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미술/한국미술의 흐름/백제의 미술/백제의 회화·공예
고분벽화
편집古墳壁畵
백제의 고분벽화로서 현재 알려지고 있는 것은 공주 송산리 6호분의 고분 벽화와 부여 능산리의 고분벽화 단 둘뿐이다. 그나마 보존상태가 좋지 못하여 당시의 백제 회화의 전모를 실측하기에는 아주 미흡하다고 하겠다. 웅진시대의 고분군에 속하는 송산리 6호 전축분의 토벽에 그려진 사신도와 천체도(天體圖)는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마멸되었는데, 그 복원도(復原圖)로 미루어 부여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 축조된 남조풍의 고분에 고구려식 사신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 벽화의 백호(白虎)는 호신(虎身)은 사신형(四神形)이나 호두(虎頭)는 현실의 호두와 흡사한 것이어서 조화를 깬다. 한편 능산리의 고분벽화는 네 벽에 사신도, 천장에 연화문·비운문(飛雲文) 등의 무늬를 직접 석면에 매우 능숙한 필치로 그렸는데 백제적인 우아한 감각이 엿보인다. 6세기 반경부터 7세기 반경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고구려 말기의 고분벽화와 상통하고 있어 이 시기에 고구려·백제 사이에 문물교류가 있었음을 입증한다.
인사라아
편집因斯羅我 (생몰, 연대미상)
백제의 화공. 463년(개로왕 9년)에 일본에 건너가 일본 회화계의 계몽에 크게 공헌했고 그의 자손도 아버지의 업을 계승하였다. 후에 고우치(河內) 화사라 불려졌다.
백가
편집白加 (생몰 연대 미상)
백제 말기의 화가. 588년(위덕왕 35년)에 사공(寺工)·와박사(瓦博士)·노반박사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일본 회화에 큰 영향을 주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아좌태자
편집阿佐太子 (생몰 연대 미상)
백제의 화가. 백제27대 위덕왕(威德王)의 아들. 그림에 뛰어나서 597년(위덕왕 44년)에 일본에 건너가서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으며,현재 전해 내려오고 있는 쇼토쿠 태자의 진영(眞影)이 아좌태자의 그림이라는 설이 있는데 학문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남기고 있다.
금동관
편집金銅冠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羅州市 潘南面新村里) 9호분(옹관 묘)에서 출토한 백제의 유일한 금동관. 엷은 동판을 오려서 만든 관모로 내관과 외관의 둘로 구성되어 있다. 외관은 폭이 3cm, 길이가 50cm의 동대(銅帶)를 구부려 직경 17cm의 테를 만들고 거기에 세 개의 초화형입식(草花形立飾)을 세웠다. 그 테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칠판화문(七瓣花紋)을 철점(凸点)으로 나타내고 상연(上緣) 가까이 일렬로 하트형 영락(瓔珞)을 달고 있다. 또 세 개의 입식은 중앙 세 기둥의 끝머리와 그 좌우에 세 개의 보주형(寶珠形) 두식(頭飾)이 얹히고 그 아래로 좌우 각 두 개씩의 분지(分枝)가 있는 것이며, 일견 무슨 모란이나 백합꽃을 모아 놓은 것 같고 앞쪽에 하트형 영락을 매달고 있다. 내관은 반원형의 동판을 두 개 맞붙여 이루어지고 있는데 각 면마다 인동문(忍冬文) 테두리 안에 백합꽃 같은 꽃무늬를 철점으로 나타내고 있다. 여러 면에서 신라의 금관과 비슷한 형식을 보이는데 신라의 관보다 약간 고형(古形)이며 왕관이라기보다는 지방 호족(豪族)이 썼던 것으로 추측된다.(국립박물관 소장)
능산리 고분 출토 관식금구
편집陵山里古墳出土 冠飾金具관모의 장식으로 믿어지는 이 식금구(飾金具)는 그 무늬가 그리스적인 당초문이나 한족적인 산악문(山岳紋), 혹은 운기문(雲氣紋)이 섞였거나 탈화(脫化)된 양식으로 보이며, 일본의 호류사(法隆寺) 소장 다마무시즈시(玉蟲廚子)나 아스카시대(飛鳥時代)의 불상에 시공된 식금구의 투조문양(透彫紋樣)과 일치되어 백제 미술이 이의 원류였음을 실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금제투작 초화문관식
편집金製透作草花文冠飾
무녕왕릉(武寧王陵)의 왕과 왕비의 영구(靈柩)에서 발견된 두 개의 관식(冠飾). 종래에 발견된 여러 금관(고구려의 투각초화문 금동관, 신라의 금관 및 나주출토의 금동관 등)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장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기본이 되는 무늬는 인동초문(忍冬草紋)과 화염형(火焰形) 무늬이며 연화문을 곁들였다.
왕비의 관식은 좌우대칭으로 표현되었으나 왕의 것은 변화를 주면서 자유자재로 표현되었다. 화염형의 위를 향한 긴 꼬리는 마치 불상의 광배에서 볼 수 있는 불꽃의 꼬리나 비천(飛天)의 천의자락 혹은 구름을 연상시킨다. 밑에서 갈라진 여러 갈래의 가지의 곡선은 무한한 움직임을 보여 신라나 가야의 금관이 지닌 정적인 면과 매우 대조적이다. 왕비의 관식은 중심부에 연화대(蓮花臺)를 놓고 상하좌우에 연화문을 왕의 관식보다 더 뚜렷하게 도식화하여 배치했는데 이와 같이 인동초문에 연화문을 곁들인 점이 중국 남북조의 영향과 아울러 불교적인 감각을 더욱 짙게 한다.
이 두 개의 금관식은 애초에 섬유질로 되고 구슬이 달린 관모에 끼어 장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관식의 크기는 왕의 관식이 가로 14.2cm, 세로 29cm이며 왕비의 관식은 가로 14cm, 세로 21.7cm이다.
무녕왕릉 종합유물
편집武寧王陵 綜合遺物
공주의 금성동 송산리(錦城洞 宋山里) 소재. 백제 고분 중대인 웅진시대의 전축분으로 1971년 7월 8일에 발굴되었으며, 거의 완전한 상태로 88종 2,561점의 부장품을 보이고 있어 지금까지 발굴된 우리나라의 고분 가운데서 으뜸을 이룬다.
그중에 특히 중요한 것은 능의 주인과 그 행적을 기록한 지석(誌石)이라 하겠는데 이는 기록적인 면과 금석학적(金石學的)인 면에서 다루어져야 할 자료이다.
공예품으로는 각종 금은 장신구가 태반이고 다음에 청동제품·이기류(利器類)·도자기·목제품의 순으로서 지금까지 자료가 빈약했던 백제 금속공예의 면모를 뚜렷하게 밝힌다. 금제투작 초화문관식은 백제 왕관의 독자적인 양식이라 할 온화하고 우아한 특성을 보이는 대표적인 장신구로 손꼽힌다.
그 외의 장신구로는, 아홉 마디의 금목걸이·금팔찌·은팔찌·금귀고리·금제 뒤꽂이·거울(銅鏡)·금두식곡옥(金頭飾曲玉) 등이 뛰어난 세공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가운데 곡옥은 백제에서는 처음 나타난 신례(新例)로서 정교한 세공을 보이며, 금제 뒤꽂이는 연화문 또는 타출보상당초문(打出寶相唐草紋)이 섬세하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용(龍)의 양각과 음각 명문(陰刻銘文)이 있는 은제 팔찌이며 또 제품으로 벌집 모양의 금박선(金箔線) 안에 각종 무늬(飛天·鳳凰·蓮花紋)를 그린 왕비의 베개(頭杭)와 베갯머리에 꽂은 한 쌍의 봉황두(鳳凰頭)가 희귀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봉황두의 머리는 흑(黑)·주(朱) 칠을 한 위에 금박을 입혀 거의 원형을 잃지 않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10cm밖에 안 되지만 정교하게 깎아 만든 솜씨가 뛰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