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조선시대의 미술/조선시대 서예

서체 편집

書體

조선시대의 서체는 안진경체(顔眞卿體)의 고려와는 달리 왕희지(王羲之)에서 출발하는 원나라 말기의 조맹부의 서체로서 시종하였는데 조맹부의 규각(圭角)이 없는 세련된 서체는 명나라 초기의 문인 학자들 사이에 유행하여 이른바, 한림원체(翰林院體)라 하여 판본(板本)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것은 조선에도 자극을 주어 세종 때에 간행된 훈민정음(訓民正音),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의 서적은 명초의 서체와 사경(寫經)에서 느낄 수 있듯이 힘이 들어 있었는데 초기의 서도를 대표하는 서예가는 안평대군(安平大君)으로서 그의 서풍은 조법(趙法)을 잘 체득하여 그 연미(軟美)하고 넉넉한 품(品)이 당시에 따를 이가 없어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하자 전국에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초기의 서체는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새로운 자극과 범본(範本)이 중국으로부터 끊어짐에 따라 그저 외형(外形)만 정비하고 균형미만을 찾는 무기력한 서체로 정형화(定型化)되어 갔다. 중종 때에는 김구(金絿)가 종왕(鍾王)의 서체를 배워 인수체(仁壽體)를 개창(開創)했고 명종 때의 양사언(楊士彦)은 큰 글씨(大字)와 초서(草書)에 뛰어났다. 선조 때의 한호(韓濩)는 진체(晉體)의 대가로서 뛰어났고, 또 이광사(李匡師) 같은 우수한 서예가도 있었으나 한결같이 이들의 서체는 그저 말쑥하고 미끈한 전형적인 조선서체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 19세기에 가서 김정희(金正喜)의 독창적인 서체가 등장하여 일대 혁신을 일으켰으나 그의 추사체(秋史體)는 더 발전이나 계승을 보지 못하고 그 한 사람대(代)로서 끝났다. 한편 한글 서체로 궁체(宮體)라는 서체가 있어서 의식적(儀式的)인 등서체(謄書體)와 장식적인 서간체(書翰體)로 구별되는데 이 서체도 사각상의 미 이상의 글씨로서의 골(骨)을 갖지 못한 역시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서체임을 면치 못했다.

안평대군 이용 편집

安平大君 李瑢

1418년(태종 18)-1453년(단종 1) 조선시대 초기의 왕족(王族)이며 대표적인 서예가로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우거사(琅玗居士), 매죽헌(梅竹軒)이며 세종의 3남이다. 1428년(세종 10)에 안평대군에 봉해지고 1430년 여러 왕자들과 함께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고 조정의 정치에도 간섭했으나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의 무신세력에 눌려 실권을 박탈당하고 유배중에 교동(喬桐)에서 36세로 사사(賜死)되었다. 평소에 안견(安堅), 박팽년(朴彭年) 등 당시의 서화가들과 자주 교류를 가졌으며 시문에 뛰어났고 서화는 천하제일이라 일컬어질 정도였다. 글씨는 조맹부체로서 활달하고 자연스러우면서 획(劃) 골(骨)이 들어 있으며 풍류(風流)와 문화를 알던 그의 높은 인품이 그대로 반영되는 듯하다. 현존하는 서적(書蹟)으로는 경기도 여주(驪州)의 영릉신도비(英陵神道碑), 용인(龍仁)의 청천부원군심온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과천(果川)의 임영대군구묘표 등이 있다.

김구 편집

金絿

1488년(성종 19년)-1534년(중종 29년)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서예가.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511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에 올랐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투옥, 개령(開寧)에 유배되었다. 글씨에 뛰어나 초기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서울 인수방(仁壽坊)에 살았기에 그의 서체를 인수체(仁壽體)라고 한다. 현존하는 서적으로는 이겸인묘비(李謙仁墓碑), 자암필첩(自庵筆帖), 우주영허첩(宇宙盈虛帖) 등이 있다.

양사언 편집

楊士彦

1517년(중종 12년)-1584년(선조 17년)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서예가.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완구(完邱), 창해(滄海), 해객(海客),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지방관(地方官)을 두루 역임했는데 자연을 사랑하여 회양군수(淮陽郡守)로 있을 때 금강산(金剛山)에 자주 드나들었고 금강산 만폭동(萬瀑洞)에는 바위에 새긴 그의 글씨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洞天)>이 남아 있다. 진체(晉體)의 대가로서 해(楷), 행(行), 초(草)에 모두 뛰어났고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렸다.

한호 편집

韓濩

1543년(중종 38년)-1605년(선조 38년) 조선시대 전기의 서예가.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 청사(淸沙), 본관은 삼화(三和)이며 개성(開城)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격려로 서도에 정진하여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익혀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의 각체에 모두 뛰어났다. 그때까지 중국의 서체와 서풍(書風)을 모방하던 풍조를 벗어나 독창적인 경지를 확립하여 석봉류(石峯流)의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창시했다. 1567년(명종 22)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벼슬은 존숭도감 서사관(尊崇都監書寫官)에 이르렀다. 이 동안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조선에 오는 사신을 맞을 때 연석(宴席)에 나가 그의 정묘한 필치로 이름을 떨쳤으며 후기의 김정희와 함께 조선 서예계의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石峯書法)> <석봉천자문(石峯千字文)> 등이 모간(模刊)되어 있을 뿐 진적(眞蹟)으로 남은 것은 별로 없다. 그가 쓴 비문(碑文)이 많이 남아 있는데 평양(平壤)의 <기자묘비(箕子廟碑)>, 개성(開城)의 <선죽교비(善竹橋碑)>, <서경덕신도비(徐敬德神道碑)>, <탁타기적비>, 경기 고양의 <행주 승전비(幸州勝戰碑)>, <좌상유홍묘표(左相兪紅墓表)>, <기응세갈(奇應世碣)> 포천(抱川)의 <우참찬이몽량비(右參贊李夢亮碑)>, 과천의 <유용묘표(柳容墓表)>, <허엽신도비(許曄神道碑)> 양주의 <이공즙비(李公楫碑)>, <박세영갈(朴世榮碣)>, 용인의 <정희린갈> 등이다.

이광사 편집

李匡師

1705년(숙종 31년)-1777년(정조 1년) 조선시대의 양명학자(陽明學者)이며 서예가.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수북(壽北),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755년(영조 31) 나주(羅州)의 벽서사건(壁書事件)으로 백부(伯父) 진유(眞儒)가 처벌을 당할 때 이에 연좌되어 회령(會寧), 진도(珍島)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거기서 일생을 마쳤다. 일찍 윤순(尹淳)에게서 글씨를 공부하여 진서(眞書), 초서(草書), 전서(篆書), 예서(隸書)에 모두 능했고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이룩했다. 서적으로는 영의정 이경석표(領議政李景奭表), 우의정 정우량지(右議政鄭羽良誌), 병조판서 윤적인비(兵曹判書尹蹟仁碑), 형조판서 이신의표(形曹判書李愼儀表) 등이 있다.

김정희 편집

金正喜

1786(정조 10년)-1856년(철종 7년)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며 문인, 금석학자(金石學者), 서화가.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했다. 1819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24세 때 생부(生父)를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당시의 거유(巨儒)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 등과 교유하며 경의(經義)와 서예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역대 명필의 장점만을 모아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명필로서 특히 예서(隸書), 행서(行書)에 뛰어났다. 그림에서는 죽란(竹蘭)과 산수를 그렸는데 사실(寫實)보다 품격을 위주로 하여 선미(禪味)가 풍기는 남종화(南宗畵)의 정신을 고취하여 중국의 문인화에 비해 손색없는 작품을 남겼다. 금석학(金石學)에도 조예가 깊어 북한산(北漢山) 비봉의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임을 입증한 인물이기도 하다. 화적으로 간송(澗松) 미술관 소장의 <산수도(山水圖)>와 개인 소장의 <묵란도(墨蘭圖)>

<세한도(歲寒圖)> 외 다수가 있고 서적도 많이 전해져 온다.

추사체 편집

秋史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서체. 종래의 조선시대의 관파(官派) 글씨가 갖는 숙폐(宿弊)를 통감하고 그것을 배격하여 일어난 것이 이른바 추사이다. 추사는 조선의 서예가들을 평하기를 <但以筆法 擧擬良可槪耳>라고 개탄하며 조선의 서예를 망친 것은 바로 이광사(李匡師)라고 갈파한 것은 그의 심정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추사의 글씨는 예서(隸書)에서 출발하고 있으면서 예서의 변형인 한대(漢代)의 필사체(筆寫體)를 충분히 익혀 부조화스러운 듯하면서 조화되는 글씨의 아름다움을 천성(天成)으로 터득하고 있다.

즉 선의 태세(太細)와 곡직(曲直), 묵(墨)의 농담(濃淡) 등으로 글자 하나 하나에 구성과 역학적인 조화를 주었고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서축(書軸)을 이룬다. 이것은 획(劃)과 선으로 이어지는 공간 구성에 의한 예술로서 추상(抽象)의 경지에까지 도달하는 예술이다. 추사의 서체는 권돈인(權敦仁), 허유(許維), 신관호(申觀浩), 대원군(大院君) 같은 추종자들을 보았으나 그 진수(眞髓)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단명(短命)으로 끝났다.

윤순 편집

尹淳

1680년(숙종 6년)-1741년(영조 17년) 조선시대 후기의 서예가, 문신. 자는 중화(仲和), 호는 백하(白下), 학음(鶴陰),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1713년(숙종 39)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당시의 이름난 서예가로 송나라 미남궁체(米南宮體)를 완전히 터득했다. 서적으로는 <백하서첩(白下書帖)> <고려산적석사비(高麗山積石寺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