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세사회의 발전/조선의 성립과 발전/조선 왕조의 경제·사회적 구조
조선 왕조의 경제·사회적 구조〔槪說〕
편집조선왕조 건국 주체세력이 추구하던 경제구조는 민생안정과 더불어 국가수입을 증대시켜 부강한 재무국가(財務國家)를 만드는 것이었다. 즉 국가가 국민을 위해 봉사하려면 재무구조가 튼튼해야 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목표 아래 국가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닌 『주례(周禮)』의 경제정책이 주목되었다. 고려말, 조선초의 전제개혁(科田法)도 그러한 방향에서 이루어진 것이다.전제개혁 주동자들이 처음 구상한 것은 전국의 토지를 몰수하여 인구비례로 재분배하는 이른바 계구수전(計口授田)이었다. 이로써 모든 농민을 자작농으로 만들고, 국가수입을 늘리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지주들의 반발로 충분한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전국 토지에 공개념을 부여하여 국가가 수세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토지제도
편집土地制度
조선 초기의 토지제도는 고려 말기에 실시되었던 전제개혁(田制改革)의 원천을 다시 확립한 것으로, 국가의 철저한 관리 아래 토지를 반급(班給)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391년(공양왕 3)에는 과전법(科田法)이 마련되었는데, 이것이 조선 토지제도의 기초를 이루었다. 전국의 토지를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나누는 것은 고려 때와 같았으나, 고려 시대에는 사전이 공전보다 많았던 반면 조선시대에는 공전이 사전보다 훨씬 많아졌으니, 이는 집권적(集權的)인 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공전이라는 것은 왕실 및 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공전이라는 것은 왕실 및 관청에 직속된 토지로서 그 수조권(收租權)이 왕실인 관청에 속한 것이며, 사전은 공신전(功臣田)·별사전(別賜田)·과전(科田)·군전(軍田)·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 등으로 그 수조권이 개인에게 속하여 국가에서는 이에 대해서 다만 수세권(收稅權)만을 가지고 있었다. 과전(科田)은 경기 지방의 토지로써 왕족·문무관(文武官)에게 분배하되 현임(現任)·전임(前任)을 가리지 않고 관계(官階)와 신분에 따라 18과(科)로 나누어 주었으며, 군인에게는 경기 이외의 지방에서 군전(軍田)을 지급하였다. 과전(科田)의 지급지(支給地)를 경기에 한한 것은 왕족·관료들의 경제적인 기반을 중앙에 집중시킴으로써 이들에 의한 지방세력의 성장을 막고 중앙집권의 정치체제를 확립하려는 데 있었다.사전(私田) 가운데서는 공신전(功臣田)만 세습을 인정하였으나 그 밖의 토지도 여러 가지 특례가 마련되어 과전법 자체의 모순과 불완전, 그리고 철저하지 못한 운용(運用)으로 사전의 팽창을 보게 되었다. 이와 반면에 새로 과전을 절급(折給)받아야 될 관료의 수는 증가하여 기내(機內)라는 일정한 지역에서는 과전에 충당시킬 토지의 절대적인 부족을 초래하여 태종 때에 이르러서는 과전의 일부를 하삼도(下三道:忠淸·全羅·慶尙道)에 이급(移給)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나, 결국은 이곳에서도 귀족층에 의한 농장의 확대를 초래하였을 뿐으로 역시 과전의 부족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1465년(세조 11)에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과전을 없애고 직전(職田)을 설치, 현직에 있는 관료에게만 이를 주도록 하였다. 이 직전도 처음에는 과전법과 마찬가지로 관료가 경작자로부터 직접 수조(收租)하였는데 그 결과 직전이 관직을 그만두거나 죽은 뒤에는 국가에 도로 반환해야 될 성질의 토지였던 관계로, 관직에 있을 동안에 재산을 모아 두기 위해 경작자를 지나치게 착취하는 폐단이 생기자 1470년(성종 1)에는 직전세(職田稅)로 개편하였다. 이 제도는 국가에서 직접 경작자로부터 조세를 받아들여 관료들에게 이를 나누어 주기로 된 것이니, 이로써 『경국대전』에 수록된 직전의 지급에 대한 규정은 유명무실하게 되고, 관료들은 직전의 조(租)에 해당하는 액수만을 국고(國庫)에서 받게 되었다. 이를 보통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라고 일컫고 있는데, 이 제도도 명종 이후에는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으며 임진왜란을 계기로 없어져 관료들은 봉록(俸祿)만을 받게 되었을 뿐이고, 고려시대 이후 줄곧 봉록과 아울러 같이 받아오던 토지를 국가에서는 분배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양반들에 의한 대토지 소유는 농장의 형태로 엄연히 존재하였으며, 또한 확대되어 갔다.
한편 중앙과 지방의 관청이나 공공기관에는 제전(諸田)을 지급하여 필요한 경비를 충당케 하였다. 즉 늠전(凜田)으로는 아록전(衙祿田)·공수전(公須田)·역장전(驛長田)·부장전(副長田)·급주전(急走田)·원전(院田)·진부전(津夫田)·수부전(水夫田) 및 수릉군전(守陵軍田) 등이 있었으며 이 밖에도 제전(祭田)·학전(學田)·사사전(寺社田)·내수사전(內需司田)·혜민서종약전(惠民署種藥田) 등 여러 종류의 토지가 지급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토지제도의 특수한 형태로 국둔전(國屯田)과 관둔전(官屯田)이 있었다. 국둔전은 변경지방(邊境地方)에 두어 군자(軍資)에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관둔전도 처음에는 주(州)·부(府)·군(郡)·현(縣)에 군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서 세종 때 지방관에 설치된 둔전(屯田)이었는데, 실지로는 지방관의 일반 경비에 충당되었다. 다음으로 토지의 직접 경작자이던 전호(佃戶)와 수조권자(收租權者)이던 전주(田主)와의 관계는 어떠하였는가 하면, 먼저 과전법에서는 조(租)·세(稅)의 액을 국가에서 정하여 종래의 과중한 부담을 경감시켰으며, 또 전주(田主)가 전액의 토지를 이유 없이 빼앗을 때에는 처벌하도록 하여 경작권을 법적으로 보호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경작권의 자유처분도 금지되어 있었던 것으로, 이는 전객에게 일정한 지위를 주는 동시에 전객을 토지에 긴박(緊縛)시켜 둠으로써 사회의 안정을 얻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종래에 무제한적으로 지배되어 오던 농민에 비해서는 확실히 발전된 점이 많았다.조선시대 때의 전주와 전객과의 관계는 병작(?作)·병경(?耕)이란 말로서 표시되듯이 수확을 반반씩 나누는 관계에 있었다. 전객은 일반적으로 양민이었지만 천민(賤民)인 경우도 있었다. 양민으로서는 국가의 무거운 조세·부역의 의무를 부담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양민들은 신분을 천민으로 낮추어 그 의무를 면제받으려 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경국대전』에서는 경작자·수조자(收租者), 국가에 의한 토지의 지배 형태가 다름에 따라 자경무세(自耕無稅)·무세(無稅)·각자수세(各自收稅) 등의 구별을 두고 있다.위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의 토지제도는 토지국유의 원칙 아래 처음에는 과전법에서 출발하여 직전법으로, 여기서 다시 관수관급제로 변천하였으나 토지제도 자체가 지닌 결함은 여전하여 드디어 권문세가들에 의한 토지의 겸병(兼倂)·점탈(占奪)·세습(世襲)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사전의 증가를 초래하였던 것인데, 장기간에 걸친 임진왜란의 혼란기를 통하여 농장은 급속도로 확대되어 가는 한편 토지에 대한 국가의 관리는 소홀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 중기 이후는 공전의 사유화 과정에서 토지제도 문란의 특색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로써 건국 초기에 표방하였던 토지 국유제는 사실상 무너지게 되었으나, 그래도 그 토지의 경작권은 일반적으로 전객(佃客), 즉 농민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른바 한일합방 이후 일본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종래 고유한 관념으로서의 토지의 경작권, 근대적인 의미로는 실질적인 토지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농민의 대다수는 그 권리를 박탈당하고 소작인의 지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과전법
편집科田法
공양왕 3년(1391) 고려의 문란한 토지 소유 관계를 정리하여 관료 중심으로 토지를 분급하던 제도. 과전법의 목적은 첫째로 토지의 국유화에 의한 사전(私田)의 재분배요, 둘째로 수확의 5/10가 일반화되었던 수조율을 대폭 경감하여 국고와 경작자 사이에 개재하는 중간 착취를 배제하는 일이었다. 토지국유가 무너진 원인의 하나는 강자의 토지겸병이요, 또 하나는 국가가 허용하는 자간(自墾)·자점(自占)이었다. 과전은 왕경(王京)에 거주하는 시(時)·산(散) 문무 관료에게 품계(品階)에 따라 18등급의 토지를 각각 나누어준다는 것이니, 관료는 그 직무의 보수로 녹봉을 받는 이외에 신분상의 특전을 받는 것이었다. 이 과전은 고려 사전의 외방(外方)에 설치되었던 것과는 반대로 경기지방에 집중되었다는 데 큰 특징이 있는데, 이는 양반 관리들의 세력이 지방에서 성장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과전은 1대에 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수신전·휼양전이라 하여 실질적으로 세습되어 가는 경향이 많았던 것이다. 그 위에 공신전·군전 등도 점차 세습화하여 당초의 이상은 재분배 과정에서부터 여러 제약을 받았고, 더구나 오래지 않아 토지국유의 공정수조율은 사실상 허구화되는 여러 현상이 일어났다.
개간전의 규례
편집開墾田-規例
973년(광종 24)부터 시행된 새로 개간한 땅에 대한 조세법(租稅法). 고려 이전에는 개간전은 방임하였으나 고려에서는 973년 12월에 전시과(田柴科)의 법에 따라 개간전이 사전(私田)이면 2년째부터 전주(田主)와 반분하고, 공전(公田)이면 4년째부터 법에 의하여 조세(租稅)를 납입토록 규정했다. 992년(성종 11) 세율규정에 따라 사전은 4분의 2로 1결(結) 4섬, 공전은 4분의 1로 1결 2섬씩 규정했다. 1111년(예종 6)에는 사전으로서 개간기간이 3년이면 3년째부터 전주와 반분하고, 개간기간이 2년이면 2년째부터 4분의 1을 전주에게 주고, 개간기간 1년이면 3분의 1을 전주에게 주도록 개정했다. 조선시대에는 1401년(태종 1) 상호군(上護軍) 심구령(沈龜齡)·감무(監務) 정분(鄭芬) 등의 건의에 따라 개간전에 과세하였고, 1471년(태종 17)에는 해변 및 도서(島嶼)지방의 신간전은 전안(田案)에 정전(丁田)으로 편입시켜 과세하였다. 1457년(세조 3) 미간지 개척의 필요에 비추어 미간지개척법(未墾地開拓法)을 정하고 평안·황해·강원 3도를 개간시켰으며 법에 따라 과세했다.
공신전
편집功臣田
공양왕 3년(1391) 전제개혁 때 과전 이외로 공신에게 주던 토지. 이는 공양왕 2년(1390)에 사여(賜與)된 이성계 등 45인의 회군공신(回軍功臣)의 공신전에 한한다 하였다. 따라서 그 이전의 고려시대 여러 공신은 그 특전이 인정되지 않게 된 것이며, 이 예외적 조처는 곧 뒤에 오는 다른 공신적 설정의 선례를 남긴 것이다. 공신전도 과전과 마찬가지로 경기지방에 한하여 지급되어 갔다. 이 공신전은 고려의 공음전시가 모든 관료에게 지급된 것과는 달리, 공신으로 지명되는 자만이 자손대대로 세습할 수 있었다.
군전
편집軍田
공양왕 3년(1391)부터 군인을 양성하기 위해 한량 관리에게 분급하던 토지. 고려의 군인전은 선군(選軍)되는 일반 병사에게 주는 것이었음에 대하여, 이 군전은 양반 말류(末流) 내지 토호라고 할 특수층에게 주는 점이 현저한 대조가 된다. 그뿐 아니라 고려의 군인 및 부병(府兵)이 원칙상 양인 농민이라면, 군인전은 상당수의 양인에게도 수조권을 준 것임을 의미하는 반면에, 과전법의 군전이 한량에 국한되었다는 것은 농민의 큰 부분인 양인이 이번 급전(給田)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군자전(軍資田)도 부족한 당시의 실정으로는 불가피한 것이었으나 한량에게만은 급전하게 된 데에는 각 지방 토착세력에 대한 정치적 배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직전법
편집職田法
세조 12년(1466) 과전법의 폐단에 대한 제2의 타개책으로 나타난 토지제도. 직전법이란 현직·전직의 모든 관료에게 토지를 주어, 점차로 세습화된 과전을 폐하고, 그 대신 현직 관료들에게만 수조지(收租地)를 지급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급량은 각 품계(品階)마다 많이 감소되었다. 또 이 직전법의 실시로 직접 타격을 받은 것은, 과거 과전법에서 수혜 대상에 들어 있던 전직자 및 수신전·휼양전의 수전자였다. 이들이 수혜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왕권을 옹호하는 신분층을 대대로 우대하는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 직전법의 실시는 왕조 초창기와는 달리 왕권이 안정되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또 이미 토지 사유가 진행되어 국가의 토지에 여유가 없어졌음을 시사한다 할 것이다. 이 제도는 성종 1년(1470)에 직전세(職田稅)라는 제도로 일대 전환을 보게 된다.
둔전
편집屯田
과전법의 실시에 따라 각 지방 주둔병의 군량 자급을 위하여 반급(頒給)하던 토지. 둔전은 원래 위수(衛戍) 중의 군졸로 하여금 현지의 토지를 경작케 하여 군량에 충당케 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지방 관부의 경비부족을 보충하는 목적으로 변질된 것도 이미 고려 숙종 4년(1099)경에 시작되어 있었다. 여기에 폐단이 생겨 조선초에 여러 번 폐지해 보기도 하였으나 실효가 없다가, 마침내 세종 때에 관둔전(官屯田)을 공인하고 그 결수(結數)를 제한하기도 하는 등 개폐(改廢)를 거듭하였다. 세조 때에는 그 결수를 배가(倍加)하였으며, 이 주현관둔전(州縣官屯田)과 유사한 듯하면서 전혀 성질이 다른 것으로는 국둔전(國屯田)이 있다. 국둔전은 당번군인이 경작하고 그 수확은 그대로 국고수입으로 삼아 군자(軍資)로 쓰는 것이다. 이 둔전의 한반도 내에서의 기원은 멀리 백제 멸망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고려말에도 연해지방에 국둔전을 일으켜 왜구의 재해를 입은 토지의 복구에 힘을 썼으나, 조선 태조 때 국둔전 전폐를 내걸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군수 부족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를 부활시켰으며, 그 뒤에도 여러 번 곡절을 겪었다.
조선의 공해전
편집朝鮮-公?田
고려 이후 국가기관 내지 왕실·궁원(宮院)의 경비를 충당키 위하여 설정한 토지. 조선초는 고려의 제도를 대체로 답습하였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 이전까지 약간 변동이 있었다. 세종 16년(1434) 각 관청 소속의 공해전을 정리하여 그 수를 줄였고, 동왕 26년(1444)에는 공해전을 대폭 삭감하고 부족액을 관둔전(官屯田)으로 보충케 했다. 공해전에 해당하는 토지의 종류는 지전(紙田)·내수사전(內需司田)·공수전(公需田)·역전(驛田)·진전(鎭田)·마전(馬田) 등으로, 모두 관청에서 준 토지였다.
납세제도
편집納稅制度
납세제도는 조세(租稅)와 공부(貢賦)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조세는 지급된 토지를 대상으로 징수되었기 때문에 그 과세율(課稅率)이 분명하였으나 공부는 노동력과 호(戶)를 대상으로 부과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세보다도 그 부담이 무거웠다. 또한 중기 이후에는 공부도 토지를 대상으로 하는 제도가 채택되면서부터 조세의 부담이 제일 무거워지게 되었다. 먼저 조선시대 조세의 성립과정을 살펴보면, 세종 때 공법(公法)이라는 새로운 세제(稅制)가 마련되기까지는 고려 공민왕 때 토지개혁과 함께 정하였던 규정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즉 조(租)는 수전(水田) 1결(結)에 대해서 조미(?米) 30말(斗), 한전(旱田) 1결에 대해서는 잡곡(雜穀) 30말을 경작자로 하여금 부담하게 한 것인데, 공전(公田)인 경우에는 관가에서 그것을 징수하였고, 사전(私田)인 경우에는 수조권자(守租權者)인 전주(田主)가 이를 받아들였다. 세(稅)는 전주(田主)가 경작자에게서 받은 조(租) 중에서 1결에 대하여 2말씩 국고(國庫)에 바치게 하였는데, 능침전(陵寢田)·창고전(倉庫田)·궁사전(宮司田)·공해전(公?田)·공신전(功臣田)은 세(稅)를 면제받았다. 이와 같은 규정은 고려 태조가 내세웠던 10분의 1 수조율(守租率)에 근거하여 종래의 과중한 부담을 덜게 한 것이다.한편 종래에는 사전에 부과하지 않던 세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조선시대 조세제도의 특징의 하나라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실지로 조세를 부과시키는 규정으로서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이 마련되었는데, 이것은 농작의 상황을 10푼(分:等級)으로 나누어 손(損:凶作) 1푼에 조(租) 1푼을 감해 주고, 손(損) 8푼이면 조 전액을 면제한다는 전제 아래, 공전의 경우에는 관(官)에서, 사전의 경우에는 전주(田主)가 각각 풍흉(豊凶)을 조사하여 등급을 매기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 이를 운용함에 있어, 조사를 맡은 관리나 전주들에 의한 협잡·착취가 심하였으며, 특히 사전인 경우에는 전주가 사실보다 더욱 가혹하게 등급을 매겨 경작자를 괴롭혔으므로 한때는 그 폐단을 없애기 위해 관(官)에서 직접 풍흉의 정도를 조사한 적도 있었다.이와 같이 답험손실법에 결함이 드러나게 되자 세종 때에는 공법(貢法)이라는 새로운 세법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즉 1430년(세종 12) 8월에 왕은 종래의 답험손실법을 전폐하는 대신 상·중·하 3등전(三等田)에서 그 해의 풍흉을 막론하고 일률적으로 1결에 대해 10말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시안(試案)을 내어 전국 각계각층의 여론을 들었으나 확실한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436년(세종 18)에는 다시 공법상정소(貢法上程所)를 두어 새로운 안(案)을 내어 일부 지역에 실시하여 보았으나 결함은 여전하였으므로 1843년(세종 25)에는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조사 연구에 착수케 함으로써 새로운 세제(稅制)를 세우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에 답험손실법과 공법을 절충하여, 토지를 비척(肥瘠)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며, 연분(年分)을 그 해의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눈다는 전분육등(田分六等)과 연분구등(年分九等)의 법을 제정하였는데 이것은 조선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그리하여 1448년(세종 30)에는 토지의 개량(改量)을 시작하였으며, 양전(量田)이 끝나자 이 신법(新法)을 실시하게 되었다.그러나 늘 경작할 수 있는 토지는 정전(丁田)이라 하여 새 세법에 의해 과세하였으나, 때때로 휴경(休耕)을 요하는 토지는 속전(續田)이라 하여 재해로 말미암아 손해를 받은 재상전(災傷田)과 함께 답험손실법에 의하기로 하였다. 과세의 대상인 토지는 경작자의 사정이나 자연적 조건 등으로 그 상태가 변동될 수 있으므로 그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는 양전(量田)의 실시는 세제의 올바른 운영을 위해 필수조건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세종 때에는 20년마다 한 번씩 양전을 실시한다는 양전법(量田法)이 제정되어 『경국대전』에 수록됨으로써 길이 준수해야 될 성문법(成文法)이 되었으나 이를 실행함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농간(弄奸)과 협잡이 따르게 되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을 당하여 난후(亂後)에 문란된 전적(田籍)을 정리하기 위하여 1603년(선조 36)에 착수, 이듬해에는 겨우 경기·강원·황해도를 마쳤을 뿐이었고, 충청·전라·경상도는 정묘호란 등을 겪고 더욱 전제(田制)가 무너진 뒤인 1634년(인조 12)에야 실시되었다. 그리하여 재정(財政)을 충실케 하기 위하여 연분법(年分法)을 중지하고 정률법(定率法)에 의거하여 조세를 받아들였으나, 백성들의 피해가 큰 것을 참작하여 다시 답험손실법에 의해서 징수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와 전후하여 공부(貢賦)의 부과방법에도 큰 개혁이 있어서 세제는 더욱 복잡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공부는 건국 초기에 공부상정도감(貢賦詳定都監)을 설치하여 지방 특산물의 통계를 내서 공부의 등급을 매겨 각 지방의 공안(貢案)을 채워야만 되었다. 더욱이 연산군은 방탕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공부를 더욱 많이 매겼으므로 농민들의 부담은 더욱 무거웠으나 이때 작성된 공안은 그 뒤에도 폐지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또 공안도 실정에 맞지 않은 경우가 많아, 토산(土産)이 아닌 물품을 공납해야 될 때도 있었다. 이럴 경우는 그 물품을 사서라도 바쳐야 되는 불편과, 또 중앙에 공납이 가능한 물품이라 하더라도 수요와 공납이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든가 수송의 곤란 등으로 이른바 방납(防納)이라는 공부청부제(貢賦請負制)가 생기게 되면서 그에 의한 중간 착취로서 백성들의 고통은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공물을 미곡(米穀)으로 대신 내게 함으로써 방납에 의한 백성들의 피해를 덜자는 의견이 선조(宣祖) 초기에 나왔다. 그러나 실시되지 못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전국의 토지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국가의 수입이 격감되었다. 그 보충책으로서 시행하게 된 것이 곧 대동법(大同法)이었다.위에서 말한 것 이외에 초기부터 농민에게는 군역(軍役), 중에게는 승역(僧役), 천인(賤人)에게는 천역(賤役) 등 각종 역(役)이 부과되었으며, 다만 양반들만이 원칙적으로 역의 의무가 없었다. 역 가운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군역이다. 군역은 양인(良人)만이 부담하는 국역(國役)이라 하여 양역(良役)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현역(現役)과 봉족(奉足) 혹은 보(保)로 나눌 수 있다. 그리하여 현역(現役)으로 뽑혀 번상(番上)하지 않는 자는 대신 군포(軍布)를 바쳐 번상한 장정들의 비용에 충당케 하였으나 뒤에는 그 자체가 국가의 중요한 수입의 하나가 되었다. 양역은 특히 임진왜란을 계기로 그 폐단이 더욱 심하여져서 백성들의 부담이 막중하였으므로 영조(英祖)는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균역청(均役廳)을 두고 양역을 고르게 부과시키려는 의도에서 균역법(均役法)을 제정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 밖에도 삼수미(三手米)·삼세(蔘稅) 등의 세가 있었는가 하면 각종의 명목으로 부가세(附加稅)가 부과되어 백성들은 과중한 부담으로 근근히 목숨만을 이어갈 정도의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한편 1894년(고종 31)의 갑오경장 때에는 신식화폐장정을 의결, 은본위(銀本位)의 화페제도를 세우고 물납(物納)을 지양하고 세금의 금납화를 꾀하기에 이르렀다.
전조
편집田租 역대 조세(租稅) 중의 하나. 조·용·조(租庸調) 중 토지에 부과하는 조세를 전조(田租), 또는 지조(地租)라 하였으며, 현물세로서 곡물로 바쳤다. 전조의 세율(稅率)은 십일제(什一制)라 하여 수확의 10분의 1을 전조로 바쳤으며, 과세 방법은 관리가 그 해 농작 상황을 실지 답사하여 상·중·하의 등급을 정하여 과세하던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을 고려 이후부터 채택해 오다가 폐단이 많아 세종 때 전분6등(田分6等)과 연분9등법(年分9等法)에 의해 과세했다. 수조(收租)의 경우에는 지주(地主)인 수조권자(收租權者)의 수입이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세(稅)’를 마련하여 수조권자가 받은 전조(田租) 중에서 1결(結)에 대하여 2말(斗)씩 받았다. 그러나 조선 성종 이후 직전법(職田法)이 실시된 후에는 조(租)와 세(稅)가 구별 되지 않아 모두 전조(田租), 또는 전세(田稅)라 하였다.
공납
편집貢納
조선시대 세제(稅制)의 하나. 공납은 각지의 토산물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토공(土貢)이라고도 하며, 이는 관부의 여러 가지 용도에 충당키 위한 것이었다. 공물에는 수공업품으로서 각종의 기물(器物)·직물(織物)·지류(紙類)·석자(席子) 등과, 각종의 광물·수산물·모피·과실·목재 등이 있었다. 공납은 전조보다도 더 괴로운 부담이었다. 또 원래는 지방장관들의 부담인 진상(進上) 같은 것도 결국 그들의 부담이 되었다.
조선의 병역제도
편집朝鮮-兵役制度
고려 말에 끊임없이 외환에 시달린 경험을 살려 조선초기에는 국방강화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군대를 늘리고 정예화하였다.건국 직후에는 우선 귀족 관료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私兵)을 혁파하여 공병(公兵)으로 귀속시키는 일에 주력했다. 이 사업은 태종 때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기왕의 군대만으로는 부족하여 모든 양인은 군역을 지게 하는 양인개병제를 밀고 나갔다. 즉,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양인 남자는 군병(軍兵)이 되거나, 아니면 군병이 군역을 지는 동안 필요한 식량, 의복 등 경비를 부담하는 보조원(奉足 혹은 保人)이 되도록 하였다.토지가 3
4결 이상 되는 자립농민에게는 보조원을 주지 않았으나, 영세농민 출신의 군인에게는 보조원을 지급하여 주었다. 보조원은 군병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매년 무명 1필을 국가에 바쳤다. 정부는 군역담당자를 확보하기 위해 호적조사사업을 강화하고, 양인 인구를 확대하는 정책을 써서 태조 6년에 37만명이던 군역담당자가 세종 12년경에는 70만명으로, 세조 때에는 80만
100만명으로 늘어났다. 이 중에서 군병이 약 30만, 보조원이 약 60만이었다.군역에서 면제되는 것은 현직관료와 학생이었다. 왕의 친척인 종실과 외척, 공신이나 고급관료의 자제들도 군역을 지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다만 그들의 군역은 국왕의 호위와 시종, 왕의 경비를 담당하는 고급특수부대에 소속되어 좋은 대우를 받은 것이 다른 점이다.일반 평민은 정병(正兵), 유방군(留防軍), 혹은 수군(水軍)에 편입되어, 정병은 1년에 두달, 유방군은 석달, 수군은 두달씩 복무했고, 복무기간에 따라 산계(散階)를 받았다. 이 밖에 직업군인으로서 갑사(甲士), 별시위, 내금위 등이 있어 무재(武才)가 있는 사람들이 시험을 쳐서 들어왔으며 정식 무반에 속히 품계와 녹봉을 받고, 중앙에서는 왕궁과 서울의 수비를 맡고, 지방에서는 하급 지휘관이 되었다.조선초기에 군대를 통솔하는 기관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였다. 여기에는 다섯 개의 군단이 있어서 이들이 중앙군(府兵)을 구성했는데, 그 지휘책임은 문반관료가 맡았다. 이 밖에 군인의 훈련, 시험 등을 관장하는 훈련원(訓練院), 무관의 최고기관으로 중추부(中樞府)가 있었다.지방의 육군은 세조대 이후로 이른바 진관체제(鎭管體制)로 편성되었다. 즉 각도마다 한 개 혹은 두 개의 병영(兵營)을 두어 병마절도사(兵使)가 정해진 구역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병영 밑에서 몇 개의 거진(巨鎭)을 두어, 거진의 수령이 주변 군현의 군대통수권을 장악하였다. 말하자면, 전국이 지역단위의 방어체제를 형성한 것이다. 그리고 요새지의 읍에는 읍성(邑城)을 쌓아 지방의 방어체제를 강화하였는데, 특히 바닷가 요새지에 해당하는 읍에 읍성을 많이 쌓았다. 이로써 지금까지의 산성(山城)시대에서 읍성(邑城)시대로 바뀌면서 국방이 한층 강화되었다.한편, 중앙군과 지방군의 유기적인 통합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지방군의 일부를 교대로 서울에 올라와 복무하게 하였다. 이것이 번상병(番上兵)이다.수군은 육군과 비슷한 체제로 편성되었다. 즉, 연해 각 도에 몇 개의 수영(水營)을 두고 수군절제사(水使)를 파견하여 자기 관할구역의 수군을 통솔하게 했다. 수영 밑에는 포진(浦鎭)과 포(浦)를 두고, 첨절제사와 만호(萬戶)를 각각 파견하여 관하 수군을 통할하게 했다.조선초에는 정규군인 이외에 일부의 예비군인 잡색군(雜色軍)이라는 것이 있어서 평시에는 자기 생업에 종사하고, 일정한 기간 군사훈련을 받아 유사시에 대비했다. 여기에는 서리, 잡학인, 신량역천인, 노비 등이 배속되었다.교통과 통신체계도 전보다 한층 강화되었다. 군사적인 위급사태를 알리기 위한 봉수제(烽燧制)가 정비되고, 물자수송과 통신전달을 위한 역마참(役馬站)제도가 전국적으로 짜여져서 국방과 중앙집권적 행정운영이 한층 용이해졌다.조선초기에는 취각령(吹角令)이라 하여 서울의 관료들을 수시로 궁 앞에 비상소집했으며, 무장한 갑사(甲士)들과 돌팔매의 전문가인 척석군(擲石軍)이 광화문 앞에서 서로 싸우게 하여 군사군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이 훈련은 사상자가 많이 생겨 중단되고, 민간의 민속놀이로 전승되어 갔다.15세기의 강력했던 국방체제는 16세기 이후 점차 해이해지면서 16세기 후반의 왜란 직전에는 이이(李珥)가 10만 양병설을 부르짖을 만큼 어려운 사태에 직면하였다.
조선의 경제활동
편집朝鮮-經濟活動
조선시대에는 그 전시기를 통하여서 공업의 발달이란 거의 없
었으며, 또 대개는 농업에서 분업되지 못하고, 농촌사회의 가내부업(家內副業)으로서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수공업이 행하여지는 정도였다. 농민은 토지의 경작과 동시에 일용품의 원료도 함께 장만하여 옷감을 짜거나 가구와 농구(農具)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농민의 수공업 이외에 전문적인 수공업자(手工業者)를 공장(工匠)이라 하는데, 경공장(京工匠)과 외공장(外工匠)으로 크게 구분되었다. 중앙의 각 관청에 속해 있는 공장을 경공장, 지방의 각 도(道)·읍(邑)에 소속된 공장을 외공장이라 하여 그 인원과 종류는 상당히 많았으나 이것이 근대적인 생산 체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다만 지배계급의 위의(威儀)를 갖추기 위한 장식품을 만드는 데 종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관청의 필요에 따라 의무적으로 일을 해야 되었으며 보수(報酬)는 없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제품을 만들었을 때에는 공장세(工匠稅)를 내기로 되어 있었다.그러다가 후기에는 관청 소속의 공장 제도는 무너지게 되면서 독립적인 자유생산자(自由生産者)로 옮겨진 것 같으나 이것이 어느 정도 상품 생산의 길을 개척한 것인지는 별로 밝혀진 바가 없다. 조선시대의 수공업이 시종일관 침체한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은 상품 유통을 전제로 한 공업활동이 없었으며, 상공업의 천시(賤視) 등에도 그 원인이 있는 데다가 대외적으로는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그 중요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초기에 명(明)에 대한 금·은의 조공(朝貢)을 면제받은 뒤에 우리나라에서는 금·은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채광(採鑛)을 엄금하고 그 공예품의 생산까지도 단념한 것이라든지, 명(明)·청(淸)으로부터 대량으로 수입되던 각종 우수한 공업제품은 기술수준이 떨어진 국내의 생산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으리라는 사실 등이다.이와 같은 사회적인 여건(與件)속에서 상업의 활동이 활발치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일상 생활의 필수품을 물물교환하는 정도의 경제체제에서 머무르고 말았다. 민간에서는 일반적으로 장시(場市:場)을 통하여 상업활동이 행하여졌다. 장은 보통 5일마다 한 번씩 열려서 농민·어부들이 모여들어 물건을 팔고 샀다. 이렇게 기일을 정하여서 장이 열렸던 것은 각 지방의 상업적인 발달이 없었기 때문에서인 듯하다.장은 후기에 이를수록 그 수가 증가되는데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순조 때 전국의 장시 총수는 1061로서 이들은 30리 내지 40리의 1일 행정(行程)을 기준으로 날마다 바꿔가며 장이 열리도록 되어 있어 상인이 각 장시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데 편리하도록 꾸며져 있었다. 장에서의 거래는 주로 생산자와 소비자와의 직접적인 접촉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보부상(褓負商) 등의 행상인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들은 그 지방 토산물 이외의 상품을 보(補)에 싸거나 지게에 지고 각 장시를 돌아다니면서 팔며, 동업자(同業者)들은 길드적인 성격의 동업조합(同業組合)을 이루고 있었다.이와 같은 행상에 대립되는 것으로는 전(廛)이 있었다. 이것은 한 점포를 늘 열어 두고 물건을 매매하던 곳으로서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서울의 육의전(六矣廛)이었다. 이 육의전은 주로 정부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점포로서 발달하였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과의 거래는 활발치 못하였다.이 밖에 도시 중심으로 객주(客主)·여각(餘角) 등이 있어서 상품의 매매·보관·운송 및 그 위탁판매와 금융업(金融業)·여인숙 등을 맡아 하였다. 위에서 말한 것은 모두 국내에 있어서의 상업활동이었는 데 대하여 한편으로는 중국·여진·일본 등의 외국과의 무역도 행하여졌다. 즉 명(明)·청(淸)에 대해서는 소위 조공(朝貢)이라는 형식을 통한 공무역(公貿易)과 사신 일행에 의한 사무역(私貿易) 등이 있었으며, 일본과 여진 및 유구(流寇) 등과는 그들의 진상(進上)을 통한 공무역이 있었고, 북쪽의 중강(中江)·북관(北關), 남쪽의 왜관(倭關)에서의 개시(開市)를 통하여서는 민간무역이 행하여졌다. 조선의 경제체제가 자급자족인 물물교환의 영역(領域)을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화폐도 제대로 유통될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화폐에 대한 관심이 커서 조선에서도 초기부터 저화(楮貨)라는 일종의 지폐와 동전을 번갈아 만들어 내어 유통시키려 하였으나 어느 것이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며, 특히 저화는 시대가 흐를수록 그 가치가 폭락하여 도무지 화폐로서의 신용과 안정성을 가지지 못한 반면, 그보다 유력한 유통수단은 여전히 미(米)·마포(麻布)·면포(綿布)였으며, 저화는 중기에 이르러 자연히 소멸되고 말았다.이와 같이 전근대적인 사회·경제적 질서 가운데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丙子修護條約)을 체결하여 자본주의 여러 나라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이내 그들의 상품시장·원료 공급지로 전락됨으로써 이제까지의 봉건적인 경제체제는 붕괴되고 곧 이어 사회에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면서 차츰 식민지로의 길을 내딛게 되었다.
공장
편집工匠
전업적(專業的)인 수공업자. 조선의 수공업은 가내수공업(家內手工業)과 공장수공업으로 나눌 수 있다. 공장수공업으로서는 관영수공업(官營手工業)이 특히 두드러져서, 무기·도자기·문방구·금은세공품 등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들 공장의 구성 요소를 보면, 첫째 사노비(私奴碑) 출신을 관노화(官奴化)하여 공장에 편입한 것과, 둘째 관노비로서 공장에 편입한 것, 셋째 선상노(選上奴)의 기술자를 공장화한 것, 넷째 양민으로서 공장수공업에 종사한 것을 들 수 있는데, 사회적으로 천시되고 있었다. 공장수공업은 한성부·공조 및 29개 관사에 소속된 경공장(京工匠)과 각 지방에 소속된 외공장(外工匠)으로 구성되는데, 구성비율상 외공장의 수는 증가 추세에 있었다. 이러한 조선 초기의 관영수공업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차차 붕괴 과정을 밟아, 영조·정조를 통해서 경공장은 물론 사공장도 현저하게 쇠퇴해갔다. 그래서 관에서 사역이 필요하면 사공(私工)을 임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이러한 관영수공업의 붕괴 과정에서 차츰 독립적인 수공업자가 출현하게 되었으며, 또한 양인으로서의 관장(官匠)은 각기 흩어져 자유 신분을 누리게 됨으로써 사장(私匠)의 사역은 점차 증가하였다.
시전
편집市廛
시가지에 있었던 상점. 태조 즉위년에 서울에 경시서(京市署)를 설치하여 경내(京內) 상인을 관리하며, 도량형기를 취체하며, 물가를 억제하는 등 일반시장의 행정사무를 담당케 하였다. 그 후 정종 1년(1329)에 종로를 중심으로 공랑(公廊), 즉 상설점포를 설치하여 시전시설을 정리하여 그 곳에서 상인으로 하여금 영위케 하였다. 시전 공랑의 건조공사가 본격적으로 착수되어 완전히 자리잡힌 것은 태종 때였다. 이와 같이하여 국초에 경성에 건조된 관설(官設) 시전은 관청의 필수품을 공급하였다.정부에서는 이들 시전 중 국역을 부담하는 육의전 등에 대해서는 그 대가로서 일종의 상품 독점 판매권과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부여하였다.
장시
편집場市
조선시대에 정기적으로 개설된 시장. 장시란 어용상인 시전과 구별되는 것으로 조선왕조 태종이 한성에 천도한 후부터 본격화되었다. 그리하여 서울에서는 시전 외에 여러 곳의 특정 지역에서 일반 물화(物貨)와 미곡·우마(牛馬) 등의 교역을 위한 장시가 열렸다. 지방에 있어서는 특히 삼남(三南) 지방에서 기근과 재난이 장시 형성의 계기가 되었고, 여기에는 과중한 부세와 군역을 피하여 이농(離農)하는 농민들이 모여들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장시는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게다가 농본억상적(農本抑商的)인 사상도 작용하여 국가의 금압을 받았다.이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지방의 여러 소도시에서는 정기적인 장시가 개설되어 이 관행(慣行)은 법제화되었고, 지역마다 하나의 교역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강상
편집江商
서울의 상인. 한강을 끼고 경기·충청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왜·호 양란 이후 전국 각지에 사상(私商)이 일어나 상거래를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이들의 거래 무대와 지역에 따라 명칭을 각각 달리 하였다. 개성 상인들은 송상(松商), 의주 상인은 만상(灣商), 기타 행상들을 보부상(褓負商)이라 하였다.
보부상
편집褓負商
신라 이후 자연경제의 기반 위에 농업생산자·소가내수공업자(小家內手工業者)·시장상인 등과 소비자 사이의 물물교환을 매개하던 행상인·부보상(負褓商)이라고도 하며, 토기 같은 조잡한 일용잡화를 지고 다니던 부상(負商)과 장식품 등 세공품(細工品)을 팔러 다니던 보상(褓商)의 총칭이다. 적어도 부상만은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있었고, 고려 말기의 공양왕 시대에는 보부상을 시켜 소금을 운반한 기록이 있다. 보부상의 활동은 조선의 수립과 더불어 활발해지며 이성계의 건국에 많은 협력을 했던 것 같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행주산성(幸州山城)의 권율(權慄)에게 수천 명의 양식을 조달하였다. 또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청군(淸軍)에 포위되었을 때 포위망을 뚫고 양곡을 조달해 주었으며,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반란에는 의주의 허항(許沆)이 부상 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진압에 협력하였고,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에도 강화도에 군량을 운반해 주었다. 1894년(고종 31) 동학란(東學亂) 때 엄순영(嚴順榮)·송학헌(宋鶴憲)·최해승(崔海昇) 등이 동료 백여 명을 동원하여 동학도(東學徒) 토벌에 공을 세웠다. 보부상의 길드(gild)적 조직은 조선 초기부터 형성된 듯하며, 몇 개의 임방(任房)이 있었으나 그것은 후기에 더욱 조직화되어 1866년(고종 3) 보부청(褓負廳)을 설치하여 전국의 보부상을 통합했으며 이재면(李載冕)이 청무(廳戊)를 맡아보았다. 1883년(고종 20) 혜상공국(惠商工局)을 설치하고 보부청을 여기에 통합시켜 군국아문(軍國衙門)의 관할을 받게 하였다. 1885년(고종 22) 혜상공국은 상리국(商理局)으로 개칭하면서 부상을 좌단(左團), 보상을 우단(右團)이라 했다. 1899년(광무 3) 상리국의 좌·우단은 상무사(商務社)에 이속되고 좌단은 좌사(左社), 우단은 우사(右社)로 개칭하였다. 1898년(광무 2) 황국협회(皇國協會)는 보부상을 이용하여 독립협회(獨立協會) 분쇄에 전력하였다. 후에 상무사는 진흥회사(進興會社)로 개칭되어 보부상 활동을 확장시키켜 했으나 큰 효과를 얻지 못했다.
왜관
편집倭館
조선시대 일본인이 조선에 와서 통상(通商)하던 곳. 고려 말기 이후 조선 초기까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그 회유책으로써 삼포(三浦), 즉 웅천(熊川)의 내이포(乃而浦:薺浦)·동래(東萊)의 부산포(富山浦:釜山浦)·울산(蔚山)의 염포(鹽浦)를 열어서 일본인이 왕래하며 무역하는 것을 허가하고, 또 거기에 왜관을 두어 교역(交易)·접대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는 임신약조(壬申約條)를 맺고 왜관을 제포에만 두었다. 그러나 1541년(중종 36) 제포에서 조선이 관병(官兵)과 쓰시마인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 중앙에서는 이것을 이유로 제포에 거주하던 일본인을 모두 추방하고 왜관을 부산포로 옮겼다.이에 쓰시마주와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는 전과 같이 다시 설치해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이를 허락지 않았으며, 1678년(숙종 4)에는 부산에서 초량으로 왜관을 옮겼다. 왜관에는 주위에 성(城:倭城)을 쌓고, 그 안에 거류민·공청(公廳)·시장·상점·창고 등이 있었다. 초기부터 왜관을 중심으로 일본과 조선 상인 사이에 무역이 행하여졌는데 조선 상인으로서 금제품(金製品)을 파는 경우가 많아서 1429년(세종 11)에는 금·은·표피(豹皮)·동전(銅錢)·11새(升) 이상의 모시·베 등은 팔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무역을 감시하기 위해서 금란관(禁亂官)·녹사(綠事) 등을 두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점 제한을 더하고 되도록 일본인과의 개별적인 접촉에서 오는 불상사를 막으려고 여러 가지 법률을 만들었다. 『속대전(續大典)』 형전(刑典)에 의하면 왜관의 개시(開市) 때에는 훈도(訓導)·별차(別差)·수세산원(收稅算員)·개시감관(開市監官)·개시군관(軍官)이 입회하여 모든 물화(物貨)를 수검(搜檢)하기로 되어 전에 비해 관원이 많이 배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왜관에서 몰래 물건을 팔고 사거나 일본인에게서 뇌물을 받고 여자를 꾀어 몰래 들어가서 간음(姦淫)을 행하게 한 자와 일본인에게 빚을 지거나 일본인의 물건을 훔친 자는 모두 왜관 앞에서 목을 베며, 일본인이 가지고 온 물건을 포구(浦口)에서 몰래 사는 자는 장(杖) 100도(度), 도(徒) 3년 한다는 규정이 있었고, 이를 묵인 내지 붙잡지 못한 관원은 엄벌에 처하였다. 왜관의 개시(開市)는 동래부(東萊府)의 확증을 얻은 자만이 관헌의 감시 아래 매달 여섯 차례(5일장) 행하였는데, 동래 상인이 인삼(人蔘)으로써 왜은(倭銀)을 무역하여 이득을 많이 취하였으나 그 뒤 한말(韓末)에는 인삼의 산출량이 적고, 또 일본이 청(淸)과 무역케 되면서부터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소금·채소 따위만 매매되어 몹시 한산하였다.
조선 초의 화폐
편집朝鮮初-貨幣
조선초의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의 울타리 안에서 화폐 경제는 완만하게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효종 2년(1651)까지는 화폐주조가 별반 없었고 주로 마포(麻布)와 면포(綿布), 그리고 쌀 등 현물화폐가 거래되었다. 태종 1년(1401)에 하윤(河崙) 등에 의해 지폐인 저화(楮貨)를 발행하여 국폐(國幣)로 삼고 통용을 장려하였으나 일반 백성은 즐겨 사용하지 않고, 다만 녹봉(祿俸) 지불 등에 혼용되었기 때문에 경성 부근에만 통용되고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다. 세종 5년(1423)에는 조선통보(朝鮮通寶)라는 동전이, 그리고 세조 10년(1464)에는 전폐(箭幣)가 만들어졌으나, 이들은 대개 국가에서 수세(收稅)에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분계급
편집조선 사회의 신분계급은 학자에 따라 다르게 분류될 수가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양반(兩班)·중인(中人)·상인(常人)·천인(賤人)의 넷으로 대별(大別)되고 있다. 이와 같은 체제는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사회적인 전통 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서, 조선의 집권적인 정치체제의 확립 및 제도의 정비와 더불어 점점 굳어져 갔다. 즉, 조선의 신흥귀족(新興貴族)들은 고려의 귀족을 대신하여 지배계급으로 성장하면서 양반계급을 형성한 반면, 그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중인계급으로 남게 되었다.피지배계급으로는 여전히 상인·천인이 있었으며, 양반과 이들 사이에서 일정한 세습적인 직업을 가짐으로써 하나의 계층으로 고정된 중인이라는 특수한 신분계급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보면 같은 신분층에도 여러 가지 차등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계급과 계급의 한계를 짓는 데에도 모호한 경우가 많았다.양반이란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총칭하던 말로서, 이들은 농(農)·공(工)·상(商)에 종사하지 않고 유학만을 공부하여 과거를 거쳐 아무 제한없이 고급관직으로도 승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으며, 관료가 되면 토지와 녹봉(綠峰) 등을 국가에서 받게 되므로 지주계급(地主階級)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들 양반 가운데서 조선의 건국 이래 속출된 각종의 공신(功臣)들과 고급 관료들은 그들에게 여러 가지의 명목으로 지급된 광대한 토지를 점점 세습·사유함으로써 대지주가 되었으며, 이런 경제적인 기반을 토대로 삼아 권문세가(權門勢家)의 문벌을 이룬 양반도 생기게 되었다. 같은 양반이라도 문관은 무관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일반적인 요직은 물론, 군사 요직까지도 문관이 장관이 되면, 무관을 그 아래 두었던 일이 많았다. 양반의 서얼(庶孼) 출신자에게는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지 않았던 반면에, 무과에는 천인만 아니면 누구든지 응시할 자격을 준 결과 적서(嫡庶)의 차별과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앝잡아 보는 사회적인 인습이 만들어지게 되었다.한편 양반신분의 세습에 따른 그들의 수적(數的) 팽창은 한정된 국가 정치기구에의 참여를 둘러싸고서 서로 이권과 이념을 달리하는 파벌을 짓게 하여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이란 피비린내 나는 대립 항쟁을 일으키게도 하였다. 중인은 외국어(外國語:漢·蒙古·女眞·日本語)·의학(醫學)·천문학(天文學)·법률학 등 특수 기술을 배워 세습하였다. 중인과 양반의 서얼 출신자를 합하여 중서(中庶)라고 해서 양반 이외의 관료가 될 수 있는 계급이었지만, 법으로써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도록 제한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낮은 관직에 그치고 말았다. 중기 이후에 이들의 한품서용(限品敍用)에 대한 제한을 철폐하려는 기운이 싹트기도 하였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서얼들은 출세의 길이 막힌 것에 불만을 품고 서로 무리를 지어 반역이나 도둑의 주동자가 되기도 하여 사회의 여러 가지 파문을 던졌다.이들보다 하위(下位)의 신분층으로 이서(吏胥)·역리(驛吏)·군교(軍校) 등이 있었는데 말단(末端)의 행정·경찰사무를 담당하여 직접 평민들을 지배하는 실권을 쥐고 있어 사회적으로 하나의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상인은 농(農)·공(工)·상(商)에 종사하는 사람을 말하지만, 그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이들은 국가에 대하여 조세(租稅)·공부(貢賦)·군역(軍役) 등 각종의 의무를 부담한 데다가 지방관이나 향리 등의 착취대상이 되어 그 생활은 일반적으로 몹시 비참하였다. 이렇게 시달리는 생활 속에서 서로 단결하여 살길을 찾기 위한 움직임은 농촌 공동체를 만들게 하였으며, 상호부조를 목적한 여러 가지 계(契)가 조직되었다. 한편 말기로 내려오면서 더욱더 심해지던 관리들의 수탈에 대한 반항으로 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니 홍경래(洪景來)의 난, 철종 때의 민란, 동학혁명(東學革命) 등의 주체는 농민이었다. 공업·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노비(奴婢)가 거의 전부였다. 이들은 일종의 재산으로 간주되어 매매·상속 등의 대상이 되었다. 노비는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의 둘로 대별(大別)될 수 있었지만 이들 가운데에도 여러 계층이 있었다.이 밖에 창기(娼妓)·무당·광대 등도 천인에 속하였으며, 불교의 몰락과 함께 승려도 천인의 대우를 받았다. 천인 중에서도 가장 천대를 받은 신분층은 백정(白丁)으로서 이들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으며 특수부락(特殊部落)을 이루어 일반인과도 격리된 가운데서 도살(屠殺)·유기장(柳器匠) 등의 작업을 세습하며 살았다. 위에서 말한 네 가지의 신분계급을 바탕으로 조선 사회의 지배체제는 형성 유지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로 다소 변천이 생겨 평민이나 천인으로서도 전공(戰功) 또는 납속(納贖) 등의 수단을 통하여 당상(堂上)·당하(堂下)의 위계(位階)나 직명(職名)을 얻는 경우도 많았으나, 특전이란 군역을 면제받는 정도에 불과하였으며, 그것도 일신(一身)에만 한한다는 제약이 있었다. 이와같이 엄격한 신분체제는 1894년(고종 31)의 갑오경장 이후 신분계급의 타파가 제도화됨으로써 점차적으로 소멸되어 갔다.
호패법
편집號牌法
조선시대 때 16세 이상이 된 남자가 차고 다니던 패. 일명 호패(戶牌). 현재의 신분증명서와 같은 것으로 그 기원은 원(元)나라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는 1354년(고려 공민왕 3)에 이 제도를 모방, 수·육군정(水陸軍丁)에 한하여 실시하였으나 잘 시행이 되지 않고 조선시대에 와서 비로소 그 사용범위가 확대되어 전국적으로 호적법(戶籍法)이 보조역할로 시행되었다. 그 목적은 ① 호구(戶口)를 명백히 하여 민정(民丁)의 수를 파악하고 ② 직업·계급을 분명히 하여 ③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군역(軍役)·요역(요役)의 기준을 밝혀 백성의 유동과 호적편성상의 누락·허위를 방지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조선은 1413년(태종 13)부터 2년 간, 2차는 1459년(세조 5)부터 1470년(성종 1) 12월까지, 제3차는 1610년(광해군 2) 10월부터 1612년(광해군 4) 7월까지이며, 제4차는 1626년(인조 4) 3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제5차는 1675년(숙종 1) 11월 이후가 그것이다. 이같이 호패의 사용이 여러 번 중단된 것은 백성들이 호패를 받기만 하면 곧 호적과 군적에 올려지고 동시에 군정(軍丁)으로 뽑히거나 그 외의 국역(國役)을 져야 했으므로 되도록 이를 피하고자 한 까닭에 실제적으로 효과가 없었다. 특히 이를 계기로 일반 백성들은 국역을 피하기 위하여 양반의 노비로 들어가는 경향이 늘고 호패의 위조·교환 등 불법을 행하는 일이 증가하여 국가적 혼란이 격심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여 호패의 위조자는 극형, 호패를 차지 않는 자는 엄벌에 처하는 등의 법을 마련하는 한편 세조 때는 호패청을 두어 사무를 전담케 하였으며, 숙종 때에는 호패 대신 종이로 지패(紙牌)를 만들어 간직하기 쉽고 위조를 방지하는 등의 편리한 방법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책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별로 효과를 얻지 못하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데 불과하였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호패를 받은 사람은 전체 인구의 1-2할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패는 왕실·조관(朝官)으로부터 서민(庶民)·공사천(公私賤)에 이르키까지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사용하였는데 그 재료와 기재 내용은 신분에 따라 구별되었다. 태종 때의 규정에 의하면 그 모양은 길이 3치(寸) 7푼(分), 폭 1치 3푼, 두께 2푼으로 2품 이상은 관직·성명, 3품 이하의 조관·성중관(成衆官)·유음자제(有蔭子弟)는 관직·성명·거주지, 서인은 그 외에 얼굴빛·수염의 유무를 기재하고 5품 이하의 군관(軍官)은 소속부대·신장, 잡색인(雜色人)은 직역(職役)과 소속, 노비는 주인·연령·거주지·얼굴빛·신장·수염의 유무를 덧붙여 기록하였다. 호패는 서울은 한성부(漢城府), 지방은 관찰사(觀察使) 및 수령(守令)이 관할하고, 이정(里正)·통수(統首)·관령(管領)·감고(監考) 등이 실제사무를 담당하였는데 그 지급방법은 각자가 호패에 기재할 사항을 단자(單子)로 만들어 제출하면 2품 이상과 삼사(三司)의 관원에 한하여 관청에서 만들어 지급하며 기타는 각자가 만들어 관청에서 단자와 대조한 후에 낙인(烙印)하여 지급하였다. 『속대전(續大典)』의 규정에 의하면 호패를 차지 않는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적용하고, 이를 빌려 준 자는 장(杖) 1백에 3년 간 도형(徒刑)에 처하도록 하였으며 본인이 죽었을 경우에는 관가에 호패를 반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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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옥의 난
편집李澄玉-亂 단종 1년(1453) 이징옥이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부터 파직되자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 단종 1년(1453)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자 일찍이 김종서의 천거로 함길도 도절제사가 된 이징옥을 파면시키고 박호문(朴浩文)을 임명하였다. 이에 분개한 이징옥은 박호문을 죽인 후, 병마를 이끌고 종성(鍾城)으로 가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하고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서 반란을 일으켰다.그러나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징옥은 정종(鄭種) 등의 술책에 빠져 아들과 함께 사로잡혀 죽고 말았다. 이 반란 사건은 후일 이시애의 난을 유발케 하는 선구가 되었다.
이시애의 난
편집李施愛-亂 세조 13년(1467) 길주의 호족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 세조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에도 중앙의 관리를 많이 파견했다. 그리하여 함길도(咸吉道)에도 수령이 중앙에서 파견되어 본도인(本道人)의 반발이 있었는데, 때마침 조정에서 호패법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자유로운 이주가 불가능해졌다.세조 13년(1467) 5월 회령부사 이시애는 그의 본거지 길주(吉州)에서 군사를 일으켜 함길도의 수령을 함길도인으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함흥 이북의 주군(州郡)이 이에 호응하였으며, 각지 유향소(留鄕所)가 지도 세력을 이루었다. 그러나 반군은 정부군에게 대패(大敗)하고 이시애는 여진으로 도망하려다. 체포·참수되었다.
조선의 양인
편집朝鮮-良人
조선시대 노비가 아닌 사람은 모두 양인(良人)이라 불렀다. 양인은 공민권을 가졌고, 그 대가로 국가에 대하여 조세, 공납, 군역, 그리고 요역의 의무를 졌다. 양인은 법제적으로는 자유민이지만, 직업과 경제력의 차이에 따라서 복잡한 계층으로 구성되었다.양인의 최상층은 문무 관원으로서 양반(兩班) 혹은 사족(士族)이라고 불렸다. 지위가 높은 양반의 자손에게는 음서(蔭敍), 대가(代加) 등의 특권이 주어졌지만, 그것은 관직세습을 보장해 줄 만한 특권이 되지는 못하였다.따라서 높은 양반의 자손이라도 출세를 하려면 반드시 과거에 합격해야 했으므로 개인의 능력이 출세를 좌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시대의 양반은 특권적 세습신분이 아니라, 부단히 이동하는 지배계층에 지나지 않았다.양인 중에서 문무관원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잠재력이 가장 큰 것은 지방 중소지주층이었다. 그 중에서도 전제개혁에 의해 군전(軍田)을 받았던 이른바 한량층(혹은 品官으로 불림)의 출세빈도가 가장 높았다. 이들은 지방사회의 유지들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통제도 많이 받았지만, 학식과 경제력에서 일반 농민보다 우세하여 자연히 과거시험에서의 경쟁력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한량 다음으로 양반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은 것은 향리였다. 이들은 원래 지방사회의 뿌리 깊은 유력층으로서 고려시대에는 관직진출이 활발했던 계층이었다. 개국 후 중앙집권 정책의 걸림돌로서 집중적인 견제를 받아, 축재를 일삼는 향리를 ‘원악향리(元惡鄕吏)’로 규정하여 타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하고, 불법적으로 축재한 재산을 몰수하여 그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수령을 보좌하는 아전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스스로는 사족으로 자부하면서 학문에 힘써 유명한 관리와 학자를 적지 않게 배출하였다. 세종 때 예문제학을 지낸 윤상(尹祥) 같은 이는 향리출신 학자로 유명하다.양인 중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농업에 종사하는 일반 상민(常民)이다. 이들도 법제적으로는 공민으로서 교육과 벼슬의 자유가 있었고, 전제개혁에 의해 생활조건이 크게 개선되어 교육과 벼슬의 기회가 전보다 넓어졌다. 그들은 하급서리나 하급기술직, 혹은 무반으로서뿐만 아니라 재능만 있다면 과거에 합격하여 고관대작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그래서 ‘사(士)는 농(農)에서 나온다’든가 ‘사(士)와 농(農)은 조정에서 벼슬한다’는 말이 식자들 사이에 오르내렸다.농민 중에서도 병작농이나 1
2결 정도의 작은 토지를 가진 소농들은 법적으로 공민권을 가졌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권리를 행사하기가 어려웠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양인 중에서 장인(匠人)과 상인(商人)은 과거 응시에 필요한 인문교양을 쌓을 기회가 농민보다도 훨씬 적었다. 더욱이 자급자족의 농업사회에서 수공업과 상업은 말업(末業)으로 인식되어 노비와 함께 공상천예(工商踐隸)로 합칭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유외잡직(流外雜織)이라는 하급 기술직에 나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장인과 상인은 직업을 세습하도록 강제된 것은 아니었다.양인의 최하층을 구성하는 것은 이른바 신량역천(身良役賤)층이었다. 여기에는 조졸(뱃사공), 수능군(묘지기), 생선간(어부), 목자간(목축인), 봉화간(봉화 올리는 사람), 철간(광부), 염간(소금 굽는 사람), 화적(도살꾼), 재인(광대) 등이 속했다. 이들은 일정기간 국역을 지면 양인으로서의 공민권을 가질 수 있게 되어 있는 일종의 조건부 양인이었다. 이들의 수효는 그리 많지 않으며, 실제로 15세기 말에는 대부분 양인으로 되었다.이 밖에 조선시대에는 서얼(庶孼)이라는 특수계층이 있었다. 정실부인이 아닌 첩의 소생을 서얼이라고 하는데, 대개 양녀(良女)보다는 여자종이 첩으로 되는 일이 많아 그 소생을 차별대우하게 된 것이다.그러나, 조선초기에는 서얼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얼출신 중에 개국공신과 고관들이 꽤 많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정치적 반대세력으로부터 신분상의 문제로 곤경에 처하는 경우가 많아 원한을 품고 서로 충돌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정도전 일파가 서얼왕자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가 정실 소생의 이방원에게 화를 입은 것도 적자와 서얼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서얼세력을 제거한 태종이 즉위하면서 서얼의 출세를 제한해야 한다는 논의가 고개를 들었지만, 실제로 15세기에는 서얼이 과거에 합격하여 고관이 된 사례는 허다했다. 그러나 서얼차대는 결국 『경국대전』에 법제화되기에 이르렀다. 문과(文科)와 생진과(生進科)의 응시를 금지하고, 무과(武科)와 전문 기술관을 뽑는 잡과(雜科)의 응시를 허용하였으며, 최고 3품까지만 승진할 수 있게 하였다.이와 같이 서얼은 출세에 제한이 생겨 점차 문반으로 나가는 부류와는 구별되는 별개의 신분으로 굳어져 갔으며, 조선후기에는 중인(中人)과 비슷한 계층으로 취급되어 이른바 중서(中庶)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그렇지만 서얼 중에는 우수한 학자와 문인이 다수 배출되어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의 노비
편집朝鮮-奴婢
조선의 사회 계급 중 천민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노비였다. 노비에는 국가기관에 속해 있는 공노비(公奴碑)와 개인에게 속해 있는 사노비(私奴碑)가 있었다. 이들 노비 중에는 외거노비(外居奴婢)와 같이 독립된 호(戶)를 이루고 일정한 신공(身貢)을 바치는 자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신분상으로 천민이었지만 일반 양인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노비 제도는 고종 23년(1886) 노비의 세습을 금하여 부분적인 개혁을 진행한 이래 갑오개혁 때 공사노비제를 전부 없애고 인신 매매를 금지함으로써 형식상 사라졌다.
조선의 백정
편집朝鮮-白丁
사천(私賤)의 하나. 일명 재우군(宰牛軍). 호적(戶籍)에서 제외된 천민계급으로 가축류의 도살을 주업으로 하는 한편 부업으로 고리를 제작하였다. 백정이란 명칭은 원래 수(隨)나라에서는 백성을 일컫던 말로서 고려에 전래되었을 당시는 그대로 백성를 가리키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에서는 백정에 대하여 일정한 직업도, 일정한 토지도 주지 않았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군호(軍戶)에도 편입시켰고, 또 역정(驛丁)에도 보충하여 이들에 대해선만은 일정한 토지를 주기도 하였으므로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천인이라 하더라도 가장 우대받는 편이었다. 그런데 고려 사회에는 북방민족의 귀화인으로서 일반 민중과 융합되지 못하고 방랑 생활을 하며 특수 부락을 형성하고 있는 족속이 있어서 이들은 양수척(陽水尺)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였는데 이들 양수척은 왜구를 가장하고 민가 및 관청에 침입하여 노략질해 가는 일이 많아 일반 민중의 원성이 높았다. 조선에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이들을 매우 엄격히 감독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 대부분이 도살업(屠殺業)을 생업으로 삼게 되었고, 기타 광대·고리 제조 등을 하며 살아갔다. 1425년(세종 7) 세종은 양수척을 평민으로 대우해 주기 위하여 백정에 편입시켰고, 일반 민중은 이들은 신백정(新白丁)이라 하였으나 종래 평민 중에서 약간 천인 축에 있던 백정보다는 양수척으로 백정에 편입된 신백정이 사회적으로 폐단이 될 많은 문제를 일으켰으므로 이후 백정이란 명칭은 신백정을 가리키는 말로 변질되었다. 그 동안 백정은 각 지방으로 흩어져 무질서한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하면 매해 그 실태를 조사하여 이들을 서울과 각 지방에 골고루 배치하여 그들의 명부를 작성하고 생활을 엄격히 감독케 하였다 한다. 이들은 천인으로서 국가에 대한 여러 가지 부담이 없었으므로 평민 가운데 생활이 곤란해지면 백정으로 들어가는 자의 수가 해마다 증가하여 백정의 수는 날로 증가하였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백정의 수가 7,538호, 33,712명이었다 하나 실제의 수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백정은 갑오경장(甲午更張)을 계기로 제도상으로는 신분적 평등권을 얻었으나 오랫동안의 습관은 간단하게 버려지지 않아 여전히 차별을 받아 오던 중, 그들 자체의 자각이 싹터 1923년 5월에는 경상도 진주에 그들의 결사(結社)인 형평사(衡平社)를 조직하고 자기들의 사회적인 신분 향상을 요구하는 한편 직업의 자유를 외친 일이 있다.
가족제도
편집家族制度
조선 사회의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으로서, 이 가족을 중심으로 조선의 사회는 형성 운영되어 왔다. 조선조의 가부장적 가족제도는 정교(政敎)의 근본 이념으로 채택된 유교로써 더욱 엄격하게 통제되었으며, 모든 생활의 규범과 의식은 유교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강요당하였다.조선시대 가장의 권리는 고려 때보다도 더욱 강화되어서, 가령 자손·처첩(妻妾)·노비(奴婢)가 모반(謀反)·반역(反逆) 이외의 죄상(罪狀)으로 부모나 가장을 관청에 고소하는 자는 오히려 극형을 받기로 되어 있었으며, 인조(仁祖) 때에는 심지어 가장의 반역 음모를 고발하였다가 인륜을 해치는 죄도 반역죄에 못지 않게 무겁다 하여 먼저 사형시킨 일까지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반역죄와 동등하게 강상죄(綱常罪)에 대해서도 이를 엄중하게 다루었다함은 이미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이와 반대로 존장(尊長)에 대한 절대 복종과 희생정신에서 우러나오는 효행이나 정렬(貞烈)은 국가에서 크게 장려하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그 권위(權威)를 국가에서 보증을 받는 가장은 안으로는 조상의 제사를 주재(主宰)하는 한편, 가정의 관리, 가족의 부양(扶養), 분가(分家) 또는 입양(立養), 자녀의 혼인·교육·징계·매매(賣買) 등에 관한 전권(全權)을 가지고 가족성원을 통솔하였으며, 밖으로는 민간의 계약(契約)은 가장의 서명(署名) 없이는 성립될 수 없었고, 관청에서도 가장을 상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또한 조선시대 가족제도의 특징은 종족을 하나의 단위로, 대가족제도를 형성하여 상부상조(相扶相助)한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동족간(同族間)의 결합이 촉진되어 족보(族譜)가 생겼으며, 이로 말미암아 동족에 대한 관념이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사회에서는 엄격한 족외혼(族外婚)이 행하여졌으며, 『속대전(續大典)』에서는 동성동본(同性同本)은 물론이요, 동성이본(同姓異本)도 서로 혼인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혼인은 남녀 모두 조혼(早婚)이 특징이어서 법적으로 남자는 15세, 여자는 14세 이상이면 혼인 할 수 있었으며, 특별한 경우에는 12세만 되어도 혼인이 허가되었다. 혼인에도 남존여비의 관념이 철저하여서 남자는 아내가 죽은 뒤에 얼마든지 다시 혼인하여도 무방하였지만, 여자의 경우는 제약이 심하여 성종 때부터는 재가(再嫁)를 원칙적으로 금하였으며 재가한 여자의 자손은 문무관(文武官)에 임명되지 못하였고,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다.혼인 관계 이외에도 여자의 사회적 지위는 아주 미약하여 여자로서의 법률적 행위는 반드시 남편이나 가장의 허가가 있어야 되었으며, 교제나 외출도 엄격히 제한되어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이 아니면, 남자와 대면(對面)하지 못하였고, 외출해야 될 때에는 상류계급에서는 너울을 쓰고 하류계급이라도 장옷·건모 등을 써서 얼굴을 가리게 하였다. 그리고 조선 사회에서처럼 적(嫡)·서(庶)의 차별을 가혹하게 한 사회는 역사상 없었다. 일부다처(一夫多妻)를 공인하면서도 첩(妾)의 소생을 차별대우하게 된 것은 태종 때에 만들어진 서얼금고법(庶?禁錮法)에서 시작되었다. 또 같은 첩자(妾子)라도 양첩자(良妾子)·천첩자(賤妾子)의 구별에 따라 신분·재산상속 등에 차등이 있었다.사람이 죽으면 신분의 높고 낮음과 촌수의 가깝고 먼 것에 따라 복상(服喪)의 기간을 다섯으로 나누는 오복제도(五服制度)가 시행되었다. 제사에 있어서는 고려 때에는 불교적 의식이 유행하였으나 고려 말기의 주자학(朱子學)의 전래와 함께 가묘(家廟)의 제도가 생기게 되었으며, 조선 중종 때 조광조(趙光組)가 정권을 잡은 뒤에는 그 보급에 힘써 사대부(士大夫) 집안에는 모두 가묘가 세워졌다 한다. 가족 제도의 핵심이 되는 관혼상제(冠婚喪祭) 등의 예제(禮制)는 이미 고려 말기에 주자(朱子)의 가례가 기준이 되어 다소 보급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주자학이 숭상됨에 따라 가례도 처음에는 사대부들 사이에서만 성행하였으나, 뒤에 점점 유교적인 윤리관념이 보편화되자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쳐 가족제도의 변천을 초래한 점도 많았다.
유학
편집儒學
태조(太祖)를 도와 조선의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정도전(鄭道傳)·조순(趙俊) 등은 모두 주자학(朱子學)의 신봉자들로서 이들은 유학적(儒學的)인 이상을 새 왕조에 실현시켜 보려고 정교(政敎)의 지도이념으로 유교를 채택하는 동시 불교를 맹렬히 배출시켰다. 조선에서는 임금의 진강(進講)을 비롯하여, 성균관·사학(四學)·향교(鄕校) 등의 교육기관이나 과거 등에도 그 과목이 채택되어 나라의 정치는 유교정치와 같이 되기에 이르렀다.한편 새 왕조에 벼슬하지 않고 절의(節義)를 지킨 길재(吉再) 등은 산림(山林)에 묻혀 제자들이 교육과 주자학의 연구에 힘써 이들 사이에서 주자학은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길재의 문하에서 배운 김숙자(金淑滋)·김종직(金宗直) 및 그 뒤를 이어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의 신진사류들도 세종 때부터 차츰 관계(官界)에 오르게 되었으며, 또한 세종 때에 설치된 집현전(集賢殿)을 통하여 훌륭한 유학자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던 중 세조의 찬위(簒位)를 계기로 유학자는 지방·사상·처세(處世)상의 여러 가지 이류로서 훈구파(勳舊派)·절의파(節義派)·청담파(淸談派)·사림파(士林派)의 넷으로 크게 갈라졌다. 훈구파는 건국 초기부터 조정에 기반을 가지고 계속 정권을 잡아오던 학자였던 데 대하여 절의파나 청담파는 절의를 지키거나 청담(淸談)만을 일삼아 현실의 정권에서는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훈구파의 대립적인 세력을 이룬 것은 사림파였다.사림파는 처음에 훈구파와 불화가 생겨 여러 번 박해를 받았으나 뒤에는 계속해서 요직에 등용되어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한편 정통적인 주자학을 계승하면서 조선시대 유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중종 때에 김굉필(金宏弼)의 학통을 이은 조광조(趙光祖)는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이상적인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해 보기 위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를 표방하고 유교적 교화사업을 여러 방면으로 크게 일으킨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학풍(學風)은 문자(文字)·훈고(訓?)를 주로 하였다. 그러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말미암아 조광조 이하 많은 사류(士類)들이 사형 혹은 축출당하자 나머지 사류들은 정계(政界)에 나아갈 생각을 버리고 학문에만 열중하는 풍조가 일어나 학문의 경향도 사색과 이론의 방면으로 일변하여 주자학의 우주론(宇宙論)·심리설(心理說) 등이 깊이 연구되었다. 이 학풍의 선구를 이룬 학자는 서경덕(徐敬德)과 이언적(李彦迪)이었으나, 이들의 뒤를 이어 나타난 명종·선조 때의 이황(李滉)·이이(李珥)는 특히 뛰어나서 우리나라 유학사(儒學史)상 대표적인 학자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뒤로는 당파싸움과 결부됨으로써 학문에 대한 연구는 활발치 못하였으며 더욱이 주자학이 융성함에 따라 대두된 예론(禮論)은 시끄러운 복제문제(服制問題)를 야기시켜 당쟁에 이용되기도 하였다.조선시대 유학은 배타적이어서 중국에서 성행하던 양명학(陽明學)은 조선에서는 이단시(異端視)되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주자학파라도 주자와 경주(經註)에 반대하여 심한 비난을 받았으며, 학설의 상위(相違)는 당쟁(黨爭)을 유발시켜 정치·사회면에도 깊이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가 후기에 이르러서야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과 서양문물 등에 대한 지식을 얻어 공헌할 수 있는 학문인 실학(實學)이 일어났는데, 유형원(柳馨遠)·이익(李益)·정약용(丁若鏞) 등, 이 방면에 뛰어난 학자들이 나와 새로운 학풍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주자학의 테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한편 한말(韓末)의 최익현(崔益鉉) 같은 유학자들은 주자학의 명분론(名分論) 등을 내세워 항일운동을 실천에 옮긴 일도 있었다. 유학을 국교(國敎)처럼 숭상하던 조선에서는 유학사상을 사회에 널리 보급하기에도 힘썼다. 고려 말기에 주자학과 같이 전래된 주자의 가례(家禮)·가묘(家廟) 등의 보급이 양반층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도 유교적인 윤리관념을 일반화시키는 데에 크게 작용하였다. 또 그 윤리 도덕을 구체적으로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의 사적(事蹟)을 편찬했으며, 지방관들도 그 교화에 힘썼다. 이렇게 하여 유학이 조선사회에 끼친 공적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가족제도와 계급사상을 엄격히하였으며 형식적인 예절과 사대주의 사상을 낳게 하고, 상공업·예술 등을 천시케 하는 등 폐단이 많았다.
종교·신앙
편집宗敎·信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종교로서 역시 불교를 들 수 있다. 조선에서는 처음부터 불교를 배격하고 유교를 숭상하였으나 오랜 기간에 걸쳐 번성하였던 불교 중심의 문화가 일시에 거세(去勢)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고려 이래로 불교의 폐단이 많았음은 사실이어서, 태조 때부터 이에 대한 개혁에 착수하였다. 태종은 시종일관 불교 탄압정책을 써서 태조 때 제정한 도첩제(度牒制)를 더욱 엄하게 하고 전국의 사원(寺院)을 정비하여 242개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버리는 동시에 거기에 딸려 있던 토지와 노비는 모두 국가에서 몰수하였다. 고려 이후 전해오던 국사(國師)·왕사(王師)의 제도를 폐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여 불교는 큰 타격을 받았다. 뒤이어 세종도 처음에는 억불(抑佛)정책을 썼는데, 특히 불교의 7종파를 선(禪)·교(敎) 양종(兩宗)으로 통합하는 한편 전국에서 선종·교종에 각각 18본산(本山), 도합 36본산만을 인정하였으며, 서울 안에 있던 흥천사(興天寺)의 흥덕사(興德寺)를 각각 선·교의 대본산(大本山)으로 삼았다.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무학(無學:太祖의 王師)을 비롯하여 많은 명승(名僧)들이 배출되었다. 세종은 만년(晩年)에 불교를 믿게 되었으며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죽은 뒤에는 경북궁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기까지 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유신(儒臣)들에 의해 척불(斥佛)의 소리가 높았으나 왕실에서는 불교를 독실히 믿었으며, 훈민정음이 반포된 뒤에는 불경의 언해(諺解)가 시작되었다. 세조는 불교를 독실히 믿어 처음부터 사원 및 승려의 보호에 힘썼으며, 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각종의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해 내는 등, 조선시대 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었다.그러나 성종이 즉위하여서는 이내 억불정책을 써서 도첩(度牒)을 발급(發給)하지 않고 승려들의 환속(還俗)을 장려한 일도 있었다. 연산군 때에는 더욱 심하여, 선·교 양종의 대본산인 흥천사·흥덕사의 철폐와 동시에 승과(僧科)·법계(法階) 등 불교에 관한 관제가 일체 없어짐으로써 국가와의 관계가 단절된 사적(私的)인 단체로서 남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선·교 양종의 존재 의의도 없어지고 따라서 종파(宗派)도 제대로 구분될 수 없었다. 명종 때에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섭정(攝政)을 하면서 보우(普雨)라는 중을 등용하고 양종을 부흥하며 승과와 도첩제를 다시 실시하여 한때 교세(敎勢)가 크게 확장되었으나 문정대비가 죽자, 곧 양종·승과·도첩제는 모두 폐지되고 보우는 장살(杖殺)되매 불교는 다시 쇠퇴하였다. 그러다가 선조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휴정(休廷:西山大師)·유정(惟靜)·영규(靈圭)·처영(處英) 등이 승병(僧兵)을 이끌고 나라를 위해 일본군과 싸움으로써 그에 대한 보답으로 교세를 만회할 기회를 얻었다.한편 휴정은 선·교 양종은 조계종(曹溪宗)의 단일종(單一宗)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유정·언기(彦機)·태능(太能) 등의 고제(高弟)를 비롯하여 우수한 승려들이 많이 나와서 제각기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불교가 배척되던 조선사회에서는 승려들도 천인(賤人)과 같은 대우를 받았으나, 일반 백성들 중에는 국가 정책과 별 관계없이 여전히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편 고려 후기부터 국가적인 보호를 받아 관제(官制)에까지 편입된 도교(道敎)에 대한 신앙은 조선에도 계승되어 소격서(昭格署)를 두고 치제(致祭)하게 하였으나 중종 때 조광조 등에 의해 소격서가 폐지된 적도 있었다. 조광조가 죽은 뒤 이 관청은 다시 설치되었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다시 폐지되고 말았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도교 계통의 신앙이 전해졌으며, 또 임진왜란 때 조선에 나왔던 명군(明君)에 의해 공왕숭배(關王崇拜)의 신앙이 들어와서 경향각지에 관왕묘(關王廟)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옛날부터 민간신앙이던 샤머니즘과 고려 이래의 풍수설(風水說), 『정감록(鄭鑑錄)』 등의 참위사상(讖緯思想)이 민간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천주교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단편적으로 소개되다가 정조 때 이승훈(李承薰)이 중국 북경에서 세례(洗禮)를 받고 돌아와 전도함으로써 널리 전파되긴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유교의 윤리·도덕과는 맞지 않은 점이 많아서 순조·고종에 걸쳐 여러 번 박해을 당하였다. 그러다가 한말에 종래의 쇄국정책을 버리고 문호를 개방하자 기독교도 공인되어 이와 관련된 사업이 활발히 추진됨으로써 신자의 수가 더욱 증가되는 동시 우리나라의 개화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철종 때에는 이 천주교에 대립하여 최제우(崔濟遇)가 종래의 천신사상(天神思想)에다가 유(儒)·불(佛)·선(仙) 등의 삼교(三敎)와 풍수사상을 응용하여 동학(東學)을 개창(開倉)한 뒤에 이 역시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점차 민간에 전파되어 하나의 큰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고종 때에는 동학혁명까지 일으키게 되었다. 뒤에 동학은 천도교(天道敎)·시천교(侍天敎)·상제교(上帝敎) 등으로 갈렸으며 이
밖에도 동학계통의 유사종교가 속출하여 농촌 사회에 널리 유포되었다.
과학·기술
편집科學·技術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 역사를 통하여 문화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은 무엇보다도 먼저 세종대왕에 의한 훈민정음의 제정이었다. 이것은 조선시대 언어학 분야의 가장 큰 수확으로서, 민족의식의 대두와 문자의 실용성(實用性)에 착안하여 한자에서 음절 단위의 원리를 채용함과 동시에 알파벳 문자에서 단음요소(單音要素)의 원리를 채택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를 만든 것은 한자에의 무조건 맹종(盲從)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과학적인 문자의 하나로서 민족문화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이 문자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석보상절(釋譜詳節)」·「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등을 지어 간행했으며, 그 뒤에는 여러 가지 불경과 두보(杜甫)의 시 등이 우리말로 번역되었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실학사상 이 보급되면서부터는 신경준(申景濬)·황윤석(黃胤錫)·유희(柳僖) 등의 학자가 나와 이 방면에 깊은 연구업적을 남겼다.다음으로 왕권이 안정됨에 따라 각종 서적의 편찬사업이 활발히 일어났다. 우선 역사는 정치의 귀감(龜鑑)으로서, 지지(地誌)는 정치의 자료로서 절대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초기부터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사서(史書)로서는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 전조(前朝)의 역사와 한편으로는 조선 역대왕의 실록이 대대로 편찬, 보관되었다. 세조 때부터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이 편찬되어 그 뒤에도 계속되었으며, 성종 때에는 중국의 『자치통감(自治痛鑑)』을 본받아 『동국통감(東國通鑑』이 만들어졌다. 지지(地誌)로는 세종 때의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등이 편찬되었다. 또한 주목할 것은 법전(法典)의 편찬이었다. 조선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그 편찬에 착수하여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 『경제육전(經濟六典)』 『육전등록(六典謄錄)』 등의 뒤를 이어 이른바 만세성법(萬世成法)으로서 이들을 종합적으로 재편성하여 이루어진 것이 성종 때의 『경국대전(經國大典)』이었다.그러나 그 뒤 시대의 변천에 따라 부분적인 개혁이 있었으므로 영조 때의 『속대전(續大典)』 정조 때의 『대전통편(大典通編)』 고종 때의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의 편찬을 보게 되었다. 이 밖에 초기에 편찬된 것으로서 세종 때의 『농사직설(農事直設)』 『사시찬요(四時纂要)』 『의방유취(醫方類聚)』 세조 때의 『삼강행실(三綱行實)』 성종 때의 『동문선(東文選)』 『악학궤범(樂學軌範)』 『국조오례서례(國祖五禮書例)』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이 있으며 후기에 편찬된 것으로서 영조 때의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 『속오례의(續五禮儀)』 『국조악장(國朝樂章)』 『문헌비고(文獻備考)』 정조 때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존주휘편(尊周彙編)』 『규장전운(奎章全韻)』 『전운옥편(全韻玉編)』 『동문휘고(同文彙考)』 『추관지(秋官志)』 순조 때의 『만기요람(萬機要覽)』 등이 있다. 정조는 궐내(闕內)에 규장각(奎章閣)을 두고 재주 있는 문사를 뽑아 학문의 연구와 서적편찬에 종사케 하였으며, 『홍재전서(弘齋全書)』라는 자신의 문집을 남기는 한편 『대학유의(大學類義)』 『주서백선(朱書百選)』 『오경백선(五經百選)』 등 왕이 친히 편찬한 것도 있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편찬사업이 초기의 왕권확립기와 영정조 시대의 문예부흥기에 집중된 것은 이 시기가 조선 일대를 통하여 민족문화의 전성시대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편 서적의 편찬사업은 활자의 개량과 인쇄술의 발달을 크게 자극시켜 많은 기술의 진전이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는 농업사회었으므로 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천문(天文)·기상(氣象)·역법(曆法)을 중심한 자연과학 분야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여 이 방면에서도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특히 세종은 과학에 조예가 깊어 측우기(測雨器)·대소간의(大小簡儀:天文觀測器)·혼천의(渾天儀:天球儀)·앙부일영(?釜日影:해시계)·자격루(自擊漏:물시계) 등을 발명 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측우기의 발명은 세계에서 가장 앞선 것이었다. 그 뒤 세조는 지리(地理) 측량기인 규형(窺衡)·인지의(印地儀)를 친히 만들기도 하였다.조선에서는 의학도 많은 발전이 있었는데, 이 방면의 성과 중에서 특히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 『동의보감(東醫寶鑑)』 등은 조선시대 의학의 우수한 수준을 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명저(名著)들이었으며, 이와 동시에 유명한 의사·의학자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해서는 일반적으로 문화가 침체되어 있었으나, 이 가운데서도 무기의 발달을 보게 되어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화차(火車)·거북선 등이 만들어졌으며, 한편으로는 일본군의 무기인 조총(鳥銃)과 명군(明軍)의 불랑기(佛狼機)라는 서양식 대포도 모조(模造)하여 그것을 사용하는 데도 상당한 기술의 향상이 있었다. 특히 거북선은 초기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보이나 실제 전투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 것은 이순신(李舜臣)이 임진왜란 직전에 완성한 거북선으로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 일컫고 있다.17세기에 이르러서는 당시 중국에 들어온 서양문물이 연경(燕京)에 보내던 사신 등에 의하여 간접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즉 선조 말년에 명나라에 갔던 사신이 구라파의 지도를 가져와서 처음으로 서양 여러 나라의 지리를 알게 되었으며, 1631년(인조 9)에는 정두원(鄭斗源)이 명나라에 갔다가 서양식 화포(火砲)·천리경(千里鏡)·자명종(自鳴鐘)과 서양의 과학서적 등을 가지고 돌아왔고, 1653년(효종 4)에는 처음으로 청(淸)의 시헌력(時憲曆), 즉 서양의 역법(曆法)에 의한 태양력(太陽曆)을 우리나라에서도 시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서양문물의 수입은 학계에도 큰 영향을 끼쳐 새로운 학풍을 고취하였다. 이익(李益)·안정복(安鼎福)·정약용(鄭若鏞) 등이 이 방면의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으나 얼마 가지 않아 이러한 학풍은 주자학의 끊임없는 사상통제(思想統制)에 의하여 성장하지 못하였다.
문학
편집文學
조선시대의 문학은 우리나라 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세종대왕에 의해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된 뒤로는 문학에도 획기적인 변천을 가져와서 종래에는 한문 내지는 이두(吏讀)로만 표현되었던 문학에서 점차로 그 내용과 형식을 갖춘 진정한 국문학이 성장할 터전이 마련되었다.그러나 오랜 기간을 통하여 한자 사용에 익숙해졌으며 또 모화사상(慕華思想)에 깊이 젖은 당시의 지식층은 여전히 한문학을 존중하여 국문학과 한문학은 조선 후기까지 나란히 이어 내려오게 되었다.먼저 국문학 계통으로는, 조선 초기에 건국의 창업을 찬양한 노래로서 정도전(鄭道傳)의 「신도가(新都歌)」, 권근(權近)의 「상대별곡(霜臺別曲)」, 변계량(卞季良)의 「화산별곡(華山別曲)」 등과 세종 때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가 있으며, 또한 고려 때 발생한 시조 문학은 조선에 들어와서 크게 발전되어 국문학의 수준을 향상시켰다. 작가층은 광범위하여 국왕에서 일반 평민·기녀(妓女)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그들의 생활이나 정서, 또는 당시의 세태를 절실히 묘사해 낼 수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와 같이해서 발표된 작품들을 수록하기 위해 『청구영언(靑丘永言)』 『해동가요(海東歌謠)』 『가곡원류(歌曲源流)』 등의 시조집이 편집 간행되었는데, 시조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윤선도(尹善道)·정철(鄭撤)·황진이(黃眞伊)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성종 때 정극인(丁克仁)이 지은 『상춘곡(賞春曲)』이 그 최초의 작품이며, 선조 때 정철(鄭撤)에 의해 크게 발전되어 말엽까지 많은 작가와 작품을 내었다.소설은 고려 이래의 패관문학(稗官文學)에서 발달하여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초기에 김시습(金時習)의 명나라 구우(瞿佑)의
「전등신화(剪燈神話)」를 모방하여 지었다는 「금오신화(金鰲神話)」는 한문으로 쓰여졌긴 하지만 우리나라 소설문학의 선구가 되었다. 그 뒤 광해군 때에 허균(許均)이 당시의 사회 상태를 묘사한 『홍길동전(洪吉童傳)』을 발표함으로써 조선의 소설문학은 어느 정도 확립되는 감을 주었으며, 숙종 때 김만중(金萬重)의 『구운몽(九雲夢)』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소설문학의 수준을 한층 더 높인 작품들이었다. 특히 김만중은 국문학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제 나라 글로 쓴 작품이 아니면 참다운 문학이 될 수 없다는 작가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뒤를 이어 영조·정조시대를 중심으로 평민문학이 대두되면서 소설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루어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 『심청전(沈淸傳)』 『흥부전(興夫傳)』 『춘향전(春香傳)』 등을 비롯하여 무수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그러나 한말에는 갑오경장 이후의 개화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고대 소설 대신에 신소설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대개가 계몽적인 내용으로 쓰여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인직(李人稙)·이해조(李海朝) 등은 그 대표적인 작가였다. 한편 한문학은 조선 이전부터 이미 난숙하였는데,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번성하여 많은 작품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호질(虎叱)』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등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일련의 작품들은 당시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여지없이 풍자 폭로한 것으로 귀중한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술
편집藝術
검소한 것을 미덕으로 삼고, 형식적인 예절을 숭상하는 유교사상은 인간의 정열과 패기를 억누르고 정서를 메마르게 하였으므로, 조선조 예술에서는 섬세하고 화려한 점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회화(繪畵)·음악·공예 등의 예술 분야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도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여 이런 환경 속에서 예술이 크게 발달될 수는 없었다.조선시대 예술의 특색은 소박하고 순진스러움에 있으며, 이런 점이 오히려 청신한 맛을 풍겨 사람에게 친근감을 줄 때도 많다. 건축은 초기부터 새 수도의 건설사업에 의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 궁전으로서 훌륭한 것이 많았으나 임진왜란 때에 거의 불타 없어지고,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는 창덕궁·돈화문·창경궁의 홍화문·명정문 등이 있다. 성문으로는 서울의 숭례문·흥인지문·개성의 남대문, 평양의 보통문(普通門) 등이 건축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 밖에도 강릉의 객사대문(客舍大門), 안변의 가학루(駕鶴樓), 고령(高靈)의 가야관(伽倻館)과 석왕사(釋王寺)의 호지문(護持門), 성불사(成佛寺)의 극락전(極樂殿)·응진전(應眞殿), 청평사(淸平寺)의 극락전, 장안사(長安寺)의 사성전(四聖殿) 등은 조선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독특한 목조 건물이다. 석탑으로는 원각사의 대리석다층탑(大理石多層塔), 낙산사의 칠층석탑, 신륵사의 칠층석탑이 있으며, 한편 불상도 우수한 것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신덕사의 관음좌상(觀音坐像:銅造), 해인사의 비로자나불좌상, 낙산사의 관음좌상(觀音坐像:銅造) 등은 그 수법이 뛰어나다.회화(繪畵)는 중앙에 도화서(圖畵署)를 두고 화원(畵員)을 길러서 조정이나 중신들의 필요에 따라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조선 초기 세종 때에 활약한 대가(大家)로는 안견(安堅)·최경(崔逕)·강희안(姜希顔)을 들 수 있는데, 이 중에서도 안견은 특히 산수(山水)에 능하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라는 명작을 남겼으며, 후기까지도 그의 화풍을 따르는 화가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뒤로 이상좌(李上佐)·이암(李巖)·신사임당(申師任堂) 등이 나와 명성을 얻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자 한때 화단(畵壇)도 침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하여 숙종·영조 때 정선은 우리나라의 산수(山水)를 잘 그려 동방산수화(東方山水畵)의 조종(祖宗)이 되었다. 또 영·정조 시대에 들어서자 차츰 서민의식이 대두되고 화풍도 변하여서 초기의 귀족 중심에서 일반 민중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풍속화가 많이 나왔으며, 이 방면에서 활약한 화가로는 김홍도(金弘道:檀園)와 신윤복(申潤福:蕙園)을 들 수 있다.이 밖에도 이인문(李寅文)·변상벽(卞相壁)·남계우(南啓宇)·안해사(安海士)·장승업(長承業) 등의 화가가 속출하여 모두다 일가(一家)를 이루었는데, 그 중에서도 장승업은 고종 때의 화가로서 뛰어난 재능이 있어, 안견·김홍도와 함께 조선 3대가(大家)로 손꼽히고 있다. 서예로는 조선 전기에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銶:白帆)·양사언(楊士彦:逢萊)·한호(韓護:石峯) 등이 각각 명성을 드러냈으며, 후기에는 특히 김정희(金正喜:秋史·院堂)가 나타나 추사체(秋史體), 또는 원당체(院堂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창작하여 국내는 물론 중국 학자들에게서 절찬을 받았다. 공예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성격을 나타내는 석공(石工)·와공(瓦工)·목공(木工)·죽공(竹工)·도자기(陶瓷器·나전(螺鈿:자개) 등이 많았는데, 대개 양반층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사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도자기의 제조술은 상당히 발달하여 분청사기(粉靑沙器)·백자(白瓷) 등의 질적인 향상을 보았다. 특히 중앙에서는 초기부터 광주(廣州)에다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을 두고 우수한 제품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분원자기(分院瓷器)라는 명칭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음악은 궁정 중심의 아악과 함께 속악(俗樂)도 상당히 발달되었다. 세종 때에는 박연(朴堧)을 시켜 아악을 정리한 일이 있으며, 성종 때에는 성현(成俔)·유자광(柳子光) 등이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연산군이 방탕한 생활을 하는 동안 아악 대신에 한때 기악(妓樂)이 성하였는데, 이 기악은 기녀(妓女)들을 통하여 민간에도 소개됨으로써 속악에 영향을 미쳐 음악의 보급에 다소 도움이 된 듯하다. 속악으로는 가사(歌詞)·지소·가곡(歌曲) 외에 각 지방의 민요와 판소리 등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한편 무용과 연극 중에서 음악과의 밀접한 관계로 보존되어 내려 온 것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