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유 태 교/유태교〔서설〕

유태교의 성립

편집

猶太敎-成立유다야(유태)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12종족(十二種族) 중 하나인 유다로부터 비롯된 말이다. 뒤에 자세히 기술하거니와 이스라엘 민족의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전(全)역사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왕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다윗왕도 이 종족 출신이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신앙의 중심은 유다 왕 다윗의 후계자인 솔로몬왕이 최초로 세운 이스라엘의 신 야웨(Jahweh)를 모신 예루살렘 신전이다. 유다야족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종족이며 그리스도 시대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를 그리스어로 유태교('Ioudaismos)라고 하였다. 유태교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어 오고 있지만 여기서는 주로 그리스도 이전의 고대 유태교, 즉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라고 한다. 이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이름은 유태인의 언어인 헤브라이 말로 '민중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지방을 떠나서 신으로부터 약속받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황폐한 땅과 사막이 많은 중근동(中近東) 지방에서는 가장 기름진 땅인 팔레스티나에 이주하였다고 한다. 그후 이 종족은 셈족 힉소스의 이동과 더불어 이집트에 들어가 처음에는 좋은 대우를 받았으나, 힉소스 시대가 끝나자 압박을 받기 시작하여 마침내 노예로 전락되고 말았다가 모세의 영도하에 또 다시 팔레스티나에 옮겨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로 따져서 이스라엘 민족의 발자취를 역사적으로 더듬어 올라갈 수가 있는 것은 이 모세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13세기 전반에 모세는 헤브라이(Hebrew)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出埃及:Exodus)하여 그들의 조상이 살던 땅 팔레스티나에 들어갔다. 그는 시나이로부터 네게브를 거치는 어려운 여행을 하는 동안에 여러 종족을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함에 있어서 야웨신(뒤에 예호바 또는 여호와라고 불리게 되었다) 신앙을 통하여 이를 이룩하게 되었다. 이때 그에 의하여 이루어진 종교적 원칙이 이후 유태교의 기본 성격을 결정짓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민족일신교(民族一神敎)와 선민신앙(選民信仰), 그리고 이에 수반하는 계약과 율법의 사상이다.

이스라엘 왕국의 건설과 멸망

편집

Israel王國-建設-滅亡 <구약성서>에는 모세의 오경(五經) 다음에 팔레스티나의 선주민(先住民) 가나안을 정복한 영웅 여호수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여호수아기(記)>를 싣고 있으나, 그는 오히려 전설상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모세와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한 사울왕(Saul王) 사이에 역사적 확실성을 가지고 둘 수 있는 것은 사사(士師)이다. 사사(헤브라이어로 Shophetim)라 함은 열두 종족의 지도자로서 '심판자(審判者)'·'수호인(守護人)'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들은 가나안을 정복한 다음 각각 그들의 점거지(占據地)를 확보해 나갔다. 그들은 각 종족 자체의 정치적·군사적 체제를 유지해 가면서 공동으로 야웨 신전에서 일년에 한차례 전체제사(全體祭事)를 거행하는 종교연합을 만들어 민족일신관(民族一神觀)과 선민신앙(選民信仰)을 유지해 나가고 아울러 민족적 공동의식을 높여 나갔다. 그러나 당시 지중해의 북쪽 해안으로부터 동진하여 온 필리스티아인(Philistine:팔레스티나어로 정복한 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하나의 통일된 정치적 국가를 만들 필요가 생겼다. 12종족의 하나인 베냐민족 출신의 사울이 예언자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도자 사무엘(Samuel)의 손에 의하여 머리에 '기름이 부어진 것'은 기원전 11세기 말경이었다. 그는 12종족의 지지를 얻어 최초로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시대(歷史時代)로서의 사료(史料)를 갖추게 된 것은 사울왕의 후계자인 다윗(David) 시대부터이다(학자에 따라서는 다윗을 제1대 왕으로 치는 사람도 있다). 유다족 출신으로 사울왕 군대의 무장(武將)이었던 다윗은 뛰어난 힘 때문에 사울왕의 질투를 받아 군대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사울이 죽은 뒤 마침내 이스라엘 12종족의 왕이 되었다. 그는 '시온산(山)' 예루살렘에 도읍을 정하고 팔레스티나 전역에 걸쳐 판도를 넓혀감으로써 이스라엘 사상 가장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였다. 다윗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솔로몬(Solomon)이 왕위를 계승하여 내정(內政)과 외교에 걸쳐 '지혜로운 왕'으로서 후세에까지 이름을 떨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웅대한 예루살렘 신전을 완성했으며, 이후 예루살렘 신전은 야웨신을 모신 곳으로서 전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다. 다윗, 솔로몬 2대에 걸친 명군(名君)을 얻어 크게 융성하게 된 이스라엘도 솔로몬왕이 죽은 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싸움으로 인하여 기원전 922년경 남북왕조로 분열되고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특히 북이스라엘 왕국은 그 뒤에도 계속 왕위 찬탈(簒奪)이 잇달아 기원전 721년 북방의 대국인 아시리아에 의하여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당해 드디어 망하게 되었다. 남 유다 왕국은 남쪽에 인접한 대국 이집트가 침략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하여 아시리아의 남침(南侵)에도 견디어 낼 수가 있었다. 기원전 7세기 후반에 명군 요시아(BC 636∼BC 605)가 신명기법(申命記法)을 발포하여 국정을 정비하고 중앙집권제를 확립하였다(지방에 있는 신전들도 사교(邪敎)의 소굴이라고 하여 모두 파괴해 버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것만을 받들게 하였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뒤를 이어서 나타난 새로운 세력인 바빌로니아의 침략에 의하여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태의 주요인물은 거의 바빌로니아의 포로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유태교의 종교사에 있어서 이 바빌로니아에 의한 포로 사건은 커다란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예언자의 활동

편집

豫言者-活動 위에 말한 바빌론의 유수(幽囚:Exile)까지의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종교사상사(宗敎思想史)에 있어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구약성서>의 중심을 이루는 예언자들이다. 예언자의 첫째 역할은 계약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기원전 8세기에 들어와서 엘리야(Elijah), 엘리사는 야웨신 이외의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신과의 계약을 범하고 가나안의 신(神) 바알(Baal)을 섬기는 민중을 비판하고 바알신을 따르는 예언자들과의 투쟁을 통하여 야웨 신앙을 확고하게 하였다. 이러한 역할에 윤리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 기원전 760년경에 출현한 최초의 경전적 예언자(經典的豫言者)인 아모스(Amos:<구약성서>에 그의 예언이 실려 있다)였다. 이전의 '선지자'들의 단순한 예언과는 달리 이들은 신의 뜻을 받들어 신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예언자로서 시정자(施政者)와 민중의 비판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예언자의 비판 기준이 된 것은 '의(義)'의 관념이었다. 야웨신이 선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광을 내려준다는 사상에 윤리적 조건이 추가될 때에 신은 '의로운 신'으로서 백성들에게 '의로운 생활'을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의롭지 못한 백성에게는 멸망이 신으로부터 내리게 된다. 하느님에 대한 예배나 제물이 귀중한 게 아니고 '공정한 길을 물과 같이, 정의(正義)를 냇물과 같이 흐르도록 하는(아모스서 5:24) 일이 유태교의 기본적 요건으로 된 것이다. 예언자가 선민신앙을 체크하는, 멸망을 경고하는 비판자가 될 때 그들에 대한 일반민중으로부터의 비난과 관헌에 의한 박해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여기에 더욱 불을 지른 것은 소위 애국적 예언자인 나훔(Nahum), 하박국(Habakkuk) 등의 선동이었다. 아모스, 호세아(Hosea), 이사야(Isaiah), 미가(Micah) 등 예언자들은 우국(憂國)의 비극적 인물이 되고 예레미야(Jeremiah)에 이르러서는 예언으로 말미암아 옥사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우국 예언자(憂國豫言者)들의 말은 적중하여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북이스라엘도 남유다왕국도 다 같이 멸망을 하게 되고 이스라엘 민족은 유수(幽囚)의 반세기를 맞게 된다. 선민신앙이 궤멸된 유수의 백성 앞에 나타난 것은 전부터 나라가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던 에스겔(Ezekiel)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그는 이제 실의에 빠진 백성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고자 하는 예언자로서 나타난 것이다. 그의 뒤를 이은 제2의 이사야(이사야서 40∼55장)는 고난의 의의를 설파하고 신의 종으로서의 길을 가르쳤다. 포로 신세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성스러운 백성이라는 긍지를 잃지 않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종말사상의 형성

편집

終末思想-形成 유태교 역사는 특히 기원전 3세기 이후의 세레우코스가(家) 통치시대에 이르러 강압적인 헬레니즘화 정책으로 말미암아 심한 역경에 처하게 되었다. 새로 세운 신전을 중심으로 한 경건한 유태교도의 신앙생활은 보람도 없이 신전조차 그리스 사람들의 약탈 대상이 되고 말았다. 첫째는 이러한 환경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페르시아와 그리스로부터 온 사상의 영향으로 유폐생활 이후의 유태교에는 부활(復活)·천사·사탄 등의 사상이 도입되게 되었다. 또 <욥기(Job記)>·<전도서> 등에 보이는 회의사상(懷疑思想)과 페시미즘이 <시편>에 나오는 여러 탄식의 노래와 더불어 유태교도의 가슴을 두드리고 처세술을 가르친 <잠언> 등의 지혜문학(智慧文學)이 꽃피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종말사상(終末思想:Eschatology)이다. 구약의 사상에는 내세사상(來世思想)이라는 것이 없다. 그런데 불우한 처지에 놓이게 된 유태교도의 현실은 외래사상의 영향을 받아 내세사상을 낳게 하였다. 현세에 대한 신의 최후의 심판이 내리고 유태의 구세주 메시아가 나타나 하느님이 지배하는 세계가 오리라는 종말사상이다. 이러한 메시아관(觀)은 실제에 있어 메시아 운동으로 나타나서 반(反) 그리스 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다. 기원전 168년에 마카비가(家)의 반 그리스 전쟁이 일어나 기원전 141년에 독립을 이루고 하스몬 왕조가 성립되었으나 히르카누스(재위 BC 135∼BC 104)를 제외하고는 모두 약체를 면치 못하고 기원전 63년 로마에 정복당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메시아 운동은 종종 일어났으나 기원 70년에 있었던 반란은 로마에 의하여 진압되고 이때에 예루살렘의 신전이 파괴되었으며 유태인들은 세계 각지로 분산되었다. 1948년, 19세기 동안에 걸친 숙원을 달성하여 이스라엘국을 재건하였는데 지금 유태교의 모습은 완전히 근대화된 사회생활에도 불구하고 고대 유태교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오히려 민족이 곳곳으로 흩어진 동안 신전을 잃어버린 유태교 신앙의 중심은 율법을 중시하게 되었고 <구약성서>의 율법에 종교적인 교훈이 가미되어 방대한 탈무드(Talmud)로서 집대성되었다. 그러나 그후 7세기에는 이에 반대하여 성전(聖典)에 돌아가기를 주장하는 카라이트파와 또 14세기에는 신비주의적 경향을 띤 가바라파가 일어나 유태교 사상에 복잡성을 주게 되었다. 근대에 이르러서의 뚜렷한 운동은 첫째 18세기에 일어난 것으로 고대 율법주의의 대표자인 바리새파의 본래 이름인 하시딤('경건한 자')의 이름을 딴 일파로서 이들은 고대 유태교로의 복귀를 주창하고 소박한 경건주의(敬虔主義)를 주장하여 오늘날 유태교도의 대표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다. 또 다른 것은 근대 유럽에서 탄생한 개혁파로서 신전을 대신하여 흩어진 유태인들의 예배장소가 된 시나고그에서의 예배를 근대화하여 예배용어로서 일상어를 채택하고 여성의 예배 참가를 허용하자는 파이다. 오늘날 유태교는 정통파·개혁파·중간보수파 등으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