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태동/사회변화와 대외관계/경제체제의 개편

경제체제의 개편〔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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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조선은 전란으로 인해 농토는 황폐하여지고, 경작 면적은 줄어들었다. 게다가 토지대장이 산실되었으므로 이를 이유로 은결(隱結)이 더욱 증가되어 갔다. 전란 후의 양전 실시 결과 임진왜란 이전에 150만 결에 달하였던 토지면적이 광해군 시대에는 54만 결밖에 안되었다. 이는 곧 조세 수입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충하고 방납(防納)에 의한 피해를 덜기 위해 공납의 미곡 대납제가 채택되었다. 이 제도는 임진왜란 이후 재정의 곤란을 당하고 나서 이원익·김육 등의 주장에 따라 비로소 실시됐다.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에는 국초의 5위가 사실상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다. 이에 따라 임란 중 훈련도감을 설치해 여기에서 3수(三手) 병을 훈련했다. 이 훈련도감을 위시한 5군영이 모두 갖추어진 것은 17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이며, 이후 5군영은 국군의 중심부대가 되었다. 5군영의 설치로 조선의 군제는 무병제가 사실상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일반 장정들은 군포(軍布)를 바쳐 군역의 의무를 대신했다. 이 군포는 그 뒤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아 17세기 중엽 이후 시정책이 거듭 논의되었으나 대책은 쉽게 마련되지 않았다.17세기로 들어서면서 농업 생산 능력은 기술적으로 현저하게 발달하였다. 벼의 이앙법(移秧法)이 발달함에 따라 벼와 보리의 이모작(二毛作)이 널리 보급된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저수지가 새로 만들어지고 또 수리되게 되었으며, 저수지 시설은 제언사(堤堰司)가 설치되어 국가적인 뒷받침을 받았다. 한편 상업적 농업생산이 발달하게 되고 농민들의 토지 경영에 있어서도 변화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들은 조선 사회의 신분 질서에도 변화를 일으켰는데 납속(納粟)이나 공명첩(空名帖) 등으로 평민들은 양반 신분으로 상승하기도 하고 관직을 얻기도 하였다.이 시대의 상공업에 있어서는 우선 공인자본(貢人資本)이 생겨나는 것을 들 수 있다. 한편 17세기 이래 현저하게 나타난 난전상인(亂廛商人)의 상업활동이 어용상인의 상권(商權)을 위협했다. 개성의 송상(松商), 경강상인(京江商人) 등의 사상(私商)과 경원·회령·중강 개시의 상인들은 점차 상업자본을 축적하여 그들의 상권을 확대해갔다. 그리하여 17세기 이후에는 금제(禁制) 하에서도 늘어나는 자유상인의 상행위를 제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시기에도 관영수공업은 여전히 중요하였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점점 쇠퇴해가고 있었다. 공장안(工匠案)은 장인세를 징수하는 대상자의 명부에 지나지 않았다.상업의 발달에 따라 금속화폐가 필요하게 되었다. 숙종 때 상평통보가 주조된 후 17세기 말경에는 이미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이 금속화폐의 유통은 상업활동을 더욱 자극하게 되었다.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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肅宗 (1661

1720)

조선 19대 왕(재위:1674

1720). 이름은 순. 자는 명보(明普). 시호는 현의(顯義). 현종의 아들.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비는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 계비(繼妃)는 민유중(閔維重)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 계비는 김주신(金柱臣)의 딸 인원왕후(仁元王后). 1667년(현종 8)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즉위, 이해 제2차 예송(禮訟)으로 남인 허목(許穆) 등의 대공설(大功說, 九個月說)을 지지하고 기년설(朞年說, 滿一年說)을 주장하는 서인(西人)들을 배척하여 남인 정권을 수립했다.이어 남인들이 서인의 처벌문제로 강온파(强穩派)로 분열되자 허적(許積) 등 탁남(濁南)을 지지하였다가, 1680년에 허견(許堅) 등이 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자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시켰다. 당시 서인의 김석주(金錫胄)가 떳떳하지 못한 수법으로 남인의 박멸을 기도하자, 그 방법이 졸렬하다 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에서 이를 비난, 1683년에 서인이 노소론(老少論)으로 분열하게 되었다.그는 용모가 출중한 숙원(淑媛) 장(張)씨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昭儀)로 승격시키고 이듬해 장씨에게서 출생한 왕자(王子, 景宗)의 명호(名號)를 결정코자 했으나, 송시열·김수항(金壽恒) 등 서인들이 이를 반대하자 모조리 유배한 뒤 남인을 등용시켜 왕자의 명호를 정하고 왕비 민(閔)씨를 서인(庶人)으로 폐위케 한 뒤, 왕자를 낳고 소의(昭儀)에서 희빈(禧嬪)에 승격된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차츰 폐비 사건을 후회하던 그는 민암(閔?) 등이 폐비 복위 운동을 꾀하는 서인을 박멸하고자 음모를 획책하는 기미를 알고, 1694년에 남인을 추방하고 서인을 등용시킨 후 폐비를 복위케 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으며, 1701년 희빈 장씨를 무고(誣告)의 죄로 사사(賜死)했다. 이후 차츰 정계는 안정되어 소론이 우세한 집권 체제로 확정되었으나 1717년 유계(兪?)의 『가례원류(家禮源流)』가 간행될 때 정호(鄭澔)가 소론 윤증(尹拯)을 공격한 내용의 발문(跋文)으로 노론·소론 간의 당쟁이 격화되자 그가 노론을 지지함으로써 이후 노론이 중용(重用)되었다.이듬해 왕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케 했으며 병환이 위독해지자 이이명(李?命)을 불러 사관(史官)의 입회없이 연잉군(延?君) 금(昑:뒤의 英祖)을 경종의 후계자로 삼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겨(1720) 신임사화(信任士禍)의 화근을 만들었다. 조선의 왕조 중 가장 당쟁이 격심했던 시기로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태평안일했으며, 그의 애증(愛憎)의 감정 노출이 심한 것을 당인(黨人)들이 교묘히 조종하여 비참한 살육 사건이 수차 유발되었다. 선조 말 이래 계속된 사업인 대동법(大同法)을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하여 토지개혁을 추진하여 종결시켰으며, 주전(鑄錢)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중앙관청·지방관아 등에 통용되도록 하는 등 경제 시책의 결실을 보았다.특히 폐한지(廢閑地)로 버려 둔 압록강변에 무창(茂昌)·자성(慈城))의 2진(鎭)을 신설하여 옛 영토 회복 운동을 시작하고,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워 국경선을 확정시켰으며(1712), 종래 4영이던 군제에 금위영(禁衛營)을 만들어 5영을 완성하고, 재위 중 『선원록(璿源錄)』 『대명집례(大明集禮)』 등의 간행과 『대전속록(大典續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귀중한 책이 편찬되었다. 또 쟁쟁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691년에는 사육신(死六臣)을 복관시키고, 이어 1698년에 노산군(魯山君)의 묘호를 단종(端宗)으로 올렸다. 고양(高陽)에 능(明陵)이 있다.

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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隱結

토지대장에서 누락된 토지. 면세지(免稅地)를 가장하여 징세 대상에서 빠진 것으로 궁방(宮房)에 투탁(投託)하는 경우가 많았다. 토지 소유자가 은결하는 경우와 경작자가 은결하는 경우 이외에 조세를 관리하던 관리들이 부정으로 은결시켜 착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은결의 확대로 국가 재정이 크게 위협을 받았고, 일반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부담이 커졌다. 은결이 많았던 시대는 숙종 때부터 철종 때까지였다.

이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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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元翼 (1547

1634)

조선의 대신. 자는 공려(功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전주(全州). 태종의 왕자 익녕군(益寧君) 이(移)의 4대 손. 1569년(선조 2) 문과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있었으나 원래 인품이 곧아 사교를 싫어하여 공사(公事)가 아니면 나오지 않았으므로 아는 이가 없었으나 유성룡(柳成龍)만은 그의 슬기로움을 인정하고 그를 존경했다. 1573년 성균전적(成均典籍)으로 성절질정관(聖節質正官)이 되어 하사(賀使) 권덕여(權德與)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예조랑(禮曹郞)에서 뽑혀 황해 도사(黃海都事)가 되어 크게 인망을 얻었다.이이(李珥)가 황해 감사(監司)로 있을 때 그 밑에서 일을 잘 처리하여 이이가 천거하여 1576년 정언(正言)으로 임명되고, 1578년 옥당(玉堂)에 들어갔으며, 1583년 승지(承旨)가 되었다. 그러나 왕자사부(王子師傅) 하낙(河洛)이 승정원(承政院)이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고 상소함으로써 그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그 후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이조 판서로 평안도 도순찰사(都巡察使)를 겸임하고 선행(先行)하였다. 뒤따라 선조도 서행(西幸)하였는데 평양 수비에 실패하자 원익은 정주(定州)에 이르러 흩어진 군사를 모으고 정헌대부(正憲大夫)·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대동강 이서(以西)를 잘 방어했다.이듬해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평양을 회복하였다. 1592년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사도도 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고 이어 좌상(左相)이 되어 누차 소문을 올려 국사를 논했으며 선조를 간(諫)하여 한때 대신을 그만 두고 시골에 가 있었으나 1600년 다시 소환되었고 1604년 비로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고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에 피봉되었다.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고 왕대비(王大妃)를 폐위(廢位)할 때 반대하다가 홍천(洪川)으로 귀양갔으나 인조반정(1623)에 영의정으로 소환되었다. 인목대비(仁穆大妃)는 한사코 광해군을 죽이고자 하였고 모든 공신은 이에 찬성하였으나 원익은 대비에게 간청하여 이를 무사하게 하였으며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공부(貢賦)를 단일화하였다. 사후 인조의 사당에 함께 모셨다.

김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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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堉 (1580

1658)

조선의 문신·학자. 호는 잠곡(潛谷), 본관은 청풍(淸風). 인조 2년(1624) 문과에 급제하여 동왕 23년(1645)에는 관상감 제조가 되었고, 효종 1년(1649)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동왕 2년(1650) 대동법 실시 문제로 김집(金集)과 논쟁하다가 사직했으나 효종 6년(1655)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그는 경제 정책에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서 대동법 실시를 주장하고, 시헌력을 시행했으며, 상평통보의 주조를 건의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실학의 원조(元祖)격인 유형원(柳馨遠)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5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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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軍營

임진왜란을 계기로 설치된 훈련도감(訓練都監)·총융청(總戎廳)·수어청(守禦廳)·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다섯 군영. 국초의 5위가 유명무실해지고, 그 대신 임진왜란 중에 훈련도감을 설치해서 군사를 양성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의 3수(三手) 병을 훈련하였다. 이는 중국의 절강병법(浙江兵法)의 권위자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의한 것이었다. 이 훈련도감을 위시해서 5군영이 숙종 때까지 점차로 설치되어 이후 국군의 중심 부대가 된 것이다.

납속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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納贖策

조선 초기 이후부터 군량(軍糧) 등 재정궁핍과 구호대책을 보호하기 위하여 행하였던 재정정책의 하나. 납속책은 미(米) 혹은 전미(田米)를 헌납하면 그에 적합한 상을 주는 것으로, 1469년(예종 1) 황해도와 강원도의 절도사(節度使)가 한명회(韓明澮)에게 납속환염(納贖換鹽)을 청한 일이 있었으며, 1480년(성종 11) 서거정(徐居正)은 한제(漢制)에 의하여 납속보관(納贖補官)을 건의하였고, 1481년(성종 12) 경기관찰사 손순효(孫舜孝)도 건의하였다. 1485년(성종 16)에 비로소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영안도 감사에 납속시행을 명했다. 1553년(명종 8) 경상도 기민구제(飢民救濟)를 위하여 삼남지방의 납속자를 모집하였는데 사족(士族)이 납속하면 관직을 주고, 공사천(公私賤) 및 제색군사(諸色軍士)는 납속량(納贖量)에 따라 각각 가능한 청을 들어주었고, 장도(臟盜) 및 강상(綱常)에 관련된 자를 제외한 유배 이하(流配以下)의 죄인은 죄를 면해 주었다.특히 선조 때에는 임진왜란으로 재정이 탕진되었기 때문에 납속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되었다. 1593년(선조 26)에는 호조(戶曹)의 건의로 납속사목(納贖事目)을 결정하였다. 그 내용은 향리(鄕吏)는 3섬(石)의 납속으로 3년 면역(免役), 15년 간 매년 1섬씩 15섬의 납속이면 기신면역(己身免役), 30섬이면 참하영직(參下影職), 40섬이면 참하영직과 그의 아들의 신역 면제, 45섬이면 상당한 군직(軍職), 80섬이면 동반실직(東班實職)을 주고, 사족(士族)은 3섬이면 참하영직, 8섬이면 6품 영직(六品影職), 20섬이면 동반 9품(東班九品), 25섬이면 동반 8품, 30섬이면 동반 7품, 70섬이면 동반 종3품, 100섬이면 동반 정3품, 현직자는 매10섬이면 승품(陞品), 자궁자(資窮者)는 30섬이면 당상(堂上)에 승진되었다. 서얼(庶孼)은 5섬이면 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 군직 6품, 15섬이면 허통, 20섬이면 전소생의 허통, 30섬이면 참하영직, 40섬이면 6품 영직, 50섬이면 5품 영직, 60섬이면 동반 9품, 80섬이면 동반 8품, 90섬이면 동반 7품, 100섬이면 동반 6품을 주도록 규정되었다. 1594년 사목 중 사족 및 무고한 평민만 60세 이전부터 매년 1섬씩 납속하면 80세까지 생존을 예상하고 당상에 승진시켜 납속의 모집 범위를 확장시켰고, 1595년 사목을 개정하였다.납속책에 의하여 부족한 재정을 메우려는 데서 많은 모순이 생겼으니 그 예로는 납속으로 직을 얻었던 군기주부(軍器主簿) 김윤창(金允昌)·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유형(柳珩) 등이 1600년(선조 33)에 파직된 것이다. 죄인들의 형면(形免)은 사회의 많은 물의를 일으켰으므로 1583년(선조 16) 강섬(姜暹)은 북도(北道)의 죄인이 납속으로 면죄되는 폐를 지적하였다.

공명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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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名帖

조선시대 숙종 이후 시행되었던 진휼책(軫恤策)으로 부유층에게 관직의 이름을 팔아 돈을 얻던 증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가 재정이 탕진되었고, 당재의 폐로 국가 기강이 문란하였으며, 또 흉년이 자주 들어서 많은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니 조정에서는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명예직(名譽職)을 주고 그 대가로 많은 재정을 확보하였다. 이 제도는 1677년(숙종 3) 기근을 당하여 가설첩(加設帖)을 만들어 진휼청(賑恤廳)에서 매매한 데서부터 시작했다. 가설첩의 매매로 얻은 돈으로 영남지방의 기민들을 구제했으며 영조시대에 공명첩의 이름으로 여러 번 발행하여 돈을 얻어 백성을 구제하였고 순조시대에도 김재찬(金在瓚)의 적극적인 주장에 따라 공명첩을 발행하였다. 이것은 사회가 극도로 혼란되었을 때에 매관 매직을 합리적으로 조장했다.

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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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商

개성(開城)의 상인. 17

18세기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사상(私商)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이들의 상업 활동은 중요한 교역로를 따라 전국의 시장으로 뻗어나갔다. 그 중 개성 송상의 활동은 경기를 중심으로 육로를 따라 북쪽으로 황해·평안 지방, 남쪽으로는 충청·경상 지방에 미치고 있었으며, 이들은 각지에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설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호간에 단결하여 외래 상인들을 배척하였고, 기회를 틈타 이익을 취하는 데 능했다.

경원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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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源開市

조선 때 경원에서 청과 행해지던 무역. 병자호란 이후 청의 요청으로 조선에서는 북쪽 여러 곳에 시장을 설치하여 무역을 계속하였으나 경원에서 정식으로 시장을 개설한 것은 인조 23년(1645)이었다. 이 시장은 격년제(隔年制)로 하여 소·보습·솥과 모피 등을 교환하였다. 당시의 국경무역은 수동적이어서 조선의 국부(國富) 증진에 큰 공헌을 하지는 못했으나 점차 이것이 사상 활동의 영역에서 진행됨에 따라 새로운 상업 활동의 면모를 보였다. 이 경원개시는 회령개시와 함께 북관개시(北關開市)라 하였다.

회령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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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寧開市

조선 인조 이후 회령에서 청과 행하여지던 무역. 이 부근에는 조선 초에 만주 동부 및 지방 거주의 여진 간에 무역이 있었으나 개시의 기록에 의하면 인조 15년(1637)에 비롯하였다고 한다. 동왕 23년(1645)에 경원개시가 격년으로 열리게 되면서 이 두 곳에서 열린 개시를 북관개시라고 하였다. 이 회령개시는 양국 관리의 감시하에 행하여진 공무역(公貿易)이었으나 부수적인 사무역(私貿易)도 행하여졌다 한다. 이리하여 청에서는 영고탑(寧古塔)·오라(烏喇) 지방의 상인이 모여들었고, 조선에서도 함경도 지방 상인을 중심으로 서울 등지에서도 모여들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주로 소·보습·솥(釜)·소금(鹽) 등을 수출하였고, 만주에서는 청포(靑布)·모피(毛皮) 등에 그쳤다. 개시의 비용도 조선에서 부담하였던 까닭에 고통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상평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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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平通寶

조선 숙종 4년(1678)에 주조된 화폐. 숙종 4년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 등의 건의에 따라 호조·상평청·진휼청·훈련도감에 명하여 상평통보를 주조케 했다. 이 화폐는 조선 말에 신식 화폐가 주조될 때까지 근 2세기에 걸쳐 주조 발행되었는데, 그 동안 주전행정(鑄錢行政)이 문란하였고, 조정에서도 각 관청의 재정 궁핍을 구제하기 위해 주조를 허용했으므로 문무의 각 관청에서 이를 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