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태동/제도변화와 경제생활/상업자본의 발달
상업자본의 발달〔槪說〕
편집조선 왕조의 봉건적인 상업체제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 이미 붕괴되기 시작하여, 17
18세기에는 그 양상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이 시대의 상업에서는 특히 공인의 활동이 주목된다. 공인들은 서울에서는 육의전, 지방에서는 장시의 객주나 여각과 상거래를 하는 한편, 직접 수공업자들과 거래하기도 하여 점점 상업자본으로서 성장하여 갔다.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는 사상(私商)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가령 서울의 강상(江商), 개성의 송상(松商)의 활동이 그러했다. 그리고 의주(義州)의 만상(灣商)은 중강후시 혹은 책문후시의 사무역(私貿易)을 통하여 거부(巨富)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이러한 사상들의 활약이 커짐에 따라 서울 상가의 모습도 변하여 갔다. 육의전의 존재는 점차 미약해졌고, 드디어 17
18세기에 걸쳐서 대두하게 된 난전은 금제하에서도 더욱 번성했다. 이 같은 사태에 대처해서 취하여진 조처가 이른바 신해통공책으로 지적되어 왔다. 서울 상가의 중심은 이현(梨峴)·종루(鍾樓)·칠패(七牌)의 3대시가 되었다.여기서 상업자본의 성장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17
18세기 이후 조선 왕조 상업계에 독점 상업을 전개함으로써 상업자본 축적에 성공하고 있었던 도고 상업이 고려되어야 하겠다.조선 후기에는 수공업에 있어서도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볼 때 관영수공업은 점점 쇠퇴해가고 있었다. 공장안(工匠案)은 다만 장인세를 징수하는 대상자의 명부였을 뿐인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정조 때인 18세기말경에는 공장안 자체가 폐지되고 말았다. 이것은 공장들이 독립하여 독자적인 수공업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동법이 실시된 뒤에는 공인들의 발생과 함께 수공업이 더욱 성하게 되었다. 즉 수공업자들은 공인으로부터 주문을 받고 그들에게 판매할 물품을 생산하였다. 이리하여 독립적인 수공업자들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일반 시장을 상대하는 상품생산이 생겨났던 것이다.광업은 중국과의 밀무역을 위하여 금과 은이 민간에서 많이 채굴되었고, 국가에서는 이를 공인하여 수세(收稅)하여 왔다. 그러나 국가의 수세는 공인된 광산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대신 잠채하는 광산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수공업과 광업의 발달
편집手工業-鑛業-發達
관청 수공업(官匠)이 중심이 된 조선초기의 수공업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점차 쇠퇴하고 민영수공업이 발달하였다. 무기·종이·옷·자기·비단·유기(놋그릇), 화폐주조 등 국가의 수요가 많은 분야에서는 뒤늦게까지 관청수공업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그것도 점차 민영화의 길을 걸었다. 조선초기에 2,800여 명에 달하던 서울장인(京工匠)은 18세기 후반에는 약 10분의 1로 줄어 들었으며, 지방장인(外工匠)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였다.이와 같이 국가기관에 전속된 장인이 줄어든 대신, 국가에 장인세(匠人稅)를 바치기만 하는 납포장(納布匠)은 더욱 늘어서 18세기 중엽에는 10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들은 대동법실시 이후 새로 새겨난 공인(貢人)이나 일반시장을 상대로 물품을 제조하였으므로 독립수공업자와 다름없었다. 대동법과 민영수공업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전개되었다. 국가는 공인(貢人)으로부터 관수품을 사들이고, 공인(貢人)은 수공업자에게 주문하여 관수품을 제조·구입하였다. 국가는 대규모 건축사업이 있을 때는 장인을 일당노동자로 고용하여 물품을 제조하게도 하였다. 정조 때 화성을 건설하면서 수천명의 장인을 고용하여 근무 날짜에 따라 일당(日當)을 지불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이러한 사례는 그 후 관례화되었다.수공업자는 공인(貢人)하고만 연결을 가진 것이 아니라 대상인(大商人)과도 깊이 제휴하였다. 제조과정이 간단하고 소비규모가 적은 상품은 수공업자가 자기 자본으로 제조·판매하여 상인과 경쟁할 수 있었지만, 종이·화폐·야철·자기 등과 같이 소비규모가 크고 막대한 원료를 필요로 하는 물품은 대자본을 가진 상인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경우 대상인(大商人)은 원료와 대금을 선대(先貸)해 주고 생산된 물품을 사들였는데, 그들은 물주(物主)라고 불렀다. 가령, 지장(紙匠)은 지전상인, 야장(冶匠)은 잡철전인, 그리고 자기장(磁氣場)도 상인물주와 연결되어 가고 있었다. 물주의 등장은 17·18세기 수공업의 특징적인 현상이었다.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지방장시가 크게 확장되고 시장권이 넓게 형성되면서 수공업자는 자기자본으로 상품을 대량으로 제조하여 점촌(店村)을 만들어 직접 팔기도 하고, 보부상을 통해서 판매하는 사례도 많았다. 그 중에서 특히 제조규모가 컸던 것은 솥과 놋그릇(유기)으로서, 경기도 안성과 평안도 정주의 납청(納靑)은 놋그릇 생산지로 가장 유명하였다. ‘안성맞춤’이라는 말은 바로 유행하였다. 이곳의 수공업자들은 자기의 자본으로 공장을 설비하고 원료를 구입하였으며, 임노동자를 고용하여 부업에 의해서 물품을 제조하였다. 이들은 일종의 산업자본가로서, 서양에서 중세 말기에 나타났던 공장제수공업(매뉴팩처)과 유사한 것이다.조선초기에는 광업을 국가가 경영하여 개인의 광산개발이 금지되었으나, 17세기 중엽부터는 개인의 광산개발을 허용하면서 세금을 받아내는 정책으로 바뀌어갔다. 이를 설점수세제(設店收稅制)라 한다. 이에 따라 개인에 의한 광산개발이 촉진되었는데, 특히 청(淸)나라와의 무역에서 은(銀)의 수요가 늘어감에 따라 은광개발이 점차 활기를 띠었다. 그리하여 17세기 말에는 70개소에 가까운 은광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평안도 단천과 경기도 파주·교하는 특히 유명하였다.18세기 중엽부터는 농민들이 광산에 너무 모여들어 농업에 지장을 주는 것을 고려하여 공개적인 채취를 금지하고 높은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러나 상인들은 광산개발이 이득이 많았으므로 금광·은광을 몰래 개발하여 이른바 ‘잠채’가 날로 번창하여 갔고, 큰 자본을 모은 이도 나왔다. 이른바 덕대(德大)라고 불리는 물주가 노동자를 고용하여 대규모 광산을 개발하였다. 금광은 평안도의 자산·성천·수안이 유명하였다.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란 때 대상인이 자본을 대고, 광산노동자가 다수 참여하게 된 것도 이곳의 광산개발과 관련이 깊다.금·은광만큼 활기를 띠지 않았으나 놋그릇과 무기 그리고 동전주조의 원료로서 철광과 동광개발이 촉진되고, 화약제조의 원료인 유황광업도 일어났다.
상업발달과 화폐의 유통
편집商業發達-貨幣-流通
조선후기에는 도고(都賈)라고 불리는 독점적 도매상업이 성행하였다. 도고상인은 관상(官商)인 시전상인과 이른바 '난전(亂廛)'이라고 불리는 서울의 사상(私商), 그리고 공인(貢人) 가운데서 출현하였고, 지방의 상업도시에서도 나타났다. 먼저 시전상인들은 국가로부터 난전을 금압할 수 있는 특권으로서 이른바 '금난전권'을 부여받았으므로 이를 이용하여 독점판매의 혜택을 오래 누렸다. 특히 시전 중에서도 비단·무명·명주·종이·모시·어물 등을 파는 육주비전(六注比廛:六矣廛)은 16세기 말에 서울의 상권을 장악하였고, 조선후기에도 수공업자를 지배하면서 큰 자본을 가지고 사상(私商)들과 경쟁하여 도고활동을 전개하였다.그러나 국가의 금압에도 불구하고 난전이 줄기차게 성장하여 마침내 1791년(정조 15)에 이른바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육주비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인의 금난전권을 철폐하였다. 이로써 사상(私商)들은 육주비전 상품이 아닌 것은 자유스럽게 관상(官商)과 경쟁하면서 판매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시전 이외의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동대문 부근의 이현(梨峴)과 남대문 밖의 칠패(七牌, 지금의 서울역 부근), 그리고 종로 근방의 종루는 3대상가를 형성하여 국내외의 다양한 물종이 일반시민을 상대로 거래되었다. 서울은 이제 국제적인 상업도시로 변모하였으며, 상인들이 시민을 상대로 호객하는 풍속이 나타나서, 마치 오늘의 남대문 시장의 풍속을 방불케 하였다. 번창한 상업도시로서의 서울의 면모는 19세기 초에 유행한 「한양가」라는 노래에 잘 나타나 있다.한편, 시전상인이 사상(私商)의 침식을 크게 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공인(貢人)들의 활동은 사상의 침해를 받지 않는 가운데 특허상인으로서 날로 번창하였다. 공인들은 대개 시전상인(市人)이나 경주인(京主人), 혹은 장인(匠人) 등 과거에 공납과 관련을 맺었던 부류에서 나왔으며, 선혜청이나 상평청·진휼청·호조 등에서 공가(貢價)를 받아 소요물품을 사서 관청에 납품하였다. 이들은 한 가지 물품을 대량으로 구입하는 관계로 큰 자본을 가지고 상품을 거래하였으며, 거래규모만큼 이득도 커서 손쉽게 자본을 축적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국가에 대한 국역(國役)으로서 공인세를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사상(私商)들은 앉아서 판매하는 난전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라, 전국의 지방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화를 교역하기도 하고, 전국 각지에 지점을 설치하여 판매를 확장하기도 하였으며, 또 대외무역에 참여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부(富)를 축적하여 갔다.이러한 사상 중에서도 서울의 경강상인, 개성의 송상(松商), 동래의 내상(萊商), 의주의 만상(灣商), 평양의 유상(柳商) 등은 대표적인 거상(巨商)으로 출현하였다. 경강상인들은 한강을 이용하여 우수한 조선(造船)을 통해서 돈을 벌기도 하고, 미곡·소금·어물 등을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 판매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하였다. 경강상인의 활동으로 뚝섬에서 양화진에 이르기까지 한강유역에는 많은 나루터가 늘어났으며, 지방민의 서울 유입에 따라 도성 밖에 많은 신촌(新村)이 건설되고, 서울의 행정구역도 4대문 밖으로 확대되었다.개성의 송상들은 전국에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차려놓고 인삼을 직접 재배·판매하고, 의주와 동래상인을 매개로 하여 청·일간의 중개무역에 종사하기도 하였다.한편, 15세기 말에 전라도지방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장시(場市)도 조선후기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18세기 중엽에는 1,000여 개소를 헤아리게 되었다. 이는 한 군현에 평균 3-4개의 장시가 형성된 것을 의미한다. 장시는 보통 5일마다 열려서 인근주민들이 농산물과 수공업제품 등을 교환하였고, 보부상이라는 행상단이 먼 지방의 특산물을 가지고 와서 팔았다.그러나, 장시는 시장의 기능만 가진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음식을 즐기며, 각종 놀이도 구경하는 축제 장소이기도 하였다. 장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부가 상설시장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통·폐합하는 과정을 거쳐서 점차 대형화해 가는 동시에 전국적인 시장권을 확대해 갔다. 특히 항구를 낀 장시에서는 대규모 교역이 행해져서 도고업과 위탁판매업·창고업·운송업·숙박업·은행업 등에 종사하는 객주(客主)·여각(旅閣) 등이 나타나고, 거래를 붙이는 거간(居間)도 생겨났다.그리고 서울 부근의 송파·칠패·이현, 누원(樓院, 서울 노원구) 등 시장을 상대로 하는 중간도매상이 나타나 이들을 특히 중도아(中都兒)라고 불렀다.장시가 발달함에 따라 도로도 많이 개설되었다. 배의 수송능력이 커지고, 해로가 개척되고 수상운수도 발달하였다. 조선후기 장시 가운데서 충청도의 강경, 전라도의 전주, 경상도의 대구·마산·안동, 황해도의 은파, 함경도의 원산, 강원도의 대화장(평창) 등이 유명하여 새로운 상업도시로 성장해 갔다.국내의 상업발달과 병행하여 대외무역도 활기를 띠었다. 17세기 중엽부터 청(淸)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의주의 중강(中江)과 중국 봉황의 책문(柵門) 등 국경을 중심으로 관무역과 사무역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른바 의주의 만상이 사무역에 종사하였다. 청에서 들어오는 물품은 비단·모자·약재·말·문방구 등이었고, 우리나라에서 수출하는 물품은 은을 비롯하여 가죽·종이·무명 등이었으며, 19세기 이후로는 개성인삼(홍삼)이 대종을 이루었다.한편, 17세기 이후로 일본과의 관계가 점차 정상화되면서 대일무역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삼·쌀·무명 등이 나가고, 청에서 수입한 물품을 중개하였다. 반면에 일본으로부터는 은·구리·유황·후추 등을 들여 오고, 은을 다시 청에서 수출하여 중간 이득을 취하였다. 대일무역에서는 특히 동래(왜관) 상인(萊商)의 활약이 컸다.조선후기의 보편적인 상업형태인 도고상업의 발달은 유통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상업자본의 축적을 가져왔으며, 그 자본의 일부는 정치자금으로 이용되었다.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영세상인의 몰락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상품판매의 독점행위를 이용하여 물가를 올리기도 하고, 국가에 대한 탈세행위가 논란이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는 도고상업이 국가와 민생에 끼치는 폐단을 우려하여 이를 막는 정책에 부심하였고, 유수원(柳壽垣)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도 사상과 도고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는 상공업 진흥을 강조하는 북학(北學)이 대두하여 지식인들의 상업관이 크게 변하였다.상공업이 진흥함에 따라 금속화폐에 대한 수요가 커지게 되었다. 숙종 4년(1678)에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동전(속칭 엽전)을 주조한 이래로 계속하여 화폐를 주조하였는데, 17세기 말에는 전국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도 금속화폐의 대종을 이룬 것은 은자(銀子)였으며, 그 밖에 미(米)·포(布)가 현물화폐로서 광범위하게 민간에 사용되었으므로 동전은 보조적 기능밖에 갖지 못하였다.그러나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대동미(大同米)와 기타 세금이 금납화되어가고, 지대(地代)도 화폐로 지불되면서 동전은 일차적인 유통수단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금속화폐의 보급은 상품유통과 교환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양반·상인이나 지주들은 화폐를 유통수단으로만 이용한 것이 아니라, 많은 화폐를 주조하여 사용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리하여 국가가 동전을 대량으로 발행하면 할수록 사라지는 화폐가 많아져 유통화폐의 부족을 가져왔다. 이러한 현상을 '전황(錢荒)'이라 한다.화폐유통이 가져온 치부욕과 전황, 그리고 그로 인한 빈부격차의 가속화 등은 18세기 중엽 이후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실학자 이익(李瀷)을 비롯한 많은 식자들은 화폐의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그 부정적 기능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일부에서는 화폐폐지론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
||
|
|
|
|
|
|
조운
편집漕運
조세(租稅)로 징수한 미곡(米穀)·포백(布帛) 등을 해상수송하던 일. 조전(漕轉)이라고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조운이라 하면 해운(海運)과 수운(水運)을 포함하여 말하기도 하나, 강수(江水)를 이용하는 경우는 참운(站運)이라고 하여 조운과 구별하였다.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 일시에 많은 분량의 세미(稅米)를 수송하는 데에는 육운(陸運)보다 조운에 의존하는 것이 적합하였다. 국가에서는 군현의 관할 창고에 조세미(租稅米)를 모으고 선박을 창고에 부속 상비시켜서 매년 일정한 기한을 정하여 중앙의 경창(京倉)에 수송하였다.이때 해상 수송을 맡은 창고는 해운창, 강상(江上) 수송을 맡은 창고는 수운창이라 하였다. 조운에는 출발 지점과 기항 지점 및 도착 지점이었는데, 이 세 지점을 이은 선이 조운 항로이며, 이 항로연번에 있는 창고가 조창(漕倉) 혹은 수참(水站)이다.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여러 지역에 조창을 두어 예성강(禮成江)으로 연결되게 하였다. 그러나 무신란 이후 국내 정세가 문란해졌고, 말기에는 왜구(倭寇)의 창궐로 연해의 도읍이 황폐되어 조운의 기능이 약화되었다.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조운에 대한 규정을 정비하고 있다. 후기에 다소의 변동이 있었는데, 지방에 따라 세곡(稅穀)을 지방 창고에 일단 보관해 두는 곳과 지방 창고를 거치지 않고 직접 경창으로 수송하는 곳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지방 세곡을 무사히 경창으로 수송하기 위하여 각 창고에 수납할 때에는 해운사(海運使)와 함께 감독하고 동승 호송하였다. 경창에 도착하면 호조(戶曹)의 당상(堂上)·낭관(郎官)이 직접 점검하여 수납하였다. 조선(漕船)의 적재량은 지방마다 일정하게 제한하였고, 사곡(私穀)이나 사화(私貨)를 싣지 못하게 하고 위반하는 경우에는 처벌하였다. 조선 초기의 연간 세곡의 총수입은 40만 석 이하였으나, 후기 고종 32년(1894)에는 184만 석에 달하였다. 특히 대동법(大同法) 실시 이후에는 세곡의 수송량이 증가되었다. 조운의 시기는 각 지방마다 따로 정하였다. 경기·충청·황해도는 2월 20일 전에 운행하여 3월 10일 이내로, 전라도는 3월 15일 전에 운항하여 4월 10일 이내로, 경상도는 3월 25일 전에 운항하여 5월 15일 이내로 수납하게 하였다. 그리고 평안도와 함경도 및 제주도는 세곡을 직접 조운하지 않고, 각각 해당 도에 보관하게 하였다.또 교통이 불편하여 조창에 수납하기 어려운 지방에서는 민간 선박으로 납부하기도 하고, 영동을 비롯한 산간 지방에서는 면포(綿布) 혹은 화폐로 대납하기도 하였다.
공인
편집貢人
관부(官府)에서 지정한 공납청부업자. 대동법 실시 이후 공납이 없어졌으므로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은 공인을 통하여 조달되었다. 공인의 출현으로 상품생산의 형태도 전환되어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그리하여 시전상인 및 공장(工匠), 지방에서의 공물 상납을 중간에서 알선하던 경주인(京主人) 등이 공인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정부는 각기 지정된 공인에게 공가(貢價)를 대동미로 미리 내주고 공인은 이로써 소정의 물품을 구매 조달하여 그 차액을 그들의 수익으로 삼게 했던 것이다.그러나 관부·궁부의 수요 물종과 수량이 소정 이상의 수요를 요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 공인은 처음부터 자기 자본이 필요했던 것이며, 공인 자본의 성장은 이 경우에 더욱 가능성이 많았다. 공인들에 의한 자본의 축적, 시장의 발달, 산업의 융성은 근대 자본주의에의 발달을 위한 한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육의전
편집六矣廛
조선시대 서울 종로에 자리잡고 있던 여섯 가지 종류의 어용상점(御用商店). 일명 육주비전(六注比廛)·육부전(六部廛)·육분전(六分廛)·육장전(六長廛)·육조비전(六調備廛)·육주부전(六主夫廛). 이들은 국역(國役)을 부담하는 대신에 정부로부터 강력한 특권을 부여받아 주로 왕실과 국가의식(國家儀式)의 수요(需要)를 도맡아 보는 등 상품의 독점과 전매권(專賣權)을 행사, 상업경제를 지배하면서 말기까지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여 왔다. 원래 조선의 전(廛:市廛)은 태종 때 설치되었는데 초기에는 상업의 규모가 비슷하여 경영과 자본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점차 도시의 번영과 상업의 발달이 이룩되자 경영방식이 달라지고 관청에 대한 대응관계(對應關係) 및 규모에 따라 과세(課稅)의 비율이 정해져, 그 중 가장 많은 국역을 담당하는 전을 추려 육의전이라 하였다. 따라서 육의전의 발생 연대는 전의 국역부담이 시작됨과 함께 생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여기에 대하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임진왜란 때 이미 국역이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편으로는 대동법(大同法) 실시를 전후하여 발생하였다는 주장도 있어 그 시대가 확실치 않으나 대략 조선 중기에 생겼다고 보인다. 이와 같이 육의전은 국역부담에 의하여 특권화된 전이므로 영구불멸의 것이 아니라 관청에 대한 부담력과 정부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할 수 있는 상업능력을 보유하느냐 못 하느냐에 변화를 보게 되었으며 때로는 수를 늘려 7의전 또는 8의전이 되기도 했다.육의전은 도중(都中)이라는 일종의 조합(組合)을 가지고 도령위(都領位)·대행수(大行首)·상공원(上公員)·하공원(下公員) 등의 직원을 두어 경시서(京市署)를 통해 관청에 납부할 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각 전의 부담능력에 따라 나누어 상납(上納), 관청과 전 사이의 종적인 연결을 도모하였다. 그런데 이때의 세액(稅額)의 비중은 외국상품·수요가 많은 물품 등에 많았으며 공물로는 세폐(歲幣)와 방물(方物)·관청의 수요에 부과되는 일시 부담금 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리하여 당시 재정의 궁핍을 느끼고 있던 정부는 상인의 부력(富力)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한편 상인들은 정부의 권력을 이용하여 자본의 축적을 꾀하려고 하니 여기에 양자간에는 일종의 대상관계(對象關係)가 성립, 정부는 육의전에게 공납을 받는 대신에 강력한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① 자금의 대여 ② 외부압력으로부터의 보호 ③ 난전(亂廛)의 금지 등으로 특히 난전을 금하게 한 사실은 육의전이 갖는 최대의 특권으로서 상권(商權)을 완전히 독점하고 길드(Guild)적인 권력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특권이 강화될수록 의무도 가중(加重)하여 육의전의 상품 독점은 한편으로는 정부관리의 부정·부패의 기회를 마련하고 신흥기업가(企業家)를 봉쇄하여 상공업의 발전을 근본적으로 위축시키는 페단을 가져왔다.19세기 초부터 우리나라에도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값싼 상품이 들어오자 정부는 이를 막을 힘을 잃은 채 봉건사회에서만 가능했던 육의전의 생명은 점차 끊어지기 시작하여 갑오경장 후에는 누구나 자유로운 상업을 영위하게 되었다.
공무
편집公貿
조선시대 후기에 정부가 육의전(六矣廛)에 없는 상품을 육의전으로 하여금 구입·납공(納貢)케 한 것. 공무의 대상이 되는 상품은 대부분 특별한 물품이었으므로,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상업의 발달에 따른 물주(物主)의 물가 조정이 자행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물가는 폭등한 반면, 육의전 상인이 정부기관으부터 받는 대가는 불과 10분의 1, 2에 지나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상업계의 변화에 따르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곧 이러한 현상은 특권 어용상인으로서의 육의전 상인이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어 가고, 일반 상인층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그에 따라 상업계의 주도 세력을 쥐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이와 같은 과정에서 종래의 공무에 따르는 모순을 제거하기 위하여 1791년(정조 15) 6월 공무제도를 혁파하게 되었고, 단지 어약재(御藥材)와 시급하고 구하기 힘든 물품에 한해서만 예외를 두기로 하였다. 공무의 매상(賣上) 대가는 세폐(歲幣)·방물(方物)·공납(貢納)·별무(別貿)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절전(折錢)의 형식을 취하였다. 그 공평율(公平率)은 조선 초기 포(布)·저화(楮貨)를 사용했을 때는 정포(正布) 1필=상포(常布) 2필=저화 30장=쌀 4되이었으며 후기에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사용했을 때에는 동전(銅錢)은 백문(百文) 1냥, 은전(銀錢)은 전문(錢文) 2냥이었다.이 절전 형식의 대가 지급은 규정상 시가(時價)보다 우급(遇給)한다고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였다. 한편 공무는 정부가 직접 구득(購得)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물품의 조달을 각계 각층에 의뢰하기도 하였다. 즉 종친(宗親) 및 동반(東班) 6품 이상, 서반(西班) 4품 이상은 백저포(白苧布) 1필씩을, 그리고 동반 7품 이하, 서반 6품 이상, 서울의 무녀(巫女) 및 서울 ·개성의 부거인(富居人)은 일정의 면주(綿紬)·저포·마포를 바치게 하고, 그 대가를 지급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객주
편집客主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있었던 주요한 상업·금융기관의 하나. 그 기원이나 연혁(沿革)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때부터 있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객주란 객상주인(客商主人)이라는 뜻이며, 주인이란 주선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다. 객주에는 보행객주(步行客主)와 물상객주(物商客主)의 2종류가 있다. 보행객주는 주막(酒幕)보다는 여러 모로 고급이며 객실(客室)·대우(待遇) 등도 좋아서 중류 이상의 양반계급이 숙박하던 곳이다. 이에 대하여 물상객주는 일종의 상업·금융기관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주된 업무는 상품의 매매였으나 동시에 창고업(倉庫業)·위탁판매업(委託販賣업)·운송업(運送業)을 취급하였으며 또 이들 업무에 부수(附隨)하여 오늘날의 은행 업무와 비슷한 일을 하였고, 하주(荷主)의 편의를 위하여 여숙업(旅宿業)도 겸하였다.상품의 생산자나 상인들이 보낸 화물을 받아들이고, 혹은 지방에서 화물을 가지고 온 상인들을 실비(實費)로 재우기도 하였으며, 한편 그 위탁에 응하여 화물의 매매를 주선해 주고 구전(口錢)을 받았다. 그런데 반드시 일정한 구전을 받는 것이 아니고 경우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보통은 대가(代價)의 100분의 1 내지 5정도였다. 객주는 화물의 보관도 받았으나 특별히 창고세를 받지는 않았다. 다만 아주 오래 팔리지 않거나, 팔리기 전에 화주(貨主)가 자기 화물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경우에는 창고세를 받는 일이 있었다. 객주는 또한 화물을 가진 사람이나 살 사람에 대해서 대금(代金)의 입체(立替)·자금의 융통을 해주어 그 화물을 담보로서 잡아 둘 수가 있으며, 특수한 경우에는 토지·가옥 등 부동산(不動産)으로써 이에 충당시키는 일도 가끔 있었으나 대부분은 신용대부(信用貸付)를 행하였다. 그리고 화물의 거래·대금입체(代金立替)·자금제공 등을 할 경우 흔히 수표(手票) 비슷한 어음(於音)를 발행하거나 인수(引受)하고, 또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간의 금전(金錢)·재화(財貨)의 결제(決濟)를 대행, 지금의 환(換) 비슷한 환표(換票:換簡)를 발행·인수하여 교통이 불편하던 당시에 여객이나 상인들에게 많은 편의를 주었다. 또 객주는 하주(荷主)의 자금, 혹은 왕실·대관(大官)·양반 등을 위하여 예금(預金)도 취급하였다. 이럴 경우 일반적으로 하주나 상인에 대해서는 1푼(分) 내지 2푼의 이자를 지불하는 반면 왕실이나 양반 등에 대해서는 대개 이자가 없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뒤로는 한 달에 2푼의 이자를 붙에게 되었다. 또 객주는 지방에서 중앙의 각 관청에 바치는 물품·금전 등도 취급하였는데, 정부의 두터운 보호를 받기도 하였다.관리들의 엽관(獵官)운동의 자금을 대주어 일이 잘되면 특정한 화물을 독점적으로 취급하는 특권을 얻는 수도 있었다. 봉건적인 경제체제이긴 하였으나 그 업무를 통하여 자본을 축적할 수 있어서, 개항(開港)과 동시에 초기 외국무역의 담당자가 되어 새로운 자본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 체결 후 외국 상품이 개항지(開港地)를 조직하여 길드(Guild)적인 동업조합(同業組合)의 기능을 발휘하였으며, 이들은 개항지에서 외국인과 절충하여 외국상품 판매의 중개역할도 하였다. 1890년(고종 27) 인천·부산항에 객주 25개소를 설치하여 화물(貨物)을 취급하는 도매업과 운송업·창고업 등을 맡아보면서 구전(口錢)을 받도록 하였다. 1930년에 철폐되었다.
만상
편집灣商
조선 후기에 중국과 무역 활동을 하던 의주 상인(義州商人). 유만(柳灣) 또는 만고(灣賈)라고도 한다. 의주는 국경 도시로서 조선 사행(使行)이 떠나는 곳이며, 또 중국 사신이 오는 관문으로 정치·외교상은 물론 양국간의 무역 중심지로서도 중시되었던 곳이다. 조선 전기에 엄금되었던 민간상인의 외국무역은 17세기부터 국내 상업계의 현저한 발달과 금속화폐의 전국적 유통과 더불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당시 대외무역에서 크게 진전을 보인 것은 대청무역이었다. 대청무역은 조선은 사대정책(事大政策)의 구현으로서의 부연사행(敷衍使行)에 부수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여 점차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즉 사행의 왕래에 부수하여 양국의 상인인 연고(燕賈)·만상이 활약하여 중계무역의 형태를 띠고 대청무역이 발달하였다.이러한 사무역활동(私貿易活動)은 17세기에 이르러 개시무역(開市貿易)으로 열렸다가 다시 후시무역(後市貿易)으로 발전함으로써 급격히 진전되었다. 임진왜란 다음해에 열린 중강개시(中江開市)는 왜국격퇴 후 중지되었다가 청의 요청이 있어 다시 열려 양국간의 공식 교역장이 되었다. 여기에는 사상(私商) 개입이 금지되었으나 법령의 해이와 민간상인의 참여로 중강후시(中江後市) 중심이 되었고, 1700년(숙종 26)에는 마침내 중강개시가 폐지되었다. 그리고 사신 왕래와 관련하여 책문(柵門)에 후시가 생겨 양국 무역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밀무역에 관여하는 자는 직접적으로 사행원과 상고(商賈)이고 간접적으로는 감독기관의 관료들이었다. 후시무역이 성행할 수 있었던 것은 부연사행 자체의 모순과 더불어 당시의 사회·경제적 사정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즉 조선의 전통적인 사무역 금지로 상류층의 외국 물자 수요가 충족되지 못했고, 여기서 상업자본이 국가통제에 반발하여 부연사행제도상의 모순을 이용하여 밀무역이 성행하였던 것이다. 만상들은 사행 때마다 은(銀)과 인삼 등을 가지고 몰래 사신 일행에 끼어 책문에서 청나라 상인과 교역하였다. 이것이 소위 책문 후시로 1년에 4, 5차나 열리고, 1회에 은 10만 냥의 액수에 해당되는 물품이 거래되었으며, 여기서 의주 상인들은 특히 지리적 잇점을 지녀 매우 유리하였다. 또 그들은 사행이 책문을 출입할 때 그 복물(卜物)을 운반하기 위해 파견되는 여마(餘馬)와 연복제(延卜制) 등에 편승하여 무역을 하기도 하였다.개시무역에서 작용하던 관권(官權)의 개입, 통제가 없어지면서 후시무역은 빈번하게 대규모적으로 진전되어 국내시장과 외국시장의 직접 연결이 가능해졌고, 또 이에 종사하는 의주상인과 같은 민간상인의 자율적 성장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민간 상인들의 대청무역에는 이들의 청국 상인에 대한 부채(負債) 문제 등의 여러 가지 부작용도 있었다. 이러한 부작용으로 인해 1725년(영조 원년)에 연복무역이 금지되기도 했으나, 만상들의 강한 경제적 욕망과 감독관의 부패로 대청무쳑은 봉쇄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754년(영조 30) 연복무역 곧 책문무역이 재개되고, 이는 만상에게만 허용되었으므로 만상후시(灣商後市)라고 불리었다. 정조(正祖) 말년에는 사행정사(使行正市)가 의주 부윤(府尹)과 상의해서 연행상금절목(燕行商禁節目)을 합의·작성하여 이를 기준으로 만상의 무역을 감독케 하였으며, 이와 같은 정책 무역권을 만포(灣包)라고도 하였다. 이는 정부가 의주 상인을 통해 출입 물품에 대한 관세를 하여 국가 수입을 증대시키려는 목적이 작용한 것이었다.만상은 대청 무역에 있어서 당시 국내 최대규모였던 개성 상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국내외 시장을 연결하고 있었으며, 또한 이를 통해 대일본 무역의 일선상인인 동래상인과도 연결되어 개성상인과 국제 중계무역을 가능케 하였다. 이렇게 하여 만상은 그 자본 집적도를 더욱 높여갈 수 있었다. 만상들의 대청 무역은 개항 전의 국제 무역을 통한 상업자본 가운데 전형적인 것이었으나, 개항 후 1700년(숙종 26) 외래 자본주의의 침투에 따라 경제력의 상대적 약화로 인해 점차 해체되었으라라고 추측된다.
여각
편집旅閣 객주와 본질적으로 같은 성질의 것이나 자본이 객주보다 조금 많은 것. 여각이란 연안의 각 포(浦)에 존재하며 곡물·어염(魚鹽)·해패류(海貝類) 등의 위탁판매 또는 매입을 업으로 삼고 대개 큰 창고를 보유하고 있다. 여각은 여관업도 겸하였던 것으로 관헌과 권력가의 세력을 이용하여 자기의 거래 지방에서 오는 화객(華客)을 거의 강제적으로 숙박시키고 규정된 수수료를 받았다.연안의 여각은 당초 각 포에 숙박하는 선객주가 발전한 것으로서 풍부한 자금을 보유하며, 널리 상품을 취급 거래하는 대상급(大商級)에 속하였다.
책문후시
편집柵門後市
조선 현종 초년부터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중간의 책문에서 행해지던 청과의 통상. 조선의교역으로는 청에 대한 조공무역, 사행(使行)에 의한 사무역, 기타 청구에 의한 교역이 행해졌다.그리고 중기 이후에는 압록강변의 중강개시와 야인에 대해 경원·경성·회령에서 개시를 행하였다. 후기의 대청(對淸) 무역상 중강개시는 인조 24년(1646)에 복설(復設)되었는데 금제된 사상(私商)의 도량(跳梁)이 심하여 마치 자유무역의 양상을 나타냈으며, 그 후 약 50년 간 중강후시(中江後市)란 이름하에 대단한 번영을 이룩하였다.그러나 숙종 26년(1700)에 일단 폐지되었다가 현종 초년부터 통상이 시작되어 소위 책문후시란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 개시는 상당한 번창을 이루었다. 조정에서는 시초에는 금하였으나 할 수 없이 묵인하는 대신 세금을 부과하여 국고수입을 삼았다. 영조 30년(1754)에 책문후시가 공인됨에 따라 피물(皮物)·지물(紙物)·수(紬)·저포(苧布) 등의 수출은 막대하였다.정조 11년(1787) 후시를 일체 혁파하고자 하였으나 효과가 없었고, 이곳에서의 조선상인과 만주상인들의 교역은 개항 때까지 계속되었다.
난전
편집亂廛 전안(廛案)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자 또는 자기 소관 이외의 상품을 서울 도내(都內)에서 판매하는 행위. 조선초의 시전 중에서 고액의 국역을 부담하는 시전이 차츰 생겨나게 되었다. 그 중 6의전(육주비전)은 국가가 특별히 보호하는 반면에 다른 시전은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이 제한을 벗어난 상행위를 난전이라 하여 난전례에 따른 처벌을 받았다. 6의전을 중심으로 국역을 부담하던 37개의 시전에게는 그 보상으로 금난전권(禁亂廛權)이 주어졌다. 이러한 것은 상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국역을 부담하지 않는 각 시전은 불법 상행위를 많이 하였으므로 국가에서도 직접 취체하도록 하였고, 금난전권을 가진 시전의 수도 47개로 증가하였다. 이는 대개 18세기 이래 발전한 일반시전과 사상활동의 번창으로 기인한 것이었다. 그 후 6의전의 세력도 점차 미약해졌고, 난전에 대한 규정도 차츰 없어져 상업활동에 있어서 일대 변동을 가져오게 되었다.
신해통공
편집辛亥通共
시전의 국역은 존속하되 그들의 도고상업(都賈商業)은 금지시킨 조처.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울에는 많은 새로운 시전이 설립되어 6의전 및 기성의 일반 시전과 같이 모두 금난전권을 행사하고 도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도시 상업의 발달로 인한 시전 수의 증가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었지만, 시전의 도고권이 육의전과 같은 몇몇 관수품 조달상에 한정되지 않고 도회지인의 일상생활품상 전부에게 주어짐으로써 생기는 폐단은 대단히 컸다. 이에 대해 영세 사(私)상인층의 부단한 공세와 도회지 세궁민의 반발이 심했고, 정부 자체도 절정에 달한 도고상업의 폐단을 묵과할 수 없었다. 이 같은 사태하에서 정조 15년(1791) 신해통공이 취해졌다. 이 조처는 첫째 6의전 이외의 모든 시전에게는 금난전전매권, 즉 도매권을 허용하지 않고, 둘째 설립된 지 30년 미만인 시전은 폐지한다는 것이었다. 신해통공의 주동자라고 할 수 있는 당시의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의 이와 같은 주장은 곧 그대로 실시되어 조선왕조 상업 발전사상 또 하나의 큰 계기를 이루었다.
도고
편집都賈 독점상업의 행위 혹은 기관. 도고(都庫)·도고(都雇)와 혼용된다. 도고(都庫)는 원래 대동법 실시 이후의 공납품 조달을 위해 설치된 기관 혹은 창고를 뜻하는 것이었으며, 기록에 의하면 숙종 7년(1681)에 처음 설치되었다. 도고(都賈)·도고(都雇) 등은 상인들의 도매 기관을 뜻하는 것이었으나 도고(都庫)와 통용되었다. 그 후 공물주인이나 일반 도매상인들이 독점상인으로 발전하게 됨으로써 그 뜻이 매점 혹은 독점행위 자체를 나타내었으리라고 추측된다.요컨대 도고는 일반 민간상인의 경우 그들의 자본력과 상술(商術)을 근거로 전개한 독점상인의 행위나 기관을 말하며, 시전상인의 경우는 정부로부터 인정받는 전매권, 즉 금난전권을 근거로 하여 영위한 독점상업의 행위 혹은 그 조직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 도고상업은 처음부터 조선 왕조 상업계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16세기 이후의 봉건사회 해체기에 상업발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 도고상업은 문호개방 이전에 최대 규모의 토착자본으로 성장하며, 대개 18세기 말엽부터는 부분적으로나마 생산부문에 침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조선 왕조 사회에 새로운 생산양식이 발전하고 있었음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신분제의 동요
편집身分制-動搖
조선후기의 산업발달은 전통적인 신분계급구조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양인과 노비의 엄격한 차별과 세습성을 특징으로 하는 양천제가 무너지고 양반(사족)과 상민(평민과 노비)이 대칭되는 새로운 계급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이른바 반상(班常)의 구별이다. 그러나 양천제가 법에 의해서 규제되는 신분제라면, 반상구조는 사회관헹으로 형성된 것이어서 구속력이 약하고 서로간의 상하이동이 비교적 활발하였다. 따라서 반상구조는 신분사회에서 근대적 계급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태라 할 수 있다. 신분제의 붕괴는 무엇보다도 지주제의 발전에 의해서 그 단서가 열렸다. 16세기 이후로는 병작제가 보편화되면서 양인 중에서 지주의 위치에 있던 부류가 양반(사족)으로 상승하고, 작인의 처지에 있던 부류는 양인이건 노비이건 상한(常漢)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16세기 말의 왜란과 17세기 전반의 호란을 거치면서 양천제는 더욱 급속하게 무너졌다. 노비 스스로 도망하여 신분을 해방시키기도 하고, 국가는 군역 대상자와 재정의 궁핍을 보충하기 위하여 노비를 단계적으로 해방시켜 주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군공(軍功)을 세우거나 곡식을 바치는 자(納粟)를 양인으로 풀어주고, 속오군으로 편제하여 군역을 지우기도 했다. 또한 노비인구를 제도적으로 줄이기 위해 어머니가 비(婢)인 경우에만 그 자식을 노비로 만들고, 나머지는 양인으로 되게 하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시행하였다. 이 제도는 1669년(현종 10년)에 시작되어 여러 차례 치폐를 거듭하다가 1731년(영조 7년)에 정착되었다. 당시에는 양인과 노비 사이의 결혼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이 제도로 양인이 되는 노비가 적지 않았다. 국가에 소속된 공노비도 도망자가 속출하여 국가에서는 신공(身貢)과 입역(入役)을 완화해 주기도 하였으나 별로 효과가 없자 마침내 1801년(순조 1년)에 일부 공노비를 제외한 66,000여 명의 공노비(內寺奴婢)를 양인으로 해방시켜 주었다. 나머지 공노비는 1894년의 갑오경장 때 해방되었는데, 이때 사노비도 세습제가 폐지되어 우리나라 노비제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한편, 신분제가 붕괴되면서 그에 대신하여 나타난 반상(班常)구조는 양반의 계급적 구성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었다. 우선 양반의 개념이 조선초기와 달라졌다. 원래 양반이란 문무의 관직을 가진 사람을 가리켰으나, 조선후기의 양반은 뚜렷한 법제적·객관적 기준이 없었다. 그러나 대체로 양반은 학문과 벼슬의 유무를 기준으로 척도를 삼는 것이 관행이었다. 따라서 명성이 높은 학자나 서원의 유생, 생원, 진사, 그리고 벼슬아치의 친족들이 양반을 차지하였으며, 이들은 족보를 만들어 족단 전체가 양반가문으로 행세하고, 상한(常漢)과는 통혼하지 않았다. 또 이들은 청금록(靑衿錄) 혹은 향안(鄕案)이라는 양반 명단을 만들어 향약 등 향촌자치기구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국가는 기준이 모호한 양반을 일률적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과거응시자격, 특히 고급문관이 되는 생진과(生進科)와 문과(文科)의 경우에는 4조(증조·조·부·외조) 중에 현관(顯官, 실직관리)을 지낸 사람이 있어야 응시할 수 있게 하였고, 군역을 면제시켜 주는 경우에는 ‘유학(幼學)’으로 기록된 사람에 한하였다. 이러한 신원의 파악은 국가가 작성한 호적에 의해서 확인되었으므로, 상한(常漢) 중에서도 벼슬을 하고 싶거나 군역을 면제받고자 하는 사람은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 호적을 바꾸고 족보를 위조하기도 하였다. 조상의 신분을 위조하는 것을 ‘환부역조(換父易祖)’라 하고, 자신의 직업을 ‘유학(幼學)’이라고 속이는 사람을 ‘모칭유학’이라 불렀다.조선 후기에는 상민(常民) 중에서 신분을 속여 양반행세를 하는 가짜 양반이 시대가 흘러갈수록 많아져서 19세기 들어가면 전체주민의 과반수가 양반으로 호적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양반 인구가 급증한 것은 그만큼 계급상승이 활발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치권력의 핵심에 접근하는 길은 모든 양반에게 열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에 합격했다 하더라도 실제 관직을 주는 경우에는 가문의 차별과 지방의 차별이 있었다. 이른바 청요직이라 불리는 승문원·홍문관 등에는 서울양반(京華士族)이 임용되고, 서북사람은 그보다 못한 성균관, 중인은 승진이 어려운 교서관에 임용되는 것이 관례였다. 무과(武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서울양반은 왕을 호종하는 선전관(宣傳官)에, 중인은 궁궐이나 성문을 지키는 수문청에 임용되었다. 조선후기의 중인(中人)은 인구면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으나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있는 부류로서 의관(의사), 역관(통역), 천문관, 산관(수학), 율관(법률), 화원, 서리 등 전문기술직에 종사하는 하급관료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밖에 시골의 교생(校生)이나 군교(軍校), 향리들도 중인으로 자처하여 두 부류의 중인층이 형성되었다. 건국초에는 전문기술직에 종사하는 가문이나 신분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나, 17세기 중엽 이후로 그 직업이 세습되면서 중인(中人)이라는 특수 계급 집단이 형성된 것이다. 특히 서얼들에게 잡과응시가 허용되어 전문기술직에 함께 참여하면서 중인은 서얼과 동류로 취급되어 천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중인은 법제상으로는 문무과 응시가 가능하고, 당당한 문관(顯官)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으나, 실제상으로는 청요직 임용이 막혀 있었다.한편, 서얼은 양반의 소생으로 인구비중도 높았으나, 서얼금고에 의해 전문기술직 이외에는 벼슬길이 법제적으로 막혀 있었다. 그러나 서얼들 자신의 꾸준한 집단적 상소운동과 국가의 정책적 배려로 18세기 후반부터는 점차적 청요직으로의 허용이 이루어졌다. 정종 때 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 등이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등용된 것은 유명한 사례이며, 또한 그 후에도 서얼허용은 꾸준히 계속되어 마침내 1851년(철종)에 ‘신해통공’ 조치를 거쳐 완전한 청요직 허통이 이루어졌다.서얼 허용에 자극을 받아 중인(中人)들도 1850년대에 대대적인 연합상소운동을 벌였으나, 그 세력이 미미하여 청요직 허용이 실패로 돌아갔다.그러나 중인들은 경제력이 높아서 서울의 여러 곳에 시사(詩社)를 조직하여 양반들과 어울려 문예 활동을 통해 양반과 비슷한 인문교양을 쌓아가는 한편,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위상을 높여갔다. 중인들의 위상이 뚜렷하게 높아진 것은 개항 이후로서 서구의 근대문물을 수용하는 데 양반보다 앞서 나갔다. 그들이 지닌 전문적 지식과 출세의욕이 서양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급진적 개화파가 대부분 중인층에서 나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급진 개화파에서 뒷날 친일파가 많이 나타난 것은 중인이 양반처럼 자존심이 강하지 못하고, 전문가로서의 공리적·출세지향적 기질이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