, 20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구국운동에 나섰다.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황성신문』에서 날카로운 필봉으로 일본 배척운동을 벌였으며, 이어 『매일신보』로 옮겨 자주적인 민족혼을 대중들에게 고취하였다. 그의 언론활동은 이에 그치지 않고 정치론 외에 역사에 관한 논문으로까지 발전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신민회』에 가입했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앞장섰다. 국권강탈 이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상하이와 북경 등지로 다니면서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한국사 연구에 전력했다.1926년에는 무정부단체에 가입하였고 그로 인해 다롄(大連)에서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뤼순(旅順)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36년 57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등이 있는데, 이러한 역사책은 민족사관의 원류(源流)로 한국사학사에 길이 기억될 작품이다.

흥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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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士團

1913년 안창호가 조직한 민족혁명 수양단체. 광무 10년(1906)에 국내에서 조직된 ‘신민회’의 후신으로 안창호가 노력해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직되었다. 1919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안창호는 상하이로 가서 ‘흥사단’ 극동 임시 위원부를 설치했다.로스앤젤레스의 본부에서는 『흥사단보』를 발행, 국내외의 소식을 알리고 교포 계몽에 힘썼다. 해방 후 국내에서도 이 운동이 전개되어 서울에 본부를 두고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신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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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民會

1906년에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安昌浩)가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조성환(曹成煥)·노백린(盧伯麟) 등과 같이 만든 비밀결사(秘密結社)로서 정치·교육·문화·경제 등 각 방면의 진흥운동을 전개, 국가의 실력을 기르는 데 목적을 두었다. 회원은 애국사상이 강한 사람으로 엄밀히 선출되고, 치밀한 조직을 세워 회원은 2명 이상 서로 알지 못하게 하였으며, 모든 회원의 생명과 재산은 회의 명령에 전적으로 복종케 하였다. 800여 명의 회원을 가지고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 정주(定州)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창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발행하는 한편 평양·대구에 태극서원(太極書院)을 설립, 문화운동에 종사하였으며, 평양 마산동(馬山洞)에 자기회사(磁器會社)를 만들어 산업부흥에 노력하였다. 그 후 1912년 데라우치(寺內正毅)총독 암살모의 사건에 타격을 받아 회원들이 투옥 또는 망명하여 자연히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