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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전래와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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寫眞-傳來-展開

프랑스의 화가L.J.M.다게르에 의해 사진술이 발명된 것은 1839년의 일이며, 한국에 사진술이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약 40년 후인 1880년대초로 추측된다. 이 무렵은 한미통상조약이 체결된 데 이어 각국과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각국 선교사와 외교관의 왕래가 빈번한 때였는데, 이들을 통해 사진술이 들어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는 물론 외국인들에 의해 촬영되었던 것이며, 한국인 최초의 사진사로는 영친왕(英親王)의 스승이며 서화가였던 해강 김규진(海崗 金圭鎭, 1868-1933)이 기록에 남아 있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사진술을 배운 뒤 창덕궁에 사진실을 두어 황실 관계 사진을 찍는 한편 소공동에 천연당(天然堂)이란 영업사진관을 개업하였다. 작품적인 가치로 보아 본격적인 사진활동을 한 사람으로는 함경북도 출신의 임도원(任道元)을 들 수 있는데, 그는 1911년부터 수년간에 걸쳐 전국 각지의 생활상을 기록 촬영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작품적인 가치나 사적(史的)·자료적 가치로 보아 중요한 것이다.

1929년에는 서울에서 정해창(鄭海昌)이 평양에서 서순삼(徐淳三)이 개인전을 가졌는데, 이것은 한국인에 의한 사진전의 효시라 할 수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많은 아마튜어 사진작가들이 등장, 친목단체를 만들고 연구와 작품 발표를 하였다. 본격적인 사진단체로는 1935년 최계복(崔季福) 중심의 대구아마추어사우회(寫友會), 임응식(林應植) 주재의 강릉사우회(江陵寫友會),1937년에 임병기(林炳基) 주재의 경성아마추어 사진구락부, 1939년에 이해선(李海善) 주재의 백양사우회(白羊寫友會) 등이 조직되어 발표전을 가졌다. 이 무렵 가장 큰 사진단체로는 전조선사진연맹(全朝鮮寫眞聯盟)을 들 수 있으며, 이 연맹은 1934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전조선 사진살롱'을 열었다. 물론 일본인 중심의 것이었으나 한국인 사진작가들도 역작들을 출품, 그들과 어깨를 겨루었다. 이 전시회를 통해 활약한 작가로는 서순삼(徐淳三)·현일영(玄一榮)·최계복(崔季福)·임응식(林應植)·이규완(李揆完)·김원선(金元善)·서병직(徐丙直)·이형록(李亨祿)·박삼식(朴三植)·장병진(張炳眞)·오병도(吳炳道)·김순영(金舜泳)·김병수(金炳洙)·임석제(林奭濟)·정도선(鄭道善)·김조현(金祖顯) 등이다. 이밖에 연례적인 사진행사로는 조선일보사 주최의 납량사진전(納凉寫眞展)이 있었다.

8·15해방이 되자 사회적인 무질서 속에서도 서울에서는 이해선(李海善)이 중심이 되어 조선사진예술연구회(朝鮮寫眞藝術硏究會)가, 대구에서는 최계복(崔季福)이 중심이 된 경북사진문화연맹(慶北寫眞文化聯盟)이, 부산에서는 임응식(林應植) 중심의 부산예술사진연구회(釜山藝術寫眞硏究會)가 조직되어 전시회 개최, 후진양성 등 의욕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가장 규모가 컸던 공모전으로는 서울사진재료상조합과 조선사진문화사가 공동 주최한 제1회 전국종합사진대현상모집전(1949년)을 들 수 있으며, 여기에 400여 점이 응모하였고 입상자로는 최인집(崔仁集)·이경모(李坰謨)·최경덕(崔慶德)·허승균(許承均)·김원영(金元榮)·김종탁(金鍾琸)·정인성(鄭寅星)·홍사영(洪思永)·안월산(安月山)·이병삼(李炳三)·정희섭(丁熙燮)·조명원(趙明元)·이규철(李圭喆)·이수형(李秀衡)·이건중(李健中)·김찬영(金燦影) 등이었다. 이밖에도 이명동(李命同)·고종일(高鍾壹)·조상규(趙祥奎)·김진수(金珍洙)·오인창(吳寅昌)·김창권(金昌權)·임인식(林寅植)·임윤창(林允昌)·박을수(朴乙壽)·최창희(崔昌熙)·조상범(趙尙範)·박효주(朴孝柱)·박기동(朴基同)·이안순(李安純)·성두경(成斗慶)·신상우(申相祐))·송건배(宋建培)·송전화(宋塡和) 등이 활약하였다.

한국사진작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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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寫眞作家協會

한국의 사진계가 아직 전국적인 사단(寫壇)을 형성하지 못하고 회화·조각등 다른 미술분야와 어깨를 겨눌 만큼 굳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을 즈음 6·25가 일어났고, 전국의 사진작가들은 임시수도 부산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사단(寫壇) 형성을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부산예술사진연구회(대표 林應植)·대한사진예술연구회(대표 李海善)·경북사진문화연맹(대표 崔季福) 등이 가칭 전국사진단체연합회를 구성하기 위해 몇차례 모임을 가졌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위 3개단체에 소속한 중견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사진작가협회(韓國寫眞作家協會, 발기인 林應植·趙明元·林奭濟·宋亮淳·朴基同·李炳三·崔季福)를 조직하였는데, 작가의식이 확고한 중견작가 37명을 가입시켰으며, 초대회장에 현일영(玄一榮)이 선출되었다. 이 협회는 1961년 포고령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12회의 전람회, 4회의 공모전(公募展)을 통해 많은 작가를 배출·양성하였고, 전국 각 도에 지부를 설치하여 한국사단을 대표하는 기성작가들의 단체로 성장하였다.

한국사진작가협회는 창립과 함께 '생활주의리얼리즘 사진운동'을 가치로 내세우고, 그때까지 회화적 구도에만 사로잡힌 소위 예술사진·살롱사진을 지양하고, 전쟁에 짓밟힌 폐허에 서서 자연과 현실 속의 모순을 냉철하게 파헤쳐 나가려 하였다. 이것은 2차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적인 주조류였던 리얼리즘 경향에 보조를 같이 한 것이다.

문총 가입과 국전사진부 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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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總加入-國展寫眞部新說전국 사단을 대표할 만한 사진단체를 갖지 못해 다른 예술분야에 뒤진 듯하던 사진계는 1958년 한국사진작가협회가 문총 산하단체로 가입함으로써 굳건한 지위를 확보하였다. 또한 1964년 제13회 국전 때부터 사진부가 신설되어 사단의 오랜 숙원이 달성됨과 함께 사진계의 비약적인 발전을 위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국제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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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際交流

1952년 일본 주최의 국제사진살롱에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들이 출품하여 임응식의 <병아리>가 입선된 것을 필두로 해외사진전 참가가 활발해졌으며, 동아일보 주최의 동아국제사진살롱, 한국일보 주최의 한국 국제사진살롱 등 국제사진전 개최도 많이 이루어졌다. 또한 세계적인 대사진전이었던 <인간가족(人間家族, The Family of Man)>(1957년)이 경복궁 미술관에서 여성 사진전(1975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되어 많은 감명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