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발전/동학운동과 갑오경장/동학혁명

동학혁명〔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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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고종 31) 동학당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농민혁명. 조선은 후기에 와서 정치의 부패, 탐관오리의 행패, 세금의 과중 등으로 농민은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고, 특히 외국세력의 침투로 국가의 위험이 가중(加重)되는 한편 농촌의 인적계층(人的階層)의 변동에 따라 농민의 사회의식이 급속도로 발전되는 등 복잡한 정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실하에서 농민들은 막연하게나마 외국의 침략을 물리치고 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풍조가 싹트게 되었다.신흥종교인 동학은 이러한 정세를 배경으로 급속도로 발전, 단순한 종교적인 신앙의 영역을 넘어 농민들의 사상을 뒷받침하고 사회개혁·외국세력의 배척을 포함하는 정치적인 세력으로 삼남 지방에 급격히 전파되었다. 광범한 계층의 민중을 결집(結集)하는 데 성공한 동학은 때마침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처형당한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 1892년(고종 29) 12월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통문(通文)에 의하여 전라도 삼례도회소(參禮都會所)에 모인 수천 명의 교인은 진정서를 가지고 동학의 탄압과 동학·서학의 혼동을 반박하였다. 감사는 폭동을 두려워하여 동학교도의 탄압을 금하는 관문을 발표하자 이에 기세를 올린 교도는 다시 전국에 통문을 돌려 교주의 지휘 아래 중앙정부에 교조 신원을 진정할 것을 결의, 1893년(고종 30) 1월 진정서를 정부에 보내고 다시 3월에는 박광세(朴光洗) 등 40여 명이 서울에 올라가 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그런데 이때의 상소문 가운데는 외국인 배척의 내용이 들어 있었으며 서울 각처의 외국인 주택·교회·영사관 등에는 외국인의 철수를 요구하는 대자보가 붙어 있어 외국인과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호조참판(戶曹參判) 어윤중(魚允中)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보내어 무마케 하는 동시에 장위영(壯衛營)·영병관(領兵官)·홍계훈(洪啓薰)에게 군대를 주어 청주에 진주케 하고 비밀리에 원세개(遠世凱)에게 후원을 청하였다. 한편 동학교도들은 신원운동의 실패에 불만을 품고 4월 26일 전국의 교도를 충청도 보은에 소집,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5자를 새긴 깃발을 날리면서 2만여 명의 군중이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어윤중의 무마로 일단 해산, 한때 사태는 수습된 듯 하였으나 오히려 이는 정부의 무능을 표시하는 결과를 가져와 이듬해 본격적인 반란으로 확대되었다.전라도는 원래 곡창지대로 관리의 토색질이 가장 많았던 곳이며, 조선 말기 고종 때에는 대규모의 민란이 26회나 발생, 특히 고부(古阜)의 민란은 동학혁명의 직접적인 동기를 이루었다.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은 부임하자 만석보(萬石洑)의 수세(收稅)를 비롯하여 황지과세(荒地課稅)·불효(不孝)·불목죄명(不睦罪名)·대동미(大同米)·건비(建碑) 등 부당한 세금을 받아 착복하였다. 이에 분격한 농민은 한문교사 전봉준(全琫準)을 선두로 1893년(고종 30) 12월과 이듬해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체포 또는 축출당하였다. 이리하여 1천여 명의 농민은 전봉준을 선두로 1894년(고종 31) 2월 15일 관아를 습격, 세미(稅米)를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만석보의 저수지를 파괴하고 해산하였다.안핵사(按?使) 이용태(李容泰)는 이때 봉기한 농민을 동학도로 취급하여 탄압하자 다시 분격한 농민들은 4월 하순 '보국민안(輔國民安)'을 부르짖으며 백산(白山)에 진격, 부근의 농민 수천 명의 호응을 얻었다. 이에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和中)을 장령(將領)으로 삼고 농민군의 규율과 체제를 엄격히 하는 동시에 ①불살생(不殺生) ② 충효총전(忠孝叢全) 제세안민(濟世安民) ③ 축멸양왜(逐滅洋倭) 징청성도(澄淸聖道) ④ 구병입경(驅兵入京) 멸진권탐(滅盡權貪)의 4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이때의 봉기는 동학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농민의 조직은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였고, 그 지도층에는 동학의 교도가 많았다.농민군은 다시 5월 11일 전주에서 온 1천여 명의 관군과 보부상군(褓負商軍)을 격파하고 무장(茂長)·영광(靈光)으로 진격, 군기를 뺏고 죄인을 석방하는 한편 탐관오리를 추방하였다. 당황한 정부는 홍계훈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고 1천여 명의 군사로 군산에 상륙하게 하고 다시 5백여 명을 증원하여 법성포(法聖浦)에 상륙시켰으나 반란군에 패배하고 반란군은 5월 31일 전주를 점령하였다.6월 8일 청나라의 원군이 아산만(牙山?)에 도착하고 뒤따라 일본정부는 텐진조약(天津條約)에 의하여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정부는 험악한 정세가 벌어질 것을 예측, 속히 동학군을 회유하여 해산시킬 필요를 느껴 휴전을 교섭, 전주에서 강화를 맺었다. 그 내용은 ①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의 숙청 ③ 횡포한 부호의 처벌 ④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을 처벌할 것 ⑤ 노비문서의 소각 ⑥ 7종의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⑦ 과부재가의 허락 ⑧ 무명잡세(無名雜稅)의 폐지 ⑨ 인재등용, 문벌타파 ⑩ 일본과 간통(奸通)하는 자의 엄벌 ⑪ 공사채(公社債)의 면제 ⑫ 토지의 평균분작(分作) 등 12조항이었다. 강화 후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했으나 동학군은 교세확장을 구호로 그들의 조직을 각지에 침투시키고 전라도 53군에는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폐정개혁(弊政改革)에 착수하였다.그러나 이 휴전은 동학군에 불리하여 정부는 강화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한편, 청군은 물론 일본군도 6월 9일부터 1만의 군대로 인천에 상륙, 왕궁을 점령하고 7월 26일 드디어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험악한 정세를 조정하였다. 이에 동학군은 10월 12일 삼례회의(參禮會議)를 연 결과 전봉준·김개남의 과격파는 최시형·이용구(李容九) 등 온건파의 타협론을 거부하고 북상(北上), 때를 같이 하여 다시 전국적인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손병희(孫秉熙)의 10만 호서군은 3로(三路)로 나누어 논산(論山)을 거쳐 공주(公州)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과 대결, 격전·분투하였으나 근대식 훈련과 장비를 갖춘 일본군에 패배하여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재기를 꾀하였으나 배반자의 밀고로 11월 순창(淳昌)에서 체포되어 3월 서울에서 처형됨으로써 1년 간에 걸친 동학혁명은 30 40만의 희생자를 내고 끝마쳤다. 이와 같은 동학혁명은 양반사회와 관료의 부패, 외국의 침략에 대항하여 일어난 역사상 최초의 민족운동으로 지도층의 결핍과 국제 정세의 불리로 실패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동학혁명 이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쳐 대내적으로는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여 갑오경장(甲午更張)의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고 대외적으로는 청·일 양군의 출병을 유발(誘發),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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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

1860년(철종 11) 최제우(崔濟愚)가 창건한 신흥종교.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각지의 반란, 외국의 간섭, 정치의 문란, 사회적인 불안과 긴장이 계속되었으며 한편 종래의 종교는 이미 부패 또는 쇠퇴하여 민중의 신앙적인 안식처가 되지 못하였다. 새로 들어온 천주교는 유교적인 윤리에 젖은 민중에게 영합되지 않는 반면 조정의 탄압이 심하여 널리 유포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정세를 배경으로 경주(慶州) 출신인 최제우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1860년 서학(西學:기독교)에 대립되는 민족 고유의 종교를 제창, 동학이라 하고 종래의 풍수상과 유(儒)·불(佛)·선(仙)의 교리를 토대로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인내천’의 원리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의 이념과 만민평등의 이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 신앙의 구체적 방법은 21자의 주문 ‘至氣令至, 願爲大峰,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를 외우고 칼춤을 추며 ‘弓弓乙乙’이라는 부적을 태워 마시면 빈곤에서 해방되고 제병장생(濟病長生), 영세무궁(永世無窮)한다는 미신적인 것이었다. 한편 동학은 신분·적서제도(嫡庶制度) 등에도 비판적이어서 이와 같은 현실적·민중적인 교리는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되던 삼남지방에 재빨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최제우는 포교를 시작한 지 3년 만인 1863년(철종 14)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처형당하고, 최시형이 2대 교주가 되어 비밀리에 교조의 유문(遺文) 『동경대전(東京大典)』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하는 한편 교리를 체계화하고 교세를 확대시켰다. 그 후 동학혁명이 일어나 최시형도 처형을 당하고 동학은 천도교(天道敎)와 시천교(侍天敎)로 분열, 3대 교주에는 손병희가 되어 꾸준히 교리 정비와 교세 확장에 힘썼다. 동학의 교회조직은 최시형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즉 전국 각지에 세포조직인 포(包)를 설치하여 접주(接主)로 통솔케 하고, 접주(接主) 중에서 유력한 사람을 도접주(都接主) 또는 대접주(大接主)라 하여 여러 포를 통솔하는 한편 교장(敎長)·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의 6가지 직분을 두었다.

동학당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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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黨條目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정부에 대한 동학군의 요구 조건. 내용은 모두 13조로 되어 있다. ① 전운영(戰運營)을 폐지하고 옛날대로 읍으로부터 상납(上納)하게 할 것 ② 균전어사(均田御使)를 폐지할 것 ③ 탐관오리는 벌을 주고 축출할 것 ④ 각 읍의 향리 중 천금(千金)을 포탈한 자는 죽이고, 족징(族徵)을 받지 말 것 ⑤ 춘추 두 번에 호역전(戶役錢)은 옛날대로 매호 한 냥씩 정할 것 ⑥ 여러 가지 지급(支給)과 징수를 공평하게 하고 함부로 남용하지 말 것 ⑦ 각 포구에서 사사로이 쌀을 무역하는 것을 금할 것 ⑧ 각 읍 수령이 그 지방의 산을 이용하며 전답을 사는 것을 금할 것 ⑨ 각 국의 상인은 각 항구에서 매매하고 도성에 들어와 시장을 설치하거나 임의로 다니면서 장사하는 것을 금할 것 ⑩ 행보상(行補商)은 폐해가 많으니 개혁하고 벌을 줄 것 ⑪ 각 읍의 방(房)에 서리를 등용할 때 돈을 받아들이는 것을 금하고 적당한 인물을 택하여 임명할 것 ⑫ 간신들이 농락하여 국사가 날로 잘못되니 매관(賣官)하는 자는 벌을 줄 것 ⑬ 왜인과 양인을 몰아낼 것 등인데 이것으로 당시의 사회상태와 반란의 원인을 알아볼 수 있으며 뒤의 폐정개혁 조목과 대조해 봄으로써 동학혁명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최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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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濟愚 (1824

1864)

조선 고종 때의 동학 제창자. 호는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아명은 복술(福述), 본관은 경주(慶州). 본래 몰락한 양반 집안의 만득자(晩得子)로 태어나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전국의 명산대찰을 두루 찾으며, 대도(大道)를 얻고자 방황하였다. 약 20년에 걸친 구도수행(求道修行) 끝에 접령(接靈)의 기운과 안으로 강화(降話)의 가르침을 체험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철종 11년(1860) 정월부터 본격적인 포덕(布德)을 시작하고 동학을 창설하였다. 이 무렵 서학(西學)의 전래 및 시대적 불안이 가중하자 그는 민족 고유의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게 되었다. 유·불·선의 동양적인 사상에 인내천(人乃天)을 종합, 인간의 평등성과 지상천국의 현실적인 이상을 표현했다. 동학은 이후 농민 사회에 급속도로 파급되어 중대한 사회문제로 대두했으며, 후일 동학혁명의 사상적 온상이 되었다. 동왕 14년(1863) 정부는 동학을 금압하고 이듬해 최제우를 대구에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사형하였다.

『동경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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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經大全

최제우가 지은 동학의 경전. 최제우의 저작으로 그가 사형될 때 이 책도 불태워졌으나 후계자 최시형이 고종 17년(1880) 비밀리에 간행했다. 내용은 본문과 별집으로 나누어져 포덕문(布德文)·논학문(論學文)·축문(祝文)·절귀(絶句) 등이 실려 있다. 사대주의 사상에 침엽되어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빠져 있던 당시에 민생의 보국안민(輔國安民)·광제창생(廣濟蒼生)을 꾀하는 사상적 근대화를 촉진시킨 점 등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그의 저서에는 이외에도 『용담유사(龍潭遺詞)』가 있다.

교조신원운동과 복합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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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祖伸寃運動-伏閤上疏

동학교조 최제우가 처형당한 뒤의 동학 교문(敎門)은 불법화되어 많은 탄압을 받았다. 2세 교주 최시형은 은밀하게 교세 재건에 노력하여 동학이 커다란 사회적 세력으로 확대되었고, 이 힘은 교조신원운동이라는 시위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이 표면화한 것은 고종 29년(1892)의 일이다. 이 해에 수천의 교도가 삼례(參禮)에 모여 충청감사 조병식과 전라감사 이경직(李耕稙)에게 청원을 하였던바, 그 내용은 교조의 신원(伸寃), 신앙과 교단의 자유, 이서(吏胥)와 군졸배들의 탄압에 대한 항의였다. 이에 대한 반응이 미온적이매 각지의 교도들은 상경하여 복합상소로써 목적을 달성하려고 고종 30년(1893) 박광호(朴光浩)를 소두(疏頭)로 삼아 이를 단행했다. 그러나 이 또한 탄압을 받고 해산되었다.

동학군의 제1차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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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軍-第一次蜂起

고종 29년(1892)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되어 온 군수 조병갑(趙秉甲)은 부임 이래로 갖은 수단을 다 써서 농민들을 노략질했다. 그 중 가장 농민들의 원성을 산 것은 만석보(萬石洑)의 개수와 수리세(水利稅)의 강제 징수였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동학 교인(敎人) 전봉준(全琫準)의 지휘하에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군아(古阜郡衙)를 습격·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다음, 법으로 징수한 세곡(稅穀)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보고에 접한 정부는 안핵사를 파견하여 조사하였던바, 그는 전기 민란의 책임을 오로지 동학교도에게 전가하여 오히려 동학교도를 탄압하느라 횡포를 다했다.정세를 관망하던 전봉준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세워 창의문(倡義文)을 산포하고, 민중의 궐기를 호소했다. 이에 태인(泰仁)·금구(金溝)·부안(扶安) 등 각처의 농민들이 합세하여 고부군의 백산(白山)으로 몰려들어, 그 수가 수천에 도달했다. 동학군의 봉기는 이로부터 본격화하였다. 동학군은 황토현(黃土峴)의 싸움에서 관군을 맞았다. 정부에서는 홍계훈(洪啓薰)을 초토사(招討使)로 삼아 이를 토벌케 하였으나 동학군은 장성에서 이 중앙군을 패배시키고 재빨리 북상하여 전주를 점령했다. 이에 정부는 휴전 교섭을 제의했고, 그 결과 폐정 개혁을 조건으로 휴전이 성립되어 동학 교도들은 촌촌설포(村村設包)를 구호로 그들의 조직을 지하에 침투시켜 폐정 개혁에 착수했다.

동학군의 제2차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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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軍-第二次蜂起

일본군의 왕궁점령에 분격한 농민군은 이 해 10월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재기하였다. 이제는 내정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의 항쟁이라는 반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그리하여 10만여 명의 전라도 농민군이 전주 북쪽의 삼례(參禮)에 집결하였다. 그동안 전봉준이 봉기에 반대입장을 보였던 손병희는 교주 최시형의 승인하에 10만여명의 충청도 농민군(북접)을 이끌고 청산(靑山)에 집결하여 논산(論山)에 합류했다. 이들 남북연합 농민군은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일본군의 병참기지를 습격하고 전신줄을 절단하면서 서울을 향해 북상하다가 공주 남쪽의 우금치(牛禁峙)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큰 격전을 벌였다. 약 1주일 간 50여회의 공방전을 벌인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가운데 500여명의 생존자가 전주 남쪽의 금구 원평(院坪)으로 후퇴하였다.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일본 공사의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으며(1895. 4), 나머지 농민군의 지도자들도 체포 혹은 살해되었다. 이로써 동학농민전쟁은 거병한 지 1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동학농민전쟁은 동학이라는 종교조직과 동학인의 지도하에 일어난 농민항거라는 점에서 이전의 민란과 다르며, 뒤늦게나마 외세배척을 목표로 했다는 점도 처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조건하에서 동학농민전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당시의 최우선 과제는 열강의 침투를 막아 낼 수 있는 부국강병한 산업국가를 세우는 것이라 할 때, 농촌문제를 내걸고 중앙의 모든 정치세력을 적으로 만든 것은 개혁의 순서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둘째, 농민군은 일차적으로 적대세력이 될 수 없는 지주·부호·양반 등 향촌사회의 유력자들까지 공격하여 오히려 이들은 민보단(民堡團)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과 대결하게 되었다. 이는 농촌사회의 역량을 스스로 분열시키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셋째, 과단성은 있으나 신시대 감각이 뒤지는 대원군에 의지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따라서 갑오동학농민전쟁은 애국적이고 애민적인 동기에서 일어났지만 이 시대의 과제와 전략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려깊은 민중혁명은 아니었다.결국, 동학농민전쟁은 순박하고 애국적인 농민들의 자기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실패경험을 바탕으로 농민층의 반일애국주의가 다음 시기의 의병운동에 양반유생과 더불어 함께 참여하는 성숙성을 보여주게 되었으며, 농민들의 내정개혁요구는 갑오경장에 부분적으로 반영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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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宗 (1831

1863)

조선 제24대 왕. 재위 1849

1863년. 휘는 변(?), 초휘는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광(壙)의 셋째 아들. 1849년(헌종 15)에 덕완군(德完君)에 피봉, 헌종이 후사(後嗣) 없이 승하하여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純祖妃 安東金氏)의 명으로 강화에 촌거(村居)하다가 승통을 이어 1850년 19세로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왕는 나이가 어리고 촌에서 농경(農耕)을 하다가 왔으므로 대왕대비가 수렴정치를 하였다. 1851년에 왕대비의 군친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王妃:哲仁王后)로 삼았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고 국구(國舅)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말부터 세도(勢道)의 폐해는 사라지지 않고 또다시 안동 김씨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3년부터 친정(親政)은 하였으나 정계(政界)는 김씨 일족의 독무대가 되고 백반(百般)을 전횡하니 정치는 어려워지고, 기강은 문란해졌으며, 수뢰는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따라서 삼정은 어려워지고

도처에 탐관오리가 늘고, 백성을 착취하니 인민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이에 민중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여 1862년에는 진주(晋州)에 민요(民擾)가 일어나 삼남일대를 휩쓸었으며, 잇달아 함흥(咸興)·제주(濟州)에서도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현상에 최제우의 동학은 시의에 맞는 사상운동으로 날로 커져갔다. 관에서는 겁을 내어 1863년에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고 최제우를 잡아 대구에서 처형하였으나 그 운동은 그치지 않았다. 재위 14년 만인 1863년 12월에 병환으로 하세하였다. 철종은 정치를 모르는 농군의 아들로 즉위하여 세도의 농간으로 국정을 제대로 잡아보지도 못하고, 후사(後嗣)도 없이 요절하고 말았다. 예릉(睿陵)에 장사하였다.

철종조의 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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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宗祖-民亂

조선 철종 때 삼남지방(三南地方)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농민봉기(農民蜂起). 농업을 위주로 한 자연경제를 재정적 기초로 삼은 조선은 국고(國庫) 수입을 전적으로 농민에게 의존했다. 따라서 재정적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농민의 부담은 과중해지고 특히 조선 말기 삼정(三政)의 문란과 지배층의 가혹한 착취, 세도정치에 의한 정치적 모순, 문호개방(門戶開放) 이후 급속히 증가된 지출비(支出費) 등은 농민에게 2중·3중의 부담을 겹치게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조세를 징수하러 오는 아전(衙前)들의 행패는 막심하였다. 이 결과 초가 4칸(間)을 가지고 있는 자도 1년 세납이 1백여 금(金)에 달하였고, 토지 5·6두락(斗落)을 가지고 있는 자가 4섬(石) 이상의 조세를 바치는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농민들 속에 자라나는 관리계급에 대한 불평은 농민의 봉기를 일으키게 하고야 말았다. 이러한 사정은 조정에서도 논의되어 1861년(철종 12) 왕은 지방관리의 행패를 엄중히 처단하도록 명령하였으나 당시의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이듬해 2월 중순부터 영남의 진주를 필두로 전국적인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병사(兵使) 백낙신(白樂莘)의 착취와 박해에 있었는데 그는 횡령·취잉(取剩:還穀의 이식을 많이 받는 것)·공갈·늑징(勒徵:불법으로 田稅를 받는 것)·배호백징(排戶白徵:戶別로 강제징수하는 세금) 등을 감행, 민원(民怨)을 사니 전 교리(敎理) 이명윤(李命允)과 같은 양반 지식인이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나서서 향리(鄕里)의 간부들을 가담시키고 머슴살이의 초군(樵軍)·목동까지 규합하여 어느 정도의 조직과 훈련을 갖게 한 다음 그들을 전위부대로 외촌(外村)에서부터 읍내로 진격했다. 조정에서는 이 보고를 받고 2월 29일 박규수(朴珪壽)를 안핵사(按?使)로 삼아 사태를 수습케 하였으나 한번 터진 농민의 분노와 항쟁은 진주에서 그치지 않고 삼남지방에 널리 파급되었다. 즉 3월에는 전라도 익산, 4월에는 경상도 개령, 전라도 함평, 5월에는 충청도 회덕·공주·은진·연산·청주, 전라도의 여산·부안·금구·장흥·순천, 경상도의 단성·함양·성주·선산·상주·거창·울산·군위·비안·인동 등지에서 계속적으로 폭동이 일어나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필두로 삼남 각지에 안핵사·선무사(宣撫使)·암행어사를 파견, 사태를 수습케 하여 민란의 주모자는 극형에 처하고 탐관오리를 징계하는 한편 삼정의 근본적인 시정책을 강구하는 등의 태도를 취하였다. 이에 박규수는 민란의 원인이 국가재정의 소모와 민생의 궁핍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삼남지방에는 100호(戶) 미만에 10만 9천 8백여 섬(石)의 화곡을 징수하므로 매호당 거의 1천 9백 섬의 부담이 되는 등의 농민의 생활상을 말하고 이 시정책으로 환곡제도의 폐지를 상소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접수, 삼정의 개혁을 위한 이정청(釐整廳)을 설치하여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을 공포하였다.그 내용은 전정(田政)과 군정(軍政)에 대해서는 민원을 참작하여 그 폐해를 시정하는 데 힘을 쓰고 환정(還政)에 대해서는 23개조의 수습방법을 열거, ① 전국의 환곡 수량을 2백 36만 1천9백98섬으로 고정하고 1백 50만 섬은 보유미(保有米)로 항상 두어 둘 것 ② 허류(虛留:문서상으로만 남아 있는 양곡) 환곡 2백 81만 6천9백16섬 중 3분의 2는 탕감하고 3분의 1은 관리나 아전들이 포탈한 것이 명백하므로 그들에게 본전만은 10년 연부로 상납(上納)케 하되 1천 섬 이상을 포탈한 자는 명부를 작성 조사하여 처벌한다 ③ 전국 전결(田結)의 실제 경작수를 밝혀 매결당 2결씩 결전(結錢)의 예에 따라 납부케 한다는 등의 응급조치를 취하였다. 이같이 하여 치열하던 각 지방의 민란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으나 그 해 여름의 한발(旱魃)과 수해(水害)로 다시 민심이 동요, 8월 이후에는 다시 전국적으로 민란이 확대되었다. 9월에는 제주도(濟州道)에서 수만 명의 농민이 폭동을 일으키고 10월에는 함경도 함흥, 11월에는 경기도 광주, 12월에는 경상도 창원, 전라도 남해, 황해도 황주 등지에서 민란이 폭발, 그 해가 저물도록 전국은 불안이 계속되었다. 이듬해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금위영(禁衛營)의 군졸까지 소요를 일으켜 좀처럼 안정될 기세가 보이지 않았으나 결국 무능한 철종이 죽고 그와 함께 외척 안동 김씨의 세도도 몰락하여 국가 전반의 변동을 초래, 농민의 항쟁도 다시금 소강상태를 가져왔다. 그러나 20년이 못 가서 민씨의 세도하에 발생한 임오군란(壬午軍亂)과 동학란은 이들 민란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니 조선은 스스로 붕괴 과정을 촉진시키고 말았다.그런데 민란은 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발생하였으며 재정의 문란과 관리들의 행패는 오래 전부터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철종 때에 와서 폭발하게 되었느냐에 대한 문제는 민란문제를 다루는 데 중요한 과제다.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로 방납(防納)을 통해서 무제한으로 축재(蓄財)를 할 수 있었던 지배층은 동요를 면치 못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법적인 보호를 받게 된 농민층은 점차 경제적인 자의식과 권력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되었다. 한편 비옥한 삼남지방은 어느 지방보다 착취의 피해가 컸던 만큼 이에 대한 농민의 의식수준도 높아져 말단 관리와 결탁함으로써 면세(免稅)·면역(免役)을 취하던 종래의 소극적 방법을 버리고 그들 자신이 신분적으로 양반층에 승격하여 지배층과 동등한 계층에 소속되려는 대담한 방법이 강구되었다. 이리하여

숙종 때에 이르기까지 신분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으며 이들은 종래의 양반층과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하여 나머지 농민의 부담은 한층 증가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반 농민의 피해는 가중되고 한편으로는 농민의 의식이 성장되어 가혹한 피해를 겪는 동안 반항심과 투쟁의욕을 북돋아 드디어 철종 때에 이르러 민란으로 폭발되었으니 이는 어느 모로 보나 엄격한 계급제도와 경제적 봉건성에 대한 붕괴과정을 의미하는 것이요 근대사회로의 추진력이 된 것이다.

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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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時亨 (1827

1898)

조선말 동학(東學)의 제2대 교주(校主). 초명은 경상(慶翔). 호는 해월(海月). 본관은 경주. 종수(宗秀)의 아들. 경주 출생으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造紙所)에서 일을 하다가 1861년(철종 12) 동학 교도가 되었고,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이듬해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에 은신, 그 후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安東)·울진(蔚珍) 등지로 전전하며 포교(布敎)에 힘썼다. 1871년(고종 8) 이필제(李弼濟)가 그의 승낙없이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전개, 영해(寧海)에서 민란을 일으켜 동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가중되자 소백산의 암굴에 피신하였다. 그 뒤 영월(寧越)을 거쳐 인제(麟蹄)에 가서 『동경대전(東京大典)』을 간행하고, 이어 단양에서 『용담유사(龍潭遺詞)』를 발간하는 등 경전(經典)을 완성,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정국이 소란하여 동학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조직 강화에 힘써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하여 종교로서의 면목을 일신했다. 1892년 손천민(孫天民)·손병희(孫秉熙) 등의 주장에 따라 충청도 관찰사에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을 요구하는 글을 보냈으나 묵살당하자 이듬해 2월 제2차 신원운동을 전개, 박광호(朴光浩)를 소두(疏頭)로 하여 각 도의 동학 대표자 40여 명을 보내어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고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왕으로부터 해산을 조건으로 선처를 약속받고 일단 해산했으나, 시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다시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보은(報恩)의 대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의 집결을 명령하는 한편, 교조의 신원과 부패 관리의 처단 및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으로부터 파견된 선무사(宣撫使) 어윤중(魚允中)과 면담하여 선처를 약속받고 우선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 탐관이 파면되자 자진 해산했다.그는 모든 운동에서 일체의 폭력 사건을 엄금하도록 시달했으나, 1894년 고부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琫準)이 농민과 동학도를 지휘하여 동학 혁명을 일으키자 교주로서 이에 호응, 북접(北接) 산학 동학도를 궐기시켜, 청산(靑山)에 집결했다가 회덕(懷德)의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했으나 관군과의 충돌을 피해 우선 해산시켰다. 그러나 각지의 관군을 격파하여 요구 조건의 이해을 수락받고, 동학군을 해산시켰던 전봉준이 일본군의 상륙과 정부의 요구 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9월 재기포(再起包)하자 그도 북접 각지의 접주(接主)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만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논산(論山)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하였다. 이에 관군·일본군의 연합군과 공주에서 싸워 참패, 논산을 거쳐 장수(長水) 등지에서 연패하고 영동(永同)·청주(淸州)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송경인(宋敬仁)에게 피체,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했다. 1907년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伸寃)되었다.

전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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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琫準 (1854

1895)

조선 동학혁명(東學革命)의 지도자. 초명은 명숙(明淑), 별명은 녹두장군(綠豆將軍). 창혁(彰赫)의 아들. 전북 태인(泰仁)출생. 아버지가 민란(民亂)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30세 때 동학에 들어가 고부 접주(古阜接主)가 되고 각지를 다니며 동지를 규합, 한편 은거 중인 대원군(大院君)과도 접촉하며 국정 개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1892년 조병갑(趙秉甲)이 고부 군수(古阜郡守)로 부임,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근거없는 죄명을 씌워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貪虐)을 자행하던 중 수세(收稅)를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洑)를 축조, 불법으로 수세(收稅)를 징수하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힘에 의한 응징을 결심, 이듬해 1월 농민과 동학 교도를 이끌고 궐기, 관아(官衙)를 습격하여 강탈되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반환하고 부패한 이속(吏屬)들을 감금했다.이 보고를 받은 정부에서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使)로 보내어 선처를 확약하자 일단 농민군을 해산,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으나 이용태 역시 탐학이 심했으며 농민군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처벌을 감행했다. 이에 재봉기(再峰起)를 결의, 이 기회에 국가 정치와 사회제도의 전면 개혁을 단행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동학사상을 펼 뜻을 굳혔다. 이해 3월 동지 정익서(鄭益瑞)·김도삼(金道三) 등과 협의하여 동학의 조직을 이용, 동학 교도를 주도 세력으로 하고 농민대중의 호응을 얻어 진용(陳容)을 정비하고 고부의 백산(白山)을 근거로 8천여의 병력으로 대오(隊伍)를 편성, 동도대장(東徒大將)이 되어 척왜(斥倭)·척양(斥洋), 부패한 지배 계급의 타파 등 사대 강령(四大綱領)을 내세우고 부근의 군읍(郡邑)으로 진격, 관군(官軍)을 무찔렀다. 중앙에서 관군을 이끌고 온 양호 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을 황토현(黃土峴)에서 대파하고 이어 부안(扶安)·정읍(井邑)·고창(高敞)·무장(茂長) 등을 장악, 4월 28일에는 전주(全州)를 점령했다.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淸軍)이 오고 동시에 텐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입국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탐관의 응징, 시정(施政)의 개혁, 노비의 해방 등 12개 조목의 실현을 확약받고 일단 선유(宣諭)에 응하기로 결정하여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 후 20여 명의 간부를 인솔, 각지로 다니며 교도를 격려하고 집강소(執綱所)를 전국에 설치하는 등 조직 강화에 힘쓰는 한편 정부의 관헌들과 대등한 처지에서 시정을 감시하고 신임 관찰사 김학진(金鶴鎭)과 도정(道政)을 상의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차지했다. 그러나 부패한 지배 계급의 근절과 근본적인 시정 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진전됨에 따라 점차 조선에서의 침략 행위를 더해가는 일본의 흉계에 격분, 다시 봉기했다. 9월 삼례(三禮)에서 남도 접주(南道接主)로 10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 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로 10만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항일 구국(抗日救國)의 기치를 들고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다. 한때 중부·남부의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특히 이천(利川)·목천(木川)·공주(公州) 등지에서 혈전(血戰)을 벌였으나 우수한 무기와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패배, 11월의 금구(金溝) 전투를 최후로 분쇄되고 말았다. 이에 수명의 동지들과 순창(淳昌)에 피신, 재기를 도모하다가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韓信賢) 등 지방민의 급습으로 피로리(避老理)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고 이듬해 3월 사형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