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세사회의 발전/임진왜란과 병자호란/17세기경의 한국
17세기경의 한국〔槪說〕
편집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이 8여년 동안 계속되었고, 1627년과 1636년에 호란이 일어났으므로 한국사의 17세기는 극심한 전쟁 피해 속에서 시작되었다. 15세기를 통하여 수립된 조선왕조의 통치 질서는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미 변화하기 시작하였지만 16세기 말엽의 왜란과 17세기 초엽에 일어난 호란의 영향으로 그 변화는 훨씬 빨라져 가고 있었으며, 한국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이 변화는 오랜 전통 사회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근대사회로 지향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었다.한국사의 17세기가 이와 같이 새로운 사회로 지향하는 출발점으로 이해되는데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변화를 찾을 수 없다. 이미 16세기에 본격화한 집권층의 당쟁은 17세기에 들어오면서 더욱 심해져 광해군 시대에는 북인이 집권하여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분열되었고, 1623년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곧 이괄의 난이 일어났으며, 그 후 서인의 분열, 예론(禮論)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다툼, 노론·소론의 분당(分黨) 등 일련의 권력투쟁이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당쟁 와중에서 청의 침입을 받아 외교적으로는 대명사대(對明事大)가 대청사대(對淸事大)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의 한국사에 있어서 사회경제적인 변화는 현저하였고, 그것은 또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었다. 19세기의 전반기는 극심한 전쟁 피해 때문에 모든 경제분야가 파탄 상태에 빠져 있었으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차차 복구되기 시작하였다. 전쟁 피해를 극복하려는 정책적인 노력은 효종시대를 계기로 활발히 일어났다.청에서의 인질생활에서 돌아와 즉위한 효종은 북벌론(北伐論)을 내세워 일반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경제발전을 촉구하였으니, 그의 재위 10년 간에는 금속화폐의 유통, 대동법 실시 범위의 확대 등에 큰 효과를 보았다. 한편 17세기 후반기에는 농민층의 부단한 노력에 의하여 농업면에서도 향상 발전이 있었다. 우선 전시(戰時)에 극도로 감축되었던 경작 면적이 점차 확장되어 갔고, 관개시설의 복구에도 큰 성과가 있었으며, 또 농업기술이 향상되어 이모작이 점차 보급되었다. 이 시기에는 이러한 조건 속에서 단위면적의 수확고 또한 증가되었으니 신속(申?)이 『농가집성(農歌集成)』을 저작하여 영농(營農) 기술을 향상시킨 것도 바로 이때였다.농업기술의 향상 발전과 더불어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면화재배를 전업(專業)으로 하는 농가가 생겨났고 담배와 인삼의 재배가 보급되어 갔다. 17세기 후반기에는 상업의 발전도 현저하였다. 우선 대청무역(對淸貿易)에 있어서 종래의 개시무역(開市貿易)이 후시무역(後市貿易)으로 바뀌어 민간의 사(私)무역이 발전하였고, 대일무역에 있어서도 공(公)무역보다 사무역이 우세해져 갔다.한편 국내상업에 있어서도 도시의 상업인구가 증가하여 시전상업계에 난전(亂廛)이 발전하였고, 대동법의 실시에 따라 새로이 공인(貢人)이 생겨났으며, 지방의 장시(場市)에 있어서도 종래의 금압령을 폐지하고 장세(場稅)를 받는 정책으로 전환하게 됨으로써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다.17세기 후반기는 또 수공업에 있어서도 관영수공업(官營手工業)의 쇠퇴가 현저하고 민간수공업이 크게 성장해가던 시기였다. 16세기부터 이미 무너지기 시작하던 관영수공업 조직은 왜란과 호란을 겪음으로써 무기·사기(沙器) 등 특수 분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너졌고, 그 대신 도시에서의 민간수공업의 발달이 활발하였으니, 정부가 각종 수공업품 등을 포함한 현물납세제(現物納稅制)를 폐지하고 미(米)·포(布)·목(木)으로 수세(收稅)하여 그것으로 관수(官需) 수공업품을 시장구입하는 대동법제도를 실시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민간수공업의 발달 때문에 가능하였으며, 또 대동법이 실시됨으로써 민간수공업의 발달은 더욱 촉진되었다. 이 시기에는 광업 분야에 있어서도 새로운 제도가 실시되었으니, 1651년에 실시된 은광(銀鑛)에 대한 설점수세제도(設店收制度)가 그것이었다. 이 제도는 정부가 은광의 채굴권을 부상대고(富商大賈)에게 허가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제도인데, 1687년에는 전국에 68개의 설점수세은광이 설치되었다.17세기 후반기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성과는 금속화폐의 전국적 유통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 50년대에 김육(金堉)의 제의에 의하여 동전을 전국적으로 유통시키려는 조처가 취해졌다가 한 때 중단되었으나, 70년대 이후에는 정부의 적극적 유통책에 의하여 사실상 전국적 유통이 이루어졌고, 이에 정부는 1678년을 기하여 이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문화면에 있어서의 17세기는 실학(實學)이 발생하는 역사적인 시기였다. 지금에 와서 실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수광(李?光)이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저술한 것이 1614년경이었고, 김육이 활약한 시기도 17세기 중엽이었다.17세기 후반기에는 실학의 체계화가 이루어지는데, 유형원(柳馨遠)이 정치·경제·군사 등 국정의 각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고도 합리적인 개혁안을 제시한 『반계수록(磻溪隨錄)』이 완성된 것은 1670년경이었고, 이어서 박세당(朴世堂)의 『장경(檣經)』,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 등 일련의 실학서적이 저술되어서 새로운 사회체제를 구상하였다. 17세기는 또 문학에 있어서도 중요한 계기를 이루는 시기였다. 시가문학(詩歌文學)에 있어서 사설시조(辭說時調)와 같은 새로운 형식이 발달하였고, 특히 잡가(雜歌) 등이 비중을 높여가고 있었으며, 산문에 있어서도 봉건적 계급질서에 저항하는 새로운 내용의 소설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요컨대 한국사의 17세기는 왜란과 호란의 전상(戰傷)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전통 사회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그 속에 새로운 사회체제를 배양해 가는 시기였던 것이다.
<姜萬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