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한국의 유교/한국유교의 역사

한국유교의 역사〔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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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儒敎-歷史〔槪說〕

한국유교의 역사는 그 전래(傳來)와 신라·고려 및 조선 시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전래 ―― 유교라면 중국을 발상지로 하고 그것이 여러 나라로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한국에 전해진 것은 기록에 분명치 않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는 벌써 유교의 교육제가 있었고, 백제의 왕인(王仁)이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일본에 전한 것(285)으로 보아 최소한 그보다는 앞선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유교의 발상이 반드시 중국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최근 다른 견해도 일부 있지만 일반적으로 중국을 종주국(宗主國)으로 하고 있다.

(2) 신라·고려시대 ―― 신라의 선덕(善德)여왕 9년(640)에 당(唐) 태종이 유교를 장려하기 위하여 널리 해외의 학생을 모집하였으므로 이때에 신라·고구려·백제에서는 자제들을 보내어 수학하도록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에 태학이 설립되었고 백제는 학교 시설의 시초 연대가 분명하지 않으나 고이왕(古爾王) 52년(285) 왕인이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으며, 신라에서도 학교 설립은 신문왕(神文王) 2년(682)에 이루어졌다. 이때에 최고학부인 국자감의 교풍은 대개 경전을 잘 익히고 사기(史記)를 알아서 관리가 되는 일과 문장이나 시를 짓는 일을 주로 하였다. 대체로 이론을 찾는 것보다는 문장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고, 여말(麗末)에 주자학(朱子學)이 들어옴에 따라서 학풍도 점차로 달라졌다. 즉, 한(漢)·당(唐)의 학풍을 지녔던 때가 고려 이전이라고 한다면 고려 말기부터는 차츰 송학의 풍을 띠게 되었다. 당시의 유명한 학자로서는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최충(崔沖)·안유(安裕)를 비롯해서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과 함께 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정도전(鄭道傳)을 들 수 있다.

(3) 조선시대 ―― 초기에는 조정의 적극적인 장려로 불교에 염증을 느낀 인심(人心)이 공맹사상을 높이는 경향으로 전환되어 갔고, 정치변동에 따라서 절의(節義) 문제가 유교의 중요한 중심문제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관학(官學)으로 입신 출세를 목표삼던 풍은 사화로 인해서 사라져 갔고 반면 유교의 철학인 성리학(性理學)이 대두되어 유교의 이론이 체계화된다. 서경덕(徐敬德:花潭)·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退溪)·이이(李珥:栗谷)는 이때의 학자이다. 4단7정론(四端七情論)이라든가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이 이 시기의 핵심문제이기도 했다. 이론이 실을 거두지 못하고 부질없는 분석만 일삼는 폐단에서 실행을 중요시하는 예학(禮學) 중심으로 바뀌어 갔고 유명한 예송(禮訟)문제도 이 시기에 일어났던 일이다. 중국에서는 공허한 이론을 배척하고 양명학(陽明學)이 등장하여 환영받았으나, 한국에서는 전래 초기부터 정주학(程朱學) 중심의 학풍에 그 세를 얻지 못하였다.

당쟁이 거듭되면서 민중의 피폐는 심하여 갔고 이 해결을 실현시켜 주는 새로운 이론이 요청되어, 여기에 실학(實學)이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道)와 경세제민(經世濟民)에 힘쓰면서 공맹의 왕도정신(王道精神)을 본받자는 주장이었다. 유형원(柳馨遠:磻溪)·정약용(丁若鏞:多山)·이익(李瀷:星湖)은 이 계열의 학자들이다. 이들의 주장은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서학(西學)의 감염을 혐오하는 정부의 탄압으로 다시 성리학 연구의 방향으로 전환되어 갔다.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중심으로 해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로 나뉘어 서로 견해를 달리하는 학파가 형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두 주장을 절충하는 절충학파도 나오기에 이르렀다.

퇴계를 으뜸으로 하는 조목(趙穆:月川) 정구(定逑:寒岡)·유성룡(柳成龍:西厓)·김성일(金誠一:鶴峯)의 계통과 율곡을 으뜸으로 하는 송시열(宋時烈:尤庵)·한원진(韓元震:南塘)·임성주(任聖周:鹿門)의 계통 및 김창협(金昌協)·오희상(吳熙常:老洲)의 계통은 이기설의 세 흐름을 형성하였다.

요약해서 조선의 유교는 철학이 중심이었고 그 철학은 하나의 학문으로서만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민중을 움직이기도 한 특성을 보이고 있다. 국정의 부패를 규탄하는 유생들의 상소라든가 국권을 침해당했을 때 항거하는 의로운 행동을 보여줌은 한국 유교사(儒敎史)의 면목이기도 하다.

<柳 正 東>

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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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學

고구려 때의 유교 교육기관. 소수림왕 2년(372) 중앙에 설립한 국립학교로서 상류층의 자제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유교경전과 한문학 및 무예 등을 교육시켜 유교교양을 갖춘 고급관리를 양성한 것 같다.

오경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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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經博士

3국시대에 5경(詩·書·禮·易·春秋)에 통달한 사람에게 준 칭호 혹은 관직명. 당시 최고 수준의 신학문인 유학에 통달한 자를 중앙요직에 임명하여 박사로 하고, 교육·문화·역사편찬·외교·문서작성 등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구려의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 및 백제의 박사 왕인(王仁)·고흥(高興) 등이 있고, 신라는 뒤에 국학 혹은 태학감(太學監)에 아주 박사와 조교(助敎)를 두어 교수를 담당시키기까지 하였다.

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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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學

신라시대의 유교 교육기관.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예부(禮部) 관할 하에 설치하여 귀족 자제들에게 유교교육을 시켰고, 성덕왕 16년(717)에 당으로부터 공자와 그의 10철(哲)·72제자의 화상을 가져다 봉안하여 체모를 갖추었으며, 경덕왕 6년(747)에 일시 태학감(太學監)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12년(776)에 도로 환원시켜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여기에는 유학과와 기술과의 두 과가 있었는데, 유학과에서는 주역(周易)·상서(尙書)·모시(毛詩)·예기(禮記)·춘추좌전(春秋左傳)·문선(文選)을 2과목씩 나누어 가르치고, 논어와 효경은 전체 필수과목이었다.

국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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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子監

고려시대의 유교 교육기관. 신라의 국학을 계승하여 고려 성종 11년(992) 개경에 처음으로 창립되었고, 그 안에 6학(六學)을 두어 문무관 3품, 훈관(勳官) 2품, 경관(京官) 4품 이상의 자제들에게 유교경전과 산(算)·서(書)·율(律)의 3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교과목은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사문학(四門學) 등의 3개 학당에서 유교경전을 가르쳐 과거제 실시와 함께 유교 발달에 큰 역할을 하였다.

문묘의 연원과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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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廟-淵源-發達

공자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祀堂)을 선사묘(先死廟)·문묘·성묘(聖廟)·공자묘(孔子廟) 등으로 부르는데 우리나라에서 이것이 설립되기까지의 과정과 설립 이후 보존의 경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신라 성덕왕 16년에 당나라 조정에 들어갔던 왕자 김수충(金守忠)이 귀국하여 바친 공자·10철·72제자의 화상을 국학에 안치시켰다. (2) 고려 성종 2년(983)에 박사 임모성(壬老成)이 송(宋)에서 돌아와 바친 <태묘당도(太廟堂圖)>·<사직당도(社稷堂圖)>와 그 기록, <문성왕묘도(文聖王廟圖)>·<제기도(祭器圖)>·<72현찬기(七二賢贊記)> 등 도서를 국자감에 안치시켰다. (3) 현종 4년(1013)에는 최치원(崔致遠)을, 13년에는 설총(薛聰)을 각각 추봉하여 종사(從祀)케 하였다. (4) 안향(安珦)이 문묘의 황폐를 개탄하여 국학 대성전(大成殿)을 신축하고 박사 김문정(金文鼎)을 원나라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및 제기·악기·경서 등을 가져와 비치시켰다. (5) 조선 태조 7년(1398)에 한양(漢陽)에 문묘를 낙성시켰고, 연산군 때 수난을 겪었다가 중종(中宗) 때 복구 개수되었다. 이때부터는 고려의 최충(崔沖)·안향(安珦)·정몽주 등 많은 선유(先儒)가 종사되어 현재는 공자·4성·10철·송조(宋朝) 6현·공자의 70제자, 한·중(韓·中) 양국의 111위가 배향되기에 이르렀다. (6) 이 문묘종사(文廟從祀)는 학통(學統)·당파·정치정세 등의 혼란으로 유학자들간에 때때로 큰 분쟁을 일으켜 중종 12년에는 정몽주 종사문제, 광해군·인조년간의 5현(五賢) 종사문제, 숙종 때의 이이·성혼(成渾) 출학(黜學)문제, 영조 때의 송시열·송준길(宋俊吉)·박세채(朴世采) 등의 종사문제 등이 그 예이고, 정세에 따라 위차(位次) 무가 바뀌는 수도 있었다.

최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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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4∼1068)

고려 때의 유학자 교육가.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뒤에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되었다. 72세에 문하시중으로 퇴직하자 당시 병란(兵亂)의 후유증으로 국학이 피폐한 상황을 보고 사학(私學)을 세워 후진 양성과 유교 교육에 여생을 바쳐 사숙(私塾)으로 9재(九齋)학당을 열고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이를 문헌공도(文憲公徒)라 하고, 이에 자극을 받은 유학자들이 서로 다투어 사학을 개설하여 모두 합쳐 12공도(十二公徒)에 이르니 사학이 오히려 국학을 압도할 정도였다. 그는 9재학당에서 9경(經)·3사(史)를 가르치고, 간혹 선진이 왔을 때 각촉(刻燭)하여 글을 짓게 하고 등급을 매겨 방을 붙이기까지 하였다. 뒤에 문묘에 배향되어 종사케 하였다.

김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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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文鼎

고려 충렬왕 때의 오경박사. 과거 중심의 사장(詞章) 교육을 지양하고 경사(經史)에 치중하는 성리학의 전래에 따라 유학이 흥기(興起)할 즈음 안향(安珦)의 천거에 의한 왕명으로 원(元)에 들어가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제기·악기 및 6경 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새로 낙성시킨 문묘에 봉안하였다.

안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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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珦(1243∼1306)

고려 때의 유학자. 초명은 유(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원종 때 관계에 진출하여 충렬왕때는 지방관으로 유교의 입장에서 미신을 금지시켰고,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해 와서 연구하였다. 그는 주희(朱熹)의 학덕(學德)을 깊이 숭모하여 영정(影幀)을 걸어두고 모셨으며, 김문정을 원나라에 보내어 공자 등의 화상을 가져와 국학대성전에 비치함으로써 문묘를 부흥시켰다. 국학의 발전과 성리학 연구에 공로가 많아 충숙왕 6년(1319)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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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光祖(1482∼1519)

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정치가.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14세때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정치학 연구에 힘써 마침내는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袖)로 중종의 신임을 얻어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의한 이상정치를 구현하려다가 구세력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그는 유교 특히 성리학만을 유일한 배타적 종교로 신봉하고 불교·도교·도참비기(圖讖秘記) 등을 금할 것을 주장하여 도교에 대해서는 소격서혁파논쟁(昭格署革罷論爭)을 불러일으켰고, 무격(巫覡)의 숭신 및 영철야(靈徹夜)의 풍을 금지시켰으며, 불교에 대해서도 사찰중창(寺刹重創)을 엄금하고 사찰의 노비(奴婢)·전지(田地)를 몰수하였다.

그는 국교로서 유교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전국에 시행시키고 각종 유교 윤리서적을 간행하는 한편, 현량과(賢良科) 시취(試取)를 주장하며, 외방여악(外方女樂)을 금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사(賜死)되었다.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이이(李珥)는 그를 동방4현(東方四賢)의 1인으로 추앙하였다.

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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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訟 조선 현종 때 상례(喪禮) 문제로 2차에 걸쳐 일어난 유학자들간의 싸움. 일명 복상(服喪) 문제라고도 한다. 1659년 효종(孝宗)이 승하하자 효종의 모후(母后) 조대비(趙大妃)의 복상을 1년상으로 정하고 현종이 즉위하였다.

그 후 허목(許穆) 등이 상소해서 3년상을 주장하므로 송시열 등은 효종이 인조(仁祖)의 제2왕자(次嫡:鳳林大君)이고 조대비는 계모후(繼母后)이니 1년복상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윤휴 등은 다시 상소하여 효종이 왕위를 계승한 이상 장자(長子)나 다름없으니 3년상을 입는 것이 옳다고 반박하였으나 송시열의 주장대로 시행되었다. 이것이 1차 예송이며, 그후 1674년 현종 15년에 효종의 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가 돌아가니 대공설(大功說:8개월복상설)을 주장하는 측과 1년복상을 주장하는 양론이 대립되어 1년복상으로 결정되었다. 이것이 2차 예송이다. 문제는 계비라는 점과 장자가 아니라는 점에 예의 이론상 논쟁이 벌어진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노론(老論)과 남인(南人)간의 당파싸움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무시할 수 없다.

절의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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節義派

조선 전기 유학계(留學界)의 4대학파 중 하나.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와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충의를 본받아 세조(世祖)의 패륜 행위에 분개하여 단종(端宗)을 위해 의거를 일으키다가 실패하였거나 세조에게 협조를 거부하고 은둔생활을 한 사람들을 말한다.

성삼문(成三問) 등의 사육신(死六臣)과 김시습(金時習) 등의 생육신(生六臣)이 이에 속하고, 이들의 절의(節義)는 뒤에 영남 사림파(도학파), 임진왜란시의 의병, 병자호란시의 3학사(三學士)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사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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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林派

조선 전기 유학계의 일파. 전원사림(田園士林)에서 유학을 공부하던 문인·학자들로 순수하게 성리학에만 전념하고 조선 개국(開國)에 협조한 훈구파(勳舊派)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으며, 사장(詞章) 위주의 학풍을 배척하고 도학(道學) 혹은 이학(理學)의 철학적인 탐구를 주장하였으며, 뒤에 세조의 패륜을 규탄하기도 하였다.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로 이어져 오다가 성종때에는 관계에 대거 진출하였으나 훈구파의 반격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수난을 겪고, 중종 때 다시 조광조(趙光祖)를 입각시켜 지치주의에 의한 이상정치를 펴보려 하였으나 남곤(南袞) 등 훈구파의 모략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격었다. 그후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학풍이 크게 일어나 조선 유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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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憲(1544∼1592)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의병장.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렬(文烈).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명종 22년(1567) 문과에 급제, 정주(定州)교수·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질정관(質正館)·박사(博士)·현감·전라도사(全羅都事)·공주제독 등을 거치는 동안 철저한 유교의 입장에서 많은 개혁안을 상소하고 정론(正論)을 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시 청주성을 탈환하였으나 금산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그가 유교의 입장에서 행한 것으로는 (1) 선조 5년에 왕의 불공(佛供)을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2)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 문물제도 중 따를 만한 것을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3) 선조 14년 공조좌랑에 임명, 전라도사로 나가 연산군 때 정해진 공안(貢案)의 개혁을 청하였다. (4) 1582년 보은현감으로 소를 올려 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을 세워 표충할 것을 청하였다. (5) 1589년 대궐에 엎드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론(極論)하다가 귀양갔다. (6) 1589 ∼1591년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보낸 사신을 죽일 것을 청하고 왜적대비책을 상소하였으나 거부되었다. (7) 금산전투에서 700의사(義士)와 함께 전몰하니 그 충성심은 길이 추앙받았다. 선조 37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광해군 1년에 그의 사당에 '표충(表忠)'이라는 액이 하사되었으며, 영조 30년에 영의정으로 추증, 공자묘에 함께 모셔졌다.

성균관유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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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館儒生運動

조선시대의 최고학부인 성균관 유생들이 집단적 행동으로 국정을 비판하거나 왕에게 상소한 운동. 1398년 유학 교육기관으로 개설되어 성종때에 그 체제의 탄생을 본 성균관은 역대(歷代) 제왕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제학(大提學) 이하의 석학들이 깊이 관계하고, 뒤에 고관·대학자가 거의 모두 여기서 나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재학중인 유생들은 정주학(程朱學)의 입장에서 국정에 대한 비판자 역할을 하였고, 이교(異敎)를 사도(邪道)라 하여 배척하는 데 앞장섰으며, 국란(國亂)이 있을 때는 충의지심에서 집단 저항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당파싸움에 이용되기도 하였고, 보수적인 편견으로 새로운 종교·사상의 등장을 봉쇄하는 반동적 역할도 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을 간추려보면 이러하다. (1) 1519년 기묘사화 때 성균관 유생들은 조광조의 사면을 항소(抗訴)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 1611년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를 논박하자 성균관 유생들은 정인홍을 청금록(靑衿錄)에서 삭제하였다. (3) 1893년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하자 성균관 유생들은 동학 탄압을 상소하였고, 동학교도들은 이에 대항하여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訴)·보은대시위를 하게 되었다. (4) 1902년 성균관 유생 신채호(申采浩) 등은 이하영(李夏榮)등의 매국음모를 규탄하였다.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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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益鉉(1833∼1906)

한말의 유학자.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 경기도 포천(抱川) 출생. 이항로(李恒老) 문제로 철종 6년에 문과에 급제, 뒤에 의정부 찬정(贊政)까지 배명받았으나 개화정책에 반대, 사퇴하였다. 1873년 대원군(大阮君)의 만동묘(萬東廟) 폐지·서원철폐정책에 반대상소를 올려 유배되었고 한일통상(韓日通商)에도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다가 체포되어 일본 쓰시마(對馬島)로 유배, 단식(斷食)으로 운명하였다. 저서에 <면암집(勉庵執)>이 있고, 1962년 전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받았다.

위정척사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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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政斥邪運動

조선 후기에 서학(西學)이 들어온 데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는 실학운동이 활발해지고 천주교가 전파되자 주자학의 입장에서 이를 사도(邪道)로 보아 배척하고 국교로서의 유교를 수호하려는 운동이 유학자들간에 일어났다. 이것은 제1기에 천주교배척과 실학자탄압으로, 제2기에는 개화(開化) 반대와 천주교·동학의 거부로, 제3기에는 국권수호와 의병운동으로 전개되어 한말까지 꾸준히 계속되었다. (1) 1785년 서학의 옥이 일어나자 유하원(柳河源) 등은 양서의 금단(禁斷)을 주장하였다. (2) 1788년 이경명(李景溟)이 서학의 폐단을 상소하고 그해 8월에는 천주교책을 불사르게 하였다. (3) 1791년부터 정부에 의한 천주교박해가 본격화되었는데 이것은 거의 모두 유교의 입장에 선 고관들의 상소에 의한 것이었다. (4) 1839년 이지연(李止淵)이 천주교 토치(討治)를 논하고 기해사옥(己亥邪獄)이 일어나 천주교 다수를 처형하고 5가작통법(吾家作統法)을 시행하였으며 이해 11월에 '척사윤음 (斥邪綸音)'이 반포되었다. (5) 1866년 기정진(奇正鎭)·이항로(李恒老) 등이 척화소(斥和疏)를 올렸다. (6) 1876년에 강화도조약이 맺어지자 이만손(李晩孫) 등의 만인소(萬人疏)가 개화반대 여론을 일으켰고 이것은 김평묵(金平默)·최익현(崔益鉉) 등에 의하여 꾸준히 계속되었다. (7) 갑오경장 이후에는 항일의병운동이 일어나 국권수호, 매국역도(賣國逆徒) 격살, 항일 무장투쟁 등으로 전개되었다.

경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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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學院

한말·일제시대에 붙인 성균관의 별칭. 일제의 침략정책에 따라 1887년(고종24)에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칭하고 일제 때 명륜당과 부속건물에 명륜전문학교를 세워 친일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나 해방 이후 성균관으로 복귀되었다.

김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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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淑(1879∼1962)

유학자·독립운동가. 자는 문우(文佑), 호는 심산(心山), 경북 성주(星州)출신. 일찍이 유학을 배워 조예가 깊었고, 1909년 성명(星明)학교를 창립하였으나 '을사5원흉 매국성토사건(乙巳五元凶賣國聲討事件)'으로 피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 대표들이 서명한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진정서를 가지고 상해로 건너가 우송한 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19년 광복운동모금중 체포되었다. 그 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임정의정원(臨政義政院) 등에 관계하다가 1927년 상하이 일본 영사관에 체포되어 다롄(大連)에서 복역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곧 유도회를 조직,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창립하여 초대학장으로 교육에 힘썼으나,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여 수난을 겪으면서 유도회의 분쟁에 말려들었다가 병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