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동학-천도교/동학의 교파

동학의 교파〔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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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敎派〔槪說〕

동학의 교파는 정통교단과 방계교단, 그리고 변성(變成)교단으로 구분된다. 정통교단은 교법의 전수 과정이 정상적이고 현재의 교리와 신행에 있어서 동학의 정통을 공식적으로 이었다고 볼 수 있는 교단이며, 방계교단은 동학 정통파의 밖에서 교법의 공식적인 전수 과정이 없이 자기 나름으로 창교한 교파 혹은 정통파 내부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면서도 동학교단이라고 자처하는 교단들이다.

변성교단은 동학에서 파생되었거나 근기(根基)를 동학에 두고 만들어진 교단들이 뒤에 종교적 내용을 크게 고쳐서 동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동학에서 이탈한 교단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단은 표면상 동학과 다른 것처럼 주장하지만 본질적인 내용은 동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교단들이다.

일반적으로 동학에 분파가 발생한 것은 1905년 3세 교주 손병희(孫秉熙)가 천도교(天道敎)를 선포하자 시천교(侍天敎)가 여기에서 분립한 데서부터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동학의 정통이 분파되기 시작한 사건일 뿐이고, 방제교단이나 변성교단까지 포함시켜 고찰하면 분파의 시기는 더욱 소급된다. 동학의 최초 분파는 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생존시에 일어났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혁명을 둘러싼 지도층의 이견(異見)이 최시형의 북접(北接:경상·충청도 지방)과 서장옥(徐章玉)의 남접(南接:전라도 지방) 사이에 예리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립은 경상·충청도의 북접과 전라도의 남접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남접에서 발생한 회은도(回隱道)와 청림교(靑林敎)·동학교(東學敎)는 북접에 대항하는 교파로 등장하였다. 이 무렵 전라도 지방에서 발생한 증산교(甑山敎)와 남학(南學)은 표면상 동학(東學)과 다른 교단인 것 같았지만, 그 내용은 동학이 새로운 방향으로 출발하려는 동학의 변성교파(變成敎派)이다.

증산교는 동학의 교리에 새로운 교리를 첨가하여, 혁명에 실패하고 지도자를 잃어 실의에 빠진 동학의 남접 교도들을 흡수하였던 것이다.

남학은 사실상 최제우 생존시에 동학을 모방하여 시작된 교단이었으나, 별다른 명칭 없이 남접 내에 존속되다가 명칭을 내세운 것이었다.

북접 계통의 최초 분파는 북학(北學)이라는 교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교단은 최제우의 직계자로서 북부 지방에 정배당한 백사길(白士吉)·이내겸(李乃謙)·김리기(金利器)를 추종하는 신도들이 남접계의 남학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북접의 정통파인 최시형에게도 대항한 것이었다.

북접에서 발생한 무궁도(無窮道) 등도 이러한 북접의 분열이었다. 그러나 북접의 결정적인 분열은 전술한 1905년 시천교의 분립이다.

시천교는 다시 분열되어 상제교(上帝敎:현 天眞敎)를 파생시켰다. 이 세 교단은 모두 북접의 정통을 주장한다. 이와 같이 분열된 교파 중에 정통파에서 이탈, 정통파와 대립하고 있는 교파들은 남접에서 발생한 것이나 북접에서 발생한 것이나 모든 방계교파로 취급된다.

동학의 교파가 분립된 주요한 원인은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지도층 인물들의 교권욕이고, 둘째는 교체조직이나 교단 운영문제로 인한 내분이며, 셋째는 교리·신행에 대한 이견과 불만이고, 넷째는 동학의 교리를 모방한 자기도각(自己道覺)을 내세우는 창교(創敎)나 기업성이 개재한 창교이다. 남접과 북접의 분열, 정통교파의 자기분열이 거듭된 것은 주로 첫째와 둘째의 원인에 의해서였고, 방계교단·변성교단들의 분립은 주로 셋째·넷째의 원인이었다.

각 교단간에는 근본신조에 있어서는 공통적인 것이 있으나, 그 신조에 대한 해석이나 신행, 그리고 교체에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공통적인 신조는 다음 네 가지이다.

첫째는 동학의 3대종지(三大宗旨)인 보국안민(保國安民)·포덕천하(布德天下)·광제창생(廣濟蒼生)을 종지로 삼고 있는 점, 둘째는 '천개벽(後天開闢)'에 따르는 지상천국(地上天國)·조화선경(造化仙境)의 건설, 그리고 셋째는 '신앙통일'을 표방하여 유(儒)·불(佛)·선(仙)의 합일을 주장하는 것이며, 넷째는 동학 신앙의 핵심인 시천주의 실현을 목적으로 삼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 공통신조는 교단에 따라 관석(觀釋)이 다르고, 이에 따라서 신행과 교체의 유형 차이가 생긴다. 후천개벽의 신조는 그 시기와 개벽의 형식이 교단에 따라 다양하다. 후천선계·지상천국은 계룡산의 신도(新都) 건설이라고 믿기도 하고, 미륵불의 용화세계가 실현될 것으로 믿기도 한다.

신앙통일의 신조는 유·불·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무교(巫敎) 등 국내외 모든 종교의 통합을 주장하기도 하고, 유·불·선 중 어느 하나를 주로 하여 다른 종교들을 포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시천주의 신앙에 있어서도, 인간에 내제하는 천주를 길러야 한다는 천도교의 주장과, 객관적인 천주의 감응을 주장하는 상제교의 신앙태도, 구천상제의 강림을 희구하는 증산교의 신앙태도가 다르다.

신행방법에 있어서도 주축(呪祝)의 신비만을 중시하는가 하면 주문(呪文)이나 주축을 '시천주(侍天呪)' 외에 첨가시키는 등, 파에 따라 다르다. 혹은 시천주가 5주(五呪:남학의 경우)로 바뀌기도 한다.

동학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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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分裂

교조 최제우는 수제자 최시형에게 북접도주를 명하고 교통(敎統)을 전수하는 뜻을 밝힌 바 있어 최시형이 2세 교주가 되었다. 최시형은 손병희에게 법도주(法道主), 손천민(孫天民)에게 경도주(經道主), 김연국(金演局)에게 성도주(聖道主), 박인호(朴寅浩)에게 신도주(信道主)를 임명하고, 특히 손병희, 손천민·김연국이 합석한 자리에서 손병희를 주장으로 하라고 명하여 손병희는 1898년 최시형이 순교한 후 교주가 되었다.

그 후 손병희는 일본에 건너가 동학 부흥의 기회를 살피다가 1905년 천도교(天道敎)라는 교명을 선포하고 교리·교체를 정비하면서 그동안 동학의 부흥운동에 앞장선 일진회장 이용구의 친일적인 정기 참여를 억제하였다. 이에 반발한 이용구는 천도교를 이탈, 천도교우 동지구락부를 만들고, 이 단체가 1906년 시천교(侍天敎)로 개명하였다.

시천교는 1911년 교장(敎長) 이용구가 사망한 후 김연국과 재정적 실권을 잡은 송병준 사이에 불화가 생겨, 김연국이 자기를 따르는 교도들을 이끌고 분립, 제세교(濟世敎)라는 교명을

쓰다가 1926년 상제교(上帝敎)라고 개칭, 1927년 계룡산 신도안에 본부를 옮겼다.

이로써 동학의 정통은 셋으로 분열되었다.

한편 천도교 대도주 박인호는 교리강습소, 초·중·전문학교를 설치하고 교지를 발행하는 등 교화사업에 힘써 약 300만의 교도를 얻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으로 손병희 등 주축 인물들이 체포되고 일제 탄압이 심해지자 급격히 쇠약하여, 1921년에는 교통전수제도 등을 개혁하려는 혁신운동을 기점으로 분쟁이 생겼다. 1922년 손병희가 사망하고 박인호가 교주직에서 물러나자 요직쟁탈까지 겹쳐 천도교연합회(지방분권제를 주장한 오지영의 혁신파), 천도교 중앙총부(박인호를 4세 교주로 인정하자는 오영창파), 중앙총리원(박인호의 4세 교주 인정을 거부하는 최린의 신파), 통일기성회(천도교구파)로 분열되었다.

시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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侍天敎

시천교는 친일 행위로 국민의 지탄을 받고 동학의 위신을 크게 실추시켰다. 1920년 송병준이 대주교직을 사임, 박형채가 교주가 되었다.

시천교는 한때 천도교보다도 교인이 많았으나 1913년 김연국이 분립한 후부터 교세가 급격히 쇠미해졌다. 해방 후 신·구 양파의 내분이 계속되다가 마침내 얼마 남지 않은 대부분의 교인과 재정이 천도교에 흡수된 듯하다.

상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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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帝敎

상제교가 본부를 계룡산으로 옮긴 것은 정감록 비결을 이용한 것으로 여기서 후천개벽에 의한 새왕국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어 한때 교도 수십만의 교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상제교의 개벽설이 맞지 않자 많은 교인들을 잃고, 1931년 황기동이 교단혁신운동을 일으켰다가 출교당하여 천불교를 만들었다.

1944년 김덕경이 2세 교주가 되었으나 아우 김도경과 재산상속 문제로 분쟁이 발생, 덕경파와 도경파로 분립되었다. 이후 덕경파 내에서 1947년부터 상제교 구파인 유원섭이 상제교 정리본원(上帝敎正理本院)이라는 이름으로 분립하고, 1957년에는 박병선 등 상제교 신파가 대종원(大宗院)이라 개명하여 분립하였다. 1960년 김덕경이 교명을 천진교(天眞敎)로 개명하자 유원섭은 상제교 중앙본부라고 다시 개명하니 이를 상제교 구파라 한다.

동학의 방계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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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傍系敎團

방계교단은 천도교가 선포되기 전에 남·북접에서 파생된 교단, 천도교·시천교·상제교 등에서 파생된 교단, 그리고 타종교단에서 동학계로 전입한 것 등으로 분류되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회은도(回隱道) ―― 남접의 신도 중 전봉준의 혁명운동을 반대하고 수도에 전념하던 신도들의 모임이었으나 인멸되었다.

(2) 동학교(東學敎) ―― 최제우를 사사하던 김시종이 최시형을 반대, 남접도주라 자칭하고 안동에서 일으킨 교단. 그 교리·신행은 동학과 큰 차이가 없으나 신비적 경향이 있다.

(3) 청림교(靑林敎) ―― 임종현(林鐘賢)이 일으킨 교단으로 남접을 자칭하고, 유·불·선 <3달(三達)>의 도는 역(易)의 이(理)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한때 30만 교도를 가졌으나 곧 쇠퇴, 시천교와 천도교에 흡수되었다(이상 남·북접계).

(4) 선도교(仙道敎:일명 大道敎) ―― 우황(禹璜)이 선법(仙法)을 주로 하여 시작한 교단. 1928년 보천교 간부 이달호 등의 협력으로 대도교로 고쳐 포교하다가 해방 후 교주 양주학(梁柱學)이 시천교로 전입하였다.

(5) 제세교(濟世敎:일명 仙敎) ―― 해방 전 일본에서 천명교(天明敎)를 포교하던 천도교인 조일제(趙一濟)가 해방 후 귀국하여 성도교의 교리에 감복하여 시작한 교단. 처음 교명을 제세교라고 하였다가 뒤에 선교로 고쳤다.

(6) 도학교(道學敎) ―― 천도교 신파로서 천도교도인 최수정(崔守正)이 1959년 유·불·선을 체(體)로, 서양의 신(神)·철(哲)·과(科) 3학을 용(用)으로 하는 종합종교의 이념을 내세우고 동학의 방계교인과 각종 무종 무속숭신계 종교인들을 모아 계룡산 신도안에서 창교한 교단. 1971년 최수정 사망 후 인멸되었다(이상 천도교·상제교·시천교계).

(7) 수운교(水雲敎) ―― 최제우의 재생이라 자칭하는 이상용(李象龍)이 1920년 동학의 교리를 불교적으로 해석하여 세운 교단.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신조로 하지만 경천의 신행방법으로 예불(禮佛)과 주송을 병행하였다. 일본불교인 진종불교와 1934년 합세하자 도주 박성호는 대동교(大同敎)라는 명칭으로 분립하였다.

(8) 성도교(性道敎) ―― 수운교의 간부였던 이민제(李民濟)가 1923년 충남 예산에서 3역(三易:河洛靈)의 이치를 주장하고 창교한 교단. 1933년 이응종(李應鐘)이 교계를 이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학의 변성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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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變成敎團

변성교단에는 남학·북학·광화교(光華敎)·대화교(大華敎)·증산교(甑山敎)·백백교(白白敎)·인천교(人天敎)·천명도(天命道)·천불교(天佛敎)·진동학제화교(眞東學濟化敎) 등이 있다.

(1) 남학 ―― 1861년 완주군 운주(雲州)면에서 이운규(李雲圭)가 동학을 모방하여 만든 교단으로 후천개벽의 시기를 계산하는 '정역(正易)'이라는 역(易)을 가지고 있다. 시천주 대신에 5주(五呪:음, 아, 어, 이, 우)를 사용하고 동학을 유교적으로 해석하였다. 현재 대종교(大倧敎) 등 10개 교단이 있다.

(2) 대화교 ―― 처음 동학교도 손은석(孫殷錫)이 제우교(濟愚敎)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다. 1920년 동학의 후천개벽사상을 미륵불 출세에 의한 용화세계의 개벽이라고 불교적으로 해석하여 용화교(龍華敎)로 개칭, 뒤에 대화교로 개명하였다.

(3) 광화교 ―― 남학의 분파로서 1908년 전북 진안에서 김치인(金致寅)에 의하여 오방불교(五方佛敎)라는 이름으로 창교되었다.

김치인이 처형된 후 김원배(金元倍) 등이 교단을 유지하다가 1930년 권순채(權珣采)가 청림교(靑林敎)인들을 규합하여 광화교로 개명한 후 대화교와 합작하였다.

(4) 증산교 ―― 1901년 강일순(姜一淳:호 甑山)이 전북 김제에서 창교하였다. 종지(宗旨)는 동학의 것과 같으나 강일순 자신이 구천상제의 화신이라고 주장하고, 최제우는 세례 요한으로 비유하였으며, 천지공사(天地公事)·운도공사 등의 새 교리를 설교했다. 주송 수련에는 시부 시천주 외에 태을주(太乙呪) 등 많은 주문을 썼고 동학의 영부(靈符)는 의통인패(醫統印牌)로 바꾸었다.

(5) 백백교 ―― 동학교도 전정예(全廷藝)가 1899년 동학의 교리를 변경하여 평북 영변에서 창교했다. 그는 스스로 후천세계를 개벽할 신천부님(新天父任)이며 신예수님이라고 자칭하였다. 주송에는 백의적(白衣的) 주문, 백마(白魔) 주문 등을 썼다.

1927년 전정예가 간음·살인 등의 죄로 처형되자 장남 전용주(全容周)가 인천교를 창설하고, 차남 전용해(全容海)가 백백교를 계승, 다시 10년 동안 비행(非行)을 일삼다가 관에 의해 처벌되고 교단은 해산되었다.

(6) 진동학제화교 ―― 처음 보화교(普化敎)의 교주 김명환과 불화로 이탈한 이한우(李翰雨)가 정읍에서 진동학이라는 이름으로 창교한 교단이다.

보화교는 보천교의 간부 김환옥이 만든 수운과 증산을 아울러 신봉하는 교단이다.

1958년 성도교(性道敎)에서 이탈한 김은재(金殷栽)가 진동학에 합세하여 성도교의 이론인 삼역대전(三易大典)의 이론을 차용한 후 진동학제화교라고 개칭, 포교해 오고 있다. 이 교단은 단군·최제우·강일순을 모두 신앙 대상으로 한다.

기타 천명도는 백백교의 간부였던 박종근(朴宗根)이 1925년에, 중심교는 시천교의 간부 조정욱이 세운 교단이었으나 현재 인멸되었다.

<李 康 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