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조선시대의 미술/조선시대의 회화

조선시대 전기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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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時代前期-繪畵

조선시대 전기는 대체로 조선왕조의 성립으로부터 16세기 초엽인 중종(中宗) 연간까지를 의미한다. 이 시기의 회화는 송원(宋元)의 화풍이 그대로 잔존하여 이른바 북종화(北宗畵)가 성행하는 경향을 보이며 북종화 계통의 수묵산수(水墨山水)가 발달한다. 이것은 사대부(士大夫) 계급의 수요에 따르는 현상으로서 이 시대의 수묵산수는 하나의 감상화(鑑賞畵)의 성격을 띠는데 역대의 왕, 예컨대 세종(世宗)이나, 문종(文宗), 성종(成宗)이 모두 그림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화기(畵技)에 능한 사인(士人)이 다수 배출되고 또 그 감상안(鑑賞眼)을 높일 수 있는 중국 명적(名蹟)의 수장(收藏)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곽희(郭熙)나 이성(李成) 등으로 대표되는 북종화법을 주축으로 하면서 또 하규(夏珪)나 마원(馬遠)에서 시작되는 남송의 원체화법이 조선시대 초기 회화의 범본(範本)이 된다. 화단의 주류는 도화서원(圖畵署員), 즉 화사(畵師)들이 쥐고 있었고 그들은 대체로 궁정의 요구에 따르는 장식적이고 현실적인 화풍으로 흘러 더욱 북종화의 경향을 강조하고 있었다. 척불숭유(斥佛崇儒)의 정책 때문에 불화(佛畵)는 별로 빛을 보지 못했으리라 추측된다.

도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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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畵署

초기에는 도화원(圖畵院)으로 불려진 조선시대의 회원(畵院)이 여기 해당한다. 그 제도는 예의 고려시대의 화원을 따른 것인지는 알 수없으나 성종(成宗) 때에 화원의 취재(取才)에 대(竹) 그림을 1등, 산수를 2등, 인물영모(人物翎毛)를 3등, 화초(花草)를 4등으로 친 것은 국초(國初) 이래의 규정으로 보이며 따라서 사인 취향(士人趣向)이 명백하다. 그리고 시대가 내려갈수록 도화서는 몇 개의 화원 집안이 대를 이어 독점하는 인상을 주는데 이러한 경향은 성종(成宗) 때에 특히 심하게 나타난다.

안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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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堅

1418(태종 18년)∼? 조선시대 전기의 화가. 자는 가도(可度), 득수(得守), 호는 현동자(玄洞子), 또는 주경(朱耕)이다. 본관은 지곡(池谷). 화원(畵員)으로서 호군(護軍)까지 지냈으며 천성이 총명 정박(精博)하여 고화(古畵)를 많이 보고 그 요령을 체득하고 여러 대가들의 좋은 점을 절충하여 많은 명작을 남겼다. 특히 북송의 곽희(郭熙)와 이필(李弼)의 화풍을 많이 따른 산수화(山水畵)의 대가이며 남송의 마하(馬夏) 계통의 화풍도 겸하여 배우고 있었다. 같은 시대의 사람이던 성현(成俔)은 그의 <청산 백운도(靑山白雲圖)>를 절보(絶寶)라고까지 하며 극찬하였고, 박팽년(朴彭年)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까지 곁들여 삼절(三絶)의 하나로 보았고, 조식(曹植)의 글에는 <안견은 그림의 묘법을 지녀 동방국의 오도자(吳道子)라 칭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그의 화적(畵蹟)으로는 <적벽도(赤壁圖)> <동경산수도(冬景山水圖)>(덕수궁 미술관 소장)가 있으나 대표적인 작품은 <몽유도원도>이다.

안견필 몽유도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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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堅筆 夢遊桃源圖

세종(世宗) 29년(1447년)에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속에 본 도원경(桃源境)을 안견(安堅)으로 하여금 그리게 했다는 일화를 가진 작품으로 안평대균의 자필시서(自筆詩書)와 위의 내용이 발문으로서 담겨 있다. 북송 곽희(郭熙)풍의 필치로 기상천외의 고산준령(高山峻嶺)과 온화한 계류(溪流)가 흐르는 도원경을 그리고 있는데 수묵을 주조로 하여 점점이 홍색(紅色)과 금색을 착색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회화로서는 드물게 보는 걸작이다.(일본 天理大學 소장)

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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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涇

1418년(태종 18년)-? 조선시대 전기의 화가. 자는 사청(思淸), 호는 근재(謹齋)이며 본관은 탐진(耽津). 안산(安山)출신이다. 세종 때 도화서의 화원을 거쳐 벼슬은 별제(別提)에 이르렀다. 마원(馬遠)의 산수 및 인물과 이공린(李公麟)의 인물화를 연구하여 그 진수(眞髓)를 체득하였고 특히 인물화에 뛰어나서 안견의 산수화와 쌍벽을 이루었다. 1472년(성종 3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조, 예종, 덕종(德宗:追尊王)의 어진(御眞)을 그린 공으로 성종이 당상관(堂上官)에 임명하려 했으나 언관(言官)의 반대로 취소되고 안구마(鞍具馬)를 하사 받았으며 1484년 당상관에 올랐다. 70세가 지나도록 필력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며 현존하는 화적은 없다.

이상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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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上佐

1465년(세조 10년)-? 조선시대 전기의 화가. 자는 공우(公祐), 호는 학포(學圃),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본래 어느 선비의 노복(奴僕)이었으나 그림에 뛰어나 중종(中宗)의 특명으로 도화서에 보직되었다. 특히 산수와 인물을 잘 그렸으며 북종화풍(北宗畵風)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중종이 죽은 후 그 초상을 그렸고 1546년(명종 1년)에 공신들의 초상을 그려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고 아들 흥효(興孝)도 군직(軍職)에 등용되었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덕수궁 미술관에 소장되고 있는 <송하 보월도>, <한강 조어도(寒江釣魚圖)> 및 <연방 조사계회도(蓮傍曹司契會圖)>와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우중 맹호도(雨中猛虎圖)>, 동경예술대학 소장의 <나한도(羅漢圖)> 등이 있다.

이상좌필 송하보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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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上佐筆 松下步月圖

조선시대 전기의 화가 이상좌(李上佐)의 작품구도는 남송 마원(馬遠)의 원체풍을 따르고 있는데, 특히 화면의 왼쪽 아랫부분의 암산(岩山)이나 바람에 흔들리는 노송(老松), 능선만을 나타내는 원산(遠山), 인물의 펄럭이는 옷자락 등이 그렇고, 선묘나 흑색에 뛰어난 필법을 보이고 있다. 화면 전체가 바람이 불고 있는 듯한 생기가 흐르는 건아(健雅)한 필세를 보이며 작자가 안견과 마찬가지로 회화의 진수(眞髓)를 아는 대가였음을 말해 주는 작품이라 하겠다.(덕수궁 미술관 소장)

강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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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希顔

1417년(태종 17년)-1464(세조 10년) 조선시대 전기의 사대부(士大夫) 화가·문신. 자는 경우(景愚),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진주(晋州).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고 벼슬이 직제학(直提學) 인수부윤(仁壽府尹)에까지 이르고 한때에는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일도 있다. 대대로 시문서화(詩文書畵)에 출중한 가문에서 자랐고 시, 서, 화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는데 등과(登科)후 얼마 안 되어 바로 세종에게 그 재능을 인정받아 인면전서(印面篆書)를 봉서한 사실이 있으며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와 함께 그의 글씨도 주자화(鑄字化)되었다 한다. 특히 그림에 남다른 천재를 발휘했으나 당시의 서화천기(書畵賤技) 사상에 자극받았음인지 자신의 작품을 대개 숨기고 공개하지 않아 현존하는 진적(眞蹟)은 극히 드물다. 화풍은 원체의 영향이 현저하며 그의 진적으로 전해지는 몇 개의 작품은 주로 인물을 소재로 다룬 것이 많은데 힘센 필치와 정확한 터치가 눈에 뛴다. 회화작품으로 대표적인 것은 국립박물관 소장의 <한일관수도>이고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교두연수도(橋頭煙樹圖)> <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 <절매삽병도(折梅揷甁圖)> <소동 개문도(小童開門圖)> 및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산수도(山水圖)>, 일본에 있는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북극자미궁도(北極紫微宮圖)> 등이 있다.

강희안필 한일관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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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希顔筆 閑日觀水圖

조선시대 전기의 화가 강희안(姜希顔)의 작품. 강희안의 그림은 유, 곽(劉, 郭)의 필법과 같다고 전해지는 데 곽(郭)은 곽희(郭熙)를 뜻하나 유(劉)는 유송년(劉松年)인지 유융(劉融)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포함한 그의 대개의 현존하는 작품들은 오히려 마원(馬遠)이나 하규(夏珪)의 원체풍이 농후하다. 선묘가 강직하고 중후할 뿐만 아니라 암파(岩坡)에 부벽(斧劈) 같은 큰 준을 쓴 점, 이른바 마일각(馬一角)의 화풍이라 부르는 변각(邊角)의 풍경을 그린 점 등이 이를 실증하며 그런 점에서 안견의 그림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이 그림에서는 시서화(詩書畵)에 통달한 대가로서의 작자의 고매(高邁)한 식견과 청수(淸秀)한 인품이 그대로 화면에 반영된다. 암벽 아래 바위에 기대어 명상에 잠긴 고사(高士)의 모습은 그 활달하고 솔직(率直)한 필치와 함께 화면에 넘치는 시적(詩的)인 감흥을 느끼게 한다. 남송 원체풍이 엿보이는 수묵주조(水墨主調)의 지본(紙本) 담채화이며 이와 비슷한 그림이 명나라 장로(張路)의 작품에도 있다.

최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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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7년(성종 18년)-1521년(중종 16년) 조선시대 전기의 학자이며 사대부 화가. 자는 가진(可鎭), 호는 원정(猿亭), 북해거사(北海居士), 경포산인(鏡浦山人),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일찍이 학문을 연마하여 사림(士林)간에 명망 높은 학자가 되었으며 시문이나 서화, 음률, 수학에 모두 뛰어났다. 35살 때 신사무옥(辛巳誣獄)에 관련되어 억울하게 형장에서 죽었고 사후에 인종으로부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받고 문정공(文正公)의 시호도 받았다.

전국의 명산(名山)을 찾아다니며 시작(詩作)과 서화에 심취했는데 그의 그림은 명나라 사신이 천하의 절보(絶寶)라고 극찬한 만큼 우수했다고 전하나 남은 있는 화적은 없다.

양팽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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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彭孫

1480년(성종 11년)-1545년(인종 1년) 조선시대 전기의 학자이며 사대부 화가.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1516년(중종 11)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교리(校理)를 거쳐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지냈다. 글씨와 산수화에 뛰어났는데 그의 산수화는 중종 때의 산수화풍을 대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작품으로 국립박물관 소장의 <산수도(山水圖)>가 있는데 묘사가 정확하고 필치가 고답한 북종화풍의 회화로 알려진다. 개인 소장의 <춘강계칙도>도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며, 한편 일본 히로시마현(廣島縣)의 다이겐사(大願寺)에 있는 <소상팔경(瀟湘八景)>도 그의 필법과 매우 흡사하여 주목된다.

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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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기의 직업적인 화가. 자는 계수(季綏), 호는 양송당(養松堂), 양송헌(養松軒), 또는 취면(就眠),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생년(生年)은 대체로 중종 10년 전후로 추측되며 벼슬은 사포별제(司圃別提)를 지냈을 뿐 일체의 과거(科擧)에 응하지 않고 서화에만 전심했는데 그림은 인물, 산수, 우마(牛馬), 영모(翎毛), 초충(草蟲)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묘(精妙)한 경지를 보였다고 전한다. 당시 최립(崔笠)의 문장, 한호(韓濩=石峯)의 글씨, 김시의 그림을 일컬어 삼절(三絶)이라 했다. 유작으로는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하산모우도(夏山暮雨圖)>와 <여인사서도(麗人寫書圖)> <우배도하도(牛背渡河圖)> 및 <우배적성도(牛背笛聲圖)> 등이 있다.

신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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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世霖

1521년(중종 16년)~1583년(선조 17년) 고려 및 조선시대 전기의 화가. 일명 인림(仁霖),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도화서별제(圖畵署別提), 영월군수(寧越郡守)를 역임했다. 영모(翎毛)를 잘 그려 강희안 이후의 제일가는 화가로 일컬어졌으나 현존하는 화적은 극히 적다. 덕수궁 미술관 소장 <죽금도(竹禽圖> <영모도(翎毛圖)>가 남아 있다.

이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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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不害

1529년(중종 24년)-? 조선시대 전기의 서화가. 자는 태수(太綏). 그림과 글씨에 모두 뛰어났으며 지식이 해박하고 필치가 정교하여 당시 안견(安堅)에 다음가는 거장(巨匠)으로 일컬어졌다. 화적으로 <예장소요도(曳杖逍遙圖)>가 덕수궁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기마독행도(騎馬獨行圖)> <산수도(山水圖)> 6폭 및 <묘작도(猫鵲圖)> 등이 있으나, 앞의 것에 비하면 웅건한 필세(筆勢)의 점에서 떨어진다.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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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正根

1532년(중종 26년)-? 조선시대 전기의 화가. 호는 심수(心水),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원(畵員)으로 사과(司果)에 이르렀으며 산수를 잘 그렸다. 안견(安堅)의 화법을 따랐으며 필법의 정묘함이 특징이었다. 화적으로 안견풍의 <관산 적설도(關山積雪圖)>와 <미법 산수도(米法山水圖)>가 덕수궁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숭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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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崇孝

1536년경(중종 30년)∼? 조선시대 전기의 화원 출신 화가.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화가 이상좌(李上佐)의 아들로서 조부로부터 그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화가의 가문에서 태어나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자는 백달(伯達), 화적으로 <어웅 귀조도>(덕수궁 미술관 소장)와 개인 소장의 <수금도(水禽圖)>가 있다.

이숭효필 어옹귀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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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崇孝筆 漁翁歸釣圖

조선시대 전기의 화가 이숭효(李崇孝)의 그림으로 명나라 화가의 그림을 범본(範本)으로 삼은 대표적인 예로 중요하다. 필치가 경쾌하고 아취(雅趣)가 넘치며 어부(漁夫)의 형상과 적로(荻蘆)의 단순화된 표현이 독창적인 경지에 이르고 있다.

이흥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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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興孝

1537년(중종 32년)-1593년(선조 26년) 조선시대 전기의 화원 출신 화가. 이상좌의 아들이며 이숭효의 아우. 자는 중순(仲順)이며 화원으로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 명종(明宗)의 초상을 그렸고 필법은 김시를 숭배하였다. 화적으로는 개인 소장의 <산수도(山水圖)>가 남아 있다.

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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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楨 1578년(선조 11년)-1607년(선조 40년) 조선시대 전기의 화원 화가. 자는 공간(公幹), 호는 나옹(懶翁), 나재(懶齋), 나와(懶窩), 설악(雪嶽),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화가 이숭효(李崇孝)의 아들로서 증조부 때부터 화가의 가문으로 10세 때에 이미 그림으로 이름이 알려져서 산수, 인물, 불화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13세 때에는 장안사(長安寺)가 개수(改修)되자 벽화를 그려 절찬을 받았다. 그 조부(祖父)인 이상좌(李上佐)보다 오히려 정채(精彩)의 풍위가 낫다고 할 정도로 극찬을 받았으며 가난 속에 부(富)와 타협하지 않고 고절(孤節)을 지켰으며 술과 의로운 친구의 우의(友誼)로 살았으나, 과음(過飮)으로 30세에 요절(夭折)했다. 화적으로는 개인 소장의 <노옹 탁족도>가 대표적인 작품이며 남종화(南宗畵)의 필법으로 보이는 <산수도(山水圖)> <수향귀주도(水鄕歸舟圖)>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한강조주도(寒江釣舟圖)> <기송망안도>등이 덕수궁 미술관 소장으로 남아 있다.

이정필 노옹탁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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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楨筆 老翁濯足圖

조선시대 전기의 화가 이정(李楨)의 작품으로 화제(畵題)는 발을 씻는 두 노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필법이 간담(簡淡)하고 절묘(絶妙)하여 화원(畵員)의 집안에 태어난 화가답지 않게 초탈(超脫)한 선승(禪僧)의 경지를 전개시키는 당대 최고의 걸작이다.

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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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澄 1581년(선조 14년)-? 조선시대 전기의 화가. 자는 자함(子函), 호는 허주(虛舟),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화가 이경윤(李慶胤)의 서자이다. 인조(仁祖) 때 화원(畵員)으로서 문신직의 6품(品)에 임명되었다. 안견(安堅)풍의 <청록산수(靑綠山水)>와 <금벽산수(金碧山水)>등 착색화(着色畵)를 많이 그렸다. 화적으로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해천비안도> <원사만종도(遠寺晩鐘圖)> <유정 방방도(遊艇訪芳圖)>와 몇 점의 산수도(山水圖)가 남아 있다.

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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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巖 1499년(연산군 5년)-? 조선시대 전기의 사대부(士大夫) 화가. 자는 정중(精仲),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증손이다. 벼슬은 두성령(杜城令)을 지냈고, 그림은 영모(翎毛)에 뛰어나서 조선시대 초엽을 대표하는 대가라 할 수 있으며 초수(草樹), 화충(花蟲)도 잘 그렸다. 그의 화풍은 묘사보다 진률(眞律)이 앞서는 특이한 표현으로 시(詩)적인 느낌을 준다. 화적으로 현존하는 것은 국립박물관 소장의 <견도(犬圖)> 및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화조묘구도(花鳥猫狗圖)> 2폭 등이다.

신사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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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師任堂

1504년(연산군 10년)-1551년(명종 6년) 조선시대 전기의 서화가이며 여류 문인. 호는 사임당(師任堂·思任堂·師姙堂), 임사재(任師齋)이며 본관은 평산(平山),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문장, 침공(針工), 자수(刺繡)에 이르기까지 일가를 이루었는데 특히 시문과 그림에 뛰어났다. 안견(安堅)의 영향을 받은 화풍에 여성 독특한 섬세한 감각으로 산수(山水), 초충(草蟲), 포도(葡萄) 등을 잘 그려서 우리나라 제일의 여류화가로 손꼽히고 있다. 화적으로는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 <노안도> <연로도(蓮鷺圖)> <원앙도(鴛鴦圖)> <요안부압도(寥岸鳧鴨圖)>등 다수가 남아 있다.

신사임당필 초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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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師任堂筆 草蟲圖

명나라 초기의 초충화풍(草蟲畵風)을 본받은 신사임당(申思任堂)의 8폭(幅) 그림이다. 각 화폭을 일관하는 그림의 특색은 구도의 중심을 중앙부로 잡은 것과 각종의 초충을 산만하게 배열한 점, 벌레의 표현에서 엄격한 균제(均齊)를 지킨 점 등이다. 따라서 그림은 정지감(靜止感)이 강조되며 그외에 곱고 품위있는 부채(賦彩), 여성다운 섬약한 묘선과 조화감으로 짜여져 있다.

황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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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執中

1533년(중종 28년)-? 조선시대 전기의 사대부(士大夫) 화가. 자는 시망(時望), 호는 영곡(影谷), 비목당(卑牧堂),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벼슬은 경력(經歷)을 지냈으며 포도(葡萄)를 잘 그려 유명하였는데 이정(李霆)의 죽(竹)과 어몽룡(魚夢龍)의 매(梅)와 그의 포도 그림을 들어 삼절(三絶)이라 부른 이도 있었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포도 그림을 답습하였으나 그의 필법에는 미치지 못했는데 그의 진적(眞蹟)으로 남아 있는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포도도(葡萄圖)>는 간결하고 힘찬 품위를 보인다.

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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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霆 1541년(중종 36년)-? 자는 중섭(仲燮), 호는 탄은(灘隱), 세종대왕의 현손(玄孫)이다. 석양정(石陽正)을 제수(除授)받고 뒤에 다시 군(君)의 봉함을 받았다. 묵죽(墨竹)을 잘 그려 동방의 제일명가(第一名家)로 손꼽히고 삼절(三絶)이라 일컬음을 받은 바 있으며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임진왜란 때에 왜병의 칼에 오른팔을 상해 겨우 이었는데 그 후에도 글씨에 신조(神助)가 있는 듯 다시 격이 높아졌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전기의 화가 중에 비교적 화적(畵蹟)을 많이 남기고 있어 덕수궁 미술관소장의 <상강야우도(湘江夜雨圖)>를 비롯하여 개인 소장인 <풍죽도> <왕죽도(王竹圖)> <설죽도(雪竹圖)> <난죽도(蘭竹圖)> 등이 있다.

이정필 풍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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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霆筆 風竹圖

이정이 그린 풍속도는 여러 개 있으나 그의 묵죽법(墨竹法)은 국내에 따로 전하지 않고 있다. 사죽(寫竹)의 근경과 원경은 먹빛의 농담(濃淡)으로 가렸고, 바람에 시달리는 풍죽의 풍모, 죽엽끝이 꺾이어 보이는 작은 잎새의 표현, 대나무 그루 밑에 진좌한 바위의 준법(峻法), 구도 등이 명나라 묵죽의 대가 하중소(夏仲昭)의 격조와 기법에 비길 만하며, 모든 대잎이 저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의취(意趣)를 머금고 있어 조선시대 사대부화(士大夫畵)의 성격이나 화풍을 잘 드러낸다.

이경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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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慶胤

1545년(인종 1년)-? 조선시대 전기의 사대부 출신 화가. 자는 수길(秀吉), 호는 낙파(駱坡), 학록(鶴麓)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벼슬은 학림수(鶴林守)를 제수받고 뒤에 다시 정(正)에 올랐다. 그림은 산수와 인물을 잘 그렸으며 우마(牛馬), 영모(翎毛)에도 뛰어났다. 그의 그림은 고담한 속에 정취(情趣)가 있고 색도 고상했다. 화가 이징(李澄)은 그의 서자이다. 화적으로는 국립박물관 소정의 <수하탁족도(樹下濯足圖)> <관폭도(觀瀑圖)>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 <송하대기도(松下對碁圖)>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송단보월도(松壇步月圖)>등이 있다.

이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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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英胤 (1561-1611년)(광해군 3년)

이경윤의 아우로 자는 가길(嘉吉)이다. 죽림수(竹林守)에 봉해졌고 산수를 잘 그려 형과 화법이 비슷했으나, 말(馬)과 영모는 오히려 형을 능가했다고 한다. 화적으로는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화조도 병풍(花鳥圖屛風)>과 <택반백로 색어도(澤畔白鷺索魚圖)> 및 <영모도(翎毛圖)>가 있다.

윤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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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毅立

1568년(선조 1년)-1643년(인조 21년)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며 사대부 화가. 초명은 의립(義立) 자는 지중(止中), 호는 월담(月潭),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1594년(선조 27)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고, 그림은 산수화를 잘 그렸다. 화적으로는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춘강화교도(春江畵橋圖)>, <하경 산수도(夏景山水圖)> 및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가 있다.

윤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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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貞立

1571년(선조 4년)-1627년(인조 5년) 조선전기의 화가. 윤의립의 아우로서 자는 강중(剛仲), 호는 학산(鶴山), 매헌(梅軒)이며 1605년(선조 38) 진사(進士)직을 거쳐 군수(郡守)를 지냈다. 인물과 산수를 잘 그렸는데 화적으로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관폭도(觀瀑圖)>가 남아 있다.

어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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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夢龍

1566년(명종 21년)-? 조선시대 전기의 화가. 자는 견보(見甫), 호는 설곡(雪谷), 설천(雪川),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1604년(선조 37년) 진천 현감(鎭川 縣監)을 지냈으며 매화(梅花)를 잘 그렸다. 이정(李霆)의 대(竹)와 아울러 국조제일(國朝第一)이라 일컬어졌다. 화적으로는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월매도(月梅圖)>와 <묵매도(墨梅圖)> 몇 폭이 전한다.

조선시대 후기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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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時代後期-繪畵

조선시대 후기는 17세기부터 시작되며 새로운 회화관(繪畵觀)의 탄생과 화법(畵法)의 전개로 특징짓는다. 즉 명나라 말기의 오파(吳派)와 청나라 초기 화단의 영향 아래 남종화(南宗畵)가 숙종(肅宗) 후반에 크게 진출하며 호탕한 문인화(文人畵)가 시작(試作)되기도 한다. 한편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특수한 한국화(韓國畵)가 성립되고 서민 풍정(庶民風情)을 그리는 속화(俗畵)도 유행하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중국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화풍으로서 조선시대의 시민적인 각성(覺醒)이 회화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남종·문인화의 성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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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宗·文人畵-盛行

중국의 화법(畵法)은 원래 심석전(沈石田) 이래로 이른바 명나라 말기 오파(吳派)의 남종 문인화(南宗·文人畵)가 점차 우세해지다가 동기창(董其昌, 1555-1636)에 이르러 그림의 남북론(南北論)이 화론(畵論)으로 정착되고, 감상에 있어서도 송대의 동원(董源)이나 거연(巨然), 원나라 말기의 4대가인 황공망(黃公望), 오진(吳鎭), 예찬(倪瓚), 왕몽(王蒙)과 명나라의 심석전(沈石田), 문징명(文徵明)의 산수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이 화단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중국화단의 움직임은 청조(淸朝)를 매개로 하여 뒤늦게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게 되는데 영조(英祖) 때에 커다란 풍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화풍은 명나라 유민(遺民)들의 특색있는 문인화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개성을 죽이는 형식적인 화풍으로 일관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큰 병폐가 된다.

이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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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繼祐

1573년(선조 6년)-1645년(인조 23년)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호는 휴휴당(休休堂), 휴당(休堂), 휴옹(休翁). 김식(金湜)에게서 그림을 배웠으며 포도를 잘 그려 포도 화가의 대표자로 불리어졌다. 국립박물관 소장의 <월야 포도도(月夜葡萄圖)>를 비롯하여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채포도(彩葡圖)>, <수포도(水葡圖)>등 여러 점의 포도그림이 남아 있다.

김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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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明國

1600년(선조 33년)-? 별명은 명국(命國),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 취옹(醉翁)이며 본관은 안산(案山)이다.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을 거쳐 사학교수(四學敎授)를 지냈고 1636년(인조 14)에 통신사(通信使)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남송의 선승(禪僧)들의 활력이 넘치는 필치를 연상시키는 발묵(潑墨)으로 인물을 그리는데 뛰어났으며 수석(水石)도 잘 그렸다. 임진란 후에 침체된 화단을 재건하는 데에 크게 공헌했고 성품이 호협하고 술을 즐겨하여 취한 후에 붓을 들여야 신운(神韻)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고 하며 조선시대 전기의 세심한 그림에 비하여 퍽 활달한 필치를 보인다. 화적(畵蹟)으로는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관폭도(觀瀑圖)> <투기도(鬪碁圖)> <심산 행려도(深山行旅圖)> <어정산수도(漁艇山水圖)> <기려인물도(騎驢人物圖)><노엽달마도(蘆葉達摩圖)> <은사도(隱士圖)>와 개인 소장의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수로예구도(壽老曳龜圖)> <달마도> 등이 있다.

김명국필 달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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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明國筆 達磨圖

일찍 신위(申緯)는 김명국(金明國)의 그림을 일컬어 <인물이 생동하고 필묵이 혼융(混融) 백년 이내에는 필적할 이가 없을 것 같다>고 하였거니와 이 그림은 바로 그러한 작자의 면모를 과시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경쾌하고 호방(豪放)한 필촉으로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始祖)인 달마(達磨)의 상을 묘출하고 있는데 단숨에 그려내린 인물의 윤곽과 한점의 실수도 없는 세부의 붓끝까지 신기할 정도로 생명감이 스며 있으며 기교의 묘(妙)를 터득하고 있다.

이 그림은 일본에서 그려 그곳에 남겨두었던 작품으로 근래에 일본 화가들이 그리는 달마도는 이 그림의 필법을 종(宗)으로 삼고 있다고 전해진다.(국립박물관 소장 1폭 및 일본 동경미술학교 소장 1폭)

조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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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世杰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호는 패주(浿州), 수천(須川), 본관은 창녕(昌寧), 평양(平壤) 출신이다. 김명국(金明國)에게 그림을 배웠고 벼슬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집안이 부유하여 중국의 명적(名蹟)을 많이 수집, 소장했고 김명국의 화법을 후세에 전했다. 산수, 인물을 잘 그렸고 그의 단채(丹彩)는 보통 화가의 수묵도말(水墨塗抹)과 다른 독자적인 수법을 보였으며 또 섬세하고 정교한 필치와 선명한 색채로서 명나라 말기나 청나라 초기의 화풍을 보여준다. 화적으로는 <선인위기도(仙人圍棋圖)>가 있다.

한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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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時覺

1620년(광해군 12년)-?,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자는 자유(子裕), 호는 설탄(雪灘),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화원으로 교수(敎授)를 지냈으며 1655년(효종6) 통신사(通信使)와 함께 일본을 다녀왔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77세 초상을 그렸다. 화적으로는 전술한 <송우암 초상도(宋尤庵肖像圖)>가 덕수궁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국립박물관 소장의 <사립 인물도>와 개인 소장인 <포대 인물도(布袋人物圖)>가 있다.

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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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涑

1595년(선조 28년)-1668년(현종 9년) 조선시대 후기의 사대부(士大夫) 화가. 자는 희온(希溫), 호는 창강(滄江), 취추(醉醜), 취옹(醉翁),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벼슬은 진선(進善)에 이르렀고 그림은 매(梅), 죽(竹), 영모(翎毛), 절지(折枝), 산수(山水) 모두 뛰어났는데 특히 영모를 잘 했고 그의 영모는 한국적인 성격을 띤 영모화로서 주목된다. 한편 묵매(墨梅)는 어몽룡(魚夢龍)의 필법을 닮았다. 글씨에도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나 자신의 작품에 낙관(落款)하지 않는 기벽을 지녔다.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 국립박물관 소장의 <매도(梅圖)> 및 개인 소장으로 <매작도(梅鵲圖)> <원도(猿圖)> 등이 화적으로 남아 있다.

진경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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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景山水

조선시대 후기에 화원(畵員) 사회에서 일어난 새로운 화풍.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화법 같은 외래적인 영향에서 이탈하여 명실상부한 한국의 회화를 지향한 첫 예로서 중요하다. 이것은 종래 화가들의 화첩(畵帖)에 의한 상상적인 산수도를 벗어나 한토(韓土)의 풍치의 사생(寫生)에서 나온 산수화법(山水畵法)을 의미하는데 어떤 특정한 실경(實景)을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구도에 구애됨이 없이 눈 앞에 전개되는 무한대의 자연을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컷트하여 화면에 옮기는 방법이다. 이러한 이른바 진경(眞景)을 사생하는 방법을 시도한 대표적인 화가는 정선으로서 그는 직접 각지를 여행하며 그림의 소재를 채취하였는데 특히 금강산(金剛山)의 두드러진 산골(山骨)에 매혹돼 수직의 준을 창시하였고 중국화에서 볼 수 없는 한국적인 송림(松林)도 자기 나름대로의 필치로 대담하게 표현하였다.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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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6년(숙종 2년)-1759년(영조 35년)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 난곡(蘭谷),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약관(弱冠)에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이 되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했으나 30세를 전후하여 한국 산수화의 독자적인 특징을 살린 산수사생(山水寫生)의 진경(眞景)으로 전환하여 동방 진경산수의 종화(宗畵)가 되었다. 여행을 즐겨 금강산(金剛山) 등의 전국 명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심사정(沈師正), 조영석과 함께 삼재(三齋)라고 불렀다.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主調)로 하여 암벽(岩壁)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일대에 그쳤다. 문재(文才)가 없었던 탓으로 다만 서명과 한두 개의 낙관(落款)만이 화폭 구석에 있을 뿐, 화제(畵題)가 없는 것이 이채롭다. 화적(畵蹟)으로는 국립박물관 소장의 <입암도(立巖圖)> <혼혼해색도(混混海色圖)>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선인도해도(仙人渡海圖)> <산창유죽도(山窓幽竹圖)> <의송관란도(倚松觀瀾圖:扇面)> <노산폭포도(盧山瀑布圖)>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 <청풍계도(淸風溪圖) 그리고 개인 소장의 <금강산 정양사도(金剛山正陽寺圖)> <해금강도(海金剛圖)> <노산초당도(盧山草堂圖)> <통천 문암도(通川門巖圖)> <봉래산 불정대도(蓬萊山 佛頂臺圖)> <석굴암도(石窟庵圖)> <인왕 제색도> <금강전도> 외에 다수가 있다.

정선필 인왕제색도·금강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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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이 그린 이 두 작품은 우리나라 진경산수의 종화(宗畵)로 불릴 수 있는 쌍벽(雙璧)이다. 모두 필력이 웅고(雄高)하고 창윤(蒼潤)한 점에서 조선시대 전기의 산수화나 청나라 초기의 관학적(官學的)인 이른바 사왕(四王)의 그림에 비할 수 없는 개성이 뚜렷한 작품이다. 앞의 것은 인왕산(仁旺山)을 소재로 한 작품이며 암벽의 양감과 솟아 오르는 고준(高峻)을 나타내기 위한 연립(連立)한 부벽준이 인상적이며 뒤의 것은 부채면(扇面)에 그린 그림으로 금강산(金剛山) 1만2천봉을 압축하여 원형의 구체(球體)로 만든 기발한 구도(부감법)가 신묘(神妙)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부감법은 매우 새로운 시도로서 후일에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孫在聲씨 소장).

진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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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再奚

1691년(숙종 17년)-1769년(영조 45년) 조선시대 후기의 관화파(官畵派) 화가. 자는 정백(井伯), 호는 벽은(僻隱), 본관은 풍기이다. 도화서의 화원으로서 인물의 사생에 뛰어났다. 1713년(숙종 39)에 어용 모화도감(御容模畵都監)의 화공(畵工)이 되어 숙종(肅宗)의 전신상을 그려 상을 받았고 벼슬은 첨절제사(僉節第使)에 이르렀다. 화적으로는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월하취적도(月下吹笛圖)>가 있다.

김두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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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斗樑

1696년(숙종 22년)-1763년(영조 39년)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자는 도경(道卿), 호는 남리(南里), 운천(芸泉).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원으로 도화서 별제(圖畵署別提)를 지냈으며 산수, 인물, 동물, 풍속에 모두 능했고 특히 신장(神將)을 잘 그렸다. 화적으로는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월림도(月林圖)> <춘하도리원 호흥도(春夏桃李園豪興圖)> <추동전원행렵 승회도(秋冬田園行獵勝會圖)>와 개인 소장의 <고사몽룡도(高士夢龍圖)> <목우도(牧牛圖)> <삼로도(三老圖)> 외에 다수의 동물 그림이 있다.

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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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北

숙종·영조 때의 화가.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 유용(有用), 호는 성재(星齋), 기암(箕庵), 거기재(居其齋), 삼기재(三奇齋), 호생관(豪生館), 본관은 무주(茂州)이다. 산수, 인물, 영모(翎毛), 화훼(花卉), 괴석(怪石), 고목(枯木)을 두루 잘 그렸는데 특히 산수와 메추리를 잘 그려 최산수(崔山水), 혹은 최순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필법이 대담하고 솔직하여 구애(拘碍)받은 곳이 없었으며 남화(南畵)의 거장인 심사정(沈師正)과 비길 만한 인물이다. 한 눈이 멀어서 항상 반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렸으며 성질이 괴팍하여 기행(奇行)이 많았고 폭주가이며 여행을 즐겼다.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주유(周遊),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서 천하의 명사가 천하의 명산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외치며 투신했으나 미수에 그친 일도 있다. 칠칠거사(七七居士)로 알려진 많은 일화(逸話)를 남긴 위인으로 시에도 뛰어났으며 49세로 서울에서 죽었다. 화적으로는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미법 산수도>를 위시하여 <송음관폭도(松陰觀瀑圖> 개인 소장의 <수하담소도(樹下談笑圖)> <설산 조치도(雪山朝雉圖)> <의룡도(醫龍圖)> 외에 다수가 있다.

최북필 미법산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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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北筆 米法山水圖

최북(崔北)의 화풍은 일반적으로 중국 산수화법을 익힌 관화파(官畵派)로 알려지고 있으나 세심한 구도와 필치로 된 중국인의 그림과는 달리 즉흥적이고 기지(機智)있는 표현이 특징이다. 이 산수화는 노련한 필치에 신선한 발묵(潑墨)으로 구름을 뚫고 윤곽을 드러내는 연봉(連峰)을 그리고 있는데 자유로운 공간의 유동성 있는 배치로서 조화의 비(秘)를 담은 듯하다(덕수궁 미술관 소장).

이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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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寅文

1745년(영조 21년)-1821년(순조 21년)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자는 문욱(文郁), 호는 유춘(有春), 고송유수관도인(高松流水館道人),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을 거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산수와 포도를 잘 그렸는데 중국의 화법을 완전히 체득한 점에서 초기의 안견(安堅)에 비할 수 있는 대가라 하겠으나, 중국화의 모방에 끝나지 않고 종래의 산만한 화면구성을 탈피하여 정연한 구도와 아담한 준법의 화면에 액센트가 있는 자기 본유(本有)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화적으로는,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강산무진도> <대부벽준산수도>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산창독서도(山窓讀書圖)>와 개인 소장의 <춘경산수도(春景山水圖)> <강촌청우도(江村晴雨圖)> <운리 제성도(雲裏 帝城圖)> 외에 다수가 있다.

이인문필 강산무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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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寅文筆 江山無盡圖

길이 10m에 달하는 긴 축(軸)에 춘·하·추·동의 4경(景)을 환상적으로 전개시킨 이인문(李寅文)의 작품. 필법은 남종화의 평원(平遠)과 북화의 굴강을 겹친 듯한 중국화의 기술수준을 과시하고 있다. 포구의 춘경(春景)으로부터 도원(桃園)의 춘색(春色)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대자연 속에 아물거리는 인간세계를 묘사했는데 중첩한 암벽의 준법과 정제된 구도 속에 정온(靜穩)한 강촌(江村)의 아취(雅趣)가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의 수장인(收藏印)이 찍혀 있는 작품이다.(덕수궁 미술관 소장)

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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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弘道

1760년(영조 36년)-?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 단구(丹邱), 서호(西湖), 고면거사(高眠居士), 첩취옹(輒醉翁),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호조참판(戶曹參判)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이 된 뒤에 1771년(영조 47) 왕세손의 얼굴을 그렸고, 1781년(정조 5) 어진화사(御眞畵師)로 정조를 그렸으며 1795년(정조 19) 신창현감(新昌縣監)이 되었다가 곧 사임했다. 이듬해 왕명으로 용주사(龍珠寺)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의 삽화 및 판화를 그렸다. 김응환(金應煥)에게 그림을 배웠으나 강렬한 개성으로 독특한 경지를 개척, 한국적인 풍토 감각을 맑게 표현했다. 산수, 인물, 화훼(花卉), 초충(草蟲), 영모(翎毛)에 모두 뛰어났으나 특히 신선(神仙)을 잘 그렸으며, 풍속화(風俗畵)에 있어서는 해학(諧謔)과 풍자(風刺)를 조화하여 서민적인 풍취로 그렸고, 용주사의 <삼세여래 후불정화(三世如來後佛幀畵)>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운염기법(暈染技法)을 구사하고 채색의 농담(濃淡)으로 형체의 遠近高低원근고저)를 표현한 작품이다. 당시 화단에 고착된 무력한 중국 북화양식을 탈피하고 대담하게 남화양식을 시도하여 신선한 조형미를 완성했다. 화적(畵蹟)으로 개인 소장의 <산수도첩> <쌍치도(雙雉圖)> <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 <군선도 병풍(群仙圖屛風)> <관폭도(觀瀑圖)> <유하미인도(柳下美人圖)> <해구회유도(海鷗會遊圖)> <구룡연도(九龍淵道)> 및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선동취적저(仙童吹笛圖)> <사원아집도선면(四園雅集圖扇面)> <풍속화첩> 외에 다수가 있다.

김홍도필 산수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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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弘道筆 山水圖帖

김홍도의 산수화는 정선이 시작한 이른바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정신을 이어 한국의 자연을 사생하는 자기 특유의 산수화를 개척한 것으로 바위나 산이나 나무가 지금까지의 중국회화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롭고 실재(實在)하는 형태를 그려내고 있다. 20폭으로 구성된 이 화첩은 주로 산수 풍경을 주제로 했으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소림 명월도(疏林明月圖)>이다. 역시 사생풍(寫生風)의 소품으로 자유롭게 찍어 나간 나뭇가지의 그 특이한 수법(樹法)은 높은 문기(文氣)와 명쾌한 자연감각을 일깨운다. 그의 이러한 수법은 그 후의 화단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고 남북화(南北畵)의 사이를 교모하게 걸어간 그의 작품 경향의 하나로 아윤(雅潤)한 담채(淡彩)와 더불어 요약된 구도가 종래의 관습적인 화풍을 벗어난 단원(檀園) 특유한 경지를 보인다.(孫在聲 소장)

김홍도필 풍속화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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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弘道筆 風俗畵帖

김홍도(金弘道)가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가지는 위치는 자기 주변의 자연에 눈을 돌렸을 뿐 아니라 자기 주변의 생활, 사회에 대해서도 깊은 흥미를 기울이고 종래 화가들이 경시했던 인물의 동작 사생에 새로운 면을 개척한 점이다. 그의 풍속화첩은 초기의 작품으로 단원의 특징이라 할 구도의 날카로운 공간배정(空間配定)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현존하는 화첩의 종류는 <야공도(冶工圖)> <무락도(舞樂圖)> <상박도(相撲圖)> <서상도(書堂圖)> 등이다. 이들 작품에 대하여 당시의 강표암(姜豹菴)은 평하기를 '구상이 세밀하고 물건에 대한 형용이 신기하다. 참으로 역대에 보기드문 걸작이다'(運思之微 狀物之神 眞曠代絶筆)라 했다(孫在聲씨 소장).

김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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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得臣

1754년(영조 30년)-1822년(순조 22년)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자는 현보(賢輔), 호는 긍재(兢齋), 홍월헌(弘月軒), 본관은 개성(開城)이다. 도화서의 화원 출신으로 초도 첨절제사(椒島 僉節制使)에 이르렀다. 인물과 풍속화를 잘 그렸는데 심사정(沈師正:玄齋), 정선과 함께 영조 때의 삼재(三齋)로 불렸다. 화적으로는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곽분양자 행락도(郭紛陽子 儀行樂圖)>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부취도(扶醉圖)> 귀시도(歸市圖)> 간송(澗松) 미술관 소장의 <풍속화첩> <숙상야우도(潚湘夜雨圖)> 개인 소장의 <오동 폐월도(梧桐吠月圖)> 등 다수가 있다.

김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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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碩臣

1758년(영조 34년)-?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김득신의 아우로서 자는 군익(君翼), 호는 초원(蕉園)이다. 화가 김응환(金應煥)에게 입양(入養), 화원(花員)을 거쳐 부사과(副司果)를 지냈으며 산수와 풍속화를 잘 그렸다. 화적으로 개인 소장의 <가고중류도(茄鼓中流圖)>, <도봉도(道峰圖)> 및 <담담장악도(澹澹張樂圖)>가 있다.

김득신필 풍속화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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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得臣筆 風俗畵帖

김득신(金得臣)은 가장 충실하게 홍도화파(弘道畵派)를 따른 화가인데 이 풍속화첩은 단원(檀園)에 못지않는 기지(機智)에 넘치는 일상 생활의 파악력(把握力)을 보여준다. 화첩 중 <묘포계추도(猫捕鷄雛圖)>는 2책(冊)중의 하나인 8장 속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림이다. 농가(農家)의 한낮의 적막이 병아리를 물고 달아나는 고양이로써 깨뜨려지는 순간이 생동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인물의 민첩한 동작이 익살스럽게 표현되었으며 화면 전체가 크게 흔들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의 인물은 선이 날카롭고 또 모가 있는 필선(筆線)을 의문(衣文)에 자주 사용하여 한 특징을 삼고 있음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변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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卞相璧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자는 완보(完甫), 호는 화재(火齋),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숙종 때 화원(畵員)을 거쳐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닭과 고양이를 잘 그려 변계(卞鷄), 혹은 변고양(卞古羊)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초상화에도 뛰어나 국수(國手)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의 동물화(動物畵)는 한국적인 분위기와 개성이 강한 동물화로서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장식적인 동물화와는 구별이 된다. 화적으로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쌍묘도> <빈계포충 호추도(牝鷄哺蟲呼雛圖)> <윤급초상도(尹汲肖像圖)>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노수군묘 작작도(老樹群猫鵲雀圖)> 간송(澗松) 미술관 소장의 <자웅계 장추도(雌雄鷄將雛圖)>가 있다.

변상벽필 쌍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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卞相璧筆 雙猫圖

변상벽(卞相璧)의 작품 가운데 가축(家畜)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예로 꼽히는 작품. 나무 아래에서 노는 한쌍의 고양이와 이 침입자(侵入者)의 출현에놀란 듯한 나무 위의 참새떼로서 긴박한 분위기를 유도한다. 어딘가 동화(童話)의 세계를 일깨우며 보는 이에게 공감(共感)의 미소를 짓게 하는 화제(畵題)로서 동물의 외형 묘사에 세심하면서 동작과 정신의 요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또한 사실적인 설채(設彩)와 안정된 구조, 향토적인 풍정(風情)이 속기(俗氣)없는 조선시대인들의 생활철학과 합치되어 작품의 품격을 높인다.(덕수궁 미술관 소장)

신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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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潤福

1758년(영조 34년)-? 자는 입부(笠父), 호는 혜원(蕙園),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화원으로서 벼슬은 첨정(僉正)에 올랐다.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한국인의 생활을 주로 소재로 다루었으며 특히 기녀(妓女), 무속(巫俗), 주점(酒店) 등의 색정적인 면을 많이 그렸다. 한국 여성의 미(美)를 화면에 많이 재현한 점에서도 큰 공로자라 하겠다. 인간주의적인 욕망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평가된다. 화적으로는 간송(澗松) 미술관 소장의 <풍속화첩> <미인도(美人圖)> 및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탄금도(彈琴圖)> 외 다수가 남아 있다.

신윤복필 풍속화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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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潤福筆 風俗畵帖

신윤복(申潤福)의 풍속화는 김홍도(金弘道)의 풍속화에 비하여 조선시대 특유의 생기와 야성미가 부족하며 부드러운 필치로서 시정촌락(市井村落)의 여러 가지 생활상, 특히 상류사회의 남녀 연락(宴樂)을 그리고 있다. 시대적으로 보면 이른바 서민사회의 각성이 싹트던 때이기는 하나 아직도 사대모화(事大慕華)의 사상이 농후한 당시에 속세간사(俗世間事)를 다룬 그림에 힘을 기울였음은 이 작가의 선구자적인 풍모를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현재 혜원의 풍속화첩 중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림은 <주중희녀도> <주막도(酒幕圖)> <단오일 수변희희도> <검무도(劒舞圖)> <무무도(巫舞圖)> 등이다. 여기에서 그는 사대부(士大夫)로부터 서민사회에 이르는 한국 특유의 생활 정서를 묘사하였는데 에로틱한 풍정(風情)의 표현은 독보적인 경지에 이른다. 이러한 종류의 그림이 범하기 쉬운 저속성(低俗性)을 용케 벗어나서 전체적인 품위를 잃지 않았으며 풍속묘사 위주(爲主)이면서도 원근표현이나 진경산수(眞景山水)에 다같이 허술함이 없다.

조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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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榮祐

1686년(숙종 12년)-1761년(영조 37년)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자는 종보(宗甫), 호는 관아재(觀我齋), 석계산인(石溪山人),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1713년(숙종 39) 진사시(進士試)에 합경하여 벼슬은 도정(都正)에 이르렀다. 산수와 인물에 뛰어나서 정선, 심사정(沈師正)과 함께 삼재(三齋)로 일컬어졌다. 또 시와 서예에도 능하여 그림과 함께 삼절(三絶)이라 불리었다. 화적(畵蹟)으로는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봉창취우도(蓬窓驟雨圖) <송하기거도(松下箕踞圖)> 국립박물관 소장의 <출범도(出帆圖)> 및 개인 소장의 <숙조도(宿鳥圖)> <산수도(山水圖)> 등이 있다.

심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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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師正

1707년(숙종 33년)-1697년(영조 45년)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자는 이숙, 호는 현재(玄齋),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일찍부터 정선의 문하에서 그림을 공부하여 중국의 남화와 북화를 종합한 새로운 화풍을 이루어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가 되었다. 1748년(영조 24)에 모사중수도감(摸寫重修都監)의 감동(監董)이 되었다. 특히 화훼(花卉), 초충(草蟲)을 비롯하여 영모(翎毛)와 산수화에 뛰어났다. 화적으로는 국립박물관 소장의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맹호도(猛虎圖)> <화수초충도(花樹草蟲圖)>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추포도(秋圃圖)> <화항관어도(花港觀漁圖)> <계산고거도(溪山高居圖)> <운룡도(雲龍圖)> 개인 소장의 <전가악사도(田家樂士圖)>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시문월색도(柴門月色圖)> 외에 다수가 있다.

강세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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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世晃

1713년(숙종 39년)-1791년(정조 25년) 조선시대 후기의 사대부(士大夫) 화가.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庵),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1776년(영조 52) 기로과(耆老科)에 장원하여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에 이르렀다. 서화(書畵)에 뛰어나 1784년 천추부사(千秋副使)로 북경에 갔을 때 그의 서화를 구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왕희지(王羲之)의 글씨와 고개지(顧愷之)의 그림과 한퇴지(韓退之)의 글, 두목지(杜牧之)의 시를 광지(光之)는 겸했다 하여 자신을 합쳐 오지(五之)라고 했다. 산수화에서 풍속화에 이르기까지 넓은 분야에서 담담하면서 격(格)이 있고 개성이 뚜렷한 작품을 보이는데 특히 묵죽(墨竹)과 묵란(默蘭)에 뛰어났다. 화적으로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산수도화첩(山水圖畵帖)> <노배멱구도(驢背覓句圖)> <비폭수천도(飛瀑垂天圖)> 개인 소장의 <삼청도(三靑圖)> <벽오청서도(碧梧淸署圖)> <간변쌍송도(澗邊雙松圖)> 외 다수가 있다.

이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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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在寬

1783년(정조 7년)-1837년(헌종 3년) 조선시대 후기 말엽의 화가. 자는 원강(元剛), 호는 소당(小塘),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젊어서 아버지를 여의고 집이 가난하여 그림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림은 구름, 초목, 나는 새 등을 잘 그렸으며 초상화에도 뛰어났다. 1836년(헌종 2) 영흥(永興) 선원전(璿源殿)의 태조 어진(御眞)이 훼손된 것을 복원하였고 그 공으로 등산첨사(登山僉使)가 되었다. 독자적으로 전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남화의 세계를 끌고간 마지막 화가라고 할 수 있다. 화적으로는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송하인물도(松下人物圖)> <초엽제시도(蕉葉題詩圖)> <세한도(歲寒圖)> <약산초상(若山肖像)> 개인 소장의 <삼인해후도(三人邂逅圖)> <북한산영루 회사생도(北漢山影樓會寫生圖)> 외 다수가 있다.

장승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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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承業

1843년(헌종 9년)-1897년(광무 1년) 자는 경유(景猶). 호는 오원(吾園), 본관은 태원(太原)이다. 화원(畵員)을 지내고 벼슬은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남의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웠다고 하며 술을 즐겨 그림과 바꾸는 일이 많았다. 절지(折枝), 기완(器玩), 산수, 인물 등을 주로 그렸으며 필치가 호방하고 대담하면서도 소탈한 여운이 감돌아 조선 후기 말엽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안견(安堅),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 화단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진다. 화적(畵蹟)으로는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기명절지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풍림산수도(楓林山水圖)> <산수영모절지 병풍(山水翎毛折枝屛風)> <산수도(山水圖)> 및 개인 소장의 <팔준도(八駿圖)> <매화도(梅花圖)> <교변람폭도(橋邊攬瀑圖)> <수기화상포대도(睡起和尙布袋圖)> <호산어은도(胡山漁隱圖)> <수상서금도(樹上棲禽圖)> <화조수도(花鳥獸圖)>

<노안도> 외 다수가 있다.

장승업필 기명절지도·노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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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承業筆 器皿折枝圖·蘆雁圖

장승업은 어느 의미에서 동양화의 본령(本領)에 뛰어든 화가로서 기술적으로 중국 본토의 수준을 따르고 있으나 교양의 부족으로 확고한 자기 세계를 갖추지 못한 화가였다. 그는 소위 방원인법(彷元人法)이라고 하여 맹금(猛禽)을 자주 그렸는데 또 한가지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이 <기명절지도>와 <노안도>이다. 그의 노안은 머리가 유난히 커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무거운 머리로 들어박는 듯한 불균형을 느끼게 하지만 구도나 필치는 자신만만해 보인다. <기명절지도>는 그 착상이 중국의 조지겸(趙之謙)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회화의 격식은 어디까지나 작자 특유한 체취를 보인다.

조선시대 후기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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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時代後期-肖像畵

고려시대부터 왕의 어진(御眞)을 그리는 화원(畵員)이 있고 이 그림을 봉안하는 진전(眞殿=璿源殿)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이들 궁정화가인 화원들은 어용화사(御用畵師)라는 사회적인 대우를 받았고 왕의 어진을 그리는 외에 고관(高官)들의 초상도 그렸다. 오늘날 남아 있는 허다한 초상화들은 모두 이들 무서명(無署名)의 화원작품들로서 비록 작가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의 초상화들은 그 박진(迫眞)하는 안면 묘사(顔面描寫)와 대상자의 정신을 화면에 발산케 하는 안광(眼光)의 정확, 예리한 포착으로 매우 유명하다. 특히 18세기경부터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아 안면의 입체감을 선과 색채로써 표현하려는 노력이 보이며 때로는 세밀한 안면의 묘사와는 대조적으로 의복은 흰색 바탕에 2,3개의 윤곽선만으로 평면적으로 처리해 버려 화면에 더 강한 액센트를 주는데 성공하고 있다.

김삼산재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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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三山齋 肖像畵

18세기에 그려진 최대 걸작에 속하는 초상화. 김이안(金履安)의 반신초상(半身肖像)으로서 작자는 알 수 없다. 안면에 볼륨과 음영(陰影)을 주어 효과를 냈고 인물의 개성파악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인다. 두건(頭巾)이나 동정, 깃에 칠한 검정색은 인물을 더욱 인상적으로 부각시키며 화면에 긴장감을 준다. 뾰죽한 턱의 날카로운 얼굴과 검정색의 첨두 두건(尖頭頭巾) 서로 교차하는 동정이 만드는 예각(銳角) 등이 더욱 날카롭게 화면에 힘을 준다. 이와 같은 흑백 2색의 대담한 배치는 조선시대의 화가들이 안출해낸 독특한 초상화의 기법이라고 하겠다.

채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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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龍臣 1848년(헌종 14년)-1941년 조선시대 후기 말엽의 초상화가. 호는 석지(石芝), 본관은 평강(平康)이다. 벼슬은 종이품(從二品)에 이르렀으며 그림은 산수, 인물, 영모 모두 잘 그렸다. 특히 초상화에 뛰어나서 고종황제의 어진(御眞)을 그린 것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역양화 기법의 영향을 보이는데 이것은 일본을 거쳐서 파급된 외래양식의 수용으로 보인다. 그의 초상화 작품으로는 <최치원 초상(崔致遠肖像)> <최익현 초상(崔益鉉 肖像)> <전우 초상(田愚肖像)> <운낭자 초상(雲娘子肖像)> 등 다수가 있다.

작자 미상 투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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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者未詳 鬪犬圖

한국에 서양화의 기법이 전해진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중국 청나라 시대에 낭세령(朗世寧)의 영향으로 보고 대략 18세기경에 청의 화단으로부터 전래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이 작품은 바로 서양화 기법의 동양화에의 이입(移入)이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된다. 한식 건물을 배경으로 사슬에 매인 양견(洋犬)을 묘사한 것인데 입체적인 표현과 동물의 자연스러운 동작, 표정 등이 이제까지의 그림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외래 화풍을 현출하고 있다. 1920년대에 서울 북촌(北村)의 어느 고가(古家)에서 발견되었고 더 컸던 화면에서 절단되어 남은 한 부분으로 추측된다. 오랫동안 김홍도(金弘道)의 작품으로 와전되었으나 작자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