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한국의 그리스도교/한국그리스도교의 교파

한국그리스도교의 교파〔개설〕

편집

韓國Christ敎-宗派〔槪說〕가톨릭 Catholic 교파(敎派:Denomination)라는 용어는 18세기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나 보편교회의 특성을 지닌 천주교회는 세계 어디에서나 교파라는 관념에서의 분리적·파벌적 교단조직은 없다.

다만 교회의 조직을 그 존재형태와 활동기능에서 재속교회(在俗敎會)와 수도교회(修道敎會)로 구분하는 경우가 있었다. 전자는 실제로 사회 속에서 신자들의 영신생활(靈信生活)을 지도함을 목적으로 하는 교회로, 주교·신부가 영도하며, 각지에 산재해 있는 성당(聖堂:정식으로는 天主敎會라 부른다)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활동을 말한다.

후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복음적 권유를 실천하기 위하여 부름(召命)을 받아, 청빈(淸貧)·순명(順命)·동정(童貞)을 충실히 서약(誓約)하고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다는 목적에서 특별한 봉헌활동(奉獻活動)을 펴는 수도회(修道會)로 된 교회를 말한다.

일생 동안 인간적 애정과 물질적 선과 자기의 개체의지(個體意志)를 오로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께 바치는 수도회는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며, 또한 그것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은서자적(隱棲者的) 봉쇄수도회(封鎖修道會)에서의 자기 완성으로부터 사회참여적인 재속수도회(在俗修道會)로의 이행이 있었고, 수도자(수사·수녀)뿐만 아니라 여성 수도자들의 조직인 수녀원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수도교회의 활동은 매우 다양하다. 모든 수도회는 소속 수도자들에게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기 생애를 바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또한 신비체(神秘體)의 이익을 위하여 행하는 특별한 직무의 수행을 의무화하고 있다. 그들은 전교·성무·지원·교육·의료·사회사업은 물론 매스컴이나 노동문제에 이르기까지 각 방면에 걸쳐 활동하며, 말보다 실천하는 모습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특별한 사도직(使徒職)을 행하며 성성(成聖)에 헌신하고 있다.

한국에는 재속교회로서의 활동을 담당한 전교단체(傳敎團體)와 수도교회 활동으로서의 수도회 조직이 해외로부터 도입되어 각기 엄격한 회칙에 따라 자기 소임을 다하고자 활동하고 있다. 밖으로부터의 전교 없이 학문적 연구결과로 자율적인 교회의 창립을 본 한국천주교회였으나 교정상(敎政上)으로는 중국 북경교구(北京敎區) 관할지역의 교회였다.

그러나, 1931년 9월 9일 조선교구(朝鮮敎區)의 설정을 봄으로써 한국천주교회는 중국교회의 예속적 처우에서 독립적인 교회로의 교법상(敎法上)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고, 조선교구에 대한 전도와 사목(司牧)의 권한이 파리 외방교회(La Societe des Etrangeres de Paris)에 위임되었다.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전교활동을 펴온 전교단체는 그 밖에 콜롬바노 외방전교회(St. Columban Foreign Mission Society)와 메리놀 외방전교회(Catholic Foreign Misssion Society of America)와 수도회인 성분도수도회(Order St. Benedict)이다.

프랑스계의 파리 외방전교회는 1831년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소속 성직자의 순교자를 내면서 한국교회를 키워왔다. 일제의 탄압정치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교세가 자라고 있던 조선교회의 전교(傳敎)를 요청받은 메리놀회는 1923년, 콜롬바노회는 1933년에 한국으로 진출하여 각기 평안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전교활동을 폈다.

이보다 앞서 분도수도회는 구한국 말기인 1909년에 요청을 받고 한국에 진출하여 함경도와 만주, 간도지방의 전교를 담당하였다. 이들 네 전교 단체는 값진 희생을 치러가면서 한국천주교회를 발전시켰고,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여 한국교회를 한국성직자에 의한 교회로 육성한 간 결과, 오늘날에는 한국인 성직자들에게 협조하는 형식이기는 하나 아직도 전교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남성만의 수도회와 여성만의 수녀회가 각기 다양한 활동을 펴고 있다.

이들 수도단체는 대부분 외국에 존재하는 수도조직이 한국으로 진출하여 활동을 펴온 것들이지만, 한편 복자수도회(福者修道會)나 복자여자수도회 또는 성가회(聖家會) 등 한국에서 조직된 것들은 이채로운 존재이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분도수도회와 예수회이다. 교회의 모든 수도회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분도수도회는 한국교회에서도 역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08년 한국에 진출한 후 함경도와 만주의 간도 지방 전교를 담당하는 한편 함경남도 덕원(德源)에 대수도원을 마련하고 일선포교·수사교육·묵상지도와 출판사업 등에 힘써왔다. 1946년 북한에서의 교회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경상도 왜관(倭館)에 대수도원을 마련하여 활동하고 있다. 한편 동양 전도의 선두에 섰던 전통을 가진 예수회는 오늘날 사도직수도회(使徒職修道會)로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회원들의 높은 교양을 배경으로 교육활동을 중심으로 해서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오늘날 전세계에는 예수회가 경영하는 대학이 300여 개나 있다. 동회는 1954년 한국에 진출하였고 1960년부터 서강대학(西江大學)을 경영하고 있다.

한편 여자수도회의 활동도 활발하다. 현재 한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도단체는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도회를 위시하여 30여 개에 이르고 있다.

1696년 프랑스 파리교회에서 창립된 사르트르 성바오로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888년의 일이었으며, 어느 수녀원보다도 먼저 한국에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 후 오늘날까지 근 100년간 수도회 창설의 사명을 지키기 위해 고유사업 활동을 피하고 재속 사목활동의 말없는 뒷받침을 담당하여 주교·신부들의 필요한 일에 적극 봉사해 왔고, 새로 한국에 진출하는 여자수도회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내의 여러 여자수도회는 교회의 전교 활동과 성무(聖務) 집행에 적극 협력하는 한편, 양로원·고아원·영아원이나 진료소 등을 통한 사회사업, 병원·약국경영에 의한 의료사업,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의 교육 사업은 물론 기숙사 경영·기술지도·출판물 보급 등등의 사업을 통해 사회에 도움을 주는 한편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의 개선을 실천하고 있다.

<李 元 淳>

프로테스탄트

편집

Protestant

현재의 한국 프로테스탄의 교파 형성은 역사적으로 세 가지 근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외래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이식(移植)한 서양의 재래교파들이 있고, 둘째로는 이 외래교파들 가운데 분열되어 생긴 교파들이 있다. 이 경우, 분열된 교파들 사이의 차이는 극히 말초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때가 오면 재연합이 용이한 것이 많다. 예를 들면 몇 갈래의 장로교회들을 들 수 있다. 셋째로는 기성 교파의 내적(內的) 분열이라기보다는 소수의 신앙동지들이 규합하여 형성된 교파들이 있다.

이러한 교파들 가운데는 신학적으로 건전한 교파도 있지만 소위 신흥종교의 범주에 속하는 교파들은 그리스도교의 진리 해석에 있어 큰 차이를 보여 그리스도교 교파로서의 인정 문제가 가끔 논의된다. 그 예로서 전도관·통일교회·동방교회(일명 개혁장로교회) 등을 들 수 있다.

(1) 1885년 이후로 서양에서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와서 1945년까지 분열 없이 존속한 교파들은 아래와 같다. 미국의 남·북 두 장로회선교회와 캐나다 및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두 장로회선교회들이 연합하여 세운 조선예수장로회, 미국 남·북 두 감리회선교회들이 연합하여 세운 조선감리회, 그 밖에 침례교회·안식일 예수재림교회·성결교회·구세군 및 성공회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 기간에 동지적 규합으로 생긴 교파로서는 복음교회와 조선기독교회를 들 수 있다.

(2) 1945년 이후 새롭게 서양에서 수입된 교파들이 많이 늘어났다. 또 해방 후 한국 교계는 과거보다 진보적인 신학사상의 도입과 교계의 정치적 요인 때문에 기성 교파 안에서 분열이 생겨 교파의 수가 많이 늘어 났다. 또 부흥운동의 결과로 기성 교회에서 이탈해 나간 신도들의 규합으로 형성된 교파들이 많게 되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주요 교파들은 다음과 같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파)·한국기독교장로회·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파)·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파)·대한예수교장로회(호헌파)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보수)·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파)·기독교대한감리회·예수교대한감리회·예수교대한감리회·기독교대한성결교회·예수교대한성결교회·구세군대한본영·대한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기독교한국침례회와 기독교복음침례회·기독교남침례회·기독교대한 하느님의 성회·대한예수교오순절성결회 그리고 대한기독교 하나님의 교회 총회·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그리스도교회협의회·한국루터선교회·기독교대한복음교회·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대한기독교나사렛교회·국제순복음교단한국총회와 그 밖의 많은 교파(敎派)가 있어 신교는 가히 난맥상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3) 교회의 활동면에서 보면,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은 각각 자율적 체제로 운영과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협력을 원하는 교파들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가입해서 출판·교육·사회봉사 등의 사업을 연합해서 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파·대한기독교장로회·기독교대한감리회·대한성공회·구세군대한본영 및 기독교대학복음교회가 이 협의회의 회원 교파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 협의회는 세계교회협의회라는 국제 기구에 가입되어 국제적인 기독교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 밖의 국내 교파들은 비교적 보수적인 신앙사상을 가지고 있다.

각 교파는 각각 신학교를 가지고 교역자를 양성하고 있어서 신학교 수는 상당히 많다. 그 중에서도 주요 신학대학은 한국신학대학·장로회신학대학·서울신학대학·감리교신학대학·연세대신과대학·대전감리교신학대학·고려신학대학 및 삼육신학대학 등이며 대학원을 가진 신학대학은 한국신학대학·연세대신과대학(교파연합) 및 장로회신학대학 등이다.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은 한국선교 초기부터 현대교육에 주력하여 왔고 교회 산하에 있는 중고등학교 및 초등학교의 수는 상당히 많다.

대학의 수는 전부 20여 곳, 중고등학교의 수는 120여 곳이다. 이 학교들은 실질적으로 자급하는 교육기관들이며 교파나 개체교회의 재정적 도움을 받지 않고 있다.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은 개체교회의 유지와 활동을 위한 재정은 자급하고 있으나 교파 수준의 사업에 있어서는 아직도 외국 교회로부터 선교비를 도움 받고 있다. 그러나 원조의 액수는 점차 줄어가고 있어서 멀지 않아 완전히 자급하는 날이 올 것이다. 한편 교세가 큰 예수교장로회 통합파·감리교회·기독교장로회 등 예수교장로회 합동파는 일본·대만·파키스탄·브라질·태국·인도네시아 등지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다.

이것은 이 교회들이 조달하는 선교비로써 하는 사업이다. 이렇게 하여 한국 교회는 선교와 원조를 받는 교회가 아니라 이제부터는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이웃 교회를 돕는 교회가 되고 있다.

가톨릭의 교파

편집

한국천주교

편집

韓國天主敎

1783년(正祖 7년) 이승훈(李承薰)이 세례를 받고, 1784년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활동을 시작한 이래 수많은 박해와 수난 속에서도 부흥·발전하여 왔으며, 1969년 4월 29일 김수환(金壽煥) 대주교가 추기경(樞機卿)에 임명됨으로써 국제적인 교권(敎權)을 갖게 되었다. 이후 1998년 6월 29일 정진석 대주교가 서울대교구 제13대 교구장 및 평양교구장 서리에 서임되었다.

현재 사회문제와 노동문제(勞動問題)에 깊은 관심과 문제의식을 갖고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며, 교세는 770개소의 교회, 교직자 1,540명, 신도수 2,400,000명에 달하고 있다.

한국희랍정교회

편집

韓國希臘正敎會

1897년 1월 제정(帝政) 러시아의 교무원 암부로시 신부가 내한하여 임시 성당을 설립하고 노국정교회(露國正敎會)라 칭하였으나, 러시아 혁명 이후 선교비 조달이 중단됨에 따라 학교 및 자선사업도 중단되어 교세(敎勢)는 미약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1956년에 미국 뉴욕 소재 남북미(南北美) 희랍정교 대관구(大管區) 산하에 소속하게 되었다.

신앙의 근원은 신·구약과 사도에게 계승된 성전(聖典)에 의거한다.

프로테스탄트의 교파

편집

대한예수교장로회〔통 합〕

편집

大韓-敎長老會〔統合〕 1885년 4월에 내한한 언더우드(H.G.Underwood 1859∼1916) 목사, 같은 해 6월에 내한한 헤론(J.W Heron) 목사 부부, 1884년 9월에 내한한 알렌(H.N. Allen 1858∼1932) 부부 등 5명이 북장로회 선교사회를 조직함으로써 선교가 시작되었고, 1901년 선교사와 한국인 총대가 연합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를 조직하고, 1912년 9월 1일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가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1959년의 합동·통합측의 분열로 인해 1960년 2월 17일 새문안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를 조직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개신교 최대 교파의 하나이다. 교리로는 12조항의 신조를 갖고 있으며 사도신경,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서, 성경대소 요리문답을 따르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 동〕

편집

大韓-敎長老會〔合同〕 본래 하나였던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59년에 이르러 세계교회협의회(WCC:World Council of Churches)가 용공적(容共的)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내분을 겪고, 그 해 11월 24일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를 열었으나 W.C.C.의 노선을 반대하는 승동파, 즉 합동파측 인사들이 1960년 12월 13일에 따로 총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들은 분열의 아픔을 안고서도 계속 발전하여 대교파의 하나로 성정하였으며, 교리는 통합측과 같다.

기독교대한감리회

편집

基督敎大韓監理會

1885년 4월 5일 미국 북(北)감리회 선교회에서 아펜젤러(H.G.Appenzeller, 1858∼1902) 목사 부부와 스크랜턴(W.B. Scranton, 1856∼1922) 의사 부부, 그리고 스크랜턴 목사 모친이 경기도 제물포에 도착하여 교육과 의료 사업에 착수하면서 선교가 시작되었다.

1895년 10월에는 윤치호(尹致昊, 1865∼1945) 박사의 청원에 의해 남(南)감리교회 동양선교사업관할자 헨드릭 감독과 중국 선교사 이덕 박사(Rev.Dr.C.F.Reid)를 파송(派送)하여 남감리회 선교를 시작하였고, 1930년 12월 두 감리교회는 각각 본국 모교회(母敎會) 총회의 승낙을 얻어 총대 100명으로 구성된 역사적인 제1회 합동총회를 열어 명칭은 '기독교 조선 감리회'라 하고 전문 8조로 된 교리적 선언을 제정·채택하였으며, 양주삼(梁柱三, 1879∼ ? ) 목사가 제1대 총리사(總理師)로 선출되었다. 창설 이후 일제(日帝)의 억압 속에서 수난을 겪다가 해방 이후에는 재건파(再建派)와 부흥파(復興派)로 분열되어 싸우던 중 1949년에 합동총회가 개최되어 '기독교대한감리회'로 호칭하고, 여러 정치적 문제가 많이 깔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한편 제도를 다시 정비하여 차츰 발전의 기틀을 잡아간 결과 오늘날에는 대교파의 하나로 성장했다.

이들은 8개조의 감리교 교리적 선언에 의해 특색있는 스스로의 신앙을 고백하고, 18세기 웨슬레(J.Wesley 1703∼1791)의 경건한 복음주의 신앙을 그 기본 신앙으로 삼고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편집

韓國基督敎長老會

이 교단이 탄생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52년 4월 29일 대구에서 열린 총회의 결의였다.

즉, 조선신학교를 총회 산하 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김재준 목사를 제명하고 서고도 박사와 함께 두 교수의 사상을 찬성 지지 선전하는 자는 처벌키로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을 부인하고 고등비판(高等批判)을 시도하는 신학 방법론 때문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조선신학교와의 분립은 불가피하였다.

1953년 6월 10일 마침내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호원총회(護憲總會:법통총회)를 선언하고 1954년 6월 10일 '대한기독교장로회'로 개칭하게 되었다.

그 후 발전을 거듭하여 신학적 공헌뿐 아니라 사회참여에도 항상 앞서는 교단이 되었으며, 현재 큰 교파를 이루고 있다.

이 교파는 전통적인 신앙고백과 다를 바 없는 교리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최근에 발표한 한국적인 신앙 선언은 괄목할 만한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신학파

편집

大韓-敎長老會 高麗神學派1946년 출옥 성도를 중심으로 하여 한상동 목사는 교회의 정화와 재건을 추진하였으나 문제가 발단되어, 그 해 9월 20일 고려신학교(高麗神學校)를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1948년 9월 경남(慶南) 노회(老會)는 결국 고려신학교의 인가 취소를 결정적으로 단행하고, 1949년 4월의 제35회 총회도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결의를 하게 되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에서 1951년 5월 24일 총회가 속개(續開)되었는데, 고려신학교파가 정식으로 정죄(定罪)됨에 따라 고려파는 출옥 성도를 중심으로 경남법통노회(慶南法統老會)를 조직하고 갈라져 나갔다.

이들은 칼빈주의에 입각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교리 및 신조로 삼고 있으며,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과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을 철저히 믿고 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편집

基督敎大韓聖潔敎會

1907년 5월 30일 동경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김상준과 정빈 두 사람이 종로 염곡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하고, 1933년 4월 5일에는 제1회 창립총회를 열고 발전하던 중, 1943년 2월 29일 성결교회 교리가 일본 국체(國體)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해산되었으며, 해방이 되자 다시 교회를 재건하여 총회를 재조직하고 1949년 4월 이름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변경하였다.

1961년 4월 14일 연합기구(NCC 및 NAE)에서의 탈퇴문제로 교단이 분열, 김음조·황성택 등이 '예수교성결교회'를 조직하였으나, 1965년 7월 23일 분열되었던 교단이 전성도들의 기도와 양측 지도자들의 노력과 인내로써 역사적 합동을 성취하였다. 교리 중 특히 사중복음(四重福音), 즉 중생·성결·신유·재림 등은 이 교파에 특징적인 것이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

편집

-敎大韓聖潔敎會

1965년에는 임시 총회까지 열어 예수교 총회 해체(解體)를 결의하고 법대로 합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강경파 지도자들이 합동총회를 불법시(不法視)하고, 서울 중앙교회와 독립문교회를 중심으로 여전히 분파교단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기독교 개신교파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복음주의를 신조로 삼고 있다.

구세군대한본영

편집

救世軍大韓本營

1878년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1829∼1912)가 영국에서 구세군(Salvation Army)을 조직한 지 30년 만인 1908년, 런던 만국 본영(萬國本營)으로부터 허가두(許嘉斗) 정령(正領) 일행이 한국에 파견되어 구세군 사업을 시작하였다. 해마다 성탄절 때면 자선 냄비로 모금하여 사회사업에 힘쓰고 있는 교파이다. 발전 도상에 있는 교단이며, 교리로서는 웨슬레 신앙 내용에 의한 11개 신조(信條) 조항을 기본 교리로 삼고 있다.

한국침례회연맹

편집

韓國浸禮會聯盟

1890년 12월 8일 캐나다 토론토(Toronto) 출신인 말콤 시 펜위크(Malcom C. Fenwick) 선교사가 내한(來韓)함으로써 기독교 침례회의 한국 선교가 시작되었다.

1921년 일본의 강요에 의해서 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로 개칭되었으나, 해방이 되자 1949년 대한기독교침례회(大韓基督敎浸禮會)로 변경하고 교회 재건에 주력하였다.

1959년 4월 총회에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총회(大韓基督敎浸禮會聯盟總會)가 이탈·독립하여 분열된 상태를 이어오다가 1968년 4월 16일 총회에서 대한기독교침례회 연맹총회와 기독교대한침례회가 합동하여 '한국침례회(韓國浸禮會)'로 개칭하기에 이르렀다.

교리로는 10개의 연맹 교리를 갖고 있다. 특히 교회와 국가의 완전 분리 및 종교의 절대적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편집

基督敎大韓-聖會

1914년 미국 미주리(Missouri)주 스프링필드(Springfield)에서 조직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1932년 8월 박성산·배부근 두 목사가 일본에서 귀국하여 오순절(五旬節) 신앙운동을 시작하고, 해방과 함께 체스넛 선교사가 내한함으로써 본격적인 선교가 개시되었다.1953년 4월 8일 제1회 창립총회를 가짐으로써 '기독교 대한하나님의 성회'가 발족되었다. 교리의 특색은 성령론(聖靈論)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한국그리스도의 교회(유악기파)

편집

韓國-敎會(有樂器派)

1935년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체이스 선교사가 내한하여 최상현·성낙소 두 목사와 함께 서울에 6개 교회를 세우고, 1939년 힐 선교사가 내한하여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하여 남한 일대에 교회를 설립한 이후 발전 도상에 있다.

교리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還元運動)과 침례(浸禮), 그리고 매주일마다 성찬(聖餐)을 가지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그리스도의 교회(무악기파)

편집

韓國-敎會(無樂器派)무악기파의 선교는 1930년 동석기가 함남 북청에서 교회를 설립함으로써 시작되었고, 1954년 데일리 리치슨이 초대 선교사로 내한하여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주로 성서가 중심 교리이고 예배시에는 악기(풍금·피아노 등)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대한기독교 나사렛교회

편집

大韓基督敎-敎會

1860년 이후 미국 전역(全域)에서 일어났던 성결부흥운동(聖潔復興運動)의 결과로 형성된 성결교단(聖潔敎團) 중의 한 단체로서, 1948년 6월 정남수(鄭南洙) 목사가 미국 나사렛 교회 외국선교국장과 상의하여 한국에 나사렛교회의 전도사업을 하기로 결정하였고, 1954년 5월 미국인 오은수(吳恩洙) 목사가 내한하여 사직동에 신학원을 개설하고 교회부흥에 힘쓰고 있다.

대한예수교개혁장로회

편집

大韓-改革長老會

1965년 5월 15일 개혁신학교가 부활하여 총노회(總老會)를 구성하게 되었고, 그 해 9월 15일 총노회를 서울·경기·강원 등 세 노회로 분립(分立)하여 총회를 조직하였다.

교리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서를 그대로 믿고, 칼빈주의에 입각한 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193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을 사용하고 있다.

루터교선교회

편집

-敎宣敎會

1958년 1월 13일에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한국루터교선교회를 조직하고, 9월 26일에는 지원용 목사 부부가 귀국하여 선교사와 합동으로 전도를 시작하였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

편집

基督敎大韓福音敎會

1935년 12월 22일에 복음교회가 창설되어 초대 감독에 최태용 목사가 선출되었고, 6·25전쟁으로 최태용·백남용 목사가 순교했다. 1966년 한국그리스도교 교회협의회(NCC)에 가입한 이후 발전 도상에 있다. 7개조의 교리를 갖고 있다.

예수교대한감리회

편집

-敎大韓監理會

1962년 8월 28일에 창립되어 초대 감독에는 진덕성 목사가 선출되었다.

1963년 8월 22일에 국제그리스도연합회(ICCC)에 가입했고,1965년에는 미국 개혁감리회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교리는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교리적 선언'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다만 제7조를 "우리는 예수의 재림과 영원한 천국과 영생을 믿노라"로 바꾸었다.

그런데 1967년 5월 예수교대한감리회 제5회 연합회에서 진덕성 목사 불신임안이 가결되어 1967년 6월 14일 그가 물러나면서 새로이 교단을 조직, 국제 그리스도교 연합에서 탈퇴하였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편집

第七日安息日-再臨敎韓國聯合會

1904년 6월에 처음으로 한국 땅에 상륙하였으며, 1943년 일본 정부의 탄압으로 교회가 폐쇄되고 재산이 몰수되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다시 교단을 재건하고 총회를 조직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집총거부(執銃拒否)·침례(浸禮)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대한기독교 하나님의 교회

편집

大韓基督敎-敎會

하나님의 교회의 전신(前身)의 구성원은 동양선교회(東洋宣敎會) 성결교회의 교역자(敎役者) 및 신도들이었다.

신앙과 정치 이념의 차이로 말미암아 1936년 성결교회 제2차 총회를 계기로 독립, 같은 해 7월 12일 '하나님의 교회'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대한성공회

편집

大韓聖公會

로마가톨릭과의 정치적인 문제로 분리되었던 영국 성공회는 1890년 9월 29일 영국 종군 주교(從軍主敎) 고요안의 인천 상륙으로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1915년 첫 한국인 신부로 김희준 신부가 서품(敍品)되었으며, 1965년 서울·대전 양교구(兩敎區)로 분할, 서울교구장이 된 이천환(李天煥) 주교가 첫 한국인 주교로 성좌(星座)하였다. 주교·신부·부제(副祭)의 세 성직이 있으며, 7성사(七聖事)를 통하여 성신의 은총을 입는 것을 기본 교리로 한다.

여호와의 증인(워치타워 성서책자협회)

편집

Jehova-證人(Waatch Tower 聖書冊子協會)

이 단체는 새로운 종파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리를 부흥시키려는 목적으로 찰스 테이즈 러셀에 의해 1884년 법인체로 설립되었다.

한국에 들어오기는 1912년 R. R. 홀리스터 선교인의 내한에서 비롯되었다.

전도관(한국예수교전 도관부흥협회)

편집

傳道館(韓國-敎傳道館復興協會) 1955년 4월 4일 박태선(朴泰善) 장로를 중심으로 한 한국예수교부흥협회로서 발족되었다. 신앙의 근거를 오직 성서에 두고, 그것의 무류성(無謬性)을 믿으며, 오로지 성경 말씀에 입각한 의로운 생활을 신조로 한다. 전국 주요 도시에 전도관을 두고 경기도 소사와 덕소에 신앙촌을 건립하여 집단적인 신앙운동을 하고 있다. 1959년 3월 한국예수교총회를 개칭하였다.

통일교(세계기독교통 일신령협회)

편집

統一敎(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 하나님을 인간의 아버지로 믿으며, 예수가 한국에 재림하여 세계가 하나의 대가족 사회로 통일될 것이라는 주장 아래 1954년 5월 교주인 문선명(文鮮明)에 의해 창설되었다. 특히 그의 합동결혼식은 이색적인 것이어서 여러 차례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해외에도 선교조직과 국제협력기구를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무수한 군소(群小) 교파들과 신흥 종파들이 산재해 있다. 교육부에 등록된 교파수만 해도 수십 개를 헤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