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이 슬 람 교/이슬람교〔개설〕

이슬람교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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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lam敎-形成

이슬람교는 그리스도교 및 불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로서 역사적으로 크게 발전하여 현대 아시아·아프리카 세계에 있어서 가장 유력한 종교의 하나가 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적·문화적으로 우리나라와의 교섭은 직접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종교이다. 우리들의 이슬람교에 대한 이미지는 구미의 눈을 통한 것에 의해서 형성되어 왔다.

중세 유럽 세계에 대해서 선진적인 이슬람 과학·신학은 직접적인 교사의 관계에 상당하는 것이어서 외면적 적대관계에도 불구하고 이슬람문화는 가치적으로도 내재화(內在化)될 수 있는 것이었는데 19세기 이후 이슬람의 여러 지역이 식민지화됨에 따라서 이슬람은 유럽적 근대의 보편주의에 있어서, 말하자면 외재화(外在化)되어 파악되었다. 제2차대전 후의 식민주의 지배 붕괴나 신편성 속에서 유럽측에서는 이슬람교측에 대한 상대주의적 접근이 새로이 나타나 대등한 입장에서의 대화가 제창되기 시작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아직도 대화 이전의 상호불신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상황은 이슬람교에 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현대 아시아·아프리카의 모든 종교에 대한 우리들의 기성관념의 재평가가 오늘날 문제로 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중핵지대(中核地帶)는 역사적으로 가장 초기에 아랍=이슬람군의 정복하에 놓였던 서아시아·북아프리카일 것이다. 그것을 둘러싸고 11세기경부터 터키계 이슬람교도 지배자에 의해서 정복된 외연지대(外緣地帶)가 퍼져 있는데, 인도·중앙 아시아·아나톨리아의 여러 지역이 그것이다. 이보다 늦게 이곳들을 거점으로 한 해상무역에 의해서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에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

마그리브(Magrib:해가 지는 서쪽)에서는 지중해

연안 북아프리카의 이슬람이 사하라 사막을 넘어서 서부·중부 아프리카에 침투하여 후배지(後背地)와의 밀접한 교역관계를 주축(主軸)으로 했다. 그러나 이들 군사적 정복이나 교역망은, 그대로 '이슬람화(化)'의 외적 조건으로는 되어도, 바로 그에 의해서 이들 지역의 사회가 이슬람으로 개종(改宗)한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정치적·상업적 지배권의 확립에 훨씬 뒤져서 주민 사회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우가 역사적으로 일반적이다. 더구나 개종은 전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전(聖典)의 백성'인 유태 교도와 그리스도 교도, 나아가서 조로아스터 교도, 혹은 힌두 교도까지 정치적 복종을 조건으로 그들 자신의 사회적·종교적 일체성을 '즈임미'로서 보장받았다. 그리하여 그들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개종이 강제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오른손에 칼, 왼손에 코란' 등의 서구적 기성관념은 역사적 사실과는 전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다만 18∼19세기에 각 지역에서 일어난 '지하드' 운동의 일부에 타당한 일면이 있다). 이슬람교의 전도활동은 그것 자체로 많은 흥미가 있는 문제인데 이슬람의 정통적 엘리트인 '울라마(이슬람 학자)' 조직과는 별개의, 민중적 수피 세력에 의해서 잠행적(潛行的)으로 진행되어 마지막으로 표면화된 경우가 많다고 생각된다. 특히 식민주의하에서 현저하게 발전된 검은 아프리카의 이슬람화 현상에서 이것이 지적되고 있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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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lam敎-Christ敎-比較

매우 간략하고 도식적이지만, 일단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 검토해 둘 필요가 있다. 즉,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종교의 비교가 시도되고 있다. 먼저 <코란>과 <성서>, '마호메트'와 '그리스도'가 대응한다. 그러나 두 종교의 종교적 개념을 각자의 종교 구조에 의해 보다 명확히 비교·배치해 보면, 신의 살아 있는 계시의 중핵은,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 그 자체'이며, 이슬람교에서는 <코란>이다. 다음에 그리스도교의 '사도(使徒)'에 가까운 이슬람교의 개념은 '예언자 마호메트'이며, 예수 그리스도 및 그 사도들의 언행을 기록한 <신약성서(新約聖書)>와 근사한 이슬람교의 문건은 예언자 마호메트의 언행을 기록한 '하디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단(異端)에 대한 정통성(正統性)을 획득·확인받는 절차로서 그리스도교에서는 교회회의(敎會會議)를, 이슬람교에서는 '이지마(ijma')'를 들 수 있다.

이슬람교의 교의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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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lam敎-敎義體系

이슬람의 종교 교의체계는 <코란>·'하디스'·'이지마'의 삼각(三脚) 위에 성립한다. 일반적으로는 <코란>이 첫째 원천(源泉)이고 하디스는 그것을 보족(補足)하는 것이며 다시 '이지마'가 그것을 보조한다는 형태로 순서가 매겨진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신학·법학(마호메트 사후 100∼200년에 걸쳐 성립)에 있어서는 이 기본적인 순서가 역전되어 <코란>을 종합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서 '하디스'가 설정되고 다시 양자를 최종적으로 종합하여 정립시키는 것으로서 '이지마'가 설정되어 있다. 즉, '이지마'에 의해 <코란>·'하디스'가 비로소 근거가 부여되는 체제이다. 거기에서 우선하는 것은 '이지마'의 원칙이며, 다음에 하디스가 있고, 끝으로 <코란>이 수동 형태로 존재한다. 신학·법학의 체계화 이래 이슬람교는 자기완결화(自己完結化)되어 교의 발전 여지가 후세에 올수록 좁아진다는 견해를 취했다.

이슬람교의 교의와 실태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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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lam敎-敎義-實態-關係

그러나 모든 교의체계를 갖춘 성립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의 경우도 체계화되고 형식합리화된 교의가 그대로 종교생활의 실태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교의 종교사적 전개는 그 사이의 차가 특히 현저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교의를 곧바로 실태와 동일시하는 태도는 근대적인 즉단(卽斷)으로서, 이슬람의 교의 해석자에게 있어서는 종교적 진리는 하나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어프로치는 극히 다양해도 무방하며, 설령 어프로치가 극단적인 형태를 취하더라도 거기에 절대적인 신뢰를 두는 일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형식논리에 의해서 제지될 줄을 모르는 교의화(敎義化)가 이슬람교에 있어서는 극단적인 형태를 취했던 것은 거기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 대해서 교의에 흡수되지 않는 신앙이나 실태 쪽이 일방적인 교의화에 반항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교의화된 것과 거기에 흡수되지 않았던 실태와의 사이에 긴장관계가 잠재·현재(顯在)하여 전자가 후자를 종속시켜 통합하는 형태로 이슬람교가 내적으로 발전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이슬람교의 실태 측면으로 다음 3가지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 일신교의 단계 이전의 종교관념·의례의 잔존이 강하게 나타나 있는 점이며, 교의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슬람교는 일신교로서 파악될 수 있는 합리적인 형식의 종교라고 하더라도 의례의 측면을 비롯한 실태를 본다면 종교민속학·종교인류학의 대상이 되는 비합리적인 기층(基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시 이슬람의 교의는 이 광의의 '애니미즘'적 기층을 종속시켰지만, 이것은 후자가 실질적으로도 배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앞문으로 쫓아버렸다고 해도 뒷문으로 다시 도입한 결과가 된 것이다. 오히려 교의에 종속화되고 뒷문으로 도입되었기 때문에 이 '애니미즘'적 심벌리즘이 더욱 완강히 지속되게 되었다.

(2) 수피즘과의 종합. 교의화된 이슬람은 법학자 곧 신학자인 울라마의 손으로 이슬람의 도시를 기반으로 하여 엘리트 학문으로서 형성되었는데 도시사회의 서민층 신앙과의 사이에는 커다란 거리가 있었다. 이 서민층 신앙의 갈망에 응한 것이 수피즘이었다. 이것은 정통적 교의와는 다른 종교사상, 종교적 태도의 형태로서 특히 11세기 이후에 발전하여, 종교집단으로서는 13세기 이후에 수피 교단이 전 이슬람 사회에 걸쳐서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종교사회학적으로는 정통적인 종교공동체는 직접으로 신도 개인을 조직하거나 말단의 사회집단을 직접 파악한 것이 아니라, 이 말단의 사회를 조직하는 원리가 된 것이 바로 수피 교단이었다.

13세기 이후의 이슬람 사회는 특히 도시의 직인조합(職人組合)을 기반으로 한 수피 교단을 기초 구조로 하고 상부에 보편적인 이슬람 공동체가 구축되는 형태를 취했다. 이슬람 교도 중의 서민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이해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소집단을 종교적으로 조직한 수피 교단에 참가하는 것이 첫째 관심사가 되어, 울라마가 대표하는 이슬람 종교공동체로의 참가는 2차적인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서 종교공동체가 후기의 이슬람에서는 추상적 원리로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외래 정복왕조의 지배에 대해서 이슬람 도시사회의 총의를 대표했고, 정복왕조는 그 의사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피의 종교 형태에서는 교의화된 이슬람교가 정면으로부터 쫓아낸 비합리적인 제요소가 성자숭배 형태로 수피즘의 신앙·의례에 풍부하게 재도입되게 되었다. 즉 수피즘은 이슬람 세계 내의 민간신앙의 기층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어 비아랍 세계에서는 이슬람 이전에 다양한 민족종교가 그 모습을 바꾸어 다시 나타났다. 끝으로, 기본적으로는 교의화된 이슬람에서는 이슬람법을 통해서 신도가 신과의 결합을 구하는 데 대해서 수피즘에 있어서는 자기가 속하는 교단의 신비화된 성자와의 결합을 통하여 신에게 접근했다. 이 경우 교의화된 이슬람과 수피즘의 관계는 일면에 있어서는 긴장을 낳고 대립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상호 보완하고 의존하는 관계에 있었다.

(3) 인간중심주의. 이슬람교는 다른 종교체계와 비교해서 고도(高度)의 신중심(神中心)주의 종교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신학·법학 자체는 신과 인간과의 종(縱)적 관계를 규정함과 동시에 인간과 인간과의 횡(橫)적 관계에 관한 규정도 포함하고 있다.

이슬람교의 신학·법학에서는 이 두 가지가 겹쳐서 나타나는데, 그 중 어느 한 편이 빠져서는 이슬람이 완전하게 성립될 수 없다는 균형감각(均衡感覺)이 작용하고 있다. 완전한 종교에는 전자만이 있으면 족한 것이 아니고 후자의 측면과의 균형이 예상되고 있다. 더욱이 본래 이슬람법의 입장은 인간 본래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며, 인간을 자유스러운 주체로서 인정하고 법은 그것을 전제로 하여 개괄적인 테두리를 제공하는 최소한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컨대 성욕이 적극적으로 긍정된 기반 위에 이슬람법의 혼인관이 성립된다. 이와 같이 이슬람교의 신학·법학체계 자체와, 신중심주의임과 동시에 두드러지게 인간중심주의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

다시 이 교의화된 이슬람교의 외부에 9세기 이후 헬레니즘의 영향하에 철학·윤리학·정치학이 발전하여 이슬람교와의 조화가 성립된다. 이들은 인간의 욕구충족·행복추구를 긍정하는 데에서 이론(理論)을 출발시켜 인간중심주의적인 사회기술론을 전개했다. 더구나 이것이 이슬람 사회에 인식론으로서 정착되었다. 이 사회이론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에 응하는 의식주 충족의 목적에서 출발하여 도시국가(메디나)와 그 연합체의 왕조나 제국 수준의 정치·사회결합을 인간의 필요 충족이나 그의 고도화로 설명하는 것으로서 '완전한 사회'라는 것은 가장 훌륭하게 인간과 사회의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거기에는 공리주의적 내지 프래그마틱한 논리가 전체의 행복 달성의 기술론으로 성립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이슬람교에 있어서 인간중심주의로 처리되는 세계의 상대적 독립성을 우리들은 승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세계의 저편에는 더 깊은 종교적인 신비스러운 세계가 상정(想定)되어 있었다.

이상 (1)(2)(3)이 이슬람교에 종합화되어 전체적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 비(非)이슬람적 원리를 종합·조화시킨 통합력으로서 우리들은 이슬람교의 힘을 평가할 수가 있는 것이다.〈徐 廷 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