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한국의 불교/한국불교의 사상
한국불교의 사상〔개설〕
편집韓國佛敎-思想〔槪說〕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 다 같이 처음에 받아들인 불교는 선인선과(善因善果)의 인과를 가르치는 새로운 종교로서뿐만 아니라 갖가지 재액을 없애고 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새로운 주술(呪術)로도 여겨졌던 것이므로 재래의 샤먼적인 토속신앙과 상통하였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보게 되는 것인데, 한국 불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 있어 토속신앙과의 융합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여 왔다. 또한 3국의 지배층들은 모두가 새로운 지배체제를 갖추어 왕권을 보다 강화함으로써 고대국가를 이룩함에 있어 불교를 그 정신적인 기둥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한국 불교는 초기적 수용(受用) 과정에서부터 종교적 차원과 국가적 차원의 한계가 분명치 않았다.
고구려에서는 5세기 후반부터 불교 연구가 활발하여져서 승랑(僧朗)을 비롯한 실법사(實法師)·인법사(印法師) 등이 삼론학계(三論學界)에서 명성을 떨쳐 부정(否定)의 논리를 전개하는 중도사상(中道思想)을 밝혔으며, 또 중국으로부터 돌아오면서 의연(義淵)은 남도파 지론종(南道派 地論宗)의 사상을 소개했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은 대개 불교사상에 혼동을 일으키고 있었으니 미타정토(彌陀淨土)와 미륵(彌勒)정토와의 혼동이 그것이었다. 백제는 성왕(聖王) 때 겸익(謙益)이 인도로부터 돌아온 것을 계기로 계율(戒律)사상이 성하게 되었다. 중국 천태종(天台宗)의 제2조(祖) 혜사(慧思) 밑에서 법화삼매(法華三昧)와 관심법(觀心法)을 얻고 돌아온 현광(玄光)이라든가, 또는 유학(留學)은 하지 않았어도 <속고승전(續高僧傳)>에 들어간 혜현(惠現) 등이 법화(法華)와 삼론사상을 널리 편 일도 있었으나 백제불교는 마침내 그 계율주의(戒律主義)가 극단적으로 흘렀다.
신라는 3국 가운데서도 특히 불교를 국가통일의 정신적 원리와 국민사상으로 삼아 국가정책에 적극 반영시켜 국가적·현실적인 이익을 종교적 사명보다 앞세웠다. 집단훈련을 통해서 국가가 요청하는 이상국가(理想國家)의 역군을 기르기 위한 화랑제도가 진흥왕(眞興王) 때 창설된 것도 그 중 하나였다. 화랑은 서민들을 교화하는 미륵의 화신(化身)으로 받들어졌다. 신라의 왕족은 스스로의 골품을 불교사상으로 정화하여 신상가족(神聖家族)이라는 골품상의 관념을 세웠다.
진사상(眞思想)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국가불교와 왕실불교 육성의 뚜렷한 지도자는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이었다. 수(隋)에서 신라인으로는 처음으로 섭론종(攝論宗)의 참신한 사상을 배우고 돌아온 원광은 <세속오계(世俗五戒)>와 <걸사표(乞師表)>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을 통해 불교에 입각한 도덕관(道德觀)을 세웠다.
한편 자장에 의해 발전·대성하게 된 신라불국토설(新羅佛國土說)은 호국사상과 결부되어 불교의 유통에 공헌한 점이 많았다. 이러한 때에 불교 본연의 자세를 세우려고 나섰던 혜숙(惠宿)·혜공(惠空)·대안(大安)·원효(元曉) 등의 교화는 서민들이 자기의 의사와 결단으로 자기의 종교를 가지게 하였으며, 특히 원효가 "본위범부 겸위성인설(本爲凡夫兼爲聖人說)"을 외치며 널리 미타사상(彌陀思想)을 펼친 일은 실로 신라 불교를 대중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신라는 통일 전반기에 수많은 승려들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불교사상을 연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어느 일가일파(一家一派)에 치우치지 않고 총화불교(總和佛敎)로서 통불교(通佛敎)적인 학풍을 세웠던 것이다. 그 대표적 인물인 원효는 유가사상(瑜伽思想)과 중관(中觀)사상 등 모든 불교사상을 하나의 이치로 귀납하여 자기분열 없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 신라인으로서의 불교사상 체계를 세웠으며, 이런 조화정신을 가리켜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한다.
<십문화쟁론(十文和諍論)>은 이런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이장의(二障義)> 역시 그의 불교사상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대표작인데, 여기서 그는 신역(新譯)불교와 구역(舊譯)불교와의 단혹설(斷惑說)을 서로 하나의 체계로 모순 없이 통합했다.
범부(凡夫)와 부처 차이도 이를 선천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오직 시간적인 선후관계로 다루었던 것도 화엄사상(華嚴思想)의 입장에서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을 지양시킨 것이다. 원효의 저서로는 이 밖에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 등이 전하여 온다. 또 의상(義湘, 625∼702)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백화도장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을 지어 특히 화엄사상을 정통적으로 널리 폈다. 화엄사상은 귀족사회에 크게 환영되었던 것이므로 원효나 의상 외에도 많은 승려들이 이를 연구하였다.
정토사상(淨土思想)에 있어서는 태현(太賢)·의적(義寂)·법위(法位) 등이 나와서 정토신앙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지만, 그들은 다 같이 원효의 학풍을 이어받아 <무량수경(無量壽經)>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각각 설파된 10념(十念)을 서로 한 체계로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미륵계(彌勒系) 경전에 논술된 10념까지도 함께 묶은 것은 신라 정토사상의 독특한 전통이 되었다.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간 원측(圓測, 613∼696)은 그곳에 오래 머물러 현장의 문하에서 유식학자(唯識學者)로서 일가를 세우고 서명학파(西明學派)를 이루었다. 서명학파는 정통파인 중국의 규기(窺基)와 그 후계자들로부터 이단시(異端視)되었으나 원측의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오히려 그 양심적인 학풍이 인정되어 서장어(西藏語)로 완역되기까지 하여 오늘날 유식사상사(唯識思想史)에 있어서 건실한 신라계 유식사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많은 유식학자들이 배출되어 태현의 <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는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나라(奈良)시대의 범망보살계사상(梵網菩薩戒思想)도 신라승들의 연구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불교사상의 연구와는 별개로 통일신라 시대에는 밀교(密敎)가 새로 들어와 명랑(明朗)·해일(海日) 등의 활약으로 밀교의 성행을 보게 되고 밀교의 다라니(陀羅尼)가 널리 민간에 보급되었다. 미타정토 신앙은 통일신라 때 더욱 성행하였다. 이것은 서민층에서도 쉽게 믿어질 수 있는 신앙이면서 한편 유식한 상류층에서도 부담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고, 또 통일전쟁을 겪는 가운데 인명의 피해 등 무상감(無常感)을 절감한 신라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보상을 줄 수 있는 매력적인 구원의 가르침이기도 했으므로 피안(彼岸)에 있어서의 구제의 확신과 아울러 현세에 있어서의 만족을 갖게 하였다. 이리하여 골품(骨品)사회에서 귀족이든 노비든 모두 같은 극락에 태어날 수가 있다 하여 사회적 마찰 없이 통일신라의 사회적 질서는 오래 지속되었다. 또한 관음신앙(觀音信仰)의 성장은 법화사상(法華思想)의 대중화를 엿보게 한다.
통일신라 후반기인 9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고대 지성(知性)에 맞설 만한 중세적인 불교사상을 모색하게 되었다.
예컨대 불교계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 준 선불교(禪佛敎)의 전래와 선풍(禪風)의 진흥이 그 하나였다. 도선(道詵, 827∼898)이 불교의 선근공덕사상(善根功德思想)을 중심으로 지리도참위설(地理圖讖緯說)을 가미하여 여러 비기(秘記)를 남긴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한편 궁예(弓裔)는 미륵하생사상(彌勒下生思想)을 들고 나와서 이상국가(理想國家)의 건설을 꿈꾸었으나 고대를 극복할 만한 사상을 자기 것으로 체질화시키지는 못하였다.
고려 불교계의 초창기를 장식한 이는 균여(均如)와 체관(諦觀)이었다. 균여는 화엄사상을 대중화하는 데 힘썼으며 체관은 중국 오월(吳越)로 들어가 그곳에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지어 천태사상을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천태종(天台宗)을 다시 일으켰다. 천태종의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이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王建)을 자극시키면서 정치적 의미까지 지니게 됨으로써 고려 불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통일신라 후반기부터 있어 온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의 대립은 고려에 들어오면서 차츰 지양되어 교선일치(敎禪一致)의 경향을 띠게 되고, 마침내 의천(義天, 1055∼1101)에 의하여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취지로 하는 천태종이 한 종파로서 새로이 열리기에 이르렀다. 의천이 당시 거란(契丹)왕 도종(道宗)이 <보림전(寶林傳)>을 불사르고 종밀(宗密)의 저술인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都序)>를 간행한 일에 대하여 공명하였던 일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후 요세(了世)·무외(無畏)·의선(義璇) 등이 나와 천태종의 교세를 떨치게 했는데, 이때 여러 곳에서 법화결사(法華結社)가 이루어져 <법화경(法華經)>을 세우며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닦고 아울러 미타정토에의 왕생도 희구했던 것이다. 이같은 천태종의 성립으로 희종(熙宗) 때에는 재래의 선종9산(禪宗九山)이 하나로 묶어져 마침내 <정혜쌍수(定慧雙修)>를 부르짖는 지눌(知訥, 1158∼1210)에 의해서 조계종(曹溪宗)이 확립되었다. 그의 <수심결(修心訣)>·<진심직결(眞心直說)>·<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는 <돈오점수(頓悟漸修)>에 입각한 그의 선불교 사상을 엿보게 한다.
지눌(知訥) 이후에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에는 혜심(慧諶)·혼원(混元)·천영(天英) 등이 배출되어 고려가 망할 때까지 그 법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공민왕때는 보우(普愚, 1301∼1382)가 나와 9산의 선문(禪門)을 다시 한번 통합하는 데 힘쓴 일이 있었으며, 이 밖에 혜근(惠勤)과 경한(景閑)이 나와 고려 말기의 선불교(禪佛敎)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한편 태조 왕건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던 도선의 <지리(地理)·비보(裨補)>사상은 고려사회에서 크게 환영받아 인종(仁宗) 때에는 묘청(妙淸)에 의하여 8성당(八聖堂)의 건립을 보게 되기까지 했다.
그의 사상이 정치적 문제로 확대된 서경(西京) 천도운동(遷都運動)은 유교주의자 김부식(金富軾)에 의하여 분쇄되고 말았지만 묘청과 김부식의 대결은 고려사상사에 커다란 분수령을 이룬 것이었다. 호국불교의 경향은 고려때에도 변함 없이 계승되어 외적의 침입을 당했을 때 <대장경>을 간행함으로써 불력(佛力)에 의해 외적을 막으려고 하였다. 또 불교를 양재초복(攘災招福)하기 위한 것으로 여기는 일도 여전히 뿌리 깊이 남아 있었다.
고려는 초기 성종(成宗) 때 현실적인 정치 이념으로서 유교를 채택하기는 하였으나 그 유교는 불교와 서로 돕는 입장에서 공존하였다. 유교와 불교는 다 같이 귀족정치가 국민들에게 요구하는 윤리였다. 유교주의를 지향한 최승로(崔承老)도 두 가지 사상을 함께 지니는 것을 모순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권근(權近)은 불교와 유교가 다 같이 효(孝)를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결국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 했다. 고려 말기에 불교배척론이 본질적인 면에 접근하게 된 것은 실로 정도전(鄭道傳)에 의해서였던 것이다.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辯)>·<심기리편(心氣理篇)>은 불교를 부정하는 이론을 전개하여 놓은 것이다. 주자학적(朱子學的) 정치이념을 확립하고자 실천에 옮긴 정도전은 한국 사상사(思想史)에 있어 한 고개의 마루턱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한국 불교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근본적으로 국가의 배불(排佛) 정책에 의해 교세가 여지없이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러 사찰에서 불경이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 때 간행되었던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 등이 중종(中宗) 때 재간행되었던 일은, 법화사상 내지 불교사상이 이미 사회에 토착화되고 있었거나 또는 그랬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기화(己和, 1376∼1433)의 <현정론(顯正論)>은 당시 유교 선비들의 배불론을 부수고 불교의 참뜻을 드러낸 저술이지만, 여기서 그는 불교의 5계(五戒)와 유교의 5상(五常)이 결국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했으며, 보우(普雨, ? ∼1565)는 명종(明宗) 때 화엄(華嚴)을 펴는 한편 일정설(一正說)을 내세워 불교의 이치를 보다 조리있게 설명하였다. <허응당집(虛應堂集)>은 바로 보우의 문집이다. 이어서 선조 때에는 휴정(休靜)이 나와 불교계를 중흥시킨 바 있었는데, 그의 <선가귀감(禪家龜鑑)>에는 <교(敎)는 곧 불어(佛語)이며 선(禪)은 다름아닌 불심이므로 참된 불제자는 불심(佛心)을 가져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학식 있는 선승(禪僧)들이 배출되어 <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 등을 널리 폈는데 그 중에서도 연담(蓮潭) 유일(有一, 1720∼1799)의 <연담사기(蓮潭私記)>는 인악(仁岳) 의소(義沼, 1746∼1796)의 <인악사기(仁岳私記)>와 더불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혀지고 있다. 한편 백파(白坡, 1767∼1852) 초의(草衣, 1786∼1866)가 나와 새로운 선론(禪論)을 불러일으킨 일은 조선시대 말기의 불교사상을 장식하는 것이 되었다. 백파가 선에는 조사선(祖師禪)·여래선(如來禪)·의리선(義理禪) 등 셋이 있는 것이라 하며 그의 <선문수경(禪門手鏡)>에서 논한 데 대하여 초의는 <사변만록(四辯漫錄)>을 지어 이를 논박하였던 것이다. 초의와 막역한 벗으로서 그 정의를 두텁게 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도 일가의 선론을 펴서 유명하다. <安 啓 賢>
승랑의 사상
편집僧朗-思想
승랑(6세기)은 고구려 요동성 사람으로 낭대사(郎大師)·섭산대사(攝山大師)라고도 한다. 일찍이 중국에 가서 구마라습(鳩摩羅什) 계통의 삼론(三論)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본래 박학하여 어느 경론에나 능통했으며, 특히 화엄(華嚴)·삼론(三論)에 조예가 깊었는데 2체합명중도설을 그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2체합명중도설
편집二諦合明中道說
2체합명중도설이란 승랑(僧朗)이 제창한 독특한 인식 방법이다. 중도(中道)는 불교의 궁극적인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 중도를 밝히는 방법으로 2체(二諦)를 합명(合明)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
2체란 세체(世諦)와 진체(眞諦)의 둘을 의미한다. 모든 불(佛)은 항상 2체에 의하여 설법했다. 그러므로 모든 경(經)은 2체를 벗어나지 않으며, 2체를 밝히면 모든 경을 해득하게 된다. 2체를 2종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으나 결국은 비이(非二)·비불이(非不二)를 제1의체(第一義諦)로 하는 것이 2체합명중도의 요점(要點)이다. 이러한 학설은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쳐, 승랑은 중국 삼론종의 제3대조가 되었다.
원효의 사상
편집元曉-思想
원효(617∼686)는 한국이 낳은 최대의 불교사상가이며, 학자·문장가·교육자였다. 그는 100여 부 240여 권의 저술이 있을 뿐 아니라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몸소 경험하고 실천한 대자유인이었다.
그는 유학 도중에 돌아왔고,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薛聰)을 낳은 아버지이기도 하며, 승려요, 거사(居士)로서 참으로 다양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항상 '1'이라는 구경점을 향하였고 화쟁(和諍)과 자유를 제창하였다.
일심사상
편집一心思想
원효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 철저하게 천명되어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9식설(九識說)에 의거하여 본각(本覺)에 돌아가는 것, 즉 환귀일심(還歸一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6바라밀(波羅蜜:Paramita)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원효는 만법귀일(萬法歸一)·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 갔다. 그리고 일심(一心)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극락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大乘)이니 불성(佛性)이니 혹은 열반(涅槃)이라고 불렀다.
화쟁사상
편집和諍思想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열반경>·<반야경>·<심밀경>·<미타경>·<능가경> 등 대승(大乘)불교 경전의 전체를 섭렵·통효(通曉)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전(全)불교를 일리(一理)에 귀납하고 종합·정리하여 자기분열 없이 보다 높은 입장에서 신라인으로서의 불교사상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그의 조화정신을 화쟁사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십문화쟁론(十門和爭論)>은 바로 이러한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여러 이설(異說)을 10문(十門)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會通)함으로써 일승불교(一乘佛敎)의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했다. 그의 이와 같은 통불교적 귀일사상은 한국 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화쟁(和諍)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고 있다. "쟁론(爭論)은 집착에서 생긴다. 어떤 이견(異見)의 논쟁이 생겼을 때, 가령 유견(有見)은 공견(空見)과 다르고 공집(空執)은 유집(有執)과 다를 것이다. 이리하여 논쟁은 더욱 야기된다. 그렇다고 하여 이 동(同)과 이(異)를 같다고 하면 자기 속에서 상쟁(相諍)할 것이며, 다르다고 하면 둘과 더불어 상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異)도 아니요 동(同)도 아니라고 설(說)한다."
또 "불도(佛道)는 광탕(廣蕩)하여 무애무방(無碍無方)하다. 그러므로 해당하지 않음이 없으며 일체의 타의(他義)가 모두 불의(佛義)이다. 백가(百家)의 설이 옳지 않음이 없고 8만법문(八萬法門)이 모두 이치에 맞는 것이다. 그런데 견문 이적은 사람은 좁은 소견으로 자기의 견해에 찬동하는 자는 옳고 견해를 달리하는 자는 그르다고 하니, 이것은 마치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본 사람이 하늘을 보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하늘을 보지 못한 자라고 함과 같다"라고 했다. 원효는 이처럼 철저한 논리의 근거를 가지고 화쟁을 주장한 것이다.
무애사상
편집無碍思想
원효의 무애사상은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아무것에도 구애됨이 없는 사람은 나고 죽음에서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고 한 그의 만을 보더라도 그의 무애사상이 짐작된다.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무릇 중생의 마음은 융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한 자유인이 된 것이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一乘)과 일심(一心)을 주장했던 것이다.
의상의 사상
편집義湘-思想
의상(義湘:625∼702)의 속성(俗姓)은 김씨(혹은 박씨)라고 한다. 20세에 출가하여 26세때 원효(元曉)와 함께 당(唐)에 유학의 길을 떠났다.
원효는 도중에
돌아오고, 의상은 후에 중국 화엄종조가 되었던 현수(賢首)와 함께 지엄(知嚴)화상에게 7년간 화엄종을 공부하고 돌아와 해동화엄 초조(初祖)가 되었다. 저서로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백화도장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등이 현재 남아 있다.
화엄사상
편집華嚴思想
의상의 화엄사상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화엄의 대지(大旨)인 해인삼매(海印三昧)를 7언 30구(七言三十句) 210자(字)의 계송으로 요약하여 54각(角)의 굴곡으로 도시(圖示)한 것으로서 그 처음과 끝을 중심으로 일치시킨 것이다. 그는 "법성(法性)은 원융무애한 것이며, 모든 명상(名相)을 초월한 것이며, '1'과 '다(多)', '다'와 '1' 서로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백화도장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에서는 '화엄가(華嚴家)의 비로자나를 그 본존(本尊)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세세생생(世世生生)으로 관음(觀音)을 본사(本師)로 하겠다'고 하였으며, 또 화엄사상과 미타사상(彌陀思想)과의 융합에도 뜻을 두어 문무왕(文武王) 17년(677)에 영주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도 했다.
자장의 사상
편집慈藏-思想
자장은 신라 제일의 귀족인 진골 출신이었다. 선덕왕
5년(636)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불사리(佛舍利)와 가사, 그리고 장경(藏經) 400여 함을 가지고 동 12년(642)에 돌아왔다. 그후 신라는 불교의 정리와 교단의 통관(統管)을 위하여 그를 대국통(大國統)으로 삼았다.
불국토사상
편집佛國土思想
자장이 제창한 불교사상은 불국토사상이었다. 그는 신라의 불교는 결코 새로운 종교가 아니며 과거세(過去世)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와 인연(因緣) 깊은 이상국(理想國)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뜻에서 자장은 왕에게 상주(上奏)하여,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황룡사(皇龍寺)에 9층의 거대한 목탑(木塔)을 세웠다. 일본과 중국 및 말갈 등 9개국의 내항(來降)과 삼국통일을 불타(佛陀)께 빌기 위한 것이었다.
삼국통일의 염원으로 9층탑을 황룡사에 세운 뜻은, 황룡사는 과거세의 가섭불(迦葉佛)이 설법한 곳이기도 하며 현재 범왕(梵王)의 명을 받들어 그의 장자(長子)인 호법룡(護法龍)이 인도의 찰제리종(刹帝利種)인 신라 국왕을 가호하기 위하여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여 황룡사의 신라적 의미도 더욱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자장은 화엄경(華嚴經)에 설해진 문수보살의 영장(靈場)인 오대산(五臺山)을 신라에 설정함으로써 불교 인연의 국토임을 선명(宣明)하였고, 이에 대한 신앙이 신라인의 생활에 부각되었다. 이와 같이 자장에 의하여 발전·대성한 신라 불국토사상은 호국사상과 결부되어 불교의 유통과 일반 국민의 국가사상을 고취시켰으며, 이러한 국민사상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
원측의 사상
편집圓測-思想
원측(613∼696)은 신라의 왕손으로서 그 본명은 문아(文雅)이다. 후에 당경(唐京) 서명사(西明寺)에 머물러 있었다고 하여 서명(西明)이라고도 한다.
15세에 입당(入唐)하여 법상(法常)과 승변(僧辯) 밑에서 수학한 후 현장이 인도에서 돌아오자 그에게 사사하여 역장(譯場)에서 증의(證義)로 일했다. 그는 중국어·범어(梵語)에 능통했으며 유식(唯識) 관계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10권은 담광(曇曠)이 가지고 둔황(敦煌)으로 간 것이 계기가 되어 법성(法性)에 의해 티베트어로 완역되었다.
유식사상
편집唯識思想
정통파 규기(窺基)의 유식설은 고대 인도의 10대논사(十大論師) 중
호법(護法)의 설을 그 정의로 하였으나 원측은 이와는 달리 안혜(安慧)의 설을 중심으로 하는 유식설을 세웠다. 이것은 인도 유식학을 보다 충실하게 전한 것이 되어 유식사상사(史)에서 건실한 신라계(新羅系) 유식사상으로 이채를 띠고 있다.
유식학상의 과제인 행상(行相)을 다루는 데 있어 규기는 견분(見分)으로 보았으나, 원측은 상분(相分)으로 보았다. 견분이란 주관의 심작용이요, 상분이란 인식의 대상인 객관의 형상을 가리킨 말이다. 진체(眞諦)의 <구식의기(九識義記)>를 섭론사(攝論師)의 9식사상(九識思想)과 결부시킨 것도 원측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5성각별설(五性各別說)을 고수한 규기와는 달리, 같은 유식학자이면서도 이승(二乘)을 정성이승(定性二乘)과 부정성이승(不定性二乘)으로 나누어 그 부정성의 경우에 있어서도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천태(天台)·화엄(華嚴) 등의 일승사상(一乘思想)과 조화시킨 것으로서 원측계학파의 사상적 특색이다.
신라의 계학
편집新羅-戒學
통일신라 시대의 계학(戒學)은 원효·태현(太賢)·의적(義寂) 등의 고승에 의해서 발전을 보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대승계율인 <범망경(梵網經)>을 중심으로 각각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赤記)>·<범망보살계본소(梵網菩薩戒本疏)>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대중불교의 윤리생활에 관심이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범망경 소설(所說)의 10중금계(十重禁戒) 가운데 그 제1살생계에 대하여, 의적은 그 동기에 의하여 선심(善心)에 의한 자비살생의 경우이거나 또는 그 결과에 있어서 무궁한 공덕을 가져온 살생의 경우라면 죄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현은 이 설에 전폭적으로 좌단(左袒)하지 않았다. 또 자찬훼타계(自讚毁他戒)에 있어서 원효는 물질적으로 5전(錢) 이상을 바라는 마음만 있다면 자찬하거나 훼타하면 중죄(重罪)가 된다 하고, 태현은 자찬과 훼타의 두 행위가 합해야 중죄라고 했다. 당시 이들의 계학은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일본의 율종학승(律宗學僧) 청산(淸算)·예존(叡尊) 등은 <범망경고적기>를 크게 애호하였다.
신라의 정토사상
편집新羅-淨土思想
원효의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와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는 신라 정토학의 개척적인 논저이다.
정토학의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인 10념(十念)에 대하여 원효는 현료문(顯了門)과 은밀문(隱密門)으로 하였으나 누구나 실천하기 쉬운 현료문의 10념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설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6자의 명호(名號)를 부르는 것으로 하고, 한편 실천하기 어려운 은밀문의 10념은 <미륵발문경>의 자심(慈心) 등 10념이라 하였다. 다시 <무량수경>에서 설한 10념은 은밀문과 현료문을 함께 설한 것이라 함으로써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의 10념을 서로 한 체계 안으로 담아 넣었다. 특히 정토사상에서 미륵계 경전에 설한 10념을 아울러 다룬 것은 신라 정토사상의 전통이 되었다.
그는 또 <관무량수경>의 5역10악(五逆十惡)의 중죄라도 극락에 왕생을 허용한 것은 참회를 할 줄 알기 때문이며, 5역비방정법자(五逆誹謗正法者)의 왕생을 거부한 <무량수경>의 소설은 그들이 전혀 참회를 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 것도 양경(兩經)의 모순을 화쟁하려는 뜻이다.
이승(二乘)을 정성(定性)과 부정성(不定性)으로 나누어, 정성이승이 무여열반(無餘涅槃) 후에 다시 왕생극락할 수 있다고 한 반면에 경흥(憬興)은 정성이승의 왕생을 허용하지 않았으니 신라 정토교학상의 2대 조류를 가져오게 하였다.
호국사상
편집護國思想
한국 불교에 있어서의 호국사상은 신라에 불교가 토착화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인왕반야바라밀경(仁王般若波羅蜜經)>에 의거한 호국사상은 많은 의식(儀式)과 불사(佛事), 그리고 승려의 직접적인 전쟁 참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법화경>에 나타난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은 신라·백제·고구려 3국의 통일에 대한 역사적 현실에 있어서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신라인의 가슴에 제공하였으며, 원효의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는 삼국통일(三國統一)의 결정적인 이념이기도 하다. 진호국가(鎭護國家)를 위한 혜량(惠亮)은 백고좌회(百高座會)와 팔관회(八關會)가 국가행사로서 행하여졌고, 일본·중국 등 아홉 외적(外敵)을 진압하기 위하여 자장(慈藏)의 건의에 의하여 황룡사 9층탑이 건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명랑(明朗)법사의 건의로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으니 삼국통일의 상징처럼 되었다. 원광의 세속오계는 신라 젊은이의 애국 방향을 제시했고, 삼국통일의 결정적 계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호국사상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고려 고종(高宗) 23년(1236)에 착수한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판각사업도 외적을 퇴치하기 위하여 국가와 국민이 단합하여 완성한 호국불사(護國佛事)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일어선 서산(西山)·사명(四溟)을 위시한 의승군(義僧軍)의 활약 역시 호국사상의 발로였다.
3·1 독립만세 때 민족대표 33인 중 백용성(白龍城)·한용운(韓龍雲) 두 고승이 참여함으로써 불교의 호국사상은 계승되어 왔다. 이와 같은 호국사상은 다른 불교국가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은 한국 특유의 불교사상이다.
의천의 사상
편집義天-思想
의천은 고려 문종(文宗)의 제4자로 문종 9년(1055)에 태어났다. 11세에 출가하여 왕사(王師) 난원(爛圓)에게서 계(戒)를 받고 화엄교관(華嚴敎觀)을 배웠다. 13세에 왕은 우세(祐世)라는 호를 내리고 승통(僧統)이 되게 하였다. 송(宋)에 유학하여 많은 불전(佛典)을 가지고 왔으며, 다시 자료를 모아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편집하고, <속장경(續藏經)>을 조판하였으며, 천태종(天台宗)을 성립시켰다.
그의 사상은 단적으로 표현한 저서나 기록이 없으므로 한마디로 무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선교(禪敎)의 대립을 융화하고 원효의 화쟁사상에 이어 통화(統和) 종단을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학문에 있어서 편견을 경계하고 종파의 대립(특히 禪과 敎의 대립)을 꾸짖었다.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종교적 원리를 곧 국가통화의 민족적 이념에 합치시켰으며, 이론적으로 화엄의 1승(乘)과 천태의 1승(乘)은 우주와 인생의 통화적 이념에 있어서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 선사상(禪思想)까지 귀납시켜 종합일승을 제창하고 교관겸수(敎觀兼修)의 사상을 높이 제창했다. 후에 대각국사라 시호되었다.
교관겸수
편집敎觀兼修
고려에 있어서 선종은 태조(太祖)의 옹호를 받아 그 세력이 당당하였다. 그러나 현종(顯宗) 이후에 이르러서는 화엄(華嚴)·법상(法相) 등의 교종이 세력을 얻어 선종에 대항하였으며, 서로의 장점을 주장하고 남을 배척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의천은 천태와 화엄의 양종을 통한 종합적 불교관을 세워 교(敎)와 관(觀)을 겸수하는 것이 불교 수행(修行)의 바른 길이라고 했다. 교만 닦고 선(禪)을 없애거나 선만 주장하고 교를 버리는 것은 완전한 불교가 못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리하여 선·교가 자아(自我)만 주장하는 폐단을 타파하고 전(全)불교가 대동단결하는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였으니, 이것이 의천의 교관겸수 사상이다. 이와 같은 교관겸수 사상은 지눌(知訥)의 정혜쌍수(定慧雙修) 사상과 함께 한국 불교의 전통이 되었다.
지눌의 사상
편집知訥-思想
지눌(1158∼1210)은 서경(西京) 동주(洞州), 즉 황해도 서홍 사람이다. 8세 때 출가하여 25세 때(1182) 승선(僧選)에 급제하였다. 그 후 전남 나주 청원사(淸源寺)에 있을 때 어느 날 6조 혜능(慧能)의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읽다가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의 깨달음은 진성(眞性)은 항상 자재(自在)한 것이며 진여(眞如)의 체용(體用)이 곧 정혜(定慧)라는 것이다. 다음에 <일체경(一切經)>을 열람하다가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화엄론(華嚴論)>을 읽고 화엄원돈지(華嚴圓敦旨)와 선지(禪旨)가 서로 어긋나지 않음을 알았으며, 다시 <대혜어록(大慧語錄)>에 의하여 정(定)·혜(慧)가 함께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제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제2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제3 경절문(徑截門) 등 3문을 열어 모든 근기(根機)를 접(接)하였다. 곧 교학자(敎學者)에게는 먼저 화엄론의 입장에서 원돈문으로 들어가게 하고, 선학자(禪學者)에게는 <육조단경>과 <하택지>에 의하여 돈오문으로 들어가게 하며, 또 점수문에 들어가서 어려운 수행의 고비를 지나 여러 가지 병폐를 경험하고, 경절문에 들어가 자성(自性)을 발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와 같이 천태·화엄·선학 등의 모든 종학(宗學)을 '정혜쌍수'로써 포괄하고 정혜쌍수에 3문을 열어 제1문으로 선승(禪僧)을 섭하며 제2문으로 교승(敎僧)을 섭하고 제3의 경절문에 이르러서는 선종의 진소식(眞消息)을 밝혔다. 이러한 정혜쌍수설은 대각국사(의천)의 교관겸수(敎官兼修)설이 교종으로써 선종을 융섭하고자 하는 데 대하여 선종으로써 교정을 융섭하였다. 뿐만 아니라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을 지어 일반 승려의 일상 행위를 경계하여 병폐를 제거함으로써 교운(敎運)을 만회(挽回)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과 종풍(宗風)하에 한국 특유의 종지(宗旨), 즉 정혜쌍수를 기반으로 한 돈오점수(敦悟漸修)를 제창하였다.
정혜쌍수
편집定慧雙手
지눌(知訥)은 정혜쌍수를 가리켜 "수행은 정(定)과 혜(慧)의 2문밖에 없다(修行 不出定慧爾)"라고 했으며, 또 "정이 없고 혜가 없으면 이것은 광(狂)이요 우(愚)이다(無定無慧 是狂是愚)"라고 하였다. 연(緣)을 쉬고 마음이 정(定)하여 적연불변(寂然不變)한 것이 '정'이요, 관조(觀照)하여 지(知)가 분별(分別)이 없음을 '혜'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수행방법으로 정혜를 쌍수해야 한다고 했으며, 쌍수라는 말 대신에 등지(等持)라는 말로 표현하여 정혜등지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그는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에서 정혜를 적(寂)과 지(知)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발심(發心)으로부터 성불(成佛)에까지 오직 적(寂)이요 지(知)일 뿐인데, 이 적과 지가 수행의 지위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다. 오시(悟時)에는 이지(理智)라 하고 발심시(發心時)에는 지관(止觀)이라 하며 성불시에는 보리·열반(菩提·湟槃)이라고 했다. 이처럼 이지(理智)·지관(止觀)·정혜(定慧)·보리 열반(菩提涅槃)은 모두가 적지(寂知)의 이명이다. 그러므로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혜는 체(體)·용(用)의 관계로서 체에 즉한 용이므로 혜는 정을 떠나지 않고, 용에 즉한 체이므로 정은 혜를 여의치 않는다. 그러므로 정혜쌍수이다.
무심합도
편집無心合道
지눌은 수선(修禪)의 방법으로 정혜쌍수를 주장하면서 관행자(觀心者)들을 위하여 정혜를 닦는 것 외에 무심합도문(無心合道門)을 주장했다. 그는 말하기를,
"무심합도라는 것은 정혜에 구애되는 것이 아니라(祖宗無心合道者 不爲定慧所拘也)"고 했다. 그는 또 "무심이란 심체(心體)가 없어서 무심이 아니라, 단지 심중에 물(物)이 없음을 무심이라 하는 것이니, 마치 빈 병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병 속에 물이 없음을 빈 병이라 하는 것이지 병체가 없음을 공병(空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일이 없고 일에 마음이 없으면 자연히 허(虛)하되 영(靈)하며 적(寂)하지만 묘(妙)하다. 이것이 심지(心旨)이다(今云無心 非無心體 名爲心也 但心中無物 名曰無心 如言空甁 甁中無物 名曰空甁 非甁無體 名空甁也 …汝但於心無事 於事無心 自然虛而靈
寂而妙 是此心旨也)."
마음이 있으면 불안하지만 마음이 없으면 즐겁다(苦有心 卽不安 無心卽自樂). 그러므로 정혜의 궁극적인 뜻도 이 무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돈오점수
편집頓悟漸修
돈오점수란 수행과 각오(覺悟)에 있어서 그 차제(次第)와 단계에 관한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이 먼저냐 수행이 먼저냐, 아니면 수행(修行)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냐, 깨달은 후에 단계적인 수행을 해야 하느냐는 문제이다.
그는 "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번뇌가 없고,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으므로 돈오라고 말한다." 그는 또 "네가 만일 믿어 의정(疑情)이 대번에 쉬고 장부의 뜻을 내어서 진정한 견해를 발하여 친히 그 맛을 맛보아 스스로 자긍(自肯)하는 데 이르면 곧 수심인(修心人)의 해오처(解悟處)가 되나니 다시 계급과 차제가 없으므로 돈오라(初無級漸階次 故云頓悟也)"고 했다. 그러나 그 본성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쳤다 하더라도 무시습기(無始習氣)를 갑자기 버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므로 깨달음에 의하여 수행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여 점차로 훈화(薰化)되기 때문에 점수(漸修)라고 했다.
마치 얼음이 물인 줄 알았다 하더라도 물로 변한 것은 아니다. 열기를 얻어 비로소 물이 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迷)로부터 깨치는 것은 돈오요, 점점 성화(聖化)되는 것은 점수이다. 그러나 그러한 수행은 바른 길이 아니며 항상 의심이 따른다고 하였다.
<權 奇 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