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고대국가의 형성과 문화/동·남부의 부족사회

동·남부의부족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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槪說〕

동해안에 면한 지역에는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라 불리는 부족 사회가 할거하고 있었다. 이들은 예맥족의 한 지족(支族)으로 고구려와 언어·풍속이 비슷하였다.옥저에 있어서나, 동예에 있어서나 간에 전 부족 사회를 지배할 만한 대족장 세력은 성장되지 않았다.대륙으로부터 전파된 금속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3~4세기경 후에는 한강 이남으로 전래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이 지역에 있어서의 원시사회는 부족사회로 전환되었다.북부 사회보다는 뒤늦게 그 형식이 변모된 남방식 지석묘가 이 시기에 각처에서 축조되었으며, 또 그러한 사실은 부족사회의 성립이 그만큼 뒤늦었음과 그 발전 과정이 북부사회의 그것과 비슷함을 말해주는 것이다.기원전 2세기경 위만이 고조선의 지배권을 장악할 무렵 이 지역에는 진국(辰國)이 있었고, 이들은 중국의 군현세력에 저항하면서 점차 부족연맹 세력을 형성하여 갔다. 그 결과 삼한(三韓)이라고 통칭하는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 등 세 그룹의 부족사회가 생겨, 기원후 3세기경에는 대방군에 공격을 가하기도 하고 직접 진(晉)과 교섭하기도 했다.일찍이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던 목지부족(目支部族)은 기원후 3세기 전반에 이르러 소멸된 것 같다. 이리하여 고구려로부터 망명해 온 백제(伯濟)의 부족이 그 지배권을 대신하였다. 전설상 온조가 영도한 백제는 마한 세력을 결합하여 백제왕국(百濟王國)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으로 진한의 여러 부족 중에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중심으로 한 사로(斯盧)가 경주 평야의 6촌(六村)의 씨족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금속문화를 수용해서 점차 세력을 키워갔다.삼한은 사회 발전이 늦어 씨족사회적인 요소가 오래 계속되었다.
기원전 2~3세기에 이르기까지 삼한 사회에 있어서 부족간의 권력에 크게 차이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세력의 대소에 따라 신지(臣智)·읍차(邑借) 등으로 불리는 족장이 있었으나 그들은 아직도 지역적으로 조직화된 권력을 형성하지 못하여 서로 제어할 수는 없었다.그러나 제정(祭政)은 일찍부터 분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제사권은 족장 외에 천군(天君)이란 것이 따로 있어, 각기 소도(蘇塗)라고 일컬어지는 특별 구역에서 매년 1/2차 제사(祭祀)가 행해졌다.
이미 노예제는 성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관개시설(灌漑施設)이 갖추어졌으며, 삼한 전 지역에 걸쳐서 벼농사가 행해졌다. 또 견직물과 철(鐵)이 생산되었다. 예속(禮俗)이나 기강은 제대로 서지 않았고, 남녀노소가 움집 또는 귀틀집에서 살았으며, 복식과 주거 양식에 있어서는 지배층과 씨족원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장사에는 관(棺)만을 사용하였고, 특히 변한에서는 큰 새의 날개를 함께 부장했다.농업을 주로 한 삼한 사회에 있어서는 5월의 파종(播種)과 10월의 수확 후에 제천의식을 행하고 전 씨족원이 모여 음주와 가무로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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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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沃沮

고대에 있어서 함경도 함흥 평야를 중심으로 한 북부의 부족사회. 북은 읍루·부여, 남은 예(濊)에 접하고 있었다. 일찍이 임둔이라 불리던 토착사회가 있어 뒤에 여기에 임둔군이 설치되었다.그 후 옥저는 동예와 함께 고구려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으나 토착사회의 거수(渠師, 族長)들의 세력은 보존되었고 이들을 통하여 공물(貢物)이 징수되었다. 옥저 사람들은 맥포(貊布)·물고기·소금 등을 고구려에 가져갔고 또 미녀도 보냈다. 토지가 비옥하여 농경이 발달되고 해산물도 풍부하여 생활 조건이 좋았으나 그 대신 고구려의 수탈(收奪)을 당하였다.고구려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한 옥저는 북위의 고구려 정벌의여파로 동천왕 때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동옥저·남옥저로 갈라져 있던 옥저의 풍속은 고구려와 대개 비슷하나 예부제(預婦制:민며느리제)의 혼인 풍습과 장례 방식은 특이하였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먼저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후에 뼈를 거두어 큰 나무관 속에 장사지냈다.

예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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預婦制

옥저의 혼인 풍습. 옥저에서는 여자가 10세가 되면 결혼을 하고 서가(壻家)에 가서 자랐는데, 성인이 되면 여자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자의 집에서는 전폐(錢幣)를 청구하여 그것이 끝난 뒤에 서가로 보냈다.

데릴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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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만 있는 집안에서 혼인한 딸을 시집으로 보내지 않고, 처가에서 데리고 사는 사위. 솔서(率壻)·예서(預壻)·서양자(壻養子)·서류부가(壻留婦家)·초서(招壻)·췌서(贅壻) 등 예로부터 남자가 처가에서 사는 유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데릴사위 혼인과 혼동되는 경향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딸만 있는 집안이 동족(同族:同姓)에서 양자를 입적시키고, 사위는 별도로 맞이하여 그의 노동력으로 가사를 돌보게 하는 솔서혼을 말한다.
고구려의 데릴사위제는 서류부가로, 남자가 혼인을 한 뒤 일정 기간 처가에서 살다가, 남자집으로 돌아와 사는 혼인 형태이다. 

『위서(魏書)』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남녀 간에 혼담이 이루어지면 여자집에서는 ‘서옥(鋤屋)’이 라는 작은 집을 세우고, 날이 저물어 사위가 돈과 폐물을 가지고, 집 밖에서 여자와 동숙할 것을 청하면 부모가 사위를 서옥으로 안내하여 여자와 동숙하게 함으로써, 결혼생활이 시작되는데, 남자는 자녀가 장대하여야 비로소 처자를 데리고 본가로 간다 하였다.

이러한 서류부가의 혼속을 사위가 처가에 장기간 머물며, 노력을 제공하는 봉사혼(奉仕婚)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이를 조선 중기 효종 때의 『반계수록(磻溪隨錄)』에는“사대부가는 고루구간(固陋苟簡)하여 사위가 처가에 유하므로, 처를 취하지 않고 장가든다.”라고 표현하였다. 수천 년 내려온 서류부가(혼속)은 체류 기간이 조선 후기에는 13년으로 단축되었다.

동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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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濊

지금의 원산 부근인 안변(安邊)지방을 중심으로 중부 동해안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부여 계열의 부족사회. 옥저와 마찬가지로 한의 군현으로 있다가 후한(後漢) 말에 고구려에 복속했다.주민은 옥저·고구려와 같은 예맥족이며 언어·풍속도 거의 같았다. 『위지(魏志)』에 의하면 호수(戶數)는 2만 정도이나 군주가 없었으며, 옥저의 삼로(三老)와 같이 중국 민족이 온 이래 후(侯)·읍장(邑長)·삼로(三老)의 관명을 사용하며 서민을 다스렸다.

여러 부족 사회를 통틀어 지배할 만한 대족장 세력이 성장하지 못하고 있어서 책화(責禍)라는 씨족사회의 유습(遺習)이 남아 있었다.동예의 법속으로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원시 형법이 사용되었으며, 도적이 적었다. 또한 경제 생활은 크게 발달하지 못했으나 반어피(班漁皮, 海豹皮)·문표(文豹)·단궁(檀弓)·과하마(果下馬) 등의 특산물이 산출됐다.혼상법(婚喪法)은 고구려와 비슷하여 동성(同姓)간에는 혼인을 하지 않고 질병자나 사망자가 있으면 곧 집을 버리는 등 금기(禁忌)가 많았다. 주민은 검소·근면하고 싸움에 능하였다. 매년 10월에 무천(舞天)이라 일컬어진 제천행사가 있었다.

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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責禍

동예에 있어서 생활권을 상호 존중하는 일종의 벌칙으로 씨족사회의 폐쇄성을 말해주는 유풍. 동예에서는 씨족 상호간에 생활권을 존중하여 서로 다른 씨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만약 이를 어기고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침범자측에서 노예와 소·말로 배상하게 하였다.

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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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天

동예에서 행하던 제천의식. 매년 10월에 공동으로 큰 제사를 지내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춤과 노래로 즐겼다. 이것은 고대의 다른 부족사회에서와 같이 하늘과 태양에 농사를 잘 짓게 해준 감사의 의식이며, 또한 부락민 사이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풍속에서 유래된 것이다.

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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辰國

삼한 각 부족국가의 명칭이 생기기 이전에 있었으리라고 추정되는 목지국 진왕(辰王) 세력하의 부족 연맹체. 기원전 4-전 3세기경부터 금속문화가 한강 이남으로 전파되면서 남한의 원시사회가 붕괴되고 새로운 정치적 사회가 성립되었는데, 이를 진국이라 한다.위만조선이 대동강 유역에 웅거할 때 진국은 금속문화의 수용을 위하여 한(漢)과 통교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준왕(準王)을 비롯하여 고조선 지방으로부터 다수의 유이민(流移民)이 밀려오고, 한의 4군 설치 후 금속문화가 광범하게 전파됨에 따라 사회적 변화가 싹텄다. 이들 유이민은 토착사회와 결합하여 점차 세력을 키워갔다.





 

 

 



삼한



위   치



중심국과 소속국



삼 국

시 대



종래학설



신학설



마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충청도, 전라도



목지국(직산) 등 54국



→백제



진한



경상도 지방



경기도, 강원도, 일부



사로국(경주) 등 12국



→신라



변한



경남 서남쪽

(낙동강하류)



낙동강 유역,

경상도



구야국(김해) 등 12국



→가야

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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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韓

고조선 말기에 이르러 한강 유역으로부터 남부 일대에 걸쳐, 진국(辰國)이라는 하나의 큰 부락연맹체(部落聯盟體)가 서 있었는데 그의 중심지는 지금의 직산(稷山) 지방이었다. 아울러, 당시 북쪽에 위치하였던 위씨조선(衛氏朝鮮)은 우거왕(右渠王) 때에 이르러 한 무제(漢武帝)의 침략을 받아 붕괴되고(기원전 108년), 그 땅에 한의 군현이 설치됨에 따라 한족의 세력과 문화가 크게 흘러 들어왔다. 이와 같은 외래의 정치적 세력과 문화는 한의 군현과 이웃한 고대 한민족의 여러 부족국가 또는 부락국가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주었는데, 이 무렵에 이르러 남쪽 진국은 지리적 환경에 따라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 등 삼한으로 나뉘어졌다.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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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은 삼한의 기간으로서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는데, 그의 범위는 한강 유역으로부터 충청·전라의 양도에 퍼져 있었으며 목지(目支 또는 月支로도 쓰였는데 지금의 직산이 중심임)·백제(伯濟:廣州 지방이 중심임) 등 54개국의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마한의 여러 나라 총 호수는 10여만호였으며, 큰 나라는 1만 여호, 작은 나라는 수천호였다. 특히 목지국(目支國)은 진국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삼한시대에도 왕은 진왕(辰王)이라 일컬어 마한 여러 나라의 맹주처럼 되어 있었으며, 삼한의 초기에는 진왕의 세력이 진한·변한에까지 미쳤고,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5만인데, 큰 나라는 4~5천호였고, 작은 나라는 6~7백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삼한 78개의 소국(小國)들은 각각 지역에 따라 여러 부락 국가로 된 연맹체였고, 각 부락 국가에는 위에 족장(族長:군장)이 있어 각기 그 우두머리로서 큰 것부터 신지(臣智)·험측(險側)·번예(樊濊)·살해(殺奚)·견지(遣支)·읍차(邑借)가 있으며, 그 군장(君長)의 통솔 밑에서 부락적 또는 씨족적 자치생활을 하였다.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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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과 양잠·길쌈 등은 삼한을 통하여 널리 행하여졌다. 특히 평야가 많은 삼한지역에는 벼농사가 일찍부터 행하여졌고, 수리시설로 저수지도 많이 만들었던 것 같다. 한 예로 김제(金堤)의 벽골지(碧骨池),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제천(堤川)의 의림제(義林堤) 등은 이때의 저수지이다.목축(牧畜)도 성했으며, 해안지대에는 어업(漁業)이 성행하였다. 특히 진한·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산출되어 널리 쓰였다. 물품매매에 돈처럼 사용되었고, 낙랑 방면과 일본에까지 수출되었다고 한다.

생활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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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대개 평지에 움집, 산지에는 귀틀집이 많았는데, 의복은 삼베·모시·명주 등으로 만들어 입었다. 남자는 베도포처럼 된 웃옷을 입고 상투를 틀었으며, 가죽신 또는 짚신을 신었으며, 이때부터 지게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구슬을 재보로 삼았고 또 그것을 치레로 옷에 달기도 하였으며, 귀걸이와 목걸이도 사용하였다. 이러한 유물은 지금도 당시의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풍속이 순후하였던 것으로, 변한·진한에서는 길가던 사람들도 서로 길을 사양하였다 한다. 혼인과 예절에도 남녀의 구별이 있었으며, 법과 형벌은 일반적으로 엄하였다.한민족은 본디 명랑하고 낙천적인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삼한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술마시기를 즐겼다 한다. 특히 변한·진한에는 비파와 같은 현악기가 있었는데, 이것은 뒷날에 가야금의 근원이 된 듯하다. 남주지방에는 남자 가운데 간혹 문신(文身)을 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해양 족속의 풍습에서 온 듯하다.

종교와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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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기에 이르러 제정(祭政)은 서로 나뉘게 되었다. 마한의 여러 국읍(國邑)에는 정치를 맡은 군장 이외에 천신을 제사하는 사람을 각각 따로 두어 이를 천군(天君)이라 이름하였다.그리고 마한 여러 나라의 특별한 지역에는 소도(蘇塗:솟대)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달아매고 귀신을 제사하던 곳인데, 본래 이것은 단군설화에 보이는 신단수(神檀樹)의 유풍을 받은 것으로서 만주풍속의 신간(神竿)과도 같이 신역을 상징하는 것이며, 방울과 북은 신을 즐겁게 하는 악기였던 것이다.이 신역에서는, 도망하여 들어간 죄인도 잡아내지 못할 만큼 법률의 힘도 미치지 못하였던 곳인데, 이것도 또한 고대 사회의 공통된 풍습이었다. 그리고 천군은 종교적으로 보면 단군의 원류를 받은 것으로, 뒷날 향무(鄕巫:골무당 또는 단골)의 근원도 여기에 있다.이 밖에 마한에서는 연중행사로 5월에 씨뿌리기가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하고 여럿이 모여 주야로 노래하고 춤을 추고 놀았다. 수십명이 같이 손발의 장단을 맞추어가며 추었다 하는데, 이것은 지금도 남아있는 전라도 지방의 ‘강강수월래’ 및 경상도 지방의 ‘칭칭나네’와 같은 노래춤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마한에서는 이러한 제삿노래를 10월에도 행하였다 하는데, 이는 상고 농업사회에 있어 공통적으로 널리 행하여진 것으로 5월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기년제(祈年祭)이고 10월에는 풍년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장례는 일반적으로 후하게 지냈다. 마한에서는 장사에 관(棺)을 쓰고 곽(槨:外棺)은 쓰지 않았으며, 소와 말도 모두 장사에 썼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축을 순장(殉葬)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삼한의 풍습은 뒷날 신라·백제·가야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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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韓

고대 한민족의 부락집단(部落集團). 한강 유역 이남, 반도 서반부 지역에 있었던 것 같다. 78개의 소국(小國)으로 형성된 삼한(三韓) 전체의 왕인 목지국(目支國)의 진왕(辰王)은 마한의 부족사회에서 추대되고 마한인이 대대로 계승하였다. 54개의 소국으로 형성된 마한은 정치적으로 통일된 집단은 아니었으나 그 중 백제국(伯濟國)이 점차 세력을 펴 기원후 4세기 중엽에 백제(百濟) 왕국을 이루었다. 마한에 있어서의 대부족 세력은 만여 호(戶), 소부족 세력은 수천 호를 거느려서 총호수가 10만여에 이르렀다.

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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辰韓

마한·변한(弁韓)과 함께 남한에 위치한 고대 한민족의 부락집단. 그 위치는 경상도의 낙동강 동쪽 지역이라고 종래 주장되었으나 한강 유역으로 비정(比定)하는 새로운 견해도 있다.12개의 소국(小國)을 거느린 진한은 마한과 함께 진왕(辰王)을 정치적 맹주로 받들었다. 진한에서는 대부족 세력은 4~5천 호, 소부족 세력은 6~7백 호를 거느렸다. 여러 부족 중에서 지금의 경주 지방에 있던 사로부족(斯盧部族)이 가장 유력하여 큰 세력을 형성해 갔다.

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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弁韓

고대 삼한 중의 한 나라. 『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지역과 종족명으로 마한의 동쪽. 진한의 남쪽에 위치하여 12개의 작은 부족국가로 형성되어 있다. 12국은 미리미동국·접도국·고자미동국·고순시국·반로국·낙노국·미오야마국·감로국·구야국·주조마국·안야국·독로국으로 서쪽은 지리산, 북쪽은 가야산, 동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하였다. 각국에는 추장이 있어서 신지·험측·번예·살해·읍차 등으로 불리었다.언어·주택·풍속·의복은 진한과 비슷하였으나 제사는 독특한 양식을 갖고 있었으며 농업과 양잠을 주요산업으로 하였다. 뒤에 가야국이 되었다.

수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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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山堤

삼한(三韓)시대의 유명한 저수지. 경상남도 밀양에 있었으나 조선 세조 때 논으로 만들었다. 김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와 함께 3대 저수지로서 주위는 20여리나 되었다. 현재 저수지의 내부는 모두 논으로 변했고, 낙동강 지류인 용진강의 물이 논으로 범람하는 것을 막으려고 최근에 쌓은 제방이 남아 있다.

김해패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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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海貝塚

경남 김해읍 회현리(會峴里)의 유적에서 발굴된 패총. 융희 1년(1907) 이마니시(今西龍)의 조사 이후 1920년과 1934

1935년에 걸쳐 걸쳐 일본 학자에 의해 매장지가 조사 발굴되어 패총과 같은 성격이 드러났다.발굴품으로는 적색토기(赤色土器)·회색토기·신라토기의 파편과 철부(鐵斧)·철도자(鐵刀子) 및 특히 왕망시대의 화천(貨泉) 등이 있어 철기 시대의 패총임이 밝혀졌다.또한 상식석관(箱式石棺)·옹관(甕棺)·세형동검(細形銅劍)·마제석촉(磨製石鏃) 등이 발굴되었다. 이 패총은 금석병용기 말부터 삼국고분기(三國古墳期)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온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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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祚王(백제의 시조. 재위: 기원전18년~기원후 28년)

고구려 주몽(朱蒙)의 셋째 아들로 유리(類利) 왕자가 내려오자, 형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하여 위례성(慰禮城, 廣州)에 도읍을 세우고, 백제를 세운 후 '마한(토착) 세력을 점차 결속'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백제(건국)신화에 속하는 '전설적인 왕'으로 생각된다.

육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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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村

사로의 중심이 된 6부락. 서벌육촌(徐伐六村)으로 불리기도 함. 사로국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6개 씨족, 즉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취산 진지촌(?山珍支村)·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 있었다. 이 6촌이 연맹체가 되어 신라가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그 후 발전하여 6부(六部)가 되었다.

박혁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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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赫居世(생몰: 기원전 69년~기원후 4년); 신라의 시조. (재위: 기원전 57년~기원후 4년); 성(姓)은 박(朴), 휘는 혁거세(赫居世). 왕호는 거서간(居西干)이다.

6촌 중 고허촌의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나정(蘿井) 옆의 숲에서 말의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가니, 말은 없고 큰 알이 있는데 그 속에서 한 아이가 나왔다.

10여 세에 기골이 준수하고 대인(大人)의 풍이 있으므로 6부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했다. 왕이 된 후 알영(閼英)을 비(妃)로 맞아들이고 농사와 누에치는 것을 권장하였다.

기원전 28년 낙랑이 침범하였으나 도덕의 나라라 하여 스스로 물러갔고, 뒤에 마한과 통교하였으며, 궁성을 축조하고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였다. 신라 건국 신화에 속하는 전설적인 왕으로 생각된다.

거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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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西干

신라 최초의 왕호. 부족의 군장(君長)을 의미하는 말로 시조 박혁거세를 거서간이라 했다. 이것은 고대 진한의 말로 임금 또는 귀인(貴人)을 뜻하였으며, 제사(祭祀)를 주재하는 웃어른이란 뜻이 있다고 한다.시조 박혁거세 이후로는 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왕 등의 순서로 왕호(王號)가 변해 갔다.

신지·읍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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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智·邑借

삼한의 군장 칭호의 하나. 『삼국지』 위지(魏志) 변진조(弁辰條)에 의하면, 큰 나라의 우두머리를 신지, 그 다음은 검측, 맨 하급을 읍차로 불렀다. 이들 칭호는 격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장수에 대한 칭호로, 그 중 가장 높고 유력한 것이 신지였다. 이것은 진지(秦支)·축지(蹴支)라고도 했다고 한다.

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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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君

마한 때 소도(蘇塗)라는 특수한 신성 지역을 지배하던 제사장(祭祀長)의 칭호. 제정(制政)이 일찍부터 분리된 후 삼한사회에는 족장 외에 제사권을 장악하는 제사장, 즉 천군을 각 읍(邑)마다 1명씩 두었다.

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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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塗

산천에 제사지내던 신성 지역. 삼한사회에서는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매년 1/2차에 걸쳐 각 읍(邑)별로 천군을 선발하여 제사를 지내었으며, 질병과 재앙이 없기를 빌었다. 그 지역을 소도라 하는데, 이 소도는 매우 신성한 곳으로서 제사에 참석하는 자는 죄인이라도 처벌하지 않았다. 이 소도에는 큰 소나무를 세우고 신악기(神樂器)의 구실을 하는 방울과 북을 달아서 강신(降神)에 대한 안내 또는 신역(神域)의 표지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