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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수·당과의 투쟁〔槪說〕
편집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반도의 중앙을 점유하자 고구려와 백제는 동맹을 체결하여 신라로 하여금 고립적 존재가 되게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 특히 당에의 통로인 당항성(黨項城, 南陽)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명장 온달(溫達)이 영양왕 초에 한강 유역을공격하다가 아차산성(阿且山城, 廣壯津峨嵯山城) 밑에서 전사한 것도 유명한 이야기다.이렇게 반도에서 정세 변화가 있던 6세기 후반기 이후는 동양 전체의 국제 정세에도 긴장이 조성되던 때였다.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을 수가 통일하고, 몽골에서는 유목민족인 돌궐족(突厥族)의 신흥 세력이 수를 위협했다.한편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는 돌궐과 연결하여 수에 대항하려 했고, 백제는 바다 건너 일본과 통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합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수와 신라는 손을 잡았다. 이 양대 진영의 대립은 장차 풍운을 불러올 조짐을 보였다. 공격의 선수는 고구려가 취하였다.영양왕 9년(598) 고구려는 요하를 넘어 요서(遼西)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하여 수나라 문제(文帝)는 수륙으로 군대를 동원, 반격하였고, 양제(煬帝)에 이르러서는 일대 침략이 시도되었다. 양제는 자신이 건설한 대운하(大運河)를 통하여 운반된 미곡을 군량으로 삼고, 113만여 대군으로 요하를 넘어 공격해 왔다.요동성(遼東城) 공격에서 실패한 수군은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이 거느린 별동대(別動隊)로 하여금 평양을 직접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유도 작전에 속아 살수대첩(薩水大捷)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그 후 양제는 수차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수가 망하고 당(唐)이 중국을 통일하니, 고구려는 당의 공격을 예상, 천리장성을 구축하여 국방을 굳게 했다. 이즈음 고구려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독재 정치를 하였다. 한편 그는 강력한 대외 정책을 써서 당이나 신라에 대항하고, 백제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하여 원군을 청하는 신라 김춘추(金春秋)의 청을 거절하고 한강 유역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이 실시된 것이다.당태종은 요하를 건너 몇 개의 성을 함락하였으나 안시성(安市城)의 공방전(攻防戰)에 끝내 실패했으며, 후에도 몇 차례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수·당의 침입에 대한 고구려의 끈질긴 항전(抗戰)과 승리는 이민족(異民族)의 침략에 대한 민족 항쟁사상 높이 평가될 만한 사실이라 하겠다.
영양왕
편집?陽王
고구려 제26대 왕(재위 590
618). 일명 평양왕(平陽王)임. 즉위 후 수(隋)의 침공에 대비하여 조공(朝貢)으로 화친을 꾀하다가 영양왕 9년(598) 말갈(靺鞨)의 군사 1만을 이끌고 요서(遼西)를 선제공격하였다. 이에 수 문제(文帝)가 3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이를 격퇴시켰다. 11년(600)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유기(留記)』 1백 권을 재편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게 했다. 19년(608)에 신라의 우명산성(牛鳴山城)을 함락하였으며, 23년(612) 수 양제(煬帝)가 113만의 수륙군(水陸軍)으로 침입하자 을지문덕을 시켜 살수에서 적을 섬멸케 했다. 그 후에도 계속 수의 침략을 물리쳐, 수 멸망의 한 원인을 만들었다.
온달
편집溫達
고구려의 장군. 살림이 구차하여 구걸로 어머니를 봉양했고, 남루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다녔기 때문에 ‘바보 온달’로 불리었다.뒤에 왕의 반대를 물리치고 그를 찾아온 평강공주(平岡公主)와 결혼한 후 학문과 무예를 익히고 해마다 3월 3일에 열리는 사냥 대회에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올렸다.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요동을 거쳐 고구려에 침입하자 선봉에 나서 승전, 제1의 전공자가 되고, 대형(大兄)에 승진했다.영양왕 1년(590)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이북 땅을 탈환하고자 출정하여 아차산성(阿且山城)의 싸움에서 적병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을지문덕
편집乙支文德
고구려 명장(名將). 중국을 통일한 수가 영양왕 23년(612) 수륙 양군 113만여 명으로 고구려에 침입하자 고구려군을 지휘, 압록강에서 대치하다가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적의 정세를 살피고 돌아왔다. 적의 군사력을 소모시킬 계략으로 패배를 가장하면서 적을 평양성 30리 밖까지 유인했다. 적장 우문술(宇文述)·우중문(于仲文)이 험난한 평양성을 함락하기 곤란하다고 판단, 회군하자 살수(薩水, 청천강)에서 맹공격하여 대승했다. 이때 수나라 육군 중 살아간 사람은 2천 7백여 명에 불과했다. 침착 대담하고 지략(智略)과 무용(武勇)에 뛰어났으며, 시문(詩文)에도 능했다.
살수대첩
편집薩水大捷
612년(영양왕 23)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한 것을 살수[淸川江]에서 격퇴시킨 싸움. 중국에서 통일 세력을 형성한 수나라는 고구려가 돌궐과 내통하여 수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알고, 동년 1월 113만 3천 8백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수나라 군사는 하루 1군(軍)씩 보내 40일 걸려 겨우 출발이 끝났으며, 깃발은 960여 리에 뻗쳤다 한다.이해 4월에는 요하를 건너 별대(別隊)는 양제의 지휘하에 고구려의 요새인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성군은 힘써 싸웠으므로 수군은 조급해져서 다시 별동대 30만 5천명을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켜, 단숨에 평양성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하여 적진에 들어가서 적의 허실을 보았는데, 적장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사로잡고자 하였으나 유사룡의 말을 듣고 돌려 보냈다. 우중문과 우문술은 후회하고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올 때, 을지문덕은 하루에 적과 7전(戰)하였으나 계속 거짓으로 패하였다. 적장은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에 속은 것을 모르고 살수를 건너 평양성 북쪽 30여리 지점에까지 밀려왔다. 을지문덕은 적장에게 희롱하는 시를 써서 보내니, 수군이 비로소 꾀임에 빠진 것을 알고, 허둥지둥 후퇴하게 되자 도처에서 고구려군의 반격을 받게 되었고, 살수를 반쯤 넘었을 때 고구려군의 총공격을 받아 거의 전멸되었다. 적장 신세웅은 여기서 전사하고 군대는 패망하여 고구려군은 멀리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탈환하였다.
연개소문
편집淵蓋蘇文
?
665(보장왕 24) 고구려 말엽의 재상. 일명 개금(蓋金), 성은 천(泉). 일본측 기록에는 이리가스미라고 있으니 이것이 원명에 가까운 것 같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동부(東部:혹은 西部라고도 함)의 대가 (大加:部族의 長) 및 대대로 (大對盧:의정부의 수상)가 되었다. 628년(영류왕 11) 왕명으로 장성을 쌓으니, 남녀를 막론하고 동원되어 고통이 심하였다. 성품이 호방하고 안하무인이어서 여러 신하들이 그를 죽이고자 임금과 밀의한 것을 알고 642년(보장왕 1) 영류왕 이하 반대파 중신들 100여 명을 죽이고 보장왕(영류왕의 조카)을 추대한 후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독재를 하였다. 백제와 함께 신라를 쳐 당항성을 빼앗았으며, 643년(보장왕 2) 당(唐)나라의 숙달(淑達) 등을 초청, 도교를 퍼뜨리고, 평양에 용인성을 쌓았다. 자주 신라를 침공하니 신라의 요청으로 당나라는 고구려·신라 양국의 국교를 조정하려고 사신을 보내왔으나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하고 오히려 당나라 사신을 구금까지 하였다. 당태종은 이에 격분, 친히 장량·이세적을 거느리고 664년(보장왕 3) 내침하여 안시성을 포위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 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과했으나 당은 듣지 않고 수차 쳐들어왔다가 모두 실패하였다. 연개소문이 죽고 맏아들 남생이 막리지가 되었으나 동생 남건·남산과의 세력 싸움으로 남생이 당나라로 도망쳐 구원을 청하니 당나라는 이세적으로 하여금 668년(보장왕 27)에 고구려를 쳐 드디어 멸망케 하였다.
남생
편집男生
고구려 말의 재상. 연개소문의 장자. 보장왕 25년(666) 연개소문이 죽자 대막리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동생 남건·남산과의 이간을 꾀하는 자가 있어, 남건·남산은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남건이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남생을 쳤다. 이에 남생은 패하여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의 아들 헌성(獻誠)을 당에 보내어 항복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보장왕
편집寶藏王
고구려 제28대 왕(재위 642
668). 영류왕(榮留王)의 아우.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왕위에 추대하였다. 당에서 도교를 구하여 처음으로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받아들였다. 보장왕 4년(645), 당태종이 친히 이세적(李世勣) 및 장량(張亮)이 이끄는 육군과 수군을 거느리고 내습하여 요동과 백암(百岩) 두 성을 함락하였으나 안시성(安市城) 싸움에서 격퇴, 동왕 20년(661) 소정방(蘇定方)이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나 연개소문에게 패하고 돌아갔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의 아들들이 세력다툼을 벌인 때인 27년(668), 나·당 연합군의 침입을 받고 항복, 고구려는 28대 705년 만에 멸망했다. 『구당서(舊唐書)』 고구려전을 보면 막리지는 중국의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중서령(中書令)의 직을 겸한 것이라 한다.
안시성의 공방전
편집安市城-攻防戰
보장왕 4년(645) 고구려와 당 사이에 벌어진 전쟁 중 안시성에서 있었던 일대 공방전. 고구려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수(隋)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唐)은 숙적(宿敵)인 고구려의 정벌에 나섰다. 이세적(李世勣)·장량(張亮) 등이 지휘하는 당의 대군은 보장왕 4년(645) 봄 요수(遼水)를 건너 현도성에 이르렀다. 고구려는 이 일대의 성을 굳게 지키며 대항했으나, 당은 개모성(蓋牟城)·비사성·요동성·백암성을 점령하고 안시성을 공격하여 왔다. 양쪽은 갖은 전략으로 공방전을 계속했다.
고구려군의 사기는 날로 올라가고 용감무쌍해졌으나 당은 군량이 떨어지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군대를 돌려 돌아갔다. 당시 안시성의 수비대장은 양만춘(楊萬春 또는 梁萬春)이라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