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세계의 종교/유 교/유교〔서설〕
"儒敎〔序說〕 유교란 공자(孔子:이름은 丘, BC 551∼BC 479)가 창도(唱道)한 교리를 말한다.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에 ""나를 닦고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修己以安百姓)은 요(堯)임금 순(舜)임금도 어렵게 여기신 것""이라는 공자의 말이 보인다. 한마디로 표현하여 유교 교리의 근본 이상(根本理想)은 수기 치인(修己治人)에 있다. 수기는 자신을 닦는 도덕적인 수양이다. 나를 닦는 것이니 그 학문은 나를 위한 것이다. 곧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다. 위기(爲己)·수기(修己)의 학문으로 도덕적 충실을 기한 뒤에는 남을 다스리고 만물을 이루게 하는 치인(治人)·성물(成物)의 학문으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유교는 도덕과 정치 양면을 중요한 골격으로 갖추게 된다. 유교의 정치 사상은 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법치주의에 반대하고, 도덕적 감화력에 의한 덕치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그리고 형벌로써 백성들의 풍속을 통제하는 것보다는 예(禮)로써 통제하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한다. 공자에 의해 창도된 유교의 수기 치인의 교리에서 그 교리 체계의 두 기둥을 이루고 있는 것은 덕(德)과 예(禮)이다. 유교의 사상체계에서 예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은 유교의 종교 여부(宗敎與否) 논쟁에 시사하는 바 크다. 유교는 물론, 기독교적 유형의 종교 개념으로 따져 볼 때 종교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유교의 합리주의는 ""불합리한 까닭에 나는 믿는다""라고 한 테르툴리아누스(Q.S.F.Tertullianus:160∼220)의 유명한 말과는 거리가 멀고 사후세계(死後世界) 문제보다 생(生)의 문제를 그 중심과제로 하고 있는 유교에서 내세관(來世觀) 논의가 거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유교의 예(禮), 특히 제례(祭禮)에 대한 중시는 유교의 종교적 성격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결국 넓은 의미 종교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보급은 유교의 종교화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주 왕조(周王朝)의 권위가 동요되고 각 제후국(諸侯國)에서도 하극상(下剋上)의 정치적 무질서와 분수를 참람하게 넘는 예(禮)의 자행에 의한 제례의식의 파괴가 눈에 띄기 시작한 춘추시대(春秋時代)에 공자는 삶을 누리었다. 공자는 이러한 무질서 속에서 질서의 회복을 목표로 내세우고, 은자(隱者)들의 야유를 무릅쓰면서 정성껏 구세(救世)하려 하였다. ""성인의 말은 사람에 따라 변화한다(聖人之語·因人而變化)""는 송(宋)의 정자(程子:宋代의 程顥 兄弟)의 말처럼, 논어에 보이는 공자의 말은 그 대부분이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제시된 실제적 교훈이다. 공자에 있어서의 윤리도덕의 이상인 인(仁)에 대한 교설도 마찬가지이다. 논어 안연(顔淵)편에서 안연의 질문에 답한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인(仁)이란 말의 거의 유일한 개념 규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나의 사사로운 욕망을 극복하여 예(禮)로 돌아와 그것을 이행한다는 구체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인(仁)은 인(人)이다. 즉 ""사람다움에 있다""고 해석한다면 인간의 도덕성(禮)의 존재를 믿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공자에 있어 예는 사회질서의 근본원칙이다. 수기치인(修己治人)도 구체적으로는 스스로의 도덕적 노력에 의하여 예를 이행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예를 이행케 하여 사회질서를 확립케 하는 것이다. 공자의 이러한 이상은 그 모범을 옛 성왕(聖王)에서 볼 수 있고 또 주 왕조 초기의 위대한 정치가 주공(周公)에게서 구할 수 있다. 주초(周初)의 문물제도와 지도원리의 완성자 주공을 ""심하도다 나의 쇠약함이여, 나 이제 꿈에 주공을 보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다""고 한 것은 유교의 연원적(淵源的) 고찰에 있어서 주공의 비중을 크게 하기에 족하다. 공자 이후로 내려와서는 제자 사이에서도 덕(德), 즉 주관을 중시하는 경향과 예(禮), 즉 객관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갈라졌는데, 이것이 전국시대로 내려와서 인간의 본성, 즉 성(性)의 문제와 결부되어 맹자(孟子:이름은 軻, BC 371∼BC 289)의 성선설(性善說)과 순자(荀子:이름은 況, BC 320∼BC 238)의 성악설(性惡說)로 나타났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선양하고 이단사설(異端邪說)을 배격하는 주장을 내걸고 전국시대의 사상계(思想界)에 등장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의 특색은 주(周) 왕조의 위엄과 실력이 너무나도 쇠미한 시대적 여건도 있고 해서 어느 제후라도 도덕적으로 월등한 유덕자(有德者)가 되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道)를 밟아나가면 통일천하의 왕자가 될 수 있다는 유덕작왕설(有德作王說)에 있다. 맹자는 또한 유교 경전의 하나인 서경(書經)의 전통을 계승하여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백성을 돌보지 않는 왕은 역성혁명(易性革命)에 의한 방벌(放伐)을 당해서 마땅한 것이라는 혁명시인(革命是認)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치자계급(治者階級)을 향한 경고에 의의가 있는 것이며 피(被)치자계급을 향한 혁명 선동 이론은 아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유교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지도원리로 군림하고 있는 동안에 맹자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특히 북송(北宋)의 이구는 주 왕실의 존재를 무시하고 누구든 덕이 있는 자는 왕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을 전개한 맹자를 못할 짓을 차마 해내는 인인(忍人)이라고까지 비판하였다. 다른 한편 맹자의 혁명시인 사상은 후세 중국 혁명사상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특히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의 저자 황종희(黃宗羲, 1610∼1695)에 준 영향은 매우 크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재위 BC 247∼BC 210)에 의한 통일천하 이후에 유교는 분서갱유(焚書坑儒)와 같은 끔찍한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이것은 질서의 원리로서의 예(禮)가 성악설의 순자(荀子)를 거쳐, 사회적 신분 규정과 법에 의한 제재의 이론으로 발전된 것을 옛 성왕의 덕치(德治) 이론을 들어 유자(儒子)들이 비판한 데 원인이 있는 것 같다. 분서갱유의 제안자인 진의 이사(李斯:?∼BC 208)는 순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송의 소동파(蘇東坡:이름은 軾, 1036∼1101)는 그의 <순경론(荀卿論)>에서 이런 점을 들어 순자를 비난하고 있다. 진대(秦代)의 억압으로 수난의 역사를 거친 유교가 활로를 발견한 것은 한(漢)의 무제(武帝:재위 BC 159∼BC 87) 때의 일이다. 한 무제는 동중서(董仲舒, BC 179∼BC 104)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로 정하였으니, 이때부터 2천년 동안 후세에까지 길이 긍정될 원리와 부정 극복되어야 할 부정점(否定點)을 다 함께 포괄한 유교가 동양 사상계에 군림하게 된 것이다. 한 무제 때는 진말 한초(秦末漢初)의 난(亂)도 가라앉아 평온을 되찾았고, 이러한 토대 위에 밖으로 그 세력이 팽창하려는 시기였다. 안정된 통일천하가 밖으로 그 세력의 확장을 요구하는 이 시대에, 전통사상에 근거하여 대일통(大一統)의 이상을 내건 당시 유교의 이상주의는 그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충분한 것이 되었다. 유교가 국교로 정해진 관계로 유교의 경전인 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예기(禮記)·춘추(春秋) 등 경서의 학습은 사대부계급에 있어 필수학문이 되었다. 관리가 되기 위하여는 유교적 교양을 반드시 갖추어야만 했다. 이 전통은 청말(淸末)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의한 가치관의 근원적인 변동이 요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대(漢代) 유학의 주류적인 관심사는 경서의 장구(章句) 해석에 관한 학문이었다. 그것도 후한(後漢)의 반고(班固:32∼92)가 그의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경문(經文) 5자(字)의 해석에 2∼3만자가 동원되는 정도로 일경 전문(一經專門)의 장구의 학이 성행하였다. 후한 말기로부터 진(晉)에 걸쳐서의 사회 불안은 사대부계급 사이에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유행케 하였으며, 유교에 대한 반발적인 풍조가 보였다. 역경(易經)이나 논어의 주석에 노장사상을 띠고 있는 주(注)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육조(六朝)로부터 수·당(隋·唐)에 걸쳐서는 주(注)와 소(疏)가 유행하여,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송대(宋代)에 이르러서는 그동안 오래 계속된 훈고학에 대한 반성이 가해졌다. 또한 사상계에서 유교의 지위가 불교와 도교의 세력에 밀리기 시작한 데 대한 반성이 가해졌다. 그리하여 유교의 경서는 그 속에 담겨진 교리를 생활에 실제로 살리는 점에서 중시되고, 그 교리는 불교적·도덕적 이론을 원용하면서 하나의 형이상학으로 체계화하였다. 이러한 송대의 유학을 일컬어 송학(宋學)·정주학(程朱學)·주자학(朱子學)이라 하고 또한 신유학(新儒學)이라고도 부른다. 신유학의 중심 인물인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이름은 熹, 1120∼1200)에 의하여, 예기(禮記) 속의 대학(大學)편과 중용(中庸)편이 특히 중시되었는데, 이 <대학>과 <중용>에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합하여 <사서(四書)>라 일컫게 되었다.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 속에, 고주(古注)에 비하여 형이상학적 해석이 많이 보이는 것도 송대 신유학의 한 특색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理)와 기(氣)로 우주 만물을 설명하는 이기철학(理氣哲學)이 유교철학의 중요한 부분이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그리고 주자의 객관주의와 육상산(陸象山:이름은 九淵, 1139∼1192)의 주관주의 논쟁도 그 근거는 경서(經書)에 있었다. 명(明)에서는 주자학을 관학(官學)으로 정하였는데, 이러한 주자학의 고정화를 타파하고 새로운 분야를 연 것이 왕양명(王陽明:이름은 守仁, 1472∼1528)의 양명학(陽明學)이다. 왕양명의 학설은 송의 육상산의 학설에서 받은 바 크다. 명대(明代)에는 또한 관학으로서의 주자학의 이 우위(理優位)의 이기설(理氣說)에 반대하는 나흠순(羅欽順, 1465∼1547)>·왕정상(王廷相, 1474∼1544) 등 일련의 기(氣)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기 철학은 물론 철저한 것이 되지는 못하였으나, 청대(淸代)의 대진(戴震, 1723∼1777)에 이르러 철학이 완성되는 길을 열었다. 청대(淸代)에 이르러서는, 고염무(顧炎武, 1613∼1682) 등의 이른바 명(明)의 유로(遺老)들에 의하여 실학(實學)이 제창되었다. 청학(淸學)의 성립에는 기의 철학이 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 청대의 유학은 공자의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서 명말(明末)의 관념적인 학문에 대한 반성으로 일어난 것이라 평가되기도 한다. 유교 경전 이외에 전국시대 제자(諸子)의 학문에 대한 연구도 새로이 활발해지는 한편, 유교의 경서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는 풍조가 굳어졌다. 마침 청조(淸朝)의 정책에 의한 뒷받침도 있고 해서 청대의 고증학(考證學)은 크게 발달하였다. 유교가 한 무제 이후 역대에 걸쳐 여러 형태로 그 경향이 변질되면서도 국교의 지위를 지킨 것은, 유교가 중국민족의 전통을 잘 지니고 있는 것이 하나의 이유이고 또 유교 성립의 변화가 완만한 데 또 한 가지 요인이 있었다고 보겠다. <安 炳 周>"