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한국 현대미술/현대의 미술가

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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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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具本雄 (1906-1953)

서양화가. 호는 서산(西山), 서울 출신이다. 1929년 니혼대학(日本大學) 미술과를 졸업하고 1934년에는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 본과를 졸업했다. 주로 도쿄에서 열린 이과전(二科展)과 독립전(獨立展) 등 전위적인 전람회에 출품했고, 귀국 후에는 서화협회(書畵協會) 전람회에 출품했다. 1938년에 미술지(美術誌) <청색(靑色)>을 발간하는 한편 정판사(精版社)를 경영했고 1952년 서울신문 촉탁으로 언론계에도 종사했다. 작품경향은 퀴비슴(cubisme=立體派)의 영향을 받아 지적(知的)이고 분석적이었다. 유작으로는 <정물(靜物)> 등이 있으며 꼽추라는 불구(不具)의 몸으로 미술에서 생의 희열(喜悅)을 찾은 작가이기도 했다.

이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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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星 (1912-1950)

서양화가. 대구 출신. 1930년 일본 다이헤이요 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에 입학함과 동시에 일본 수채화연맹(日本 水彩畵聯盟) 회원이 되었다. 1929년부터 선전(鮮展)에 출품하기 시작하였으며, 1935년 14회 선전에서는 창덕궁상(昌德宮賞)을 받았다. 1945년에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 1946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를 지냈으며, 1949년 제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이 되었다. 일본의 문전(文展)이나 제전(帝展)에도 여러 번 입선한 경험이 있다. 6·25사변 중의 혼란기에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특히 수채화에서 날카로운 지적(知的)인 특성을 보이는 그의 작품은 독자적인 강한 개성으로 한국의 풍토적인 감각을 살리고 있다. 작품은 <가을의 어느날> <경주(慶州)의 산곡에서> 등이 있다.

심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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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亨求 (1908-1962)

서양화가. 호는 운봉(雲峰), 서울 출신이다. 1934년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1936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특선, 제16회에서는 총독상(總督賞)을 탔고 계속해서 특선을 하여 1940년에 추천작가가 되었다. 해방 후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에 미술과를 창설하고 동 예술대학장이 되었으며 1950년 아데파이대학 초청교수로 도미(渡美)했고 1958년에 귀국하여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및 동 대학교 박물관장을 역임했다. 목우회(木友會) 회원이었고 국전(國展) 심사위원, 초대작가로 있었다. 강원도 고성(高城)에서 수영 중 심장마비로 죽었다. 작품은 인상파적인 시각을 근간으로 한 사실 경향이면서 서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유작으로는 <수변(水邊)> <향원정> 등 다수가 있다.

이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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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仲燮 (1916-1956)

서양화가. 호는 대향(大鄕), 평양(平壤) 출신이다. 오산고등보통학교(五山高等普通學校) 졸업. 일본 도쿄 분카학원(東京文化學院)에 재학 중 1937년 일본 자유미협전(自由美協展)에 출품하여 태양상(太陽賞)을 받고, 졸업 후에도 주로 자유전(自由展)에 출품했으며 1939년 자유미술협회의 회우(會友)가 되었다. 1945년에 귀국하여 원산(元山)에서 일본 여인 이남덕(李南德=山本方子)과 결혼, 원산 사범학교 교사로 있었다. 6·25때 월남하여 신사실파(新寫實派) 동인으로 활약했고, 부산·제주·통영 등지를 전전하며 재료가 없어 담배갑 은종이를 화폭 대신 쓰는 등 빈곤 속에 지냈다. 1952년 부인이 생활고로 두 아들과 함께 도일(渡日)하자 부두 노동 중 환도(還都)와 함께 상경하여 1955년 미도파(美都波) 화랑에서 단 한번뿐인 개인전을 가졌다. 정신이상에 간장염이 겹쳐 적십자 병원에서 40세로 죽었다. 작품(作風)은 포비슴(fauvisme=野獸派)의 영향이 농후하며 동양 전래의 골법(骨法) 정신과도 연관되는 향토적이고 개성적인 포현으로서 서구의 현대 화풍을 도입하는 데 크게 기여한 서양화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소(牛)를 주제로 한 작품이 유명하며 뉴욕현대미술관 소장의 <소>와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흰 소>가 대표작이다.

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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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壽根 (1914-1965)

서양화가. 강원도 양구(陽口) 출신.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여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화단에 등장. 해방 후 월남하여 1952년 제2회 국전(國展)에서 특선. 미협전(美協展)에도 입상했다. 1958년 이후 미국 월드하우스 화랑, 조선일보사 현대작가초대전, 마닐라 국제전 등에 출품하는등 국내외의 미술전에 여러번 참가했다. 1959년에 제8회 국전에 추천작가가 되었고 1962년 11회 국전에는 심사위원이 되었다. 회백색(灰白色)을 주조로 간결한 선묘(線描)와 마티에르로 서민들의 생활풍경을 많이 다루는 그의 작품은 단조로우나 금욕적인 한국의 풍토감각에 바탕을 둔다. 한국인다운 순박함과 허식 없는 인간성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 <나무>

<저자의 여인들> 등이 있다.

함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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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大正 (19? -1959)

서양화가. 해방후 북한에 체재 중 6·25 동란과 함께 월남. 1951년 부산 국제구락부(國際俱樂部)에서 열린 월남작가전(越南作家展)에 참가했다. 1957년 도불전(渡佛展)과 함께 파리로 건너가 수학(修學)했고, 1959년 귀국하여 국내에서 체불작품전(滯佛作品展)을 열었다. 동년 뇌일혈로 졸도, 사망했다. 빈곤과 불우한 환경 속에서 온갖 고초와 시련을 겪은 그는 착잡한 시대 사조에 자신을 과감히 투입(投入)시키는 작가의식을 지닌 화가였고, 짧은 기간의 작품전시를 통하여 과도하게 자기를 발산한 화가였다. 작풍(作風)은 자연형태의 퀴빅한 해체를 통한 추상형태의 인출(引出), 역학적인 구성의 추상양식을 보이는데 이 땅의 흙과 더불어 산다는 체념과 애정의 토착성을 곁들이고 있다. 작품 <뒷거리> <군조(群鳥)> <익사자(溺死者)> 등이 있다.

박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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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商玉 (1915-1968)

서양화가. 서울 출신. 제일고보(第一高普)를 거쳐 1939년 일본 데이고쿠 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를 졸업했다. 1955년 제3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1958년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사실 경향의 작가단체인 목우회(木友會)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는 한편 한국 일요화가회(日曜畵家會)의 지도교수를 지냈다. 1942년 이후 대구사범(大邱師範)과 경기 고등학교 교사, 1961년부터 서울교육대학 교수로 재직해 왔다. 1960년 정부로부터 녹조소성훈장(綠條素星勳章)을 탔다. 부드럽고 소박한 색조와 충실한 필치의 사실화풍으로 한국의 풍경과 풍물들을 소재로 즐겨 택했으며 어느 정도 관념적인 사실화의 테두리를 벗어난 화풍을 보인다. 유작(遺作)으로는 <국화(菊花)> <피리부는 소년> <초추(初秋)> <한일(閑日)> 등이 있다.

이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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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鳳商 (1916-1970)

서양화가. 서울 출신. 1937년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 연습과를 졸업했다. 1943-1949년 사이에 경성여자사범학교(京城女子師範學校)·경동고등학교 등에서 교직생활을 거쳤고 1952년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미술과 강사,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홍익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국전 추천작가를 거쳐서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오랫동안의 교직생활을 통하여 미술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아동미술의 운동에도 관여했고 미술평론에도 관계했다. 그룹 활동으로서는 해방 후 1947년 미술문화협회(美術文化協會)의 결성에 참가했고, 1953년 기조동인회(其潮同人會)를 필두로 창작미협(創作美協)과 신상회(新像會)의 창립회원으로 활약했으며 현대작가초대전의 초대작가이기도 하다. 작풍은 과도기의 양식을 보이는 구상(具象) 경향으로서 발색(發色)있는 화려한 색면의 유니크한 작품세계를 보인다. 작품은 <정물> <고궁(古宮)에서> <산> 등이 있다.

이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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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揆祥 (1918-1967)

서양화가. 서울 출신. 1941년 일본 니혼미술학교(日本美術學校) 회화과를 졸업했다. 1942년 도쿄조형연구소(東京造形硏究所)에 입소하여 계속 수학(修學)하였으며 귀국 후 1948-1960년 사이에는 경복 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1961년에 홍익대학으로 교직을 옮겼다. 1948년에 신사실파전(新寫實派展), 1956년에 모던 아트전의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역경의 생활 속에서 1963년에 개인전을 가졌다. 일찍부터 추상주의 미술운동에 몸담아 온 그의 작품은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 형과 면의 기호공간(記號空間)을 추구하고 있으며, 그는 본능적으로 전위정신(前衛情神)을 구현한 작가이기도 했다. 원(圓)을 주축으로 간략하게 화면을 전개시킨 작품 <생태(生態)> 등이 있다.

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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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耕 (1922-1965)

서양화가. 본명은 만두(萬斗), 경상남도 하동(河東) 출신. 일본 니혼미술학교(日本美術學校)를 졸업했다. 1953년 부산에서 동인(同人) 그룹 "토벽(土壁)"의 결성에 참가하면서 주로 사실적인 경향에 강렬한 조형의식을 바탕으로 한 성실한 화면을 구축했다. 1956년 서울 환도(還都)한 이후 모던 아트의 동인(同人)에 참가하면서부터 추상화의 경향으로 전향하여 현대정신의 허망성을 고발하고 그 속에서 생명의 강인한 근원을 발굴하려고 노력하였다. 1959년 제1회 조선일보 현대작가초대전(朝鮮日報現代作家招待展)에 출품하는 한편, 모던 아트의 동인전에 6회 출품, 그 뒤 병중에 있으면서도 1964년에 추상화 및 소(牛)를 주제로 한 소품 등 30여점으로 개인전을 가졌다. 작품으로 <소(牛)>, <모자상(母子像)>, <침식(浸蝕)> 등 다수가 있다.

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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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圭 (1923-1971)

화가·도예가. 일본 데이고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서양화과 졸업. 6·25때 월남하여 한동안 부산에서 작품활동을 하다가 서울 환도(還都) 후에는 주로 국립박물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편 1954년 이래 이화대학교 미술대학을 필두로 홍익대학교, 경희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7년 록펠러 재단(財團) 초청으로 미국 로체스터에 1년간 머물면서 도자기를 연구한 바 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에는 서양화에서 전신(轉身)하여 도자기와 판화에만 전념했다. 1953년 첫 서양화 개인전을 가졌고 1956년에 목판화전, 1961년에 도자기전을 가졌으며, 1958년 한국판화협회의 참가 외에는 별로 그룹활동에 종사하지 않았다. 농촌을 소재로 한 소탈하고 서민적인 체취와 향토적인 색채가 짙은 폭넓은 작품을 보이고 있다. 작품으로는 <농촌> <곡예(曲藝)> 등이 있다.

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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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相鳳 (1902-1977)

서양화가. 함경남도 홍원(洪原) 출신. 1927년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졸업하고, 귀국 후 1930년-1949년 사이에 경신중학, 배화여중, 경기여고와 숙명여자대학에서 각각 교편을 잡았다. 1955년에 대한미술협회 위원장에 피임되고 계속하여 예술원 회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전 심사위원장, 동 운영위원, 유네스코 한국 문화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60년 이후 3·1 문화상, 예술원상, 국민훈장 모란장, 대한민국예술문화상 등을 수상하였고, 1955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에 출품한 것을 비롯, 국내에서 여러 차례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해방 후의 혼란기 속에서 예술문화단체의 육성과 발전에 공헌을 했으며 작품 경향은 온건한 사실풍(寫實風)으로서 정물(靜物)을 많이 다루고 있다. 작품으로

<성균관(成均館) 풍경> 등이 있다.

이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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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馬銅 (1906-1981)

서양화가. 충청남도 아산(牙山) 출신. 1932년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졸업했다. 1928년 이후 선전(鮮展)에 출품하였고, 1933년 동아일보 미술기자, 1938년에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39년-1961년 사이에 보성 중·고등학교 교사 및 교감을 역임했고, 1951년 대한미술협회 부회장, 1953년 이후에는 국전 심사위원, 1956년에는 대한미술협회 위원장을 지냈다. 목우회(木友會) 회원으로서 1963년부터 홍익대학에 재직하여 홍익대학장을 역임했고 서울특별시 문화상(文化賞)을 수상했다. 사실적인 풍경화에서 출발하여 인상주의적인 개방된 색변화에 초점을 두는 그의 작품은 일반적인 풍경화와는 달리 유동(流動)과 생명의 환희를 느끼게 한다. 작품 <정물(靜物)> <흑석동(黑石洞)> 등이 있다.

김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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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仁承 (1910-2001)

서양화가. 경기도 개성(開城) 출신. 1937년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년 선전(鮮展)에서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1947년 문교부 미술전 심사위원이 되었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거쳐 동 미술대학장이 되었다. 1952년 이후 국전심사위원, 예술원 회원,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 중앙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목우회(木友會)의 창립회원이다. 1957년에는 미국무성(美國務省) 초청으로, 1960년에는 유네스코 국제조형미술협회의 한국 수석대표자격으로 두 차례에 걸쳐 구미(歐美) 미술계를 시찰한 바 있다. 1965년 서울시 문화상 및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전형적인 사실화가로서 아카데믹한 흐름을 추구하는 그의 작풍(作風)은 주로 인물의 표현에서 특색을 보이며 중요작품으로는 <5월의 여인상> <녹음> <조춘(早春)> 등이 있다.

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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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源 (1912-1994)

서양화가. 평안남도 평양(平壤) 출신. 1937년 일본 데이고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서양화과를 졸업, 귀국 후 함흥(咸興)의 영생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6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1954년 이후에는 홍익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60년 제3차 국제미술교육협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약 4개월간 구미(歐美) 미술계를 돌아본 바 있다. 목우회 회원,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인상주의적인 사실화풍의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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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煥基 (1913-1974)

서양화가. 호는 수화(樹話), 전라남도 무안(務安) 출신으로 1936년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학부 미술과를 졸업, 도쿄(東京)와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46년-1949년 사이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신사실파전(新寫實派展)에 출품했다. 여러 차례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고 1952년에는 홍익대학 교수, 1954년에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6년에 도불(渡佛)하여 파리의 엠베지트 화랑을 위시하여 남불(南佛) 니스 및 벨기에의 브뤼셀 등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59년 귀국하여 홍익대학 학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하게 되어 브라질로 갔고, 동 국제전의 명예상 수상과 함께 그곳 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1964년 이후 부인인 수필가 김향안(金鄕岸)씨와 함께 미국에 체류하며 작품활동중 그곳에서 사망했다. 전후 14회의 개인전을 국내외에서 가졌고,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미술대상전(韓國美術大賞展)에서 대상을 받았다. 작품경향은 초기의 기하학적인 추상에서 출발하여 동양적인 관조(觀照)와 아취(雅趣)를 근간으로 한 반추상(半抽象)의 세게를 보이다가 도미(渡美) 후에는 완전히 추상화풍으로 전환하여 옵티컬한 양식의 새로운 사조(思潮)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인다. 작품으로 <산> <산월(山月)> <야상곡(夜想曲)>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이 있다.

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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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寬 (1913-1990)

서양화가. 경상북도 청송(靑松) 출신. 일본 도쿄 다이헤이요 미술학교(東京太平洋美術學校)를 졸업했다. 고(故) 이인성(李仁星) 등과 일본 화단에서 활약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여 1947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50년 이종우(李鍾禹) 등과 50년 미술협회의 결성에 참여했고, 6·25 후인 1951년 재차 도일(渡日)하여 포름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54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그랑드 쇼미엘에서 수학(修學)했다. 1955년 재불(在佛) 외국인 화가전에 첫 출품한 것을 비롯하여 20여회의 초대전에 출품했다. 1958년-1966년 살롱 드 메, 1966년에는 레알리테 스피리튜엘전에, 그리고 망통 회화 비엔날레에서의 대상(大賞) 수상, 에스파냐의 투 루 쥬 미술관전에의 출품 등이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파리생활 14년 동안 8백여 점의 작품을 제작했고 1백여 미술전에 출품했으며 8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파리 국립미술관을 비롯하여 룩셈부르크, 이탈리아의 각 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1968년 귀국과 함께 개인전을 열었고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동양의 신비한 사상을 서양의 세련된 기법을 통해 마스터한 화가'라는 평을 듣고 있는 그의 화풍은 추상 표현주의의 흐름을 따르고 있으며 한국의 고유한 형태나 전쟁의 체험들을 환상적으로 표현하여 기호화(記號化)하거나 비형상적(非形相的)으로 해체시켜 간다. 대표작으로 <낙조(落照)> <벽(壁)> 등이 있다.

최영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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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榮林 (1916-1985)

서양화가. 평안남도 평양(平壤) 출신. 일본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를 중퇴했다. 선전(鮮展) 및 일본 판화협회전에 출품했고 해방 후에 제8회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55년 미국 뉴욕 월드 하우스 화랑 주최 한국 현대작가전에 초대 출품하고 계속 마닐라, 사이공, 도쿄(東京) 등지의 국제전에도 출품했다. 서라벌예술대학,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강사로 재직하였다. 그룹활동으로는 창작미술협회(創作美術協會)에 참가하였다가 그 후 구상전(具象展)의 지도적인 인물로 활약했다. 1971년에 처음 개인전을 열었다. 초기의 도식적(圖式的)인 구상경향(具象傾向)에서 출발하여 점차 토속적(土俗的)인 데로 흐르는 그의 작풍(作風)은 그 위에 선(禪)과 무속(巫俗)과 에로티시즘을 혼융한 독자적인 스타일로서 특색지어진다. 작품 <낙(樂)> <여인의 일지(日誌)> 등이 있다.

유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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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永國 (1916-2002)

서양화가. 경상북도 울진(蔚珍) 출신. 1937년 일본 도쿄문화학원(東京文化學院) 유화과를 졸업했고, 1937년부터 도쿄에서 추상회화(抽象繪畵) 운동에 참가, 일본 독립전(獨立展)과 자유미전(自由美展)에 출품하여 수상(受賞)하고 동 회우(會友)로 있었으며, N.B.G 동인전(同人展)을 긴자(銀座)에서 열기도 했다. 해방 후 1948년 신사실파전(新寫實派展), 1956년에는 모던 아트협회의 동인으로 활약했고 1962년 신상회(新象會)의 결성에도 차가했다. 1959년 이후 조선일보 현대작가초대전,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및 도쿄 국립미술관 주최 한국현대작가전, 이스파 국제전에도 출품했다. 홍익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1964-1970년 사이에 4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차가운 기하학적인 추상회화로 일관해온 그의 작품경향은 후기로 접어들수록 더욱 단순화되고 견고한 구축성을 보이는데 주로 산(山)을 테마로 하여 암록색조(暗綠色調)의 바탕에 섬광처럼 번득이는 황색의 빛으로 미묘한 긴장감을 일으키는 특유한 화면을 전개시킨다. 작품으로 <산> 등이 있다.

손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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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應星 (1916-1979)

서양화가. 서울 출신. 일본 도쿄 다이헤이요미술학교 (東京太平洋美術學校)를 졸업했다. 1934년 이후 선전(鮮展)과 일본 다이헤이요화회전(太平洋畵會展)에 출품했으며, 1954년의 대한미술협회전에서는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1955년-1960년 사이에 홍익대학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물체를 치밀하게 꿰뚫어보고 극히 사실적으로 처리해 버리는 그의 남다른 묘사력은 냉철한 과학자의 태도에 견줄 만할 정도이며, 그와 같은 객관묘사에 의하여 그는 다른 작가가 따를 수 없는 그 나름의 고전적인 작품세계를 확립하고 있다. 한국 사실작가회 회원이며 대표작으로 <회의(回衣)> <낙엽(落葉)> <비원(秘苑)> 등이 있다.

장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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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旭鎭 (1917-1990)

서양화가. 충청남도 출신. 일본 도쿄 데이고쿠(東京帝國)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일제하에서는 선전(鮮展) 및 재동경미술협회전(在東京美術協會展=白牛會)에 출품했다. 1948년 이후에는 신사실파전(新寫實派展), 2·9전 등에 동인(同人)으로 참가했고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한국현대작가전, 동남아시아 문화교류전, 미네소타대학 미술학부 교환전에도 출품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와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앙가쥬망전 동인으로 활약하였다. 아동화(兒童畵)를 연상케 하는 특이한 기법으로 동심(童心)의 세계를 파헤치고 있는데 검소한 색채와 화면의 평면적인 처리가 두드러지며 그의 모든 작품은 소품(小品)의 테두리를 벗어난 적이 없다. 한결같이 생활의 주변 즉 마을·가족·가로수·건물·자전거·어부 등 동화의 이미지를 좇아 프리미티브한 생략법을 쓰는 작가이다. 작품으로 <들>이 있다.

김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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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興洙 (1919- )

서양화가. 함경남도 함흥(咸興) 출신. 1944년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졸업했다. 해방 후 1952년 서울예술고등학교 미술과장 및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를 역임하고 1955년 도불(渡佛),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크랑크 샤브마에르에서 회화를 연구했다. 1955년 살롱 도톤느전에 출품, 동 회원이 되고 갈르리 라라 벵시 외 여러 화랑과도 계약, 개인전을 가졌다. 귀국 후 1961년 제10회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현대작가초대전 및 문화자유초대전에 출품했다. 1962년 제11회 5월문예상을 수상하였고 1967년 다시 미국 무어대학 교환교수로 도미(渡美)하여 전미국 유화조각전에 출품했고 순회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모자이크 기법에 착안하여 색면분할(色面分割)로 화면을 처리해 나가는데 한국의 풍물(風物)과 에로틱한 소재를 많이 다루고 있으며 대단히 화려하고 장식적인 화풍을 특징으로 삼는다. 작품 <나부(裸婦)> <탑(塔)과 소녀> <군동(群童)> <호(壺)> 등이 있다.

김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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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永周 (1920-1995)

서양화가. 함경남도 원산(元山) 출신. 1942년 일본 도쿄다이헤이요미술학교(東京太平洋美術學校)를 졸업했다. 1941년 미술문화전에 출품. 1957년 현대미술작가전과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조최 한국현대미전에 출품, 1961년 이후에는 마닐라 국제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제1회 칸느회화제 등에 출품했다. 미술평론에도 관계하여 한국 미술평론가협회 대표를 역임한 바 있고 국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을 거쳤다. 개인전 4회. 저서(著書)로서 <동서미술 개설(東西美術槪說)>이 있다. 비교적 새로운 사조(思潮)에 민감하여 몇 차례의 변모를 겪고 있는 그의 작품경향은 1950-1960년대에 상징적인 신화(神話)의 세계를 추구한 이래 타시즘, 앵포르멜과 옵아트 등 여러 추상양식의 경로를 받아들이고 있다. 작품 <검은 태양> <청기사(靑騎士)> <회전(回轉)> <비전> 등이 있다.

임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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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直淳 (1919-1996)

서양화가. 니혼미술학교(日本美術學校) 졸업. 제2, 5, 6, 7, 8회, 국전에서 특선, 제5회 국전 때에는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국전 추천작가를 거쳐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1967년 문예상을 수상했다. 광주 조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인상주의적인 화풍의 밝고 정감있는 색채를 구사하여 생활주변을 담담하게 표현하는 화가로서 완벽한 짜임새와 명암의 대비 등을 작품의 특징으로 삼는다.

이항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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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恒星 (1919-1997)

판화가.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초대전 심사위원을 역임, 한국판화협회 및 국제판화협회 회장을 지냈다. 제5,6,7회 신시내티 국제판화전(미국)에 출품한 바 있고, 출판사(문화교육출판사)를 경영, 세계미술전집(世界美術全集)을 발행하는 등 미술서적의 편찬, 보급에도 주력하였다. 한국고금판화전(韓國古今版畵展)을 기획했으며 작품 <다정불심(多情佛心)> 등이 있다.

유경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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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景埰 (1920-1995)

서양화가. 서울 출신. 1941년 일본 도쿄로쿠인사화학교(東京綠陰社畵學校)를 졸업, 세키다쿠니타로(績田國太郞)에게서 사사(師事)했다. 1940년부터 선전(鮮展), 일본 대조회(大潮會) 미술전에 출품하기 시작했고, 1949년의 제1회 국전에서는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42년 마산상업학교·경기사범학교 교사로 재직한 것을 필두로 대구·진해 등지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1953년 이후 문교부 교사자격 검정고시 위원과 교재심의위원, 요목제정(要目制定) 위원을 거쳤고 이화여자대학교·서울대학교·홍익대학교의 강사를 지냈다. 1955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1957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고 1967년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출품했다. 창작미술협회의 창립동인이며 동 그룹의 실질적인 리더이기도 하다. 작품 <폐림지(廢林地) 부근> <뒷산> <산길> 등이 있다.

손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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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東鎭 (1921- )

서양화가. 경상북도 경주(慶州) 출신. 1953년 일본 도쿄예술대학(東京藝術大學) 미술학부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55년-1958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 국립미술대학에서 벽화(壁畵)와 근대회화(近代繪畵)를 전공했고 파리·칸느·도빌 등지의 국제전과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다. 1957년 벽화의 연구를 위해 이탈리아·에스파냐·스위스·독일·벨기에·이라크 등 여러 나라를 순방했고, 1959년 귀국하여 개인전을 열었다. 1960년 이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벽화를 지도하는 외에 서울 시민회관의 벽화를 위촉받아 완성했다. 이화여자대학교 및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오랫동안 수업한 프레스코 벽화의 기법을 회화에 도입하여 벽화와 도기적(陶器的)인 질감의 두꺼운 마티에르, 피카소류의 콤퍼지션에서 출발하여 한국적인 무속성(巫俗性)을 살린 독자적 세계를 보이고 있다. 작품 <전설(傳說)> 등이 있다.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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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信 (1922-1995)

서양화가. 일본 사가겐(佐賀縣) 다케오(武雄) 출신. 본명은 문안신(文安信)이다. 일본에서 잡화상 일을 보며 고학(苦學)으로 중학교와 미술학교를 마친 후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 선향(先鄕)인 마산(馬山)에서 제작생활을 했다. 1946년에 첫 개인전을 가졌고 1960년에 도불(渡佛)하여 4년간 파리에서 수업(修業)했다. 아카데미 뒤페에서 회화와 조각을 지도할 때 현대 조각가인 자보를 알게 되고 그가 소유하고 있는 라버넬이라는 고성(古城)을 수리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건축에 관심을 두게 되고 '플래스틱'이라 명명(命名)된 새로운 형식의 조각을 제작하기 이르렀다. 오브제(物)에 색(色) 아크릴을 병용(竝用)하여 색광선(色光線)의 효과를 내는 그의 전위적인 작업은 하나의 종합적인 예술로서 평가된다. 1967년 귀국하여 개인전을 연 후 세 번째의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도불했다. 작품으로 <정(精)> <생태(生太)> 등이 있다.

권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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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玉淵 (1923- )

서양화가. 함경남도 함흥(咸興) 출신. 1942년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졸업했다. 1940년 이후 선전(鮮展)에 출품했고 1957년 도불(渡佛)하여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엘에서 수학(修學)하였고 아케데미 뒤페의 회원이 되었다. 살롱 도톤과 레알리테 누벨 및 쉬르레알리슴전에 초대 출품했다. 1961년 귀국하여 개인전을 가졌고, 마닐라·사이공·파리 청년국제비엔날레 등의 국제전과 문화자유전, 현대작가초대전 등에도 출품했다. 1963년 파리 갈르리 랑벨에서 그룹전을 가졌고 1964년의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출품하고 1965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동양적인 체질의 환상과 신비를 서구적 감각으로 요약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세련된 오리지널리티가 신선하며 대문이나 벽, 고도기(古陶器) 혹은 역사가 새겨진 대지(大地)를 연상케 하는 중후함을 가졌다. 작품에 <양지(陽地)> <메아리> <푸른 언덕> 등이 있다.

변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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卞鍾夏 (1926-2000)

서양화가. 대구(大邱) 출신. 1945년 만주 신경미술학교(新京美術學校)를 졸업했다. 1953년 이후 국전에 출품하여 부통령상을 수상했고 동 추천작가가 되었다. 홍익대학교 강사와 수도여자사범대학 미술과장을 역임하고 1960년 도불(渡佛)하여 국제 조형미술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파리의 알리앙스 프랑세스와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엘에서 수학(修學)하였고 1962년 소르본느 대학, 1964년에는 유네스코 펠로우십으로 유럽, 멕시코, 미국 등지를 시찰하고 뉴욕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 사이 파리의 몇 화랑에서 개인전 및 부리, 맛타 등 유럽의 유수한 화가들과 동인전을 가졌고 프랑스 및 독일 주최 프랑코 알마뉴 초대전에도 응했다. 1964년에 귀국,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작품경향은 잠재의식적인 환상의 기호공간(記號空間)을 추구하는 서정적인 추상계열로서 독특한 스타일을 전개시키고 있다. 작품으로 <사슴도(圖)> <포플라> <군서(群棲)> 등이 있다.

김상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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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相遊 (1926-2002)

판화가. 평안도 안주(安州) 출신 연희대학교 철학과를 중퇴했다. 1963년 서울에서 처녀 에칭개인전을 열었고 1964년 이후 이스파 국제 조형예술가협회전에 출품했다. 1968년 이후 도쿄(東京) 한국 현대회화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국제 판화비엔날레전, 조선일보 현대작가초대전 및 이탈리아 카르피시(市)의 국제 판화 트리엔날전, 제7회 파리 비엔날레 등에 출품했다. 현대판화협회와 구상회(具象會)의 동인으로 활약하는 한편 일본에서 2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경기도 문화상 및 1970년 동아일보 주최의 제1회 국제 판화비엔날레전에서 대상(大賞)을 받은 바 있다. 종교적인 내면세계를 추구하는 데서 출발하여 인간의 근원적이고 고독과 허무, 현대문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지적(知的)이고 논리적인 작품세계를 보인다. 작품 <막혀버린 출구(出口)> 등이 있다.

박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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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在弘 (1931- )

서양화가. 호는 서보(栖甫). 충청북도 음성 출신, 1955년 홍익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했다.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한국현대작가전, 그리고 국내에서 현대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다. 1959년 조선일보 현대작가초대전에 출품 동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1961년 도불(渡佛)하여 유네스코 국제 조형미술연맹 주최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에한국대표로 참가했다. 1962년 악뒤엘 그룹의 결성에 핵심 멤버로 참가하였고 제1회 사이공 국제전 및 마닐라 한국현대작가전에도 출품했다. 1963년과 64년의 제3회 파리 비엔날레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출품하고 제4회 파리 비엔날레에는 한국 전권대표를 역임했다. 해외의 유수한 국제전에 출품하는 한편 국내에서도 현대작가초대전, 한국일보대상전 등 주로 재야전(在野展)에 출품했다. 1962년과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원형질전(原形質展), 유전질전(遺傳質展) 등의 특이한 이름으로 개인전을 가졌다. 홍익대학교 교수와 동 조형미술연구소장에 재직하고 있다. 이른바 앵포르멜 회화가 도입되던 시기에 각광을 받고 등장한 화가로서 그 이후의 온갖 실험적인 전위운동(前衛運動)에서도 괄목할만한 활동을 보여 왔다. 작품으로 <원형질> <원시(原始)> <그림자> <허상(虛像)> 등이 있다.

이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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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聖子 (1918- )

여류 판화가. 경상남도 진주(晋州) 출신. 일제(日帝) 말기에 어느 의학박사와 결혼, 가정주부로서의 평범한 생활 끝에 1958년경 이혼하고 다시 외교관과 결혼한 후 부군(夫君)을 따라 도불(渡佛)하여 파리에서 처음에는 다지인을 공부했고 그것을 계기로 미술연구소에서 본격적인 판화수업을 시작했다. 프랑스 화단의 젊은 전위작가들과 교우(交友)하며 에콜 드 파리의 일원(一員)으로 활약하게 되었고 유럽 각지에서 10여회의 개인전을 갖는 동안 스스로 내적(內的)인 세계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추상경향의 화풍이나 누구에게나 친밀감을 주는 대화(對話)를 담은 그의 판화작품은 서양의 마티에로 동양의 정서를 독특한 기법을 써서 조형화하는 데 성실성을 보인다.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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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南準 (1932- )

전위예술가. 도쿄대학(東京大學) 미학과(美學科) 졸업. 독일로 건너가 작곡·음악학·전자음학 등 음악 계통의 학문을 연마했다. 1950년대말-1960년대 사이에 유럽의 아방가르드(前衛)의 운동체인 '데코라쥬'나 초기의 '후룩사스'에 참가, 액션 뮤직, 해프닝의 작품을 다수 발표했고 동시에 일렉트로닉 아트(電光藝術)를 제창(提唱), 기존 텔레비전을 개조하여 독자적인 영상(映像)을 가진 일렉트로닉 T.V. 혹은 여성 로봇 K.456을 제작, 섹솔로지로부터 일렉트로닉 테크놀로지까지를 구사했다. 1967년 뉴욕에서 그의 슈퍼스타인 모오만양(孃)에 의해 <오페라 섹스트로닉>을 연주하였으나 당국에 의해 제지당하고 유죄판결을 받은 일이 있다. 실험적인 전위음악, 전위미술의 시도로 국제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1964년 이래 뉴욕에 정주(定住)하고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의 주요 멤버로 활약하고 있다.

전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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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筬雨 (1934- )

서양화가. 서울 미대 졸업. 도미 후 미국 밀스대학원을 졸업. 위트니 미술관 주최 <영 아메리카> 58전 및 일리노이대학 주최 크라네르트 미술관 초대전에 출품한 바 있다. 귀국 후에는 파리 비엔날레 국제전, 상파울로 비엔날레국제전, 일본 도쿄 근대미술관 주최 한국현대회화전에 출품했고 국내 전시로는 조선일보사 주최 현대작가초대전, 한국일보사의 한국 미술대상전에도 초대출품, 2회의 개인전을 가지기도 했다. 동양적인 환상과 로컬리즘을 기초로 하는 기하학적 전 추상경향의 작품을 가졌고 한국 고유의 색동과 동전(銅錢) 모양을 변형시켜 모노크롬 형식으로 조형화하는 등 다채로운 작법을 보인다. 작품 <색동만다라(曼茶羅)> <스트럭처(立體構造)> 등이 있다.

하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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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鐘賢 (1935- )

서양화가. 경상남도 출신. 1959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를 졸업. 신상회전(新象會展)에 출품, 신상회상을 받은 바 있으며 1965년 파리 비엔날레, 1967년 상파울로 비엔날레, 1968년 일본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주최 한국현대회화전, 1969년 마닐라 국제전, 인도·네팔 순회의 한국현대회화전, 1970년 일본 도쿄 도키와화랑 주최 한국현대작가 6인전,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주최 도쿄 판화비엔날레 등에 출품한 경력을 갖고 있으며 1971년 파리 비엔날레에는 입체작품을 출품한 바 있다.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의 지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1960년대 말기의 전위적인 경향을 보이는 환경작품에 탐닉하여 여러 가지 실험적인 작업을 시도하는 젊은 작가로서 주목된다.

이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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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禹煥 (1936- )

서양화가. 미술평론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중퇴, 도일(渡日)하여 도쿄대학(東京大學)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대 말에 새로운 전위적인 실험작가로 일본 화단에 등장, 1969년 제5회 미전에서 포름상(賞)을 수상한 바 있고 미술지 <미술수첩(美術手帖)>의 미술평론 모집에 응모하여 당선, 미술평론가로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화가로서 전후 일본화단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한 한 사람으로 주목된다. 저서 <만남의 현상학적 서설(序說)> 등이 있다.

배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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裵濂 (1911-1968)

동양화가. 경상북도 금릉(金陵) 출신. 호는 제당(齋堂). 1930년부터 선전(鮮展)에 출품하기 시작했고 서화협회(書畵協會) 회원이 되었다. 1946년 숙명여자대학교 강사로 재직했고 서울시 문화위원을 역임했다. 1953부터 국전 심사위원, 예술원 회원이 되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 한국미협 최고위원이 되었다. 1965년 이후 홍익대학 교수로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63년 대한민국 문화훈장(文化勳章), 1964년에는 예술원상, 이어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전통적인 동양화의 수묵(水墨)을 지향하는 그의 화풍은 다른 면에서는 생활 주변을 사실화(寫實化) 함으로써 독특한 자기세계를 견지해 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산전(山田)> <서상(瑞祥)> <도봉 백운(道峰白雲)> <우후(雨後)> 등이 있다.

박생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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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生光 (1904-1985)

동양화가. 전라북도 전주(全州) 출신. 일본 도쿄예술대학(京都藝術大學)을 졸업했다. 재일(在日)시에 니혼미술원(日本美術院) 메이로 미술가연맹(明郞美術家聯盟)에 가입, 활약했고 니혼미술원의 회우(會友)이기도 하다. 귀국 후 홍익대학에서 강사로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작품은 한국의 전통적인 동양화의 입장에서 보면 몹시 이단시되는 독특한 표현양식을 구사하고 있어 주목되는데 동양화의 재료로서 일본이나 서구(西歐)의 현대적인 조형방식을 채택하여 폭넓은 전위적인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작품 <조양(朝陽)> 등이 있다.

윤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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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亨根 (1928- )

서양화가. 충북 청주 출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중퇴한 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 1962년의 앙가쥬망전(展)을 비롯하여 제10회 비엔날레 상파울로전, 일본 교토에서의 현대미술 13인전, 제13회 비엔날레 상파울로전, 프랑스에서의 제8회 칸느 국제회화전, 이란 국제문화미술전, 파리 국제현대미술전, 제4회 인디아 트리엔날레전 등에 출품하여 국내 활약보다 국제적인 활약이 두드러져 미국, 파리, 일본 등지에서 현대작가로서의 정평(定評)을 굳히고 있다. 주로 어두운 색깔을 바탕으로 한 그의 추상감각(抽象感覺)은 의식의 집적(集積)과 해체(解體)의 과정에서 사상(事象)의 공간적 처리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으며 그 독특한 소박성과 경직감은 작품 전체에 일관하여 <사트 인터내셔널>지(誌)에서 미술평론가 조셉·러브는 다음과 같이 극찬하기도 했다. "……그것은 차라리 원초적인 차원에서 삶에 대한 모종의 증언이 없다면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감동을 주는 것은 이 과정에 의해 거의 의지의 활동없이 만들어진 그 이미지이다. 그것은 모두 그림의 방법 치고는 대단히 쉬운 듯이 보인다. 그는 우연적인 방법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그것이 아주 뚜렷해서 시각기억에 강한 인상, 즉 그림에서 눈을 뗀 다음까지도 파고드는 강한 현존성을 준다."

장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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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遇聖 (1912- )

동양화가. 경기도 출신. 호는 월전(月田). 1932년부터 선전(鮮展)에 출품, 1946-1961년 사이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3년 국전 심사위원을 거쳐 1962년에 홍익대학 강사를 역임했다. 1963년에 도미(渡美)하여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東洋藝術學校)를 설립, 그곳에서 동양화를 지도했다. 1970년 귀국, 개인전을 가졌다. 예술원 회원이며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고 현충사(顯忠祠)의 이 충무공(李忠武公) 영정(影幀)을 제작했다. 동양화의 가장 동양적인 맛은 문인화(文人畵)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남종 수묵화 계통의 간결한 화면구성과 처리에서 남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작품 <쌍록도(雙鹿圖)> <어부(漁夫)> <죽순(竹筍)> 등이 있다.

김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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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基昶 (1913-2001)

동양화가. 서울 출신. 1931년 김은호(金殷鎬)의 문하에서 사사(師事)했다. 1932년부터 선전(鮮展)에 출품하기 시작하여 추천작가를 거쳤다. 1954년부터 홍익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교 한국 현대작가전에 초대 출품했다. 1960년 국전 심사위원, 대북(台北)과 홍콩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 출품했고 이어 도쿄(東京)·마닐라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도 출품했다. 1962년 수도여자사범대학으로 교직을 옮겼고 문화자유전에 출품했다. 1963년에 5월문예상 미술본상을 수상했고,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도 한국 대표로 출품했다. 1964년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도미(渡美), 1969년에 재차 도미하여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구상(具象)·추상(抽象)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는 그의 화풍은 힘차고 동적(動的)이며 기법에 있어서도 다각적인 실험으로 폭 넓은 작가적인 역량을 보인다. 화집(畵集) <화방여적(畵房余滴)>을 출간했다.

성재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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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在烋 (1915- )

동양화가. 경상남도 창녕(昌寧) 출신. 호는 풍곡(豊谷). 허백련(許百鍊)에게서 동양화를 사사(師事)했다. 1948년부터 국전에 출품했고 1957년 이후에는 현대작가초대전에 초대출품했다. 백양회(白楊會)의 회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미국 뉴욕의 월드하우스 화랑 초대전, 샌프란시스코 미술관 선발전(選拔展), 대북(台北) 미술관 초대전에도 출품했다. 1960년 도미(渡美)하여 미국 뉴욕 빌리지미술관 미술전에서 수석상(首席賞)을 받고 동 회원이 되었으며 1개월간 그곳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65년 이후에는 홍익대학교와 수도여자사범대학에서 동양화를 강의하였다. 힘차고 대담한 먹(墨)으로 형성되는 형상(形象)을 공백(空白)과 대비시켜 단순화와 추상화를 시도하는 새로운 경향의 화풍을 가진 화가로서 작품 <사슴> <악의(惡意)를 거두라> <어골(魚骨)> 등이 있다.

이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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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惟台 (1916-1999)

동양화가. 서울 출신. 호는 현초(玄草) 1935년 김은호(金殷鎬)에게 사사(師事)하고 1942년 일본 도쿄 데이고쿠미술학교(東京帝國美術學校)를 졸업했다. 1943년부터 선전(鮮展)에 출품하기 시작했고 1955년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1947년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에 재직하여 동 미술학과장을 역임하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를 역임했다. 미국 및 유럽, 동남아시아의 미술계와 박물관을 시찰한 바 있고 백양회(白陽會)의 국외전, 프랑스 예술인협회 초청 한국미술전에 출품했고, 4회의 개인전을 통하여 전통적인 산수화가의 면목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산수(山水)는 시시로 변하는 자연대상을 사실(寫實)하여 화폭에 옮기는 실경산수(實景山水)의 작품세계로서 수묵(水墨)의 유현(幽玄)한 운무(雲霧)공간과 원경으로 떠오르는 암산기봉(岩山奇峰), 근경의 산사(山寺), 억제된 색채의 수립(樹林) 등으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작품 <가야심동(伽倻深冬)> <속리설효(俗離雪曉)> <설봉추효(雪峰秋曉)> 등이 있다.

박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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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崍賢 (1921-1976)

동양화가.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 출신. 호는 우향(雨鄕). 1944년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東京女子美術專門學校)의 일본화과(日本畵科)를 졸업, 1940년부터 선전(鮮展)에 출품하여 총독상을 받기도 했다. 1956년 제8회 대한미술협회전과 제5회 국전에서 각각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한국 현대작가초대전에 초대출품했고 서울 문리사범대학 교수가 되었다. 1960년 자유중국의 대북과 홍콩 등지의 초대전에 출품하고 이어 일본·월남의 초대전에도 출품했다. 1961년 이후 국전 심사위원, 서울시문화위원을 역임하고 성신(誠信) 여자사범대학 강사가 되었다. 1964년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부군(夫君)인 동양화가 김기창(金基昶)과 함께 도미(渡美)한 바 있고 국내·국외에서 여러 차례의 개인전 및 부분전(夫婦展)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 동양화의 재료로서 서구적인 공간설정을 종합함으로써 새로운 한국화의 방향을 시험하고 있다. 작품 <노점(露店)> 등이 있다.

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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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鏡子 (1924- )

여류 동양화가. 전라남도 고흥(高興) 출신. 1944년 도쿄미술전문학교(東京美術專門學校)를 졸업했다. 1943년부터 선전(鮮展)에 출품하기 시작했고, 1954년의 제7회 미술협회전에서는 대통령상을 받았다.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 과장을 역임했다. 1964년에는 국전 심사위원이 되고 5월문예상 미술본상을 수상했다. 1962년 마닐라 국제전에 출품, 1964년에는 프랑스에서 열린 한국작가초대전, 1969년에는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각각 출품했다. 국내와 일본 등지에서 많은 개인전을 열었고 1970년 세계일주 스케치 여행을 하고 왔다. 전통적인 동양화 기법에서 벗어난 특이한 독자적인 화풍을 가진 화가로서 그의 작품은 설화적(說話的)인 면이 많이 강조되고 있다. 꽃·뱀·여인·태양·만선(滿船) 등이 중요한 테마로 등장하며 밝은 원색을 즐겨 다루는 색채 화가이기도 하다. 작품 <자살(自殺)의 미(美)> <정> <추정섬 인상> <향미사(響尾蛇)> <화혼(華婚)> 등이 있고 수필집 <여인소묘(女人素描)>(외 2편)을 내었다.

박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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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魯壽 (1927- )

동양화가. 충청남도 연기(燕岐) 출신. 호는 남정(藍丁). 1952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 1945년부터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하여 상명(祥明) 여자고등학교 등의 교사를 지냈고 1956년 이화여자대학교 1962년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53년부터 국전에 출품하기 시작하여 제2회 국전에서 국무총리상, 제4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대한미술협회전에서도 국무총리상과 공보실장상을 받았다. 묵림회(墨林會), 청토회(靑土會)의 회원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동양수묵(東洋水墨), 부채(賦彩)에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시켜 개성이 뚜렷한 화풍을 확립하였으며 그의 작품에는 광활한 대기(大氣)를 달리는 시각(視覺)의 초극(超克) 같은 것이 있다고 평가받는다. 작품으로 <비마(飛馬)> <수하(樹下)> <선소운(仙簫韻)> 등이 있다.

서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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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世鈺 (1929- )

동양화가. 충청남도 출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1952년 제1회 국전에서 국무총리상 1954년 제3회 국전에서 문교부 장관상을 1970년 제19회 국전에서는 초대작가상을 각각 수상했다. 1955년 한국미술가협회, 1960년 묵림회(墨林會)의 창립회원으로 활약했고 국전 심사위원, 동 운영위원,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사이공에서 열린 국제미술전에서 수상, 동(銅)메달을 획득하였으며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1966년 말레이시아 한국미술전, 1969년 제1회 이탈리아 현대회화 비엔날레, 1967년 프랑스 한국미술전, 그리고 1969년의 제1회 칸느회화제에도 출품했다. 1966년 일본 도쿄(東京)의 IAA 정기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고 북미 및 유럽 미술계를 순방했다. 서정적인 추상계통의 동양화로 동양수묵의 무채담묵(無彩淡墨), 여백(餘白) 공간의 강점(强點)만을 살려 현대적이며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추구하는 작가이다. 작품으로 <설화이장(說話二章)> <태양을 다루는 사람들> 등이 있다.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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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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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景承 (1915-1992)

조각가. 경기도 개성(開城) 출신. 1933년 송도고보(松島高普)를 졸업, 동 1939년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졸업했다.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 및 여자사범학교 교사로 재직, 그후 정신·풍문·경기중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9년-42년 선전(鮮展)에 출품, 총독상·창덕궁상 등을 수상했고 동 1943년 선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1947년 종합미술전 심사위원, 그리고 동 1949년 이래 오랫동안 국전 창설위원을 거쳐 심사위원을 지냈다. 1954년 대한미술협회 회원, 1954년-62년 홍익대학교 교수 및 조각과장을 역임, 1964년에 이화대학교 미술대학으로 교직을 옮겨 동 조각과장이 되었다. 1948년-68년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64년 3·1문화상 수상, 68년 애국선열동상건립위원회(愛國先烈銅像建立委員會) 전문위원장에 피임(被任)되었다. 1961년 동남아시아 9개국을 예방, 한국의 현대미술을 널리 소개한 바 있으며 각종 기념동상의 건립에 많은 공헌을 했다.

주요기념동상 대표작으로 <이충무공동상(釜山, 統營)> <맥아더장군상(仁川)> <밴프리트장군상> <코울터장군상> <안중근의사상> <김성수선생상> <김활란박사상> <세종대왕상> <김구선생상> <김유신장군상>이 있으며 작품으로 <목동> <유(流)> <희망> <사색> <평화> <정(靜)> 등이 있다.

김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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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鍾瑛 (1915-1982)

조각가. 경상남도 창원(昌原) 출신. 1941년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졸업. 1953년의 제2회 국전에서 시작하여 오랫동안 국전 심사위원을 지냈다. 1949년 이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재직하여 동 교수와 학장을 역임했다. 1956년에 발족된 한국미술협회의 창립회원이며 서울시 문화위원이기도 하다. 1953년 영국에서 열린 국제조각대회에서 입상(入賞)한 것을 필두로 동 54년 가톨릭성미전(聖美展)에 출품, 1954년 벨기에 만국박람회에 출품, 1959년 조각개인전 및 3·1독립선언기념상을 제작하는 등 오랜 작품생활을 해왔다.

작품으로 <여인좌상> <새> <이브> <황혼> <소립상(小立像)>

<앉아 있는 여인> 등이 있다.

윤효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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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孝重 (1917-1967)

조각가. 호는 불제(弗薺). 경기도 장단(長端) 출신. 1941년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졸업. 1940년부터 문전(文展)·선전(鮮展) 에 출품하기 시작하여 총독상·창덕궁상을 수상했고, 1942년 일본조각가연맹(日本彫刻家聯盟) 회원이 되었다. 1948년-58년 홍익대학 미술학부의 창설에 참가하여 동 조각과장, 미술학부장 등을 역임했다. 1951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유네스코 국제예술가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 1952년 스위스 만국박람회, 동 53년 영국 국제조각대회에 출품했다. 1953년 이래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했고, 1955년 예술원 회원 및 대한미술협회 부위원장 역임. 1957년 한국미술연구소의 개설에 힘썼다.

주요 기념동상작으로 <이충무공동상(鎭海)> <민충정공상> <이승만박사상>이 있으며, 작품으로 <현명(弦鳴)> <생> <희망> <석(昔)> <해변가의 도시 풍경> <십자가> 등이 있다.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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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貞淑 (1917-1967)

여류조각가. 서울 출신. 1953년 홍익대학 미술학부 조각과를 졸업하고 도미(渡美), 미시시피대학원과 뉴욕·포름 갤러리에서 조각을 연구했다. 1956년에는 크렘브룩 아카데미에서 조각대학원 코스를 수료했고 1958년에 재차 도미하여 클리블랜드 미술대학에서 산업미술을 연구했다. 1960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조형미술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고 유럽 전역에 걸친 미술 시찰여행을 하였다. 국전 심사위원과 홍익대학교 조각과장을 역임했다. 마닐라와 사이공 등의 국제전과 상파울로 비엔날레전 등에 출품하는 한편 조선일보 현대작가초대전에도 출품했고 몇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여성다운 섬세한 감각의 볼륨있는 석조 및 목조를 통하여 생활의 애환을 표현하는 작가로 알려지고 있으며 작풍은 추상경향에 가깝다.

주요작품으로 <이인호소령상> <지덕칠중사상(池德七中士像)>

<이율곡선생상> <새의형태> <작품> <엄마와 애기> <두 얼굴> 등이 있다.

김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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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世中 (1928-1986)

조각가. 경기도 안성(安城) 출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및 대학원 졸업. 1952년 이후 모교에 재직, 교수를 거쳐 1972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이 되었다. 1957년 한국미술협회 상임위원이 되었고 1958년 국전 추천작가, 1961년 제10회 국전의 심사위원 및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이 되었고 1962년 한국문화단체 총연합회 이사(理事)가 되었다. 작품할동으로는 1956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에 초대출품한 것을 비롯하여 1962년 마닐라 국제미술전, 사이공의 국제미술전에 각각 한국대표로 출품했고 사이공 국제전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도 있다. 1963년 국제조형미술협회 제4차 정기총회(뉴욕)에 한국대표로 참가하는 한편 UN탑을 제작하였다. 1987년 김세중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작품으로 <희망> <토루소> <청년> 등이 있다.

김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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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泳仲 (1925- )

조각가. 전라남도 출신. 홍익대학 미술학부 조각과 졸업. 원형회(原形會)의 회원으로 활약,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초대전 등에 초대출품 했다. USOM 청사 및 정부 청사의 대리석 부조(浮彫)를 제작한 바 있으며 목조를 많이 다루는 추상 경향의 작풍을 가졌다. 홍익대학교 및 서라벌예술대학 강사를 역임한 바 있다.

전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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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

조각가. 홍익대학교 조각과를 졸업. 제4,5,6회의 국전에서 특선을 받고 동 추천작가 되었다. 1965년 제14회 국전 이후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홍익대학 부교수 및 동 조각과장을 지냈다. 마닐라 국제전, 사이공 국제전,말레이시아 국제전 등에 출품한 바 있다. 대리석을 소재로 부드러운 정감과 기념비적 형태의 독자적인 양식을 구현한 작가로 알려지고 있다.

김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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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燦植 (1926-1997)

조각가. 평안남도 출신 1950년 평양 미술대학을 중퇴, 월남 후 동 58년 홍익대학 미술학부 조각과를 졸업했다. 1955년 제4회 국전에 출품하여 문교부장관상을 받았고 1956년 대한미술협회전에서 문총상(文總賞)을 받았다. 1957년 현대작가초대전에 초대출품, 1961년 국전 추천작가, 동 70년대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이 되었다. 1958년 이래 경희고등학교 교사, 1970년부터는 홍익대학교 강사로 재직하였다. 1964년 일본의 도쿄미술전에 출품, 1969년 브라질 상파울로 비엔날레 전에 출품, 동 1970년 인도 트리엔날 국제전과 엑스포 70 한국조각전에 출품했다. 한국현대조각회와 홍익조각회의 동인으로 활약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를 지냈다.

주요 기념조각으로 경희대학내 <사자상 및 육체미술> <육군용사상> <이용문(李龍文)장군 동상> <마산 의거탑> <공군전공탑(강릉)> <공군 보라매탑> 등이 있다.

이승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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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升澤 (1929-1971)

조각가. 함경남도 출신. 1959년 홍익대 조각과 졸업. 1964년 원형회전(原形會展) 동인으로 활약했고 현대조각회전, 신상회전(新象會展) 등에 출품하는 한편 1967년 조선일보 현대작가초대전 및 1970년 한국일보 주최 한국대상전에도 초대출품했다. 국제전은 일본 엑스포 70 한국현대조각전을 필두로 제6회 파리 비엔날레 제12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전에 출품 기록을 갖고 있다. 전위미술의 단체인 한국 아방가르드협회 회원이며 파격적인 전위경향의 조각으로 주목을 받는 작가이다. 1970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및 단국대학교 강사로 재직하면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작품으로 <오지작품> <비닐작품> <유리작품> <연기작품> <헝겊(바람)작품> <입체(오브제)작품> <모뉴망> 등이 있다.

송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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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榮洙 (1930-1970)

조각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각과 졸업. 1953년-56년 제2,3,4,5회 국전에서 특선, 1963년-1967년 12,14,15,16회 국전에서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역임. 주요 기념조각 작품으로 <사명대사동상> <원효대사동상>이 있다.

오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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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宗旭 (1934- )

조각가. 황해도 출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출신.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 동 추천작가가 되었다. 현대작가초대전 및 한국미술대상 전에 초대출품한 바 있으며 현대공간회의 핵심멤버이다. 인천교육대학 교수로 재직 중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도 출품했다. 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초대출품한 작품이 현장전시를 거부당한 일이 있으며 그만큼 파격적인 전위실험을 시도하는 작가로 알려지고 있다.

최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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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起源 (1935- )

조각가. 서울 출신. 1957년 홍익대학교 졸업. 1956년 대한미술협회전에 출품. 미협위원장상을 수상했고 동 57년 국전에서 특선, 58년 반공미술전에서 반공연맹상을 수상했다. 1960년 국전 추천작가, 동 64년 심사위원이 되었다. 1958년 조선일보 주최 현대미술 작가전에 초대출품했고 동 1963년 원형회(原形會)의 동인으로 활약하는 한편 문화자유회의전에도 초대출품했다. 현대 조각회의 핵심멤버이며 한국미술대상전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홍익대학교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기념동상·탑 대표작으로 <김원등(金源登) 상사상> <강재구소령상> <을지문덕장군상> <4·19기념탑(東國大學校)> <국립묘지 현충탑>이 있다.

작품으로 <항아리 든 여인> <바이올린 켜는 여인> <피리 부는 여인> <작품 9> <정오의 건물> <전설에서>가 있다.

박종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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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鍾培 (1935- )

조각가. 경상남도 마산(馬山) 출신. 1962년 홍익대학교 및 동 대학원을 졸업, 도미(渡美)하여 크렘브룩 아케데미에서 조각 석사과정을 마쳤다. 원형회 회원으로 활약하며 현대작가 초대전 및 한국현대 조각회전에도 출품했다. 1965년 제14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 1966년 도미후 내셔널 메탈 스칼프처 쇼에서 1등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제4회 파리 비엔날레, 제9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국제전에 출품했고 1968년 일시 귀국하여 홍익대학교 조교수를 지냈으며 동년 재차 도미하여 미시건주(州) 버밍햄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국내에서는 비교적 철조(鐵彫)를 많이 다른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도미 후에는 주물(鑄物)조각 외에 알루미늄, 브론즈, 철, 아연, 스테인레스 등 다양한 재료를 구사하여 메커니즘과 에로티시즘이 교호(交互)하는 새로운 실험적인 경향을 추구하고 있다.

작품으로 <역사의 원(源)>이 있다.

최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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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滿麟 (1935- )

조각가. 서울대학교 대학원 조각과를 졸업. 국전에 출품하여 동 추천작가가 되었으며 현대작가초대전에도 초대출품한 바 있다. 제4회 및 제5회 파리비엔날레 국제전 말레이시아 한국미술전, 세계문화자유회의전, 이스파 국제전 등에 출품했다.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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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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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泰植 (1903-1981)

서예가. 충청남도 대전(大田) 출신. 경성제대 철학과 졸업. 7세 때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서예공부를 시작, 한적(漢籍) 연구 및 전서(篆書)·논어(論語)를 공부하며 서도에 정진한 성균관(成均館) 계통의 학자이기도 하다. 연희전문학교와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1950년-1960년 충남대학교 총장, 그후 성균관대학교 교수로서 동양철학을 강의해 왔다. 한국 서예가협회 대표위원을 지낸 바도 있다. 전서(篆書)를 즐겨 쓴다.

손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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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在馨 (1902-1981)

서예가. 호는 소전(素筌). 전라남도 진도(珍島) 출신. 1925년 양정의숙을 졸업, 1929년 외국어 학원을 졸업했다.

1929년-1932년 중국 금석학자 나진옥(羅振玉)에게서 서화(書畵) 및 금석학을 수학했고, 1924년 이래 선전(鮮展)에 출품했다. 1930년 조선서화협회전(朝鮮書畵協會展)에서 특선, 1933년 조선 서도전(朝鮮書道展) 심사위원, 1934년 조선 서화협회 이사 및 동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45년 조선서화연구회 회장, 1947년 향지(鄕地)에 진도중학교를 설립, 이사장이 되었다. 1947년-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전임강사를 지냈고 서울시 문화위원이 되었다. 1949년-1959년 국전 심사위원, 1954년 1960년 각각 제1대 및 제2대 예술원 회원을 역임했고, 1958년 자유당 소속 4대 민의원의원(民議院議員)으로 선출되었다. 1962년 한국미술가협회 이사와 5월문예상 심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동년 예술원장 작품상을 수상했다. 1965년 예술인총연합회 이사장이 되었으며 1970년 국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작품으로 <화류운>이 있다.

김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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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基昇 (1909-2000)

서예가. 호는 원곡(原谷). 충청남도 부여(夫餘) 출신. 중국 상해(上海)의 중국공학대학부(中國公學大學部) 경제과 졸업. 1952년 제1회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 계속 제4회까지 특선을 받았고, 1961년 이래 국전 추천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56년 대성서예원(大成書藝院)을 창설하였으며 9회에 걸친 개인전을 가졌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 문교부 문화재보존위원,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등을 역임했다. 서체는 황정견(黃庭堅)을 익혔으며 개성적인 새로운 서체의 발굴을 시도하기도 했다.

대표작으로 <안창호선생 비문> <민충정공 비두전(閔忠正公碑頭篆)>. <안중근의사 동상문> <국립묘지 무명용사 영현예병서>가 있다.

유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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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熙綱 (1911-1976)

서예가. 호는 검여(劍如). 인천(仁川) 출신. 1937년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 졸업. 1938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의 동방문화학회(東方文化學會)에서 중국의 서화 및 금석학을, 상해(上海) 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1939년 북경동학회어학교(同學會語學校)를 졸업, 1940년 <강서시보(江西時報)> 편집장을 역임, 1945년 광복군 지대장(支隊長)의 비서로 있다가 해방과 함께 1946년 귀국했다. 1954년-1961년 인천 시립박물관장, 1955년 대동서화 동연회(大東書畵硏究會) 회장 및 미술가협회 중앙위원을 역임했고 인천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55년부터 국전에 출품,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고, 1959년 국전 초대작가, 1961년 이후 심사위원을 지냈다. 1962년 및 1965년 각각 인천교육대학과 홍익대학의 강사로 재직했으며, 1962년 경기도 문화상을 수상했다. 1959년, 1964년 두 차례에 걸쳐 인천과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검여서숙(劍如書塾)을 열어 후배들을 지도해 오던 중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실어증과 반신불수의 증세가 병발하는 등 불의의 병고를 치렀으나 꺾이지 않고 계속 서도에 정진, 오른손이 마비된 불완전한 상태에서 왼손으로 쓴 글씨를 가지고 마련한 1971년 제3회 개인전은 여러 가지 충격적인 반향(反響)을 일으켰다. 육조체(六朝體)를 터득하여 행서(行書)·초서(草書)를 통하여 준엄한 서예의 한 경지를 보여 주목을 받아온 서예가이다.

작품으로 <행서칠언대련(行書七言對聯)> <해서혜천선생시(楷書惠泉先生詩)> <나무아미타불(南無阿媚陀佛)>(左書) 등이 있다.

배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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裵吉基 (1917-1999)

서예가. 호는 시암(時庵). 경상남도 창원(昌原) 출신. 1941년 니혼대학(日本大學) 법학과를 졸업. 1942년-1945년 부산 초량상업학교, 경남중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다. 1952-1964년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문총(文總) 중앙위원, 대한미술협회 상임위원, 한국미술가협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1953년 문교부 예술과장, 1960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한국서예가협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1952년 이래 동국대학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로 재직, 1958년 동국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52년 부산에서의 제1회의 개인전을 필두로 몇 차례 개인전을 가진 바 있고 1966년 일본 도쿄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중국 진(秦)나라의 전서(篆書)를 즐겨 쓰고 왕희지(王羲之)를 좋아하여 이를 범본(範本)으로 삼았다.

대표작으로 <음덕자연선유경(陰德自然宣有慶)> 등이 있다.

최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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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重吉 (1917- )

서예가. 호는 어천.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 8세 때 조부(祖父) 앞에서 서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10여 세에 유공권(柳公權)의 서체를 익혔다. 1954년 제4회 및 5회 국전에 출품, 각각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고, 1962년 이래 국전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손과정(孫過庭)의 서보(書譜)에 능하고 초당삼가(初唐三家)의 서체와 또는 육조서(六朝書), 갑골문(甲骨文) 등 중국의 고전(古典) 서체를 터득하고 있다.

작품:해서칠언대련(楷書七言對聯), 비파행(琵琶行).

이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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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基雨 (1920- )

서예가. 호는 철농(鐵農). 서울 출신. 22세에 일본 미술전에서 수상, 5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철필(鐵筆)로 농사를 짓고 묵(墨)으로 밭을 간다는 철농묵경(鐵農墨耕)의 뜻에서 아호(雅號)를 철농이라 지었다. '서예(世譽)를 불탐(不貪)'해서 국전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서예가이다. 대한국정교과서 주식회사 조사역으로 평범한 샐러리맨의 생활을 하며 서도에 정진했다. 특히 전각(篆刻)에 뛰어나서 역대(歷代) 대통령의 사인(私印)을 각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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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忠顯 (1921- )

서예가. 호는 일중(一中). 서울 출신. 1943년 중동학교를 졸업. 1949년 문교부 예술위원,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등을 역임했고, 1953년 국전 심사위원이 되었다. 1965년 한국 서예가협회 상임위원이 되었고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를 창립, 이사장으로서 1천5백여 회원들에게 서예를 지도하기도 했다. 7세 때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쓰기 시작했고 현재는 후한(後漢) 조전비서풍(曹全碑書風)의 예서(隸書)를 썼다. 궁체(宮體) 한글은 국내 독보적인 존재로 알려지고 있다. 김응현과 중계(仲季)의 형제간으로 그들의 사백(舍伯) 김문현(金文顯) 등 3인 모두 삼절(三絶)로 불릴 만큼 일가(一家)의 서풍(書風)을 이루었다.

주요작품으로 <4·19의거 희생자 묘비> <권도원수 행주대첩비명> <이충무공 한산도제승당비> <병천 유관순 기념비> <예산 윤봉길의사 기념비> <백범 김구선생 묘비> <사육신묘비> <의암손병희선생 묘비> <월남 이상재선생 묘비>가 있다.

박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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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世霖 (1924-1975)

서예가. 호는 동정(東庭). 경기도 강화(江華) 출신. 동양한의대(東洋韓醫大)를 중퇴, 8세 때부터 조부를 따라 서예공부를 시작, 1958년 이래 국전에 출품하여 문교부장관상을 받고(제9회 국전) 심사위원과 문교부 신인예술상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3년간 예총(藝總) 경기도지부장을 지내면서 인천여자고등학교에서 서예를 지도했다. 육조체(六朝體)를 정교하게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으로 <왕언절대련(王言絶對聯)> <성교서절록(聖敎序節錄)> <해서병풍(楷書屛風)>이 있다.

김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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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膺顯 (1925- )

서예가. 호는 여초(如初). 서울 출신. 고려대학교 영문과 졸업. 10여세 때 안진경체(顔眞卿體)로 글씨공부를 시작, 육조서(六朝書)를 전공했다. 1954년부터 국전에 출품, 동 추천작가를 역임했고, 국회도서관의 창설멤버이기도 하다. 1965년 12월 첫 개인전을 가졌고, 중형 김충현과 더불어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를 창설, 1971년 이후 동 회장으로 있으며 건국대학교에서 서예를 강의했다. 원래 육조서를 썼으나 근래에는 강유위(康有爲=靑末人)와 같은 전형(典型)과 파격(破格)의 경지를 발고 있다.

작품으로 <견귤현(見橘顯)> <전적벽부(前赤壁賦)> 등이 있다.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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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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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寅國 (1914-1974)

건축가. 황해도 재령(載寧) 출신. 1942년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교수, 1951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강사를 역임했다. 1956년 이래 국전 심사위원, 1954년 홍익대학교 건축과장, 1965년 홍익대학교 건축학부장이 되었다. 1957년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1960년 국회의사당 건설상임위원이 되었으며 한편 국제 조형미술가협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유럽 건축계를 시찰하기도 했다. 1961년 서울특별시 문화재 보존위원, 남대문중수공사 자문위원, 대한주택영단 자문위원 등에 피임되고 1965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주요작품으로 <중앙관상대(中央觀象臺)>가 있고 저서로 <서양 건축사>, <근대 건축론>이 있다.

김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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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熙春 (1915- )

건축가. 함흥 출신. 1937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 1957년 미네소타 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1960년부터 1971년까지 국전 심사위원. 1964년 건축가 협회 회장, 예총 이사, 대한건축학회 부회장, 1963년에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1963년 대통령 표창장 받음.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교수. 작품으로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사 및 강당 서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숙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과학관 및 도서관> <워커힐 주건물> <수원 조합원호원> <경기도 청사 설계>가 있다. 현대 생활에 걸맞는 경제적·실질적인 작품을 주로 하며 특히 온건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강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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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明求 (1917- )

건축가. 서울 출신. 1940년 와세다대학 부속공업학교 건축과 졸업. 1943년-1946년 조선주택영단(朝鮮住宅營團) 설계부 기사로서 재직. 1946년 이후 설계사무소를 자영(自營)했다. 1954년 미국 뉴욕의 웹 앤드 놉 건축회사에서 설계에 종사했으며, 1955년 홍익대학교 강사로 재직하여, 1961년에 조교수가 되었다. 1956년 대한 미술협회 이사, 1956년-1963년 국전 심사위원, 1957년 한국건축가협회 이사, 1961년 국회의사당 건설위원 및 대한주택영단 주택건설위원, 1962년 예술인 총연합회(1961) 등을 역임했으며, 1960년 제3차 국제조형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바도 있다.

주요작품으로 <예총회관> <제일은행 광주지점> <서울대학교 농대 기숙사> <해무지청> 등이 있다.

김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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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秀 (1919-1985)

건축가. 평안남도 대동(大同) 출신. 1941년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공학과 졸업. 1947년 미군정청 총무처 설계과장, 1951년 운크라 주택국 기사(技師)로 재직했다. 1953년 이래 종합건축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1953년-1955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및 한양공과대학의 강사를 거쳐, 1956년 교환교수로 도미(渡美), 미네소타대학원에서 연수(硏修)했다. 1957년 서울공대 조교수 대우, 1961년부터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교수를 거쳐 건축공학과장이 되었다. 1955년 국전 초대작가, 1958년 대한건축학회 이사, 1960년 대한건축사협회 부회장, 1962년 대한건축학회 부회장을 각각 역임했으며 196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대표작품으로 <종로(鐘路) YMCA 회관> <성모병원> <한일빌딩> <성신여고 교사>가 있다.

김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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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重業 (1922-1988)

건축가. 평안남도 평양출신. 1941년 일본 요코하마 고공(橫潰高工) 건축과 졸업. 1945년 조선주택영단 기수(技手)로 재직, 194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가 되었다. 1952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국제예술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도불(渡佛)하여 1956년까지 르코르뷔지에 연구소에서 건축학·도시계획 등을 연구했다. 귀국과 함께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설립, 후진양성에 힘쓰는 한편 개인전을 가졌고 홍익대학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1956년 이래 국전 심사위원, 1961년 문화재 보존위원, 1961년-1963년 문화자유회의전 준비위원, 1965년 현대작가초대전 운영위원을 역임했다.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1963년 도미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의 한국관 설계를 담당하기도 했다. 대표작품으로 <부산대학교 본관> <건국대학교 도서관> <서강대학교 본관>

<프랑스 대사관> <뉴욕 세계박물관회 한국관> 등이 있다.

이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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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光魯 (1928- )

건축가. 호는 무애(無涯). 서울 출신. 1951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부 졸업, 1955년에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1953년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위원회 연구원으로 재직, 1954년 주택문제 연구차 도미(渡美)한 바 있고, 1955년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위원이 되었다. 1955년 한국미술가협회 회원, 1956년 무애건축연구소(無涯建築硏究所)를 설립, 대표로 활약했고, 1957년 국전에 출품, 특선을 받았다. 195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강사, 1959년 조교수로 피임되어 교수로 재직하였다.

대표작품으로 <연세대 대강당> <신문회관> <서울대 문리대 이공학부> 등이 있다.

김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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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壽根 (1931-1986)

건축가. 서울 출신. 1957년 일본 도쿄예술대학(東京藝術大學) 건축과 졸업, 1959년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 다카야마(高山)연구실 석사학위 과정을 수료, 석사학위를 획득했으며 1962년 동 대학원의 박사학위과정을 수료했다. 1955년-56년 도쿄(東京)의 마쓰시타(松田) 건축 설계사무소에 근무했으며 1960년 국회의사당 건축설계안 모집에 응모하여 1등으로 당선했다. 1961년 이래 건축연구소를 자영(自營)하는 한편 홍익대학교에 재직중, 1964년에 조교수가 되었다. 1961년 워커힐 설계위원, 1962년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위원, 자유센터 건설분과위원장, 1964년 대한체육회 시설분과위원 등을 역임하고 1970년 일본 오사카(大阪) '엑스포 70 만국박람회' 한국관 설계를 담당하기도 했다.

대표작품으로 <자유센터> <왕양빌딩> <우석대학교 부속병원> <엑스포 70 만국박람회 한국관> 등이 있다.

공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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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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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順石 (1905-1986)

공예가. 석공예(石工藝). 호는 하선(荷仙), 하라(賀羅). 충청남도 아산(牙山) 출신. 1924년 남대문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도일(渡日), 1931년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도안과를 졸업, 귀국과 합께 동아일보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으며 화신백화점 광고부에 입사했다. 해방후 문교부 예술과 고문직을 역임했고 194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창설에 참가, 동 응용미술 과장이 되었다. 1947년 제2회 장식도안 개인전, 1950년 국방부 정훈국 계획전문위원이 되고 1955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동년 이래 국전심사 위원을 지냈으며 1961년 한차례의 유럽 시찰여행을 마쳤다.

1962년 한국미술가협회 부회장에 피임, 동년 뉴욕에서 열린 제1차 공예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고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1969년 서울대학교를 정년퇴직하고 70년과 71년 두 차례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특히 석공예의 독보적인 존재로 알려지고 있다.

작품으로 <대(台)를 겸한 수반(水盤)>등이 있다.

박성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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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星三 (1907-1987)

공예가. 목공(木工). 평안남도 평양 출신. 1925년 평양 동명학원(東明學院) 졸업. 1934년-41년 만주(滿洲) 안동(安東)의 무석장미숙(武石莊未塾)에서 목각을 수업했다. 1943년 선전에 출품하기 시작했고 1953년 59년 두차례에 걸쳐 공예작가도인전에 출품했고, 1956년 제8회 대한미술협회전에도 출품했다. 1954년 이후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1960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1년 국제 자유미술전에 출품, 동 62년 신인예술상 심사위원이 되었다. 1963년 공보부(公報部)의 파견으로 도미(渡美), 스미소니안 박물관의 한국실 설치를 지도한 바 있다.

강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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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昌園 (1910-1977)

공예가. 건칠(乾漆). 경상남도 출신. 1930년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졸업. 1933년-1940년 선전(鮮展)에 출품, 계속 특선을 받은 바 있고 1946년 발족된 한국공예가협회의 부회장이 되었다. 1949년 국전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 동 55년 국전 초대작가, 55년 제4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이 되었다. 1951년 경상남도 공예기술원양성소의 강사로 재직 후진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작품으로 각화병(角花甁) 등이 있다.

한홍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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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弘澤 (1916- )

공예가. 그래픽 디자인. 서울 출신. 1939년 일본 도쿄도안전문학교(東京圖案專門學校) 응용미술과 졸업, 동 40년 데이고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서양화과 연구과에서 수학했다. 1943년 유한양행 미술부장, 48년 경기상고 및 53년 보성중고교의 미술교사를 각각 역임했다. 195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를 지냈고 동 59년 서울 도안 연구소를 창설했다. 1960년 홍익대학교 조교수를 거쳐 65년 공예학부 도안과장이 되었다.

작품활동은 1953년 제3회 국전에서 특선을 받은 것을 필두로 1957년 제2회 개인전을 가졌고, 대한산업미술가협회의 창립위원 및 간사, 1960년 동남아시아 현대작가전에 출품 제2회 신인예술상 심사위원, 1963년 신상회(新象會)의 회원 및 간사로 활약했다. 1965년 이후의 활동으로는 국전과 상공미전(商工美展), 국제기능올림픽 심사위원, 서울시 문화위원, 문교부 미술교과 출제위원, 코트라(KOTRA) 디자인 위원, 세계 공예회의(W.C.C.) 한국위원 등을 들 수 있다.

현재 대한산업미술가협회를 주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그래픽 디자인계의 선구자의 한사람이다.

백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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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泰元 (1923- )

공예가. 목칠(木漆). 평안북도 태천(泰川) 출신. 1953년 제3회 국전에서 특선을 받고 동 추천작가를 거쳐 1960년 제9회 및 제12회 국전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중앙대 예술대 공예과교수를 역임했다.

황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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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鍾九 (1919-2003)

공예가. 도자기. 서울 출신. 일본에서 수학(修學). 선전에 출품하기 시작하여 해방 후 국전의 추천작가를 거쳐 동 심사위원이 되었다. 이화여대 미술대학 도예과 창설에 참가하여 동 교수로 재직했다. 1970년 12월 과학기술처의 후원으로 일본 및 자유중국의 요업계를 시찰하고 돌아온 바 있다.

유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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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康烈 (1920-1976)

공예가. 염색, 판화. 함경남도 북청(北靑) 출신. 1942년 일본 도쿄 사이토공예연구소(薺藤工藝硏究所)에 입소하고, 동 44년 니혼미술학교(日本美術學校) 공예도안과를 졸업했다. 1951년 경상남도 공예기술원양성소 강사를 지냈으며, 52년의 제2회 국전 및 54년의 제3회 국전에 문교부장관상·국무총리상을 각각 수상했다.

1953년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동 55년 이화대학교 강사, 5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강사를 역임했다. 1955년 국전 추천작가 60년 이래 국전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57년 미국 신시내티 제5회 국제판화전에 입선, 58년 뉴욕 한국현대미술전에 출품했다.

1958년 미국 록펠러재단의 초청으로 도미(渡美), 뉴욕대학 및 프레트 콘템포레 그래픽 아트 센터에서 수학했다. 1959년 미국 현대판화 100인 선발 초대전에 출품, 동년 캘리포니아 국제판화전과 워싱턴 국제판화전에도 출품했다. 1960년 홍익대학교 부교수, 동 공예과장을 거쳐 65년 공예학부장이 되었다.

1963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전에 한국대표로 출품, 68년 현대판화가협회의 창립동인으로 활약했다. 공예가로서보다는 판화가로 더 많이 알려지고 있으며 우아한 현대적인 감각의 여러 작품을 보인다.

작품으로 <바다와 나비(염색)> <가을(염색)>이 있다.

백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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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泰昊 (1925- )

공예가. 염색.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를 졸업. 제3,6,7,8,9회 국전에서 특선을 받고 추천작가가 되었다. 1963년 제12회 국전 이후 동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63년 제12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숙명여자대학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등의 교직생활을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의 작품 경향은 향토색(鄕土色)에 충일하고 서구(西歐)양식의 흐름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작품으로 <노을(염색)> 등이 있다.

권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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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純亨 (1929- )

공예가. 도자기. 강원도 강릉(江陵) 출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를 졸업, 도미(渡美)후 1년간 클리블랜드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에서 수업(修業)했다. 국전 추천작가, 상공미술전(商工美術展)의 추천작가, 동 심사위원, 한국공예디자인연구소 이사(理事)를 역임했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교수로 재직했다. 1964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개인전 2회, 독일에서 열린 국제공예전을 비롯, 3차례나 국제전에 출품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