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한국 근대미술/한국 근대건축

근대건축의 전개 편집

近代建築-展開

1910년을 기점으로 구한국(舊韓國)은 서구(西歐) 선진국과 외교 및 통상관계를 맺고 새로운 외래사조(外來思潮)와 문물을 수입하기에 이르렀고, 한반도에 밀려들기 시작한 선진국의 식민지 정책은 여기에 박차를 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동시에 기독교등 서구종교의 포교(布敎)로 새로운 문화가 이식(移植)되어 건축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것이 붕괴되고 서구식 건축물이 건조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건축은 ① 궁전 건축, ② 종교적인 건축, ③ 외국 거상(巨商)들의 상점, 저택건축 등으로 대별되며 그 태반이 외국인에 의해 설계되었거나 시공(施工)되었다. 일제(日帝) 아래에서는 일본화된 서구식 건축이 성행하여 관청을 비롯한 학교·호텔·병원·은행 기타 공공건물이 거의 이러한 절충식(折衷式) 양식으로 세워졌고 한편 일본식 민가(民家)가 판을 치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건축 전통의 큰 명백은 일단 단절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오직 민간에 의해서만 소극적으로 재래식 건축양식이 전수(傳受)되어 한국식 주택건축의 새로운 전형을 이루었으나 이것도 부분적으로 그 미점(美點)이 손상되어 가면서 창의성 없는 타락양식(墮落樣式)으로 바뀌어졌다.

명동 천주교당 편집

明洞天主敎堂

구한말에 세워진 종교 건축의 대표적인 예. 1887년에 부지공사를 마치고 1892년 기공(起工), 1896년에 준공(竣工)되었다. 고딕식 삼연(三緣), 라틴 십자형의 건물이며 프랑스인 신부(神父) 코스테(Eugene Joan George Coste)가 설계, 감독했다. 서울 명동 소재.

성공회 본당 편집

聖公會本堂

구한말 세워진 종교건축물. 서구 중세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모방한 건물로서 변화있는 짜임새와 통일성 있는 건축미로서 외래양식을 반영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주목된다.

영국 영사관 편집

英國領事館

1897년에 건립된 외국인 외교관 저택건축의 대표적인 예. 1950년 9월 15일 UN군의 인천상륙(仁川上陸)시에 소실되었다. 영국 식민지 스타일의 양식을 가진 연와연단즙평가(煉瓦鉛丹葺平家)이며 건평 16평 정도로서 원래 소재지는 인천시 항동(港洞) 1가 3번지이다.

인천각 편집

仁川閣

1903년 기공, 1905년 준공의 인천에 세워졌던 영국 근대식 저택건축. 1950년 9월 15일 UN군의 인천상륙과 동시에 전화(戰火)를 입어 대파(大破)된 것을 그후 인천시가 헐어 없앴다. 영국인 상인(商人) 제임스 존스톤(James Johnston)의 별장으로 언덕 암반(岩盤) 위에 굳게 세워졌는데 건축설계와 디자인은 독일인 로즈케젤(Rothkegel)이라는 기사(技士)가, 건축은 중국인 청부업자 리 케이즈(Lee Kci Tso)가 했다. 지하실을 겸비한 4층 건물로 흰 벽과 뾰족 지붕 위의 붉은 타일이 조화를 이루는 이 건물은 인천시 일대의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고지대(高地帶)에 세워져 오랫동안 인청항의 랜드 마크가 되어 왔다. 건축 자재 일부 및 가구집기는 중국·영국·독일 등지에서 구입해 온 것으로 전해지며 중국 상해(上海)에서 초빙해온 십여명의 조각수(彫刻手)들에 의해 건물 내부의 각종 목각(木刻) 장식이 채워졌다. 1차대전 후에 일인들에게 전매(轉賣)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인천시가 관리하여 고급호텔로 쓰여졌다. 1층의 건평은 127평 정도로서 원소재지는 인천시 북성동(北城洞) 3가 1번지이다.

인천 시립박물관 편집

仁川市立博物館

1883년에 세워진 인천(仁川)에서 가장 오래 된 서양식 저택 건축, 1950년 9월 15일 UN군의 인천 상륙시 완전 소실되었다. 독일상사(獨逸商社) 세창양행(世昌洋行) 칼 월터의 주택으로 세워졌으며 일제시대에는부립도서관(府立圖書館), 향토관(鄕土館)으로 사용되었고 해방 후 시립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인천각과 인접한 언덕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다.

덕수궁 석조전 편집

德壽宮石造殿

구한말에 세워진 궁전건축의 대표적 예. 1900년 기공, 1909년 준공했다. 구한말 총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서 영국 사람 하딩(G.R.Harding)이 설계했으며 그리스 건축을 조형(祖型)으로 르네상스 양식을 가미한 이른바 콜로니얼 스타일(식민지 양식) 건물로서 동형의 건물이 18세기 이후 영국 식민지의 여러 곳에 세워진 바 있다. 내부 실내장식은 영국인 로벨(Lovell)이, 시공은 역시 영국인 데이브드슨(H. W.Davidson)이 담당했다. 1950년 한국동란 중 전화(戰火)를 입어 석조의 구조만을 남기고 전부 소실된 것을 1953년 수리하였으며 국립 현대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울 덕수궁 소재.

독립문 편집

獨立門

1896년 11월 21일 기공, 러시아인 세레덴 사비진이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요청으로 설계했으며 이탈리아 로마의 개선문(凱旋門) 양식을 소박하게 모방한 특수한 서양식 건물로 건축적인 미적 가치는 별로 없다.

종로 일대의 상가건축 편집

鍾路一帶-商街建築

재래의 한국식 건축양식에 서양식 설계를 가미한 절충식 건축의 한 예. 한국 근대 건축의 단면을 시사하는 이들 상가 건물은 목조 5층에 기와를 입히고 2층 정면에 발코니를 두어 목조난간을 두른 구한말의 서구식 건축이 우리의 고유양식에 정착한 좋은 구체적인 사례가 된다. 지금은 종로 및 안국동(安國洞)의 일부에만 남아 있을 뿐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조계사 편집

曺溪寺

조선시대 건축양식이 근대로 연장된 대표적인 예. 사교(邪敎)의 왕으로 군림했던 차경석(車景錫)이 전라북도 정읍(井邑)에 세웠던 것을 서울로 옮겼다. 규모에 있어서는 조선시대 왕궁에 비할 만큼 크나 조형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문제될 수 없을 만큼 속악(俗惡)하게 지어졌다. 일제시대에 세워진 최대의 한국식 건축물로 중요하며 현재 불교의 총본산(總本山)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울 수송동(壽松洞) 소재.

일본 절충양식주의 편집

日本折衷樣式主義

일본인 건축양식. 1910년-1945년에 걸친 일제하에서는 이러한 왜곡(歪曲)된 절충주의가 건축의 주류를 이루었다. 원래 이 양식은 돌과 벽돌을 위주로 한 것으로 일본인들의 이른바 메이지(明治)의 문명 개화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일본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다. 일본 아카사카리큐(赤坂離宮)를 본딴 총독부청사, 경성부청(서울시청), 반도호텔, 구경복궁미술관 등은 이 절충양식주의의 좋은 예이며, 일본인들 손으로 세워진 각종 관청·학교·은행·공회당·호텔 건물들이 모두 이 양식을 답습하고 있다.

구조선호텔 편집

舊朝鮮 Hotel

1914년 건립. 원래 환구원이 있던 자리에 세운 건물이며 독일인 게테라 란테가 설계했다. 대지 6750평, 건평 583평이며 방 수는 69, 수용인원 108명의 호텔 건축이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건물이나 일본식을 떠나 변화있는 공간 구성과 재료의 아름다움을 잘 살폈다. 1970년에 구건물을 헐고 현재의 철근 콘크리트 고층건물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